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40권, 고종37년 1900년 10월

싸라리리 2025. 1. 30.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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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양력

【음력 경자년(庚子年) 윤(閏) 8월 8일】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주영(李胄榮), 소경(少卿) 윤태흥(尹泰興)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정2품 이승순(李承純)을 장례원 경에, 종2품 조중목(趙重穆)을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에 서임(敍任)하되 이주영과 이승순은 3등에, 윤태흥과 조중목은 4등에 서임하였다.


【원본】 44책 40권 90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81면
【분류】인사-관리(管理)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주영(李胄榮), 소경(少卿) 윤태흥(尹泰興)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정2품 이승순(李承純)을 장례원 경에, 종2품 조중목(趙重穆)을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에 서임(敍任)하되 이주영과 이승순은 3등에, 윤태흥과 조중목은 4등에 서임하였다.

 

육군 참위(陸軍參尉) 김규복(金奎福) 등 18명을 일본국에 유학 보내라고 명하였다.

 

10월 3일 양력

육군 2등 감독(監督) 이건영(李健榮)을 군부 경리국장(軍部經理局長)에 보임하였다.

 

일본인의 어업 구역을 종래의 전라(全羅), 경상(慶尙), 강원(江原), 함경(咸鏡) 사도 외에 다시 경기(京畿) 1도(道)를 추가하도록 허락해주었다.

 

10월 4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길주(吉州), 성진(城津)의 민요(民擾) 문제에 대하여 함경북도 관찰사(咸鏡北道觀察使) 이규원(李奎遠)의 보고가 왔습니다. 사건이 거창하여 두 사람이나 죽었다고 하니 너무도 통분하고 놀라워서 차라리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소요를 일으킨 사단은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므로 한 명의 수령(守令)이 조사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정3품 김인식(金寅植)을 안핵사(按覈使)로 차하하여 그로 하여금 하루빨리 길을 떠나 전후곡절을 아주 엄히 조사하여 등문(登聞)하게 하고 법에 의거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6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오정근(吳正根)을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0월 7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일전에 교외로 나간 후로 병이 나아가는 것을 기뻐했는데 혹시 오가는 사이에 심해진 것이 아닌가? 나랏일 중에 경이 처리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오늘 보내온 글을 보니 실로 강요하지 못할 점이 있다. 경은 다시 병 조리를 하여 빨리 상도(常度)를 회복하여 정승의 직책을 다하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의정(議政)이 병조리를 하는 동안에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가 의정의 사무를 서리(署理)할 것을 명한다."
하였다.

 

10월 8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경기전(慶基殿)에 어진 표제(御眞標題)를 봉안(奉安)한 후 예당(禮堂)은 이어 봉심(奉審)하고 조경묘(肇慶廟)와 조경단(肇慶壇)에 달려가 모두 봉심하고 오라. 화녕전(華寧殿)에 어진 표제를 봉안한 후 예당은 이어 봉심하고 융릉(隆陵)과 건릉(健陵)에 달려가 모두 봉심하고 오라"
하였다.

 

토지측량아문 총재(土地測量衙門總裁) 박정양(朴定陽)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0월 9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박정양(朴定陽)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홍릉(洪陵)을 천봉(遷奉)하는 새 자리가 정해졌고 여러 길일(吉日)을 모두 이미 받아놓았으며 역사(役事)도 역시 시작하였으니 누가 감히 이견(異見)을 내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털끝만치라도 좋지 않은 점이 있다면 한 사람의 말도 폐하가 독단으로 처리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위로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받들고 아래로는 만대의 자손과 억조의 신민들의 기대가 대해서 그 일을 지극히 신중히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은 배운 것이 없어서 모든 일에 거칠며 음양에 관한 방술(方術)에 대해서는 애초에 섭렵하지 못하였고 풍수학(風水學)에 있어서는 더욱 몽매합니다. 그러나 방술에 유식한 사람이 금곡(金谷)에 대하여 논하면서 근심하고 탄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연운(年運)과 오행(五行)이 상생하고 상극하는 이치와 무덤 방향을 설정하는 법은 한 글자나 반 줄 정도면 좋고 나쁜 것이 판별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설이 심원하여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으나 대체로 천지만물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수(數)를 벗어나지 않으며 그 수에 정통한 사람은 세상에 드물게 있습니다. 혹 고루한 선비는 이것을 황당하다고 하는데 이런 사람은 《주역(周易)》 한 책이 만 가지 이치의 근본이 되고 세 성인이 후세를 위하여 깊이 우려하였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장사지내는 법에 자년(子年)에는 자년에 출생한 사람을 꺼리는데 올해의 간지에 ‘자(子)’자가 들어있으니 꺼리는 법을 어겨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또 경년(庚年)에 을방(乙方)을 잡으면 천운이 망하므로 역시 이롭지 못합니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아예 쓸 수 없는데 더구나 태세(太歲)는 이미 피할 수 없고 산의 형체도 을방 외에는 다시 변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은 두 가지 꺼리는 점이 있는 것이어서 결코 쓸 수 없습니다.
대체로 하늘이 좋은 땅을 열어 놓아 안전하기 끝없는 자리를 잡으려면 어찌 땅이 없다고 근심하겠습니까? 순리에 따라 거스르지 않아야 하고 들어맞아 충돌함이 없어야 합니다. 산운(山運)과 천명(天命)이 서로 들어맞는다면 어찌 적당한 해가 없다고 근심하겠습니까? 이는 매우 신중히 해야 할 문제이므로 경솔히 하여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지금 만약 지역 안에 자세히 찾아본다면 격식에 맞고 안전한 좋은 자리가 없지 않을 것이며 금곡보다 나은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고 길이 복을 누리어 자손들이 끝없이 창성하고 번영하여 천지와 더불어 무궁할 것이니 종묘사직에서 만년토록 제사를 받게 될 계책으로서 이보다 급한 것이 없습니다.
평소 두려워하고 삼가는 마음을 간직해 온 신이 어찌 국가의 대사에 뛰어들어 허튼 소리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문공(朱文公)의 부릉(阜陵) 고사를 본받아 감히 나라를 위한 정성으로 만 번의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는 굽어 살피시어 신의 이 글을 조신(朝臣)들에게 내려 보내어 널리 물어서 처리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새 능 자리가 금기를 범하고 있다는 경의 말은 잘 살펴보고 조심하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나라를 위한 그대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기노라 . 일이 매우 중대한 문제와 관계되므로 마땅히 묻고 의논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상소를 올린 중신(重臣)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박정양(朴定陽), 천릉도감 제조(遷陵都監提調) 민영준(閔泳駿)·민종묵(閔種默)·이근명(李根命),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조정희(趙定熙)이다.】 상이 이르기를,
"중신이 올린 글을 경들은 보았는가? 경들을 소견하여 의논하려고 하노라."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이 문 밖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새 능 자리가 금기를 범한다고 중신이 말하였는데 더없이 중대한 문제이므로 매우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우리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은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으며 남에게 미친 혜택이 넓었으니 생명을 가진 사람치고 누군들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만년토록 전해야 할 능에 대하여 완전무결한 가장 좋은 자리를 얻어 신령을 편안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두 가지 거리끼는 점이 함께 발견되어 온 나라가 다 같이 근심하고 몹시 놀라며 두려워하므로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잘 살펴보고 아주 조심해야 할 일이므로 경들은 내일 도감(都監)에 모여서 여러 상지관(相地官)들을 초치(招致)하여 곡절을 상세히 물어서 다시 품정(稟定)하라."
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권재형(權在衡)이 아뢰기를,
"올해 8월 18일에 특별히 용서하여 주는 은전(恩典)을 베풀라는 명을 받들고 평리원(平理院)과 각도(各道) 재판소(裁判所)에서 심리한 징역 죄수 중에서 6범 내외로서 방송(放送)할만 한 자 전치만(全致萬) 등 28명, 감등(減等)할만 한 자 10명에 대하여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10월 10일 양력

전환국 관리(典圜局管理) 심상훈(沈相薰),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신기선(申箕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승순(李承純)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에 서임(敍任)하되, 심상훈과 신기선은 1등에, 이승순은 3등에 서임하였다. 태의원 경(太醫院卿) 윤정구(尹定求)를 장례원 경에, 특진관 민영규(閔泳奎)를 태의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정2품 김가진(金嘉鎭)을 중추원 의장에 임용하고 칙임관 1등에 서임하였다.

 

칙령(勅令) 제37호·제38호, 〈경부 대신 이하 예모·예장, 상모·상장 개정에 관한 안건〔警部大臣以下禮帽禮裝常帽常裝改正件〕〉과 제39호, 〈각 개항 시장 경무서 설치에 관한 안건〔各開港市場警務署設置件〕〉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10월 11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새 능 자리가 금기를 범한다는 것을 잘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총호사(總護使) 이하는 다시 국내(局內) 여러 곳을 간심(看審)하고 오라."
하였다.

 

군부 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에, 검사국 총장(檢査局總長) 민병석(閔丙奭)을 군부 대신에, 법부 대신(法部大臣) 권재형(權在衡)을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육군 참장(陸軍參將) 주석면(朱錫冕)을 원수부 검사국 총장(元帥府檢査局總長)에 임용하였다. 학부 대신(學部大臣) 김규홍(金奎弘)에게 법부 대신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종2품 민영철(閔泳喆)은 특별히 징계를 면제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 천릉도감 제조(遷陵都監提調) 민영준(閔泳駿)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새 능 자리가 금기를 범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다시 간심(看審)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신들은 명을 듣고 매우 송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연운(年運)이 맞지 않아 그런 것에 불과하다. 국내(局內)의 향배(向背)에 따른 음양 관계와 용맥(龍脈)의 기복(起伏)을 다시 자세히 간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신들이 내일 나아가서 간심하겠습니다."
하였다.

 

10월 13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심상훈(沈相薰)을 토지측량아문 총재관(土地測量衙門總裁官)에 임명하였다.

 

10월 14일 양력

경운궁(慶運宮)의 선원전(璿源殿)에 화재가 났다.

 

궁내부 대신서리(宮內府大臣署理) 민종묵(閔鍾默)이 아뢰기를,
"오늘 축시(丑時) 쯤에 선원전(璿源殿)의 정전(正殿)에 불이 났는데 7개 실(室)의 어진(御眞)을 봉출(奉出)하지 못하였으니 기가 막히기 그지없습니다. 더없이 중대하고 공경스러운 곳에 이처럼 전에 없던 변이 생겼으니 당일의 입직 내관(內官)과 수복(守僕) 이하를 모두 법부(法部)에 이송하여 불이 난 원인을 엄히 조사하여 진상을 밝혀내고 조율(照律)하여 징계하소서.
근처의 파수(把守)로 말하자면 역시 순찰을 잘못한 책임이 없지 않으니 다 같이 조사해서 정죄(定罪)하며 평상시에 신칙하지 못한 차지 중관(次知中官)도 중한 처벌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역시 법부로 하여금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존엄하고 정중한 곳에 이러한 기막힌 변이 생겼으니 이 얼마나 통분할 일인가? 불이 어찌 난데없이 일어났겠는가? 그 원인을 즉시 엄히 조사하여 밝히지 않을 수 없으나 신식(新式)에 구애되어 친국(親鞫)을 할 수가 없다. 신문해야 할 사람들은, 아뢴 대로 법부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진상을 밝혀낸 다음 조율하여 중하게 처벌하라."
하였다.

 

의정(議政) 이하를 대유재(大猷齋)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의정 윤용선(尹容善),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재완(李載完), 찬정(贊政) 민응식(閔應植)·이용직(李容稙)·윤웅렬(尹雄烈), 참찬(參贊) 성기운(成岐運), 궁내부 대신 서리(宮內府大臣署理) 민종묵(閔種默), 특진관(特進官) 민영준(閔泳駿)·박정양(朴定陽)·신기선(申箕善), 양지아문 총재(量地衙門總裁) 민영소(閔泳韶),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서정순(徐正淳),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 학부 대신(學部大臣) 김규홍(金奎弘), 외부 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권재형(權在衡), 경부 대신(警部大臣) 이종건(李鍾健),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이지용(李址鎔), 태의원 경(太醫院卿) 민영규(閔泳奎), 회계원 경(會計院卿) 민치헌(閔致憲), 장례원 경(掌禮院卿) 윤정구(尹定求), 시종원 경(侍從院卿) 이근명(李根命), 명헌태후궁 대부(明憲太后宮大夫) 홍순형(洪淳馨), 원임 직각(原任直閣) 이용태(李容泰), 직학사(直學士) 김영적(金永迪),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 조동완(趙東完), 부첨사(副詹事) 민영적(閔泳迪), 시독관(侍讀官) 김춘수(金春洙)·홍성우(洪性友), 시종관(侍從官) 이용구(李龍九)·정인헌(鄭寅獻)·조중관(趙重觀)이다.】 선원전(璿源殿)에 화재가 난 다음의 문안이었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궁중에서 불을 조심하는 문제가 얼마나 엄밀합니까? 더구나 더없이 조심하고 중시해야 할 곳에 이러한 화변이 생긴 것은 그 원인을 끝까지 따져서 진상을 밝혀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문해야 할 모든 사람을 법부(法部)로 하여금 붙잡아 조사하여 엄하게 징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더없이 존엄하고 더없이 공경스러운 곳에 이처럼 전에 없던 화변이 생겼으니 기막힌 짐의 심정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대소 신민들이 부여잡고 부르짖는 통분도 본성을 지닌 사람이면 모두 같을 것이다. 불이 어떻게 난데없이 일어났겠는가? 그 원인에 대한 문제를 내가 직접 따져서 진상을 알아내야 하겠으나 요즘 신식(新式)에 구애되는 점이 있어서 크게 벌리지 않으려 한다. 신문해야 할 모든 사람은, 아뢴 대로 모두 법부로 하여금 그 원인을 궁핵(窮覈)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열성조(列聖朝)의 사적이 오늘에 와서 전부 불 속에 들어갔다. 덕이 없는 짐이 조상을 받들고 효성하는 일에 힘쓰지 못한 데로부터 이러한 큰 변이 생기게까지 되었으니 더욱더 끝없이 애통한 일이다. 지금 경비가 비록 부족하긴 하지만 어진(御眞)을 모사하고 전각을 중건하는 역사를 조금도 늦출 수 없다. 모사 도감(摹寫都監)과 증건 도감(增建都監)을 합설(合設)하여 집행하도록 조칙을 내려 보내야겠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어진을 모사하고 전각을 중건하는 일은 한시가 급합니다. 효성이 순결하고 지극한 폐하로부터 이러한 명령이 내렸으니 신은 존경의 마음을 금할 수 없으며 일이 중대한 문제와 관계되므로 아랫사람의 심정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더없이 경건하고 더없이 중대한 곳에 이처럼 전에 없는 화변(火變)이 생겼으니 기막힌 짐의 마음이야 어찌 끝이 있겠는가? 영정(影幀)을 모사하여 봉안하고 진전(眞殿)을 중건하는 일은 하루라도 헛되이 보낼 수 없으니 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과 진전중건도감(眞殿重建都監)을 합쳐서 설치하여 시행하고 도감(都監)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은 궁내부(宮內府)로 하여금 차출해서 며칠 내로 역사를 시작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생각건대 짐이 열성조를 추모하고 가까이에 의지하여 산 사람을 모시는 것처럼 모시는 도리를 다하는 방도는 진전(眞殿)을 받드는 것뿐인데 이번에 이러한 큰 화변이 생겼으니 기가 막힌 것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생각보다도 더욱 통절하다.
진전의 영정을 모사하는 일은, 제1실은 무술년에 모사하여 준원전(璿源殿)에 모신 익선관(翼善冠)을 쓴 어진을 대본으로 하며, 제2실은 무진년에 모사하여 영희전(永禧殿)에 모신 익선관을 쓴 어진을 대본으로 하며, 제3실은 갑자년에 그려 냉천정(冷泉亭)에 모신 익선관을 쓴 어진을 대본으로 하며, 제4실은 신해년에 그려 평락정(平樂亭)에 모신 원유관(遠遊冠)을 쓴 어진을 대본으로 하며, 제5실은 경인년에 그려 영희전에 모신 원유관을 쓴 어진을 대본으로 하며, 제6실은 병술년에 그려 평락정에 모신 면복(冕服) 차림 한 어진을 대본으로 할 것이며, 제7실은 병오년(1846)에 그려 평락정에 모신 익선관을 쓴 어진을 대본으로 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어진을 모사하고 진전을 중건하는 일은 더없이 경건하고 더없이 중대한 일이므로 나라의 경비가 부족하다 하여 차일피일 지체할 수 없으니 내탕전(內帑錢) 5만 원(元)을 특별히 내려 보내어 두 도감의 비용에 보충하라. 역사(役事)를 감독하는 여러 신하들은 절대로 쉬지 말고 역사를 다그쳐서 빨리 준공하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윤정구(尹定求)가 아뢰기를,
"삼가 등록(謄錄)을 상고하여 보니, 영전(影殿)에 불이 나서 영정을 봉출하지 못하였을 때 상은 소복(素服)을 입고 거애(擧哀)하고 정전(正殿)에서 피해 있으며 감선(減膳)하고 음악을 중지하다가 사흘이 되어서야 그만둔 전례가 있습니다. 이번에 선원전(璿源殿)에 실화(失火)하여 어진(御眞)을 봉출하지 못한 데 대해서도 이 전례대로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이에 근거해서 마련하되 선원전 문 밖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가 등록을 상고하여 보니 강릉(江陵) 집경전(集慶殿)에서 실화하여 영정을 봉출하지 못하였을 때 종묘(宗廟) 제1실에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고 관리를 강릉에 보내어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역시 위안제를 지냈습니다. 이번에 선원전에서 실화하여 어진을 봉출하지 못한 데 대하여 마땅히 종묘에 위안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위안제는 날을 받지 않고 음력 윤8월 22일에 진행하되 축문(祝文)은 시독관으로 하여금 찬출(撰出)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선원전에 신위를 설치하고 대신을 보내어 역시 위안제와 다례(茶禮)를 지내도록 하라. 제물(祭物)은 작헌례(酌獻禮)의 예대로 마련하되 친제(親祭)의 규례대로 하고 백관들이 들어와 참여하라."
하였다.

 

장례원(掌禮院)에서 선원전(璿源殿) 실화(失火) 뒤의 응행 사목 별단(應行事目別單)을 바치자 재가(裁可)하였다. 【1. 황제의 변복(變服)은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참포(黲袍)를 입고 오서대(烏犀帶)를 띠고 백피화(白皮靴)를 신으며, 황태자의 변복은 익선관을 쓰고 참포를 입고 오서대를 띠고 백피화를 신으며, 거애하고 정전(正殿)을 피해 있으며 감선(減膳)하고 음악을 중지하며 오늘부터 3일이 되면 그만둔다. 1. 명헌 태후(明憲太后), 황태자비(皇太子妃)는 오늘부터 천담복(淺淡服)을 입으며 3일이 되면 그만둔다. 1. 종친(宗親)과 문무백관(文武百官)의 변복은 천담복에 오사모(烏紗帽)를 하고 흑각대(黑角帶)를 띠고 백피화를 신으며 3일이 되면 그만두되 2품 이상의 관리들은 그날로 문안한다. 1. 당일로부터 시작하여 정조시(停朝市)하고 죄를 주거나 죽이는 것을 그만두며 도살(屠殺)을 금지하고 음악을 중지하되 3일이 되면 그만둔다.】


【원본】 44책 40권 93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83면
【분류】왕실-국왕(國王)

 

별전(別殿)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 실화(失火)에 대한 거애(擧哀)를 행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심순택(沈舜澤)을 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과 진전중건도감(眞殿重建都監)의 도제조(都提調)에 임용하고 원수부 회계국 총장(元帥府會計局總長) 민영환(閔泳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김석진(金奭鎭), 정2품 조희일(趙熙一)을 영정모사도감과 진전중건도감의 제조(提調)에 임용하였으며, 종2품 민영철(閔泳喆)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이번 선원전(璿源殿) 실화(失火) 이후 종친(宗親)과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소복(素服)을 입되 3일이 되면 그만두도록 장례원(掌禮院)에서 아뢰어 비준 받았습니다. 군부(軍部)와 경부(警部) 2부(部) 관리의 복색은 이미 신식 규례가 있으므로 역시 변통해서 2촌(寸) 너비의 흑색포(黑色布)로 왼쪽 팔 윗부분에 둘러 감되 3일이 되면 그만두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원수부(元帥府)의 각국(各局) 총장(總長), 군부 대신(軍部大臣), 경부 대신(警部大臣)은 오늘부터 별생기(別省記)로 입직하며 실화한 곳을 검찰 하는 일은 경부 대신이 전관하여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산릉도감(山陵都監)과 천릉도감(遷陵都監) 두 도감에서는 우선 역사(役事)를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5일 양력

별전(別殿)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 실화(失火)에 대한 거애(擧哀)를 행하였다.

 

산릉(山陵)을 간심(看審)하고 온 대신(大臣)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 천릉도감 제조(遷陵都監提調) 민영준(閔泳駿),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민응식(閔應植), 김영목(金永穆), 궁내부 대신 서리(宮內府大臣署理) 민종묵(閔鍾默), 학부 대신(學部大臣) 김규홍(金奎弘), 장례원 경(掌禮院卿) 윤정구(尹定求), 상지관(相地官) 이병헌(李秉憲) 등이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들이 명을 받들고 군장리(群場里) 임좌(壬坐), 정안리(正安里) 계좌(癸坐), 팔곡산(八谷山) 계좌를 간심하고 여러 상지관(相地官)과 의논하여 보니, 군장리 임좌에 대해 상(上)을 쓴 자가 매우 많았으며 정안리 계좌에 대해 상을 쓴 자는 군장리보다 적었습니다.
신들이 풍수(風水)의 이치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고 상지관이 논한 것에 대해서도 좋고 나쁜 것을 가려내지 못하고 있으나, 평범한 안목으로 말하더라도 토덕(土德)이 돈후하고 산의 기세가 명랑하기는 군장리 임좌나 정안리 계좌가 모두 그러했습니다. 상지관이 대령하고 있으니 하순(下詢)하신다면 자연히 통촉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짐도 일찍이 상지관의 말을 들으니 모두 군장리가 좋은 자리라고 하였다. 이제 물어보겠다. 경들이 보기에는 두 곳 가운데서 어느 곳이 낫던가?"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지관의 말은 군장리의 임좌는 산세가 웅장한데다 뻗어 내린 용맥(龍脈)에 왕자혈(王字穴)이 있어서 능침(陵寢)을 쓸 만한 대지(大地)라고 하였습니다. 정안리 계좌는 용세(龍勢)가 웅장하지는 못하지만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감싸고 있으므로 흠 없는 길지(吉地)라고 하였습니다. 임좌는 흙 색깔까지도 징험하였습니다. 계좌는 흙 색깔은 아직 징험하지 못했으므로 감히 질정하여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안목으로 보더라도 임좌가 계좌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상지관을 입시하라고 명하자 이병헌 등이 앞에 나아가 보고하기를,
"군장리 임좌는 청룡과 백호가 웅장하게 감싸고 안산(案山)이 빽빽이 들어서 있어 참으로 상길(上吉)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안리와 팔곡산의 계좌는 것은 모두 이만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다시 가서 군장리와 정안리를 간심하고 오라."
하였다.

 

10월 16일 양력

별전(別殿)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 실화(失火)에 대한 거애(擧哀)를 행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윤정구(尹定求)가 아뢰기를,
"선원전(璿源殿)에서 실화(失火)한 것과 관련하여 거애(擧哀)한 지 이미 3일이 지났습니다. 내일부터는 도로 정전(正殿)으로 나가고 길복(吉服)을 입으며 상선(常膳)을 회복하며 음악 같은 것도 회복하도록 통지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되 음악을 회복하는 것은 이달 안으로는 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17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원수부(元帥府) 각국 총장(各局總長), 군부 대신(軍部大臣), 경부 대신(警部大臣)은 오늘부터 별생기(別省記)로 입직하지 말고 윤번(輪番)으로 입직하라."
하였다.

 

길주(吉州)와 성진(城津)의 안핵사(按覈使) 김인식(金寅植)이 부모의 병으로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자 정3품 이순하(李舜夏)로 대신하였다.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김가진(金嘉鎭)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요즘 보니 군대를 증가시키는 것과 관련하여 예산 밖의 지출이 많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경비가 군색한데다 또 나라의 용도가 이처럼 방대하므로 타개할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세금을 추가해서 받아들이며 둘째로 시장의 물건에 인지(印紙)를 붙이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결세(結稅)는 나라의 정공(正供)인 만큼 그 법은 일정하여 털끝만치라도 변동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돈으로 쌀을 대신하여 토지 1결(結)에 30냥(兩)씩 내는 것은 개혁 후의 새로운 법입니다. 처음에는 소요를 겪은 백성들의 심정을 생각하고 나라의 용도를 절약하여 공사(公私)가 모두 편리하였으나 지금에는 지출이 많고 수입이 적으며 쌀은 귀하고 돈은 천하므로 그전에 바치던 쌀을 오늘 바치는 돈과 비교한다면 그 이해관계가 대단히 큽니다. 형편에 따라 적당하게 조절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으므로 세금을 더 거두는 데 대한 논의는 그만둘 수 없는 정당한 논의입니다.
인지는 곧 매매하는 표식이며 이 세상 모든 나라들에서 모두 쓰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은 아직 쓰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특별한 모양으로 만들어 위조를 방지하면서 물품에 따라 값을 정하고 이 믿을 만한 표식을 각별히 시행한다면 장사하는 사람들이 손해 보는 것은 적고 공용(公用)에 주는 이익은 클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이 올린 글을 정부에 널리 물어서 따로 규정을 정하여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는 터전이 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이 시의(時宜)에 합당한 듯하다. 그러나 지금 갑자기 의논할 수는 없다."
하였다.

 

10월 18일 양력

총호사(總護使)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총호사 윤용선(尹容善), 궁내부 대신서리(宮內府大臣署理) 민종묵(閔種默),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민응식(閔應植)과 조정희(趙定熙), 학부 대신(學部大臣) 김규홍(金奎弘), 장례원 경(掌禮院卿) 윤정구(尹定求), 상지관(相地官) 이병헌(李秉憲) 등이다.】  산릉(山陵)을 다시 간심하고 온 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신들이 명을 받고 상지관(相地官)을 거느리고 가서 두 번째로 간심한 데 의하면 군장리(群場里)는 형국(形局)과 지세(地勢)가 볼수록 더욱 좋으므로 이보다 나은 데는 없을 것 같습니다. 흙 색깔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였으나 혈(穴)을 다칠 염려가 있을 것 같아서 감히 깊이 파지는 않았지만 땅 색깔이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만약 깊이 파면 땅이 더욱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땅 색깔이 좋다 해도 역시 좀 습한 기미는 없던가?"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땅 속의 흙이 어찌 습기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상지관에게 하순(下詢)하는 것이 아마도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상지관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이병헌(李秉憲) 등이 아뢰기를,
"두 번째로 간심한 결과 군장리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에 정감이 있고, 조산(祖山)이 매우 빼어나므로 참으로 대길(大吉)한 자리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상지관의 말이 마치도 한 입에서 나온 것 같으니 군장리는 반드시 좋은 자리일 것이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동궁 전하의 정성과 효성에 감응되어 쉽게 얻지 못할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경의 말과 같다."
하였다. 이어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홍릉(洪陵)을 다시 군장리에 천봉하기로 정하였으니 세 번째로 간심한 다음 곧 봉표(封標)하라."
하였다.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 오정근(吳正根)을 소견(召見)하였다.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의 어진(御眞)을 화녕전(華寧殿)에 모신 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를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0월 19일 양력

육군 참령(陸軍參領) 구영조(具永祖)를 법부 협판(法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김가진(金嘉鎭)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일전에 망녕되게 어리석은 견해를 내어 함부로 상소를 올린 데 대해 하기를, ‘지금은 갑자기 논의할 수 없다.’라고 비답을 내리시면서 간곡히 타일러 주셨는데 과연 위대한 것이 성인(聖人)의 말씀이신 듯합니다. 이는 참으로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이 어찌 더불어 넉넉하지 않겠는가?’라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은 끝없이 존경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으나 스스로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일을 임금에게 열어 준 죄과를 범하였으니 너무나 부끄럽고 두려워서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재물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귀신이 가져다주는 것도 아닌 만큼 백성들에게서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정상적으로 쓰는 비용이 부족하고 예산 지출이 거의 부족한데다 더구나 군사 편제가 확장된 결과 군량을 마련하기 어렵고 관리의 정원 수가 많이 증가된 결과 봉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 없게 된다면 비록 백성이 있다 해도 어떻게 백성을 다스리겠습니까?
대체로 우리 왕조의 전결(田結)에 대한 행정 중에 대동전세(大同田稅)는 공법(貢法)과 철법(徹法)을 참고하고 그 땅의 소출을 헤아려서 정공(正供)을 정하는 공명정대한 법입니다. 그러나 매년 풍흉에 따라서 결가(結價)를 더하거나 덜며 그 밖에 영문(營門)에 바치고 고을에서 쓰는 것 가운데 변통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첨부하여 쌀로 거두는 것이 근세에 통용되는 규례입니다.
경장(更張) 이후부터 돈으로 대신 바치는데 그 해의 농사 형편도 따지지 않고, 태비(駄費)도 계산하지 않고 다만 1결(結)에 30냥(兩) 혹은 25냥으로 정하여 바닷가와 산간 지대의 차이를 두었습니다. 만약 쌀값이 언제나 풍년이 들 때와 같고 경상 비용이 그전보다 증가하지 않는다면 전일대로 따라 행해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쌀은 귀하고 돈은 천하여 옛날 쌀 1두(斗)에 1냥 하던 것이 지금은 2, 3냥까지 오르고, 전에 1년 동안 쓰던 비용이 지금은 겨우 반년의 비용으로 되고 있습니다. 또 1결의 땅에서 나는 벼가 평년을 기준하면 적어도 20석(石), 30석을 내려가지 않는데 세금으로 걷어 들이는 돈은 많아야 1, 2석의 값을 넘지 않으므로 30분의 1세를 실시하던 옛날에 비해도 오히려 매우 가벼운 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더 걷어 들인다 해도 사실은 절도 없이 마구 걷어 들이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이 백성들의 고통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시장의 물건에 인지(印紙)를 붙이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실시해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만 아직도 실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생선, 소금, 미역 따위에 대한 세는 대부분 소홀한 것이 많고 갈수록 복잡다단해집니다. 약간 걷어 들인 것도 늘 중간에 없어져 버리고 국고(國庫)에 들어가는 것도 백에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만약 특별히 인지를 만들어서 물건이 대소(大小)와 경중(輕重)에 따라 붙여서 증거로 삼고 값은 돈으로 통용함으로써 협잡을 방지하고 폭리를 금지한다면 장사치들이 내는 것은 그전보다 더한 것이 없으면서도 나라에서 보태어 쓰는 것은 백배에만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에 관시(關市)에서 매기던 세금과는 아주 다르니, 상인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것이 또한 명백합니다. 백성들을 괴롭히지도 않고 상인들에게 해도 되지 않으면서 국가의 재용(財用)을 넉넉히 하는 것이 어찌 당면한 폐단을 수습하는 좋은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감히 진달하여 거듭 호소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황상께서 경상 비용을 넉넉히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유념하시고 신이 아뢴 것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헤아리시어, 빨리 의견을 수집하여 규정을 제정함으로써 시세(時勢)에 따라 마땅하게 조처할 것을 천만 번 간곡하게 비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해관계를 지적하여 진달한 것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니 말한 내용은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겠다."
하였다.

 

10월 20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선원전(璿源殿) 제1실의 어진(御眞)은 준원전본(濬源殿本)을 모사하여 봉안할 것이다. 모셔오는 의식 절차는 장례원(掌禮院)에서 마련하여 거행하되 날짜는 음력 9월 보름쯤으로 택하여 들이고 장례원 당상(掌禮院堂上)과 낭청(郞廳)이 나아가도록 하라."
하였다.

 

종2품 이재현(李載現)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0월 21일 양력

궁내부 대신서리(宮內府大臣署理) 민종묵(閔鍾默)이 아뢰기를,
"선원전(璿源殿)에 불이 나서 타다 남은 것을 되는 대로 버려둘 수 없으니 모두 수습하여 종묘(宗廟)의 해당 실(室)의 북쪽 섬돌 위에 매안(埋安)하는 것이 원칙에 맞을 것 같습니다.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택일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윤정구(尹定求)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궁내부 특진관 신기선(申箕善)을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0월 22일 양력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이모중건도감 도제조(移摹重建都監都提調) 심순택(沈舜澤)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진전(眞殿)에 불이 난 것은 옛날에도 드문 괴변입니다. 너무나도 원통하여 아뢸 말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날 밤은 초하루 여름에 분향(焚香)할 때도 아니었고 또 지척에 있는 곳인데 어떻게 잡인들이 왕래할 수 있었겠는가? 밤중이 되어 바로 자리에 누우려고 할 적에 갑자기 동북 변두리에서 불길이 하늘에 뻗쳤는데 변이 어디서 생겼는지 알 수 없어 대궐문을 굳게 닫고 외인(外人)들을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더니 삽시간에 불이 전각까지 번져서 끌 수 없게 되었다. 너무나 황공하고 급한 가운데 더없이 중대한 어진(御眞)을 봉출하지 못하였다. 정성과 효성이 미치지 못하여 전에 없던 변고가 생긴 것이니 절통하기 그지없다."
하였다.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신도 이 변고를 듣고 놀랍고 황공함을 금치 못하여 밤을 세워 올라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전에 능침에 불이 났을 때에는 단지 하루 거애(擧哀)하였지만 이번에는 사흘 거애하고도 오히려 여한이 있다. 정묘년(1627)과 병자년(1636)의 오랑캐 난리 이외에 더는 이와 같은 큰 화변이 없었다. 그 화재의 원인에 대하여 내가 친국(親鞫)하여 끝까지 캐려 하였으나 신식(新式)에 구애되어 다만 경부(警部)에 분부하고 만 것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만약 폐하가 직접 신문하게 된다면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모두 화를 입을 염려가 있으므로 유사(攸司)에서 사핵(査覈)하여 중하게 다스리게 하는 것이 원칙에 부합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효종(孝宗)이 심양(瀋陽)에 가 있을 적에 지은 붉은 행전(行纏) 및 마고자(摩古子)와 열성조들이 쓰신 고적(古跡)들이 모두 불타버리는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그 절통한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준원전(濬源殿)의 어진(御眞)을 모셔오는 의식 절차는 인조조(仁祖朝) 신미년(1631) 집경전(集慶殿)의 전례대로 간소하게 하라."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올 봄에 어진을 이모(移摹)할 때에 연로(沿路)의 지방에 폐를 끼친 것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고, 심순택이 아뢰기를,
"이모하는 의식 절차는 이미 간단하게 한 전례가 있으니 거기에 근거해서 진행할 것이나, 이모할 장소는 어디로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흥덕전(興德殿)에서 설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들이 내일 회동하여 거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선원전(璿源殿)에 불이 난 다음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하는 의식을 진행할 곳이 없으니 짐의 마음에 기막히기 어찌 끝이 있겠는가? 내일 영희전(永禧殿) 평락정(平樂亭)에 원임 규장각 제학(原任奎章閣提學) 민영환(閔泳煥)을 보내어 초하룻날의 분향하는 의식을 섭행하게 하고 이어 봉심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휴가를 마치고 일을 본 지 며칠 안 되어 병으로 사임하려는 글을 또 올리는가? 경의 상소문에서, ‘오늘날 나타난 증세를 지난날에 비하면 더하면 더하였지 나은 것은 없다.’라고 한 것은 바로 오늘날의 시국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경의 나라를 고치는 솜씨로 손을 대어 고치리라고 기대하였는데 어찌하여 손대지 않는 것을 고상하다고 여기는가?
그러나 병이 오래 낫지 않는 것은 매우 걱정된다. 경은 건강에 조심하여 빨리 회복하여 아침저녁으로 곁에 있으면서 나랏일을 바로잡아 줄 것을 짐이 기대하는 바이다."
하였다.

 

정2품 김학진(金鶴鎭), 종2품 조민희(趙民熙)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에게 의정(議政)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3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신기선(申箕善)이 아뢰기를,
"준원전(濬源殿)의 영정(影幀)을 떠나보내는 날을 음력 9월 18일로 추택(推擇)하였습니다. 먼저 고유제(告由祭)는 같은 달 16일에 지내고 동가(動駕)를 고하는 제사는 떠나는 날 첫 새벽에 설행하며 축문(祝文)은 시독(侍讀)으로 하여금 찬출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되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지어서 내려 보내겠다."
하였다.

 

10월 24일 양력

주일 공사(駐日公使) 조병식(趙秉式)을 대유재(大猷齋)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일본(日本)에 갔다가〗 돌아온 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신기선(申箕善)이 아뢰기를,
"나라의 정공(正供)은 기일을 지체시켜서는 안 되며 더구나 각 능원(陵園)의 복호(復戶) 결전(結錢)은 소중하기가 더욱 남다른데 근래 그 기일을 지연시키는 것이 갈수록 더욱 심합니다. 더없이 존엄하고 경건한 곳에서 비용이 궁핍하여 늘 걱정거리가 되고 있으니 사체에 비추어 보아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부터 복호가 있는 각군(各郡)에 훈령(訓令)으로 거듭 신칙하여 이전의 세금은 날짜를 찍어 주어 모두 바치게 하고 새로 바치는 세금도 기한을 정해주고 독촉하여 받아들이소서. 만약 그전처럼 질질 끈다면 나타나는 대로 보고하여 경책하게 하라는 내용으로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능원(陵園)의 복호(復戶)에서 이와 같이 조세를 지체시키어 더없이 중대하고 경건한 곳에 비용이 궁핍하게 한 것은 매우 놀랍고도 개탄스러운 일이다. 이제부터는 아뢴 대로 엄히 신칙하고 기한을 정해 주되, 혹시 기한을 넘길 경우에는 해원(該院)에서는 탁지부(度支部)의 정공(正供)을 독촉하여 받아들인 전례에 따라 논경(論警)하고 기준대로 받아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궁내부 대신 임시서리(宮內府大臣臨時署理) 민종묵(閔鍾默)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강화부(江華府) 정족산성(鼎足山城) 사고(史庫)에 보관된 실록(實錄)을 포쇄(曝曬)한 비서원 낭(秘書院朗) 이병소(李秉韶)가 서주(書奏)할 때에 인조조(仁祖朝)의 정축년(1637)의 실록 2책이 없다고 한 것과 관련하여, 전후로 포쇄하고 조사하는 일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비서원 낭 이우만(李愚萬), 전전 강화 부윤(前前江華府尹)        이해창(李海昌), 겸장례(兼掌禮) 김태제(金台濟), 비서원 낭 김덕한(金德漢)을 모두 법부(法部)로 하여금 조사하여 유배시키도록 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번에 실록을 조사한 비서원 낭 최병철(崔炳哲)이 복명할 때 아뢴 것을 들으니, 전에 잃어버린 인조조 정축년의 실록 2책이 39번째 궤 안에 있으므로 지금 이미 찾아다가 40번째 궤 안에 도로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포쇄는 얼마나 신중히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전에 포쇄한 비서원 낭 이병소는, 애초에 자세히 점검하지도 않고 경솔하게 입주(入奏)하여 그 동안 일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사체로 헤아려 볼 때 참으로 놀랍습니다. 전혀 다르게 아뢴 잘못을 피하기 어려운 만큼 심상하게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법부로 하여금 사핵하여 징계하게 해야 합니다.
유배한 이우만 등 4인은 죄가 없다는 것이 한결같이 밝혀졌으므로 이미 시행한 형률에 대해서는 참작하여 용서해주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으나 신의 부(府)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리고 실록 2책은 지금 다행히 도로 봉안하였으니, 등서(謄書)하여 채워 봉안하는 일은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되 유배한 이우만 등은 이미 죄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모두 용서하여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군부 대신(軍部大臣) 민병석(閔丙奭)을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법부 사리 국장(法部司理局長) 김석규(金錫圭)를 법률 기초위원장(法律起草委員長)에 임용하였다. 군부 협판(軍部協辦) 이한영(李漢英)에게 대신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5일 양력

칙령(勅令) 제40호, 〈외국어 학교, 의학교, 중학교 졸업인을 각 해당 학교에 수용하는데 관한 안건〔外國語學校醫學校中學校卒業人收用於各該學校件〕〉, 칙령 제41호, 〈강원도의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는데 관한 안건〔江原道鬱陵島以鬱島郡改稱島監以郡守改正件〕〉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의정부 의정서리 내부대신(議政府議政署理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가 아뢰기를,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김가진(金嘉鎭)이 올린 상소 내용을 의정부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신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모여서 의논한 결과 가결(加結)하는 문제는 찬성이 5표, 반대가 3표였고 인지(印紙)를 붙이는 문제는 찬성이 2표, 반대가 6표였습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裁決)을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표 수가 많은 대로 시행하되 인지를 붙이는 문제는 다시 편리한 방도를 충분히 의논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6일 양력

영정모사도감 제조(影幀摹寫都監提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영희전(永禧殿)에 봉안(奉安)한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어진(御眞), 냉천정(冷泉亭)에 봉안한 영조 대왕(英祖大王)의 어진, 평락정(平樂亭)에 봉안한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의 어진, 영희전에 봉안한 순조 숙황제(純祖肅皇帝)의 어진, 평락정에 봉안한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의 어진과 헌종 대왕(憲宗大王)의 어진을 이봉(移奉)하여 모사(摹寫)해야 할 것입니다. 이봉하는 일은 장례원(掌禮院)에서 택일(擇日)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신기선(申箕善)이 아뢰기를,
"준원전(濬源殿)의 영정(影幀)을 흥덕전(興德殿)에 모셔 와서 봉안(奉安)하는 날을 음력 9월 28일로 정하고 봉안제(奉安祭)는 당일에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작헌례(酌獻禮)를 친행(親行)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제문(祭文)도 내가 직접 짓겠다."
하였다.

 

종1품 서정순(徐正淳), 정2품 조희일(趙熙一), 비서원 경(祕書院卿) 윤덕영(尹德榮)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에 서임(敍任)하였는데 서정순에게는 1등, 조희일과 윤덕영은 모두 3등에 서임하였다. 궁내부 특진관 김학진(金鶴鎭)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장례원 경(掌禮院卿) 신기선(申箕善)에게 비서원 경을 겸임시키고, 궁내부 특진관 윤태흥(尹泰興)을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10월 27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신기선(申箕善)을 소견(召見)하였다. 준원전(濬源殿)의 어진(御眞)을 모셔오기 위하여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진전(眞殿)에 불이 난 변고는 오래 될수록 더욱 망극(罔極)하다. 옮겨다가 모사(摹寫)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 준원전의 어진을 인조조(仁祖朝) 집경전(集慶殿)의 전례대로 장례원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보내서 모셔오게 하는 것은 오로지 성조(聖祖)께서 폐단을 줄인 뜻을 우러러 본받고자 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니, 신기선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진전에 불이 난 변고로 하여 기막힌 슬픔은 위아래 사람이 모두 절절하였습니다. 준원전의 어진을 모셔오는 일은 신에게 있어서 매우 조심스럽고 두려운 일이었으나 이미 백성들의 폐단을 염려하고 또 지나간 규례까지 원용하셨으니 폐하가 뜻을 둔 데 대해서는 이루 다 칭송할 수 없으며 어리석고 용렬한 신의 자질로는 보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 길은 단출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을 장례원의 당상과 낭청이 겸행(兼行)하게 하고 중사(中使)도 그만두게 한 것은 백성들의 폐단을 덜기 위해서이다. 지난번에 들은 데 의하면 올봄에 어진을 모시고 갈 때에 병정(兵丁)과 순검(巡檢)의 무리들이 폐단을 끼친 것이 매우 많았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각별히 신칙(申飭)하여 전날의 폐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신기선이 아뢰기를,
"이번에는 올봄과는 다릅니다. 서울에서 내려갈 때에는 당상과 낭청이 몇 명만 있고 일행이 모두 수십 인(人)에 지나지 않으므로 폐단을 크게 끼칠 것은 없으나 모시고 올라 올 때에는 군사들의 호위가 없을 수 없으니 경계하고 삼가는 일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을 부장(副將)에 임명하였으니 경계하고 삼가는 일들이 다른 관리들보다는 나을 것 같다."
하니, 신기선이 아뢰기를,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각 부대의 군사들이 명령에 잘 응하지 않을 것이므로 원수부(元帥府)에서 신에게서 훈령(訓令)을 받도록 신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수부와 의논하여 훈령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신기선이 아뢰기를,
"신이 본원(本院)의 일을 가지고 염치를 무릅쓰고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수원(水原)에 옛날에 궐리사(闕里祠)가 있었는데, 정묘조(正廟祖)에 지은 것으로서 공자(孔子)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경오년(1870)에 서원(書院)을 철훼(撤毁)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선현들과 선유(先儒)들의 사당이 지나치게 중첩되었기 때문에 재감(裁減)하려고 한 것이었고 애초에 선성(先聖)의 영당(影堂)까지 모두 포함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의 수령(守令)이 그냥 모두 철훼하였습니다. 거기에 모셨던 영정을 수원 향교(水原鄕校)에 이안(移安)한 것도 조령(朝令)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유생(儒生)들과 선성의 후예들이 사당 자리에 두어 칸짜리 집을 중건(重建)하고 영정을 도로 모시자고 청하는 것은 사사로운 정성을 발휘한 데 지나지 않을 뿐이고 애초에 나라의 사전(祀典)에 관계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전전 장례원 경(前前掌禮院卿) 이승순(李承純)은 해당 관찰사(觀察使)의 보고에 대해 지령을 내려 허락하였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말썽이 생겨서 지령을 환수(還收)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충주(忠州) 운곡서원(雲谷書院)은 주자(朱子)의 영당이었는데 역시 경오년(1870)에 철훼하였다가 계사년(1893) 경에 이르러 유생들이 사당을 중건하고 공주 향교(公州鄕校)에 이안했던 영정을 도로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때의 감사(監司)도 인정하여 허락하고 조가(朝家)에서도 애초에 금지한다는 영(令)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규례로 하여 다른 유생들도 성의를 펴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지금 유교가 침체하고 있는 이때에 선성(先聖)을 함께 제사 지내는 일을 혹시라도 막는다면 아마도 사체에 흠이 갈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운곡 서원의 이전 규례를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천릉(遷陵), 산릉(山陵) 두 도감(都監)에서는 다시 역사(役事)를 시작하라."
하였다.

 

정1품 조병식(趙秉式)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장례원 경(掌禮院卿) 신기선(申箕善)을 영정모사도감 진전중건도감 제조(影幀摹寫都監眞殿重建都監提調)에 더 차하(差下)하였으며, 천릉도감 제조(遷陵都監提調) 이근명(李根命)과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조정희(趙定熙)를 서로 바꾸었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신기선(申箕善)이 아뢰기를,
"영희전(永禧殿)에 봉안(奉安)한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어진(御眞), 냉천정(冷泉亭)에 봉안한 영조 대왕(英祖大王)의 어진, 평락정(平樂亭)에 봉안한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의 어진, 영희전에 봉안한 순조 숙황제(純祖肅皇帝)의 어진, 평락정에 봉안한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의 어진과 헌종 대왕(憲宗大王)의 어진을 이봉(移奉)하는 날을 음력 9월 28일로 가려 정하였습니다. 흥덕전(興德殿)에 봉안한 다음 친행(親行)하는 작헌례(酌獻禮)를 규례대로 마련합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규례대로 마련하되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지어서 내려 보내겠다."
하였다.

 

전 남소영(前南小營)의 유지(遺址)에 장충단(奬忠壇)을 세웠다. 원수부(元帥府)에서 조칙(詔勅)을 받들어 나랏일을 위해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10월 28일 양력

총호사(總護使) 윤용선(尹容善)이, ‘홍릉(洪陵)을 다시 군장리(羣場里)에 옮겨 모시기로 정하고 세 차례 간심(看審)한 다음 이어서 봉표(封標)하도록 칙령(勅令)을 내리시고 봉표 길일과 길시(吉時)를 장례원(掌禮院)에서 가려 정하도록 주하(奏下)하였는데, 원임 의정 대신(原任議政大臣)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는 병이 있고, 윤용선(尹容善)과 궁내부 특진관 심순택(沈舜澤), 천릉도감 제조(遷陵都監提調) 민영준(閔泳駿), 본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민응식(閔應植)·김영목(金永穆)·이근명(李根命), 학부 대신(學部大臣) 김규홍(金奎弘),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 궁내부 대신서리(宮內府大臣署理) 궁내부 특진관 민종묵(閔種默),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 윤태흥(尹泰興)등이 함께 상지관(相地官)을 데리고 내일 나아가겠습니다.’라고 아뢰니, 윤허하였다.

 

10월 30일 양력

총호사(總護使)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총호사 윤용선(尹容善), 천릉도감 제조(遷陵都監提調) 민영준(閔泳駿),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민응식(閔應植), 학부 대신(學部大臣) 김규홍(金奎弘),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 궁내부 대신 서리(宮內府大臣署理) 민종묵(閔鍾默),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 윤태흥(尹泰興)이다.】  산릉(山陵)을 세 차례 간심(看審)하고 이어 봉표(封標)를 세우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어제 좋은 시각에 봉표(封標)를 순조롭게 세웠습니다. 봉표를 세우기 전에 여러 상지관(相地官)들과 함께 간심한 결과 모두 같은 말로 찬미하는 것이 전번과 매한가지였습니다. 심지어 촌 늙은이들도 모두 좋은 자리라고 하였습니다. 인심이 천심이라고 오늘 좋은 자리를 얻은 것은 천만다행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산의 생김새가 낮은 데서부터 높은 데를 향하였던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건원릉(健元陵)에 비하면 그 높이가 과연 어떻던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건원릉만큼 높지는 못하지만 봉표를 세운 곳은 엄연히 존엄한 기상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미 좋은 능 자리를 얻었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산릉의 각 항목의 길일(吉日)을 장례원(掌禮院)에서 가려 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시종원 경(侍從院卿) 이근명(李根命)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 윤정구(尹定求)를 시종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10월 31일 양력

어진(御眞)을 봉심(奉審)하고 온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전 장례원 경(前掌禮院卿) 이승순이다.】 이승순(李承純)이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고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어진 표제(御眞標題)를 받들고 경기전(慶基殿)에 달려 나아갔다가 이어 조경묘(肇慶廟)에 나아가서 봉심(奉審)하고, 도로 경기전에 나아가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는데, 제사를 받드는 일이 안녕하였습니다. 그날 손시(巽時)에 본도(本道) 관찰사(觀察使) 신 조한국(趙漢國)이 표구하는 사람과 함께 어진 표제를 붙이고는 조경단(肇慶壇)에 나아가 단상(壇上)을 봉심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표제를 원래의 표제 안에 붙였는가, 밖에 붙였는가?"
하니, 이승순이 아뢰기를,
"안에다 붙였는데 서로의 간격이 5분(分) 쯤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강(升降)하는 용 문양의 낙영(絡纓)에 가리지 않던가?"
하니, 이승순이 아뢰기를,
"탐외(榻外)에서 우러러보면 과연 가리지 않습니다."
하였다.

 

총호사(總護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신들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천릉(遷陵)의 각 항목 날짜를 정하기 위하여 일관(日官)을 불러다가 상세히 의논한 결과 오는 신축년(1901) 9월이 좋은 달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들을 시켜 정밀하게 가려서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입니다. 성상께서 재결(裁決)하기 바랍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택일 별단(擇日別單)은 다음과 같다. 홍릉(洪陵)은 오른쪽으로 돌아 축간방(丑艮方)에서 뻗어온 용(龍)이 손사방(巽巳方에서 출맥(出脈)하고, 을묘방(乙卯方)에서 위이(逶迤)하고, 갑묘방(甲卯方)에서 성봉(成峰)하고, 축간방에서 전신(轉身)하고, 감계방(坎癸方)에서 과협(過峽)하고, 축간방에서 박환(剝換)하고, 손사방에서 일절(一節)하고, 을묘방에서 개장(開帳)하고, 건해방(乾亥方)에서 출신(出身)하고, 임감방(壬坎方)에서 환절(換節)하고, 축간방에서 성봉하고, 감계방에서 결인(結咽)하고, 임해방에서 도두(到頭)하고, 해방(亥方)에서 입수(入首)하였다. 혈(血)의 좌향(坐向)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이다. 역사(役事)를 시작하는 것은 신축년(1901) 4월 6일 신축일(辛丑日) 손시(巽時)이며, 풀을 베고 흙을 파내는 것은 같은 달 15일 경술일(庚戌日) 손시에 하되 북쪽 방향에서부터 시작하며 후토신(后土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동일(同日) 첫새벽에 먼저 행한다. 옹가(甕家)를 짓는 것은 8월 6일 기해일(己亥日) 진시(辰時)에 금정(金井)을 여는 것은 같은 달 17일 경술일 손시에 하되 혈의 깊이는 7척(尺)으로 한다. 외재궁(外梓宮)을 모셔 나가는 것은 9월 15일 정축일(丁丑日) 손시에 하고 외재궁을 내리는 것은 같은 달 16일 무인일(戊寅日) 손시에 한다. 빈소(殯所)를 만드는 것은 대여(大輿)가 능소(陵所)에 도착한 다음 시간에 따라 하며, 능소에서 찬궁(攢宮)을 여는 것은 같은 달 28일 경인일 정시(丁時)에 하되 서쪽 방향을 먼저 연다. 출발은 찬궁을 연 뒤에 한다. 현궁(玄宮)에 하관(下棺)하는 것은 같은 달 같은 날 경인일 해시(亥時)에 한다. 천릉(遷陵)의 택일 단자는 다음과 같다. 후토신에게 고하는 제사와 먼저 사유를 고하는 제사는 경자년(1900) 10월 9일 정미일(丁未日) 첫새벽에 지낸다. 옹가를 짓는 것은 같은 날 사시(巳時)에 하되 먼저 서쪽 방향에서 시작한다. 옛 능을 여는 것은 같은 달 28일 병인일(丙寅日) 병시(丙時)에 하고, 현궁을 내는 것은 신축년 9월 15일 정축일 곤시(坤時)에 한다. 출발은 같은 날 시간에 따라서 한다. 빈소를 만드는 것은 대여가 침전(寢殿)에 도착한 다음 시간에 따라 한다. 찬궁을 여는 것은 같은 달 27일 기축일(己丑日) 갑시(甲時)에 하되 먼저 동쪽 방향부터 한다. 발인(發靷)은 같은 달 같은 날 손시에 한다.】


【원본】 44책 40권 99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86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건설-토목(土木) / 왕실-의식(儀式)

 

특진관(特進官) 이승순(李承純)을 장례원 경(掌禮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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