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40권, 고종37년 1900년 8월

싸라리리 2025. 1. 30.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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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양력

【음력 경자년(庚子年) 7월 7일】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원본】 44책 40권 68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70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올해는 옛날 우리 원경 왕후(元敬王后)께서 승하(昇遐)하셨던 해이다. 옛날을 생각하면 그리운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이달 음력 10일 헌릉(獻陵) 작헌례(酌獻禮)를 대신(大臣)을 보내어 섭행(攝行)하라.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서북 양계(西北兩界)는 사실상 변경의 요충지이므로 방비를 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번에 새로운 부대를 편성하여 배치한 것이 주밀하다 하더라도 체제를 밝히고 대오를 정돈하여 진영의 면모를 개변하고 변경 방위를 더욱 튼튼히 하는 것은 오직 영관(領官)과 위관(尉官)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직분을 다하는데 달렸으니 그 맡은 임무가 참으로 중요하지 않겠는가? 대체로 군대란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 일이 곧 나라를 보호하는 것이다. 만약 군대를 양성한다 하면서 백성들을 소란하게 한다면 그런 군사를 어디에 쓰겠는가? 그들 모두가 백성들을 갓난아이처럼 보호하려는 나의 뜻을 체득하여 엄격히 단속함으로써 조금이라도 지방에 폐단을 끼쳐서 죄를 스스로 초래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원수부(元帥府)로 하여금 서북 각 부대의 영관, 위관들을 초대(招待)하여 일일이 깨우치게 하고, 이미 부대에 도착한 자들에 대해서도 일체(一體) 훈령(訓令)으로 신칙하게 하여 모두 각자 엄히 준수하여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병이 아직도 낫지 않았다니 더더욱 염려된다. 의정의 자리가 오래도록 비었으므로 날마다 완쾌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사임하려는 편지가 또 이르니 나도 모르게 망연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닥친 걱정이 바야흐로 급하다는 것은 경도 이미 말하였다. 짐(朕)이 만약 경을 버린다면 누구와 함께 나라를 구하겠는가? 경은 속히 상소하는 일을 그만두고 안심하고 몸조리하여 빨리 상도(常度)를 회복하여 자리를 비워둔채 기다리는 짐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이도재(李道宰)가 올린 상소에,
"삼가 아룁니다. 신이 보잘 것 없는 자질로서 일을 맡아보았지만 성과가 없었고 중대한 책임은 그것을 감당할 힘이 없었으므로 안타까운 속마음을 털어 놓아 은혜롭게 헤아려 주시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온후하신 비답을 받아보니, 신을 물리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전의 업적을 칭찬하면서 빨리 부임할 것을 하유해 주시니 신은 은혜에 감격하고 의리상 두려운 마음이 들어 간절한 제 마음이 폐하를 감격시키지 못한 것을 자책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구구한 생각은 실로 전번의 상소문에서 감히 모두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므로 정세가 궁지에 빠져서 염치를 무릅쓰고 다시 아뢰게 되니, 신의 죄는 진실로 죽어 마땅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관찰사의 임무는 수령(守令)과는 달라 백성과 나랏일에 대한 모든 것을 직접 처리하지는 않지만 오직 폐하의 교화를 펴고 관리를 평정하는 것을 직분으로 삼고 있습니다. 때문에 위에서 선발할 때도 위임할 생각만 하고 아래에서 기대하는 것도 반드시 위풍이 있는 것을 앞세웁니다. 이 두 가지에 걸맞지 않으면 아무리 어진 인재라도 직책을 수행할 수 없게 되는데 더군다나 용렬하고 노둔한 신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평상시에도 일을 처리하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형세가 위태로운 오늘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작년에 의정부(議政府)에서 나와서 전라도(全羅道)에 안렴사(按廉使)로 갔었는데 그 무거운 짐과 빛나는 위풍이 관찰사보다 더하지 않겠습니까? 험한 일을 겪은 지 일 년이 되어도 잘못한 일만 쌓였고 다녀온 보고를 하는 날에는 겨우 한 장의 보고에 백성들에게 이로움과 해로움을 조목별로 진술할 뿐이었으며 또 고을 아전(衙前)들 중 특별히 나쁜 자를 지적하여 경고하고 탄핵할 뿐이었습니다. 신은 생각하기에 스스로 너무도 용렬하여 폐하의 명을 어긴 것이 실로 많다고 봅니다. 상주(上奏)한 글을 아직까지 유보해 두시어 한 가지 일도 시행되지 못하였으니, 지난날 신이 전라도로 떠나갈 때 폐하의 선발을 받아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겠다고 자처하면서 분발하여 큰일이나 할 것처럼 생각하던 것이 그냥 허튼 소리로 되어버렸고 규탄받은 자들은 모두 끄떡없이 있으면서 손가락질하며 비웃고만 있습니다. 신은 원래 보잘것없는 자이니 무엇을 돌볼 것이 있겠습니까만 어떻게 조정의 체통이 이로 하여 더욱 가벼워지고 공기(公器)가 이로 하여 더욱 흠가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변방에는 변란이 많고 민심은 흩어지기 쉬우므로 위엄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백성들의 풍속을 진정시킬 수 없고 믿음이 없고서는 정사를 해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이 명을 받고 나갔을 때 일을 잘못하여 너절하고 뻔뻔스러운 행동을 평안도 백성들도 귀가 있는 만큼 모두 들었을 것이니, 신이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이미 신의 인품을 엿보게 될 것이므로 그들을 복종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아무리 노둔함을 채찍질하여 조금이라도 직분을 수행하려 한들 되겠습니까? 신은 종전부터 입은 은혜가 하늘처럼 끝없었으므로 감히 한 마디의 말이 효과가 없었다 하여 결국 스스로 벗어나려는 것도 아니며 또 감히 주는 벼슬을 기어이 사양함으로써 헛된 이름을 크게 내려는 것도 아닙니다. 두려운 것은 실패한 이 몸이 일을 한 번 그르친데다가 재차 그르친다면 조정에서 명령을 받은 안사(按事)의 위엄과 권위가 그만 가벼워져서 나라에 해를 입히게 될까 해서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이러한 심중을 헤아려 주시어 앞서 청한 것을 윤허하시고 지체와 명망으로 보아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돌려줌으로써 서쪽 지방에 대한 근심을 푸는 동시에 명령을 어기고 태만한 신의 죄를 다스려 나라의 기강을 엄숙히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전번에 내린 비답에서 이미 자세히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또 이와 같이 거듭 아뢰는가? 끌어다 말한 호남에 관한 문제는 처분할 것이니 거기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지금 면유하려 하니 즉시 대궐로 나아오라."
하였다.

 

각도(各道) 관찰사(觀察使)를 소견(召見)하였다. 【전라남도 관찰사(全羅南道觀察使) 조종필(趙鍾弼),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이도재(李道宰), 충청북도 관찰사(忠淸北道觀察使) 윤용식(尹容植),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 윤상연(尹相衍),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윤길구(尹吉求),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주석면(朱錫冕)이다.】  사폐(辭陛)를 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신식(新式)으로 개혁한 후 관찰사들을 불러다 만나 보는 것은 지금 처음 있는 일이다. 풍속을 관찰하는 일은 옛날에도 중요치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현재 백성들이 살아가기가 그전보다 더욱 곤란하기 때문에 관찰사를 선발하는 것을 더욱 신중히 하였으며, 따라서 소견하여 이 자리에서 면유하는 것이다. 경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참된 마음으로 다스림으로써 실효를 거두기 바란다."
하니, 이도재(李道宰)가 아뢰기를,
"개혁 이후로 관찰사의 권한이 줄어들어 그전날의 부윤(府尹)보다 훨씬 못합니다. 또 장계(狀啓)를 올리는 규례가 없어졌으므로 상하의 실정을 소통시키기 어렵게 되었으니 변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찰사가 만약 장계를 직접 올린다면 내부(內部)의 권한에 방해될 것 같으니, 이것도 어려운 일이다. 듣건대, 다른 나라에서는 개화한 이후로 신식(新式)과 구식(舊式)을 참작하여 적당히 쓴 전례도 있다고 한다."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다른 나라의 전례에 대해서는 신이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옛 규례대로 좋은 것은 백대를 내려가면서 계승하는 것이 옳습니다. 혹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기게 되어 변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적당히 참작하여 덜고 보태어 나라에 이롭고 백성들에게 편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주(全州)의 능(陵)을 봉심(奉審)하고 온 신하에게서 들으니, 요즘 지방의 도에서 모든 것이 그전에 비하여 규모가 잡혀간다고 한다."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갑오년(1894) 이전에는 감영(監營)과 고을의 권한이 너무도 커서 그것으로 위세를 부리며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개혁한 초기 그것에 경계하는 것이 너무도 심해 권한을 아주 줄였습니다. 지금은 전혀 위세가 없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데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정부(議政府)에서 응당 변통이 있어야 하겠다. 그전에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겸임이 있었고 또 속오군(束伍軍)도 있었는데 지금은 군사에 관한 권한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관찰사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수령(守令)도 병부(兵符)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관찰사나 수령이나 모두 군사에 관한 권한이 없으므로 이른바 군수라는 ‘수(守)’자는 참으로 의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청(淸) 나라 비적(匪賊)들이 저러하니 서쪽 지방의 근심이 크다. 군사를 모집하고 준비를 갖추는 일에 대해서 특별히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신은 서생(書生)으로서 본래 군정(軍政)에 어둡습니다. 어떻게 감히 무거운 기대를 감당해 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바로 부장(副將)이다. 사령(司令)의 임무까지 겸해 가진다면 군사를 모집하기가 쉬울 듯하다."
하니, 윤상연(尹相衍)이 아뢰기를,
"북도(北道)뿐만 아니라 남도(南道)에도 청나라 비적의 소동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양(平壤)의 외성(外城)에 외국 사람들이 거주하지 못하게 하라. 모쪼록 조치를 잘 취하여 기자(箕子)의 유적이 조금이라도 없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군사를 뽑는 절차는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한(漢) 나라 조충국(趙充國)이 말하기를, ‘금성(金城)에 가서야 방책을 올리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도 서쪽 지방의 형편에 어두우므로 감히 바로 대답을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설하는 부대가 미처 군사의 면모를 이루기 전에 연변(沿邊) 각군(各郡)의 산포수(山砲手)들을 모집하여 대오를 편성함으로써 사전에 대비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계(江界)의 산포수는 쓸만 하다고 하였는데 갑오년 이후로 혁파하였는가, 아닌가?"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갑오년 이전에는 변경의 군에 각각 포수 부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지된 지 이미 오랩니다. 대체로 서쪽 변경은 풍속이 억세고 용맹스러우므로 방법이 있게 지휘한다면 강한 부대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한편으로 신설 부대를 설치하고 한편으로 토착 부대를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토착 부대를 모집하는 것이 과연 변경을 방어하는 좋은 계책이긴 하지만 군비를 조달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울에서부터 조치가 있을 것이지만 북관(北關)의 일도 염려된다."
하니, 조종필(趙鍾弼)이 아뢰기를,
"삼남(三南)도 또한 뱃길이 있으므로 미리 방비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주(全州), 안동(安東), 광주(光州), 대구(大邱), 고성(固城)은 모두 요해지이다. 울산(蔚山), 운봉(雲峰)도 모두 요해지이다."
하니, 조종필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계를 개척한 것이 과연 어느 해였던가? 후창(厚昌), 자성(慈城) 등지에 고을을 설치할 때에 정주응(鄭周應)이 순변사(巡邊使)로서 내려 갔었다."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후창은 비록 개척되었다고는 하나 황무지가 아직도 있고 민호(民戶)도 적으므로 갑자기 규모를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텅 비워놓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건너편 백성들을 되도록 위로하여 오게 하는 것이 모여서 안착되게 하는 방도이다."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북도에도 이러한 일이 있습니다. 그전에 그들을 호적에 올리고 조세를 받으려 하다가 민심만 소란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갑자기 불러모이게 한다면 아마도 소란해질 것이니 신의 옅은 생각으로는 아직 천천히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서쪽 지방에도 역시 있다고 한다. 유인석(柳麟錫)은 이미 죄를 용서하여 주었고 현재 저쪽 땅에서 산다고 한다."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신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쪽 땅에 붙어사는 백성들도 반역하려는 마음은 없으며 지방 관리들의 탐욕스럽고 포악한 정사에 견디지 못하여 부득이 다른 지경으로 넘어간 것이니 어찌 하고 싶어서 한 노릇이겠습니까? 지금 그들 친척의 분묘(墳墓)도 모두 본 경내에 있으니 만약 법을 만들어 돌보아주고 은혜와 신의로 집결한다면 거의 돌아와서 모일 가망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변(寧邊)은 변경까지 비록 멀기는 하지만 반드시 돌아다니며 살펴보아야 한다."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요즘 세월에는 관찰사가 마땅히 가끔 변경을 순찰하여야 하며 압록강(鴨綠江) 연변의 수령들도 반드시 문무를 겸비한 사람을 골라서 배치해야만 변방을 방어할 수 있고 또한 백성들을 위로하여 돌아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비적들에 대해서 응당 방어를 잘해야 하겠지만 만약 청나라 양민들이 병란(兵亂)을 피하여 넘어온 자들에 대해서는 장차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이 일은 매우 처리하기 어렵습니다. 저 나라의 양민이 만약 병란을 피하여 온다면 이웃 나라와 가까이 지내던 우의를 끊을 수는 없으나 제멋대로 내륙 지대를 다니도록 내버려두고 단속하지 않는다면 무리를 지어가지고 말썽을 일으키는 사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요컨대 대책을 잘 세워서 살 길을 잃지 않게 하여야 문란한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심양 총독(瀋陽總督)에게 조회(照會)하여 백성들을 놓아서 건너오지 못하게 하되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자들이 있을 경우에는 마땅히 군사로써 쫓겠다는 내용으로 통문(通文)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외부에서 저들의 지방 관청에 조회해서 미리 방지하도록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책일 듯합니다."
하고, 윤길구(尹吉求)가 아뢰기를,
"청나라의 피난민은 비단 육지로 나오는 것만 염려되는 것이 아닙니다. 황해도(黃海道) 바닷가의 여러 고을에도 뱃길로 오는 자들이 어찌 없겠습니까? 이것도 미리 참작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내려 가거든 마음을 다하여 제대로 왕명을 받들어 행하라."
하였다.

 

8월 2일 양력

원수부 회계국 총장(元帥府會計局總長) 육군 부장(陸軍副將) 민영환(閔泳煥)에게 헌병대 사령관(憲兵隊司令官)을 겸임하도록 명하였다.

 

8월 3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심순택(沈舜澤)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가뭄과 무더위에 여행길이 매우 곤란했을 터인데 어떻게 올라왔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별일 없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신이 시골 집에서 병으로 지체하고 있는 동안 천릉(遷陵)과 산릉(山陵) 두 도감(都監)의 총호사(總護使)로 임명한다는 명을 받았으며 곧이어 공주 군수(公州郡守) 심건택(沈健澤)이 와서 한 폭의 별유(別諭)를 전하였으니 신이 목석(木石)이 아닌 이상 어찌 감격하지 않았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명성 황후(明成皇后)를 장사 지내는 일에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장마 길이라지만 즉시 떠나 많은 고생을 겪으면서 5일날 도착하였습니다. 피곤이 몰린 것을 수습할 수 없어서 7일에 지낸 경효전(景孝殿) 별다례(別茶禮)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하여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이러한 신하로서는 참으로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억지로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었으며 칙서를 받고 연석(筵席)에 나오게 되었으니 노쇠하여 흐리멍덩해 있는 꼴을 황상(皇上)도 직접 보았습니다. 이러한 현재 상태로서 어떻게 국가의 일을 맡아보겠습니까? 비록 분주하지 않은 직책이라 해도 사무가 많고 문서가 번잡합니다. 일보는 사람들을 평정하고 장공인(匠工人)들을 감동(監董)하고 신칙하는 데는 설사 해당 당상(堂上官)이 있어서 힘을 다한다 하더라도 사실은 모두가 도제조(都提調)의 책임이니 무슨 정력으로 구관(句管)할 수 있겠습니까? 일찌감치 변통하여 나라의 중대한 예식을 온전히 치르기를 바라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호사의 임무는 분주한 일이 아니고 통솔할 뿐이므로 노련한 경의 힘을 빌고자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능소(陵所)를 정하지 못하여 다시 살피는 문제는 앞서 이미 초벌로 여러 곳을 살펴본 데가 있으니 널리 찾을 필요가 없이 합당한 두 세 곳에서 자리를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신은 천한 몸을 아껴서 널리 살펴보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큰 역사(役事)가 다가 오는데 쓸데없이 드는 비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지관(相地官)에 대해 말한다면 풍수 술법이 신통한 사람을 고르되 만약 너무 많게 되면 중론이 분분하여 취사선택이 어렵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쓸데없이 드는 비용도 그렇기는 하다. 상지관은 총호사가 선택하여 차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은 오랫동안 시골 집에 있었으므로 지사의 이름도 모르고 누가 나은지도 모르며 또 신과 같이 풍수학(風水學)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지사를 고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저 깊이 헤아려서 하기에 달렸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특별히 조령(詔令)을 내리신 것을 보고 모두들 ‘거룩하시다. 왕의 말씀이여!’라고 하면서 서울과 지방의 여론이 다같이 기뻐서 춤추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백성들을 갓난 아이처럼 보호하는 폐하의 은혜가 온 세상에 흡족합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이번에 실제로 시행하는 것이 급선무가 됩니다. 상벌(賞罰)이 분명해지고 법과 기강이 바르게 되는 것은 실로 어떻게 실행하는가에 달려 있지, 조서를 내리는 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백 마디 빈 말이 한 가지를 실행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깊이 생각하여 오늘 한 가지 문제를 실행하고 내일 한 가지 문제를 실행하여 인의(仁義)를 점차 닦아 나간다면 자연히 황극(皇極)으로 돌아가게 되어 억만 년 한량없는 경사를 이제부터 누리게 될 것입니다. 노신(老臣)은 나랏일을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구구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 이에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문을 듣고 매우 놀라서 이와 같은 처분이 있었던 것이다. 경이 또 이처럼 간절히 아뢰니, 모쪼록 더욱 도와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귀인(貴人) 엄씨(嚴氏)를 순빈(淳嬪)으로 삼고 궁인(宮人) 이씨(李氏)를 소의(昭儀)로 책봉할 것을 명하였다.

 

종정원 경(宗正院卿)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이 아뢰기를,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팔고조도(八高祖圖)》를 이정(釐正)하는 일을 가지고 본원(本院)의 제21호 주본(奏本)에 대해 판하(判下)한 대로 본원의 낭청(郞廳)을 보내어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장례원 당상(掌隷院堂上)에게 수의(收議)하였습니다.
봉조하(奉朝賀) 김병국(金炳國), 송근수(宋近洙), 특진관(特進官) 심순택(沈舜澤), 조병세(趙秉世)는 모두 병으로 의견을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선원보략(璿源譜略)》에 《팔고조도》를 싣는 것은 선계(璿系)의 출신을 상세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열성조(列聖朝)를 거치면서 수정하였으므로 응당 미비한 점이 없겠으나 원종 대왕의 《팔고조도》 안에 외계(外系)에 대해서는 두 가지 뜻이 있으며, 종신(宗臣)이 건의한 것도 이에 대한 물음을 받들어 논의한 것입니다. 예의는 나라의 체통과 관계되므로 더없이 조심하여 살펴야 하는 것인데 신은 원래 아는 것이 적은 데다가 요즘은 또 병들고 혼미하여 감히 자기 주장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만 열성조의 전범(典範)을 널리 상고하여 이와 유사한 사실을 찾아가지고 맞추어 보고 바로잡는다면 아마도 잘못이 적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진종 대왕(眞宗大王)의 춘추는 실로 정순 왕후(貞純王后)보다 앞섰는데 존호를 올릴 때는 정순 왕후에게 품명(稟命)하였으니 사체가 우연히도 원종이 인목 왕후(仁穆王后)에 대한 관계와 같게 되었습니다. 진종의 외가 계통을 정성 왕후(貞聖王后)로 쓴 것에는 선조(先朝)의 깊은 뜻이 있으며 후대 임금의 계승하는 도리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원종 대왕 《팔고조도》의 외가 계통을 의인 왕후(懿仁王后)로 게재하는 것은 적당치 않을 듯합니다. 어리석은 견해가 이와 같으나 끝내 스스로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널리 물어서 잘 헤아려 결정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조정희(趙定熙), 소경(少卿) 심상황(沈相璜)이 올린 의견은 의정(議政)의 의견과 대략 같습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裁決)하시기를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대신(大臣)과 장례원 당상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8월 4일 양력

완평군(完平君) 이승응(李昇應)을 소견(召見)하였다. 헌릉(獻陵)에 작헌례(酌獻禮)를 섭행(攝行)하고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홍종우(洪鍾宇)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금 이웃 나라에서 방비를 잘못하여 그 화가 퍼져서 서쪽 변경에 미치고 있습니다. 지난 날 내린 조서(詔書)를 보니 폐하께서는 밤낮으로 나라의 형편이 위태롭고 당면한 근심이 눈 앞에 가득한 것을 걱정하지 않는 적이 없어서 이것을 온 나라에 알려 주어 각자가 정신차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신하치고 누가 감히 두려워하면서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보답하는 방도는 바로 각자 맡은 직분을 다하는데 있을 뿐입니다. 대체로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얻는 것은 현직에 있는 대신(大臣)의 책임이며 공정한가 사사로운가에 따라 득실(得失)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법부 대신(法部大臣) 대리 민종묵(閔鍾默)은 나이도 많고 벼슬도 높으며 전후에 걸쳐 벼슬한 것이 모두 요직이었는데, 아직까지 한 명의 어진 사람을 등용했거나 한 가지 공훈을 세워서 산같이 무거운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러면서도 오히려 밖으로 깊이 생각한다고 핑계대고 속으로는 벼슬자리만 탐내어 일에 맞닥쳐서는 머뭇거리기만 하고 두각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임금을 날마다 도울 것으로 생각하는 미덕이 아닌 듯합니다.
또한 외도(外道)의 부(府)와 항구의 검사시보(檢事試補)를 임명하는 데 대한 주본(奏本)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사정(私情)을 쓰는 데만 급급해서 단지 해당 부의 한두 사람과 더불어 제 집에서 제멋대로 꾸며 내어가지고는 올린 글에 대한 임금의 처분이라고 핑계함으로써 여론이 떠들썩하게 하여 도리어 명철한 성상의 덕을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더구나 처음 벼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차례를 뛰어 넘어 주임관(奏任官)으로 임명한 것은 관리를 임명하는 격식에 크게 어긋나는데도 어찌하여 이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평리원 판사(平理院判事) 및 한성부 재판소 판검사시보(漢城府裁判所判檢事試補)를 임명하는 것과 관련해 아뢴 것으로 말하자면, 비록 그 사람의 재능으로 보아 그 임무에 맞는다 하더라도 사람을 법부에 쓰는 것은 딴 곳에 비하여 매우 다릅니다. 만약 사체를 신중히 고려하였더라면 어떻게 신이 보잘 것 없다 하여 치지도외하며 한 번의 질의도 해보지 않은 채 선뜻 임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앞으로 일에 부닥쳐 혹시 그르치는 일이 있게 되면 이것은 신의 어리석은 의견을 더욱더 해명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니, 한 번의 행동에서 사사로운 편에 치우친 것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때에 대신(大臣)의 직분이 과연 이와 같단 말입니까? 의정부(議政府)에서 곧 규탄이 있어야 하겠는데도 귀를 기울여 들어봐도 마치 입을 봉한 듯이 잠잠하니 이것이 어찌 폐하의 뜻에 대답하고 조칙을 받드는 도리이겠습니까? 각부(各部)의 대신들로 하여금 민종묵의 소행을 경계하게 하지 않아 민종묵이 하는 대로 하게 한다면 재능과 덕행을 보고 인재를 등용하는 날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바야흐로 허물을 반성하고 있으므로 감히 장황하게 말할 수 없지만, 여름 장마철에 찌는듯 무덥고 답답한데 옥안(獄案)이 많이 지체되고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아 주지 못하고 있으니, 죄지은 것은 헤아려 보면 중한 견책으로도 속죄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속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신의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관리를 임명하는 방법이 어찌 이 지경으로 난잡한가? 매우 놀랍고도 한스러운 일이니, 처분할 것이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에게 별유(別諭)하기를,
"듣건대 경이 성 밖으로 나갔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였는가? 정말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다. 혹시 사람들의 말 때문에 이와 같은 지나친 행동을 한 것이 아닌가? 경은 노숙한 사람으로서 나라를 생각하여 벼슬자리에 앉아 쇠퇴해지는 풍속을 안정시켰으니 어찌 나 한 사람만이 의지하고 믿어온 것이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조야(朝野)에서 모두 보고 들은 것이다. 경과 같은 아량과 큰 도량으로서는 응당 이러한 것을 마음속에 두지는 않을 것이다. 경은 즉시 집으로 돌아와서 짐이 기대하는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이때에 전권공사(全權公使) 유기환(兪箕煥)이 윤용선(尹容善), 조병식(趙秉式), 이건하(李乾夏), 권재형(權在衡)에 대하여 상소를 올려 탄핵하였는데, 원래의 상소문은 비서원(祕書院)에서 명을 받고 기각시켰다.】


【원본】 44책 40권 72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72면
【분류】인사-관리(管理)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처럼 어렵고 근심스러운 때에 응당 서로 믿고 공경하면서 나랏일을 함께 도와야 하겠는데 한 통의 상소문을 함부로 올려 풍파를 갑자기 일으킴으로써 의정(議政)이 달아나게까지 하였으니 조정의 꼴이 소란스러워지고 그지없이 놀랍고 한스러워서 차라리 말하고 싶지도 않다. 전권공사(全權公使) 유기환(兪箕煥)은 법부(法部)로 하여금 5년 동안 유배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일전에 법부의 주본(奏本)에는 많은 착오가 있다. 이미 결재하여 내려보냈다 하여 내버려두고 따지지 않을 수 없으니 원래의 주본은 시행하지 말라. 법부 서리 대신(法部署理大臣) 민종묵(閔鍾默)이 관리들을 임면(任免)할 때에 진실로 공정하게 하고 사정(私情)을 쓰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본관(本官)을 파면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종1품 조병직(趙秉稷)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에, 육군 부장(陸軍副將) 이윤용(李允用)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장례원 경(掌禮院卿) 조정희(趙定熙)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 이주영(李胄榮)을 장례원 경으로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3등 감독 이건영(李健榮)을 군부 경리국장(軍部經理局長)에 보임하였다.

 

8월 5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은 이미 천명(天命)을 받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여러 아들을 책봉하여 황실을 굳건히 하는 것은 만 대를 내려온 떳떳한 법이다. 둘째 황자(皇子)와 셋째 황자를 왕으로 책봉하는 의절(儀節)에 대하여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전례(典禮)를 상고하여 택일(擇日)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헌릉(獻陵) 작헌례(酌獻禮) 때의 헌관(獻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대축(大祝) 이순범(李舜範)은 가자(加資)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에게 재차 유시(諭示)하기를,
"경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은 이미 지나친 것이고 짐(朕)이 반복하여 깨우쳐 준 것도 또한 남김없이 모두 말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서로 믿는 처지에 마땅히 짐의 마음을 헤아림이 있어야 하는데 마치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리는 사람과 같이 글을 보내온 경우는 보지 못하였으니 짐이 의도한 바가 아닐 뿐 아니라 경으로서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될 듯하다. 사람들이 말한 것은 원래 허튼 말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을 마음속에 둘 필요는 없으며 또 이미 그 죄를 따졌으니 경은 다시 제기하지 말고 즉시 집으로 돌아와 간절히 기다리는 짐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궁내부 대신 서리협판(宮內府大臣署理協辦) 윤정구(尹定求)가 아뢰기를,
"방금 함경남도 관찰사(咸鏡南道觀察使) 김종한(金宗漢)의 보고서를 받아 보니, ‘지릉(智陵), 의릉(義陵), 준원전(濬源殿)을 수리하는 일이 끝났다고 방금 보고하였고, 함흥(咸興), 영흥(永興)의 두 본궁(本宮)을 수리하는 공사도 지금 차례로 끝났으니, 이것은 드물게 있는 일입니다. 일을 감동(監董)한 지방관, 차비관(差備官) 및 감색(監色) 이하의 공로가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마땅히 은의(恩意)를 보이는 행사가 있어야 하겠으니 시상하는 일에 대해서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장공(匠工)에게 시상하는 것도 그만두어서는 안 될 듯하나 또한 은전(恩典)과 관계되는 문제이기에 모두 함부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은혜로운 명을 내려 그들에게 표창하는 은전을 베풀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다섯 곳에 일을 시작한 것이 동시에 새롭게 되었으니 감동한 관리 이하 원역(員役), 공장(工匠)들에게 은의를 보이는 거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은전과 관계되는 일이어서 본부(本府)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裁決)을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감동한 관리 이하의 별단(別單)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작성하여 올리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8월 6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에게 세 번째로 유시(諭示)하기를,
"짐(朕)이 이미 두 번에 걸쳐 말하고도 반복하여 그렇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고 변론한 것은 경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였는데 갈수록 더욱 고집하고 있으니, 경의 의향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 경이 지난 날에 설사 곤란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이처럼 당치않은 행동을 하는가? 짐의 말이 간절할 뿐만 아니라 경과 같이 노숙하여 나라를 간절히 생각하는 충성으로서는 마땅히 지금의 황급한 나라 형편을 생각하고 한결같이 지금의 난국을 수습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이고 태평스럽고 한가하게 지내기를 마치 일없는 평상시처럼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짐이 시각을 다투어 경을 기다리는 까닭에 대해서는 경도 반드시 근심하고 고민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으니 경은 묵묵히 이해하고 속히 집에 돌아옴으로써 번거롭게 글을 주고받게 하지 말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주영(李胄榮)이 아뢰기를,
"이번에 친왕(親王)을 책봉(冊封)할 때에 봉호(封號)를 마땅히 의정(議定)하여야 할 것이며 세 번째 황자(皇子)의 이름을 정하는 것도 기일 전에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음력 7월 14일로 날을 잡아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조병식(趙秉式)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전권공사(全權公使) 유기환(兪箕煥)의 상소를 보니 종이에 한 가득 나열한 것이 다만 허공에 시렁을 매거나 허공을 뚫는 것과 같아서 신이 구태여 수다스럽게 논박하지도 않겠습니다. 호서(湖西)에서 사람을 해쳤다는 것과 북쪽 변경에서 소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애초에 끌어다 댈 건덕지가 없는 말입니다. 청(淸) 나라에 물어주어야 할 한 가지 문제는 몇 해 전에 있었던 일이었고 폐하께서도 명백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탁지부의 관원을 석방하는 문제와 경부(警部)의 빚 장부에 대한 문제는 더욱더 횡설수설한 것이 됩니다. 석방하는 문제는 법부(法部)에 권한이 있는 것이고 빚 장부는 애초에 공적인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허구날조하는 데 급급하였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처럼 신의가 없습니까? 다만 이것은 모두 신의 평상시 행동이 좋지 못하고 믿음을 보이지 못한 것과 관련되어 그렇게 된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신이 병들고 늙었으나 다만 은혜를 입은 것에 감동되어 보답하려는 생각으로 벼슬자리에 그냥 있다가 간서(簡書)를 거듭 받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신이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누구를 또 원망하겠습니까? 첫째도 신의 죄이고 둘째도 신의 죄이므로 자책하는 뜻으로 고충의 내막을 다시 진술하는 바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빨리 신을 내쫓고 신의 죄를 다스림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엄숙히 하고 동료들을 깨우쳐주시옵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말이 부당하고 원래 마음에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제반 사무가 쌓여 있어 하루가 급하니 경의 노숙한 견해로서 마땅히 이에 대하여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며, 짐이 경에게 권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시는 제기하지 말고 곧 나와서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재능도 없이 외람되게도 중임(重任)에 있으면서 아직까지 한 명의 어진이를 내세운 것도 없고 한 가지 폐단도 고친 것이 없었으며, 또 한 가지 일도 처리하지 못하고 한 가지 계책도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른 것은 사실 신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니 어찌 감히 장황하게 변명하겠습니까? 성 밖에 나가 엎드려 있으면서 형벌이 내리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에게는 통분하고 한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신은 대대로 국은(國恩)을 입었고 40년 가까이 폐하를 섬겨오면서 두터운 사랑은 지극하여 하늘처럼 끝이 없으므로 조금이나마 보답하려는 생각에서 밤낮 마음속으로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천성이 거칠고 재능과 지혜가 졸렬하여 한갖 벼슬자리와 녹봉만 차지하면서 한 가지도 도움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늘그막에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전혀 생각지 않고 높은 자리를 과분하게 차지하였다는 비방을 스스로 초래한 결과 그만 백수(白首)로 천명을 다한 나이에 천지 간에 용납될 수 없고 신하로서 참을 수 없는 거짓말과 모함을 당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 성상께서 위에서 보시고 동료들은 아래에서 보며 관리 임명의 명단은 나라의 문서에 명백히 있어서 혹시라도 사정을 썼다면 털끝만한 것도 밝힐 수 있기는 하나 몸과 이름이 이미 더럽혀졌으므로 목욕을 한다 해서 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돌이켜보면 부끄럽고 슬프기만 하여 살고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또한 신의 한 몸은 원래 걱정할 것도 못되는 것이지만 신이 주책없는 것으로 인하여 폐하의 덕에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춥지 않은데도 떨리며 만 번 죽음을 당한다 해도 오히려 죄가 남습니다. 신이 처분을 기다리는 처지에서 어찌 감히 외람되게 장황한 호소를 하겠습니까마는 맡고 있는 직책이 잠시라도 비워 둘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처럼 감히 단장(短章)을 서둘러 올려 존엄한 폐하를 번독스럽게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신의 내부 대신(內部大臣)의 직함을 속히 체차(遞差)하고 이어 신을 응당 감처(勘處)해야 할 형률에 둠으로써 사람들의 말을 끊고 나랏일을 다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람들의 말이 실로 근거가 없으므로 경이 스스로 생각해 보면 또한 개의할 것이 없을 것이다. 또 법부의 사무가 많이 지체되어 잠시라도 비워 둘 수 없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고 즉시 나와서 일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권재형(權在衡)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의 지위와 녹봉이 자신에게는 재앙으로 되어서 걸핏하면 비방을 받게 됩니다. 때문에 스스로 반성하기에 급급하여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전권공사 유기환이 상소한 글을 보니 의정부(議政府)의 여러 신하들에 대하여 규탄하였는데 거의 모두 근거가 없고 신에 대해서 말하기를, ‘형편을 보아가며 잇속만 차리며 설사 적의 무리라 해도 세력이 있으면 아부하고 아무리 충직한 사람이라 해도 자기에게 이롭지 않으면 배척합니다. 심지어 역적인 안경수(安駉壽)가 스스로 나타났을 때에도 대청에서 내려가 비위를 맞추어 주면서 보석(保釋)함으로써 인정을 썼으니 이것이 무슨 심보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선악과 사정(邪正)의 구분에 대해서는 대략 알고 있었으며 오직 군자(君子)의 부류가 되려고 하였지 소인(小人)이 되려고는 원치 않았습니다. 벼슬길에 나서서는 공정하고 청렴하다는 이름만 바랐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계책은 소홀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가정에는 쓸만한 물건이 없었고 집은 스산하였으니 그가 말한 것처럼 형편을 보아가며 잇속만 차리는 자가 과연 이와 같겠습니까? 세력 있는 적의 무리로서 신의 아부를 받아준 자가 누구이며 충직한 사람으로서 신이 이롭지 않다 하여 배척을 받은 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또한 이른바 대청에서 내려가 비위를 맞추어 주면서 보석해 줌으로써 인정 쓴 것을 본 자는 누구란 말입니까?
지난번 두 차례의 비답에서 모두 이미 여지없이 밝혔는데도 그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자진하여 시골의 무식한 자들과 함께 몽매한 짓을 하였으니 참으로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원래 타고난 성질이 조급하고 마음가짐이 비루하여 세력을 믿고 틈을 엿볼 계책으로 이처럼 일망타진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도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필이면 거짓말을 날조하는 것으로써 출세하는 다리로 삼겠습니까? 지금 유형(流刑)에 처하라는 조서(詔書)가 내린 상황에서 신이 감히 법부에 곧장 가서 당장 재판할 것을 청할 수 없으므로 감히 짧은 글로 심정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는 조정을 순결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풍속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신을 법부에 회부하여 그와 한 자리 대질시켜 주십시오. 그리하여 과연 신에게 죄가 있다면 벌을 받아야 할 것이고 만약 관계한 사실이 없다면 해탈되어야 할 것이니, 공사 간에 이보다 더 다행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청한 대로 시행하되, 배소(配所)로 보내기 전에 해야 할 것이다. 현직으로 말하자면 실로 특별히 주는 것이니 경도 짐이 경의 마음을 알고 있는 내막에 대하여 알 터인데 어찌 갑자기 사임하겠다고 말하는가?"
하였다.

 

법부 협판(法部協辦) 이근호(李根澔)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8월 7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을 네 번째로 칙유(勅諭)하였다.

 

육군 부장(陸軍副將) 조동윤(趙東潤)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조병식(趙秉式)을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으며, 일본국(日本國)에 주재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탁지부 재무관(度支部財務官) 이준상(李濬相)을 탁지부 회계국장(度支部會計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주영(李胄榮)이 아뢰기를,
"친왕(親王)을 책봉(冊封)할 때에 혹은 금책(金冊)과 금인(金印)을 쓰기도 하고 혹은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쓰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금책과 금인으로 하되, 친림(親臨)하여 책배(冊拜)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책봉할 때에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 경효전(景孝殿)에 선고사유제(先告事由祭)를 설행해야 하는데 축문(祝文)은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되, 제문(祭文)은 친히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책봉한 다음날에 황태자(皇太子)가 치사(致詞)를 올리고 백관(百官)이 표문(表文)을 올려 진하(陳賀)하는 예식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규례대로 친림하는 것으로 마련합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친림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8월 8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에게 다섯 번째로 칙유(勅諭)하였다.

 

궁내부 대신 서리협판(宮內府大臣署理協辦) 윤정구(尹定求)가 아뢰기를,
"셋째 황자(皇子)의 정명 단자(定名單子)에 ‘은(垠)’ 자와 ‘우(圩)’ 자로 비망(備望)하여 써서 들인다는 내용으로 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은’ 자로 하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서리 탁지부 대신(議政府議政署理度支部大臣) 조병식(趙秉式)이, ‘신들이 칙지를 받들고 둘째 황자(皇子) 의화군(義和君)의 친왕(親王) 봉호 망단자(封號望單子)를 ‘의(義)’ 자와 ‘정(靖)’ 자로 셋째 황자의 친왕봉호 망단자를 ‘영(英)’ 자와 ‘경(敬)’ 자로 의정(議定)하여 들입니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둘째 황자 의화군의 봉호에는 ‘의(義)’ 자를 쓰고 셋째 황자의 봉호에는 ‘영(英)’ 자를 쓸 것이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의왕(義王)에게 금책(金冊)을 주는 일은 조정에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거행하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주영(李胄榮)이 아뢰기를,
"친왕(親王)을 책봉(冊封)하는 의절(儀節)을 마련하여야 하는데, 삼가 역대의 전례(典禮)를 상고하여 보니 친왕의 나이가 어리면 관리를 보내어 명령을 전하고 금책(金冊)과 금인(金印)을 왕궁(王宮)으로 보내도록 한 다음 이어 명령을 전하고 금책과 금인을 수여하였습니다. 영왕(英王)은 나이 어리므로 지금 또한 이에 따라 거행하되 금책과 금인을 받을 때에 전례대로 쌍동고(雙童䯻), 공정책(空頂幘), 칠장복(七章服) 차림으로 의식을 행하도록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정1품 이호준(李鎬俊)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영왕(英王)을 책봉(冊封)할 때의 정사(正使)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외부 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포달(布達) 제60호, 〈궁내부의 관제 중 황태자비 궁 아래에 친왕부를 증치(增置)하는 일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皇太子妃宮下增置親王件〕〉, 【부(府)의 사무 및 소관 회계를 맡는다. 영(令)은 1인(人) 주임관(奏任官)이 맡고, 전위(典衛)는 2인으로 판임관(判任官)이 맡는다.】  포달 제61호, 〈시종원 승봉 2인(人)을 증치하는 일에 관한 안건〔侍從院承奉二人增置件〕〉을 모두 반포하였다.

 

외부 참서관(外部參書官) 박승봉(朴勝鳳)을 경흥감리 겸 경흥부윤(慶興監理兼慶興府尹)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외부 주사(外部主事) 황우영(黃祐永)에게 영사관(領事官)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8월 9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의 올린 상소의 대략에,
"고금의 사실을 차례로 상고해 봐도 어찌 신처럼 재화(災禍)를 당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원수처럼 미워하고 비방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그 형세가 신을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빠뜨린 다음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은 단지 고독하고 약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없던 두터운 은총을 남달리 입었으며 험악한 세월에 오랫동안 영의정(領議政)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이 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아도 높은 벼슬을 한 데서 재앙이 초래되었으니 폐하의 은덕을 저버린 죄를 속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매번 사람들의 말이 있을 때마다 문득 자신을 반성하곤 하였으나 이번에 유기환(兪箕煥)의 상소문이 발표되자 신의 죄는 더욱 이 세상에서 용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외에 나가 엎드려 죄 주기만 기다렸으나 성유(聖諭)가 여러 번 내려 자세히 위로하고 해명해 주었으니 신이 어떻게 줄곧 명령을 거역하기만 하여 과오를 거듭 범하는 죄를 지겠습니까? 다만 신이 늙고 쇠약한 몸으로 북쪽 길에 두 번 오르는 바람에 피곤이 몰려 병을 얻었고 큰 종기가 계속 나서 달포나 누워 앓았습니다. 그러니 전후 6개월 사이에 조정의 일을 오랫동안 비워두어 대리로 하게 하였으니 만약 신의 국량과 지혜가 참으로 소임을 감당할만하다 하더라도 원래 한 마디 말을 하고 한 가지 시책이나마 실현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신은 노둔하고 늙고 거친데다가 계속 여행과 질병 속에 있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돌아 보건대, 지금 이웃 나라에서 변란이 생겨 순망치한의 형세인데도 남의 일보듯 한다는 비방을 스스로 초래하고 있는데다 백성들이 시달리고 곤궁이 더욱 심한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다는 꾸중마저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신은 누워 앓으면서 일은 보지 못하고 다만 기별이 내려올 것을 기다리면서 나라를 근심하는 한 가지 마음만 가지고 안절부절 잠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조금이라도 유지할 대책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먼저 어진 사람을 골라서 맡겨야 하고 어진 사람을 골라서 맡기자면 반드시 신을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므로 정성을 다하여 사임을 청한 것이 두 번, 세 번인데도 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유기환이 신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고 규탄한 것은 혹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논한 문제들은 사람을 함정에 떨어뜨리는 데만 급급해서 말이 두서가 없습니다. 신이 그와 더불어 여러 말로 다투려고는 하지 않으나 하도 한심하여 또한 침묵만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외람되게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만큼 어떻게 저들의 이른바 협회(協會)에 대하여 엿보겠습니까? 신의 손자도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의로운 방도는 좀 지킬줄 아는 터에 어찌 결탁하고 부추김 받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머리가 허옇게 된 늘그막에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의탁하는 것을 운명으로 삼고 있는데 그만 신을 모해함으로써 그 여파가 손자까지 미쳤으니 그가 마음을 쓰고 계책을 꾸미는 것이 교활하고도 지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권세 있고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에게 빌붙는다고 한 데 대해서는 도리어 저도 모르는 가운데 한바탕 웃고 말았습니다. 신은 본래 성미가 졸렬하여 세상 사람들과 섞이는 일이 적었으며 오랫동안 있지 못할 벼슬자리에 있다 보니 권세 있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엇나간 것이 많아져서 마침내 비방이 날마다 좌우에서 일어나고 조소가 온 나라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폐하의 천지와 같은 덕과 일월 같은 총명이 아니었더라면 신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부지되었겠습니까? 그는 원래 벼슬하기 전에는 벼슬을 구하느라고 걱정하고 벼슬한 다음에는 벼슬을 떼일까봐 걱정하는 하나의 비루한 사내일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남들의 사주를 받으며 권세 있고 가까이 도는 사람들에게 의지하여서 이런 망녕되고 기탄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정말 말하자니 비루할 따름입니다.
오늘날 에 있어서 공사(公私)를 모두 이롭게 할 수 있는 계책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신이 물러가는 것뿐입니다. 신이 물러가게 되면 나랏일은 성스럽게 될 수 있고 조정의 형편이 분열될 우려도 없고 신 자신도 자연히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심정은 궁하고 말은 위축되어 죽을 죄만 더해집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빨리 신을 물리치는 동시에 나라를 저버리고 왕명을 태만한 신의 죄를 다스림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엄숙히 하고 사람들의 말에 사례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람들의 말은 허망할 뿐이다. 그 말이 이미 허망한 것이라면 서로 겨룰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미 죄 주었다면 또 다시 제기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짐(朕)이 말한 것을 듣고도 못들은 척하고 있으니, 경이 고집하고 있는 것만 옳고 짐은 경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을 강요하려고만 한다는 것인가? 너무도 개탄할 일이어서 다시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다."
하였다.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민병석(閔丙奭)에게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고, 원수부 회계국 총장(元帥府會計局總長) 민영환(閔泳煥)에게 표훈원 총재(表勳院總裁)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여러 번 간절하게 타일렀으나 한결같이 고집하고 있으니 의분(義分)으로 보아 진실로 개탄할 노릇이다. 이는 높은 관리라 하여 부당하게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에게 서용(敍用)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8월 10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전 의정(前議政) 윤용선(尹容善)을 서용(敍用)하고 다시 전 직임을 제수하라."
하였다.

 

8월 11일 양력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에게 칙유(勅諭)하기를,
"지난번 경이 여러 번 말을 듣지 않은 데 대해서는 또한 괴이적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전에 취한 거조는 사체(事體)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고 이틀도 되지 않아서 다시 이 직책을 주는 것은 짐이 경을 꼭 버리지 않으려고 해서이니 경은 이 뜻을 모른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굳게 사양해도 반드시 허락해주지 않을 것도 이해할 것이다. 앞서 한 말을 다시 하지 말고 곧 일어나 명에 응하여 밤낮으로 자리를 비워 놓고 기다리는 짐(朕)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이어서 재차 칙유하기를,
"군신이 서로 관계를 맺을 때에는 마치 신부(信符)가 서로 맞고 믿음과 보답이 서로 융합된 것과 같으므로 또한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할 수 있다. 하물며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고 간절히 말한 경우인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경은 기꺼이 마음을 돌려 딴 말이 없으리라고 여겼는데 막상 보내온 편지를 보고 나니 너무 놀라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결코 평상시에 경에게 기대하고 바라던 바가 아니다.
바야흐로 곤란한 일들이 눈앞에 가득하니 위험한 형세는 누란의 정도가 아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위태로워지는 것은 노숙하여 모두가 우러러 보는 대신(大臣)에게 달려 있는 만큼 만약 편안히 팔짱을 끼고 나랏일을 맡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경으로서 차마 할 일이 아니므로 반드시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조가 굳어 고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도 아주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서 필경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경의 의도를 짐은 이해할 수 없도다. 경의 오늘의 의리는 오로지 벼슬자리에 나오는데 있을 뿐이므로 이렇게 거듭 칙유하는 것이니 경은 깊이 이해하고 번잡하게 글을 올리지 말라."
하였다.

 

양지아문 부총재(量地衙門副總裁) 고영희(高永喜)를 탁지부 협판(度支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부령(副領) 김정근(金禎根)을 친위(親衛) 제1연대장(聯隊長)에 보임하였다.

 

비서원 경(祕書院卿) 윤덕영(尹德榮)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처신하는 것이 보잘것없고 살아가는 방도에도 어두워서 애초에 상관없는 일과 관련하여 문득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없는 것을 문제로 만들었으니 처지가 위태롭다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되고 변명하지 않을 것을 변명하였으므로 그들이 이러 저러하게 날조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이번에 유기환(兪箕煥)의 상소문이 발표되자 신의 충성스럽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죄가 여기에서 더욱 드러나서 천지 사이에 용납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또 그 중에 가장 원통하고 억울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신의 할아버지는 조정에서 벼슬을 한 이래로 처신이나 행사하는 데 있어서 모두 원칙이 있었고 전하를 섬기면서부터는 딴 생각이 없이 성실하였을 뿐이었으니, 어찌 한 가지 흠과 누(累)라도 있어서 틈을 엿보아 아부한다는 지목에 해당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보잘 것 없는 신 때문에 신의 할아버지에게 헤아릴 수 없는 모함이 씌워지게 되었으므로 이것이 신이 밤낮으로 가슴을 치면서 살고 싶지도 않은 까닭입니다.
신의 경우를 놓고 말하더라도 또한 당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보고 함께 아는 문제였습니다. 대체로 이른바 ‘협회(協會)’라는 것은 바로 하나의 불량한 무리들이 그에 의탁하여 변란을 선동한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인심을 가지고 있다면야 누가 즐겨 거기에 관계하여 옳지 않은 죄를 스스로 짓겠습니까? 다만 그 때에 관리와 백성이 동등한다는 핑계로 그 많은 조정 관리들이 숱한 위협과 구박을 받아 수도의 네 거리에서 욕을 보았으며 당당한 의정부(議政府)의 신하도 엎치락 뒤치락하는 창피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또 이른바 ‘총대(總代)’란 자를 억지로 시켜 혹은 의정부에 보내어 설명하기도 하고 혹은 각부(各部)에 보내어 요청해오기도 하였으니 그 또한 말하자면 가슴 아픈 일입니다. 신은 실로 나약하여 죽기 살기로 극력 모면하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억지로 남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결국은 그 무리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아 집이 허물어지는 화변을 당하게까지 되었습니다. 이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신이 이 회원에 대하여 아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심이 나빠서 말을 되는 대로 만들어내어 신이 스스로 자기 집을 허물었다고 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는 물론 한 번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으며 또한 구구하게 밝힐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비방하는 자들은 걸핏하면 구설수(口舌數)에 올리고 남을 헐뜯는 자는 이것으로 무함하니 신이 비록 암둔하고 미련하지만 어떻게 견디어 내겠습니까? 이번에 유기환이 올린 상소문에는 또한 위로 한 걸음 올라가서 신의 할아버지가 시킨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결탁하여 부추겼다고 함으로써 신을 충성스럽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죄과에 밀어 넣었습니다.
아! 그가 사람을 모함하려면 어찌 허구 날조할 말이 없을까 근심해서 몇 해 뒤에 와서 이렇게 이치에 어긋나고 실제에 가깝지 않는 말을 만들어 내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여 신의 죄가 더없이 엄중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도 망측한 것이니 신이 다시 무슨 낯으로 뻔뻔스럽게 모든 관리들의 말석에서 관복을 입고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심상하게 지내겠습니까? 신의 정세는 참으로 곤란하고도 위축되어 다만 물러가 엎드려서 자책하면서 엄한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현직으로 말하면 밤낮없이 가까이에서 기밀을 맡아보는 관청의 우두머리로서 이런 죄에 걸렸으므로 원래 하루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일 진전(眞殿)에 다례(茶禮)를 지낼 때에 배종(陪從)하여 참가하는 데 대한 칙서(飭書)를 받았으니 의분(義分)으로 보아 어찌 감히 위반하겠습니까? 정한 날짜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고집만 피울 수 없으므로 대략 실정을 드러내어 아뢰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는 아래 사정을 굽어 살피시어 신의 직명을 삭제하고 신의 죄를 다스림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엄숙히 하고 신의 본분을 편안하게 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이미 명백히 밝혀졌으니 이번에 말한 것도 허튼 소리이다. 어찌 반드시 혐의를 피할 필요가 있겠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8월 12일 양력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8월 13일 양력

종2품 육군 참장(陸軍參將) 김영준(金永準)을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조병식(趙秉式)이 상소하여 공사(公使)의 직책을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요즘 걸핏하면 사직 상소를 올리는 것이 하나의 풍습으로 되고 있다. 만약 형식적으로 사양하는 것이 아니면 이는 바로 회피하는 것이다. 경은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인데 어찌 이런 무리들의 행위를 본받겠는가? 경은 나이가 많기 때문에 염려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랏일을 해 나가는 것은 의로운 일이니 굳이 사양하지 말고 즉시 떠날 행장을 꾸려 위임한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8월 14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옛 사람이 ‘이 가슴 안에는 사람 수백 명을 용납할 수 있다.’라고 한 말을 경의 상소문에서 인용한 것은 참으로 사리에 맞았다. 대체로 의정부의 우두머리로 있으면 백 가지 책임이 집중되고 모든 관리들을 통솔해야 하므로 그 너그러운 도량이 이렇지 못하면 크게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이다. 경이 한 선한 말을 짐(朕)은 매우 좋게 생각한다. 짐이 경에 대해 의지하고 믿어 왔으며 서로 만난 정의가 살뜰하였다. 짐이 한 말에 대해서는 경이 언제나 마음속으로 긍정하고 옳게 여기지 않는 적이 없었고 경이 진술한 말에 대해서는 짐이 언제나 모두 받아들여서 시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후하여 가고오고 한 의견들이 모두 서로 어긋나고 있으니 매우 의심스럽고 답답하다. 돌이켜 보건대, 지금 위태로운 형세가 닥쳐와서 아침저녁으로 보전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은 항간의 뭇 백성들도 근심할 줄을 알고 있다. 경은 나라의 주석(柱石)으로서 나라가 안정되고 위태로워지는 것이 경에게 매였으니 어찌 사사로운 문제를 말할 겨를이 없이 급급하게 힘쓸 때가 아니겠는가? 또 경의 병은 한때 뜻 밖에 생긴 종기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도 점차 나아가고 있으니 합(閤)에 누워서 정사를 논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경이 아무리 날마다 계속 상소를 올린다 해도 결국 들어줄 리가 없으니 경은 그렇게 이해하고 즉시 일어나서 명에 응함으로써 편안히 앉아 있지 못하고 간절히 바라는 짐의 기대에 부응 하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에게 세 번째로 칙유(勅諭)하였다.

 

경무관(警務官) 임창호(任昶鎬)를 경부 회계국장(警部會計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敍任)하였다.

 

8월 15일 양력

산릉(山陵)을 재심(再審) 한 총호사(總護使)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총호사(總護使) 심순택(沈舜澤),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조정희(趙定熙), 궁내부 대신 서리(宮內府大臣署理) 윤정구(尹定求), 학부 대신(學部大臣) 김규홍(金奎弘),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 심상황(沈相璜), 상지관(相地官) 길영수(吉永洙)·제갈형(諸葛炯) 등이다.】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신들이 재차 간심(看審)한 다음 대령(待令)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알기 어려운 것이 묘소의 이치이다. 산줄기의 생김새와 혈처(穴處)를 보니 어떠하던가?"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산줄기의 생김새와 혈처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히 살펴 보았으나 무덤 자리의 이치를 잘 모르는 데다가 또 산을 모두 돌아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변론하겠습니까? 상등(上等), 중등(中等), 하등(下等)의 세 등급의 산에 대한 논의는 상지관(相地官)들이 써 올린 것이 있으므로 이미 보셨을 것이니 조항별로 하문(下問)하신다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동도(東道) 군장리(軍藏里)의 혈처는 평탄하고 원만하여 보기에 매우 좋습니다. 금곡(金谷)의 혈처는 얕고 비좁아서 다른 염려가 있을 것 같다고 하지만 산줄기의 생김새가 매우 좋고 형국을 이룬 모양이 꽉 짜여있습니다. 서도(西道)의 분수원(汾水院)은 문봉(文峯)의 겉모양이 매우 훌륭하지만 여러 사람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모두 이해할 수 없는 데다가 상지관이 논하는 것만 들었을 뿐이므로 황공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고, 길영수(吉永洙)가 아뢰기를,
"이번에 살펴 본 데 의하면 군장리는 혈처가 풍만한 것이 과연 큰 자리로 될 만 합니다. 또 금곡을 살펴보니, 뻗어내린 산줄기가 우뚝 서자 다음 줄기가 생겨났으며 혈처가 나지막하고 펑퍼짐한 것이 또한 큰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화접동(花蝶洞)은 주되는 산줄기가 네 방위의 산에 둘러싸여서 그 중 가운데에 큰 자리가 있을 듯하나 뻗어내린 뒷산 줄기가 대부분 모래 둔덕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과연 크게 쓰일 곳으로 되기 어려울 듯합니다. 분수원(汾水院)은 뒤에서 뻗어내려온 산줄기가 매듭을 지어 봉긋 솟았고 무덤 자리가 왼쪽, 오른쪽의 산줄기에 잘 쌓였으므로 큰 자리라 할만 합니다."
하고, 제갈형(諸葛炯)이 아뢰기를,
"이번에 재차 간심할 때에 일곱 곳 가운데서 양주(楊州) 금촌면(金村面) 군장리의 임방(壬方)을 등지고 앉은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이고 금곡의 을방(乙方)을 등지고 앉은 자리는 화접동의 술방(戌方)을 등지고 앉은 자리와 함께 다음으로 좋은 자리입니다. 파주(坡州) 분수원의 간방(艮方)을 등지고 앉은 자리도 매우 좋은 자리입니다. 그 밖의 것은 상지관들이 논의하여 보고한 것과 대략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 번째로 간심한 다음에 산릉에 대하여 의정(議定)할 것이며 총호사와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이하가 가서 간심하라."
하였다. 윤정구(尹定求)가 아뢰기를,
"강화(江華)의 정족산성(鼎足山城) 사고(史庫)에 있는 《인조실록(仁祖實錄)》 2책(冊)을 채워 넣는 문제는 속히 거행하라는 처분이 이미 있었습니다. 강릉(江陵), 무주(茂朱), 봉화(奉化) 세 곳의 사고 가운데서 어느 곳의 실록을 등서(謄書)해야 합니까? 신중한 문제이고 상고할 만한 전례가 없으니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차출하여 집행해야겠습니까? 겸장례(兼掌禮)와 비서원 낭(祕書院郎)을 보내어 집행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문관(藝文館)에서 자세히 상고하여 집행하라."
하였다. 윤정구가 아뢰기를,
"예문관에는 상고할 만한 사적(史蹟)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순조(純祖) 때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자세히 상고한 다음 다시 아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에게 네 번째로 칙유(勅諭)하기를,
"비답과 칙유로 이미 속에 품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하였으므로 환히 깨달으리라고 만 생각하였는데 사양하는 편지가 왔으니 더욱더 놀라와 참으로 뭐라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 경이 여러 날 버티는 것으로 말하면 경도 아래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다는 것을 알 것인데 그처럼 하고 있으니 이렇게 하는 것을 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짐이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제 경사스러운 의식이 다가오고 축하 의식이 가까워오고 있으니 경은 모쪼록 힘써 당일로 들어와서 명에 응하라. 짐은 난간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겠다."
하였다.

 

전보사장(電報司長) 이정래(李鼎來)를 공사관(公使館) 3등 참서관(參書官)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6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일본국(日本國)에 주재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덕원 감리(德源監理) 팽한주(彭翰周)를 평양 감리(平壤監理)에 임용하고 주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8월 16일 양력

종1품 정낙용(鄭洛鎔)과 종2품 민병승(閔丙承)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정낙용은 칙임관(勅任官) 1등, 민병승은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민병석(閔丙奭)에게 헌병대 사령관(憲兵隊司令官)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종1품 민종묵(閔鍾默), 정2품 이유인(李裕寅), 종2품 장봉환(張鳳煥)·이인영(李寅榮)은 모두 특별히 징계를 면제시켜 주었다.

 

일본인(日本人) 시부자와 에이치(澁澤榮一), 아사노 소이치로(淺野總一郞)의 광산 조합(鑛山組合)과 직산군(稷山郡) 금광(金鑛) 채굴에 대한 합동 조약이 체결되었다.

 

8월 17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황자(皇子)를 책봉(冊封)하였다. 이강(李堈)은 의왕(義王)으로 삼고 이은(李垠)은 영왕(英王)으로 삼았다. 반조문(頒詔文)에,
"봉천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마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옛날의 황제들이 천명(天命)을 받아 여러 아들을 책봉한 것은 자손을 융성하게 하고 나라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서였다. 지나간 시대를 죽 보더라도 모두 이 도(道)를 따랐었다. 짐(朕)은 천지 사이의 모든 신의 도움과 조종(祖宗) 신령의 도움을 받아 대위(大位)에 올랐으므로 가까운 신하들을 널리 들여 세우고 황실을 좌우에 있게 함으로써 나라의 만년 기초를 공고히 하려고 생각한다.
둘째 황자(皇子) 이강과 셋째 황자 이은은 모두 황제 가문의 귀중한 사람들로서 마땅히 높은 칭호를 주어야 한다. 그래서 예조(禮曹)의 신하에게 명하여 옛 제도를 널리 상고하여 종묘(宗廟)에 미리 고하고 좋은 날을 받아 음력 7월 23일에 이강은 의왕(義王)으로 봉하고 이은은 영왕(英王)으로 봉하였으며 금책(金冊)과 금인(金印), 칠장복(七章服)을 하사하였다. 이는 짐 한 사람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고 바로 천하의 공적인 일이며 만 대의 법이다.
아! 왕조에는 경사가 많았고 황실에는 복이 뻗어 나갔다. 한(漢) 나라 헌제(獻帝)는 문화(文化)를 좋아하여 종실(宗室)의 모범이 되었고 《주역(周易)》에서는 제후를 잘 세움으로써 사직(社稷)을 영구히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조시(詔示)하여 모두가 알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차일본 전권공사(駐箚日本全權公使) 조병식(趙秉式)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 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70세 된 늙은이로서 이 무더운 날씨에 먼 바다를 건너자니 떨쳐 나서기 어려우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세상에 변란이 있는 이 때에 지위와 명망이 모두 높은 사람이라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보내는 것이다. 혹시 청(淸) 나라 문제와 관계되는 것이 제기되면 잘 처리하여 기어이 일을 완전히 끝내도록 하라. 경의 이번 길이 비록 주차공사이지만 1품이란 높은 지위로서 실지로는 대사(大使)이니 참으로 임무가 크고 책임이 막중하다."
하였다.

 

정2품 민영달(閔泳達)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외부 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에게 경부 대신(警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으며, 탁지부 협판(度支部協辦) 고영희(高永喜)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8월 18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황태자(皇太子)가 올리는 치사(致詞)와 전문(箋文)을 받고, 이어 하례(賀禮)를 받았다.

 

정2품 남정철(南廷哲), 종2품 민영국(閔泳國)·민영돈(閔泳敦)·임영상(林永相)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 오정근(吳正根)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에 서임하되, 남정철은 1등에, 민영국 이하는 모두 4등에 서임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옥(獄)이란 것은 부득이해서 설치한 것인 만큼 백성들에게 죄가 있어서 잡아넣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오랫동안 가둬둘 수가 있겠는가? 죄수를 오래 지체시키는 것은 실로 제때에 재판하지 않아 기한 안에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요즘처럼 많은 때가 없었다. 이처럼 혹심한 가을 더위를 당하여 사람들이 병이 생겨서 옥 안에서 아우성을 치는 것이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미결된 모든 죄수들에 대하여 법부 대신(法部大臣), 경부 대신(警部大臣), 평리원장(平理院長), 한성 판윤(漢城判尹)이 모여서 의논하여 빠른 시일 안으로 너그럽게 처결하여 윤허받도록 하라. 더구나 경사스러운 때를 당하였으니 응당 특별한 은전(恩典)을 베풀 것이다. 죄수 가운데서 70세 이상과 15세 이하로서 형편이 용서할 만한 자에 대해서는 모두 석방하고 미결 죄수는 판결을 기다려서 일체(一體) 시행하여 나라의 경사를 함께 축하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책봉(冊封)할 때의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이하, 금책(金冊)과 금인(金印)을 만들 때에 감동(監董)한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하, 진하(陳賀)할 때의 각 차비(差備) 이하, 영친왕부(英親王府)의 영(令)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정사(正使) 이호준(李鎬俊)은 아들과 손자 중에서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고, 부사(副使) 박제순(朴齊純),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윤정구(尹定求),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주영(李胄榮),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민병석(閔丙奭), 독금책인관(讀金冊印官) 조명교(趙命敎), 겸장례(兼掌禮)인 비서원 승(祕書院丞) 이경하(李敬夏), 선조관(宣詔官) 정승모(鄭承謨), 부첨사(副詹事) 조중목(趙重穆), 상례(相禮) 민항식(閔恒植), 영친왕부 영(英親王府令) 조충하(趙忠夏)은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8월 19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황태자(皇太子)가 올리는 치사(致詞)와 전문(箋文)을 받고 하례(賀禮)를 받았다. 만수성절(萬壽聖節)005)  을 축하하였기 때문이다.

 

진하(陳賀)할 때의 각 차비(差備)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겸장례(兼掌禮)인 비서원 승(祕書院丞) 남규희(南奎熙), 첨사(詹事) 오정근(吳正根), 상례(相禮) 김영의(金永儀)는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8월 20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번에 이 방면의 관찰사(觀察使)로 특별히 선발한 것은 바로 경의 도량이 너그러워 변경 관문을 지키는 일을 맡길만 하기 때문이다. 진위대(鎭衛隊)의 사령(司令)을 겸임시키니 일을 처리하고 관할하는 데서 엄격하고 명백하게 단속하라. 또 부대를 갓 편성하였으므로 군사들을 돌보아주고 지휘하는 것을 편의대로 하되, 되도록 백성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 여러 곳의 요새지에 대한 주밀한 방어와 굳건히 지킬 계책에서는 그 곳의 지리를 보아서 알맞게 타산함으로써 짐의 서쪽 변경에 대한 근심을 풀어줄 것을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에게 칙유(飭諭)하노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평안북도 관찰사 이도재(李道宰)를 찰변사(察邊使)로 차하(差下)하라."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민응식(閔應植)을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민병한(閔丙漢)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8월 21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조정에 나오게 되고부터 짐의 마음이 위안되고 만족스러웠다. 경은 날마다 좋은 계책을 진술하여 당면한 난국을 타개하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어찌 사임을 청하는 글이 갑자기 올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비답과 칙유로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모두 드러내었으나 실정과 형세를 말하면서 또 다시 앞서 한 말을 되풀이하여 고집을 부리니 정말 지루하기만 할 뿐이다.
경이 올린 글에 이르기를, ‘무늬놓은 비단이라도 낡아지면 새로 짠 성근 베만도 못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사람은 그저 오랜 사람을 써야 한다.’는 원칙을 생각지 않는가? 더구나 지금 백성과 나라의 형편이 마치도 물이 새는 배와 불이 붙은 집 정도가 아니므로 결코 장단을 비교해가며 쓸데없는 시시비비를 일삼을 때가 아니다. 부디 이런 것을 말하지 말고 조정의 일을 정리함으로써 짐이 기대하는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권재형(權在衡)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일전에 올린 글에서 유기환(兪箕煥)과 더불어 재판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제 다시 곰곰히 생각하여 보니 신이 유기환과 재판하는 것의 부당한 점이 세 가지 있습니다. 폐하께서 마음을 안다는 한 마디 말로 이미 따뜻이 타일러 주셨으니, 임금이 신하의 마음을 알아주는 데야 어찌 헐뜯는 말을 걱정하겠습니까? 이것이 재판하는 것이 부당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신이 아무리 보잘것없다 해도 당당한 의정부의 관리로서 이 몰지각한 무리들과 더불어 한 자리에서 떠들썩거리는 것은 조정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재판하는 것이 부당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는 본래 글 쓰는 것이 서툴러서 일반적인 글도 반드시 남의 손을 빌어 쓰곤 합니다. 지금 올린 글의 내용을 보면 비록 억지로 맞추어서 말이 되지 않기는 하지만 그 대체적인 뜻을 논한다면 자못 조리가 있으므로 그것이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배후에서 부추겨서 이 일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패거리가 만들어지는 싹이 여기에서 나타났으니 뒷날에 풍파가 일어날까봐 걱정됩니다. 실은 유기환 한 사람에 대해서야 무엇을 깊이 책망하겠습니까? 신이 이미 충분히 간파하면서도 오히려 서로 겨룬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니, 이것이 재판하는 것이 부당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
신이 무함당한 여러 조항은 모두 허망한 거짓말과 관련되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대청에서 내려 갔다’, ‘보증하고 석방하였다’고 한 말은 남을 잘 쓰러뜨리는 자가 구실을 만들어 낸 것이 틀림없으므로 전날에 재판을 청한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만약 중지한다면 신을 시기하는 자들이 반드시 ‘저에게 과연 죄가 있기 때문에 질문에 응할 면목이 없는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생각건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숨기는 말이 없는 것을 첫째로 삼으므로 신은 법정에서 말하려는 것을 조항별로 폐하에게 진술하려 합니다.
대체로 죄인이 법부(法部)에 이르게 되면 으레 검사합니다. 경청(警廳)에서 역적 안경수(安駉壽)를 이송할 때에 신이 여러 동료들과 함께 검사하였는데 유기환이 이른바 대청에서 내려 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미 검사를 한 다음 법부 참서관(法部參書官) 김영한(金榮漢)이 역적 안경수의 집 종의 말을 잘못 듣고 신에게 말하기를, ‘경청의 순검(巡檢)의 말에 의하면, 평리원(平理院) 문밖에 임시로 거처하면서 약을 먹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더는 관심을 두지 않고 대답하기를, ‘잠시라도 순검을 많이 파견하여 엄밀하게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음날 재판장(裁判長)을 우연히 만나서 법부에서 평리원에 보내는 공문 안에 안경수를 보증받고 놓아준다는 글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깜짝 놀라 말하기를,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이는 혹시 참서관이 잘못한 일일 것이다.’라고 하고는 법부에 나간 후 김영한을 불러다 따진 결과 해당 과(課)의 주사(主事)가 글을 보낸 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신문계(訊問係) 감동(監董)을 불러다가 보석으로 놓아준 이유를 따지니 대답하기를, ‘처음에는 이 말이 없었는데, 재차 김영한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어제 이른바 순검이라 한 것을 오늘 비로소 자세히 알아보니 순검이 아니라 안씨(安氏) 집안의 종이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영한의 일처리가 매우 흐리멍덩하기는 하지만 또한 고의적으로 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만 징계하기 위하여 견책을 주었습니다. 이른바 공문(公文)이라고 하는 것은 즉시 거두어 없애 버렸으므로 전후의 사실은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으니 유기환이 이른바 ‘보석으로 놓아주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보증받고 놓아 주었다는 설이 신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고 공문을 보낸 것이 신의 눈을 거치지 않았으니 신이 어떻게 책임지겠습니까?
신이 무함을 당한 데는 또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신은 미천한 처지에 외람되게 폐하의 총애를 받았으며 벼슬을 그만둬야 했었는데 떠나지 않고 나아가기만 하면서 물러나지 않았으니, 이것이 신이 용서받기 어려운 죄안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맡고 있는 벼슬을 회수하고 신이 응당 받아야 할 죄를 다스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 내린 비답에서 이미 마음을 안다는 것으로 칙유하였으므로 재판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한 경의 말도 옳다. 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남김없이 이해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니 굳이 사직하지 말고 즉시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8월 23일 양력

종2품 이우면(李愚冕), 첨사(詹事) 오정근(吳正根)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직학사(直學士) 조동완(趙東完)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경흥 감리(慶興監理) 박승봉(朴勝鳳)을 덕원 감리 겸 덕원 부윤(德源監理兼德源府尹)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하였으며, 정3품 심후택(沈厚澤)을 경흥 감리 겸 경흥 부윤(慶興監理兼慶興府尹)에 임용하고 주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8월 24일 양력

산릉(山陵)을 세 번째로 간심(看審)하고 온 총호사(總護使)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총호사 심순택(沈舜澤),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이근명(李根命), 궁내부 대신 서리(宮內府大臣署理) 윤정구(尹定求), 학부 대신(學部大臣) 김규홍(金奎弘),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주영(李胄榮), 학부 기사(學部技師) 이병헌(李秉憲), 상지관(相地官) 오성근(吳聖根) 등이다.】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명을 받고 여러 신하들을 데리고 세 번째로 간심하기 위하여 갔었는데 산릉의 그림과 산릉에 대한 논의는 이미 입정(入呈)하였으므로 보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는 여러 상지관(相地官)들이 논의하는 것이 과연 어떠하던가?"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은 본래 풍수설(風水說)에 어두우므로 정확히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상지관들에게 물어 본다면 명백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상지관이 보고하라고 명하였다. 오성근(吳聖根)이 아뢰기를,
"화접동(花蝶洞)은 뒤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맥이 끊어졌으므로 쓸만한 데가 못되고 군장리(軍藏里)는 옛 능(陵)을 쓴 자리가 있는데 모두 크게 쓸만한 자리이며 금곡(金谷)은 진방(辰方)을 등지고 자리잡은 곳이 합당합니다."
하였다. 여러 상지관이 보고한 것도 대략 같았다. 상이 이르기를,
"군장리에는 옛날에 장릉(章陵)을 쓴 일이 있으나 금곡에는 애초에 이런 일이 없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금곡으로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삼가 신이 본 바에 의하더라도 금곡은 산줄기와 혈처(穴處)가 정확하고 맑은 강이 빙 둘러 싸였으며 바라보이는 산도 보기 좋으므로 훌륭한 자리가 틀림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릉의 경계표를 세운 다음 여러 집들이 이장(移葬)할 곳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각 역참과 공해(公廨)를 폐지한 자리에 묘소로 쓸만한 곳이 더러 있을 터이니 각각의 무덤 주인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고르게 하고 이로써 주문(奏聞)하면 사패지(賜牌地)를 특별히 주어라. 장례하는 비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나라의 경비가 곤란하지만 얼마간을 지급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폐하의 거룩한 덕이 하늘처럼 커서 아래 사정을 생각하여 이처럼 보살펴 주시니 무덤 임자치고 누군들 크나큰 은덕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서 은혜를 베푸는 뜻을 각 무덤의 자손들이 사는 곳에 깨우쳐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어 궁내부 대신 서리(宮內府大臣署理) 윤정구(尹定求)에게 이르기를,
"실록(實錄)을 보충하는 전례는 과연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니, 윤정구가 아뢰기를,
"신이 옛 규례를 상고하니 편리한 대로 거행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보충할 때에는 반드시 비서원 낭(祕書院郞)과 겸장례(兼掌禮)를 시켜서 실록을 보충하여야 할 것이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고(史庫) 중의 한 곳에 가서 등출(謄出)하여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윤정구가 아뢰기를,
"네 곳에 있는 사고 중에서 거리를 따져보면 강릉(江陵)이 가장 가깝습니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홍릉(洪陵)의 천봉(遷奉)을 지금 묘적산(妙積山) 금곡(金谷)으로 완전히 정하였으니, 봉표(封標)를 규례대로 세우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사직 상소를 거듭 올리자 비답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해 주었다.

 

정1품 윤용선(尹容善), 종1품 민종묵(閔鍾默)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이어 민종묵(閔鍾默)을 천릉도감 제조(遷陵都監提調)로, 종1품 민응식(閔應植)을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8월 25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이근명(李根命)과 천릉도감 제조(遷陵都監提調) 김영목(金永穆)을 서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8월 26일 양력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김만수(金晩秀)를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에, 종2품 심상황(沈相璜)을 경효전 제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궁내부 대신 서리협판(宮內府大臣署理協辦) 윤정구(尹定求)가 아뢰기를,
"강화부(江華府) 정족산성(鼎足山城) 사고(史庫)에 보관되어 있는 《인조실록(仁祖實錄)》 2책(冊)을 등서(謄書)하여 보충하는 절차를 속히 시행할 것을 명하였으나 끌어댈 만한 전례가 없습니다. 강릉(江陵), 봉화(奉化), 무주(茂朱) 세 곳에 보관되어 있는 실록 중에서 편리한 대로 등서하여 보충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하나, 아래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겸장례(兼掌禮), 비서원랑(祕書院郞)을 각각 한 사람씩 강릉 사고에 보내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9일 양력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권재형(權在衡)을 법부 대신(法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삼정검찰대원(蔘政檢察大員) 브라운〔柏卓安 : J. McLeavy Brown〕을 해임하고 철도원 감독(鐵道院監督) 대삼륜장병위(大三輪長兵衛)를 임명하였다.

 

8월 30일 양력

종2품 김중환(金重煥)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정3품 태명식(太明軾)을 평리원 검사(平理院檢事)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8월 31일 양력

총호사(總護使)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총호사(總護使) 심순택(沈舜澤), 산릉 제조(山陵提調) 민응식(閔應植)·김영목(金永穆)·조정희(趙定熙), 학부 대신(學部大臣) 김규홍(金奎弘),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 궁내부 대신 서리(宮內府大臣署理) 윤정구(尹定求),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주영(李胄榮)이다.】  산릉(山陵)에 봉표(封標)한 뒤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봉표를 세워 영구히 태평하게 되었으니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해 동안 걱정해 오던 끝에 이제야 좋은 산을 얻어 봉표까지 세웠다. 또 동궁(東宮)이 애타게 걱정하던 끝이니 더욱 경사스럽고 다행하게 여긴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동궁이 경사스러워하는 것은 실로 지극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신은 끝없이 흠앙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봉표도 이미 세웠으니 각 항목의 날짜를 정하는 것은 장례원(掌隷院)으로 하여금 날을 잡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가을에는 해가 봄, 여름에 비해 차츰 짧아지는데 역사(役事)가 방대하니 매우 걱정됩니다. 여러 당상(堂上)이 비록 분장(分掌)한다 해도 반드시 특별히 독촉하고 감독해야만 역사를 제때에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상석(象石)과 사석(獅石)은 이미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明) 나라의 능제(陵制)대로 하려 한다면 사력(事力)이 미치지 못할 것이니 여러 가지 석의(石儀)를 적당히 줄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정유년(1897)에 사람을 보내어 명나라 제도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모든 석물이 아주 굉장하였다 한다. 그런데 청(淸) 나라가 선 이후에도 하나도 훼손된 것이 없이 각별히 보존되고 있으니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우하는 것이 또한 후하다고 하였다. 모든 석물을 모두 동네 어귀에 벌려 세우고 또 토성(土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힘으로 명나라 제도를 그대로 따르자고 하면 설사 한두 해를 허비하더라도 역사를 끝내기 어려울 것이다. 또 한(漢) 나라 문제(文帝)가 수릉(壽陵)을 지은 것은 길이 100여 척(尺)에 너비 90척으로서 그 역사가 방대하니 어떻게 이렇게까지야 할 수 있겠는가? 진(晉) 나라의 문공(文公)이 수도(隧道)를 내고 장사지낸 일은 꼭 예법에 맞는다고는 할 수 없다. 대체로 장사지내는 것은 우리나라의 규례대로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하였다.

 

포달(布達) 제62호, 〈궁내부의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반포하였다. 【내장원(內藏院) 봉세관(捧稅官) 13인(人)을 증치(增置)한다.】


【원본】 44책 40권 82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77면
【분류】사법-법제(法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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