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갑신
상이 장차 원소(園所)에 거둥하려 했는데, 약원의 세 제조와 시임·원임 대신 및 각신(閣臣), 승지(承旨) 등이 누차 접견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도제조는 사임을 허락하고 부제조와 승지들을 모두 체차하였다.
왕대비(王大妃)가 약원에 언문(諺文) 교서를 내리기를,
"계원(啓園)하는 날 주상께서 너무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건강에 대단한 손상을 가져왔다. 그런데 미처 쾌유가 되지 않았는데도 그 뒤의 거둥을 대신과 약원이 일제히 청하여 도로 중지시키지 못한 까닭에, 병세가 악화되어 성후(聖候)가 아직도 평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또 거둥을 하려고 하니, 부득이하여 경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하니, 여러 대신들이 다시 접견을 청하자,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분부가 정원에 내렸으면 먼저 정서하여 입계한 뒤 하교를 기다려 반포하는 것이 격례인데도, 오늘은 외간에 반시를 할 때까지도 나는 오히려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약원의 제조 및 승지의 체차를 자전의 분부를 받아서 한 일로 여기는 듯한데, 이 어찌 말이나 되는가."
하니, 서명선이 아뢰기를,
"여러 승지들에게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분부가 내린 이상 오늘 전배(展拜)는 하교하여 중지시키고, 정원에 있었던 승지는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재협이 아뢰기를,
"비국 당상 중에 아비가 상직(相職)에 있으면 비국 당상의 체차를 허락하는 것은, 이미 선조(先朝) 때 정한 격식이 있습니다. 행 도승지 김재찬(金載瓚)이 비국 당상을 겸대하고 있으니, 청컨대 우선 감원하소서."
하니, 따랐다.
고 승지 임성(任珹)에게 정경(正卿)을 증직하고, 고 승지 정순검(鄭純儉)과 고 현령 김이곤(金履坤)을 품계에 따라 증직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김종수(金鍾秀)가 아뢰기를,
"임성(任珹) 등은 예전에 국가가 슬픔에 겨를이 없는 때에 각기 그 충성을 바쳤으니, 마땅히 기리어 증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 주청을 재가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증직하는 법은, 고하를 막론하고 만일 특별히 하교하여 초품(超品)하는 것이 아니라면, 단지 한 자급만을 증직하는 것이 정해진 법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당하관 이하의 경우에는 마음대로 올리고 내리어 품급에 구애하지 않고 있는데, 조정에서 옛 전장(典章)을 지키고 명기(名器)를 신중히 여기는 본뜻에 어긋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증직에 대해 옛 법을 거듭 밝힐 것이며, 또 유생(儒生)을 기려 증직하는 경우에는 단지 참하관(參下官)만을 증직하고, 그 중에 가장 드러난 자만을 6품직으로 증직하고, 그 중에 특히 탁월한 자는 품지한 뒤 비로소 대시(臺侍)를 증직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이조원(李祖源)을 이조 참의로, 임률(任嵂)을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9월 2일 을유
경모궁에 전배하였다. 예조가 처음에 전배 복색을 백포(白袍)로써 마련하였는데, 상이 묘(廟) 안에서 소복(素服)을 입는 것이 미안하고 또한 평상시의 복색을 그대로 쓸 수도 없다고 여겨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한 결과, 상은 흑원령포(黑圓領袍)를 입고 수행한 신하들과 입직한 궁사(宮司)는 모두 무양 흑단령(無揚黑團領)을 착용하였다.
9월 3일 병술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정범조(丁範祖)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9월 4일 정해
윤숙(尹塾)을 특별히 임명하여 병조 판서로 삼았다.
9월 5일 무자
원소 도감이 봉표(封標)한 곳의 진토(眞土)를 올렸다.
이에 앞서 도감 당상 김이소(金履素)와 정민시(鄭民始)가 지관(地官)을 거느리고 등대(登對)하여 아뢰기를,
"봉표한 곳의 부토(浮土)를 제거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더니, 꽤 깊숙이 파냈는데도 진토가 나오지 않았고 색깔 역시 곱지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표를 할 때 반드시 약간 왼쪽의 약간 아래쪽에 하고자 했던 것은 또한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이다. 부토를 죄다 걷어내면 어찌 진토를 얻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하고, 이어 금성위 박명원(朴明源) 등을 보내어 다시 지형을 살피게 하였는데, 이때 와서 봉표한 곳의 약간 왼쪽 약간 아래 되는 곳을 서너 촌(寸)쯤 파니 금색(金色)의 진토가 나왔다. 이에 도감이 계문을 하고 봉진하니, 상이 매우 기뻐하면서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여주고, 흙을 가지고 온 장교(將校)를 특별히 만호(萬戶)로 차임하도록 명하였다.
9월 7일 경인
문희묘(文禧廟)에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훈련 대장 이주국(李柱國)을 유배하였다. 부교(浮橋)의 배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원 도감의 제조 윤숙(尹塾)이 아뢰기를,
"모화관(慕華館)의 잔디[莎]를 떠내는 지역이 매우 좁아서 금번 원역(園役)에 필요한 수량대로 떠내기가 어렵습니다. 건원릉(健元陵)은 능 위에만 북녘의 잔디[北莎]를 썼고 병풍석(屛風石) 이하에는 다른 곳의 잔디를 전부 썼습니다. 지금 이 수원부(水原府)의 잔디를 모화관의 잔디에 비교해 볼 때 그다지 우열이 없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대성인(大聖人)이 세운 법은 마땅히 만세의 아름다운 모범이 되도록 해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재가하였다.
서유대(徐有大)를 훈련 대장으로, 이한풍(李漢豊)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수찬 최현중(崔顯重)이 소를 올려, 애책(哀冊)을 새로 지어서 궐문(闕文)을 보충하기를 청하니, 비답하여 이르기를,
"애책을 《실록(實錄)》 및 의궤(儀軌)에서 상고하였더니 영릉(英陵)·목릉(穆陵)·장릉(長陵)·영릉(寧陵)을 천봉(遷奉)할 때 모두 사용하지 않았고, 영릉(英陵)의 실록에도 애책이 없으니, 초상(初喪) 때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9월 8일 신묘
총호사 김익, 금성위 박명원에게 유시하였다.
"형국(形局)과 음양(陰陽)은 서로 안팎이 되므로 어느 한 쪽을 폐지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중에서 그 경중을 논한다면 형국은 체(體)이자 본(本)이고 음양은 용(用)이자 말(末)이다. 그러니 어찌 체를 제쳐두고 용을 구한다거나 본을 팽개치고 말을 잡을 수 있겠는가. 원소(園所)의 체세(體勢)가, 서린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형국을 이루고 있는데, 만약 대주(對珠)의 뜻을 잃지 않으면서 아울러 분금(分金)048) 의 법에 합치된다면 더없이 좋겠으나, 만약 분금에 구애되어 주안(珠案)을 그르치게 된다면, 천성(天性)의 형국을 어기고 빈주(賓主)의 정의를 잃는 것이니, 아무리 나경(羅經)049) 의 묘용(妙用)을 얻은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더구나 안산(案山)을 취하는 법은 해당 안산의 한 가운데에 꼭 구애받을 필요가 없고 좌우에 아울러 나아가 추이(推移)하여 쓰는 것이다. 그리고 매 방위에 각기 다섯 글자가 있으니 만약 구슬의 중앙이 분금의 길한 방향에 합치되지 않는다면 구슬 좌우 각의 길한 방향과 만나는 곳에 나아가 변화하여 써야 되며, 만약 구슬이 작아서 단지 한 글자와만 만나는데다 또 길한 방향에 합치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분금을 제쳐두는 한이 있어도 알맞은 안산을 잃어서는 안 된다.
대체로 분금을 하는 법은 지극히 미묘하여 요새 사람 중에는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드물다. 더구나 1백 20간지(干支)나 3백 60도수(度數) 역시 어찌 일일이 서로 합치시킬 수가 있겠는가. 진실로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 아득하여 알기 어려운 이치를 지나치게 믿으면서 분명하여 쉽게 알 수 있는 구슬을 잃을 수 있겠는가. 이는 불가불 십분 성의를 쏟고 십분 상세히 살펴야 될 점이다.
그리고 혈(穴)의 깊이로써 말하자면, 금번에 얻게 된 진토(眞土)는 하늘이 준 것으로, 색깔로 보나 품질로 보나 곧 비할 데 없는 지극히 좋은 품질이다. 찬탄을 하고자 하더라도 형용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또한 그 뻗어온 산맥이 그다지 넓지 않은데도 혈처(穴處)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풍성하게 맺어졌다가 혈처를 지나면 다시 오무라지므로, 단지 부토(浮土)만 걷어내면 혈의 형체가 저절로 드러나니, 이는 달걀이 노른자위를 내포하고 있는 상(象)이다. 단지 진토의 테두리 중심에 나아가 혈을 꽂기만 하면 상하와 좌우를 털끝만큼도 의심할 것이 없으나, 무엇보다도 이 천심(淺深)을 마땅하게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비록 7척(尺) 쯤으로 표준을 삼는 이미 정해진 규약이 있기는 하지만, 때에 임해 변화하여 요컨대 적중하도록 해야 한다. 만약에 7척까지 미처 파내지 않았는데 황색이 옅어지려는 기미가 있으면, 곧 파기를 중지해야 된다. 이는 대체로 누런 곳을 뚫고 지나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적중하게 되지 못할 경우에는, 차라리 얕게 해야 되지 깊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한삽 한삽 파들어갈 때마다 항시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한치 한치 파들어가야 되니, 절대로 아무렇게나 방심하고 파지 말라. 또 혹시 색깔과 품질이 갈수록 짙어지고 딱딱해지며 갈수록 딱딱해지고 누렇게 되거든, 비록 7척을 넘게 파들어가더라도 무방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안에 대해서는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벌써 강구해 둔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지금 금정(金井)050) 을 여는 날이 눈 앞에 다가왔기에 염려하는 생각에서 자다가 일어나 거듭 유시하는 것이다."
9월 9일 임진
전라도 관찰사 윤행원(尹行元)이 선정비(善政碑)를 철거하는 문제로 계문하니, 하교하기를,
"전전번의 기유년에 세운 무주(茂朱)·장수(長水)의 수령 정권(鄭權)의 비 또한 철거 대상 속에 들어있는데, 비국의 발사(跋辭)는 갑자년 《속전(續典)》이 간행된 이후로 한정을 하였다. 그런데 지금 60년 이전의 사람까지 싸잡아 혼동하여 아뢰었으니, 도백(道伯)의 일처리가 어찌 민망하지 않겠는가. 한두 가지 일에 거조가 이와 같으니, 이 어찌 조정의 수치가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9월 11일 갑오
천원(遷園)할 때 수행하는 궁인(宮人)을 없앴다.
9월 12일 을미
이문원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윤숙(尹塾)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9월 13일 병신
선원전에 작헌례를 행하였다.
수원부의 향교(鄕校)를 낙성하였다.
9월 14일 정유
유배되었던 죄인 이주국(李柱國)을 석방하였다.
9월 16일 기해
도감 낭청 이창회(李昌會)를 특별 승진시켜 돈령부 도정으로 삼았다. 어제 지문(御製誌文)을 새기는 작업을 감독한 공로 때문이었다.
9월 17일 경자
하교하였다.
"능에 거둥할 때 민력(民力)을 사용하는 곳에 대해 저치미(儲置米)를 회감(會減)해주는 일은, 선대왕께서 백성들을 마치 다친 사람 보듯이 불쌍히 살피시는 성덕(盛德)에서 나온 일이었다. 그런데 한때의 특별한 은전이 근래에는 상례가 되다시피하여 아래에서 거행함에 있어 매양 유명 무실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경기의 곡물이 바닥나고 경기의 백성이 원망하는 것은 진실로 시일이 조금 오래되다보니 간계(奸計)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매번 한 차례 거둥을 할 때마다 그 일 때문에 민망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선대의 성덕을 이어받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까 염려된다. 평년의 거둥에도 마음이 오히려 이와 같았거늘, 더구나 이번 원(園)의 역사(役事)야 오죽하겠는가.
원역(園役)에 드는 물품들을 대부분 궁중에서 가져가고 균역청(均役廳)의 재력(財力)을 옮겨다 쓴 것도 대가를 지급하도록 하는데, 더구나 곧장 그들로부터 경비로 나간 것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으며, 게다가 회감(會減)을 해주는 바가 들어간 비용만 못한 데다가, 농사가 약간 풍년이 들어 소민들의 입장에서 입는 은혜가 곡물이 돈만 못한 상황에서야 오죽하겠는가. 이런저런 이유로 유사에게 묻지는 않고 이미 마음속에 결정을 해둔 바가 있으니, 금번의 원역(園役) 및 봉련(奉轝)·전배(展拜) 거둥에는, 민읍(民邑)에서 나온 비용에 대해서는 아울러 회감하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기영(畿營)에서 다른 전화(錢貨)를 옮겨 즉시 제값을 갚도록 하라. 그리하여 안으로는 경비가 손실됨이 없고 밖으로는 민읍에 유익하게 하라. 이렇게 한다면 나의 성의를 다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원행정례(園幸定例)》를 편찬하여 올리도록 명하고, 하교하였다.
"신원(新園)이 서울과의 거리가 백 리는 족히 넘으므로, 매년의 전성(展省)을 전처럼 하기 어려운 형세이다. 비록 2년에 한 번씩 거둥한다 치더라도 구애되는 점은 여전하여, 서울은 각사(各司)·각영(各營)의 폐해가 있고 외방에는 민읍(民邑)의 폐해가 있으며, 이밖에 허다한 경비의 원식(原式)·근규(近規)가 어느 것 하나 폐해를 끼치는 단서 아닌 게 없다. 폐해를 끼치는 정도가 이와 같지만 정은 억제하기가 지극히 어려우니, 반드시 별달리 강구하여 특별 규례를 만드는 일이 있어야겠다. 그런 뒤라야 정을 펴고 폐해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니, 오늘날 묘당의 유사로 있는 신하들이 만약 나의 마음을 알고 있다면, 어찌 별도로 보답하는 방책을 생각하여 편리하고 좋은 도리를 찾지 아니하겠는가.
내년 봄의 전성(展省) 때로부터 선박은 경강(京江)에서 마련하고 교량은 선혜청에서 쓰지 말도록 할 것이며, 기용(器用)이나 양초(糧草)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저치미(儲置米)로 회감(會減)하지 말라. 수행하는 백관(百官)·군병(軍兵)은 각기 정수를 두고 고을이 받는 노자에 각기 일정한 한계를 두며 군(軍)이 숨을 돌릴 수 있도록 갖가지로 강구하여 매우 좋게 마련함으로써, 경외(京外)에서 근거하여 행하는 법식이 되게 하라. 그러면 이로부터 내용과 형식에 부족함이 없고 군민(軍民)들이 영구토록 힘을 입을 것이며, 내가 편안한 마음으로 전성을 할 수 있을 것이니, 이 어찌 평범한 정령(政令)이겠는가. 그렇다면 마땅히 그 일을 중히 여긴다는 뜻을 보여, 행하기 알맞은 조목들을 하나의 책으로 모아 완성하여 《원행정례(園幸定例)》라 이름을 붙이라. 대신이 총괄하고 당상은 비국 당상 가운데서 임명하여, 비국에 모여 마련해서 들이라."
9월 18일 신축
영우원에 전배하였다. 재실에 나아가 대신과 제신들을 소견하였다. 좌의정 이재협이 아뢰기를,
"계원(啓園)한 후 한 차례 전배하시자 성후(聖候)가 대번에 더치셨는데, 느닷없이 명령을 내려 의위(儀衛)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기에 이르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오늘의 거둥은 실로 성인의 지나친 거조라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달에 들어서는 이제야 비로소 전성(展省)을 하였으니, 이 어찌 정리상 참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어제 《원행정례(園幸定例)》에 관한 일로 주사(籌司)에 하교를 하였다만, 거둥의 큰 폐해는, 하나는 외방 고을의 공판(供辦)이고, 하나는 군병(軍兵)을 마련하는 것이고, 하나는 나루를 건너가는 것이다.
기내(畿內)의 고을들이 모두 쇠잔한 실정인데 원근에서 운반하느라고 민읍이 모두 시달리게 된다. 비록 저치미(儲置米)를 회감(會減)해주는 예가 있기는 해도 유명 무실할 따름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연로 양읍(兩邑)의 민력이 아무리 넉넉치 못하다 하더라도, 만약 다른 방식으로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잘못된 규례를 고친다면, 과천(果川)·수원(水原)이 충분히 감당할 것이다.
도감(都監) 이외 양영(兩營)이 돌아가면서 어가를 수행하는 것은, 비록 정해진 규식이 있기는 하나 또한 폐단이 많으니, 이제 만약 군제(軍制)를 헤아려 정밀하고 간략히 뽑아, 도감의 선상(先廂)은 그 초수(哨數)를 줄이고, 후상(後廂) 군병은 양영(兩營)의 군총(軍摠) 중에서 상황에 따라 서로 바꾸어 연읍(沿邑)에 이송케함으로써 평상시에 단속하는 군대로 만들되, 혹은 경기 관찰사로 하여금 모두 거느리게 하기도 하고 혹은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하여금 거느리도록 한다면, 어가를 호위하는 방책이 양영과 향군(鄕軍)만 못할 것이 없을 듯하다. 더구나 전에 온천에 거둥할 때 호서 병사(湖西兵使)가 후상 대장이 되었으니, 경기에서 이에 비추어 거행하는 것도 안 될 게 없을 것이다.
선창을 부교(浮橋)로 대신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만전을 보장할 수 있다. 선창은 소용되는 배가 많게는 1천 척 가까이 되는데 부교의 경우는 백 척도 되지 않으니, 이것만 하더라도 폐해를 줄이는 셈인데, 더구나 또 완고하고 견실하기가 육지나 다름없으니, 영구히 준행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생각건대, 이 이후로 부교에 드는 경비는 경강(京江)에 전적으로 떠맡기되, 배의 경우는 별도로 작대(作隊)하는 제도를 수립하여 그들로 하여금 시기에 맞춰 역(役)에 응하도록 하고, 조정에서 줄 수 있는 혜택을 깊이 강구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익을 입고 힘을 바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니 내 생각에는, 외방 기읍(畿邑)의 세곡(稅穀)을 경강의 제선(諸船)에 나눠주어 마치 도감선(都監船)에 운세(運稅)를 원정(元定)하듯이 한다면, 강가의 백성들이 억울하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을 듯하고, 뱃사람들 역시 기꺼이 나설 듯하다. 이밖에 소소한 폐단에 대해서는, 밖으로는 기영(畿營)이, 안으로는 각사(各司)가 일체 절약하고 간략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오랫동안 시행하면서 폐단을 없애고자 하면 거의 될 수 있을 듯하다. 일찍이 듣건대, 세조조(世祖朝) 때 어가를 수행하는 신하들은 각자 밥을 싸가지고 가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좌승지만 혼자서 밥을 지어 먹자 잡아다 곤장을 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의 사대부들은 일찍부터 고량 진미에 물들어서 비록 한결같이 밥을 싸가는 법을 따를 수는 없겠으나, 정말로 만약 절약하는 데에 마음을 둔다면 어찌 이익되는 바가 없겠는가. 단지 음식의 경비 뿐만 아니라, 마부들에 대해서까지도 마땅히 일정한 제한을 두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9월 19일 임인
대신과 각신(閣臣)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김익이 아뢰기를,
"봉표(封標)의 일 체모가 이 얼마나 엄중한 것입니까. 그런데 전 승지 김이성(金履成)은 진토(眞土)를 찾아낸다는 핑계로 품지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표외(標外)의 이쪽저쪽을 맘대로 파보았습니다. 국가 체면에 관계된 바인 만큼 심상하게 문책해서는 안 되니, 견삭(譴削)을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김익이 또 아뢰기를,
"신해년의 의궤(儀軌) 중에는, 길유궁(吉帷宮)은 배설을 하지 않았고, 재궁(梓宮)이 산릉(山陵)에 올라갈 때 지방(紙榜)을 정자각 내 동쪽에 이안(移安)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이 예를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9월 23일 병오
경상도 관찰사 홍억(洪檍)을 파직시키고, 이조원(李祖源)으로 대임을 삼았다. 하교하기를,
"호남과 영남의 관문을 막아 솜을 싣고 다니는 무리들을 넘나들 수 없도록 하여, 충주(忠州) 이상으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모두 옷이 없어 추위에 몸을 가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영백(嶺伯)의 일은 극히 망령된 짓이다. 이웃 나라에 대해서도 오히려 이러한 수단은 사용하지 않는데, 더군다나 번신(藩臣)이 된 몸으로 서울의 목면이 품귀해질 것을 생각지 않고서 도리어 유통을 차단하는 버릇을 본받다니 어디 될 일인가."
하고, 그 직임을 파척하였다.
기병과 보병의 가포(價布)를 거둬들일 차사원(差使員)이 숙배(肅拜)를 하니, 상이 이르기를,
"쓸데없는 폐해이다. 이제부터는 없애도록 하라."
하고, 이어 제도(諸道) 차사원의 규식을 바로잡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삼영(三營)의 군향보(軍餉保), 사옹원(司饔院)의 사기보(沙器保), 장포(匠布), 칙행(勅行)의 파발마를 보충하거나 거둥시의 선박을 위해 부과하는 대동(大同) 면목(綿木)을 거두어들이는 차사원 등을 모두 없앴다.
9월 26일 기유
강화부(江華府) 유수(留守) 윤승렬(尹承烈)이 섬에 안치된 죄인 이인(李䄄)이 내사(內司) 별제(別提)와 함께 나루를 건너 빠져 나갔는데 즉시 발각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견책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무슨 말을 그리하는가."
하였다.
왕대비가 매일 올리는 탕제(湯劑)를 도로 내리고 언서(諺書)로 여러 대신들에게 하교하기를,
"미망인이 오늘날까지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는 종묘 사직과 성궁(聖躬)을 위해서이다. 아낙네가 어찌 조정에 대해 간섭을 하고자 하겠는가. 그러나 병오년 겨울의 역변(逆變) 때 나라의 형세가 위급함을 목격하고서 어쩔 수 없이 조정에 언문 교서를 내렸었다. 그러나 국법을 적용한 자는 오직 역적 구선복(具善復) 한 사람뿐이었다. 궁녀 연애(連愛)가 포도청에서 한 공초(供招)에서, 독약을 마시고 죽은 이담(李湛)051) 과 담의 집에 왕래한 수상한 사람 뿐만 아니라 그해 5월과 9월에 있었던 일 또한 그 자초 지종을 밝혀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주상이 깊은 우애심으로 기어코 보존해주고자 하여 그 일을 덮어두고 따지지 않는 바람에, 연애가 지레 죽기에 이르렀다. 이때 나는 드러내 말하고자 하였으나 주상께서 애써 만류한 까닭에 그만두고 말았는데, 필경에는 왕법(王法)이 엄하지 못하여 이인(李䄄)052) 은 그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또 서울에 올라와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의 집에 있도록 놔두고 있다. 경들은 이 나라의 신하이고 또한 선대왕을 모신 사람도 있을 것인데, 진실로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어찌 주상으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도록 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모진 목숨 때문에 이런 일을 차마 보게 되었으니, 종묘 사직의 죄인이고 선대왕의 죄인인 것이다. 이 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역적 윤승렬(尹承烈)의 목을 베지 않고 죄인 인(䄄)을 당장 도로 유배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탕제를 들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 승지들과 각신(閣臣)·옥당(玉堂)의 시임·원임 대신으로 2품 이상의 신하들이 접견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요즈음 나의 심정이 비로소 편안하고 어제는 잠도 편하게 잘 잤다. 이게 어찌 다만 질병이 몸에서 떠난 때문만이겠는가. 자교(慈敎)가 비록 엄중한 것이기는 하나, 지금에 와서 감히 받들 수 없다는 점을, 경들 또한 생각하였을 것이다. 내가 이번 일을 하고 나서 나름대로 마음속에 잘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 경들이 아무리 이래도 어찌 조금이라도 들어줄 리가 있겠는가."
하고, 모두에게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영중추부사 김치인(金致仁)이 소를 올려, 역적 이인(李䄄)을 도로 해도에 수금하여 화의 기미가 번져나가게 하지 말 것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규장각 제학 김종수(金鍾秀)가 상소하기를,
"인(䄄)으로 하여금 천지 사이에 숨을 쉬고 있게 한 것은 신들의 죄입니다. 인륜이 지극하신 성인께서 이때를 당하여 이러한 조처를 하셨으니, 신들이 어찌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 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천지와 조종(祖宗)이 다함께 죽여야 되는 죄인이어서 전하께서 사사로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어쩌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 강화를 지키는 신하는 비록 전교가 정원으로부터 내렸더라도 죽으면 죽었지 감히 받들지 못할 것이니 도리상 그러한 것인데, 하물며 몰래 데려온 내수사 사람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또한 바라건대 그의 죄를 무겁게 정하시어 신하로서의 분의(分義)를 세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금일의 일은 전부터 짐작을 하고 있었다. 말미에 아뢴 강화 유수의 죄를 청하는 일은 더욱 부당한 일이다."
하였다.
왕대비가 또 다시 언서(諺書)로 잇따라 엄한 분부를 내렸는데, 교서의 말미에 조정 신하들이 두 마음을 품고서 나라의 역적을 토죄하지 않는다고 호되게 나무랬다. 이에 대신 등이 황송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궁문을 밀치고 들어가려 하였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에 경재(卿宰), 삼사(三司)를 거느린 채 선화문(宣化門) 밖에서 관을 벗고 석고 대죄하니, 하교하기를,
"궁문을 밀치고 들어오려 하여 반나절이나 궁문을 닫아놓는 바람에 명령을 통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는가. 청대한 대신 이하를 모두 삭직시키고 속히 물러가도록 하라. 삼사가 아직껏 물러가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기어코 문외 출송을 한 뒤라야 비로소 물러가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문외 출송하라."
하였다.
왕대비가 이인(李䄄)의 집에 중사(中使)를 보내 배소(配所)로 압송토록 하고, 여러 대신에게 하교하여 대신들로 하여금 먼저 거행을 하고 난 후 대조(大朝)에다 마음대로 거행한 죄를 청하도록 하였는데, 중관(中官)이 자전(慈殿)의 하교를 받들어 대전(大殿)에게 품달하지 않은 채 곧장 대신에게 전하였다. 그리하여 영의정 김익 등이 자전의 뜻을 받들어 포도 대장과 금부 당상으로 하여금 인을 배소에 압송하게 하였다. 상이 그 일을 듣고 하교하기를,
"어찌 이와 같은 변괴가 있단 말인가. 대내(大內)에서 당장 중사(中使)를 보내어 표신(標信)을 지니고 또 상방검(尙方劒)을 내리어 그로 하여금 가서 호위하게 하되 누구를 막론하고 만약 손을 대는 자가 있거든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하라. 대신 역시 사람이거늘, 어찌 국법을 무서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고, 이어 가마를 타고서 협양문(協陽門)을 나서니, 대신 이하가 모두 관을 벗은 채 허겁지겁 궐문 안팎에 물러나 부복하였다. 상이 가마를 재촉하여 돈화문(敦化門)을 나서면서 위사(衛士)에게 신칙하여 신하들이 위내(衛內)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홍마목(紅馬木) 앞에 이르렀을 때 왕대비가 중사를 보내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수레를 움직여 어디를 가는 것인가? 바야흐로 뜰 가운데 선 채 환궁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였다. 이때 김익 등이 신하들과 더불어 관을 벗은 채 급히 달려가 길을 막고 울면서 간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오늘 심정으로서는 어찌 지나친 거조임을 돌아볼 겨를이 있겠는가. 그로 하여금 성 안에 머물러 있게 하는 일이 불가할 게 뭐 있길래 경들이 이러는가. 나로 하여금 천고에 윤리를 손상하는 일을 저지르도록 할 셈인가. 내 곧장 그가 간 데까지 따라가겠다. 비록 강화라도 그를 따라갈 것이다."
하였다. 이에 영중추부사 정존겸(鄭存謙)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어찌 전하의 지극하고 간절한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종묘 사직의 위급함이 눈앞에 닥쳐있고, 자교(慈敎)가 엄정하여 신들을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꾸짖으면서 탕제까지 드시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신들이 어찌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전하 또한 어찌 우러러 따르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또 삼가 듣건대, 자전께서 지금 선 채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데, 전하께서는 유독 자전께서 우려하고 계시는 뜻은 생각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판국에 이르러서는 비록 자교가 있었다 하더라도 실로 받들어 따를 수 없다."
하고, 다시 가마를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돈령부 앞길까지 갔을 때, 대신과 제신들이 늘어서서 가마를 부여잡은 채 아뢰기를,
"전하로 하여금 오늘 이 지나친 거조가 있게 한 것은, 모두 신들이 불충하고 형편없는 탓입니다. 전하께서 기어코 가시려거든 먼저 신들을 죽이고 나서 앞으로 나아가소서. 신들은 비록 만번 죽임을 당하더라도 죽기 전에는 결단코 수레를 돌려야겠습니다."
하고,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신들이 아무리 형편없다 하더라도 그 직임을 돌아보면 대신입니다. 만약 가마 앞에 늘어서 엎드리게 되면, 전하께서는 필시 가마를 타신 채 짓밟고 지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그를 보호하지 못하면 장차 어떤 사람이 되겠으며, 또한 무슨 낯으로 신민을 대하겠는가."
하였다. 쟁론하는 동안에 시각이 점점 지체되고 마음이 갈수록 초조하였는데 신하들이 그래도 물러가지 않으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지나갈 때 경들이 만약 수레를 부여잡고 떨어지지 않을 경우, 나는 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가겠으니, 경들에게 길을 빌렸으면 한다. 경들은 제발 갈라서기 바란다."
하였다. 그러고는 마치 가마를 땅바닥에 내릴 듯이 하니, 대신들이 일제히 나아가 가마를 부여잡고 있을 때 자전이 다시 언문 교서를 내리기를,
"이 일은 국가와 종사를 위한 것인데도 주상께서 이러하시니, 나는 사제로 물러가 살겠다."
하였다. 이에 대신 등이 언문 교서를 아뢰니, 상이 비로소 가마를 돌렸다. 선화문 안에 이르렀을 때 신하들이 따라 들어가려 하였으나, 그대로 문을 닫아 걸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지의금부사 김상집(金尙集), 동의금부사 이병정(李秉鼎)·남현로(南玄老)가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연이어 자성(慈聖)의 하교를 받고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일제히 이인(李䄄)이 머물고 있는 곳에 나아가, 도사(都事)를 정해 배소에 압송하려던 무렵에 내관(內官)이 표신(標信)을 받들고 그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미 내보낸 역적의 우두머리를 길에서 못가도록 붙잡다니, 아, 이게 어인 일입니까. 이런 판국에서는 신들에게 죽음이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에 감히 왕명이라도 받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전례에 의하여, 이에 떠나 보내기는 하였습니다만, 명을 어긴 죄는 만번 죽어도 속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감히 자교(慈敎)의 위세에 빙자하는가. 비록 자교가 있었더라도 보고하지 않은 채 거행하였으니 그 죄 지극히 무겁다. 더구나 표신을 받아 가지고 갔던 중사(中使)를 이른바 금부 당상이란 자가 직접 손으로 혁대와 허리를 끌어당겼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변괴인가. 당해 당상들에게 모두 유배의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자교의 체모가 비록 지극히 중하나 일의 대소나 완급을 막론하고 반드시 등서하여 품지(稟旨)한 연후에 거행을 하는 것이 곧 금석(金石)처럼 바꿀 수 없는 법이다. 금부 당상의 일은 이미 더없이 가증스런 일인데, 포도 대장까지도 모두 품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처리를 해버리다니, 더욱 변괴라고 하겠다. 두 포도 대장을 모두 찬배하고 이창운(李昌運)과 신대겸(申大謙)으로 대신하라."
하였다. 정원이 처분 전교를 돌려보내니, 하교하기를,
"정해진 격식대로 내렸거늘 하는 짓이 더없이 방자하구나. 승지 이조승(李祖承)·이서구(李書九)·홍인호(洪仁浩)를 모두 찬배하라."
하였다. 승지 조윤대(曺允大)가 즉시 거행하지 않자, 삭직하도록 명하였고, 정대용(鄭大容)이 승지로서 들어가니, 하교하기를,
"저라고 각신(閣臣)이 아니란 말인가. 어찌 감히 승지로 자처하는가."
하고,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시임·원임 대신이 차자를 올려, 역적 이인(李䄄)을 압송한 일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며 죄를 청하고, 이어 심유(沁留)053) 가 방수(防守)를 삼가지 않았음을 논하여 빨리 형전(刑典)을 바로잡고 중군(中軍)과 경력(經歷)에 대해서도 상당하는 법을 아울러 시행하라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자전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감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받들게 되었고, 길가에서 허둥지둥 의장을 돌려 세우게 됨을 면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처음의 심정을 돌아보건대, 차라리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다. 경들의 어제 거조는 결코 신자로서 감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경들이 비록 자교 때문이었다고 둘러대나 조정은 체모가 있는데 거조를 어찌 그처럼 할 수 있는가. 대신은 나라를 몸받아 안위(安危)를 책임지고 있는 자들인데 일을 당해 처변(處變)함에 있어 이와 같이 그릇되게 하였으니,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윤승렬(尹承烈)에 대한 일은 자교가 비록 이와 같기는 하나, 내 마땅히 만회할 방도를 생각할 것이다. 경들이 아뢴 바는 또한 불성실한 태도에 가깝다."
하였다.
수어사 김종수(金鍾秀)에게 명하여 훈련 도감·어영청·금위영·총융청 4영(營)과 좌우 양 포도청을 겸찰하도록 하였다. 이때 여러 장신(將臣)들이 모두 삭직당했기 때문이다.
9월 27일 경술
규장각 제학 김종수(金鍾秀)가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듣건대, 어제 저녁에 대신이 자교를 받들어 거행을 한 뒤로 상의 마음이 아직 풀어지지 않고 있다 하는데, 어가가 궐문을 나간 일로부터 제신에 대한 처분이나 감히 들을 수 없는 하교에 이르기까지 지나친 거조가 거듭되어 듣고 보는 이들이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이 무슨 일입니까.
우리 자성(慈聖)께서 종묘 사직을 위하고 성상을 위하는 지극한 뜻으로 볼 때, 언문 교서는 실로 권도에 통달한 성덕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사사로운 정을 펴지 못한 점과 은애를 시종 여일하게 하지 못하는 점이 있더라도, 이는 그 도리와 사세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자전의 뜻을 받든 후에라야 성인의 효성이 이에 지극해지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평온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시어 전후로 내린 엄한 분부를 모두 환수하도록 하소서.
또 삼가 듣건대, 약원이 올린 탕제(湯劑)를 자성께서 윤승렬을 법대로 처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잇따라 도로 내리셨다고 합니다. 어서 빨리 결단을 내리시어 탕제를 드시도록 권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신이 밤중에 느닷없이 네 영문(營門)을 겸찰하라는 어명을 받았는데, 겸찰하는 일이 일시의 권섭(權攝)이라고는 하지만 하나의 몸으로써 각영을 모두 관리하는 일은 비록 잠깐 동안이라 하더라도 사람으로서 해내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신처럼 늙고 병든 사람이야 어련하겠습니까. 빨리 성명을 거두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거둥이 겨우 궁문을 나섰다가 즉시 돌아섬을 면치 못했는데, 거조가 엉망이어서 듣고 보는 이들이 놀라고 의혹하였다. 이 일은 우선 차치하더라도, 이번에 어렵사리 빼내오게 된 고심과 본의를 이룰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밤새도록 앉아 잠을 못 이룬 채 거의 뜬눈으로 날을 새우다시피 하였는데, 경은 어찌 도리어 잘못된 거조라고 하는가. 윤승렬에 대한 일은 자전의 하교가 아무리 이와 같더라도 결코 받들기 어려운 일이다. 탕제를 드시게 하는 것은 내가 성의를 쌓아 나가는 데 달려 있는 일이니, 경이 번거롭게 청할 필요가 없다. 덧붙여 아뢴 바, 네 영문과 양포도청을 겸찰하는 일은 사세에 구애되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성원(李性源), 좌의정 이재협(李在協)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윤승렬을 법대로 죄주고 자전께 탕제를 드시도록 권할 것을 청하였는데, 아무런 비답이 없었다.
전 영의정 김익과 전 판중추부사 서명선을 부처(付處)하였다. 하교하기를,
"조정의 일은 수상(首相)이 주관하고 일제히 청하는 일은 반수(班首)가 주도하니, 어제의 거조는 첫째도 수상과 반수의 죄이고 둘째도 수상과 반수의 죄이다. 그러나 대신과 경재(卿宰)를 한꺼번에 견삭(譴削)하는 일은 행해서는 안 될 일일 뿐만 아니라, 거조에 도리어 성실이 부족하게 된다. 금일의 도감(都監)은 더없이 중대한 일을 거행해야 하는데 서사관(書寫官) 이하가 대부분 대신과 중신이니, 이로 보나 저로 보나 마땅히 구별하는 처분이 있어야 하겠다. 대신과 제신의 견삭 전교는 모두 시행하지 말고, 전 영의정 김익과 전 판부사 서명선에게 속히 중도 부처의 형전을 시행하여 임금의 강령이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복원, 영의정 이재협, 판중추부사 이성원, 좌의정 채제공이 소를 올려, 성토하는 의리를 바로잡을 것에 대하여 진달하고, 다시 포도청의 문안을 살펴 5월과 9월에 있었던 일의 자초 지종을 끝까지 조사할 것을 이어 청하니, 비답하기를,
"자전께서 탕제를 드시도록 권하는 것은 어찌 경들의 말을 기다릴 게 있겠는가. 이밖에 모든 내용이 어느 것 하나 나를 곤궁에 빠뜨리고 나를 속박하는 설이 아닌 게 없다. 내가 경들에게 무얼 저버렸기에 경들이 나를 이와 같이 대하는 것인가. 하루 동안 차자나 상소에 비답하지 않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이므로, 부득이 양본(兩本)을 아울러 찾아내어 이에 서너 줄의 비답을 내리는 것이니, 경들은 이 점을 잘 알았으면 한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정존겸(鄭存謙)과 영돈녕 홍낙성(洪樂性)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이인(李䄄)과 윤승렬(尹承烈)을 토죄하고, 이어 말하기를,
"어제 일제히 청원한 일 때문에 반수(班首)를 중도 부처하라는 어명이 있었는데, 진실로 반수를 따지자면 신 존겸(存謙)이 실로 반수가 되고, 신 낙성 역시 이미 반열의 끝에 나아가 참여했으니, 함께 죄를 받고자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동료 재상에게 내린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다."
하였다.
규장각 제학 김종수를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의 일은 말하자면 얘기가 길다. 노력을 많이 들여 빼왔는데 결국에는 다시 배소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나의 심회가 어떻겠는가. 자전께서 경에게 하교를 하여 국사를 맡기려고 하셨으므로 내가 진실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만류를 하였다. 그러나 대신 및 약원에 언문 교서를 내리신 일에 있어서는 나 또한 온갖 방법으로 만류하였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다. 탕제를 아직까지도 드시지 않고 있으니, 가슴이 타고 경황이 없음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비록 지난 날의 역사 기록으로 보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의 일일지라도 또한 죄를 용서받지 못했는데, 더구나 그는 역적의 우두머리였음이 남김없이 모두 드러난 자입니다. 성상의 마음이 진정 지극한 정리와 사랑에서 우러나와 이런 비상한 거조가 있었으니, 진실로 받들어 따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신이 비록 보잘것 없으나 어찌 성대한 뜻을 받들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만 지엄한 국법을 생각건대 비록 성상의 지극하신 인으로써도 사사로운 은정을 펴느라고 공공의 법을 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위대한 순(舜)임금이 상(象)에 대해서와 주공(周公)의 관숙(管叔)·채숙(蔡叔)에 대한 일에서 성인이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역적 이인(李䄄)의 죄범(罪犯)은 역대에 유례가 없는 것입니다. 윤승렬(尹承烈)에 대한 죄의 처분 역시 잠시도 늦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믿고 의지하는 바는 경 한 사람뿐이다. 어제 여러 대신들이 합문에 지켜 서서 접견을 청한 것은, 조금도 내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부득불 문을 닫아 걸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어제와 오늘 심신이 어지러웠으므로 도로 유배하게 된 곡절을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하겠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대신이 자전의 하교를 받든 후에 금부 당상과 포도 대장으로 하여금 배소로 돌려보내게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제 거둥했을 때 걸어가서라도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하면 보는 이들이 놀랄 것 같아서 그대로 돌아왔다. 만일 나로 하여금 잠깐 동안이나마 얼굴이라도 보게 하였다면, 내 마음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텐데 끝내 그렇게 할 수가 없었으니,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
하였다.
복상(卜相)하였다. 【구복(舊卜)을 위에 보이자 상이 김종수(金鍾秀)를 추가하였다.】 김종수(金鍾秀)를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고, 이재협(李在協)을 영의정에 승진시키고, 채제공(蔡濟恭)을 좌의정에 승진시켰다. 또 채제공을 총호사로, 김이소(金履素)를 이조 판서로, 이재간(李在簡)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우의정 김종수에게 유시하기를,
"경이 인정을 받은 것은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였다. 내가 믿고 환대하는 것이 어찌 대배(大拜) 전후에 차이가 있겠는가. 다만 지금 대례(大禮)를 눈앞에 두고 있어 정석(鼎席)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되는데, 이러한 때의 선발은 더욱 일반적 격식을 초월하는 것이니 만큼 경은 모쪼록 으레 사양하지 말고 즉시 나와 일을 봄으로써 탕평(蕩平)에 애쓰는 나의 마음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교리 서배수(徐配修) 등이 연명 차자를 올려, 역적 이인을 잡아다가 엄히 국문할 것과 윤승렬을 법대로 처리할 것을 청하고, 이어 아뢰기를,
"어제 대신의 거조는 진실로 지체시킨 죄 정도일 뿐인데 도리어 조정에서 호소한 일을 가지고 부처(付處)하라는 명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어찌하여 죄주어야 할 사항으로 죄주지 않고 죄주지 않아야 할 사항으로 죄주시는 것입니까. 처분의 전도됨이 이렇게까지 심할 수 있겠습니까. 금부 당상과 포도 대장의 어제 조처는 진실로 충의에 북받친 뜻에서 나와 각기 그 직무를 수행한 것이었는데, 잇따라 유배를 당했습니다. 원컨대 빨리 성명을 거두시고, 그밖에 적절하지 못했던 처분 역시 모두 환수하소서."
하고, 말미에서는 정원이 징토(懲討)를 가로막은 일을 논핵하였다. 이에 비답하기를,
"지금 같은 시기에 이처럼 소란스레 굴다니, 이 무슨 의도인가. 자전께서 탕제를 드시도록 하는 일은 내가 성의를 쌓아 감동시키기에 달린 것이다. 어찌 너희들의 말이 필요하겠는가. 강화 유수에 대한 일은 이미 분부를 내렸는데 어찌 감히 번거롭게 아뢰는가. 대신을 부처한 일을 감히 처분이 전도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자교(慈敎)가 아무리 비상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대신이라는 자가 아무렇게나 대응해도 될 일로 보아넘겨 명색은 배합(排閤)을 한다고 하면서 애당초 나와서 면전에 아뢰지도 않다니, 이게 과연 말이 되는 얘기인가. 환수하라는 청은 극히 무엄한 짓이다.
금부 당상과 포도 대장에 관한 일은 이것만 하더라도 오히려 말감(末勘)한 데서 또 말감한 것이다. 단지 일이 자교(慈敎)에 관계된 까닭에 처분이 이 정도에서 그친 것이다. 그렇다면 ‘환수’라는 두 자를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말미에 아뢴 바 적절하지 못한 처분을 환수하라고 운운한 것은 과연 무슨 일을 가리킨 것인가. 매우 가지고 노는 것이다. 올린 차자가 후원(喉院)에서 저지당했다는 일에 있어서는, 상신(相臣)의 차자에 대해서도 오히려 비답을 내리지 않고 녹사(錄事)로 하여금 도로 전해주라고 전유(傳諭)하였으니, 후원이 그 차자를 어떻게 곤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너희들이 성내는 말로 저지했다는 죄목을 어거지로 덮어씌우니, 너희들의 거조야말로 모두 해괴하다."
하였다. 배수 등이 다시 연명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여러 대신들이 진실로 나라를 한 몸으로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당연히 머리를 부딪쳐 피로 낯을 씻어가면서라도 이 역적과 하루라도 함께 살지 않고자 했어야 됩니다. 그런데 잠깐 접견을 청하고 한 번 대궐문을 두드리는 정도에 그쳤고, 관을 벗었다가 다시 쓰고 또 관을 벗고 물러갔습니다. 거조가 전혀 귀착이 없었을 뿐더러 그에 따라 징토(懲討)하는 일이 자연 늦어지게 되었으니, 만약 이런 이유로써 그들을 죄주는 것이라면 신들이 진실로 받들어 따르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금번에는 죄명이 사실과 일체 상반되니, 형정의 도치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내 오늘날 대신들에 대해 애석한 마음이 너희들 못지 않다. 공박을 하는 것은 똑같지만 공박 내용은 크게 상반되니, 이런 따위의 차자에 어찌 으레 비답을 내리겠는가."
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의 관례에 여사 대장(轝士大將)은 모두 일찍이 장수의 직임을 거친 자 가운데서 으레 임명하였다. 그런데 정축년 이후로부터 잘못된 전례가 생겨 아장(亞將)이 아니면 의망을 하지 않고 있다. 전후 의궤(儀軌)에 실린 조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앞으로는 대장과 아장을 역임한 자를 통틀어 의망하여 들이라."
하고, 이주국(李柱國)을 대장으로 삼았다.
9월 28일 신해
우의정 김종수가 소를 올려, 자전께서 탕제를 드시도록 권할 것과 윤승렬의 죄를 정해 법대로 처리하기를 청하고, 이어 아뢰기를,
"신이 우직하고 독선적이라 원수가 많고 친한 이가 적은 것은 성명께서 통촉하고 계시는 바입니다. 신의 분수는 종신토록 빈곤하게 살아야 제격인데, 성상의 유례가 드문 대우를 받아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고 빠른 속도로 숭현(崇顯)의 대신 자리에 올랐습니다만, 오히려 누차 만 번 죽임을 당할 죄에 빠졌습니다. 금번에 새로이 내리신 이 명은 우리 성상께서 시종 온전히 보호하신 본래의 뜻과는 크게 서로 어긋나니, 이는 진실로 신의 명이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법에, 부모의 나이가 90인 자에게는 중자(衆子)까지도 모두 돌아가 봉양하도록 허락하고 있는데, 지금 신의 어미의 나이는 중자가 모두 돌아가 봉양할 때가 지난 지 벌써 오래되었으며, 신에게는 또 형제도 없고 조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돌아가 봉양할 수 있게 해달라는 청을 아직껏 허락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만 하더라도 이미 효도로 다스리는 세상의 죄인이 됨을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또 백료(百僚)의 으뜸이 되는 자리에 나아가 앉아 온종일 조정에 있으면서 모자가 서로 돌보지 못하게 하신다면 전하께서는 어떻게 나라 사람들에게 명령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어질고 덕있는 자로 다시 임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을 선발한 것은 또한 늦었다고 할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같은 때를 만나서는 어찌 상례적으로 출사를 권할 수 있겠는가. 자전께서 탕제를 드시기로 허락하는 일은 내가 성의를 힘써 쌓아 우러러 마음을 돌리시게 하는 데에 달렸다. 자교(慈敎)의 체모가 더없이 중한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따라서는 부당한데도 따르는 것은 또한 도리상으로 당연한 일이 아닌 듯하다. 내가 어찌 일개 윤승렬을 아깝게 여기어 자전의 마음에 걱정과 염려를 끼치는 것이겠는가. 또한 지금 대례(大禮)를 목전에 두고 의논해야 될 일이 쌓여 있는 까닭에 성의를 극진히 다하는 데에 전념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그러니 경처럼 규석(揆席)에 있는 자로서는, 지금이 어찌 한가하게 사정을 말할 때이겠는가. 경은 모쪼록 즉시 일어나 일을 보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이성원(李性源), 영의정 이재협(李在協)이 아뢰기를,
"자교(慈敎)를 받들어 제멋대로 처리해 버린 죄는 부처(付處)된 시임·원임 대신과 찬배(竄配)된 금부 당상, 포도 대장과 더불어 다름이 없고, 자전께서 탕제를 여러 날 동안 드시지 않는 것은 모두 신들이 윤승렬에 대한 토죄를 지체했기 때문입니다. 짚자리를 깔고서 궐외(闕外)에서 명을 기다립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이 의를 지키는 것은 비록 자별한 것이라고는 하나, 지금 같은 때에 어찌 죄는 똑같은데 벌이 다르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제 아침 이후로 별로 가감(加勘)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하룻밤이 지난 뒤에 와서야 갑자기 다시 뒤늦게 제기하여 궐외에서 거적을 깔고 처분을 기다리는 것은 또한 이해할 수가 없다.
윤승렬에 관한 일은, 자교의 체모가 지극히 엄중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이미 규례를 뛰어넘어 빼내왔는데 이제 도리어 수신(守臣)에게 죄를 돌리다니, 어찌 이러한 형정(刑政)이 있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대례(大禮)를 목전에 두고 있는데, 이런 때에는 사무를 전례대로 수응할 수 없으니, 더욱이 말이 될 수 있겠는가. 영상이 들어온 뒤에 수응하고 싶고 또한 거행할 일도 많으니, 명을 기다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과 도감 당상을 소견하였다. 반수(班首)와 대신을 중도에 부처한 명과 금부 당상·포도 대장을 찬배한 명을 환수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그저께의 일은 삼가 생각건대 처음 보는 잘못된 거조였습니다. 전하께서 죄가 종사에 관계된 역적 이인을 조정에 상의하지도 않고서 유례가 없는 이번의 거조를 하셨는데, 이 일이 주공(周公)의 허물054) 에 속한다 할 수 있으나, 자전의 하교가 한 번 내리자 종사를 위하고 성궁(聖躬)을 위하여 화의 근본을 없애고자 하는 자전의 성스런 뜻이 해와 별처럼 환히 알려졌습니다. 신들이 명색이 대신된 자로서 그를 봉행한 바가 독단이라는 죄에 낙착되어, 성상의 마음으로 하여금 번뇌케 하고 국세를 손상시켰으니,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자전께서 탕제를 드시는 길은 오직 한시바삐 윤승렬을 토죄하는 데에 달렸습니다. 전하께서 승렬을 죄주지 않으시는 까닭은, 일이 국가에 관련된 것인데 죄는 수신(守臣)에게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입니다만,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승렬의 죄는 평소에 방수(防守)를 허술히 하여 일부러 풀어준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심도(沁都)의 성문을 빠져 나온 때가 24일 야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승렬의 서울 집에 쏜살같이 알리는 부예(府隷)와 군교(軍校)들이 도로에 잇따랐는데 26일 해가 돋은 후에야 비로소 장계(狀啓)와 소본(疏本)으로써 후원(喉院)에 올렸으니, 그가 아예 놀라지도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극률(極律)에 처하더라도 아까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날 금부 당상과 포도 대장에 대한 처분은, 대신을 위하는 자는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법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그 때문에 성상의 분부가 엄절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집에 가서 잡아들이라고 한 명이, 마침 자교가 내린 얼마 뒤에 있었는데 이어 이 때문에 찬배되기까지 하였으니, 외간에서 이 사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혹시 성상께서 분풀이를 하신 것으로 의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대단히 온당하지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생각하기로는, 모두 잠시 보류하는 것이 자전의 마음이 누그러지게 하는 데 일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바로잡아주는 말을 나 또한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지나친 거조[過擧]’라는 두 자로도 오히려 모자라서 잘못에다 또 잘못을 하여 ‘놀라운 거조[駭擧]’라고 하더라도 은혜를 펴기에 급급하여 다른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금번의 거조가 무슨 옳지 않다거나 불가하거나 하는 점이 있는가.
금부 당상과 포도 대장의 처분에 대한 일은 나의 본의가 오로지 경들에게 서운함을 느꼈던 데에 있었다. 경들이 배혼(排閽)이라는 명목으로 한 마디의 언질도 없이 지레 멋대로 처리해버렸는데, 나라가 있고 임금이 있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경의 말을 듣건대, 그 가운데 ‘화풀이[移怒]’라는 두 글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운한 점이 있다. 처분을 환수하는 것을 아낄 게 뭐 있겠는가. 더구나 이인을 돌려 보낸 사람은 경들이고 경들은 반수(班首)와 수상(首相) 외에 모두 힘써 출사하도록 유시하였는데 유독 유사(有司)인 신하가 죄명을 덮어 썼으니, 형정(刑政)이 도치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 한 가지 일은 경의 청을 따르도록 하겠다. 그러나 윤승렬에 대한 일은, 경은 비록 사체가 다르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목하(目下)의 당연한 도리는, 오직 탕제를 드시도록 권하여 다시 기뻐하시게 하고 자교(慈敎)를 힘껏 간쟁하여 풀어주시게 하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내가 어렵게 빼왔다가는 도리어 승렬에게 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어찌 말이 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김종수가 아뢰기를,
"두 반수(班首)만 유독 무거운 벌을 받았으니, 여러 대신들의 모든 심정이 황송스럽게 여기는 것은 진실로 마땅합니다. 좌상이 금부 당상과 포도 대장의 일을 진달하였는데 상께서 채납하시는 뜻이 있었습니다. 두 반수가 금부 당상이나 포도 대장과 더불어 죄가 어찌 다르겠습니까.
대저 이 일은 본래 일부터 이러한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성상의 처분이 매양 자전의 하교와 큰 차이가 나는 것이 많습니다. 조지(朝紙)에 나가는 것을 눈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가 보았을텐데, 아마 성상의 심중에도 반드시 불안하신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새로이 임명받은 뒤 첫 연석에서 아뢴 바가 이와 같으니, 대신을 예대(禮待)하는 일은 오히려 두 번째의 일이다. 경이 아뢰면서 이미 ‘불안(不安)’ 두 자를 제기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이상 청을 거절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특별히 경의 청을 따르겠다."
하였다.
김희(金憙)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9월 29일 임자
창경궁(昌慶宮)으로 이어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부터 창경궁에 옮겨 머물겠다. 환궁한 후 돌아가 머물 것이니, 정원 이하 각사는 회태문(回泰門) 근처의 공해(公廨)에 옮겨 거처하라."
하였다.
윤상동(尹尙東)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문영(洪文泳)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우의정 김종수가 겸대한 직을 체차시켜 달라고 청하자, 이조가 내각(內閣) 제학은 교체시켜 바꾸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아뢰니, 하교하기를,
"내각의 제학은 양관(兩館)의 제학과는 자별하여 보국(輔國)의 품계부터는 겸대를 하지 못하는데, 그 당시 경연에서의 아룀을 아직도 의아하게 여긴다. 수어사(守禦使)는 경기 곤수(閫帥)와 마찬가지인데, 비록 상사(上使)라는 칭호를 없애기는 하였으나 예로부터 정승의 경우에는 오히려 그대로 겸대를 하였고, 인하여 규례로 삼아왔다. 내각은 새로 창설한 벼슬이고, 규모도 모두 송(宋)나라 조정을 본떴는데, 왕증(王曾)이 관문전 학사(觀文殿學士)로 있다가 재상에 임명되고서도 그대로 관문전의 벼슬을 겸대하였으니, 이것이 모방할 만한 단서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관서(關西)·관북(關北)·해서(海西)에 기근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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