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정미
경모궁(景慕宮)의 삭제(朔祭)를 행하고, 지나는 길에 어의 본궁(於義本宮)에 들러 봉심(奉審)하였다.
상호군(上護軍) 김문순(金文淳)이 졸(卒)하였다.
8월 2일 무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문신(文臣)의 제술(製述)과 한학 문신(漢學文臣)의 강(講)을 행하고, 또 호위 군관(扈衛軍官)의 포진(布陣)을 행하였다.
시임·원임 대신 및 약원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성후(聖候)의 보호는 오로지 탕제에 매여 있으며, 탕제의 공효(功效)는 오로지 진후(診候)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인접(引接)하는 경우가 아주 드무니 대성인이 병을 신중히 여기는 뜻에 크게 어긋남이 있습니다. 옛날 우리 선묘조(宣廟朝)와 숙묘조(肅廟朝) 때에 항상 양예수(楊禮壽)와 유상(柳詳)을 좌측(座側)에 둔 것이 근시배(近侍輩)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성후를 익숙하게 익혀 매번 증세에 대한 탕제(湯劑)를 아뢰었으며, 또한 영묘조(英廟朝)의 만년에는 약원(藥院)의 인접(引接)을 매번 연침(燕寢)에서 하였으며, 더러는 편복(便服)으로 일시(日時)에 구애되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도 이런 아름다움을 본받으신다면 성체를 보호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도제조 김사목(金思穆)이 아뢰기를,
"비록 여염(閭閻)의 일반 백성의 집일지라도 혹시나마 약을 복용할 경우에는 의원을 맞아들여 진찰하기를 반드시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상세하고 신중하게 그의 재능을 다하게 하였으니, 그런 연후라야 맥을 상세히 살필 수 있으며, 약의 공효를 아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조석으로 진찰하게 하여도 간혹 시기를 놓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탕제(湯劑)를 진어(進御)하는 절차를 돌아보면, 단지 황문 소시(黃門小侍)175) 가 바삐 봉입(封入)하도록 할 뿐이니, 신 등의 억울한 마음에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무신의 삭시사(朔試射)를 행하였다.
8월 3일 기유
약원(藥院)에서 입시(入侍)하였다.
개성 유수 민기현(閔耆顯)이 졸(卒)하였으므로 유상조(柳相祚)로 대신하게 하였으며, 박종경(朴宗慶)을 호조 판서로, 김이영(金履永)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문관과 음관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관북(關北)의 무산(茂山)·갑산(甲山)의 절미(折米) 4만 석과 영남의 원회미(元會米)·우병영 향미(右兵營餉米) 1만 석, 그리고 관서(關西)의 별향목(別餉木) 2백 동(同)을 호조에 떼어 주도록 명하였는데, 경상 비용이 부족하다고 비국(備局)에서 청한 때문이었다.
8월 4일 경술
중일각(中日閣)에 나아가 행행(行幸)할 때의 군령(軍令)을 받았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전경 무신(專經武臣)의 강(講)을 행하였다.
8월 5일 신해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존덕정(尊德亭)에 나아가 태학 유생(太學儒生)의 응강(應講)을 행하였다.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8월 6일 임자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경모궁(景慕宮)의 추향(秋享)에 쓸 향·축(香祝)을 전하고, 이어서 인정전(仁政殿) 월대에 나아가 예행 연습을 하였다.
약원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이문 제술(吏文製述)을 행하고, 이어서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궁궐 밑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쌀을 내려 주었다.
규장각에 나아가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8월 7일 계축
홍문관(弘文館)에 나아가 별강(別講)을 행하였다.
약원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여 도담탕(導痰湯)의 진어(進御)를 정지하고, 감맥 대조탕(甘麥大棗湯)을 이튿날부터 달여서 들이도록 명하였다.
이집두(李集斗)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무신 당상(武臣堂上)의 삭시사(朔試射)를 행하였다.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옥당의 진전(進箋)을 받았다.
8월 8일 갑인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도정(都政)을 행하였는데, 망통(望筒)을 지체(遲滯)시켰다는 것으로 이조 판서 이면긍(李勉兢)과 병조 판서 박종래(朴宗來)를 파직하도록 명하고, 박종경(朴宗慶)을 이조 판서로, 심상규(沈象奎)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는데, 도제조 김사목(金思穆)이 아뢰기를,
"승정원의 여러 신하들의 말을 들으니, 간혹 밤이 깊은 뒤에 명령을 출납(出納)하는 때가 있다고 하였는데, 잠자리에 드는 절차에 있어서도 그 때를 잃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증세를 상세히 하교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잠이 드는 것을 하룻밤으로 견준다면 거의 3, 4경(更) 쯤이며, 수라(水剌)는 평상시와 비교하면 10분의 1에 불과하다."
하자, 김사목이 아뢰기를,
"요즈음에는 조동(跳動)하는 징후가 어떠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금 나은 편이다."
하자, 김사목이 아뢰기를,
"황홀(恍惚)한 징후는 어떠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끔 있다가 곧바로 그치기도 하며, 정신이 간혹 앞뒤의 일을 잊어버리는 때가 있다."
하자, 김사목이 아뢰기를,
"요즈음에는 피곤한 증세는 어떠합니까? 신이 삼가 어좌(御座)에 오르내리는 때를 보니 가끔 고르지 않은 때가 많으신데, 혹시 피곤한 증세 때문에 그러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점점 그전과 같지가 않다."
하자, 김사목이 아뢰기를,
"신 등이 약(藥)의 당부(當否)를 의논하는 것은 오로지 성후(聖候)를 상세하게 살피는데 매여 있으니, 계속해서 지금부터는 자주 소접(召接)하도록 허락하시기를 천만 번 바라고 빕니다."
하였다.
8월 9일 을묘
시임·원임 대신과 각신(閣臣)·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전경 무신(專經武臣)의 강(講)을 행하였다.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태학 유생(太學儒生)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8월 10일 병진
약원(藥院)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중일각(中日閣)에 나아가 문신의 삭시사(朔試射)를 행하고, 이어서 어수당(魚水堂)에 나아가 문관·음관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강원 감사 홍의모(洪義謨)가 졸(卒)하였다.
8월 11일 정사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냉천정(冷泉亭)의 별분향(別焚香)에 쓸 향(香)을 전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선파인(璿派人)의 응제(應製)를 행하고, 이어서 금군(禁軍)을 열무(閱武)하였다.
육상궁(毓祥宮)과 선희궁(宣禧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8월 12일 무오
약원(藥院)에서 입시하였다.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석채 유생(釋菜儒生)의 응제(應製)를 시험 보이고, 이어서 전경 문신(專經文臣)의 강(講)을 행하였다.
8월 13일 기미
약원(藥院)에서 입시하였다.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8월 14일 경신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경모궁(景慕宮) 망제(望祭)에 쓸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총관(摠管)에게 선온(宣醞)하였다.
8월 15일 신유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박종경(朴宗慶)·참판 김이영(金履永)·참의 송면재(宋冕載)·병조 판서 심상규(沈象奎)이다.】 김이도(金履度)를 호조 판서로, 김이교(金履喬)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직보(李直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조만원(趙萬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호민(李好敏)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총관(摠管)의 진전(進箋)을 받았다.
혼원삼중고(混元三重膏)를 오늘부터 달여서 들여오게 하여 진어(進御)하도록 명하였다.
8월 16일 임술
시임·원임 대신 및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영부사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며칠 전에 신이 약원의 여러 신하들의 말을 들으니 성상의 하교에 이르기를, ‘내 마음을 내가 도리어 알지 못하는 때가 있다.’라고 하셨다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알지 못한다는 하교는 바로 그것을 안다는 단서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정말로 알지 못하신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하교가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관찰하건대, 근래에 전·당(殿堂)에 임어(臨御)하심이 거의 빠지는 날이 없으시니, 성궁(聖躬)의 노고는 이미 말할 수 없지만, 전좌(殿座)하셨을 적에는 그 일을 끝낸 적이 없으며, 출궁이나 환궁하는 경우에는 매번 허둥대며 급히 서두르는 탄식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화기(火氣)가 쌓인 증세로 인연하여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답답함을 소통시키는 자료로 삼기는 하지만, 전하께서는 위로 삼전궁(三殿宮)을 받들고 아래로 억조(億兆)의 백성을 다스리시니, 종묘·사직의 중대함과 민생(民生)의 운명이 전적으로 전하의 몸에 매여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매번 성심(聖心)이 깨우쳐지고 밝아졌을 때에 통렬하게 억제하는 방도를 힘쓰시어, 하루 이틀이나 한두 가지 일에 있어서도 그때그때 재량(裁量)하고 억제한다면, 옥후(玉候)가 손상을 당한 근저(根柢)를 즉시 시원하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며, 본체의 총명도 머지 않아 회복이 되실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이 고명하시니, 비록 일시적인 증후가 있다 하더라도 만약 우선 마음 다스리는 공부를 잘 착수하고 증후와 제절(諸節)을 약원의 여러 신하들에게 환히 유시(諭示)하여 안팎으로 번갈아가며 치료하는 방법을 다하도록 한다면, 옥후를 평상시처럼 회복시키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로 병을 치료하는 데에 있어서 마음을 치료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가려진 것이 없으면 병이 침입할 수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은 아뢰기를,
"요즈음 정령(政令)이 전도(顚倒)되고 동정(動靜)에 일정함이 없다는 것은 조정의 신하들 뿐만 아니라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들 알고 있으니, 민심이 흉흉합니다. 장차 어그러지고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민심이 한번 떠나게 되면, 국가는 따라서 위태롭게 되므로 대소의 신민들이 초조하게 애를 태우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지만, 이와 같은 상황을 깊은 구중 궁궐에 계시는 전하께서는 아직 미처 듣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매번 쌓인 화기(火氣)를 없애어 내려가게 하는 때에 억제시키는 공부를 한층 더하소서."
하였다.
인정전(仁政殿)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육조 낭관(六曹郞官)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8월 17일 계해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다시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숭릉(崇陵)에 쓸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감맥대조탕(甘麥大棗湯)의 진어(進御)를 정지하고, 가미심신탕(加味心腎湯)을 오늘부터 달여서 들이게 하였다.
약원(藥院)에서 입시하였다.
8월 18일 갑자
어수당(魚水堂)에 나아가 태학 유생(太學儒生)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8월 19일 을축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내금위(內禁衛)의 시사(試射)를 행하고, 이어서 농산정(籠山亭)에 나아가 성균관 유생의 응강(應講)을 행하였다.
규장각에 나아가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옥당이 모두 비고 강연을 오래도록 폐하였기 때문에, 오늘 규장각에 나아가 석강을 행한 것은 옥당 제신들에게 경계하는 뜻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이 뜻으로써 신칙하여 그들로 하여금 번(番)을 갖춤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8월 20일 병인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을 소견하고, 전경 무신(專經武臣)의 강(講)을 행하였으며, 이어서 훈국 중사군(訓局中司軍)을 열무(閱武)하였다.
신사 호행 대차왜(信使護行大差倭)가 출래(出來)한 것으로 인하여 조봉진(曹鳳振)을 접위관(接慰官)으로 차출하였다.
승지·사관과 각신(閣臣)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8월 21일 정묘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선릉(宣陵)에 쓸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8월 22일 무진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이조와 형조 낭청(郞廳)의 응강(應講)을 행하였다.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승지·사관과 각신(閣臣)의 응사(應射)를 행하였다.
8월 23일 기사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태학 유생(太學儒生)의 응제(應製)를 행하고, 이어서 전경 무신(專經武臣)의 강(講)을 행하였다.
8월 24일 경오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의릉(懿陵)에 쓸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8월 25일 신미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휘릉(徽陵)에 쓸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전경 무신(專經武臣)의 강(講)을 행하였다.
이조원(李肇源)을 이조 참판으로, 백동원(白東薳)을 공충도 병마 절도사(公忠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8월 26일 임신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장녕전(長寧殿)의 수개제(修改祭)에 쓸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태학 유생(太學儒生)의 응강(應講)을 행하였다.
8월 27일 계유
약원(藥院)에서 입시하였다. 전 현령 홍욱호(洪旭浩)를 의약(議藥)에 함께 참여하도록 명하였는데, 도제조가 청하였기 때문이다.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전경 문신(專經文臣)의 강(講)을 행하였다.
8월 28일 갑술
약원(藥院)에서 입진(入進)하였다.
농산정(籠山亭)에 나아가 대궐 안에 입직한 음관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대궐 밖 각 관사의 문관·음관의 응강(應講)을 행하였다.
8월 29일 을해
차대하였다.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근래에 입계(入啓)한 공사(公事)를 오래도록 판하(判下)하지 않으시어 일이 지체된 것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연분 사목(年分事目) 및 수령 망통(守令望筒)을 여러 날 동안이나 판하하지 않으셔서, 민읍(民邑)의 일이 참으로 매우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하고, 약방 도제조 김사목(金思穆)이 아뢰기를,
"오늘날 성후(聖候)가 편찮으시어 탕제를 연달아 진어(進御)하는 때에, 신 등이 의관(醫官)과 함께 장시간 능히 대령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석(朝夕)의 제절(諸節)을 잇달아 자주 상세히 받들지 못하며, 탕제를 달여서 올리는 데에도 때를 어길 염려가 있습니다. 신 등이 입진 의관(入診醫官)과 함께 본원(本院)에서 돌아가며 입직하는 것이, 실로 사체(事體)에 적합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약원(藥院)에서 돌아가며 입직하는 것을 오늘부터 하도록 하라."
하고, 혼원삼중고(混元三重膏)의 진어(進御)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종묘(宗廟)·경모궁(景慕宮) 삭제(朔祭)에 쓸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전경 무신(專經武臣)의 강(講)을 행하였다.
입직한 각신(閣臣)에게 명하여 《맹자(孟子)》를 가지고 입시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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