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양력
【음력 계묘년(癸卯年) 8월 11일】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육군 참장(陸軍參將) 민영철(閔泳轍)을 헌병 사령관(憲兵司令官)에 임용하였다.
【원본】 47책 43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9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육군 참장(陸軍參將) 민영철(閔泳轍)을 헌병 사령관(憲兵司令官)에 임용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헌병 사령관(憲兵司令官) 민영철(閔泳轍)이 이미 서경 영건 당상(西京營建堂上)을 대직(帶職)하고 있다. 그에게 편리한 대로 왕래하며 감독하도록 하고, 관서 사령관(關西司令官)의 직책은 아직 임시로 섭행(攝行)하도록 하라."
하였다.
함경남도 관찰사(咸鏡南道觀察使) 서정순(徐正淳)이 상소를 올려 관직을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한 도(道)의 백성을 구제하여 성대한 업적이 한창 드러나는데, 어찌 이런 때에 사직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경은 관찰사(觀察使)의 직책에 더욱 힘쓰라."
하였다.
10월 2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능을 옮길 때 각 항목의 날짜를 다시 회의해서 택하여 들여오라."
하였다.
경상북도 관찰사(慶尙北道觀察使) 윤용식(尹容植)을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에, 경상남도 관찰사(慶尙南道觀察使) 이윤용(李允用)을 경상북도 관찰사에,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민형식(閔衡植)을 경상남도 관찰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0월 3일 양력
정3품(正三品) 곽종석(郭鍾錫)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0월 4일 양력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이하영(李夏榮)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0월 5일 양력
태의원 경(太醫院卿) 정한조(鄭漢朝)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윤헌(尹)을 태의원 경에, 특진관(特進官) 윤달영(尹達榮)을 경효전 제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김영전(金永典)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경효전 제조 심상만(沈相萬)을 봉상사 제조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 이하영(李夏榮)에게 임시로 외부 대신(外部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도록 하였으며, 육군 부령(陸軍副領) 양성환(梁性煥)을 경무사(警務使)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10월 6일 양력
월식(月食)이 있었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경효전(景孝殿)의 기신제(忌辰祭)를 친히 지내는 것으로 마련하라. 제문도 친히 지어 내릴 것이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정한조(鄭漢朝)를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0월 7일 양력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김성근(金聲根)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의 부(府)에서 관장하는 바는 바로 한 나라의 재부(財賦)에 관한 정사입니다. 도대체 어찌 근년 이래로 창고가 고갈되고 경비가 궁색해지는 것이 갈수록 심해져 거의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되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이 살피건대 역대로 나라들의 공통된 우환은 언제나 용도(用度)가 헤픈 데로부터 재정이 고갈되게 되고, 재정이 고갈된 데로부터 또 횡렴(橫斂)하고 남징(濫徵)하는 폐단이 생깁니다. 이에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번성하게 되어 결국은 나라가 망하는 화를 빚어내니, 그 해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예로부터 정치의 치란성쇠(治亂盛衰)와 국가의 안위존망(安危存亡)의 기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낱낱이 들 수는 없으나 진(秦) 나라와 수(隋) 나라의 가혹한 정사의 경우에는 더욱 거울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재정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생각지 않으며, 밤낮으로 생각하며 계책을 내는 자들은 모두 ‘모사(某事)를 행하고 모책(某策)을 실시하면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나라에 이익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을 공평하게 따져보면 요컨대 백성들을 요란하게 하고 나라에 해를 끼치며 각박하게 거두고 철저히 징수하여서 사리(私利)를 도모하고 자신을 살찌우며 화(禍)와 복(福)을 주는 권세를 도적질하고 희롱하자는 계책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실로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계책이 있어 국가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먼저 재정(財政)을 정리하는 방도를 강구한 연후에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여 태산 같고 반석 같은 데에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대개 재물이란 본래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신(神)이 운반하거나 귀신이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토지의 공물(貢物)과 부세(賦稅)의 수입으로 나라의 경비에 이바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대저 조종(祖宗)의 강토는 지난날과 같고 백성들의 조세(租稅)는 더구나 다른 때보다 배나 되는데, 어찌하여 지난날 넉넉하던 것이 지금에는 궁핍하며 옛날 부유하던 것이 지금에는 곤궁한 것입니까? 공자(孔子)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를 논하면서 다만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세입(歲入)과 세출(歲出)을 계산하고 용도에 맞추어 적당하게 결정하여 절약하기에 힘쓰고 혹시라도 쓸데없거나 긴급하지 않은 비용을 쓰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어찌 재용이 넉넉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신이 한밤중에도 잠들지 못하고 벽을 돌며 방황하였지만 임시라도 변통할 계책을 찾지 못하여 감히 꼴 베는 백성과 같은 말을 아뢰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陛下)께서 유념하여 잘 살피소서. 신은 정신이 쇠퇴하여 시행하는 조치마다 다 어긋나지만 한결같이 벼슬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나중에는 일을 그르치고야 말 것입니다. 이에 감히 상소를 올려 진술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본직(本職)과 겸직(兼職)을 빨리 체차(遞差)시켜 공사(公私)로 다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말이 간절하고 절실하니 더욱 생각해서 도모하겠다. 굳이 이같이 사직하고자 하니, 탁지부의 직임은 그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충청북도 관찰사(忠淸北道觀察使) 심상훈(沈相薰)을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종건(李鐘健)을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에, 기록국 총장(記錄局總長) 구영조(具永祖)를 충청북도 관찰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헌병 사령관(憲兵司令官) 민영철(閔泳轍)을 원수부 기록국 총장(元帥府記錄局總長)에, 육군 참장(陸軍參將) 윤웅렬(尹雄烈)을 육군 부장(陸軍副將)에, 육군 참령(陸軍參領) 이용익(李容益)을 육군 참장(陸軍參將)에 임용하고 헌병 사령관에 보임(補任)하였으며, 탁지부 협판(度支部協辦) 현석운(玄昔運)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재야(在野)의 신하 곽종석(郭鍾錫)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전달 23일에 수령(守令)이 사신(使臣)과 함께 와서 내린 칙유(勅諭) 한 통과 속백(束帛) 4단(段)을 삼가 두 손으로 받들고 네 번 절하고서 받았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누추하고 가난한 사람으로 위로는 전하의 귀를 어지럽혔고, 땅강아지 같은 미천한 품성으로 분촌(分寸)의 수고로움도 바치지 못하였는데, 폐하(陛下)께서는 천지(天地)와 같은 깊은 은덕으로 쓸모있는 인재로 도야시키는 힘을 누차 번거롭게 쓰셨습니다. 지난 을미년(1895)에 외람되게 수령(守令)으로 임명받았으나 시국을 헤아리고 재주를 가늠해 보고는 분수에 만족하고 물러나 숨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물러난 것으로 인해 더 좋은 관직에 나아가는 계기가 되어 거듭 성상의 살피심을 그르쳤습니다. 기해년(1899)에 이르러 부르는 명령을 내리면서 문득 현자를 부르는 예(禮)로 신을 불렀습니다. 신은 놀랍고 두려워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하건대 헛된 명성으로 세상을 속인 것만도 죄를 범한 것이 이미 무거운데, 다만 폐하께 달려가는 것만이 공손하다고 생각하여 보고 듣는 자들의 이목을 현혹시킨다면 청명(淸明)한 조정에 누를 끼치게 되어 더욱 만 번 죽어 마땅할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속을 털어놓아 폐하의 위엄을 범하게 됨을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격식이 있는 관계로 성심(誠心)을 통하지 못해 다시 중추원(中樞院)의 직책에 제수되었습니다. 미물같은 천한 몸으로 외람되이 조정을 더럽힐 수는 없으니 시골구석에서 생을 마치며 폐하의 은택을 노래함으로써 은덕에 보답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요즘 세 번째로 칙지(勅旨)가 절차대로 연이어 내려와 졸지에 밝은 시대에 승지의 직함을 갖게 하시니, 궁벽한 산간에서 농사짓는 몸이라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습니다. 가만히 엎드려 날을 보내면서 애오라지 청의(淸議)가 한번 일어나기만을 기다렸지만, 홀연히 천만 뜻밖에도 폐하의 이 따뜻한 말씀이 내렸습니다. 말씀이 자상하고 간절하여 돼지나 물고기 같은 짐승도 감동시킬 만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폐하의 부탁하신 바는 옛적의 대현(大賢)이나 통달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도 감히 받들 수 없는 것이어서 미천한 신은 천지간에 몸을 용납할 바가 없습니다. 예전처럼 분수를 헤아려 더욱 고루함을 지키면 연산(燕山)의 하찮은 돌과 같은 사람을 화씨(和氏)의 옥과 같은 인재로 현혹시켜 신의 죄가 더욱 깊어질 것이고, 은혜에 감격하여 생각을 바꾸어서 얼굴을 들고 폐하께 나아가면 변변찮은 사람을 맞느라 떠들썩하여 듣는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할 것이니, 신은 이에 속을 썩이고 애간장을 태우며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칩니다. 또한 다시 생각해보니 폐하의 위엄은 여러 번 범할 수 없고 헛된 명성은 다시는 빚어져서는 안 되니, 차라리 그대로의 모습대로 해와 달처럼 밝은 폐하께 보여 누추한 꼴을 스스로 드러내면 아마도 시골에 물러나 숨는 방도가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구구하고 미천한 분수로도 천만 번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기 짝이 없어 아직도 어버이와 스승의 훈계를 지키고 선비나 군자(君子)가 조정에 진퇴(進退)하는 의리를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 전에 낮은 직책으로 부르니 자취를 감추고 있다가 이제 높은 직함으로 부르니 차지하려 하고, 전에는 명(命)만 내리니 머리를 움츠리다가 이제 예의를 더하자 뛰쳐나오면, 나라 사람들이 귀가 있는데 신을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영화(榮華)를 탐낸다고 하는 산천의 조소나 학들의 원망이 오히려 신의 부끄러움이 되며 이익을 독차지하려고 농단하는 것이 되어 참으로 세도(世道)에 한심한 것이 됩니다. 하물며 총애가 지나치면 재앙이 생기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이치이고, 지나치게 많이 실으면 도적을 이르게 한다는 것은 성인(聖人)께서 경계하신 것입니다. 죽을 죄이기는 하지만 어리석은 신은 생각하기를 우리 성상(聖上)께서 시종 생성(生成)시키는 은택은 미물이라도 미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천위(天威)를 다소 관대하게 하시고 다시 곡진히 살펴, 신의 전후의 직명(職名)을 모두 깎아 삭제하시고 이번에 내린 폐백도 환수하여 신으로 하여금 적막한 곳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살도록 하여 늙도록 요순시대를 즐기려는 본래의 소원을 이루게 해 주신다면, 이야말로 참으로 끝없는 은덕이 될 것입니다. 부득이하다면 송(宋) 나라 때의 진박(陣搏)과 충방(种放)의 고사(故事)를 따라 산중의 야복(野服)으로 폐하께 나아가되 개나 말처럼 한번 사랑해 주시고 다시 물음을 내리셔서 숨김없이 말하게 하시면 묵은 약초는 약으로 될 수 없고 들나물은 수라상에 올려놓을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당나귀같이 아무런 재주가 없는 데다가 길들이기 어려운 오리 같은 성미를 겸하였으니, 의당 관직을 그만둘 것을 허락하셔서 시골에서 죽도록 하는 것이 본분에도 마땅합니다. 이와 같이 한 연후에야 위로는 은혜를 잘못 베푼다는 나무람을 면하고 아래로는 염치의 기풍을 상하게 한다는 꾸짖음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충정을 다하여 애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생각하건대 신이 한없이 천한 몸으로 여러 번 폐하의 위엄을 범하여 편안하게 집에 있을 수는 없어 경기(京畿)의 지경에 포복하여 와서 객사(客舍)에 자리를 깔고 은혜로운 비답을 내려 주시기만 삼가 기다립니다. 만일 새 글에 대해 전처럼 회보하지 않으시면 신은 단지 마땅히 집에 돌아가 엄한 문책을 기다릴 것이니, 밝으신 지혜로 판단하시고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요체는 진실로 경술(經術)에 있으니, 역대 융성하던 시대에 이것으로 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하물며 이처럼 곤란한 때이겠는가? 세상을 구제하고 바로잡는 방도는 반드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생각하건대 그대는 축적된 학문이 넓고 깊으며 이치와 의리에 정밀하고 감추고 있는 덕행이 은근히 빛을 뿌려 명성과 행실을 닦은 지 오래이다. 짐이 밤낮으로 자나 깨나 만나 보리라 생각한 날도 오래되었다. 이번에 듣건대 그대가 탄 수레가 경기(京畿)에 이르렀다 하여 장차 조정에 활개치고 나서기를 목마르듯 기다리고 있으니, 한시바삐 그대는 즉시 조정에 들어와 자리를 비워두고 안타까이 기다리는 짐의 뜻을 위로하라."
하였다.
10월 9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10월 10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기신제(忌辰祭)를 지내고 나서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경효전(景孝殿)에 기신제(忌辰祭)를 지낼 때 종헌관(終獻官) 이하와 홍릉 제조(洪陵提調)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10월 11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이용직(李容稙)을 장례원 경(掌禮院卿)에,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조동희(趙同熙)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이근명(李根命)이 상소를 올려 관직을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신병(身病)이 염려되나 기력이 쇠한 노년에는 으레 이와 같으니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오늘날 백성과 나라가 병들고 고달픈 형세가 실로 조석에 달려 있다. 대저 나라의 안위(安危)를 걸머진 경은 비록 한때 뜻밖의 이겨내기 어려운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대궐에 나와 몸을 회복하면서 전체적으로 관계된 일이나 다스려도 안 될 것이 없다. 더구나 꼭 관계되지 않는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모든 일이 해이해지고 점차 시들어버리는 것은 오로지 기강을 떨치지 못해서이다. 이를 교정하는 방도는 오직 깨끗하고 신중하며 단정한 경(卿)이 자리에 앉아 진정시키고, 교화로써 격려하는 것뿐이다. 경이 어찌 차마 사직한다고 말하며, 짐이 어찌 곧바로 경을 버리겠는가? 경은 다시는 이런 말을 꺼내지 말고 더욱 힘써 나를 도와 세상을 널리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재야의 신하 곽종석(郭鍾錫)이 거듭 상소를 올려 관직을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옛날 현인들은 지조를 지키거나 배운 바를 시행하여 서책(書冊)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꼭 다르지는 않았고, 조우하는 상황만이 달랐던 것이다.
대저 재능을 감추고 독선(獨善)하는 것이 어찌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혀 모두 구제하는 것만 같겠는가? 생각하건대 그대는 총명 해박하고 체득한 도체가 빛나 깊은 산중에서 경서를 논해도 경사(京師)에 명성이 진동하니, 짐(朕) 또한 구하기를 정성스럽게 하였다. 이제 경기(京畿)의 경계에 이르러 머뭇거리면, 그것이 어찌 기대하던 바이겠는가? 중추원(中樞院)에 제수한 직함을 면해주니 그대는 당일로 혜연(惠然)하게 지극한 뜻에 보답하라."
하였다.
10월 13일 양력
종2품(從二品) 김갑규(金甲圭)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종2품 백남석(白南奭), 이민항(李敏恒)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0월 14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경릉(景陵)의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후에 대신(大臣)은 바로 능 위로 가서 봉심(奉審)하고 오라."
하였다.
10월 15일 양력
의정(議政) 이근명(李根命)을 소견(召見)하였다. 경릉(景陵)의 작헌례(酌獻禮)를 섭행(攝行)하고 복명(復命)하였다. 이근명이 아뢰기를,
"수령(守令)을 신중히 간택하는 일로 일찍이 아뢴 바 있지만, 돌이켜보면 오늘날 백성과 나라의 급한 일 중에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거듭 흉년이 든 나머지 금년에 다소 곡식이 잘 익었다고는 하나 상처 입고 곤궁한 형편을 어루만져 소생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수령들이 성심으로 두루 잘 구제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런 때에 수령은 잠시라도 그 직책을 비워둘 수 없습니다. 또한 공금이 탈취되거나 소송 판결이 지체되니, 하루 동안 관(官)을 비우면 하루만큼의 폐단이 생기게 됩니다.
현재 수령이 궐직이 되어 차임되지 못한 자리가 몇입니까? 봄과 여름에 행한 수령들의 전최(殿最)을 신이 아직 보지는 못하였지만 또한 마땅히 하등(下等)으로 평가된 몇 개의 고을이 있을 것이니, 해부(該部)에서 며칠 안으로 택차(擇差)하고 아뢰게 하여 재촉하여 내려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령을 신중히 간택하는 것은 어느 때고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하물며 거듭 흉년이 든 나머지에 백성들을 보살피고 안착시키는 것을 더욱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빨리 명령을 내려 속히 택차하고 재촉하여 내려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근명이 아뢰기를,
"근래에 시찰관(視察官)이나 파견관 등의 허다한 명목으로 주군(州郡)을 두루 돌아다니며 민간에 폐해를 끼치지 않은 곳이 없어 군보(郡報)와 민소(民訴)가 잇달아 끝이 없습니다. 소환하라는 품지를 받고 처리하는 훈령(訓令)을 여러 번 내렸으나 줄곧 두류(逗遛)하면서 예전처럼 횡포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런데도 방치해 두니 백성들이 어떻게 지탱해 살 수 있겠습니까?
다시 각도(各道)에 엄하게 훈령을 내려 발견되는 대로 쫓아 보내고 조정의 신칙(申飭)을 따르지 않고 종전의 버릇을 계속 일삼아서 부군(府郡)의 보고에 오르는 자가 있으면 법부(法部)로 하여금 위로 잡아올려 징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환하라는 명령을 이미 여러 번 내렸는데, 줄곧 두류하며 조정의 명령을 보통으로 여기는 것은 필시 오로지 제 배를 불리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즉시 엄한 말로 훈령을 내려 일체 소환하라. 일을 실제로 시행되도록 하여 예전처럼 형식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다. 조정의 신칙을 따르지 않고 민간에서 횡포를 부리는 자는 법부로 하여금 법에 비추어 징계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3품(正三品) 곽종석(郭鍾錫)을 비서원 승(祕書院丞)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0월 16일 양력
종2품(從二品) 이재성(李載星)을 경은군(景恩君)에 책봉하고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였으며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회계원 경(會計院卿) 이재곤(李載崑)에게 평식원 총재(平式院總裁)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신하 곽종석(郭鍾錫)이 상소를 올려 새로 제수된 비서원(祕書院)의 직함을 거두어달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연차(連次)의 비답에서 속마음을 남김없이 털어놓았으니 소원한 마음을 돌리고 틀림없이 오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또 사양하는 글이 올라오니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어찌 구하는 것이 성의가 없고 예의가 진지하지 못해서인가? 실로 탄식할 일이다. 현재의 직함은 밤낮으로 분주하게 붙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경모의 뜻을 보이는 것이니 굳이 사양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양찰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서원 승(祕書院丞) 곽종석(郭鍾錫)에게 칙유(勅諭)하기를,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으나 다시 이렇게 거듭 깨우치는 것은 진실로 간절히 구하고 급히 만나려고 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대저 학문은 행하기 위해서이니, 옛날의 큰 선비들도 모두 시골에서 학문을 강마(講磨)하고 그것을 시행하였을 뿐이다. 진실로 시골에서 숨어 사는 뜻을 굳게 지키고 겸선(兼善)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짐이 이해할 수 있는 바가 아니며, 그대도 마땅히 해야 할 바가 아니다. 내가 우두커니 기다린 지 오래다. 서울 교외의 땅에 더욱 가까워졌으니 마땅히 짐이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뜻에 생각이 미칠 것이다. 그대는 번연히 생각을 돌려 즉일로 수도에 들어오라."
하였다.
10월 17일 양력
비서원 승(祕書院丞) 곽종석(郭鍾錫)에게 두 번째로 칙유(勅諭)하기를,
"비답과 칙유로 남김없이 다 말하였으니 마땅히 확연히 깨닫고 번연하게 생각을 되돌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연이어 상소를 올려 줄곧 고집하고 있으니, 참으로 그대에게 기대하던 바가 아니다.
대저 임금과 신하 간의 의리란 천지 간에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장저(張沮)나 걸익(桀溺)을 따르고, 즐겨 소부(巢父)나 허유(許由)같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이는 굳이 짐이 억지로 할 바가 아니지만 그대의 평소 독서가 세상을 다 잊고 홀로 선하게 되는 것으로 궁극의 목적을 삼아서는 안 된다. 혹시 짐을 더불어 큰일을 하기에는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 짐짓 임금을 섬기지 않고 자기의 지조만 지키자고 한다면 짐은 진실로 부끄러움이 많다. 그러나 짐이 기울인 정성도 또한 절실하다 할 수 있으니, 어찌 오로지 편평하기만 하고 대의(大義)가 있는 곳은 생각지 않는가? 진박(陳搏)과 충방(种放)은 순수한 선비의 일이 아니다. 우리 조정으로 말하더라도 포의(布衣)로 들어와 대면하는 것은 상례(常例)가 아니니,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높이게 되지 않겠는가?
내가 길게 말하지 않겠으니 그대는 깊이 양찰하고 즉시 들어오라."
하였다.
고(故) 봉조하(奉朝賀) 송근수(宋近洙)에게 ‘문헌(文獻)’이라는 시호(諡號)를, 고 특진관(特進官) 신응조(申應朝)에게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고 영평군(永平君) 이경응(李景應)에게 ‘효정(孝貞)’이라는 시호를, 의정(議政)으로 추증한 민응식(閔應植)에게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선대의 묘지 일로 또 상소를 올려 처분을 내려 주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묘지의 점유에 비록 새로운 규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참작해야 할 것이 없지 않다. 내부(內部)로 하여금 다시 더 토의하여 곁으로 핍박하여 묘도(墓道)에 지장이 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원수부 검사국총장(元帥府檢査局總長) 백성기(白性基)가 아뢰기를,
"지난 갑오년(1894)에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 대관(隊官) 이종구(李鍾九)가 적을 만나 굽히지 않고 의리를 지켜 자결하였으며, 교장(敎長) 박춘빈(朴春彬)은 장수가 되어 위급한 곳에 나가 돌에 부딪쳐 목숨을 끊었습니다. 병정(兵丁) 나용석(羅龍錫)은 난리에 떠나지 않다가 갑자기 불행을 당하였습니다. 나용석의 처 임조이(林召史)는 남편의 흉음(凶音)을 듣고 젊은 나이로 열녀(烈女)의 길을 따랐으니 모두 가상한 일입니다. 마땅히 표창하여야 할 본보기이나 은전(恩典)에 관계되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염도희 등에게 증직(贈職)하고 나용석과 그의 처 임조이를 정려(旌閭)하는 은전을, 청하건대 궁내부(宮內府)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재극(李載克)이 아뢰기를,
"피고 이기동(李基東)과 이치만(李致萬)의 안건을 심사하니, 이기동은 사람을 해칠 음모를 하였고 말이 터무니없으며 흉기를 휴대하고 대궐 안에 함부로 들어왔으므로 그 정상이 진실로 패악(悖惡)하여 법률 적용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치만은 ‘사람을 해칠 음모를 한다.’라든가 ‘아마 폐하를 놀라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난만(爛漫)하게 주고받고 위험한 물건을 실정을 알고도 만들어 주었으므로 마땅한 처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기동은 《대전회통(大典會通)》의 ‘난언자(亂言者)’ 법과 《대명률(大明律)》의 ‘지도입궁전문내자(持刀入宮殿門內者)’ 법에 따라 교형(絞刑)에 처하고, 이치만은 ‘난언자수종감일등(亂言者隨從減一等)’ 법에 비추어 태형(笞刑) 100대와 징역 15년에 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특별히 1등(一等)을 낮추어 모두 유배(流配)로 바꾸어라."
하였다.
10월 18일 양력
비서원 승(祕書院丞) 곽종석(郭鍾錫)에게 세 번째로 칙유(勅諭)하기를,
"짐이 순순(諄諄)히 타일렀으나 그대는 막막(邈邈)하게 듣고 있으니 어찌 그리도 고집스럽고 굳센가? 그대에게 기대하던 바와는 자못 어긋난다. 그러나 만나보고 싶은 갈증이 한시가 급한데 이것으로 버티고 여러 날을 끄는 것은 도리어 실제에 힘쓰는 도리가 아니다. 비서원(祕書院)의 직함을 특별히 면해 주니, 그대의 멀리 낙향하려는 생각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끌어 나오게 하는 것이다. 이미 그대의 뜻을 이루었으니, 그대의 본색대로 즉시 들어와 자리를 비우고 기다리는 뜻에 부합되게 하라."
하였다.
전 비서원 승(前祕書院丞) 곽종석(郭鍾錫)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발돋움하며 기다리던 끝에 오늘 풍채를 보니 짐(朕)의 마음이 확 트인다. 순수함으로 가득한 기상이 속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름지기 평생에 배운 바를 말하여 짐의 정사를 도움으로써 크나큰 기대를 저버리지 말라."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보잘것없는 신이 그저 허명(虛名)을 도적질하여 폐하(陛下)께서 잘못 아시게 하였으니 지극히 황송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야인의 복장으로 등연(登筵)하는 것은 드문 예이다. 현자를 예우하는 입장에서 이미 바라는 것은 반드시 따라 주었으니, 또한 마땅히 속마음을 숨김없이 개진(開陳)하여 짐의 마음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신은 본래 산야의 비부(鄙夫)로서 학식이 얕고 재주가 졸렬하여 애당초 숨기거나 내놓아 말할 만한 것이 없으니 시골로 돌아가 미천한 분수에 편안한 것이 신에게는 다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학문이 깊고 도량이 넓어 몸은 초야에 있어도 명성이 조야(朝野)에 퍼져 실컷 들어온 지 오래다. 어째서 겸손한 말을 하는가?"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한갓 허명이 알려졌으니 더욱 죄송합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법은 이미 폐하께서 환히 밝게 아시는 바이니, 어찌 신의 아룀을 기다리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하의 국가를 다스림은 중용의 9경(九經)과 대학의 8조목(八條目)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별다른 도리가 없다. 책의 절반만 사용해도 시국의 어려움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폐하께서 지난날 내리신 칙유(勅諭)를 읽어보니, ‘내가 밤낮으로 훌륭한 정치를 구한 지 40년이 되나 국사(國事)가 날로 잘못되어간다.’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의혹이 없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진실로 훌륭한 정치를 구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40년 동안 훌륭한 정치를 구해 왔는데 아직도 훌륭한 정치의 효험이 없었겠습니까? 대개 임금의 마음이 매양 어려운 시기에는 깨우치고 훈계하지만 편안한 시기에는 안일해져서 심법(心法)이 끊기고 정령(政令)이 무상(無常)하여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날로 어렵게 되어 갑니다. 그러니 나라의 흥망이 어찌 ‘심(心)’ 한 글자에 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오직 마음에 돌이켜 구하시기를 엎드려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훌륭하구나, 그 말이여! 참으로 치국(治國)의 좋은 약이로다."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신이 ‘심’이라는 글자로 시작하였습니다만, 요(堯)·순(舜)의 훌륭한 정치도 또한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이라는 16자(字), 즉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아야 그 중도를 잡을 수 있다는 말에 불과합니다. ‘심’은 하나지만 그것이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충효경자(忠孝敬慈)에서 발현되는 것이 도심(道心)이며, 음식 의복(飮食衣服)과 성색 화리(聲色貨利)의 사사로움에서 발현되는 것이 인심(人心)입니다. 폐하께서는 하나의 생각에서도 반드시 인심과 도심의 공사(公私)의 단서를 살펴서 그것이 도심의 공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면 반드시 확충시켜 밀고 나가고, 그것이 인심의 사적이라는 것을 알면 반드시 억제하여 없앤다면, 요·순의 정치를 아마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진술한 것을 들으니 말이 의미가 깊어 마음이 환하게 개발(開發)된다. 시국을 건질 요체도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마땅히 가슴에 새기고 힘써 시행할 것이다."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성유(聖諭)가 이러하니 신민(臣民)들의 크나큰 다행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상을 구제할 방책을 깊이 품고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들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선비의 일이다. 시골에 묻혀 자기 몸만 선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신에게 진실로 세상을 구제할 방책이 있다면 어찌 티끌만큼이라도 도와드려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아뢴 데에서 이미 속생각을 털어놓았습니다. 더는 남아있는 말이 없으니 향리(鄕里)에 돌아가 본분이나 지키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위태로움이 조석 간에 있는데 적임자를 구하지 못하면 누구와 더불어 정치를 하겠는가? 옛날 유현(儒賢) 가운데는 시국을 걱정하고 출사(出仕)한 사람들이 많았다. 어찌하여 본래의 분수를 고집하고 사직하고 돌아가겠다고만 하는가? 밤낮으로 짐의 걱정하며 애쓰는 뜻에 대해서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면 어찌 의리와 명분에 허물이 아니겠는가?"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설령 신에게 한두 가지 천박한 소견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폐하께서 다 아는 바이고, 그 밖에는 만 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기이한 묘책이 더는 없습니다. 단지 영화를 탐내고 녹을 바라서 조정의 반열을 더럽힌다면 또한 성세(聖世)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임자가 있으면 그 말을 쓸 것이다. 말해도 쓰지 않는다면 짐이 무엇 때문에 먼 곳의 사람을 불렀겠는가?"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시무(時務)에 대해서는 만의 하나라도 신이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大經)과 대법(大法)이 오직 마음에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앞서 진술하였습니다. 오늘의 걱정거리는 외환(外患)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정(內政)이 닦여지지 않은 데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밤낮으로 이에 근념(勤念)하시고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에 힘쓴다면 외환은 족히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짐이 모르는 것이 아니다.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짐이 혼자 무엇을 하겠는가? 방책을 다 진술하여 시국의 어려움을 함께 구제하고 국사(國事)를 함께 걱정함으로써 구구한 소망에 부합되게 하라."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신이 진술한 하나의 ‘심’이란 글자는 별건(別件)의 일이 아니라 전대 성현들의 글에 갖추어 실려 있는 것입니다. 글은 이 마음을 유지하고 지혜를 증익(增益)시켜 주는 것입니다. 천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글을 읽지 않으면 속마음이 띠처럼 폐색되고 일에 임해서는 미혹되어 모든 것이 절도에 맞지 않게 됩니다. 하물며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의 큰 정치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폐하께서 경연(經筵)에 나가시지 않은 지 이미 오래이고 황태자(皇太子)의 서연(書筵)도 따라서 해이해졌다고 하니, 혹 국사가 다난하여 겨를이 없는 탓이어서입니까? 글이란 치국(治國)의 근본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유신(儒臣)을 초치(招致)하여 경연(經筵)에 두어 득실(得失)을 묻고 의리를 강구하여 폐하의 덕을 돕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박식하고 도덕이 높은 선비를 뽑아 원자를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맡겨서 보고 듣고 익히는 것들이 하나라도 올바른 것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게 하면 국가의 근본이 튼튼해지고 영명(永命)을 간구할 수 있으니, 이는 실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끝없는 복입니다. 근본을 튼튼히 하고 말단(末端)을 다스리면 어떤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은 근래에 과연 일 때문에 열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마땅히 힘쓰도록 하겠다. 지금 국사가 위급하여 마땅히 할 말이 있을 것이나 그 방책을 말하지 않으니 짐의 마음이 울적하다. 말을 하면 짐이 마땅히 반드시 따를 것이니 짐의 좌우에서 날마다 치국 안민(治國安民)의 방책을 올려라."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신에게 만일 치국 안민의 방책이 있으면 어찌 아뢰지 않겠습니까? 치국의 요체는 비록 옛날의 명신(名臣)과 뛰어난 재상이라도 부지런히 힘쓴 것이 ‘심’ 한 글자뿐이었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안으로 법을 지키는 세신(世臣)과 보필하는 어진 선비가 없고, 밖으로 적국이나 외환이 없으면 나라는 항상 망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국사가 어렵고 위태로운 것은 바로 하늘이 우리 폐하께 경고를 보여 우리나라를 크게 진작(振作)시키는 기회로 삼아서입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인(賢人)을 등용한 연후에 바야흐로 정치를 말할 수 있다. 겸양하지 말고 짐의 불민함을 도우라."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만일 인재를 등용하신다고 하면 초야에 현량한 사람과 방정한 선비가 적다고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신과 같이 어리석고 용렬한 사람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줄곧 겸손하게 사양하니 끝내 짐의 목마른 듯한 기대에 부합되지 않는다. 고집부리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은가? 오늘 이미 접견을 하였으니 짐이 제수한 관직을 어찌 버리고 간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재삼 내리는 성유(聖諭)가 이토록 정중한데 신이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하늘이 내린 지위와 관직은 천하의 공기(公器)이니 폐하께서 사적으로 쓸 것이 아닙니다. 재목이 못 되는 신이 지위와 관직을 탐내어 앉아 있으면 어진 이를 등용하는 길이 이 때문에 막히고 사방의 선비들이 틀림없이 발을 싸매고 멀리로 달아날 것입니다. 사적인 분수도 편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진 이를 가로막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에 더욱 의당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작이란 하나의 명기이니, 적임자가 아니면 줄 수 없다. 내가 어찌 마땅히 주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주겠는가?"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성교(聖敎)가 이와 같으니 더욱 황공함을 이길 수 없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개나 말, 사슴은 제각기 본성이 있으니 사슴을 몰아 밭을 갈게 하거나 개나 말을 놓아 산에 있게 하면 모두 그 본성을 잃어 천지가 만물을 낳은 인(仁)에 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성인의 덕은 하나의 사물이라도 그 마땅한 바를 얻지 않음이 없게 하니, 폐하께서는 성찰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말이 진실로 옳다. 적당한 재목이 아니면 어디에 쓰겠는가? 다시는 번거롭게 사양하지 말고 치국과 안민의 방책을 진술하도록 하라"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옛날의 현인들은 모두 가슴 속에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할 방책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출사하여 정치를 돕는 것은 진실로 사양하지 않을 바입니다. 진(晉) 나라의 은호(殷浩)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 허명(虛名)을 날려 마침내 나라를 그르쳤고 한(漢) 나라의 번영(樊英)은 스스로 무능함을 알고 힘써 청하여 시골로 돌아갔으니, 두 사람이 모두 애석한 일이지만 신은 번영의 과오가 작고 은호의 죄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자(儒者)의 복장으로 접견하는 것은 상례(常例)가 아니라서 관복(官服)을 내려준 것이니 입도록 하라."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단지 신의 몸만을 영화롭게 하려고 편벽되게 큰 은혜를 베푸니, 폐하께서 공기를 아끼지 않는 이유를 신은 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잘못이라는 말인가? 마땅한 인물임을 알고 마땅한 관직을 제수하는 것이다. 무슨 사양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신은 스스로를 잘 압니다. 산야에 퇴거하여 미천한 분수라도 굳게 지킨다면 성은(聖恩)을 만 분의 일이라도 갚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처럼 고집을 부리지만 짐의 뜻은 이미 정해 졌으니 결코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하니, 곽종석이 아뢰기를,
"부모의 은혜는 언제나 두루 미치지 않는 적이 없지만 갓난아이의 마음에는 혹 뜻에 맞지 않는 때도 있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면 울고 원망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미천한 저의 정성을 살펴 성교를 빨리 중지시켜 신의 분수를 편하게 해주어 원망하고 울지 않도록 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날 객지 생활에 의당 피곤할 것이니, 물러가 휴식하고 다시 생각해 보라."
하였다. 곽종석이 아뢰기를,
"성교가 이러하니 더욱 감격스럽습니다."
하였다.
태의원 경(太醫院卿) 윤헌(尹)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박용대(朴容大)를 태의원 경에, 참찬(參贊) 이용태(李容泰)를 사직서 제조에, 특진관(特進官) 조동완(趙東完)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민경식(閔景植)을 농상공부 협판(農商工部協辦)에, 부령(副領) 길영수(吉永洙)를 한성부 판윤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정3품(正三品) 곽종석(郭鍾錫)을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으며, 정3품 이완용(李完鎔)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이근명(李根命)이 상소하여 직임을 사직하였으나,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이근명(李根命)에게 칙유(勅諭)하기를,
"짐(朕)이 경을 의지함이 잠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경은 매양 노경(老境)에 항시 있는 증세로 관직을 그만둘 사람처럼 거듭 말하고 있다. 나라의 주춧돌인 경에게 기대하는 것이 어떠한 데 그대는 직함을 그만두고 한가롭게 물러나 짐 혼자 위에서 수고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듯이 하니, 심히 알 수가 없다. 짐은 한밤중에도 수많은 복잡한 정사를 부지런히 돌보고 있으니, 경은 직위에 있지 않을 때라도 마땅히 이리저리 움직이며 돕고 보좌할 바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경은 지금 직위에 있으면서 어깨에 큰 짐을 지고 있으니 책임이 중하고 기대하는 바도 크다. 어찌 이런 때에 사직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경은 양찰(諒察)하여 다시는 이런 말이 들리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9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이근명(李根命)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경연에서 폐하를 뵈온 후 수령들을 신중히 선발하는 일로 명을 받고 그에 따라 내부(內部)에 조칙(照飭)하였습니다.
방금 해부(該部)의 주본(奏本)을 보건대 많게는 70여 자리나 되는 데다가 혼탁하여 물의(物議)가 비등하니, 이것이 어찌 신중히 간택하는 뜻이며 군명(君命)을 받들어 널리 알리는 도리이겠습니까? 사체(事體)로 보아 너무나 놀랍습니다. 이것은 대신(大臣)이라고 해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내부 대신(內部大臣) 김주현(金疇鉉)은 우선 그 본관(本官)을 면직시키고 해당 주본을 즉시 시행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수령을 신중히 간택하는 것은 어느 때라도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하물며 백성들의 일을 더욱 걱정하는 때이겠는가? 내부 대신은 본 관에서 면직시키고 원래의 주본은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영건도감 제조(營建都監提調) 윤정구(尹定求)가 아뢰기를,
"본 도감(都監)의 경비를 수용(需用)하는 일로 이미 아뢰어 재가를 받았으나 경용(經用)이 커서 탁지부(度支部)에서 이미 획급(劃給)해 준 재화로 완공을 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은화(銀貨) 2만 원을 다시 더 탁지부에서 지출하여 비용을 대어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용직(李容稙)이 아뢰기를,
"유학(幼學) 하락서(河洛瑞)가 올린 단자(單子)로 인해 조사한 결과 충렬공(忠烈公) 신 하위지(河緯地)가 단계인(丹溪人)이라는 것이 이미 정론(定論)이며 《변무록(辨誣錄)》에도 상세히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진주(晉州) 하씨(河氏)가 방손(傍孫)을 이미 경연(經筵)에서 품의하여 사손(祀孫)으로 세운 지도 몇 년이 되니 신중한 사안으로 창졸간에 바로잡기는 어렵습니다. 사육신의 사실을 상세히 알기로는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가문 만한 것이 없었기에 그 후손에게 탐문하니 과연 명백한 증거가 있었습니다. 하위지(河緯地)가 단계인이라는 것이 더는 의심할 것이 없으니 하락서 등이 호소한 바에 따라 단계인 하상기(河相驥)의 아들 하구용(河九鎔)을 사손으로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이미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바로잡는 것이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뜻에 부합된다.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찬정(贊政) 윤정구(尹定求)에게 내부 대신(內部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도록 하였다.
포달(布達) 제99호, 〈궁내부의 일부 관제를 개정하는 일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반포하였다. 【박문원(博文院)에 부장(副長) 1명, 찬의(贊議) 3명을 더 두어 감서(監書)를 참서(參書)로 고친다.】
【원본】 47책 43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98면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법제(法制)
10월 20일 양력
탁지부 재무관(度支部財務官) 최석조(崔錫肇)를 전환 국장(典圜局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곽종석(郭鍾錫)이 상소를 올려 직임을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나아가거나 물러섬을 구차스럽지 않게 해야 할 따름이다. 혹 구하는 것이 그리 부지런한데도 거절하는 것이 그리 굳으면 그것이 무슨 의리겠는가? 전현(前賢)들을 두루 살펴보아도 처음에는 머뭇거리고 관직을 사양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허다한 사업을 이루었다. 처지에 따라 행하니 세운 뜻이 같지 않음이 없고, 출처(出處)도 일찍이 같지 않음이 없었다. 그대는 그것을 양찰하고 다시는 번거롭게 사양하지 말고 즉시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10월 21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참찬(參贊) 곽종석(郭鍾錫)에게 집 한 채를 하사하라."
하였다.
법무 국장(法務局長) 이근상(李根湘)에게 박문원 부장(博文院副長)을 겸임시켰다.
10월 22일 양력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이용태(李容泰)를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從二品) 김영덕(金永悳)을 사직서 제조에, 검사국 총장(檢査局總長) 백성기(白性基)를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군부 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을 원수부 검사국총장(元帥府檢査局總長)에 임용하고, 정3품(正三品) 현보운(玄普運)은 징계 처분을 특별 사면하였으며, 회계국 총장(會計局總長) 이근택(李根澤)에게 군부 대신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도록 하였다.
준경묘(濬慶墓), 영경묘(永慶墓)의 정자각(丁字閣)과 삼척(三陟) 활기동(活耆洞)의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의 유지(遺址)와 어사대(御射臺), 적도(赤島) 적지(赤池)의 각 비각을 개수(改修)할 때의 감동(監董)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5품(五品) 김영규(金泳圭)·이철화(李喆和), 6품(六品) 임철재(任喆宰)·김명근(金蓂根)·송인회(宋寅會)·조창호(趙昌鎬)·오재풍(吳在豐)·유응렬(劉膺烈)·이석재(李奭宰)·구종식(具宗植)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포달(布達) 제100호, 〈궁내부 관제 중 개정 안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반포하였다. 【수륜원 서무국장(水輪院庶務局長) 다음에 참서관(參書官) 1인을 첨입(添入)하고 기사(技師) 10인을 9인으로 개정한다.】
【원본】 47책 43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98면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법제(法制)
10월 24일 양력
은혜를 저버린 신하〔辜恩臣〕 곽종석(郭鍾錫)이 상소를 올려 집을 하사하라는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예우가 상례(相禮)를 벗어났지만, 또한 원용할 전례도 있으니 굳이 사양할 필요가 없다. 산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마땅히 돌려 짐(朕)의 간곡한 마음에 보답하라. 그대는 그것을 양찰하고 다시는 이 말을 꺼내지 말라."
하였다.
10월 25일 양력
법무 대신 이재극(李載克)에게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와 시강원 일강관(侍講院日講官)을 겸임하게 하고, 궁내부 대신 비서관(宮內府大臣祕書官) 홍우석(洪祐晳)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10월 26일 양력
통신원 회판(通信院會辦) 강인규(姜寅圭)에게 총판(總辦)의 사무를 서리(署理)하게 하였다.
10월 27일 양력
종정원 경(宗正院卿) 이재덕(李載德)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종2품(從二品) 이완용(李完鎔)을 종정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기장조성소 감동 당상(旗章造成所監董堂上) 민영환(閔泳煥)이 아뢰기를,
"황제 폐하(皇帝陛下)와 황후 폐하(皇后陛下), 황태자(皇太子) 전하와 황태자비(皇太子妃) 전하, 영친왕(英親王) 저하의 기장(旗章)을 만들었는데, 내입(內入) 일자(日字)를 9월 13일로 택일(擇日)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28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사신(使臣)의 일이 긴요하고 상(喪) 중에 출사(出仕)를 명하는 것이 이미 전례가 있으니, 전 전권공사(前全權公使) 이지용(李志容)에게 다시 전직(前職)을 제수하라."
하였다. 이어 일본국에 주차(駐箚)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탁지부 협판(度支部協辦) 현석운(玄昔運)을 수륜원 부총재(水輪院副總裁)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고영희(高永喜)를 탁지부 협판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다.
10월 29일 양력
포달(布達) 제101호, 〈궁내부 관제 중 개정 건(宮內府官制中改正件)〉을 반포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 경연관(經筵官)을 더 두고 시강원(侍講院)에 서연관(書筵官)을 더 둔다. 모두 칙임관(勅任官) 혹은 주임관(奏任官)으로 어진 선비들을 서임한다.】
【원본】 47책 43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99면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법제(法制)
특진관(特進官) 송병선(宋秉璿), 정3품(正三品) 곽종석(郭鍾錫)을 홍문관경연관 겸 시강원서연관(弘文館經筵官兼侍講院書筵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에 서임하되, 송병선은 4등에, 곽종석은 2등에 서임하였다.
10월 31일 양력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 윤용선(尹容善)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친왕(英親王)이 며칠째 앓고 있는데 병이 홍진(紅疹)인 것 같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의관(醫官)이 대령하고 있으니 들어와 진찰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의관 김흥규(金興圭) 등이 입진(入診)한 후 아뢰기를,
"좌우 3부(左右三部)의 맥박이 고르고 홍진이 겉에 돋았으니 정녕 의심할 바 없이 증상이 평순(平順)합니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홍진이 평순하다고는 하지만 탕약을 드셔야 할 것입니다. 물러가서 입진한 여러 의관들과 상의한 후 약방문(藥方文)을 정서하여 입감(入鑑)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약원(藥院)에서 숙직하는 것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신 등이 오늘부터 모두 숙직하겠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동희(趙同熙)를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 경(卿), 소경(少卿)들의 숙직소를 태평문(太平門) 바깥 행각(行閣)으로 옮기고 의약청(議藥廳)이라고 부르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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