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갑인
하교하였다.
"신원(新園)을 가려 정한 곳이 서울에서 백여 리나 떨어져 있으므로 매년 거행하는 전성(展省)을 뜻대로 행할 수 없는 형세이다. 그러므로 지금 천봉(遷奉)하기 이전에 자주 가서 예를 펴고 싶다. 이와 같은 상황이니 금년 가을의 능행(陵幸)은 겸행(兼行)할 수 없다. 원소(園所)의 여러 가지 일들은 친히 살핀 후 결정할 것이 많으니, 그때 가서 영(令)을 내려 의위(儀衛)를 간략하게 차리고서 편한 대로 왕래해야겠다. 잇따라 제사를 지내는 것은 신령(神靈)을 모독하는 것이니, 단지 전배례(展拜禮)만 거행하겠다."
평안도 관찰사 정창성(鄭昌聖)이 도내의 농사 상황을 계문하니, 하교하기를,
"지난달 보름 뒤부터 날씨가 순조로운 것이 매우 다행이기는 하다만, 남쪽 고을처럼 곡식이 잘 여물지 못했으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앞으로 백성들을 보살필 대책을 미리 고을 수령들에게 엄히 신칙하고, 경 역시 유념해서 연로의 곡식을 저축하여 백성들의 식량을 여유있게 하고, 잡역(雜役)을 덜어주어 백성들이 쉴 수 있도록 하라. 지금 밤낮으로 두근거리는 이 심정으로서야 어찌 기무(機務)에 생각이 미칠 겨를이 있겠는가마는, 백성들의 일이 지극히 중하므로 부득불 이와 같이 거듭 당부하는 바이니, 경과 고을 수령들은 굳은 각오로 나의 뜻에 보답하기를 평상시보다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대저 곡물이 제대로 여문 해의 경우에도 백성들이 가렴 주구에 시달리느라 풍년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처지가 오히려 더없이 불쌍하거늘, 하물며 본도의 올해 민정(民情)이야 오죽하겠는가. 경은 마땅히 잘 살피도록 하라. 수령들의 거리낌없이 사욕을 채우는 버릇이 유행처럼 되다시피 하여, 조정도 속여 넘길 수 있다고 여기고 순영(巡營)의 비호만 믿고 있다. 탐욕을 징계하는 법을 이런 자들에게 시행하지 않고 어디다 쓸 것인가.
농정(農政)이 추수 준비를 할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영칙(營飭)이 엄격한지 엄격하지 않은지 살필 겸하여, 마땅히 별도로 안렴사(按廉使)를 보내 일벌 백계의 징치(懲治)를 각별히 거행할 것이다. 근래에 어사의 종적이 드러나는 폐단이 진실로 민망스러운데, 이번에는 설령 암행 어사가 나가게 되더라도, 은밀히 왕래하도록 할 것이다. 지금의 이 미리 알리는 교서(敎書)는 그 뜻이 속이지 말도록 하는 데에 있으니, 경은 이 전교를 열읍(列邑)에 반포하여 각자 조심해서 나라의 법에 걸려드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고, 경상도 관찰사 홍억(洪檍)이 도내의 농사 형편을 계문하니, 하교하기를,
"가을철이 이미 깊었고 시령(時令) 또한 이르니, 지금의 8월은 곧 예전의 9월이다. 그러니 풍흉(豊凶)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때인데, 설령 한 도(道)를 통틀어 곡물이 제대로 영글었다고 하더라도 금년 여름의 장마는 근년에 보지 못한 바이니, 떨어지고 물에 잠긴 곳이 필시 많을 것이다. 이 때문에 경술년043) 의 급재(給災)가 예년에 밑돌지 않았던 이유이다. 이전에 이미 검전(檢田)을 때가 되어서야 급작스레 보고하게 될까 염려하여, 각자 기한에 앞서 분초(分抄)하도록 하였는데, 과연 조정의 명령대로 거행을 하였는가. 이곳과 저곳의 허실을 분간하지 않는다면, 특별히 유시를 한 본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경기 및 삼남(三南)의 제도(諸道)에 한 줌의 나락일망정 마구 거두는 일이 없도록 엄히 신칙하도록 하였는데, 본도의 경우는 연해의 읍이 아니면 산골짜기 고을이니, 모쪼록 배전의 힘을 들여, 명령대로 시행하는 책무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일 을묘
하교하였다.
"새로 봉안하게 될 원소(園所)의 위치가 서울에서 약간 먼 곳에 떨어져 있는데, 화소(火巢)044) 안의 인가를 철거시킨 뒤에는 지역이 넓어지게 될 것이니, 수호(守護)하는 방도에 있어 전례를 벗어나지 않을 수 없다. 원군(園軍)을 원래 정해진 숫자 외에 마땅히 늘려 충정(充定)해야 될 터인데, 위전(位田)과 복호(復戶)를 분배함에 있어 구애되는 일이 있을 것이니, 비록 수호군이라고 칭명하지는 않더라도 산지기[山直]나 혹은 다른 이름으로, 별도로 명수(名數)를 정하고 역을 면제해주도록 하라.
그리고 각 능침의 화소 안에 비록 인가가 들어있는 예가 없기는 하나, 지금은 한 가호도 이사시키기 어려운 때이니 동구(洞口)의 경계를 정한 후에 능행(陵幸)할 때 수레가 머무르게 될 곳을 헤아려 제외하고, 그 밖에 빈 땅은 화소 안이라는 데에 구애받지 말아서 현재 남아있는 인가에 대해서는 철거하지 말도록 하라. 설령 이사를 떠나는 백성이 있더라도, 원래의 집은 수호군과 매매하도록 해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이니, 이에 따라 편의대로 조처하라. 도감 및 고을의 관아에서 사용하기 위해 사유지의 재목을 베어내 가져오는 것은 모두 값을 지급해 주도록 하라."
찬배(竄配) 이하 죄인을 소결(疏決)하였다.
제신이 곧 상복을 받아 입을 때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승지 이민채(李敏采) 등이, 이노춘(李魯春)에게 형량을 감해주는 일, 오익환(吳翼煥)에게 첩(牒)을 지급하는 일, 성윤검(成胤儉)·윤득부(尹得孚)의 죄를 용서해 주는 일과 유악주(兪岳柱)를 석방토록 한 일을 철회하기를 청하니, 따르지 않았다.
8월 3일 병진
영우원에 전배하였다.
특명으로 팔도와 양도(兩都)의 제전가(祭奠價)를 정지하고 연군(烟軍)·승군(僧軍)의 역을 면제하였다.
이 일은 능침을 천봉할 때의 고례인데, 이때에 이르러 특별히 감해준 것이다.
8월 4일 정사
이에 앞서 상이, 경모궁의 대제(大祭)와 삭망제(朔望祭)를 친행 또는 섭행할 경우의 복색(服色) 및 주악(奏樂)의 당부에 대하여 대신에게 물었는데, 대신들이 모두 의논드리기를,
"면례(緬禮)045) 는 초상과 달라 현실(玄室)에 흙을 덮는 날에 상례가 끝납니다. 본 궁의 대소 향사(享祀) 때의 복색과 주악은 규례대로 해야 되니, 복제가 끝나기 전에 절목을 바꾸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하교하였다.
"원(園)을 옮길 때에 분사(分司)를 차출해야 하는데, 기사년 이후로는 승지와 사관이 배종하고 양방(兩坊)046) 관원은 단지 시강의 직임만 배종하여 자급이 올랐을 뿐이니, 금번에는 차출하지 말라. 그리고 일찍이 양방을 거친 인원 중에 문신으로서 아직껏 하대부로 있는 자와, 음관으로서 아직껏 당하관으로 있는 자를 각기 한 자급 높이도록 하되, 그 가운데 봉조하 조돈(趙暾)은 임술년에 제배되었고 전 오위 장 조덕수(趙德洙)는 병인년에 제배되었으니, 오래되었기로 말하면 이 두 신하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 나의 요즈음 심정 같아서는 어찌 상례에 구애하겠는가. 특별히 아울러 가자토록 하라. 연전의 일에 대해서는 나의 뜻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그의 아우이니 만큼, 무엇을 아끼겠는가. 전 승지 한광계(韓光綮)를 총관(摠管)에 의망하여 들이라."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8월 6일 기미
차대하여 북도(北道)에서 녹용을 공납하는 폐단에 대해 신칙하였다. 이에 앞서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에 북영(北營)을 맡고 있을 적에, 녹용 한 대(對)의 값을 80냥으로 정했었는데 요즘에는 4, 5백 냥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는 모두가 심약(審藥)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북지(北地)의 녹용은 봉진을 허락하지 않고 곧장 본값으로 징납하는데, 각 고을에서 나오는 데가 없고 보니 부득불 해마다 민간에다 강제로 떠맡기고 있습니다. 불가불 한 차례 탕척하여 간악한 짓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감진 어사(監賑御史) 정대용(鄭大容)에게 물으니, 대용이 대답하기를,
"녹용의 폐단은 오로지 양수(兩數)가 많은 것이 원인입니다. 만약 3, 4 냥 이상으로써 예에 따라 봉진하게 한다면, 값이 불어나게 될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비록 이것보다 백배 더한 것이더라도, 진실로 백성에게 이로울 것 같으면 무슨 일을 아까워하겠는가. 공납하는 녹용은 곧 약재 가운데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데, 그 폐단을 해결하는 방안 때문에 누차에 걸쳐 신칙하는 하교를 내리게 하는가. 한 해 두 해 벌써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에, 이른바 ‘조령(朝令)’이니 ‘도계(道啓)’니 하는 것들이 죄다 형식이 되고 말았다. 이제 와서는 한 대에 수백 냥 한다는 설이 한술 더 떠 6백 금이나 된다고 하니, 나라에 기강이 있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양수를 감하는 것은 이미 절목(節目)을 만들었으니, 이제 별도로 알릴 필요 없겠고, 작공(作貢)·감가(減價)·경무(京貿)·향무(鄕貿)·자비(自備) 또는 어떻게 폐단을 바로잡을 것인지에 대한 일을 논할 것 없이 또 다시 녹용을 공납하는 일을 가지고 털끝만큼이라도 예전처럼 폐단을 끼치게 된다면, 이는 나라에 법이 없는 것이다. 법이 없는 나라에 도백(道伯)과 수령을 둔들 무엇에 쓰겠는가. ‘폐단’이라는 두 글자가 또 내 귀에 들리게 될 경우 일의 곡절을 불문하고, 북도의 감사와 병사는 모두 가장 먼 육진(六鎭) 땅에 연한을 정하지 않은 채 정배할 것이며, 간교한 짓을 한 비속(裨屬)과 심약(審藥)은 어사를 내려보내 그 경계에서 죽지 않을 만큼 곤장 50도(度)를 친 후 백성들에게 돌려 보일 것이며, 예전의 버릇을 고치지 않는 수령이 있으면, 왕부(王府)에 잡아들여 형추하여 실정을 알아낸 후 곧 그곳에 정배시키고 아울러 금고를 하도록 하라.
그 폐단의 근원을 따져보면 내국(內局)이 퇴짜를 놓고 농간을 부리는 까닭이니, 이 또한 마땅히 드러나는 대로 수의(首醫)는 수령에 대한 율을 적용하고, 장무관(掌務官)은 심약에 대한 율을 적용하고, 해당 제조 또한 감·병사에 대한 율을 적용하겠다.
대저, 약이 독하지 않으면 병도 낫지 않거늘, 하물며 법이 엄하지 않고서 어떻게 영구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금번의 이 하교는 명령을 거듭 밝히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이 전교를 안으로는 내국과 밖으로는 해도의 병영 및 고을에 게시토록 하고, 내년 봄부터서 만일 괄목할 만한 성과가 없을 경우, 도수신(道帥臣)을, 폐단이 없이 대충 미봉했다 하더라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만약 성한 몸으로 철령(鐵嶺)을 넘어 다시 조정의 반열에 서고 싶거든, 먼저 이 일부터 마음을 다해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8월 7일 경신
이운행(李運行)을 등용하도록 명하였다. 운행은 고 처사 이고(李皐)의 후손으로, 집이 팔달산(八達山) 아래에 있었는데, 이때 수원(水原)의 새 읍치(邑治)를 팔달산에다 정하였다. 그리하여 향교를 운행의 선영 곁에 세우게 되었는데, 상이 그 소식을 듣고 그의 3세(三世) 다섯 분묘가 한꺼번에 모두 옮겨지게 된 점을 가엾게 여기어,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장례 물품을 넉넉하게 지급토록 하고, 인하여 운행을 등용하라고 명한 것이다.
이조 판서 김종수(金鍾秀)를 소견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추은(推恩)과 증직(贈職)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조(吏曹)나 옥당(玉堂)을 거친 뒤라야만 비로소 이조(吏曹)의 벼슬을 허락하도록 하고 있는데, 고 봉조하 정술조(鄭述祚)는 전관(銓官)이 이조를 허락하지 않은 까닭에 증직을 받지 못한 채로 작고하였다고 합니다. 정술조는 일찍이 당상인 보덕(輔德)을 거쳤는데 이 자리는 엄선하는 자리입니다. 옥당의 예를 인용하여 증직을 허락하더라도, 크게 뒤에 폐단을 열어놓게 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구상(具庠)을 이조 참판으로, 이조승(李祖承)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도(三道)의 저축된 곡식에 대해 이미 저번 달에 아뢰어, 관서(關西)의 면포를 판 돈 2만 냥과, 어영청의 돈 4만 냥과, 금위영의 돈 3만 냥을 특별히 꾸어 주도록 하고 이어 탁지(度支)로 하여금 매년 주조하는 돈 가운데서 해마다 1만 냥씩 수를 나누어 보상토록 하여 7년 후에 끝내도록 하였습니다. 쌀을 사다 둘 곳은, 경기에 절미(折米) 1만 석, 호서에 1만 3천 석, 호남에 7천 석을 나누어 배정하였는데, 모두 상정가로 1석마다 3냥에 사들여 3만 석의 수량을 맞추도록 하였습니다. 탁지로 하여금 해도에 공문을 보내 좋은 방향으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내년을 대비하여 식량을 넉넉하게 하려는 방도에서 나온 일이니, 엄히 신칙하여 실효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8월 8일 신유
내탕(內帑)의 돈 2천 민(緡)을 원소 도감(園所都監)에 내려주어 일꾼을 고용하는 비용에 쓰도록 하였다.
이병정(李秉鼎)을 이조 참판으로, 조정진(趙鼎鎭)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재찬(金載瓚)을 규장각 직제학으로, 이시수(李時秀)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김종수(金鍾秀)를 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으로, 오재순(吳載純)을 예문관 제학으로 각각 삼고, 변득양(邊得讓)을 발탁하여 지돈녕부사로 삼았다.
8월 9일 임술
신원(新園)의 호를 ‘현륭(顯隆)’이라고 의논해 정하였다.
제신(諸臣)이 【영돈녕부사 홍낙성(洪樂性),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이복원(李福源), 영의정 김익(金熤), 좌의정 이재협(李在協), 판중추부사 이성원(李性源), 우의정 채제공(蔡濟恭), 이조 판서 김종수(金鍾秀), 좌참찬 김화진(金華鎭), 우참찬 조경(趙瓊), 예조 판서 이재간(李在簡),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 공조 판서 정창순(鄭昌順), 예문관 제학 오재순(吳載純), 형조 판서 심이지(沈頤之), 이조 참판 이병정(李秉鼎), 병조 참판 신응현(申應顯), 호조 참판 이헌경(李獻慶), 예조 참판 민종현(閔鍾顯), 형조 참판 유당(柳戇), 대사헌 조정진(趙鼎鎭), 규장각 직제학 김재찬(金載瓚), 부제학 이시수(李時秀), 대사간 박천형(朴天衡)이다.】 모여 의논하여 빈청에 ‘현륭(顯隆)’, 【현(顯)은 《상서(尙書)》에 "크게 드러났도다, 문왕의 모책(謨策)이여." 하였고, 《시경》에 "드러나지 않은 곳에도 또한 임하시네." 하였고, 두보(杜甫)의 시에 "바라건대 부지런히 애쓰는 뜻으로 힘들여 키워주신 현부(顯父)에 보답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융(隆)은 융숭하게 보답한다는 뜻이다. 《설문(說文)》에 "푸짐하고 큰 것을 말한다. 물건의 가운데가 높다랗고도 성대한 것을 뜻한다." 하였다.】 ‘덕융(德隆)’, 【《당서(唐書)》에 "음악을 만들고 예법을 제정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덕(德)을 알게함이 융(隆)이다." 하였다.】 ‘헌륭(獻隆)’, 【헌(獻)은 《자설(字說)》에 "큰 것이다."고 하였고, 시법(諡法)에 "바탕을 알고 문채가 있는 것을 헌(獻)이라 한다." 하였다.】 ‘희륭(熙隆)’, 【희(熙)는 《설문(說文)》에 이르기를 "흥성하고 화목하며 넓고 장구한 것이다." 하였다.】 ‘계륭(啓隆)’, 【계(啓)는 《서경》에 "우리 후인을 계우(啓佑)하셨다." 하였다.】 ‘태륭(泰隆)’을 【《대대례(大戴禮)》에 "근본을 귀하게 여김을 문(文)이라 하고 친히 쓰는 것을 이(理)라 하는데, 이 두 가지를 합치어 문(文)을 이룩해서 태일(太一)에 귀결(歸決)함을 곧 태륭(泰隆)이라 한다." 하였다.】 써서 내렸는데, 빈청이 현륭·태륭·덕륭의 삼망(三望)을 의계(擬啓)하였다.
원(園)을 옮길 길일을 다시 잡았다.
이에 앞서 천원 도감(遷園都監)이 아뢰기를,
"원을 옮길 길일을 잡은 뒤에 방외인(方外人) 강필제(姜必齊)·김영위(金永暐) 등이 전연 고방(古方)에 어두우면서 이설(異說)을 제기하고 나섰으니, 유사로 하여금 엄하게 처리토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천기대요(天機大要)》와 《시용통서(時用通書)》 등의 서책은 그래도 근거삼아 설을 삼을 만한 것들이다. 그러나 성요 전차(星曜躔次)의 설은 주천(周天)하는 도수가 고금이 전연 다르다. 그러니 가령 방서(方書) 가운데 이 간지(干支)의 위차에 있는 것이 지금은 마땅히 다른 간지에 옮겨져 있어야 된다는 것은, 술수가(術數家)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래서 국방(局方)의 추택(推擇)에 격국(格局)을 중시했던 것이다. 이후로는 다시 기문법(奇門法)으로서 딴소리를 하는 의논이 있을지라도, 경들은 절대 귀를 기울이거나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형조가 필제 등을 정배하라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망언율(妄言律)을 적용하여 감죄(勘罪), 석방하라."
하였다. 총호사 김익(金熤)과 금성위 박명원(朴明源)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길일을 잡은 뒤에 방외(方外)에서 이론이 있었는데, 병신년에는 비록 김엽(金曄)의 망언한 죄를 감정하기는 하였으나 날짜는 다시 잡았으니, 이는 실로 신중하게 처리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12일과 초이틀 외에 또 길일이 있는가?"
하였다. 명원이 아뢰기를,
"10월 7일이 길일임에는 틀림없으나, 계원(啓園)하는 날짜를 8월 중으로 골라야 될 상황이므로 계원하는 일이 두 달이나 먼저 있게 되는 것은 참고할 만한 전례가 없습니다. 그래서 감히 가리어 들이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안원(安園)하는 날을 중요시해야 될 것이다."
하고, 이에 10월 7일로 길일을 잡았다. 김익이 아뢰기를,
"구원(舊園)을 여는 길일을 8월 12일로 잡게 되면 기일이 촉박합니다. 외방의 경우는 관문(關文)이 도착한 날에 상복을 입으라는 뜻으로 제도에 알렸으면 합니다."
하니, 따랐다.
경모궁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각 전궁(殿宮)의 소선(素膳)을, 현실(玄室)을 꺼내는 날부터 현실을 내리는 날까지 마련토록 하고, 분병조와 분도총부의 오위장(五衛將)과 무겸 선전관이 돌아가며 직숙을 하되, 현실을 꺼내는 날부터 시작하라고 명하였다. 구례에는 구릉(舊陵)을 여는 날부터 시작을 하였는데, 이때 와서 개원(開園)할 시기가 현실을 내리는 날과 매우 떨어져 있었으므로, 예조와 병조의 판서가 품정(稟定)하자, 이를 윤허한 것이다.
8월 10일 계해
예조가 아뢰기를,
"계축년과 신해년의 등록(謄錄)에는 계릉전(啓陵奠)이 있으나 《속오례의(續五禮儀)》에는 단지 계릉하는 의식만 있고 계릉전은 없습니다. 대저 이 책은 신해년 이후에 만들어졌는데, 계릉의 고유제(告由祭)를 이미 기한 사흘 전에 거행한 이상 계릉할 때 다시 전을 올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례의》에 전을 수록하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인 듯합니다."
하니, 《오례의》를 따르라고 하교하였다.
8월 11일 갑자
원을 옮길 때 사향(祀享)을 정지하고 혼인과 장사를 금지하는 제한에 대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는데,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계원(啓園)하는 날짜가 성빈(成殯)하는 시기와 석 달이나 떨어져 있는데 추석 명절이 단지 며칠 밖에 남지 않았으니, 향사(享事)를 본원(本園)에서만 거행하고 태실(太室)과 각 능침(陵寢)에는 거행을 하지 않을 경우 압존(壓尊)의 혐의가 있을 듯합니다. 예전에는 계릉과 성빈의 날짜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비록 잠시 향사를 정지하기는 하였으나, 금일의 사세는 전일과 같지 않습니다. 모든 향사는 성빈하는 날부터 현실을 내리는 날까지 정지하고, 혼인과 장사를 금지하고 조시(朝市)를 정지하는 일도 이에 준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8월 12일 을축
영우원에 나아가 계원례(啓園禮)를 행하였다. 어가가 안락재[安樂峴]에 이르렀을 때 격기(膈氣)가 매우 심해졌는데 가마를 멈추고 잇따라 탕약과 환약을 든 후 재실에 들어갔다.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 등이 아뢰기를,
"금일의 길시(吉時)는 묘시 말고도 또 사시와 신시가 모두 길하다고 합니다. 신·사 양시로 물리신 뒤 햇살도 조금 퍼지고 격기도 조금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예를 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출궁할 때 자궁(慈宮)에 들어가 뵙고, 행례한 후 즉시 돌아오겠다고 고하였다. 지금 만약 갑자기 정시(正時)를 물리게 되면, 자궁께서 놀라고 걱정하심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때가 되자 상이 시복(緦服)을 갖추고 판위(版位)에 나아갔다. 계원(啓園)을 함에 이르러, 상이 옹가(甕家) 안에 나아가 사초(沙草)를 부여잡고 어루만지면서 정도에 지나치게 울부짖고 가슴을 쳤다. 이에 약원(藥院)의 제조와 각신·승지 및 여러 대신들이 번갈아 곡을 멈추기를 청했으나, 상이 모두 듣지 않았다. 이때 시각이 이미 많이 흘렀고 격기(膈氣)의 증세가 다시 심해져서 곡도 제소리가 나지 않는데다 연이어 구토를 하려는 증세까지 있었다. 이에 대신 이하가 일제히 나아가 아뢰기를,
"신들이 부득불 이런 죽을 죄를 범합니다."
하고, 드디어 성궁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소차(小次)에 이르러 편여(便輿)를 타고서 재실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조금 후에 격기가 가라앉자 환궁하였다.
8월 14일 정묘
이문원(摛文院)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경모궁의 제향 복색(服色)을 대신의 논의에 따라 길복(吉服)으로 정했습니다만, 원향(園享)에 있어서는 계원(啓園)하여 상복을 받은 뒤이니 궁향(宮享)과 차이가 있습니다. 향(香)을 받을 때와 제향을 지낼 때에는 백포(白袍) 차림으로 거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8월 15일 무진
선원전(璿源殿)에 작헌례를 행하였다.
8월 16일 기사
신원(新園)의 석물(石物)을 광릉(光陵)의 제도를 따르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각능 석물의 제도와 수효를 살펴보았는데, 차이가 많이 있었으나 대체로는 같았다. 그런데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은 영릉(寧陵) 이후로 모두 쓰지 말도록 명하였다. 검소함을 밝히신 성덕(聖德)을 우러러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 신해년에 천릉(遷陵)을 하면서 예전대로 따라서 하였던 전례가 있었던 것은 예전 장릉(長陵)의 석물에 병풍석을 사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금번에는 성의를 다하는 뜻을 본받고 싶을 뿐만 아니라, 천릉을 할 때 예전대로 써온 전례에 근거하여, 병풍석과 와첨(瓦簷)·상석(裳石)은 쓰게 되더라도 난간석은 없앴으면 한다. 이는 수교(受敎)를 준행하기 위하여 감히 격식대로 하지 않는 것인데, 이후의 능역(陵役)에 만일 나의 본의가 어떤지를 알지 못하고서 이번의 예를 잘못 근거로 삼게 되면, 곧 나는 수교를 어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병풍석에 관계된 갖가지 석물은 절대 다시 쓰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 전교를 호조와 예조의 등록에 상세히 기재하고, 아울러 또 장생전과 동정고(東正庫)에 게시토록 하라.
그리고 신원(新園)은 합원(合園)의 제혈(制穴)로 설치하는 만큼 전후의 석물을 배설할 곳이 매우 비좁으니, 병풍석 이외의 석물을 모두 광릉(光陵)의 제도를 따라서 혼유석(魂遊石) 1좌(坐), 장명등(長明燈) 1좌, 망주석(望柱石) 1쌍, 문·무석(文武石) 각 1쌍, 양·마·호석(羊馬虎石) 각 1쌍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8월 18일 신미
경기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천·수원의 숙소에서 소용되는 그릇을 안에서 내려줄 것이니, 해읍에 그대로 보관하여 영구히 쓸 수 있게 하라. 금번의 행행에는, 비록 솥 하나라도 민간에서 가져다 씀으로써 폐단을 끼치고 싶지 않다. 원소(園所)에서 소용되는 그릇은 외도감(外都監)에 분부하여 만들어서 진배토록 하였는데, 원관(園官)이 주관하여 길이 본원의 제향 때 사용하는 그릇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0일 계유
영우원에 전배하였다. 판중추부사 서명선 등이 일제히 가마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십수 일만 기다렸다가 성상의 체후가 정상을 회복하신 후 거둥하소서. 그렇게 하면 도리로 보나 일의 체면으로 보나 실로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때를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한때나마 슬픈 마음을 쏟아내고 싶으니, 경들은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재협이 가마를 부여잡고서 아뢰기를,
"대저 한(漢)나라 설광덕(薛廣德)은 일개 어사에 불과하였으나 능히 임금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신들이 비록 매우 형편없지만 그 관직은 임금을 보호하는 대신(大臣)입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이토록 굳이 거부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에게 시달리다보니, 격기(膈氣)가 다시 치밀어 오르려고 한다."
하였다. 명선이 아뢰기를,
"곡읍(哭泣)은 자잘한 예절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복을 입고서도 곡을 안 하는 것은 예로 볼 때 안 될 일이다. 다시는 번거롭게 청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재실에 들어가 시복(緦服)을 갖추어 입고서, 옹가(甕家) 안에 들어가 곡을 하며 슬픔을 한껏 터뜨려 마지않았다. 격기가 다시 심해지니, 명선 등이 아뢰기를,
"비록 죽을 죄를 범하더라도 감히 옷깃을 당기는 의리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나아가 절을 하고는 부축하면서 연이어 곡을 멈추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신기(神氣)가 점점 더욱 혼미해지고 또 구역질을 하려는 증세까지 보이니, 명선 등이 앞으로 나아가 부축하여 일으켰다. 이어 재실로 돌아와 편여(便輿)를 타고서 원소의 청룡(靑龍) 편을 통해 답십리(踏十里)를 지나 살곶이 다리[箭串橋]에 이르렀는데, 상이 이르기를,
"지나온 길이 더없이 평탄하구나. 신원의 연로(轝路)를 이곳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8월 21일 갑술
시임과 원임 대신,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판중추부사 서명선이 어제 슬퍼하시는 정도가 너무 지나쳤던 일로 누누이 진계를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곡읍이 정도에 지나쳤던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된 것이다. 처음 생각에는 5일 간격으로 전배(展拜)를 할 계획이었는데, 격기(膈氣)가 이러한데다 경들의 청이 또 이와 같으니, 닷새마다 하려던 계획을 미루어 열흘에 한 번씩 해야겠다. 나의 안타까운 심정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여러 대신들에게 묻기를,
"유궁(幽宮)의 지문(誌文)을 이제 친히 지으려고 하는데, 드러내어 천명하는 도에 대해 내 마땅히 힘과 성의를 다할 것이다. 그러나 차마 말할 수 없고 차마 쓸 수 없는 일 때문에 슬픔을 누르고 참아가며 피눈물을 떨구면서 써나가 한 글자를 쓸 때마다 한 번씩 눈물을 떨군다 하더라도 오히려 표현이 부족한 말이 될 것이다. 그러니 평범한 문자로 보아 넘겨 전례대로 지장(誌狀)에 편입을 하게 된다면, 차마 널리 드러내지 못한다는 뜻에 어긋나는 면이 있게 되는데, 경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하니, 명선이 아뢰기를,
"지문을 친히 찬술하시는 일은 실로 무궁하신 효심에서 나온 일입니다. 더구나 친히 지으시는 문자는 사체가 지극히 중하니 만큼, 열성(列聖)의 지장에 편입하는 것은 순차적인 일입니다."
하고, 영의정 김익이 아뢰기를,
"문자의 체제에는 미사(微辭)가 있고 완사(婉辭)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지으실 적에 한결 더 신중을 기하소서."
하고,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28년이 지난 후에야 영우원의 문자가 이제 비로소 있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성상께서 몸소 찬술을 하시니 그 체모의 중함이 마땅히 어떻겠습니까. 다만 신은 이 글을 몸소 지은신다는 얘기를 들은 후부터 삼가 마음 속에 생각되는 바가 있었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지금 처하신 입장은 실로 천고의 제왕(帝王)에 일찍이 유례가 없었으니, 반복하여 생각하면서 눈물을 몰래 떨구곤 하였습니다. 일단 몸소 지으실 바에는 오직 당시의 사실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해야 되는데, 그러다보면 한 편 가운데에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음을 밝히는 것도 있어야겠고, 예덕(睿德)을 드러내어야 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영상이 아뢴 바 ‘미사(微辭)·완사(婉辭)’의 견해는 비록 적절한 것이기는 하나, 내용을 엮을 무렵에는, 신이 사죄(死罪)를 범하며 말씀드리자면, 필시 지극히 난처한 경우와 지극히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리라 삼가 여깁니다. 이러한 글을 외간에 반포하게 된다면 사리상 실로 미안한 점이 있으니, 글을 완성하고 나서는 가까운 신하에게 보이고 그대로 어제(御製)에 싣도록 하고 안에서 글씨를 새겨 수도(隧道)에 봉안하는 것이 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의 의견이야말로 마땅한 의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의리에 맞는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러 대신들은 다시 소견을 진달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재협이 아뢰기를,
"우상이 아뢴 바는 원칙을 고수하는 의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미 드러내어 알리려는 성모(聖慕)에서 나왔는데 도리어 그 문자를 숨기고자 하는 것은 중외의 의혹을 초래할 것입니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아뢴 바도 숨기자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반시(頒示)를 하려거든 별도로 하나의 적절한 문자를 지어서 의리를 밝히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만, 지문(誌文)의 사체는 이것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극히 난처하고 지극히 말하기 곤란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비록 한껏 은미하고 완곡하게 표현을 한다 치더라도 그것을 보는 자들이 저절로 그 말 밖의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굳이 반시하여 내걸 필요는 없다고 말을 하였는데, 구구한 견해가 실은 까닭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한 바는 실로 감탄할 만하다."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그 당시 흉악한 무리들의 꾀가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사실에 입각하여 곧게 쓰다보면, ‘참(讒)’ 자가 아니고서는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 자를 가하는 것이 이 자들에게는 비록 가벼운 처벌이 되더라도, 또한 어찌 지극히 말하기 곤란한 데로 귀결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극히 말하기 곤란하다.’는 말은 곧 위로 선조(先朝)를 핍박(逼迫)하게 되는 것을 이르는가?"
하자, 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감히 말하지 못할 점이 있었으므로 ‘지극히 말하기 곤란한 부분[至難言之地]’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만, 이 다섯 글자의 본 뜻은 성상의 말씀과 같습니다."
하였다. 재협이 아뢰기를,
"영상 또한 ‘미완(微婉)’이라는 두 글자를 진달하였는데, 오늘날 군신 상하가 언제 선조(先朝)에 대해 논의를 한 적이 있습니까. 우상이 한 말은, 소견이 없지 않을 듯하나, 또한 이와 같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오늘날 군신 상하가 언제 선조에 대해 의논한 적이 있었느냐는 점에 대해 신이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신의 변변찮은 생각에는 필시 외간에 말들이 있게 될 것이니, 아무래도 처음에 신중히 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제는 나의 생각이 정해졌다."
하였다. 김익이 아뢰기를,
"신이 운관(雲觀) 감생(監生)의 말을 들으니, 중성(中星)과 경루(更漏)를 측후하여 바로잡은 지가 거의 50년이나 되어서 지금은 성차(星次)가 점점 이동하여 거의 1도(度)나 어긋나고 경루 또한 이로 인해 진퇴(進退)의 차이가 없지 않다고 합니다. 이번 천원(遷園)하는 대례를 당하여, 시각을 정하는 일이 실로 더없이 중대하니, 경루와 일영(日影)을 불가불 이때에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근본을 미루어보면 중성을 추산하여 그 전차(躔次)와 도수(度數)를 정하는 데에 있는데, 만약 의기(儀器)가 없으면 측후를 근거할 데가 없으니, 먼저 지평의(地平儀)와 상한의(象限儀) 양의(兩儀) 및 새로운 법의 해시계[日影]를 주조하여 측후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나 해감의 관생배들이 추산의 학술에 능한 자가 매우 드무니, 역상의 제법에 정통하다고 알려진 김영(金泳)이라는 자를 본감에 소속시켜 이 일에 함께 참여하도록 한다면, 실효가 없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누주통의(漏籌通義)》047) 구본에 기재된 각 절기의 중성(中星)은 바로 갑자(甲子) 해인 영묘(英廟) 20년 항성(恒星)이 적도(赤道)를 경위(經緯)하는 도수였다. 이미 40여 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항성의 본래 운행이 반 도(度)가 차이났다. 이에 금상 8년 갑진(甲辰) 해에 항성의 적도를 경위하는 도를 경도(京都)의 북극(北極) 높이 37도 39분 15초에 의거하여 각 절후의 각 시각 중성을 추산하여, 이를 책으로 만들어 《누주통의》와 더불어 인행하였던 것이다.
8월 26일 기묘
도감 당상 정민시(鄭民始)를 소견하였다. 민시가 아뢰기를,
"종전에는 능침에 허우(虛右)·허좌(虛左)의 제도를 썼을 경우에는 으레 십자석(十字石)에 용맥(龍脈)과 좌향(坐向)을 써서 묻어두었는데, 특히 동원(同原) 쌍릉(雙陵)일 때는 이것을 빈 곳에다 묻어서 후일의 표지(標識)를 삼았습니다. 이번에는 이미 합원(合園)의 제도로 하는 만큼 만약 십자석을 쓰게 될 경우 봉축(封築) 안에다 묻어야 될 형세이니,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하니, 그냥 두라고 명하였다.
8월 28일 신사
고 대사헌 한광조(韓光肇)에게 ‘충정(忠貞)’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하교하기를,
"선조(先朝)께서 직접 제문(祭文)을 써서 내리실 때에 ‘장래에 시호(諡號)의 자료를 삼으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제문에 "부자(父子)가 한 조정에 같이 봉사하면서 붉은 충성심으로 일관하였다. 슬프도다! 지난 일이여. 지금까지도 개탄스럽고 애석하구나." 라는 내용이 있었고, 또 "차마 임오년의 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아직까지도 혀를 찰 지경이다. 슬프도다, 탐라(耽羅)여. 무슨 마음으로 얘기를 할 것인가."라는 내용이 있었다.】 단지 아경(亞卿)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직껏 증시(贈諡)를 하지 않았다. 고 참판 이이장(李彛章)의 증시 또한 파격적인 일이었으니 만큼, 고 재신(宰臣)을 유독 함께 거론하지 않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하고, 이어 시장(諡狀)을 기다릴 것 없이 곧바로 시호를 의논하라고 명하였는데, 홍문관이, 이이장은 정경(正卿)을 증직한 후 증시를 하였고 광조의 품계는 재열(宰列)이라고 품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이 재신을 증직을 하는 것도 무방하나, 내 생각에는 ‘일찍이 문형(文衡)을 역임한 자는 오히려 아경으로써 증시(贈諡)를 한다.’고 하였으니, 이 전례를 적용하는 것이 남다른 일을 표창하는 점에 더욱 합치될 뿐더러, 또 선조의 전교가 금석(金石)처럼 믿을 만하니 구구한 격례 따위야 꼭 따질 필요는 없다고 여긴다."
하였다.
영종(英宗) 임오년 5월에 광조가 약방의 분제조(分提調)로서 망극한 변고를 만났을 때 궁궐의 문을 밀치고 들어가 울먹이면서 아뢰기를,
"신이 동궁을 모셔온 지가 14년이나 되었는데, 이제 죽을 바를 얻었습니다."
하니, 영종이 진노하여 잡아 끌어내라고 명하였다. 반교(頒敎)를 함에 이르러서도 유독 그 혼자서만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대신(臺臣) 김양심(金養心)과 임개(任瑎) 등이 번갈아가며 논핵을 하여 대정현(大靜縣)으로 귀양갔다가 곧이어 용서를 받았고, 무자년에 이르러 죽었다. 영종이 늘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임오년의 일은 신하된 분수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실은 뉘우치고 있고 한껏 그 재주를 쓰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하였다.
윤숙(尹塾)을 판돈녕부사로 발탁 등용하였다. 옛 정을 기억하고 환대하는 뜻에서 특별히 중비(中批)를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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