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2권 철종1년 1850년 3월

싸라리리 2025. 4. 26.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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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계사

진강(進講)하였다. 평안도 청남 암행 어사(平安道淸南暗行御史) 이삼현(李參鉉)을 불러 보았으니, 은산(殷山) 전(前) 현감 박재선(朴齋璿), 삼화 부사(三和府使) 이용준(李容駿), 평양 서윤(平壤庶尹) 조면호(趙冕鎬), 증산 현령(甑山縣令) 이노재(李魯宰), 강서 현령(江西縣令) 서기보(徐箕輔), 맹산 현감(孟山縣監) 위종민(魏鍾敏), 맹산 전전 현감 정학권(鄭學權), 중화(中和) 전전 부사 김일구(金一求), 개천(价川) 전 군수 이희민(李熙敏), 개천 전 군수 백낙정(白樂貞), 상원(祥原) 전 군수 윤석구(尹錫九), 강동(江東) 전 현감 송주헌(宋柱獻)을 죄주어야 한다고 서계(書啓)한 때문이었다.

 

3월 2일 갑오

진강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3월 3일 을미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유원(李裕元)이 황제 등극(皇帝登極) 칙사의 패문(牌文)016)  이 나왔다고 치계(馳啓)하였다.

 

3월 4일 병신

이기연(李紀淵)을 한성부 판윤으로, 조형복(趙亨復)을 이조 참판으로, 황호민(黃浩民)을 강화부 유수로 삼았다.

 

3월 5일 정유

약원에서 희정당에 입진하였다.

 

3월 6일 무술

평안도 청북 암행 어사(平安道淸北暗行御史) 김경현(金敬鉉)을 불러 보았으니, 선천(宣川) 전 부사 조술영(趙述永), 선천 전전 부사 한계철(韓啓轍), 초산(楚山) 전 부사 이겸희(李兼熙), 희천(熙川) 전 군수 정운두(鄭雲斗), 희천 전 군수 이희명(李熙明), 영변 부사(寧邊府使) 이원하(李元夏), 창성 부사(昌城府使) 이근영(李根永), 철산 부사(鐵山府使) 이장호(李長祜), 가산 군수(嘉山郡守) 이규회(李圭會), 운산 군수(雲山郡守) 홍병주(洪秉周), 운산 전전 군수 한승열(韓承烈), 곽산 군수(郭山郡守) 김강(金鋼), 의주(義州) 전 부윤 임백경(任百經), 강계(江界) 전 부사 윤희열(尹羲烈), 삭주(朔州) 전전 부사 정하응(鄭夏應)을 죄주어야 한다고 서계(書啓)한 때문이었다.

 

3월 8일 경자

홍재룡(洪在龍)·김좌근(金左根)·박영원(朴永元)을 겸 지실록사(兼知實錄事)로 삼고, 김병기(金炳冀)를 수찬관으로 삼았다.

 

3월 10일 임인

파주목(坡州牧)의 행궁(行宮)에 나아가 밤을 지냈다.

 

3월 11일 계묘

인릉(仁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지내고, 장릉(長陵)을 전알한 뒤에 도로 파주의 행궁에 돌아와 밤을 지냈다.

 

이가우(李嘉愚)를 판의금부사로, 채학영(蔡學永)을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3월 12일 갑진

용성 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묘소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환궁(還宮)하였다.

 

교하군(交河郡) 사민(士民) 남녀 61세 되는 사람에게는 본도에서 쌀과 고기를 지급하라 명하고, 교하·파주·고양 세 고을의 성향미(城餉米)의 모비(粍費)는 임인년017)  의 예대로 제감해 주라 하였다.

 

3월 13일 을사

약원에서 희정당에 입진하였다.

 

이돈영(李敦榮)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인릉(仁陵)에 친제할 때의 아헌관(亞獻官) 이하 제관(祭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집례(執禮) 부사과 홍익섭(洪翼燮), 대축(大祝) 부사과 이병규(李秉珪), 파주 목사 유장환(兪章煥), 예방 승지 조병항(趙秉恒)을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3월 14일 병오

소대하였다.

 

3월 15일 정미

함경 감사 서유훈(徐有薰)을 불러 보았으니,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효정전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소대하였다.

 

3월 16일 무신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3월 17일 기유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3월 18일 경술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김시연(金始淵)을 이조 참의로, 이약우(李若愚)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황해도 암행 어사 신석희(申錫禧)를 불러 보았으니, 전 병사 김상우(金相宇), 봉산(鳳山) 전 군수 조희찬(趙羲贊), 강령(康翎) 전전 현감 최달수(崔達洙), 연안 부사(延安府使) 민치구(閔致久), 기린 찰방(麒麟察訪) 조명귀(趙名龜), 황주(黃州) 전전 목사 박현규(朴顯圭), 수안(遂安) 전 군수 이희창(李羲昌), 재령(載寧) 전 군수 한필교(韓弼敎), 문화(文化) 전 현령 홍형모(洪衡謨), 은율(殷栗) 전 현감 김응하(金應夏)를 죄주어야 한다고 서계한 때문이었다.

 

3월 19일 신해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3월 20일 임자

희정당(熙政堂)에서 약원의 입진과 차대를 하였다.

 

관동(關東)의 합록(合錄)한 모조(耗條)를 대전(代錢)을 주고 끌어쓰며 공삼전(貢蔘錢)도 환곡(還穀)으로 만들어 첨보(添補)하라고 명하였으니, 대신의 주청으로 인한 것이었다.

 

진강하였다.

 

소대하였다.

 

대왕 대비전에서 한성시(漢城試) 일소(一所)의 원방(原榜) 중 초장(初場)과 종장(終場)에 합격한 사람 가운데 아래로부터 각 50명을 이소(二所)로 나아가게 하라고 명하였으니, 대신의 주청으로 인한 것이었다.

 

김정집(金鼎集)을 반송사(伴送使)로 차하(差下)하였다.

 

3월 21일 계축

진강하였다.

 

대왕 대비전에서 판윤 이기연(李紀淵)을 황해 병사로 보외(補外)하라 명하였다. 즉시 응명(應命)하지 않자 바로 그곳에 정배(定配)케 하였다.

 

3월 22일 갑인

진강하였다.

 

이경순(李景純)을 좌변 포도 대장으로, 강시영(姜時永)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헌종 대왕 어제(御製)와 열성조(列聖朝) 어제의 합부본(合附本)을 인출할 때 감인(監印)한 각신(閣臣)018)   이하의 관원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검교 직제학(檢校直提學) 김보근(金輔根), 직제학 김대근(金大根)·조병준(趙秉駿), 원임 직각(原任直閣) 이가우(李嘉愚)·이경재(李景在)·윤정현(尹定鉉)·오취선(吳取善), 검교 직각(檢校直閣) 정최조(鄭㝡朝), 원임 직각 서유훈(徐有薰)·이공익(李公翼)·김시연(金始淵), 원임 대교(原任待敎) 조두순(趙斗淳)·김수근(金洙根), 검교 대교(檢校待敎) 이우(李㘾)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고, 대교 이병문(李秉文)은 6품으로 올려 주었다.

 

3월 23일 을묘

진강하였다.

 

3월 24일 병진

진강하였다.

 

박제헌(朴齊憲)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3월 25일 정사

희정당에서 약원의 입진과 진강을 하였다.

 

3월 26일 무오

진위 진향사(陳慰進香使) 【정사 서좌보(徐左輔), 부사 홍희석(洪羲錫), 서장관 김회명(金會明)이다.】 를 불러 보았으니,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3월 27일 기미

돌아온 세 사신을 불러 보았다.

 

이약우(李若愚)를 판의금부사로, 조두순(趙斗淳)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3월 28일 경신

유치숭(兪致崇)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덕희(金德喜)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3월 29일 신유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서(勅書)를 맞이하였다.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선조의(宣詔儀)를 행하고 칙사를 접견(接見)하였다.

 

3월 30일 임술

관소(館所)로 나아가 칙사(勅使)를 접견하다.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를 불러 보았으니, 【정사 성수묵(成遂默), 부사 이명적(李明迪), 서장관 윤행복(尹行福)이다.】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김보근(金輔根)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경상우도 암행 어사 조석여(曹錫輿)를 불러 보았으니, 금산(金山) 전 군수 유도종(柳道宗), 상주(尙州) 전 목사 이상두(李象斗), 창원(昌原) 전 부사 채학영(蔡學永), 김해(金海) 전 부사 엄석정(嚴錫鼎), 거제(巨濟) 전 부사 손양석(孫亮錫), 곤양(昆陽) 전전 군수 이혁원(李赫遠), 남해(南海) 전 현령 이상주(李尙周), 전전 감사 김대근(金大根), 전 통제사 김건(金鍵), 전전 통제사 서상오(徐相五), 우병사 정택선(鄭宅善), 전 병사 이규철(李圭徹)을 죄주어야 한다고 서계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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