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갑자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진강(進講)하였다.
전교하기를,
"양암(諒闇)006) 중에 선대의 능침을 전알(展謁)하는 것이 비록 상례(常禮)는 아니나, 금년은 우리 순조(純祖)께서 탄강(誕降)하신 해이다. 나 소자(小子)의 추원(追遠)하는 마음을 어떻게 형용하겠는가? 마땅히 인릉(仁陵)에 나아가 몸소 제사지내고 정례(情禮)를 펴야 하겠다."
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김학성(金學性)을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로, 조원석(趙元錫)을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2월 2일 을축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서희순(徐憙淳)을 호조 판서로, 오현문(吳顯文)을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2월 3일 병인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건원릉(健元陵)·원릉(元陵)·인릉(仁陵)을 전알하시겠다는 명을 이미 내리셨습니다. 행례의 복색(服色)을 의당 마련해야겠는데, 등록(謄錄)을 삼가 상고해보면 국휼(國恤)의 3년내에는 선대의 능침을 전알하려 해도 복색이 난처하여 중지하여 왔기에 확실히 근거가 될 만한 예(例)가 없습니다. 영묘조(英廟朝)신해년007) 장릉(長陵)을 전알하심이 비록 국휼 3년 내가 되기는 하였습니다마는, 그때는 능침을 천봉(遷奉)할 때였기에 면복(緬服)을 입고 행례하였으니 지금 원용(援用)할 수는 없습니다. 순묘조(純廟朝) 임오년008) 현륭원(顯隆園)을 전알하실 때에는 성상의 전교 가운데 이르시기를, ‘능원(陵園)은 사체(事體)가 묘궁(廟宮)과는 조금 다른 바가 있으니 비록 시사복(視事服)으로 행례해도 안될 것은 없을 듯하다.’ 하였는데, 그 당시의 대신이나 예조의 당상(堂上)들은 ‘평일에 천담복(淺淡服)을 착용(着用)하는 것이 실로 슬퍼함을 나타내는 뜻이 있다.’ 하여, 시사복으로 행례할 것을 헌의(獻議)하여 그렇게 마련하였습니다. 금번의 복색은 원용함이 마땅할 듯하오나, 다만 삼가 생각해보면 능원을 전알함은 본래 슬퍼함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항상 참포(黲袍)009) 를 써 왔는데, 이는 슬픈 마음을 나타내는 복색입니다. 묘궁(廟宮)을 전알할 때에는 이미 흑포(黑袍)를 썼으니 선대의 능침을 전알할 때에는 참포로 행례함이 사리에 합당할 듯하오나, 신들이 감히 마음대로 결정할 일은 아닌 줄 아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참포로 마련하라."
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유원(李裕元)이 황제가 붕서(崩逝)하였다고 치계(馳啓)하였다.
2월 4일 정묘
진강(進講)하였다.
시임·원임 대신과 호조·예조의 당상을 불러 보고 이르기를,
"황상(皇上)께서는 우리 나라를 생각하심이 매우 두터웠는데, 지금 이 기별을 들으니 놀라움을 견딜 수 없다."
하니, 정원용(鄭元容) 등이 말하기를,
"황상께서는 재위(在位)한 지 30년이요 수는 69세이니, 자리를 오래 누림이 역대(歷代)에도 드문 일입니다. 외국 사람이 무슨 놀라울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부음(訃音)이 갑자가 들리자 대소 인민들이 모두 놀라니, 황가(皇家)의 인성(仁聲)이 외국에까지 미쳤기에 그러한가 싶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임금이 덕정(德政)을 펴면 인심이 자연히 이러한 것이다."
하니, 정 원용이 말하기를,
"듣건대 신황(新皇)도 성품이 인후하여 백성들이 지성으로 떠받든다 하옵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이르기를,
"도광(道光)010) 황제는 30년 동안 우리 나라를 보살펴 여러 차례 격외(格外)의 은총을 베풀어 마음으로 항상 감탄해 왔는데, 이제 이 기별을 들으니 허망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헌구(李憲球)를 원접사(遠接使)로 차하(差下)하였다.
2월 5일 무진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전 정언 박문현(朴文鉉)이 육조(六條)의 진면소(陳勉疏)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매우 훌륭하다."
하였다.
2월 6일 기사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2월 7일 경오
경시관(京試官) 도사(都事)를 불러 보고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금년의 증광시(增廣試)는 원년(元年)의 경과(慶科)이다. 가만히 생각건대 사방에서 고무(鼓舞)되어 그 기대하여 바라는 바가 심상치 않은 듯하니, 경외(京外)를 막론하고 공평함을 가지고 넓게 펼쳐서 기필코 물의(物議)와 불만의 탄식이 없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2월 9일 임신
서유훈(徐有薰)을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2월 10일 계유
약원에서 희정당에 입진하였다.
김병기(金炳冀)를 이조 참의로, 조두순(趙斗淳)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2월 11일 갑술
홍학연(洪學淵)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2월 13일 병자
산릉(山陵)에 나아가 경릉(景陵)에 친히 제사지내고, 이어 건원릉(健元陵)과 원릉(元陵)에 나아가 전알한 뒤에 경기 감사 김기만(金箕晩)을 불러 보았다. 김기만이 아뢰기를,
"북한산성(北漢山城) 평창(平倉)의 성향미(城餉米)로 경기의 14고을에 방출하였다가 받아들였다 하는 것이 모비(耗費)는 배사(倍蓰)로 늘고 수운(輸運)은 극난(極難)하여 백성들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는데, 어느 고을이나 그렇지 않은 곳이 없지만 고을은 피폐하고 백성은 적어서 육로(陸路)로 운반하기 먼 곳은 유달리 더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교하(交河)는 두 능침을 수호하느라 백성들의 부역이 자연 많고, 인천(仁川)은 백 리 길에 육로로 운반하는데 가장 멀어서 두 고을 백성의 실정이 지탱하기 어려우므로, 모두가 절반을 다른 고을에 이전하기를 원하나 다른 고을도 마찬가지여서 이전하는 데 따른 괴로움을 모면하지 못하니, 이 또한 천단(擅斷)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비변사에 보고하여 조치를 청했었지만, 삼가 생각해보니, 지난 기해년011) 에 양주목(楊州牧)에서 포흠(逋欠)한 성향미 1천 석을 상정법(詳定法)에 의하여 대전(代錢)으로써 해서(海西)에 이송하도록 장청(狀請)하여 시행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이 교하와 인천의 성향미 1천 9백 석 가운데 1천 석을 한정하여 기왕의 전례대로 해서에 이송케 해주시면, 두 고을은 힘을 펼 수 있을 것이고 성향미도 변통이 될 터이나,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니만치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라."
하였다.
양주(楊州)의 포흠곡(逋欠穀)을 모미(耗米)를 제외하고 기일을 물려서 받도록 하되 장점에 따라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2월 14일 정축
이경재(李景在)를 형조 판서로, 김수근(金洙根)을 이조 참판으로, 조운승(曹雲承)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17일 경진
진강하였다.
2월 18일 신사
진강하고 소대하였다.
2월 19일 임오
진강하였다.
2월 20일 계미
진강하였다.
이원명(李源命)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2월 21일 갑신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조두순(趙斗淳)을 관반(館伴)으로 차출하였다.
칙사(勅使)를 지공(支供)012) 하는 수령들을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양주목의 포환전(逋還錢)을 새로 기한을 정하여 모미(耗米)를 제외하고 받도록 하되 3분의 1을 탕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동칠릉(東七陵)의 향사청(香祀廳)을 개수(改修)하였다.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을 호위 대장으로 삼았다.
2월 22일 을유
진강하였다.
2월 23일 병술
진강하였다.
2월 24일 정해
효정전(孝定殿)에 나아가 한식제(寒食祭)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진강하였다.
2월 25일 무자
진강하였다.
삼척부(三陟府)의 소실(燒失)된 가호(家戶)에 휼전(恤典)을 주었다.
칙사를 맞으려 교외(郊外)로 동가(動駕)할 때에 호위하고 있는 내외 배종(陪從)의 하례(下隷)들이 혼잡을 일으키는 폐단과 경사(京司)에서 밥을 제공하는 폐단을 신칙하라 명하였으니, 대신의 주청(奏請)으로 인한 것이었다.
2월 26일 기축
진강하였다.
2월 27일 경인
대왕 대비전에서 이소(二所)013) 의 파방(罷榜)014) 과 시관(試官) 조도순(趙道淳)·윤행모(尹行謨)·목인배(睦仁培) 등의 정배(定配)와 일소(一所)의 시관 김영작(金永爵)·홍우건(洪祐健)·이교인(李敎寅)의 삭판(削版)을 명하였으니, 비변사의 계사로 인한 것이었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인일제(人日製)015) 를 행하였다.
2월 28일 신묘
춘당대에 나아가 윤차(輪次)를 행하여 부(賦)로 유학(幼學) 이돈우(李敦禹)를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2월 29일 임진
약원(藥院)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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