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3권 철종2년 1851년 1월

싸라리리 2025. 4. 28.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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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무자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친히 표리(表裏)001)  를 올리고, 인하여 하례(賀禮)를 받은 후 반사(頒赦)하였다.

 

1월 2일 기축

친히 표리를 올리고 진하(陳賀)할 때 각 차비관(差備官)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고, 예방 승지(禮房承旨) 서영순(徐英淳), 대거 승지(對擧承旨) 성원묵(成原默), 선교관(宣敎官) 병조 정랑(兵曹正郞) 이인기(李寅夔)에게 가자(加資)하였다.

 

서영순(徐英淳)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김수근(金洙根)을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홍학연(洪學淵)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1월 3일 경인

하교하기를,
"홍 좨주(洪祭酒)의 회근례(回巹禮)002)  가 가깝다고 하는데 매우 희귀한 일이다. 나라에서 예우(禮遇)하는 처지이고, 또 종전에 이미 시행한 전례(典禮)가 있으니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넉넉하게 보내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존문(存問)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홍직필(洪直弼)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삼았다.

 

1월 6일 계사

홍재철(洪在喆)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조두순(趙斗淳)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1월 10일 정유

약원(藥院)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入診)하였다.

 

1월 11일 무술

대사헌(大司憲) 홍직필(洪直弼)의 사직소(辭職疏)에 대해 비답하기를,
"도헌(都憲)003)  을 특별히 가리는 것은 뜻이 있는 바이다. 행실을 닦고 이름을 내어 당세(當世)에 쓰이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는데, 더군다나 경의 경술(經術)과 풍범(風範)은 온 세상이 추장(推奬)하는 바이다. 올바른 말이 또 이처럼 간절하니 모르는 사이 용동(聳動)되어 장엄(莊嚴)하게 읽게 된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떠나려는 마음을 빨리 돌려 속히 명에 응하라."
하였다.

 

1월 12일 기해

하직하는 곤수(閫帥)와 수령(守令)을 불러 보았다.

 

1월 15일 임인

김흥근(金興根)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1월 18일 을사

이목연(李穆淵)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1월 19일 병오

박회수(朴晦壽)를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이가우(李嘉愚)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1월 20일 정미

약원(藥院)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入診)하고, 차대(次對)하였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서 이르기를,
"어진(御眞)을 봉안(奉安)하는 처소를 의논해 정하려고 한다. 병신년004)  에 양조(兩朝)의 어진을 옮겨 봉안할 때 한 말을 모두 기억(記憶)하고 있을 터인데, 그때에 어찌 비통(悲慟)하지 않았겠으며, 어찌 인정(人情)에 가깝지 않은 줄을 스스로 몰랐겠는가마는, 앞으로 사세(事勢)를 생각하여 비궁(閟宮)005)  ·경우궁(景祐宮)에 봉안했었던 것이다. 병오년006)  에 대행조(大行朝)께서 미처 섬기지 못한 감회를 나에게 말한 것이 간절하였는데, 추모하여 미치지 못한 슬픔으로 이어 진전(眞殿)에 봉안하고자 하는 것을 내가 만약 만류(挽留)한다면 인정(人情)과 천리(天理)에 가깝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서 봉안한 것이다. 지금 내가 당한 바는 병신년에 비해 더욱 할 말이 없는데,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으로는 오직 헌종(憲宗)뿐이다. 비록 매우 장황(張皇)하기는 하나 진전(眞殿)에 봉안하고자 하는데 여러 대신들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영부사(領府事) 정원용(鄭元容) 등이 모두 아뢰기를,
"이어 진전으로 봉안하는 것이 실로 마땅합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전에서 이르기를,
"늘려 짓는 일은 이미 병오년의 예가 있으니, 도감(都監)은 그만두고 호판(戶判)으로 하여금 동독하게 하라."
하였다.

 

1월 21일 무신

서기순(徐箕淳)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박영원(朴永元)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1월 22일 기유

소대(召對)하였다.

 

은언군(恩彦君)007)  의 신유년의 일008)  을 변무(辨誣)하는 주문(奏文)에 대략 이르기를,
"신(臣)의 아비 선각왕(宣恪王)은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었는데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어려운 때를 당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는 권병(權柄)을 훔쳐 국가에 변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이 때를 틈탈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듬해 신유년에 신의 본생조(本生祖) 은언군(恩彦君) 인(䄄)이 제일 먼저 그 칼날을 받았는데 그때 우리 나라에는 불행하게도 사학(邪學)009)  의 옥(獄)이 있게 되었습니다. 심환지의 무리들이 신의 본생조도 역시 사교(邪敎)에 물들었다고 말하면서 감히 천만 이치에 닿지 않는 지목(指目)을 하고, 천만 이치에 맞지 않는 죄를 씌워 이 옥사에 몰아 넣어 싸잡아 죽임을 당하였으니, 공의(公議)가 아직껏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온 나라가 그를 위해 슬퍼하자 급히 겸제(箝制)010)  하여 감히 의논하지 못하게 하고, 그후에 또 반드시 천청(天聽)에 알려 천하에 폭로하고자 하여 마침내 무함하여 주문(奏聞)하는 일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 전후 주어(奏御)한 글 역시 내부(內府)의 편집(編輯)하는 반열(班列)에 갖추어져 있으니 일의 허실과 주문의 진위(眞僞)는 오로지 우리 나라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만약 단지 신유년의 무함한 주문만을 의거하여 말한다면, 효경(梟獍)011)  이 되고 귀역(鬼蜮)012)  이 되었으니 비록 헌경(軒鏡)013)  이 높이 달리고 우정(禹鼎)014)  이 모습을 드리우더라도 어떻게 남김없이 다 통촉하시겠습니까? 감히 신의 본생조(本生祖)가 신유년에 망극하게 무함 당한 것을 가지고 눈물을 뿌리며 진문(陳聞)하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서기순(徐箕淳)이 지어 올린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560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치안(治安) / 어문학-문학(文學)


[註 007] 은언군(恩彦君) :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서자.[註 008] 신유년의 일 :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이 순조(純祖) 원년(1801) 천주교(天主敎) 박해 때 신자로 몰려 배소(配所)에서 죽은 일. 신유년은 1801 순조 원년.[註 009] 사학(邪學) : 천주교(天主敎)를 말함.[註 010] 겸제(箝制) : 꼼짝 못하게 함.[註 011] 효경(梟獍) : 효는 어미를 잡아 먹는 올빼미, 경은 아비를 잡아 먹는 파경(破獍)이라는 짐승. 흉악하고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임.[註 012] 귀역(鬼蜮) : 귀신과 물여우. 물여우가 모래를 입에 물고 있다가, 물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에 뿌리면 그 사람이 병에 걸리는데, 물여우는 귀신과 같이 그 형태를 볼수 없다 함. 한편으로 음흉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도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이러한 뜻으로 쓰였음.[註 013] 헌경(軒鏡) : 헌원경(軒轅鏡)을 말함이니 황제 헌원씨(皇帝軒轅氏)가 서왕모(西王母)와 만나 큰 거울 12개를 만들어 달마다 바꾸어 사용했는데 이것이 거울을 만든 시초가 됨. 《비사유편(稗史類編)》에 보임.[註 014] 우정(禹鼎) : 우(禹)임금이 구주(九州)의 쇠를 거두어 구주를 상징해 만들었다는 아홉 개의 솥.

 

1월 23일 경술

이헌구(李憲球)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서좌보(徐左輔)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소대(召對)하였다.

 

1월 24일 신해

소대하였다.

 

1월 25일 임자

진주 사은사(陳奏謝恩使)  【정사(正使)는 김경선(金景善), 부사(副使)는 이규팽(李圭祊), 서장관(書狀官)은 이승수(李升洙)이다.】 와 황해 감사(黃海監司) 홍기섭(洪耆燮)을 불러 보았으니, 사폐(辭陛)한 때문이다.

 

소대하였다.

 

1월 26일 계축

소대하였다.

 

1월 27일 갑인

소대하였다.

 

1월 28일 을묘

소대하였다.

 

1월 29일 병진

소대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목연(李穆淵)이 현도(縣道)를 거쳐 상소하여 스스로 인피(引避)하고 인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지난일을 어찌 차마 소급해 제기(提起)하겠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행공(行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기원(鄭岐源)을 충청도 병마 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1월 30일 정사

약원(藥院)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하고, 소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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