12월 1일 양력
【음력 정유년(丁酉年) 11월 초8일】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경효전(景孝殿)의 일곱 번째 우제(虞祭)에 쓸 제문(祭文)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원본】 40책 36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1면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경효전(景孝殿)의 일곱 번째 우제(虞祭)에 쓸 제문(祭文)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영목(金永穆)이 아뢰기를,
"삼가 역대의 전례(典禮)를 상고해 보니, 태묘(太廟)에 친향(親享)할 때의 서계(誓戒)는 3일 전에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태묘 친향 때의 서계가 만약 담제(禫祭) 이전일 경우에는 아헌관(亞獻官) 이하가 나아가 참가한 예가 있었으니, 이번에도 이대로 마련하되, 종헌관(終獻官) 이하만 행례(行禮)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3품(三品) 박용화(朴鏞和)를 주차 일본 공사관 2등참서관(駐箚日本公使館二等參書官)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12월 2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일곱 번째 우제(虞祭)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영규(閔泳奎)가 아뢰기를,
"광무 원년(光武元年) 9월 17일은 우리 임금이 황제로 즉위한 날이니 실로 나라의 경사로운 날입니다. 매년 이 날을 계천 기원절(繼天紀元節)로 칭할 것이며, 작년 8월 21일 각 전궁(殿宮)의 탄일(誕日) 주본(奏本)에 첨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3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경효전(景孝殿)의 여덟 번째 우제(虞祭)에 쓸 제문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영목(金永穆)이 아뢰기를,
"삼가 역대의 전례(典禮)를 상고해 보니, 부알례(祔謁禮) 때 신주(新主)를 받들고 태묘(太廟) 앞의 욕위(褥位)에 이르러 북쪽을 향하여 서면 황제가 신주 뒤에서 사배례(四拜禮)를 거행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전례에 따라서 마련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신주를 받드는 것은 궁위령(宮闈令)이 거행하고, 배례(拜禮)는 동궁(東宮)이 대신 거행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태묘에 친향(親享)할 때 먼저 망묘례(望廟禮)와 망전례(望殿禮)를 행합니다. 그러나 이번의 전례는 이전과 다른 것이 있으니, 매번 친향할 때마다 먼저 전알례(殿謁禮)를 행하는 것으로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종2품(從二品) 이용익(李容翊)에게 각 도(道)와 각 군(郡)의 금(金), 은(銀), 동(銅), 철(鐵), 석탄과 관련한 각 광산의 사무를 감독하라고 명하였다.
내부 대신(內部大臣) 남정철(南廷哲)이, ‘지난번 전 주서(前注書) 안형진(安衡鎭)의 상소(上疏)에 대한 비지(批旨)에, 내부(內部)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품주(稟奏)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지난 번 전 정언(前正言) 최정헌(崔鼎獻)이 해당 사건을 가지고 본부(本部)에 정소(呈訴)를 하였기 때문에 해부(該府)로 문의하였었습니다.
순안 군수(順安郡守) 심종순(沈鍾舜)이 과연 시종인(侍從人)을 지낸 일이 있었는데 제 마음대로 법을 집행하여 이미 견책 징계(譴責懲戒)를 시행하였습니다.
해원(該員)이 이미 관찰사(觀察使)의 서리(胥吏)를 겸하였다면 역시 재판소 판사(判事)도 겸하고 있는 것입니다. 청송(聽訟) 조율(照律)하여 참작하고 헤아려 벌을 집행해야 합니다. 설사 지나친 조치가 있었다 하더라도 신원(伸寃)할 방도가 없다고 무슨 근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뜸 상소를 올려 성상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더없이 무엄한 것입니다. 이미 삼가 비지(批旨)를 받았으므로 사체에 따라 다시 조사해 보았으나 해부에서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하니 한결같이 이전에 조사한 대로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조사(朝士)로서 이렇게까지 하였으니 제 스스로 취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체에 어긋난 것은 있다. 해당 군수에 대해서는 다시 참작하여 반 달 분의 벌봉(罰俸)에 처하고, 작은 문제를 가지고 대뜸 신소(伸訴)를 하였으니 역시 무엄한 행동이다. 본 부에서 특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12월 4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여덟 번째 우제(虞祭)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이어 조전(朝奠)과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12월 5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경효전(景孝殿)의 아홉 번째 우제(虞祭)에 쓸 제문(祭文)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달 10일에 돈례문(敦禮門)에 나아가 진위대(鎭衛隊)와 지방대(地方隊)를 불러올려 위로하여 주겠다. 시위(侍衛)와 배위(陪衛)는 입직군(入直軍)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장생전 도제조(長生殿都提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장생전(長生殿)에 쌓아둔 판자가 이미 떨어졌고 연한도 지났습니다. 가을이 되면 황장목(黃腸木)이 있는 세 도(道)에 위원(委員)을 파견하여 베어오는 것에 대하여 전에 이미 주하(奏下)받았습니다. 현재 겨울철이 깊어 가므로 즉시 베어오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 전례대로 각 해도(該道)에 관리를 차임(差任)하여 베어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우주(虞主)를 매안(埋安)하고 연주(練主)를 봉안할 때의 각차비(各差備)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 이주영(李胄榮)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종2품(從二品) 민형식(閔亨植)을 시강원 첨사에 임용하였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12월 6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아홉 번째 우제(虞祭)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이어 조전(朝奠)과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비서원 경(祕書院卿) 서상조(徐相祖)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이완용(李完用)을 비서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12월 7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각 제전(祭奠)을 지냈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이호익(李鎬翼)을 경모궁 제조(景慕宮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12월 8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졸곡제(卒哭祭)를 행했는데, 황태자(皇太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뒤이어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을 올렸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을미년(1895)의 사변을 아직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으니, 세월이 흘러 2주년이 되었어도 마음이 슬퍼 위로할 수도 없다. 충숙공(忠肅公) 이경직(李耕稙)의 사당에 비서승(祕書丞)을 보내서 치제(致祭)하도록 할 것이며, 충의공(忠毅公) 홍계훈(洪啓薰)의 사당에 예관(禮官)을 보내서 치제하게 하라. 제문은 직접 지어서 내려보내겠다."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 대신(議政大臣), 참정(參政), 찬정(贊政), 참찬(參贊),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칙임관(勅任官), 시임 각신(時任閣臣)과 원임 각신(原任閣臣),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황태자시강원(皇太子侍講院), 황태자익위사(皇太子翊衛司) 관리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졸곡제(卒哭祭) 후에 위로하였기 때문이다.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이승순(李承純)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봉상사 제조 이헌경(李軒卿)을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12월 9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고동가제(告動駕祭)를 행하였다. 이어 태묘(太廟)에 나아가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부알례(祔謁禮)를 행하였으며, 친제(親祭)를 같이 행하고 돌아왔다.
경효전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함께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김명규(金明圭)에게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를 겸임(兼任)하도록 하였다.
12월 10일 양력
불러올린 진위대(鎭衛隊) 중대장(中隊長)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경이 지난번에 늙고 병든 몸으로 먼 길을 급히 달려온 이것은 변함없는 경의 충성심에서 나온 것으로서 나라를 위한 진실한 마음이었다. 경이 짐(朕)을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대하는 데 대해서 짐이 어찌 종전처럼 깊이 체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은 연로하였으니, 지난번에 왔을 때 경 역시 자신으로야 어찌 그런 강한 힘이 나와서 꼭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겠는가?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오직 마음과 정성에 달린 것이니, 마음과 정성이 극진하여 늙고 병든 것도 이겨내었다.
경이 지금 여러 달 수고하던 나머지 건강에 많은 손상을 당했는데, 경이 말하지 않아도 이곳에서는 몸조리가 불편하리라는 것을 짐도 본래 생각하던 터이다. 또 추위가 닥쳐오고 있으므로 하루가 급하니, 의정과 제조(提調)의 벼슬을 사임하는 것을 경의 뜻에 따라 특별히 윤허한다. 경은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중히 여기고 몸조리를 잘 하여 장차 따뜻한 봄이 돌아오면 다시 나와서 일을 수행하여 밤낮으로 기대하는 짐의 뜻에 보답하기 바란다."
하였다.
외부 대신(外部大臣) 조병식(趙秉式)에게 의정(議政)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정1품 심순택(沈舜澤)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 조병세(趙秉世)를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 1등에 서임하는 동시에 봉상사 도제조(奉常司都提調)를 겸임시켰다.
부알례(祔揠禮)와 친제(親祭) 때의 종헌관(終獻官) 이하와 혼전(魂殿)의 향관(享官)과 산릉(山陵)의 수릉관(守陵官), 각 차비관(差備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비서원 경(祕書院卿) 이완용(李完用), 비서 승(祕書丞) 윤태흥(尹泰興), 겸장례(兼掌禮) 비서승(祕書丞) 정은조(鄭誾朝), 예모관 첨사(禮貌官僉使) 민형식(閔亨植), 신련 배종 부첨사(神輦陪從副詹事) 김석규(金錫圭), 상례(相禮) 조중목(趙重穆),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김명규(金明圭), 전사관(典祀官) 조진만(趙鎭萬), 대축(大祝) 신대균(申大均)·최창부(崔昌溥)·이석종(李奭鍾), 좌장례(左掌禮) 이승구(李承九), 우장례(右掌禮) 김규형(金奎馨), 별군직(別軍職) 정기택(鄭騏澤), 호위대 부위(扈衛隊副尉) 민준식(閔峻植), 향관(餉官) 이정한(李靖漢)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12월 11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전 판사(前判事) 민영익(閔泳翊)이 외국에 머문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또 지금 명령을 받고 사신(使臣)으로 나가니 돌아올 기한이 아득하다. 더구나 그의 나이가 마흔에 가까운데 자식이 없으니 두 대의 국구(國舅)에 대한 제사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장례원(掌禮院)에서 서울에 있는 해당 가문의 문장(門長)에게 통지하여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의 직계와 방계 중에서 후사(後嗣)를 세워 예사(禮斜)를 만들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탁지부 회계국장(度支部會計局長) 이해만(李海萬)을 탁지부 사계국장(度支部司計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재무관(財務官) 신정식(申廷植)을 탁지부 회계국장에, 법부 참서관(法部參書官) 피상범(皮相範)을 법부 검사국장(法部檢事局長)에, 농상공부 참서관(農商工部參書官) 강인규(姜寅圭)를 농상공부 통신 국장(農商工部通信局長)에 임용하였으며 모두 칙임관(勅任官) 5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헌직(李憲稙)이 상소하여, 족제(族弟) 효직(孝稙)의 아들 우규(禹珪)가 자기 동생 경직(耕稙)의 대를 잇게 해달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대가 끊어지는 것을 잇게 하고 없어진 것을 존속시키는 것은 나라의 법전에 실려 있다. 더구나 경의 동생의 문제에 대해서 짐이 어떻게 저버리겠는가? 지난날을 생각하니 지금도 슬프다. 장례원(掌禮院)에서 예사(禮斜)를 만들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4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영목(金永穆)이 아뢰기를,
"삼가 역대의 전례(典禮)를 상고해 보니, 〈장불이시조(葬不以時條)〉에 ‘부제(祔祭)를 지낸 다음 달에 연제(練祭)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대로 마련하되, 경효전(景孝殿)과 산릉(山陵)에 연제를 지낼 날짜를 음력 정유년(1897) 12월 12일로 추택(推擇)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김낙영(金洛榮)을 15년 간 제주목(濟州牧)에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다.
해당 범인은 지난해 10월 국사범(國事犯) 한선회(韓善會) 등의 사건을 조사할 때 그 공모자로서 도망쳤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체포되었다. 법부(法部)에서 왕명을 위조한 일에 추종한 것에 대한 법조문을 적용시켜 상주(上奏)하니 재하(裁下)한 것이다.
12월 15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올린 차자에,
"원구단(圜丘壇)에 지내는 큰 제사를 친히 거행하겠다고 한 명령을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마지못해 따랐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방금 대신의 차자에 비답을 내렸다. 원구단(圜丘壇)에 지내는 큰 제사는 섭행(攝行)하는 것으로 안(案)을 마련하되, 여러 집사(執事)는 친제(親祭)의 전례대로 가려 차임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시위(侍衛)와, 친위(親衛) 각 부대의 군사를 영솔하는 직임에 대하여 그 수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휴직되어 본래의 녹봉을 나누어 주기 전이라 하더라도 우선 다 각 부(部)의 관리들에게 녹봉을 주게 하라."
하였다.
정1품(正一品) 김영수(金永壽)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정2품(正二品) 이근명(李根命)을 궁내부 특진관에, 김문현(金文鉉)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근용(李根)을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12월 16일 양력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민종묵(閔種默)을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판적 국장(版籍局長) 윤진석(尹瑨錫)을 내부 토목국장(內部土木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3등에 서임하였으며 내부 참서관(內部參書官) 현은(玄檃)을 내부 판적국장에 임용하고 주임관 5등에 서임하였다.
12월 18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예의 제도에 구애되어 정성을 다 펴지 못한 지 참으로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황천(皇天)과 조종(祖宗)이 독실하게 도와주어 우리나라가 오랜 나라이지만 그 운수는 새롭다. 비로소 큰 의식을 거행하였으나 역시 제때에 진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정리로 보나 예의로 보나 부족함이 있다. 이번 동지(冬至)에는 진전(眞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직접 진행하겠다. 제문은 직접 지어서 내려보낼 것이니 모든 관리들은 참석하라."
하였다.
러시아〔俄國〕의 명명일(命名日)에 직접 축전을 보내기를,
"폐하의 경사로운 명절에 즈음하여 짐은 이 축하로써 두터운 정성을 표시합니다. 아울러 폐하(陛下)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서 영원한 번영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니, 러시아 황제가 답전을 보내기를,
"짐의 깊은 감사와 지극한 축원을 귀 폐하(陛下)에게 보냅니다. 러시아와 한국 사이의 친선은 갈수록 두터워질 것입니다."
하였다.
포달(布達) 제34호, 〈궁내부 관제 중 귀족원 경 아래 ‘종정원 경겸’ 5자를 삭거하는 안건〔宮內府官制中貴族院卿下宗正院卿兼五字刪去件〕〉을 반포하였다.
비서원 승(祕書院丞) 김홍륙(金鴻陸)을 귀족원 경(貴族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법부 형사국장(法部刑事局長) 이충구(李忠求)를 법부 민사국장(法部民事局長)에, 정3품(正三品) 김기룡(金基龍)을 법부 형사국장에 임용하였으며 모두 주임관(奏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외부 참서관(外部參書官) 정대유(丁大有)를 외부 통상국장(外部通商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 5등에 서임하였다.
12월 19일 양력
포달(布達) 제35호, 〈궁내부 관리들의 봉급표 중 개정 안건〔宮內府官等俸給表中改正件〕〉을 반포하였다.
12월 20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경효전(景孝殿)의 동지(冬至) 제사에 쓸 제문(祭文)과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였다.
전 주사(前主事) 김석구(金錫九)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을미년(1895) 8월 사변은 이 세상 만고에 가장 큰 흉악한 변고입니다. 구름이 슬퍼하고 비가 눈물을 흘리니 해와 달이 빛나지 않고, 하늘이 어둡고 땅이 터지니 귀신과 사람이 서로 분격합니다. 높고 낮은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군들 역적의 피를 마시고 간을 꺼내서 이 원통함을 죽기 전에 갚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역적이 예나 지금이나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극악한 큰 원수치고 어찌 그때 저 흉악한 무리와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당시에 드러났던 역적의 사실에 대해서 극력 진술하고자 하니 살펴주소서.
자신이 두목이 되어 은근히 흉악한 음모를 꾸미는 것이 조조(曹操)와 동탁(董卓)보다 심한 자는 김홍집(金弘集)이며,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침범하여 제멋대로 흉기를 사용한 자는 우범선(禹範善)과 이두황(李斗璜)입니다. 어로(御路)를 막고 적의 선봉을 맞아들인 자는 정병하(鄭秉夏)이고, 총리(總理)가 결재한 거짓 제칙(制勅)과 황후(皇后)를 폐위시킨다는 거짓 조서와 새 황후를 간택하는 주본(奏本)을 만든 자는 유길준(兪吉濬)과 조희연(趙羲淵)이며, 권형진(權瀅鎭)·이범래(李範來)·전준기(全晙基)·장박(張博) 등도 그 공모자입니다. 각 공관(公館)에 통지하여 글에 날인할 것을 청하고 황후가 폐위된 이유를 선포한 자는 김윤식(金允植)입니다. 황후의 폐위를 종묘(宗廟)에 고하는 글을 지은 자는 이승오(李承五)인데 그 글에 이르기를, ‘소자(小子)는 똑똑치 못하여 종묘(宗廟)와 사직에 근심을 끼쳤습니다. 명첩(命牒)을 거두어 왕비(王妃)를 교체합니다.〔小子不令 憂深宗祊 纔收命牒 用替坤裳〕’라고 하였습니다. 이 16자의 글을 지은 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신하의 명분이 없어졌고 나라의 기강이 퇴폐해졌습니다. 생각하면 뼈가 떨리고 말하려면 목이 메입니다.
한 번 그렇게 한 이후 여러 역적 무리들이 혹 처형을 당했으나 형명(刑名)이 바로 정하여지지 못하였고, 혹은 도망을 가서 죄안(罪案)이 만들어지지 못했는가 하면, 혹은 교외에 숨어살고 있는데도 형률(刑律)을 적용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만국의 수치이며 조정에서 형벌을 대단히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지난번 4명의 역적에게 율(律)을 시행하라는 명을 보고 온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면서 차례로 처리하는 조치가 거행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몇 달이 지나도록 잠잠해서 그에 대한 것을 들을 수 없으며, 세월은 빨리 흘러 어느덧 대행 황후(大行皇后)의 인봉(因封)이 지났습니다. 신하와 백성들의 아픈 마음은 갈수록 더해가고 역적을 처단해서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은 이 때를 당하여 더욱 절절하니, 아무리 참으려 한들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 역적들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는 형명을 바로잡고, 도망간 자는 붙잡아오는 것이 응당 차례를 따라 실시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김윤식과 이승오에 대해서 말한다면, 저 역적 무리들과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세상에 살아있으니, 이들을 빨리 처단하지 않는다면 어떤 화의 기미가 또 어느 구석에 잠재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충성스런 의분이 격동되어 짧은 글로 우러러 폭로하니, 바라건대 폐하(陛下)는 명철하게 잘 굽어 살펴서 결단을 내리시어 빨리 의금부(義禁府)에서 김윤식과 이승오를 모두 잡아다가 추국청(推鞫廳)을 설치하고 극형에 처하게 하여 역적들로 하여금 두려운 것을 알게 하고 신하와 백성들의 울분을 만 분의 일이라도 씻어주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응당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종정원 경(宗正院卿) 이재완(李載完), 찬정(贊政) 심상훈(沈相薰), 광주 부윤(廣州府尹) 조한국(趙漢國)을 향관(享官)에 추가하여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을미년(1895) 역변에 대하여 아직도 귀신과 사람들이 분을 삭이지 못한다. 저들은 대대로 나라의 녹봉을 받아온 가문의 후손들로서 이미 숨기기 어려운 죄를 지었으니 엄격히 징계해야 할 것이다. 여론이 더욱 들끓고 있으니, 지금까지 관대히 용서한 것은 형벌을 대단히 잘못 적용한 것이다. 김윤식(金允植)과 이승오(李承五)를 우선 제주목(濟州牧)에 유배하여 종신토록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영규(閔泳奎) 등이 아뢰기를,
"지금 내리신 조칙(詔飭)을 보니, 죄인 김윤식(金允植)과 이승오(李承五)를 정배(定配)하여 종신토록 유배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신들은 이 명을 접하고 서로 놀라하면서 이어 근심과 탄식을 하였습니다. 을미년(1895)의 사변은 천하 만고(天下萬古)에 없었던 것이며, 여러 역적들의 극악한 죄도 천하 만고에 없던 것입니다.
8월 21일, 위조한 칙서(勅書)를 반포한 것에 서명하였고, 차마 할 수 없는 말로써 각 공관(公館)에 통지하여 더없이 지엄한 자리를 무함하고 핍박하였습니다. 또 교묘하게 꾸며서 우리나라 군사가 실지로 대궐을 침범하고 외국 군사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로 외국 사람들에게 아첨한 자는 김윤식이며, 역적의 괴수에게 아부하고 종묘(宗廟)에 고하는 글을 지어 극도로 패악스러운 내용으로 조종(祖宗)의 신령을 속인 자는 이승오입니다.
이 두 역적의 죄는 여러 역적들보다도 심한데 지금까지 용서하여 세상에 살려두었기에 이것만으로도 귀신과 사람들의 분함이 절절합니다. 비록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폐하(陛下)의 덕으로서도 나라 법을 내키는 대로 적용해서는 안 되므로, 신들은 피눈물을 흘리는 의리로서 이렇게 감히 우러러 호소합니다.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는 명을 철회하시고, 김윤식과 이승오를 담당 관청에 넘겨 엄하게 신문한 다음 속히 나라의 형전(刑典)을 바로 잡으신다면 천만 번 다행한 일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두 죄인에게 이 율(律)을 감처(勘處)한 것이 그 죄에 합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나, 처분하는 데는 역시 참작이 있어야 한다. 형정(刑政)에 대하여 꼭 크게 벌일 필요가 없으니 경 등은 마땅히 이해할 줄로 안다."
하였다.
의관(議官) 성대영(成大永)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사임할 것을 청하는 글에서 어찌 다른 것을 덧붙여 말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지금은 바로 전하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첫 해이므로 하늘의 도움이 바야흐로 새롭고 사람들의 마음도 더욱 간절하니 억만 년 반석의 터전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삼가 옛 사람이 이미 진술한 말을 글의 끝에 덧붙이겠습니다.
옛날 송(宋) 나라의 기거(起居)로 있었던 호인(胡寅)이 상소를 올려 실효(實效)에 힘쓰고 허례허식(虛禮虛飾)을 없애는 것에 대해 한 말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효제(孝悌)·구현(求賢)·납간(納諫)·임장(任將)·치군(治軍)·애민(愛民) 여섯 가지에 대하여 각각 허식(虛飾)과 실효의 진상을 서술하면서 그 마지막에, ‘이 여섯 가지 허식을 행하면서 황옥(黃屋) 수레를 타고 장막 궁전을 세우고 하늘이 밝아올 때에 연(輦)이 방에서 나갑니다. 꿩꼬리와 금화로가 양쪽의 섬돌에 모셔 있고 의장 말과 호위하는 군사가 엄하게 의식을 나누어서 차리고 있습니다. 찬자(贊者)가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차례로 문안드리고 물러가면 재상과 대신(大臣)들이 몸을 낮추어 앞으로 나가 홀을 꽂고 나서서 아룁니다. 사신(司晨)이 진정(辰正)을 외치면 수레는 들어오고 의장은 물러가니, 이것은 천자의 허식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절실하고 기발하여 임금의 약석(藥石)이 될 만합니다.
지금 이 말로 인하여 실효를 구하며 더욱 큰 뜻을 가다듬고 더욱 원대한 계책을 넓혀 나간다면 삼황 오제(三皇五帝)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니, 실로 이것은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들의 더없이 큰 경사가 될 것입니다. 만약 혹 허례(虛禮)를 숭상하고 실효에 결함이 있다면 도리어 신의 간절한 속마음과는 다른 것이니, 잘 살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청한 바에 따라 시행하겠다. 끝에 진술한 경의 말은 좋은 것이다."
하였다.
전 현감(前縣監) 이병규(李秉奎) 등이 상소를 올려 추천하기를, ‘허정(許楨)은 대대로 글을 읽는 기풍을 물려받아 자신을 신칙하고 실지를 위해 힘써 왔으며, 구차하게 부합되는 것을 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문장도 깊이 알고 군사도 겸비하였습니다.’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추천하는 것은 그대들의 책무가 아니다."
하였다.
출신(出身) 정한용(鄭漢鎔)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군부(君父)의 원수는 의리상 반드시 갚아야 하며 시역(弑逆)한 역적은 사람들이 모두 주벌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체모(體貌)는 훼손해서는 안 되고, 선왕의 법은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갑오년(1894)에 역신(逆臣)이 왕명을 훔쳐 천하 만고(天下萬古)에 있어본 적이 없는 변고를 빚어냈으니, ‘반드시 갚아야 하고, 반드시 주벌해야 하며, 훼손해서도 안 되고 무너뜨려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몇 개월 사이에 모두 모였습니다. 이에 감히 한 몸의 생사와 성패를 돌보지 않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규합하여 의로운 기치를 들고서 골수에 사무친 원수를 복수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어찌 바른 것을 해하고 역적에게 빌붙는 무리들이 수시로 〖재앙을〗 매개하면서 도리어 악명을 들씌우며, 임금을 호위하는 군사가 패하기도 전에 비적(匪賊)을 토벌하는 군사가 재빨리 남쪽으로 갈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미 임금을 호위하는 군사로 칭하였으므로 의리로 감히 항거하지 않고 마침내 기치를 거두고 군사를 해산시켜 황량한 골짜기로 도망쳐서 천하가 안정되기를 기다렸는데, 또 재앙이 가정에까지 미쳐 형벌이 엇갈려 가해졌습니다. 그 때 두 진(陳)의 군비의 대체적인 것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부담시킨 데서 나온 것이고, 공적으로 유용한 것은 신의 본생형(本生兄)에게 곱절 징수하여서 가산이 탕진에 이르러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고 서로 돌보지 못하였습니다. 몸과 명예가 륙패(僇敗)당하였고 모든 일이 망쳐졌으니, 위로는 훌륭한 조정에 수치를 끼쳤고 아래로는 부형(父兄)에게 근심을 끼쳤습니다. 신의 상황이 이러하니, 살아 무엇 하겠습니까? 해당 율(律)을 속히 시행하시어 신하로서 충성하지 못하고 용감하지 못한 것을 징계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자수한 것이 가상하니, 과오를 고쳐라."
하였다.
전 사사(前司事) 홍병후(洪昺厚)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나라의 원수에 대해서는 먼저 보복을 도모해야 하고 나라의 역적에 대해서는 급히 처단해야 합니다. 도망간 잔당을 며칠 내에 잡아다가 국법을 펴야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형세를 바로잡는 데 있어서 더 힘써야 할 것은 사역원(司譯院)을 다시 설치하여 특별히 통역관을 두어 써야 할 때 응하도록 하고, 학부(學部)에 신칙하여 우수한 인재를 널리 불러다가 경서(經書)를 강습시키고 재주를 연마시켜 각부(各部)에 조용(調用)하고 각군(各郡)에 수령으로 보내어 관리를 등용하는 법을 중시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중앙과 지방의 모든 경비에 대하여 탁지부(度支部)에서 절약해서 쓰도록 하고, 군비를 넉넉히 갖추고 군사 정원수를 늘려 진위대(鎭衛隊)를 두어서 융통성 있게 대비하는 것이 둘째입니다.
하찮은 의견을 널리 하문(下問)하는 의리를 특별히 베풀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것이 공적인 분격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래 두 조목은 현 시기의 조치에는 마땅하지 않다."
하였다.
12월 21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따라 나아가서 예를 행하였다. 이어 진전(眞殿)에 나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영규(閔泳奎) 등이 재차 아뢰기를,
"유음(兪音)을 속히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전에 비답을 내렸으니 번거롭게 굴지 마라."
하였다. 이어 세 번째로 아뢰니, 비답하기를,
"공론이 더욱 커지는 것은 알겠으나, 경중에 맞게 처벌함으로써 형벌이 없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니 경들은 이해하라."
하였다.
중추원 2등의관(中樞院二等議官) 지석영(池錫永)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대체로 정삭(正朔)이란 것은 나라에서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3대(三代) 때에는 어진 임금들이 서로 계승하면서 비로소 사람의 기강을 다스렸고, 반드시 자(子)·축(丑)·인(寅)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정월로 삼아 엇바꿔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하(夏) 나라 때 정월을 썼다.〔行夏之時〕’고 하였는데, 하 나라 때는 바로 인을 정월로 삼았습니다. 성인께서 그 사시(四時)가 바르고 월령이 잘 맞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그렇게 칭송하신 것이므로 한(漢) 나라 건국 초기부터 수천 년간 내려오면서 인을 정월로 삼은 것입니다. 진(晉) 나라가 꼭 한 나라의 정월을 답습하려 한 것은 아니었고, 당(唐) 나라 역시 꼭 진 나라의 정월을 답습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으나, 〖인(寅)을 정월로 삼은 것은〗 하늘을 공경히 받들고 사람들에게 농사 때를 적합하게 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을 써서 정월달로 삼는 것을 반드시 고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우리나라의 종묘(宗廟), 사직(社稷), 전각(殿閣)에 지내는 제사와 경사스러운 명절, 기원절(紀元節)에 대해 음력을 쓰는 것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을 정월로 삼기 때문이며, 행정의 조서(詔書), 칙서(勅書) 및 각 항목의 중앙과 지방에 보내는 공문에서 양력(陽曆)을 쓰는 것은 양력 1월 1일을 한 해의 정월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정월이 두 개인 것이니, 어찌 한 나라 안에 두 가지 정월을 쓸 수 있겠습니까? 지금 폐하(陛下)가 요(堯) 순(舜)과 같은 성인으로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이것을 먼저 결정하여 정월달을 제시해야 하겠는데 아직도 잠잠하니, 신은 몹시 의혹을 가지게 됩니다.
생각해 보건대, 양력을 사용한 것은 수년 동안 외국과의 교제 및 국내의 예산 사용에서 이미 관습된 것이 있어 변통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손해되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예산을 가지고 말한다면, 평년을 12달로 나눈 것이고 윤달이 있는 경우 13달로 하면 예산에 털끝만치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외교문건을 가지고 말하자면, 큰 글자로 음력 정월 하루 날을 쓰고 옆에 양력 몇 월 몇 일이라고 써놓으면 외교에도 손실이 없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양력 월일을 섞어 쓰고 정월을 정하지 않음으로써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키고 민심을 현혹시키는 것입니까? 신은 실로 부끄럽습니다.
아! 현재의 형편은 옛날 문을 닫았을 때와는 전연 다릅니다. 정세는 부득이 문을 열고 남을 접해야 합니다. 교섭할 때 저들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며, 저들은 부유하고 우리는 빈한하며, 저들은 교묘하고 우리는 졸렬하여 호시탐탐 노리는 자가 적지 않으니, 우리가 저들과 대등한 후에라야 우리 강토와 백성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비록 실행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실행하고 힘을 다해 본받으면서 저들이 강하고 부유하고 공교하게 된 이유를 따져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양력을 쓰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기틀과 관계되지 않고 한갓 남을 본뜨는 일과 관계되며, 더구나 전반적으로 본뜨는 것이 아니라 절반을 본뜨고 있으니 도리어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남을 본뜨는 것을 전반적으로 하지 않고 절반을 하는 것은 원래 우리가 사용하던 것을 전적으로 쓰게 하여 우리의 것을 온전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과단성 있게 결단하시어 양력 사용을 없애고 전적으로 음력을 사용하게 해서 정월을 완전히 하고 나라의 체모를 높이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은 갑자기 의논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유학(幼學) 이문화(李文和)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강상(綱常)을 부지하고 역적을 쳐서 원수를 갚는 것은 신하의 대의(大義)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관리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아뢰어 계책을 도모해야 하는데, 이를 하지 않고 도리어 상소한 자가 그르다고 비방합니다.
전 진주 관찰사(晉州觀察使) 이항의(李恒儀)가 상소를 올린 선비를 비적(匪賊) 무리라고 하면서 내부(內部)에 보고하니, 내부 대신(內部大臣) 남정철(南廷哲)은 순검(巡檢)을 내보내서 상소를 올린 선비를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선비들이 죽는 한이 있어도 물러가려 하지 않으니 온갖 방법으로 모해하였습니다. 상소를 올려 복수하겠다고 한 선비들을 비적의 무리라고 하였는데, 그 심보를 따져보면 절대로 의리를 해치고 역적을 비호하는 술수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습니다.
도망간 역적으로서 일본에 있는 자들은 빨리 조회해서 돌아오게 하는 동시에, 본 국에 있는 여러 역적들에 있어서는 속히 나라의 형전(刑典)을 적용시키며, 전후에 걸쳐 역적을 비호한 사람들도 일일이 잡아다가 신문하고 경중을 따져 죄를 논하여 《춘추(春秋)》의 큰 의리를 밝혀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또 연명으로 진술한 것은 참으로 의분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여러 사람들의 일을 규탄해서 나열한 것에서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 많다. 그리고 조령(朝令)을 봉행(奉行)하는 대신을 억지로 탄핵하는 것은 더욱 무엄하다."
하였다.
의정부 의정 서리(議政府議政署理) 외부 대신(外部大臣) 조병식(趙秉式) 등이 올린 연명 상소(聯名上疏)의 대략에,
"역적들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김윤식(金允植)과 이승오(李承五)처럼 음흉하고 패악스러운 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토가 한창 진행되는데도 단지 정배(定配)하는 법만 시행하였으니, 실로 죄는 중한데도 처벌은 가벼운 잘못이 있습니다. 빨리 내린 명을 거두시고 판결을 더욱 엄하게 해서 나라의 형전(刑典)을 바로잡아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두 죄인이 범한 죄에 대해서 어찌 판결을 기다리겠는가? 이번에 처분을 내린 것은 참작한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너희들은 이해하라."
하였다.
내부 참서관(內部參書官) 최훈주(崔勳柱)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금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각자의 화폐를 사용하여 다투어가며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술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우리나라만이 우리의 화폐를 사용하지 못하여 나라의 비용이 거덜 나고 있으니 지폐를 만들어서 대한(大韓)의 통보(通寶)로 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또 백동화(白銅貨)를 주조하여 유통시킨다면 온 나라의 비용이 날로 넉넉해질 것이며 자주권도 더욱 공고해질 것이니, 이것이 첫째 계책입니다.
최근에 경기(京畿) 안의 이름난 전장(田莊)이 마구 외국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 그들이 이를 헐값으로 마구 사들이니 만약 몇 년이 지나가면 남을 땅이 없어질 것 같습니다. 마땅히 외국의 규례에 따라 그것을 엄하게 금지하고 그 세금을 무겁게 받는다면 개화(開化)의 법도 자연히 밝아질 것이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묘술도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계책입니다.
서학(西學)을 공부하는 자들이 공부를 실속 있게 하지 않고 도리어 이름만 내고 있으니, 우선 공부하게 할 것은 공부하게 하고 금지할 것은 금지시킨다면 현혹시키는 설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셋째 계책입니다.
도적의 우환은 모두 교화에 항거하고 패악스런 행동을 하는 자들의 소행입니다. 지금 재판하는 규정은 늘 벌은 주지 않고 감화시키려고 하니, 세상에 자복하고 죽음을 달게 여기는 무리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법은 법으로써 집행하고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린다면, 문란한 도적들이 반드시 흩어질 것이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안정될 것입니다. 이것이 넷째 계책입니다.
한강(漢江)의 견고함과 절영도(絶影島)의 험준함은 바로 우리나라의 보배인데, 일본인들이 이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불시의 사변을 만날 경우에 이 어귀만 한 번 방어하면 소식을 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선 부대를 나누어 몇 곳을 전적으로 지키게 한다면 만 년의 기반이 될 것이니, 이것이 다섯째 계책입니다.
원은(圓銀)과 백동화(白銅貨)는 바로 가볍고 중요한 돈인데, 한 번 경기(京畿) 지방을 통과하면 은(銀)은 가격이 솟아 정가가 없고 동(銅)은 쓸 데가 없으므로 공납이 지체되는 것도 실로 여기에 기인되는 것입니다. 각 부(府)에 엄하게 신칙하여 은돈 1원(元)과 엽전(葉錢) 5냥(兩)의 규정으로써 준수하고 바꾸지 못하게 한다면 운수 비용은 제거될 것이고, 재물이 불어나는 것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여섯째 계책입니다.
북변(北邊)에 비적(匪賊)을 소탕하기 위해 특별히 군사를 설치하라는 명령을 받아서 백성들이 소생될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각 군(郡)과 행영(行營)과의 거리가 먼 데는 수백 리가 더 되고, 가까운 데도 70리나 되니 위급한 때를 당하면 어느 겨를에 위험에서 구원하겠습니까?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두되 행영에서 연습시키고 각 군에서 방어하게 한다면 변경의 근심이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일곱째 계책입니다.
각 군의 사창(社倉)을 혁파하였었는데 다시 곡식을 저축한다면 흉년의 구제에 도움이 되고 위급한 때 군사들의 군량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여덟째 계책입니다.
어진 사람을 추천하고 재능있는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바로 선대 임금이 남긴 정사인데 하나로 뭉쳐야 할 이 때에 쓸 만한 사람을 선발하고 그 재주에 따라서 10부(部)에 나누어 임용한다면 신하는 병풍과 줄기처럼 굳건할 것이고 나라는 반석처럼 편안할 것이니, 이것이 아홉째 계책입니다.
지금 위생국(衛生局)의 황폐한 상태는 실로 애석한 일입니다. 마땅히 병원을 설치하여 혹 위급한 생명을 구원한다면 명의(名醫)의 처방은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열째 계책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문제에 대하여 유념하겠다."
하였다.
전 사과(前司果) 여형섭(呂衡燮)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함경북도(咸鏡北道) 10개 군의 땅 길이가 천리라고 하더라도, 너비는 수백 리에 불과하고, 토지는 4만 결(結)이 차지 못하며, 호구도 4만 호가 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지방대(地方隊)를 설치하여 병정(兵丁) 500명(名)을 두는 것은 실로 변경 방어에 크게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마다 그 월급을 계산하면 합하여 5만 원이 되는데 10개 군의 영락한 역량으로서는 나누어 처리하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영(營)과 군(郡)의 역참(驛站)과 진(鎭)과 보(堡)의 둔전(屯田)에 본 고을의 백성에게 농사지어 먹고 세를 바치게 한다면, 군사들의 급료와 백성들의 실정이 편리한 데 따라 서로 미더워질 것입니다. 10개 군 안의 연해의 어염(魚鹽), 장시(場市)에 대한 세금 및 공전(公錢)과 미곡을 조목에 따라 실지대로 조사하면 연간 10여만 원의 이익을 볼 것입니다. 역시 지출을 헤아릴 수 있고 군수(軍需)를 편리하게 하여 만전의 은택을 보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백성들의 실정에 관계되는 것이니, 관찰사(觀察使)와 수령(守令)이 강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12월 22일 양력
의정부 의정 서리(議政府議政署理) 외부 대신(外部大臣) 조병식(趙秉式) 등이 재차 연명 상소(聯名上疏)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미 어제 비답을 내렸으니 번거롭게 굴지 마라."
하였다.
홍문관 부학사(弘文館副學士) 윤정구(尹定求) 등이 연명 상소(聯名上疏)를 올리니, 【글의 내용은 의정부(議政府)에서 올린 연명 상소의 대략과 같았다.】 비답하기를,
"두 죄인의 일에 대하여 사람들의 공론이 분해하는 것은 한결같겠지만, 이번의 처분은 역시 참작할 것이 있어서 한 것이니 그대들은 잘 이해하라."
하였다.
진전(眞殿)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할 때의 찬례(贊禮) 이하의 사람들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겸장례(兼掌禮) 비서승(祕書丞) 민영돈(閔泳敦), 제1실의 대축(大祝) 이민하(李民夏), 제5실의 대축(大祝) 서상훈(徐相勛)에게 가자(加資)하였다.
12월 23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경효전(景孝殿) 삭제에 쓸 제문(祭文)과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였다.
의정부 의정 서리(議政府議政署理) 외부 대신(外部大臣) 조병식(趙秉式) 등이 세 번째로 연명 상소(聯名上疏)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와 같이 연명으로 진술하니 진실로 공분(公憤)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만, 유독 돌보는 의리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가? 경 등은 잘 이해하고 더는 번거롭게 굴지 마라."
하였다.
홍문관 부학사(弘文館副學士) 윤정구(尹定求) 등이 재차 연명 상소(聯名上疏)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미 비답을 내렸으니 번거롭게 굴지 말라."
하였다.
포달(布達) 제36호, 〈궁내부 관제 중 개정 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반포하였다. 【왕태후궁 대부(王太后宮大夫)를 명헌 태후궁 대부(明憲太后宮大夫)로, 왕후궁 대부(王后宮大夫)를 황후궁 대부(皇后宮大夫)로, 왕태자비궁 대부(王太子妃宮大夫)를 황태자비궁 대부(皇太子妃宮大夫)로 모두 개정한다.】
【원본】 40책 36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5면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법제(法制) / 인사-관리(管理) / 왕실-비빈(妃嬪)
칙령(勅令) 제41호, 〈각 개항장 관제와 비용 첨재 건〔各開港場官制及費用潻載件〕〉, 【각 개항장 감리 관제(監理官制) 중에서 인천(仁川), 동래(東萊), 덕원(德源)에 주사 각 3원과 무안(務安), 삼화(三和)에 각 2원이던 것을 다 각 4원의 정원을 둔다.】 제42호, 〈관상소기사 2인 증치 건(觀象所技師二人增置件)〉과 제43호, 〈임시 우편 규칙(臨時郵遞規則)〉을 모두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12월 24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어 조상식(朝上食)을 올렸으며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올린 차자의 대략에,
"나라가 을미년(1895) 변란을 겪은 다음부터 삼강(三綱)이 문란해지고 구법(九法)이 해이되었습니다. 역적의 두목에게 아직 추율(追律)하지 못하고 있고 잔당들도 지금까지 살아있으니, 고금 천하(古今天下)에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온 조정의 신하와 온 나라 안의 백성들이 누군들 거적을 깔고 무기를 베고 자면서 복수할 의리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신식(新式)에 장애가 되어 감히 말하지 못하고 분함을 3년 동안 하루와 같이 참아왔습니다.
지난번 폐하(陛下)가 과단성 있게 처리하시어 김윤식(金允植)과 이승오(李承五)를 유배(流配)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이 바로 역적을 다스리는 데서 처음으로 형정(刑政)을 크게 실시한 것입니다.
아! 두 죄인은 바로 개국 500여 년간 들어본 적도 없고, 있어본 적도 없는 극악한 큰 역적이기 때문에 두 부(府)에서 연명 상소(聯名上疏)를 올린 것이니, 지금 다시 올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죄에 대해서 이 율(律)로써 감처(勘處)하는 것이 타당합니까? 이에 대해서는 비단 사람마다 처형할 것을 주장할 뿐 아니라 두 역적 자신에게 말하라고 해도 오직 참형(斬刑)을 달게 받겠다고 할 것입니다. 더구나 태양처럼 밝으신 성상께서 이렇게 처결하는 것이 윤리를 바르게 하고 역적을 없애는 것이 되겠습니까?
만약 그 사이에서 이랬다 저랬다 저울질한다면 《춘추(春秋)》의 의리가 장차 성인의 빈말로 될 것입니다. 신이 여러 날 벽을 안고 돌면서 근심과 분통을 이기지 못하여 이렇게 역적을 치는 의리로써 외람됨을 무릅쓰고 전하를 번거롭게 하는 것이니, 전하는 널리 생각하고 깊이 생각해서 빨리 여러 신하들의 요청을 윤허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두 죄인의 사건은 의분이 격동되어 글이 날마다 올라오고 경의 말도 이와 같이 엄정하다. 그러나 형정(刑政)은 형벌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참작해서 처분한 것이다. 노성한 지위에 있는 경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12월 25일 양력
법부대신(法部大臣) 임시서리(署理) 외부대신(外部大臣) 조병식(趙秉式)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 김윤식(金允植)과 이승오(李承五)가 지은 죄는 지극히 엄중하여 위로는 관리들로부터 아래로는 종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치하게 말하기를, ‘용서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폐하(陛下)가 특별히 크나큰 은전(恩典)을 베풀고는 종시 내린 명령을 철회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는 지극히 인자한 덕이 있어서 혹 용서하여 생명을 보전하게 한다 하더라도 아래에서 명령을 받드는 도리로 볼 때 침묵을 지키면서 나라의 법을 굽힐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지금 공론이 분격하는 것은 천성이 일치한 것이며, 공정한 저울은 법 맡은 사람도 신중해야 합니다. 만일 위엄있는 명령에 두려워하면서 옛 습관에 젖어 거행한다면 공론에 어떻게 되며 후세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이 이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조종조(祖宗朝)에 전해 내려온 법이 이로 인해서 해이되고 선대 임금들이 세워 놓은 기강이 이로 인해서 떨쳐지지 못할 것이고 역적의 싹이 끊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두 죄인에게 유배 보내라고 한 명을 속히 취소하시고, 법부(法部)로 하여금 죄를 논하게 해서 사형(死刑)에 처함으로써 나라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고 사람의 기강을 부지하게 하소서. 이렇게 한다면 천만 번 다행한 일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처분이 내린 이상 이처럼 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즉시 집행하라."
하였다.
12월 26일 양력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 조제균(趙濟均) 등이 올린 상소에,
"김윤식(金允植)과 이승오(李承五)에게 형률(刑律)을 높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두 죄인의 일에 대하여 여론이 한결같으니 마땅히 성토해야 하겠으나 이번의 처분이 어찌 참작하지 않고 한 것이겠는가? 그대들은 잘 알고 물러가라."
하였다.
12월 27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영목(金永穆)이 아뢰기를,
"삼가 역대의 전례를 상고해 보니, 황후(皇后) 초상과 관련한 소상일(小祥日)에 황제와 황태자(皇太子)가 치제(致祭)하는데, 백관(百官)이 진향(進香)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직접 진향(進香)하고 황태자가 진향하는 것은 규례대로 마련할 것이며, 궁내부(宮內府)와 의정부(議政府) 관리들이 진향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천하의 명산(名山), 대천(大川), 성황(城隍), 사토(司土)의 위패를 이미 신실(神室)에 봉안(奉安)하였습니다. 제사는 매년 중춘(仲春)과 중추(仲秋) 상순에 마련하여 남단(南壇) 옛 터전에 설행(設行)하겠지만 단(壇)의 이름을 고치는 것에 대해서는 본 원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라. 산천단(山川壇)으로 부르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남단과 성단(星壇)에 제사지내는 것은 지금 이미 그만두었습니다. 신실에 봉안한 두 단의 위패를 봉상사(奉常司) 관리를 시켜 본 단의 옛 터에 내다가 묻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28일 양력
태의원(太醫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조병세(趙秉世)가 문안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문안하는 글에 ‘황(皇)’자와 ‘폐하(陛下)’, ‘전하(殿下)’라고 한 것이 명(明) 나라 제도에는 없었다. 지금부터 ‘전(殿)’, ‘궁(宮)’으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문안(問安)’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서는 명나라 제도에 ‘청안(請安)’이라고 불렀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청(淸) 나라에서는 ‘성안(聖安)’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호칭이 과연 같지 않다. 경이 연전에 청나라에 들어갔을 때 문안하는 등의 절차는 어느 전에서 하였고, 명절은 어느 명절을 가장 큰 것으로 여기던가?"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문안한 곳은 자광전(紫光殿)이었고, 명절은 동지(冬至)와 정월 초하루를 제일로 삼고 있었습니다. 전과 궁은 역시 지극히 높이는 칭호입니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이것을 홀시하여 이전과 다른 것이 있으니 이것은 알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 것 같다. 연설(筵說)에 기록하여 두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태의원의 중요함이 과연 어떠한 것입니까? 그런데 대궐 안에 거처할 곳이 없어 문안을 거행할 때 장소가 좁아서 불편하니 이미 일의 체모에 손상이 있으며, 더없이 중요한 속미음(粟米飮) 등의 절차는 경복궁(景福宮)의 내국(內局)에서 달여서 올리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허다한 거행이 구차하고 옹색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대궐 안의 어느 관청을 막론하고 즉시 옮기게 해서 구차하고 옹색함을 모면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의원의 일은 참으로 딱하다. 궁내부(宮內府)와 서로 상의해서 변통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의관(醫官)은 태의(太醫) 몇 사람, 전의(典醫) 몇 사람으로 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응당 변통해야 하겠다. 비록 개화(開化)의 신식 의원을 설치하는 절차에 구애되는 것이 있기는 해도 이전의 전례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두 죄인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어제 근심어린 차자를 올렸는데, 윤허한다는 비답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참으로 몹시 답답합니다. 이 죄인들의 범죄가 용서할 만한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까? 그들 자신의 말로써도 생명을 보전할 방도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범죄가 엄중하므로 실로 아까울 것이 없지만 참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나라의 법은 지극히 엄하고 조정의 의논은 막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을 살리는 방도로 잔악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과연 당연하나, 형법(刑法)이 해이해졌기 때문에 근년에 온갖 사변이 다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법사(法司)를 두고 말하더라도 한성부(漢城府)와 경기(京畿)의 여러 고등 재판소에서 비록 각각 관장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관계되는 바가 매우 광범하여 특별히 송사(訟事)를 판결하는 데 도움되는 것이 없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나라에 법이 없으면 어떻게 나라라고 하겠습니까? 근래에 법사에 대해 말하자면, 그 이름이 많으나 사심이 없이 공정하게 집행하는 것은 적어 백성들이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곡식 값이 너무 높아서 백성들이 몹시 근심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황후(皇后)의 연제(練祭) 때의 제주관(題主官)에 정2품(正二品) 김석진(金奭鎭)을 임명하였다.
12월 31일 양력
법부 민사국장(法部民事局長) 이충구(李忠求)를 경무사(警務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36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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