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27권, 정조 13년 1789년 6월

싸라리리 2025. 8. 2.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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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병진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5일 기미

선묘(宣廟)의 어찰(御札)이 고 판서 송언신(宋言愼)의 집에 있었다. 상이 들여오게 하여 구경하고는 호조로 하여금 다시 단장해 첩으로 만들어서 본가에 돌려주게 하고, 따로 한 벌을 모사(模寫)해서 내각에 보관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어 송언신에게 시호를 주라고 명하였다. 어제 발문(御製跋文)은 다음과 같다.
"모두 일곱 쪽인 이 첩은 우리 선조 대왕께서 함경도 관찰사 송언신에게 내리신 수독(手牘)이다. 첫째 쪽은 계사년 7월 어가(御駕)가 의주(義州)에 머물러 계실 때 북로(北路)의 일을 부탁한 것이고, 둘째 쪽은 은총을 내려 명주와 모시를 그 어버이에게까지 반사(頒賜)하고 또 상화지(霜華紙)를 하사한다는 내용인데, 때는 정유년 중양절(重陽節) 3일 뒤였다. 셋째 쪽은 그 해 11월 20일에 그의 헌의(獻議)가 있음으로 인해 검은 비단을 하사하고 이어 덧붙인 대책에 대해 진력하기를 명한 내용이고, 넷째 쪽은 비방에 개의치 않고 직무에 진력한 것을 위로한 내용인데, 그 이듬해 3월에 붓을 바칠 때 내린 것이다. 그 다음 쪽은 또 그의 헌의가 있으므로 인하여 비단·명주·모시 및 청원향(淸遠香)·천지다(天池茶)·낭호필(狼毫筆)·저영필(楮穎筆)을 하사한다는 내용이고, 또 그 다음 쪽은 중요한 지역에 적임자를 얻도록 권장한 내용인데, 이 다섯째 쪽과 여섯째 쪽은 모두 3월 이후에 내린 것이다. 일곱째 쪽은 또 이듬해 기해년에 서울로 돌아올 것을 허락하면서 불로단(不老丹)·비천고(比天膏)를 하사한 내용이었다.
아래에서 정성을 바치고 위에서 은혜로 대우한 것을 보건대 어진 임금과 어진 신하가 한마음으로 뭉쳤던 대략을 찾아볼 수 있다. 더구나 전쟁으로 어지러워 사방의 순수(巡狩)가 오랫동안 폐해졌는데, 관북(關北)과 서울이 비록 멀지만 임금과 신하가 매우 가까워 화락하기가 마치 사가(私家)의 부자가 천 리 밖에서 면담(面談)하듯이 한 것은 외인으로서는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었으니, 참으로 훌륭했다. 아, 이때를 당하여 좌우에 훌륭한 신하들이 구름처럼 많았으니 어찌 유독 이 사람에게만 사사로이 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임금이 친밀하게 하지 않으면 신하를 잃는 것이니, 그가 사람들보다 훌륭하다고 여겨 사사로이 한 것이다. 사사로이 하지 않고는 일을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개 성인의 은미한 뜻은 장차 한 세상을 풍미(風靡)하여 뭇 호걸들을 창의(倡義)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어찌 뒤를 이은 임금으로서 헌장(憲章)으로 삼아 계승해 밝혀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2백여 년이 지난 뒤에 그 일을 아뢰는 자가 있기에 가져다 보니 그 문장이 마치 운한(雲漢)이 밝은 빛을 내며 회전해서 찬란하게 문장을 이루어 상서로운 빛이 나와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이에 나 소자(小子)가 감동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일었으니, 어찌 오래된 골동품의 연조나 고증하고 대수롭지 않은 물건을 보존하는 것과 함께 논할 수 있겠는가. 듣건대 그의 집이 옛부터 한강 남쪽에 있는데 매우 가난하여 이 첩을 정성들여 걸어둘 곳이 없다 하므로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집[閣]을 지어주어 봉안(奉安)하게 하였고, 그에게 영양(榮襄)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이어 그 자손을 찾아서 그 고을에서 먹여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성조(聖祖)022)  께서 돌보아주셨던 뜻과 일을 잇기에 충분할지는 모르겠다."

 

한성부와 진휼청이 무너진 민가(民家)에 휼전(恤典)을 베풀 것으로 아뢰니, 전교하기를,
"가난한 백성들의 집이 많이 무너졌다 하니 매우 불쌍할 뿐만이 아니다. 더구나 완전히 무너진 무리들은 몸을 의지할 곳조차 없을 것이니, 이것이 그들을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무너진 민가에 대한 별단(別單)이 올라올 경우 계하(啓下)를 잠시도 지체한 적이 없었던 것은 그들의 가족이 실지의 효과를 입을 수 있게 하고자 해서였다. 본청에서는 제때에 맞추어 제급(題給)했으며, 해당 민가가 받아간 것도 과연 날짜를 넘기지 않았는가? 날씨가 개이기를 기다려 적간(摘奸)할 사람을 파견하여 근만(勤慢)을 조사시킬 것이다. 본청에서 태만히 하였으면 본청의 낭관을 잡아다가 처벌하고, 해부(該府)에서 태만히 했으면 당상관과 낭청을 엄중하게 감죄(勘罪)하고, 신칙하지 않은 부관(部官)도 먼저 파면시킨 뒤에 잡아들일 것이니, 다시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6월 6일 경신

평안도 관찰사 정창성(鄭昌聖)이, 비로 인해 대동강이 넘쳐 민가가 떠내려가고 무너진 것으로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번 비로 평양성 안에 무너진 집이 수백 호에 이른다 하니, 그 딱한 사정을 듣고도 만약 특별히 돌보아 구휼하지 않는다면 농사철에 백성들이 무엇을 믿고서 생명을 유지하며 정착해 살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선전관에 명하여 역마를 타고 달려가서 위로하고 원래의 휼전(恤典) 이외에 연전의 화재를 입었을 때의 예에 따라 호수를 계산해서 나누어 주고, 도백(道伯)과 지방관을 신칙하여 힘써 자재와 인력을 모아 무너진 집을 개축(改築)하고, 완전히 무너진 집에는 환곡과 신포(身布)를 탕감해 주게 하였다.

 

전교하였다.
"수표교(水標橋)가 넘는 데 이르지 않고 장맛비가 온종일 내리는 데는 이르지 않았으나, 두 달에 걸쳐 장마가 계속되고 있으니 농사에 병이 생길 것이 우려된다. 관서 지방에는 물에 떠내려간 민가가 이처럼 많으니 북도의 사정이 진실로 근심된다. 서울은 팔도의 표상이니 시기의 조만(早晩)을 논하지 말고 좋은 날을 받을 것도 없이 즉시 기청제(祈晴祭)를 시행하라."

 

삼성사(三聖祠)를 개수(改修)하고 제사 의식을 개정(改正)하였다. 삼성사는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을 제사하는 사당으로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에 있는데, 본도에 명하여 봉심(奉審)해 개수하게 하고, 친히 제문을 지어 근시(近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전교하기를,
"전 평안 감사의 연주(筵奏)를 듣건대, 평양 같이 큰 곳에서도 기성(箕聖)의 사당에 미비된 의식이 있다고 하는데, 더구나 본 사당이겠는가. 감사로 하여금 해당 고을에 물어서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하니, 감사 이홍재(李洪載)가 삼성사의 제품(祭品)과 제사 의식으로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본 사당의 체모가 숭인전(崇仁殿)023)  과 일반이기는 하지만, 기자(箕子)는 동방으로 와서 임금이 되었고 단군은 요(堯)와 나란히 서서 임금이 되었으니, 맨 먼저 나와서 비로소 나라를 세운 업적을 상고해 보면 높여 받드는 절차에 있어 기자보다 더욱 존경하는 것이 합당하다.
12변두(籩豆)는 종묘와 사직 제사에만 사용하고 이 밖에 역대 시조(始祖)의 사당에는 각각 2두와 2변씩을 감하였는데, 유독 본 사당에만 변·두의 수를 종묘와 사직의 예에 따라 사용하고 있으니, 개정한 본의를 모르겠다. 그렇다면 두 가지의 희생을 사용하는 것도 어디에서 모방한 근거가 있겠는가. 축문의 서식과 홀기(笏記)에, 첫째 신위(神位)와 둘째 신위에 곧장 환인·환웅이라 쓰고 별칭이 없는 것도 의아스럽다. 이 밖의 의식 절차에도 치제(致祭)하는 홀기에 단지 ‘홀을 잡는다.’ ‘홀을 꽂는다.’는 말만이 있을 뿐이니, 시향(時享) 때는 제복을 입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변에 개자(芥子) 등 네 가지와 두에 초와 간장 두 가지에 있어 바꾸어 쓰는 것과 응당 써야 하는 것은 과연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현행 진설 도식(陳設圖式)이 도리어 옛 도식만 못한 것은 무슨 곡절에서인가? 헌관(獻官)을 으레 지방관으로 차정(差定)하고 지방관이 유고시에는 향임(鄕任)이 대행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숭인전에는 없는 예이다. 전사(典祀) 겸 대축(大祝)을 변장(邊將)으로 차정하는 것도 매우 타당치 않다. 사당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 사람됨과 처지가 어떠하며 종이나 하인 등 감독하여 보살피는 무리는 있는가? 이미 사당의 의식이 이처럼 엉성하다는 것을 들은 이상 어찌 무턱대고 인습할 수만 있겠는가. 관문(關文)으로 해도(該道)에 묻고 여러 신하들에게 문의하라."
하였다. 해도가 아뢰기를,
"옛 도식에 10변두로 되었던 것이 새 도식에 12변두로 바뀐 것은 어느 해에 고쳐진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제복이 다 떨어져서 임시 방편으로 흑단령(黑團領)을 입은 것도 몇 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신축년에 감사가 치제할 때 ‘홀을 꽂는다.’ ‘홀을 잡는다.’는 등의 말은 있으나 애당초 홀을 잡고 꽂는 절차가 없었으니, 이렇게 변천된 데에는 모두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변에 개자 등 네 가지와 두에 초·간장 등 두 가지에 있어서도 바꾸어 쓴다는 예문(禮文)이 없으며, 절향(節享) 때 헌관을 으레 지방관으로 차정하고, 전사 겸 대축과 도예차(都預差)는 첨사(僉使)·만호(萬戶)·별장(別將) 중에서 차정합니다. 지방관이 공석(空席)일 경우이면 겸관(兼官)024)  이 헌관이 되고, 지방관이 있으나 유고할 경우이면 전사 겸 대축이 헌관으로 오르고 도예차가 전사 겸 대축으로 오르니, 향임이 일찍이 대행한 적이 없으며, 모든 집사(執事)는 생원·진사·유학(幼學) 중에서 차정합니다. 두 가지 희생을 쓰는 것과 홀기에 첫째 신위와 둘째 신위를 곧장 환인·환웅이라고 쓰고 별칭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증빙할 만한 문적이 없으므로 억측으로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사당을 지키는 사람으로는 도감(都監)과 감관(監官)이 있고, 하인으로는 사당지기와 산지기 등의 명색이 있습니다. 절향 때 전사 겸 대축을 찰방으로 차정하지 않는 것은 비단 내려오는 전례일 뿐만이 아니라 사신의 행차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므로 세 역(驛)의 찰방을 여기저기 나누어 파견할 겨를이 없는 소치입니다."
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종묘와 사직에 변·두는 그 수가 모두 12이고 역대 제왕(帝王)들의 사당에는 10만 쓰고 둘을 감한 데에는 본래 뜻이 있는데 본 사당에 옛 도식을 지금 도식으로 변경한 것이 누구에게서 비롯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축문의 서식에 곧장 환인·환웅이라고 쓰고 별칭이 없는 것이 비록 의아스럽기는 하지만, 단군 시대에는 풍속이 미개하였으니 문명을 어찌 논하겠습니까. 환인·환웅이 호(號)인지 이름인지를 지금에 와서 함부로 헤아릴 수 없을 뿐더러 위판(位版)에 이미 이렇게 쓰여 있는 이상 이것이 아니고서는 달리 호칭할 방법이 없습니다. 헌관을 변장으로 대체(代替)하는 것은 엉성하고 구차하니, 헌관은 반드시 본 고을의 현령으로 차정하고 전사 겸 대축은 반드시 찰방으로 차정해야 합니다. 현령과 찰방이 모두 유고시에는 원근을 막론하고 도내(道內)의 수령으로 대신 차정해야 합니다. 사당을 지키는 사람으로 이미 도감·감관의 호칭이 있고 모두 본 고을의 유생 중에서 차정하고 있는 이상 각별히 선택하게 할 뿐입니다. 사당지기 5명과 산지기 1명에게도 모두 역(役)을 지우지 말아 수호에 마음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순박한 풍속은 멀어지고 겉치레의 형식만 날로 심해가는 이때에 무엇 때문에 절차 사이의 번잡한 의식에 대해서 고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본 사당의 체모가 각별하니 제사가 격식에 맞지 않으면 실로 제사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는 탄식이 있을 것이다. 지난번에 말을 엮어서 판하(判下)한 것도 실로 이런 마음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변·두의 가짓수 중에 전에 없던 것이 지금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반포한 조령(朝令)이 없었으니 속히 옛 제도로 돌아가라. 토산물(土産物)로 바꾸어 쓰는 것도 편의에 따르도록 허락하겠다. 희생에 관한 일은 증거할 만한 문적은 없으나 예의에는 전거가 있다. 축문 서식과 홀기에 쓴 것이 호인지 이름인지 분간해 알기 어려우니, 이 두 조항은 모두 예전대로 하는 것이 무방하다. 제복 대신 임시 방편으로 흑단령을 입는 것은 마음대로 결정한 데 가까우니 해도에 신칙해서 새로 제복을 마련하고 또 떨어진 것은 수리하게 하라."
하였다.

 

6월 7일 신유

사대문(四大門)에 영제(禜祭)를 지냈다.

 

6월 8일 임술

한성부가, 민가(民家)가 무너진 것으로 아뢰니, 전교하기를,
"왕정(王政)은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로 미쳐가는 것이다. 금년의 큰물은 근년 중에 가장 많은 것이었으니, 모든 도에 만약 물에 떠내려간 민호(民戶)가 있거든 각각 지방관으로 하여금 방방곡곡을 자세히 살펴서 원래 휼전(恤典)에 든 자들부터 회감(會減)한 뒤에 장계로 보고하게 하고, 이 밖에 휼전에는 들지 않았지만 가난해서 몸을 가릴 곳이 없는 무리들은 감사로 하여금 뽑아내어 상례(常例)에 얽매이지 말고 돌보고 구휼하여 기필코 고향에 정착하게 하라."
하였다.

 

6월 10일 갑자

전교하였다.
"금년의 큰물은 근래에 없던 바인데, 더구나 물가에 과다하게 물이 불어났으니 이것이 강가에 사는 백성들이 더욱 지탱해 견디기 어려운 까닭이다. 도성 안팎의 완전히 무너진 민호에 대해서는 원래 정해진 휼전이 있거니와, 근자에 한성부가 올린 별단(別單)을 보건대 완전한 부분이 많고 무너진 부분이 적은 무리들은 차치하고 구호 등급을 논하지 않았다. 금년에는 이런 데 구애되지 말고 완전한 부분과 무너진 부분이 절반 이상이 되는 잔약한 민호에게는 휼전을 일체로 시행하여 등급을 나누어 제급(題給)하라. 지금 선전관이 적간(摘奸)하고 돌아와서 아뢰는 말을 듣건대, 강가의 민호 가운데 물 속에 잠겨 무너졌는지 완전한지를 분간할 수 없는 것이 그 수가 또한 많다고 하니,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 한성부의 낭관을 보내어 부관(部官)과 함께 형편을 적간한 뒤에 휼전을 시행해야 할 자에게는 예에 따라 제급하도록 하라. 수해(水害)를 입은 곳에는 대호(大戶)·중호(中戶)·소호(小戶)를 막론하고 금년의 잡역(雜役)을 특별히 면제하거나 감해주고,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판윤(判尹)이 몸소 순찰하면서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물어서 등대(登對)해 아뢰라.
지금 듣건대 하산군(夏山君)의 손자가 가난하여 스스로 생존할 수 없어 기울어져가는 집안의 형편이 보기에 딱하다 하니, 즉시 해부(該府)로 하여금 그 사람을 불러다가 사정을 자세히 묻고 호조에 넘겨 후하게 구휼해 주도록 하라."

 

6월 11일 을축

재차 영제(禜祭)를 지냈다.

 

김문순(金文淳)을 이조 참판으로, 이조원(李祖源)을 이조 참의로 삼고, 민종현(閔鍾顯)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가 이내 구익(具㢞)을 대신 임명하였다.

 

6월 13일 정묘

차대하였다.

 

6월 13일 정묘

한성부 판윤 서유방(徐有防)을 불러 보고서 상이 이르기를,
"작년 여름에 병막(病幕)을 적간한 부관(部官)들의 노고가 가상할 뿐만이 아니라 전염도 되지 않았으니 그들을 위해 매우 기뻐하였다. 또 지난 겨울 목면(木綿)을 발매(發賣)할 때에 자격이 있는 민호(民戶)를 골라 뽑아내느라고 추위도 무릅쓰고 뛰어다녔고, 금년에는 수해로 병든 백성들과 무너진 민호를 적간하느라고 밤낮으로 수고하였다. 옛날에 성단용(城旦舂)025)  이란 말이 있거니와, 명색이 조정의 관원이고 또 잘못한 죄도 없으면서 이처럼 고뇌하는 것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으로서는 감내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조정에서 권장하는 은전을 이런 무리들에게 베풀지 않고 어디에 베풀겠는가. 작년 여름 이후로 연거푸 너댓 역(役)을 담당했던 자들을 모두 벼슬을 올려 등용하라."
하였다.

 

선원각(璿源閣)을 개축(改築)하였다. 종부시(宗簿寺)가, 선원각이 지지난 경자년에 건축되었으므로 재목이 썩고 상하였으니 본시(本寺)의 낭청을 보내어 개축할 것을 건의하자, 윤허한 것이다.

 

6월 15일 기사

황해도 관찰사 이홍재(李洪載)가 지난달 큰비로 인하여 신천(信川)·재령(載寧)·안악(安岳)·곡산(谷山) 등 네 고을에 1백 65호의 민가가 무너진 것으로 치계하니, 넉넉하게 휼전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6월 16일 경오

상이 서울과 지방의 전최(殿最)를 보고서, 남을 시켜 폄목(貶目)을 쓴 어영 대장 이방일(李邦一)을 파직시켰다. 전교하기를,
"나라의 큰 정사로서 고적(考績)보다 더한 것이 없다. 폄목과 제평(題評)을 개봉하기 전에는 누설할 수 없다는 국법이 지엄하므로 직접 스스로 써넣는 것이 바로 3백 년 동안 내려오는 옛 규정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서울이나 지방에서 폄목을 대서(代書)시키는 폐단이 있으니, 결코 이방일 한 사람뿐이 아니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이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먼저 묘당에서 안으로는 각사(各司)와 밖으로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에 이르기까지 다시 거듭 금칙(禁飭)을 엄하게 밝히라. 그런 뒤에도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개봉하는 날에 해방 승지가 그 사실을 아뢰라. 모두 법대로 처단할 것이다."
하였다.

 

규장각에 명하여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계속해서 완성하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여러 문신(文臣)들에게 업무를 분담시켜 여러 도의 읍지(邑誌)를 모아가지고 운각(芸閣)에서 편찬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완성되지 못하였다.

 

이한풍(李漢豊)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6월 17일 신미

훈련 대장 이주국(李柱國)이 상소하여, 다른 사람을 시켜 폄목을 쓰게 하였다고 자수하니, 불서(不敍)의 처벌을 내렸다.

 

김사목(金思穆)을 총융사로 삼았다.

 

6월 19일 계유

차대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원춘도(原春道) 포폄 계본(褒貶啓本) 중 회양 부사(淮陽府使)에 관한 제목(題目)에 ‘잔약한 중이 절벽에 칭송하는 글을 새겼다.’고 썼습니다. 대체로 선정비(善政碑)를 세우는 것은 그 원이 갈려간 뒤에 있는 일인데, 그 원이 그 고을에 있는데도 그 고을 백성들이 절벽을 깎아 칭송하는 글을 새긴 것은 아첨이 가증스러울 뿐만 아니라 뒷날의 폐단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도신(道臣)은 드문 일로 보아 번거롭게 상주(上奏)하기까지 하였으니, 감사 이도묵(李度黙)을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어 전교하기를,
"근래 온갖 일에 허위가 풍조를 이루어 윗사람이 하는 일은 명예를 구하는 것뿐이고 아랫사람이 일삼는 것은 아첨뿐이다. 비석을 세우는 일은 당연히 금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이다. 더구나 선왕의 금령이 지엄하였는데도 조정의 금령을 무시하고서 방임한 채 금하지 않았으니, 감사부터 신칙하지 않은 죄를 받아야 한다. 묘당에서 모든 도에 행회(行會)해서 고을과 진(鎭)에 엄히 신칙하여 비석이란 명목이 붙은 것들을 모두 철거하게 하라. 그런 뒤에도 다시 금령을 범하는 자는 한결같이 법대로 감죄(勘罪)하라."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지난 경자년은 건륭(乾隆)026)  이 70세가 되던 해였는데, 당초 중국 정부에서 알려오지 않았으되 기해년 절사(節使)가 갈 때에 방물(方物)과 하례하는 표문(表文) 및 사유를 적은 자문(咨文)을 갖추어 보냈고, 또 다음 해 성절(聖節) 때도 따로 사신을 보내어 하례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내년이 바로 건륭의 나이가 80세가 되는 해이니, 이번 절사가 갈 때에 기해년의 예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어영 대장 이한풍을 양재역(良才驛)으로 유배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신의 말을 듣건대, 폄목을 대서시킨 일로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 죄상을 따져볼 때 나이 많은 것을 핑계한 이주국보다 백 배나 더하고 원래 꼼꼼하지 못한 이방일보다 열 배나 더하다. 대체로 상례에 벗어난 은총을 입힌 것이 어찌 옅은 생각에서였겠는가. 하나는 충무공(忠武公)의 집안에 근래 장신(將臣)이 없기 때문이었고, 하나는 그 형을 아직 다 등용하지 못한 것을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다년간 시위(侍衛)에 출입할 적에 매양 움츠리고 불안해 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에 조심성이 여러 무장(武將)들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의 범죄는 단지 무엄(無嚴)으로 논죄할 수만은 없다. 설령 사람마다 모두 법을 범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감히 본받아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처음 장신으로 제수되어 처음 고적(考績)함에 있어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지금 만약 기탄없는 그 행위를 내버려둔다면 장신이란 명색이 있는 자들이 장차 법률이 무엇하는 것인지를 모르게 될 것이다. 어영 대장 이한풍을 개차(改差)하고 이어 곤장을 쳐서 귀양보내라."
하였다.

 

홍병찬(洪秉纘)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6월 20일 갑술

도목 정사(都目政事)에 친히 임하여 【이조 판서는 이재간(李在簡), 참판은 홍병찬, 참의는 이조원(李祖源)이고, 병조 판서는 이문원(李文源)이었다.】  좌의정 이성원(李性源)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조종현(趙宗鉉)을 부사(副使)로, 김익휴(金翊休)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이재간을 체직하고 정창순(鄭昌順)을 대신 제수하였다. 재간이 연석에서 간곡히 진달했기 때문이다.

 

6월 21일 을해

이조 판서 정창순이 상소하기를,
"지난번 대간이, 인류가 금수로 화하고 중국이 오랑캐로 변한다는 설을 오늘날 성대(聖代)의 근심스러운 일로 삼으라고 하면서 신이 전조(銓曹)에 있는 것을 마치 홍수(洪水)와 이단(異端)이 세상에 해를 끼치는 것처럼 보았습니다. 신 또한 무턱대고 올라가고 요행으로 분수에 넘는 은총을 받은 것이 이처럼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전장(銓長)의 망(望)에서 신의 이름을 삭제해 주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가 이내 불러 보고서 체직하였다.

 

이갑(李𡊠)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6월 22일 병자

서유대(徐有大)를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부사과 강석귀(姜碩龜)가 상소하기를,
"작년 겨울에 윤음(綸音)을 받들어 본도에 펼 적에 전 안동 부사(安東府使) 신익빈(申益彬)의 행위가 그지없이 놀랍고 통탄스러웠습니다. 대간에 내리신 비답 중에 ‘이후로는 영읍(營邑)이나 유생을 막론하고 다시 본 사건을 제기해서 상주(上奏)하는 일이 있으면 모두 향전율(鄕戰律)027)  로 논죄할 것이고, 조성(助成)한 관장(官長)은 배가(倍加)의 형벌로 처치할 것이다.’고 분부하셨는데, 이것은 진실로 소요를 종식시키고 세속을 진정시키려는 성대하신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본도 감사 홍억(洪檍)은 향전율로 논죄하겠다는 전교를 빙자해서 금년 봄에 통문(通文)을 발송한 유생에 대해 본 고을에 관문을 보내어 넉 달 동안이나 가두어두게 하고, 한 차례 엄히 형문(刑問)하여서 남해의 섬 속으로 귀양보내게 하였습니다.
아, 성상의 비답이 반포된 뒤로 유생들은 감히 다시 소요를 일으킴이 없었는데, 감사는 반드시 죄에 얽어넣고야 말려 하였으니 조성(助成)한 관장이 홍억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섬으로 귀양보내는 것은 특별 전교가 없으면 감사가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신이 이미 대간의 직에서 체직된 이상 율명(律名)을 감히 청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 상소문이 체직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감히 이렇게 말미에 진술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상 감사의 일로 말하면, 비록 사실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편벽되게 억압한 잘못에는 그에 상당한 책벌(責罰)이 있어야 하니, 해도의 감사를 월봉 일등(越俸一等)에 처하겠다. 특별 전교가 없으면 섬으로 귀양보낼 수 없는 것이니, 진실로 너의 말대로라면 감사의 일은 더욱 타당하지 않다. 당해 유생을 즉시 풀어보내도록 하라. 영남 유생으로 말하더라도 이후로 다시 본 사건을 제기하여 혹시라도 시끄럽게 구는 일이 있으면 곡직(曲直)을 불문하고 전에 내린 금령대로 처단할 것이니, 너는 돌아가서 그 고장 사람들에게 전하여 영남 인사들로 하여금 모두 거듭 유시한 뜻을 체득하게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영남 일대가 평소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칭해진 것은 윗사람을 친애하고 상관을 위해 대신 죽을 줄을 알아 예의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듣건대 예안(禮安)에는 수령의 선정비(善政碑)가 없다 한다. 이것은 악(惡)은 물론이고 선(善)도 입을 열어 칭찬하려 하지 않아서이니 그 뜻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며 그 풍속이 어찌 순후하지 않은가. 수령에게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감사에 대해서이겠는가. 대간의 직을 띠고 있는 몸이라면 무엇을 말해도 불가하지 않으니 수령·방백을 가릴 것이 뭐 있겠는가마는, 전관자(前官者)로서 도내 감사의 선악을 논한 것은 고사하고라도 규례를 무시한 잘못은 처분이 없을 수 없다. 이것은 곧 영남 사람들을 권면하여 잘하기를 바라서이니 부사과 강석귀를 파직하여 풍속을 도탑게 하고 사체(事體)를 중시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6월 23일 정축

오재순(吳載純)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6월 24일 무인

심화진(沈和鎭)을 먼 섬으로 귀양보냈다. 이에 앞서 규장각 제학 김종수(金鍾秀)가 상께 아뢰기를,
"전 군수 심재진(沈載鎭)이 와서 말하기를 ‘서재종제(庶再從弟) 전 찰방 심화진이, 적삼촌(嫡三寸) 전 사간 심협(沈埉)이 매양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한다고 하기에 윤상(倫常)의 의리로 꾸짖어 물리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또 협이 성상을 꾸짖고 욕설을 한다고 하면서, 즉시 상변(上變)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꾸짖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그런 말을 들은 이상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어 아뢰기는 합니다만, 화진이 요사(妖邪)하다는 것은 전부터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자는 바로 심정보(沈廷輔)의 독자를 독살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형된 정보의 첩의 손자입니다."
하니, 심화진의 이름을 조적(朝籍)에서 깎아내고, 형조로 하여금 형벌을 가해 공초(供招)를 받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승지 홍인호(洪仁浩)가 아뢰기를,
"우상이 신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속에 ‘어떤 사람이 한 통의 봉서(封書)를 바치기에 뜯어 보았더니 고변서(告變書)였다. 그 사람을 불러서 물어보았더니, 바로 청평위(靑平尉)의 서손(庶孫)으로 심협과 사촌이 되는 심득영(沈得永)과 심풍영(沈豊永)이었다. 그들이 말하기를, 협이 아무 아무를 상대해서 귀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성상을 꾸짖고 욕을 하였으나 성상 앞에서 공초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감히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이 비록 고변이기는 하지만 역모(逆謀)를 지적해 발고한 것과는 다름이 있으므로 대신이 입대(入對)를 청해서 인심을 동요시킬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포도 대장을 불러다가 철저히 조사한 뒤에 문안을 작성해 내라고 하였더니, 포도 대장이, 귀로 들은 각각의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은 성상의 분부가 있지 않으면 감히 아래에서 시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득영·풍영은 바로 화진의 자질(子姪)이 아니더냐. 그렇다면 간악한 서얼(庶孽)들의 요망한 계획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다 하겠다. 제 아비가 고발한 것이 혹시라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이렇게 일시에 함께 일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포도 대장에게 명하여 다시 자세히 조사하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포도청이 아뢰기를,
"득영과 풍영이 공초하기를 ‘저희 아비가 저희에게 이르기를 「협이 나라를 원망하는 난폭한 말을 한 것을 외인(外人)으로는 이세장(李世章)이 함께 들었으니 만약 세장의 입에서 이 말이 발설되면 반드시 집안이 망할 것이기 때문에 수차에 걸쳐 너희들에게는 종숙(從叔)이 되는 재진에게 가서 의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아비가 협과 숙질간이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와서 발고한 것은 우리 아비를 위해 억울함을 변호하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세장이 공초하기를 ‘화진이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구제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숙부와 점점 틈이 벌어졌습니다. 득영 등이 발고한 것은 모두 무고입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화진이 공초하기를 ‘삼촌이 사람들이 있고 없고를 생각지 않고 간혹 놀라운 말을 하였으므로 과연 육촌과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얼로서 적통(嫡統)을 빼앗으려 했다는 것은 본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삼촌이 집안에서 없어지면 뒷 걱정이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숙부는 아비와 같고 조카는 자식과 같은데, 아비와 같은 숙부를 고발한 것이 자식이 아비를 고발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가령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부자(父子)의 윤상(倫常)을 모르는 자가 어찌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를 알겠는가. 더구나 심협의 사람됨에 대해 매양 질박하고 우직하다고 인식해 왔기 때문에 애당초 협에게는 심문을 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결정하였다. 근래에 남의 잘못을 들추어 고발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어 출세의 첩경으로 여기기 때문에 심지어 화진이 조카로서 숙부를 고발하는 일이 있게까지 된 것이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장차 종으로서 주인을 고발하고 아내로서 남편을 고발하게 될 것이니 앞으로 더욱 날뛰게 될 조짐을 소홀히 볼 수 없다. 숙부를 무함하고 적통을 빼앗으려 한 것을 가지고 상률(常律)로 처리한다면 그가 어찌 감히 무죄하다고 변명하겠는가. 그의 공초 중에 운운한 말이 바로 반은 승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헤아릴 일이 있다. 청평위의 집안에 원근이나 적서를 막론하고 본파(本派)의 혈속(血屬)으로는 단지 화진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니, 화진이 죽으면 청평위의 후손이 끊어지게 된다. 그리고 화진이 저희 집안 일을 가지고 전 군수 심재진에게 가서 의논할 때에 단지 괴변을 당하여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를 상의했을 뿐이고, 말하는 사이에 비록 성상께 아뢰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가 스스로 고발한 자취가 이미 없고 보면, 마음속의 생각을 주벌(誅伐)하는 법이 섬으로 귀양보내는 데 그치더라도 형을 잘못 시행하는 데는 이르지 않을 것이니, 화진에게 형장을 쳐서 먼 섬으로 귀양보내라.
화진의 말에 의하면 협의 본 사건에 참고가 될 만한 증인이 두 사람이 있다고 하나, 하나는 화진이 전하는 말을 듣고 알았다고 하니 거짓말이라는 것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으며, 하나는 70세가 되어 거의 죽게 된 궁노(宮奴) 중의 한 사람으로 화진과 대질해서 이겼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 협은 죄에서 깨끗이 벗어났으니 앞으로 관직에 어찌 일호라도 구애됨이 있겠는가. 전조(銓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6월 26일 경진

훈련 대장 이주국(李柱國)을 잉임(仍任)시켰다.

 

병조 판서 이문원(李文源)이, 이조 판서 오재순(吳載純)이 매서(妹壻)028)  가 되기 때문에 함께 두 전조(銓曹)를 차지하고 있을 수가 없다 하여 상소해 면직시켜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구윤옥(具允鈺)을 병조 판서로, 이재간(李在簡)을 예조 판서로, 정창순(鄭昌順)을 공조 판서로, 구상(具庠)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6월 27일 신사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였다.

 

6월 28일 임오

경원 부사(慶源府使) 홍성연(洪聖淵)이 상소하기를,
"계묘년의 감진사(監賑使) 이재학(李在學)이 설치한 교제곡(交濟穀)을 삼분 이류(三分二留)하도록 정한 법이 가장 실효가 있습니다. 작년에 기한을 물려주었던 것과 받지 못했던 각종 곡식 2만 8천여 석을 다 받아가지고 어떤 아문(衙門)을 막론하고 반을 꺾어 유고(留庫)하고서 묵은 곡식은 쓰고 새 곡식은 저축한다면 비록 흉년을 만나더라도 백성들에게는 몇 해 동안 지탱할 양곡이 있게 되고 나라에서는 곡식을 운송하는 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금년 봄에 진휼한 백성 중에는 중들이 반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길주(吉州)·명천(明川)·회령(會寧) 등 고을에는 승군(僧軍)의 명색이 있으니, 모든 고을에서 모방해 시행한다면 군대를 충원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고 또한 그들을 점차 환속(還俗)시키는 방도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두 사항은 바로 백성들의 양식과 백성들의 고통에 크게 관계가 있는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정창성(鄭昌聖)이, 영변부(寧邊府)에 물에 빠져 죽은 남녀가 82명이고, 집이 전부 물에 떠내려갔거나 무너진 것이 1백 7호라고 아뢰니,
"죽은 자에게는 환곡과 신포(身布)를 탕감해 주고 집이 떠내려간 자들에게는 납기(納期)를 물려줄 것이며, 원래 정해진 휼전(恤典) 이외에 별도로 쌀 섬이나 주라. 그리고 사체를 거두어 묻어주고 집을 지어주는 등의 일을 지방관에게 엄히 신칙하라."
고 명하였다.

 

지평 이승운(李升運)이 상소하기를,
"윤시동(尹蓍東)의 상소문 내용이 죄를 범한 것이 지극히 중하였고 보면, 전일에 전관(銓官)이 제거(提擧)로 검의(檢擬)한 것부터가 이미 하나의 커다란 세변(世變)입니다. 유신(儒臣)의 항의하는 의논이 있었고 공론이 막을 수 없이 일어났는데도 그 뒤에 전관(銓官)이 된 자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오늘 한 관직에 주의(注擬)하고 내일 한 망단(望單)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혹은 참의의 반대도 돌보지 않고 스스로 담당하고 나서고, 혹은 참판의 인혐(引嫌)도 돌보지 않고 떨쳐 일어나 숙배(肅拜)하고는 마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이 서둘러 주의하였으니, 신은 전후에 의망했던 전관(銓官)에게 모두 삭탈 관직의 처분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삼사의 여러 신하들이 형조의 죄수에 관한 일로 연명으로 올린 차자를 승정원에 당도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즉시 도로 찾아갔습니다.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엄격하고 연명 차자가 지극히 중대한 것인데도 올렸다가 이내 도로 찾아갔으니 상도를 벗어난 어지러운 거조입니다. 신은, 원차(原箚)는 도로 들이게 하여 비답을 내리시고 연명으로 차자한 여러 신하들은 견책해 파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관(銓官)의 일에 관한 말이 너에게서 나왔으니 마음을 비우고 공평한 입장에 서는 것만 못하겠다. 말미에 진술한 일은 서두른 실수이니 일단 논할 것이 없다. 너의 말 또한 일의 체통을 보존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견책해 파직하라는 요청은 그대로 따라 시행하겠다."
하고, 전교하기를,
"대간에게 내린 비답에도 대략 언급했거니와, 겉으로 보면 저희 무리에 사사로이 한 데 가깝다. 비록 요청한 대로 시행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근일 전관의 일은 해괴하기 그지없다. 일차 주의(注擬)도 오히려 임금의 마음을 떠보는 것이 되는데 재차 주의하고 삼차 주의하였으니 어찌 견주어 보려 한 자취를 면할 수 있겠는가. 수망(首望)도 아니고 말망(末望)도 아닌 제 이망자(二望者)만을 번번이 주의한 것은 사세의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매우 눈에 걸렸다.
대체로 중신 윤시동이 그런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또한 죄도 없다고 일찍이 하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근래에 우선 방치하고 있는 것은 잠잠해진 뒤에 등용하겠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고 보면 전관이 아무리 부망(副望)·말망(末望) 사이에 백 번 천 번 주의하여 특별히 낙점(落點)해 주기를 바라더라도 나라에는 기강이 있으니 어찌 벼슬을 구하는 사사로운 요청을 따라줄 수 있겠는가. 이런 풍습은 결코 저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방임할 수 없으니 당해 전관에게 모두 불서(不敍)의 전형을 시행하라.
대신(臺臣)으로 말하더라도 정목(政目)이 한 번 나오면 사람마다 볼 수 있으니 진실로 잘못된 것이 있으면 누구나 말할 수 있다. 근일에 있었던 한 중신을 부망으로 주의한 일이 과연 심히 눈에 걸리기는 하였으나, 허다한 언관 중에 유독 이승운 한 사람만이 논열하였으니 이 또한 뒤를 밟아 추종한 혐의를 면할 수 없다. 더구나 자구(字句) 사이에 타당치 않은 말이 많은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양쪽편 사람들을 융화시키는 이때를 당하여 이런 말은 억제하는 것이 도리에 마땅하니 지평 이승운도 파직하라."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정창성(鄭昌聖)이 의주부(義州府)에서 물에 전부 떠내려간 집이 3백 75호라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변방의 중요한 곳이니 돌보아 구휼하기를 더욱 각별히 하는 것이 마땅하다. 집을 떠내려보낸 뒤에 다시 무슨 힘이 있어 허다한 세금과 부역을 감내할 수 있겠는가. 수해를 입은 민호(民戶)에게는 환곡과 신포(身布)를 신년조(新年條)나 구년조(舊年條)를 막론하고 특별히 모두 상례에 구애되지 말고 탕감해 주라. 그리고 이어 의주 부윤으로 하여금 무마(撫摩)에 마음을 써서 빠른 시일 내로 전처럼 생업에 안주할 수 있도록 하라. 영변(寧邊)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 중에 아직까지 시체를 건져올리지 못한 경우는 다 건지기를 기다려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그리고 사망자의 살아 있는 처자를 불러다가 위로하고 금년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게 하라."
하였다.

 

6월 29일 계미

황산 비각(荒山碑閣)을 개수(改修)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 일찍이 그 고을 원을 지낸 사람을 통해 듣건대, 운봉현(雲峰縣) 황산(荒山)은 바로 국초(國初) 때 승전한 고적지로서 전적(戰績)을 기록한 비석이 황산에서 8리 떨어진 화수산(花水山) 밑에 있는데 비각은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고 체제(體制) 또한 대체로 엉성하여 수호하는 사람으로 단지 승장(僧將)이란 명색만을 두었을 뿐이라 하니, 높여 받들어야 하는 사체의 뜻에 어긋남이 있다. 비각에서 서쪽으로 1백 보(步)쯤 떨어진 곳에 또 동고록(同苦錄)과 연월일을 새긴 석벽이 있는데 고로(故老)들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으며 읍지(邑誌)에도 실려 있다고 하니, 비각이 위치한 곳의 지형을 우선 자세히 살펴보게 하라."
하였다. 감사가 개수하는 역사를 시작했다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보살피고 수호함에 있어서는 중이 속인(俗人)보다 나으니, 중 몇 십 명을 정원으로 한정하고, 곡식을 모아 봄에는 흩고 가을에는 거두어들여 모곡(耗穀)을 받아서 요미(料米)로 주라. 별장(別將)은 전대로 다시 설치하되 고을의 군교(軍校) 중에서 한 갈래를 골라 정하여서 오래 근무한 순서에 따라 삼망(三望)을 갖추어 감사가 병조에 보고해서 의망해 낙점을 받게 하라. 장교가 있으면 졸개가 없을 수 없고 또한 지방(支放)의 밑천도 없을 수 없으니 감사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만들어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황산은 바로 태조(太祖)가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사로잡은 곳이다.

 

6월 30일 갑신

헌납 임도호(林道浩)가 상소하여, 윤시동과 전관(銓官)에 대해 그 잘못을 논하고, 이승운을 파직하라는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전에 조성규(趙星逵)의 소는 언뜻 내비쳤다가 숨기면서 일부러 졸렬한 태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 윤시동의 일에 관한 한 건(件)은 더욱 무엄하기 그지없습니다. 대각의 체통으로 말하면 옳으면 옳다 하고 그르면 그르다고 해야 하는데도 감히 옳다고도 하지 않고 그르다고도 하지 않으면서 그 단서만을 약간 드러내어 은연중 떠보려는 계획을 이루고자 하였으니, 신은 조성규를 우선 삭탈 관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전교하기를,
"대간의 말은 체통이 중한 것이고 보면 상소나 차자를 막론하고 번번이 도로 돌려주게 한다면 도리어 무슨 꼴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예에 따라 비답을 내리기는 하였으나, 대신(臺臣)의 일로 말하면 어찌 말이 되는가. 모든 사단과 논쟁은 부딪치지 않으면 형성되지 않는 것이니, 근일에 전관(銓官)이 대조해 의망하는 것을 엄격히 하지 않은 것은 세도(世道)를 위하여 소요를 종식시키는 처사에 크게 어긋난다. 중신을 출사(出仕)시키려는 뜻과 부딪쳐 형성시킨 잘못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 파면으로 처분한 데에는 대략 헤아린 바가 있으니, 처분이 여기에 멈추어도 충분할 것이다.
설령 상소해 논핵하고자 했다 하더라도 어디 갔다가 어제 비답에 운운(云云)한 말을 보고서야 비로소 흔쾌히 이승운의 후견인(後見人)이 되어 기치(旗幟)를 세웠다는 명예를 낚고자 하는가. 수일 전에 전관의 일이 있었고, 어제 대신(臺臣)의 일이 있었는데, 오늘 또 이 소(疏)가 나왔다. 궤변이 뒤섞여 논쟁만을 일삼으니, 깨끗한 조정의 예를 다하는 풍도가 쓸은 듯이 없어졌다고 하겠다. 이 대신을 엄중히 처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부딪치면 형성된다는 경계를 생각하여 우선 삼령(三令)의 죄과로 처분하는 바이니, 헌납 임도호에게 서둘러 불서(不敍)의 전형을 시행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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