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을유
부교리 이희관(李羲觀)이 상소하기를,
"윤시동의 작년 겨울의 일은 성상께서 굽어 살피시고서 남김없이 밝게 분변하셨으니, 조정에서도 서서히 수용(收用)하는 것이 또한 하나의 도리였습니다. 그런데 애당초 전망(銓望)에서 누락시킨 것이 이미 많은 사람들의 의논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또 한편에서 한창 일어나고 있는 논의는 중신(重臣)029) 을 곧장 악역(惡逆)의 죄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형의 붓을 잡고서 왕명(王命)의 선양(宣揚)을 맡은 자로서 자주자주 의망해서 평명(平明)하신 전하의 정치를 돕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일차 의망하고 재차 의망한 것을 가지고서 탄핵해 공격하고 드러내놓고 함부로 한단 말입니까. 이런 행위가 이승운의 상소에 이르러 극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처분은 양시(兩是)·양비(兩非)에 가까운 듯하여 전관을 불서(不敍)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셨으니 성상을 위하여 이 거조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승운은 엄히 처분하시고 전관을 불서하라신 명은 환수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예악(禮樂)·정벌(征伐)이 천자(天子)로부터 나올 수 없는데, 위복(威福)이 임금에게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신하들을 접대함에 있어 너그럽게 눈감아주기를 힘썼으나, 이런 구습에 대해서는 새어나오는 곳이 아무리 미세하다 하더라도 방심해 지나친 적이 없었으니, 이것은 대체로 전공(前功)을 생각하면서 한 번의 방심이 전공을 다 무너뜨린다는 경계를 마음 속에 깊이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희관의 소로 말하면 그 내용이 전관을 불서하라고 한 명을 환수하기를 청한 데 불과하지만, 그 조짐은 한마디로 말해서 ‘소인의 세력이 미약하지 않고[豕非羸]’ ‘연약하던 것이 굳어지려 한다.[霜將氷]’고 할 수 있다. 조정에서 감히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도 어찌 좋은 소식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세도(世道)를 위하여 상례를 벗어난 처분을 내린 뒤이겠는가. 이희관은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원소(原疏)는 도로 돌려주어 기강을 진작시키고 탕평(蕩平)에 힘쓰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7월 2일 병술
이문원(李文源)을 이조 판서로, 김문순(金文淳)을 이조 참판으로,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문순이 당소(堂疏)와 대장(臺章)이 있었다는 이유로 인의(引義)하며 상소하니, 체직을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학문과 지식은 근본 밖의 일인데도 기록해 보존하는 자가 있는데 하물며 한 벌의 《상훈집편(常訓輯編)》이겠는가. 그 안설(按說)을 읽어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지금 《여지승람》의 일로 인해 생각해 보건대, 고 사간 정항령(鄭恒齡)의 아들 정원림(鄭元林)이 가정에서 받은 학문에 본디부터 공정(工程)이 있었다는 것을 익히 들은 바 있다. 그러나 백도(白徒)로서는 교정하는 일에 참여할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우선 군직(軍職)에 붙여 초사(初仕)로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고, 이어 《여지승람》 편찬사업에 참여시키라고 명하였다.
7월 3일 정해
이조 판서 이문원이 누차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으니, 전교하기를,
"특별히 제수한 것은 허물을 씻어주겠다는 뜻에서였는데, 네 차례나 명패(命牌)를 어기면서 기어이 체직되기를 청하고 있다. 그 고집하는 바가 부당하지 않은 것 같으니 그의 마음을 간곡하게 살펴주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고, 이어 체직을 윤허하였다.
김문순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김이소(金履素)를 이조 판서로, 정호인(鄭好仁)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조승(李祖承)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5일 기축
남현로(南玄老)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7일 신묘
팔도 유생 신광례(申光禮) 등이 상소해 선정(先正) 김인후(金麟厚)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중대한 전례(典禮)를 경솔히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지난 예에서 보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7월 9일 계사
차대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수군·육군의 조련(操練)은 나라의 큰 정사인데, 편의에 따라 정지한 지가 이미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삼남(三南) 지방은 농사가 제법 풍년이 들 가망이 있으니, 수군·육군의 조련과 순점(巡點) 및 안흥성(安興城)의 조련을 막론하고 규례대로 시행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순점은 그만두고 성조(城操)는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이조 참판 홍병찬(洪秉纘)이 이조 판서를 천망(薦望)하는 일로 신에게 왔는데 구망(舊望)을 겨우 베껴 내놓자마자 갑자기 말하기를 ‘이조 판서의 천망에 당연히 들어갈 사람으로 누락된 자가 있다는 외부의 말들이 있다.’고 하기에, 신이 누락된 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병찬이 ‘윤시동과 조시준(趙時俊)이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너무나 뜻밖이었으므로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저 윤시동의 일에 대해서 신이 충심으로 이미 진달하였으되, 조지(朝紙)에 난 성상의 전교에는 매양 자기 당에 사사로이 한다고 하셨으니 신이 감히 다시 운운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조시위(趙時偉)의 경우는 그 죄악이 어떠하였으며 삼사의 성토가 또 어떠하였습니까. 한 번 윤음을 내리셨고 보면 시준은 바로 연좌된 사람이니, 총재(冢宰)의 천망에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리 무식하고 조리가 없는 무리들이 저의 집에서 하는 사담(私談)이라 하더라도 결코 조금도 언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불초하기는 하지만 이미 대신이고, 이조의 당상관 역시 천망에 관한 일로 왔고 보면 사석(私席)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말이 이러하였으니, 만약 우롱한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신을 숙맥으로 여겨 그런 것입니다. 이런 것을 그대로 버려둔다면 의리·기강·체면이 모두 신으로 말미암아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기에 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이 본래 촌스럽고 사리에 어두운 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 경의 말을 듣고 조정의 체통으로 헤아려 보건대 신칙이 없을 수 없으니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서북(西北)에 신설한 별부료(別付料)들에게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7월 10일 갑오
반궁(泮宮)에서 칠석제(七夕製)를 실시하였다.
윤상동(尹尙東)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창한(李昌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경상도 관찰사 홍억(洪檍)이 상소하기를,
"강석귀(姜碩龜)의 소에 신을 숨기고 속였다는 것으로 죄를 얽고 방자해 꺼림이 없다는 것으로 단정하였습니다. 신하된 사람으로 털끝만큼이라도 이에 근사한 것이 있다면 죄가 어떠한 데 해당하겠습니까. 금년 봄에 본도 유생들이 막중한 것을 믿고 위협해 억제할 계획으로 조리에도 닿지 않는 겁나는 말을 만들어 내어 통문(通文)을 띄우기까지 하고 터무니없는 사실로 명리(命吏)를 무함하여 곧장 망측한 죄에 몰아 넣었습니다. 이러한데도 징계하지 않으면 크게 풍화(風化)에 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도내의 죄수를 판결해서 귀양보내는 것은 바로 모든 도에서 통행하고 있는 관례입니다. 추자도(楸子島)·흑산도(黑山島)·제주도 등 먼 섬을 제외하고는 본래 법령에 구애될 바가 없는데, 이것을 가지고 제멋대로 했다는 죄안(罪案)을 날조한 것은 꼼짝 못하도록 바싹 잡아매려는 뜻이겠지만 실로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하고, 이어 번임(藩任)을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1일 을미
영우원(永祐園)을 천장(遷葬)할 것을 결정하였다. 상이 원침(園寢)의 형국이 옅고 좁다고 여겨 즉위 초부터 이장할 뜻을 가졌으나, 너무 신중한 나머지 세월만 끌어온 지가 여러 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기를,
"원소(園所)는 그 사체가 어떠하며 관계 또한 어떠합니까. 오늘의 신하된 자로서 만세의 대계를 생각할 때 마음을 끝까지 쓰지 않을 수 없고 의리로 보아 감히 스스로 숨길 수 없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신은 본래 감여(堪輿)030) 에 어두워 귀머거리나 소경과 일반이므로 다만 사람마다 쉽게 알고 쉽게 볼 수 있는 것만을 가지고 논하겠습니다.
첫째는 띠가 말라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고, 넷째는 뒤쪽 낭떠러지의 석축(石築)이 천작(天作)이 아닌 것입니다. 이로써 볼 때 풍기(風氣)가 순하지 못하고 토성(土性)이 온전하지 못하고 지세가 좋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만 있어도 신민(臣民)들의 지극한 애통스러움이 되는데, 더구나 뱀 등속이 국내(局內) 가까운 곳에 또아리를 틀고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 정자각(丁字閣) 기와에까지 그 틈새마다 서려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옛 장릉(長陵)에 혈도(穴道)까지 침범했던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국내에 이미 많이 있고 보면 지극히 존엄한 곳까지 침범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갑오년에 원(園)을 처음으로 참배하신 때로부터 병신년에 즉위하신 뒤에 이르기까지 걱정하신 일념이 오직 원소의 안부에 계시어, 새벽에 종소리를 듣고 밤에 촛불을 대하실 때 깊은 궁중에서 눈물을 뿌리신 것이 얼마인지 모르며, 봄비가 오고 가을 서리가 내릴 때이면 조회에 임해서도 자주 탄식하셨다는 것을 신이 여러번 들었습니다. 병신년 초에 천장해 모실 것을 연석(筵席)에서 처음으로 발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성상께서도 아마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 병오년 5월과 9월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외로이 홀로 위에 계시며 해는 점점 서산으로 기울어가는데 아직까지 뒤를 이을 자손이 더디어지고 있습니다. 옛날 영종 대왕 7년 신해년에 장릉(長陵)을 천장할 때,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무신년 이후로 중외(中外)에 공경하고 삼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 하여 주문공(朱文公)의 혈식 구원(血食久遠)이란 말을 이끌어 어전으로 가서 다시 길지(吉地)를 골라 천장해서 국운을 장구하게 하기를 건의하였는데, 실로 지금까지 그 덕을 힘입고 있습니다. 이미 선왕조의 고사(故事)가 있고 보면 더욱 오늘날에 천장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바라건대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널리 물으시고 지사(地師)들을 널리 불러 모아 길흉을 물으시어 신도(神道)를 편안하게 하시고 성상의 효성을 펴시어 천추 만대의 원대한 계책이 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밤낮으로 가슴속에 담아 두고 답답해 하기만 하였는데 경의 요청이 이런 때에 이르렀으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 결정하겠다."
하고, 이어 대신·각신(閣臣)·예조 당상과 종친부·의빈부·삼사의 2품 이상을 희정당으로 불러 접견하고서 승지에게 명하여 박명원의 소를 읽게 하였다. 대신과 예조 당상들이 한 목소리로 빨리 성명(成命)을 받들기를 청하니, 상이 눈물을 삼키며 목메인 소리로 이르기를,
"나는 본래 가슴이 막히는 증세가 있는데 지금 도위(都尉)의 소를 보고 또 본원(本園)에 대해 언급하는 경들의 아룀을 들으니 가슴이 막히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없다. 갑자기 말을 하기가 어려우니 계속 진달하지 말고 나의 기운이 조금 내리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조금 뒤에 상이 이르기를,
"만약 화복(禍福)의 설에 현혹되어 갑자기 오래된 묘를 옮기는 것이라면 비록 여항(閭巷)의 서인의 집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불가하다고 할 수 있는데 하물며 국가의 막중하고 막대한 일이겠는가. 지금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이 어찌 한 도위(都尉)의 소로 인해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나의 심정이 정상인으로 자처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경들도 아는 바일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지극한 슬픔이 가슴속에 맺혀 있는데, 만약 흙이 시신에 가까이 닿아 있다[土親膚]고 말한다면 나의 망극한 마음이 다시 어떠하겠는가. 지하의 체백(體魄)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은 오렴(五廉)031) 운운하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판단할 수 있다.
대체로 광중(壙中)의 흙은 기운이 없는 죽은 흙이니 지극히 말하기 곤란한 염려가 충분히 있다. 그리고 감여가(堪輿家)들이 항용하는 말로 말하더라도, 나경(羅經)의 내반(內盤)으로는 갑좌(甲坐)가 되고 외반(外盤)으로는 묘좌(卯坐)가 되며 신술방(辛戌方) 득수(得水)032) 이고 해방(亥方) 득파(得破)033) 이니, 갑·묘·해가 모두 목(木)이다. 신술방의 물은 바로 이른바 황천 득수(黃泉得水)034) 로서 내명당(內明堂)035) 에 물이 없다. 그러나 한쪽에 있는 물만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더구나 을입수(乙入首)036) 로서 용세(龍勢)가 더욱 논할 만한 것이 없는데이겠는가. 갑오년에 성묘(省墓)하고 나서부터 옮겨 모셔야겠다고 계획하였으나 새로 정하는 자리가 지금의 자리보다 천만 배 나은 뒤에야 거의 여한이 없을 수 있을 것인데, 오늘날 행용(行用)하는 지사(地師)로서 누가 땅속의 일을 분명히 알 수 있겠는가.
도위도 병신년에 옮겨 모시자는 의논이 있었다고 하였거니와, 대체로 즉위한 처음부터 간절한 나의 일념이 오직 이 일에 있었다. 그 때에 과연 상하가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고, 기유년이란 세 글자를 이미 그 때의 연교(筵敎)에서 언급했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14년 동안에 오직 금년만이 연운(年運)·산운(山運)·원소(園所) 본인의 명운(命運)이 상길(上吉)함이 되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 더욱더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도위의 소를 보고 여러 경들의 말을 듣건대 숙원(宿願)을 이룰 수 있겠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전에 봉표(封標)해 두었던 곳으로 문의(文義) 양성산(兩星山) 해좌(亥坐)의 언덕은 예전부터 좋다고 운운하는 자리이지만 조산(祖山)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이 흠이어서 답답하게 막힌 기색을 면하지 못하였고 지질과 물이며 용세(龍勢)도 결코 언급할 만한 것이 없다. 장단(長湍) 백학산(白鶴山) 아래의 세 곳은 국세(局勢)가 혹은 협소하기도 하고 혹은 힘이 없고 느슨하기도 하다. 광릉(光陵) 좌우 산등성이 중의 한 곳은 바로 달마동(達摩洞)으로서 문의의 자리와 함께 찬양되는 곳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가운데 한 곳은 바로 절터이니, 신당(神堂)의 앞이나 불사(佛寺)의 뒤나 폐가(廢家) 또는 고묘(古廟)에 묘를 쓰는 것은 옛사람들이 꺼린 바이다. 용인(龍仁)의 좋다고 운운하는 곳도 역시 그러하다. 이밖에 헌릉(獻陵) 국내의 이수동(梨樹洞)과 후릉(厚陵) 국내의 두 곳, 강릉(康陵) 백호(白虎) 쪽, 가평(加平)의 여러 곳들도 마음에 드는 곳이 한 곳도 없다.
그러나 오직 수원(水原) 읍내에 봉표해 둔 세 곳 중에서 관가(官家) 뒤에 있는 한 곳만이 전인(前人)들의 명확하고 적실한 증언이 많았을 뿐더러 옥룡자(玉龍子)가 이른바 반룡 농주(盤龍弄珠)의 형국이다. 그리고 연운·산운·본인의 명운이 꼭 들어맞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하늘의 뜻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이름이다. 나라 안에 능이나 원(園)으로 쓰기 위해 봉표해 둔 것 중에서 세 곳이 가장 길지(吉地)라는 설이 예로부터 있어 왔는데, 한 곳은 홍제동(弘濟洞)으로 바로 지금의 영릉(寧陵)이 그것이고, 한 곳은 건원릉(健元陵) 오른쪽 등성이로 바로 지금의 원릉(元陵)이 그것이고, 한 곳은 수원읍(水原邑)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수원의 묏자리에 대한 논의는 기해년 《영릉의궤(寧陵儀軌)》에 실려 있는 윤강(尹絳)·유계(兪棨)·윤선도(尹善道) 등 여러 사람과 홍여박(洪汝博)·반호의(潘好義) 등 술사(術士)들의 말에서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말로 말하면 윤강의 장계(狀啓)와 윤선도의 문집 중에 실려 있는 산릉의(山陵議) 및 여총호사서(與摠護使書)보다 자세한 것이 없다. 내가 수원에 뜻을 둔 것이 이미 오래여서 널리 상고하고 자세히 살핀 것이 몇 년인지 모른다. 옥룡자의 평(評)이 그 속에 실려 있는데, 그의 말에 ‘반룡 농주의 형국이다. 참으로 복룡 대지(福龍大地)로서 용(龍)이나 혈(穴)이나 지질이나 물이 더없이 좋고 아름다우니 참으로 천 리에 다시 없는 자리이고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자리이다.’ 하였으니, 이곳이야말로 주자(朱子)가 이른바 종묘 혈식 구원(宗廟血食久遠)의 계책이란 것이다.
대체로 그 형국으로 말하면 비록 범인의 안목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유두(乳頭) 아래 평탄한 곳에 재혈(裁穴)하고 작은 언덕을 안대(案對)해서 좌향(坐向)을 놓으면 바로 이른바 구슬을 안대한다는 것이다. 구슬을 안대하려면 두 봉우리 사이 빈 곳으로 안(案)이 가는데, 이것이 또 이른바 구슬을 안대하면 빈 곳으로 향(向)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금(分金)037) 도 이렇게 재혈하고 이렇게 좌향을 놓고 이렇게 안대할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의 뜻은 이미 수원으로 결정하였다. 지금 경 등을 대하여 속에 쌓아 두었던 말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 음으로 돕고 신명(神明)이 묵묵히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판중추부사 김익(金熤)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분부를 들으니 신도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겠습니다. 옥룡자는 바로 도선(道詵)의 호인데 그의 논평이 이와 같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디에서 구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수원산론(水原山論)을 읽게 하니, 연신(筵臣) 모두가 아뢰기를,
"옛사람의 논한 바가 이미 이와 같은데 지금에 와서 어찌 다른 말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해년에 봉표해 둔 곳이 바로 이른바 유두(乳頭)로서, 아래쪽의 낮은 곳에 비하면 너무 올라오고 드러나는 혐의가 없지 않으니, 오직 달무리처럼 둥그렇게 평탄한 곳이 바로 진정한 복룡 길지(福龍吉地)이다. 길일(吉日)이 머지않았으니 오늘날의 급선무로는 그 고장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다음으로 고을을 옮길 계획을 의논하는 것이 가장 마땅하다. 나는 인정이 편안한 뒤에야 지리(地理)도 길해진다고 생각한다. 백성을 옮기는 일에 관해서는 내가 이미 여러모로 계획을 세워 각각 살 곳을 정해 안주하게 하였거니와, 왕명을 선포하고 백성들을 무마하는 책임을 맡은 나의 신하는 감사와 지방관이 바로 그들이다."
하고, 이어 경기 관찰사 조정진(趙鼎鎭)과 수원 부사 김노영(金魯永)을 내직(內職)으로 옮기고, 서유방(徐有防)을 경기 관찰사로, 조심태(趙心泰)를 수원 부사로 삼았다. 그리고 상이 이르기를,
"천장해 모시는 일은 사체가 막중하므로, 본원(本園)의 제사 의식도 태묘(太廟)에 버금가는 것으로 대부(大夫)의 예를 사용해서 제사할 것이니 총호사(摠護使)를 차출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때에는 삼공(三公)을 의당 갖추어야 할 것이다. 총호사의 임무는 으레 영의정이 관장하는 것이니, 좌상과 우상은 복상(卜相)한 뒤에 가서 봉심(奉審)하라."
하였다.
복상하였다. 【김치인(金致仁)·정존겸(鄭存謙)·서명선(徐命善)·홍낙성(洪樂性)·이복원(李福源)·김익(金熤)·이재협(李在恊).】 김익(金熤)을 의정부 영의정으로, 이조원(李祖源)을 이조 참의로, 이한풍(李漢豊)을 포도 대장으로 삼고, 김문순(金文淳)을 발탁하여 한성부 판윤과 돈체사(頓遞使)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서명선 등이 영우원을 봉심하고서 서계(書啓)하기를,
"상지관(相地官) 이명구(李命求)는 뻗어온 용이 너무 느슨하고 혈(穴)도 정 위치가 아니며 청룡 백호가 옅고 작아서 편산(偏山)·편수(偏水)가 흠이라고 하고, 성몽룡(成夢龍)은 신방(申方)의 수가 목산(木山)과 맞지 않고 해방(亥方)의 파(破) 역시 길하지 않다고 하고, 김양직(金養直)은 국세(局勢)가 형성되지 못하였고 해방의 파가 더욱 목산(木山)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영의정 김익과 봉심한 여러 신하와 상지관을 불러 보고서 원소를 옮겨 모시는 일을 도감(都監)을 설치해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김익을 총호사 천원 도감·원소 도감 도제조로 삼고, 서유린(徐有隣)·이재간(李在簡)·정창순(鄭昌順)을 천원 도감 제조로, 김이소(金履素)·정민시(鄭民始)·이문원(李文源)을 원소 도감 제조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원소로 새로 정한 곳이 길이 조금 머니 백성과 고을들의 폐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살피고 온 뒤로 도감을 설치하기 위해 거둥할 때까지 모든 신하들은 모두 스스로 밥을 싸가지고 다니도록 하라. 산을 살피기 위해 왕래하는 사람과 도감이 왕래하는 데는 말을 주라. 문서의 거래는 지체할 수가 없으니 조경묘(肇慶廟)를 봉안할 때의 예에 의거해서 편의에 따라 인부와 장색(將色)을 세워 두고 전례를 상고해서 양료(粮料)를 주되 전에 비해 갑절을 더 주라. 이밖에도 자연 거행할 일이 많을 것이니 여유있는 영문(營門)에서 돈 1만 냥을 경기 감영에 떼어주게 하라."
각신(閣臣)에게 명하여 외규장각에 가서 영릉(寧陵)과 장릉(長陵)을 옮겨 모실 때의 의궤(儀軌)를 가져오게 하였다.
김종수(金鍾秀)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7월 12일 병신
수원의 묏자리를 살피는 여러 신하들에게 전교하였다.
"묏자리를 살핀 뒤에 승지가 대신과 더불어 지방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모아 놓고서 어제의 연교(筵敎)대로 먼저 안심하고 생업(生業)을 즐기라는 뜻으로 되풀이해 타이르고, 이사한 민호(民戶)라 하더라도 조정에서 의당 따로 구휼하는 도리가 있을 것이니 이 내용도 자세히 일러 주라."
7월 13일 정유
영의정 김익 등이 【영의정 김익, 좌의정 이성원, 우의정 채제공, 관상감 제조 김종수, 선공감 제조 서유린, 예조 판서 이재간, 도감 제조 이재간·정민시·이문원.】 수원의 치표(置標)한 곳을 살펴보고서 아뢰었다.
"지사(地師)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극히 길하고 모든 것이 완전하다. 화산(花山)이 왼쪽으로 돌아 건방(乾方)으로 떨어져서 주봉(主峯)이 되고 건방의 주산(主山)이 해방(亥方)으로 내려오다가 계방(癸方)으로 돌고 다시 축방(丑方)으로 뻗어오다가 간방(艮方)으로 바뀌면서 입수(入首)하였다. 앞에 쌍봉(雙峯)이 있는데 두 봉우리 사이가 공(空)이 되고, 안에 작은 돈(墩)이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구슬 같다. 계좌 정향(癸坐丁向)으로 안장(安葬)하면 그 구슬은 턱밑의 구슬이라 할 수 있고 공은 빈 곳을 안대하는 공이라 할 수 있다. 오른쪽으로 건방에서 득수(得水)하고 왼쪽으로 을방에서 득수하며 또 신방(申方)의 물이 오방(午方)에서 파(破)하니, 수법(水法)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청룡 네 겹과 백호 네 겹이 에워싸 국세(局勢)가 만들어졌는데, 혈(穴)이 맺힌 곳이 마치 자리를 깐 것처럼 펑퍼짐하니 혈 자리가 분명하다. 뻗어온 용의 기세가 7백 리를 내려왔는데 용을 보호는 물이 모두 뒤에 모였으며, 현무(玄武)로 입수(入首)하였으니 천지와 함께 영원할 수 있는 더없는 대지(大地)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상이 묏자리를 살피고 온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고 한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이르기를,
"지금 대신의 장계를 보니 내 마음이 한편으로는 슬프고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이런 큰 일을 당하여 어찌 마음을 너그럽게 먹고 슬픔을 억제하는 것을 주로 삼아 힘쓰고자 하지 않겠는가마는 종전에 가슴에 맺혔던 것이 나도 모르게 아무 때나 드러난다."
하고, 이어 소견을 물으니, 김익이 아뢰기를,
"위로 주봉(主峯)에서부터 아래로 혈(穴) 자리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윗쪽에 있는 혈 자리의 약간 높은 곳에 앉아 국세와 청룡 백호를 둘러보니, 국세가 평탄하고 반듯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청룡 백호가 에워싸지 않은 것이 아니나, 평탄하고 반듯한 속이 너무 넓고 크다는 느낌이 없지 않고, 에워싼 속 역시 견고하게 결속된 형세가 약간 모자랐으며, 안계(眼界) 역시 조밀하고 번잡한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평탄한 곳이라고 하는 곳에 앉아서 둘러보니 국세가 평온하고 청룡 백호가 긴밀하며 또 혈 좌우를 매미가 날개를 양쪽으로 펼친 듯한 형국이 있으며, 안계도 매우 조용했습니다. 시야 속에 작은 돈(墩)이 혈 자리와 직선으로 대치해 있는데, 이곳이 본래부터 칭송되어오는 서린 용[盤龍]의 형상이고, 이 돈을 서린 용이 희롱하는 구슬[弄珠]이라고 한 말이 신의 범안(凡眼)으로 보아도 정확한 논평인 것 같았습니다. 대안(對案)으로 말하면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데 만약 봉우리로 향을 놓아 안산(案山)으로 삼으면 두 봉우리의 기세를 다 끌어들일 수 없을 것 같고, 두 봉우리 사이의 빈 곳으로 향을 놓으면 두 봉우리의 기운이 합쳐 하나의 안(案)이 되니, 예로부터 이른바 구슬을 안대해 빈 곳으로 향을 놓는다[對珠向空]는 말이 이런 뜻에서인 듯합니다. 세 지사(地師)의 말이 이미 모두 계좌 정향(癸坐丁向)으로 통일되었으니 바뀔 염려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원을 비록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밤낮으로 상상하면서 마음속으로 헤아린 바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경 등의 말을 내가 헤아린 바와 비교하면 더 보탬은 있고 줄임은 없다고 하겠다."
하였다. 김익이 아뢰기를,
"원소를 이제 이미 결정하였으니, 읍치(邑治) 옮기는 일을 잠시도 늦출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원이 비록 기내(畿內)에서 약간 충실한 고을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나라의 역사를 당했는데 다시 무슨 힘이 있어 고을을 옮길 수 있겠는가. 옮겨야 할 민가(民家)가 얼마나 되는가?"
하자, 김익이 아뢰기를,
"2백여 호는 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큰 일에 경비를 낭비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미 평소부터 품고 있던 생각이니, 이 밖에 무엇을 조처해 주선할 것이 있겠는가. 균역청의 사목(事目)이 본래 엄중한 것은 오로지 백성들의 부역을 막으려는 선대왕의 성덕에서 나온 것이고, 이번에 경비를 낭비하지 않으려는 것도 백성을 위한 것이다. 균역청의 돈 10만 냥을 수원에 떼어주어 모든 일을 처리하게 하고, 서울과 지방의 도감은 10만 냥을 금위영과 어영청에서 가져다 쓰면 좋겠다."
하였다. 김익이 아뢰기를,
"창고의 재물이 임금의 재물이 아님이 없는데, 이런 큰 일을 당하여 무엇 때문에 영문(營門)의 유고(留庫)에 구애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전의 연석(筵席)에서 이미 천하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어버이에게 박하게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였다. 이것은 대개 어버이 장례에는 진실로 자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쓰지 않음이 없는 도리에까지 미룬 것이니, 진실로 백성의 힘을 수고롭히거나 경비를 낭비하지 않는 것이면 지극히 아름답게 하여 마지막 일에 정성을 조금이나마 펴보고 싶다.
병신년에 원(園)으로 봉할 때 영릉(永陵)038) 의 옛 제도를 따랐을 뿐만이 아니라 바로 고사(故事)를 준용(遵用)하였다. 대체로 옛 능에 석물(石物)을 새로 세우는 것과 비기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 이미 옮겨 모시기로 하였으니 정성을 다해 규례대로 하고자 한다. 그러니 도감으로 하여금 자세히 알게 하라. 석재(石材)는 꾀꼬리봉 및 산성(山城) 밖에 떠내기에 적당한 곳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석재의 품질이 합당하지 않을 경우에는 남양(南陽)·강화(江華) 등지의 석재라야 난간석(欄杆石)과 병풍석(屛風石)의 용도에 합당하니 떠내어 운반해 오는 노력은 따질 겨를이 없다. 나의 정리(情理)는 오직 자주 봉심해 정성을 펴는 데 있을 뿐이니, 여염집들을 다 옮긴 뒤에는 어가(御駕)를 수행하는 백관(百官)들이 한데서 거처하게 될 것을 염려해야 한다. 보존할 만한 관청은 철거하지 말아서 여러 신하들이 들어가서 거처하는 곳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민시가 아뢰기를,
"원소를 완전히 봉안한 뒤에는 독성 산성(禿城山城)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산성의 산 꼭대기가 혈(穴) 위에서 바라보면 지극히 가까운 것 같지만 서로의 거리가 10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 밥짓는 연기나 닭·개의 소리가 원래 묘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니, 병기(兵器)를 간직해 두는 따위도 이해를 논할 것이 없을 것 같다.
산소를 매만져 다듬는 방법은 그 산의 형세를 그대로 따를 뿐이니, 보토(補土)를 고대(高大)하게 하는 것을 나는 옳지 않게 생각한다. 더구나 이 묏자리의 혈체(穴體)는 유두(乳頭) 밑에 웅덩이가 파여 있어 음양이 서로 붙어 있는 데 그 신묘함이 있으니 흙을 파낼 때 유두를 파지 말라. 혈 앞의 남은 기운이 생동해 구르고 있는데 만약 지나치게 흙을 보충하면 천연으로 이루어진 정교함을 잃기 쉬우니 원형 그대로 띠를 입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장릉(章陵)을 천장해 모실 적에 성내(城內)를 경유하도록 길을 냈으니 이번에도 이 전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비단 조조(朝祖)의 절차가 중대할 뿐 아니라 자궁(慈宮)의 망극하신 심정이 다시 어떠하시겠는가. 천장해 모실 때에는 몸소 가서 보시겠다고 매양 말씀하시므로 현재 마음을 너그러이 먹고 슬픔을 억제하시도록 청하고 있는 참인데 만약 상여(喪輿)가 성내로 지나는 것을 보시게 될 경우 장차 무슨 말로 위로드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모두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에 미치셨으니 마땅히 성외(城外)로 길을 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판윤 김문순(金文淳)에게 이르기를,
"내가 즉위한 이후로 한 번도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힌 일이 없는데, 더구나 본원에 관계된 일로 백성들을 수고롭히겠는가. 백성을 수고롭히고 싶어하지 않는 나의 뜻을 경들도 반드시 알 것이다. 상여군이 되는 것이 비록 방민(坊民)들이 응당 행하는 부역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이번에는 군정(軍丁)을 고용하고자 하니 민역(民役)에 관계된 모든 것들은 한결같이 모두 줄이도록 하라. 경이 돈체사가 되었으니 나의 뜻을 깊이 헤아리라."
하니, 연석에 참여한 모든 신하가 아뢰기를,
"국전(國典)에도 없는 바이고 체모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미륵당(彌勒堂)에 원(院)을 설치하고 창고를 세워 조적(糶糴)하였다. 경기 관찰사 서유방이 아뢰기를,
"과천(果川)에서 수원까지는 두 참(站) 길인데 그 사이에 미륵당참이 있으니, 영릉(寧陵)을 옮겨 모신 뒤에 이천(利川)의 참에 행궁(行宮)을 설치한 전례를 준용하여 미륵당참에 하나의 원을 설치해서 이번에는 영구(靈柩)를 봉안하여 낮참을 쉬고 지나간다면 후일에 어가가 머무르시기에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점(店) 근처에 사는 광주(廣州) 백성들이 산성(山城)과 거리가 1백여 리나 떨어졌기 때문에 조적의 정사가 절박한 피해가 된다고 하니, 원을 설치한 뒤에 따로 하나의 창고를 세우고, 창고 밑의 민호(民戶)에게 연한을 정하거나 혹은 영원히 부역을 면제해 준다면 수년 안에 응모(應募)해 들어오는 자가 매우 많을 것이다. 혹 산성의 군량을 성외의 창고로 옮겨 두는 것을 곤란하게 여긴다면, 각 아문(衙門)에 곡식이 본래 여유가 있으니 비록 산성의 군량이 아니더라도 조치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구상(具庠)을 이조 참판으로, 김노순(金魯淳)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7월 14일 무술
관북(關北)에 진장(賑場)을 설치하여 남관(南關)에는 1월부터 진휼을 시작해서 윤5월에 마치고, 북관에는 1월부터 진휼을 시작해서 6월에 마쳤다. 【남관의 안변(安邊)·영흥(永興)·북청(北靑)·덕원(德源)·정평(定平)·단천(端川)·문천(文川)·고원(高原)·함흥(咸興)·홍원(洪原)·이원(利原) 등 고을과 이동(梨洞)·쌍청(雙靑)·황토기(黃土岐) 등 진(鎭)에서 기민 먹인 총수가 29만 6천 5백 8명이고, 진휼한 곡식이 2만 9천 9백 85석이었다. ○북관의 길주(吉州)·회령(會寧)·명천(明川)·부령(富寧)·무산(茂山)·종성(鍾城)·경원(慶源)·경흥(慶興)·온성(穩城)·경성(鏡城) 등 고을과 어유간(魚游㵎)·오촌(吾村)·주온(朱溫)·고령(高嶺)·보을하(甫乙下)·고풍산(古豊山)·동관(潼關)·방원(防垣)·유원(柔遠)·미전(美錢)·황척파(黃拓坡)·아산(阿山)·아오지(阿吾地)·조산(造山)·서수라(西水羅)·성진(城津)·삼삼파(森森坡)·폐무산(廢茂山)·양영(梁永) 등 진과 고산(高山)·거산(居山)·수성(輸城) 등 역(驛)과 함흥 목장(咸興牧場)에서 기민 먹인 총수가 24만 7천 12명이고, 진휼한 곡식이 2만 6천 3백 10석이었다.】 이조 판서, 병조 판서, 진휼청 당상이 들어와서 복주(覆奏)하라고 명하였다. 감진 어사(監賑御史) 정대용(鄭大容), 전 명천 부사 정우붕(鄭宇朋), 북청 부사 유지양(柳知養), 문천 군수 이사증(李師曾)에게는 가자(加資)하고, 무산 부사 유심원(柳心源)은 방어사에 제수하고, 단천 부사 이여절(李汝節)은 준직(準職)에 제수하고, 부령 부사 이광섭(李光燮), 홍원 현감 홍윤복(洪允復), 경성 판관 조운기(趙雲紀)는 승서(陞敍)하고, 회령 부사 이윤경(李潤慶), 경원 부사 홍성연(洪聖淵), 전 종성 부사 안정현(安廷玹), 명천 부사 심능익(沈能翼), 정평 부사 이우창(李禹昌)에게는 숙마(熟馬)를 주고, 변장(邊將) 및 자원해서 곡식을 바친 사람들에게는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감진 어사(監賑御史) 정대용이 별단(別單)을 올리기를, "1. 북관의 교제곡(交濟穀)을 3분의 2를 유고(留庫)하고 3분의 1을 나누어 주도록 한 것은 바로 갑진년부터 정해진 규칙인데, 곡식의 품질이 좋고 두량(斗量)도 축난 것이 없어 봄에 진대(賑貸)할 때 효과를 거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금년의 남운곡(南運穀)과 무산·종성의 이전곡(移轉穀)을 모두 각각 그 고을의 구치조(久置條)에 소속시키면 매년의 유고(留庫)가 4만 2천 5백 60석이 되고, 유고되어 있는 원구치조(元久置條)와 합산하면 8만 2천 2백 40석이 되니, 앞으로 홍수나 가뭄을 대비함에 있어 곡식을 옮겨 오는 걱정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민정(民情)이 혹 2년 간격으로 나누어주면 썩거나 상한 곡식이 많을 것이라고 하므로 중간에 도로 절반을 유고(留庫)하기로 하여 7만여 포대만을 유고하였는데, 흉년이 들어 곡식이 귀하고 창고가 바닥나기 쉬운 이 때를 당하여 처음에 불편하다고 말한 자들이 이미 대부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곡식은 구치조이기 때문에 잘 건조되고 정결한 것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몇 해 사이에는 결코 먹을 수 없도록 썩을 리가 없습니다. 비록 햇곡식만은 못하겠지만 어찌 아무 것도 없어 끼니를 끓이지 못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교제창(交濟倉)을 반드시 해변에 설치한 것은 오로지 장래에 배로 운반하기에 편리하게 하기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각 고을의 해변이 산골이나 평야 지대와의 거리가 몇 백 리가 되는 곳도 간혹 있는데, 이 곳 백성들로 하여금 저 곳의 곡식을 받아가게 할 경우, 오고 가는 데 6, 7일을 허비하게 될 것이므로 멀리에서 수송해 오는 데 지쳐 그 농기(農期)까지 잃게 될 것이 진실로 벌써부터 염려됩니다. 그렇다고 만약 바다 가까이 사는 백성들에게만 오로지 이 곡식을 받아가게 하면 곡식은 많고 백성은 적어서 거의 수량대로 다 나누어 줄 수가 없으므로 나누어 주고 유고하는 연한을 약간 물려 4, 5년에 한 번씩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니, 곡식이 묵어 썩는 병통이 반드시 여기에서 생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만약 적당히 헤아려 산골과 평야 지대에 각각 하나의 창(倉)을 나누어 설치하고 따로 하나의 곳간을 두어 다른 곡식은 침범하지 말고 한결같이 절목(節目)에 따라 시행한다면 민정도 편리하다 할 것입니다. 또 비록 포구로 내가는 부역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한 때의 운반에 불과하니, 해마다 노고하는 것과 비교해서 그 득실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1. 각 고을의 환곡(還穀) 중에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도 마음대로 다른 곡식으로 대신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여전히 본색(本色)을 존속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곡을 받아들일 때마다 번번이 다른 지방에서 바꾸어다가 바치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진실로 환곡을 먹는 백성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폐단입니다. 작년 가을에는 백성들의 형편이 만부득이해서 각종 곡식을 단지 쌀값으로 환산해서 받아들인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작년에 대신 받아들였던 것을 인하여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것인지 생산되지 않는 것인지를 참작해서 곡부(穀簿)를 시정한다면 앞으로 곡식을 출납하는 데 폐단을 줄이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남운곡(南運穀) 중의 벼와 쌀 두 가지는 모두 깊은 북쪽 땅에서는 생산되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다른 정곡(正穀)으로 대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밀과 보리는 쉽게 썩고 쉽게 상하니 오래 견디는 콩이나 조나 기장을 받아들이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니 구치조(久置條)의 밀과 보리가 가장 많은 곳에서는 또한 상당한 곡식을 분수(分數)해서 다른 곡식으로 바꾸어 받아두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1. 관북의 마병(馬兵)이 모두 6천여 명인데, 전마(戰馬)와 군장(軍裝)·복색(服色)을 모두 스스로 준비하게 하므로 다른 군역(軍役)에 비해 일방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많습니다. 힘있는 자들은 온갖 꾀를 다 내어 벗어나기를 도모하니 세력없는 자들만으로 구차하게 인원수를 채웁니다. 조련할 때가 되면 몸에 딸리는 제구(諸具)를 간신히 빌리거나 세를 내야 하므로 근심과 원망이 점점 심해져서 도망하는 자가 계속됩니다. 지난 임인년에 비변사의 관문(關文)으로 인해 도시(都試)를 처음으로 실시하여 우등한 한 사람은 전시(殿試)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주고, 그 다음 두 사람은 모두 상당한 군임(軍任)에 승진시켜 발신(拔身)의 계제로 삼게 하였는데, 지금은 신수가 좋고 기예(技藝)를 가진 자들이 건장한 말에 신선한 단장으로 기꺼이 과거에 응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결원이 생길 때마다 대신 임명하기가 그리 심하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다만 도시는 매년 10월에 행영(行營)에서 합쳐서 실시하는데, 행영이 남쪽에 있는 네 고을과는 좀 먼 곳은 왕복이 1천여 리나 되고 가까운 곳도 몇백 리 이하가 아니어서 풍설(風雪)이라도 만나면 엎어져 넘어지는 우환이 종종 있으므로 군정(軍情)이 이것을 고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전에는 친기위(親騎衛)의 도시도 행영에서 합쳐서 실시해서 단지 우등한 한 사람만을 뽑았는데, 거리가 균일하지 않다는 이유로 중년 이후에는 행영과 본영(本營)에서 나누어 시험을 실시하여 각 고을의 친기위로서 남쪽에 있는 자들은 본영에 가서 시험을 치르고 북쪽에 있는 자들은 행영에 가서 시험을 치르게 하여 각각 우등한 한 사람씩과 몰기자(沒技者)는 모두 곧장 전시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주었습니다. 지금 마병(馬兵)들이 응당 지는 제반 역(役)은 친기위와 동일한데 유독 시취(試取)에 있어서만은 이렇게 차등이 있으니 억울하다는 탄식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이후로는 마병의 도시를 친기위 도시 끝에 나누어 붙여 각각 우등한 사람과 몰기자를 뽑는 것을 모두 친기위의 예에 따라 시행한다면 건장한 사내들이 격려되는 효과가 있고 추운 길에서 낭패하는 염려가 없어질 것입니다. 1. 남관에 당초에는 큰 배는 없고 널리 쓰이던 것이 고작 통나무배뿐이어서 많아야 20, 30석을 싣는 데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고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본도의 감사로 있을 때 3백, 4백 석까지를 실을 수 있는 큰 배를 건조해 두고, 조정으로 돌아온 뒤에 연품(筵稟)해서 규정으로 정하여 새로 23척을 건조하고 10척을 추가로 건조해서 도합 33척을 남관의 각 고을들에 나누어주고 관선(官船)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리고 배마다에 선주(船主) 한 사람과 격군(格軍) 15명씩을 정해 주어 장사를 업으로 삼게 하고서, 격군 1인당 1년에 돈 1냥씩을 받아들여 5년에 한 번씩 삭(槊)을 개수하고 10년에 한 번씩 새로 건조하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습니다. 매양 곡식을 운송할 때마다 오로지 이 배들을 의존했기 때문에 공사의 수용(需用)에 크게 이익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 큰 배의 제도가 점점 퍼져서 가장 큰 것은 1천여 석까지 싣는 것도 간혹 있고 적어도 3백, 4백 석을 밑돌지 않았습니다. 금년의 수만 포대의 곡식은 각 고을의 사선(私船)으로 영남이나 관북으로 책응(責應)하기에 넉넉하니 얼마간의 관선(官船)이 있고 없고는 그리 긴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근래 수십 년 이후로 목재(木材) 값이 치솟아 새로 건조하거나 삭을 개수하는 데 본래 정했던 값으로는 태반이 부족하기 때문에 관선의 몸체가 점점 작아져서 1백여 석을 실을 수 있는 것조차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격군의 일을 사람들이 모두 기피하기 때문에 선주가 매양 삯을 주고서 격군을 들여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세납(歲納)하는 1냥을 스스로 담당하게 하니 곳곳에서 억울하다고 합니다. 당초에 실시했던 것은 오로지 시대를 구제하자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방치해서 도리어 폐단을 끼치는 꼬투리가 되었으니 모두 혁파하는 것이 변통하는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1. 온성(穩城)의 사초도 목장(莎草島牧場)은 물과 풀이 부족한데다가 겨울 추위마저 가장 심하기 때문에 해마다 죽어 없어지는 말이 적어도 30마리를 밑돌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실대로 낱낱이 보고할 경우 관장(官長)에게 죄가 돌아가기 때문에 사복시(司僕寺)에 보고하는 것은 고작 7, 8마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가난하고 잔약한 목졸(牧卒)들에게 담당시켜 숫자를 채워넣게 합니다. 이에 목졸들이 몸을 팔고 자식을 파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백성들의 근심과 원망을 상상해 알 만합니다. 당초 절목에는 보살펴 기르는 목자(牧子)를 종성·경원·온성에 각각 10명, 경흥에 7명 등 모두 37명을 정해 두어 사역(使役)과 목초(牧草)와 복개(覆盖) 등의 일도 협력해서 조처하도록 하였는데, 그 뒤에 종성은 병영(兵營)이 있는 고을이라 하여 면제하고 경원은 개시(開市)하는 고을이라 하여 면제하고서 단지 온성과 경흥의 얼마되지 않는 목졸들로 하여금 이 일을 전담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도망해 흩어지는 자가 연이어 마정(馬政)이 점점 엉성해지니 목장이 오래지 않아 텅 비게 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임시 방편으로 물과 풀이 풍부해 목장으로 삼을 만한 곳으로 목장을 옮긴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예전의 절목대로 네 고을의 목졸들로 하여금 공동으로 간수(看守)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거의 일방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한탄이 없어질 것입니다. 1. 회령(會寧)과 경원(慶源)에 개시(開市)할 때에 중국에서 나오는 사람과 마축(馬畜)에 대해서는 모두 수를 한정하였지만 통역관과 하인들에 대해서는 유독 수를 정하지 않았으며, 기묘년039) 에 정한 규례에도 통역관 일행 가운데 정수를 넘는 인원에 대해서도 우선 예에 따라 음식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당년에 개시할 때 통역관과 하인들이 75명이나 되었으니 당초에 규칙으로 정한 13명에 비교하면 이미 몇 배나 되었습니다. 그 뒤로 20여 년 동안은 나오는 하인이 많아도 70, 80명을 넘지 않고 적은 경우에는 간혹 30, 40명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개시하는 고을에서 계속 규례대로 거행해서 별 폐단없이 지날 수가 있었습니다마는, 계묘년 이후부터 비로소 1백 명을 넘더니 해마다 그 수가 증가하여 작년 겨울에는 1백 63명이 되었으니 기묘년에 비교하면 갑절 이상 증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인 한 사람이 끌고 오는 말도 많은 경우에는 10여 마리이고 적은 경우라도 3, 4마리이니 말의 수도 기묘년보다 몇 갑절이나 더 많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점점 갑절로 늘어난다면 개시하는 고을에서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 실로 지탱하기 어려운 걱정이 될 뿐 아니라 인원이 이미 많아지고 교역이 점점 넓어지면 저들과 우리가 응대하는 사이에 시끄러운 일이 생길 염려가 없지 않으니, 이 때에 미쳐 변통해서 통역관과 하인들을 모두 알맞게 정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1. 차수고(差需庫)를 창설할 당시 곡식과 베[布]의 수량이 모두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종 물건의 값을 정할 때 단지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만을 들어 말하고 그 고을에서 조처해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우선 그대로 두었습니다. 이제 창설한 지 30년이 되어 물산이 점점 귀해지고 원가(元價)가 더욱 올랐기 때문에 진실로 규례에 비추어 준행할 방도가 없습니다. 차원(差員)을 지대(支待)할 때 민간에서 받아들이는 물건 중에는 염가로 강제로 사들이는 것도 있고 무가(無價)로 거두는 것도 있고 임시로 차용하는 것도 있는데, 이른바 차용한다는 사기(沙器)나 말구유 같은 종류는 거의 다 깨지거나 망가져서 도로 찾아가는 것이 얼마 없고, 염가나 무가로 거둔 것으로 말하면 애당초 견고하지 못하여 금년에 구입한 것이 명년까지 지탱할 수가 없으므로 해마다 다시 준비해야 하니 경비는 더욱 늘고 백성은 더욱 곤란해집니다. 이런 폐단은 회령이 가장 심하고 종성·온성이 그 다음이며, 경원은 병신년에 비록 시정한 것이 많지만 아직도 완전하지 못한 조건이 있습니다. 대체로 당초에 차원을 지대하는 절목을 정하고 간략하게 한 것은 우선 차수고가 조금 넉넉해지기를 기다리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각 항목의 물건을 마련하는 데 원회곡(元會穀) 중에서 쓰도록 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차수고의 곡식과 베가 모곡(耗穀)을 낳고 이자를 불려 그 수량이 많아졌으니, 절목 중에 이미 값을 정한 것이나 정하지 않은 것을 막론하고 단지 차수고의 곡식과 베만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원회곡을 침범해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해도의 감사로 하여금 개시하는 고을의 수령과 상의해서 알맞게 헤아려 구분해 처리하게 하여, 한편으로는 공비(公費)를 줄이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형편을 펴게 하소서. 1. 안변(安邊)에 사는 유학(幼學) 이종현(李綜顯)의 자부 현씨(玄氏)가 그 시아비와 함께 밭에 갔는데 갑자기 사나운 호랑이가 그 시아비에게 덤벼들어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현씨는 왼손으로는 시아비를 부축하고 오른손으로는 호랑이를 치면서 나를 대신 잡아먹으라고 애걸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지 반나절이나 되어 호랑이가 버리고 가니, 현씨는 시아비를 업고 돌아와서 약으로 치료해서 소생시켰습니다. 1. 북청(北靑)에 사는 유학 이정상(李正相)의 처 강씨(姜氏)는 평소 남편을 섬기는 데 정성과 공경을 모두 다하였는데, 그 남편이 병이 위독하자 밤낮으로 하늘에 대고 남편 대신 이 몸이 죽기를 원한다고 부르짖었으며, 점쟁이에게 물으니 어떤 점쟁이가 ‘남편 대신 죽으면 길(吉)하다.’고 하자 강씨는 즉시 침옥(砧屋) 밑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강씨가 죽은 뒤에 그 남편은 병이 나았습니다. 1. 무산(茂山) 역리(驛吏) 김덕화(金德華)의 처 강녀(姜女)는 그 남편이 병으로 죽자 염습과 장사에 드는 모든 도구를 마음을 다해 마련했고, 우제(虞祭)와 졸곡(卒哭)이 끝나자마자 물에 빠져 자살하였습니다." 하였다.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금년의 남운곡(南運穀)과 무산·종성의 이전곡(移轉穀)을 산골과 평야 지대의 각 창고에 나누어 두자는 일에 대하여, 구치조(久置條)를 3분의 2는 유고(留庫)하고 3분의 1은 나누어 주는 법이 갑진년에 규칙으로 정해진 뒤에 금년에 이처럼 효과를 거두었으니 남운곡과 이전곡 4만 석을 구치조에 넣어 원래 있던 구치조의 곡식 4만 석과 함께 3분의 2는 유고하고 3분의 1은 나누어 주도록 하소서. 산골과 평야 지대에 나누어 두자는 논의는 자못 의견이 있으니 이곳 저곳을 참고하고 비교해 헤아려 연해(沿海)와 내륙(內陸)의 각 창고에 고르게 나누어 두되, 연해와 내륙을 막론하고 따로 하나의 곳간을 세워 다른 곡식과 서로 섞지 말아서 관리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법령의 엄함을 알도록 원절목(原節目)에 첨가해 넣으소서. 남운곡 중의 벼와 쌀 등 상당한 곡식을 분수(分數)해서 다른 곡식으로 바꾸어 받아들이라는 일은, 북관은 다른 지방과 달라서 무역할 길이 없으므로 그 곳에서 생산되지 않는 곡식을 본색(本色)으로 받아들일 경우에는 받아들이는 일에 기한이 어그러져서 반드시 이로 말미암아 곡부(穀簿)가 문란해질 것이니, 모두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상당한 곡식으로 민원(民願)에 따라 환산해서 대신 받아들일 것으로 곡부를 시정하소서. 마병(馬兵)의 도시(都試)를 친기위 도시(親騎衛都試) 끝에 나누어 붙이고, 각각 우등과 몰기(沒技)를 뽑는 것을 모두 친기위의 예에 따라 하라는 일은 별단대로 시행하소서. 남관의 관선(官船)을 혁파하는 일은, 고 중신이 연석에서 아뢰어 창설한 것은 그 뜻이 백성을 구제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혁파하기를 논하는 것은 실시한 본의가 아니니, 감사로 하여금 사정을 헤아려 사리를 논해 보고하게 하소서. 온성 사초도의 목장을 예전의 절목대로 온성·경흥·종성·경원 네 고을의 목졸(牧卒)들로 하여금 공동으로 간수(看守)하게 하라는 일은 별단대로 시행하소서. 회령·경원에서 개시(開市)할 때 통역관과 하인들의 수를 알맞게 정해 변통하라는 일은 감사와 병사(兵使)에게 분부하여 개시하는 고을에 신칙해서 통역관에게 사리를 분명히 알도록 일러주게 하여 정원 이외의 사람을 데리고 오지 못하게 하소서. 차수고(差需庫)의 각종 물품을 감사로 하여금 알맞게 헤아려 구분해 조처하게 하라는 일은, 차수 절목(差需節目)은 병신년에 시정한 초기에도 오히려 자세하고 극진하지 못하여서 강제로 사들이거나 거두어들이고 임시로 차용하는 등의 폐단까지 생겼습니다. 차수고의 곡식과 베가 해마다 불어나서 원수(元數)를 축내지 않고도 지용(支用)할 수 있으니, 감사로 하여금 참작해 마련해서 모든 물품을 다 값을 주고 장만하여 혹시라도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기명(器皿) 등속도 그 연한을 정하여 다시 장만하게 할 것으로 절목에 첨가하여 영원한 정식(定式)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예조가 복계하기를, "이정상의 처 강씨와 김덕화의 처 강녀에게는 정려(旌閭)하고, 이종현의 자부 현씨에게는 복호(復戶)하소서."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45면
【분류】상업(商業) / 물가(物價) / 교통(交通) / 외교(外交) / 윤리(倫理) / 구휼(救恤) / 인사(人事) / 왕실(王室) / 재정(財政) / 군사(軍事)
[註 039] 기묘년 : 1759 영조 35년.
이조 판서, 병조 판서, 진휼청 당상이 들어와서 복주(覆奏)하라고 명하였다. 감진 어사(監賑御史) 정대용(鄭大容), 전 명천 부사 정우붕(鄭宇朋), 북청 부사 유지양(柳知養), 문천 군수 이사증(李師曾)에게는 가자(加資)하고, 무산 부사 유심원(柳心源)은 방어사에 제수하고, 단천 부사 이여절(李汝節)은 준직(準職)에 제수하고, 부령 부사 이광섭(李光燮), 홍원 현감 홍윤복(洪允復), 경성 판관 조운기(趙雲紀)는 승서(陞敍)하고, 회령 부사 이윤경(李潤慶), 경원 부사 홍성연(洪聖淵), 전 종성 부사 안정현(安廷玹), 명천 부사 심능익(沈能翼), 정평 부사 이우창(李禹昌)에게는 숙마(熟馬)를 주고, 변장(邊將) 및 자원해서 곡식을 바친 사람들에게는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감진 어사(監賑御史) 정대용이 별단(別單)을 올리기를,
"1. 북관의 교제곡(交濟穀)을 3분의 2를 유고(留庫)하고 3분의 1을 나누어 주도록 한 것은 바로 갑진년부터 정해진 규칙인데, 곡식의 품질이 좋고 두량(斗量)도 축난 것이 없어 봄에 진대(賑貸)할 때 효과를 거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금년의 남운곡(南運穀)과 무산·종성의 이전곡(移轉穀)을 모두 각각 그 고을의 구치조(久置條)에 소속시키면 매년의 유고(留庫)가 4만 2천 5백 60석이 되고, 유고되어 있는 원구치조(元久置條)와 합산하면 8만 2천 2백 40석이 되니, 앞으로 홍수나 가뭄을 대비함에 있어 곡식을 옮겨 오는 걱정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민정(民情)이 혹 2년 간격으로 나누어주면 썩거나 상한 곡식이 많을 것이라고 하므로 중간에 도로 절반을 유고(留庫)하기로 하여 7만여 포대만을 유고하였는데, 흉년이 들어 곡식이 귀하고 창고가 바닥나기 쉬운 이 때를 당하여 처음에 불편하다고 말한 자들이 이미 대부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곡식은 구치조이기 때문에 잘 건조되고 정결한 것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몇 해 사이에는 결코 먹을 수 없도록 썩을 리가 없습니다. 비록 햇곡식만은 못하겠지만 어찌 아무 것도 없어 끼니를 끓이지 못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교제창(交濟倉)을 반드시 해변에 설치한 것은 오로지 장래에 배로 운반하기에 편리하게 하기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각 고을의 해변이 산골이나 평야 지대와의 거리가 몇 백 리가 되는 곳도 간혹 있는데, 이 곳 백성들로 하여금 저 곳의 곡식을 받아가게 할 경우, 오고 가는 데 6, 7일을 허비하게 될 것이므로 멀리에서 수송해 오는 데 지쳐 그 농기(農期)까지 잃게 될 것이 진실로 벌써부터 염려됩니다. 그렇다고 만약 바다 가까이 사는 백성들에게만 오로지 이 곡식을 받아가게 하면 곡식은 많고 백성은 적어서 거의 수량대로 다 나누어 줄 수가 없으므로 나누어 주고 유고하는 연한을 약간 물려 4, 5년에 한 번씩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니, 곡식이 묵어 썩는 병통이 반드시 여기에서 생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만약 적당히 헤아려 산골과 평야 지대에 각각 하나의 창(倉)을 나누어 설치하고 따로 하나의 곳간을 두어 다른 곡식은 침범하지 말고 한결같이 절목(節目)에 따라 시행한다면 민정도 편리하다 할 것입니다. 또 비록 포구로 내가는 부역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한 때의 운반에 불과하니, 해마다 노고하는 것과 비교해서 그 득실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1. 각 고을의 환곡(還穀) 중에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도 마음대로 다른 곡식으로 대신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여전히 본색(本色)을 존속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곡을 받아들일 때마다 번번이 다른 지방에서 바꾸어다가 바치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진실로 환곡을 먹는 백성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폐단입니다. 작년 가을에는 백성들의 형편이 만부득이해서 각종 곡식을 단지 쌀값으로 환산해서 받아들인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작년에 대신 받아들였던 것을 인하여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것인지 생산되지 않는 것인지를 참작해서 곡부(穀簿)를 시정한다면 앞으로 곡식을 출납하는 데 폐단을 줄이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남운곡(南運穀) 중의 벼와 쌀 두 가지는 모두 깊은 북쪽 땅에서는 생산되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다른 정곡(正穀)으로 대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밀과 보리는 쉽게 썩고 쉽게 상하니 오래 견디는 콩이나 조나 기장을 받아들이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니 구치조(久置條)의 밀과 보리가 가장 많은 곳에서는 또한 상당한 곡식을 분수(分數)해서 다른 곡식으로 바꾸어 받아두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1. 관북의 마병(馬兵)이 모두 6천여 명인데, 전마(戰馬)와 군장(軍裝)·복색(服色)을 모두 스스로 준비하게 하므로 다른 군역(軍役)에 비해 일방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많습니다. 힘있는 자들은 온갖 꾀를 다 내어 벗어나기를 도모하니 세력없는 자들만으로 구차하게 인원수를 채웁니다. 조련할 때가 되면 몸에 딸리는 제구(諸具)를 간신히 빌리거나 세를 내야 하므로 근심과 원망이 점점 심해져서 도망하는 자가 계속됩니다.
지난 임인년에 비변사의 관문(關文)으로 인해 도시(都試)를 처음으로 실시하여 우등한 한 사람은 전시(殿試)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주고, 그 다음 두 사람은 모두 상당한 군임(軍任)에 승진시켜 발신(拔身)의 계제로 삼게 하였는데, 지금은 신수가 좋고 기예(技藝)를 가진 자들이 건장한 말에 신선한 단장으로 기꺼이 과거에 응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결원이 생길 때마다 대신 임명하기가 그리 심하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다만 도시는 매년 10월에 행영(行營)에서 합쳐서 실시하는데, 행영이 남쪽에 있는 네 고을과는 좀 먼 곳은 왕복이 1천여 리나 되고 가까운 곳도 몇백 리 이하가 아니어서 풍설(風雪)이라도 만나면 엎어져 넘어지는 우환이 종종 있으므로 군정(軍情)이 이것을 고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전에는 친기위(親騎衛)의 도시도 행영에서 합쳐서 실시해서 단지 우등한 한 사람만을 뽑았는데, 거리가 균일하지 않다는 이유로 중년 이후에는 행영과 본영(本營)에서 나누어 시험을 실시하여 각 고을의 친기위로서 남쪽에 있는 자들은 본영에 가서 시험을 치르고 북쪽에 있는 자들은 행영에 가서 시험을 치르게 하여 각각 우등한 한 사람씩과 몰기자(沒技者)는 모두 곧장 전시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주었습니다. 지금 마병(馬兵)들이 응당 지는 제반 역(役)은 친기위와 동일한데 유독 시취(試取)에 있어서만은 이렇게 차등이 있으니 억울하다는 탄식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이후로는 마병의 도시를 친기위 도시 끝에 나누어 붙여 각각 우등한 사람과 몰기자를 뽑는 것을 모두 친기위의 예에 따라 시행한다면 건장한 사내들이 격려되는 효과가 있고 추운 길에서 낭패하는 염려가 없어질 것입니다.
1. 남관에 당초에는 큰 배는 없고 널리 쓰이던 것이 고작 통나무배뿐이어서 많아야 20, 30석을 싣는 데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고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본도의 감사로 있을 때 3백, 4백 석까지를 실을 수 있는 큰 배를 건조해 두고, 조정으로 돌아온 뒤에 연품(筵稟)해서 규정으로 정하여 새로 23척을 건조하고 10척을 추가로 건조해서 도합 33척을 남관의 각 고을들에 나누어주고 관선(官船)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리고 배마다에 선주(船主) 한 사람과 격군(格軍) 15명씩을 정해 주어 장사를 업으로 삼게 하고서, 격군 1인당 1년에 돈 1냥씩을 받아들여 5년에 한 번씩 삭(槊)을 개수하고 10년에 한 번씩 새로 건조하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습니다. 매양 곡식을 운송할 때마다 오로지 이 배들을 의존했기 때문에 공사의 수용(需用)에 크게 이익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 큰 배의 제도가 점점 퍼져서 가장 큰 것은 1천여 석까지 싣는 것도 간혹 있고 적어도 3백, 4백 석을 밑돌지 않았습니다.
금년의 수만 포대의 곡식은 각 고을의 사선(私船)으로 영남이나 관북으로 책응(責應)하기에 넉넉하니 얼마간의 관선(官船)이 있고 없고는 그리 긴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근래 수십 년 이후로 목재(木材) 값이 치솟아 새로 건조하거나 삭을 개수하는 데 본래 정했던 값으로는 태반이 부족하기 때문에 관선의 몸체가 점점 작아져서 1백여 석을 실을 수 있는 것조차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격군의 일을 사람들이 모두 기피하기 때문에 선주가 매양 삯을 주고서 격군을 들여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세납(歲納)하는 1냥을 스스로 담당하게 하니 곳곳에서 억울하다고 합니다. 당초에 실시했던 것은 오로지 시대를 구제하자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방치해서 도리어 폐단을 끼치는 꼬투리가 되었으니 모두 혁파하는 것이 변통하는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1. 온성(穩城)의 사초도 목장(莎草島牧場)은 물과 풀이 부족한데다가 겨울 추위마저 가장 심하기 때문에 해마다 죽어 없어지는 말이 적어도 30마리를 밑돌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실대로 낱낱이 보고할 경우 관장(官長)에게 죄가 돌아가기 때문에 사복시(司僕寺)에 보고하는 것은 고작 7, 8마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가난하고 잔약한 목졸(牧卒)들에게 담당시켜 숫자를 채워넣게 합니다. 이에 목졸들이 몸을 팔고 자식을 파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백성들의 근심과 원망을 상상해 알 만합니다. 당초 절목에는 보살펴 기르는 목자(牧子)를 종성·경원·온성에 각각 10명, 경흥에 7명 등 모두 37명을 정해 두어 사역(使役)과 목초(牧草)와 복개(覆盖) 등의 일도 협력해서 조처하도록 하였는데, 그 뒤에 종성은 병영(兵營)이 있는 고을이라 하여 면제하고 경원은 개시(開市)하는 고을이라 하여 면제하고서 단지 온성과 경흥의 얼마되지 않는 목졸들로 하여금 이 일을 전담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도망해 흩어지는 자가 연이어 마정(馬政)이 점점 엉성해지니 목장이 오래지 않아 텅 비게 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임시 방편으로 물과 풀이 풍부해 목장으로 삼을 만한 곳으로 목장을 옮긴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예전의 절목대로 네 고을의 목졸들로 하여금 공동으로 간수(看守)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거의 일방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한탄이 없어질 것입니다.
1. 회령(會寧)과 경원(慶源)에 개시(開市)할 때에 중국에서 나오는 사람과 마축(馬畜)에 대해서는 모두 수를 한정하였지만 통역관과 하인들에 대해서는 유독 수를 정하지 않았으며, 기묘년039) 에 정한 규례에도 통역관 일행 가운데 정수를 넘는 인원에 대해서도 우선 예에 따라 음식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당년에 개시할 때 통역관과 하인들이 75명이나 되었으니 당초에 규칙으로 정한 13명에 비교하면 이미 몇 배나 되었습니다. 그 뒤로 20여 년 동안은 나오는 하인이 많아도 70, 80명을 넘지 않고 적은 경우에는 간혹 30, 40명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개시하는 고을에서 계속 규례대로 거행해서 별 폐단없이 지날 수가 있었습니다마는, 계묘년 이후부터 비로소 1백 명을 넘더니 해마다 그 수가 증가하여 작년 겨울에는 1백 63명이 되었으니 기묘년에 비교하면 갑절 이상 증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인 한 사람이 끌고 오는 말도 많은 경우에는 10여 마리이고 적은 경우라도 3, 4마리이니 말의 수도 기묘년보다 몇 갑절이나 더 많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점점 갑절로 늘어난다면 개시하는 고을에서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 실로 지탱하기 어려운 걱정이 될 뿐 아니라 인원이 이미 많아지고 교역이 점점 넓어지면 저들과 우리가 응대하는 사이에 시끄러운 일이 생길 염려가 없지 않으니, 이 때에 미쳐 변통해서 통역관과 하인들을 모두 알맞게 정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1. 차수고(差需庫)를 창설할 당시 곡식과 베[布]의 수량이 모두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종 물건의 값을 정할 때 단지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만을 들어 말하고 그 고을에서 조처해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우선 그대로 두었습니다. 이제 창설한 지 30년이 되어 물산이 점점 귀해지고 원가(元價)가 더욱 올랐기 때문에 진실로 규례에 비추어 준행할 방도가 없습니다. 차원(差員)을 지대(支待)할 때 민간에서 받아들이는 물건 중에는 염가로 강제로 사들이는 것도 있고 무가(無價)로 거두는 것도 있고 임시로 차용하는 것도 있는데, 이른바 차용한다는 사기(沙器)나 말구유 같은 종류는 거의 다 깨지거나 망가져서 도로 찾아가는 것이 얼마 없고, 염가나 무가로 거둔 것으로 말하면 애당초 견고하지 못하여 금년에 구입한 것이 명년까지 지탱할 수가 없으므로 해마다 다시 준비해야 하니 경비는 더욱 늘고 백성은 더욱 곤란해집니다. 이런 폐단은 회령이 가장 심하고 종성·온성이 그 다음이며, 경원은 병신년에 비록 시정한 것이 많지만 아직도 완전하지 못한 조건이 있습니다.
대체로 당초에 차원을 지대하는 절목을 정하고 간략하게 한 것은 우선 차수고가 조금 넉넉해지기를 기다리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각 항목의 물건을 마련하는 데 원회곡(元會穀) 중에서 쓰도록 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차수고의 곡식과 베가 모곡(耗穀)을 낳고 이자를 불려 그 수량이 많아졌으니, 절목 중에 이미 값을 정한 것이나 정하지 않은 것을 막론하고 단지 차수고의 곡식과 베만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원회곡을 침범해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해도의 감사로 하여금 개시하는 고을의 수령과 상의해서 알맞게 헤아려 구분해 처리하게 하여, 한편으로는 공비(公費)를 줄이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형편을 펴게 하소서.
1. 안변(安邊)에 사는 유학(幼學) 이종현(李綜顯)의 자부 현씨(玄氏)가 그 시아비와 함께 밭에 갔는데 갑자기 사나운 호랑이가 그 시아비에게 덤벼들어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현씨는 왼손으로는 시아비를 부축하고 오른손으로는 호랑이를 치면서 나를 대신 잡아먹으라고 애걸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지 반나절이나 되어 호랑이가 버리고 가니, 현씨는 시아비를 업고 돌아와서 약으로 치료해서 소생시켰습니다.
1. 북청(北靑)에 사는 유학 이정상(李正相)의 처 강씨(姜氏)는 평소 남편을 섬기는 데 정성과 공경을 모두 다하였는데, 그 남편이 병이 위독하자 밤낮으로 하늘에 대고 남편 대신 이 몸이 죽기를 원한다고 부르짖었으며, 점쟁이에게 물으니 어떤 점쟁이가 ‘남편 대신 죽으면 길(吉)하다.’고 하자 강씨는 즉시 침옥(砧屋) 밑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강씨가 죽은 뒤에 그 남편은 병이 나았습니다.
1. 무산(茂山) 역리(驛吏) 김덕화(金德華)의 처 강녀(姜女)는 그 남편이 병으로 죽자 염습과 장사에 드는 모든 도구를 마음을 다해 마련했고, 우제(虞祭)와 졸곡(卒哭)이 끝나자마자 물에 빠져 자살하였습니다."
하였다.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금년의 남운곡(南運穀)과 무산·종성의 이전곡(移轉穀)을 산골과 평야 지대의 각 창고에 나누어 두자는 일에 대하여, 구치조(久置條)를 3분의 2는 유고(留庫)하고 3분의 1은 나누어 주는 법이 갑진년에 규칙으로 정해진 뒤에 금년에 이처럼 효과를 거두었으니 남운곡과 이전곡 4만 석을 구치조에 넣어 원래 있던 구치조의 곡식 4만 석과 함께 3분의 2는 유고하고 3분의 1은 나누어 주도록 하소서. 산골과 평야 지대에 나누어 두자는 논의는 자못 의견이 있으니 이곳 저곳을 참고하고 비교해 헤아려 연해(沿海)와 내륙(內陸)의 각 창고에 고르게 나누어 두되, 연해와 내륙을 막론하고 따로 하나의 곳간을 세워 다른 곡식과 서로 섞지 말아서 관리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법령의 엄함을 알도록 원절목(原節目)에 첨가해 넣으소서.
남운곡 중의 벼와 쌀 등 상당한 곡식을 분수(分數)해서 다른 곡식으로 바꾸어 받아들이라는 일은, 북관은 다른 지방과 달라서 무역할 길이 없으므로 그 곳에서 생산되지 않는 곡식을 본색(本色)으로 받아들일 경우에는 받아들이는 일에 기한이 어그러져서 반드시 이로 말미암아 곡부(穀簿)가 문란해질 것이니, 모두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상당한 곡식으로 민원(民願)에 따라 환산해서 대신 받아들일 것으로 곡부를 시정하소서.
마병(馬兵)의 도시(都試)를 친기위 도시(親騎衛都試) 끝에 나누어 붙이고, 각각 우등과 몰기(沒技)를 뽑는 것을 모두 친기위의 예에 따라 하라는 일은 별단대로 시행하소서.
남관의 관선(官船)을 혁파하는 일은, 고 중신이 연석에서 아뢰어 창설한 것은 그 뜻이 백성을 구제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혁파하기를 논하는 것은 실시한 본의가 아니니, 감사로 하여금 사정을 헤아려 사리를 논해 보고하게 하소서.
온성 사초도의 목장을 예전의 절목대로 온성·경흥·종성·경원 네 고을의 목졸(牧卒)들로 하여금 공동으로 간수(看守)하게 하라는 일은 별단대로 시행하소서.
회령·경원에서 개시(開市)할 때 통역관과 하인들의 수를 알맞게 정해 변통하라는 일은 감사와 병사(兵使)에게 분부하여 개시하는 고을에 신칙해서 통역관에게 사리를 분명히 알도록 일러주게 하여 정원 이외의 사람을 데리고 오지 못하게 하소서.
차수고(差需庫)의 각종 물품을 감사로 하여금 알맞게 헤아려 구분해 조처하게 하라는 일은, 차수 절목(差需節目)은 병신년에 시정한 초기에도 오히려 자세하고 극진하지 못하여서 강제로 사들이거나 거두어들이고 임시로 차용하는 등의 폐단까지 생겼습니다. 차수고의 곡식과 베가 해마다 불어나서 원수(元數)를 축내지 않고도 지용(支用)할 수 있으니, 감사로 하여금 참작해 마련해서 모든 물품을 다 값을 주고 장만하여 혹시라도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기명(器皿) 등속도 그 연한을 정하여 다시 장만하게 할 것으로 절목에 첨가하여 영원한 정식(定式)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예조가 복계하기를,
"이정상의 처 강씨와 김덕화의 처 강녀에게는 정려(旌閭)하고, 이종현의 자부 현씨에게는 복호(復戶)하소서."
하였다.
7월 15일 기해
수원 읍소재지를 팔달산(八達山) 밑으로 옮기고 광주(廣州)의 두 면(面)을 떼어 수원에 붙였다. 전교하기를,
"본부의 한 지방에 원소(園所)를 쓰기로 정한 뒤에 다수의 민가(民家)가 철거되었기 때문에 백성을 위한 근심이 밤낮으로 풀리지 않는다. 대개 민심이 기뻐한 뒤에야 내 마음이 조금 풀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경진년040) 에 머물러 묵으실 적에 백성들을 사랑해 돌보셨던 덕의(德意)를 우러러 본받을 수 있다. 말이 이에 미치고 보니 무엇이 아깝겠는가. 이미 돈 10만 냥을 본부에 떼어 주어 백성을 옮기고 곡식을 옮기는 비용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지금 당해 부사의 장계를 보건대 읍터를 팔달산 밑으로 정하였는데 국세(局勢)가 크게 트여 큰 진(鎭)의 터로 합당하나, 그 백성들은 땅이 광주의 일(一)·용(用) 등 두 면과 맞닿았기 때문에 주저하는 뜻이 없지 않다고 하니, 사실 그렇다면 수원으로 떼어 붙이는 것을 어찌 아끼겠는가. 일·용 두 면의 백성들도 산성(山城)과의 거리가 1백여 리나 되기 때문에 모두 수원에 붙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사이에 두 면의 군정(軍政)과 적정(糴政) 등의 폐단이 광주 백성들에게 가중될 염려가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도 이미 헤아린 바가 있다. 감사가 등연(登筵)할 때 마땅히 조처를 내리겠거니와, 수원 백성을 위하고 광주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양쪽 다 좋은 이 계책을 가지고 거듭 밝게 당부하는 바이니, 감사와 수령은 자세히 알고서 백성들을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특별히 수원부의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전교하기를,
"수원 민호(民戶)들이 이제 이사할 때를 당하였으니 그들을 염려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중한 죄수나 가벼운 죄수를 막론하고 모두 석방하고 고을을 옮길 때까지는 수금(囚禁)하지 말라. 그중에 사형수는 즉시 지방관으로 하여금 죄목을 뽑아 기록해 단자로 감영(監營)에 보고하게 하고, 보고된 뒤에는 감사가 의견을 구체적으로 붙여 장계로 아뢰게 하라. 본 고을 백성으로서 어떤 일로 인해 귀양간 자도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모두 귀양간 곳의 감사로 하여금 놓아 보내게 하라. 그리고 이 뜻을 백성들에게 알아듣도록 일러 주라."
하였다.
대신·도감 당상·판윤·경기 감사를 불러 보았다. 상이 정민시(鄭民始)에게 이르기를,
"구슬의 형체는 맑고 밝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나무를 심으면 그늘에 가리기 쉬우니 마주 대한 구슬에 단지 띠만을 입히는 것이 좋겠다."
하니, 민시가 아뢰기를,
"구슬 위에 예전부터 소나무 너댓 그루가 있는데 이것은 없앨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보건대 정릉(定陵)·화릉(和陵)의 청룡(靑龍) 끝에 모래가 뭉친 곳도 구슬 형상 같았는데 그 위에 소나무가 빙둘러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서유방(徐有防)이 아뢰기를,
"수원 신읍(新邑)을 이미 팔달산 밑으로 정했으니, 앞으로 원소로 거둥하실 때 지나시는 길의 차례가 대궐 문에서 과천(果川)까지가 30리이고, 과천에서 수원 신읍까지가 40리이고, 신읍에서 원소까지가 20리입니다. 주정(晝停)과 숙소(宿所)는 본래 정한 곳이 있으니, 미륵당(彌勒堂)에는 창사(倉舍)만을 세워 검암참(黔巖站)의 예와 같이 임시 머무시는 곳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좋다고 하였다.
7월 16일 경자
상이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이르기를,
"혈(穴) 자리가 매우 좁아서 비록 각 원(園)의 제도처럼 하고 싶어도 그 국세(局勢)로 보아 할 수가 없다. 지금 만약 한 가운데에 광중(壙中)을 만들고 왼쪽을 비워두는 제도로 정할 경우, 땅의 형세에 맞을 뿐만 아니라 배위(配位)를 부좌(祔左)하는 뜻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능침(陵寢)에 합릉(合陵)한 예가 많으니 만약 이 예를 따른다면 회(灰)로 막힌 사이의 너비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도감 당상 정민시가 아뢰기를,
"국장(國葬)에는 옆에 회를 거의 주척(周尺)으로 1척(尺)을 씁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의 너비가 2척이 될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외재실(外梓室)041) 을 내릴 때는 택일(擇日)이 없고 모시고 갈 때에만 택일이 있었다. 앞으로는 외재실을 내릴 때에도 길일을 따로 고르라."
하였다.
경기의 연해 고을에서 게[蟹]를 바치는 것을 특별히 정지하도록 하였다.
김희(金憙)를 이조 참판으로,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7월 17일 신축
돈체사 김문순(金文淳)을 불러 보았다. 문순이 아뢰기를,
"어제 각 방계(坊契)의 두목에게 물었더니, 건장하고 실하여 여사군(轝士軍)으로 합당한 자가 3백 50여 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나라에 일이 있으면 호(戶)마다 장정 한 사람씩을 내는 것이 곧 떳떳한 법이니, 인정이나 도리로 미루어 볼 때 저들이 수고롭다고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즉위한 지 수십 년 동안에 혜택이나 인정(仁政)이 백성에게 미친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단지 서울 백성들로 하여금 1백여 리나 되는 곳에 가서 애써 일만 하게 할 뿐이니 마땅히 구휼해야 한다. 더구나 길일로 잡은 때가 한겨울인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본 원의 일로 털끝만한 폐도 백성들에게 차마 끼칠 수 없어 하는 것은 저 백성들이 비록 어리석지만 또한 지극히 신령스러우니 거의 나의 뜻을 알 것이다. 지난날 마음속으로 경영할 때 이미 따로 내탕(內帑)에 조처해 둔 것이 있으니, 이번 원을 옮길 때 방민(坊民)을 여사군으로 쓰지 말고 호연대(扈輦隊)의 예에 따라 한성부로 하여금 잘 가려 뽑아 양료(粮料)와 복색을 주게 하라. 예인하는 시민군(市民軍)과 각 차비군(差備軍)도 이 예에 준할 것이며, 이 밖에 부사군(浮莎軍)042) ·역군(役軍)·잡물군(雜物軍)은 도감으로 하여금 잘 알아서 책임지고 세우게 하고, 한성부가 상관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이외에는 본 도감이 따로 낭관(郞官)을 정하여 점검과 신칙하는 일을 전담시켜 날짜를 계산해서 양식을 주게 하라.
사대부(士大夫) 집에서 혹 전례를 이끌어 자원이라는 이름으로 한성부에 응모(應募)한다면 백성들을 쓰지 말게 한 본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한성부의 여러 당상들은 각방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모아놓고서 이 전교를 자세히 일러주고, 등사해서 각부(各部)의 마을에 붙이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원을 옮길 때의 복색을 마련해서 아뢰었다.
"전하는 매우 세밀한 숙포(熟布)로 지은 시복(緦服)입니다. 【시사복(視事服)은 백포(白袍)에 익선관(翼善冠)·오서대(烏犀帶)·백피화(白皮靴)이고, 한가로이 계실 때는 백대(白帶)입니다.】 왕대비전은 매우 세밀한 숙포로 지은 대수 장군(大袖長裙)에 개두(盖頭)·두수(頭𢄼) 및 띠·백피화입니다. 【한가로이 계실 때는 흰 치마 저고리에 검은 개두·두수 및 띠·백피화입니다.】 혜경궁(惠慶宮)과 중궁전(中宮殿) 및 내명부(內命婦)는 복이 대비전 복과 같습니다. 대전·왕대비전·혜경궁·중궁전의 상궁(尙宮) 이하는 흰 치마 저고리에 검은 개두·두수 및 띠·백피화입니다.
종친·문무 백관 및 제도(諸道)의 대소 사신(使臣)·외관(外官)은 세밀한 숙포로 지은 시복입니다. 【공사(公事)를 볼 때에는 흰 베로 지은 단령(團領)에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이고, 평상시에는 흑립(黑笠)에 백의·백대입니다.】 연변(沿邊) 각 고을은 변복(變服)하지 않습니다. 전함(前啣) 문신(文臣) 당상관 및 당하관으로 시종(侍從) 이상을 지낸 사람과 무신(武臣)으로 곤수(閫帥) 이상을 지낸 사람의 복은 백관의 복과 같고, 3품 이하로 직(職)이 없는 사람은 흑립(黑笠)에 백의·백대입니다. 생원·진사·유학(幼學)·생도(生徒)는 흑두건(黑頭巾)에 【입(笠)도 같은 색깔입니다.】 백의·백대이고, 서인은 흑립에 백의·백대입니다. 삼의사(三醫司)의 잡직(雜職)과 성중관(成衆官)은 흰 베로 지은 단령에 오사모·흑각대이고, 내시·사알(司謁)·반감(飯監)은 복이 백관의 복과 같습니다. 종묘서·사직서·각릉(各陵)과 전(殿)의 관원은 입직(入直)할 때는 모두 상복(常服)이고, 밖으로 나오면 백관의 복과 같습니다. 【의소묘(懿昭墓)·효창묘(孝昌墓)의 관원 등은 입직할 때나 밖으로 나와서나 백관의 복과 같습니다.】 대전관(代奠官)으로서 겸하여 빈궁(殯宮)을 지키는 한 사람은 복이 백관의 복과 같습니다. 영우원(永祐園)의 별겸(別檢)과 참봉의 복은 개원일(開園日)부터 입직할 때나 밖으로 나왔을 때나 백관과 복이 같습니다. 녹사(錄事)·서리(書吏)는 검은 평정 두건(平頂頭巾)에 【입도 같은 색깔입니다.】 백의·백대입니다. 영악궁(靈幄宮)의 시위 별감(侍衛別監)과 각 차비인(差備人) 등은 백두건(白頭巾)에 백의·백대입니다 【원소 안에서 감독하는 모든 신하 및 수빈관(守殯官) 이하 내시 등은 제복(祭服) 차림으로 일을 봅니다.】 각전의 시복은 개원(開園)하고 망곡(望哭)하는 날부터 시작해서 석 달이 차는 날에 벗습니다. 【백관도 같습니다.】 "
7월 18일 임인
헌납 이영목(李永穆)이 상소하여, 여사군을 고용해 양료(粮料)를 주라는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막중 막대한 일에 어찌 사소한 민폐를 돌아보겠는가. 본원의 일에는 모두 나의 작은 정성은 부치고자 하여 크고 작은 수용(需用)을 위해 이미 조치한 것이 있다. 더구나 호연대(扈輦隊)에게 양료를 준 전례도 인용할 수가 있다. 자원군을 허락하지 말라는 일에 있어서도 헤아린 바가 있다."
하였다.
7월 19일 계묘
도감 당상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선창(船艙)을 만들 때 선운(船運)이 시기를 잃어 서울 백성들의 식량이 곤란할 염려가 있으므로, 아산창(牙山倉)의 조선(漕船)도 모두 사곡(私穀)을 실어나르도록 허가하였다. 그런데 공조 판서의 말을 듣건대 10월 보름께를 기해 경강(京江)에 모여 기다리게 하였으나 기한 전에 얼음이 얼어붙을 염려가 없지 않다고 하니, 그렇다면 선창을 만드는 데 공선(公船)과 사선(私船)을 섞어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강화(江華)·교동(喬桐) 및 호서(湖西)·해서(海西)의 여러 수영(水營)에 병선(兵船)·방선(防船)을 새로 건조한 자에게 따로 양식과 물자를 주어 편리한 대로 선소(船所)에서 배를 가져다가 쓰게 하되 올라올 때는 공사(公私)의 짐을 막론하고 실어 운반하도록 허가하라."
하였다.
대사성 이병정(李秉鼎)이 상소하기를,
"태학(太學)의 동재(東齋)·서재(西齋)에 색목(色目)을 갈라 한 색목은 동재에, 한 색목은 서재에 나뉘어 거처하는 것이 백 년 동안 고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기 때문에, 지난번 칠일제(七日製)가 끝난 뒤에 장색(掌色) 이하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을 불러 놓고서 옛 규정에 따라 생원은 동재에, 진사는 서재에 들어 거처하라는 뜻으로 타일렀더니, 이튿날 동재·서재의 유생들이 각자 스스로 동·서재로 나뉘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동재에 있는 유생 네 사람이 갑자기 앞서 한 말을 바꾸면서 여전히 옮기지 않기 때문에 앞서 한 말을 뒤에서 바꾼 죄목으로 간략하게 정거(停擧)의 벌을 내린 바 있었는데, 신이 일전에 몸소 식당에 참석해서 정거한 벌을 풀어주고서 서재로 들어가도록 권하였습니다. 그러자 네 유생은 수복(守僕)을 불러 ‘근래 태학의 일을 사석(師席)은 일마다 옛 규정으로 회복시키려 하나 동·서재로 나뉘어 거처하게 한 명령은 참으로 어리석다 하겠다.’는 말을 신에게 전하게 하므로 수복이 이런 말이라면 비록 죽는다 해도 감히 고하지 못하겠다고 대답하자, 네 유생은 또 ‘네가 만약 고하지 않는다면 너만 죽일 뿐 아니라 너의 아비까지 함께 죽이겠다.’고 했다 합니다. 사석이라 칭하면서 어리석다고 한 이런 일은 태학이 생긴 이래로 일찍이 없던 변괴이니, 얼굴을 들고 스승의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다시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생원·진사를 동재·서재로 나누어 거처하도록 한 것은 바로 옛법이다. 경이 옛법을 다시 회복한 것이 체통에 맞는다고 할 수 있는데, 유생들의 거조는 해괴하기 그지없다. 이 역시 기강과 관계되는 것이니 경은 각별히 더 무거운 벌을 실시하라."
하였다.
7월 21일 을사
북원(北苑)에 거둥해서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를 행하고서 반열에 참여한 유신(儒臣)과 무신(武臣)들을 불러 보았다. 도감 당상을 불러 보고서 상이 정창순(鄭昌順)에게 이르기를,
"물을 건너는 나루에 부교(浮橋)로 선창(船艙)을 대신하고자 한다. 앞으로는 물을 건너는 모든 나루에 모두 부교를 놓고자 한다. 이번이 바로 규례를 정한 처음이니 경이 모름지기 담당하되 선척(船隻)을 많이 들이지 않는 것을 주로 삼으라."
하였다.
7월 22일 병오
원소 도감 당상에게 하유하였다.
"오늘 날씨가 좋은데 정자각(丁字閣) 터닦는 일을 과연 시작했는가. 정자각을 약간 오른쪽으로 옮겨 세우는 것이 지극히 온당하다. 그리고 듣건대 혈(穴) 자리로 정한 곳과 금산(禁山)으로 봉표(封標)한 곳도 매우 온당하다 하니, 앞으로 남은 염려되는 일은 혈의 깊이를 얼마로 하느냐 하는 것이다. 영조척(營造尺)으로 10척을 파는 것은 논할 것도 없고 토규척(土圭尺)으로 10척을 파는 것도 지나치니, 경들은 모름지기 옅게 파고 깊이 파지 말아서 차라리 길한 기운이 밑으로 지나가게 할지언정 위로 지나가게 하지 말라는 뜻을 더욱 염두에 두어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미리 더욱더 살펴 정하라."
박천행(朴天行)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23일 정미
예조 판서 이재간을 불러 보았다. 재간이 아뢰기를,
"계축년에 능을 옮길 때 대왕 대비전께서 매일 때때로 가서 천담복(淺淡服)으로 곡하는 예를 행하셨고, 복제(服制)는 애당초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원을 옮길 때 왕대비전의 예절은 장렬 대비(莊烈大妃)께서 행하셨던 계축년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니, 복제를 원단자(原單子) 중에다가 고쳐 부표(付標)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재간이 아뢰기를,
"동지에 진하(陳賀)하는 것과 왕대비전·중궁전의 탄신일에 진하하는 것이 다 시복(緦服)을 벗기 전에 있으니 모두 임시로 정지하소서."
하니, 따랐다. 재간이 아뢰기를,
"신해년에 원을 옮길 때 외관(外官)들은 진위(陳慰)하는 글을 올리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이 예에 따라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상이 증미(拯米)가 연해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는 것을 염려하여, 괘서곡(掛嶼穀)을 본색(本色) 그대로 상납(上納)하게 하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서 두 도의 감사로 하여금 품고(稟告)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충청 감사 권엄(權𧟓)이 장계하기를,
"조세선(漕稅船)이 배 전체가 침몰되지 않고 혹 풀이나 암초에 걸렸을 경우에는 해당 지방관이 달려가서 감독하에 짐을 부려 가지고 본색을 그대로 바치게 하고, 짐을 실어보낸 지방관 이하를 논죄하는 조항은 폐기하며, 만약 다수가 침몰되어 이미 썩었을 경우에는 패선 증열미(敗船拯劣米)의 예에 따라 격식을 갖추어 시행하소서. 이렇게 구별하여 규칙으로 정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24일 무신
영광군(靈光郡) 태이도(台耳島)에서 산기슭이 무너져서 물에 빠져 죽고 흙에 깔려 죽은 사람이 29명이고, 물에 떠내려가고 무너진 가옥이 92호였다. 이를 감사가 아뢰니, 휼전(恤典)을 실시하라고 명하였다.
7월 25일 기유
예조 판서 이재간을 불러 보았다. 재간이 아뢰기를,
"시복(緦服)이 끝나기 전에 종묘·사직과 영희전(永禧殿)에 친제(親祭)하거나 전알(展謁)하는 예를 행하실 때는 평상복을 입으시고 백관들도 상의 복색을 따라 입습니다. 출궁(出宮)하고 환궁(還宮)하실 때에는 흉배(胸背)가 없는 흑단령(黑團領)을 입으시고, 백관들은 무늬가 없는 흑단령에 흉배와 품대(品帶)를 하지 않습니다.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에 전배하기 위해서 거둥하실 때는 상께서 백포(白袍)를 입으시고 백관들도 백포를 입고서 수행합니다. 이대로 마련하소서."
하니, 따랐다. 재간이 또 아뢰기를,
"계축년에 능을 옮길 때에는 동지(冬至)의 진하(陳賀)를 임시로 정지하였고, 각도에서도 전문(箋文)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신해년에 능을 옮길 때에는 대전관(代奠官)이 수빈관(守殯官)을 겸하였으므로, 대전관이 축문을 읽을 수 없다 하여 능소(陵所)에 있는 문관 낭청을 따로 대축(大祝)으로 차출하였습니다. 이 예에 따라 거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전교하기를,
"현궁(玄宮)에서 모셔낸 뒤에 조석 상식(上食)과 낮 다례(茶禮)에서부터 견전(遣奠)의 제품(祭品)까지를 모두 대내(大內)에서 조처할 것이니 해사는 상식 이외의 각전(各奠)과 낮 다례에 대해 서하(書下)한 품수(品數)만을 대령하라. 각 공인(貢人)에게서 나오는 진상물(進上物)은 호조와 선혜청으로 하여금 마련해서 먼저 회감(會減)한 뒤에 진상하되 넉넉하고 후하게 하도록 힘쓰게 하라. 도감에서 사용할 각종 물품으로 공인이나 시민(市民)들에게서 취하여 쓰지 않을 수 없는 것들도 모두 이 예에 따라 하라."
하였다.
7월 26일 경술
호조 참판 이헌경(李獻慶)이 상소하여, 발인일로 정한 날짜가 극한기(極寒期)에 해당하니 10월 상순으로 앞당겨 정하기를 청하고, 송파(松坡)나 삼전도(三田渡) 나루는 과천(果川)과 서로 반대에 위치해 있으니 두모포(豆毛浦)를 경유하거나 혹은 흥화문(興化門)과 숭례문(崇禮門)으로 나아가 서빙고(西氷庫)로 향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진술한 바에서 숨김이 없는 의리를 볼 수 있다. 비록 가상하기는 하지만 원을 안장(安葬)하는 날짜를 앞당기거나 뒤로 물릴 수는 없다. 발인 날짜를 10월 상순 안으로 택일하라는 일로 말하면, 경의 말이 진실로 신중히 하자는 데서 나온 것이겠으나 상순과 하순 사이에 기온이 크게 달라지리라는 것도 정확히 요량하기 어려운데다가 더구나 왕조(王朝)의 예는 사서인(士庶人)과 달라 찬실(欑室)을 반드시 청사(廳事)에 마련하고 밑에 모래와 벽돌을 깔기 때문에 춥고 더운 것이 날씨와 관계되지 않는다. 이것이 경의 말을 따를 수 없는 이유이다.
도로에 관한 일로 말하면 지난번 연석에서 대신들에게 하교한 것이 있다. 당초에는 임시로 별전(別殿)에 모셨다가 서빙고에서 강을 건너 무궁한 슬픔을 조금이나마 부치고자 하였으나, 이렇게 할 경우, 자궁(慈宮)께서 반드시 몸소 왕림하고자 하실 것이므로 위안해 드리는 일이 급할 것 같아 원소에서 편리한 길목에 모셨다가 발인할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노정(路程)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반포를 늦추고 있다. 선창의 일로 말하면, 경은 비록 얼어붙은 얼음을 깨는 것을 염려하였으나 이에 대해서는 이미 헤아린 바가 있다. 이번에는 선창을 쓰지 말고 임진강의 예에 따라 부교(浮橋)를 만들어 사용할 뜻으로 미리 유사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였다."
하였다.
관북에 큰물이 졌다. 함경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가 장계하기를,
"이달 7일의 수재(水災)로 이원(利原)에는 물에 빠져 죽은 자가 4명이고, 단천(端川)에는 물에 떠내려 갔거나 무너진 민가가 55호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30명이며, 명천(明川)에는 물에 떠내려가거나 깔려 죽은 사람이 5백 46명인데 아직 시체를 건지지 못한 것이 3백 76명이고, 떠내려갔거나 무너진 가호(家戶)가 5백 70호입니다. 하가리(下加里)는 모든 물이 합수(合水)하는 곳인데다가 밤에 비가 사납게 퍼부어 잠깐 사이에 물이 넘쳐 드넓게 퍼졌다가 사흘 뒤에야 물이 점차 빠졌는데, 바다 입구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시체가 그 수를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길주(吉州)의 상황은 북쪽으로 들어간 감영의 비장(裨將)이 지나는 길에 본 것으로 급히 보고해 왔는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30여 명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장계의 말을 보건대 명천에 물에 떠내려간 민호(民戶)가 많은 것은 고사하고라도 인명(人命)이 이처럼 많이 상했다 하니, 놀랍고 슬프다고만 말할 수 없다. 산 사람으로 집을 잃은 자들에게는 그래도 물자를 주어 구제할 방책이 있거니와, 물에 빠져 죽은 저 불쌍한 백성들에게는 그 원통함을 위로할 방법이 없다. 생각이 이에 미침에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어서 바야흐로 입시(入侍)한 사관(史官)을 특별히 보내어 백성들을 위무해 안집(安集)시키게 하고자 한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는 마을 근처에 따로 하나의 단(壇)을 설치해서 봉명 사행(奉命使行)이 도착하는 날을 기다려 제사를 지내 주도록 하라. 재해를 입은 가호(家戶)에는 원래의 휼전(恤典) 이외에 따로 쌀 한 포대 정도를 더 주고, 백성들에게는 신구 환곡과 신포(身布)·잡역(雜役) 등 백성에게서 나오는 공사(公私)의 모든 것들을 모두 탕감해 주라. 그 중에 집이 완전히 없어진 자 및 죽은 자의 아들이나 아내에게는 감사가 상례에 구애되지 말고 두루 구휼하라. 길주의 이재민에 대한 휼전도 한결같이 명천의 예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명천에서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생각하면 슬프고 놀랍습니다. 환곡과 신포를 이미 탕감하라고 명하셨으니 지극히 두터운 은전이십니다. 그러나 이번에 입은 재해는 근래에 없던 바이니 반드시 특별히 돌보아 구휼하는 은전을 베푼 뒤에야 죽은 자는 그만이더라도 살아 있는 자들은 혹 지탱해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본군 온 경내의 전조(田租)를 전부 면제해 준다 하더라도 지나침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환곡은 명년에 구제할 밑천이고 보면 전조를 면제해 주었다 해서 이 환곡의 수납마저 변동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과 꼭 맞는다. 한 고을 전체에 1년 동안 급복(給復)하라."
하였다.
7월 27일 신해
예조가 종묘에 가을 전알(展謁)할 것으로 품지(稟旨)하니, 상이 이르기를,
"새 원에 지금 이미 풀을 깎고 흙을 팠으니 역사(役事)를 시작한 것인데, 이런 때에 동가(動駕)하면서 규례대로 풍악을 잡힐 수는 없다. 악기를 늘어놓기만 하고 울리지 않자니 막중한 전알 의식을 갖추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방조(傍照)할 전례도 없다. 전알하는 데 궐례(闕禮)됨이 있는 것도 미안할 듯하니, 대신들과 의논해서 전례를 자세히 상고해서 아뢰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재협(李在恊)이 아뢰기를,
"법가(法駕)에 풍악을 잡히는 것은 사체가 지극히 중하니, 악기를 늘어놓기만 하고 울리지 않는 것은 의거할 만한 전례가 없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이재간 등이 아뢰기를,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건대, 무자년 봄과 가을 전알을 취품(取稟)했을 때, 다시 하교를 기다릴 것으로 비답하시고서 모두 정지하였다가 기축년 정월에서야 비로소 전알을 거행하셨으니, 이것이 혹 전례가 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까 연석에서 자문했던 것은 상고할 만한 의리가 없고 의거할 만한 예가 없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종묘의 의식이 지극히 엄중하니 갖추지 않기도 미안하고 그렇다고 갖추기도 곤란해서였다. 선유(先儒)도 사유를 고한 처음에는 의당 입어야 할 복을 입는다고 하였다. 옛 원에 고유(告由)하는 예를 밤에 거행하려 하고, 새 원의 공사도 이미 시작했으니, 풍악을 잡히는 일 외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법가를 갖추고 의식과 호위를 갖추는 것은 이미 강행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법가에 풍악을 잡히는 것은 전례(典禮)의 중한 것이고 또 압존(壓尊)의 혐의에 관계가 있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임시로 철폐하는 것이 더욱 무엇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평상시에 전알을 정지했던 전례대로 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선왕조 때 두 해의 고사는 바로 정양 중에 계시어 애를 써가며 거둥하기가 고달프실 때의 일이었으므로 꼭 들어맞지는 않으나 지금 나의 심정이나 기력으로 볼 때 실로 강행하기가 어려우니 정양 중에 한 번 임시로 정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인정이나 예문(禮文)으로 볼 때 잠시 정지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 이어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 좌의정 이성원(李性源)의 사직을 윤허하고 이어 복상(卜相)하라고 명하였다. 이재협(李在恊)을 의정부 좌의정으로 삼았다.
7월 28일 임자
이에 앞서 꾀꼬리봉에서 석재(石材)를 채취하도록 명하였는데, 석공(石工) 무리들이 힘이 드는 것을 꺼려 함부로 말하기를,
"돌의 결이 거칠어서 쓰기에 적합하지 않고 돌덩이가 작아서 석물(石物)을 만들기에 적당하지 않다."
하니, 조정의 의논도 어지러워서 부득이 강도(江都)로 옮겨 채석장(採石場)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석공들에게 명하여 다시 꾀꼬리봉으로 가서 돌을 찾아 보게 하면서 면대해 타이르기를,
"돌을 얻는 것은 하늘의 뜻인데 돌을 얻지 못하는 것은 나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해서이다."
하고, 이어 장용영에 명하여 세 사람이 쓰는 가래와 괭이·삽 등의 기구를 많이 만들어서 그 용도에 쓰도록 공급하게 하였다. 석공들이 각각 힘을 다해 겨우 한 층을 파자 한 돌맥을 만나서 30여 길을 파들어가니 마치 달걀의 노른자 같은 무리[暈]가 있고 광택이 나고 단단하고 결이 고운 돌이 나왔는데, 강도에서 나는 쑥돌[艾石]에 비교하면 돌과 옥의 차이 정도뿐이 아니었다. 이리하여 각종 석물을 모두 꾀꼬리봉의 돌을 가져다가 만들고 강화에서 돌을 뜨는 일은 철폐하였다.
7월 29일 계축
임률(任嵂)을 여사 대장(轝士大將)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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