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4권 철종3년 1852년 6월

싸라리리 2025. 4. 29.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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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경진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6월 2일 신사

홍종응(洪鍾應)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요즈음 양서(兩西)034)                                              도신(道臣)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진휼하는 일은 이미 끝내었고, 양맥(兩麥)이 차례로 풍년이 들어서 유망(流亡)하던 백성이 서로 이끌고 환집(還集)하고 있다 하니, 예전에 황급하던 일이 과연 잘 진정(鎭定)되었으며, 전에 쇠약하고 수척하던 자도 모두 소생(蘇生)하였으며, 비가 내리고 개임도 알맞아서 못자리의 염려가 없으며, 전야(田野)를 개간하여 황폐한 탄식이 없는가? 아! 백성을 회보(懷保)하는 것은 어느 때인들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마는, 황해도와 평안도 두 도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함이 있다. 대개 그 재황(災荒)을 혹독하게 당하지 않은 데가 없으나, 다행히 사망(死亡)하는 데에 이르지 않은 것은 하늘의 인자함이요, 또한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 성심으로 회보(懷保)한 때문이다. 또 이미 천신 만고(千辛萬苦)를 겪으면서 겨울과 봄 동안 지내었고 진휼을 마쳤다 하여 혹 무휼하는 책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더욱더 부지런히 힘써 그 일자리를 얻어서 그 생업에 편안하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마음 아파하고 측은히 여기는 생각에 부응하게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6월 4일 계미

소대하였다.

 

6월 6일 을유

하교하기를,
"희우(喜雨)가 장마로 변하여 달을 넘기고도 그치지 않고 있으니, 이때에 곡식에 병이 드는 근심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는데,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침식(寢食)이 편안하지 못하다. 입추(立秋) 전에 기청(祈晴)하는 일도 근례(近例)에 많으니, 날을 가리지 말고 설행(設行)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위(金鍏)를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6월 7일 병술

소대(召對)하였다.

 

6월 8일 정해

사문(四門)에서 영제(禜祭)035)                                             를 설행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명하여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북부(北部)의 무너진 집에 휼전(恤典)을 주었다.

 

하교하기를,
"각영(各營)에서 중순(中旬)에 비록 이 습예(習藝)를 격려하고 권장하는 정사가 있더라도 판부(判付)를 거치면 곧 이는 국시(國試)이다. 이미 국시라고 하면서도 남잡(濫雜)함이 심한 것이 어찌 이번과 같은 적이 있었던가? 이른바 직부(直赴)와 가자(加資)에 있어서 각영 군장(軍將)의 원액(原額) 가운데에 입격(入格)한 자와 권무 군관(勸武軍官) 이외에 교함(校銜)을 빌어서 참여(參與)한 자는 직부첩(直赴帖)과 가자첩(加資帖)을 한결같이 아울러 환수(還收)함으로써 과법(科法)과 국체(國體)의 엄중함을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6월 10일 기축

희정당(熙政堂)에서 약원(藥院)의 입진(入診)과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초(旌招)036)                                             에 응(膺)할 만한 자가 이제 또한 몇 사람이나 있는가? 여러 산림(山林)에게 물어서 천거(薦擧)하게 함이 좋겠다."
하였는데, 좌의정                     이헌구(李憲球)가 아뢰기를,
"예전의 정초(旌招)는 산림(山林)의 천거(薦擧)가 많이 있었습니다. 고례(古例)를 상고해 보니, 혹은 산림이 진소(陳疏)하여 천거하거나 혹은 임금께서 특별히 예관(禮官)·사관(史官)을 보내어 별도로 유현(儒賢)에게 효유하여 천거를 받아 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이 매우 좋다. 사관을 보내어 유현(儒賢)에게 물어서 지적(指的)하여 오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충간공(忠簡公) 신(臣) 홍계적(洪啓迪)·충정공(忠貞公) 신(臣) 김운택(金雲澤)의 사판(祠版)에 모두 특별히 부조(不祧)의 은전(恩典)을 내리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전 음정(蔭正) 김응근(金應根)·정헌용(鄭憲容)은 모두 특별히 가자(加資)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조(戶曹)에 주전(鑄錢)하도록 명하였다.

 

윤대관(輪對官)을 소견(召見)하였다.

 

6월 11일 경인

사은사(謝恩使)                                             【정사(正使)                           서염순(徐念淳)·부사(副使)                           조충식(趙忠植)·서장관(書狀官)                           최우형(崔遇亨)이다.】                     를 소견(召見)하였으니, 사폐(辭陛)037)                                             한 때문이었다.

 

6월 12일 신묘

소대(召對)하였다.

 

좨주(祭酒)                     홍직필(洪直弼)에게 효유하였다.

 

6월 15일 갑오

의주부(義州府)의 떠내려간 집과 무너진 집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6월 17일 병신

조기영(趙冀永)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6월 22일 신축

유학(幼學) 조병덕(趙秉悳)에게 우선 음직(蔭職)을 주고, 김병준(金炳駿)·송달수(宋達洙)를 경연관(經筵官)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6월 23일 임인

경연관                     송달수·김병준에게 하유(下諭)하였다.

 

6월 27일 병오

도정(都政)038)                                             을 행하였다. 하비(下批)하여 김병기(金炳冀)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익섭(洪翼燮)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병운(金炳雲)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6월 28일 정미

수령(守令)·변장(邊將)의 초사인(初仕人)을 소견(召見)하였다.

 

6월 29일 무신

유장환(兪章煥)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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