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병자
일강하였다.
2월 1일 병자
김병국(金炳國)을 이조 참의로 삼았으니, 중비(中批)010) 에 의한 것이었다. 유장환(兪章煥)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2월 2일 정축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사직(社稷)의 춘향(春享)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일강하였다.
2월 3일 무인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2월 4일 기묘
경모궁(景慕宮)의 춘향(春享)을 행하였다.
2월 5일 경진
희정당(熙政堂)에서 약원(藥院)의 입진(入診)과 일강을 행하였다.
2월 6일 신사
일강하였다.
좌의정 이헌구(李憲球)가 진소(陳疏)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김수근(金洙根)을 한성부 판윤으로, 이제도(李濟道)를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오현우(吳顯佑)를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이근영(李根永)을 황해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2월 7일 임오
충청 감사 심의면(沈宜冕)을 소견(召見)하였으니,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일강하였다.
2월 8일 계미
일강하였다.
2월 9일 갑신
일강하였다.
2월 10일 을유
일강하였다.
2월 11일 병술
함경 감사 조병준(趙秉駿)을 소견(召見)하였으니,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일강하였다.
2월 12일 정해
일강하였다.
2월 13일 무자
일강하였다.
2월 14일 기축
일강하였다.
2월 15일 경인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일강하였다.
이학수(李鶴秀)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2월 16일 신묘
일강하였다.
2월 17일 임진
일강하였다.
2월 19일 갑오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도위(都尉)의 단정하고 엄숙한 자태와 겸손하고 절약하는 몸가짐은 마음속으로 천수(天壽)를 길이 누리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오랜 병으로 갑자기 서단(逝單)011) 을 보게 되니, 옛날을 더듬어 생각하매 슬픔이 더욱 간절하다. 하물며 우리 동조(東朝)012) 께서 슬퍼하시는 성회(聖懷)이겠는가? 창녕위(昌寧尉)의 상사(喪事)·예장(禮葬) 등의 절차는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고, 동원 부기(東園副器)013) 1부(部)를 실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김병주는 이판(吏判) 김학순(金學淳)의 손자이다. 몸가짐이 수미(秀美)하고 성품과 도량이 간묵(簡默)하여 유소(儒素)의 가법(家法)을 지켰으며, 내려 준 저택에는 하나도 치장을 더하지 않았다. 창두(蒼頭)014) 와 응사(鷹師)015) 들의 발자취가 마을 사이에 이르지 않았다. 원림(園林)의 종고(鍾鼓)는 세상을 잊은 것과 같이 맑았으며, 시절(時節)에 기거(起居)하는 외에는 문을 닫고 내객을 거절하여, 스스로 화려한 기환(綺䊵)의 테두리에서 벗어났으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모두 칭송하였다.
2월 20일 을미
수릉(綏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유원(李裕元)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2월 21일 병신
수릉(綏陵)에 친히 제사하였을 때의 아헌관(亞獻官)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고, 집례(執禮)인 부사과(副司果) 김보현(金輔鉉), 집준(執尊)인 교리(校理) 이정신(李鼎信), 대축(大祝)인 부사과(副司果) 김병계(金炳溎)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조헌영(趙獻永)을 이조 참의로, 조술영(趙述永)을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2월 22일 정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방씨(方氏)를 숙의(淑儀)로 봉작(封爵)하라."
하였다.
2월 23일 무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춘도기(春到記)016) 를 행하였다. 강(講)에서 유학(幼學) 김병휴(金秉休), 부(賦)에서 진사(進士) 박제소(朴齊韶)가 수위를 차지하였는데,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2월 24일 기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삼일제(三日製)를 행하였다. 부(賦)에서 유학(幼學) 이재원(李載元)이 수위를 차지하였는데, 직부 전시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집에 과명(科名)이 있게 되었으니, 매우 기특하고 기쁘다. 은신군(恩信君) 사판(祠版)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5일 경자
좌의정 이헌구(李憲球)가 진소(陳疏)하여 사직(辭職)하니, 비답을 내려 면부(勉副)017) 한다고 하였다.
우의정 김좌근(金左根)을 영의정으로, 서기순(徐箕淳)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2월 29일 갑진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진소(陳疏)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비지를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종부시(宗簿寺)와 도감(都監)의 제조(提調)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고, 경평군(慶平君) 이호(李晧)와 감인(監印)인 정(正) 유진한(柳進翰)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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