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41권, 고종38년 1901년 12월

싸라리리 2025. 1. 3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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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양력

【음력 신축년(辛丑年) 10월 21일】 도로 내려 보내는 평양 진위대(平壤鎭衛隊)의 장수와 군사들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대대장(大隊長)인 육군 참령(陸軍參領) 이용구(李容九)에게 가자(加資)하였다.

 

탁지부 대신 서리(度支部大臣署理)인 탁지부 협판(度支部協辦) 이용익(李容翊)이 아뢰기를,
"삼가 상고하건대, 개국(開國) 505년 2월 13일에 무릇 중앙과 지방의 공납 장부에 오른 것 중 관리가 축낸 것, 백성이 바치지 않은 것, 공납인들에게 남아 있는 것으로서 개국 503년 6월 이전에 등기(登記)된 것은 모두 탕감하라는 조칙(詔勅)을 받고 신의 부(部)에서 별도로 규정을 정하여 부령(部令)으로 반포하였습니다. 제2항에는 각 군(郡)에서 이미 거두어놓고 발송하지 않은 것과 이미 발송하였으나 아직 수납하지 못했거나 혹은 도중에 지체된 것은 그전대로 독촉해서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그대로 시행하지 못하여 당당한 정식 공납 몇 백만 냥을 이미 민간에서는 모두 거두고도 국고(國庫)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고 한갓 관리배들이 중간에서 포탈하는 것이 되었으니, 일의 대체로 보아 더없이 놀랍고 한탄할 노릇입니다. 이것은 오래 전의 일이라고 해서 덮어둔 채 따지지 않을 수 없으니, 철저히 조사하고 모두 독촉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자년(1900) 분의 공납으로서 기한이 지나도록 바치지 않은 것을 이미 기한을 정하여 훈령(訓令)을 내렸으나, 줄곧 흐지부지하면서 태연하게 꿈쩍도 하지 않으니, 절대로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80관(貫) 이상을 바치지 않은 고을 이름과 사람들의 성명을 적어 따로 장부를 만들어서 우선 모두 파면시키고, 법부에서 잡아다 가두고 수량대로 다 받아내는 동시에 법대로 조율하여 징계하고 처분하게 하며, 80관 이하는 신의 부에서 엄하게 독촉하여 받아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광무(光武) 4년 8월 15일, 본부의 전 대신(大臣)인 신 조병식(趙秉式)이 일본 공사(日本公使)로서 국외로 나갈 때 국고(國庫)의 돈 2만 6,920원을 어려움 없이 돌려쓰고 막상 귀국해서는 단지 지폐 3,001원(元) 11전(錢) 8리(釐)만을 환납했으며, 그 나머지 금액은 아직도 가져와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문서에 빈 숫자만 올라 있게 되었습니다. 금년 7월 25일 본 부의 전 대신인 신 민병석(閔丙奭)이 법부에서 독촉하여 받게 하자고 서면으로 아뢰어, 아뢴 대로 하라는 비지(批旨)를 받았는데, 같은 해 8월 13일 의정부(議政府)의 주본(奏本)에 일률적으로 보류하자는 일로 인하여, 아뢴 대로 하라는 비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그때의 형편에 맞추어 그렇게 한 것이었지만 막중한 공금을 채워 넣지 않을 수 없으니, 다시 법부에서 징계 처분하고 독촉하여 받아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2일 양력

육군 부장(陸軍副將) 이종건(李鍾健)을 원수부 군무국 총장(元帥府軍務局總長)에 임용하고 이어 경부 대신(警部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12월 3일 양력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민영찬(閔泳瓚)을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고 프랑스와 벨기에 두 나라에 주재하라고 명하였다.

 

12월 4일 양력

경사(京師)와 13도(道)의 대소 신민(臣民)들에게 윤음(綸音)을 내려 칙유(勅諭)하기를,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온 나라의 대소 신민들은 짐의 말을 잘 들으라. 짐은 올해에 심한 기근이 들어 의지할 데 없는 백성들이 하소연할 데가 없는 것을 염려하여 이미 특별히 혜민원(惠民院)을 설치하고 대책을 강구하여 서둘러 구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공사(公私)의 재정이 군색한 때에 아무리 해보자고 해도 칼날이 없는 칼을 쥔 것처럼 해낼 수 없다. 정말 이러고 만다면 혜민원은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도리어 내가 죽어가는 백성들을 속이는 것이 되니, 백성들의 부모된 짐으로서 어찌 맛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며 잠자리가 편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밤부터 새벽까지 허전한 마음으로 옛날의 어진이들과 군자들이 한 일을 생각해보다가 하나의 계책을 찾았는데, 그것은 곧 주자(朱子)와 우리 왕조 선정신(先正臣) 이 문성공(李文成公 : 이이(李珥))의 사창법(社倉法)이었다. 이 법은 주자가 숭안(崇安)에서 시행했고 선정신이 해주(海州)에서 시행한 것으로서, 주자는 일찍이 이 법을 당시의 임금에게 고하여 온 나라에 널리 시행하려고 하였지만 끝내 하지 못하였고 선정신은 또 미처 주청(奏請)하지도 못하였다. 요즘의 이른바 사환(社還)이라는 것은 그 뜻을 대략 취한 것이지만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다. 애석하게도 그 훌륭하고 아름다운 법이 오랫동안 종이 위에만 남아 있고 능히 시행된 적이 없었다.
주자가 대개 이 법을 공사의 저축을 미리 마련하는 원대한 계책으로 여기면서도 우선 목전의 급한 것을 구제할 것은 없다고 말한 것은, 어찌 밑천이 많지 못하여 거두어들였다 내주었다 하면서 이자를 취하는 것이 마치 잇속을 다투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것이겠는가? 그러나 천하의 재물과 곡식이 단지 이 수량만 있으니, 역시 내주기만 하고 거두어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형편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내주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거두는 것이 있고 거두는 것이 있으면 또 반드시 이자가 있어야만 계속 시행해도 폐단이 없는 것으로서, 이것은 성현들의 더없이 공명정대한 뜻이고 잇속을 다투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러하지만 법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시행하는 데에서는 반드시 시세를 따라야 한다. 시세를 따르지 않고 법을 논하는 것은 애당초 말도 되지 않는다. 주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지금 흉년을 만났을 때 시행하면 틀림없이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많을 것이니, 이야말로 적합한 때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으며, 주자가 또 말하기를, ‘법령에는 규정된 조문이 없고 인정은 강요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모든 지방의 주(州)·군(軍)에 반포하여 백성들을 잘 타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도 법을 세워 시행하도록 권하지 않는다면 몇 군데에나 설치할 수 있겠는가? 부잣집들에서 자원하여 내어서 밑천을 세우는 것으로 말하면 짐이 인심은 다 같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틀림없이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음을 안다. 왜 그런가? 가령 열 집으로 이루어진 고을에서 일곱 집은 모두 텅 비고 세 집은 넉넉하다면 그 세 집에서 과연 일곱 집이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앉아 보면서 구제하지 않겠는가? 설사 마음속에는 구제할 생각이 없어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인하여 말하면, 부잣집들에서 의로운 마음으로 굶주림을 구제하는 것은 천리(天理)의 당연한 것이고 사람의 마음으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부잣집 재물도 한정이 있으니 어떻게 끝없이 낼 수 있겠으며, 또 어찌 영원히 내고 도로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사창법이 훌륭한 것이고, 거두어들였다 내어주었다 하면서 이자를 취하여 폐단 없이 시행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에 짐이 선현들의 지극한 뜻에 감동되고 훌륭한 법이 시행되지 못한 것을 개탄하면서 장차 그 뜻을 따르고 그 법을 본받아, 한편으로는 오늘날을 구제하기 위한 밑천으로 삼고 다른 한편으로는 먼 장래를 예비할 계책으로 삼는다. 짐과 이 일을 같이 할 사람은 우리의 높고 낮은 관리들과 백성들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출연(出捐)하는 것은 약간의 재물에 불과하나 이룩하는 것은 만민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다. 그 이해관계를 따지면 과연 어느 것이 중대하고 어느 것이 가벼우며 무엇이 많고 무엇이 적겠는가? 그래서 서울에는 총 혜민사(總惠民社)를 두고 각군(各郡)에는 분 혜민사(分惠民社)를 두어 총 혜민사와 혜민원이 서로 의거하되, 혜민원에서는 구제하는 일을 주관하고 총 혜민사에서는 돈과 곡식을 주관하면서 각 군의 분 혜민사를 관할하고, 분 혜민사는 해당 군의 돈과 곡식 및 구제와 관련된 제반 일들을 모두 관할하라.
짐이 특별히 1만 원을 내리고 동궁(東宮)이 별도로 5,000원을 내린 것은 탁지부(度支部)에서 획송(劃送)하게 하며, 순비(淳妃)가 안에서 2,000원을 내리고 영친왕(英親王)이 또한 3,000원을 내린 것은 모두 총 혜민사에 넘겨주어 여러 관리들과 백성들의 앞장에 서도록 하겠다. 그리고 각 도 각 군에 원래 있던 사환의 미곡도 모두 농민들을 위하여 가난을 구제하려고 설치한 것으로서 국고(國庫)의 경비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혜민원과 총 혜민사에서 관할하게 하고 분 혜민사에 넘겨주어 돈과 곡식 두 가지가 다 마련되게 할 것이며, 애초에 사환이 없던 군과 있어도 규정이 미비한 곳에도 역시 혜민원과 총 혜민사에서 수량을 참작하고 적당히 정해서 풍년든 지방의 것을 가져다 흉년든 지방을 구제하는 일을 편리하게 하도록 하라.
또 관리나 백성들이 사적으로 서로 진자(賑資)를 마련한 데 대해서도 짐이 모두 가상히 여기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장구한 계책이 될 수 없는 만큼 역시 모두 분 혜민사에 소속시켜 해당 규정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혜민원과 총 혜민사에서 따로 방책을 내어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부자를 안정시키는 두 가지 일이 다 편리하게 되도록 하라. 대체로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면 흉년에 대처하고 풍년이 들면 저축을 마련해야 백성들이 구렁에 떨어지거나 떠나고 흩어지는 폐단이 거의 없을 것이다. 만일 혹 탐욕스러운 수령이나 간사한 아전이 정해진 법을 준수하지 않고 이 일을 기회삼아 백성들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는 경우에는 나타나는 대로 엄하게 징계하여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
대체로 사창법은 본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임을 안다면, 가난한 자는 죽음을 면하게 되어 틀림없이 부자를 보호하고, 부자는 혜택을 베풀 수 있게 되어 반드시 가난한 자들로부터 원망을 사지 않을 것이다. 면(面)으로부터 리(里)에 이르기까지 각기 그 재물을 주관하여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며, 관리들이 또 돈과 재물을 거두고 내어주는 일에 관여하지 않으면 자연히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 없어지고 탐욕스러운 수령과 간사한 아전들은 잔꾀를 부릴 수 없게 될 것이다.
면과 리의 가장 부유한 민호(民戶) 중에서 성실하고 믿음직한 사람을 골라서 사창의 우두머리로 삼아 돈과 곡식에 대한 출납을 주관하게 한다면 세력 있는 자들이 반드시 벗어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 효와 우애와 신의와 화목의 의리로 서로 권면하여, 덕스러운 일을 서로 권하고 잘못을 서로 바로잡아주며 예에 맞는 풍속을 서로 교류하고 어려움을 서로 구제함으로써 교화를 돕고 풍속을 돈후하게 한다면, 맹자(孟子)가 이른바 정사가 없을 때에 수양한다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이에 나의 심정을 모두 담아서 온 나라에 선포하니, 모든 관리들과 백성들은 각기 짐의 뜻을 체득하고 진심으로 받들어 공적을 쌓을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혜민원에서 각 도, 각 군에 훈령(訓令)을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5일 양력

종2품 윤헌(尹)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종2품 윤충구(尹忠求)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6일 양력

평리원 검사(平理院檢事) 한인호(韓麟鎬)를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에 임용하고, 정3품 홍종우(洪鍾宇)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평리원 판사(平理院判事) 오상규(吳相奎)를 평리원 검사에 임용하고, 법부 참서관(法部參書官) 윤성보(尹性普)를 평리원 판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지금 삼가 12월 4일의 칙유(勅諭)를 받드니, 굶주리는 백성들을 걱정하는 뜻이 더없이 성실하고 간절하였으며, 이미 경사(京師)와 각군(各郡)에 총 혜민사(總惠民社)와 분 혜민사(分惠民社)를 설치함으로써 구제 대책을 다하였습니다.
또 ‘짐(朕)이 특별히 1만 원을 내리고 동궁(東宮)이 별도로 5,000원을 내린 것은 탁지부(度支部)에서 획송(劃送)하게 하며, 순비(淳妃)가 안에서 2,000원을 내리고 영친왕(英親王)도 3,000원을 내린 것은 모두 총 혜민사에 넘겨주라.’는 명을 받드니, 신은 폐하의 이 조치가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삼왕(三王)도 더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대개 화기(和氣)는 상서(祥瑞)를 불러오고 훌륭한 덕이 복을 받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번에 큰 혜택이 한번 내리자 만백성의 얼굴에 화기가 돌아 모두들 기쁨의 춤을 추고 일제히 폐하가 만년토록 장수하시기를 빌고 있습니다. 화기를 이끌어오고 복과 상서를 불러오는 것이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조정의 여러 신하들도 모두 우러러 칭송하면서 약간의 봉급을 희사함으로써 고마운 뜻의 만 분의 일이나마 받들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칙임관(勅任官)의 원래 봉급 가운데 올해 12월부터 내년 5월까지 여섯 달분 봉급의 3분의 1을 덜어내되 혜민원(惠民院)에서 계산하여 액수를 정하게 한 다음, 중앙 관직인 경우에는 각기 탁지부에서 총 혜민사에 획송하고 관찰사인 경우에는 그 도에서 분 혜민사에 획부(劃付)하며, 특진관(特進官)과 칙임(勅任) 의관(議官)은 모두 논하지 말 것입니다. 분 혜민사의 시행 규정과 각 군의 사환미(社還米)는 모두 혜민원에서 관할하면서 분 혜민사에 넘겨주는 일을 며칠 안으로 각 군에 지시하여 즉시 거행하게 함으로써 진휼(賑恤)하고 구제하는 조치를 성실하게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8일 양력

첨사(詹事) 민형식(閔衡植)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종2품 오정근(吳正根)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11일 양력

황태자(皇太子)가 상소하기를,
"우리 부황(父皇) 폐하의 높고 훌륭한 공덕은 선열들보다 빛나고 크고 깊은 혜택은 후세에 전할 것입니다. 하늘은 이 때문에 말없이 돕고 보답하려고 큰 위업을 맡기고 장수하게 하였으며 한없는 복을 주었습니다.
내년은 바로 우리 부황 폐하의 나이가 51세가 되고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경사스러운 해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두루 상고하여 보고 우리 집안의 지나간 사실들을 고찰해보아도 보기 드문 것으로서 실로 나라가 선 지 천 년 만에 있는 더없이 큰 경사입니다. 경사스러운 일을 만나 연회를 차리는 것은 예법인데, 예법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위로는 하늘의 의사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뜻에 부합하여 후대에 밝게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움직일 수 없는 떳떳한 법은 반드시 따라서 행하여 혹시라도 어기지 말아야 합니다.
내년에 진행하여야 할 절차는 원래 우리 역대 임금들이 이미 시행한 규례가 있는데다가 이 달은 바로 동짓달입니다. 동짓날은 밤이 제일 길고 하나의 양기(陽氣)가 생기기 시작하며 만물이 소생하고 새해의 근본이 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와 모든 관리들의 축하를 받고 이와 관련하여 작은 연회를 차리는데, 그 의식은 설 명절에 버금가기 때문에 작은 설이라고도 합니다. 무릇 새해에 대한 경축을 동짓날에 미리 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의 예법만 그런 것이 아니며, 그 뜻을 따져보면 인정과 예절에도 부합됩니다. 그러나 예법의 규모에는 등급이 있어 설날과 똑같이 할 수는 없는 만큼 역시 절충해서 적당히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신하와 자식으로서는 임금과 부모가 오래오래 장수할 것을 축원하는 마음에 설사 날마다 만세를 부르더라도 어찌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아쉬워하고 장수하는 것을 기뻐하는 정성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일단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상 오직 손가락을 꼽으며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소자(小子)가 바라는 바는 장대한 것도 아니고 단지 한 장의 축하하는 글로 기쁨이나 표시하자는 것뿐입니다. 이에 감히 외람됨을 무릅쓰고 폐하를 번거롭게 하니, 삼가 바라건대, 부황 폐하께서는 굽어 살피고 헤아려 소자가 동짓날에 모든 관리들을 거느리고 축하를 올리도록 허락함으로써 하찮은 성의나마 조금이라도 펼 수 있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상소를 보고 너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대체로 경사(慶事)라고 하는 것은 길(吉)한 일로서, 너의 효성으로는 물론 기쁘고 다행할 것이지만, 나의 입장으로서는 이것은 다 편안한 때에 한가히 논할 일이다. 지금은 온갖 정사가 복잡하여 사실 여기에 생각을 돌릴 형편이 못된다. 하지만 네가 청한 바는 꼭 크게 벌리자는 것은 아니므로 특별히 윤허한다."
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신기선(申箕善)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겸임시켰다.

 

12월 12일 양력

의정 윤용선(尹容善)이 차자(箚子)를 올려 원구단(圜丘壇)에 지내는 큰 제사를 친행(親行)하겠다는 명을 거둘 것을 청하니, 마지못해 따른다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조령을 내리기를,
"방금 대신(大臣)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원구단(圜丘壇)의 대제(大祭)는 대신(大臣)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고, 종묘(宗廟)의 고유제(告由祭)는 참정(參政)을 보내어 섭행하되, 모두 친제(親祭)의 규례대로 마련하라."
하였다.

 

법률(法律) 제2호, 〈적도 처단례 중 일부를 개정할 일에 관한 안건〔賊盜處斷例中改正件〕〉을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탁지부대신서리 탁지부협판(度支部大臣署理度支部協辦) 이용익(李容翊)이 아뢰기를,
"본부(本部)의 매해 문서를 조사하여 보니, 서도(西道)와 북도(北道) 두 도의 방곡(防穀) 및 과중한 세금과 수삼(水蔘) 등 도합 5가지에 관한 배상금 5만 원을 신의 부에서 5년을 기한으로 상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외부(外部)에서 보낸 문서를 소급하여 상고해보니, 지난 계사년(1893) 4월에 외부에서는 두 도의 5가지에 관한 배상금 11만 원에 대하여 지방(地方)과 사안(事案)을 구분하여 징수할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 6만 원은 정해진 기한 내에 우선 갚고 나머지 5만 원은 몇 해에 나누어 상환하도록 한다는 내용으로 아래와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북관(北關)의 방곡 한 가지 안건에 관한 3만 원은 조병식(趙秉式)이, 황해도(黃海道)의 2차 방곡 및 생복(生鰒), 수삼 등 네 가지 안건에 관한 합계 2만 원 중에서 1만 5,000원은 오준영(吳俊泳)이, 1,500원은 조병철(趙秉轍)이, 3,500원은 정부가 담당한다.’라고 이와 같이 기록하여 입계(入啓)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개국(開國) 504년에 외부에서 신의 부에 조회하여 청하기를, 각 배상금을 응당 징수할 곳에서 미처 받아내지 못했더라도 이것은 양국 정부의 조약과 관련되는 만큼 부득이 귀부(貴部)에서 먼저 상환하라는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이미 조약대로 상환하였습니다. 그런데 징수해야 할 여러 사람들 중에서 오직 황해 감사(黃海監司) 오준영만이 갑오년(1894)에 이미 청산하였고, 전 감사 신 조병철은 단지 1년분 200원만 국고(國庫)에 바쳤을 뿐 그 후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아직 청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을 답습하여 그냥 내버려둠으로써 관청 장부에 빈 숫자만 올라 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위의 항목 가운데 여러 해로 나눈 액수인 5만 원에서 오준영이 이미 청산한 분과 조병철이 선납한 분, 3개 항구에서 분담하여 보상하는 분 3,500원을 제외한 나머지 바쳐야 할 분은 수량대로 징봉(徵捧)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계사년(1893)에 먼저 상환한 분 6만 원으로 말하면 조병식이 선납한 분 1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5만 원은 정부에서 대신 갚을 것인데, 이것도 오랫동안 마감하지 않았으니, 법부(法部)에서 조율(照律)하여 징계하고 처분하게 하는 동시에 독촉하여 바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칙령(勅令) 제22호, 〈각 관찰사, 목사, 부윤, 군수의 부임 여비를 잠시 정지에 관한 안건〔各觀察使牧使府尹郡守赴任旅費姑爲停止件〕〉, 제23호, 〈총 혜민사 규정(總惠民社規程)〉, 제24호, 〈분 혜민사 규정(分惠民社規程)〉을 모두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의 청의(請議)로 인하여, 경기(京畿), 황해(黃海), 전라북도(全羅北道), 충청남도(忠淸南道), 충청북도(忠淸北道), 경상남도(慶尙南道), 경상북도(慶尙北道) 관하 각군(各郡)의 신축년(1901) 재결 3만 8,500결(結) 중 새 재결과 그 전 재결(災結)을 서로 참작하고 등급을 나누어 조세를 감하는 것을 허락하는 문제에 대해 의정부의 회의를 거쳤습니다. 그런데 이앙하지 못한 것은 조세를 절반 감하고 곡식이 말라버린 것은 조세의 3분의 1을 감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찬성한 표가 7이고, 아뢴 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찬성한 표가 1입니다. 삼가 폐하의 재결을 기다립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표제(表題)가 많은 쪽으로 시행하라."
하였다.

 

12월 16일 양력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를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와 시강원 일강관(侍講院日講官)을 겸임하게 하였으며, 규장각 직학사(奎章閣直學士) 정인승(鄭寅昇)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특진관(特進官) 이근교(李根敎)를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17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천자(天子)는 천하의 이름난 산과 큰 강에 제사를 지내는 법이건만 다섯 산〔五嶽〕과 다섯 진〔五鎭〕, 네 바다〔四海〕와 네 강〔四瀆〕을 봉(封)하는 일을 미처 하지 못하였으니, 사전(祀典)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장례원(掌禮院)에서 널리 상고하여 제사를 지낼 곳을 정함으로써 짐(朕)이 예로써 신(神)을 섬기는 뜻에 부합되게 하라."
하였다.

 

종1품 이순익(李淳翼)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내부 참서관(內部參書官) 심상익(沈相翊)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경위원 경무관(警衛院警務官) 김영진(金永桭)을 경위원 총무국장(警衛院總務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2등에 서임하였으며,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김성근(金聲根)에게 법부 대신(法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9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원일(李源逸)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궁내부 특진관 이정로(李正魯)를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20일 양력

정3품 김우용(金禹用)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21일 양력

일본국 군함(軍艦)의 함장(艦長) 사에키 곤〔佐伯誾〕을 훈3등에 서훈(敍勳)하고, 프랑스국 병함 사령(司令)인 무관(武官) 모로넷 데벨로이를 훈4등에 서훈하고, 각각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하였다.

 

12월 22일 양력

황태자가 올린 상소에,
"삼가 아룁니다. 신자(臣子)가 군부(君父)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복록이 그치지 않고 장수하는 것뿐입니다. 때문에 나라의 경사는 그 일에 따라서 각기 명칭이 같지 않지만 임금의 장수를 경하하는 의식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우리 왕조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들을 두루 상고해 보건대 언제나 경사를 빛내는 의식을 성대하게 차렸지 간소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내년은 바로 우리 부황(父皇) 폐하께서 51살이 되고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두 가지 큰 경사가 겹친 경사스러운 해이며 또한 우리 왕조에서 보기 드문 큰 경사입니다. 그러니 그 의식은 마땅히 이전보다 더 성대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소자(小子)가 폐하의 장수를 기뻐하고 세월의 흐름을 아쉬워하는 정성으로 은혜의 만분의 일이나마 갚으려는 생각에 해드리고 싶은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마는 감히 넘어설 수 없는 것이 예법입니다. 응당 시행하여야 할 예법으로서 절대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라면 애당초 이 소자의 청을 기다릴 필요도 없지만, 상신(相臣)들과 예관(禮官)들이 반드시 이 아들이 말한 다음에 거행하는 것도 역시 전례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부황 폐하의 크나큰 공로와 훌륭한 업적은 고금에 뛰어났습니다. 오랜 나라를 넓혀 새로운 명(命)을 받았고 대업(大業)을 일으켜 왕통을 전하였으며 원구단(圜丘壇)에 슬기로운 조상들을 배향하여 제사지내고 다섯 임금을 황제로 추존하였으니, 모든 귀신들이 모두 흠향하고 온갖 예법이 충분히 갖추어졌습니다. 대체로 선대를 훌륭하게 잇고 왕통을 물려받은 자리에 올라 크나큰 공적을 쌓음으로써 전대의 업적을 더 빛내고 자손만대 무궁하게 태평세월을 누릴 터전을 닦은 것으로 말하면 하늘과 땅이 생긴 이래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크나큰 결단을 내려 모든 권한을 쥐고 참작하여 줄일 것은 줄이고 보탤 것은 보탠 결과 온갖 법도가 다 정돈되어 위엄은 만방에 떨치고 혜택은 백성에게 크게 베풀어졌습니다. 재물이 크게 늘어났을 뿐 아니라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어 모든 백성들이 받들면서 칭송하니 부황 폐하의 높고도 큰 공로와 업적은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금 글자로 아로새긴 역사책은 방에 차고 넘치게 많게 만들어도 그 사적을 비슷하게나마 묘사할 수 없으니 훌륭한 덕을 드러내어 휘호를 올리고 잔치를 열어 장수를 경하하는 의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부황 폐하께서 겸손하게 거절하시더라도 사양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소자에게는 하늘땅과 더불어 끝이 없는 지극한 통한(痛恨)이 있습니다. 우리 모후(母后) 폐하께서는 아름다운 덕이 태임(太任)과 태사(太姒)와 나란하여 종사(宗社)에 공을 남기시고 이 아들에게 은택이 미치어 오늘까지도 도움을 받는 것이 실로 많건만 존호를 올린 데서는 아직 빠진 글자가 많습니다. 게다가 금년은 우리 모후 폐하의 보령(寶齡)이 51세가 되는 해로서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어 아득히 옛날과 같건만 봄가을 가리지 않고 능의 나무를 부여잡고 통곡하여도 갈수록 더욱 아득합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기쁨을 표현할 곳이 없고 오직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는 기회에나 지극한 정을 조금 표시할 수 있을 뿐이니 부황 폐하께서도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에 감히 지극히 간절한 마음으로 폐하 앞에 외람되게 아뢰오니 부황 폐하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내년 정월 초하룻날 백성에게 고포(告布)하고 경하하는 의식에서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고 존호를 추상하는 일과 내진연(內進宴)과 외진연(外進宴)을 마련하는 등의 절차를 모두 속히 예원(禮院)에서 전례대로 마련하게 함으로써 위로는 조종(祖宗)의 떳떳한 법을 따르고 아래로는 신하와 자식의 큰 소원에 부응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상소를 보고 너의 마음을 잘 알았다. 수명(壽命)이란 하늘이 주는 것으로서 인력(人力)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또한 이렇게 된 것은 우연일 뿐이다. 만일 이것으로 짐에게 덕을 돌리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 공렬(公烈)이라고 하는 것도 모두 하늘과 조종(祖宗)들이 도와 준 덕분이니 짐에게 무슨 공이 있어서 감당하겠는가? 너의 상소에 들어있는 비통한 말들은 짐도 차마 넘길 수 없지만 눈앞의 백성들의 일이 다급하니 결코 이처럼 화기애애한 일을 할 겨를이 없다. 하려고 하면 훗날에 어찌 적당한 날이 없겠는가? 청을 들어줄 수 없으니 너는 이해하라."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장례원(掌禮院)의 당상(堂上)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심순택(沈舜澤),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정로(李正魯), 소경(少卿) 이헌경(李軒卿), 겸장례(兼掌禮) 홍우석(洪祐晳)이다.】 을 소견(召見)하였다.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경(卿)들은 무슨 일로 청대하였는가?"
하였다.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우리 황상 폐하의 훌륭한 덕과 크나큰 공로는 3대 이후로 견줄 데가 없습니다. 대체로 선대를 훌륭하게 잇고 왕통을 물려받은 임금으로서 옛 왕업을 크게 넓히고 대명(大命)을 이루어 대통(大統)을 억만년 무궁할 터전 위에 드리웠으니 그 공덕을 만분의 일이나마 묘사하려면 하늘과 해에 견주어 표현해도 비슷하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명년은 두 가지 큰 경사가 겹치는 실로 오랜 세월에 만나기 어려운 기회입니다. 존호를 올리고 경축하는 것은 원래 우리 국가의 움직일 수 없는 떳떳한 법입니다. 그리고 우리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아름다운 규범과 훌륭한 계책은 태사(太姒), 태임(太任)과 비견되며 공로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보존하고 혜택은 만 백성에게 미쳤건만 존호를 올리는 일에서는 아직 미처 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동궁 전하께서 타고난 효성으로 이처럼 폐하께 아뢴 것은 나라의 떳떳한 법이고 천리(天理)와 인정에도 부합되는 것이건만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 어찌 우리 동궁 전하만이 안타깝고 답답하겠습니까? 대소(大小) 신민(臣民)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다시 전번 청한 것을 반복하니, 속히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동궁 전하의 효성은 바다와도 비길 만합니다. 부모의 장수를 기뻐하고 세월의 흐름을 아쉬워하는 심정에서 본다면 혹시 예법에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기어이 성의를 다하려는 법입니다. 하물며 이번에 청한 일은 선왕(先王)의 떳떳한 법으로서 시행해야 마땅하고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년의 두 가지 큰 경사는 오랜 세월에 한 번 있는 일로써 실로 막대한 경사인데 한 해에 두 경사가 겹친 것은 더구나 드뭅니다. 동궁 전하께서는 윤허를 받지 못하여 장차 다시 아뢰어 기어이 윤허를 받으려고 하니, 신들은 칭송하고 축하드리면서 물러나 허락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궁의 효성이 가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백성들의 일과 나라의 형편이 궁색하므로 결코 이런 한가한 일을 논의할 수 없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역대 임금들의 떳떳한 법을 어찌 형편이 어떤가에 따라 시행하거나 그만두거나 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의 겸손한 마음을 삼가 받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일에 대해서만은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지금 나라의 형편과 백성들의 일이 급하다는 것은 신이라고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선대 임금들의 예법은 특별히 중요한 것이니 다시 재삼 숙고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말도 혹 타당하다. 그러나 이때에는 결코 불가한 일이다."
하였다.

 

12월 23일 양력

황태자가 다시 올린 상소에,
"소자가 청한 것은 모두 위로 열성조 때의 떳떳한 법을 본받은 것이니 소자의 말은 소자의 사적인 말이 아니라 바로 열성조께서 법으로 남겨둔 말입니다. 그런데도 비답(批答)을 보니 겸손한 태도로 처하시면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소자는 어리둥절하고 조심스러워 더욱 대처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때에는 문자가 간단하였지만 요 임금의 덕을 찬양하여 ‘공경하고 밝으며 문채가 있고 생각이 깊고 진실로 공손하시며 능히 사양하셨다.〔欽明文思允恭克讓〕’라고 하였고 순 임금의 덕을 찬양하여 ‘깊고 지혜로우며 문채가 있고 밝으시며 온순하고 공손하며 미덥고 독실하셨다.〔濬哲文明溫恭允塞〕’라고 하였습니다. 천하의 후세 사람들이 구름에서 비가 내리기를 바라듯이 하고 따뜻한 햇빛에 나아가듯이 하니 ‘남풍가(南風歌)’에 실린 기상을 상상할 수 있게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무엇을 가지고 구별하겠습니까? 주(周) 나라의 아송(雅頌)들은 다 덕업과 공로를 칭송한 것으로써 온갖 악기로 은은하고 유쾌하게 연주하여 수천 년 뒤에도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손을 휘젓고 발을 구르며 춤추면서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시대의 광경을 직접 보듯이 하게 하는 것도 단지 글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옥책문에 써서 보관하는 것은 나라의 큰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부황 폐하께서는 덕업과 공적이 3대 때의 임금들보다 더 훌륭하여 비할 데가 없으니 그 만분의 일이나마 묘사하자면 몇 글자로 새겨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년의 두 경사는 바로 국조(國朝) 이래로 보기 드문 큰 경사입니다. 하늘이 펴는 경사로운 일이 함께 몰려드는 것은 모두 우리 부황 폐하의 훌륭한 덕이 그것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이런 경사가 있는데도 그에 합당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경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이런 덕이 있는데도 드러내지 않는다면 역대 임금들의 떳떳한 법을 대하여 어떻겠습니까? 또 신민(臣民)들의 기대가 어떻게 되며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조금이라도 이 일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부황 폐하가 독자적인 결정으로 취소해버릴 수 없는 일이며 이 소자가 윤허 받지 못해도 역시 감히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감히 거듭 번거롭게 아뢰니, 부황 폐하께서는 거듭 깊이 생각하시고 빨리 명령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네가 날마다 상소를 올려 간절히 청하는 것을 보고 그 정성을 더욱 잘 알았다. 부자간에 귀한 것은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앞서 내린 비답에서 짐의 마음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는데도 또 이처럼 번거롭게 구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명분은 실질의 외피이고 형식은 바탕의 나머지다. 빈 명분을 내세우고 부화한 형식을 좋아하는 것은 또한 바탕과 실질에 힘쓰는 일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연회를 차리는 일은 백성들이 한창 식량 고생을 하는 때에 논의할 일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급하지 않은 일이며 지금 형편에는 더구나 그러하다. 하지만 거듭 아뢰는 간절한 심정을 눌러버리기만 할 수는 없으니 정월 초하룻날에 고포(告布)하는 일만은 특별히 마지못해 따르니 너는 그리 알라."
하였다.

 

종2품 김영덕(金永悳)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24일 양력

황태자가 모든 관원들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아뢰기를,
"소자의 절박한 심정으로 거듭 간절한 심정을 아뢰고 심지어 두 번의 상소까지 올리고서는 폐하의 마음이 돌아서서 윤허를 내리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폐하의 비답(批答)을 받고 보니 더욱 겸손하게 사양하면서 내년 정월 초하룻날 고포(告布)하고 칭하(稱賀)하는 의식에 대해서만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경사로운 해에 늘 시행하는 작은 의식일 뿐이고 가장 큰 의식으로서 반드시 준행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아직 허락받지 못하였으니 소자는 답답하고 안타까워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폐하의 춘추가 높으신 것은 억만년 무궁할 터전으로써 하늘이 도와준 것이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과 만백성의 복입니다. 기쁜 일을 만나면 기쁨을 표현하고 경사를 만나면 경사를 빛내며 공로와 업적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은 곧 소자의 책임입니다. 우리의 부황 폐하의 높은 덕과 성대한 공적은 3대 이후로 없던 것으로서 나라는 오래되었지만 운수는 새로워졌으며 나라의 명(命)을 새롭게 하여 후대에 물려주는 큰 공로를 이룩하고 상서로운 징조를 이끌어 장구한 운수를 맞이하였습니다.
내년은 우리의 부황 폐하께서 51세가 되고 왕위에 오른 지 40돌이 되는 두 가지 경사가 한 해에 겹친 해인데 이런 경사는 오랜 세월에 만나기 드문 큰 경사입니다. 연회를 열어 신자(臣子)의 기뻐하는 성의를 표시하고 공로와 덕을 드러내어 존호를 올리는 것은 원래 우리 왕조의 변함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후(母后) 폐하께서는 훌륭한 규범이 태사(太姒)와 태임(太任)처럼 아름다우시며 부드러운 교화가 백성들에게 흠뻑 배이고 온갖 정사를 크게 도운 남모르는 공로가 있었으며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의 혜택을 베풀었으니 이것은 실로 지나간 역사에서 볼 수 없던 일입니다. 그런데 존호(尊號)와 묘호(廟號)를 올리는 것에서 아직 불충분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니 경사로운 기회에 훌륭한 공로를 추가로 드러내는 것도 역대 임금들의 훌륭한 법이니 반드시 빠뜨리지 말고 그대로 따라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 소자가 청하는 것은 모두 위로는 이미 성헌(成憲)을 본받고 아래로는 여러 사람들의 소원을 따랐으니 소자의 말은 소자의 사적인 말이 아니라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이며 온 나라 사람의 일치된 의견입니다. 그러니 부황 폐하께서도 단지 소자의 말로 여기고 막아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소자가 변변치 않고 성의가 부족하여 폐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말이 똑똑치 못하여 받아들이기에 부족하여 시행해야 할 일을 혹 시행하지 못하게 되거나 따라야 할 일인데도 혹 따르지 않게 된다면 우리의 부황 폐하의 뜻을 누가 감히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역대 임금 때의 떳떳한 법을 반드시 시행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신민(臣民)들의 일치된 공론을 반드시 따르지 않아서도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황 폐하가 시행하려다가 그만두어 오늘날에 옛 법이 지켜지지 않게 된다면 소자가 감히 말씀드리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체 신민으로서 종들이나 아녀자들 같은 천하고 미미한 사람들도 모두 말들을 할 것입니다. 안에서는 답답한 생각을 품고 그것을 펴지 못할 때에 떳떳한 본성이 있듯이 밖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니 임금의 위엄으로도 그런 마음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 년 동안에 보기 드문 큰 경사를 만나고도 칭송하는 것이 없다면 뒷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며 장차 소자가 아들의 직분을 지니고 그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황 폐하께서는 널리 헤아리고 불쌍히 여기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조정의 모든 관리들을 거느리고 일치한 목소리로 호소하니 부황 폐하께서는 특별히 소자가 앞서 청한 것에 대해 속히 윤허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효성을 짐이 왜 알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두 차례의 비답에서 정중히 타일렀으니 너도 마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재하여 시행할 만한 것을 헤아려 마지못해 따랐으니 그만하면 절충하여 알맞게 처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또 어째서 이렇게 일을 확대시키는가?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황태자가 정청(庭請)하여 두 번째로 아뢰기를,
"소자가 성의를 다해서 아뢴 것도 이제는 벌써 여러 차례가 되었건만 허락하실 의향은 전혀 없고 윤허가 아직도 내리지 않고 있으니 모르기는 하지만 부황 폐하께서는 아들의 말을 사사로운 간청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하지만 조정에 가득 찬 관리들이 손을 모아 다 같이 빌고 온 나라 사람들이 일치한 목소리로 호소하니 이것은 실로 천하의 공론입니다.
아! 우리 부황 폐하께서는 거룩하고 신성하며 문무(文武)의 자질로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고 큰 공로를 이룩하여 큰 칭호를 받았습니다. 시조(始祖)를 황제로 높이고 장조(莊祖)를 종묘(宗廟)에 배향하여 모든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예법과 음악이 크게 구비되어 제도는 한 시대에 빛났고 훌륭한 교화는 온 누리에 미쳤습니다. 훌륭하고 큰 덕화(德化)는 하늘에 닿고 땅에 서렸으며 높고 뛰어난 공적은 고금(古今)에 떨쳤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가 억만년 무궁할 크나큰 터전을 태산처럼 굳건히 다져놓았습니다. 대체로 나라를 이어받아 지켜나간 업적에 나라를 세워 후대에 물려주는 계책까지 겸한 점에서는 이전 시대를 두루 상고해 보아도 오직 우리 부황 폐하뿐이니 아! 훌륭합니다. 하늘이 돌보아 온갖 복을 내려주고 끝없이 장수할 운수를 내려준 것입니다.
이번에 새해가 돌아오면 큰 경사가 이르러 51세에 접어들고 왕위에 오른 지 40돌이 되는 두 가지 경사가 일시에 겹치게 되니 실로 역대 임금들 때에 드문 일입니다. 존호(尊號)를 올려 훌륭한 덕을 드러내고 옥(玉) 술잔을 올려 장수를 축원하는 것은 나라의 떳떳한 법이니 신민(臣民)의 정성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소자의 이런 간청은 예법에 없는 예법을 감히 억지로 청하면서 번거롭게 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조종(祖宗)들이 예전에 시행하여 온 것이니 어찌 빛나는 훌륭한 법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아무리 겸손하게 받지 않으려고 해도 선대의 법을 지키는 원칙으로 보아 끝내 사양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소자에게는 마음속에 남모르는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 모후(母后) 폐하는 천품이 하늘처럼 뛰어나고 덕은 황후의 자격에 맞았습니다. 이남(二南)의 교화를 굳건히 다져 백대 자손들의 복을 열어 놓았으며 공로는 종사(宗社)를 보존하고 혜택은 백성들에게 흠뻑 배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다 우러르는 생각이 간절하였는데 올해는 우리 모후 폐하께서 51살이 되는 해입니다.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되어 그 모습을 더듬을 길이 없습니다. 이번 경사에 즈음하여 아울러 책문을 올리는 것은 역시 나라의 예법이 그러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소자가 지극한 정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번거롭게 굴면서 간절하게 청하니, 부황 폐하께서 굽어 살펴 소자의 청을 빨리 윤허하고 훌륭한 전례를 시행함으로써 지극한 소원을 풀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는 한번 생각해보라. 저축이 거덜 나고 경비를 마련하기도 어려워 눈앞의 급한 일도 수습할 방책이 없다. 더구나 그만두어도 되는 일이고 현행 정사에 별반 급하지도 않은 일이니 네가 아무리 번거롭게 간청하더라도 절대로 따를 수 없다. 너는 그리 알라."
하였다.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조병필(趙秉弼)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이원일(李源逸)을 경효전 제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25일 양력

황태자가 정청(庭請)하여 세 번째로 아뢰기를,
"소자는 위로 떳떳한 법에 의거하고 아래로는 여론을 따라 네 번씩이나 간절한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정청하기도 하면서 그만 두지 않는데, 폐하를 시끄럽게 구는 것이 황송한 일이라는 것을 어찌 알지 못해서 정말 이처럼 번거롭게 굴겠습니까? 신자의 절절한 마음은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어서 막을 수 없으므로 윤허 받지 않고서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폐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생각을 돌려 세우게 되었으리라고 여겼는데 내린 비답(批答)을 보니 단지 고포(告布)와 칭경(稱慶)의 의식만 억지로 따른다고 하였을 뿐 성대한 의식과 훌륭한 전례에 대해서는 더욱더 겸손하게 사양하면서 윤허를 더욱 내리지 않으시니 소자는 멍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며 모든 관리들은 황황하여 손쓸 줄을 모르니 참으로 천지(天地) 같은 큰 도량에 유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 부황 폐하께서는 지극한 덕과 크나큰 업적이 모든 임금들보다 으뜸가고 3대 때의 임금들보다 뛰어났으며 더없는 인자함과 크나큰 혜택이 온 나라에 푹 배이고 만백성들에게 미쳤습니다. 당당한 황제의 칭호를 동한(東韓)에서 처음 내었고 아름다운 명성이 오대주(五大洲)에 가득 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후에 올린 글들에서 이미 다 진술하였으니 다시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도 없으며 지난날의 소략한 존호(尊號)만으로는 그 만분의 일도 드러낼 수 없으니 소자가 오늘 가상(加上)하자는 청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큰 덕이 있어야 반드시 그 이름을 지닌다.’고 하였고 한(漢) 나라의 사관(史官)이 말하기를, ‘임금이 명철하고 거룩한데도 덕이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면 유사(有司)의 과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부황 폐하의 덕과 공로를 존호에 표현하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아들과 신하의 직분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늘의 도움으로 장수하고 복 받는 것이 한이 없어 왕위에 오른 지 40돌이 되고 나이가 51세가 되었으며 그것이 더 나가서 앞으로 억만년의 운수를 마련하였으므로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축하하는 정성이 동지보다 간절하니 오늘 소자가 연회를 차려 올리자는 청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백성이 부모를 섬기면서도 모두 경사를 만나면 연회를 차려 기쁨을 표시하고 해마다 술잔을 올리는 법인데 더구나 소자가 황태자로 있으면서 이전에 없던 이런 경사를 만나 조정의 모든 신하들과 온 나라의 모든 백성들과 함께 기뻐하면서도 만년 장수를 축수하는 한 잔의 술을 올리지 못한다면 아들과 신하된 마음에 과연 어떻겠습니까?
과도하게 자신을 억누르면서 연회를 풍성하게 차리는 것이 오늘날 할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성인의 겸손한 덕이고, 신자(臣子)의 지극한 심정을 이해하고 정성을 표현할 길을 열어주는 것은 성인이 아랫사람들의 뜻을 알아주는 어진 마음입니다. 겸손한 덕 때문에 아랫사람들의 뜻을 알아주는 어진 마음을 소홀히 하는 것은 중도(中道)를 행하는 성인의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더구나 우리 어머니 명성 황후(明成皇后)는 아름다운 규범과 큰 업적으로 안에서 내조하고 임금의 교화를 도왔으니 실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운수를 열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액운을 만나 그 음성을 영영 들을 수 없게 되었으니 큰 공로를 세우고 큰 경사가 겹쳐졌어도 모두 뵙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소자의 마음속에 있는 더없는 애통함과 신하와 백성들의 원통함을 풀 수 없습니다. 오늘 존호를 추상(追上)하자는 청이 물론 하늘에 있는 영혼을 위로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신자의 심정에서 어찌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소자가 누차 청하지 않더라도 폐하께서 아마 서글퍼하시며 명백히 아시고 있을 것입니다.
아! 오늘의 청(請)은 소자 한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온 나라 신민(臣民)들의 일치된 말이고 소자가 내키는 대로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과 역대 임금들이 이미 시행한 전례이며 사사로운 인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곧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도리상 당연한 것입니다. 지극히 인자하고 뛰어난 황제 폐하가 어찌 이것을 통찰하지 못하겠습니까? 아무리 거절하려고 해도 끝내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니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고 단번에 마음을 돌려 여러 사람들의 청을 특별히 허락하고 예원(禮院)으로 하여금 예법대로 거행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만약 실속이 있으면 명분이 없어도 물론 손해될 것이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명분이 어떻게 되겠는가? 네가 날마다 추위를 무릅쓰고 간절히 청하는 효성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에 대해서는 부득이 마지못해 따른다. 그러나 연회를 차리는 일에 대해서 말하면 지금 백성들이 처한 처지에서 헤아리면 짐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명년 가을에 해도 결코 늦지 않으니 부모의 뜻을 받드는 도리에서 보아 마땅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함녕전(咸寧殿)에서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장례원(掌禮院)의 당상(堂上)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경(卿)들을 소견한 것은 예법 문제를 가지고 물어볼 것이 있어서이다. 우리 영고(寧考)의 풍모가 옛 성인보다 뛰어났고 공로는 우순(虞舜)과 대등하였으며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덕화(德化)가 온 나라에 배었으므로 백대 후에도 잊지 않고 천 년이 흘러도 떳떳이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비께서는 자애로운 사랑과 부드러운 교화를 백성들에게 베풀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태산 반석(泰山盤石)처럼 영원무궁한 터전에 올려놓았다. 그 덕과 공로는 쇠와 돌에 새겨도 이루다 기록할 수 없는데 소자가 이번의 경사와 관련하여 미치지 못하는 사모하는 마음을 확대하여 존호를 추상(追上)하여 인정과 예절을 조금이나마 표시하려고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떤가?"
하니,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우리 익황제(翼皇帝)는 훌륭한 덕과 크나큰 효성이 당요(唐堯)나 우순에 대등하고 우리 익황후(翼皇后)의 덕행은 여자들 중의 요순에 비길 만하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보존하는 공로를 세웠습니다. 존호나 올리는 것으로는 그 만분의 일도 표현할 수 없지만 우리 황상께서 미치지 못한 효성으로 이처럼 문의하였으니 이것은 인정과 예절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빨리 명을 내리소서."
하니,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우리 익황제와 익황후의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정사와 아름답고 부드러운 덕은 역사에 이루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황상의 타고난 효성으로 미치지 못할 분들을 추모하여 경사(慶事)와 관련하여 높이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입니다. 신은 더없이 우러러 칭송하게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궁이 경사(慶事)를 축하하는 효성으로 날마다 간절히 청하기에 마지못해 윤허하기는 하였지만 짐의 마음이 부끄러우니 부모에게 존호(尊號)를 소급하여 올리는 일만 하면 다행이겠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우리 동궁 전하가 간절한 정성으로 상소를 올린 지 여러 날이 되었지만 폐하는 겸손한 덕으로 성인(聖人)으로 자처하지 않으면서 여러 번 윤허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더욱 애타게 빈 다음에야 마음을 억지로 돌린 결과 떳떳한 법이 거행되어 이제 만분의 일이나마 드러낼 수 있게 되었고 명년 가을에 연회를 차려 장수를 축하하게 되었습니다. 온 나라에 기쁨의 춤이 차 넘치고 종묘에 추존하는 예를 시행하여 폐하의 효성을 더욱 빛내게 되었으니, 신은 더없이 칭송하고 경하 드립니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이번에 우리 동궁 전하가 경사를 만나 기쁨을 표시하려는 정성으로 여러 날 간절히 청한 끝에 다행히도 사양하시던 마음을 억지로나마 돌린 결과 신들이 성세(盛世)를 만나서 훌륭한 의식을 보게 되었으니 뛸 뜻이 기뻐하며 칭송하는 극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경사를 만났는데 또 우리 왕조에서 이런 경우에 이미 시행한 전례도 있으니 명헌 태후(明憲太后)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려는 것을 인정으로 보나 예의로 보나 그만둘 수 없는데 경들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예법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폐하의 심중에서 나왔고 인정과 규범에도 부합되니 신은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이미 의거할 만한 전례가 있는데 이처럼 더없이 큰 경사까지 만나 이런 성대한 일을 하게 되었으니 두 손 모아 칭송하는 신의 지극한 심정을 어떻게 다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우리 영고(寧考)는 훌륭한 덕과 더없는 어짐, 지극한 사랑과 효성이 3대 이후로 견줄 만한 이가 없어 백대 후에도 잊지 않을 것이며 우리 성모(聖母)의 자애로운 사랑과 부드러운 덕을 뭇 백성들에게 베풀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억만년 무궁할 터전에 올려놓았으니 아! 훌륭하다.
소자가 뵙지 못할 분들을 추모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묘호(廟號)를 추가로 높인 후로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을 아직까지 미처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대신(大臣)들과 장례원(掌禮院)의 당상(堂上)들에게 문의하였더니 일치한 의견으로 찬성하니 이제 인정과 예법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게 되었다.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와 신정 익황후(神貞翼皇后)에게 존호를 추상(追上)하는 도감(都監)을 합설(合設)하여 거행하라."
하니, 또 조령을 내리기를,
"우리 왕가의 예를 상고해보니 이미 시행한 전례들이 있으니 명헌 태후(明憲太后)의 가상존호도감(加上尊號都監)을 이번의 도감에 합쳐서 설치하라."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를 상호도감 도제조(上號都監都提調)로,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정로(李正魯), 특진관(特進官) 조병필(趙秉弼), 시종원 경(侍從院卿) 김학수(金學洙)를 상호도감 제조(上號都監提調)로 삼으라."
하였다.

 

정청(庭請)할 때 배종(陪從)한 춘방(春坊)과 계방(桂坊) 관원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경위원 총관(警衛院總管) 이근택(李根澤)과 육군 참령(陸軍參領) 조철희(趙轍熙)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첨사(詹事) 오정근(吳正根)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 이헌경(李軒卿)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특진관(特進官) 민찬호(閔贊鎬)를 장례원 소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육군 참장(陸軍參將) 권재형(權在衡)을 임시서리군부대신사무(臨時署理軍部大臣事務)에 임명하였다.

 

12월 26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황태자가 직접 올리는 치사(致詞)와 백관(百官)이 올리는 표문(表文)을 받고 이어 하례(賀禮)를 받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에게 추상(追上)하는 존호(尊號)의 망을 굉유 신휘 수서 우복(宏猷愼徽綏緖佑福)으로 의주(議奏)하니,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勅旨)를 내렸다. 신정 익황후(神貞翼皇后)에게 추상하는 존호의 망을 계지(啓祉)로 의주하니,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내렸다. 황제에게 가상하는 존호의 망을 건행 곤정 영의 홍휴(乾行坤定英毅弘休)로 의주하니, 윤허하였다. 명헌 태후(明憲太后)에게 가상하는 존호의 망을 유녕(裕寧)으로 의주하니,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내렸다. 명성 황후(明成皇后)에게 추상하는 존호의 망을 성덕(誠德)으로 의주하니,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내렸다.

 

황태자가 직접 치사(致詞)를 올릴 때와 진하(陳賀)할 때의 각차비(各差備)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겸장례인 비서원 승(祕書院丞) 김영전(金永典), 예모관(禮貌官) 이헌경(李軒卿), 상례(相禮) 서병찬(徐丙贊)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를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에, 종1품 김규홍(金奎弘)과 조병호(趙秉鎬)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첨사(詹事) 이헌경(李軒卿)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민형식(閔衡植)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하였다.

 

상호 도감(上號都監)에서 아뢰어,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의 옥책문 제술관(玉冊文製述官)으로 김병국(金炳國)을, 문조 익황제 옥책문 서사관(書寫官)으로 조병호(趙秉鎬)를, 문조 익황제 악장문 제술관(樂章文製述官)으로 이순익(李淳翼)을, 문조 익황제 옥보 전문 서사관(玉寶篆文書寫官)으로 이경응(李景應)을, 신정 익황후(神貞翼皇后)의 옥책문 제술관(玉冊文製述官)으로 윤용선(尹容善)을, 신정 익황후 옥책문 서사관으로 윤정구(尹定求)를, 신정 익황후 악장문 제술관(樂章文製述官)으로 조동면(趙東冕)을, 신정 익황후 옥보 전문 서사관으로 민영환(閔泳煥)을, 황제의 옥책문 제술관으로 심순택(沈舜澤)을, 황제 옥책문 서사관으로 김규홍(金奎弘)을, 황제 악장문 제술관으로 신기선(申箕善)을, 황제 옥보 전문 서사관으로 민영소(閔泳韶)를, 명헌 태후(明憲太后)의 옥책문 제술관으로 서정순(徐正淳)을, 명헌 태후 옥책문 서사관으로 홍순형(洪淳馨)을, 명헌 태후 악장문 제술관으로 민종묵(閔種默)을, 명헌 태후 옥보 전문 서사관으로 이승응(李昇應)을,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옥책문 제술관으로 민영휘(閔泳徽)를, 명성 황후 옥책문 서사관으로 심상훈(沈相薰)을, 명성 황후 악장문 제술관으로 김성근(金聲根)을, 명성 황후 옥보 전문 서사관으로 이재완(李載完)을 차임하였다.

 

12월 28일 양력

대죄(待罪)하는 신 조병식(趙秉式)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횡액을 거듭 당하니 온갖 모함이 일어나 거듭 걸려든 이 일은 바로 함경도(咸境道)의 방곡령의 배상금 문제인데 대죄하면서 아뢰는 일은 옛날에도 있는 일이므로 성상을 번거롭게 하는 것도 고려하지 않고 일의 대강을 대략 진술합니다.
대체로 신이 기축년(1889) 이후로 13년 동안 북번(北藩)을 맡기도 하고 일본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면서 전적으로 나랏일을 맡아서 이르는 곳마다 일하게 된 것은 모두 우리 황제의 은혜가 중하고 폐하께서 돌보아주신 덕분이므로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번거롭게 아뢰겠습니까?
그런데 다만 함경도의 배상금 문제로 말한다면 지난 기축년에 함경도에 기근이 들었는데 황두(黃豆) 소출 상황이 더욱 심각하기에 약장(約章)에 준해서 외서(外署)에 논첩(論牒)하였습니다. 그러자 외서에서는 원산항 감리(元山港監理)에게 공문을 보내서 10월 초부터 기한을 정하고 조약대로 방출을 금지하게 하였을 뿐 도신(道臣)은 수수방관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또 금령(禁令)을 늦추었습니다. 그러니 방출을 금지시킨 것도 외서이고 금령을 늦춘 것도 외서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임진년(1892) 윤6월경에 외서에서는 애당초 사실을 조사하지도 않고 일본 공사관(日本公使館)에 조회하고는 배상금을 물겠다고 암암리에 수락한 다음 추후에 기기사사(機器司事) 임응호(任膺鎬)를 파견하면서 문서 안의 허위 기록을 조사하라고 일렀으니 먼저 배상금을 물겠다고 수락하고 후에 조사를 진행한 셈입니다.
막상 임응호가 돌아가자 모호한 문제들이 많으므로 정부(政府)에서 불러다 사유를 묻자 그는 일본 상인의 부탁을 고스란히 따랐다고 대답하였으며 심지어 뇌물을 받은 사실까지도 드러났습니다. 또다시 외서 주사(外署主事) 이계필(李啓弼)을 파견하여 뇌물을 받고 허위 날조한 정황을 다시 조사하였으니 신이 죄 없이 억울하게 변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임응호가 뇌물을 받은 쪽지와 이계필이 조사한 문서가 모두 외서에 있는데도 시비곡직을 따지지 않은 채 이 배상금을 액수대로 갚도록 특별히 허락한 것은 사실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좋게 가지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뿐 애초에 당시의 도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원통하게 변상하느라고 가산을 탕진하였으니 어찌 더없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60만 냥의 돈을 바치는 데에 가옥(家屋)까지 들어갔는데 이런 일을 한번 겪은 후에 이미 이를 억울하게 여기는 공론이 있기는 했지만 어언간 13년의 세월이 흘러 자연히 기정사실로 낙착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에 파견될 때의 여비 출납과 감단(勘斷)으로 말하면 수원(隨員) 중의 한 사람인 이준상(李濬相)이 설명한 문서에 원래 들어있는데 올 가을에 법부(法部)에서 조사 보고하였고 또 정부에서도 아뢰어 비준을 받았습니다. 신은 그 무렵에 감히 마음에 들어있는 간절한 생각을 진술하여 명백히 변별해 주시는 비답(批答)을 받아서 온 집안이 감사하였으니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
이상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 조정의 처분이 있는데도 갑자기 탁지부(度支部)에서 차례로 문서를 들여서 아뢰면서 다시 전날의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으니 이것은 모두 앙심을 품고 마구 몰아세우면서 기어이 보복하려는 것이므로 쟁론(爭論)할 일도 못됩니다. 그러나 우리 폐하께서 밝게 살피시어 틀림없이 중병에 걸린 이 늙은이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도록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대죄하는 처지에 번거롭게 아뢰니 황상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측은하고 가엾게 여겨 억울함을 풀어주는 혜택을 특별히 베푸시어 다시 죄에 걸려들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명확하게 해명하였으니 자연히 밝혀질 것이다."
하였다.

 

12월 29일 양력

정2품 이민승(李敏承)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30일 양력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박제순(朴齊純)을 외부 대신(外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2월 31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정로(李正魯)가 아뢰기를,
"경상북도 관찰사(慶尙北道觀察使) 이유인(李裕寅)의 보고서를 보니, ‘예안(禮安)의 도산 서원(陶山書院)에 있던 퇴계(退溪) 선생의 위판(位版)을 도적맞았습니다. 이런 변고는 만고에 없는 것이므로 극히 놀라고 당황하여 즉시 달려가서 살펴보고서 우선 원임(院任)과 원직(院直)을 잡아 가두라는 내용으로 해당 군(郡)에 훈령으로 신칙하였으며, 범인을 염탐하여 체포하기 위하여 기찰(譏察)하는 포교(捕校)를 특별히 파견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사액(賜額)한 서원에서 이런 도적질의 변고가 생긴 것은 더없이 놀라운 일이니 변고를 일으킨 죄인은 체포한 다음 엄하게 조사하여 처리하며 위판은 즉시 다시 만들어 날을 받아 봉안한 뒤에 그 군에서 위안제를 설행하고 옛 위판은 기어이 찾아내어 깨끗한 곳에 묻으라는 내용으로 아울러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외부 참서관(外部參書官) 이기(李琦)를 공사관 2등참서관(公使館二等參書官)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여 프랑스, 벨기에 두 나라에 주재하도록 명하였다.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41권 끝】


【원본】 45책 41권 85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3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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