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28권, 정조 13년 1789년 10월

싸라리리 2025. 8. 2. 09:06
반응형

10월 1일 계축

일식이 있었다.

 

영의정 이재협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윤승렬이 지은 죄가 어떤 죄입니까. 보장(保障)의 중요한 지역을 내내 비워둔 채 다툴 수 없으니, 우선 대임자를 차임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또한 시행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하였다.

 

신대승(申大升)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윤승렬이, 밀부(密符)를 편비(褊裨)로 하여금 대신 바치게 하였는데 정원이 병부(兵符)를 겸유수(兼留守)에게 이송하였습니다."
하니, 유수의 업무는 잠시라도 비울 수가 없다 하여, 이어 대임자를 차임한 것이다.

 

상이 영우원(永祐園)에 거둥하려 하면서 하교하기를,
"궁을 지키는 각신(閣臣) 이 판부사(李判府事)는 분제조(分提調), 가승지(假承旨) 1 원과 명정전(明政殿) 안의 공해(公廨)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주 자궁(慈宮)에게 문안을 드리고, 자전의 안부를 어가를 수행하는 승지에게 적어 보내 아뢸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시복(緦服)을 갖춰 입고서 수도각(隧道閣)의 판위(版位)에 나아가, 부복하여 곡을 한 후, 옹가(瓮家) 안에 나아가 호벽(號擗)을 하였다. 격기(膈氣)가 점점 치밀어오르니, 대신·각신·승지 등이 부축하여 소차(小次)에 들어갔는데, 잇따라 탕환(湯丸)을 들었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기운이 그래도 견딜 만하였는데, 잇따라 자궁(慈宮)의 문안을 받들었더니 궁을 나온 뒤부터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내 마음의 어찌할 바를 모름이 어떻겠는가. 안부를 왕래할 때에는 십당(十塘)의 파발마를 사용하게 하고 궐문 및 명정문(明政門)은 닫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밤에 옹가(瓮家)에 나아가 공역을 직접 감독하였다.

 

10월 2일 갑인

옹가에 나아가 역사를 감독하였다.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 등이 아뢰기를,
"밤이 깊어지므로 바람과 이슬이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성후(聖候)가 겪으신 바가 과연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그런데 또 밤새도록 한데 처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같은 때에 내 어찌 차마 이곳을 잠시라도 떨어질 수 있겠는가. 토석(土石)을 져나르고 파내는 일을, 비록 모두 친히 하더라도 오히려 나의 정을 제대로 펼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하룻밤 한데서 지내는 일이야 어찌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혜경궁(惠慶宮)이 금성위 박명원에게 봉서를 내렸다. 상이 언교(諺敎)를 열람하고서 이르기를,
"자궁(慈宮)의 이 말씀은, 어제 저녁에 떠나올 적에 백 번도 더 넘게 들었으니, 내 속이 금석(金石) 같지 않은 바에 어찌 억제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직접 현궁(玄宮)을 꺼낼 때 살펴보느라 신경쓰고 애태울 것을 염려하시어 이제 또 의빈(儀賓)에게 글을 보내왔다.
만약 자궁(慈宮)의 마음을 누그러지게 하려면, 천고에 처음 당하는 이 상사(喪事)에 나의 정례(情禮)를 다할 수가 없게 되고, 현궁을 뵐 때에 슬픔을 쏟아내려 하면 자궁의 편찮은 증세를 즉시 진찰해서 처방할 수 없는 실정이니, 예전이나 앞으로나 어찌 나의 오늘 같은 정리(情理)가 있을 것인가. 개봉(開封)할 즈음에 한 차례 곡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경들 역시 인정을 갖고 있으니 어찌 차마 나로 하여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박명원이 울먹이면서 아뢰기를,
"자교(慈敎)가 또 내렸습니다. 전하께서 환궁을 하지 않으시면, 장차 무슨 말로 복명하겠습니까."
하였다. 궁을 지키던 각신(閣臣) 이복원(李福源)이 "혜경궁의 신기가 자꾸만 어지러워지고 있는데 환궁하신 후에야 수라를 들겠다고 한다."고 치계하였다. 명선 등이 아뢰기를,
"지금 환궁을 하였다가 오후에 환가(還駕)를 하시면, 충분히 개봉하기 전에 올 수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총호사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여 나로 하여금 천고에 슬픔을 머금게 하지 말라."
하고는, 인하여 창경궁으로 돌아왔다. 하교하기를,
"지금으로서는 자궁(慈宮)의 마음을 누그러지게 하는 일이 시급하다. 현궁(玄宮)을 내릴 때에 직접 임하면 똑같은 것이다. 강 머리에 이르렀다가 도로 들어와 다음날 아침에 출궁하고 7일에 새 원소(園所)에 나아가겠다."
하였다.

 

길유궁(吉帷宮)에 지방(紙榜)을 썼다. 【제지방관(題紙榜官)은 윤사국(尹師國)이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7면
【분류】왕실(王室)

 

퇴광(退壙)을 여니, 증옥(贈玉)과 증백(贈帛)이 노출되었는데, 모두 길유궁에 봉안하였다. 【비단은 불에 태우고 옥은 파묻었다.】  재궁(梓宮)의 하우판(下隅版)이 노출되었다. 영의정 이재협과 집의 박성태(朴聖泰)가 감봉(監封)하고 개표(開標)한 뒤 물러나왔다.

 

상이 다시 원소에 나아갔다. 총호사 채제공이 아뢰기를,
"옥백을 담은 궤(櫃)에 물기가 너무 많고 게다가 화기(火氣)까지 있어, 칠색(漆色)이 문드러져 있습니다. 봉표(封標) 밖의 회반(灰盤)이 깎여나가 지회상(地灰上)에 고여 쌓인 물이 쏟아부은 듯이 흥건하여, 하우판(下隅版) 전면에 가득하였습니다. 중간 크기의 바가지로 퍼냈는데 족히 두 통 세 동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즉시 담장 밖 깨끗한 곳에다 갖다 부었습니다. 외재궁(外梓宮)의 하우판(下隅版)을 꺼낸 후 봉심(奉審)하였더니, 내재궁(內梓宮)이 약간 동쪽으로 두세 푼 밀려나 있었는데 이것은 풍기(風氣)인 듯하고, 외재궁의 상우판(上隅版)에는 또 얼음송이가 응결된 곳이 있었는데 이것은 빙렴(氷廉)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손으로 가슴을 치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이르기를,
"수화(水火)와 풍빙(風氷)으로 인한 재변이 극심한데 그대로 체백(體魄)을 봉안한 채 지금 몇 년이나 되었다. 그러고도 대궐에 편히 있었으니, 그야말로 내가 불효하고 불초한 것이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이 아뢰기를,
"미시(未時)에 자궁께서 총호사에게 언문(諺文) 교서를 내리셨습니다. 그 하교에 이르기를 ‘성상의 체후가 근래 오랫동안 화평치 못했는데, 만약 현궁을 꺼낼 때에 몸소 임어(臨御)하신다면 필시 지나치게 애훼(哀毁)를 하실 것이니 걱정스런 마음이 한량없다. 지금 바야흐로 친히 옷깃을 당겨 만류하면서 출궁(出宮)을 하시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대가(大駕)가 원소에 이르기 이전에 현궁을 봉출(奉出)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뜻으로 누차에 걸쳐 하교를 하였습니다. 이 분부를 받들고부터 하정(下情)이 더욱 감격과 슬픔을 누르지 못하여, 잇따라 작업을 독촉하였는데 수기(水氣)가 드러나기 시작한 뒤로는 더욱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대다가 자연히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궁의 하교가 간절한 것은 오로지 내가 몸소 개봉(開封)에 임할까 갖가지로 염려를 하신 까닭이다. 그러므로 하는 수 없이 직접 임하지 않겠다고 아뢴 연후에야 비로소 출궁을 허락하셨다. 이러한 까닭에 신시 전에 출발하려던 것이 유시 말경까지 늦어졌으니, 나의 사정을 경들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개봉하는 일이 이틀밤 하고도 한나절이나 걸렸으니, 오랜 시간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하우판이 노출된 때가 때마침 내가 동구(洞口)에 들어선 뒤에 있었다고 하니, 이 또한 천의(天意)와 신리(神理)를 우러러 짐작할 수 있는 바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교(慈敎)를 받들어야 되기 때문에 장차 직접 임할 수 없으니, 이게 어찌 사람의 처지인가. 경들은 모쪼록 나의 뜻을 몸받아 나로 하여금 유감이 없도록 하라."
하고, 이어 칠포(漆布)를 쓸 것인지 쓰지 않을 것인지를 물으니, 우의정 김종수가 아뢰기를,
"다만 재궁(梓宮)의 봉합 부분에 칠포 한 가닥을 사용하고 그대로 가칠(加漆)을 하여 완전히 같은 색이 되게 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이에 따라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현궁(玄宮)을 꺼내 찬궁(欑宮)에다 성빈(成殯)하고 재궁(梓宮)을 봉출(奉出)하여 출안막차전(出安幕次奠)을 행하였다. 상이 옹가(瓮家)의 서쪽에 있는 소차(小次)에 있다가, 막차(幕次)에서 전(奠)을 행하면서 찬배(贊拜)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도보로 옹가 안에 나아가 곡벽(哭擗)하였다. 대신과 제신이 곡을 하면서 주달을 하였으나, 상이 알아듣지 못하였다. 봉안한 재궁의 살평상[箭平床] 곁에 나아가 호곡(號哭)·고벽(叩擗)을 하였다. 격기(膈氣)가 점점 치밀어 오르려 하자, 대신 등이 놀라 허둥대며 곡주(哭奏)하기를,
"어수(御手)가 너무 차갑습니다. 옷소매의 눈물 자국이 모조리 혈점(血點)이니, 이러시다 장차 어쩌시려는 것입니까."
하였다. 조금 후에 상이,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실의(失儀)하는 것을 금칙(禁飭)하였다. 판중추부사 서명선이 향대청(香大廳)의 앞길이 매우 가파르니 가마를 타고 곡종(哭從)하라고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게 무슨 말인가. 예(禮)에 ‘곡(哭)하며 걸어 따른다.’는 글귀가 있는데 어찌 가마를 타겠는가."
하였다. 견여(肩輿)로써 재궁(梓宮)을 받들고 의장(儀仗)이 앞에서 인도하였는데, 상이 호곡(號哭)을 하면서 따르고, 제신 이하 위사(衛士)와 원역(員役)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곡을 하며 조애(助哀)를 하였다. 백관이 정자각(丁字閣)의 동·서 뜰에 반열지어 있다가 일시에 곡을 하며 맞이하였다. 성빈(成殯)을 하고 나서 영좌(靈座)를 설치하였다. 상이 호곡을 하며 밤새도록 소리가 끊기지 않다가 격기가 다시 심해지니, 서명선 등이 아뢰기를,
"성빈을 하고 나면 마땅히 전례(奠禮)를 거행하여야 되는데, 성후(聖候)의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신 등이 다시금 죽을 죄를 범해서라도 잠시 재전(齋殿)에 돌아가시도록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승지와 각신이 부축하여 재전에 들어갔는데 격후(膈候)가 그때까지도 가라앉지 않았다. 대신 이하가 수합(守閤)을 한 지 한참 지난 후에 상이 이르기를,
"조금 전에 내가 혼미하여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다. 이런 때에 어찌 내가 재전에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고, 이어 빈궁에 나아가 성빈전(成殯奠)을 행하였다.

 

10월 3일 을묘

조전(朝奠)·조상식(朝上食)·주다례(晝茶禮)를 친행하였다. 상이 찬궁(欑宮)의 문을 열고 재궁(梓宮)을 부여잡으며 핏빛같은 눈물을 흘리니, 총호사 채제공이 울며 아뢰기를,
"오늘 이후로는 성효(聖孝)에 유감이 없게 될 것인데, 어찌 이처럼 지나치게 슬퍼 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봉(遷奉)을 의정(議定)할 처음에 이미 고(故) 정 영부사(鄭領府事)의 일로 말을 주고받은 바가 있었다만, 당시에 본 것은 단지 나무 한 조각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현궁(玄宮)을 살펴보니, 더욱 나의 마음에 유감이 없어지게 되었다. ‘은감(恩感)’이라는 두 글자를 그야말로 고상(故相)을 위해 할 말이다."
하자, 제공이 아뢰기를,
"정 영부사의 지극한 정성과 원대한 사려에 대해서는 이루 다 찬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고상 정홍순(鄭弘淳)이 임오년에 장인(匠人)을 감독하여 재궁을 만들면서 성의와 신중함을 쏟아 다듬고 남은 한 조각을 동원(東園)에 남겨두어 수리(守吏)로 하여금 삼가 기억하도록 당부하였던 것이다.】  상이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 유악(帷幄)을 헤치고 살핀 다음, 제공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오늘 이후로는 의물(儀物)이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떨구었다. 제공 등이 눈물을 닦느라 감히 대답하지 못하다가, 이어 잠시 재전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오늘 같은 날 어찌 한 시각일망정 재전에 편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늙은 대신을 위하여 잠시 청을 따르노라."
하였다. 조전(朝奠) 때가 되어, 유사가 예찬(禮饌)을 올리니, 시선례(視膳禮)를 몸소 친행하였다. 【이 뒤로 친행한 제전(祭奠)은 이와 같다.】  하교하기를,
"총호사와 도감의 당상·낭청은 모두 제전(祭奠)에 들어와 참여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다섯 상사(上司)의 진향(進香)을 오늘 안으로 거행해야 하는데, 여러 차례 제사를 거행하는 것은 도리어 번독(煩瀆)스런 감이 있으니, 조전·조상식·주다례·석상식·석전을 겸행하라."
하였다. 이때 상이 제전을 몸소 행하면서도 특별히 대전관(代奠官)을 두었는데, 이는 국전(國典)의 상제(喪制)를 사용한 것이며, 또한 예(禮)에 우제(虞祭)가 아니면 목욕 재계하지 않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10월 4일 병진

원소에 나아가 빈전에 곡하고, 이어 구광(舊壙)을 살폈는데 광중(壙中)에 거의 한 치[寸] 남짓 물이 고였고, 화기(火氣)는 외재궁(外梓宮) 천판(天版)으로부터 좌우의 협판(夾版)에 이르기까지 검게 그을린 빛을 띠고 있었으며, 빙류(氷溜)는 외재궁의 좌우 협판에 늘어진 것이 많이 있었다. 상이 지난 일을 추념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였다.

 

하교하기를,
"어가를 수행하는 이외의 영문(營門)은 모두 영여(靈輿)의 선상(先廂) 앞에서 제각기 그 대장이 기고(旗鼓)를 거느리고 전도(前導)하라. 나루터에 이르러 벌려 서서 건널 때에는 부교(浮橋)의 좌우에서 영여(靈輿)를 끼고 영도(迎渡)하라. 이렇게 하자면 용호영(龍虎營)의 기고를 별장(別將)에게만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니, 병판(兵判)이 별장과 더불어 거느리고 거행하라. 장용영(壯勇營)과 경기 감영(京畿監營)이 함께 도가(導駕)하되, 수레를 맞이하여 영문(營門)에 들어서면 기고(旗鼓)는 마땅히 좌우로 갈라 각기 4대(隊)를 만들되, 경기 감영과 수어청은 앞에 서고, 어영청과 총융청이 그 다음에 서며, 훈련 도감·금위영의 두 영(兩營)과 장용영·용호영이 뒤에 있으면서 분열(分列)을 하라. 이로써 약속을 하여 혹시라도 어김이 없도록 하라."
하고, 영가(靈駕)의 숙소(宿所)와 주정소(晝停所)에서의 취라(吹螺)와 문을 열고 닫거나 물을 건널 때의 취타(吹打)는, 신해년의 예에 따라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조상식·주다례·석상식·석전을 정해진 법식대로 몸소 행하였고, 재궁의 결과(結裹)를 거행하였다.

 

10월 5일 정사

영여(靈轝)가 구원(舊園)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전날 밤 2경(更)에 선전관이 찬궁(欑宮) 앞에 나아가 제영(諸營)이 현등(懸燈)하였음을 꿇어앉아 아뢰었고, 병조 판서 윤숙(尹塾)이 군령(軍令)을 꿇어앉아 올렸고, 선전관이 초취(初吹)를 꿇어앉아 아뢰었다. 이어 우의정 김종수가 찬궁의 남쪽에 나아가 북향하여 꿇어앉아 아뢰기를,
"우의정 신 김종수는 삼가 길신(吉辰)으로써 찬궁을 엽니다."
하였고, 선공감의 관원이 찬도(欑塗)를 철거하고, 종척(宗戚) 집사가 탁자를 철거하고, 선전관이 꿇어앉아 바라(哱囉)·율발(鋝鈸)을 불었음을 아뢰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세 줄로 분립(分立)하였음을 꿇어앉아 아뢰었고, 또 꿇어앉아 이취(二吹)하기 1각 전임을 아뢰었다. 내시(內侍)가, 증옥(贈玉)·증백(贈帛)의 함과 삼중 관의(三重棺衣)·광중 명정함(壙中銘旌函)을 집사에게 주어 채여(彩轝)에 담았고, 또 노합(爐盒)을 집사에게 주어 향정(香亭)에 담았다. 종척 집사가 전기(奠器)를 받들어 나갔고, 선전관이 삼취(三吹)를 꿇어앉아 아뢰니, 섭상례(攝相禮) 박장설(朴長卨)이 영좌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어좌(御座)에서 내려 가마[轝]에 오를 것을 청하였다. 대축(大祝) 이제만(李濟萬)이 지방함(紙榜函)을 토등(土藤) 방상(方箱)에다 봉안하고 박(帕)으로 덮어 신여(神轝)에 안치하였다. 홍살문[紅箭門]에 이르러 섭상례가 가마에서 내려 연(輦)에 오를 것을 청하였고, 대축이 지방 상자를 신연(神輦)에 모셨다. 종척 집사가 전기(奠器)를 앞에 두었고, 내시가 명정의 소선개(素扇盖)를 철거하여 충찬위(忠贊衛)에게 주고 노합(爐盒)을 집사에게 주어 향정(香亭)에 담았다. 섭상례 권유(權裕)가 재궁 앞에 나아가 대여(大轝)에 오르시기를 꿇어앉아 청하였고, 【예(禮)에 순륜여(輴輪轝)에 오르는 절목이 있으나 온당치 못한 것을 염려하여 모두 생략하였다.】  예재궁관(舁梓宮官)이 조예 무신(助舁武臣)을 거느리고 재궁을 드니, 별군직(別軍職) 등이 부책 별감(扶策別監)과 더불어 메었고, 충찬위가 삽(翣)으로 가렸다.
홍살문 밖에 이르러 대여(大轝)에 오르니, 도청(都廳) 이익운(李益運)이 과설(果揲)을 앞에 두었고, 노부사(鹵簿使)가 그림을 살펴 진열을 하였다. 경기 관찰사가 선도하였고, 그 다음은 당부관(當部官), 그 다음은 돈체사(頓遞使)·예의사(禮儀使)·정리사(整理使)·대사헌, 그 다음은 의금부 도사가 좌우에 둘로 나뉘어 선상군(先廂軍)을 고훤(考喧)하였고, 4백 명의 홍호의(紅號衣)가 세 줄로 나누어 섰다. 홍개(紅盖) 둘이 한가운데 마주서고, 평교자(平轎子)가 홍개 뒤에 있고, 사금집오장(司禁執烏杖)이 좌우에 각 여덟, 선전관 둘, 영내취(領內吹) 열 여덟이 그 뒤에 있고, 장마(仗馬) 여섯, 황룡기(黃龍旗) 하나, 벽봉기(碧鳳旗) 하나, 가귀선인기(駕龜仙人旗) 하나, 청개(靑盖) 둘이 가운데 마주서고, 기린기(麒麟旗) 둘, 청룡기(靑龍旗) 하나, 백호기(白虎旗) 하나, 주작기(朱雀旗) 하나, 현무기(玄武旗) 하나, 백택기(白澤旗) 둘, 각단기(角端旗) 하나, 용마기(龍馬旗) 하나, 현학기(玄鶴旗) 하나, 백학기(白鶴旗) 하나, 영자기(令字旗) 하나, 고자기(鼓字旗) 하나, 금자기(金字旗) 하나, 웅골타(熊骨朶) 하나, 표골타(豹骨朶) 하나, 가서봉(哥舒棒) 넷, 은등자(銀鐙子) 둘, 금등자(金鐙子) 둘, 은장도(銀粧刀) 하나, 금장도(金粧刀) 하나, 은립과(銀立瓜) 하나, 금횡과(金橫瓜) 하나, 은작자(銀斫子) 하나, 금작자(金斫子) 하나, 한(罕) 하나, 필(畢) 하나, 정(旌) 하나, 모(旄) 하나, 절(節) 하나, 은월부(銀鉞斧) 둘, 금월부(金鉞斧) 둘, 작선(雀扇) 넷, 용선(龍扇) 하나, 봉선(鳳扇) 하나가 좌우에 서고, 전부(前部)의 고취(鼓吹)는 늘어놓기만 하고 연주하지 않았다.
신여(神轝)가 그 뒤에 있고 삼색의 촉롱(燭籠) 각 둘이 앞에 나누어 서고, 도감의 당상·낭청 각 1 인이 그 뒤를 따르고, 금려(禁旅) 1백 인이 고취의 주위를 배위(陪衛)하고, 청양산(靑陽繖)이 그 다음에 있고, 향정(香亭)이 그 다음에 있고, 신연(神輦)이 그 뒤에 있고, 시위 별감(侍衛別監) 26인이 좌우로 나누어 있고, 봉두(鳳頭) 2인이 앞에 있고, 삼색 촉롱 각 둘이 앞에 나뉘어 서고, 무겸(武兼) 8인, 선전관 4인, 별군직 4인, 배위 청선(陪衛靑扇) 둘이 신연의 뒤에 있고, 내시 1인, 도감의 당상·낭청 각 1인, 대축(大祝) 1인, 섭사복정(攝司僕正)·박집사(帕執事)·상집사(床執事)가 그 다음에 있고, 방상씨(方相氏) 4인, 죽산마(竹散馬) 둘, 죽안마(竹鞍馬) 여섯, 청수안마(靑繡鞍馬) 넷, 자수안마(紫繡鞍馬) 넷이 나뉘어 늘어서고, 옥백(玉帛)·채여(彩轝)가 그 다음에 서고, 봉증옥관(奉贈玉官)·봉증백관(奉贈帛官)·명정 집사(銘旌執事)·욕석 집사(褥席執事) 각 1인과 거안(擧案)한 자 4인이 그 다음에 있었다. 순(輴)은 그 뒤에 있었고, 도감의 당상·낭청 각 1인이 그 뒤를 따르고, 선공감의 관원이 우보(羽葆)를 받들어 가운데 거하고, 향정이 그 다음에 있고, 소선(素扇) 둘, 소개(素盖) 둘이 좌우에 나뉘어 서고, 충의위가 명정을 받들고 그 뒤에 서고, 섭상례 1인, 섭전의(攝典儀) 1인, 별군직 2인이 그 다음에 서고, 대여(大轝)가 그 뒤에 서고, 부책 별감(扶策別監) 20인이 좌우에 나뉘어 서고, 봉두(鳳頭) 2인이 그 앞에 서고, 오색 촉롱(燭籠) 각 40개, 화철 촉롱(化鐵燭籠) 40개, 집탁 호군(執鐸護軍) 16인, 충찬위 6인이 삽(翣)을 들고 각기 차례대로 좌우에 나뉘어 서고, 영여(靈轝)를 끼고 가는 군사 2백 명이 겹줄로 서고, 만장(輓章) 1백 축(軸)에서 【제술관(製述官)은 1백 41인인데 합쳐서 1백 축을 만들었다.】  50축은 상여 앞에 서고 50축은 대여(大轝) 뒤에 섰다.
배왕(陪往)한 사람은, 대장 1인, 종사관 2인, 내시 2인, 대전관(代奠官) 1인, 도감 낭청 2인, 도청 2인, 제조 2인이었으며, 그 다음에 총호사, 그 다음에 조예 무신(助舁武臣) 2인, 그 다음에 분승지(分承旨) 2인, 분사관(分史官) 2인, 각신(閣臣) 2인, 분총관 분병조의 당상관과 당하관 그리고 오위 장 각 2인, 종친 집사, 동·서반(東西班) 배종관(陪從官)이 서고, 후상군(後廂軍) 3백은 백호의(白號衣) 차림으로 세 줄로 갈라섰다.
신여(神轝)가 노제소(路祭所)에 이르러 노제를 지냈는데, 연(輦)에 오르고 내리는 절차는 처음의 의식(儀式)대로 하고는 【뒤에도 이와 같다.】  다시 출발하였다.
상이 말을 타고 뒤따르면서 곁의 신하들에게 묻기를,
"내가 정신이 혼미하여 살피지 못하는데 대여(大轝)를 편안히 받들고 있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장막을 쳐다보건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마치 쟁반에 물을 담은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별계군(別契軍) 덕분이다."
하였다. 대여(大轝)가 둑도(纛島)의 악차(幄次)에 이르러 차례로 배에 오른 다음, 다리의 좌우편을 끼고서 건넜는데, 대여가 다리 남쪽을 지나자 총호사가 무사히 건넜다고 아뢰었다. 상이 곡을 하여 하직 인사를 하고 환궁하였다.

 

부사직 이헌경(李獻慶)이 부교행(浮橋行)이라는 시를 지어 올렸다. 시는 다음과 같다.
자양이 전에 천하에는 큰 강이 세 개 있다고 논하면서
한강은 일컫지 아니하고 압록강을 일컬었네
마치 시(詩)를 편집할 때 석고문(石鼓文)을 누락한 것 같아
창려가 아쉬워했던 것처럼 신 또한 아쉽게 여기네055) 한강도 그에 견주어 손색이 없어 그 원기 깊고 넓기 한이 없구나 그 이름 한강이라 부르니 은하수와 비슷하고 마치 하늘에서 폭포가 흘러내리는 듯하네 비단을 빠는 듯 구슬을 씻는 듯 수백 리에 서남으로 흐르는 푸른 파리옥 아니런가 큰 나라에 작은 나라가 조회를 하듯이 온갖 물줄기가 한 곳으로 모여드네 물귀신이 당해봐도 눈이 휘둥그래지고 양쪽 물가 아득하여 마소도 분간하기 어렵도다 단군·기자 이후 4천 년에 세상의 온갖 만물 성신들이 만들었네 산길을 뚫고 물길을 뚫어서 큰 강에는 나무다리 놓고 작은 강엔 줄다리를 놓았네 남쪽에 있는 금강과 북녘의 용흥강을 모두다 다리 놓아 인객을 건너게 하였더라 유독 한수에만 섣불리 논의하기 어려워서 예전부터 다리없이 배를 타고 왕래했네 백학은 아니오고 청룡도 달아났건만 수면엔 무지개처럼 곧은 다리 보이지 않았네 우리 임금 성덕은 하늘과 같아서 마련하고 이룩함에 빠뜨린 일이 없네 땅의 신령도 고분고분하니 초목이 살찌고 물의 귀신도 순종하니 물결이 잔잔해졌네 천지를 두루 다스리니 하늘도 거역치 않고 사방을 고무하니 다들 거들고 나섰도다 13년 되던 해 가을 7월에 원침을 장차 만년 터전에 옮길 제 대궐의 밤시간은 효심으로 길어가고 애타는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했네 지관을 기다릴 것도 없이 좋은 자리 찾았고 산악에 오른 적도 없이 명당자리 얻었도다 여룡이 구슬을 뱉으니 햇살이 빛나고 하늘 너머에서 날아온 아름다운 봉새 깃일레라 찬란한 연화는 구슬과 비단을 따르고 명당을 찾아뵈니 금성을 에워쌌네 세심하게 공들여 책에서 찾아봐도 마치 귀신이 몰래 하사한 듯하네 성인이 성인을 장사하니 길상이 뒤얽히고 구슬같은 언덕은 어찌 그리 고울까 흠의를 마련할 때 내탕고를 기울이고 갖가지 공역은 삯을 내어 꾸렸도다 털끝만큼도 농군들은 귀찮게 안 하니 닭과 개도 저마다 새 고을로 돌아갔네 의장 행렬은 앞길에 십여 리나 늘어서고 임금님 지나는 길 깎은 듯이 평탄하네 드넓은 한강물 뗏목으로는 건널 수 없어 유사의 걱정이 무엇보다 깊었도다 더구나 10월 초의 추운 겨울이라서 강복판은 북풍에 얼어붙으려 하였네 임금이 말하였네, 배다리는 옛 제도가 있고 대아에서는 서주의 임금을 칭송했다 천연적인 강에는 별빛이 반짝이고 각도는 꾸불꾸불 북두성을 빙 둘렀는데 수여! 너의 직임은 공역을 관장하니 네가 가서 이 역사(役事)를 정성껏 꾸려나가게나 하필 형촉의 먼 데 재목 찍어올 것이 있겠으며 기원의 먼 데 대나무 베어올 것이 있겠는가 사방의 바다 둘레엔 배들이 남아돌고 돛대는 여기저기 삼대처럼 즐비하다 태평 세월 백년에 전함이 한가하고 가고 소리 잠잠하여 물새들도 평화롭다 한 차례 북을 쳐서 신호를 보내면 물가의 역참에서 새벽부터 재촉하여 용 같은 큰 배와 새매 같은 작은 배가 꼬리를 물고 머리를 맞추어 줄을 지으니 지탱하여 저절로 내를 건널 것이다 까치와 거북이가 놓은 다리, 그거 별거 아니로다 사도여! 너의 직책은 감독을 맡았으니 고을의 백성들을 때때로 친히 감독하라 경기의 관찰사도 자주 와서 돌아보매 강을 지나는 대장기는 바람에 펄럭이고 호서와 해서에서 저마다 배를 보내니 구름가에 모인 돛대 백여 개나 되었도다 네모난 용깃발에 깃대는 부용같고 잉어깃발은 바람에 날려 물새보다 사뿐하네 돛달고 다함께 행주 나루 지나가니 두모포는 아득하고 저자도가 거뭇하네 나이 많은 사공들056)  을 누구보다 가엾게 여겨 헐벗은 자 옷을 주고 굶주린 자 식량 주니 떠들썩한 노랫가락 환성을 다하고 봄볕이 고루 비쳐 추위가 물러갔네 또 대장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케 하니 옥장막 옥끌에 군령이 빈틈없네 배들을 부르니 빗살처럼 잇대 와서 원앙처럼 떼 지어 비늘처럼 늘어섰네 처음엔 조각조각 하나씩 흩어져 있더니 점차 구슬을 꿴 것처럼 잇대어 붙었네 물고기가 정나라 그물에 걸리듯 대오가 이어지고 기러기가 오나라 하늘을 날아가듯 질서가 정연했네 어찌 적벽강의 쇠사슬이 필요하랴 긴 장대를 걸치어 밧줄로 묶으면 그만인걸 등림 숲의 나무들을 하나하나 베어오고 모구의 푸른 덩쿨 밧줄로 꼬았도다 깔끔한 잔디 연한 흙을, 그 위에 덮으니 반듯한 일색 잔디 위에, 찬 연기 자욱하네 일흔 일곱의 온갖 꽃배057)   늘어서니 밀려오는 물결 그 아래에 잠잠하네 편안히 고래등 타고 바다를 건너는 듯하고 자라들이 머리로 산을 인 듯하였네 들쑥날쑥 줄을 지어 물 위에 솟구치니 그림자가 흔들흔들 일월처럼 또렷하네 잠긴 용도 물 속에서 지켜주고 갈매기는 파도 속에 자맥질을 다투네 강물을 통과한 대장에게 술을 내리고 해자를 건넌 영장에게 좋은 벼슬 주었도다 반듯한 길에는 먼지조차 일지 않고 깨끗한 깃발 앞엔 산뜻한 비 뿌리네 첫겨울의 날씨 좋은 병진일에 임금 상여 떠나니 은초롱 늘어섰네 울긋불긋 의장대에 운삽이 또렷하고 새벽녘에 다리를 무사히 건넜도다 강물은 비록 만인의 눈물을 보태건만 다리 위론 밤길을 걷는 듯하네 뉘라서 강이 넓어 배가 못다닌다고 하며 뉘라서 강이 깊어 건너지 못한다 하랴 거북이가 전도하고 물신령이 뒤따르는데 처량한 상여노래 방울소리에 뒤섞이네 지존의 난가도 탈없이 건너니 상서로운 햇빛은 맑고도 따사롭네 백성들은 화합하고 날씨마저 따뜻하니 사녀들이 덕을 칭송하며 다들 감격하누나 신원의 예식을 마치자 백료가 축하하고 성상의 효성은 죽백에 길이 빛나리 성렬을 드러내어 책문에다 찬양하고 잠광을 묘사하여 지문에 새겼노라 아! 뜻했던 일이 다시는 유감이 없으니 서응은 모두 다 마음에 얻으리라 부교야 단지 하찮은 것일 뿐이나 범위는 하늘과 같음을 뉘라서 알랴 처음에 만들자고 명한 때를 회고컨대 대소 관원이 처음 보고 다들 놀라 의심했네 못난 신도 황송하나 내심 미덥잖아서 지나친 근심 걱정 떨칠 수가 없었네 이제야 비로소 기우였음을 깨달으니 야자 같은 소견머리 그야말로 좁았네 다리에 나아가 말한 장맹에게 부끄럽고 시를 지어 조롱한 고경의 놀림 달게 받네 제작이 신명과 짝함은 원래부터 알았고 곧장 조물주와 더불어 함께 빛났네 선가의 백화 다리는 본래가 허튼 소리 오호의 무지개 다리도 대적이 안 되네 포상을 논하여 공을 대사공에게 돌렸으니 임금의 거룩하심 그 얼마나 찬란한가 위대한 공적을 묻어둘 수 없기에 송가를 지으니 뉘라서 청풍목에 견주랴 신은 외람됨을 잊은 채 긴 시(詩)를 지어 성사를 노래하여 천년 억년 전하노니 후인으로 하여금 부교가 있는 곳을 가리켜 알게 하여  하수에 임해 우임금의 업적을 떠올리는 것처럼 하노라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7면
【분류】왕실(王室) / 어문학-문학(文學)


[註 055] 창려가 아쉬워했던 것처럼 신 또한 아쉽게 여기네 : 창려는 당(唐)나라 때의 대유(大儒)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그는 일찍이 석고가(石鼓歌)를 지어, 주(周) 선왕(宣王) 때의 석고문(石鼓文)이 《시경(詩經)》에 편입되지 않은 점을 아쉬워하고, 고대 문물(文物)의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자고 역설한 바 있다. 《고문진보(古文眞寶)》 권9 석고가(石鼓歌).[註 056] 나이 많은 사공들 : 뱃사공을 뜻함. 《서언고사(書言故事)》 인품류(人品類)에 "초인왈 장년삼노(梢人曰 長年三老)"라고 하였고, 그 주(注)에 이르기를 ‘협중이주사위장년 시공위상노(峽中以舟師爲長年 拖工爲三老)’라고 하였다.[註 057] 온갖 꽃배 : 모두 화방(畵舫)의 이름으로, 예전에 귀인(貴人)이 타던 놀잇배의 일종이며, 왕발(王勃)의 등왕각서(謄王閣序)에 ‘가함미진 청작황륭지축(舸艦迷津靑雀黃龍之軸)’이라 하였다. 곧 놀잇배의 깃발에 푸른 새와 누런 용을 그려넣은 데서 ‘놀잇배’의 뜻으로도 쓰이게 된 것이다.
한강도 그에 견주어 손색이 없어
그 원기 깊고 넓기 한이 없구나
그 이름 한강이라 부르니 은하수와 비슷하고
마치 하늘에서 폭포가 흘러내리는 듯하네
비단을 빠는 듯 구슬을 씻는 듯 수백 리에
서남으로 흐르는 푸른 파리옥 아니런가
큰 나라에 작은 나라가 조회를 하듯이
온갖 물줄기가 한 곳으로 모여드네
물귀신이 당해봐도 눈이 휘둥그래지고
양쪽 물가 아득하여 마소도 분간하기 어렵도다
단군·기자 이후 4천 년에
세상의 온갖 만물 성신들이 만들었네
산길을 뚫고 물길을 뚫어서
큰 강에는 나무다리 놓고 작은 강엔 줄다리를 놓았네
남쪽에 있는 금강과 북녘의 용흥강을
모두다 다리 놓아 인객을 건너게 하였더라
유독 한수에만 섣불리 논의하기 어려워서
예전부터 다리없이 배를 타고 왕래했네
백학은 아니오고 청룡도 달아났건만
수면엔 무지개처럼 곧은 다리 보이지 않았네
우리 임금 성덕은 하늘과 같아서
마련하고 이룩함에 빠뜨린 일이 없네
땅의 신령도 고분고분하니 초목이 살찌고
물의 귀신도 순종하니 물결이 잔잔해졌네
천지를 두루 다스리니 하늘도 거역치 않고
사방을 고무하니 다들 거들고 나섰도다
13년 되던 해 가을 7월에
원침을 장차 만년 터전에 옮길 제
대궐의 밤시간은 효심으로 길어가고
애타는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했네
지관을 기다릴 것도 없이 좋은 자리 찾았고
산악에 오른 적도 없이 명당자리 얻었도다
여룡이 구슬을 뱉으니 햇살이 빛나고
하늘 너머에서 날아온 아름다운 봉새 깃일레라
찬란한 연화는 구슬과 비단을 따르고
명당을 찾아뵈니 금성을 에워쌌네
세심하게 공들여 책에서 찾아봐도
마치 귀신이 몰래 하사한 듯하네
성인이 성인을 장사하니 길상이 뒤얽히고
구슬같은 언덕은 어찌 그리 고울까
흠의를 마련할 때 내탕고를 기울이고
갖가지 공역은 삯을 내어 꾸렸도다
털끝만큼도 농군들은 귀찮게 안 하니
닭과 개도 저마다 새 고을로 돌아갔네
의장 행렬은 앞길에 십여 리나 늘어서고
임금님 지나는 길 깎은 듯이 평탄하네
드넓은 한강물 뗏목으로는 건널 수 없어
유사의 걱정이 무엇보다 깊었도다
더구나 10월 초의 추운 겨울이라서
강복판은 북풍에 얼어붙으려 하였네
임금이 말하였네, 배다리는 옛 제도가 있고
대아에서는 서주의 임금을 칭송했다
천연적인 강에는 별빛이 반짝이고
각도는 꾸불꾸불 북두성을 빙 둘렀는데
수여! 너의 직임은 공역을 관장하니
네가 가서 이 역사(役事)를 정성껏 꾸려나가게나
하필 형촉의 먼 데 재목 찍어올 것이 있겠으며
기원의 먼 데 대나무 베어올 것이 있겠는가
사방의 바다 둘레엔 배들이 남아돌고
돛대는 여기저기 삼대처럼 즐비하다
태평 세월 백년에 전함이 한가하고
가고 소리 잠잠하여 물새들도 평화롭다
한 차례 북을 쳐서 신호를 보내면
물가의 역참에서 새벽부터 재촉하여
용 같은 큰 배와 새매 같은 작은 배가
꼬리를 물고 머리를 맞추어 줄을 지으니
지탱하여 저절로 내를 건널 것이다
까치와 거북이가 놓은 다리, 그거 별거 아니로다
사도여! 너의 직책은 감독을 맡았으니
고을의 백성들을 때때로 친히 감독하라
경기의 관찰사도 자주 와서 돌아보매
강을 지나는 대장기는 바람에 펄럭이고
호서와 해서에서 저마다 배를 보내니
구름가에 모인 돛대 백여 개나 되었도다
네모난 용깃발에 깃대는 부용같고
잉어깃발은 바람에 날려 물새보다 사뿐하네
돛달고 다함께 행주 나루 지나가니
두모포는 아득하고 저자도가 거뭇하네
나이 많은 사공들056)  을 누구보다 가엾게 여겨
헐벗은 자 옷을 주고 굶주린 자 식량 주니
떠들썩한 노랫가락 환성을 다하고
봄볕이 고루 비쳐 추위가 물러갔네
또 대장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케 하니
옥장막 옥끌에 군령이 빈틈없네
배들을 부르니 빗살처럼 잇대 와서
원앙처럼 떼 지어 비늘처럼 늘어섰네
처음엔 조각조각 하나씩 흩어져 있더니
점차 구슬을 꿴 것처럼 잇대어 붙었네
물고기가 정나라 그물에 걸리듯 대오가 이어지고
기러기가 오나라 하늘을 날아가듯 질서가 정연했네
어찌 적벽강의 쇠사슬이 필요하랴
긴 장대를 걸치어 밧줄로 묶으면 그만인걸
등림 숲의 나무들을 하나하나 베어오고
모구의 푸른 덩쿨 밧줄로 꼬았도다
깔끔한 잔디 연한 흙을, 그 위에 덮으니
반듯한 일색 잔디 위에, 찬 연기 자욱하네
일흔 일곱의 온갖 꽃배057)   늘어서니
밀려오는 물결 그 아래에 잠잠하네
편안히 고래등 타고 바다를 건너는 듯하고
자라들이 머리로 산을 인 듯하였네
들쑥날쑥 줄을 지어 물 위에 솟구치니
그림자가 흔들흔들 일월처럼 또렷하네
잠긴 용도 물 속에서 지켜주고
갈매기는 파도 속에 자맥질을 다투네
강물을 통과한 대장에게 술을 내리고
해자를 건넌 영장에게 좋은 벼슬 주었도다
반듯한 길에는 먼지조차 일지 않고
깨끗한 깃발 앞엔 산뜻한 비 뿌리네
첫겨울의 날씨 좋은 병진일에
임금 상여 떠나니 은초롱 늘어섰네
울긋불긋 의장대에 운삽이 또렷하고
새벽녘에 다리를 무사히 건넜도다
강물은 비록 만인의 눈물을 보태건만
다리 위론 밤길을 걷는 듯하네
뉘라서 강이 넓어 배가 못다닌다고 하며
뉘라서 강이 깊어 건너지 못한다 하랴
거북이가 전도하고 물신령이 뒤따르는데
처량한 상여노래 방울소리에 뒤섞이네
지존의 난가도 탈없이 건너니
상서로운 햇빛은 맑고도 따사롭네
백성들은 화합하고 날씨마저 따뜻하니
사녀들이 덕을 칭송하며 다들 감격하누나
신원의 예식을 마치자 백료가 축하하고
성상의 효성은 죽백에 길이 빛나리
성렬을 드러내어 책문에다 찬양하고
잠광을 묘사하여 지문에 새겼노라
아! 뜻했던 일이 다시는 유감이 없으니
서응은 모두 다 마음에 얻으리라
부교야 단지 하찮은 것일 뿐이나
범위는 하늘과 같음을 뉘라서 알랴
처음에 만들자고 명한 때를 회고컨대
대소 관원이 처음 보고 다들 놀라 의심했네
못난 신도 황송하나 내심 미덥잖아서
지나친 근심 걱정 떨칠 수가 없었네
이제야 비로소 기우였음을 깨달으니
야자 같은 소견머리 그야말로 좁았네
다리에 나아가 말한 장맹에게 부끄럽고
시를 지어 조롱한 고경의 놀림 달게 받네
제작이 신명과 짝함은 원래부터 알았고
곧장 조물주와 더불어 함께 빛났네
선가의 백화 다리는 본래가 허튼 소리
오호의 무지개 다리도 대적이 안 되네
포상을 논하여 공을 대사공에게 돌렸으니
임금의 거룩하심 그 얼마나 찬란한가
위대한 공적을 묻어둘 수 없기에
송가를 지으니 뉘라서 청풍목에 견주랴
신은 외람됨을 잊은 채 긴 시(詩)를 지어
성사를 노래하여 천년 억년 전하노니
후인으로 하여금 부교가 있는 곳을 가리켜 알게 하여
하수에 임해 우임금의 업적을 떠올리는 것처럼 하노라

 

영여(靈轝)가 둑도(纛島)에서 출발하여 과천에 머물렀다. 석곡(夕哭)·석전(夕奠) 및 석상식(夕上食) 때가 되자 모두 의식에 따라 예를 거행하였다.

 

10월 6일 무오

영여가 과천으로부터 출발하여 수원(水原)의 신읍(新邑)에 있는 막차(幕次)에 이르러 주정전(晝停奠)을 지낸 다음, 다시 출발하여 원소의 정자각에 도착하였다. 재궁(梓宮)을 받들어 찬궁 안의 탑(榻) 위에 안치하였는데 진설(陳設)은 처음과 똑같게 하였으며 설전(設奠)은 정해진 의식대로 하였다. 석상식(夕上食)·포곡(哺哭)·석전(夕奠)을 겸하여 지냈다.

 

대가(大駕)가 과천현(果川縣)에서 주정(晝停)하고 사근현(沙斤峴)을 넘어 경진년 온천에 행행하였을 때 주정을 하였던 옛 터를 찾았다. 주민들 가운데 그때에 행차를 구경했던 사람들에게는 쌀을 지급하도록 경기 관찰사에게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경모궁(景慕宮)의 행차가 이곳을 지날 때 예교(睿敎)하시기를 ‘대가(大駕)의 주정소(晝停所)가 저쪽 언덕에 있으니, 어떻게 나의 주정소를 다시 설치할 수 있겠는가.’ 하시고는, 이곳에다 옮겨 설치하도록 하셨다. 이 일은 내가 직접 들은 것인데 이제 이곳에 왔으니 나의 심회를 억제하기 어렵구나. 이후로는 지방관으로 하여금 대충 수리를 하도록 하라."
하였다. 저녁에 수원부(水原府)에 머물렀다.

 

10월 7일 기미

행차가 새 원소에 나아갔다. 재실에 들어가 시복(緦服)을 갖춰 입고 정자각까지 걸어가서 재궁을 살펴본 다음, 곡하는 자리에 가서 곡을 하였다. 이어 아침 상식을 절차대로 올리고 수도각(隧道閣)에 나아가 광(壙) 안의 흙 빛깔과 사방 산의 국세(局勢)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총호사 채제공이 아뢰기를,
"오늘 아침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으나 유독 수도각 안에만은 한 점의 안개 기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아침과 썰렁한 밤의 바람 기운이 매섭고 싸늘한 시각에도, 이 각에 들어서면 따뜻하기가 온돌방과 같으니, 상서로운 광채가 모여들고 길한 기운이 스며있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걸어서 주산(主山)의 봉우리에 올랐다가 보여(步轝)를 타고 산등성이를 빙 돌아나와 후탁(後托)의 머리를 들이민 지점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이 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만큼 꽃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자각으로 돌아와서 주다례(晝茶禮)를 친히 거행하였다.

 

재궁에다 ‘상(上)’ 자를 썼다. 【서사관(書寫官)은 박명원(朴明源)이었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9면
【분류】왕실(王室)

 

상이 석상식(夕上食)·석전(夕奠)·계찬전(啓欑奠)을 친히 거행하였다. 관을 싸매는 의식을 처음에 했던 대로 거행하였다.

 

해시(亥時)에 현궁(玄宮)을 내렸다. 천전(遷奠) 때가 되자 정해진 절차대로 예를 거행하였다. 천원 도감에서 발인할 때의 절차대로 흰빛의 의장(儀仗)과 각색 초롱을 벌려 놓았다. 방상씨(方相氏)가 퇴광(退壙) 위에 이르러 창으로 네 귀퉁이를 두드리고 나왔다. 증옥(贈玉)과 증백(贈帛)을 수도각 안의 동남쪽에 벌려 놓았다. 섭상례(攝相禮)가 무릎을 꿇고 고하여 상여에 오를 것을 청하자, 재궁을 받드는 관리가 조예 무신들을 데리고 재궁을 받들어 상여에 올리고 수도각으로 나아가 녹로차(轆轤車)에 올려놓았다. 【녹로차는, 예전에는 굴대와 정지하는 기구의 제도가 있어 《오례의(五禮儀)》에 나타나 있다. 이때에 이르러 별도로 한 제도를 만들었는 바, 먼저 좌우 받침대를 놓는데 길이가 9자, 너비가 9치, 두께가 6푼이다. 좌우 받침대의 양쪽 머리 부분에는 모두 기둥을 세우는데 높이가 2자 6치이고 받침대에 들어가는 부위는 너비가 5치 5푼, 두께가 2치 5푼이다. 기둥의 윗쪽 끝에는 가로와 세로로 2개의 홈을 파내는데, 세로 홈은 깊이가 5치로서 그 밑을 둥글게 만들어 축(軸)이 들어가게 하고, 가로 홈은 깊이가 1치 5푼으로서 가름대[橫架]가 들어가게 한다. 축은 길이가 9자, 둘레가 1자 2치로서 앞뒤의 기둥 끝을 관통한다. 세로 홈의 위쪽을 향하는 둥근 구멍은 축이 놓이는 구멍보다 2치 5푼을 줄이며, 가름대의 좌우 기둥 끝에 홈을 파는 것은 네 기둥을 받침대에 튼튼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갈고리쇠[句鐵]는 모난 갈고리로서 속명(俗名)이 등자철(鐙子鐵)이다. 두 다리를 받침대에 꽂으며 다리와 다리 사이에는 밧줄이 들어가게 하는데, 그 수는 8개로서 좌우로 서로 마주 향하게 한다. 하나의 받침대에는 4개의 갈고리가 있는데 그 간격은 1자이다. 쇠통[鐵筒]은 속명(俗名)이 토시쇠[套手鐵]인데, 모난 갈고리의 위에 둘러씌우되, 그 안둘레를 헐렁하게 하여 마음대로 돌아가게 한다. 좌우의 축에는 모두 튼튼한 쇠이빨[鐵牙]을 박는데 그 길이는 1치쯤 되게 하고, 두 이빨이 맞물리게 하며, 그 사이에도 밧줄이 들어갈 수 있게 한다. 하나의 축에는 8개의 이빨을 박는데, 그 자리는 네모난 갈고리를 보아 정한다. 밧줄은 베로 만드는데, 네 끝을 세로로 주름을 잡아서 꿰매되 모두 8겹으로 하며, 두 끝은 도로 꺾어서 갈고리를 만들고, 나무비녀[木簪]를 가로질러 나머지 두 끝에 꿰여 왼쪽 쇠이빨에 건 다음, 아래로 향하여 왼쪽 모난 갈고리와 오른쪽 모난 갈고리에 꿰고, 갈고리 위의 쇠통에다 비스듬히 위로 향하여 오른쪽 쇠이빨에 건다. 나머지 세 밧줄도 똑같이 한다. 축의 두 끝에는 십자로 교차된 두 폭(輻)을 끼우고 바퀴폭[輪輻]을 만든 다음, 테두리처럼 네 끝을 붉은 실띠로 연결시킨다. 두 받침대를 광중(壙中) 위의 좌우로 오가게 된 판(板)에 놓고, 판의 두 끝에는 못을 박아서 흔들리거나 돌아가는 것을 방지한다. 십자형 바퀴 4개는 힘을 같이 받아, 늦추어지거나 팽팽해지거나 빨라지거나 늦어지는 차이가 없도록 하는데, 바깥쪽을 향하여 회전하면 밧줄이 풀려서 아래로 내려 드리우며, 안쪽을 향하여 회전하면 밧줄이 감기면서 위로 올라간다. 받침대의 안쪽 끊어진 부분에 해당하는, 모난 갈고리가 놓이는 곳은, 둥그렇게 하여 밧줄이 오가기에 편리하도록 하고, 기둥 끝의 둥근 홈에는 기름과 밀랍을 두껍게 바르는데, 수월하게 회전하고 소리가 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퇴광(退壙)의 굴대판[輪對板]에 내려놓고 싸맨 것을 풀었다.

장생전 제조(長生殿提調) 이문원(李文源)이 가하우판(假下隅板)을 열고 외재궁(外梓宮) 안을 깨끗이 닦은 다음, 집사(執事)되는 자가 관(棺)을 싼 헝겊을 벗기니, 식재궁관(拭梓宮官) 김종수(金鍾秀)가 수건으로 닦아냈고, 내시가 유의(遺衣)를 그 위에 놓았다. 집사되는 자가 세 겹으로 된 관싸개[棺衣]를 덮고 명정(銘旌)을 그 위에 씌웠으며, 보삽(黼翣)·불삽(黻翣)·화삽(畵翣)을 관싸개 좌우쪽에 그렸다. 때가 되자 관을 절차대로 내려놓았다. 상이 곡을 하며 하직하는 예를 거행한 후, 구슬과 비단을 전하는 자리에 나갔다. 봉증옥관(奉贈玉官) 이만수(李晩秀)와 봉증백관(奉贈帛官) 서매수(徐邁修)가 각자 무릎을 꿇고 구슬과 비단을 올리니, 상이 영의정 이재협(李在協)에게 친히 전하였는데, 이재협이 무릎을 꿇고 받아서 퇴광(退壙)의 서쪽에다 놓았다. 【예법에는, 의복과 평소 즐겨 지니던 물건이나 그릇 따위를 놓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번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실컷 곡을 하고 절을 하였다.

장생전 제조가 외재궁(外梓宮)의 밑바닥 판자를 닫고 옻칠한 베로 그 이음새 부분을 둘러쌌다. 영의정 이재협이 봉폐(封閉)하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봉폐관(封閉官) 박성태(朴聖泰)가 "신이 삼가 봉(封)합니다.[臣謹封]"라고 쓰고 도장을 찍었다. 우의정 김종수가 9삽의 흙을 덮자, 총호사가 역군들을 거느리고 앞쪽에다 회(灰)를 다지는 동시에, 퇴광에 관보다 낮게 회를 채우고 지석(誌石)을 묻었다.

어제(御製) 지문(誌文)은 다음과 같다.

"현륭원(顯隆園) 수원부(水原府) 화산(花山)에 있는데 계좌 정향(癸坐丁向)입니다.

기유년 가을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옛 원(園)은 체제상 결함이 많다고 건의하면서 고쳐 쓰자고 청해서, 드디어 화산에다 자리를 잡았는데, 점을 친 사람의 말이, 그 곳은 서려있는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고 하였으며, 대소 관원이 따르고 일반 백성들도 동조하였습니다. 이에 이해 겨울 10월 기미일에 이장(移葬)하고 원의 이름을 ‘현륭’이라고 고쳤습니다. 아, 불효한 이 아들이, 천지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 지금껏 멍하고 구차스럽고 모질게 목석마냥 죽지 않고 살았던 것은, 소자에게 중사를 맡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그 뜻에 보답할 수 있게 되기를 지극한 심정으로 비나니, 아, 하늘이시여.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일은 하늘이 들어주는 것인데, 이 소자는 감히 기필코 이렇게 해야만 소자가 죽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천하 후세에 떳떳이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덕행(德行)을 들어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현궁(玄宮)에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휘(諱)는 이선(李愃)이고 자(字)는 윤관(允寬)이다. 숙종 원효 대왕(肅宗元孝大王)의 손자이고 영종 현효 대왕(英宗顯孝大王)의 아들로 영빈 이씨(暎嬪李氏) 소생이다.

삼가 행록(行錄)을 상고하건대, 태어나시기 수삼일 전부터 상서로운 빛과 구름이 보이더니, 태어나시자 해와 같은 자표(姿表)가 사람들에게 환히 비치고, 울음소리는 큰 종을 치는 것과 같았다. 이에 영묘(英廟)가 매우 기뻐하시면서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세 종통의 혈맥이 끊어질 뻔하더니, 이제는 죽어 역대 조상들을 만날 면목이 서게 되었다.’고 하시었다. 숙묘(肅廟) 경오년의 고사를 따라 곤전(坤殿)의 아들로 삼아 ‘원자(元子)’로 칭호를 정하도록 하였으니, 이때가 을묘년 정월 21일이었다.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중외에 대사령(大赦令)을 베풀었다. 뛰어난 자질이 숙성하여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벌써 두세 살짜리 아이와 같았는데, 영묘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들어와 보도록 명하시고는, 이어 가까이 모시는 신하더러 ‘성(誠)·경(敬)’ 두 글자를 써서 들어 보여주게 하였더니, 마치 조심스레 받듯이 자세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해 가을에 보양관(輔養官)과 상견하는 예식을 거행하였으며, 《효경(孝經)》의 장구(章句)를 뽑아 좌우의 신하들로 하여금 날마다 앞에서 외워 익히게 하였다.

병진년에 세자로 세웠는데 3월 15일에 의장과 호위를 갖추고 양정합(養正閤)에서 책봉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연신(筵臣)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저하(邸下)가 효묘(孝廟)의 모습을 매우 닮았으니 이야말로 종묘 사직의 끝없는 복입니다.’고 하였다. 영묘께서 궁관에게 문왕 세자편(文王世子篇)을 병풍에 써서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에 벌써 글자의 뜻을 이해하여 ‘왕(王)’ 자를 보고서는 영묘를 가리켰으며, ‘세자(世子)’라는 글자를 보고서는 자기를 가리켰다. 그 뿐만 아니라, 천(天)·지(地)·부(父)·모(母) 등 63자를 해득하였다. 정사년에 처음으로 서연(書筵)을 열고 《효경》 《소학》의 글을 뽑아 강독하였는데, 궁관의 진독(進讀)하는 것을 해득하고는, 손으로 ‘문왕(文王)’이라는 두 자를 궁관에게 짚어보이었다. 궁관이 소리내어 읽어보기를 청하니, 읽는 소리가 또렷하여 몇 줄을 읽도록 착오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큰 글씨로 다섯 글자를 썼는데 획이 힘차고 바르며 전실(典實)하였다. 궁중(宮中)에서 언젠가 한 번은 팔괘(八卦) 모양의 가루떡을 올렸는데, 이를 들지 않고 말하기를, ‘팔괘를 형상한 떡을 어떻게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복희도(宓羲圖)를 찾아보고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앞에 내걸도록 한 다음, 여러 번 절을 하면서 공경심을 나타내었다. 역학(易學)에 깊이 심취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 해 가을에 비로소 사부와의 상견례를 거행하였다. 천자문(千字文)을 읽다가 ‘사치할 치[侈]’ 자에 이르러서는, 입고 있던 반소매 옷과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구슬 꾸미개를 장식한 모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사치한 것이다.’ 하고는, 즉시 벗어버렸다. 영묘께서 일찍이 비단과 무명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물으니, 무명이 더 낫다고 대답하였으며, 또 어느 것을 입겠느냐고 물으니, 무명옷을 입겠다고 대답하였다. 영묘께서는 이에 기뻐하시고는 여러 신하들을 대하여 이와 같음을 말하였다. 자란 후에는 항상 무명옷을 입었으니, 검소한 덕행은 타고난 품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역적들의 음모에서는 도리어 화를 뒤집어씌울 계제(階梯)로 삼았으니, 이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어느날 하루는 저녁상을 받다가 영묘께서 부르시자, 입안에 넣었던 밥을 즉시 뱉고는 대답을 하면서 일어났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서두르는가?’ 하고 물으니, ‘《소학》에 이르기를 입에 밥을 물었으면 뱉어야 된다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영묘께서는 ‘이제 겨우 세 살 밖에 안 되었는데도 체인(體認)의 공부를 안다.’고 말씀하였다. 무오년에 영묘께서 빈청(賓廳)의 경연(經筵)에 임어하셨는데, 이조 판서 조현명이 앞으로 나서서 아뢰기를, ‘신은 빈청의 경연에 참여하는 관리로서 동궁(東宮)에 있는 세자를 바라보니, 슬기로운 자질이 뛰어나고 영특한 기개가 호방하여, 천고에 보기드문 기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육하는 방법에서 서두르거나 방치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의 성취에 대한 책임은 전하에게 있다고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그후 소조(小朝)가 말씀하시기를 풍원(豊原)058) 의 이 말은 나의 마음에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우를 시종 일관 변함이 없도록 했던 것이다.’고 하였다.

기미년에 영묘께서 묘당에 비망기를 내리어, 을유년의 옛 전례에 따라 임금 자리를 물려주면서 이르기를, ‘내가 즉위한 지 이제 15년이다. 임금 자리를 마치 초개처럼 여기고 있는데, 다행히도 세자가 벌써 만 5세가 되었다. 내가 비록 자리를 내놓는다고 한들 어떻게 백성들을 홀시하겠는가. 송 태종(宋太宗)의 「나를 어떤 데에다 두려는가.」라는 말059) 은 이것이 무슨 마음인가.’라고 하였다. 명령이 내리자, 조정 신하들이 극력 간청하였으므로 그만 중지하고는, 이어 세자에게 명하여 시민당(時敏堂)에서 축하를 받게 하였다. 그것은 임금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바로 취소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여름에 왕대비에게 휘호(徽號)를 올렸는데, 법복(法服)을 갖춰 입고 예식을 진행하는 동안, 동작에 법도가 있어 전연 실수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궁중에서 다들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였다. 기주(記注)를 살펴보면, 궁관(宮官) 조중회(趙重晦)가 소를 올려 말하기를, ‘하늘의 해와 같은 모습을 단번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기에 비상하여 의젓하기가 어른과 같으니, 이것은 정말 하늘이 내신 성인(聖人)입니다. 4, 5일에 한 번씩 요속(僚屬)들을 만나며 8, 9일에 한 번씩 빈객을 만나는 것을 규례로 삼으소서.’ 하니, 그 의견을 따랐다. 이때부터 늘 서연에 나왔는데, 두어 번도 훑어보기 전에 벌써 암송을 해냈으며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임술년에 종묘에 참배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예식이 끝난 다음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곁에 있기에 언제 사묘(私廟)에 갈 것인가를 물었더니, 그가 8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예절을 표시하려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사묘에 나아가 참배하였는데, 도성 백성들이 슬기로운 모습을 바라보고 춤을 추며 환성을 질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예의범절을 익히어 거동함에 착오가 없으니, 신령이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해 3월에 입학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유생의 옷차림을 하고 문선왕(文宣王)에게 술을 따라 올린 뒤 명륜당(明倫堂)에 이르러, 박사(博士)의 자리 앞에 나아가 《소학》 제사(題辭)를 강론하였는데, 반수교(泮水橋)를 빙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던 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한 번은 학문을 강론하다가 강관(講官)이 세자에게 평소에 공부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요(堯)·순(舜)을 배우고 싶을 뿐이고 이밖에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강관이 물러나와 말하기를, ‘삼대(三代) 때와 같은 태평 성대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효제(孝悌)와 성경(誠敬)에 힘쓰라고 권면하는 자가 있자, 즉시 이 네 글자를 써서 자리 곁에 붙여두었다. 강관이, 정성[誠]과 공경[敬]을 공부함에 있어 어느 것이 우선적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를 물으니, ‘정성과 공경은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둘로 가를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궁관(宮官)이 직접 지은 시를 보자고 청하여, 그 가운데 ‘해가 동방에 떠올라 온누리를 비추네.’라는 시구가 있는 것을 보고는, 축하하여 말하기를 ‘이 시구의 기상은 예조(藝祖) 일출시(日出詩)060) 와 꼭 들어맞는다.’고 하였다.

계해년 3월 17일에 관례(冠禮)를 거행하였는데, 법복(法服) 차림으로 임금을 뵙고, 물러나와 백관의 축하를 받았다. 행록(行錄)을 살펴보면, 언제인가 한 번은 영묘(英廟)를 옆자리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영묘께서, ‘우리 나라의 조정 관리들은 예로부터 당파의 논의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만두게 할 수 있는가?’고 물으니, ‘똑같이 보고 함께 등용하면 될 것입니다.’고 대답하였으므로, 영묘는 매우 기특히 여기고 기뻐하였다. 영묘께서 정사를 보면서 간혹 밤이 이슥할 때까지 있으면, 반드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을 기다린 후에야 잠을 잤다. 또 글을 읽을 때면 반드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으므로, 영묘는 늘 그만하도록 하곤 하였다. 병이 나서 영묘께서 임하여 살피시는 경우에는, 반드시 의복을 입고 일어나 앉았으며, 혹시라도 괴로워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궁중기문(宮中記聞)》에 의하면, 갑자년 1월 11일에 혼례(婚禮)를 치렀는데, 영의정인 풍산 홍씨(豊山洪氏) 홍봉한(洪鳳漢)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사흘만에 빈궁(嬪宮)과 함께 임금을 따라 종묘에 참배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에 앞서, 혜성의 이변이 발생하였는데, 혼례를 치를 때가 되자 혜성이 갑자기 없어졌다. 상이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061) 의 편제(篇題)를 써서 궁관으로 하여금 진강(進講)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묻기를 ‘마음을 어찌하여 거울에다가 비기고 정성과 공경을 어찌하여 가는[磨] 일에다 비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공경은 위와 아래를 관철하는 수양이고, 정성은 진실함을 뜻하는 말로서, 정성과 공경이 곧 마음을 다스리는 방도입니다.’고 하였다. 빈객(賓客) 이종성(李宗城)이 이어 이 설을 부연(敷衍)해서 대답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진지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성의에 감동되어 매우 융숭하게 대우를 하였다. 그해 겨울에 상이 편치 않다가 병이 낫게 되자, 진연례(進宴禮)를 거행하였다. 이윽고 강석(講席)에 임하시니, 강관이 묻기를, ‘서연에 나와 글을 읽는 것과 연회에 참가하여 음악을 듣는 것이 어느 것이 더 좋습니까?’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글을 읽는 것은 이치를 탐구하자는 것이고 음악을 듣는 것은 곧 어른을 모시고 즐기려는 것이니, 글을 읽는 것이 좋은 일임은 분명하고 음악을 듣는 것도 좋은 일이다.’고 하였다. 을축년에 상이 상훈(常訓)을 지어 가지고 읽으라고 명하시고는 말씀하시기를, ‘글자의 음을 더듬거리지 않고 읽어내고, 부연해서 대답을 하는 말에도 근거가 뚜렷하니, 이야말로 신령이 말없이 돕고 요속(僚屬)된 자들이 잘 인도한 덕분이다.’고 하였다. 그해 봄에 주강(晝講)을 행하여 《소학》을 강론하면서, 북제(北齊)의 태자(太子)가 고윤(高允)을 두둔한 문제를 놓고 궁관에게 이르기를, ‘태자가 잘못한 것이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 어찌 될 법이나 한 일인가. 고윤이 사실대로 쓴 것은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서의 원칙이고, 죽일 만한 죄가 아니다. 이러한 뜻으로 두둔하다가 태무(太武)가 들어주지 않으면, 그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간해도 될 일이다.’라고 하였다.

병인년 봄에 상을 모시고 후원에서 벼를 심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임금이 묻기를, ‘농사짓는 일이 어째서 힘들다고들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무더운 여름에 물이 펄펄 끓듯이 뜨거운데도 농사꾼들은 농기구를 가지고 일을 하니 그 고생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상이 풍경을 보고 시를 지어보라고 명하시고는, 이어 지은 시를 보고서 말씀하시기를, ‘수구(首句)는 가뭄을 걱정하여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것이고 낙구(落句)는 나더러 덕을 닦으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내 나이가 벌써 쉰을 넘어섰는데도 세자로부터 더 힘쓰라는 말을 들었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갸륵하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이어 야대(夜對)를 행하고 말씀하시기를, ‘오늘 세자의 시를 보니, 뜻이 크고 원대하다. 「큰 비가 내린다.」는 한 구(句)는 대풍가(大風歌)062) 의 기상이 있으니, 나의 마음은 이로부터 믿을 데가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한 번은 궁관과 더불어 신축(辛丑)·임인(壬寅)년에 있었던 일063) 을 논하였는데, 의리(義理)의 근원을 환히 변론하였고, 이어 애일잠(愛日箴)을 내리어 자기의 뜻을 표시하였다. 이때 상이 몸조리를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약원(藥院)의 신하들을 불러 만나보자 부제조(副提調)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어제 세자가 밤이 새도록 곁에서 모시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체로 효도라는 것은 모든 행동의 근본이 되는 것인데, 어린 나이에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진실로 종묘와 사직의 복입니다.’고 하였다. 또 상이 친히 권학가(勸學歌)를 지어 깨우치면서 말씀하시기를, ‘세자가 근래에 다시 글읽기에 열중하여, 비록 밤이 이슥해진 후에도 일어나 앉아 독서를 하고 있다. 내가 잠이 오지 않을 때 세자의 글읽는 소리를 듣노라면, 기운이 한결 솟는다.’고 하였다.

정묘년에 궁중에 천연두가 발생하여 경덕궁(慶德宮)에 피우(避寓)하도록 명하였으나, 매양 삼전(三殿)에 오랫동안 문안을 드리지 못하는 점을 염려하며 지냈다. 어떤 연신(筵臣)이 상에게 이 일을 아뢰자,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린 나이에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씨가 갸륵하다.’라고 하고는, 당장 그날로 임어하였다. 상이 대궐로 돌아올 때 미쳐 또 다시 몸소 문안을 드리겠다고 자주 청하므로, 상이 처소에 돌아오도록 특명하였다. 한 번은 친히 보리를 심으니, 묻기를, ‘심을 만한 물건들이 많은데 기이한 꽃이나 특이한 나무를 심지 않고, 꼭 보리를 심은 의도는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보리는 곡물이므로 그것이 열매를 맺는 것을 보려고 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상이 매우 기뻐하였다.

이해 5월에 상이 환경전(歡慶殿)에 납시어, 빈객(賓客)·춘방(春坊)·계방(桂坊)의 관원들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서연을 열고는 저녁이 다 되도록 강독하고 논란하다가 파하였다. 상이 대단히 기뻐하여 세자궁의 요속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겨울에 또다시 경덕궁으로 피접(避接)하였는데, 이듬해 무진년 봄에 이르러 궁관으로 하여금 문안드리겠다고 청하였으나, 상이 그만두라고 유시하였다. 문안을 드리는 궁관이 갈 때마다, 꼭 부주(附奏)하는 것을 으레 하는 일로 삼았다.

궁관 이이장(李彛章) 등이 고사(故事)를 진언하니, 답하기를, ‘예로부터 훌륭한 임금치고 누구인들 큰 효자가 아니었겠는가마는, 공자께서 유독 우순(虞舜)을 칭찬한 것은, 일반 사람의 심정은 사물의 변천에 쉽사리 동요되지만 우순은 온 천하를 가지고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칭송한 것이다. 거친 밥에 푸성귀를 먹고 살던 때이건, 임금이 되어 비단옷을 입고 거문고를 뜯던 때이건, 우순에게야 무슨 상관이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윤(伊尹)은 이 도(道)로 백성들을 깨우쳤는데, 이 도라고 하는 것은 곧 요(堯)·순(舜)의 도이다. ·은 남보다 먼저 깨달은 자이고 이윤 ·보다 늦게 깨달았으며, 백성들은 그보다 더 늦게 깨달았다. 깨닫는 데는 크고 작음과 얕고 깊음이 있으나, 깨달으면 마찬가지이고 도 또한 마찬가지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백리해(百里奚) 우공(虞公)에게 간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맹자는 그를 슬기롭다고 칭찬하였으나 장남헌(張南軒)은 응당 간해야 되는 자리에 있으면서 간하지 않았다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남의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마땅히 남헌의 설을 옳게 여겨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임금에게 어진이를 좋아하는 성의가 있으면, 한 사람의 군자를 천거하는 것으로 충분히 수많은 소인들을 이겨낼 수 있다. 맹자 설거주(薛居州)가 외톨이로 되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군자가 고립하게 되면 걱정스러운 점이 어찌 일개 설거주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기(氣)는 몸체에 차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잘 가꾸면 요(堯)·순(舜)이 되고 제대로 가꾸지 못하면 도리어 일에 해로우니, 예를 들면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그런 경우이다. 이는 기의 탓이 아니라, 요는 어떻게 가꾸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한 번은 서연에 임어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진 이와 사특한 이가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에는 나라의 흥망이 관계되어 있다. 곁에 있는 여러 대부들과 온 나라 사람들이 다들 말하는 이상, 쫓아내거나 승진시키는 데에 무슨 의심할 게 있겠는가. 그런데도 오히려 신중하게 대하는 것은, 진정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과 공적인 것 사적인 것을 명백하게 구분하지 않을 경우, 여론의 칭송과 비방을 또한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맹자는 뭇사람이 비방하는 중에서도 광장(匡章)을 취하고,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는 중에서도 중자(仲子)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나의 권도로써 판단을 내리고 취사를 한 다음에야, 주견이 흔들리는 것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지 않으면 태아검(太阿劍)을 거꾸로 잡고 반란을 일으키는 화란이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또 서연에 임어하여 맹자가 논한 바, 신하가 되지 아니한 자들에 대해 강론하면서 말하기를, ‘주(周)나라의 덕이 지극하여 온 천하가 다들 복종하였는데, 이러한 때에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아니한 자들은 모두 못된 마음을 품고 백성들을 괴롭힌 자들이다. 천리(天吏)된 자로서 어찌 이런 자들을 정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일의 선비들이 반드시 「주(紂)의 못된 행실을 도와주었다.」거나, 「민심이 상(商)나라를 떠났다.」는 등의 말로 무왕(武王)을 위하여 변명하니, 이는 소견이 좁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선(善)이란 천하의 공리(公理)로서, 성심으로 즐겨 취한다면, 천하의 선은 모두 자기의 것이 된다. 이것은 위대하신 순임금의 지극히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이다. 그러나 아는 것이 명백하지 못하면 남의 착한 것을 알 수 없으므로,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지식을 넓히는 것을 우선시 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마음이란 한 몸의 주재(主宰)인 셈이니, 잠깐 동안이나마 방심해서는 안 된다. 이 마음이 풀어지는 날이면, 무슨 일인들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利)치고 인의(仁義)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것이 《주역(周易)》에서 이른바 ‘의(義)와 이(利)로 천하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맹자가 인의(仁義)만 얘기하고 이를 말하지 않았다는 이는 바로 의(義)·리(利)의 이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공자(孔子)는 「관중(管仲)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은 오랑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맹자는 「관중이 쓰던 패도(覇道)는 증서(曾西) 같은 자도 쓰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는 때에 따라서 상황에 적절하게 한 말로 각각 일리가 있는 것이지, 공자 맹자가 어찌 견해가 달랐겠는가. 성인이 아니고서야 어느 누군들 때를 제대로 파악한 그 뜻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해 여름에 화평 옹주(和平翁主)가 죽었다. 이에 앞서 세자가 태어나시던 초기에 상께서 영빈(暎嬪)에게 말하기를, ‘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는 것이니, 칭호를 정하는 이 초기에 마땅히 그 규모를 크게 하여, 일시의 보고 듣는 것을 존엄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고는, 백일이 지나자 세자에게 명하여 경묘(景廟)께서 전에 거처하시던 전각에 이어하도록 하고, 전각의 이름을 ‘저승전(儲承殿)’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여관(女官)과 시인(寺人)들은 모두 전에 경묘를 섬기다가 갑진년과 경술년에 내보냈던 사람들로 충당하였는데, 그것은 누명을 벗겨 불안해하는 자들을 안심시킴으로써 화기(和氣)를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은 도리어 남몰래 자기들이 득세한 점을 다행으로 여기고서, 얼마 지나지 않자 주둥이를 놀리고 손뼉을 치면서 자기들 무리에게 타이르기를, ‘영빈이 비록 세자를 낳기는 하였으나 이는 사친(私親)이다.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는 만큼 자주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만날 때는 반드시 빈(嬪)으로서 정전(正殿)에 나아가 뵙는 예법을 적용하여 예절과 의식 절차 틈바구니에 제약을 받게 해놓았다. 그리하여 영빈은 자주 가보지 못하고 하루에 한 번이나 하루 건너 한 번, 또는 며칠 건너 한 번 가기도 하고, 간혹 한 달에 한두 번 가기도 하였다. 꾀가 이미 이루어지자 이번에는 또 대조(大朝)께서 자주 임어하시는 것을 꺼리어, 궁궐의 골목에다 사람들을 늘여세워 임금의 동정을 엿보았으며, 날마다 허튼소리를 퍼뜨려 현혹을 시켰다. 세자가 이런 상태를 상에게 자세히 아뢰자, 상이 그제서야 후회를 하였다. 그러나 여관과 시인들은 곧 경묘조 때에 있던 오래된 자들이었으므로 차마 사형에 처하지 못하였으나, 상의 뜻은 자연히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이때에 옹주가 울면서 아뢰기를, ‘일이 경묘와 관계된다는 것은 그 혐의가 매우 적고, 세 종통의 혈맥은 관계된 바가 매우 큰 것인데, 어떻게 일시적으로 혐의를 없애기 위해 사직의 중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 때문에 두 궁(宮) 사이에는 화기가 점차 삭막해지고 있으니, 당장 통곡을 하며 세상을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고, 또 모빈(母嬪)에게 간절하게 간하였다. 이때 상은 집복헌(集福軒)에 있었는데, 저승전(儲承殿)과의 거리가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정묘년이 되자 경춘전(景春殿)에 옮기도록 명하였는데, 그것은 거리가 가까운 편리함을 취하고 옹주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옹주는 갑자기 병이 나더니, 일어나지 못하였다. 세자는 몹시 슬퍼하면서 변고에 대처할 방도를 깊이 찾았는데, 이 일을 아는 바깥 조정의 사람들은 다들 세자가 위태롭다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 조현명(趙顯命),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 우빈객(右賓客) 이종성(李宗城) 등이 위기에 임해 적절하게 호위할 것에 대한 의견을 제기하였다.

기사년 봄에 세자에게 서정(庶政)을 대리(代理)하도록 명하였다. 기주(記注)를 살펴보면, 정월 22일 밤 4경(更)에 상이 한 통의 봉서를 승정원에 내려보냈는데, 그것은 내선(內禪)에 관한 일이었다. 승지가 청대하여 되돌려 올리면서 아뢰기를, ‘조금 전에 덕성합(德成閤)을 지나왔는데, 세자가 벌써 등촉을 밝히고 앉아있었습니다. 그 놀라고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것이 더욱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윽고 세자가 대조(大朝)의 문 밖에 나아와서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입시하여 봉서를 뜯어보니, 처음에는 내선에 관하여 얘기했고 다음에는 대리(代理)에 관하여 언급한 내용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가며 도로 취소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은 세자더러 앞으로 나오라고 재차 명하였다. 세자가 어좌 앞에 나아가 엎드려 목메어 울면서 간곡히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전부터 전례가 있던 일이니 놀라지 말라.’고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아뢰기를, ‘신축년에 정사를 대리하라는 명이 내렸을 때 전하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서연에 임하였는데, 어찌하여 전하는 그날의 전하 심정을 가지고 세자의 오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임금이 비로소 깨닫고 명을 중지하였다. 이어 현명이 아뢰기를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다행히도 도로 취소한다는 승인을 받았는데, 비록 두 번째 문제라고 하더라도 신들이 어찌 감히 받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세자가 여전히 엎드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상이 누차 명을 하자 비로소 물러갔다.

그로부터 6일 후에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대리 조참(朝參)을 행하였는데, 영지(令旨)를 내려 대소 신하들로 하여금 결백한 마음가짐으로 서로 협동하고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보좌하도록 하였으며, 또 제도로 하여금 백성들의 생업을 각별히 보살피도록 하였다. 또 경외의 혼례나 장례를 제 때에 치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관청에서 돌보아주도록 하였다. 우참찬 원경하(元景夏)가 상에게 아뢰기를 ‘신들이 초연(初筵) 때 내린 영지(令旨)를 보니, 누구인들 서로 전하며 고무되어 결백한 마음으로 공경하고 합심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으며,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대리하라는 어명이 내렸을 때, 세자가 얼굴에 눈물이 가득한 채 의롭게 대처하고 예절에 맞도록 한 일에 대하여, 외부 사람들이 듣고서 다들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여겼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세자가 나보다 낫다.’고 한 상의 하교로 인하여, 문수가 세자를 보살필 데 대한 말을 극력 진술하였으며, 또 며칠 뒤에는 인재를 등용하며 백성을 돌봐주는 문제로써 면대(面對)하고 하교하시어 세자로 하여금 법을 따르게 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제왕가(帝王家)의 가법(家法)은 엄격한 것이 비록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줄곧 너무 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의 가법은 본래부터 이러하다. 옛날에 조심하는 마음을 체득하였기 때문에 나 또한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 《궁중기문》을 살펴보면, 서연(書筵)에서 《시경》을 강론하다가 궁관(宮官)에게 말하기를 ‘척호(陟岵) 편(篇)에서 자기가 부모를 생각하는 것은 말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자기를 생각하는 것만을 말하였다. 효자는 부모의 심정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므로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이며, 자기가 부모를 생각하는 심정도 자연히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또 《상서》를 강론하다가 말하기를 ‘요(堯)·순(舜)은 큰 성인인데도 그 신하는 오히려 게을리하지 말고 황탄(荒誕)하지 말도록 경계를 하였다. 신하로서 임금에게 충고하는 도리는 응당 어려운 일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니 임금이 ·에 미치지 못하는데도 신하가 바른 말을 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은(殷)나라의 세 임금과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은 안일하지 아니한 까닭에 나라를 오랫동안 유지하였고, 순임금은 사람을 등용하여 일을 맡긴 까닭에 편안하여 임금 자리에 가장 오래 있었다. 이것이 비록 다른 것 같지만, 안일하지 않아야만 편할 수 있는 법이니, 임금의 도리에 있어 안일하지 않는 것을 제쳐두고 다른 무엇을 취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경오년 8월에 의소 세손(懿昭世孫)이 태어났으므로, 종묘에 고하고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다. 행록을 살펴보면, 9월에 영묘께서 온천에 거둥하였는데, 그 이튿날 비가 내렸다. 서울에 남아있는 대신(大臣)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을 불러 이르기를 ‘대가(大駕)가 떠나자마자 어제 비가 많이 내렸으니, 성상의 체후가 손상되셨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애가 타고 답답하여 경들을 불러 만난 것이다.’라고 하고는, 이어 서울에 머물러 있는 군사들을 위로하라고 명하였다. 이때로부터 대궐에 돌아올 때까지 거의 20일 가까이, 밤이면 옷을 단정히 가다듬은 채로 아침까지 밤을 새워 걱정하면서, 오랫동안 천안(天顔)을 뵙지 못하는 것 때문에 밤낮 그리워하며 걸핏하면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곤 하였다. 궁중에서 이를 매우 의아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내가 태어난 이후로 부모와 처음 멀리 떨어지고 보니, 어버이가 그리운 마음에서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상의 수레가 돌아와서, 영묘께서 이 얘기를 듣고는 ‘세자의 일은 늘 상상 밖이다.’고 말씀을 하시었다.

기주(記注)에 의하면, 신미년 가을에 제도에 돌림병이 극성하자, 영지(令旨)를 내리어 방백(方伯)들에게 특별히 보살피고 돌봐주도록 신칙하였다. 임신년 봄에, 대조(大朝)께 존호(尊號)를 올리는 문제로 여러 날 정청(庭請)을 하니, 상이 황단(皇壇)에 나아가 청명(請命)하는 거조를 행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울면서 내전(內殿)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세자가 편복(便服) 차림으로 걸어나가서, 임금 앞에 이르러 울면서 간청해 마지않으니, 자전(慈殿)에게만 존호를 올리라고 명하였다. 상이 내전으로 돌아오자 세자가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날이 샐 때까지 합문(閤門)에 엎드려 있었다.

이해 3월에 의소 세손이 죽었는데, 세자는 스스로 마음을 다지어 슬픔을 억제하고, 위로 삼전(三殿)을 위로하였다. 9월에 원손(元孫)이 태어나자 하교하기를 ‘오늘의 경사는 경오년의 경사보다 낫다.’고 하였다. 겨울에 세자에게 홍역의 증세가 있었으므로 약원(藥院)이 직숙(直宿)을 하였는데, 인접할 때이면 반드시 예절을 차리었다. 여러 신하들이 침실에서 누워 접견할 것을 청하자 ‘겹옷 하나 걸치는 것이 뭐가 어렵다고 신하들을 누운 채로 만나겠는가.’고 하였다. 이 무렵 조정의 의논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영묘께서 약을 물리치니, 세자가 승지에게 말하기를 ‘내가 4년 동안 대리(代理)하면서 성교(聖敎)를 몸받지 못하여 약을 물리치는 일까지 있게 하였으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약을 먹겠는가.’라고 하였다. 11월에 상이 어떤 일로 격해져서 전선(傳禪)하겠다는 하교를 내렸다가 금새 도로 취소하였다. 12월에 송현궁(松峴宮)에 행차하여 또 전선(傳禪)을 명하였고, 며칠 후에는 선화문(宣化門)에 나아가 앞서의 명을 다시 선포하였다. 세자가 엎드려 눈물을 떨구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청명(請命)을 하였는데, 이마에서 흘러 떨어진 피가 자리를 적시었다.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세자가 비오듯 눈물을 흘리니, 그 성의와 효성이 지극합니다. 전하께서 이미 취소하도록 허락하신 이상 식언(食言)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추운 겨울에 감기라도 걸릴까 몹시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중한 병을 앓고 난 후인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종성 등을 중도 부처(中途付處)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어가가 육상궁(毓祥宮)에 가니, 세자가 옷자락을 잡고 극력 요청을 하려 했는데, 상은 즉시 행차를 돌려 창의궁(彰義宮)으로 가서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이날 밤 세자가 걸어서 대궐문 밖에 나아가 상소하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새벽까지 명을 기다리다가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가 도로 취소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는, 서둘러 궁궐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그 다음날 밤에 또 대궐문 밖에 나아가서 엎드려 있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돈화문(敦化門) 밖에 물러가 거적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렸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날 계속하였다. 상이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행궁(行宮)으로 가려 하자 세자가 울면서 승지에게 말하기를 ‘나의 죽고 사는 것이야 진실로 돌아볼 것도 못되나, 이처럼 몹시 추운 때를 당하여 성체(聖體)에 바람을 쏘이니, 마음이 칼로 에이는 듯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하고는, 즉시 약원(藥院)의 신하로 하여금 상에게 인삼차를 다시 올리게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상이 비로소 대궐로 돌아왔으며, 앞서의 명을 취소하였다.

《궁중기문》을 살펴보면, 이 무렵 화협 옹주(和協翁主)의 상사(喪事)가 있었는데, 애통하고 아쉬움을 억제하지 못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 누이에 대해 각별히 고념(顧念)하는 정이 있는데, 이제 갑자기 죽었으니 이 슬픔을 어디에다 비기겠는가. 직접 가서 슬픔을 쏟아내지 못하는 처지가 나의 지극한 아쉬움이다.’라고 하였다. 계유년 정월에, 영의정 이종성이 탄핵을 당하여 성밖으로 나갔다가, 3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향리(鄕里)에 돌아갔다. 이때에 문녀(文女)064) 가 잉태를 하였으므로 중외가 뒤숭숭하였는데, 이종성이 호위하자는 논의를 극력 주장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하마터면 딴 뜻을 품은 자들에 의해 배척을 받을 뻔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너무도 모해(謀害)가 더욱 심해져서 종성은 성문 밖까지 물러나갔으나 끝내 향리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3월 초에 문녀가 딸을 낳자 비로소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은 만큼, 시속 사람들이 내쫓으려 한다는 이유로 나의 평소 뜻을 움직일 수는 없다. 설사 주먹질과 발길질을 번갈아 퍼붓더라도 오직 나아가는 것뿐, 물러설 수는 없다. 한 번 죽으면 그만일 따름이다. 이제는 다행히 옹주가 태어났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내가 귀향할 결심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고는, 드디어 글을 올려 향리로 돌아가겠다고 고하였다. 이에 세자가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제아무리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더라도 문녀의 일에 대해서 나는 결코 그런 일이 없다고 장담한다. 설사 그런 일이 있더라도 일월처럼 밝으신 대조(大朝)께서 어찌 준엄한 꾸지람을 내리지 않으리라 걱정하겠는가. 단지 뭇신하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염려를 상신(相臣) 덕분에 진정시킬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해 겨울에 명을 받들어 사형수(死刑囚)들을 세 번 심리하였는데, 죽지 않고 목숨을 보전하게 된 자들이 많았다. 이후로는 해마다 이렇게 하였다. 밤에 궁관을 불러 강론을 하다가 자정이 되자, 공물로 올라온 귤을 궁관에게 하사하였다. 귤을 다 먹자 쟁반 안에 시(詩)가 있었는데, 궁료들이 즉석에서 차운시(次韻詩)를 지어 화답하였다.

갑술년에 각도로 하여금 환곡(還穀)이 많은 데에서 모아 부족한 쪽을 보태주는 정사를 거행토록 함으로써, 백성들의 고통스런 폐단을 없애도록 하였으며, 대동 군포(大同軍布)를 돈으로 대납(代納)하는 방납(防納)은 금지시켰다.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재예(齋隷)가 임금이 하사한 은 술잔을 가지고 밤에 나오다가 순찰 도는 군졸에게 붙잡혔다는 이유로, 드디어 식당(食堂)에 들어가는 일을 중지하니, 하교하기를 ‘대조(大朝)께서 유생들을 중시하는 덕의(德意)가 얼마나 큰데, 감히 하찮은 일로 소란을 일으키어 성인의 사당에 사람이 없게 해서야 되겠는가. 병조의 장관을 엄중히 문책하겠다.’라고 하고는, 재유(齋儒)들을 권하여 들어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일찍이 《논어》를 강론하다가 삼월 불위(三月不違) 장에 이르러, 강관이 아뢰기를 ‘이는 공자(孔子)의 말씀인 만큼, 안자(顔子)의 이름을 휘(諱)하는 것은 부당합니다.’고 하니, 말씀하기를 ‘공자가 말을 했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은 하대의 사람이다.’ 하고는, 드디어 휘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또 영지(令旨)를 내리어 밖에 있는 서연관들을 모두 참가하게 하고는 사물잠(四勿箴)을 강론하다가 말씀하시기를 ‘대저 사욕(私慾)이 일어나는 데에는 크고 작은 것과 얕고 깊은 것이 있지만, 하찮은 잘못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점차 큰 과오를 빚어낸다면, 그 해로움은 마찬가지이다. 소열제(昭烈帝)가 말하기를 「자그마한 악(惡)이라고 해서 그 악을 저지르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야말로 더없이 지당한 말이다.’고 하였다. 상께서 이를 들으시고 가상히 여기어 ‘학문을 강론한 효력이 참으로 얕지 않다.’고 하였다. 또 《소학》을 강론하면서 말하기를 ‘애연(藹然)하게 사단(四端)이 느낌에 따라 나타나는데, 일단 나타나게 되면 넓게 확충해야 되며,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도 모름지기 공경을 위주로 삼는 공부가 있어야 한다. 발로되지 않았을 때에 공경을 위주로 한 다음에야 절도에 알맞게 발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공경한다는 것의 뜻을 먼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손사막(孫思邈)이 이르기를 「마음은 조심하면서도 담이 커야 한다.」고 하였다. 무왕(武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맹진(孟津)을 건넌 것은 바로 씩씩한 기상이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밤낮으로 두려운 심정이다.」고 하였으니, 성인의 심소 담대(心小膽大)한 점을 여기에서 역시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겨울에 날씨가 추우니,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을해년 역변(逆變) 때 상이 장전(帳殿)에 납시어 죄수들을 국문하면서, 세자더러 옆에서 모시라고 명하고는 하교하기를 ‘신축년과 임인년에 상소하였던 여섯 명의 역적과 구(耉)·휘(輝)065) 를 이제야 비로소 역률(逆律)을 소급해 시행하였다. 이제부터 의리가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으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강목(綱目)》을 강론하다가 말하기를 ‘즉묵성(卽墨城)이 굳게 버티어 함락당하지 않은 일은, 위왕(威王) 때 상을 받은 대부(大夫)가 일찍이 보장책(保章策)을 시행한 공이 있어, 이 날에 그 힘을 본 것인 듯하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임금의 총애를 받는 아홉 신하가 이미 전단(田單)을 참소하였건만, 오직 초발(貂勃)만이 그의 억울함을 해명하고 나섰다. 이때 제(齊)나라 임금은 의당 「전단에게 사심(私心)을 두어 두둔하는 것이 아닌가.」고 의심을 했을 법한데, 의심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등용을 하였으니, 제나라 임금은 참으로 현명한 군주이다.’라고 하였다. 또 민지(澠池)의 회합에 대하여 논하기를 ‘협곡(夾谷)에서 만났을 때 공자가 예의로써 임금을 인도한 결과 제(齊)나라 임금이 겁을 먹고 감히 노(魯)나라에 위협을 가하지 못하였다. 과연 상여(相如) 공자처럼 처음부터 예로 따졌다면 반드시 이와 같이 힘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어진 임금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도 황(黃)·로(老)를 숭상하고 상기(喪期)를 단축하는 제도를 정하였으며, 가의(賈誼) 같은 훌륭한 인재가 있는데도 등용하지 못하였으니, 끝내 후세의 기의(譏議)를 면하기 어렵다. 다만 가의의 상소문은 한갓 시정(時政)의 득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본질적인 병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동자(董子)가 주장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논의」에다 비교할 때 자연히 차등이 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당(唐)나라 현종(玄宗)은, 조정의 일은 재상에게 맡기고 변방의 일은 장수한테 맡기고는, 「내가 다시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옛날에 이른바 「어진 인재를 찾아내는 데에 애쓰고, 그에게 모든 일을 맡기는 데서 몸이 편하게 된다.」는 것과 서로 어긋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현종은 어진 이를 찾아내는 데에 애를 쓰지 못하고, 단지 사람에게 맡기면 편하다는 것만을 안 나머지 천보(天寶) 연간의 난리066) 를 초래하였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가 한휴(韓休) 소숭(蕭嵩)을 논할 때 곁에 있던 신하들에게 사적으로 얘기를 한 것은, 그가 이미 성심껏 어진 이를 좋아하지 못하고 억지로 거스르는 뜻이 있었으니, 이것은 계속적으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 아니다. 그 정치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으리라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위(衛)나라의 사군(嗣君)은 선대 임금이 물려준 토지를 일개 죄수와 바꾸었는데, 법을 세운 것은 엄격하였으나, 경중을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악의(樂毅)가 제(齊)나라를 정벌할 때, 극신(劇辛)은 고립된 군대를 끌고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논란을 하였다. 그러나 위(魏)나라는 송(宋)나라를 공략(攻略)하고, 조(趙)나라는 하간(河間) 지역을 거머쥐어, 충분히 제나라의 군대를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거에 성공을 하였다. 이 때문에 병법에서는 형세를 살피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해 여름에 날씨가 무더우니 궁관이 서연(書筵) 시각을 개정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명령하기를 ‘아침 저녁에는 조금 선선하므로 글읽기에 알맞을 뿐 아니라, 대조(大朝)께서 한낮에 주강(晝講)을 하시는데, 내가 어찌 감히 더운 것을 꺼리어 시각을 고치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허락하지 않았다. 서연관 송명흠(宋明欽)이 현(縣)의 관원이 되어 하직 인사를 하니, 특별히 소대(召對)를 명하여 《대학(大學)》의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내용을 토론하였는데, 조용하게 주고받는 말이 마치 메아리와 같았다. 송명흠이 말하기를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설을 송(宋)나라 황제는 듣기 싫어하였는데, 저하(邸下)께서는 심오한 뜻을 밝히면서 꾸준히 힘쓰고 게을리하지 않으니, 여기서 저하가 학문에 진실한 마음으로 노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또 《맹자(孟子)》를 강론하다가 궁관에게 말하기를 ‘우(禹)임금 용사(龍蛇)를 내몰아 진펄에다 살게 하였는데, 는 어떻게 용사를 내몰았는가. 가 이미 물길을 터서 길을 뚫음으로써 늪을 진펄로 만들고 나자 물이 흘러가는 곳으로 용사가 따라간 것으로서, 이는 저절로 내몰아 쫓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세가 그러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성인이 때를 살피고 기미를 살피어 어디를 들어가든지 터득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도 역시 그 형세에 순응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진퇴(進退)와 존망(存亡)의 기미를 아는 것은, 시중(時中)의 성인이다.’라고 하였다.

병자년 5월 낙선당(樂善堂)에 화재가 났다. 기주(記注)를 살펴보면, 세자가 영지(令旨)를 내리어 ‘불초한 내가 외람되게 대리(代理)를 받든 지가 벌써 8년이 되었으나, 어느 일 하나 성상의 뜻을 제대로 받든 것이 없이 늘 성상의 마음에 걱정만을 끼쳐드리며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신하들을 대하기가 참으로 부끄럽다. 다행히 우리 성상의 지극하신 인애(仁愛)에 힘입어 지내고 있는데, 삼가 어제의 하교를 받들자, 감격과 송구스러움이 교차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조정에 있는 대소 신하들은 나를 변변치 못하다고 보지 말고, 일에 따라 올바르게 바로잡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상이 그것을 듣고 하교하기를 ‘세자의 자신을 탓한 말이 어찌 덕이 없어서 그리된 것이겠는가. 조상의 신령이 돌보아주심을 받은 셈이니, 대소 신하들은 우리 세자의 이 뜻을 몸받아 지성으로 보좌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궁중기문》에 의하면, 세자가 본디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는 점은 궁중의 대소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데, 이때에 그와 상반된 말이 돌았다. 세자는 성인의 가르침에 힘쓰지 못했다는 내용의 지시를 내리어 반성하면서 자책을 하였고, 또한 술을 지나치게 마셨다고 상 앞에 말씀드렸다. 이때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없는 일을 있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성실하지 못한 것이 된다.’고 말하자, 답하기를 ‘지극히 인자하고 지극히 명철하신 전하께서 스스로 그것의 허실을 판별할 수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스스로 변명하는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고 하였다. 얼마 후에 상이, 세자가 영지(令旨)를 내리어 자신을 책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이런 말이 나도는 것은 모두 나의 잘못이다.’고 하면서 누차 감격하고 깨닫는 의사를 드러내 보였고, 그뿐만 아니라 성의(聖意)를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다.

이에 앞서 화재가 발생한 이튿날 상이 여러 신하들을 꾸짖어 말하기를 ‘근래의 일을 나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조정 신하들 중에 믿을 만한 자가 없다.’고 하니, 적신(賊臣) 김상로(金尙魯)가 대답하기를 ‘세자도 역시 두렵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승지에게 물으니, 승지 이이장(李彛章)이 아뢰기를 ‘세상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장차 이런 신하를 어디에다 쓰시렵니까.’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옳다. 승지가 한 말이 과연 옳다.’라고 하였다. 이장이 또 아뢰기를 ‘아비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들이 간하지 않는 적이 없는 법이니, 그래서 옛말에 이르기를 「아비에게 간쟁하는 아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비로서 나무라지 않는 적이 없는 법이니, 그래서 옛글에 이르기를 「어진 아버지와 형이 있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부자간에 잘못이 있으면 간하고 나무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성인이 이른바 「아비는 아들을 위하여 허물을 숨겨주고 아들은 아비를 위하여 허물을 숨겨준다.」는 것은, 간쟁하고 책망을 하되 다른 사람들이 그 간쟁하고 책망하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허물을 숨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하신 말씀은 실로 성인의 「허물을 숨겨준다.」는 말과는 어긋나는 점이 있으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라고 하였다. 상이 드디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아뢴 말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승지 같은 사람은 이처럼 걱정을 하지만, 고약한 무리들은 반드시 듣고서 기뻐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장은 오히려 본사(本事)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정도로만 아뢰고 말았던 것이다. 세자의 영지(令旨)가 먼저 내리고 임금의 전교(傳敎)가 뒤이어 내리자, 궁중과 외정(外廷)에서 이를 들은 사람들은 서로를 축하하여 말하기를 ‘감동하고 깨닫게 된 것은 성상의 인자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감동하고 깨닫게 만든 것은 역시 세자의 효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영지(令旨)를 내리어 올곧은 말로 극력 간할 것을 구하였으며, 중외에 신칙하여 농사를 장려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였으며 백성들의 고충을 알아보았다. 이해 겨울에 두환(痘患)을 앓다가 회복되자, 축하를 올리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정축년 2월에 정성 왕후(貞聖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세자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 슬퍼 어쩔 줄 몰랐다. 빈소를 차릴 때부터 발인을 할 때까지 다섯 번의 전(奠)과 일곱 번의 곡(哭)을 할 때마다 죄다 친히 참가하여 그 성의를 나타내었고, 밤낮으로 울음소리를 거의 그치지 아니하였다. 왕실 친척들과 의식을 거드는 집사(執事)들이 다들 감격하여 찬탄하였으며, 중외에서도 이를 듣고 역시 눈물을 훔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슬픔에만 겨워 지내지 않고 있는데, 지금 세자가 깊이 슬퍼하는 것을 보니 어찌 슬픔을 누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아뢰기를 ‘지난번 성후(聖候)가 불편하셨을 때 숭문당(崇文堂)에 입시하였다가 삼가 동궁을 우러러보니 밤새도록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큰 병환이 생길까 염려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감정대로 슬퍼하게 놔둔다면, 틀림없이 몸을 손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보살피셔야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해 3월에 인원 왕후(仁元王后)가 또 세상을 떠나자, 상이 정도에 지나치게 슬퍼하였는데, 세자가 곁에서 모시면서 정례(情禮)를 다하여 위로를 하였다. 6월에 정성 왕후를 발인하였다. 궐문 밖에 이르러 곡을 하면서 하직하였는데, 그 슬퍼함이 좌우를 감동시켰으며, 서울의 사녀들이 서로들 모습을 보려고 눈물을 훔치며 앞을 막았다. 길잡이들이 그들을 밀쳐내자, 사람을 다칠까 싶으니 그만두라고 지시하였다. 우반(虞返) 때가 되자 교차(郊次)에서 신연(神輦)을 맞이하여 한동안 슬피 곡을 하였는데 자리에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고, ‘장례 행렬이 나의 의장(儀仗)과 서로 막히어 바라볼 수가 없으니, 대오를 나누어서 가게 하라.’고 하였다. 유궁(幽宮)의 지문(誌文)을 친히 지어 간직해 두었는데, 바깥 신하들은 모두들 그 일을 알지 못하였다. 그 뒤로 본래 앓던 병이 매우 위독하였으나, 병을 무릅쓰고 두 혼전(魂殿)에 일곱 번의 우제(虞祭)와 삭망제(朔望祭)를 거행하였는데, 병이 위독해질수록 슬픔도 더욱 더하였다. 이때 보덕 윤동승(尹東昇)이 보살피면서 주선한 힘이 매우 컸는데, 매번 말하기를 ‘동승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나의 정리를 환히 드러낼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기주(記注)를 살펴보면, 무인년 가을에 상이 혼전(魂殿) 뜰에 엎드리어 구두로 주달(奏達)하였는데, 감히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으며,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를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에 도승지 채제공(蔡濟恭) 등이 여러 승지와 사관들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전하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신하된 자로서 감히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차마 보지 않아야 하는 일이니, 누가 감히 붓을 잡고 기주(記注)에 옮겨 적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되돌려 올리고, 물러가 엎드리어 처단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이어 소매 속에서 구두 주달(奏達)의 등본(謄本)을 꺼내어, 무릎을 꿇고 상의 앞에 놓았다. 한참 지난 후에 상이 이르기를 ‘말인즉 옳다. 내가 마땅히 받아들이겠다.’라고 하였다.

이달 그믐에 상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임어하였는데, 세자는 시민당(時敏堂) 뒷뜰에 거적자리를 깔고 대죄(待罪)하였다. 영부사 이종성(李宗城)이 구대(求對)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40년 동안 학문에 힘쓰고도 이제 군신 부자간에 처신을 이렇게 하시니, 이것을 신이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또 나를 탓하니, 나는 장차 물러가겠다.’라고 하면서 이어 일어서려고 하였다. 대신이 영부사가 한 말이 뜻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품고 있는 생각을 다시 진술하게 할 것을 청하자, 종성이 다시 말하기를 ‘신의 말이 뜻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신하로서의 의(義)는, 대조(大朝)에 있으면 임금의 잘못에 대하여 충고하고, 소조(小朝)에 있으면 세자의 잘못에 대하여 충고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일에 대하여, 신들의 심정은 물론이고 비록 모든 군사와 만백성이라고 하더라도 목을 빼고 죽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는 것은, 그가 우리 임금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에게 종묘 사직과 신인(神人)이 의탁해 있기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바라는 것은 오직 과실(過失)에 대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고, 불행하게 과실이 있더라도 또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천리나 인정상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는 이유를 말할 것 같으면, 바로 그가 우리 임금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전하와 동궁은 바로 한 몸이나 같은데 어떻게 둘로 나눌 수가 있겠습니까. 한 몸을 둘로 나누어 보시니, 이것을 신이 안타깝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고는, 이어 간사한 자들을 멀리하고 참소하는 자들을 물리칠 데 대하여 말머리를 꺼낸 후, 다 마치지 않은 채 물러갔다. 제공이 여러 대신들과 함께 시민당 뜰에 돌아와서 세자를 만나니, 세자가 자신을 탓하고 도움을 바라는 하교를 내리므로, 종성 제공이 성의를 쌓아 임금의 마음을 돌려세울 방도에 대하여 번갈아가며 진술하였다.

《궁중기문》에 의하면, 이듬해 정월 영부사 이종성이 죽었는데, 죽을 무렵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제대로 죽을 수 없게 될 듯하다. 낙선당(樂善堂)에 입시하여 죽음으로써 스스로 밝히려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고, 명정전(明政殿)에 입시하여 또 죽음으로써 통렬히 진술하려 하였으나 그만 지레 물러나왔는데, 이제는 다 끝났다. 살아서는 나라를 저버린 사람이 되었으니, 죽어서는 눈을 감지 못하는 원혼(冤魂)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보고가 들어가자, 상이 놀라면서 오랫동안 슬퍼하고 아깝게 여기었다. 세자는 흰 띠를 두르고 소선(素膳)을 들었으며, 성복(成服)하는 날까지 고자(孤子)를 보살피고 제수(祭需)를 하사하기를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 기묘년에 세손(世孫)의 책례(冊禮)를 행하였고, 중궁(中宮)의 책례를 행하였다. 행록(行錄)에 의하면, 세자는 중궁을 정성 왕후(貞聖王后)와 똑같이 섬겼으므로 궁중에서 모두들 효성(孝誠)이 독실하다고 우러러 보았으며, 영묘는 감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세자가 내전(內殿)을 모시는 것을 보니, 참으로 사람들이 트집을 잡을 수 없겠구나.’라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내전도 더없이 세자를 사랑하였다.

이 해에 훈국(訓局)에 《무기신식(武技新式)》을 반포하였다. 《궁중기문》을 살펴보면, 세자는 유년 시절부터 지도(志度)가 이미 뛰어나 놀이를 할 때면 반드시 병위(兵威)를 진설하곤 하였다. 상이 시험삼아 그의 소질을 떠보려고 물어보면 조목조목 대답을 해내곤 하였는데 매우 상세하였다. 일체의 행동 거지와 임기 응변하는 방도를 모두 손으로 그리고 입으로 대면서 혹시라도 어긋나는 경우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병가(兵家)의 서적을 즐겨 읽어, 속임수와 정당한 수법을 적절하게 변화시키는 묘리(妙理)를 은연중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에 납시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는데, 그때에 쓰던 청룡도(靑龍刀)와 쇠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여직껏 저승전(儲承殿)에 있었다. 그것을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하였건만, 세자는 15, 16세부터 벌써 모두 들어서 썼다. 또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여 화살을 손에 쥐고 과녁을 쏘면 반드시 목표를 정확히 맞췄으며, 고삐를 잡으면 나는 듯이 능숙하게 말을 몰았고, 사나운 말도 잘 다루었다. 그러자 궁중에서 서로들 말하기를 ‘풍원군(豊原君)이 연석(筵席)에서 효묘(孝廟)를 빼닮았다고 한 말에는 과연 선견 지명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때 장신(將臣)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여, 책 하나를 엮어 이름을 《무기신식(武技新式)》이라고 달아 반포하였다. 이는 대체로 척계광(戚繼光)의 책에 실려 전하는 무예가 단지 여섯 가지 기예뿐으로서 곤봉(棍捧)·등패(籐牌)·낭선(狼筅)·장창(長槍)·당파(鐺鈀)·쌍수도(雙手刀)인데, 연습하는 규정에 그 방법이 대부분 잘못되었으므로, 옛책을 가지고 모조리 고증하여 바로잡았다. 또 죽장창(竹長槍)·기창(旗槍)·예도(銳刀)·왜검(倭劒)·교전 월도(交戰月刀)·협도(挾刀)·쌍검(雙劒)·제독검(提督劒)·본국검(本國劒)·권법(拳法)·편곤(鞭棍) 등 열두 가지 무예를 새로 만들어 도식을 그려가지고, 찌르고 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 책을 전서(全書)로 편찬하여 훈국(訓局)에 주어 연습하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좁아서 군사를 쓸 땅이 없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왜(倭)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오랑캐와 이웃하였으며, 서쪽과 남쪽은 큰 바다이니, 바로 옛날의 중원(中原)인 셈이다. 지금은 비록 변경에 경보가 없지만, 마땅히 위험에 대비하는 태세를 구축하여야 한다. 더구나 효묘(孝廟)께서 뜻하신 일을 실현할 데가 없는 데다가, 북쪽 동산[北囿]의 한 자 되는 단(壇)은 나를 자다가도 탄식하게 한다. 아, 병기(兵器)는 비록 아무 걱정거리가 없이 편안한 시기라고 하더라도, 성인들은 오히려 만들어 둠으로써 갑작스런 외적을 대처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나라에는 효묘께서 결심하신 일까지 있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도간(陶侃)이 매일 벽돌 1백 장씩을 날랐다는 말067) 을 외울 때마다 고요한 밤 한가한 때이면, 문득 스스로 시험하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의술이라는 것은 의심을 하는 것이다. 사람의 장부(臟胕)와 심장·간장을 비록 모조리 알기는 어렵지만, 모색(摸索)하고 유추(類推)하면 역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니, 나라를 치료하는 수법은 논할 것도 없거니와, 진실로 약재(藥材)의 성질을 대강 알고 맥(脈)의 이치를 약간 안다면, 하루에 한 사람을 고치고 이틀에 두 사람을 고치면서 점차 숙련되어 자연히 한때의 명의가 될 것이다. 선비들의 학문도 의심을 가지는 데로부터 의심이 없어지도록 하는 것인데, 더구나 의원이 의심을 가지고 의심을 풀어나가는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처방만 내리면 당장 효험을 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하찮은 재주라고 하여 유의하지 않았다.

또 말하기를 ‘옛날에는 의복 제도가 각기 상징하는 것이 있었다. 지금 말하는 창옷[氅衣]과 소매가 둥근 옷[圓袂衣]을 나는 일찍부터 싫어했다. 창옷은 세 면이 막히고 뒤폭만 터졌는데, 그 형상이 음에 속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중국은 양에 속하고 이적(夷狄)은 음에 속한다.」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창옷 제도가 나오자 비로소 북쪽으로 건주위(建州衛)와 통하는 조짐이 발생하였다. 둥근 소매 옷은, 앞면은 두 폭을 겹치고 뒤에는 한 폭을 늘어뜨렸으니, 이 역시 남쪽을 향하고 음을 등지는 뜻이 아니다.’ 하였다. 한가롭게 지낼 때이면, 반드시 와룡관(臥龍冠)을 쓰고 학창의(鶴敞衣)를 입는데, 학창의는 사마광(司馬光)의 심의(深衣)를 모방한 것이었다.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정복(正服)은 깃이 둥근 옷[團領]과 철닉[帖裏]인데, 깃이 둥근 옷은 바로 제왕들이 회동(會同)할 때 입는 옷이고, 철닉은 바로 황제(黃帝)의 의복 제도이다. 군복(軍服)의 경우, 소매가 좁은 것은 모두 옛 제도를 숭상한 것이고 싸울 때에 입는 옷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근래의 습속(習俗)에서는 미리 마련해두는 계책과 근검 절약하는 도리를 모른다. 미리 마련해두면 걱정이 없어지고, 검박하게 지내면 재물이 넉넉해진다. 지금의 의복과 그릇들 가운데, 화려하여 사치스런 감이 있거나 산뜻하여 몸에 편리한 것들을 나는 가까이한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궁궐 안의 사람들 가운데 자기네들의 잘못을 나에게 와서 알려주는 사람이 있기에, 고발한 사람과 고발당한 사람을 서로 대질시켜, 만약 증거가 없을 경우 고발한 사람을 죄주고, 설령 그런 사실이 있더라도 반드시 양쪽을 다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부터 남의 허물을 고자질하는 일이 조금 가라앉았다.’라고 하였다.

사직(司直) 박치원(朴致遠)이 글을 올려 힘쓸 것을 진언하니,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답하였다. 후에 중신(重臣) 서지수(徐志修)가 연석(筵席)에서 진계(陳戒)한 것과 관련하여 말하기를 ‘이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전후로 세자의 덕(德)에 관련된 말을 한 자들은 다들 장려하는 말씀을 받았다.

일찍이 계방(桂坊)의 나삼(羅蔘)이 전에 서연(書筵)에서 입바르고 강직한 말이 많았다 하여 후에 궁료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안부를 묻곤 하였다. 하루는 궁관(宮官)이 시사의 염려스러운 것에 대하여 물어보는 자가 있자, 매우 엄하게 나무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두 궁(宮)을 이간시키는 것이다. 도적이란 지목은 바로 이런 무리들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주(記注)에 의하면, 이때에 대궐 하인들 중에 영(令)이 내렸다는 핑계하에 민간에 나가 횡포를 부리는 자가 있었는데, 그 일이 드러나자 즉시 유사(有司)에게 넘기게 하고는, 이어 영지(令旨)를 내리기를 ‘근래에 기강이 해이해지고 있는데, 이후로도 이런 폐단이 없을지 알 수 없다. 다시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법사(法司)가 곧장 스스로 판단하여 잡아다 다스리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진년 가을에 상이 경희궁(慶熙宮)에 이어(移御)하였다. 7월에 온천에 행행하였다가 8월에 환궁하였다. 행록을 살펴보면, 이때에 세자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으므로 영묘께서 온천에 가서 목욕하라고 명하였다. 행차가 강가에 이르니 물이 불어나서 뱃길이 안전하지 않으므로, 날이 저문 후에야 비로소 건넜다. 배 위에서 궁관 이수봉(李壽鳳) 등과 함께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는 설(說)을 강론하였다. 그 이튿날 수원부(水原府)에 이르렀다. 부의 소재지 북쪽에 화산(花山)이 있었는데, 바로 기해년에 영릉(寧陵)을 표지해 둔 곳이었다. 거기에 올라가서 두루 둘러보고 좋은 곳이라고 감탄을 한참 하다가 처소에 돌아왔다. 산성에서 무예를 열병하였다. 행차가 지나는 길가에서, 부로들이 에워싸고 막아서서 다투어 바라보면, 번번이 행차를 멈추고 질고를 물어보고는 조세와 부역을 감해주라고 명하였으므로, 일로가 크게 기뻐하였다. 어느 호위 군사의 말이 달아나 콩밭에 들어가서 마구 짓밟고 뜯어먹었는데, 지방관을 불러 밭 주인에게 값을 후하게 갚아주라고 하였으며, 호위 군사의 죄를 다스렸다. 고을 안의 나이 많은 자들을 돌봐주었으며, 시골에 파묻혀 있는 선비들을 간곡히 불렀다. 온천에 도착하여서는 날마다 강론하는 자리를 열었는데, 역대 임금들이 온천에 갔을 때에 옥당의 관원을 소대하던 옛일을 따른 것이었다. 절구시(絶句詩) 1수를 내리어 궁관에게 화답하라고 지시하였다.

달이 바뀌자, 망궐례(望闕禮)를 행하는 것의 당부(當否)를 궁료에게 묻고, 이어 말하기를 ‘오랫동안 서울 궁궐을 떠나 있자니, 그리운 심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날 드디어 행차를 돌렸으며 곧바로 경희궁에 나아가 문안 인사를 올리려 하였는데, 영묘 지신(知申)068) 을 보내어 성밖에서 마중하여 유시(諭示)하기를 ‘앓고 난 뒤에 말을 달려 왔으니 마땅히 바로 돌아가서 몸조리를 하고, 조금 지난 후에 차차 와서 만나도록 하라.’고 하였다. 상신(相臣)이 나아가 뵙고 아뢰기를 ‘학어(鶴御)069) 가 한 번 임하자, 호중(湖中)의 인사들이 비로소 세자의 덕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부로나 서인들치고 덕의를 찬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야말로 신민의 행복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번 행차 때 궁궐에서 나갈 때부터 행차가 돌아올 때까지 번번이 수봉(壽鳳)으로 하여금 경과하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위로하고 타이르는 한편 농사에 손상을 입힌 것을 살피도록 하였다. 또 날씨가 몹시 무더운 때였으므로 약원(藥院)에 명하여 약을 조제하여 도중에서 더위를 먹은 장수와 병졸들을 구료하게 한 결과 돌아온 뒤에 한 사람도 앓는 자가 없었다.

신사년에, 당시에 조치해야 될 계책에 대해 대신들에게 문의하니, 대신들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관서(關西)의 고을에 행차하게 되었는데, 이는 상에게 명을 청하여 도적들의 모의를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적신(賊臣) 홍계희(洪啓禧)가 내부에서 변란을 저지르려 하자, 세자가 그 소식을 듣고 말을 재촉하여 곧장 돌아왔다. 이때 한 승지가, 상에게 아뢰어 조정 신하가 세자에게 올린 글을 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사태가 급박하게 되었는데, 세자가 몸소 임금 앞에 나아가, 변란을 처리하려 했던 본의를 빠짐없이 고하니, 상이 그제서야 의심이 풀렸다. 후에 세자가 빈연(賓筵)에 임어하였을 때 상이 말하기를 ‘세자 또한 임금이다. 명색은 신하로서 섬긴다고 하면서 간악한 음모를 품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역적 계희(啓禧)가 무엄하다는 내용의 하교를 잇따라 내리어 한(漢) 무제(武帝) 때의 간신 강충(江充)에게 비기었다. 이때로부터 음모가 더욱 긴박해졌다.

임오년 5월에 적인(賊人) 나경언(羅景彦)이 복주(伏誅)되었다. 기주(記注) 《궁중기문(宮中記聞)》에 의하면, 경언이 형조에 글 한 통을 투서하였는데, 그 글에는 ‘전하의 곁에서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 모두 불충한 생각을 품고 있어 변란이 눈앞에 닥쳐왔다.’는 말이 있었다. 이에 형조의 관리가 본조의 좌석으로부터 그 글을 소매 속에 넣고 청대를 하였는데, 이때 역적 계희는 기백(畿伯)으로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이 모두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고, 이어 형조의 관리가 그 글을 상에게 고하자, 상이 크게 놀라서 내시에게 묻기를 ‘경언은 대궐 하인 나상언(羅尙彦)의 족속인가?’라고 하니, 내시가 대답하기를 ‘상언의 형으로서 전에 대궐 하인으로 있던 자입니다.’고 하였다. 상이 역적 계희에게 묻기를 ‘궁성을 호위해야 하겠는가?’라고 하니, 역적 계희가 앞에 나와서 아뢰기를 ‘나라에 변고가 있으면 궁성을 호위하는 일은 무신년에도 이미 행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즉시 성문을 닫고 군사를 동원하여 궁문을 파수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사복시에 나아가 경언을 국문하자 경언이 옷의 솔기 안에서 또 하나의 봉서를 꺼냈는데, 길이는 5치를 넘고 둘레는 한 줌이 차는 것이었다. 그것을 올리니, 상이 보고 나서 좌상(左相)에게 보였는데, 좌상이 겨우 두어 줄을 보자마자 소리를 내어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먼저 죽어야 하겠습니다. 동궁이 만약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겠습니까. 신이 가서 위로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판의금부사 한익모(韓翼謩) 등이 말하기를 ‘경언이 흉악한 말을 지어내어 상을 속여 세자를 핍박하게 만들었으니, 그 죄 죽여야 마땅합니다. 엄하게 국문하여 법대로 다스리소서.’라고 하니, 상이 비로소 형장을 가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사서(司書) 임성(任珹)이 분연히 나서서 익모에게 말하기를 ‘흉악한 말을, 어찌 경언이 스스로 지어낸 것이겠는가.’라고 하니, 익모가 또 사주한 자를 한시바삐 사핵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노하여 익모의 관직을 파면시키고, 대사간 이심원(李心源) 익모를 두둔하자, 그도 파직시켰다.

익모 등이 이미 쫓겨난 다음, 경언이 세자를 무함하였다고 자복을 하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이구 동성으로 극률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동의금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여느 사람을 무함해도 오히려 역적이 되는데, 더구나 세자를 무함한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흉악한 말은 이미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고 죄인이 이미 자복을 하였으니, 이러한 역적과는 함께 살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앞으로 나서서 극력 말하였는데, 책망하는 하교가 누차 내렸건만 말은 갈수록 강직하여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때 세자가 대궐문 밖에 걸어가서 대명(待命)하고 있다가, 상이 들어오라고 명하자 드디어 대궐 뜰에 나아와 엎드렸는데, 흐르는 눈물이 도포자락을 적시니 여러 신하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정휘량(鄭翬良)이 비로소 접견을 청하여 아뢰기를 ‘죄인이 이미 세자를 무함했다는 네 글자를 가지고 자복한 이상 그 죄를 단 하루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에 경언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세자가 환궁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울면서 말하기를 ‘지극하신 자애심 덕분에 함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해 윤 5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궁묘(宮墓)의 호칭을 ‘수은(垂恩)’이라고 내려주었다. 7월 23일에 양주(楊州)의 배봉산(拜峰山)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장사 지내는 날에 상이 광중(壙中)에 임어하여 어필로 신주를 썼다. 그 다음달에 조재호(趙載浩)를 북쪽 변방에 귀양보내었고 또 그의 조카인 조유진(趙維鎭)이 죄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대신(臺臣)이 법대로 처단하자고 청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저 동룡(銅龍)070) 을 쳐다보면 나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여러 신하들로서는, 마땅히 차마 말하지 못하는 나의 심정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즉시 그 일을 그만두라고 명하였고, 이어 말한 자에게 죄를 주었다. 유진은 여러 번 고문을 받았으나 항언을 하면서 두말을 하지 않았고, 원지(遠地)에 유배되어 가던 도중에 죽었다. 기주(記注)를 살펴보면, 윤 5월 13일에 검열 윤숙(尹塾)이 대궐 뜰에 내려가니, 세자가 이마를 두드려 피가 흘러 얼굴을 덮었으므로 호위 구역 밖으로 뚫고 나가 의관(醫官)을 불러 약을 구해 가지고는 소조께 올렸다. 이때에 여러 대신들이 합문(閤門) 밖에 있으면서 들어갈 수 없었는데, 윤숙이 호위 군사들을 꾸짖고 몸을 빼어 뛰쳐나가서는 대신의 손을 잡고 함께 들어왔다. 윤숙 신만(申晩) 등을 꾸짖어 말하기를 ‘이처럼 위급한 시기에 대신들이 대궐 섬돌에 머리를 찧고 죽기로 작정하면서 힘껏 간하지 않는다면, 장차 대신을 어디에다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적신(賊臣) 구선복(具善復) 홍인한(洪麟漢) 등이 각기 음흉한 꾀를 부리는 바람에, 윤숙은 마침내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상은 오히려 이 사람이 아깝다고 연신 말을 하였다.

분사(分司)의 한림 임덕제(林德躋)가 뒤이어 뜰 아래에 엎드린 채 곁에서 떠나지 않으니, 상이 끌어내라고 명하였다. 그런데도 땅에 버티어 앉은 채 일어나지 않자 호위 군사가 끌어내려 했는데, 덕제는 꾸짖어 말하기를 ‘나의 손은 사필(史筆)을 잡는 손이다. 이 손을 잘릴지언정 끌릴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의현(旌義縣)에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윤숙 덕제를 석방하라고 명하였고, 후에 덕제를 등용하였다.

궁관 임성(任珹)·권정침(權正忱) 등은 한사코 나가지 않았으며, 분주서(分注書) 이광현(李光鉉)도 몸을 빼어 뛰쳐나가 의관을 데리고 들어왔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사코 간쟁을 하니, 상이 노하여 군문(軍門)에 넘겨 효수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일단 나갔다가 다시 문을 밀치고 들어와서 땅에 엎드려 통곡을 하였다.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자, 울면서 말하기를 ‘신은 마땅히 죽어야 하겠습니다. 감히 명을 들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는, 나가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처분을 기다렸다. 패초(牌招)를 명하였으나 끝내 나아오지 않았다. 후에 묘소의 공사를 감독하는 직임에 임명하라고 명하였는데, 송영중(宋瑩中) 등이 대간(臺諫)으로서 다른 말을 꾸며 규탄을 하니, 상이 영중 등을 엄하게 배척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즉시 그의 아들을 녹용하라고 명하였으며, ‘나라가 어지러우니 어진 정승이 생각난다.’는 하교가 있었다.

분사(分司)의 제조 한광조(韓光肇)는 대궐문을 밀어젖히고 들어와서 관을 벗고 울부짖으니, 상이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광조가 말하기를 ‘신은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신이 한 마디 하고픈 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나, 또 끌어내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광조는 통곡을 하면서 기어나갔다. 그의 아비는 말하기를 ‘머리를 부딪쳐 죽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조신(朝臣)의 반열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반교(頒敎)하는 데에 불참하였다. 광조 대정현(大靜縣)에 귀양갔다가 곧이어 석방되었다. 후에 상이 말하기를 ‘얼마 전의 처분을 내 자신이 뉘우친다.’라고 하였다. 광조가 세상을 떠나자 친히 제문(祭文)을 지었는데, 그 제문에는 ‘부자가 함께 조정에 있으면서 뜨거운 충성을 다하였다.’고 하였으며, 이어 그의 아들을 녹용(錄用)하였다.

승지 조중회(趙重晦)는 눈물을 흘리면서 극력 진술하니, 섬에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가 곧이어 도로 취소하였다. 중회는 또 앞으로 나아가 엎드리어 항언하며 굽히지 않다가, 원지(遠地)에 귀양을 당하였다. 후에 ‘매서운 바람이 불어야 꺾이지 않는 굳센 풀을 알 수 있다.’는 하교가 있었으며, 누차 승진을 시키어 이조 판서로 임명하였다.

제학 한익모는 소명을 다섯 번이나 어기면서 교문(敎文)을 짓지 않으니, 하교하기를 ‘명분과 의리상 그럴 수 있는 것이니, 부르지 말라.’고 하였다. 또 치사(致詞)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으나, 소패(召牌)가 모두 여덟 번이나 내렸어도 끝까지 나아오지 않고, 의금부에서 짚자리를 깔고 대죄하다가 삭직을 당하였다. 후에 누차 그를 칭찬하였으며, 발탁하여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승지 이익원(李翼元)은 극력 항거하면서 전교를 쓰지 않았으며, 승지 정순검(鄭純儉)은 전각(殿閣) 위에 올라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신을 죽여 주소서. 신이 비록 죽을지언정, 감히 이 하교를 반포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가, 파직을 당하였다. 총관 이태화(李泰和)는 관을 벗고 머리를 부딪치면서 극력 간하였는데, 후에 특별히 명하여 가자하였다.

갑신년 가을에 입묘례(入廟禮)를 행하였는데, 상이 임어하여 살펴보았다. 을유년 5월에 제삿날을 하루 앞두고 시사(視事)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조정 신하들에게 윤음을 내리기를 ‘작년 이후 처음으로 이날을 맞는다. 경연을 정지하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의 편함을 위한 것이겠는가. 아, 마음이 이와 같지 않다면 부모가 아닐 것이고, 또 어떻게 영혼을 위로하겠는가. 아, 신하들이 80을 바라보는 자기 임금의 오늘 심정을 알고 신하로서의 분수를 지킨다면, 부산을 떨고 세력 다툼을 벌이는 마음은 마치 봄눈이나 봄얼음과 같이 저절로 풀릴 것이다.’고 하였다. 대신 등이 정섭(靜攝) 중에 계신 만큼 즉시 상선(常膳)을 드시라고 청하였다. 그 이튿날 또 수은묘(垂恩墓)의 헌관 홍낙인(洪樂仁)에게 명하여, 제사를 행한 후에 국내(局內)를 간심하고 돌아와 아뢰도록 하였다. 낙인이 연석(筵席)에 오르자, 나무들이 얼마나 잘 자랐는지를 상세하게 물었다.

가을이 되자, 상이 어의궁(於義宮)에 행차하여 세손(世孫)더러 사당에 가서 참배하라고 명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보내고는 옛일을 추억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이어 후원의 기슭에 걸어 올라가서, 담장에 기대어 한동안 멀리 바라보았다. 이후로는 매일 밤중에 번번이 문지방을 두드리면서 한탄하기를 ‘옛적에 사자궁(思子宮) 망사대(望思臺)가 있었는데 내가 어찌 스스로 이런 처지를 당할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그때의 조정 신하들 가운데 과연 안금장(安金藏)071) 과 같은 충성심을 가진 자가 있었던가. 이제 와서 협잡하여 다시 제기하는 것은 억하 심정인가.’라고 하였다.

무자년에 상이 전각 뜰에서 향 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하였는데, 효장묘(孝章廟) 이하 각묘의 향축(香祝)에 대하여, 여러 신하들이 압존(壓尊)이라는 이유로 즉시 몸을 굽히지 않자, 상이 성난 소리로 배참(陪參)한 신하들을 파직시키라고 명하고, 이어 병조 판서와 시위(侍衛)한 신하들을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한 모퉁이의 푸른 언덕[靑丘]은 바로 조선이다. 세자의 신령을 맞이하는 의식을 여러 신하들이 어떻게 감히 하지 아니하는가. 아, 수은(垂恩)아. 오늘의 여러 신하들 중에는 10년 동안 신하로서 섬기던 자가 많으니, 세자가 죽어서 무심하다고 말하지 말라. 무심 두 글자를 이런 경우에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자정전(資政殿)에 돌아와 대신과 제신들을 전각 앞에 불러놓고, 칙유(飭諭)를 내리어 10년 동안 신하로서 섬긴 의리를 알도록 하였다.

그 이튿날에 대정(大政)을 행하였는데, 또 대소 신료들에게 하교하기를 ‘아, 임오년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자질(姿質)이 훌륭하였건만, 내가 정말 인자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경인년에 왕부(王府)에 임어하여 하교하기를 ‘지난 일을 새삼스레 제기하여 나에게 들리도록 하는 것은 반역하는 심보이다.’라고 하였다.

갑오년 여름에 가뭄이 들었는데 친히 묘소에 나아가 제문을 친제(親製)하고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세손(世孫)이 뒤를 따라갔다.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오늘 단비가 내릴 것이다.’고 말하고는, 이어 찬례(贊禮) 이하 행차를 따라간 근신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병신년 봄에 이르러 《정원일기(政院日記)》와 공가(公家)의 문적 중 정축년부터 임오년까지의 차마 말하기 곤란한 점이 있는 내용은 모두 세초(洗草)하라고 명하면서 하교하기를 ‘세손(世孫)의 이 상소문을 보고 특별히 그의 청을 허락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의 마음은 슬픔을 견딜 수 없다.’라고 하고는, 옥루(玉淚)를 비오듯이 떨구었다. 또 전교를 쓰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지금 내가 밤낮으로 오로지 생각하는 것은 조종(祖宗)이 물려준 나라에 있다. 금번의 이 조처는 실로 나이 어린 아들을 위한 것이다. 아, 임오년 윤5월의 일기에 대하여 사도(思悼)가 까마득한 저승에서나마 아는 것이 있으면 틀림없이 눈물을 삼키면서 「내가 장차 여한이 없게 되었다.」고 여길 것이다. 그 때의 일기를 실록의 규례에 따라 승지와 주서가 함께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하도록 하라. 아, 내가 덕이 없는 탓에 만고에 없는 일을 당하였는데 말세의 인심이 수선을 떨고 있다. 비록 일기를 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문자(文字)를 다시 제기하고 나선다면, 마땅히 무신년 못된 무리들의 잔당으로 쳐서 엄하게 징치할 것이다. 더구나 훗날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후로 임오년의 일을 언급할 경우, 마땅히 역률로 논죄할 것이니, 모두가 이것을 듣고 나라의 법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어린 아들이 이미 면유(面諭)를 받들었으니, 내 이제는 마음놓고 편한 잠을 자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 또 세손(世孫)에게 명하여, 묘소에 가서 전배(展拜)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누워서 세손의 오늘날 심정을 생각해 보건대, 어찌 다만 어린 자식의 심정뿐이겠는가. 나의 심정 또한 어떻겠는가. 오늘날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라 하였다.

《궁원의(宮園儀)》를 살펴보면, 병신년에 ‘장헌(莊獻)’이라는 시호(諡號)를 소급하여 올리고, 궁호(宮號)를 ‘경모(景慕)’, 원호(園號)를 ‘영우(永祐)’라고 고치었다. 계묘년에 존호를 소급하여 올려 ‘수덕 돈경(綏德敦慶)’이라고 하였으며, 갑진년에 또 존호를 소급하여 올려 ‘홍인 경지(弘仁景祉)’라고 하였다. 사당 내의 제례(祭禮)는 태묘(太廟)보다 한 등급 낮추었으며, 원의(園儀) 또한 이에 준하였다.

행록을 살펴보면,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의소세손(懿昭世孫)으로서 휘(諱)가 이정(李琔)이고, 차남은 바로 소자로서 이름은 이산(李祘)이다. 딸들은 광산(光山) 김기성(金箕性) 오천(烏川) 정재화(鄭在和)에게 출가하였다. 서자가 3명 있는데 이인(李䄄), 이진(李禛), 이찬(李禶)이고, 서녀 하나는 당성(唐城) 홍익돈(洪益惇)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자손들에 대한 기록은 우선 옛 행장을 따라 간략히 쓰니, 오르내리는 신령이 도와주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10월 7일 기미

관원을 파견하여 후토(后土) 귀신에게 사례하고, 정자각(丁字閣)에 돌아와 우제(虞祭)를 지냈다. 상이 비로소 친히 헌작을 하였는데, 이는 전(奠)을 바꾸기 때문이었다. 대축(大祝)이 지방 상자를 받들어 담장 동쪽에 묻었다. 상이, 재궁(梓宮)이 상여에 오를 때부터 가슴을 치며 슬피 운 나머지, 격기(膈氣)가 치밀어 올랐는데, 현궁(玄宮)을 내려놓은 뒤에 이르러서는 격기가 더욱 심하게 치밀어 오르므로 좌우의 신하들이 겨드랑이를 부축하고 겨우 배례를 행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주달하는 말이 있었는데도, 가슴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부축하여 소차에 돌아왔으며, 우제의 예식을 마친 다음 재실로 돌아왔다. 하교하기를,
"대례를 이미 잘 마치었으니, 이제는 자궁을 들어가 뵙는 것을 한 시각도 지체할 수 없다. 내일 아침 일찍 수원의 신읍(新邑)을 출발하여, 과천의 숙소에서 주정(晝停)을 하고 모래 환궁하겠다."
하였다. 이날 밤에 상은 다시 원상(園上)에 나아가 친히 공사를 살피었다.

 

10월 8일 경신

날이 채 밝기 전에 상이 재차 원소에 나아가 공사를 감독하였다. 수도각(隧道閣)의 판위(版位)에 나아가, 원소를 하직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재실에 돌아와 평소의 융복(戎服)을 갖춰 입고 출발하였다. 수원의 향교 앞에 이르자, 유생 10여 명이 맞이하므로, 불러 만나보고 학문에 힘쓰라고 권하였으며, 이어 수원의 행궁에 들어갔다. 경기 감사와 수원 부사에게 명하여, 부로(父老)·교속(校屬)들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도록 하고는,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에게 명하여 위로하고 돌봐주게 하였다. 저녁에 과천 행궁에서 묵었으며, 백성들에게 선유하였다.

 

윤행임(尹行任)을 규장각 직각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감정을 억누르면서 수레를 돌리자니, 추모하는 심정이 끝이 없다. 정신을 가다듬기는 비록 어렵지만, 지금의 허전한 마음을 어디에 붙일 곳이 없고, 오직 은혜를 널리 베푸는 한 가지 일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 일을 감독하고 이런 뜻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원과 과천 두 읍에 금방 별도로 내린 전교가 있었다. 이번 원(園)을 옮길 때에 위사(衛士)·군병(軍兵)과 영가(靈駕)를 배종한 경외의 장졸(將卒) 및, 각종 명색의 시험에 응시해야 될 자들에게 마땅히 별도로 시재(試才)를 해야겠다. 이는 중한 바가 자별하니, 시재의 명칭을 ‘영가배종장사 관무재(靈駕陪從將士觀武才)’라고 일컫고, 날짜는 다음달 초순으로 가리도록 하라.
경중(輕重)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1일부터 9일까지 날마다 거둥하고 하루에 두 번씩 행차하기도 하여, 그 거리가 거의 5백 리(里)는 되었다. 매번 군사들이 애쓰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을 더욱 풀 수 없었다. 이제는 이미 예식을 마치었으니, 그들에게 애쓴 공을 갚아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가를 수행한 군병들에게 별시사(別試射)의 예대로 시취(試取)를 함으로써 이 원(園)에 관계되는 모든 일에 대해 위로를 해주는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영가(靈駕)를 배종하는 것은 사체가 특별한 것이다. 비록 군사라고 하더라도 모두 초시를 면제시켜주고 응시하게 허락하는 규정을 해조로 하여금 품지토록 할 것이며, 별시사(別試射)의 경우는 초시를 면제할 것인지를 전례에 따라 구별하되, 이 역시 전례를 상고하여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관무재(觀武才) 때에는, 경진년에 배종하였던 무신으로서 아직껏 생존한 사람이 있으면, 똑같이 응시하도록 허락하라. 영여(靈轝)를 받들고 나아갈 때 말[語]을 전달한 군사·척후병·복병 등의 장졸(將卒)들에게는, 각기 해당 지방에서 시사(試射)토록 하라."
하였다.

 

원(園)을 이장할 때 소요된 총 경비는, 돈이 18만 4천 6백여 냥, 쌀이 6천 3백 26석, 목면이 2백 79동 남짓, 베가 14동이었다.

 

10월 9일 신유

환궁하였다.

 

총호사, 도감의 당상관·당하관들에게 유시하였다.
"슬픔을 억누르며 길을 떠나자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되돌아보곤 하였다. 지금의 미치지 못하는 허전한 서글픔을, 경들도 내심 알고 있으리라 여긴다. 원상(園上)의 공사가 지금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지, 총호사는 며칠 쯤에나 복명할 것인가. 여러 당상이 성심껏 애쓰는 것이야 어찌 나의 말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마는, 더욱더 정성을 쏟고 부지런히 하도록 하라."

 

고 영중추부사 정홍순(鄭弘淳)에게 치제(致祭)를 하였다. 하교하기를,
"현궁(玄宮)을 들어내, 판자에 칠한 옻의 색깔과 나무의 결이 튼튼하고 좋은 것을 보니, 전에 들은 얘기가 틀리지 않았음을 더욱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상여를 부여잡고 가슴을 치는 슬픔 속에서도, 이 덕분에 마음이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더구나 전고(殿庫)에 나무토막을 저장하여 후일의 증거에 대비한 것은, 그 사려의 치밀하기가 옛 대신의 일처리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 덕분에, 덧칠을 하는 데에 힘이 들지 않았다. 이제 다행히 큰일을 무난히 치르었는데, 아쉽게도 고상(故相)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여 직접 만나 고마운 심정을 말할 수 없다. 고 영부사 정홍순의 집에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고, 그의 아들·사위·아우·조카들 중에서 적임자에게 관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10월 10일 임술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예조 판서 정창순(鄭昌順)이 아뢰기를,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건대, 원(園)을 이전하고 나서 상복을 벗을 때에는 망곡(望哭)하는 예를 행하기도 하고 행하지 않기도 하는데, 선유(先儒)의 논의에는 ‘묘소에서 상복을 입고 방 안에서 상복을 벗는 것은 예의 뜻에 어긋난 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묘소가 아니면 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를 근거로 알 수 있습니다. 또 왕대비전(王大妃殿)이 이미 상복을 입지 않은 이상 각전(各殿)이 상복을 벗을 때 또한 압존(壓尊)의 혐의가 있으니, 망곡하는 예식은 거론할 수 없을 듯합니다. 다음달 초하룻날에 조정에서 모두 길복(吉服)을 입고서, 상복을 벗었다는 문안을 행할 것이며, 지방의 경우는 또한 길복 차림으로 망궐례(望闕禮)를 행하라는 뜻으로 똑같이 행회(行會)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수원(水原) 등 세 읍의 암행 어사 유문양(柳文養)을 소견하였다.

 

정창순(鄭昌順)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0월 11일 계해

수원 등 세 읍의 백성들에게 유시하기를,
"이 고을의 화산(花山)은 원래부터 영기(靈氣)가 모인 곳으로서, 그 형상은 서린 용(龍)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고, 그 땅은 천리를 가다가 한 번이나 만날까말까 한 곳이어서, 원침(園寢)으로 의논하여 정하고 드디어 천봉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따라서 이 고을은 바로 나의 조상이 묻혀 있는 고을이고, 너희들은 이 고을의 백성들이다. 나는 너희들을 마치 한 식구처럼 여기면서 먹을거리를 넉넉하게 하고 산업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생활에 안주하고 생업을 즐기는 방도를 알게 해줘야, 나의 책임을 다하고 나의 생각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전할 지역으로 정한 처음부터 너희들에게 끼친 수고 또한 크다고 여긴다.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몸은 대궐에 있은들 어찌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새 고을 소재지에 이르러 경영한 것을 두루 둘러보건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고 거리가 질서 정연하여 엄연히 하나의 큰 도회를 이루었으니, 너희들이 수고하고 애쓴 것을 또한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 여느 행차 때에도 오히려 은택을 베푸는 법인데, 하물며 이 고장의 이 백성들에게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원소 부근의 면리(面里) 및 이사한 백성들에게는 10년 동안 급복(給復)하고 새 환자(還子)를 탕감하며, 수보미(需保米)도 수량을 나누어 탕감하고 그 나머지는 돈으로 대신 받아들이도록 허락하라. 그리고 모든 면리(面里)에 1년 동안 급복하고, 오래된 환곡(還穀) 가운데 가장 오래된 3년 조는 탕감하고, 수보미(需保米)도 수량을 나누어 탕감하도록 하라. 부로 가운데 온천의 행차를 재차 맞이한 자와, 조관(朝官)으로서 나이가 70 이상인 자와, 서인 가운데 나이가 80 이상인 자에게는 가자토록 하고, 경내의 유생(儒生)과 무사(武士)들에 대해서는 내년 봄 전성(展省)하는 행차를 기다려 설과(設科)하여 시취(試取)하고자 하며, 교속(校屬)으로서 오래 근무한 사람에 대해서는 관직을 제수하거나 조천(調遷)시키고 도목 정사 때마다 주의하도록 허락한다.
금번의 이 명이 어찌 다만 너희들만을 위한 것이겠는가. 너희들은 나의 무마하는 고심과 지성을 알고, 힘과 마음을 합쳐 함께 원(園)을 보호하면서 영원토록 변치 말지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수원의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라는 윤음을 방금 내렸다. 그런데 이 고을은 전에 경모궁께서 온천으로 행차하였을 때 숙소로 삼았던 곳이고, 금번에 영구 행차가 지날 때에도 묵은 곳이다. 나는 또 이 고을에 이르러 부로들을 불러 옛 사적을 묻고 그 대답을 듣고부터 더욱 서글픔을 누르지 못하였다. 더구나 행차가 머물렀을 때 베풀었던 혜택에 대하여 고을 사람들이 오늘날까지도 말하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감히 경모궁의 뜻과 일을 만분의 일이라도 이어나가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과천현의 부로 가운데 온천 행차와 영구 행렬을 바라본 자들로서 조관(朝官)은 나이 70세 이상, 일반인은 80세 이상인 자에게 모두 가자하고, 예전의 환곡 가운데 가장 오래된 2년 조에 한하여 탕감하고, 수보미(需保米)는 수량을 나누어 탕감하거나 수량을 나누어 대봉(代捧)하며, 두 해 동안 행차가 지나간 길가의 민호들에 대해서는, 1년간 급복(給復)하도록 하라.
광주(廣州)는 수원과 과천 사이에 끼여 있고, 사천(沙川) 역참이 영여(靈轝)가 머물렀던 곳이니, 어떻게 이 곳만 홀로 빠지게 할 수 있겠는가. 부의 행차가 통과한 연로 면에 대해서는, 묵은 환곡 1년 분을 탕감해 주고, 사천창(沙川倉) 근처에 거주하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금년도 분의 요역(徭役)을 면제하라."
하고, 하교하기를,
"큰 예식을 치른 후에 혜택을 널리 베풀기에 힘을 쓰는 이 한 가지 일은 첫째도 선왕(先王)의 뜻을 이어나가는 것이고, 둘째도 선왕의 뜻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세 읍의 백성들에게도 오히려 혜택을 베풀었는데, 하물며 도하(都下)의 공인(貢人)과 시인(市人)들에게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시를 받아 원소(園所)에서 대령했다가 공물을 바친 공납인들에 대해서는 전부터 남아있는 것 가운데 3천 석(石)에 한하여 탕감을 해 주되, 대령한 공납인들에 대해서는 넉넉하게 탕감을 해 주도록 하라. 대여(大轝)와 견여(肩轝)를 앞뒤에서 끈 군사들과 각전(各廛)의 시민들에게는 요역을 20일에 한하여 면제해 주고, 각 차비(差備) 시민들에 대해서는 10일에 한하여 면제해 주고 반인(泮人)들의 현방(懸房) 속전은 10일에 한하여 면제해 줌으로써, 조정이 소중히 여기는 뜻을 보여 주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관리영(管理營)과 진무영(鎭撫營)의 장교(將校)·군졸(軍卒)들 중에 금번에 영악전(靈幄殿)과 숙소참(宿所站)에 편 장막을 가지고 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해당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사방(射放)072)  을 시험보이고, 그 명중한 수효를 뒤에 기록하여 장문(狀聞)토록 하라."
하였다.

 

김이주(金頤柱)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정규(李鼎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부사직 홍병찬(洪秉纘)이 상소하기를,
"윤시동(尹蓍東)의 일에 대하여 대신(大臣)들이 비록 매우 급박하게 고집을 하지만, 전하께서는 그에게 고의가 없고 허물이 없다는 것을 특별히 밝혔습니다. 신이 마침 전형(銓衡)하는 자리에 몸담고 있는데, 장차 대신의 뜻을 받들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전하의 고마우신 뜻을 받들어야 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과연 신이 그를 천거한 적이 있는데, 이 일로 신을 탄핵한다면 신은 물론 받아들이고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조 판서로 천망할 때의 일에는, 기실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처음에 신이 좌규(左揆)073)  에게서 추천한 것을 받을 때, 해조의 서리(書吏)가 가져다가 바친 조그만 종이에는 바로 예전 후보자의 성명을 죽 썼는데, 그 가운데 조시준(趙時俊)과 윤시동(尹蓍東)의 이름자는 먹[墨]으로 지워 놓았습니다. 신이 이를 소매 속에 넣고 들어갔더니, 천망(薦望)의 접수가 이미 끝났습니다. 대신이 말하기를 ‘누락된 사람이 없는가?’ 하기에, 신이 쪽지를 꺼내놓고 대조하여 헤아리면서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신이 ‘누구인가?’라고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조시준의 경우는 이미 그 아우의 반역 죄안에 연루된 만큼 빼내 버린 것이 당연하지만, 윤시동이 이번에도 누락된 것은 어찌된 일인가?’ 하였습니다. 이에 대신은 잠자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번에도 빠졌구만.’ 하고는, 드디어 좋은 기분으로 더불어 말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신 또한 즉시 일어나서 나왔습니다.
그때 주고받은 이야기는 불과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대신의 상주에서는 머리와 꼬리 부분을 잘라내버리고 심지어 신이 외부의 의논을 전해 말했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대저 외부의 의논이라는 것은, 곧 여론입니다. 신이 아무리 어리석고 못났어도 이성을 잃지는 않았고 더구나 다른 사람들 역시 타고난 본성을 지니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족속을 전망(銓望)에 의의(擬議)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윤시동이 누락된 것을 경망스레 대신에게 물어보려고 하여 과연 일일이 거명하면서 물어보다가 시준(時俊)의 이름에 이르자 즉시 구별하여 말하였고, 이어 시동(蓍東)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였는데, 이는 곧 말하는 형세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정상적인 도리에서 벗어난 말로 꼬투리를 잡아가지고, 납득하기 어려운 죄를 얽어 만들면서, 마치 신이 여론을 빙자하여 시준을 위해 그 가부를 떠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였으니, 대신이 임금에게 고한 말이 어쩌면 이렇게도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그렇기는 하나, 대신 또한 어떻게 정말로 신이 시준을 위하였다고 여겼겠습니까. 단지 그는 신이 윤시동을 위하여 물어본 것에 화가 나서 애매한 사람에게 화풀이할 생각을 한 것이니, 신 역시 어찌 여러 말을 하여 구태여 변명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이 대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으로 의심을 하는 문제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 이미 신의 본정(本情)이 아닌데 콩과 보리조차 구분하지 못하였다고 자처를 하니, 어쩌면 그리도 지나치게 자신을 내리깎는 것입니까. 대체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함께 발론한 계사는, 이미 제기되었던 내용에서 대략을 추출하여 승정원 주서의 방에서 정서한 것인데, 단지 보고되지 아니한 까닭에 그 내용이 어떤 말인지를 신이 비록 보지 못하였지만, 요컨대 부스러기를 부연하여 극죄(極罪)로 단정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세가 쏠리는 곳에 의견이 다른 사람들도 이구 동성으로 바람에 휩쓸리듯 뒤질세라 덩달아 따라나서니, 신은 정말로 세도(世道)에 깊은 우려를 느끼면서 제 자신을 서글프게 느낄 겨를조차 없습니다.
신을 위한 대책으로는 영예로운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입을 다물고 문을 닫아거는 것보다 나은 길이 없으니, 유사에게 특명하시어 신의 성명을 조적(朝籍)에서 깎아내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잘못은 경에게 있다. 대신이 천의(薦擬)한 것을 어찌 전관(銓官)이 가타 부타할 일이겠는가."
하였다.

 

부교리 송상렴(宋祥濂)이 상소하기를,
"지난번의 일로 말씀드리자면,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처럼 지나친 조처를 취하시는 것입니까. 임금에게는 본래 사사로운 은정이 없고, 나라에는 원래 정해진 법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 비록 정해진 법을 잠시 굽히고 부당하게 사정(私情)을 펴고자 하더라도, 위로는 자전(慈殿)의 엄한 지시를 응당 받들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고, 아래로는 조정 신하들의 강경한 주장에 대해서도 또한 거부하는 말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명철하신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그만 갖은 궁리를 다하여 밤중에 빼내오게 함으로써,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겁을 먹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스스로 빠지게 하고, 대신들이 두려움을 느끼어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는 사태를 면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어찌 성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이제부터라도 사은과 국법의 경중을 참작하고,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 그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제대로 살피소서. 그리하여 의리(義理)의 단속을 엄격하고 신중히 할 뿐 아니라 반드시 마땅히 행해야 될 것은 하고 행해서는 안 될 것은 그만둘 것을 생각하시고, 혹시라도 내키는 대로 지나친 거조를 하는 일이 없으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 일을 이제 어쩌자고 끄집어내는가. 덧붙여 진술한 수면을 적절히 취하라는 청에 대해서는, 마땅히 유의를 하겠다."
하였다.

 

예조 참의 김이성(金履成)이 상소하기를,
"수적(讎賊)을 아직까지 토죄하지 못하였는데, 단지 전하께서 뚜렷하게 지적할 것이 없다고 전교하셨기 때문에 감히 강경하게 주장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다행히도 지난달에 자전께서 재삼 하교하여 토적(討賊)을 늦춘다고 나무라시고 사형에 처하도록 상세하고 곡진하게 말씀을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일체 자전의 하교에 따라 의원과 유모, 그리고 김우진(金宇鎭)과 조시위(趙時偉)를 신국(訊鞫)하여 사형에 처하소서.
대신은 몸소 자전의 하교를 받들고도 놀라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날 자전의 하교 중에는 ‘행동을 편파적으로 한다.’고 한 내용이 있었고, 또 ‘두 마음을 품는다.’고 한 내용이 있었으며, 끝에 가서는 ‘말을 말같이 보지 아니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신하된 자로서 이러한 말을 듣고도 그만 도리어 태연하게 보통 때처럼 처신을 하였습니다. 설령 나라에 큰일이 있어 사적인 의리를 논할 겨를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 일이 모두 끝난 뒤에는 마땅히 즉시 엎드려서 견책을 기다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이 조정에서 가만히 보건대, 그의 행동 거지가 여느 때와 똑같고 자처하는 뜻이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그가 조정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세도(世道)를 병들게 하고 있는 일은 잗단 문제가 아닙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은 내가 공경하고 예우하는 바인데, 네가 어찌 감히 이렇게 능멸하는가. 영의정은 이미 차자를 올려 사면을 청하였다. 너의 상소문 안에 이른바 ‘행동 거지가 여느 때와 똑같다.’느니, ‘자처하는 뜻이라곤 전혀 없다.’느니 하는 말들은, 어쩌면 그리도 사실과 매우 틀리는가. 그리고 더구나 ‘이러한 신하의 절의[如許臣節]’라는 네 글자를 어떻게 대관(大官)에게 가할 수 있단 말인가. 나라의 체면을 높이고 후일의 폐단을 막는 도리상 관례적인 비답만 내릴 수는 없다. 너에게는 우선 삭탈의 법을 시행한다."
하였다.

 

영의정 이재협(李在協)이 인혐하여 성을 나가니, 하교하기를,
"어제와 오늘 겨우 좀 쉬려고 하였는데, 이런 때에 김이성(金履成)의 상소가 틈을 비집고 올라왔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성을 나가는 행동에 있어서는 나에게 한 가지 수응할 일을 더 보탠 것이다. 대관(大官)으로서 의에 대처하는 것이 비록 중하기는 하지만, 어찌 내가 조용히 조섭하는 중임을 생각하지 않고 걱정을 끼치는가. 소환을 명하니, 안심하고 즉시 입성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 이복원(李福源), 김익(金熤), 이성원(李性源)이 대명(待命)하니, 하교하기를,
"여러 말 할 필요가 없다. 이런 때에 시끄럽게 굴어 겨우 조금 살아난 신기(神氣)를 이로 인해 다시 상하게 한다면 경들의 마음이 과연 편하겠는가, 불편하겠는가. 다시 ‘처분을 기다린다.[胥命]’는 두 글자가 들려오면, 이는 나로 하여금 편히 쉬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서, 나라가 있고 임금이 있는 이상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경들이 만약 다시 제기하고 정원이 이를 봉입한다면 마땅히 해당 승선 등을 유배토록 하여 임금의 기강과 나라의 체면을 세우도록 하겠다. 즉시 집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하였다.

 

10월 12일 갑자

약원(藥院)이 문안을 드리니, 하교하기를,
"한편에서는 진찰을 청하고 한편에서는 소란을 피우면서 그 신기(神氣)가 회복되기를 바라려고 하니, 너무나 불성실하다. 이른바 진찰을 하겠다느니 약을 의논하겠다느니 하는 일은, 조정의 기상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까지 당분간 정지하겠다. 도제조(都提調)는 해직(解職)을 허락하고, 제조와 부제조는 모두 감하(減下)하라.
자전의 탕제(湯劑) 문제로 말하면, 바야흐로 한창 바깥 기운을 쐬었으므로 소엽인동차(蘇葉忍冬茶)를 쓰고 있는데, 약간 회복된 뒤에 탕제를 올리는 것이야 어찌 경들의 말을 기다려서 드시도록 권하겠는가."
하였다.

 

영돈녕부사 홍낙성과 우의정 김종수가 청대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은 원임 대신이 대명(待命)한 데 대하여 내린 비지(批旨)를 보지 못하였으며, 또 약원(藥院)이 문후(問候)한 데 대하여 내린 비지를 보지 못하였는가? 문안하러 와서 진찰을 청하는 것도 오히려 불허하였는데, 하물며 윤승렬에 대한 일로 청대하는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자전의 뜻은 마땅히 감동시켜 돌려야 하겠지만, 나의 주견도 마땅히 굳게 지켜야겠다. 경들이 임금의 권한을 빼앗아 다시 제멋대로 처리하는 행동을 행하고자 하면, 윤승렬에게 비록 우선 법을 적용하고 뒤에 계문하더라도 될 것이다. 만약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생각이 있다면, 어서 빨리 물러가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어, 비답 내용을 환수하고 약원(藥院) 및 청대한 대신들을 불러 접견하기를 청하면서 명을 되돌렸다. 그리고 아뢰기를,
"대신들이 오늘 청대한 이유는 윤승렬의 일 때문이 아닙니다. 전하 앞에 등석(登席)한 뒤에라야 마음속의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설사 해를 넘긴다 하더라도, 이 일이 잠잠해지기 전에는 접견할 리가 만무하다. 이와 같이 하는 즈음에는 한갓 응대하기에만 번거로울 것이니, 조금 회복된 기력이 어찌 손상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윤승렬에 대한 일이 아니라면, 이후의 빈청(賓廳) 접견과 제반 등연(登筵) 때에 언제라도 속마음을 다 털어놓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영돈녕부사 홍낙성과 우의정 김종수가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아뢰어 청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지난달 26일에 내린 자전의 언문(諺文) 교서 안에 들어있는 사안입니다.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고 유시한 이상, 이로부터 원수를 갚게 될 길이 있게 되었는데, 때마침 대례(大禮)를 하루 앞둔 시점이라서 아직껏 잠자코 있자니 분통함이 극에 달하여 하루도 살고픈 생각이 없는 것은, 자전의 하교를 받들기 이전보다 백배 천배 정도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저께 문안을 드리면서 수상이 그 말머리를 뗐다가 호되게 거부하는 하교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체후가 아직 정상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지금에 외람됨을 무릅쓰고 시끄럽게 굴면 조용히 조섭하시는 데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조금 차도가 있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오늘 접견을 청한 것은, 곧 신들이 시·원임(時原任) 여러 동료들과 상의하여 결정한 것입니다. 여러 동료 상신들은 비록 남의 말로 인해 위축이 되었지만, 이 사안은 실로 국가의 안위와 백성들의 윤리가 존속되느냐 없어져 버리느냐 하는 기미에 관계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자리를 빌려주소서. 명백한 명령을 우러러 청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윤승렬의 일도 오히려 듣고 싶지 않는데, 하물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차자 내용 중 이른바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단서이며, ‘갚을 수 있다.’는 것이 무슨 원수인가. 갑자기 자전의 하교 속에서 나간 말을 억지로 부회하여 꾸며대는데, 이러한 때에 거리낌없이 외람스레 구는 것은 상정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나로 하여금 스스로 몸을 돌보는 중에 기무(機務)에 수응하게 하는 것이니, 경들이 다시 어떻게 입을 열어 말할 수 있겠는가. 촛불을 밝히고 마음속에 맹세하건대, 식양(息壤)074)  이 저곳에 있으니, 나는 결단코 성실치 못하고 실속이 없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말은 거짓이 아니니, 경들은 조용히 듣고 떠들지 말라."
하였다.

 

교리 서배수(徐配修) 등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기를,
"김이성(金履成)의 한 통 상소문은 실로 충성심과 의분에서 나온 것인 만큼, 말 사이에 비록 간혹 대신을 핍박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신된 자로서는 역시 이를 받아들여 자기의 잘못으로 삼아야 할 것인데, 어찌 전하께서는 사정없이 벼슬까지 빼앗는 조치를 취하시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어서 빨리 성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이어 윤승렬을 처벌할 것과 약원(藥院)이 문후(問候)한 데 대한 비답과 대신들의 연명 차자에 대한 비답을 환수할 것과 말하지 아니한 여러 대신(臺臣)들에게 모두 견삭(譴削)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어찌하여 이처럼 번거롭게 청하는가. 김이성의 일을 어찌 환수할 수 있겠으며, 윤승렬의 일을 어찌 들어줄 수 있겠는가. 약원에 대한 처분을 어찌 그만둘 수 있으며, 대신들이 청대한 데 대하여 어찌 불러 접견할 수 있겠는가. 끝에 아뢴 양사를 견삭하라는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0월 13일 을축

천원 도감과 원소 도감의 당상, 낭청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총호사 김익과 채제공에게는 안구마(鞍具馬)를 면급(面給)하고, 봉증옥백관(奉贈玉帛官) 이재협에게는 숙마(熟馬)를 면급하고, 천원 도감의 제조 서유린·윤숙·이재간과 도청 이만수·이익운에게는 가자하였다. 상(上) 자를 쓴 서사관(書寫官) 박명원과 광중(壙中)의 명정을 쓴 서사관 채제공에게는 안구마를 하사하였으며, 박명원에게는 토지와 그에 딸린 노비를 주고 대가 다한 뒤에도 세금을 내지 말게 하였다. 표석(表石)의 전문(箋文)을 쓴 서사관 윤동섬(尹東暹), 음기(陰記)를 쓴 서사관 조돈(趙暾), 행로의 명정을 쓴 서사관 이명식(李命植), 지방을 쓴 서사관 윤사국(尹師國), 원(園)을 열 때의 대축(大祝) 이경오(李敬五), 개봉(開封)·봉폐(封閉)를 한 박성태(朴聖泰), 내고 들일 때의 대축 이제만(李濟萬), 섭상례 권유(權裕)·박장설(朴長卨), 통례 박황(朴鎤), 분승지 박종악(朴宗岳)·신광리(申光履)에게는 모두 가자하였다.
분병조 참지 정존중(鄭存中)은 특별히 부총관에 임명하고, 대전관(代奠官)이자 수빈관(守殯官)인 안춘군(安春君) 이륭(李烿)과 본도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에게는 숙마를 면급하였으며, 옛 원소(園所)의 지방관인 양주 목사 임시철(林蓍喆), 숙소의 지방관인 과천 현감 윤행임(尹行任), 연도의 지방관인 광주 부윤 민태혁(閔台爀), 새 원소의 지방관인 수원 부사 조심태(趙心泰)에게는 가자하였다. 지문(誌文)의 각자(刻字)를 감독한 당상관이자, 주교(舟橋) 당상관인 정창순(鄭昌順)은 종1품에 의망하여 들이고, 장생전 도제조 김익에게는 구마(廐馬)를 면급하였으며, 이재협에게는 반숙마(半熟馬)를 면급하였다. 원소 도감의 제조 김이소·정민시에게는 가자하고, 이문원에게는 특별히 판의금부사를 제수하였으며, 도청 서매수(徐邁修)·유한모(兪漢謨)에게는 가자하고, 식재 궁관(拭梓宮官) 겸 부토관(負土官)인 김종수에게는 숙마를 면급하였다.

 

판중추부사 정존겸(鄭存謙)이 2품 이상 관원들을 데리고 빈청에서 계청하기를,
"적비(賊婢) 연애(連愛) 등의 공초 중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국청을 설치하여 엄히 신문하여 차례대로 사실을 캐내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실로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려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뉘라서 감히 이 일을 다시 제기하여 골치 아프게 할 수 있겠는가. 금번의 이 빈청 계사는 농락이 아니면 조종하는 것인데, 나로서는 어제의 비답 중에 한마디 말로 결정한 것 외에 더 할말이 없다. 들어온 대신들을 처분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파면시켰다가 금새 도로 잉임시키는 것도 성실함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 잠자코 있으면서 조정의 분위기가 잠잠해질 동안은 시사에 대하여 취품을 하지 말라. 그리하여 말을 실천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여러 승지들이 합문(閤門)에 나아와 청대하니, 그 계사를 불태우고 그 벼슬을 체직시켰다. 시·원임(時原任) 대신들이 번갈아 차소를 올렸으나,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판중추부사 김익과 좌의정 채제공이 인혐하여 성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니, 특별히 돈독하게 유시하였다.

 

서정수(徐鼎修)를 이조 참판으로,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이득신(李得臣)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0월 14일 병인

하교하기를,
"금번에 구신(舊臣)들의 후손들을 녹용하는 일이 녹용할 만한 집안에 많이 미쳤는데 이 집안이 유독 누락된 것은, 항상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뜻에 몹시 어긋난다. 도사 조후진(趙厚鎭)을 낭서(郞署)에 의망하여 들이라.
병신년의 처분과 임인년의 전교를, 조정 신하치고 뉘라서 알지 못하겠는가. 지난번 김우국(金遇國)의 상소는 필시 그 일을 잘 알지 못한 까닭에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고상(故相) 한익모(韓翼謩)의 손자는 절대로 관직에 구애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조후진(趙厚鎭)은 고 판서 조중회(趙重晦)의 아들이다.

 

정언 신기현(申驥顯)이 상소하기를,
"죄인을 빼내온 조치가, 비록 전하의 우애하는 지극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자전의 언문 교서가 종묘 사직과 성궁(聖躬)을 위한 것인 만큼, 자전의 뜻에 순종하는 전하의 효심으로서는 사적인 정 때문에 공정한 법을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정령(政令)과 형법(刑法)은 전하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충성을 다하여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신하의 도리로 볼 때, 진실로 한편으로는 자전의 하교를 받들고 한편으로는 울면서 전하에게 청함으로써, 양쪽에 모두 유감이 없는 방도를 취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금부 당상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고 감히 독단적인 거조를 취했습니다. 이것만도 이미 놀라운 사건이었는데, 더구나 표신(標信)을 지닌 중사(中使)는 더없이 체모가 중대한데도 감히 띠를 당기고 허리를 끌면서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었습니다. 기강이 있는데 어찌 이와 같은 도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그때의 금부 당상을 모두 중죄로 처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앞부분에서 아뢴 일로 말하면, 처분을 그처럼 한 것은 위를 핍박하게 될까 염려한 것이다. 첨부하여 아뢴 일은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도승지 조종현(趙宗鉉) 등이 아뢰기를,
"신기현의 상소에서 금부 당상의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는데, 심보가 어쩌면 이다지도 음험하단 말입니까. 대신이 미처 품지를 거칠 겨를이 없었고 금부 당상이 먼저 거행을 한 것은, 대체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인데, 도대체 무슨 심보로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계책을 품고 불충한 마음을 버젓이 저지른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어서 빨리 엄중하게 징계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대간의 상소문 내용은 바로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하교한 뜻이다. 경들이 심각하게 보고 억지로 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 때의 일에 과연 독단적으로 처리한 혐의가 없다는 말인가."
하였다. 종현 등이 누차 아뢰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명을 기다리던 여러 대신들이 잇따라 돈독한 유시를 받고 차례로 대궐로 나왔으나, 좌의정 채제공 혼자만은 명에 응하지 않았는데, 하교하기를,
"대신 한 사람의 거취 때문에, 여러 대신들이 온종일 고달픈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공경하고 예우하는 뜻에 흠이 된다."
하고는, 여러 대신들을 소견하여 시사를 품지하지 말라고 하였던 전의 하교를 도로 환수하였으며, 채제공의 재상 직을 파면하였으며, 약원(藥院)의 신하들을 잉임시켰다. 판중추부사 서명선이 아뢰기를,
"신기현(申驥顯)의 상소는 그야말로 괴변입니다. 그때 신들이 금부 당상을 지휘하면서 역시 보잘것 없으나마 약간의 주견이 있었기 때문에 과연 먼저 거행부터 하였던 것인데, 이것은 단지 자전의 하교하신 뜻을 따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초 귀양을 보낼 때에 전하의 하교가 정원에 내렸습니까, 해부(該府)에 내렸습니까. 이런 까닭에 역시 신들의 이런 행동도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북면(北面)하여 임금을 섬기는 자가 어찌 감히 ‘제멋대로 처리를 해 버렸다.’는 등의 말을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법대로 처치하지 않는다면, 난신 적자가 장차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김종수가 아뢰기를,
"앞서지도 않고 때늦지도 않고 이 상소문이 이때에 마침 나온 것은 그야말로 매우 위급한 상황이라고 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눈앞에 닥친 일로서,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것보다 시급한 것이 없다. 시비를 가리기 어려운데, 만약 조금이라도 이러한 사단이 있으면 경들은 징토(懲討)를 늦추었다는 지목을 받게 될 것 같으니, 이것도 또한 난처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명선이 아뢰기를,
"‘우애(友愛)가 어떻고 어떻다.’고 하시는데, 비록 위대한 순(舜)이 상(象)에 대한 데에서도 오히려 이런 말은 없었습니다. 하물며 오늘날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쪼록 더 이상 말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15일 정묘

영의정 이재협이 차자를 올려 체직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전에 이미 빠짐없이 다 말을 하였는데 이제 어찌 되풀이하겠는가. 만약 들어줄 생각이 있다면, 어제 전 좌상의 서계에 대해 어찌 그대로 따라주지 아니하고 끝에 가서 상신(相臣)을 파면시키는 조처를 취했겠는가. 여기에서 나의 뜻이 굳게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마음속에 작정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부디 나오라.[勉出]’는 두 자일 뿐이니, 경은 모쪼록 한시 바삐 애초의 마음을 돌리고 나와서 정무를 보라."
하였다.

 

교리 서배수(徐配修) 등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국청을 설치하여 신기현을 엄히 심문하자고 청하니, 비답하기를,
"그때 금부 당상을 그 정도로만 처분하고 만 것은 대체로 위를 핍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신기현의 상소 내용은 바로 최초의 전교를 옮겨 베낀 것에 불과하다. 너희들이 이처럼 시끄럽게 하는 것은 매우 조급한 행동이다."
하였다.

 

시·원임 대신들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신기현을 성토하니, 비답하기를,
"신기현에 관한 문제는 어제 경들이 등연(登筵)을 했을 때 대면하여 이야기를 했을 뿐만 아니라, 승정원의 계사와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도 그 개략을 언급하였는데, 이제 와서 어찌 번거롭게 말할 것이 있는가. 나는 김이성의 상소에서 토죄를 지체한다고 지척한 것이나, 신기현의 상소에서 멋대로 처리했다고 지척한 것은, 모두 소란을 일으킨 죄가 있는 행동으로서 근일에 안정을 위주로 펴나가려는 정사에 크게 어긋난다고 본다. 그러나, 기현은 전교의 여의(餘意)를 옮겨 베낀 것에 불과하다. 이것을 심각하게 보고서 꼬치꼬치 캐어 긴요치도 않은 풍파를 또 일으키니, 그저께 이전에 했던 말이 그 효과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더이상 번거롭게 진술하지 말고 모든 일에서 오로지 나의 지극한 뜻과 고심하는 마음을 받들기에 힘쓴다면, 조정의 분위기가 안정되는 것은 실로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경들은 부디 힘쓸지어다."
하였다.

 

김광묵(金光默)을 이조 참판으로, 이조승(李祖承)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삼사(三司)가 【지평 연동헌(延東憲), 정언 이경심(李敬心), 교리 서배수(徐配修)·이우제(李遇濟), 부교리 유문양(柳文養), 수찬 서영보(徐榮輔)·이정운(李貞運), 부수찬 박규순(朴奎淳)·한광식(韓光植)이다.】 이인(李䄄)에 관한 일을 합계하였는데, 전계의 내용 안에 첨가하여 쓰기를,
"달포 전의 비상한 거조는 실로 나라가 있은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의리가 막혀 앞뒤를 돌아보며 남의 눈치나 보는 무리들이 꼬리를 물고 잇따라 일어났는데, 신기현(申驥顯)의 더없이 음흉하고 고약한 상소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습니다. 화의 근본은 여전히 남아있고 인심은 점점 나빠져 가니, 인을 섬에 귀양보내라는 명을 도로 중지하여 한시 바삐 해당 법률을 시행하고, 여러 아들들에게는 모두 외진 섬에 따로따로 유배시키는 법을 적용하소서."
하고, 양사가 윤승렬에게 형전을 시원하게 베풀고, 신기현을 엄하게 국문하여 죄상을 밝혀낼 것을 계청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6일 무진

현륭원(顯隆園)의 공역이 완공되었다. 안원전(安園奠)을 거행하였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나는 원(園)을 옮기는 한 가지 일에 대하여 오랫동안 경영하고 조처한 것이 있는데, 반드시 비용을 덜 들이고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신연(神輦)과 여교(轝轎) 및 촉롱(燭籠)은 정련(正輦)을 쓰고, 신연(神輦)을 배호(陪扈)하는 군대와 의장은 법가군(法駕軍)을 썼으며, 계원(啓園)할 때에는 자문감(紫門監)의 군사를 쓰고 여사(轝士)와 상여를 끌어당기는 시민, 잔디를 떠내는 사람 및 각종 운반을 맡은 군정들도 다 내탕고에 비치해 둔 돈을 꺼내어 그 양식과 비용을 후하게 주었으며, 의복까지도 자체로 마련하는 것을 금하고 역시 내탕고와 호조의 비용으로 만들어 주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다들 나라의 전법(典法)에 없는 일이고 체모에 관계된 일이라는 점을 누차에 걸쳐 말을 하였지만, 나의 구구한 본의(本意)는 오로지 선왕의 뜻을 이어나가려는 ‘앙술(仰述)’ 두 글자에 있었으므로 모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밖에 순여(輴轝)를 메는 군사는 따로 별계군(別契軍)을 썼고, 양반 집에서 거느린 장정으로서 자원하여 응모하는 자들 또한 일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해 오는 대여(大轝)는, 멜채[杠幹]가 너무 무겁고 가로 세로로 놓인 대[井架]가 너무 빽빽한 까닭에, 힘이 약한 여사(轝士)들은 어깨가 서로 부딪쳐 길을 가는 데에 불편하였다. 그래서 그 멜채를 잘라냈고, 가로 세로로 놓인 대를 줄이도록 하였다. 또 습의(習儀)를 세 번에 걸쳐 하는 것은 모이고 기다리는 폐단이 있으므로 두 번은 줄였다. 발인하는 날에는 도청의 낭청 및 근시하는 무신에게 나누어 명하여, 떡과 고기를 싸가지고 가다가 10여 리를 갈 때마다 한 번씩 먹이게 하였고, 또 역참길에 식량을 지급하고 초소를 설치하여 밥을 지어 먹이게 하였으며, 신방제중단(新方濟衆丹)을 만들어 사람들마다 몇 알씩 지급하여 줌으로써 한기(寒氣)를 막게 하였다. 옛 원에서부터 신원까지의 노정이 실히 백여 리나 되어 여사(轝士)들이 모두 20번이나 교대하면서 운반하였는데, 첫날 강가에서 출발을 한 때가 이미 해가 돋은 후였는데도 정오가 되기 전에 과천(果川)의 숙참(宿站)에 안치할 수 있었다. 그 이튿날 새벽녘에 신원을 향해 출발하였는데, 채 신시(申時)가 되기 전에 정자각(丁字閣)에 도착하였다. 원(園)을 연 때로부터 원에 안치할 때까지 역사(役事)를 감독한 신하들과 호위한 장사(將士)들 및 여부(轝夫)·장수(匠手)·역부(役夫)들이 죄다 몸성히 돌아와, 마치 도와준 사람이 있는 듯하였으니, 참 기이하고도 기이한 일이다."
하였다.

 

상이, 도감 당상관 김이소(金履素) 등이 복명한다는 것을 듣고, 사관을 보내어 중로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게 하였다.

 

일차(日次) 유생 전강(儒生殿講)을 거행하였다. 동지 정사 이성원(李性源), 부사 조종현(趙宗鉉), 서장관 성종인(成種仁)을 소견하였다. 하직 인사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대사헌 이득신(李得臣) 등이 상소하기를,
"임금의 말은 귀중하기가 윤발(綸綍)과도 같은 것인데 번뇌가 극에 달하여 심지어 맹세하는 말씀까지 하였으며, 대신은 응당 공경하고 예우해야 되는데도 연명으로 올린 차자를 또한 도로 돌려주도록 하였습니다. 그밖에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와 꺼내서는 안 될 말을 마음내키는 대로 하시면서 조금도 주저하거나 어려워하는 면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이 평소에 전하에게 기대했던 것이겠습니까."
하고, 이어 신기현을 찬배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교리 서배수(徐配修) 등이 연명 차자를 올리기를,
"어제 신들이 관중(館中)에 같이 모여서, 삼사가 합사하여 신기현을 토죄하자고 청한 사실을 여러 대간에게 알렸는데, 대사헌 이득신과 장령 유한인(兪漢人)은 문을 이미 잠근 뒤에야 비로소 궐문 밖에 도착하였고, ‘오늘 마땅히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사은 숙배하고 나서 일제히 분노하는 뜻을 나타내겠다.’고 하였건만, 해가 벌써 저물어간 뒤에야 느릿느릿 들어왔습니다. 한시가 다급한 징토(懲討)를 무덤덤하게 여기고 지체시킨 자취가 뚜렷하니, 모두를 원지(遠地)에 유배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득신 등의 일은 먼저 상소를 하고 뒤에 사은 숙배하였는데, 트집잡아 말할 점이 뭐가 있는가. 그런데도 먼 곳에 유배하자고 청하니,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시간이 이미 깊어진 뒤에 이처럼 배척을 받았으니, 혐의를 피하는 외에는 처신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해당 양사 관원을 아울러 체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들과 삼사가 청대하고 신기현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삼사가 합문에 엎드려 아뢰기를,
"자지(慈旨)를 받들어 흉악한 역적을 토죄한 자가 곧 그날의 금부(禁府) 당상이었는데, 저 기현은 그만 감히 금부 당상을 성토하면서 대뜸 중죄로 감정하자고 청하였으니, 이것은 그 의도가 금부 당상을 원수처럼 본 것만이 아니라, 실은 우리 자전을 무함하고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움과 분노가 격발하여 정상적인 규례에 구애하지 않고 품은 생각을 연이어 진술하였으나, 유음(兪音)을 내려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불에 태워버리라는 명을 내렸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거조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어서 빨리 기현의 죄를 다스리는 동시에 역적 이인을 법대로 처단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이 자전의 위세를 빙자해 이런 말을 함으로써 한사코 거절하는 사령(辭令)을 막는 것이 명분과 의리로 볼 때 감히 할 수 있는 일인가. 정말 너희들의 말마따나 더없이 중한 자리를 무함하고 핍박하는 데에 관련되는 것이 있다면, 일개 신기현을 어찌 아까워하겠는가. 당초 금부 당상을 유배한 것은 이미 특명에 따른 것이었다. 나의 처분이 그래도 과연 경솔하게 서두른 것인가. 그후 대신들이 ‘위를 핍박하였다.[上逼]’는 두 자와 ‘화풀이를 하였다.[移怒]’는 두 자를 연석(筵席)에서 제기한 뒤로 비록 부득이하여 도로 중지를 하였지만, 원래의 상소문 가운데 이미 위에 미치는 말이 없었는데, 지금 이를 고집하고 있는 것은 또한 당초에 금부 당상을 처분한 거조와는 다른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 감히 아우성을 치는가. 어찌 비답을 내리고 싶겠는가마는, 위세를 빙자한 설에 대해 한마디 말하여 분석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비답하니, 너희들은 이 점을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곧이어 그 직임을 모두 체직시켰다.

 

10월 17일 기사

전 군수 조윤형(曺允亨)에게 품계를 올려주라고 명하였다. 현륭원(顯隆園) 표석(表石)의 음기(陰記)를 서사(書寫)한 공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판중추부사 정존겸이 2품 이상의 관원을 데리고 빈청에서 아뢰기를,
"역적 이인을 아직 주벌하지 않았는데, 저 홍국영(洪國榮)·송덕상(宋德相)·구선복(具善復)·구명겸(具明謙)·김우진(金宇鎭)·조시위(趙時偉) 등의 역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 것은 모두 화의 근본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신기현 같은 자가 역적의 괴수를 두둔하면서 공공연하게 상의 의중을 떠보는 계책을 꾸민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개 기현 혼자서 해낸 것이겠습니까. 기현의 죄는, 비단 임금을 안중에 두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자지(慈旨)도 안중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한시 바삐 삼사의 청을 따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만약 신기현 한 사람의 사안이라고 말한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하교를 하겠는가. 오늘의 계사는 지난번의 계사와 다른 것이 없으니, 이제 일전에 전교를 환수한 것이 과연 무슨 보람이 있는가. 경들은 잘 알도록 하라. 만약 물러가지 않는다면, 이제는 다시 무엇을 돌아보겠는가. 환수하였던 전교를 정원으로 하여금 도로 당장 반포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여러 승지들이 의논하여 바로잡기를 청하니, 불에 태워버리라고 명하였다.

 

시·원임 대신들을 소견하였다. 판중추부사 서명선이 아뢰기를,
"십수 년 이래 사변이 거듭 발생하였는데, 처음에 홍국영과 송덕상이 나타났을 때 뿌리째 다스리지 않고 화의 근본을 여전히 남겨두었기 때문에 구선복(具善復), 구명겸(具明謙)이 다시 나왔고, 광운(匡運)이 뒤를 이어 나왔고, 신기현이 또 나왔습니다. 만약 다시 그냥두고 따지지 않는다면, 장차 이런 흉악한 역적들이 얼마나 더 나오게 될지 모를 것입니다. 신 등이 다행히 속마음을 아뢸 수 있는 자리를 얻었는데, 만약 요청을 허락해 주지 않으신다면 죽어도 감히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낱 기현의 일을 가지고 경들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였다. 명선이 아뢰기를,
"기현이 어찌 빈청의 계사가 나오리라는 것을 짐작하지 않았겠습니까. 틀림없이 자기가 죽게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이런 흉악한 상소문을 지었다는 것은, 화기(禍機)가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서 일개 기현에 관한 일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만약 나라에 임금이 없을 수 없다는 의리를 안다면 더 이상 번거롭게 말하지 말고, 다만 ‘시사(視事)를 품(稟)하지 말라.’는 전의 전교를 환수하라고만 청해야 할 것이다. 만약 지금같이 군다면, 마땅히 한 등급 더 심한 전교를 내리겠다."
하였다. 명선이 아뢰기를,
"이제 만약 고집하신다면 물러간 경재(卿宰)들이 다시 도로 들어올 것이고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뒤를 이어 쟁집(爭執)할 것인데, 전하께서 어떻게 모두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본래 병란(兵亂)이 없기 때문에 전부터 편당(偏黨)의 명목을 만들어 서로 함께 주륙(誅戮)을 하는데, 종반(宗班)의 한 사람도 번번이 그 속에 들어갔다. 옛적에는 8명의 대군(大君) 가운데 온전히 보전한 사람은 겨우 두 사람 뿐이었다. 선대왕께서 당론을 통렬히 금하였으니, 그것이 더없이 비상한 조처였음을 더욱 깨닫게 된다. 그런데 세도(世道)는 날로 떨어지고 인심은 예전 같지 아니하여, 이러한 폐단이 아직껏 죄다 제거되지 않고 있으니, 이 때문에 통탄스럽고 애석하다."
하였다. 명선 등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종반(宗班)들이 법적인 처리를 받은 일이 비록 많지만, 역적 행위와 흉악한 기도치고 또한 이 역적과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하교에 대해서 무덤덤하게 보통일처럼 듣는다면, 마땅히 병오년의 전례대로 합문을 닫고야 말겠다."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번갈아 가면서 성토(聲討)에 관하여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공경하고 예우하는 점이 부족하더라도 다시 물어보도록 하겠다. 경들이 내가 필시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와 같이 앙주(仰奏)를 하는 것이라면 매우 성실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들어주기를 목표로 삼는다면 경들이 나를 보기를 뭘로 보는가. 이제 만약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 의리가 있다면, 경들은 마땅히 더 이상 말하는 바가 없어야 할 것이다. 경들이 물러가지 않겠다면, 내가 먼저 일어나겠다."
하였다. 명선 등이 드디어 물러나와 대명(待命)을 하니, 하교하기를,
"경들의 거조가 그러고도 신하로서의 분의(分義)가 있다고 하겠는가. ‘감히 받들지 않겠다.’고 하고서 또 말이 오가는 동안에 마치 달갑게 듣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더니 필경에는 물러나갈 무렵에 거조가 전도됨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 일에서나 저 일에서나 경들을 위해 개탄스러운 마음이다. 대명한다는 계사에 대답을 하자니, 피곤한 증세가 하나 더 늘어나겠는데, 내가 경들에게 무엇을 저버렸길래 이와 같이 나를 고달프게 하는가. 이제 일전의 전교를 이미 도로 반포하였는데, 그것을 다시 환수하는 것도 오직 경들에게 달렸을 뿐이다. 대명하지 말고 모쪼록 깊이 생각해서 행동을 하라."
하였다.

 

교리 이우제(李遇濟) 등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신기현에게 한시 바삐 해당 법률을 적용하고 역적 이인을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하니, 파면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신기현을 유배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신들을 접견한 것은 전적으로 이 일 때문이었다. 이와 같건 저와 같건 그것은 따질 것 없이, 이런 때에 소란을 일으켰으니 그 죄가 똑같다. 그 말이 어떤가에 대해서는 우선 내버려 두고라도, 오늘과 같은 다급한 거조를 있게 한 것은 이 사람 때문이다. 시사(視事)에 대하여 품(稟)하지 말고 약원(藥院)의 관원들을 임시로 감하하라는 전교를 다시 반포한 것 때문에 조정이 지금 조금 기가 꺾였는데 이와 비슷한 말이 한 번 있게 되면 난감한 단서를 하나 더 보태는 것이다. 금부 당상에 대한 처분과 상반되는 혐의는 작은 것이고, 갖가지로 애써 안전하게 하고 몸성히 보호하려는 의리는 큰 것이다. 그가 고심(苦心)하는 나의 심정을 몸받지 아니하고 내키는 대로 나오는 말을 섣불리 올렸으니, 어찌 더없이 절통(絶痛)할 일이 아니겠는가. 폐단을 막고 소란을 진정시키는 길은, 법을 내거는 것보다 더 나은 방도가 없다고 본다. 정언 신기현은 본직을 체차하고 즉시 찬축하라.
정원과 금부에서 만에 하나라도 대신의 잘못을 흉내내어 분에 넘는 행동을 하게 될 경우, 대신들에 대해서도 오히려 비상한 전교를 내리는 시점이니, 이 무리들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 전지(傳旨)를 만약 즉시 반포하지 아니하면 마땅히 별도의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동의금부사 서유대(徐有大)가 상소를 올려 신기현에 대한 처분을 취소할 것을 청하니, 유대를 금장(禁將)에게 넘기라고 명하였다. 여러 각신(閣臣)과 3품 이상의 관원들이 잇따라 차자와 상소를 올려 기현을 성토하였으나,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10월 18일 경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별시사(別試射)를 거행하였다.

 

승지 홍인호(洪仁浩)가 소를 올려 아뢰기를,
"역적 신기현을 유배시키는 일은 단지 일을 미봉하려는 것이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비망기를 내리자마자 반포하라고 독촉하셨는데,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되돌려 올리면서 말이 궁하고 뜻이 모자란 나머지, 결국에는 여러 동료들이 다들 쫓겨나고 신 홀로 정원에 남았습니다. 처음에 엄한 교지가 연거푸 내려 이미 인자(人子)로서 차마 감당하지 못할 지경을 당하였는데, 계속하여 우레와 같은 위엄을 여러 번 떨치어 갑자기 인신(人臣)으로서 감히 받들 수 없는 하교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이에 다른 것은 돌아볼 겨를조차 없어, 단지 반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구전(口傳)으로 들어가 품(稟)하고, 마침내 그만 서둘러 나와 문에 엎드리어 허물을 자책하니, 삼가 바라건대, 어서 신의 죄를 다스리어 공의에 답하소서."
하니, 대답하지 않았다.

 

시·원임 대신들이 연명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들은 신하로서 충성스럽지 못하고 성의가 부족하여 대론(大論)을 무상(無常)하게 제기했다 그쳤다 해서 여정(輿情)이 물끓듯이 분개하고 있으니,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자리를 얻어 임금의 마음을 감회(感回)시킬 기회를 가졌으나, 결국은 하늘을 감동시킨 효과가 없이 도리어 비상한 하교를 받들게 되었으니, 이 또한 신들의 죄입니다. 이처럼 어리석고 망령되어 분수를 범하고 예절을 잃었으며, 천위(天威)를 지척에 두고서 물러가라는 명이 내렸는데도 물러갈 줄을 몰랐으니, 이 또한 신들의 죄입니다. 이에 감히 짤막한 차자로써 대략 스스로 탄핵하는 의리를 본받는 바입니다."
하니, 대답하지 않았다.

 

10월 19일 신미

하직 인사를 하는 도신(道臣)과 곤수(閫帥)를 소견하였다.

 

시·원임 대신들이 연명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기현을 국문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연애(連愛)의 공초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신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재앙의 뿌리를 하루인들 지상에 남겨두어 종묘 사직의 헤아릴 수 없는 걱정거리를 열어 놓으며 뭇 흉도들이 반역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뭇사람의 입을 막아낼 방도가 없고 보니, 대뜸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약원에 내린 비지(批旨)를 살펴보건대, 그저께 내린 심상치 않은 하교를 아직껏 환수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들이 또 다시 천위(天威)를 범하는 것이 죽을 죄가 된다는 점을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구구하게 나랏일을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혹시라도 살피어 받아들이신다면, 환수하라는 명은 한나절도 안 되어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공경하고 예우해야 하는 의리를 대략은 알고 있고 상신(相臣)의 차자를 묵혀두는 것이 옛날에 없던 일이라는 점을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이러한 시기와 이러한 일에 있어 어떻게 상례만을 지킬 수 있겠는가. 경들은 이 점을 이해할 것이다. 다시 반포한 전교를 환수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오로지 경들이 거조를 흔쾌히 따르는 데에 달려있다. 대명(待命)한 일에 대한 비답 가운데 ‘집으로 돌아간 후에 환수하겠다.’고 말한 것은, 흔쾌히 따르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간 후 어제의 차자와 오늘의 차자에서 한결같이 번거롭게 말을 하니, 이런 판국에서 난들 어떻게 다른 말을 하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대신들의 차자 내용을 살펴보니, 오히려 다시 소란을 피우고 있다. 경재(卿宰) 이하가 근일의 사안을 가지고 궐문을 들어오는데도 금하지 않을 경우, 수문장에게는 마땅히 군율을 적용할 것이고, 병조의 당상과 낭청은 마땅히 유배를 보내겠다. 대신 이하로 하여금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사직 이집두(李集斗)가 소를 올려 김우진(金宇鎭)과 조시위(趙時偉), 의원과 유모, 윤승렬과 신기현을 성토하고, 이어 말하기를,
"전 주부 송익로(宋翼魯)는 바로 하늘이 낸 요물로서, 그의 첫 벼슬이 이미 흉악한 역적의 손에서 나온데다가 못된 무리들과 결탁을 하였으니, 이는 바로 본래 타고난 기량입니다. 그리고 권문 세가에 빌붙었으니, 또 눈앞에 있는 화근입니다. 그 어지러워진 근본을 캐보면, 바로 역적 이인(李䄄)이 섬 속에서 숨을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우선 역적 인에게 해당하는 율을 후련하게 적용하고, 그 외의 여러 역적들에 대해서도 모두 삼사의 청을 윤허할 것이며, 송익로는 외딴 섬에 정배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앞에서 말한 사항은 불에 태워버리고, 덧붙여 아뢴 송익로의 문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20일 임신

합문에 엎드려 있는 여러 대신들을 파직시켰다. 판중추부사 서명선 등이 합문에 나아와 청대하니, 하교하기를,
"빈청 계사에서의 청을 인준하라는 설은 이 무슨 말인가. 빈청에서 계청하는 일을 중지한다면 비상한 하교는 저절로 환수될 것이다. 어찌 청대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환수를 하겠는가. 이렇게 한다면 비록 열흘이 되더라도 결단코 인접할 리가 없다."
하였다. 이에 명선 등이 합문에 엎드려 아뢰기를,
"빈청의 계청을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정지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전후의 계사와 차자에서 모두 말을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들에게 신하로서의 절의가 조금이나마 있다고 보신다면 어떻게 차마 이렇게 신들을 책망하실 수 있겠습니까. 비상한 하교를 한시 바삐 먼저 환수하시고 이어 신들의 인접을 허락하시어 진심을 모두 아뢸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처럼 다그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경들은 나로 하여금 한층 더 듣고 싶지 않은 하교를 다시 내리게 하고서야 그만두려는 것인가. 절대로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와서 귀를 시끄럽게 하니, 성실함이 부족하다는 탄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 어서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재차 아뢰니, 비답하기를,
"상반되는 일을 한꺼번에 같이 제기하여 이처럼 번거롭게 청하고 있다. 경들이 나를 성의로써 대하지 않으니, 나 또한 어찌 경들을 돌볼 것이 있겠는가. 반드시 구전(口傳) 하교를 듣도록 하라."
하고, 이어 엄절한 하교를 내렸다. 여러 대신들이 합문(閤門) 밖에서 관을 벗으니, 하교하기를,
"조금 전에 내린 구전 하교를 듣고도 청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니, 대관(大官)으로서 분수와 의리가 없는 것인가? 그런데 또 합문을 지키면서 심지어 관을 벗는 행동까지 하다니, 이 비상한 하교보다 더한 하교가 어찌 다시 있겠는가. 이런 판국에서는 대관이라도 돌아볼 겨를이 없다. 합문을 지키고 있는 여러 대신들을 한꺼번에 모두 파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정존겸·홍낙성·채제공이, 의리상 서로간에 차이가 없다는 이유로 명을 기다리니, 모두 사직을 허락하였다. 각신(閣臣)들을 모두 잡아다가 처리하고, 승지들을 모두 체차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재(卿宰)로서 만약 대궐문을 넘어와 상소를 하는 자가 있으면, 수문장에게는 마땅히 군율을 적용할 것이다. 이를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윤숙이 소를 올리기를,
"지금 대신들이 모두 파면되었는데, 차자를 올릴 길이 막혀 여러 동료들은 궐문 밖에서 짚자리를 깔고 앉아 대죄(待罪)하고 있으며, 글을 올릴 문이 막혀 온 나라가 떠들썩하여 안정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어서 문을 막으라고 하신 명을 거두시고, 상신의 차자와 여러 신하들의 연명 상소에 비답을 내리시고, 이어 신기현을 국문하여 그 사주한 자를 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금번의 이 거조를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내 뜻을 흔쾌히 따르기만 하면 마땅히 곧장 중지하겠다. 경 때문에 비답을 내리는 바이다."
하였다.

 

전 판중추부사 정존겸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나랏일은 급하고 사적인 의리는 도리어 가벼운 것입니다. 청한 바를 인준하시기 전에는 감히 성 밖으로 멀리 나갈 수 없어서 의금부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기다림으로써, 삼가 옛사람이 옥중에서 글을 올렸던 의리를 본받아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엄하게 신칙하신 하교를 환수하도록 하는 일에 서두르다 혹시나 대론(大論)이 잠시라도 중단된다면, 종묘와 사직은 어떻게 되며 자전의 하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신들이, 환수토록 하는 일을 앞세우고 토복(討復)하는 청을 뒤로 미루는 데 대해 요모조모 계산을 하면서 끝까지 감히 성교(聖敎)를 받들지 않고자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들이 합문에 엎드려 있을 때 청한 바를 한시 바삐 윤허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오늘 구전한 하교를 듣고도 오히려 보통 일로 받아들이면서 심지어 이와 같이 상소를 하는구나. 경들은 대관(大官)인데도 이처럼 직분을 다하지 않으니 어찌 중외에 이 일을 알게 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비록 거리낌없이 굴더라도 유독 군신간의 큰 의리에 대해서 만큼은 생각하는 바가 없는가. 나는 근일의 조처와 사령(辭令)에 있어서 보고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거조를 날마다 수습하느라 밤낮으로 겨를이 없는데, 경들이 대하는 태도는 급하지도 않고 덤덤하게 보고 있다. 나라가 있고 임금이 있고 대신이 있은 이래 이와 같은 꼴이 언제 있었는가. 경들이 만약 참으로 신하된 자의 마음이 있다면, 우선 들으려고 하지 않는 청을 거두고 그 다음에 두 건의 일에 대한 전교를 환수하라고 청하라. 그렇게 하면 내가 아마 경들을 대할 면목이 있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경들이 모쪼록 마음을 누르고 하교를 따르기 전에는 상소문이건 차자이건 간에 결코 비답을 내릴 리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10월 21일 계유

정원이 아뢰기를,
"시·원임 대신들이 ‘시사(視事)에 대하여 품하지 말라.’는 하교와 ‘약원(藥院)의 관원을 임시로 줄이라.’는 하교를 환수하도록 청하는 것이 매우 다급하여, 궐문 밖에 와서 자리를 깔고 엎드리어 명을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밤을 꼬박 새운 후에 이제 비로소 정원의 계사를 보건대 ‘오로지 전교를 환수하도록 청하기 위한 것이다.’고 말한 이상 본사(本事)를 시원스레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근일 대신들의 거조에 대하여 파직하는 정도에서 그친 것은, 오히려 너무 느슨한 면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오늘날 시급한 일은 조용하게 진정시키는 데서 벗어나지 않는다. 더구나 그들이 시원스레 따랐다는 것을 안 이상, 환수하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하여 어찌 고집을 부림으로써 나라의 기강과 신하의 분수가 무너지도록 놔둘 수가 있겠는가. 정사를 보는 문제와 약원에 대한 일로 다시 반포한 전교를 즉시 도로 환수하겠다. 허다한 착오는 당분간 제쳐두고, 우선 조정의 분위기를 정돈하고자 하니, 시·원임 대신들에 대한 처분 전교를 모두 아직 시행하지 말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대신들을 처분한 전교를 시행하지 말라고 이미 명하였다. 직책이 대관(大官)인데 어떻게 대신이 분수없는 행동을 했다 하여 나까지 덩달아 본받아서 공경하고 예우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명소(命召) 또는 밀부(密符)를 사관에게 주어 전해 주도록 하는 동시에 안심하고 집에 돌아가라는 뜻으로 여러 대신들에게 전유(傳諭)하라. 경재(卿宰)들이 이미 물러간 이상 이번 일은 타결이 되었으니, 궐문의 통행을 오래 금지하는 것도 국가의 체모에 관계된다. 앞으로는 전처럼 출입을 하라."
하였다.

 

10월 22일 갑술

승지 정존중(鄭存中)이 아뢰기를,
"대신들에 대한 처분을 환수한다는 전교 가운데 ‘멸분(蔑分)’ 두 글자는 아무래도 대신을 공경하는 뜻이 부족하니, 특별히 취소를 하시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원칙에 맞다."
하고, 이어 그 의견을 따랐다.

 

영의정 이재협이 장단(長單)을 올리니, 하교하기를,
"경이 어찌하여 글을 올리는가. 이미 ‘버리지 않겠다.[不捨]’는 두 자를 일전에 올린 차자의 비답에서 언급하였으니, 어찌 여러 말을 하겠는가. 경은 모쪼록 한시 바삐 정고(呈告)를 철회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그저께 여러 승선(承宣)들의 행동은 지각없는 것이 아니면 참으로 무엄한 것이었다. 그때에 전교를 환수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대신들이 청을 빨리 중지하는가 늦게 중지하는가에 관련된다는 것을 빤히 알았기 때문에, 사흘 이전에 승정원에 있던 사람들은 이런 행동이 별로 없었는데, 어찌 이들의 소견이 미치지 못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대체로 합문에 나아와 청대를 하는 일은 더없이 중대하고 신중한 것인데, 하루 동안에 거의 50 차례나 청하면서 처음 비답이 내리자마자 곧장 재계(再啓)가 뒤따라 들어오고 이미 아뢰고 또 아뢰고 하여, 마치 남으로 하여금 체차시키고 파직하기를 독촉하는 것처럼 하였다. 일이 불성실하기가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잡아다 처분하는 정도로만 그칠 수 없으니, 승지들의 일로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삭직하고 풀어줌으로써 징계하는 도리를 알도록 하라."

 

우의정 김종수가 상소하기를,
"전교 가운데 이 일을 흔쾌히 따랐다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하여 민망하고 두려움을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 온 나라 사람들이 이구 동성으로 얘기하는 대론(大論)은, 실로 천리와 인륜에 관계되어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령 신들이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라 비위나 맞출 꿍꿍이를 하려고 하더라도 나라 사람들의 입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미 그 일을 쾌히 따르지 않았음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만 쾌히 따른 것으로 용서를 받았으니, 명실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 것은 바로 선현이 이른바 ‘용서받은 것이 도리어 갇혀있는 것만 못하다.’는 격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겁을 먹었다느니 다급하여 어쩔 줄 모르겠다느니 비위를 맞춘다느니 말하는가. 군신간의 큰 의리가 있다면, 역시 어떻게 하루인들 시사(視事)를 정지하겠으며 약원(藥院)을 없앨 수 있겠는가."
하였다.

 

판중추부사 채제공이 상소하기를,
"삼가 보건대, 근일의 걱정스러운 기미와 매우 분통스러운 단서들은, 실로 신기현에 대해서보다 열배 백배 더한 것이 있습니다. 아, 저 이재간(李在簡)은 더없는 보살핌과 예우를 받고 더없이 높은 품계에 있으면서도 오직 역적 조시위(趙時偉)에 대해 목숨을 내걸 줄만 알 뿐, 왕가(王家)에 마음을 쏟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병오년에는 병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서 빈청의 계청에 불참하였고 정청(庭請)의 제유(齊龥)에도 불참하였으며 소를 마련하는 일에도 또 불참하였습니다. 그의 행적을 가지고 마음을 살펴보면 길가는 사람들도 다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고쳐먹지 않고 그 버릇이 아직껏 여전하여, 오늘날에 와서도 또다시 핑계를 대고 빈청의 계청에 불참하였고 모든 관원들이 함께 올리는 상소에도 나아오지 않는 것이 병오년의 행동과 똑같은 꼴입니다. 지금 공의가 물끓듯 하여 기어코 끝까지 따져서 밝혀내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신기현의 지휘자에 있는데, 재간처럼 화근(禍根)을 양성하고 이리저리 늘어놓은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자를, 만약 명백하게 밝혀내고 통렬하게 처결하지 않는다면, 신은 흉측하고 추악한 지휘자를 잡아낼 날이 없으리라고 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재간을 엄히 국문하여 국법을 후련히 적용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중신 이재간을 엄히 국문하자는 청으로 말하면, 질병에 걸리는 것은 사람으로서 면하기 어려운 것이니, 어떻게 이것을 가지고 죄를 삼을 수 있겠는가. 어느 일, 어느 일로 말하면,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대신을 공경하는 뜻에 소홀해서가 아니라, 따라 주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다."
하였다.

 

사학의 유생 심방(沈鈁) 등이 소를 올려 역적을 성토하니, 상소문은 불에 태우고 소두(疏頭)는 정거(停擧)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3일 을해

완성군(完城君) 이의행(李義行)이 상소하기를,
"우리 자성 전하(慈聖殿下)는 여자 중의 성인이십니다. 말이 집 밖에 나가지 아니하는 덕으로 명백한 분부를 내리는 거조가 있었는데, 열 줄의 언문 교서는 글자 하나하나가 전범이 되는 말로서 어찌 혹시라도 그런 사실이 없는데 이런 분부를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전하는 타고난 효성으로서도 끝내 자전의 분부를 받들려고 하지 않으시니, 이는 마치 이인(李䄄)에게 죽일 만한 죄가 없고 나라에 걱정될 것이 없다고 여기시며, 자전의 분부 또한 존신(尊信)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셈입니다. 그리하여 대신이 ‘화풀이를 한다.’고 아뢰어 감히 우리 두 궁(宮)의 지극히 자애롭고 지극히 효성스러운 덕에 누를 끼쳤습니다. 그 후 상신(相臣)의 차자에 대한 비답 가운데 두 글자는, 전하의 사령(辭令) 역시 세심히 살피지 못한 잘못이 되고 마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자전의 분부가 정당하고 인에게 죄범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사(本事)를 끝까지 조사해내는 일도 그냥 두고 따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하의 정사와 법이 공정한 것이겠습니까, 사사로운 것이겠습니까. 자성의 언문 교서를 중시하는 것이겠습니까, 경시하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못된 무리들이 장차 이를 빌미삼아 우리 자성을 호되게 무함하고 우리 자성을 원수처럼 여길까봐 걱정스럽습니다. 신은 실로 가슴이 아프고 뼈가 저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시원스런 결단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편을 통하여 마구 함부로 말을 하였다. 그 가운데 ‘분풀이를 하였다.[移怒]’는 두 자로 말하면, 그때 두 대신은 ‘위를 핍박하게 된다.’거나 혹은 ‘불안하다.’는 뜻으로 말을 하였는데, 내가 과연 그 말을 해석하고서 다시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위를 핍박하게 된다거나 불안하다고 운운한 것은 화풀이를 하는 셈이 되는가.’라고 하였으며, 이어 ‘화풀이를 한다.[移怒]’는 두 자를 비답 내용에 불러 주어 써넣게 하였고, 아래에서 거행 조건을 추후에 써넣으면서도 역시 비답의 내용에 따라 말을 만들었다. 대신들로서야 여기에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은 대체로 근일 기회를 타서 흔들려는 속셈이다."
하고, 의행을 삭직하라고 명하였다.

 

관학 유생인 진사 윤행진(尹行進) 등이 소를 올려 역적을 성토하니, 불에 태워버리고 소두(疏頭)를 정거(停擧)하라고 명하였다.

 

정호인(鄭好仁)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시수(李時秀)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정민시(鄭民始)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이재간(李在簡)을 진도(珍島)에 유배하였다. 우의정 김종수, 형조 판서 심이지(沈頤之)를 소견하였는데, 이지가 아뢰기를,
"신기현의 흉악한 상소가 나온 뒤에 상신(相臣)을 논하는 설이 있기에 본조에서 붙잡아 냈는데 바로 이름이 최홍수(崔弘遂)라는 자였습니다. 승려의 제자로서 세상을 돌아다니며 상신을 논의하였는데, 어제와 오늘 추문(推問)을 하니 흉악한 말이 매우 많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흉악한 말이란 어떤 말인가?"
하였다. 이에 종수가 아뢰기를,
"그가 공술(供述)한 것을 듣건대, ‘지금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롭기 때문에 전하께서 지난번의 거조를 하였던 것인데 대신과 금부 당상이 제멋대로 도로 귀양을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오늘날 신자(臣子)로서 감히 엄두를 내고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고, 이지가 아뢰기를,
"상신을 논의할 때 같이 들은 사람이 4, 5명 있는데, 이들도 한꺼번에 잡아다 조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잡아다 국문해야 한다면, 어찌 기현을 심문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기현의 상소문에서 ‘형법(刑法)과 정령(政令)’이라고 한 말은 유난히 흉악하고 참혹하니, 한 번 잡아다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현을 심문 조사하지 않는 까닭을 경들이 어찌 잠자코 헤아리지 않는가. 위를 핍박한 것은 중한 문제이니 비록 통분스럽고 놀라운 일이기는 하나, 이제 만약 그를 심문했다가 이보다 더욱 흉악한 말이 나오게 되면, 이 어찌 난처하지 않겠는가. 또한 ‘형법과 정령’이라는 네 글자는 흉악한 말과 차이가 있다."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역적 이인의 정절(情節)이 이제 이미 드러났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현의 와굴(窩窟)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자, 종수가 아뢰기를,
"원임 대신의 상소문을 보건대, 바로 이재간(李在簡)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 사람에 대하여 근래 보살피고 예우한 것이 어떠했고 은혜를 베푼 정도가 어떠하였는가. 그런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일찍이 역적 김하재(金夏材)는 보살피고 예우함에 있어 융숭하지 않았던 게 뭐가 있으며, 은혜를 베풀어 줌에 있어 극진하지 않았던 게 뭐가 있어서 그러하였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조시위(趙時偉)에 대하여 애석하게 여기느라고 마음을 돌리지 못하기 때문인가?"
하였다. 이에 종수가 아뢰기를,
"비단 시위의 혈당(血黨)일 뿐 아니라, 실로 위적의 와굴(窩窟)인 셈입니다. 대신이 이미 와굴이라고 못박아 말하였고 국론이 떠들썩하니, 어떻게 덮어 가릴 수 있겠습니까. 불가불 우선 먼 곳에 유배를 보냄으로써 세도(世道)를 정돈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집안은 대대로 공훈을 세운 세가(世家)인데, 지금 만약 처분을 한다면 그 집안에서 상해(傷害)가 많을 것이니, 이 어찌 난처한 일이 아닌가. 나는 중신(重臣)에 대해서 금석(金石)처럼 변함이 없는 도리로 대하여 보살피고 예우함이 날로 융숭하였지만, 채 판부사(蔡判府事)의 상소와 차자가 계속 나오니, 부득불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 한 시대의 조사(朝士)로 하여금 각성을 하도록 해야겠다."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이재간이 병오년 겨울에 빈청의 계청(啓請)과 백관의 정청(庭請)에 불참하고 중풍(中風)을 앓는다는 핑계 아래 가마를 탄 채 대궐문 밖에 와서 위적(偉賊)과 더불어 행동을 똑같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전(慈殿)에게 존호(尊號)를 올릴 때에도 시종 참반(參班)하지 않았으면서, 탁지(度支)에 제수하였을 때에는 하루도 안 되어 금세 나와 숙사(肅謝)를 하였으니, 그의 종적이 수상한 데 대하여 오래 전부터 나라 사람들이 의심을 해왔습니다.
이번에 빈계(賓啓)를 올리고 진신(搢臣)이 상소할 때에는 가마를 탄 채 궐문 밖에 나아오는 것조차도 아울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전후 행적을 살펴보면, 마치 다른 주장을 마련하여 세우려는 것처럼 하였으니, 나라의 형세가 위급하고 인심이 흉흉한 이런 때에 일찌감치 전장(典章)을 시행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이에 하교하기를,
"내가 이 중신(重臣)에게 전후로 내린 사교(辭敎)에서 이따금 너무도 박절하게 한 때가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그 사람을 위해서였고 한편으로는 그 집안을 생각해서였다. 그후 헤아릴 수 없는 죄에 걸린 것을 곡진히 두둔하여 살려낸 결과, 겨우 다행하게 무고(無故)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번에 또 다시 두 대신이 그를 성토하는 것이 심상하지 아니한가.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자니, 이는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닐 것이다. 대체로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준 까닭에 이러한 사단(事端)이 있게 된 것인데, 줄곧 일시적으로 미봉만 해나간다면, 그 사람이나 그 집안은 우선 논하지 않고 또 반세(半世) 동안의 누명도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근일에 여러 모로 애쓰고 고심하면서 기어이 무사하게 해주고야 말겠다고 작정해온 본의(本意)에 매우 어긋나게 될 것이다. 마땅히 처단해야 하는 것을 처단하지 아니하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의당 경계를 해나갈 것이니, 외딴 섬에 정배(定配)하는 법을 적용토록 하라."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형조에 수감된 죄인의 단서가 이미 드러났으며 관계가 매우 중요하니, 즉시 국청(鞫廳)을 설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분간 수금만 하도록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의행(李義行)의 상소에서, 지난번의 거조(擧條) 가운데에 있는 ‘화풀이를 하였다.[移怒].’는 말을 가지고 호되게 비난을 가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신이 그날 상주(上奏)한 것은, 사유를 알지 못하는 외간 사람들이 혹시 ‘화풀이를 하였다.’고 여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는 가설에 불과할 뿐 성상께서 정말로 분풀이를 할 만한 노여움이 있었음을 말했던 것이 아닙니다. 거조(擧條)가 있으니 자연 조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재간의 일로 말하자면, 질병에 걸리는 것이 비록 사람으로서 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병은 공교롭게도 병오년에 징토(懲討)를 할 때 발생하였고, 다시 발생하게 된 때도 꼭 올해 징토할 때에 있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설령 진짜로 병이 있었다면 들 것에 실려 궐밖에도 나오지 못했을텐데 들 것에 실려 소청(疏廳)에 나왔으니, 이는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그가 신기현을 지휘하여 흉악한 상소를 꾸며냄으로써 관망할 계책을 한 것으로 말하면, 분명하여 덮어 가릴 수가 없습니다. 대체로 그의 처신은 갖가지로 달라지고 변합니다. 근년 이래로 김우진·조시위와 결탁하고 우진·시위와 사생을 같이하였으며, 우진·시위의 반역 행위가 모조리 드러난 후에 와서도 오히려 미련을 못버리고 죽도록 그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기현의 와주(窩主)가 그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의행 상소의 얘기를 새삼스럽게 꺼낼 것은 없다. 내가 말한 것을 경이 갑자기 대신 맡고 나서다니, 마땅히 한바탕 웃어넘겨야 할 것이다. 이재간의 일에 대해서는, 금번 차자에 나열한 것이 한결 더 정도가 깊어졌는데, 때마침 또 우상이 연석(筵席)에서 상주한 일이 있었다. 대체로 이 중신(重臣)은 전후로 입은 은혜가 매우 각별하였으니, 내막이 있고 없고는 따질 것 없이, 이 사람에게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은 진실로 생각도 못했던 바이다. 대신을 공경해야 하는 의리에 있어, 한 중신을 위하여 또한 어떻게 한결같이 거부만 할 수 있겠는가. 이미 하교를 하였다."
하였다.

 

10월 24일 병자

영의정 이재협(李在協)이 세 번째 사직서를 올리니, 안심하고 조리하라 명하였다.

 

진사 신석상(申奭相) 등 83인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역적을 성토하고, 이어 말하기를,
"신들 또한 관유(館儒)입니다. 처음에는 관학(館學)에서 올리는 소에 연명을 하였는데, 소본(疏本)을 보니 끝부분에 ‘병을 칭탁한 대신(大臣)’이라는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의심스러워 형세상 따라 참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따로 상소하는 이유를 아룁니다."
하니, 불에 태워버리고 소두(疏頭)를 정거(停擧)하라고 명하였다.

 

태학의 유생들이 권당(捲堂)을 하고, 소회(所懷)를 써서 올리기를,
"전하께서 사적인 은혜 때문에 공적인 법을 무시하므로 흉측하고 악독한 기미가 날이 갈수록 더욱 얽히고 있으며, 심지어 신기현이 상소를 꾸며냄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습니다. 안에서 부채질하고 밖에서 맞장구를 치는 것이 마치 한(漢)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에워싼 뒤 사방에서 온통 초(楚)나라 노래를 부르게 한 것과 같으니, 국가의 일이 그야말로 위급하기 짝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역적의 괴수가 도망해 돌아와서 성안에 몰래 있을 때, 오직 우리 자성(慈聖)의 언문 교서가 애통하고 측달(惻怛)하여, ‘여러 신하들이 힘껏 거들어 먼저 거행부터 하고 나중에 앙청(仰請)을 하라.’는 분부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조정 신하에는 머리를 부숴가면서 앞장을 서는 자가 없어서, 장차 형식적인 일이 되고 말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한 사람의 재신(宰臣)이 굳은 정성으로 제 한몸을 돌보지 않고 나서지 않았더라면, 역적 괴수를 당일로 압송하는 일은 어찌 해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 저 기현은 틈을 엿보아 흉악한 상소를 올려, 의리에 입각하여 역적을 토죄한 일을 놀랍고 통분하다고 하였으며, 자전의 하교를 봉행한 일을 가지고 제멋대로 처리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이 역적은 신치근(申致謹)을 할애비로 삼고 신완(申琬)을 아비로 삼고 있으니, 흉측한 심보와 못된 꿍꿍이는 물려받은 바가 있습니다. 더구나 미원(薇院)의 새 의망(擬望)에 그를 단독 통망(通望)하면서 공의(公議)와 맞서 겨루었고, 영선(瀛選)075)  의 끝자리에 극력 천거하면서 파좌(罷座)할 때까지 버티고 나선 행동이 이미 그 무리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그가 기꺼이 앞장서서 감히 흉악한 자들의 선봉 노릇을 한 짓은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송익로(宋翼魯)가 역적 이인(李䄄)과 결탁하였다는 것은, 이미 이집두(李集斗)가 죽을 판국에서 살아나려고 올린 상소에서 나왔습니다. 이재간(李在簡)이 대의(大義)를 원수보듯 하면서 한 대신의 죄에다 죄를 덧붙이는 비난까지 있게 되고, 이득신(李得臣)의 경우는 대사헌으로 있는 몸이 역적을 토죄한다는 명색 아래 단지 대충 귀양보내자고만 청하여 감싸주는 의도가 현저하였습니다. 그래서 신 등이 서로 이끌고 대궐에 호소하였는데, 불에 태워 버리고 비답을 내리지 않았으며, 뒤이어 소두를 정거(停擧)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소를 올린 점에서는 차이가 없는데, 어찌 감히 낯을 들고 당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니, 소회를 불에 태워 버리고 다른 유생들은 당에 들어가도록 권유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정원이 아뢰기를,
"유생들이 올린 소회 가운데 한 구절은 망발한 것인데도 신 등이 살피지 못하고 그대로 받들어 올렸으니 황공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유생들이 만약 이것 때문에 살피지 못한 죄를 받게 된다면, 신 등이 어떻게 감히 쟁집(爭執)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그 전편을 불에 태워 버리고 다른 유생들을 당에 들어가도록 권유한다면, 어찌 간언을 받아들이고 선비들을 우대하는 성덕(盛德)에 결함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이 계사는 도로 돌려준다. 관학 유생들의 소회 가운데 한마디 말은 단지 망발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다만 글 가운데의 일을 심하게 따지고 싶지 않아 형배(刑配)하는 법을 아직 적용하지 않은 것이다. 징토(懲討)는 징토이고 분의(分義)는 분의인데, 두 글자를 함부로 쓴 것은 어찌 무식하기 짝이 없는 짓이 아니겠는가. 조정에서 나이 젊은 유생에 대해 탓할 나위도 못 되는 까닭에 비록 처분은 하지 않지만, 지금의 지관사(知館事)는 바로 대관(大官)인 만큼 처치하도록 하겠다. 대사성은 파직시키라."
하였다.

 

홍병찬(洪秉纘)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상동(尹尙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희(金憙)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관무재(觀武才) 전시(殿試)를 훈련원과 남소영(南小營)에 나누어 실시하였으며, 춘당대(春塘臺)에서 내시사(內試射)를 행하였다.

 

우의정 김종수(金鍾秀)가 차자를 올려, 신기현과 형조의 죄인들을 국청을 설치하여 엄하게 심문하자고 청하고, 이어 아뢰기를,
"유생들은 상소에서 역적을 성토하면서 충성심과 분노에 북받친 나머지 말을 제대로 골라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의리상 처치한 것을 감히 받들어 시행할 수 없습니다. "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청대하여 가진 연석(筵席)에서 의리(義理)에 관한 단락(段落)에 다소 차이가 있는데 대하여 손바닥을 보듯이 분석하여 깨우친 결과, 양쪽이 명백하게 해명되었다. 어리석은 사람이 들어도 오히려 의혹하지 않을 것인데, 어찌 평소에 명식(明識)한 경으로서 그만 줄곧 이해를 못하는가. 진실로 따라야 할 것이라면 어찌 하찮은 죄수를 불쌍히 여겨 이와 같이 고집을 하겠는가.
덧붙여 말한 일은, 책망하지 않으려는 일로 넘겨 버리고 단지 정거(停擧)하라고만 명하였다. 그리고 한 마디 말은 문자의 출처가 있으니, 지나치건 지나치지 않건, 타당하건 타당하지 않건, 쓸 만하건 쓸 수가 없건 간에 대해서는 논할 것 없이, 위에서 이미 말을 하였으면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의리상 한결같이 계속 두둔하고 나설 필요는 없는 것이다. 비록 관중(館中)에서 으레 내리는 처벌이라도 결단코 시행하여 두려워할 줄을 알게 해야 한다. 경은 부디 자세히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삼사가 【 대사헌 홍병찬(洪秉纘), 집의 윤행리(尹行履), 장령 유문양(柳文養), 지평 정관휘(鄭觀輝)·최현중(崔顯重), 헌납 이태형(李太亨), 교리 이지영(李祉永), 부교리 이면응(李冕膺), 정언 유정(柳畊)·김효건(金孝建), 수찬 신헌조(申獻朝)·이석하(李錫夏), 부수찬 심흥영(沈興永)·이동직(李東稷)이다.】  합계하기를,
"이재협(李在協)은 본래 자질이 난폭한 데다가 성질까지 음흉하여, 반생 동안 부려온 솜씨라는 게 오직 ‘공(公)을 도외시하고 당(黨)을 위해 죽는다.[背公死黨]’는 네 글자였습니다. 더구나 금번 극악한 역적의 와주가 곧 그의 종제(從弟)이니, 가슴이 섬짓하고 뼛속이 오싹하기가 반드시 다른 사람들보다 배나 더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사직소를 중지하고 엄하게 토죄(討罪)함으로써 옛사람의, 의를 위해서는 가족도 죽이는 의리를 본받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도리어 태연하게 날짜만 보내면서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으니 도대체 무슨 심보이겠습니까. 동당(同堂) 친척인 데다가 한 마을에 같이 살고 있으니 역적 이재간(李在簡)의 흉악한 음모를 몰랐을 리가 없을 터인데, 수상(首相)이 된 몸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나라를 배반하고 역적과 한패가 된 죄에 빠졌으니, 우선 관작을 삭탈하고 성문 밖으로 내쫓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대신을 이 직임에 배치한 것은 그의 품성이 관후한 것을 잘 알고 한 일인데, 관후한 사람에게조차 이러한 지목을 가하는가. 더구나 ‘필시 몰랐을 리가 없다.[宜無不知]’는 네 글자는 연전에 한두 명의 하대부(下大夫)에게 쓰는 것도 오히려 호되게 금지하고 명백히 밝혔는데, 하물며 대관에게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죄있는 자에게 죄를 준 다음에야 물든 자들이 두려운 줄을 알고 살아날 궁리를 할 수 있다. 잘못이 없는데도 엉뚱하게 뒤집어 씌우는 것은, 소관(小官)에게도 오히려 해서는 안 되거늘 더구나 대관에게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모든 일은 적절하고 타당하게 처리해야만 세신(世臣)이 보전할 수 있고 세가(世家)가 온전할 수 있으며 세도(世道)가 안정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혹시라도 동분 서주하면서 제멋대로 외람스레 군다면, 이는 사사로이 패를 짓는 것이고 화근을 싹틔우는 마음이니, 어찌 엄하게 막고 통렬하게 배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합계(合啓)를 만약 곧장 정지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특별한 조치가 있을 것이다. 계사를 발의한 삼사 관원들은 일이 마무리되기를 기다려 마땅히 처분을 할 것이다.
지금 밤이 다 새도록 이처럼 아우성을 치는 것은 비단 대신 한 사람을 위해서 만이 아니다. 우려되는 바가 깊어서이니 이 점을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가 아뢰어 조시위(趙時偉)와 재간(在簡)을, 국청을 설치하여 사형에 처하자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가 윤승렬을 사형에 처할 것을 계청하고, 또 아뢰기를,
"송익로(宋翼魯)는 애초의 첫벼슬부터 역적 이인의 손에서 나왔고, 뇌물을 널리 부려 권세있는 집안에 뚫고 들어갔는데 명색은 벼슬을 구한다고 하였지만 실은 통정(通情)을 한 것이었습니다. 엄히 국문하여 사형에 처하소서.
조규진(趙圭鎭)이 연애(連愛)를 때려 죽인 것은 그 속셈이 음흉하고 의심스럽습니다. 이번 포도 대장으로 있으면서 거행한 일로 말하더라도, 그는 감히 의막(依幕)에 들어가 있으면서 애당초 힘을 쓰려고 하지 않은 데다가 또 얼굴조차 내밀려고 하지 않았으니, 주위의 눈치를 보면서 관망한 자취가 모두 드러났습니다. 국청을 설치하여 엄하게 신문하소서.
조시준(趙時俊)은 역적 시위(時偉)의 형으로서 죄범(罪犯)이 똑같은데, 온 나라가 다함께 경사스러운 날을 맞아 역적 이담(李湛)을 감선 제조(監膳提調)의 직임에 의망(擬望)하였습니다. 우선 섬에 위리 안치하소서. 역적 신기현(申驥顯)의 아우 신귀현(申龜顯)은 바로 역적 담(湛)의 처사촌(妻四寸)으로서, 맥락이 관통하고 속마음을 연결한 사이입니다. 결국 역적 기현의 흉측한 상소는 역적 기현의 죄안일 뿐 아니라 실은 역적 귀현의 틀림없는 죄증(罪證)이 됩니다. 우선 섬에 귀양을 보내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겸빈(李謙彬)의 상소문은 말이 음흉하고 참혹합니다. 원지(遠地)에 유배시키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사간 윤상동(尹尙東)은 감히 명패를 거스르면서 마치 보통 때에 으레 위반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비록 그 내막과 병세가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행동을 가지고 심보를 논하자면 교묘하게 회피한 자취가 현저합니다. 유배를 보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승렬의 일에 대해서는, 자전의 하교조차도 오히려 지금껏 받들지 않고 있는데 대론(臺論)을 어떻게 논할 수 있겠는가. 우려되는 점은, 연로한 사람을 오래도록 결말나지 않은 상태로 있게 놔두었다가 혹시 죽기라도 한다면 어찌 매우 불쌍하고 참혹하지 않겠는가. 정계(停啓)만 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타당성이 없으므로, 우선 윤허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비답을 내려 윤승렬로 하여금 이를 알아 겁을 내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바이다.
송익로의 일에 대해서는, 어제 우상이 입시하였을 때에도 하교를 하였다만, 분명치 못하고 어둡기 짝이 없다. 어찌 다시 번거롭게 할 수 있겠는가. 조규진의 일에 대해서는, 참으로 원통하다고 하겠다. ‘지레 죽였다.’느니, ‘입을 막아 없앴다.’느니 하는 것은 외면상 훑어본 자의 말이고, 그 당시의 사실은 원래 이와 같지 않았다. 비록 지레 죽이어 입을 막았다 하더라도 포장(捕將)인 자가 어찌 거행할 수 있겠는가. 문목(問目) 가운데 다른 조항을 가지고 연이어 가형(加刑)을 하도록 다그쳤으니, 이렇게 하는 동안에 거의 죽어가는 칠십 늙은이가 어찌 당장 쓰러져 죽지 않겠는가. 이것이 과연 포장에게 죄가 있는 것이겠으며, 의도가 있었던 것이겠는가. ‘얼굴을 내밀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너희들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이상 필시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자의 근거없는 얘기를 듣고 이러한 계사를 발의한 것일 것이다. 이 한 가지 사안은 위의 사안에 비교할 때 역시 일의 선후를 모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마무리를 짓는 것이 시급하니, 우선 아뢴 대로 하라.
조시준(趙時俊)의 문제로 말하면, 그때의 일에 대하여 스스로 정신이 나갔었다고 하는데, 위인이 과연 흉악한 동생과는 다르지만, 마무리를 짓는 방도는 역시 즉시 윤허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으니, 아뢴 대로 하라. 신귀현(申龜顯)의 일은 너무도 긴요치 않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이겸빈의 일은, 그때의 여러 상소에 대한 비답과 어제 우상이 연석에서 상주하였을 때 모두 누누이 하교한 것이다. 글 가운데서 꼬투리를 끄집어 내어 죄안(罪案)으로 꾸며내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그러나 즉시 마무리를 짓고자 하니, 아뢴 대로 하라. 끝부분에 말한 일은, 한시바삐 정계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삼사(三司)가, 이재협(李在協)의 일을 스스로 발론하였다가 스스로 정계하는 것은 전례에 없는 일이라는 이유로 극력 쟁집(爭執)하면서 명을 받들지 않자, 하교하기를,
"근래에 말을 못하게 하려다 보니 하는 수 없이 이처럼 비상한 거조를 하였다. 대관(大官)을 업신여긴다는 혐의에 있어서는 비록 돌아볼 겨를이 없으나 허다한 하교를 그렇게 했던 것은 본사(本事)가 좀 수그러들고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환수를 하려는 것이었거늘, 하물며 영상의 일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한 다음에야 대관(大官)이 대관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전에 구전(口傳)으로 하교를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있는 말이겠는가. 그런데 감히 ‘스스로 발론하였다가 스스로 정계하는 것은 전례에 없는 일이다.’는 등의 말로 이처럼 항명을 하면서 날이 샐 때까지 버티다니, ‘정계(停啓)’ 두 글자를 말하기 전에는 결코 처분하기가 어렵다. 그들 가운데서 가장 소란을 부리는 자는 필시 유문양(柳文養)일 터이니, 우선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대신(臺臣)의 행위는 너무나 놀랍고 가증스러워 실로 용서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이 일은 이 일이고, 대간의 체면은 대간의 체면이며, 나라의 기강과 신하의 분의는 나라의 기강과 신하의 분의이다. 대간들이 죄를 지은 것은 모두 유문양을 처분하고 난 뒤에 있었던 일이니, 유문양에게 과연 죄가 없다면, 유문양에 대해서는 이전의 죄로써 삭직하는 법을 시행하고, 옥당은 파직시키고, 그 나머지 대간들은 먼 곳에 귀양을 보내라."
하였다.

 

삼사가 이재협에 대한 계청을 정지하였다.

 

10월 25일 정축

이성규(李聖圭)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우의정 김종수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방금 조지(朝紙)를 보건대, 일곱 대신(臺臣)을 귀양 보내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대계(臺啓)는 일의 체모가 엄중하여 정지하거나 계속하거나 하는 것은 위에서 이래라저래라 지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언제 위의 지시를 받들고 즉시 정계를 한 대간이 있었습니까. 대신들이 처음에 지나치게 행동하다가 나중에 나약하게 행동한 점에 대해서는 죄를 주더라도 진실로 아까울 것이 없겠으나, 이미 상의 뜻을 순종한 뒤에 와서 상의 뜻을 거스른 죄를 뒤늦게 처벌하여, 마침내 먼 곳에 내쫓기까지 하는 것은 후세에 본보기를 보이는 도리에 크게 어긋납니다. 삼가 바라건대, 귀양을 보내라는 명을 한시바삐 중지하시고, 단지 고분고분 따르기에 급하여 대간으로서의 체면을 손상시킨 죄에 대해서만 적당히 견책을 가하소서. 신은 역적을 토죄하고 복수하는 의리에 급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정성이 간절하여 얼마 전부터 차자와 상소를 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으나, 한마디도 그 효과가 없으니 한갓 부끄러움과 두려움만 더할 따름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일곱 대신들을 산골과 바닷가에 귀양을 보낸 일에는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경솔하게 계사를 발론하고 즉시 정계(停啓)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관(大官)을 위하고 세도(世道)를 위하는 뜻에다가 겸하여 이러한 때에 대대적으로 진정(鎭定)을 하고자 하여, 밤중에 구전으로 하교하면서 환수하는 두 가지 사안 중에 한 가지 사안은 다시 반포하라는 명이 있었건만, 듣고도 못 들은 척하면서 줄곧 시끄럽게 떠들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이러한 신하의 분의가 있겠는가. 이보다 백배 더 큰 거조에도 경 등은 오히려 이 하교로 인하여 처음의 마음을 애써 억제하였는데, 저 대간들은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와 같이 질서없이 구는가. 이것이 여러 곳에 흩어서 유배시킨 까닭인데, 아직도 그것이 너무 너그럽게 보아준 잘못이라는 혐의를 느낀다. 경이 만약 이 사실을 들으면 아마도 의문이 속시원히 풀릴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서 스스로 인피한 것은 지나치다. 알고 있는 것을 죄다 말하는 것을 두고 세상에서 ‘연평(延平)의 주독(奏牘)’이라고 말하는데, 진실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다면 자꾸 반복해서 말한들 뭐가 안 되겠는가. 경은 이에 대하여 부끄럽다거니 두렵다거니 말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정원이, 조규진(趙圭鎭)을 국문하라는 전지(傳旨)에 대하여 아뢰니, 중지하였다.

 

10월 27일 기묘

판중추부사 정존겸(鄭存謙) 등이 연명으로 상차하여, 맨 먼저 역적 이인을 성토하고, 신기현과 형조의 죄수들을 국문하기를 거듭 청하니, 비답하기를,
"대체로 사리의 대소 경중에는 원래 바뀔 수 없이 정해진 한계가 있는 법인데, 그것이 발하여 운용되는 경우에는 모름지기 나에게 있는 권도(權度)로써 자세하게 헤아려 보고, 그 옳은 것을 골라내면 굳게 견지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런 다음이라야 때에 적절한 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위를 핍박했다는 혐의가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이었으니 기어코 보전해 살려 골육의 변을 면하고자 함은 천리와 인정상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가지고 자세히 따지면, 과연 어느 것이 경하고 어느 것이 중하며, 어느 것이 크고 어느 것이 작은가. 이 의리는 촛불의 빛이나 거북등의 점괘와 같이 명백한 것이다.
지금 경 등이 온종일 피곤하게 떠드는 것 때문에 또 하는 수 없이 연석(筵席)에서 말했던 나머지 뜻을 다시 말하는 것이니, 바라건대 계청을 한시바삐 그만두어, 나로 하여금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하였다.

 

봉조하 조돈(趙暾)이 소를 올려 역적을 성토하니, 비답하기를,
"길한 날 길한 자리에 대례(大禮)를 순조롭게 치르었다. 이러한 때에 자식으로서 사모하는 심정이 더욱 되살아나지만 미칠 수가 없다. 경은, 당초 옮겨 모시자는 의논에 있어 실로 여느 사람보다 뛰어난 식견이 있었으니 노신(老臣)의 충성심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매우 감탄하는 바이다. 그후에 한 자급(資級)은 서사(書寫)의 일로 관례적으로 준 것이었으니, 어찌 상이 그 공로에 걸맞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마침 상소가 올라왔기에 잊지 못하고 있다는 뜻을 대략 언급한다. 이 상소로 말하면, 원래 금지한 데 구애되는 점이 있으므로 정원으로 하여금 도로 보내게 하는 바이니, 경은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수찬 이석하(李錫夏)와 교리 이면응(李冕膺)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 등도 역시 삼사 관원 중의 하나로서 간통을 주고받았으며 이름이 합계에 동참하였는데, 밤에 전교가 내려 양사의 여러 대신들과 입직한 관료(館僚)들이 모두 엄한 견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 등만이 도리어 유독 빠졌으니, 실로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는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한쪽은 죄를 받고 한쪽은 행공(行公)을 하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전후로 내린 정도에 지나친 하교들을 모두 환수토록 하기를 청하였으며, 말미에 아뢰기를,
"정계를 할 때에 동참한 사람에게 묻지 않았으니, 이것도 신들이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 어려운 점입니다. 이점도 아울러 양찰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말이 옳은지 그른지는 논할 것 없이, 진계(陳戒)는 진계이니 아무튼 유의하려고 한다. 그런데 상소의 말미에서 갑자기,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 어렵다.’고 말하고 나서 바로 ‘이 점도 양찰해 달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이 사직을 하는 것은 지금 처음 보는 일이다. 이른바 ‘양찰’이라는 것은 무슨 일을 말하는가? 매우 어설프다. 너희들은 파직시킨다."
하였다.

 

수찬 신헌조(申獻朝)가 상소하기를,
"이재간(李在簡)은 나라를 원수처럼 보고 역적 신기현(申驥顯)의 상소를 꾸며내었습니다. 아, 저 이재협(李在協)은 그의 종형(從兄)으로서 한 집안에 이런 극악한 역적이 있었는데도 감히 ‘집에 있었기에 알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다그치고 몰아부쳐서 법에 입각하여 따지는 논의로 하여금 잠깐 발론하였다가 금세 정지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더욱 놀랍고 통분스러운 것은, 일전 이재협에게 내린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지어 올린 박종정(朴宗正)입니다. 그는 ‘충효를 가법(家法)으로 전해오고 의리에 대하여 엄격하다.’는 등의 말을 글에 제멋대로 삽입하였는데, 극악한 역적의 한집안을 ‘충성스럽다.’고 하였으니, 그가 이른바 역적이라고 한 것은 누구를 가리킨 것이며, 이른바 의리라고 한 것은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저 종정은 본래 극악한 역적과 매우 가까운 친척으로서, 본래부터 재간의 추천을 받고 외람되게 대간 벼슬에 올랐으며 깨끗한 조정에서 활개를 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기꺼이 역당(逆黨)의 우익(羽翼)이 된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유배를 보내소서.
재간의 종제(從弟) 이재치(李在治)는 전에 반임(泮任)076)  으로 있으면서, 상소하자는 논의가 한창 진행될 때에 오직 그 일을 저지하려고만 하였으며, 나중에는 그만 고의로 소란을 일으켜 그 자취를 가리웠으니, 먼 곳에 유배를 보내소서."
하고, 장령 심흥영(沈興永)은 상소하기를,
"이득신(李得臣)은 명색이 역적을 성토한다고 하면서 단지 유배시키자고만 청하였는데, 그 행동은 은근히 두둔하려는 감이 있으니 그대로 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날 여러 대신(臺臣)들이 대론(大論)을 규피(規避)하면서 지방에 있었다고 칭탁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원래부터 지방에 있던 사람 이외에 논의에 불참한 대신들에게는 모두 벼슬을 삭탈하는 법률을 시행해야 합니다.
전 수찬 송상렴(宋祥濂)이 지난번에 올린 상소문으로 말하면, 감히 ‘대신이 제멋대로 하였다.[大僚專輒]’는 네 글자를 임금에게 고하는 글에 써넣은 것만 해도 벌써 무엄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그날 입직(入直)한 옥당이 복합(伏閤)할 때에도 편안히 집에 있으면서 역시 나와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송상렴에게도 벼슬을 개정(改正)하는 법을 시행해야 합니다.
전 군수 조중진(趙重鎭)은 온통 못된 기운으로 뭉쳐진 자로서, 더없이 요망하고 간사한데 역적 재간의 전후 음모에 죄다 관여를 하였습니다. 대체로 그는 조시준(趙時俊)·조시위(趙時偉)의 가까운 친척이며 역적 재간과는 내종(內從)간으로서, 중간에 이리저리 얽어대어 역적 행위를 빚어낸 것은 모두 중진의 짓입니다. 중진을 먼 곳으로 유배하소서.
사복시 판관 한대유(韓大裕)는 역적 신기현과 친사돈 간이며 송익로(宋翼魯)의 처남으로서, 관상보는 요상한 사람을 집안에 붙여두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한대유를 태거(汰去)해야 합니다.
어제 여러 대신들을 일시에 귀양보낸 결과, 조정의 분위기가 꺾여 있습니다. 그들이 견지했던 바는 의리이고 그들이 아뢴 것은 대론(大論)입니다. 즉시 도로 중지하시고 삼사의 합계에 대해 모두 윤허하소서."
하니, 그 소를 돌려주고 그의 벼슬을 체차하라고 아울러 명하였다.

 

지방의 유생 어용승(魚用升) 등이 소를 올려 역적을 성토하니, 원본 상소는 불에 태우고 소두는 정거(停擧)하라고 명하였다. 성균관의 유생 등이 권당(捲堂)을 하니, 다른 유생들을 권하여 들어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삼사의 여러 신하들이 청대하니, 하교하기를,
"근일 삼사의 합계에 대한 비답에 ‘불에 태워버리라.[付丙]’는 두 글자가 잇따라 있었는데, 느닷없이 오늘 서로 이끌고 청대를 하느라 가도(呵導)하는 소리가 합문 밖에 떠들썩하다. 만약 불에 태워버리라는 말을 대청(臺廳)에 내리는 것이 비답 가운데서 불에 태워버리라고 하교하는 것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전해 듣는 말을 빈말로 돌리고 눈으로 본 일이라야 비로소 진짜로 믿겠다는 것인가. 청대한 삼사 관원들을 모두 한꺼번에 호남의 연해에 유배토록 하라."
하였다. 양사가, 이재간의 여러 아들을 여러 곳에 유배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재간이 배소(配所)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홍수보(洪秀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심환지(沈煥之)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28일 경진

오재순(吳載純)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명훈(李命勳)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우의정 김종수가 상소하기를,
"형조의 죄수는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하니, 예전의 죄수들을 끝까지 캐묻고 새 죄수들의 공초(供招)를 받는 것은 모두 한시각도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형조에서는 위의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감히 거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추국청을 설치하자고 누차에 걸쳐 청했으나 되지 않아 이미 나라의 체면을 손상했는데, 해조(該曹)가 전례에 따라 거행하는 것까지도 역시 위에서의 저지를 당하여 손을 쓰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이와 같은 옥체(獄體)가 있겠습니까. 한시바삐 해조로 하여금 새 죄수들과 예전 죄수들을 첫 공초(供招)이건 다시 받는 공초이건 논할 것 없이, 규례대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형조의 죄수들에 대한 신문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파급되지 않게 하려는 데서 나온 일이다. 이른바 관상쟁이라고 하는 자는 사천(私賤)으로서 중이 되었다가 다시 환속한 자라고 하니, 그가 무슨 지식이 있겠는가. 이밖에 수금된 자들도 신문현(申文顯)의 가인(家人)들에 불과하다고 하니, 더욱이 어찌 캐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청한 것을 윤허하지 않으니, 경은 양해하라."
하였다.

 

교리 신헌조(申獻朝)가 소를 올려, 어서 삼사의 청을 윤허하고 찬배하라는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고, 이어 아뢰기를,
"이재간은 흉악한 송익로(宋翼魯)를 끼고 역적들의 와굴(窩窟)이 되었으며, 역적 신기현을 사주하여 암암리에 결탁을 하였는데 그를 갑자기 지레 죽게 한 것만 해도 이미 실형(失刑)인 셈입니다. 그러니 그의 여러 자식들을 여러 곳에 유배하는 것을 어찌 한시각인들 윤허하지 않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압거(押去)한 도사(都事) 홍격(洪格)으로 말하면, 먼저 과천현(果川縣)에 가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죄인이 스스로 오기를 기다리다가 해가 저문 후에 사방으로 점사(店舍)를 찾아 뒤지니 재간은 벌써 지레 죽었더라고 합니다. 방수(防守)를 엄격하게 하지 아니한 죄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간의 자취 역시 수상한 점이 있으니, 신의 생각에는 홍격을 엄히 국문하여 내막을 밝혀내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봅니다.
저 조중진(趙重鎭)이라는 자는 과연 어떤 작자입니까. 역적 재간이 배소로 떠나갈 때에 앞장서서 따라갔으며 시종 서로 지켜주면서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중진을 한시바삐 섬에 유배해야 된다고 봅니다.
어제 여러 선비들이 비답을 받은 뒤에 나졸과 형조의 예속들이 내몰아 쫓아버리는 행동까지 함으로써, 허다한 선비들이 길바닥에서 허둥대며 밀려다니느라 그 꼴이 한심하였습니다. 성상의 의도는 물론 후일을 미리 단속하자는 데서 나왔겠지만, 아래에 있는 자들이 잘 받들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금부의 당직 관원과 형조의 낭청들을 엄중히 감죄(勘罪)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그날의 거조가 전하의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환히 알도록 함으로써, 사기(士氣)를 부지(扶持)하고 정론(正論)을 수호하는 방도로 삼았으면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바가 전의 상소와는 다르다. 그러나 진계(陳戒)는 진계이니 만큼 마땅히 유의를 하겠다. 홍격의 일로 말하면, 진실로 기강과 뒤폐단에 관련되지만 청한 율이 지나치다. 자연 도백(道伯)의 장계가 올라오면 해부에서 잡아다 신문할 것이다.
조중진에 대한 일은 인정상 괴이할 게 없을 듯하니 윤허하지 않는다. 덧붙여 아뢴 일은, 미리 단속하라는 명령이 잘못 전달되서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러니 죄가 해당 관원에게 있지 않다. 그러나 말인즉 옳다."
하였다.

 

10월 29일 신사

이갑(李𡊠)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인호(洪仁浩)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30일 임오

교리 심흥영(沈興永)을 고금도(古今島)에 찬배(竄配)하였다. 흥영이 상소하기를,
"역적 이재간은 조영근(趙榮謹)의 사위이며 조재민(趙載敏)의 조카로서, 그들이 서로 전해받은 심장(心腸)으로 말하면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신치운(申致雲)·심악(沈)이고, 그들이 배포한 흉모(凶謀)로 말하면 이괄(李适)·박필현(朴弼顯)·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과 같습니다. 그가 배소(配所)로 떠나갈 때 이재협(李在協)은 여러 아우들과 여러 조카들을 데리고 먼저 남문 밖에 가서 기다렸는데 문객과 하인들이 열 명 백 명씩 무리를 지어 길을 막고 떠나보냈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극악한 역적을 압송해 가는 일에 있어 이처럼 방자한 행동이 있었겠습니까.
역적 재간의 병은 사람들이 많이 보았겠지만 흔한 천식(喘息)에 불과하였는데, 겨우 10리를 나가자마자 공공연히 머뭇거리다가 느닷없이 지레 죽어버렸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전하기를, ‘이틀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5냥중의 삼(蔘)만을 달여 먹었다가 즉시 죽게 된 것이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찌 음독(飮毒)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흉악한 패거리들이 입을 막아 없애려는 계책으로 요사한 역적을 자살하도록 권한 정상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리하여 나라의 법이 적용되지 않고, 적정(賊情)을 캐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제와서 분노를 씻는 방법은, 오직 역적의 종자를 여러 곳에 유배하는 데 있을 뿐이건만, 아직껏 윤허를 아끼고 계시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무릇 죄인을 압송해 가는 법은 당직(當直)이 으레 맡게 되어 있습니다. 그날 당직은 바로 조두현(趙斗鉉)이었는데 판의금 정민시(鄭民始)가 가지 말라고 분부를 한 것은 또 무슨 까닭에서였겠습니까. 만약 친척되는 혐의가 있다고 한다면 두현의 형 조태현(趙台鉉)은 바로 이재협의 손아래 매부(妹婦)이지만 태현도 오히려 역적 재간과 상관이 없는데 더구나 두현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억지로 친혐(親嫌)을 앞세워 그의 압송을 저지시키고 필경에는 의금부의 나약한 무관 도사를 정하여 보냄으로써, 요사한 역적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행동하고 죽고 사는 것을 마음대로 하게 하였습니다. 돌보아주신 중신(重臣)조차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으니, 역적의 잔당인 조중진(趙重鎭)이 상복(喪服)을 끌면서 이재간을 따라 간 것이나, 흉악한 무리 몇몇 사람이 암암리에 안부를 전한 것 따위야 어찌 깊이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정민시에게는 특별히 견삭(譴削)하는 법을 적용하고 조두현도 결코 태거(太去)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주연(胄筵)에 있을 때부터 휴척(休戚)을 같이 하였으며 이름이 철권(鐵券)077)  에 쓰여 있어 집안 사람과 똑같이 보는 사람으로서 지금 살아있는 자는 이 중신(重臣)과 단규(端揆)078)  뿐이다. 진실로 시종 보전해주지 못하여 낭패스러운 일이 있게 된다면, 이밖의 여러 관료들 가운데 스스로를 견고하게 여기며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단규 또한 간혹 숱한 풍파를 겪었지만 끝내 시기하고 질투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흔들리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나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중신 정민시 역시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데도 이처럼 의중을 떠보는 지척(指斥)을, 관원들끼리 서로 과오를 바로잡아주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본다면, 그 해로움이 장차 더할 수 없는 경지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아무리 온전히 보전하려고 한들 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 일은 애당초 트집잡을 만한 꼬투리가 없다. 가령 그의 상소문에서 말한 무관 도사로 바꾸어 보낸 데 대하여 ‘엄격히 단속한 것이다.’고 한다면 될 법한 일이겠으나, 대뜸 ‘내키는 대로 하고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지목하는 것은 너무도 들어맞지 않는 말이다. 만일 사돈되는 조두현을 순차대로 보냈더라면, 장차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이 한 가지 일은 경중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니, 당분간 그대로 두겠다.
대체로 한두 명의 구신(舊臣)을 오늘의 조정에서 용납하지 못하면, 그 조정의 꼴이 과연 어떻겠는가. 그리고 더구나 골육(骨肉)간에 변고를 빚어내는 것도 모자라서, 한집안 사람처럼 여기는 구신에게 못된 짓을 저지르고 앙갚음을 하는 이러한 점을 만약 엄히 막고 호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나도 여러 신하들을 대하는 데 어찌 내심 부끄럽지 않겠는가. 심흥영을 외딴 섬에 유배시킴으로써 참소하는 것을 미워한다는 뜻을 보이겠다. 조정 분위기가 이 모양인데, 무슨 마음으로 차대를 수응하겠는가. 물러가라."
하였다.

 

우의정 김종수(金鍾秀)가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빈청 접견은 일차(日次)에 응당 해야 하는 일에 속하는 것입니다. 등대(登對)하지 못한 채 물러가는 것은 예로부터 이러한 전례가 없거늘 더구나 다그쳐 물러가도록 하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여러 당상들을 물러가라고 한 명을 어서 중지하시고 아울러 소접(召接)을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차대(次對)에 나온 여러 재신(宰臣)들을 물러가라고 하는 명이 전례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며, 어찌 좋아서 한 일이겠는가. 나의 심정이 편한가 불편한가와 나의 기운이 소생하는가 소생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은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여러 신하들에게 달려 있다. 오늘 환히 유시한 본의(本意)도 이미 틀어졌다. 대체로 심흥영의 행동은 또 과연 어떠한가. 차대는 결코 하기가 어려우니 경은 부디 양해하라."
하였다.

 

행 사직 정민시(鄭民始)가 상소하기를,
"사람들의 말이 매우 긴박하여 대뜸 사정(私情)을 두고 은밀히 두둔한 것으로 결론을 지으니, 머리털과 뼛속이 모두 오싹하여 그야말로 당장 죽어버리고 싶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문득 삼가 열 줄의 은교(恩敎)를 보게 되었는데, 신을 돌보아 감싸주고 신의 억울함을 깨끗이 씻어주려는 것이 천고에 드문 것이었습니다. 신이 비록 그 날로 죽어 없어진들 이런 은혜를 받고 가니 마땅히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일의 진상을 말하면, 죄인 이재간이 배소로 출발할 때에 신은 불행하게도 이 역적과 더불어 평소 서로 알고 지낸 사이인 데다가 또 사돈의 혐의가 있었습니다. 혐의를 멀리하려는 뜻은 또한 사람들의 공통된 심정이므로, 엄하게 단속할 의도에서 ‘도사(都事)는 누가 나가는가?’고 물었더니, 부리(府吏)가 ‘조두현(趙斗鉉)이 압송하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두현이 죄인의 사돈이라는 것을 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도사로 하여금 압송해 가게 하라는 뜻으로 부리에게 분부하였던 것일 뿐, 애당초 아무개 도사를 정하여 보내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낭료(郞僚)와 부속(府屬)들이 다들 알고 있는 바인데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금번에 이 일 때문에 공의(公議)에 죄를 얻게 될 줄은 예상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성교(聖敎)가 내렸다는 이유로 감히 나아갈 계책을 삼을 수는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신의 죄를 엄히 감률(勘律)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처럼 돌보아주는 자가 이와 같은 화를 당하게 되다니, 그야말로 이른바 ‘세상의 일이란 모두가 사람들로 하여금 도리어 한바탕 웃게 만든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대체로 온 세상 사람들이 꺼리고 미워하여 창끝을 들이밀지 않는 이가 없음을 이미 환히 알고 자세히 통촉하고 있거늘 하물며 기회를 타서 흔들려는 행동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파격적으로 구원해주지 않는다면, 경이 누구와 함께 돌아가겠는가. 진정시키기에 급하여 글에 의사를 다 표현하지 못하였는데,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아직도 빈청에 머물러 있는 것은 또한 새로 생긴 사단 때문이니, 나라의 체모를 외면하는 것도 어찌 말이 되겠는가. 이런 판국에 이르러 경이 무슨 겨를에 자신을 돌보겠는가. 경은 사임하지 말고 즉시 들어오라."
하였다.

 

차대(次對)가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한 번 환히 깨우치려고 이미 생각했다. 오늘 중신 정민시의 일로 인접(引接)하는 것이 약간 늦어졌는데 중신의 일은 오히려 여사(餘事)에 속한다. 내가 지난달 26일 이후로 경 등을 여러 번 접견하였는데 털어놓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지만, 차마 이야기를 주고받지 못하고 지금까지 잠자코 지내왔다. 나는 임금이 된 것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없으며 너무나 어리석고 미련한 점을 스스로 한탄하고 있다. 어쩌다가 하늘이 돕고 귀신이 도와준 덕분에 길한 곳에 옮겨 모시는 예를 아무 탈없이 치루었지만, 지난번 원(園)을 열 날짜가 임박했을 때에 정리(情理)를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지난번의 일이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점점 이에까지 이르렀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이 흘러 상복을 벗을 날짜가 눈앞에 닥쳐왔다. 이달 안으로 반드시 마무리를 지으려는 뜻으로 이미 하교를 하였는데, 어젯밤에야 비로소 빈대를 장차 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과연 이른 아침에 접견하여 마음속에 간직한 생각을 털어놓으려 하였다.
심흥영의 상소는 뜻밖의 사단(事端)을 덧붙였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경 등이 상주(上奏)한 ‘위를 핍박한다.[上逼]’는 두 자를 듣고는 더없이 놀라면서도 오히려 감히 봉승(奉承)할 수 없다고 단정을 하여, 전후로 선포하면서 보고 듣는 자들을 놀라게 하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어찌 내가 즐거워서 한 일이겠는가. 지난달 그믐 이전부터 지금까지 모두 수십 일이나 되는데 음식을 대해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밤이 되어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였다. 오늘 또한 점심때가 지났건만 역시 공복(空腹)이다. 그런데 소란을 피우는 일이 갈수록 더욱 심하니, 이것은 필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음식을 들지 못한다는 말을 핑계대어 말하는 이야기로 돌리는 것이다. 비록 나의 성의가 미덥지 못하기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또한 어찌 신하로서 분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오늘도 내일도 아침부터 밤까지 접견하는 일에 지쳐서 거의 견디기가 어려워 단지 겉으로 껍데기나 유지할 뿐이다. 본궁(本宮)에 전성(展省)하는 의식을 아직까지 빠뜨린 채로 있는데 말이 이에 미치면 다른 것이야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심상치 않는 하교를 내리기를,
"경 등이 만약 군신간의 의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다시는 이러쿵저러쿵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니, 경 등은 양찰하라. 이제 만약 합계(合啓)까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해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요즘 연명으로 상소하고 연명으로 상차하고 청대를 하는 등의 일을 모두 더이상 번거롭게 굴지 않는다면 내가 전후로 내린 전교 역시 환수를 하겠으니, 경 등은 반드시 일제히 앙주(仰奏)하라."
하였다. 이에 우의정        김종수(金鍾秀)가 아뢰기를,
"신 등의 정성이 천박하여 전하를 감동시키지 못한 결과, 구구하나마 충성을 바치려는 의도를 도리어 형식만 차리고 실속이 없다고 분부를 하시니, 신은 더이상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이전에도 역시 심상치 않은 전교를 환수할 데 대하여 누차 앙청하였는데, 금번의 이 하교는 또 전일의 하교에 비길 것이 아닙니다. 먼저 환수하라는 청을 들어주신 뒤에라야 신 등은 비로소 감히 입을 열겠으니, 어서 환수하도록 명하시기를 엎드려 바라마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 등이 만약 더이상 하지 않겠다고 앙주한다면, 금번에 내린 하교도 환수를 할 것이다."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지금 이 연석(筵席)에서 하신 말씀 가운데 차마 들을 수 없고 감히 들을 수 없는 것들을 즉시 환수해주시면, 향후의 일은 여러 신하들 역시 상의 뜻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대신이니 만큼 여러 번 강요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승선(承宣) 및 삼사의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앙주하라."
하였다. 대사헌        이갑(李𡊠)과 교리        서배수(徐配修) 등이 아뢰기를,
"하교는 이미 환수하지 않고 있고, 본사(本事)는 의리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므로, 앙주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조금 전에 말한 하교를 다시 듣고 싶어서 그러는 것인가. 기어코 중지하겠다고 앙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하였다. 이갑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떻게 감히 다시 번거롭게 떠들겠습니까마는, 막중한 의리를 갑작스레 중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의 거조들은 몰아부치는 행동이 아닌 것이 없는데, 의리에 중하게 관계되는 것이 뭐가 있다는 것인가."
하였다. 삼사가 기둥 밖에 물러나와 정지할 것을 상세히 논의하고는 이윽고 이갑 등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소계(疏啓)·청대(請對) 등의 거조를 오늘부터 삼가 정지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제는 모두 하나로 귀결되었으니, 삼사가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승지들도 앙주를 하라."
하였다. 승지        박황(朴鎤) 등이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정도에 지나친 거조가 없으시다면 신 등이 어찌 감히 시끄럽게 떠들겠습니까. 삼사에서 소란스럽게 구는 일이 없다면 정원에서도 어찌 수선을 피우겠습니까."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감히 들을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분부가 이미 여기에 이르렀는데, 시간은 이미 점심 때가 지났습니다. 삼사와 승선들이 분명하게 앙대(仰對)한 후에 아침 수라(水剌)를 들겠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합계는 이미 원래 그대로 있으니 상께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수락하게 한 것은 요즘 들어 날마다 연명으로 상소하는 것,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는 것, 청대하는 것, 원의계사(院議啓辭)를 올리는 것을 다시는 하지 말라는 하교일 뿐이니, 삼사와 승선들이 똑같은 말로 수긍을 한 것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이제는 여러 신하들이 이미 수락을 하였으니, 전후의 전교 가운데 정도에 지나치고 심상치 않은 하교와 전후로 조신(朝臣) 및 유생들의 처분 전교를 모두 한꺼번에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와서 어떻게 식언을 할 수 있겠는가. 경이 아뢴 대로 끝장을 내고 후련히 타결하는 뜻을 보이겠다."
하고, 이어 정민시(鄭民始)에게 하교하기를,
"경이 금번에 화를 당한 데 대해서는 내 말하지 않고 싶다. 대체로 경이 이제는 남의 화살을 면하게 되었으니 나는 이것도 역시 뜻밖이라고 생각한다. 근래의 일은, 멀리 혐의를 피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지금 경의 처지로서 강가의 교외에 나가 살고 있는데 기회를 타서 못살게 굴려는 무리들이 틈을 노리다가 불쑥 튀어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이후로는 도로 성 안에 들어와서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면 경에게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경이 비록 벼슬살이를 한들 내가 어떻게 차마 노려보며 눈을 흘기도록 맡겨놓아 박해를 받는 경우가 있게 놔두겠는가. 부디 즉시 들어오도록 하라."
하니, 민시가 아뢰기를,
"신이 어찌 뻔뻔스레 연석에 오를 사람이겠습니까마는, 조금 전에 은교(恩敎)를 받은 데다가 또 수라를 들지 않겠다는 말씀도 있었으므로 염치를 무릅쓰고 전하 앞에 나왔습니다. 이제는 수십 년 동안 임금을 섬겨온 성의가 부질없는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연(胄筵) 때의 옛 요속(僚屬)으로는 오직 경과 우상뿐이다. 우상 또한 화에 걸린 적이 몇 차례인가. 금번의 이 하교는 경에게 반드시 낭패스런 일이 없도록 하고 또 살 길을 열어주려는 것이다. 부디 나의 하교를 따르도록 하라."
하니, 민시가 아뢰기를,
"은택을 곡진하게 입은 것 치고 신과 같은 사람이 없었고, 누차 비호를 받는 것 치고도 신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번번이 곡진히 보전해주려고 하시건만 신은 스스로 죄에 빠지니, 충성스럽지 못하고 변변찮기로도 신과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신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살아있은들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무엇 때문에 죽기까지 하겠는가. 지금 만약 죽는다면 그야말로 그들의 소원 대로 해주는 셈이 될 것이다. 경이 강가에 나가 지내는 것도 역시 장구한 계책이 아니다. 이제 이것을 가지고 근거를 삼아 논한다면, 어찌 의심할 만한 단서가 아니겠는가. 우상 역시 시골에 물러가 지낸 일을 가지고 세인들은 죄를 보태는 일단으로 돌렸다. 현재 가까운 혈육에게서 변고가 일어난데다가 또 경마저 보전하지 못한다면, 내가 낯을 들고 다닐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이제 와서 경이 거취를 하는 것은 나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 되니, 경은 부디 양찰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이 차자를 올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召見)하여 군국(軍國)의 일을 의논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일전에 김 판부사(金判府事)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대략 말하였는데, 이제 경의 차자에 대하여 어찌 다른 말을 하겠는가. 더구나 세월은 유수와 같아서 달이 장차 바뀌려 하고 있다. 이로부터 의물(儀物)을 색깔있는 것으로 쓰게 되니, 하늘에 사무치는 슬픔을 더이상 붙일 데가 없다. 굽어보나 우러러보나 아쉽고 허전하여 더욱 심사가 어지럽고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이런 때에 수응하는 일을 어찌 억지로 할 수 있겠는가마는, 환히 깨우치는 것이 시급하여 애당초 규례대로 인접하려고 하였는데, 불충하고 무상(無狀)한 자가 소란을 피운 까닭에 부득불 조금 전의 하교가 있게 되었다. 경은 어찌하여 운운하는가. 경은 부디 양찰하라. 근일 야료를 부리는 행동들이 후련하게 타결된 것은, 연석(筵席)에서의 사교(辭敎)로 인해 삼사와 승선으로부터 대신·경재(卿宰)들에 이르기까지 죄다 똑같은 말로 힘써 받들었기 때문이다. 마침 차자가 올라왔기에, 먼저 이 기쁨을 알린다."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