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28권, 정조 13년 1789년 11월

싸라리리 2025. 8. 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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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계미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였다.

 

11월 2일 갑신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를 거행하였다. 약원 도제조 김종수(金鍾秀)가 아뢰기를,
"조규진(趙圭鎭)에 대한 일은 이미 전교를 내리셨지만, 조시준(趙時俊)과 이겸빈(李謙彬)에 대한 전지는 아직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은 지금까지 지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규진에게 만약 정말로 죄가 있다면 내가 어찌 일개 규진을 아까워하겠는가. 당초에는 이한창(李漢昌)과 더불어 함께 조사하였으며 금번에는 임률(任嵂)과 더불어 함께 갔으니, 만약 그 죄를 논한다면 두 사람이 규진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이 죄안(罪案)을 유독 규진에게만 돌리면서 심지어 ‘때려죽였다.’고까지 말하는데, 두 포장(捕將)이 그와 더불어 함께 조사하였으니 그가 어떻게 꾀를 부릴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의막(依幕)에 들어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가 혼자서 들어가 있었던 일이 아닌 만큼, 지금 이와 같이 말을 하는 것은 모두가 당파에 치우친 마음이다.
대체로 조시위(趙時偉)는 죽여야 할 자이다. 시위 때문에 사람들의 말이 아직까지 이와 같으니, 어찌 통분하고 놀랍지 않은가."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성상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규진에게 설령 흉악한 속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조사를 담당한 포장(捕將)이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으니 어찌 감히 꾀를 부릴 수 있었겠습니까. 시위(時偉)로 말하면, 이로 보나 저로 보나 결코 사형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애(連愛)는 70 살이나 된 늙고 병든 여자로서 불과 몇 차례의 형신에 곧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때에 만약 형신을 하지 않았더라면, 형벌을 적용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죄안을 삼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성상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시준은 이런 아우가 있는데도 편안하게 집에 있는데, 이것이 비록 형정(刑政)에 흠이 되나, 거기에는 의도가 있다. 대계(臺啓)를 특별히 윤허하고도 전지(傳旨)를 내리지 않는 것은 마무리를 지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겸빈의 경우에는 어찌 깊이 죄줄 것이 있겠는가. 전에 《유곤록(裕昆錄)》 문제로 도배(島配)까지 당했는데 저번의 일은 이것과 상반됨을 면치 못하니 이것이 매우 해괴한 일이다."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시준은 비록 그 아우처럼 완력이 세지는 않으나, 그가 기탄하는 바가 없음은 이미 말할 것이 없습니다. 겸빈은 죄가 봉징(鳳徵)과 조금도 차이가 없으므로 단지 귀양보내자고만 청했습니다.
시위는 당시에 한 짓이 죄다 흉악하고 고약하였는데 위복(威福)과 생사 여탈의 권한이 오직 그의 손에 달려 있었으며 온 세상을 말 못하게 막으면서도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죄가 사형을 면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위의 죄악에 대해서는 비단 나라의 여론 뿐만 아니라, 나 또한 근거를 잡고 있는 일이 있으므로 결코 잠시도 살려둘 수 없다. 시위에게 법을 적용한 다음에야 규진을 발탁할 수 있으며, 규진을 발탁한 다음에야 시위의 죄가 더욱 모조리 드러날 것이다. 그러니 규진을 발탁하여 등용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송익로(宋翼魯)의 문제는, 귀양을 보내자고 앙청(仰請)하려 하였는데, 대각의 논계가 이미 제기되었기 때문에 주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대각의 논계가 있었더라도 귀양 보내는 일을 왕부(王府)가 거행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대각의 논계에 구애될 것이 있겠는가. 해방 승지가 경조(京兆)에 분부하여 즉시 부(部)의 구역 안에서 축출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광묵(金光默)을 이조 참판으로, 김문순(金文淳)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유강(柳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정언 김용(金鎔)이 상소하기를,
"병조 판서 윤숙(尹塾)은 은혜와 총애를 잊은 채 정사의 의망을 전혀 생각없이 하여, 전후로 한두 번 의망한 것이 실로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윤숙을 한시바삐 삭출(削黜)해야 한다고 봅니다.
얼마 전에 삼사가 합계(合啓)를 스스로 발론하였다가 스스로 정지함으로써, 체례(體例)를 훼손하고 대각에 수치를 남겼습니다. 삭직시키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은근히 비친 많은 말들이, 모두 금령(禁令)의 조건(條件)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김용에게도 사람으로서의 마음이 있을텐데, 이미 그때의 연석에 참여하여 연중(筵中)의 광경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고 또한 다시는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받았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상소문의 앞뒤에다 ‘바로잡는 듯하면서도 바로잡는 것이 아니고 침척(侵斥)하는 듯하면서도 침척하는 것이 아니다.’는 등의 말을 아무 어려운 기색없이 끌어다 넣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가운데 성명(姓名)을 드러낸 자가 바로 병조 판서인데, ‘한두 의망[一二排望]’이라는 네 글자만 늘어놓고는, 이어서 여정(輿情)의 분노가 더욱 격렬해진다느니, 상식을 벗어난 일이라느니 하면서, 더없이 한껏 규탄하였고 심지어 벼슬을 빼앗고 쫓아내자고까지 청하였으니, 어찌 너무나도 무엄한 짓이 아니겠는가.
지난번의 환수하라는 청을 시원스레 허락한 것은, 비록 타결을 보기에 급하고 아울러 마무리를 지으려는 뜻을 보이려는 뜻에서 나온 일이었으나, 오늘 이 사람을 특별히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명령을 그 누가 믿겠는가. 김용을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윤숙(尹塾)이 소를 올리기를,
"대론(臺論)이, 신이 조규진(趙圭鎭)을 총관(摠管)에 의망하였다는 이유로 신을 삭직시키라고 청하였습니다.
아, 조씨(趙氏) 일가의 조시준(趙時俊)·조시위(趙時偉) 형제가 신과 원수간이라는 것은 온 조정이 다 알고 있는 일이며, 규진으로 말하면 평소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규진은 화를 당한 이후로부터 누차에 걸쳐 곤임(閫任)·포장(捕將)·중군(中軍)·총관(摠管)의 벼슬을 지냈는데, 비록 중비(中批)에서 나온 경우도 있기는 하였지만, 그때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누구 하나 왕명을 봉환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유독 신을 죄안(罪案)에 몰아넣는 것은 무슨 마음이란 말입니까.
신이 규진을 의망한 것이 만약 금번의 일이 발생한 뒤에 있었다면, 그 논척(論斥)한 바가 스스로 지은 죄이기에 면하기 어렵겠으나, 종전에 여러 번 의망하여 제수한 가운데서 신 한 사람만 끄집어낸 것은 필시 앙갚음을 하려는 것입니다.
김용 같은 자로 말하면, 시골의 어리석은 무리에 불과하여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자입니다. 그러니 상소문을 지어 사주한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 심보도 또한 불량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을 삭직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신하를 예(禮)로 부리는 의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가 흔들도록 놔둔다면, 이 어찌 경을 남달리 대우하고 특별히 선발한 뜻이겠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어서 명을 받들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숭품의 정경(正卿)이 남의 비난을 받은 것이 이미 이와 같고 현 직책이 또한 대수롭지 않은 벼슬과는 다르니, 신하를 예(禮)로 부리는 도리에 있어, 마땅히 한 번 그 소망을 풀어주어야 할 것이다. 행 병조 판서 윤숙을 체직하라."
하였다. 중비(中批)로 김상집(金尙集)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조규진(趙圭鎭)을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이 거조는 규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도(世道)를 위하는 깊고 장구한 염려에서 나온 것이다. 진정 죄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한결같이 말하는 자는 받아야 할 죄를 받은 다음에야 공론이 가라앉고 물정이 후련히 여길 것이다. 만약 혹시라도 이와 반대되면 전후로 거행한 것까지 모두 함께 행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종적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한쪽은 걸려들고 한쪽은 빠져나가면, 보고들은 자들이 오늘의 조정을 어떤 시대라고 여기겠는가. 이것이 일전에 특별히 금령을 내리어 감히 말하지 말도록 한 까닭이다. 지금 이를 거듭 유시하는 것은 의도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하였다.

 

11월 3일 을유

춘당대에 나가서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 및 관무재(觀武才)를 거행하였다.

 

김이소(金履素)를 호조 판서·판의금부사로, 오재순(吳載純)을 이조 판서로, 정호인(鄭好仁)을 한성부 판윤으로,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특별히 정민시(鄭民始)를 교동  수사(喬桐水使)에 보임하였다. 하교하기를,
"몸이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은, 그 의리상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이처럼 사교(辭敎)를 허비하고 성기(聲氣)를 허비하면서까지 기어이 온전하게 보전하고 편안하게 지탱한 뒤에야 그만두려 하겠는가. 운검(雲劒)과 시관(試官)으로 모두 입참(入參)하지 않았는데, 하나는 배종(陪從)하여 호위하는 의리가 중하고 하나는 각무(閣務)가 자별한 것이다. 요컨대 이는 모두 지난 일이다. 그런데도 머뭇거리는 것은 평소에 알고 있던 것과 크게 어긋난다. 행 사직(行司直) 정민시를 중하게 추고하고 패초하여 입시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그러한 처지에 있고 이러한 대우를 받는 몸으로, 종일토록 소패(召牌)를 거스르면서 명령에 응할 의사가 없으니, 염치나 분의는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임금을 심히 저버리는 일단(一端)인 셈이다. 별운검(別雲劒) 정민시를 통어사(統禦使)에 제수하고 그날로 하직하게 하라. 또 만약 머뭇거린다면, 이는 군율에 관계되는 일이니, 이런 뜻을 모쪼록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4일 병술

춘당대에 나아가 관무재와 대거(對擧) 문과 정시(文科庭試)를 거행하였다. 문과에서는 조득영(趙得永) 등 5인을 뽑고, 무과에서는 민종혁(閔宗爀) 등 93인을 뽑았다.

 

우의정 김종수(金鍾秀)가 아뢰기를,
"전 병조 판서가 대간의 글에 맞서 올린 상소는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대간의 사체는 대신과 더불어 대등하여 천자(天子)도 용모를 가다듬고 재상도 대죄(待罪)를 하는 법이니 그 중함이 이와 같습니다. 말한 자의 말이 옳고 그른 것은 따질 것이 아닙니다. 근래의 맞받아 비난하는 습속은, 금지해야 마땅합니다. 조정 신하가 탄핵을 받았을 때에, 만약 마음껏 대간을 모욕하는 말을 하도록 놔둔다면, 대각의 체모가 점점 가벼워질 것입니다. 낮은 관원도 감히 그렇게 하지 않는데, 하물며 숭품 중신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중신이 세운 공로가 비록 크기는 하나, 조정의 체면도 역시 중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다보면, 반드시 장차 이 일로 인하여 임금이 대간을 업신여기게 될 것입니다. 전 병조 판서 윤숙을 파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하교하였다.
"어제 연석(筵席)에서 이미 주고받은 말이 있지만, 심흥영(沈興永)을 방송(放送)하면 응당 벼슬에 나올 길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외임(外任)에 내보내야 하겠는가. 교동  수사(喬桐水使) 정민시를 그대로 내직(內職)에 유임시키고 심흥영을 석방하라."

 

11월 5일 정해

선원전(璿源殿)에 작헌례를 거행하였다.

 

춘당대에 나아가 관무재와 별시사(別試射)를 행하고 시상(施賞)을 하였다. 이어 구일제(九日製)에서 낙제한 사람들에게 다시 보이는 시험을 거행하였다.
표문(表文)에서 수석을 차지한 진사 이동명(李東明)과 부(賦)에서 수석을 차지한 생원 김희성(金熙成)에게 모두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토록 하였다.

 

11월 6일 무자

별천(別薦)과 권무(勸武)에 대한 옛 규정을 회복하였다. 하교하기를,
"관무재(觀武才)를 할 때에 별천(別薦) 또는 권무(勸武)로서 합당한 사람을 물어 보는 것이 원래 상례(常例)이다. 금번에도 물어보았는데 장신(將臣) 한두 사람 이외에는 대부분 유의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기한을 늦추어 적합한 자를 추천하게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한 번 신칙하는 일을 함으로써 옛 규정을 수복(修復)하는 바이다. 대체로 별천과 권무는 한계가 자별하다. 명목이 별천일 경우에는, 지체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추천할 직책이 있으면 추천이 없음에 구애받지 않고 벼슬을 시키고, 상격(常格)에 따르지 않는다. 적합한 자를 추천할 때에는 대신(大臣)과 장신(將臣)이 반드시 거행 조건을 제시한 문적(文蹟)이 있어야 하고, 비록 특교(特敎)일 경우라도 또한 관원을 임용하는 규례대로 전교(傳敎)를 써내야 하며, 등과(登科)하기 전에 초관(哨官) 또는 선전관(宣傳官)에 곧장 제수하는 것이, 별천의 규정이다.
권무의 경우에는, 연석에서 권무를 품한 뒤에 군문에서 전령(傳令)하여 권무 군관(勸武軍官)을 시키되, 순서를 건너뛰어 추천하기를 기다렸다가 차례대로 임용하면 그만이다. 이것이 권무의 규정이다.
그런데 근일에는 옛 규례가 전혀 무시되어 뒤죽박죽이 된 나머지, 별천과 권무의 구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옛 규정대로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오재순(吳載純)을 소견(召見)하였다. 재순이 사직소를 올리고 소패(召牌)를 거스르니, 입시를 명한 것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문계(問啓)에 대한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사차(私次)로 돌아가 버리고, 여러 번 번거롭게 신칙하는 하교를 내렸는데도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자처럼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재순이 아뢰기를,
"지난번 대간의 상소 가운데, 윤시동(尹蓍東)을 의망(擬望)한 일로 ‘극력 버티면서 이기려고 대들었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이조 판서가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경이 비록 총재(冡宰)이기는 하나 어찌 군신간의 분의(分義)를 생각하지 않는가. 지난번 빈청 접견에서 조덕린(趙德隣)의 문제를 갖고 여러 신하들이 점점 애매한 데로 굴러들어 가기에 내가 ‘그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하적(夏賊) 같은 자가 나올 것이다.’고 말했었다. 대체로 선대 임금 때 신축년과 임인년의 의리를 내가 닦아 밝히고 굳게 지키어 나가는 것이, 어찌 오늘의 이른바 여러 신하들과 같겠는가. 내가 평소에 강구하여 밝힌 것이 더없이 컸으니, 그뒤 장주(章奏)에서 이러쿵저러쿵 한 것은 과연 어찌된 것인가.
대체로 윤시동의 상소가 비록 본사(本事)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죄범(罪犯)이 막중하니 마땅히 무거운 형벌에 처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노모(老母)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귀양을 보냈다가 금세 용서를 하였다. 등용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위에서 스스로 충분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니, 아래에서 어떻게 감히 한번 의망하고 재차 의망하면서 기어이 이기고야 말려고 할 수 있겠는가. 윤시동이 과연 성인(聖人)인데도 까닭없이 등용하지 않는다면, 대신이 제기하고 삼사가 간쟁하고 관학(館學)에서 머물려두자고 청하여 허락을 받은 후에 등용하면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위로부터 아직 하교가 없는데도 전관(銓官)은 정사(政事) 때마다 번번이 의망을 하니, 경이 말한 ‘이기려고 대들고 극력 맞선다.’는 것이, 어찌 외면상 근거로 잡히는 것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얼마 전 하교를 하고 나서는 이조 판서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받아들이고 자책해야 할 것인데, 어찌 감히 예삿일로 보아넘기고 이런 긴치 않은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내가 고심하면서 어느 한쪽만 등용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린아이나 하인들도 아는 바이니, 어찌 보잘것 없는 일개 조덕린을 위해서 윤시동의 벼슬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때의 장주(章奏)는 윤시동 한 사람 뿐이 아닌데 매번 시동에 대해서는 이처럼 물고 늘어지니, 그 해독은 전적으로 위에서의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아래에서 서둘러 먼저 제기하여 그러한 것이다.
금번의 호조 판서는 단망(單望)으로 통과시켰는데 나도 모르게 한심한 느낌이다. 서로 겨룬 자취에 대해서는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한 대신은 후보에서 빼내고 한 대신은 단망으로 통과시켰으니, 이것이 과연 무슨 꼴인가. 이와 같은 관원의 주의(注擬)는 결코 나라의 뜻을 체현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시동보다 도리어 백배의 해로움이 있는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조 판서같이 본래 유선(柔善)한 사람이 갑자기 인피하고는 한사코 숙사(肅謝)를 하지 않으니, 어찌 유독 이재간(李在簡)의 일을 보지 않는가. 한편에서 조금 무사하게 되자 대뜸 기세를 부릴 생각을 하니, 또 다른 재간이 또 한편에서 나오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만약 스스로 보전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풍습을 하루 빨리 고친 뒤에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조 판서가 작년에 이미 이홍재(李洪載)를 그르치게 할 때 연석에서 상주한 것이 아직껏 귀에 쟁쟁한데, 오늘의 거조도 우상의 뜻에 맞추느라고 그러는 것인가. 나는 우상에 대해 근래에 더없는 총애를 베풀었는데, 우상은 정승에 임명된 지 얼마 안 되어 그만 이렇게 행동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일마다 잘되기를 바란들 전단(專斷)하는 병통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갑(李𡊠)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11월 7일 기축

우의정 김종수(金鍾秀)가 대명(待命)을 하니, 유시하기를,
"어제의 이조 판서 일은 어찌 놀랍지 않은가. 이것이 경과는 무관한 것 같지만 내가 개탄하는 것은, 경이 지시를 제대로 받들지 못하여 이조 판서 역시 잘못을 본따는 것을 면치 못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지금 고심하고 있는 것은, 오직 이편과 저편을 잘 조정하여 말썽이 드러나지 않게 하자는 데 있다. 그런데 한 대신은 후보에서 뽑아내 버리고 한 대신은 다시 의망을 하였다. 이것은 오히려 소견이 각기 다른 것으로 쳐서 비록 심각하게 나무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소란을 진정시키며 장차 등용을 하려는 뜻에서 아직 혜국(惠局)의 낯익은 자리에 추천하지 말게 하려고 하였는데, 이에 도리어 탁지(度支)에 단망(單望)으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또 이것도 어쩌다가 마침 그렇게 된 것으로 돌리고, 단지 다시 다른 사람을 추천하라고만 명하였는데,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이판(吏判)의 놀라운 행동이 있게 되었다.
지난번에 말하는 사람들이 이판을 잔뜩 걸고드는 것을 나 역시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였는데, 겉면만 보는 자들이 근거를 쥐고 하는 말에서 ‘맞서서 이기려고 한다.’는 지목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더구나 차대(次對)가 있는 날에 본의(本意)를 환히 깨우친 때로부터 종전에 갑론을박하던 의문들이 모두 속시원히 풀렸다. 이러한 뜻으로 반복하여 신칙을 한 뒤에도 예삿일로 보아넘기고 머뭇거리면서 명에 응하지 않고 있다. 이판처럼 어질고 착한 사람으로서 능히 이런 일을 하는 것은, 한 중신(重臣)의 부망(負望)이 은덕(隱德)보다 지나쳐서 그와 더불어 거취를 같이하는 것이 아니면, 필시 근일 경의 주의(注擬)에 감화되어서 그러한 것이다. 이랬건 저랬건 따질 것 없이, 이것이 어찌 좋은 소식이겠는가. 이 때문에 이판이 입시하였을 때 연석에서 몇 마디 말을 하여 경으로 하여금 듣게 하려 한 것이었다. 이미 지난 일을 새삼 뒤늦게 제기할 것이 없으니, 안심하고 대명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8일 경인

우의정 김종수가 차자를 올리기를,
"얼마 전 장전(帳殿)에서 천망(薦望)을 하는 날을 맞아, 일이 갑작스럽게 생긴 까닭에 미처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나머지, ‘딴 생각이 없고 결함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곧 그를 별 탈이 없는 평인(平人)으로 여기시는 줄만 알고, 상께서 등용하기 전에 섣불리 먼저 주의(注擬)를 하는 것이 타당치 않다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스로 큰 죄를 불러들이고 행동에 신중함이 결여되었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바라건대 속히 중한 벌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군신의 사이에는 서로 숨김이 없는 것이 중요하다. 경이 앞질러 주의를 한 것이, 숨김이 없는 데서 나온 일임을 알고 있으며, 내가 책면(責勉)을 하는 것도 숨김이 없는 데서 나온 것이다. 어제의 비답에서 ‘이미 지난 일을 말하지 말라.’고 다시 경에게 말한 것도 이러한 뜻에서였다. 경은 부디 안심하고 일을 보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성원(李性源)이 현도 상소(縣道上疏)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떠나간 지 여러 날이 흘렀으니 한갓 그리움만 사무친다. 물을 건너고 들판을 지나 달려갔으니 경은 울적함을 털어내고 번뇌를 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길에서의 잠자리와 끼니는 제대로 하였는가? 근래 만부(灣府) 백성들의 근심 때문에 밤낮 마음을 쏟고 있는데, 경은 모쪼록 널리 알아보고 조목조목 아뢰어라. 이미 파악해서 봉(封)하여 보냈는가. 강을 건널 날이 머지않아 있을 것으로 아는데, 부디 여행길에 몸조심하기를 바란다."
하였다.

 

11월 9일 신묘

정창순(鄭昌順)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1월 10일 임진

반궁(泮宮)에서 감제(柑製)를 설행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진사 김이재(金履載)를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다.

 

11월 11일 계사

춘당대에 나아가 도기 유생(到記儒生)의 강제(講製) 및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를 거행하였다. 도기(到記) 유생의 제술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생원 정노영(鄭魯榮)과 강론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김경환(金景煥)을 모두 전시에 직부하게 하였다.

 

11월 13일 을미

내빙고(內氷庫) 자문감(紫門監)을 없앴다. 빙고(氷庫)가 옛적에는 요금문(曜金門) 안에 있었는데,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상주하여 없앤 것이다.

 

11월 14일 병신

대신(大臣)·각신(閣臣)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간절한 일념은 오직 ‘널리 포섭하여 공평하게 한다.[恢蕩]’는 두 자에 있다. 그런데 눈앞의 일로 말한다면, 채 판부사(蔡判府事)를 재상에 임명한 뒤로는 청요직(淸要職)에 그럴싸한 자를 추천하는 자가 하나도 없으니, 일의 체면에 매우 공평함이 결여되었다. 또 금번의 전망(銓望)이 구차스럽다. 이를테면 이정규(李鼎揆)·정범조(丁範祖) 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합당한 자들이니, 경들은 미리 유념을 하여 후일 물어볼 때에 대비하라.
윤영희(尹永僖)의 일은 지난번에 이조 판서에게 이미 자세히 유시하였는데, 지금껏 난색을 표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말이 되는가. 만약 하찮고 잗단 일을 가지고 번번이 구애를 하려고 한다면, 세상에 어찌 온전한 사람이 있겠는가."
하니, 우의정 김종수가 아뢰기를,
"신들은 실로 하찮은 것까지 모두 성취시키려는 성상의 뜻을 우러르지만, 다만 외간에서 이런 논의가 분분한 지 오래입니다. 이조 판서가 난색을 표하는 것은 사실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11월 16일 무술

윤숙(尹塾)을 공조 판서로, 이경일(李敬一)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명훈(李命勳)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17일 기해

조강과 차대가 있었다. 우의정 김종수가 아뢰기를,
"신은 주연(胄筵)에서 시강(時講)하던 때로부터 삼가 성상을 보건대, 타고난 자품이 모든 임금보다 훨씬 뛰어나고 의리(義理)는 핵심을 환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이에 신은 내심 삼대(三代) 때의 지치(至治)를 다시 보게 될 것으로 여겼는데, 전하가 즉위한 후 10 여년 사이에 비단 정사가 뜻대로 되지 못한다는 탄식이 있을 뿐아니라, 또한 끝을 잘 마무리하지 못할 우려까지 있습니다. 신이 실망하여 맥이 풀린 것은 애당초 논할 것도 못되나, 우러러 생각건대 성상의 마음에도 역시 틀림없이 처음의 마음을 떠올리며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피력(披瀝)하고자 하는 것은 또한 늙은이의 상담(常談)에 불과합니다. 주연에서 주대(奏對)한 것 외에 글로 써서 진계(進戒)한 것으로는 무술년의 《경연고사(經筵故事)》와 《경연비례(經筵比例)》 책자(冊子)인데, 차자로 올리고 정사했던 글 및 신축년에 올린 《내각고사(內閣故事)》 2 통[道]을 포함하고 있으며, 신의 평생의 정열은 모두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때의 비지(批旨) 천 수백 마디는 흔쾌히 받아들이는 성덕(盛德)과 장려하는 융숭함이 고금에 탁월하였으므로 감격의 눈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세상 도리와 조정 분위기는 오히려 지난날과 같은 꼴이 되고 말았으니, 신이 고사(故事) 중에서 진계했던 ‘보고나서는 즉시 거두어 버리고 말만 꺼내고는 즉시 그만둔다.’는 말과 불행히도 근사합니다.
그러나 신이 손을 대어 전하를 섬길 것은 오직 이 한가지 말뿐입니다. 눈앞의 급한 일로는, 임금으로서의 덕을 힘써 닦고, 정치의 규범을 수립하며, 언로(言路)를 열고, 명절(名節)을 기르며, 작상(爵賞)을 신중히 하고,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임금으로서의 덕을 힘써 닦는 것이, 정치의 규범을 수립하고 언도를 열고 명절을 기르는 근본이 되며, 작상과 재용은 단지 말절(末節)일 따름입니다.
신의 《경연고사》와 《비례》에서 말하기를 ‘성상의 자품은 하늘이 내신 훌륭한 자질이나, 고명(高明)하고 빼어난 가운데에도 역시 시속(時俗)을 따르는 기상이 약간 있습니다. 습속과 풍기(風氣)를 능히 전환하고 습속과 풍기에 말려들지 않는 것은, 영웅 호걸다운 임금이 아니고서는 해낼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깊이 쌓아두고 드러내지 않으며 여유 만만하고 몰아부치지 않는 것은 비단 덕성(德性)을 기르는 방도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수명(壽命)을 기르는 데 일조(一助)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우레의 재변이 발생하였을 때의 전교(傳敎)에서 「실속에 힘쓰는 데에 부족함이 있다.」고 자책하셨는데, 전하께서 이렇게까지 반성을 하시면 그것이 바로 실심(實心)이며, 이 마음을 토대삼아서 확충해 나아가 미치지 않는 데가 없고, 잡아쥐어 놓치는 경우가 없으면, 그것이 성(誠)이 되는 것입니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이치를 터득하신 정도가 매우 밝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적중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자기만을 옳다고 여길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더욱더 이치를 밝히며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에 힘쓰소서. 그리하여 호오(好惡)의 감정이 일어날 때이면, 반드시 이것이 남들을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를 되새겨 본 다음에 행동을 하심으로써, 될 수 있으면 팔방(八方)의 보고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흔쾌히 심복(心服)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보통 사람의 심정이, 크게 사사로운 생각에 대해서는 더러 잘 극복을 해내면서도, 도리어 잗달고 조그만 사의(私意)에 대해서는 말려들어가곤 합니다. 그리하여 천금(千金)의 귀한 구슬은 능히 깨뜨려 부수면서도 가마솥을 깨뜨렸을 때 아뿔싸 하고 소리를 내고 마는 것은, 힘쓰는 것과 소홀히 여기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였습니다.
《내각고사》에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이치를 터득하는 데에는 민첩하지만 절실하게 체험을 하는 수양이 늘 부족하며, 일을 도모하는 데에는 날카롭지만 끈기있게 지켜나가는 힘이 항상 모자랍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사사로운 생각을 무찔러버리는 데에는 단칼에 끊어버리는 수양이 있지만, 사소한 인정에 있어서는 오히려 완전히 없애 버리지 못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은 임금으로서의 덕을 힘써 닦을 데 대한 말입니다.
《비례》에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명철한 예지를 타고나신 데다, 또 무너진 기강을 떨쳐 일으키는 일에 뜻을 두고 계시니, 너무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마땅히 경계해야 할 점입니다. 위정(爲政)의 도리는, 허물을 용납하고 단점을 포용하는 것과, 간사한 것을 적발하고 숨어있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 함께 병행되고 서로 어긋나지 않아야 합니다. 금령(禁令)이 성기고 관대하였던 점과 풍류(風流)가 독실하고 순후하였던 점이, 바로 서한(西漢)이 삼대(三代)에 버금가게 된 까닭입니다. 대저 이렇게 된 후라야 의미가 심장하고 기상이 유구하여, 나라가 그 복을 향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정령(政令) 사이에는, 왕왕 처음에는 예리하다가 나중에는 해이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예리한 잘못이 있으면 형편상 해이해지지 않을 수 없는데, 아무래도 처음 가다듬을 때에 나중에 해이해질 것을 미리 고려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군자는 항상 너무 관대한 데서 잘못을 범하고 소인은 못된 생각을 드러낼 것을 항시 잊지 않는 것이 특히 오늘날의 숨은 걱정거리입니다.’라고 하였으며, 《고사》에 이르기를 ‘풍기에 점점 물들어가고 습속에 점점 휩쓸려 들면, 자연히 하찮은 것만 살피고 중요한 것은 놓치게 되어, 겉치레가 실속보다 지나치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포용하는 정도가 지나치면서도 기강을 진작시키려는 것은 도리어 다그쳐 몰아부치는 데에 가깝고, 명실(名實)을 따지고 들면 더러 너무 까다롭게 살피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군자이면서도 결함이 있는 자가 많고, 소인이면서도 재주가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결함이 있다는 이유로 군자를 버리고 재주가 있다는 이유로 소인을 등용하면, 이것은 현사(賢邪)가 도치(倒置)되고 국가가 난망(亂亡)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은 정치의 규범을 수립할 데 대한 말입니다.
《비례》에 말하기를 ‘전하께서 말하기를 꺼려하는 생각이 없는데도 조정에 말하기를 꺼려하는 풍조가 있는 것은 전하께서 바른말을 요구하는 마음이 바른말을 구한다는 명령만큼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 마음만 따르고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고사》에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장차 지나친 말과 지나친 행동을 하시려 하다가, 누가 성낼까 겁을 내어 중간에 그만두는 일이 있는데, 전하의 조정에도 그럴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가령 전하에게 크게 잘못된 행동이 있을 경우, 그 과정에 한마디라도 말을 꺼내 반대하는 자조차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전하로 하여금 그 성내는 것이 두려워서 감히 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치우친 기질을 모두 바로잡아 고치지 못하였고, 사사로운 인욕(人欲)을 모조리 털어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고도 거만하게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여기면서 뭇신하들의 의견을 깔보기 때문에, 서슴없이 할 말을 하는 기상이 사라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은 언로를 열 것에 대한 말입니다.
《비례》에 말하기를 ‘사대부들이 염치를 손상하고 명절을 무너뜨리면서, 요행수로 느닷없이 부귀해지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이러한 폐습을 바로잡자면 진실로 전하께서 몸소 이끌고 앞장서서 솔선하는 것보다 나은 길이 없습니다. 또 반드시 어진이의 길을 열어주고 요행수를 바라는 길을 막아 버리며, 분수대로 조용히 사는 길을 장려하고 조급하게 다투는 태도를 억제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그 절반이나마 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아첨이란 단지 임금을 황음(荒淫)하도록 이끈 다음에라야 아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대로만 고분고분 순종하면서 거스르지 않는 것이 모두 아첨이 되는 것입니다. 아, 나라에서 덮어놓고 순종하지 않는 신하를 길러낸 다음에야 바야흐로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덕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고사》에 말하기를 ‘명분과 의리는 나라를 유지해 나가는 대방(大防)으로서, 군자는 그에 의거하고 소인은 등지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말세의 임금은 허다한 작록(爵祿)을 허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 그 욕심을 채우게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변란이 생기면 그들이 팔을 흔들며 가버리는 것을 멀거니 앉아 보게 되고, 반면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은 평소에 어떤 자인지도 알지 못했던 사람들 속에서 나오곤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은 명절을 기를 데에 대한 말입니다.
작상(爵賞)이 너무 헤픈 데에 대하여 말하면, 은택이 이미 바닥나서 위에서는 그 뒤를 이어나갈 수 없으며, 명기(名器)가 날로 천해져서 아래에서는 귀한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재용이 거의 바닥난 것으로 말하면, 눈앞의 다급한 경비를 이미 버텨나갈 길이 없는데다 앞으로도 급한 상황에 미리 대비할 수 없는 형편이니, 그야말로 지금의 고질적인 폐단이자 나라의 큰 걱정거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로잡고 돌이키는 것은 역시 전하께서 한 번 돌려세우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대체로 이 여섯 가지 조항은, 그 귀결점이 임금으로서의 덕을 힘써 닦는 데에 있으며, 그 요령은 또 성인의 학문을 진전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주자(朱子)가 천하의 일을 논하면서 그 근본을 임금의 일심(一心)에다 미룬 것은 그야말로 더없이 절실한 말입니다. 학문은 정사를 세우는 근본이 되는데, 독서로써 절도(節度)를 삼습니다. 대체로 제왕가(帝王家)에서 힘을 들이는 학문은 일반 서민들과는 다릅니다. 책은 이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서, 비록 필부(匹夫)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제왕이 하루에 만가지 사무를 처리하는 더없이 복잡하고 번거로운 과정에 있어서 이 마음을 사물에 따라 변하지 않게 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이 마음을 유지하는 방도를 특히 더 잠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도대체 어찌하여 근년 이래로 강연(講筵)을 정지하는 날이 점점 많아지는 것입니까. 비록 성학(聖學)이 이미 고명(高明)한 경지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의 한계에 대해서는 옛사람이 경계를 하였으니, 학문을 힘쓰다 말았다 할 염려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이 ‘이렇게 되는 것은 강관(講官)들을 점차 적임자로 얻지 못하여 성상께서 비록 경연에 임하여 물어보아도 누구 하나 성의(聖意)에 합당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성상의 뜻이 점점 더욱 시들해지는 것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혜있는 자도 한 번은 실수하고 어리석은 자도 한 번은 제대로 맞추는 것은, 비록 글뜻에 있어서도 그러한 것이니, 어찌 아랫사람들이 전하의 뜻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하여 드디어 학문에 힘쓰는 일을 폐지해서야 되겠습니까.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하루 세 차례의 강론과 소대(召對)하는 것을 큰 사고가 없는 한, 한 번도 거르지 말아서 학문을 빛낼 수 있는 바탕을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연(胄筵) 때의 옛 관리로는 오직 경만이 남아 있다. 이제 간곡한 말을 들으니, 내 몹시 감탄스럽다. 마땅히 유념을 하겠다."
하였다.

 

영의정 이재협(李在協)을 면직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간절하게 요구하지 않는 데다 또 곡진히 살펴 주지도 않은 채 하루이틀 이렇게 헛되이 보내는 것은, 도리어 공경하고 예우하는 도리에 흠이 된다. 금번 연석에서 우상에게 물었더니, 우상 역시 ‘이해하여 주고 후에 나오도록 권유하는 것이 조금 낫겠다.’고 하였다. 여하튼 오랫동안 서로 버틸 수 없는 노릇이니, 영의정 이재협에 대해서는 이제 우선 소원을 마지못해 따라준다."
하였다.

 

중비(中批)로 정범조(丁範祖)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구상(具庠)을 이조 참판으로, 정호인(鄭好仁)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1월 19일 신축

조강(朝講)이 있었다.

 

홍문영(洪文泳)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홍양호(洪良浩)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1월 20일 임인

차대를 하였다. 우의정 김종수가 아뢰기를,
"상소와 차자를 불에 태운 것부터가 이미 비상한 거조인데, 형조 낭관과 금부 도사가 상소하는 유생들을 금하기 위해 아직껏 대궐문 밖에 있다고 합니다. 성조(聖朝)에서 선비를 대하는 도리가 결코 이래서는 안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환수하게 되면, 이는 그들을 오게 하는 뜻이 된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부득이해서 한 일이다. 당분간 사태가 가라앉는 것을 살펴 환수를 하겠다."
하였다. 정언 유한우(兪漢㝢)가 연이어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군덕(君德)과 시정(時政)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 없다. 그대는 명문 대가의 사람으로서 다른 대간들과는 다른데, 대간 자리에 처음 들어와서는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다. 내일 대청(臺廳)에 나아가면 마땅히 소견(召見)을 하겠으니, 새로 아뢰는 것이 열 조항을 밑돌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종전에는 왜관(倭館)에 화재가 발생하면 매번 6, 7년이 지난 뒤에야 고쳐 짓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금번에 왜관에 화재가 발생한 후에 관왜(館倭)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불을 조심하지 않은 죄를 이미 도주(島主)에게서 처결받았다.’고 하면서, 고쳐 짓도록 해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시(開市)하는 대청(大廳)은 진상하는 물품을 받는 곳에 속하므로, 다른 건물로 옮겨서 받는 것은 일의 체면이 구차스럽다는 이유로, 동래 부사(東萊府使)도 다시 짓게 해달라고 장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전에 없던 규례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뒤폐단에 관계되니, 연한이 차기를 기다리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종수가 아뢰기를,
"일전에 이비(吏批) 정사(政事) 가운데 전 영의정 이재협(李在協)을 본조에 걸맞는 벼슬자리가 없으므로 규례대로 서반(西班)으로 보내라는 내용으로 계하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조(國朝)의 옛 제도에 충훈부 부원군과 군(君)은 모두 이조에서 추천하는 실직(實職)이므로 재상으로 있다가 체직된 부원군이나 승습한 군은 으레 ‘군(君)’이라는 칭호로 단망(單望) 추천을 하였는데, 근래에 전격(銓格)이 엉망이 되어 ‘군(君)’의 칭호가 있는 대신도 서반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을 배치하는 것은 사체가 자별한데도 이처럼 착오를 범하였으니, 전당(銓堂)은 추고하고 이후로는 옛 규례를 복구하라."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고산 현감(高山縣監) 윤현석(尹玄錫)은 본도의 감사와 병사가 자기 관하의 교리(校吏)를 추치(推治)하였다고 하여 마구 헐뜯고 욕지거리를 하였으며, 심지어 뇌물을 썼다는 등의 말로 누명을 씌울 속셈을 꾸미기까지 하였습니다. 일의 체면으로 보아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현석을 즉시 그곳에 정배(定配)시킴으로써, 도내의 관민들로 하여금 체통이 지엄하다는 것을 환히 알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교리 윤광안(尹光顔)이 아뢰기를,
"군신간의 분의(分義)가 비록 엄절하기는 하나, 상하간에 반드시 각기 그 도리를 다한 뒤라야 분의가 자연히 존엄해지는 것입니다. 사리가 어떠한가를 따져 보지도 않고 그저 명령대로만 고분고분 따르는 것을 공경스럽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신하들에 대하여 혹시 성상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매번 ‘분의(分義)’라는 두 글자로서 몹시 책망하고 다그치는 수단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겁을 먹고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장차 기개가 날로 사라지고 염치가 날로 무너져서, 필경에는 엄절한 분의 또한 장난처럼 존엄성이 없어지는 한탄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깊이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옳은 말이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나라를 소유한 자가 승정원의 임무를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것이 임금의 명령을 성실하게 출납하는 책임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선포해야 하는 명령은 선포하고, 선포하기에 부당한 것은 되돌려 올린 뒤에라야 바야흐로 성실하게 받드는 의리를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혹시라도 이렇게 하지 않고 그저 문서나 받들어 집행할 따름이라면 한 명의 서리(胥吏)로도 충분할 것이니, 승정원의 중요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삼가 보건대, 근일 승정원에 거듭 신칙하여 금령(禁令)을 만들고 일체의 명령을 되돌려 올리지 못하게 하므로, 비록 응당 거역해야 되는 사안이더라도 그저 한편으로 선포하고 한편으로 진계(陳啓)하며, 이미 한창 쟁집(爭執)을 하는 중인데도 또 도리어 선포를 하고 있으니, 앞뒤가 모순될 뿐만 아니라 거조가 어설픈 지경입니다. 이제부터는 설령 정도에 지나친 명령이 있더라도 장차 논란할 길이 없어질 것이고, 설사 나중에는 취소를 하더라도 이미 중외에 퍼져 알려지게 되어 성덕에 누를 끼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결국 즉시 취소하고 바로잡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금령을 도로 거두시어 정원으로 하여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되돌려 올리는 것과 거역하는 것은 과연 구별이 있다. 그러나 근래에 금지하도록 신칙한 것은, 바로잡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청한 것을 그대로 따라주기에는 곤란함이 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년 이래 개강(開講)하는 날이 매우 드뭅니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천고에 탁월하시니, 어찌 혹시라도 이 일에 싫증을 느끼어 그런 것이겠습니까. 단지 강론을 해도 실효가 없다고 여기시어 그러할 따름입니다. 그것은 근일 경연의 신하들이 대부분 속이 비고 학문이 허술하여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만하지 아니하고 아래에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제왕으로서의 훌륭한 점인데, 어찌 강관이 적임자가 못 된다고 하여 마침내 강론을 폐지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유념을 하겠다."
하였다.

 

우의정 김종수가 겸대하고 있는 수어사를 사직하니, 허락하였다. 이에 앞서 종수가 소를 올려 수어사를 사직하니, 묘당에 명하여 체직시키고 유임시킨 전례를 널리 상고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이때 와서 비변사가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니, 하교하기를,
"유임시킨 것은 다만 무자년의 전례 한 번뿐이므로, 지금 우선 사임을 허락한다."
하였다.

 

인릉군(仁陵君) 이재협(李在協)에게 유시하였다.
"사임을 마지못해 허락한 것은 경의 처지를 곡진히 이해한 데서 나온 일이다. 평소에 나라를 몸받던 경의 마음으로, 어떻게 구구한 정세에 구애되어 벼슬에 나올 방도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지난번에 사람들이 한 말이 당치않은 점에 대해서는, 이미 하나도 남김없이 환히 알고 있다. 경이 스스로 하는 말이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경의 집안일에 대해서는, 경의 말을 듣지 않고도 반드시 힘을 다해 도와주려고 하고 있다. 경은 나를 믿으라. 내가 어찌 식언(食言)을 하겠는가. 더구나 한심한 일이 더욱 심한데 이런 때에 갑자기 가버리니, 참으로 마음이 답답하다. 경은 모쪼록 나의 지극한 성의를 몸받아,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성안에 들어와 그길로 즉시 조정에 나오도록 하라."

 

11월 21일 계묘

정창순(鄭昌順)을 수어사로 삼았다.

 

춘당대에 나아가 초계 문신과 선전관들의 사강(射講)을 거행하였다. 정언 유한우가 아뢰기를,
"우리 성상은 하늘이 내신 자질로서 나날이 새로워지는 공부를 더하여, 사물의 명칭과 형상·단위와 같은 미세한 것과 문서와 회계를 처리하는 잗단일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명철하게 통촉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근심하고 애쓰는 것이 너무 지나치고 영특한 기운이 너무 드러나며, 일을 도모하는 데에 예리하지만 장구하게 먼 앞날까지 구상하는 방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성과를 단기간에 이루기에 급급하다 보니, 간혹 몰아부치거나 허술히 처리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전하의 신하들은 오직 분주히 애쓰는 것을 공손한 것으로 여기고, 명령을 받들고 말씀을 따르는 것을 공경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심지어 일반 사무에 이르기까지 모두 총괄하고 수많은 정사를 혼자서 처리하시느라고 정신을 기르고 덕을 수양하는 도리를 이미 잃은 데다가, 임금은 한가하고 신하는 애써야 한다는 원칙에도 어긋났습니다. 이제부터는 시종 일관하는 학문에 더욱 힘쓰고 덕을 함양하는 공부에 더욱 노력하여, 정화(精華)를 수렴하고 근본만을 다스린다면, 장차 성려(聖慮)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표준을 세우는 정치를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선비는 나라의 원기(元氣)이고 태학은 어진 선비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유학을 숭상하고 문(文)을 높이 여기는 교화가 이처럼 훌륭한데, 인재를 육성하여 성취시키는 방도에 있어서는 도리어 문신들을 초계(抄啓)하여 강론을 장려하는 것만도 못하니, 이 어찌 성세의 궐전(闕典)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매월 순두(旬頭)에 하는 전강(殿講) 때에 글을 읽지 않은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을 끌어들여 그저 규례대로 제비를 뽑게 하는 것은 성실한 도리가 매우 부족한 것입니다.
청컨대 미리 거재 유생들을 지휘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원(自願)에 따라 하나의 경서를 통습(通習)하게 하고, 관학의 재임(齋任)과 더불어 똑같은 규례로 진강하게 함으로써, 과업을 장려하고 성과를 이루도록 책할 바탕을 삼으소서."
하니, 따랐다. 우의정 김종수가 아뢰기를,
"정언 유한우가 계사(啓辭)를 모두 말한 뒤에 전하께서 말을 하도록 인도하였으나, 말을 하지 못하고 다만 황공하다고만 하였으니, 그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사도 아니고 피혐도 아니고 잡다한 말을 뒤섞어 놓은 것부터가 이미 대간으로서의 체면을 잃었다. 그리고 상주하는 말로 끝마무리를 한 것은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일이다. 문비(問備)하는 정도로만 넘길 일이 아니니, 파직하라."
하였다.

 

11월 22일 갑진

반유(泮儒)인 김종화(金鍾和)·성임(成稔)·이인묵(李寅默) 등 9인이 원소(園所)를 옮길 때의 복제(服制)에 대하여 논하기를,
"예가(禮家)에서는 본생친(本生親)에 대하여 면례(緬禮)할 때의 복(服)이 없다."
하였으므로 신봉조(申鳳朝)와 한계중(韓啓重)이 종화 등을 책망하니, 종화가 또 봉조를 비난하면서 그의 선조까지 들먹였다. 이에 동의금부사 신응현(申應顯)이 소를 올려 무함당한 것을 해명한다고 하자, 상이 물리치면서 이르기를,
"이런 일을 하필 시끄럽게 조정에 올리는가."
하였다. 후에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무 해에 상복(喪服) 제도를 마련하지 못한 것을 매우 가슴 아프게 여기고 있다. 이번에 의로운 일을 한 것은 사실 추복(追服)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나의 심정을 여러 신하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였다.

 

조원진(曺遠振)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23일 을사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를 거행하였다.

 

승지 조연덕(趙衍德) 등이 아뢰기를,
"관학의 유생들이 글을 봉해가지고 홍마목(紅馬木) 밖에 왔다가 수문장(守門將)에게 저지당하여 나아오지 못하고 궐문에 엎드려 있으면서 또 들어와서 상소문을 올리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금번 이 유생들의 상소가 어떤 내용인지를 알 수는 없으나, 상소문이 궐문 밖에 방치되어 있고 유생들이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으니, 그 정상이 쓸쓸하여 듣기에 놀라운 일입니다. 지난날의 비상한 하교를 먼저 환수하시고, 유생들이 이미 낸 글을 즉시 받아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소의 내용이 어떻든지 간에, 이미 금부 낭관과 형조 낭관이 수직하여 방금(防禁)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무슨 까닭에 와서 엎드리는 것을 금하지 않았단 말인가. 방금 조사하여 상주한 것을 듣건대, 해당 낭관들이 모두 간 곳이 없다고 하니 어찌 이러한 기강이 있는가. 당시에 아직 임명하지 않은 사람과 당직을 제외한 금부·형조 낭관들을, 주모자와 추종자를 분간하여 엄하게 처벌해야 할 것이다. 먼저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태학의 유생들이 권당(捲堂)을 하고서 소회(所懷)를 써서 올리기를,
"저희의 상소가 겨우 대궐에 이르렀으나, 정성을 쏟아 적은 글은 끝내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 등이 성명(聖明)에게 기대하던 것이겠습니까. 비록 상소문은 불에 태워버릴 수 있겠지만 의리는 태워버릴 수 없고, 종이는 재가 될 수 있겠으나 마음은 재가 될 수 없습니다. 신 등이 여기에서 어찌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사람이 보잘것 없고 소원한 처지여서 성의가 전하에게 미덥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어찌 감히 태연히 입당(入堂)할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금지하라고 내린 명령이 있으니 원래의 상소문은 불에 태워버리고, 소회를 쓴 글은 도로 돌려주도록 하라. 성묘(聖廟)는 사체가 지극히 중하니 재실을 오래 비워 두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금령은 금령이고 체면은 체면이니, 즉시 전하여 들어가도록 하라."
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1월 25일 정미

형조 판서 심이지(沈頤之)를 체직시키고, 이문원(李文源)을 임명하였다.

 

윤숙(尹塾)을 특별히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전보(轉補)하였다. 인의(引義)하여 소명을 어기고 지레 강외(江外)로 나갔기 때문이었다.

 

판의금부사 정창순(鄭昌順)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본부의 도사(都事) 홍격(洪格)이 역적 이재간(李在簡)을 압송해 가다가 겨우 강건너에 이르자마자 지레 죽게 하였습니다. 그간의 사정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도신(道臣)의 장계 내용으로 보면, 그는 원래 앞서 갔고 죄인은 머뭇거리면서 유배지에 가는 속도를 마음내키는 대로 하였으며, 약물을 먹는 데 대해서도 전혀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죄인이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뒤쫓아 왔으니, 압송해 가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정상은 은근히 비호한 감이 있고, 사안은 후일의 폐단과 관계됩니다. 대질을 시켰으나 순전히 둘러대기만 하므로 일반적인 신문으로는 자복을 받아낼 수 없습니다. 형신(刑訊)하여 내막을 알아내고 법대로 처결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변변치 못한 탓에 빚어진 일이고 달리 숨긴 사실은 없으니, 형장을 가하면서 자복받을 일이 별로 없다. 청한 것을 윤허하지 않는다. 뒷날을 징계하는 도리에서 조율(照律)하여 정배(定配)하는 법을 적용하라."
하였다.

 

11월 26일 무신

희정당에 나아가 초계 문신의 회강(會講)을 거행하였다.

 

11월 27일 기유

영우원(永祐園)의 옛 터에 배봉진(拜峰鎭)을 설치하였다. 하교하기를,
"옛 원은 30년 가까이 모셔 왔던 곳인데, 옮겨 모신 뒤로 텅빈 곳이 되고 말았으니 공경하는 바에 흠이 될 뿐아니라 또한 매우 무엄한 일이다. 옛 장릉(長陵)을 모셨던 곳에, 처음에는 비록 금양(禁養)을 하였으나, 그후 대신의 주청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경작하도록 하였으며, 근래에는 그대로 둔전(屯田)을 만들었다. 더구나 옛 원을 모셨던 곳은 본래 내원(內苑) 구역 내의 금양(禁養)하던 곳이니, 일의 체면이 파주(坡州)에 비해서 더욱 구별된다.
이제 마땅히 정식(定式)을 두어, 단속하고 보호하는 방도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동구(洞口) 밖에는 예전대로 금양을 하고, 전토(田土)는 이전대로 경작하며, 혈(穴) 앞의 가까운 곳은 별도로 수치(修治)를 하여 밭을 일구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돌보아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별도로 관장(官長) 1인을 두되, 주봉(主峰)의 이름이 ‘배봉(拜峰)’인 만큼 배봉  별장(拜峰別將)이라고 칭하라. 그 제도는 대략 성북 둔전(城北屯田)의 예를 모방하여 차출하고, 또한 임진(臨津)·장단(長湍) 두 진(鎭)의 예를 적용하라."
하였다.

 

김문순(金文淳)을 예조 판서로, 변득양(邊得讓)을 공조 판서로, 이명식(李命植)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1월 28일 경술

서북(西北)의 도백(道伯)과 북평사(北評事)에게 유시하였다.
"요즘 밤낮으로 걱정스러운 것은 서도와 북도의 백성에 관한 일이다. 이런 때에 무마하고 안정시키는 방도는, 방백과 수령들이 근심을 나누어 맡는 뜻을 잘 받들고 어떻게 힘과 마음을 다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고을에는 착한 정치를 하는 수령이 없고 백성들에게는 신음하는 걱정이 있어, 보이는 것마다 재해이고 떠도는 소문이 귀에 들어오니, 이는 도백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허다한 수령들 중에는 틀림없이 낫고 못한 차이가 있을 터인데, 나은 자를 장려하고 못한 자를 다그치는 것이 너무나 형편없다. 가장 좋지 못한 사람 이외에는 수시로 채찍질을 하여 배가(倍加)의 노력을 하게 한다면, 효과를 거두기가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서 할 일이겠는가. 그런데도 모두 그들에게 내맡겨 밤낮으로 걱정을 끼치니, 서북도의 도백의 일이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엄하게 신칙하여 행회(行會)하게 하라.
암행 어사가 나갈 때에 종적이 드러날 것을 염려하여, 몰래 갔다가 몰래 오는 것에 대하여 일찍이 미리 법령을 보였으나, 여러 고을에서 정신을 차리는 효과를 볼 수가 없다. 이것 또한 도백들이 제때에 선포하지 않은 소치이다. 관북(關北)의 일로 말하면, 전적으로 평사(評事)에게 맡기고 있다. 우선 현재의 민정(民情)으로부터 장래의 민세(民勢)에 이르기까지, 일체 지난해 암행 어사의 규례대로 연이어 장계를 올려 북쪽에 대한 나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도록 하라."

 

영중추부사 김치인(金致仁)이 차자를 올려 치사(致仕)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병세가 이처럼 위독하다는 것을 차자를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요청한 봉조하(奉朝賀)의 옛 직함을 그대로 들어주기 어렵게 여기는 데에는 의도가 있어서이니, 경은 모쪼록 양해하기 바란다."
하였다.

 

11월 29일 신해

이조 판서 오재순(吳載純)을 체직시키고 홍양호(洪良浩)를 대임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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