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4권 철종3년 1852년 12월

싸라리리 2025. 4. 2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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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병자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2월 2일 정축

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2월 3일 무인

희정당(熙政堂)에서 약원(藥院)의 입진(入診)과 일강을 행하였다.

 

소대하였다.

 

헌납                     김영기(金永基)가 상소하여 병조 당상(兵曹堂上) 문경애(文慶愛)를 논박(論駁)하자, 비답하기를,
"기당(騎堂)057)                                             의 일은 먼 지방에 있던 사람이 관례에 어두운 소치이니, 어찌 크게 책망할 수 있겠는가? 소청이 지나치니, 방축(放逐)의 율(律)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으니, 군호(軍號)를 수계(修啓)할 때 ‘추숭(追崇)’ 두 자로 서계(書啓)한 까닭이었다.

 

양사(兩司)에서 연차(聯箚)                        【대사헌                           김기만(金箕晩), 대사간                           이제달(李濟達), 사간                           신좌모(申佐模), 지평                           임문수(林文洙), 헌납                           김영기(金永基), 정언                           이유석(李裕奭)이다.】                     하여 윤허하는 유음(兪音)를 빨리 내리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헌납의 비답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12월 4일 기묘

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연차(聯箚)                        【부제학                           정기세(鄭基世), 응교                           서익보(徐翼輔), 부응교                           조문화(趙文和), 교리                           조재응(趙在應)·이정신(李鼎信), 부교리                           이유겸(李維謙)·박규수(朴珪壽), 수찬                           권응기(權應夔), 부수찬                           홍종서(洪鍾序)·최우형(崔遇亨)이다.】                     하여 빨리 대간(臺諫)의 청을 윤허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대간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12월 5일 경진

일강(日講)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12월 6일 신사

일강(日講)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12월 7일 임오

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2월 9일 갑신

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2월 10일 을유

일강하였다.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여 왕부(王府)058)                                             로 하여금 방축 죄인(放逐罪人) 문경애(文慶愛)를 나국(拿鞫)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전의 비답(批答)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이노병(李魯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조충식(趙忠植)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11일 병술

일강하였다.

 

서원순(徐元淳)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12일 정해

일강하였다.

 

12월 13일 무자

일강하였다.

 

12월 14일 기축

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2월 15일 경인

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서염순(徐念淳)을 광주부 유수로, 조병준(趙秉駿)을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지난달에 전최(殿最)에 대하여 어떻게 신칙(申飭)하였기에 해백(海伯)의 전최에는 한 사람도 중(中)·하(下)에 든 자가 없는가? 기강(紀綱)이 있는 바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함사(緘辭)로 추고(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6일 신묘

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2월 17일 임진

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2월 18일 계사

일강하였다.

 

12월 23일 무술

평안 감사                     김병기(金炳冀)가 상소하여 본도의 폐단을 구제하는 방책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온 영(營)이 텅비어 온 도내가 곤란을 겪고 있으니, 서도(西道)를 돌아보는 한 마음이 밤낮으로 풀리지 않는다. 교구(矯捄)할 방책과 구급(救急)할 자료를 묘당(廟堂)에서 잘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4일 기해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하비(下批)하여 이현서(李玄緖)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민치성(閔致成)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원조(李源祚)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25일 경자

희정당(熙政堂)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좌의정                     이헌구(李憲球)가 아뢰기를,
"선혜청(宣惠廳)의 전문(錢文) 5만 냥(兩)과 사역원(司譯院)의 포세전(包稅錢) 6만 냥을 특별히 관서(關西)에 빌려 주도록 허락하여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고 감영(監營)의 모양을 일신(一新)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의 초사인(初仕人)을 소견(召見)하였다.

 

홍재룡(洪在龍)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이희경(李熙絅)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12월 26일 신축

이규철(李圭徹)을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2월 27일 임인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 춘향(春享)의 서계(誓戒)를 행하였다.

 

심승택(沈承澤)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28일 계묘

이원달(李源達)을 개성부 유수로, 홍우철(洪祐喆)을 강화부 유수로 삼았다.

 

12월 30일 을사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경조(京兆)에서 민수(民數)를 바치었다.                        【5부(五部)·8도(八道)의 원호(元戶)가 1백 58만 8천 8백75호(戶)인데, 남자가 3백 42만 2천 7백 41명이고, 여자가 3백 38만 7천 4백 65명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579면
【분류】호구-호구(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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