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양력
【음력 경자년(庚子年) 9월 10일】 특진관(特進官) 심순택(沈舜澤)을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학부 대신(學部大臣) 김규홍(金奎弘)이 아뢰기를,
"역서(曆書)를 검열할 때 착오가 있었으니 조심하고 삼가는 도리로 보아서 경고가 없을 수 없습니다. 관상소장(觀象所長) 이돈수(李敦修)에게 면관(免官)의 형전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특별히 용서하고 3개월 감봉(減俸)하라."
하였다.
11월 2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진전(眞殿)에 화재 사고가 난 뒤로부터 전성(展省)할 곳이 없어졌으니 그지없는 짐의 슬픔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더구나 모레는 영조 대왕(英祖大王)의 탄신일(誕辰日)이니 슬픈 마음이 여느 때보다 갑절 더하다. 이날 냉천정(冷泉亭)에 원임 직제학(原任直提學) 김석진(金奭鎭)을 보내서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반성 부원군(潘城府院君)의 어머니 정경 부인(貞敬夫人) 홍씨(洪氏)의 무덤을 옮길 때 쓰일 물건은 후한 편으로 실어 보내라."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민희(趙民熙)를 법부 협판(法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장례원 경서리(掌禮院卿署理)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 윤태흥(尹泰興)이 아뢰기를,
"이번에 홍릉(洪陵)을 옮겨 모실 곳을 다시 군장리(群場里)로 정하였는데, 군장리의 주산(主山)은 바로 묘적산(妙積山)입니다. 능으로 봉하는 산의 봉호(封號)를 천수산(天秀山)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능을 옮길 때 옛 능을 여는 때와 현궁(玄宮)에 내리는 날짜의 사이가 멀므로, 거애(擧哀)하고 성복(成服)하는 예식은 전례에 의거하여 현궁에서 내는 날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김가진(金嘉鎭)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은명(恩命)을 받은 후부터 연이어 어리석은 생각을 진달한 것은 사실 시대에 따라 그에 맞게 변해야 한다는 원칙을 그만둘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인데, 폐하의 비답이 따뜻하고 친절하여 흡족하게 받아들이는 듯 하였으므로 신은 천만 번 감격하고 송구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대체로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해야 하는 만큼 진실로 나라에 이롭고 백성들에게 편리한 점이 있는 것이라면 어찌 감히 번거롭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나라가 가난해지고 부강해지며 강대해지고 약해지는 것은 토지가 넓고 좁은 것과 백성들의 호구(戶口)가 많고 적은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맹자(孟子)는 왕자(王者)의 정사를 논하는 데서 토지의 경계를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고 주공(周公)은 나라의 제도를 만드는 데서 백성들의 수를 제일 중시하였습니다. 오늘 토지에는 양전법(量田法)이 있고 호구에는 호적법(戶籍法)이 있기는 하지만 낡은 것에 익숙하고 그릇된 것을 답습하여 번거롭기만 하고 허위가 불어나서 끝내 사실을 밝혀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려고 한다면 관청에서 문건을 발급하는 것 만한 것이 없는데 그것은 간단하면서도 누락된 것이 없고 상세하면서도 번다하지 않습니다. 삼가 《호전(戶典)》을 상고해 보면 토지와 집을 사고파는 경우 모두 100일 내에 관청에 보고하여 입안(立案)을 받게 되었으니 우리나라 토지와 호구를 모두 관계(官契)에 올리는 것은 옛날부터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온갖 법도가 모두 무너지고 온갖 조목이 갖추어지지 못한 중에도 계권(契券)에 관한 법이 더욱더 문란해졌습니다. 매매 문권(文券)은 규정이 전혀 없이 얇은 종이에 되는 대로 썼으며 말도 되지 않습니다. 한 논배미의 땅에 대한 옛 문권이 수십 개나 되고 백 칸 되는 집도 전매(轉賣)한 증명 문건이 없습니다. 문권을 위조하여 훔쳐 팔며 호적에 누락된 빈 호구 등 여러 가지 폐단들이 모두 여기에서 나오므로 삼천리 강토와 수천만 민호가 거의 나라의 소유가 아닌 것처럼 되었으니 어찌 빈약해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급급히 뜯어고쳐야만 할 것입니다. 위로는 조종(祖宗)의 옛 법에 의거하고 널리 각 나라의 새 제도를 채용해서 먼저 외국의 기계를 사들여 종이를 제조하고 인쇄판을 만들어 양식을 찍어냄으로써 위조하는 것을 방지해야 할 것입니다. 또 글을 간결하게 쓰고 호수(號數)를 정하여 각부(各府)와 여러 군(郡)에 반포하고 민간에 알리되 몇 번이고 반복하여 알리며 모두 명령이 내린 지 석 달 내로 자기들의 전택(田宅) 문권을 해당 군관(郡官)에게 바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해당 고을에서는 하나하나 효주(爻周)해가며 관계(官契)를 다시 발급하되 글자를 써 넣고 도장 찍는 것을 되도록 자세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새로 산 자는 반드시 산 지 10일 이내로 옛 문권을 와서 바치고 새 문권을 교환해 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자체로 개간한 토지와 새로 지은 집, 전해 오는 전장(田庄)으로서 본래 문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도 자수하여 문권을 받도록 허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기한이 지나도록 문권을 받아 가지 않는 것은 나타나는 대로 관청에서 몰수하며 백성들이 고발하면 그에게 절반을 주게 할 것입니다. 해당 백성에게 문권을 발급할 경우에는 집과 토지를 팔고 사고할 때 거기에 쓰이는 용지대(用紙貸)를 바치는 《속전(續典)》의 규례에 의거하여 적당한 금액을 정해 거두어서 위에 바칠 것입니다. 문권 가운데 만일 문질러 고치어 작간(作奸)을 피운 자가 있으면 사실을 조사하여 관청에서 몰수하며 만일 잘못 썼거나 찢어져서 못 쓰게 된 문서가 있으면 거두어서 서울의 해당 부(部)에 올려 보내어 숫자에 근거하여 고쳐 내려주게 해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이와 같이 한다면 온 나라의 토지와 민호는 측량하고 등록하지 않고도 우선 명백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산림이나 방앗간 등 부동산물에 대해서도 문권이 있는 것은 일률적으로 바꾸어 발급해주는 것이 재물을 넉넉히 하는 하나의 방도로 될 것입니다. 이 법이 한 번 시행된다면 그 이익이 세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토지에는 누락된 토지가 없을 것이고, 민호에는 빠진 민호가 없어서 세입을 증대시킬 수 있고, 인지(印紙) 붙이는 제도는 돈이 끝없이 생겨서 나라의 지출에 보탤 수 있으며 묵고 쌓인 낡은 문서는 실어 올려서 종이를 만들면 거액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한 가지 통쾌한 일이 있습니다. 갑오년(1894) 이전의 매매 문기(賣買文記)에 모두 다른 나라의 연호(年號)를 쓴 것은 실로 500년 역사를 가진 나라의 수치였는데 이제부터 영원히 없애 버린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더욱더 토지 측량에 관한 사무를 정리하고 게다가 호구 문서에 관한 사무를 정리해서 기어이 정확히 하여 서로 안팎 관계를 이룬다면 전국의 토지 면적과 민호의 숫자는 저절로 명백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나라 정사에서 급선무이고 주관(周官)의 큰 법으로도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온갖 법이 설 수 있고 온갖 조목이 갖추어질 수 있을 것이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자서(字書)》의 ‘계(契)’자를 상고해 보면 그것은 나무에 새기어 문서를 만든 것이었으니 옛날에 만든 문서는 모두 나무에 새기어 이용한 것이 명백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와 같이 거칠고 규정이 없는 문서는 아직 없습니다. 계권에 관한 이 방법은 사실 옛날의 법을 회복하려는 것이지 새것을 좋아해서 새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므로, 이제 또 다시 두려움을 무릅쓰고 우러러 호소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생각을 넓혀서 하찮은 사람의 의견을 굽어 살피어 신의 소본(疏本)을 가져다가 의정부(議政府)에 널리 물으며 계속하여 관할하는 각 해부(該部)로 하여금 세칙(細則)을 의정(議定)하여 중앙과 지방에 반포함으로써 경비를 넉넉히 할 것을 천만 번 간절히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이 자못 조리가 있어 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의정부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1월 3일 양력
의정부 의정서리 내부대신(議政府議政署理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가 아뢰기를,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김가진(金嘉鎭)의 상소문에 대한 비지(批旨)를 삼가 받들고 인지(印紙)에 관한 한 가지 문제를 모여서 토의한 결과 지지하는 사람은 적고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사실대로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인지에 대해서 다시 방도를 잘 토론하여 들여보내라는 명이 내렸습니다. 신들이 함께 모여서 잘 토론해 보니 모두 인지 제도는 과연 나라를 넉넉하게 하고 상인들을 돌봐주는 큰 정사이기는 하나, 현재 이름 없는 잡세(雜稅)의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여러 차례 칙유(勅諭)하였지만 아직도 모두 제거되지 못한 상황에서 만약 또 인지 제도까지 겸하여 실시한다면 백성들은 장차 번거로움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후부터는 정세(正稅)인 결세(結稅)와 호세(戶稅) 및 해관세(海關稅), 인삼세(人蔘稅), 선세(船稅), 각 광산세(礦山稅), 푸줏간세를 제외하고 중앙에서는 부(府), 부(部), 원(院), 궁(宮), 지방에서는 도(道)와 부(府), 목(牧), 군(郡), 군대와 보부상(褓負商)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일체 잡세를 모두 영원히 혁파하며, 다음으로는 국내의 도량형(度量衡) 제도를 정하고 규정을 엄격히 세워 되도록 한결같이 만든 다음에야 인지 제도를 실시해도 폐단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의 의견이 서로 같으므로 삼가 아뢰면서 엎드려 전하의 재결을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마땅히 조칙(詔勅)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결세(結稅)를 매결당 3분의 2를 더 거두는 문제를 의정부에서 모여 의논해 보았는데 찬성표가 7이고 반대표가 2입니다. 그래서 아뢰고 전하의 재결을 엎드려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표가 많은 편을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탁지부(度支部)에서 청한 농상공부(農商工部) 수리비(修理費) 3,400원(元), 경부(警部)의 경비와 수리비 2만 1,830원, 광제원(廣濟院) 수리비 3,200원, 육군 법원(陸軍法院)과 육군 감옥(陸軍監獄) 신설비(新設費) 5,735원 남짓, 무관 학교(武官學校)의 비용 증가액 1만 9,466원 남짓, 지방의 각군(各郡) 토목 공사비 4,100원, 국고금(國庫金) 운반비 증가액 16만원을 예비금 가운데서 지출할 것을 토의를 거쳐 아룁니다."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조정의 의견이 모두 같으므로 인지 제도(印紙制度)를 장차 실시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름 없는 잡세(雜稅)를 없애버릴 것을 여러 차례 칙유(勅諭)하여 한두 번 강조한 것이 아닌데 백성들에 대한 침해는 옛날과 마찬가지이다. 조정의 영(令)이 잘 집행되지 않는 데 대하여 유사(有司)의 신하들이 어찌 그 책임을 피할 수 있겠는가? 이후로부터 각 항목의 잡세는 영원히 혁파하라. 만일 제멋대로 거두어들이는 가혹한 정사를 종전의 폐습처럼 반복하는 자가 있으면 각 해당 지방에서 나타나는 대로 잡아서 적률(賊律)로 다스릴 것이다."
하였다.
법률(法律) 제8호, 〈우체 사항 중 범죄인 처단례의 개정에 관한 안건〔郵遞事項犯罪人處斷例改正件〕〉, 칙령(勅令) 제42호, 〈우체사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郵遞司官制中改正件〕〉, 칙령 제43호, 〈우체사 직원 봉급령(郵遞司職員俸給令)〉, 칙령 제44호, 〈전보사 직원 봉급령(電報司職員俸給令)〉, 칙령 제45호, 〈임시 우체 규칙 중 개정에 관한 안건〔臨時郵遞規則中改正件〕〉, 칙령 제46호, 〈국내 우체 규칙 중 개정에 관한 안건〔國內郵遞規則中改正件〕〉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승순(李承純)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비서원 경(祕書院卿) 신기선(申箕善)을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고 이어 비서원 경을 겸임시켰으며, 참령(參領) 구연항(具然恒)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칙령(勅令) 제48호, 〈한성 재판소 관제 개정에 관한 안건〔漢城裁判所官制改正件〕〉을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한성 재판소는 한성부 5서(署) 내 일체의 민사와 형사 소송을 수리(受理)한다. 수반 판사(首班判事) 1인, 판사(判事) 2인, 검사(檢事) 1인, 검사 시보(檢事試補) 1인, 주사(主事) 6인, 정리(廷吏) 4인을 둔다.】
【원본】 44책 40권 101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87면
【분류】사법-법제(法制)
칙령(勅令) 제55호, 〈종인 학교 관제(宗人學校官制)〉를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종인 학교 관제(宗人學校官制)〉
제1조
종인 학교(宗人學校)는 종정원(宗正院) 소속이며 친왕(親王)과 군왕(郡王)이 입학한 후 학업을 강습하는 곳이다. 선파 종족(璿派宗族)의 연소하고 총명 준수한 사람을 택하여 경의(經義)와 시무에 필요한 학업을 전수한다.
제2조
종인 학교의 처소는 종정원으로 정하고 경비는 국고(國庫)에서 지출하며 학부(學部)를 경유하여 수송한다.
제3조
종인 학교에 심상과(尋常科)와 고등과(高等科)를 나누어 설치한다.
제4조
종인 학교의 수업 연한은 심상과는 2년이며 고등과는 3년으로 졸업한다.
제5조
종인 학교는 황족을 교육하기 때문에 일의 체모가 특별하다. 교장(校長)은 종정원 경(宗正院卿)이 예겸하며 학부 대신(學部大臣)과 대등한 권한이 있다.
제6조
종인 학교 졸업생은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에 서임하였다가 재랑(齋郞)과 각 부(府), 부(部), 원(院)의 관원에 궐원이 생기는 대로 전천(轉遷)한다.
제7조
종인 학교의 학과(學科) 및 정도(程度)와 그 밖의 세칙은 종정원 경이 학부 대신과 협의하여 정하며 학원(學員) 시험도 회동하여 선발한다.
제8조
종인 학교에는 다음의 직원을 둔다.
교장(校長) 1인 【종정원 경이 예겸한다.】 도선(導善) 1인 【칙임관(勅任官), 상치하지 않는다.】 전훈(典訓) 2인 【칙임관 1인, 주임관(奏任官) 1인, 성균관장(成均館長)이 예겸한다.】 사회(司誨) 3인 【주임관 2인, 판임관(判任官) 1인이다.】 전부(典簿) 2인 【1인은 종정원 주사(宗正院主事) 중에서 예겸한다.】 제9조 학교장은 일체의 교무(校務)를 직접 관할하는 권한이 있으며 소속 관리를 진퇴(進退)하고 감독하되 학부로 추천해 보내 서임하게 한다. 제10조 도선은 친왕과 군왕이 입학 때에 경서를 들고 질문 토론하는 직을 관장한다. 제11조 전훈은 학교장을 도와 교무(校務)를 관리한다. 제12조 사회는 교수(敎授)를 관장하며 학원을 감독한다. 제13조 전부는 상관의 명을 받들어 서무(庶務) 회계(會計)에 종사한다. 제14조 본령은 반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원본】 44책 40권 102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87면
【분류】사법-법제(法制)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종친(宗親) / 재정-국용(國用)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제9조
학교장은 일체의 교무(校務)를 직접 관할하는 권한이 있으며 소속 관리를 진퇴(進退)하고 감독하되 학부로 추천해 보내 서임하게 한다.
제10조
도선은 친왕과 군왕이 입학 때에 경서를 들고 질문 토론하는 직을 관장한다.
제11조
전훈은 학교장을 도와 교무(校務)를 관리한다.
제12조
사회는 교수(敎授)를 관장하며 학원을 감독한다.
제13조
전부는 상관의 명을 받들어 서무(庶務) 회계(會計)에 종사한다.
제14조
본령은 반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11월 4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준원전(濬源殿)의 어진(御眞)을 모셔 올 때와 영희전(永禧殿), 냉천정(冷泉亭), 평락정(平樂亭)의 어진(御眞)을 이봉(移奉)할 때에 마땅히 신교(新橋) 앞길에 나가서 지영(祗迎)하고 이어 위내(衛內)에서 배봉(陪奉)하겠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김석진(金奭鎭)을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외부 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에게 군부 대신(軍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하도록 명하였다.
11월 5일 양력
포달(布達) 제66호, 〈궁내부 관제 중에서 내장원에 기사 1명을 더 두는 일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內藏院技師一人增置件〕〉을 반포(頒布)하였다.
11월 6일 양력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구연항(具然恒)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육군 부령(陸軍副領) 김정근(金禎根)을 강원도 관찰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법부 대신 임시서리(法部大臣臨時署理) 김규홍(金奎弘)이 아뢰기를,
"올해 8월 8일의 조칙(詔勅)을 삼가 받들어 함경남도 재판소(咸鏡南道裁判所)에서 관할하는 징역 죄인 중 죄상으로 보아 방석(放釋)할만 한 사람인 홍재구(洪在九) 등 6명을 개록(開錄)하여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김영준(金永準)의 보고를 받아 보니, 피고 이병소(李秉韶)의 안건을 조사한 데 의하면, 그는 비서랑(祕書郞)으로서 정족산성(鼎足山城)의 사고(史庫)에 있는 《실록(實錄)》을 포쇄(曝曬)한 후 《실록》 2책을 잃어버렸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비서랑 최병철(崔炳哲)이 그것을 찾아 가지고 다시 봉안(奉安)하였으니 피고가 실록을 착실하게 점검하지 못한 책임을 모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주사상서 사불이실률(奏事上書詐不以實律)’로 조율(照律)하여 징역 3년에 처할 것을 아룁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유배(流配)로 바꾸도록 하라."
하였다. 해부(該部)에서 이어 배소(配所)를 철도(鐵島)로 정하여 보고하니, 윤허하였다.
11월 7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조병식(趙秉式)을 법규 교정소 부총재(法規校正所副總裁)에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0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선원전(璿源殿)에서 일어난 화재에 대하여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참배할 곳이 없어졌으니 망극한 심정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번 음력 22일은 곧 우리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의 탄신일이다. 추모하는 짐의 마음은 여느 때보다 더욱더 간절하다. 이날 원임 직제학(原任直提學) 김석진(金奭鎭)을 화녕전(華寧殿)에 보내어 봉심(奉審)한 다음 그길로 융릉(隆陵), 건릉(健陵)에 나아가 다 같이 봉심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11월 11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충성스러운 사람을 표창하고 절개를 지키는 것을 장려하여 대대로 죄를 용서하고 고아를 돌봐주는 것은 나라의 떳떳한 법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나랏일을 위하여 죽었으나 부모와 처자는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몸이 원수의 칼날에 찔려 그만 목숨을 잃었으나 돌보아주지 않는다면, 착한 일을 한 사람을 무엇으로 고무해 주겠는가? 개국(開國) 503년 이후부터 장령(將領), 위사(衛士), 병졸, 액속(掖屬) 가운데서 순절(殉節)하였거나 부상(負傷)입은 사람이 없지 않았지만 표창하고 돌보아주는 은전(恩典)은 오늘에 이르도록 미처 베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매번 생각이 이에 미칠 때마다 가슴이 아파짐을 금할 수 없다. 원수부(元帥府)에서 세록표(世祿表)를 만들어서 등급을 나누어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궁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행동이 매우 해괴망측한 원수부 군무 국원(元帥府軍務局員) 이범만(李範萬)은 우선 면관(免官)시키고 5년 동안 정배(定配)하라. 그리고 시어(侍御) 이상준(李相俊)으로 말하더라도 단속을 잘못한 책임이 없지 않은 만큼 면관을 시행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더없이 삼가야 하고 더없이 엄숙해야 할 곳에서 화재가 일어났으니 누가 놀라워하고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사실을 밝히라고 명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죄인은 아직도 염탐하여 잡지 못하였다. 거행이 이처럼 느린 경부(警部)의 관리를 어디에 쓰겠는가? 사체에 비추어 보아도 이것은 세월만 보내면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경부 대신 이종건(李鍾健)에게 찬배(竄配)의 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선원전(璿源殿)의 상량문 제술관(上樑文製述官)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을, 서사관(書寫官)에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서정순(徐正淳)을, 현판 서사관(懸板書寫官)에 궁내부 특진관 윤용구(尹用求)를 진전중건도감(眞殿重建都監)에서 계청(啓請)하여 차출하였다.
방축향리(放逐鄕里) 죄인 민경호(閔京鎬)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2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올해는 바로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나이가 만 50이 되는 해이므로 짐의 슬픈 마음은 다른 해보다 다르다. 탄신일에 경효전(景孝殿)에서 전작례(奠酌禮)를 친행(親行)하겠으며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지어서 내려 보내겠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태자의 효성스러운 생각으로 이해 이 달을 맞이하였으니 끝없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데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을 것이다. 음력 25일에 경효전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여 지극한 심정을 펴게 하라. 제문은 태자가 지어서 내려 보내라."
하였다.
경인철도합자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에서 경성(京城) 인천(仁川)간 철도 개통식을 행하였다. 【접때 경인 철도(京仁鐵道)를 인수한 조합(組合)에서 해당 철도 부설권(鐵道敷設權)을 영국인 모오스〔謨於時 : Morse, James R.〕에게서 매수(買收)해서 광무(光武) 3년 5월에 그 조직을 변경하여 명칭을 경인 철도 합자 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라고 하였으며 일본 사람 남작(男爵) 시부자와 에이치〔澁澤榮一〕가 사장이 되어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때에 와서 한강 철교(漢江鐵橋)가 완공되자 경인 철도가 비로소 통하게 된 것이다.】
【원본】 44책 40권 103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88면
【분류】외교-영국(英) / 건설-토목(土木) / 교통-육운(陸運)
11월 13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조병식(趙秉式)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이어 경부 대신(警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육군 부장(陸軍副將) 심상훈(沈相薰)은 원수부 군무국 총장(元帥府軍務局總長)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신기선(申箕善)에게는 종1품을, 윤우선(尹宇善)에게는 종2품을, 민찬호(閔贊鎬)·민정식(閔正植)·이무로(李茂魯)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에 서임하였는데 신기선은 1등에, 윤우선은 2등에, 민찬호 이하는 모두 4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 윤덕영(尹德榮)을 비서원 경에, 정2품 김석근(金晳根)을 장례원 경(掌禮院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성기운(成岐運)을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11월 14일 양력
판리공사(辦理公使) 민철훈(閔哲勳)을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고 이어 영국, 독일, 이탈리아 세 나라의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하였다. 성기운(成岐運)에게 일본국에 주차(駐箚)하라고 명하였고, 특진관(特進官) 민영철(閔泳喆)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김영준(金永準)은 법부 대신(法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5일 양력
종2품 김정규(金定圭)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포달(布達) 제67호, 〈궁내부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시종원 시어(侍從院侍御) 6인은 산거(刪去)하고 좌시어(左侍御) 8인 내에서 1인의 주임관(奏任官)과 우시어(右侍御) 12인 내에서 1인의 주임관을 모두 판임관(判任官)으로 개정한다.】 반포(頒布)하였다.
법부대신서리(法部大臣署理) 김영준(金永準)이 아뢰기를,
"특지(特旨)로 찬배(竄配)하는 죄인 이종건(李鍾健)을 문경군(聞慶郡)으로 이제 곧 발배(發配)하려고 하나 그 연한(年限)은 신의 부(部)에서 마음대로 정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5년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11월 16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고 이어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번에 벨기에와 통상 조약(通商條約)을 의논하기 위하여 특별히 외부 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을 선발해서 전권 대신(全權大臣)으로 임명하여 벨기에 군주가 파견한 전권 대신과 회동(會同)하여 마음을 다해서 의논하여 타협을 이룩함으로써 되도록 두 나라로 하여금 우호(友好)를 두텁게 하려고 한다. 이에 특지(特旨)를 내리고 친필로 서압(書押)하며 국새(國璽)를 찍음으로서 믿음을 보이고자 한다. 황제의 명령은 이러하다."
하였다.
경효전(景孝殿) 전작례(奠酌禮)와 황태자 작헌례(酌獻禮) 때의 찬례(贊禮) 이하와 본전(本殿)의 제조(提調)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찬례(贊禮) 김석근(金晳根), 겸장례(兼掌禮) 비서 승(祕書丞) 이원규(李源珪), 예모관 첨사(禮貌官詹事) 민영철(閔泳喆), 상례(相禮) 송규헌(宋奎憲), 대축(大祝) 오장환(吳長煥)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석근(金晳根), 비서원 경(祕書院卿) 윤덕영(尹德榮),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 민영철(閔泳喆)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특진관 신기선(申箕善)을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이어 비서원 경을 겸임하라고 명하였다. 내부 협판(內部協辦) 민경식(閔景植)에게 시강원 첨사를 겸임시켰다.
칙령(勅令) 제47호, 〈사치를 금지하는 조례〔禁奢侈條例〕〉를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칙임관(勅任官) 및 50결(結) 이상 납세인이 무늬 있는 비단 주의(周衣)와 답호(褡護), 명주 상하 속옷, 금과 은, 옥류식(玉類飾) 패물, 은그릇 및 수저를 쓰는 것, 주임관(奏任官) 및 30결(結) 이상 납세인이 무늬 있는 비단 답호, 무명 주의 및 속옷 상의, 은식(銀飾) 패물, 은수저를 쓰는 것, 판임관(判任官) 및 10결 이상 납세인은 무명 답호와 주의를 쓰는 것을 모두 허용한다.】
【원본】 44책 40권 104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88면
【분류】사법-법제(法制) / 의생활-장신구(裝身具) / 재정-전세(田稅) / 의생활-상복(常服)
11월 17일 양력
철도(鐵島)에 1년간 귀양 보낸 죄인 박봉빈(朴鳳彬)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조병식(趙秉式)이 아뢰기를,
"북청(北靑)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킨 문제가 자자하게 들려오는데 소동을 일으킨 사단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특별히 조사하여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2품 이용관(李容觀)을 사핵사(査覈使)에 차하(差下)하여 하루 바삐 길을 떠나 전말을 철저하고 엄격하게 조사하여 등문(登聞)하게 하여 법에 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18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준원전(濬源殿) 영정(影幀)의 동가소(動駕所)에 원임 대교(原任待敎) 민병한(閔丙漢)을 보내서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태의원 경(太醫院卿) 민영규(閔泳奎)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 윤우선(尹宇善)을 태의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규장각 직학사(奎章閣直學士) 김영적(金永迪)을 궁내부 특진관에, 정3품 이명철(李命喆)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 경학과(經學科)에서 이범주(李範柱) 등 7인(人)이 선발되었다.
11월 19일 양력
신교(新橋) 앞길에 나아가 준원전(濬源殿), 영희전(永禧殿), 냉천정(冷泉亭), 평락정(平樂亭)의 어진(御眞)을 흥덕전(興德殿)으로 이봉(移奉)할 때 지영(祗迎)하고 이어 흥덕전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친행(親行)하였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돌아온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심순택(沈舜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신기선(申箕善)이다.】 상이 이르기를,
"어진(御眞)을 지금 임시로 봉안하였으니 진전(眞殿) 공사를 조금도 늦출 수 없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중건(重建) 공사가 시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현재 한겨울이 점점 닥쳐오고 해가 또 짧아져서 추운 계절에 장인(匠人)들을 불러들이면 공사가 소홀히 될 염려가 있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봄철이 되기를 기다려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장례원에서 경칩(驚蟄) 후 좋은 날을 받아서 들이라고 분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진전(眞殿)을 중건(重建)하는 역사(役事)가 시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겨울이 이미 닥쳐온 데다 해도 짧아졌으므로 모집한 인부들이 추위에 떨며 역사를 하자면 소홀히 할 염려가 있기 쉬우므로 대신(大臣)들에게 하문(下問)하였더니 대신들의 말도 이와 같았다. 중건하는 역사를 당분간 정지하였다가 장례원(掌禮院)에서 경칩(驚蟄)이 지난 다음 좋은 날을 받아서 들이라고 중건도감(重建都監)에 분부하라."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윤덕영(尹德榮)을 비서원 경(祕書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1월 20일 양력
영정모사도감 진전중건도감 도제조(影幀摹寫都監眞殿重建都監都提調) 심순택(沈舜澤)을 상소로 체차하고 윤용선(尹容善)으로 대신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상소를 올려 사직(辭職)하니, 비답하기를,
"짐이 경에 대하여 팔짱끼고 앉아서 성과를 기대한 것이 원래 대단하였는데 경은 매번 잠시 있을 수 있는 병과 지나간 문제를 가지고 기어이 떠나가야 할 의리로 내세우니 이것이 어찌 경에게 바라는 것이겠는가? 돌이켜 보건대 나라의 형편과 백성들의 근심은 날로 위험에 빠지고 있건만 구원할 생각은 않고 벼슬자리를 떠나서 한가로이 쉬겠다고 말하니 경의 충성과 사랑으로써 어떻게 차마 이런 말이 나오는가? 청한 데 대하여 동의할 수 없으니 경은 양해하고 더욱더 인도하는 책임에 힘씀으로써 기대하는 뜻에 부합되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민응식(閔應植)이 병을 진달하고 사직하는 상소의 대략에,
"생각건대 우리 동궁 전하가 밤낮으로 걱정하면서 산릉의 일에 정성을 다하여 유감없이 하려는 마음에서 하루가 바쁘게 서둘지만 시일을 이처럼 질질 끌고 있으니 민망스럽고 한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대단히 황공하나 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므로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 번 진달하는 바입니다. 아! 을미년(1895)의 변란을 어찌 차마 잊겠습니까? 이것을 잊는다면 사람이라도 사람이라 할 수 없고 나라라 해도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변란이 있은 초기에는 사람들이 그래도 통분해하면서 마치 살지 못할 것처럼 여기더니 덧없이 몇 년 지나자 차츰 해이해지고 위축되어 버렸습니다. 섶에 누워서 쓸개를 씹고 창을 깔고 자던 복수의 의리에 대해서는 논의할 나위도 없게 되고 지금은 말하고 의논할 때에 그 변란에 대하여 한 번도 다시 내놓지 않으며 도리어 기피하는 것 같습니다. 아! 만대를 두고 신하로서 기어이 갚아야 할 잊을 수 없는 원수가 무엇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기에 차마 이렇게까지 완전히 잊어버린단 말입니까? 지금 비록 능 자리가 좋고 관과 덧관, 관 속에 넣은 옷들이 극도로 아름답다 해도 개장(改葬)하는 예식은 아직 장사지내지 않을 때와 같으므로 《춘추(春秋)》에 원수를 갚지 않으면 장사지냈다고 쓰지 않은 그 뜻이 매우 명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감히 장사지내는 일이 좀 지연되는 것을 한스럽게 생각지 않는 반면에 통분해하는 것은 실로 앞에서 말한 것에 있습니다. 오늘을 위한 계책으로서는 오직 나라를 스스로 튼튼히 하는 데 있습니다. 진실로 나라를 스스로 튼튼히 하는 방도는 다른 데서 찾지 말고 다만 폐하가 한 번 마음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폐하는 심각하게 반성하고 선뜻 분발하소서. 궁궐 안을 청백하게 하여 요행수를 억제하고, 바른말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 폐하의 총명을 넓히며, 충성스럽고 대바른 사람을 가까이 하여 나라의 정사를 그들에게 맡기고,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 버려 재정을 절약하며, 장수를 선발하여 군사의 용맹을 닦고, 상벌 관계에서 믿음을 보이어 법령을 한결같이 할 것이며, 수령을 신중히 선택하고 가혹한 세금 징수를 금지함으로써 인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의 힘을 길러 내야 할 것입니다. 일을 집행하는 데서는 확고하게 하고 뜻을 견지하는 데서는 영구히 변치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스스로 튼튼해지지 않는 법은 없었습니다. 진실로 나라가 스스로 튼튼해진다면 무슨 수치인들 씻지 못하며 어떤 원수인들 갚지 못하겠습니까? 지금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사방에서 소동이 일어나고 은밀히 숨은 도적들에 대한 근심이 있으며 이웃 나라에서 기회를 엿보고 백 가지 방법으로 침략하고 업신여겨 마치도 호랑이 꼬리를 밟은 듯이 위험합니다. 속담에 ‘앞 수레가 전복되는 것은 뒤 수레의 경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웃 나라의 교훈이 앞에 있었으므로 충분히 두려워할 만한데도 높고 낮은 신하들은 노력하려 하지 않고 안일하게 세월만 보내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만일에 한 번 실패하는 날에는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앞서 있은 화재의 변고는 옛날에도 없었습니다. 재앙은 공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 원인이 있습니다. 하늘과 사람 사이에는 한 가지 이치가 작용합니다. 때문에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하늘은 우리 백성들이 보는 데 따라 본다.’고 하였으며, 《모시(毛詩)》에 이르기를, ‘하늘이 밝아서 네가 가는 곳에 모두 비친다.’고 하였으니 한 가지 재앙에 대하여도 마땅히 하늘의 감응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는 위로는 하늘의 경계를 받들고 아래로는 당면한 난관을 살피고 신이 진달한 조항들을 단연코 실행해서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책임을 다하며 한편으로는 분발하여 나라를 스스로 튼튼히 하는 기초를 마련한다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영원히 힘입게 되고 백성과 나라가 길이 편안해질 것이니, 신은 비록 물러가서 굶어 죽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한스러울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에게 의정부(議政府)의 직임을 준 것은 날마다 나를 도와줄 것을 바랐기 때문이었는데 경이 이미 병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청한 것을 특별히 윤허한다. 끝에다 붙인 자신을 반성하여 스스로 강해지는 데 대한 논의는 매우 중대하므로 응당 마음에 새겨 두겠다."
하였다.
종1품 민응식(閔應植), 태의원 경(太醫院卿) 윤우선(尹宇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신기선(申箕善), 종2품 이헌경(李軒卿), 남규희(南奎熙)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에 서임(敍任)하되 민응식과 신기선은 1등에, 윤우선은 2등에, 이헌경과 남규희는 4등에 서임하였다. 시종원 경(侍從院卿) 윤정구(尹定求)를 태의원 경에, 특진관 민영규(閔泳奎)를 시종원 경에, 특진관 조정희(趙定熙)를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육군 참령(陸軍參領) 신재영(申載永)을 육군법원 이사(陸軍法院理事)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으며, 공사관 서기생(公使館書記生) 유찬(劉燦)을 공사관 3등 참서관(公使館三等參書官)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하고 이어 일본국에 주재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1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요점은 먼저 법을 세우는 데 있다. 법이 서지 않고도 나라를 잘 보전한 것은 아직 없었다. 근래에 기강이 해이해져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 이후로 역적들이 거듭 생겨났으나 나라의 법을 적용하지 않아 그 패거리들 중 나라 안에 숨어서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시세(時勢)가 멸하는 것을 즐겁게 보는 자들이 매우 많다. 그러나 역시 없애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법률이 명백하지 못한 것과 관련된다. 아! 대체로 법을 세우자면 반드시 귀족들에 대해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제부터 법을 맡은 관리는 곱절 더 조심하여 법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털끝만치라도 사정(私情)을 보지 말고 죄안에 근거하여 기어이 처단함으로써 되도록 옛날의 법관인 정위(廷尉)처럼 공평하게 하라. 만약 때에 따라 적당히 고쳐야 할 법률이 있으면 제때에 곧 조문을 정해 가지고 등문(登聞)하여 결재를 받아 시행하라고 법부(法部)와 경부(警部)에 분부하라."
하였다.
종2품 이용익(李容翊)을 내장원 경(內藏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정3품 서정철(徐廷喆)을 법부 법무국장(法部法務局長)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이명철(李命喆)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옛날 제왕들이 나라를 세운 사적을 상고해 보면 한(漢) 나라의 풍패(豐沛)나 당(唐) 나라의 진양(晉陽) 같은 것은 상서로운 징조가 감응되고 칭송하는 노래가 집중되었으므로 하늘이 돌보아서 성인을 살게 하여 큰 운수를 타도록 한 것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서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여기에서 임금의 계통을 열고 표준을 세우게 되는 것이고 그저 잘 살게만 하지는 않습니다.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반드시 그 곳을 기록해 두고 신령의 이치를 빛내며 은덕을 갚는 예절을 다하는 것이니 이는 시조(始祖)를 높이고 하늘의 명령을 밝혀서 천하에 위엄을 보이고 만대토록 자랑하자는 것입니다. 신이 보건대, 개성부(開城府)의 목청전(穆淸殿)은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옛 집인데 수도를 옮긴 다음 태종 대왕(太宗大王)이 거룩한 마음으로 옛날을 생각하여 본 목청전에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奉安)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옛 수도의 신하와 백성들을 위로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임진왜란 때에 시위(侍衛)를 허술하게 하였으니 윗사람이나 아래 사람의 원통한 마음을 어느 날인들 잊겠습니까?
숙종(肅宗) 계유년(1693)에 본 개성부(開城府)에 행행(幸行)하였을 때 친필로 비석을 세워 옛 집터라는 것을 밝혔고 영조(英祖) 경신년(1740)에 행행하였을 때는 생원(生員)인 신 한명상(韓命相) 등이 상소를 올려 어진을 다시 봉안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옛 터를 살펴보니 꼭 옛날의 석실(石室)과 같아서 북받치는 슬픔이 어찌 너희들의 진술을 기다려 일어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신묘년(1771)에 진사(進士) 신 최경성(崔景星) 등이 또 상소를 올려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너희들이 올린 상소를 보니 너희들의 정성이 기특하다.’라고 하교하였으나 조정에서 의견들이 일치하지 않아 마침내 빈 문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슬기로운 시조의 옛집에 잡초만 무성하고 침전(寢殿)의 굴뚝만 거친 들 가운데에 우뚝 드러났으므로 길가는 사람들이 슬퍼하고 식견 있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긴 지가 수백 년이나 됩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폐하가 왕위에 오르자 원구단(圜邱壇)에서 태조(太祖)의 제사를 하늘과 함께 지냈고 선원전(璿源殿)을 중수(重修)하여 어진을 봉안하려 하였으니, 아! 이 세상에 효성을 다한 사람으로서 누가 이보다 더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본 개성부의 신하와 백성들은 기뻐서 춤을 추면서 말하기를, ‘이는 바로 하늘의 해를 다시 보게 된 때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신은 폐하의 위엄도 피하지 않고 속에 있는 말을 모두 털어놓는 것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영흥(永興)의 준원전(濬源殿), 완산(完山)의 경기전(慶基殿)은 이 목청전과 다름없으나 여기만은 아직 시설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예법에 흠집으로 되지 않겠습니까? 신이 전후의 조서(詔書)들을 살펴본 데 의하면 거기에 이르기를, ‘역대 제왕들의 능침(陵寢)이 헐고 허물어진 것은 해도(該道) 관찰사(觀察使)가 자세히 살펴서 해부(該部)에 보고하여 수리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왕조에 대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는데 더구나 더없이 중대하고 더없이 공경스러운 시조의 진전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폐하는 이번에 선원전에 어진을 봉안하는 날에 미쳐서 빨리 유사(有司)에 명하여 목청전을 중건하고 태조의 어진을 다시 봉안함으로써 태종(太宗) 때의 옛 제도와 똑같이 하여 위로는 계승하는 효성을 다하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를 위로하기 바랍니다.
또 신이 여기에 계속해서 아뢸 것이 있습니다. 지난 임신년(1872)에 폐하께서 일찍이 이 개성부에 머물게 되었을 때 목청전의 옛터를 직접 보고 흔적을 어루만지면서 몹시 슬퍼하였으므로 지금 그 곳 백성들이 누구나 모두 감탄하고 있습니다. 목청전을 복구한 날에 우리 폐하의 어진을 태조의 어진 옆에 봉안함으로써 우리 폐하의 큰 공로와 큰 위업이 태조에게까지 빛난다는 것을 밝힌다면 만 대를 내려가면서 아름다운 덕을 전하는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것이니, 어찌 한 때 우러러보기에 아름다울 뿐이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못난 사람이라고 말까지 버리지 말고 빨리 받아들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문제는 옛날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으니 어찌 그대의 말을 기다릴 나위가 있겠는가? 그러나 매우 신중히 해야 할 문제이므로 선뜻 윤허할 수 없다. 끝머리에 쓴 말은 심한 망발이기는 하지만 그대에게 무엇을 책망하겠는가?"
하였다.
11월 22일 양력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삭분향(朔焚香)을 행하였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정3품 최문식(崔文植)을 농상공부 농무국장(農商工部農務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1월 23일 양력
포달(布達) 제68호, 〈궁내부 관제 중 증치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增置件〕〉을 【조경묘(肇慶廟), 경기전(慶基殿) 제조(提調) 1인을 전라북도 관찰사(全羅北道觀察使)가 예겸하고, 위장(衛將) 1인은 전주 진위대 대대장(全州鎭衛隊大隊長)이 예겸하며, 화녕전(華寧殿) 제조(提調) 1인은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가 예겸하고, 영(令) 1인은 수원 군수(水原郡守)가 예겸하며, 위장 1인은 수원(水原) 진위대 대대장이 예겸한다.】 반포(頒布)하였다.
11월 24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올봄에 대신(大臣)과 예당(禮堂)이 북쪽 능(陵)을 봉심(奉審)하고 와서 한 보고에 의하면, 각릉(各陵)의 비석에 처마돌과 비각(碑閣)이 없어서 다년간의 비바람에 글자 획이 이지러져 분간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니 옛날을 추모하는 의리로 볼 때 매우 황공한 일이다. 돌을 캐다 다시 세우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으나 나라에 많은 근심이 연거푸 제기되어 아직까지 못하고 있다. 해도(該道)의 도신(道臣)을 시켜 고쳐 세울 방도에 대하여 전적으로 맡아 가지고 감독하여 빨리 하도록 하며 준공을 고하고 사유를 고하며 날짜를 정하는 일들도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도신(道臣)에게 물어 본 다음 마련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각 능의 비석의 음기(陰記)는 내가 지어서 내려 보내겠다."
하였다.
총호사(總護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산릉(山陵)을 이미 군장리(群場里)로 정하였으니 화소(火巢)의 경계를 다시 정해야 할 것입니다. 장례원(掌禮院) 및 내부(內部)의 장관(長官), 도감(都監)의 제조(提調),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는 해당 지방관을 데리고 가서 간심(看審)하여 경계를 정하라고 미리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종2품 김종규(金宗圭)와 김만수(金晩秀)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 민영철(閔泳喆)을 경부 협판(警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군부 대신 임시서리(軍部大臣臨時署理) 박제순(朴齊純)이 아뢰기를,
"금년 1월 3일 각 처소에 있는 군근전(軍根錢)과 토지는 군물조사위원(軍物調査委員)이 사실대로 조사하여 팔아야 할 것은 팔고 찾을 것은 찾아서 일체 실어 올려 보내게 하자는 내용으로 아뢰어 아뢴 대로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黃海道) 두 도(道)에 있는 군근전은 벌써 조사하여 실어 올려 보냈으며 해당한 토지를 판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건대 둔전를 싼 값으로 팔아 본전이나 찾아내는 것은 도리어 나라 토지로 놓아두고 백성들에게 경작하게 하여 해마다 도조(賭租)를 받는 것만 못할 것 같습니다. 채 팔지 못한 것은 그대로 두고 이미 판 것도 도로 물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조정희(趙定熙)가 아뢰기를,
"함경남도 관찰사(咸鏡南道觀察使) 김종한(金宗漢)의 보고를 보니, ‘본도(本道)의 각릉(各陵)과 각전(各殿)에 제사지내는 의식은 더없이 공경스럽고 더없이 중대한데도 개혁 이후로 제사 음식에 관한 일들을 수복(守僕)들만 시켜 거행하게 하므로 매우 소홀하게 되고 있습니다. 개성부(開城府)의 예대로 본 도에 분봉상사 주사(分奉常司主事) 2인을 두되 도내(道內)의 문벌과 국량이 있는 사람을 도에서 천거하여 구임(久任)으로 택차(擇差)하여 1인은 함흥(咸興)에 두고 1인은 영흥(永興)에 두어 능(陵)과 전(殿)에 쓰는 제사 음식을 정결하게 하는 일을 전적으로 맡아 거행하게 하고, 만약 부지런히 하지 않아 정결하지 못하게 하는 폐단이 있으면 본 도에서 적발하여 규탄하게 한다면 공경하고 삼가는 도리로 볼 때 사체에 부합될 것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제사 규례가 얼마나 소중하고 근엄한 것입니까? 그런데 다만 수복들을 시켜 거행하게 한 것은 과연 사체에 맞지 않습니다. 지금 이 도신이 분봉상사를 설치할 것을 청한 것은 제사 규례를 중시하고 제사 음식을 정결하게 하자는 뜻으로 보아 원칙에 부합됩니다. 그러나 전례(典禮)를 새로 정하는 문제이므로 신의 장례원(掌禮院)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상께서 재결(裁決)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능이 있는 군(郡)에 분봉상사를 두는 예가 있으나 함경도(咸境道)의 8개 능과 1개 전에만 아직 설치하지 못한 것은 열성조(列聖朝)에서 미처 못 한 일이다. 청한 대로 분봉상사를 두되 주사를 적임자로 임명하지 못하면 뒷날의 폐단을 말하기 어렵게 될 것이니 본 장례원에 명하여 법 규례를 충분히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11월 25일 양력
포달(布達) 제69호, 〈궁내부 관제 중 증치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增置件〕〉을 【함경남도(咸鏡南道) 분봉상사 주사(分奉常司主事) 판임관(判任官) 2명】 반포(頒布)하였다.
11월 26일 양력
종2품 민상호(閔商鎬)를 통신원 총판(通信院總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1월 27일 양력
법부 대신 임시서리(法部大臣臨時署理) 김영준(金永準)이 아뢰기를,
"평리원(平理院)의 보고를 받아보니, 피고 이용준(李龍俊)과 박태성(朴泰成)은 선원전(璿源殿) 수복(守僕)으로서 불이 난 그날 밤에 입직(入直)하면서 각성하여 살피지 않았고, 윤태진(尹泰鎭)과 장문업(張文業)은 전수(典守)로서 입직하면서 역시 각성하여 살피지 않았으며 이유태(李有泰)는 차지 내관(次知內官)으로서 상시적으로 잘 살피지 않아서 마침내 큰 변이 일어났으니 그 사실이 공술에서 명백해졌습니다. 피고 이용준, 박태성은 《대명률(大明律)》의 ‘궁궐에 불을 놓은 자’에 대한 율(律)을 적용하여 교형(絞刑)에 처하고 윤태진과 장문업도 같은 율로 조율하고 역시 ‘수령(首領)으로서 공적인 죄를 졌을 때는 서리(胥吏)보다 한 등급 감한다.’는 법조문을 적용하여 태형(笞刑) 100대를 치고 종신 징역에 처할 것이며, 이유태도 같은 율로 조율하여 역시 ‘이관(貳官)은 수령보다 한 등급 감한다.’는 법조문을 적용하여 태형 100대를 치고 징역 15년에 처하는 것으로 처리하자는 내용으로 아룁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이와 같이 의율(擬律)하는 것은 물론 적당하다. 그러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였고 죄가 미심스러우면 가벼운 편을 따르는 것이 도리어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선대 임금의 덕을 체현하는 것이니 죄인 이용준과 박태성은 모두 특별히 한 등급을 낮추어 종신 유형에 처하며 그 밖의 죄인도 모두 등급을 낮추어 유배(流配)하라."
하였다.
11월 28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오는 음력 10월 11일은 곧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탄신일이다. 진전(眞殿)에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한 뒤에 불행하게도 화재의 변고가 났으므로 인정과 예절을 펴지 못한 짐의 슬픈 마음은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날에 흥덕전(興德殿)에 작헌례(酌獻禮)를 친행(親行)하겠으며 제문(祭文)도 직접 지어서 내려 보내겠다."
하였다.
탁지부 협판(度支部協辦) 고영희(高永喜)를 농상공부 협판(農商工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내장원 경(內藏院卿) 이용익(李容翊)을 탁지부 협판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고, 이어서 내장원 경의 사무를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양지아문 총재관(量地衙門總裁官) 심상훈(沈相薰)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옛 수도인 개성(開城)은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천명(天命)을 받은 곳이므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있던 옛 집에 목청전(穆淸殿)을 세우고 태조의 영정(影幀)을 모신 것은 바로 우리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효성으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훌륭한 처사로서 경기전(慶基殿), 준원전(濬源殿)과 똑같이 높이 모셔야 할 것입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각이 황폐해지고 섬돌과 주춧돌은 흙에 묻혀 만년토록 우러러보면서 의지할 곳이 없게 되고 백 대를 내려오는 원한이 더욱더 새로워집니다. 이로 인해 열성조(列聖朝)께서 여기에서 비감(悲感)을 일으키고 사모하는 마음을 보태 담을 둘러쌓아 보호하라는 명이 있었고 또한 비석을 세워 표시하는 조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각을 다시 짓는 일은 아직도 겨를을 내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조정의 흠인 동시에 오늘을 기다리고 있는 일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삼가 보건대, 황제 폐하는 500년에 걸친 빛나는 운수를 이어받아 가지고 억만년토록 안전할 터전을 굳건히 하였으며 정사에는 법대로 하기에 힘쓰고 효성에는 근본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여 폐지된 예절을 모두 일으키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청전을 이제 중건하고 다시 잘 받드는 일은 조상이 이룩하여 놓은 것을 자손이 계승하는 거룩한 덕행으로 볼 때 실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전에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신 이명철(李命喆)이 상소를 올려 청한 데서도 공의(公議)가 모두 같다는 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감히 주제넘은 것도 헤아리지 않고 황공함을 무릅쓰고 진달하는 바입니다. 폐하는 계승하는 의리를 생각하시고 일의 중대함을 생각하시어 신이 올린 상소의 내용을 조신(朝臣)들에게 물어서 되도록 인정과 예의에 맞게 빨리 일을 시작하도록 한다면 이보다 더 큰 축원이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목청전에 태조 고황제의 영정을 봉안한 것은 나라를 세운 초기부터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는데 아직도 전각을 짓지 못한 것은 바로 열성조에서도 미처 하지 못한 일이다. 이번에 경이 한 말은 선대를 받들자는 데서 나온 것이니 매우 칭찬할 만하다. 마땅히 아래에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방금 중신(重臣)이 올린 상소에 대하여 비답(批答)을 내렸는데 일이 중대한 만큼 2품 이상의 관리들이 의정부(議政府)에 모여서 의견을 모아 제출하라."
하였다.
11월 30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종묘(宗廟)의 동향 대제(冬享大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고 이어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모레 흥덕전(興德殿)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다음 옮겨 모사한 영정(影幀)의 초본(初本)을 봉심(奉審)하겠다. 동궁이 배참(陪參)하는 절차는 규례대로 마련하라.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종친(宗親), 참정(參政), 찬정(贊政), 각부(各府)와 각부(各部)의 대신(大臣)과 의장(議長)은 들어와 보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경효전(景孝殿) 동향 대제(冬享大祭)는 대신(大臣)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고 일체 친제(親祭)의 규례대로 마련하라. 제관(祭官)은 그대로 쓰고, 백관(百官)은 입참(入參)하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조정희(趙定熙)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정1품 김영철(金永哲)을 장례원 경(掌禮院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회계원 경(會計院卿) 민치헌(閔致憲)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생각건대 혼인은 사람에게 있어서 큰 윤리입니다. 옛 임금이 예법(禮法)을 제정하면서 군자(君子)는 부부가 한 생을 함께 늙고 열녀는 두 번 시집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만 대를 두고 어길 수 없는 정상적인 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형편에 따라 적당히 변통하여 처리하는 것도 역시 임금이 정한 제도로 되기 때문에 호양 공주(湖陽公主)가 송흥(宋興)을 택한 데 대하여 광무제(光武帝)는 그르다 하지 않았고, 범씨(范氏)의 아내였던 자기 어머니가 주씨(朱氏)에게 재가한 데 대하여 문정공(文正公)은 수치로 여기지 않았으니 그것은 풍속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왕조에 이르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좌윤(左尹) 신 권시(權諰)에게 회답하는 편지에 이르기를, ‘주공(周公)은 예법(禮法)을 제정하면서 어찌하여 재가한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에 대한 복(服)을 제정하였겠습니까? 주공이 어찌 예법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았겠으며 또 어찌 재가하지 않는 것이 예법에 맞는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정자(程子)가, 「과부는 재가(再嫁)할 수 없다.」고 말하고도 자기 생녀(甥女)를 재가하게 하였는데, 이에 대해 주자(朱子)가 설명하기를, 「큰 원칙은 이러하다.」 하였습니다. 오늘의 현자가 도리어 옛날의 주공과 정자, 주자보다도 더 현명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과히 멀지 않은 옛날에 개가한 어머니에게서 난 아들은 청환(淸宦)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당시 사대부들이 예의를 숭상하고 벼슬자리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고, 여자의 행실을 가르치는 것도 원칙만 알고 임시적인 변통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항간의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미쳐서 그들도 절개를 지키지 않는 데 대해서는 말하기도 부끄러워하여 드디어 재가는 나라의 큰 금기(禁忌)로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주남(周南)〉, 〈소남(召南)〉의 옛 풍속이 방탕한 풍속을 일변시킨 것과도 같았으니 훌륭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당초에 법을 세운 뜻은 역시 형벌을 주어 재가를 엄격히 방지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처롭게도 청춘 나이에 하늘처럼 믿던 남편을 갑자기 잃고 보니 한창 나이의 처지가 가련하게 되었습니다. 낮에도 혼자서 우두커니 있는 모양과 밤에 잠자리에 들어도 시름겨워 탄식하는 소리를 보고 듣는 사람은 창자가 찢어지고 뼈가 저려 옵니다. 새도 쌍이 있고 신도 짝이 있는데 사람으로서 그렇지 못하기에 억울한 생각이 쌓여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남편이 없는 늙은이에 대해서도 나라의 정사에서 마땅히 먼저 돌보아주고 있는데 더구나 젊은이에 대해서야 말할 것이 있습니까? 개혁 이후로 사리를 아는 사람들은 먼저 개가하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을 확고한 논의로 삼고 있으면서도 형식을 차리는 것이 버릇으로 되고 옛 풍습에 얽매여서 애통하게 울부짖던 여인을 다시 아내로 데려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혹시 데려간 사람이 있는 경우에도 남들이 침 뱉고 꾸짖을까봐 두려워서 예의로 맞아들이지 못하고 담을 넘어가 끌어오는 짓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역시 예의와 풍속에 어그러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제부터 집에 젊은 나이의 과부가 있으면 반드시 좋은 날을 받고 납폐(納幣)하는 것을 일체 혼인 의식대로 하되 15세부터 20세까지는 첫째 혼인 예식으로 짝을 만들고 30세부터 40세까지는 두 번째 혼인 예식 또는 세 번째 혼인 예식으로 짝을 만들 것이며 이것을 넘긴 자는 때를 놓친 것으로 내버려 두며 이것을 어긴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풍속이라고 배척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부모가 권하고 동네에서 깨우쳐 주어도 끝내 고집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않으면 꼭 그 뜻을 빼앗지는 말고 칠거지악(七去之惡)을 엄격히 밝혀 주고 강제로 시집보내는 것을 엄금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고을에서 행해지고 온 국가에서 본받게 되면 안에는 원망하는 여자가 없고 바깥에는 홀아비가 없게 된다면 기막힌 운명도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고 우울하게 지내던 것도 도리어 경사스럽게 되어 이 세상이 화목한 지역이 될 것입니다. 신의 이 말은 감히 예법을 허물고 풍속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제왕들의 공통된 제도를 따르자는 것입니다. 폐하는 신의 속마음을 생각해주어 변변치 못한 말이나마 널리 채택하고 신의 소본(疏本)을 의정부(議政府)와 중추원(中樞院)에 내려 보내어 개가하는 규례를 토의 결정하여 중앙과 지방에 알리기 바랍니다. 이리하여 한 명의 백성도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하고 한 명의 여자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천만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청한 대로 의정부와 중추원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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