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양력
【음력 임자년(壬子年) 4월 16일】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알현하였다. 왕비(王妃)도 따라 나아갔다. 이어 태왕 전하(太王殿下)를 모시고 복녕당(福寧堂)에 나아갔다.
【원본】 6책 3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71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왕실-행행(行幸)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알현하였다. 왕비(王妃)도 따라 나아갔다. 이어 태왕 전하(太王殿下)를 모시고 복녕당(福寧堂)에 나아갔다.
6월 2일 양력
왕세자(王世子)가 오이소 이토〔大磯伊藤〕 공작(公爵)의 별저(別邸)에 방림(訪臨)하였다가 당일 저택으로 돌아왔다.
6월 4일 양력
궁내성(宮內省) 종질료(宗秩寮) 주사(主事) 고미 긴페이〔五味均平〕와 총독부 통역관(總督府通譯官) 후지나미 요시쓰라〔藤波義貫〕가 양궁(兩宮)에 알현하였다.
6월 14일 양력
낙선재(樂善齋)로 이차(移次)하였다.
태왕 전하(太王殿下)가 복녕당(福寧堂)에 왕림하였다. 이희 공(李熹公) 이하 종척(宗戚)과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차관(次官) 칙임관(勅任官) 이상 및 내빈(內賓)을 인견(引見)하고 이어 사찬(賜饌)하였다. 새로 태어난 아지(阿只)가 삼칠일(三七日)이 되었기 때문이다.
6월 17일 양력
서향각(書香閣)에 나아갔다. 왕비(王妃)도 함께 나아가 수견식(收繭式)을 행하였다.
6월 19일 양력
총독(總督) 백작(伯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해군 소장(海軍少將) 야마가타 분조〔山縣文藏〕, 육군 중좌(陸軍中佐) 고노 쓰네키치〔河野恒吉〕, 육군 대위(陸軍大尉) 후지타 코스케〔藤田鴻輔〕가 두 궁을 알현하였다.
6월 23일 양력
왕세자(王世子)가 황태자 전하(皇太子殿下)의 초대로 동궁(東宮) 어소(御所)에 나아가 오찬(午餐)을 받았다.
6월 24일 양력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왕비(王妃)도 따라 나아갔다. 태왕 전하(太王殿下)를 모시고 덕안궁(德安宮)에 왕림하여 연제(練祭)를 행하고 이어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진명(進明)과 숙명(淑明) 두 여자 학교 학생 252인(人)이 정문 밖에서 정렬하여 참배(參拜)하였다. 귀비(貴妃)가 일찍이 근면한 이념으로 학교를 설립하였기 때문이다.
이왕직 사무관(李王職事務官) 조동원(趙東源)·윤시용(尹始鏞), 찬시(贊侍) 김황진(金璜鎭)·김영갑(金永甲)·서병협(徐丙協) 등을 모두 고등관(高等官) 6등에 승서(陞敍)하여 임명하였다.
6월 25일 양력
찬시(贊侍) 자작(子爵) 윤덕영(尹德榮)을 총독부(總督府)에 보내고, 덕수궁(德壽宮)에서도 찬시 남작(男爵) 김춘희(金春熙)를 보내어 황태자비 전하(皇太子妃殿下)의 탄신일 축하를 아뢰어 주도록 부탁하였다.
태왕 전하(太王殿下)가 덕안궁(德安宮)에 왕림하여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이어 왕세자(王世子)에게 친히 전보하기를,
"지난 밤 덕안궁 연제(練祭)에서 내가 초헌(初獻)을, 창덕궁(昌德宮)이 아헌(亞獻)을, 완흥(完興)이 종헌(終獻)을 행하였다. 너는 나라 밖 멀리 있으니 참석하지 못하는 서러움이 더할 것으로 생각된다. 오직 학업에 부지런하고 몸을 잘 보호하기를 바란다."
하였다.
6월 26일 양력
정강현(靜岡縣) 전방군(田方郡) 삼도정(三島町)에 소재(所在)한 고마쓰 노미야〔小松宮〕 별저(別邸)를 9만 원(圓)에 매수(買受)하여 왕세자 별저(王世子別邸)로 정하였다.
6월 27일 양력
총독(總督) 백작(伯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친히 전보로 무사히 도착한 것을 축하하였다. 왕비(王妃)도 총독 부인에게 축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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