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27권, 정조 13년 1789년 윤5월

싸라리리 2025. 8. 2.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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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5월 1일 병술

여러 도에 명하여 납육(臘肉)018)  을 꿩으로 대신 바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납육을 바치기 위해 행하는 사냥이 크게 민폐를 끼친다는 것을 듣고서 경기 고을들에서 바치는 멧돼지·노루·사슴을 꿩으로 대신 바치라고 명하였다. 또 호남 지방은 바닷가가 아니면 평야 지대인데다가 주변의 산마저 벌거숭이여서 납육을 바치라고 독촉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하여 경기 감영의 예에 따라 대신 꿩으로 바치게 하였다. 이어 여러 도로 하여금 각각 편리한지의 여부에 대해 진술하게 하였다. 그리고 납육과 평상시에 별봉(別封)하는 멧돼지·노루·사슴을 꿩으로 준절(準折)해 대신 바치라고 명하였으며, 이어 사옹원에서 받아들일 때 점퇴(點退)하여 금품을 강요해 받아내는 폐단을 금지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아 그 내용을 써서 사옹원 청사(廳舍) 벽에 게시하게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홍억(洪檍)이 추계(追啓)하기를,
"경주(慶州)·안동(安東)·상주(尙州)·함양(咸陽)·안의(安義)·창원(昌原)·진주(晋州)·김해(金海)·거제(巨濟)·남해(南海) 등 고을에는 꿩이 없어서 한 마리의 사슴을 잡는 것이 도리어 쉬우므로 모두 이전대로 해주기를 원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윤5월 3일 무자

이조원(李祖源)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윤5월 4일 기축

구익(具㢞)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윤5월 6일 신묘

이경일(李敬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해서와 영남에 전염병이 유행하였는데, 구료(救療) 방법을 세우도록 특별히 신칙하고, 빈궁하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고을에서 돌보아 도와주라고 명하였다.

 

윤5월 8일 계사

상이 도수도 단자(都囚徒單子)를 열람하고서 전교하였다.
"서울의 죄수 중에 이미 심리(審理)가 다 끝난 무리들에 대해서 매양 한 번 조사해 열람하고자 하였으나, 근자에 여러 도의 조사 문건을 처리하느라 미처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본조의 초기(草記)를 보건대 옥중(獄中)에 전염병이 있다 하니, 진실로 불쌍히 여겨 구휼하는 것이 합당하다. 일차 죄인(日次罪人)과 결안 죄인(結案罪人) 등에 대해서는 판서와 참판·참의가 문안을 상세히 열람하여 명단을 초록(抄錄)한 후에 판서가 입대(入對)해 품처(稟處)하라. 그리고 다시 조사할 죄수 6명은 형조 안으로 옮겨 두었다가 감옥 안에 전염병 기운이 사라져 깨끗해지기를 기다려 도로 가두라.
근자에 여러 도의 장계를 보건대 전염병이 도는 곳이 더러 있으므로 백성들에 대한 구료(救療)는 방금 묘당으로 하여금 특별 관문(關文)으로 엄히 신칙하게 하였다. 그런데 옥에 갇힌 죄수로 말하면 옥중에 이런 병세가 있을 경우, 전염될 것이 우려될 뿐 아니라 범죄가 모두 사형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처형으로 죽지 않고 병으로 죽게 될 것이니, 이것은 죄인을 불쌍히 여겨 신중히 처리하는 정사에 어긋남이 있다. 도내(道內) 각 고을의 죄수 중에 현재 앓고 있는 무리가 있으면 즉시 편의에 따라 습기가 없는 깨끗한 방으로 옮겨 가두거나 혹은 보증을 받고 놓아주라. 연전에 《흠휼전칙(欽恤典則)》을 반포할 때에도 옥사(獄舍)를 깨끗이 쓸고 닦으라는 등의 일로 서울과 지방에 신칙하였거니와, 이렇게 더운철을 당하여 비록 병이 없는 곳이라 하더라도 사리로 보아 이 뜻으로 거듭 명령하는 것이 마땅하니 각도에 일체로 엄히 신칙하라."

 

윤5월 9일 갑오

이문원(摛文院)에 묵으면서 재계하였다.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기일(忌日)이 윤5월 10일이기 때문이었는데, 선대왕 경인년에 윤달을 만나 예(禮)를 행하고서 이어 정식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던 것이다.

 

이명식(李命植)을 판의금부사로, 이재간(李在簡)을 이조 판서로, 이갑(李𡊠)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사목(金思穆)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황산 찰방(黃山察訪) 유운우(柳雲羽)가 상소하여 역(驛)의 폐단을 진술하자, 비변사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논해서 장계로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전교하기를,
"역마에 있어 토산마(土産馬)로 달종(㺚種)을 대체하는 것이 어찌 본도만 그러하겠는가. 이로 인해 묘당으로 하여금 여러 도에 두루 물어보게 하였더니, 그 중 한두 도는 영남의 예를 따라도 무방하겠다고 하였다. 사신 일행을 태우는 말로 말하면 남쪽 끝에서 방목하고 있던 것을 북쪽 끝으로 몰아 보내야 하므로 불편할 뿐만이 아니어서 사신의 행차가 있을 때마다 관서(關西)의 말을 대파(代把)하는 일이 거의 없는 해가 없으니, 관서의 입장으로 볼 때 대파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는가. 이것도 다시 관서에 물어 품처하라."
하였다.

 

윤5월 10일 을미

열천문(冽泉門)에서 망배례를 행하고, 반열에 참여했던 조사(朝士)와 유생·무신(武臣)들을 불러 보았다. 전교하기를,
"관직이 없는 삼학사(三學士) 집안의 자손 중에서 각각 한 사람씩을 빈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등용하라. 지금 듣건대 충장공(忠章公) 이흘(李忔)의 연시(延諡)를 연호(年號)에 구애되어 할 수 없다고 한다 하니 그들의 소원대로 단지 연·월만을 써서 주라. 그 집안 자손들을 보건대 빈한하다는 것을 알 만하니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연시할 때에 관에서 연회에 필요한 물자를 주라. 그리고 이후로는 반열에 참여하는 문신이나 무신 중에 일찍이 일명(一命)의 관직이라도 지낸 자는 모두 사모 관대 차림으로 들어와 참여하게 하라."
하였다.

 

특별히 이조 참판 김문순(金文淳)을 온성 부사(穩城府使)에 보임(補任)하였다. 문순이 우의정 채제공과 혐의가 있어 그의 천망(薦望)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엄한 전교를 내려 견책하여 외직에 보임한 것이다.

 

서유린(徐有隣)을 판의금부사로, 김종수(金鍾秀)를 한성부 판윤으로, 정창순(鄭昌順)을 예조 판서로, 구상(具庠)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윤5월 11일 병신

차대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내성군(萊城君) 정기원(鄭期遠)이 임진란 초기에 명나라 조정에 울면서 호소한 공로가 실로 많습니다.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과 함께 남원(南原)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양원은 도망하였으나 기원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선조(宣祖)께서 이미 증작(贈爵)을 명하시고 또 정려(旌閭)를 명하셨으며, 또 남원사(南原祠)에 모셔지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도 실렸습니다. 그러나 그 자손들이 시골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시호가 내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고 판서 이기(李墍)도 선조(宣祖) 때의 명신으로 임진·계사년 사이에 나라를 위해 공로를 세워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자신을 단속함이 청렴하고 엄숙하여 청백리(淸白吏) 선발에도 들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도 절혜(節惠)의 은전을 내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모두에게 시호를 주라고 명하였다.

 

이경무(李敬懋)를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대제학 오재순(吳載純)이 대제학으로서 견책하여 파직하라는 탄핵을 한 번이라도 받으면 잉임(仍任)할 수 없는 것이 3백 년 동안 내려오는 문원(文苑)의 고사(故事)라고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비답을 내려 윤허하였다.

 

윤5월 13일 무술

홍병성(洪秉聖)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서유방(徐有防)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도류안(徒流案)에 실린 각도의 죄인들을 너그럽게 처결하였다.

 

윤5월 14일 기해

정존중(鄭存中)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재간(李在簡)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윤5월 15일 경자

죄인들을 너그럽게 처결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 처분에서 아내의 상전을 능욕한 죄로 귀양간 자들이 많이 풀려났다. 대체로 인원수가 너무 많아, 혹 다른 죄를 지은 사람이 이 율(律)로 처결된 경우가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가벼이 방면(放免)하였겠는가. 대체로 가장 가증스럽고 가장 해괴한 것이 이른바 비부(婢夫)가 아내의 상전에게 불공(不恭)한 것으로 양반집이나 여염집을 막론하고 능욕을 당하는 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오늘날 백성들의 풍습이 예전과 같지 않아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때에 이런 죄를 헐하게 다스린다면 후일의 폐단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 너그럽게 방면해준 것으로 조정의 본의가 헐하게 다스리는 데 있다고 오인(誤認)하지 말라. 이후로는 드러나거나 고발되는 대로 즉시 모두 법대로 처결해서 귀양보낼 것이다. 비부의 불공이 어찌 단지 중신(重臣)이나 품계가 있는 양반의 집에만 있는 일이겠는가. 이제부터는 지체가 낮고 미미한 사람이 능욕을 당한 것에 대해서도 고발되거나 혹은 전해 듣는 대로 즉시 엄히 다스리라. 그러나 규례에 정해진대로 형장을 치고 도배(徒配)하는 것만으로 어찌 악을 징계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 중에 사리가 중한 자에게는 반드시 모두 원율(原律) 이외에 한 차례 엄히 형벌하고서 조율(照律)해 도배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심이지(沈頤之), 참판 유당(柳戇), 참의 박천형(朴天衡)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현풍현(玄風縣)에 정배한 죄인 조상우(趙相羽), 방답진(防踏鎭)에 정배한 죄인 최광태(崔光泰), 금산군(錦山郡)에 정배한 죄인 김천흠(金天欽), 진산군(珍山郡)에 정배한 죄인 이규경(李奎景) 등은 극악한 역적을 징토(懲討)하는 상소문에서 이름을 도려내기도 하고, 혹은 흉악한 역적을 변호하는 의논에 동참하기도 하였으니, 완전 석방하는 무리 속에 섞어넣는 것은 실로 악을 징계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삼가 네 사람을 방면해 보내라는 명을 서둘러 취소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윤5월 18일 계묘

상이 호남과 호서의 장계를 열람하였다. 전교하기를,
"장계 말미(末尾)에 쓸데없는 군소리를 써넣는 것에 대해서 방금 신칙하였거니와, 근래 여러 도에서 잘못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다. 이 장계의 내용으로 말하더라도 이는 임금의 하사(下賜)를 삼가 받았다는 형편을 진달하는 데 불과한 것이고 보면, 단지 삼가 받은 연유로 치계(馳啓)한다고만 하는 것이 옳은데, 은혜가 지극히 융숭하고 덕이 지극히 두텁다는 등의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비록 이보다 백 배나 더한 선정(善政)·양법(良法)이라 하더라도 이로 인해 지나치게 칭찬하는 번신(藩臣)들의 말을 듣는다 해서 조정에 무슨 광영(光榮)이 있겠는가. 이것은 모두 조정이 엄숙하지 못한 소치이다. 여러 고을에 명령을 선포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효유(曉諭)하는 데 부지런하냐 게으르냐 하는 것이 어찌 말미에 말이 많고 적은 데 관계되겠는가. 이 장계를 도로 내려보내라. 일전에 충청 감사의 장계를 보고서도 처분하고자 하였으나 아직 결행(決行)하지 못하고 있던 참이니, 두 도의 도신을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라."
하였다.

 

윤5월 19일 갑진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형조 판서 심이지(沈頤之)를 불러 보았다. 이지가 아뢰기를,
"인신(印信)을 위조한 죄인 남의진(南毅鎭)이 위조한 인신은 바로 과일 껍질에 새겨 만든 것으로 이것을 찍어 위조 문권(文券)을 만들었으니 다시 더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각(篆刻)한 자획(字畵)이 완전하지 못하고 인신이 격식대로 되지 않은 것은 감사(減死)로 처결하라는 수교(受敎)가 계셨다. 그러나 이 죄수는 인신을 찍어 문권을 위조한 것이 이미 드러나 잡혔으니, 어찌 응당 받아야 할 처벌을 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모자가 많고 주범(主犯)과 종범(從犯)이 분명하지 않으며, 그 자가 도중에서 문권을 탈취하려 한 계획도 사태가 궁박해지자 외람된 짓을 한 데서 나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으니, 애긍(哀矜)이라는 두 글자는 바로 이 옥사(獄事)를 위해 준비된 말이라 하겠다. 남의진을 엄히 형벌하여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이지가 아뢰기를,
"인신을 위조한 죄인 이형수(李亨秀)가 새긴 인신은 인발이 다 닳아 없어져서 새긴 형태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마치 나무 조각이나 기와 조각을 찍어 놓은 것 같고, 또 그 서법(書法)과 말을 엮은 것이 전혀 문서의 형식이 없으니, 이에 대해서는 조금은 생각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교(受敎)의 정식을 이런 죄수에 적용하는 것이 합당하니, 경은 물러가 수교를 상고하여 즉시 참작해 처결한 뒤에 초기(草記)하라."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삼가 선대왕의 수교를 상고하건대 ‘내가 인신 위조범을 처결함에 있어 항상 마음에 편치 못한 점이 있었으니 늙은 지금에 와서 어찌 하유(下諭)하지 않겠는가. 이미 대신들에게도 물어보았거니와, 대체로 위조를 처벌하는 법은 본래 《대명률(大明律)》이 아니라 《대전(大典)》의 법이고, 인발이 없는 인신으로 문안을 작성한 자를 사형에 처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과거에는 이런 무리들을 살리는 쪽으로 처결하였지만 혹시라도 잘못된다면 사람의 목숨이 어찌 중하지 않은가. 이 또한 《대전》의 뜻이 아닐 뿐더러 진실로 득표(得彪)의 일처럼 될 것이다. 이후로는 서울과 지방의 법관(法官)이 문안을 작성할 때 세심히 살피고 삼갈 것으로 형조·포도청 및 팔도·3도(都)에 신칙하라.’고 전교하였을 뿐, 율명(律名)의 경중에 대해서는 하교(下敎)가 없으셨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수교의 깊은 뜻을 준수(遵守)하여 차율(次律)로 처결해서 방면하라."
하였다.

 

윤5월 22일 정미

차대하였다. 이에 앞서 연신(筵臣)이 평안 감영 창고에 저축하고 있는 면포(綿布)가 유명무실하다고 아뢰었으므로 사정(査正)하라고 명한 바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좌의정 이성원이 아뢰기를,
"관서에서는 무명의 길이 10척을 한 필이라고 하니, 이것은 모두 창고지기들의 농간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상은 세 등급으로 나누어 보고하라는 뜻으로 본도에 알리자고 하지만, 신의 생각에는 세 등급으로 나눌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현재 창고 속에 있는 것 중에서 새[升]나 자수가, 남겨두었다가 뒤에 쓸 만한 것들은 보관하고, 그 밖에 쓸 만하지 못한 것들은 구별해서 책자에 기록해 보고하여 서울의 관청에서 가져다 쓰기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이후로는 해마다 받아들이는 새 무명에는 필마다 몇 등·몇 년도산·몇 자라는 도장을 찍어 후일의 참고에 대비하게 할 것으로 엄하게 규칙을 세우고, 연도가 오래되어 팔 수 없는 것들은 도신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처분하게 하소서. 그리고 해마다 5만 냥 중에서 3분의 1이나 4분의 1에 한하여 무명으로 대신 받고, 그 나머지는 본색(本色)과 현금으로 보관하였다가 매 연말에 무명으로 받은 것이 얼마이고 돈으로 보관한 것이 얼마라는 것을 낱낱이 본사(本司)에 보고하도록 하여 관리할 수 있는 자료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척수가 짧은 베는 수십 년 전부터 내려온 물건이어서 지금에 와서 조사해 내어 소급해 처벌한다는 것은 사세로 보아 방법이 없다. 비록 경들의 말에 따라 편리한 대로 등급을 나누어 처리하게 한다 해도 이번의 이 거조는 바로 크게 정리하는 것이니 이른바 잡된 항목의 명색을 어찌 감히 다시 거론하겠는가. 이후로는 서울 본사(本司)에서 가져다가 쓸 때와 적간(摘奸)할 때에 만약 척수가 차지 않거나 표지가 없는 것이 있을 경우 당해 도백(道伯)을 장오율(贓汚律)로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해부(該府)의 장고(掌故)에 기재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과 선혜청 당상 이재간이 아뢰기를,
"곡식을 저축해야 하는 도에 먼저 돈이 있는지의 여부를 묻고서 백방으로 강구해 보았으나 끝내 좋은 계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관서의 좁쌀 얼마를 떼어다가 곡식을 사들인 양의 다소를 보아 균역청에 이관해 기록하고 관례에 따라 반을 환곡으로 나누어주고서 단지 모곡(耗穀)만을 취하고, 균역청의 돈을 3도에 나누어주어 한결같이 각각 그 도의 전례에 따라 좋은 쪽으로 곡식을 사들여 저축하게 한다면, 관서 창고에는 저축이 줄어들 염려가 없고 다른 도의 곡부(穀簿)에는 곡식을 사들일 길이 생길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관서의 좁쌀은 정공(正供)에 관계된 것으로서 세곡(稅穀) 중의 일부를 본도에 떼어놓은 것이니 호조 이외에는 급여할 수 없는 것이 규례입니다. 그런데도 근년 이래로 각 아문(衙門)에서 요청해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3도에서 곡식을 사들여 저축하는 것이 비록 백성들을 위한 데서 나온 것이지만 관서의 좁쌀은 요청하는 대로 급여해서는 곤란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곡식을 저축하는 방법은 대체로 백성들의 식량을 위해서이고 겸하여 다음 해를 위해서이다. 그리고 본사(本司)의 기유년 등록(謄錄)을 열람해 보건대 그 때에도 풍년이 들어 미리 뜻밖에 생길 수요(需要)를 강구해 두었기 때문에 임진·계사년에 이르러 순전히 그 덕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러므로 며칠 전의 차대에서 특별히 경들에게 조치하여 품처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대체로 곡식을 가지고 곡식을 늘리는 것은 이것을 옮겨다가 저것과 바꾸는 데 불과하니 이미 더 늘어나는 효과는 없고 한갓 모아놓기만 한다는 한탄만이 있을 것이다. 어렵게 여기는 우상의 말이 매우 의견이 있다. 오늘 관서의 잡다한 항목의 무명을 발매(發賣)하는 한 건(件)을 결정해 주었으니 그들이 힘써 일하기를 기다려 속히 서둘러 곡식을 모으라. 그리고 곡식 값을 먼저 추이(推移)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오직 경들이 유사(有司)의 신하들과 방편을 상의하는 데 달렸을 뿐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혹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침이 있을 듯하지만, 이 문제라면 연전에 신칙했던 전교를 경들도 반드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니 모두 살펴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린이 아뢰기를,
"영남 세 조창(漕倉)에서 조선(漕船)이 올라올 때 안흥(安興)에서 점검하는 규정은 벌써부터 있어왔지만 법성진(法聖鎭)에서 점검하는 것은 어느 때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점검을 받기 위해 항구로 들어갈 때 도리어 위험에 부딪힐 염려가 있고 검열할 때 지체되기 쉬우니 지금부터는 안흥 이외의 점검은 모두 혁파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안흥의 경우로 말하더라도 반드시 모든 조선이 본진의 선소(船所)에 일제히 정박하기를 기다려 점검하기 때문에 그 선소를 출입하는 데 매양 어려움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후로는 영남·호남을 막론하고 각 조창의 조선이 안흥 앞바다 포구에 도착한 뒤에는 수우후(水虞候)가 배를 타고 나아가서 규례대로 점검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러면 법을 준수하고 폐단을 제거하는 도가 어그러지지 않고 함께 행해질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유린이 아뢰기를,
"법성·군산(群山)은 도차사원(都差使員)의 칭호만으로는 조창의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가 되기에 부족하니, 법성은 반드시 진량(陳良) 한 면(面)을 이관해 받고, 군산은 반드시 북면(北面) 한 면을 이관해 받고, 또 성당(聖堂)을 읍진(邑鎭)에 이속(移屬)한 뒤에야 영구히 폐단이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두 진이 비록 일반이라고는 하지만 조창의 폐단은 법성이 더욱 심하니 더욱 심한 곳부터 땅을 분할해 맡게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군산은 조창의 폐단이 조금 나을 뿐만이 아니라 옥구(沃溝)는 영광(靈光)에 비해서 고을의 크고 작음에 큰 차이가 있으니 덮어놓고 떼어내는 것은 곤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운(漕運)의 정사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땅을 떼어 이속(移屬)시키기 전에 영(營)과 진(鎭)들을 서로 비교해서 반드시 동등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영광군 진량 한 면을 법성에 주어 그대로 독진(獨鎭)으로 만들고 첨사(僉使)를 변지 이력(邊地履歷)의 자리로 삼으라. 군산의 경우도 당초에는 법성의 예를 따르려고 생각했으나 이미 여러 사람의 의견에 이견이 있으니 땅을 떼어주는 문제는 실로 경솔히 의논하기 곤란하다. 변지 이력의 자리로 삼는 문제는 참작해 결정함이 있어야 하겠지만 독진으로 삼는 것은 법성과 일반이다. 여러 사람의 의논도 이미 같으니 두 진을 모두 변지 이력의 자리로 만들라."
하였다.

 

김희(金憙)를 이조 참판으로, 윤상동(尹尙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평안도 청남(淸南)과 함경도 남관(南關)에 별부료(別付料)를 설치하였다. 전교하기를,
"서도(西道)와 북도에 당초 별부료를 설치한 것은 대체로 먼 지방 사람들을 회유(懷綏)하고 기예(技藝)를 권장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고, 강변(江邊)과 관북으로 한정한 것은 그 지방이 더욱 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북 두 도가 모두 변방인 이상 그 사람들을 회유하고 그 기예를 권장함에 있어 남·북의 구분이 없어야만 한다. 북도의 별부료를 용흥(龍興) 이북으로 한정하고 서도의 별부료를 중산(中山)의 각 고을들로 한정한 데에서도 남쪽만 편벽되이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더구나 듣건대 남관 사람들이 별부료가 혁파된 뒤부터 발신(拔身)할 수 있는 계제가 없고 재주를 쌓아도 쓸 곳이 없으므로 자포자기하여 모두 헛되이 늙어간다는 한탄을 하고, 서도의 청남 역시 활 잘 쏘고 말 잘 타기로 이름난 고장인데도 추천·발탁될 길이 없어 남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들어간다고 하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북도는 바로 왕업(王業)이 일어난 곳이고 서도는 곧 무예를 숭상하는 곳이니 국가에서 서도와 북도를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그런데도 평상시에 이미 권장하고 발탁하지 않았으니 급한 때에 어찌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서도와 북도의 문신(文臣)들이 여러 해 동안 침체되었기 때문에 연거푸 소통(疏通)시켜줄 것을 명하였으니, 문신들에게 이렇게 한 이상 무사(武士)들도 어찌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특별히 용흥 이북과 중산 각 고을의 옛 규정을 인용하여 청남·남관에도 별부료를 따로 설치해서 인재를 수습하고 기예를 권장하는 방도로 삼으라. 설치에는 선후의 구별이 있고 변방에는 내외의 차이가 있으니 한결같이 강변과 관북의 예를 따를 필요는 없다. 뽑아올리는 별부료의 수는 원 별부료 수에 비해 각각 그 반씩만을 뽑아 합쳐서 한 청(廳)으로 만들고, 구근(久勤) 변장(邊將)도 간도목(間都目)으로 차임해 보내게 하라."
하고, 이어 절목을 만들어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남관에 20명·청남에 20명씩을 뽑았는데 각각 출신이 10명이고 한량(閑良)이 10명씩이었다.

 

장령 조성규(趙星逵)가 상소하기를,
"근래 홍수와 가뭄이 해마다 계속되어 1년 내내 손에 못이 박히도록 일해도 과다한 세금을 충당할 수 없고 논농사·밭농사·습지 농사에 애써 부지런히 해도 아침 밥 저녁 죽마저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남의 전지를 빌려서 경작하는 자는 세(貰)를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고 품팔이를 업으로 삼는 자는 신역(身役)을 내기에도 부족합니다. 게다가 한 몸으로 세 역(役)을 하는 자들이 매우 많은데, 관리들의 횡포로 끝도 없이 해를 입고 있으니 어찌 근심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된 뒤로 고을 수령들이 공인(工人)·상인(商人) 및 사기(沙器)나 옹기(甕器)를 만드는 마을에서 징수하는 세금에는 모두 정해진 액수가 있는데, 또 허다한 명색을 새로 만들어내어 수탈하는 묘책으로 삼고 있습니까. 이에 수령을 골라서 임명하라는 전교를 날마다 연석(筵席)에서 내리시지만 구차히 머리수나 채우는 정사는 그런 무리를 임명하는 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 전하께서 정주(政注) 때마다 의망(擬望)된 자를 바꾸라는 거조가 없지 않으셨으니, 이것이 비록 정선하겠다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다시 의망되는 사람이 바뀌기 이전의 사람보다 훌륭하리라는 것을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장관(長官)이 가르치는 것이라고는 단지 문장을 정기적으로 시험하는 것뿐이니 이것이 어찌 옛날에 인재를 기르던 방도라 하겠습니까. 가르치기를 정당한 도리로써 하지 않고 취하기를 정당한 방법으로 하지 않아, 그 덕의 대소는 묻지 않고 문벌의 고하만을 물으며, 그 재주가 맞는지의 여부는 논하지 않고 그 선음(先蔭)의 유무만을 논하니, 관직에는 어진 사람을 세우고 일에는 유능한 사람을 앉힌다는 도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중에 과거로 사람을 뽑는 것으로 말하면, 명경과(明經科)의 경우 빨리 외우는 것을 공으로 여기고 제술(製述)의 경우 성운(聲韻)이 잘 맞는 것을 기이한 것으로 여기며, 전강(殿講)으로 말하면 한 경(經)을 자원해 외우게 하고는 주석까지 아울러 제외시켜 주고서 이로써 합격시키니, 이는 은총이 과람한 데 가까운 것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도가 되기에는 부족할 듯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하루에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한 증자(曾子)의 심법(心法)과 네 가지에 아직 능하지 못하다고 하신 공자(孔子)의 뜻으로 조정이 편안하지 못할 경우이면 반드시 ‘나의 회탕(恢蕩)의 정치가 확립되지 않아서인가.’ 반성하시고, 근신(近臣)들이 총애를 믿고 함부로 굴 경우이면 반드시 ‘나의 단속이 엄격하지 못해서인가.’ 반성하시고, 신하들이 연약하여 거스리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풍속이 될 경우에는 반드시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나의 아량이 넓지 못해인가.’ 반성하시고, 궁실이 너무 아름다운 경우이면 반드시 ‘검소를 숭상하는 나의 덕이 닦여지지 않아서인가.’ 반성하소서.
재물 하나를 쓰는 데에도 그것이 우리 백성들의 피와 땀에서 나온 것임을 생각하시고, 기뻐하거나 미워하는 사이에도 그것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친 데서 나온 것임을 생각하시며, 일을 당해서는 반드시 총명하다고 스스로 뽐내는 것을 경계하시고, 정사에 임해서는 매양 대체(大體)를 굳게 지키기만을 생각하소서. 상벌이 공평하지 않으면 어찌 봉삼(奉三)의 도019)  를 몸소 실천했다고 하겠으며, 비가 오고 햇볕이 나는 것이 순조롭지 않으면 어찌 치중(致中)의 학020)  을 마음으로 터득했다고 하겠습니까. 어느 때 어느 곳이고 스스로 반성하지 않음이 없도록 하소서. 언어 동작의 사이나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사이에 이르기까지 이런 마음으로 헤아려 처리하신다면 명령을 내림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지 않을 것이며, 어진 자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침에 사람들의 뜻이 모두 복종하여, 조정의 백관이나 만백성들이 모두 감히 바르게 행동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아, 중신(重臣) 윤시동(尹蓍東)이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전하께서 남김없이 통찰하시고서 이미 서용(敍用)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근자에 공격하는 수고를 그칠 줄 모른단 말입니까. 허다한 언관(言官) 중에 중신을 변호하거나 중신을 공격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유독 한쪽편 사람들만이 서로 계속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들은 비록 온 나라의 공론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신은 당사(黨私)의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래 백성들이 생업을 잃어 간사한 거짓이 날로 더해져서 팔도의 판적(版籍)에는 실호(實戶)가 이미 줄었고 고을들의 군액(軍額)에는 허부(虛簿)가 태반이어서 이웃과 친척들에게 침징(侵徵)하는 환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이웃과 친척들도 지탱해 보전할 수 없어 역시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고 있으니 장차 백성이 하나도 남지 않는 데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보오법(保伍法)을 실시하게 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고향을 떠나는 일이 있을 경우, 아무 고을 아무 마을의 아무 신역(身役)을 진 아무 이름의 사람이 아무 고을로 거처를 옮긴다는 내용으로 본 고을에 보고하면 고을에서 공문을 만들어주어 빙거(憑據)해 믿을 수 있는 자료로 삼게 하고, 만약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이곳에 살기를 원할 경우, 보오(保伍)의 우두머리가 그의 공문을 상고해 관에 보고해서 살도록 허락하되, 3년까지는 그 신역과 포흠(逋欠)을 그가 전에 살던 고을에서 공문을 보내어 징수해 가게 하고 3년이 지나면 그가 현재 살고 있는 고을에서 징수하게 하며, 만약 공문이 없는데도 살도록 허가한 것이 적간(摘奸) 때 발견될 경우, 담당자를 논죄(論罪)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도망해 흩어지는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도성(都城)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세 군문(軍門)뿐인데도 군졸의 태반이 도성 2, 30리 밖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만약 급한 일이 생겨 성문이 모두 닫히는 날이면 비록 달려 들어와서 호위하려 하여도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성 밖에 사는 군졸들을 이사시켜 성안에 살게 함으로써 명령하는 즉시 출동할 수 있게 한다면 어찌 만전의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말에 매우 근거가 있으니 여러 조항에 권면한 것들을 깊이 생각하겠다. 덧붙여 진술한 일은, 봄에 내린 금령(禁令)과 그대가 이른바 온화한 비답이란 것은 모두 때에 따라 걸맞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이 시끄러움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미에 진술한 두 건(件)의 일은 하나는 백성을 속박하는 데 가까우니 아마도 받아들여 시행하기 어려울 것 같고, 하나는 성 밖이 그리 먼 곳은 아니다."
하였다.

 

윤5월 28일 계축

좌의정 이성원이 장문(長文)의 단자를 올리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평안도 병마 절도사 이경무(李敬懋)가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으니, 삭탈 관직하여 방귀 전리(放歸田里)하였다.

 

윤5월 29일 갑인

전교하였다.
"삼가 선왕조(先王朝)의 어제(御製)를 상고하다가 근자에 옛날의 의망 단자(擬望單子)를 전조(銓曹)에서 발견했는데 어휘(御諱)가 실려 있었다. 그러므로 특별히 단장해 매어 첩(帖)으로 만들게 하였다. 이조와 병조에 있는 망통(望筒) 중에 만약 선대왕의 어휘가 기재된 것이 있으면 호조 판서로 하여금 살펴보고서 선왕조의 고사(故事)에 따라 잘 단장해 첩으로 만들어 봉모당(奉謨堂)에 봉안하게 하라. 열성조(列聖朝)의 낙점(落點)한 망통은 비변사·승정원·이조·병조를 막론하고 역시 호조 판서로 하여금 살펴본 뒤에 각각 궤에 넣어 정부와 도총부의 예에 따라 각각 해당 관청의 벽이나 문미(門楣) 위에 간직하게 하라. 당후(堂后)021)  의 경우는 비좁으니 당상관의 청사(廳舍)에 간직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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