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양력
【음력 신축년(辛丑年) 3월 13일】 종1품 민영규(閔泳奎)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원본】 45책 41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0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종1품 민영규(閔泳奎)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포달(布達) 제74호, 〈궁내부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반포하였다. 【궁내부(宮內府) 소속 직원 철도원 관제(鐵道院官制) 중에서 감독(監督) 이하 ‘수시 증감’ 4자를 삭제하고, 감독 2인을 3인으로, 기사(技師) 3인을 6인으로, 주사(主事) 3인을 6인으로, 기수(技手) 2인을 3인으로 고치고 증치하는 철도 과장(鐵道課長) 1인, 문서 과장(文書課長) 1인, 회계 과장(會計課長) 1인은 기사 중에서 3인이 겸임한다.】
【원본】 45책 41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09면
【분류】사법-법제(法制)
5월 2일 양력
육군 부장(陸軍副將) 유기환(兪箕煥)을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용선(李容善), 학부 협판(學部協辦) 민영찬(閔泳瓚), 철도원 감독(鐵道院監督) 민영선(閔泳璇)에게 모두 특명전권공사를 겸임하도록 하였으며, 정3품 한인호(韓麟鎬)를 내부 회계국장(內部會計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목청전 중건도감(穆淸殿重建都監)의 제조(提調) 조희일(趙熙一)을 소견(召見)하였다.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영정을 임시로 봉안한 행궁(行宮)을 봉심(奉審)한 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5월 3일 양력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유기환(兪箕煥)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정2품 이봉의(李鳳儀)를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 황기연(黃耆淵)을 궁내부 특진관에, 태의원 경(太醫院卿) 김학진(金鶴鎭)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특진관 심상훈(沈相薰)을 태의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외부대신서리 외부협판(外部大臣署理外部協辦) 최영하(崔榮夏)가 아뢰기를,
"재외(在外) 공사관(公使館) 소속 관원들이 사무 처리를 매우 어려워하니, 초창기에 참서관(參書官) 한 자리를 권설(權設)하고 외국인을 선발하되 수시로 임명하는 것이 사리에 부합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부(本部)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삼가 성상의 재결을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프랑스 사람인 살타렐〔薩泰來 : Saltarel, P.M.〕 【쌀달랠】 을 프랑스주재 공사관 참서관(參書官)으로 임명하여 공사(公使)의 사무를 돕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 4일 양력
전권공사(全權公使) 성기운(成岐運)을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 유기환(兪箕煥)을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에 겸임시켰다.
전권공사(全權公使) 성기운(成岐運)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재주와 학술이 부족하고 문벌과 명망이 보잘것없어서 안으로는 성상의 명을 받들어 집행할 수 없고 밖으로는 무거운 임무를 잘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신의 본말(本末)에 대해서는 신 자신도 분명하게 잘 알고 있으며 명철하신 성상께서도 환히 아실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이 맡은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직함을 속히 체차하시고 적임자를 골라 제수하심으로써 외국과의 교제를 중하게 하소서.
그리고 생각건대, 신은 일에 무능하여 옛날의 이른 바 남의 나라 실정을 속속들이 알아가지고 돌아왔다는 사람에게 비할 바가 아니지만 이번 사행(使行)에 대략 한두 가지 소견이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유신(維新) 이래로 30여 년 동안에 구라파와 미국을 모방하여 부강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풍도와 기개는 매우 굳세고 인물들은 뛰어나고 민첩해서 일을 하는 데는 용감하고 자립하는 데 신중하여, 결코 남의 아랫사람 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백성들과 나라가 서로 뭉쳐 의지하고, 위아래가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칩니다. 모든 관청에 방치되는 직임이 없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잘되는 것은 절대로 그 사람들이 다 현명하고 지혜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규정이 명백히 갖추어져 있고 법망이 잘 짜여서, 보통 이하의 사람도 폐단 없이 준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진보하여 스스로 강해지는 것으로 충분히 본받을 만한 것이기에 이에 덧붙여 진달하니, 다시 살펴보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끝에 진술한 것은 현행 정사에 매우 적절한 내용이다. 공사의 직함에 대해서는 사임을 말해서는 안 되지만, 주재하는 임무는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5월 5일 양력
종2품 윤덕영(尹德榮)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육군 부장(陸軍副將) 이재순(李載純)에게 호위대 총관(扈衛隊總管)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5월 6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산릉을 이미 재혈(裁穴)하였으니 이제 공사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오른쪽 자리를 비우는 제도는 일체 장릉(長陵)과 명릉(明陵)의 규례대로 하도록 도감(都監)에 분부하라."
하였다.
5월 9일 양력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의 두 본궁(本宮)을 특별히 크게 수리할 때와 준원전(濬源殿)의 당가(唐家)를 수리할 때, 의릉(義陵)과 지릉(智陵) 능 위의 사초를 수개(修改)할 때 감독한 관리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도신(道臣) 김종한(金宗漢), 영흥 군수(永興郡守) 이윤재(李允在), 함흥 군수(咸興郡守) 이준상(李俊相), 홍원 군수(洪原郡守) 홍재주(洪在周), 단천 군수(端川郡守) 이현재(李賢在), 북청 군수(北靑郡守) 윤헌섭(尹憲燮), 문천 군수(文川郡守) 이상희(李象羲), 판사(判事) 조경구(趙經九), 군수(郡守) 김용진(金容鎭), 홍혁주(洪赫周), 이장직(李長稙), 정인국(鄭寅國), 민병성(閔丙星), 이종성(李種聖), 황연수(黃演秀), 이재하(李載夏), 이재기(李載紀), 이근홍(李根洪), 이교영(李喬永), 김건한(金建漢), 유기준(兪起濬), 정봉시(鄭鳳時), 4품 이연광(李演光), 이우규(李祐珪), 홍종윤(洪鍾奫), 5품 이범팔(李範八), 6품 이승린(李承麟), 오정선(吳正善), 김기조(金基肇), 민달식(閔達植), 황긍연(黃兢淵), 박봉주(朴鳳柱), 김영순(金永順), 이규승(李奎承), 이중옥(李重玉), 김직수(金稷洙), 임연재(任淵宰), 윤자용(尹滋容), 박제경(朴齊絅), 윤택영(尹澤榮), 김영한(金榮漢), 김낙헌(金洛憲), 심정섭(沈定燮), 민형기(閔亨基), 참서관(參書官) 박제선(朴齊璿), 윤성보(尹性普), 서병숙(徐丙肅), 신명호(申命祜), 조동선(趙東璿), 구완희(具完喜), 준원전 영(濬源殿令) 이종한(李鍾漢)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5월 10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이호준(李鎬俊)이 졸(卒)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 중신(重臣)은 심후한 자태와 넓은 도량을 가지고 대대로 충성과 지조를 지키면서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일하였다. 노쇠할수록 오히려 의지할 만하였는데 뜻밖의 병으로 이제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슬픔을 무슨 말로 다하겠는가? 졸한 전 특진관 이호준의 상장(喪葬)에 필요한 물건을 후하게 수송하고, 비서원 승(祕書院丞)을 보내어 장례 전에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시호를 내리는 은전은 시좌(諡座)를 기다려 거행하라."
하였다.
5월 11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 민영휘(閔泳徽)를 장례원 경에, 종2품 이근용(李根)을 함경북도 관찰사(咸鏡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정3품 이교석(李敎奭)과 민창호(閔昌鎬)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으며,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홍순형(洪淳馨)에게 명헌태후궁 대부(明憲太后宮大夫)를 겸임하게 하고,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이지용(李址鎔)에게 군부 대신(軍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하라고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명헌 태후(明憲太后)에게 진작(進爵)하여 경사를 축하할 것을 이미 몇 해 전에 명을 내렸는데, 겸손하게 사양하는 하교를 계속 받아 그동안 즉시 거행하지 못하였다. 지금 보령(寶齡)이 71세가 되는 경사로운 해를 맞이하여 정리와 예의를 펴지 않을 수 없으니, 진찬(進饌)할 날짜를 음력 5월 보름 경으로 추택(推擇)하여 들이고, 여러 가지 거행할 일은 궁내부(宮內府)와 장례원(掌禮院)에서 전적으로 맡아서 하게 하되, 명헌태후궁 대부(明憲太后宮大夫)도 똑같이 주관하라."
하였다. 이어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휘(閔泳徽), 명헌태후궁 대부 홍순형(洪淳馨), 궁내부 대신서리(宮內府大臣署理) 윤정구(尹定求)를 모두 진찬소 당상(進饌所堂上)에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5월 13일 양력
정2품 김석근(金晳根)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의 시조인 김선평(金宣平)은 신라 말 역적 견훤(甄萱)의 난리 때 고창(古昌)의 성주(城主)로서, 고을 사람인 권행(權幸), 장길(張吉)과 함께 고을을 가지고 고려 태조를 도와 역적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원수를 갚기를 장사도(張司徒)가 한(漢) 나라를 도와 원수를 갚은 것처럼 하니, 고려의 왕업이 이로 인하여 이룩되었고 그 일대가 보존되어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고려 태조는 공로를 논하여 벼슬을 제수하였는데, 김선평은 대광(大匡)으로 삼고, 권행과 장길은 다 대상(大相)으로 삼았으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작위는 태사(太師)라고 하였으며, 고창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로 삼았습니다.
그들이 죽자, 안동부의 백성들이 그들의 공덕을 생각해서 사당을 세우고 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사당 제도는 〖신주를〗 한 줄로 남쪽을 향해 배열하였는데, 김 태사의 신주를 동쪽에, 그 다음이 권 태사, 그 다음에 장 태사의 신주를 놓았습니다. 당시 동쪽을 상석(上席)으로 삼았으면 김 태사가 제일 높은 자리가 되고 서쪽을 상석으로 삼았으면 장 태사가 제일 높은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관(史官)의 기록이나 여러 책들의 기록에 의하면 장 태사의 명위(名位)가 제일 아래에 있는 만큼, 서쪽에 놓았다고 해서 미루어 상석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니 김 태사를 마땅히 제일 높은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애당초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은 그 증수기(增修記)를 지어 말하기를, ‘안동부에서는 고려 왕조의 공신 3명의 제사를 주관하는데, 김공 선평, 권공 행, 장공 길이다.’라고 하여 그 명위의 차례를 순전히 역사 기록만을 따르고 믿었으니, 후세의 자손들이 높인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후세의 자손들이 낮춘다고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 권 태사의 자손들은 공정한 논의를 생각지 않고 한갓 저들의 조상을 위해서 이황의 기문(記文)에서 질문에 대답한 말 중에 ‘주(主)’ 자에 대한 내용을 뽑아내고 주향(主享)과 주벽(主壁)의 의미로 해석하여, 저들의 조상에게 술을 먼저 붓는 잘못을 타당한 것이라고 망녕되이 증명하면서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조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황이 취한 정사(正史)의 정론을 한사코 버리려고 하니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사를 거꾸로 지내는 잘못에 대해서는 일찍이 누차 분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영조(英祖) 정해년(1767)에 이르러 하교를 받아 바로잡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 신주의 차례를 바꿔 놓은 읍지(邑誌)가 권씨 가문에서 다시 나왔는데, 그 인물편에서는 버젓이 권 태사를 첫째로, 김 태사를 그 다음으로 만들어 놓고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조상을 내세우기에 급급하기로서니 어찌 연석(筵席)에서의 하교를 공경스럽게 따라야 한다는 의리를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 일이 비록 개별적인 가문 간의 시비에 관계되는 것이지만 가령 저 읍지가 세상에 공공연하게 나돌게 한다면, 성조(聖朝)께서 연석에서 하교하여 바로잡은 것이 장차 오래될수록 분변할 수 없을 것이고, 역대의 정사(正史)도 오래될수록 허언(虛言)이 될까 걱정이 됩니다. 이 읍지가 이미 간행된 이상 그 책 중에서 그 차례를 바로잡는 것이 제일 좋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밝은 칙지를 내리셔서 분명하게 수정하도록 즉시 명령함으로써 선조께서 연석에서 하교한 것을 빛내시고 사관(史官)의 직필(直筆)을 밝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5월 15일 양력
진찬소 당상(進饌所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휘(閔泳徽),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홍순형(洪淳馨), 궁내부 대신서리(宮內府大臣署理) 윤정구(尹定求)이다.】 상이 이르기를,
"회동은 아직 하지 않았는가?"
하니, 민영휘가 아뢰기를,
"연석(漣席)에서 물러간 뒤 마땅히 교방사(敎坊司)에서 회동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미리 품정(稟定)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하니, 민영휘가 아뢰기를,
"회동한 뒤에 품정할 일이 많겠지만 진찬(進饌)하는 장소만은 미리 품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운당(慶運堂)으로 하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헌병 1개 중대를 늘이고 편제를 짜서 들여오도록 하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휘(閔泳徽)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진관 이근수(李根秀)를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5월 16일 양력
정3품 신응선(申應善)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17일 양력
법부 협판(法部協辦) 이재곤(李載崐)에게 대신의 사무를 서리(署理)하게 하고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이용태(李容泰)에게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를 겸임하라고 명하였다.
원수부(元帥府)에서 아뢰기를,
"진위(鎭衛) 5연대 제2대대장의 보고를 보니, ‘소대장(小隊長) 조기설(趙基卨), 김상열(金商說), 강희규(姜熙圭) 등은 삼수군(三水郡)에 나가 주둔할 때 성을 침범하는 청(淸) 나라 비적(匪賊) 400여 명을 격파하였는데, 죽은 자가 2명, 생포된 자가 1명, 부상당하여 실려 간 자가 수십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해당 위관(尉官)들이 연합하여 지키면서 기회를 이용하여 위력을 떨친 것은 지극히 가상한 일이니 응당 논상(論常)해야 할 것입니다. 군사들로 말하면, 평소에 교육 받은 것을 어기지 않았고 위험한 실전에서 명령을 받들어 군대의 위엄을 멀리 떨쳤으니, 역시 매우 가상하고 다행스럽습니다. 앞장선 군사를 조사하여 뛰어난 자를 가려 아래에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적의 침범을 막고 적을 소탕하는 것이 비록 군인의 직분상의 일이기는 하지만 조기설, 김상열, 강희규 등은 앞장서서 용맹을 떨쳤고 위험을 무릅쓰고 이긴 만큼 응당 표창하는 은전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은전(恩典)에 관계되므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군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비적을 소탕한 것은 지극히 가상한 일이니, 위관들은 승서(陞敍)하고 정교(正校) 김영표(金永杓)는 위관으로 승차(陞差)하며, 그 밖의 부교(副校) 이하는 자리가 나는 대로 등급을 올리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진위 5연대 3대대장의 보고를 보니, 소대장 나영훈(羅泳薰)이 5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청나라 비적 150명을 맞아 격파하여 비적들을 소탕하였다고 합니다. 해당 위관이 이런 군공(軍功)을 세운 만큼 응당 논상해야 하나 은전을 구하는 일에 관계되므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승서하라."
하였다.
법부 대신임시서리(法部大臣臨時署理) 조병식(趙秉式)이 아뢰기를,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김정근(金禎根)의 질품서(質稟書)를 접준하니, ‘피고 김광식(金光植)의 안건을 검사(檢事)의 공소(公訴)에 의하여 심리한 결과, 피고가 공초하기를, 작년부터 이따금 미치광이가 되고 싶은 생각이 났는데 올해 음력 정월 4일에도 술김에 정신없이 보문각(寶文閣)에 뛰어들어 창문을 깸으로써 죄가 중벽(重辟)에 이르렀으니 군말없이 지만(遲晩)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실은 피고의 진술에서 명백히 자복하였으니, 피고 김광식을 《대명률(大明律)》 〈적도편(賊盜編)〉, 모반대역조(謀反大逆條)의 모반과 대역(大逆)에 관한 법조문에 비추어 볼 때, 《형률 명례(刑律名例)》 제6조대로 참형(斬刑)에 처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원래 의율(擬律)한 대로 처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상남도 재판소(慶尙南道裁判所)에서 심리한 살옥 죄인(殺獄罪人) 현재천(玄在千)은 그의 아내 박조이(朴召史)와 결혼한 지 5년 만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피고는 갑자기 자기 할아버지가 죽은 것은 박씨가 북어로 뺨을 친 탓이라며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원수를 갚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면서 칼로 그의 아내를 찔러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였으니, 《대명률(大明律)》의 고의로 처첩(妻妾)을 살해한 조문에 비추어 교형(絞刑)에 처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본 도에서 다시 조사한 후에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각 도의 재판소에서 심리한 살옥 죄인 김종근(金鍾根) 등 101명을 교형에 처하는 안건을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합니다.’라고 하니, 윤허하였다.
5월 19일 양력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조병식(趙秉式)을 법부 대신(法部大臣)에,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서정순(徐正淳)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에,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권재형(權在衡)을 의정부 찬정에, 학부 대신(學部大臣) 김규홍(金奎弘)을 농상공부 대신에, 양지아문 총재(量地衙門總裁) 민영소(閔泳韶)를 학부 대신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 민영휘(閔泳徽)를 육군 부장(陸軍副將)에, 군부 대신임시서리(軍部大臣臨時署理) 이지용(李址鎔)을 육군 참장(陸軍參將)에 임용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중하(李重夏)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고(故) 우찬성(右贊成) 하령군(河寧君) 이양(李穰)은 개국원훈(開國元勳)인 의안 대군(義安大君)의 손자로서 태종조(太宗朝) 때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등록되었고, 대대로 충성스럽고 지조가 굳어 덕과 업적이 모두 뛰어났습니다. 결국에는 단종(端宗) 계유년(1453) 난에 목숨을 바쳤으니 당시 여섯 종영(宗英) 중의 하나입니다.
그의 아들과 손자, 종자(從子)와 종질(從姪)들이 함께 참화를 당했으니, 온 가문의 바른 기백이 매우 드물고 빛나서 바로 북두칠성을 달고 무지개를 뚫을 만하였으며, 의연하게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자취는 지조를 지킨 세 정승이나 여섯 신하와 비등합니다. 이에 우리 숙종(肅宗)께서는 ‘두 대에 걸쳐 공로를 세웠고 온 가문이 고상한 절개를 지녔다.〔兩世文勳一門夸節〕’라는 8자의 어필(御筆)을 특별히 내려서 장릉(莊陵)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配享)하고, 또 공주(公州)의 초혼각(招魂閣)과 요당 서원(蓼塘書院)에 신주를 봉안하도록 하셨습니다.
고 처사(處士) 남효온(南孝溫)의 저서에, ‘한 가문의 16명이 모두 계유년과 갑술년(1454)의 참화를 입었으니, 국조(國朝)의 종영들을 상고해 볼 때 특별히 출중하고 드러난 경우이다.’라고 하였으며, 고 정승 신흠(申欽)도 이르기를, ‘계유년과 갑술년의 변란에서 이양 등의 곧은 충성과 큰 절개가 모두 파묻힌 채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향기와 악취는 섞이기 어렵고 천리(天理)는 매우 밝은 만큼 비록 글로 기록한 것은 없지만 세상 사람들의 입은 가릴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예로부터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목숨을 바친 여러 현자들이 모두 소급해서 표창해 주는 은전을 받았건만, 오직 이양은 황실의 가까운 종친으로서 공로와 충절이 이처럼 뛰어났는데도 아직 시호(諡號)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비단 여론(輿論)이 답답해 할 뿐만이 아니니, 어찌 성조(聖朝)에서 표창하고 격려하는 은전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이 글을 내려 보내시어 의정부(議政府)에서 옛 법을 널리 상고하도록 함으로써 훌륭한 시호를 특별히 하사하시고, 이어 조천(祧遷)하지 않게 하는 은전을 시행함으로써 백대의 풍속과 교화를 세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5월 21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윤용식(尹容植)을 천릉도감 제조(遷陵都監提調)로 삼았다.
유배 죄인인 길영수(吉永洙), 박인근(朴寅根), 오성근(吳聖根), 김광식(金光植), 구본순(具本淳)을 모두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5월 23일 양력
육군 부장(陸軍副將) 민영휘(閔泳徽)에게 원수부 군무국 총장(臨時署理元帥府軍務局總長)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고 육군 부령(陸軍副領) 구영조(具永祖)를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24일 양력
일본국 공사(日本國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 함장(艦長) 해군 중좌(海軍中佐) 사에키 곤〔佐伯誾〕, 영국 공사(英國公使) 거빈스〔高斌士 : John H. Gubbins〕,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葛林德 : Victor Collin de Plancy〕를 접견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두 공사가 국서(國書)를 바쳤기 때문이다.
5월 25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5월 26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를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5월 27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 비서원 경(祕書院卿) 조중목(趙重穆)을 소견(召見)하였다. 준원전(濬源殿) 영정을 환안(還安)한 후 복명(復命) 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지나온 고을들에 혹시 백성들의 고통은 없던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이 돌아오는 길에 잇달아 백성들의 호소를 접했는데, 모두 목장(牧場)과 역토(驛土)에서 원래 정한 조세나 도조(賭租) 외에 봉세관(捧稅官)이 몇 배나 억지로 더 거두어들이는 폐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폐단을 혁파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지탱하겠습니까? 봉세관이 거두어들이는 것은 같은 토지에서 이중으로 조세를 매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위 문서를 가지고 백성들을 침해하는 것은 실로 나라의 비용에 보탬이 없으며, 백성들의 고통 중에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백성은 길을 막은 채 원통한 사정을 호소하기를, ‘전에는 어사(御使)로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지금 대신(大臣)이 되어 어찌하여 우리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원컨대 돌아가거든 황제 폐하께 진달하여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대신(大臣)이 백성들을 위로할 수는 없다고 하고서 복명한 뒤에 아뢰겠다고 거듭 타일렀습니다. 이른바 봉세관을 일체 혁파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참작해서 거두어들이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차라리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을지언정 어찌 백성들로 하여금 이 지경으로 피해를 받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거듭 신칙하여 폐단을 없애야 할 것이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봉안(奉安)할 때 배종(陪從)한 전 의관(前議官) 노민재(魯玟在)는 마음을 다하여 거행하면서 밤새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충성과 의리가 가상합니다. 성의를 보이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성의를 보여야 하겠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가자(加資)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능(陵), 전(殿), 궁(宮)의 공사에 의연금을 내어 많은 도움을 준 자가 몇 명 됩니다만, 안변(安邊)의 행궁(行宮)을 수리할 때 자원해서 공사를 마친 최남혁(崔南赫)과, 여(轝)를 멘 군사와 병정(兵丁)을 호궤(犒饋)한 상산 부원군(象山府院君)의 후손 강기환(康基煥) 등은 비록 바라는 마음은 없지만 그 뜻이 가상합니다. 나라에서 성의를 보이지 않을 수 없으니, 해부(該府)의 주사(主事)를 돌려가며 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내용으로 도신(道臣)에게 말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성의를 보여야 하겠는데, 그 중 월등한 사람은 몇 명인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최남혁과 강기환이 제일 낫습니다."
하였다.
5월 29일 양력
법부 대신서리(法部大臣署理) 이재곤(李載崐)이 아뢰기를,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구영조(具永祖)의 질품서(質稟書)를 받고 그 내용을 보니, ‘피고 김태웅(金太雄), 박명중(朴明重), 윤 소사(尹召史), 강문현(姜文賢), 김윤명(金允明), 김원극(金元克), 김형극(金亨克)의 안건을 검사(檢事)의 공소(公訴)에 의하여 심리하니, 피고 김태웅은 5년 전에 귀신이 몸에 붙어서 종적이 섬광(閃光)처럼 빨랐는데, 고금도(古今島)에 있을 때는 꿈에 기이한 아이를 얻었고, 광주군(光州郡)에 가서는 꿈에 하늘이 주는 조복(朝服)을 얻어 몸에 입었으며 하늘이 장검(長劍)을 주면서 위험을 없애고 오래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지리산(智異山)에 가서 기도를 드리려고 운봉산(雲峯山) 안의 동리에 가서 묵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음력 윤8월에 황근묵(黃根墨)을 만나 전후하여 경험한 꿈 징조를 자세히 말하니 황근묵이 피고에게 말하기를, 「너는 하늘이 내려보낸 사람으로서 앞으로 천자(天子)가 될 사람이다. 내가 관상을 보고 또 왼 손바닥을 살펴보니 성인 성(聖)자가 있고, 오른 손바닥에는 우물 정(井)자와 임금 왕(王)자가 있으니 이것은 큰 성인 격이다. 내 집이 진주(晉州)의 진주암(眞珠庵)에 있으니 뒤에 찾아오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피고가 그의 말대로 찾아갔더니, 황근묵이 나무 도장〔木圖章〕과 《경갑역(京甲易)》등의 물건을 꺼내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내 집 뒤 진주산(眞珠山)에서 100일 동안 기도를 드리고 나서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축문(祝文)을 주었는데 그 글에, 「정수민(鄭秀民)은 나라 백성의 성스러운 천자가 될 것이고, 황기(黃璣)는 유학자와 불자(佛子)의 성스러운 천자가 될 것이다.」라는 등등의 말이 써 있었습니다.
피고는 황근묵, 박명중, 고두산(高斗山), 강위련(姜渭連), 강문현등 10여 명과 함께 하루 건너 기도를 드리면서 여러 번 길몽(吉夢)을 꾸었는데, 그 뜻은 천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황근묵이 피고에게 말하기를, 「네가 천자가 된 후 박명중과 고두산은 정승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피고는 또 황근묵의 중매로 윤씨 성을 가진 여자와 혼인을 하고 살았습니다. 9월 초에 우연히 한 꿈을 꾸었는데, 지리산 산신령이 두 아이를 안아다 주는 것이었으므로 괴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후로 피고와 처인 윤씨 성을 가진 여자가 다같이 잉태하여 뱃속에서 아이가 움직인다고 하는 여러 가지 황당한 말을 하였습니다. 비록 진실이 결여되나 일이 흉악하고 고약하기 그지없습니다.
피고 박명중은 지난해 음력 9월에 묏자리를 구하던 차에 황근묵을 만났습니다. 황근묵이 《경갑역》을 내보이며 말하기를, 「나의 큰 선생이 여기에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강위련의 집에 같이 가서 김태웅(金太雄)을 만났는데, 그날 밤에 황근묵과 김태웅이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그 축문을 보았더니, 「천자 정수신(鄭秀臣)」 이란 구절이 있었습니다. 괴이해서 물으니, 황근묵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주역(周易)》을 읽고 이치를 통달했다. 운수를 보건대 경자년과 신축년에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온 나라의 바른 선비들이 모두 운봉(雲峰)과 함양(咸陽) 사이에 모이고 아홉 사람의 정씨가 서로 싸울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아홉 정씨를 쓸어버리고 진짜 천자가 될 사람은 바로 김태웅이다. 그의 성은 김씨가 아니라 정씨이며 이름은 수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책 속에서 글을 적은 종이를 꺼내 보이기에 피고가 보고 난 뒤, 황근묵이 또 피고에게 말하기를, 「임인년과 계묘년에 세상이 어지러워질 때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모두 함양과 운봉 등지에서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황근묵의 생일날 피고는 장기포(張基包)와 함께 찾아가서 술과 떡을 얻어먹었고, 하늘에 지낸 제사의 축문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피고는 정승이 된다는 말을 애초에 황근묵에게서 듣지 못했으며, 진주부(晉州府)에 잡혀가서 취초(取招) 받을 때, 고두산과 피고가 수령과 감사가 된다는 말을 김태웅이 횡설수설 공술(供述)하는 자리에서 들었습니다.
피고 윤 소사는 지난해 음력 윤8월에 황근묵의 꼬임에 빠져 그 달 25일 이춘협(李春俠)과 함께 황가네 집에 갔더니 황근묵이 그 여자에게 권하기를, 「김태웅의 손바닥에 임금 왕자와 우물 정자, 성인 성자가 있으니 내세에 틀림없이 큰 성인이 될 것이다. 7년 동안 지리산에 기도를 드리고 꿈에 나무 검과 나무 도장을 얻었으니 내세에 천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각 처의 부유한 사람들이 나와 모두 친분이 있으니 너희 내외를 주리게 하거나 추위에 떨게 하지는 않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각이 없는 탓으로 할 수 없이 혼인을 하고 한집에서 함께 살았으며, 그 해 9월에는 아이를 배게 되었습니다. 그 후 김태웅이 기도를 드릴 때, 같은 무리 30여 명이 모여 소고기, 돼지고기, 술, 떡과 같은 물건을 차려 놓고 목욕재계를 하고는 산에 올라가 축문에다 「천자 정수신」이라는 말을 썼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애초에 함께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피고 강문현은 황근묵과 이웃에 살면서 서로 친했는데 피고의 형인 강위련이 황근묵이 시키는 대로 자기 집에다 김태웅을 머물게 하였습니다. 황근묵이 늘 김태웅은 이웃에 사는 정 노인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해 9월에 황근묵이 요청하여 가보았더니, 황근묵이 김태웅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기이한 꿈을 꾸었으니 반드시 내세에 천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피고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섬뜩하고 뼈마디가 싸늘해서 대답하기를,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나라에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인데, 설사 꿈 징조가 있더라도 어찌 이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는가? 당장 집으로 돌아가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드릴 때 종종 가서 참가하였다는 것은 김태웅의 공사(供辭)에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피고 김윤명은 이웃에 사는 황근묵이 김태웅이 머물고 있는 강위련의 집으로 오도록 하고 후하게 환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큰 선생이다.」라고 하기에 여러 날 상종하였습니다. 김태웅이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므로 김원극 형제에게 그의 행장(行裝)을 꾸려서 보냈으며, 김태웅이 지술(地術)을 잘보는 신안을 가졌다고 하길래 시험해 보려고 하동군(河東郡) 백운산(白雲山)에 함께 갔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김태웅을 취초할 때에야 스스로 천자라고 하면서 귀신이 자기 몸에 붙어 의탁하고 하늘이 준 옷을 입었다거나 하늘이 장검을 주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그러나 김태웅을 따라갈 때, 황근묵이 피고에게 권하기를, 「김태웅이 이번에 《경갑역》을 가지고 하동군에 가니 틀림없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너는 꼭 따라가야 한다.」라고 하기에 그 말대로 따라갔다는 것은 도(道)와 군(郡)에서 취초한 내용에 명백히 실려 있건만, 여러 번 신문하였는데도 버티면서 남에게 넘겨씌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묏자리를 잡기 위해 따라갔다고 말한 것은 꾸며낸 말이라는 것이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피고가 김태웅과 여러 날 상종하였다는 것을 선뜻 자복한 이상, 천제(天祭)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럴 리가 없습니다.
피고 김원극과 김형극은 모두 산골의 어리석은 백성들로서 나이가 어리고 지각이 없습니다. 지난해 음력 9월에 황근묵이 와서 말하기를, 「김태웅은 풍년과 흉년, 지리, 점치기〔卜筮〕 등의 이치를 통달한 사람으로서 손님들 찾아오는 것이 너무 시끄러워 궁벽하고 조용한 곳으로 피하려고 한다. 그러니 얼마동안 방을 빌려주어 그가 묵도록 하라.」라고 하기에 그의 달콤한 꼬임에 넘어가 집에 묵도록 하였습니다.
그 달 28일 김태웅이 하동 민포군(民砲軍)들이 염탐하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스스로 겁에 질려 피신할 때, 김윤명이 시키는 대로 품삯을 후하게 주기 때문에 그의 행장을 지고 따라갔다가 하동에서 붙잡혔습니다. 그러니 꼬임에 넘어간 사실은 불쌍하지만 집에 묵게 하고 따라간 데 대해서는 완전히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황근묵, 고두산, 강위련은 도망가서 붙들지 못하였습니다.
이상 여러 사실은 피고 등이 진술한 공술에서 명백히 자복하였습니다.
피고 김원극과 김형극은 《대명률(大明律)》 〈잡범편(雜犯編) 불응위조(不應爲條)〉의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여 사리로 볼 때 중한 자에게 적용하는 율문(律文)에 따라 모두 태(笞) 80대를 치겠습니다.
피고 김태웅(金太雄)은 《대전회통(大典會通)》 〈추단조(推斷條)〉의 상(上)에게 저촉되는 불온한 말을 하여 인정과 사리로 볼 때 매우 해로운 자에게 적용하는 율문, 《대명률》 〈제사편(祭祀編)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의 바른 도를 어지럽히는 간사한 방법으로 그림을 은근히 감추고 향을 피우며 많은 사람을 모았거나 밤중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며 좋은 일을 한다는 핑계로 아래 백성들을 선동하고 유혹시킨 주모자에게 적용하는 율문, 《대명률》 명례(名例) 중 두 가지 죄가 동시에 드러났을 경우에는 무거운 쪽으로 따진다는 법조문에 적용시켜 《형률명례》 제6조대로 참형(斬刑)에 처할 것입니다.
피고 박명중, 윤 조이, 강문현, 김윤명은 《대명률》 〈제사편 금지사무사술조〉 무당의 간사한 술법을 금지하는 조목 중 바른 것을 문란시키는 간사한 방법으로 그림을 은근히 감추고 향을 피우며 많은 사람을 모았거나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며 좋은 일을 한다는 핑계로 아래 백성들을 선동하고 유혹시킨 자에게 적용하는 율문에 따라 태 100대를 쳐서 종신 징역에 처할 것을 선고(宣告)하겠습니다.
이를 질품(質稟)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해당 범인 박명중, 윤 조이, 강문현, 김윤명은 원래 의율(擬律)한 대로 처결하라는 뜻으로 해원(該院)에 명령하고, 김태웅은 원래 의율한 대로 교형(絞刑)에 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각도 재판소에서 심리한 살옥죄인(殺獄罪人) 장 조이(張召史) 등 30명을 교형(絞刑)에 처하는 안을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하니, 윤허하였다.
5월 30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윤용선(尹容善)을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이용태(李容泰)를 칙임관 2등에 서임하고 일본국에 주재 하라고 명하였다.
5월 31일 양력
태의원 경(太醫院卿) 심상훈(沈相薰)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이지용(李址鎔)에게 태의원 경을 겸임하게 하였다. 내장원 공세 과장(內藏院貢稅課長) 구완희(具完喜)를 공사관 2등 참서관(公使館二等參書官)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4등에 서임하였으며, 일본국에 주재하라고 명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가 아뢰기를,
"수릉(綏陵)의 기신(忌辰) 망곡례(望哭禮)를 규정한 제도대로 하는 일을 전에 이미 신칙을 내렸습니다. 이번 음력 4월 17일에 수릉의 기신제 망곡례를 전례대로 마련(磨鍊)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기신날 망곡은 정리와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중화전(中和殿)의 권봉처소(權奉處所)가 매우 가까워서 여러 가지 의절(儀節)에 미안한 점이 많겠으니 마련하지 말라."
하였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서정순(徐正淳)이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제주목(濟州牧) 대정군(大靜郡)에서 백성들의 동요가 있다는데 듣기에 매우 놀랍습니다. 이것을 빨리 사핵(査覈)하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 정3품 박용원(朴用元)을 안핵사(按覈使)에 차하(差下)하여 며칠 안으로 내려가서 전후 곡절을 철저히 사핵하여 등문(登聞)토록 함으로써 법대로 처리하소서. 이처럼 온 섬이 소란할 때에 민심이 몹시 염려되니 각별히 위무(慰撫)하라는 내용으로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표훈원 총재(表勳院總裁) 민영환(閔泳煥)이 아뢰기를,
"방금 프랑스 파리 만국 박람회 부원〔法國巴璃萬國博覽會副員〕 민영찬(閔泳瓚)의 보고를 보니, ‘박람회 때 대한 박물국(大韓博物局)에서 일을 본 여러 프랑스 사람들이 수고가 퍽 많았으므로 그 공로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각각 해당한 사람의 성명을 적어 올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공적에 대하여 응당 서훈(敍勳)해야 하겠으므로 신의 원(院)에서 토의를 거친 후 서훈할 해당 등급을 개록(開錄)하였으니 성상께서 재결해 주소서."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고, 각각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하였다. 【훈 2등으로 팔괘장을 하사한 사람은 프랑스 파리 만국 박람회 대한 박물국의 총무원(總務員)이었던 자작(子爵) 미르렐〔米模來 : Mimerel〕과 사무원(事務員)이었던 매인〔梅仁〕이고, 훈 3등으로 팔괘장을 하사한 사람은 사무원이었던 총영사(總領事) 룰리나〔路里羅 : C. Roulina〕 이며, 훈 4등으로 팔괘장을 하사한 사람은 건축사(建築師) 페레〔幣乃 : Ferret〕, 사무원인 퀴랑〔古恒雷物仰 : Curant, M.〕, 공사관 참서관(公使館參書官) 살타렐〔薩泰來 : Saltarel, P.M.〕이다.】
【원본】 45책 41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12면
【분류】외교-프랑스[法] / 인사-관리(管理)
법부 대신서리(法部大臣署理) 이재곤(李載崐)이 아뢰기를,
"창릉(昌陵)의 실화(失火) 원인을 심핵(審覈)하는 일에 대해 전후하여 신칙한 것이 어떠하였는데, 여러 달을 끌어오면서 줄곧 태만하게 하여 끝내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그저 재관(齋官)과 원역(員役)들의 잘못으로 구차하게 마감하여 보고하였습니다. 일의 체모로 따져보아 그냥 둘 수 없으니 해당 검사(檢事) 이휘선(李徽善)에게 2개월 감봉(減俸)의 형전(刑典)을 시행하소서."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원인을 심핵하는 것은 전후하여 여간 신칙하지 않았건만 줄곧 질질 끌면서 구차하게 마감하였으니 일의 체모로 따져보아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해당 검사에게 우선 1개월 감봉하고 특별히 엄히 신칙하여 기어이 잡아내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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