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4권 철종3년 1852년 4월

싸라리리 2025. 4. 2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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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신사

조두순(趙斗淳)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식년 문과 복시(式年文科覆試)의 이소(二所) 방목(榜目)을 올렸는데, 유학(幼學) 황기홍(黃起鴻)이 수위를 차지하였다.

 

4월 2일 임오

종묘(宗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거행하였다.

 

식년 문과 회시(式年文科會試)를 거행하여 유학(幼學) 김면근(金勉根) 등 33인을 뽑았다.

 

4월 3일 계미

희정당(熙政堂)에서 약원(藥院)의 입진(入診)과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선원보략(璿源譜略)》                     발문 제술관(跋文製述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4월 5일 을유

주강(晝講)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4월 6일 병술

서유훈(徐有薰)을 반송사(伴送使)에 차하(差下)하였다.

 

4월 9일 기축

인정전(仁政殿)에서 식년 문과 전시(式年文科殿試)를 행하여 유학(幼學) 김기현(金琦鉉) 등 39인을 뽑고, 훈련원(訓鍊院)에서 무과 전시(武科殿試)를 행하여 한량(閑良) 민희호(閔羲鎬) 등 1백 66인을 뽑았다.

 

4월 12일 임진

주강(晝講)하였다.

 

4월 14일 갑오

소대(召對)하였다.

 

4월 15일 을미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빈사(儐使)029)                                             와 기백(畿伯)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여주 색리(驪州色吏)가 한밤중에 관소(館所)에 난입(攔入)한 일은 놀라울 뿐만이 아니다. 요즈음 기강(紀綱)이 해이해졌다 하더라도 어찌 이와 같은 무엄(無嚴)한 습속이 있겠는가? 칙행(勅行)의 소중함이 과연 어떠한가? 빈사(儐使)와 도신(道臣)이 진실로 마음을 다하여 경계하고 조심하였다면 어찌 이와 같은 전에 없던 일이 있었겠는가? 이것은 심상(尋常)하게 처리할 수 없으니, 빈사(儐使)와 기백(畿伯)은 파직(罷職)의 법(法)을 시행하고, 여주 겸임 파주 목사(驪州兼任坡州牧使)와 내외 금란 차사원(內外禁亂差使員) 가평 군수(加平郡守)·포천 현감(抱川縣監)과 호행장(護行將) 영종 첨사(永宗僉使)는 파직(罷職)하는 데 그칠 수 없으니, 모두 나문(拿問)하여 처리할 것이며, 난입한 색리(色吏)는 기영(畿營)에 잡아 올려 엄중하게 형신(刑訊)해서 끝까지 핵실하여 공초(供招)를 받아 계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6일 병신

조석우(曹錫雨)를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영접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선조의(宣詔儀)를 행하고, 칙사(勅使)를 접견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서 진하(陳賀)를 행하였다.

 

4월 17일 정유

관소(館所)에 나아가 칙사를 접견하였다.

 

하교하기를,
"빈사(儐使)와 전 기백(畿伯)은 서용(敍用)하고, 전 파주 목사(坡州牧使)·전 가평 군수(加平郡守)·전 포천 현감(抱川縣監)과 영종 첨사(永宗僉使)는 잡아올려 감죄(勘罪)하는 것을 보류(保留)하며, 난입한 색리는 엄중히 형신하여 도배(島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8일 무술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전송하였다.

 

4월 19일 기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문·무과(文武科)의 방방(放榜)을 행하였다.

 

김학성(金學性)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함흥부(咸興府)의 화재로 타버린 집에 휼전(恤典)을 주었다.

 

4월 20일 경자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신은(新恩)030)                                             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4월 21일 신축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전경 문무신(專經文武臣)과 한학 문신(漢學文臣)의 전강(殿講)031)                                             을 행하였다.

 

4월 26일 병오

여러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김재전(金在田)을 봉산 군수(鳳山郡守)로 삼았는데, 중비(中批)이었다.

 

좌의정                     박영원(朴永元)이 진소(陳疏)하여 사직(辭職)하니, 비답을 내려 면부(勉副)032)                                             하였다.

 

조두순(趙斗淳)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판돈녕                     김좌근(金左根)을 상신(相臣)에 제배(除拜)하라."
하였다.

 

4월 27일 정미

이경순(李景純)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이승권(李升權)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4월 29일 기유

의주부(義州府) 및 구례현(求禮縣)의 불탄 가호(家戶)에 휼전(恤典)을 주었다.

 

4월 30일 경술

준천사 당상(濬川司堂上)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응식(李應植)·신관호(申觀浩)·이능권(李能權)·김건(金鍵)을 모두 양이(量移)033)                                             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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