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임자
윤대(輪對)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조윤대(曺允大)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2일 계축
고(故) 대사헌 한광조(韓光肇)에게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상이 그의 집에 아직껏 시호가 내리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전랑(銓郞)을 파견하여 시호를 주게 하고서, 하교하기를,
"특별한 규례를 적용하려고, 시호를 의논할 때에 추가 증직(贈職)하는 전례에 구애하지 않았는데, 이제 시호를 주는 날을 맞아 어찌 특별히 표창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벼슬을 증직하고 사제(賜祭)하라고 명하였다.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정범조(丁範祖)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상이 완백(完伯)079) 의 군사 훈련에 대한 장계를 보고, 하교하기를,
"이른바 순아병(巡牙兵)이 2천여 명에 불과하여, 매 읍(邑)에 있는 수가 10명 안팎이고 많은 곳이라도 역시 1백 명 안팎이며, 이 인원수를 넘는 곳은 매우 드물다고 하니, 금번에 29개 읍(邑)의 수령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참가하였다는 것은 의의가 없을 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병영의 장계를 보건대, 여러 수령들이 훈련에 참가하는 것이 또한 한두 곳이 아니라고 하니, 갑자기 군사를 쓸 일이라도 있게 되면 수령의 한몸으로 어떻게 허다한 곳에 나누어 나갈 수 있겠는가. 역시 될 수 없는 일에 속한다. 평시에도 벼슬자리를 비워 민읍(民邑)에 끼치는 폐단이 적지 아니한데, 유사시에 지휘한다는 것이 어찌 말이나 되겠는가. 이 도가 이와 같으니 다른 도도 알 만하다. 수령이 순영·병영의 군사 훈련에 모두 참가하는 규례에 대해 묘당으로 하여금 여러 도의 규례를 참고해 가지고 사리를 따져 계하(啓下)하도록 하고, 아울러 즉시 행회(行會)하여 각기 이제부터 법식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12월 3일 갑인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 우의정 김종수(金鍾秀), 행 사직 정민시(鄭民始)를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달 이날이 어언 10여 년이 되었는데, 지난 때를 떠올리면 어찌 소름끼치지 않겠는가. 경들 몇 사람을 내가 보전해주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근래에 전하의 뜻이 널리 포섭하여 죄명을 씻어주고 다함께 대도(大道)에 이르는 데에 있으니, 진정 구구하게 흠앙하는 마음을 누를 수 없습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어렵던 시절을 끝까지 잊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민시에게 이르기를,
"경은 언제 서울 집에 들어오겠는가?"
하니, 민시가 아뢰기를,
"신이 오늘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성은(聖恩)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죽건 살건 편하건 위험하건 삼가 명령대로만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신의 어미가 매우 늙어, 장차 따뜻한 봄이 되면 함께 성안에 들어오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자(庶子) 출신을 전에 좌·우윤(左右尹)에 제수한 전례가 있는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이전에는 이런 전례가 없습니다. 서자 출신 가운데 윤밀(尹謐)의 처지나 모든 것이 동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으나, 장령에 통망(通望)되는데 불과하였습니다. 근래에 서자 출신 가운데 간혹 군수(郡守)나 부사(府使)에 제수된 사람이 있으며 또 낭관에 제수된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더없이 큰 은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종수가 또 아뢰기를,
"지난달에 춘당대에 친히 임하시어 시사(試射)할 때에, 기추기(騎蒭技)080) 가 점점 예전만 못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이 ‘고(故) 지중추부사 송립(宋岦)은 80세 후에 춘당대의 기추(騎蒭)에서 다섯 발을 명중시켰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송립은 벼슬을 지낸 경력으로 보아 법적으로 마땅히 시호를 받아야 할 것인데, 죽은 지 1백 년이 지난 사람은 품지(稟旨)한 후에야 비로소 시호를 준다는 새로운 법령이 있기 때문에 해조에서 시장(諡狀)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예에 의거하여 시호를 주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따랐다. 종수가 아뢰기를,
"이조 판서에 추증한 한광조(韓光肇)에게 시호를 주라고 처음 명하실 때에, 아경(亞卿)에게 시호를 내리는 것은 특수한 규례에 해롭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미 정경(正卿)에 증직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이후에는 무릇 특별히 사시(賜諡)하는 데에 관계되는 경우, 모두 정경을 추증한 다음에 시호를 내리도록 옛법을 수정해야 하겠습니다. 이전에 정경에 추증되지 못하고 시호를 받은 자가 있으면, 가증(加贈)을 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사리에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12월 4일 을묘
고(故) 판부사 조경(趙璥)에게 치제(致祭)하였다. 종상(終祥)을 하루 앞둔 시점이었으므로, 특별히 각신을 보내어 치제한 것이다.
이문원(李文源)을 판의금부사로, 강세황(姜世晃)을 한성부 판윤으로, 김희(金憙)를 이조 참판으로, 이시수(李時秀)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비변사가, 병선(兵船)·방선(防船)에 차견된 관원이 조사한 것을 아뢰니, 하교하기를,
"만약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 설사 진휼청에서 쌀을 지급하고 호조에서 솜옷을 지급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이니, 이대로 잘 알고 한 명의 아전이나 한 명의 군졸도 배고프다고 아우성치거나 춥다고 소리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어젯밤에 호서(湖西)의 배들이 민폐를 끼친다는 것을 듣고 병중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곤수(閫帥)와 그 가운데 어질지 못한 수령이나 변장(邊將)을 경은 등한히 보아 넘기려고 하는가.
대체로 공조에서 하는 일은 실로 힘이 부칠 염려가 있는데, 공조 판서를 언제나 문관 출신 재상이 하고 있다. 이번이나 이 다음이나를 막론하고 주사 대장(舟師大將)의 전례를 적용하여, 수가(隨駕)하는 영문(營門)이나 관내의 영문 중에서 무장(武將) 1 원(員)을 따로 명색을 정하고서 전적으로 담당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경 등의 생각은 어떠한가? 성가퀴를 분담해 주는 것은 경오년에 시작되었고, 궁성(宮城)을 분담해 주는 것과 개천을 분담해 주는 것은 경진년에 시작되었으니, 뱃길을 군문(軍門)에서 주관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다. 근래에 군문이 나라에 이로운 것은 하나도 없고, 한갓 대장으로 하여금 제 배나 불리고 사정(私情)만 행하게 할 따름이니, 이러한 국역(國役)에 사용한들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나루터를 관할하는 것은, 승(承)을 별장(別將)으로 고친 후에 무장(武將)에게 넘겨 주었으니, 더욱 근거할 만한 것이 있다. 경 등은 근거할 만한 전례를 여러모로 논의해 가지고 사리를 따져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종수가 아뢰기를,
"부교(浮橋)를 1년에 한 번 조성하는 것은 정해진 규례이고, 재력과 목재도 이미 떼어주었으니 마땅히 주관하는 아문(衙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교사(舟橋司)라고 부르면서 준천사(濬川司)에 합부(合付)하는 동시에, 본사(本司)의 유사 당상으로 하여금 겸대하여 관할, 거행하게 하며, 도제조 이하 예겸 당상도 역시 준천사의 겸임 당상이 똑같이 관할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때 와서 비변사가 아뢰기를,
"주교사의 도제조 3원(員)은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예겸하고, 제조 6원은 준천사의 주관 당상 및 병조 판서, 한성부 판윤, 훈련 대장, 금위 대장, 어영 대장이 겸임하고, 낭청 3원은 병조의 일군 색낭청(一軍色郞廳), 한성부의 도로 교량 차지 낭청(道路橋粱次知郞廳), 세 군문의 무관 종사관(從事官) 중에서 1인을 차임하여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영남(嶺南)의 별회곡(別會穀) 중에서 대미(大米) 2천 석(石)에 한하여, 감모조(減耗條)로 해마다 떼어주어 주교사의 비용으로 삼게 하소서."
하였다.
12월 6일 정사
서유린(徐有隣)을 형조 판서로, 이문원(李文源)을 한성부 판윤으로, 서정수(徐鼎修)를 이조 참판으로, 정범조(丁範祖)를 이조 참의로, 이경일(李敬一)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7일 무오
종묘와 경모궁에 전배(展拜)하였다. 제사 그릇과 희생을 살펴보고 친히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에게 치제(致祭)하였다. 이날이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례 당상(定例堂上) 이문원(李文源)이 주청하기를,
"호위 구역 안의 별운검(別雲劒) 이하 시위(侍衛)하는 신하들이 좌견(左牽)하는 것을, 옛 규례를 회복하여 금하도록 신칙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진(陣) 안의 당상 장관(將官)들이 좌견을 한다는 것은, 요즘에야 비로소 듣고 알았다. 견마(牽馬)하는 일도 오히려 법에 없는 일인데 하물며 좌견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은 본래부터 법을 어긴 것으로서, 금하도록 신칙해야지 옛 규례를 복구하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병조 판서로부터 훈련 대장 이하 각 영문의 당상 장관에 이르기까지 진(陣) 안에서 좌견을 하는 것은, 조정의 명령을 기다릴 것 없이 스스로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이를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8일 기미
대신(大臣), 원행 정례 당상관(園幸定例堂上官),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소견하였다. 상이 강계 부사 안정현(安廷玹)에게 이르기를,
"강계는 본디부터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졌는데, 근년 이래로 폐단이 누적되어 고질로 된데다가 또 흉년까지 만났으니, 조정에서 밤낮으로 걱정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모쪼록 마음을 다하여 봉직(奉職)하여 특별히 선발한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삼(蔘)에 대한 정사도 백성들의 고통에 속하는데, 이런 흉년을 당하여 어찌 정해진 공물(貢物)이라는 이유로, 감면하여 돌봐주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별히 기한을 물려줌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어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이다. 경 등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채제공·서유린 등이 모두 일의 체모로 보아 섣불리 논의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시적으로 기한을 물려준들 해가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고, 하교하기를,
"강계의 민사(民事)가 이처럼 마음에 걸리는데, 고을의 수령을 아무리 골라서 보낸들 공부(貢賦)와 요역(徭役)을 덜어주고 돌봐주지 않는다면, 이 어찌 실속을 요구하는 정사가 되겠는가.
본부 백성들의 가장 심한 고통은 삼에 대한 정사인데, 비록 풍년에 응당 바칠 것으로 말하더라도 올여름에는 이미 유례없는 장마를 겪다보니, 싹이 갓 돋아날 때와 꽃이 붉게 피었을 때와 잎이 누렇게 되었을 때의 세 번에 걸쳐 캐러 들어갔던 사람들이 빈손으로 돌아와서 심지어 연석(筵席)에서까지 언급되었다. 그런데 작년에 통신사가 가지고 가는 몫의 신삼(信蔘)은 규정 외의 공물이었다. 이제 와서 숨을 돌리게 해 주는 방도로는, 선납(先納)한 신삼을 당년조(當年條)로 넘기고, 올해 응당 바쳐야 할 몫은 내의원이나 호조나 각사를 막론하고, 특별히 기한을 물려주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 이것은 곧 백성들을 위하여 중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뜻이다. 도백에게 분부하여 강계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하도록 하라. 이후의 근만(勤慢)은 도백이 명령을 어떻게 받드는가에 달려 있으며, 간사한 행위를 금칙하고 고질적인 폐단을 제거하는 것은, 고을의 수령 한 사람에게만 달린 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으로 엄히 신칙하여 실효가 있게 하라."
하였다.
전랑(銓郞)을 청요직(淸要職)에 통망(通望)하는 규정을 다시 혁파하였다. 상이 판중추부사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지난번 전랑 망단자 중에 전에 의망(擬望)된 사람이 까닭없이 제외되었는데, 내 몹시 의혹스럽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신 등은, 매번 출세하기에 급급해 하는 것이 유행이 되다시피 하고 염치가 날로 없어지는 것을 보고, 내심 전랑과 한림에 대한 제도를 복구한 다음에야 혹시 이런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전랑에 대한 옛 제도를 다시 설치한 뒤에는 단지 다투는 단서가 나날이 심해지고 사의(私意)가 날로 자라는 것만 볼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조종조에 누차 설치하였다가 누차 혁파한 것이, 폐단의 근원을 환하게 살핀 데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관방(官方)으로 말하더라도 전랑은 극도로 신중히 고르는 후보입니다. 이 임무를 한 번 지내기만 하면, 비록 총재(冡宰)나 의정부에라도 무엇 하나 구애될 것이 없어집니다. 한 대(代)에 설령 적합한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서너 명에 불과할 뿐인데도, 무상하게 교체시키고 빈번이 새 후보를 내곤 합니다. 겨우 홍문관을 거치기 바쁘게, 대뜸 전례를 따라 돌아가면서 추천하는 자리가 되니, 최초에 설치한 의도가 어찌 그런 것이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이미 이 폐단을 잘 알고 결원이 있어도 보충하지 말게 하고, 시호를 내릴 일이 있으면 차출하고 일이 지나가면 금세 처리하곤 하시는데, 나라의 원칙을 가지고 논하자면, 아무래도 몹시 구차스럽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이런 점에 대해서는 다만 이해(利害)의 유무를 따져 한쪽으로 결판을 내야지, 혁파도 아니고 존속도 아닌 채 그냥두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서유린·정창순·심이지 등이 모두 혁파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처음부터 다시 설치하는 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단연코 알았지만, 이미 설치한 뒤에는 혁파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그대로 끌어왔다. 마침 말이 난 김에 경의 말을 들으니, 내 생각과 꼭 들어맞는다. 신중치 못하다는 혐의에 어찌 구애되겠는가. 이조의 낭관에 대하여 다시 설치했던 규정을 혁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용기(龍旗)가 존엄하고 중한 것은 산선(繖扇)과 같다. 그런데 산선을 드는 봉지(奉持)들은 충의위(忠義衛)나 사지(事知)나 다 모자와 띠를 착용하며 요록(料祿)이 있을 뿐아니라, 또 오래 근무하면 승진되는 규정이 있는 반면에, 용기를 드는 봉지는 요록이 없고 오래 근무하는 제도도 없으므로 늘 마음이 쓰인다. 연전에 서총대(瑞蔥臺)의 시사(試射)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였으나, 요록을 주는 자릿수를 정하는 일은 지금까지도 하지 못하였다. 원행 정례(園幸定例)를 반포하려고 하는데, 용기를 드는 봉지 15명을 선전관으로 하여금 금군 별장과 함께 취재(取才)하여 입격(入格)한 사람을 모두 금군에 소속시키게 하며, 표기(標旗)를 드는 봉지에 대해서도 똑같이 처리하도록 하라. 금군에 대한 구전(口傳)은, 용기를 드는 봉지의 예에 따라 통틀어 15 명으로 정원을 정하고, 금군의 일곱 개 번(番)에 나누어 소속시키어 돌아가면서 번을 서게 하되, 봉지 중에 결원이 있으면 금군 중에서 취재하여 채워넣는 것은, 또한 일산을 드는 봉지의 규례에 따르라. 합격하지 못한 사람들과 걸어가는 봉지에 대한 처리도, 해당 당상으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품지하여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용기와 표기를 드는 봉지는 성상의 하교에 따라 말을 타는 봉지 15인으로 정원수를 정하고, 금군에 일곱 개 번으로 나누어 소속시키며 결원이 나기를 기다려 차차 구전(口傳)할 것입니다. 매번 두 사람이 윤번제로 들어가서 수직할 것입니다. 구전(口傳)하는 한 가지 문제로 말하면, 원래 말을 바치고도 구전(口傳)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적체되어 있는 것이 민망하니, 이들을 분배하게 해서 피차 서로 충원시켜야 하겠습니다. 말을 바치는 문제로 말하면, 10년 이상 된 사람 중에서 가난하여 자비로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관마(官馬)를 주도록 하며, 오래 근무한 사람은 일산과 도로를 맡은 사지(事知) 아래에 소속시키고, 가장 오래 근무한 한 명을 차례에 따라 차견(差遣)할 것입니다. 15인 중에서 결원이 있을 경우, 원래의 금군 가운데서 시취(試取)하여 차정(差定)할 것입니다. 걸어가는 봉지는 외읍(外邑)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 본래 출신(出身)들의 자식들을 망정(望定)하여 군포(軍布)를 면제하고 역(役)을 지우고 있습니다. 이제 만약 역을 면제하면 장차 군포를 바쳐야 할 형편인데, 군포를 바칠 바에는 차라리 역에 응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앞으로 성(城) 안에서 거행할 때에는 말을 타는 봉지가 겸해서 행하게 하고 교외(郊外)로 거둥할 때에는 이전대로 대령(待令)하게 하며, 서총대 시사(試射)에는 갑진년의 특별 하교대로 계속 응시하도록 할 것입니다. 모두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갑(李𡊠)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시수(李時秀)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10일 신유
차대(次對)가 있었다. 대사간 이시수 등이 전계(傳啓)를 가지고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대사헌이 마땅히 먼저 피혐을 해야 할 것이다."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피혐하는 것은 작은 일이니, 먼저 합계(合啓)를 주달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사간을 체차하라."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삼사가 연석에 올랐을 때마다 성상께서는 대뜸 체차시켜 물리치고, 심지어 더없이 중한 징토(懲討)의 의논을 오랫동안 아뢰지 못하게 한 결과, 마침내 역적의 괴수로 하여금 지금까지 버젓이 살아 있게 만들었습니다. 병오년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어떻게 차마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전에 관학 유생들이 상소하여 규탄했다고 하는데, 그 이튿날 듣건대, 유생들에게 정거(停擧)를 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역시 공교롭게 맞아 떨어졌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부 도사가 아직도 홍마목 밖에 있는가? 일단 반중(泮中)에서 상소하여 규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필 대궐 밖에서 막을 것이 있는가. 애초에 향교(香橋)를 넘어서지 못하게 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 등을 다그치고 몰아부치는 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만, 유생들을 이와 같이 금속(禁束)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를 대강은 알고 있다. 그런데 선비들이 한사코 이기려고만 대드니, 예법으로 인도할 수 없다면 부득이 형벌로 경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의금부의 낭관들이 나장들을 많이 거느리고 궐문 밖에 늘어서 있는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필시 상소하는 유생들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할 일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국사(國史)에 기록되고 야사(野史)에 적혀지면,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부득이해서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신은 오늘의 유생들이 너무도 나약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신에게 반임(泮任)을 맡게 한다면, 어찌 들어오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생들이 일단 법을 어겨가며 함부로 들어온다면, 설사 묶여서 쫓겨나더라도 아까울 게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전하는 여기서 실언(失言)을 하셨습니다. 유생들이 설령 죄를 범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묶어서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생들을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할 수 없다는 의리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이 또한 부득이해서 한 말이다."
하였다. 여러 비국 당상들이 모두 앞으로 나오려고 하니, 모두 자리에 가 앉으라고 명하였다. 부교리 김계락(金啓洛) 등이 앞에 나서서 일제히 상주하기를,
"대신의 아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나온 옥당과 사헌부를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승지 김재찬(金載纘)이 아뢰기를,
"삼사 관원을 체차하라는 명은 정도에 지나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도 체차하겠다."
하였다.
정민시(鄭民始)를 형조 판서로, 조윤대(曺允大)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홍병찬(洪秉纘)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숭의전(崇義殿)을 고쳐 지었다. 하교하기를,
"전각을 설치하고 그 제사를 세습하는 것은 주(周)나라에서 삼각(三恪)081) 을 두었던 뜻을 본받고, 열성조(列聖朝)의 훌륭한 뜻을 우러러 받든 것이다. 지난 선조(先朝) 정미년에 특별히 명하여 개수(改修)하게 하였고, 그 뒤 수년 후에는 또 근시(近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이에 60주년이 되는 해에, 때마침 옛일을 이어 수리만 하고 말 수 없으니, 옛 규례대로 근시를 보내어 치제토록 하라. 이를 계기로 생각건대, 수호하는 관리를 처음에 감(監)으로 임명하였는데, 감에서 영(令)이 되고 영에서 수(守)가 되어 10년에 한 번 천전(遷轉)하였다. 선조 정미년에 역시 이것을 복구하라는 뜻으로 전조(銓曹)에 신칙하였는데, 근래에 다시 폐지하였다고 하니 이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이것 역시 경기 감영으로 하여금 근거할 만한 규례를 참고하고 해당 관청에 녹보(錄報)하여 즉시 품계를 올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1일 임술
하교하기를,
"오늘 선무사(宣武祠)에 치제(致祭)할 때에 정경(正卿)을 보내어 이 제독(李提督)의 사당과 선무사·무열사(武烈祠)에 치제토록 하라. 이날은 바로 이 제독의 생년(生年)·생월(生月)이다. 이 제독을 같이 배향(配享)한 것으로 알고 제문(祭文)을 직접 지었는데 다시 문서를 상고하니 양 경리(楊經理)와 형 상서(刑尙書) 두 신위(神位)뿐이었다. 무열사의 석 상서(石尙書) 이하 함께 배향된 여러 신위들에게도 치제하되, 제문은 역시 직접 짓겠으니 도백(道伯)을 헌관(獻官)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날 이 제사를 지내는 의도가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자손이 술잔을 올리고 뜰에는 악기를 진열하여, 높이고 보답하는 의절(儀節)을 한껏 다하고 아울러 우러나오는 충심을 담은 것이다. 내가 처음에는 직접 참가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어찌 한 번 제사를 지내면서 겉보기에만 화려하게 꾸미고 그치겠는가. 말세에 존주(尊周)라는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읽을 데가 없지만, 저 신경(神京)082) 을 바라보면 그 훌륭한 분들에 대한 생각을 더더욱 금할 수 없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실정(實政)으로는 그의 후손들을 돌보아주어 한편으로는 명(明)나라를 존중하는 생각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60주년 되는 날을 기념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이 제독의 손자인 행 부호군 이원(李源)을 발탁하여 병사(兵使)에 제수하라. 옛사람은 오히려 벽틈의 거미[蜘蛛]도 사랑하였으니 지주(蜘蛛)의 주(蛛) 자가 주(朱)와 음이 서로 같으므로 그렇게 사랑한 것이었다. 더구나 제독의 선계(先系)는 본래 우리 나라 출신인데 공의 손자가 근본을 돌이켜 우리 나라에 왔으니, 이것부터가 벌써 기이한 일이다. 연전에 북경의 저자에서 보책(譜冊)을 사다가 그의 집에 주는 한편, 신주(神主)를 만들어 모셔놓게 하였으니, 이 또한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닌가.
강세작(康世爵)의 후손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중국 출신인데도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을 영구히 사과(司果)에 임명한 고사(故事)가 있는데, 하물며 이 집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후로는 이 집의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벼슬이 없을 경우에는, 당상 이하는 품계에 따라 가설(加設)한 추함(樞啣)083) 을 주고, 당하관 이하 백도(白徒)에 이르기까지는, 사과(司果) 벼슬을 주도록 하라.
이것은 의리가 북받쳐 규정을 창시하는 것이 아니라, 감히 열조(列祖)의 훌륭하신 뜻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한 가지 일이다."
하였다.
오재순(吳載純)을 예조 판서로, 김문순(金文淳)을 형조 판서로, 조정진(趙鼎鎭)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민종현(閔鍾顯)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2월 12일 계해
이경일(李敬一)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15일 병인
일차(日次) 유생의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경외(京外)의 전최(殿最)를 뜯어 보았다. 호남(湖南)의 계본(啓本)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46명의 수령들에 대해 쓴 말이, 갑(甲)이 을(乙)과 비슷하고 을이 갑과 비슷하여, 사람의 강유(剛柔)와 치적의 우열에 대한 구별이 없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임기가 찬 운봉(雲峰)의 무관 출신 수령에 대해서 ‘중(中)’으로 평가하여 책임을 때운 것이다. 도백이 이 모양이니 조정이 어떻게 존엄하게 되고 수령들이 무엇을 꺼려하겠는가. 나약하기가 이와 같으니 통제하기를 바라기가 어렵고, 여러 고을에서 위의 감영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 폐해는 자연히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관원의 업적 평가를 중요시하는 도리로 보더라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으니, 전라 감사 윤행원(尹行元)을 파직하라."
하였고, 관동(關東)의 계본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관리의 치적을 평가하는 법이 비록 다 허물어졌지만, 일단 애들의 장난이 아닌 이상, 근 20개월이나 재임한 수령에 대하여 어찌 ‘방금 칭찬하는 것을 약간 들었다.’고 할 수 있는가. ‘방금[新]’이라는 한마디는 너무도 눈에 거슬린다. 이렇게 하고서도 업적 고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밖의 제품(題品)에도 세속에서 말하는 재담과 해학을 뒤섞었는데, 이런 부분에 대하여 늘 대부분 관대히 용서하곤 하였으므로 조정의 기강이 진작될 수가 없는 것이다. 원춘 감사(原春監司) 이도묵(李度黙)도 파직을 시키라."
하고, 두 도의 원래 계목(啓目)은 신임 도백이 도임(到任)하기를 기다려 다시 마감을 하여 보고하도록 명하였다. 제용감의 계본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이제 폄목(貶目)을 살펴보건대, 홍최영(洪最榮)의 행위는 놀랍기 그지 없다. 그와 같이 보잘것 없고 변변치 못한 음관이 어찌 감히 ‘처의(處義)’라는 두 자를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름이 외척으로 올라 있는 이상, 생사를 안 가리고 제몸을 돌보지 않으면서 벼슬이 있으면 헐떡거리며 따라가고 벼슬이 없으면 가만히 엎드려 있을 것이지, 어찌 감히 이런 당돌한 짓을 할 수 있는가. 설령 그의 교만한 마음이 없어지지 않아 예전처럼 방자하게 군다고 할지라도, 해감(該監)에는 나아가 참여하고 해조(該曹)에는 고의로 회피하였으니, 이것은 해당 어구(語句)에서 더욱이 말이 되지 않는다. 일전에 이조에서 태거(汰去)하자고 청한 초기(草記)를 보니, 수령으로서의 강론에 연거푸 세 차례나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대체로 이 사람은 그의 형처럼 순박하고 조심하지 않기에 내심 전부터 안타깝게 여겼는데, 금번의 행동에는 자못 의도가 있는 것이다. 이따위 버릇을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드러내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애초에 정배(定配)하는 법률로 감죄(勘罪)하고자 하였으나 당분간 참작을 하겠다. 홍최영을 부관(部官)과 서로 바꾸어 관리 노릇을 달게 여기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가 전최(殿最)를 열어보고, 아뢰기를,
"양덕 현감(陽德縣監) 김중섭(金重燮)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어둡다고 혐의하면서 단지 성실한 것만 좋아한다.’고 품평하였으니, 마땅히 하등에 놓아야 할 것인데 중등에 놓았습니다. 규례대로 파면시키고 내쫓으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어두운 것이 덕(德)을 누르는 얄팍한 재주보다는 나은데다가, 성실한 태도가 있다고 하였는데 성실하다는 것은 더없이 좋은 평가이다. 어찌 이것 때문에 고과를 강등할 수 있겠는가. 여러 고을의 폄어(貶語)를 공정하게 평가하건대, 간사한 자들에게 속아 넘어가서 언행을 고려하지 않은 채, 기름진 고을에 나간 문벌이 있고 세력이 있는 무관 출신 수령들에 대해서는 다 눈을 감아주고, 특별히 임명하여 먼 시골로 내려보낸 나약한 문관 출신 수령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때우고 있으니, 경 등의 일은 참으로 온당치 못하다. 양덕 현감 김중섭의 고과를 강등하는 한 가지 문제는 그대로 놔두고, 경들을 추고해야겠다."
하였다.
민태혁(閔台爀)을 전라도 관찰사로, 윤사국(尹師國)을 원춘도(原春道) 관찰사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 황해도 병마 절도사 손상룡(孫相龍)은 중도에서 자기의 친한 비장(裨將)을 시켜 비밀 병부(兵符)를 대신 바치게 하였습니다. 부신(符信)을 받은 후에는 죽으나 사나 몸에 차고 다니는 것이 도리상 당연한 일인데, 장수가 전에 없는 규례를 새로 만들어냈으니 나라의 체모를 손상하였을 뿐 아니라 군율에도 관계되는 일입니다. 예사롭게 처리해서는 안 되니, 먼 변방에 충군(充軍)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병부를 바친 것이 비록 전례에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충군(充軍)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한 것 같다. 대신 바친 해당 비장을 유사 당상으로 하여금 엄히 신문하여 공술(供述)을 받은 다음, 다시 율명(律名)을 정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전통편(大典通編)》의 ‘비밀 병부를 친히 바치는 조항[密符親納條]’에는, 명을 준행하지 않은 자가 정승이나 재상인 경우에는 중하게 추고하고, 통정 대부인 경우에는 금부에서 추문한다는 조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병사나 수사를 충군율(充軍律)로 감죄(勘罪)한 데 대하여, 전례를 미처 널리 조사하지는 못하였으나, 지난 병신년 선조(先朝)의 하교로, 훈련 대장 이장오(李章吾)가 교동(喬桐)에 충군되었습니다. 이것이 특교(特敎)였으므로 감히 전례로 끌어대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충군을 하는 한 가지 문제는 물론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수(武帥)가 1백 리(里) 밖에서 대신 바치게 한 것은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일인 만큼, 《대전통편》에 실려 있는 대로 엄하게 추고하거나 금부에서 추문하는 법조문만을 적용하는 것은, 법강(法綱)을 존중하고 군율(軍律)을 중시하는 도리가 아닐 듯하니, 우선 삭직을 시키고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심문한 다음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2월 16일 정묘
유생의 제술 시험을 행하였다. 윤영의(尹永儀)가 수석을 차지하였다. 시권(試券)에 써서 내리기를,
"10년 전에 남성(南城)에서 발방(拔榜)한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이복윤(李福潤)이 명절날에 지은 글을 특별히 합격시킨 것이 꼭 들어맞는 전례라고 말할 만하다. 더구나 임금이 직접 성적을 매긴 것은 사체가 자별하니, 특별히 전시(殿試)에 응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9일 경오
하교하였다.
"올해도 다 저물어가는데 밤낮으로 마음에 걸리는 것은 북관(北關)의 민사(民事)이다. 지난번에 특별히 신칙하는 명령을 내려보냈는데, 도백이 과연 성의를 다해 무마하고 착실하게 직책을 살피는가. 수령들이 두려워하고 조심하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도백이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체로 북도는 다른 도와 달라서 길주(吉州) 이북에서는 도백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 임금의 교화가 널리 퍼질 일이란 논할 것이 못된다. 믿을 것은 오직 수령뿐인데 수령을 만약 적임자로 얻지 못하면, 그 피해는 굶주리고 있는데도 구제하지 않은 채 구렁텅이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멀거니 서서 바라보는 것보다 더 심할 것이다.
조정에서는 도내의 한두 명의 수령들이 재주를 피우며 명예를 따내려는 병통이 있다는 것을 듣고 민망히 여기고 있는데도, 도백으로 있는 자가 엄히 신칙하려 하지 않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앞으로는 이전처럼 굴지 말고 한결 더 잘해 나가도록 하라.
지난번에 민간의 정세를 상세히 장계(狀啓)하도록 하는 일을 이미 공문을 보내 평사(評事)에게 신칙하였는데 아직껏 아무런 말이 없으니, 지체시키고 홀시하는 정도가 심하다.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신칙하도록 하라. 북관의 민사를 평사에게 물은 것은 그가 가까이서 보고 듣는 것이 도백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암행 어사와 다른 점이 있고 한 도를 통틀어 구제하는 것과도 다른 이상, 열읍(列邑)을 오가면서 위아래를 두루 살피자면 반드시 역마를 대고 음식을 제공하느라 도리어 민읍(民邑)에 폐단을 끼치게 될 뿐 아니라, 또 거기에 드는 비용이면 또 얼마나 되는 기민(饑民)들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리로 보아 명백한 것이니, 도백과 평사로 하여금 잘 알고 편의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이조승(李祖承)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20일 신미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이조 판서는 홍양호(洪良浩), 참판 민종현(閔鍾顯), 참의 이조승(李祖承), 병조 판서 김상집(金尙集)이었다.】 홍억(洪檍)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정운(李鼎運)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형조의 옥안(獄案)을 판하(判下)하였다. 하교하기를,
"근래에 본조가 사형 죄수의 옥안에 대해서 등한시하고 있다. 한 달에 여섯 번씩 심문하는 규정에 대한 것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한 달에 한 번 실시하는 심문조차도 하지 않고 있으니, 이러한 형조를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이렇게 하고서야 외방에서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심문하고 규정된 차수대로 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금하겠는가. 이후로는 월말에 녹계(錄啓)할 때 이달에 몇 차례 심문하였는가를 죄인의 이름 아래에 적을 것이며, 혹시 규정된 세 차례의 심문을 하지 못했을 경우, 해당 당상은 추고할 것을 청하고 해당 낭청은 나추(拿推)를 청하라. 그리고 해방(該房)에서는 이것을 고사(故事)에 기재하여 옥관(獄官)들의 게으른 습성을 징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1일 임신
윤대(輪對)가 있었다.
12월 22일 계유
차대(次對)가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두 대신이 마침 연석에 함께 올라왔으므로 내가 말하려고 한다. 지난번 이판(吏判)·호판(戶判)을 천망(薦望)할 때 우상은 사사로이 이기려고 하는 점이 없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기력이 있고 재주도 있지만, 어쨌든 상소 내용에 과연 그릇을 깨뜨릴까봐 쥐를 치지 못한다는 혐의가 있었다. 처음의 상소는 비록 별다른 생각이 없었더라도 두 번째의 상소는 고의로 범한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 일을 중시하고 그 말을 신중히 하는 도리상, 이렇게 하지 말아야 했을 것이다."
하니, 우의정 김종수가 아뢰기를,
"윤시동(尹蓍東)이 상소하기 이전에 이미 두 사람의 상소가 있었는데, 상께서는 또 별다른 생각이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호판을 새로 추천하고 전장(銓長)을 다시 의망한 것으로 말하면, 신이 과연 잘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은 윤시동에 대해서 원래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없습니다. 일개 윤시동을 제거한다고 해서 신에게 이로울 게 뭐가 있기에 한사코 그 사람의 앞길을 막으려고 나서겠습니까. 그의 상소에서 ‘장고가(掌故家)의 문적(文蹟)에서 얻어 보았다.’고 하였는데, 장고가가 전하는 문서에 4, 5 자만을 써두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은 이 일에 대해서 개탄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4, 5 자만을 적어 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을 만들 때에 ‘장고가의 문적’이라고 한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는가. 나는 이미 그에게 딴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볍게 귀양을 보냈다가 바로 용서를 했던 것이다. 만약 치우친 논의로 다투었다면, 임금에게 극력 항거한다는 지목을 면할 수 없을 것이고, 또한 딴 생각이 없는 것으로 논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였다. 종수가 아뢰기를,
"그가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함부로 쓴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시동에게는 사실 죄가 없고 모두 경 때문에 빚어진 허물이다. 다시 의망한 일로 말하면, 또한 어찌 지레 앞질러 한 것이 아니겠는가. 두 번째의 상소는 경이 보았다고 생각되는데, 어째서 그만두도록 권하지 않았는가. 이런 점에 대해서 어찌 서로 신중히 의논하지 않았는가."
하고, 이어 제공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윤시동의 죄가 아니다. 바로 사람들이 그만두도록 말리지 못한 탓이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신은 이미 소식이 서로 멀어졌으니, 무슨 수로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12월 23일 갑술
우의정 김종수가, 포도청의 포교가 정원의 하인에게 구타당한 일을 연석에서 아뢰면서, 조사해서 다스리기를 청하니, 포도청에 명하여 조사하라고 하였다. 포도청이 아뢰기를,
"포도청의 군교 윤재(尹再) 등이 우의정 집에 갔더니, 어떤 사람이 사랑(舍廊)에 앉아 있으면서 얻어맞게 된 사실을 묻고는, 만약 자기 말을 들으면 대신이 응당 연석에서 아뢸 것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로 우의정 첩의 아비라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처럼 보잘것 없이 천한 자의 더럽고 고약한 말을 나에게까지 아뢰다니, 자질구레하고 수치스럽기 짝이 없다. 이랬건저랬건을 막론하고, 그의 죄상은 가볍지 않은 면이 있으니, 법사(法司)에 이송하여 엄하게 형장(刑杖)을 치고 정배(定配)를 하여 여러 포교(捕校)들을 징계하라. 여러 포교들은 동정(同情)한 자취가 별로 없는데다가, 불러 오고 잡으러 가고 하느라 그들이 고통받고 시달린 상황을 알 만하다. 그들 역시 백성이니, 모두 분간(分揀)하여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종수가, 연석에서 아뢴 것을 스스로 허망(虛妄)한 것이었다고 돌리고 대명(待命)을 하니, 하교하기를,
"경이 손댄 일이 도리를 지키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나는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어제 연석에서 은미하게 내비치는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여 정말인가 보다고 여겼는데, 이제 포청에서 조사하여 상주한 것을 보건대, 비단 이 문제의 마디마디가 허망할 뿐 아니라 말이 귀착되는 데가 있으므로, 내가 대신 매우 수치스럽다. 꼬치꼬치 말하자면 한갓 예의로 대우하는 본의(本意)나 손상시킬 따름이다. 경은 대명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부교(浮橋)를 철거하게 되었으므로 여러 경재(卿宰)와 장신(將臣)들이 다리 위에다 음악을 벌였다. 이에 사녀(士女)들이 떼 지어 모여들었는데, 포교와 정원의 하인이 술에 취하여 서로 실랑이를 벌인 것을 종수가 잘못 듣고 상주한 것이었다.
12월 24일 을해
관동(關東)의 1백세 된 노인에게, 정해진 규칙과 격식대로 중추부 직함을 주라고 명하였다.
12월 25일 병자
병조가 아뢰기를,
"돈화문(敦化門) 서쪽 기둥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글이 나붙었는데, 글의 내용은 바로 낭천(狼川) 백성이 고을 수령을 원망하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백성들의 풍습이 예전같지 아니하여 이처럼 간사한 짓을 하는 것이다. 수령의 치적이 어떠한가는 막론하고 이처럼 간사한 백성을 만약 법으로 처결하지 않는다면 법을 어디에다 쓰겠는가. 잡아서 해도(該道)에 보내어 죄를 처결하게 하고, 이를 계기로 규정을 정하라. 이후로는 이와 같은 글을 풀로 붙였건 땅에 흘렸건 간에 수문장이나 순찰하는 영장이 보는 즉시 불에 태워버리고, 아예 와서 보고하지 말게 하라. 당상과 장신들도 역시 번거롭게 상주하지 말라."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이조원(李祖源)이 치계하기를,
"함양(咸陽)에서 나라 곡식을 축낸 것이 3만 7천여 석이나 되는데, 그것은 병오년의 부사 이득준(李得駿)과 정미년의 부사 장집소(張集紹)와 무신년의 군수 김노악(金魯岳) 등이, 그대로 덮어둔 채 한갓 빈 장부만 끼고 있었던 탓입니다. 유사로 하여금 품지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본군의 환곡 폐단에 대해서는 일찍이 들은 바이지만, 한 읍(邑)에서 3만 석이나 축냈으니 이것이 어찌 몇몇 수령들이 살피지 않은 탓이겠는가. 그러니 이른바 ‘현고(現告)’라는 것을 꼭 믿을 것이 못 된다. 받아낼 수 없는 것과 받아낼 수 있는 것을 도백으로 하여금 연도별로 구별하여 다시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조정에서 환곡의 많은 폐단을 몹시 걱정하여 모곡(耗穀)에 해당하는 몫을 모조리 내파는 것을 절반으로 만든 것은, 백성들을 위하여 폐단을 없애려는 데서 나온 조치로서, 조정이 명령을 선포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건만 이 수령이 부임한 지 반년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감영에 보고하였으니, 그가 덮어두고 있은 죄는 도리어 이전의 여러 수령들보다도 더 심하다. 이 고을이 이와 같으니 다른 고을들도 알 만하다. 당해 수령 김사석(金思䄷)을 우선 파직시키고 후에 잡아들임으로써, 한편으로는 조정의 명령을 미덥게 하고 한편으로는 민폐를 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의행(李義行)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성연(洪聖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26일 정축
하교하기를,
"영남에 곡식이 많은 폐단을 조정에서 이미 깊이 헤아리고 누차에 걸쳐 ‘많은 것을 덜어내어 모자란 데에다 보태주라.’는 내용으로 묘당에 신칙하여 말을 만들어 행회(行會)하게 하였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백성들의 폐해가 어느 정도 제거되고 창고도 충실해졌으리라고 여겼는데, 어제의 함양 일로 보건대, 감영과 고을들이 여전히 마음을 다해 바로잡고 있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것이 어찌 백성들을 위해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는 정사가, 도리어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단서로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상주(尙州) 역시 그렇다고 하기에 번(番)들러 올라온 향군(鄕軍)이 마침 그 고을에서 올라올 차례였으므로 폐단에 대해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대답하는 것이 들은 것과 똑같았다. 정말 백성들에게 이로운 것이라면, 조정에서 눈앞에 드러난 것만 바로잡는다는 혐의도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상주의 누적된 폐단에 대해서는 또한 전번에 내린 칙교(飭敎)에서 이미 대략 언급까지 하였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우선 함양과 상주에서부터 호수(戶數)와 곡물 수량을 따져보고 폐단을 바로잡을 조치를 빨리 취하도록 하라. 남겨 둘 것과 팔아야 할 수효를 구별한 다음, 적어서 장문(狀聞)토록 하라.
파는 것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물지 않은 쭉정이를 가지고 상정(詳定)한 원식에만 맞추려 한다면 그 폐단이 억지로 떠맡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값을 줄이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도백이 명령을 받들 방도를 여러모로 생각하라. 그전부터 내려오는 축난 곡식을 이웃에서 거두고 친척에게서 받아내는 것에 대해서는 거북의 등에서 털을 긁어내는 것에 가까우니, 값을 줄이는 것도 역시 폐단을 끼치는 셈이 된다. 이것은 오직 도백이 자세히 따지고 세밀히 살펴서 사실대로 보고한 다음, 조정의 처분을 어떻게 듣는가에 달려 있다. 해당 관청의 관원은 비록 어려운 점이 없지 않겠지만, 조정의 명령을 믿고 백성들의 일을 중요하게 여겨, 곡식 장부에 나타난 구구한 나머지와 부족량에 대해서는, 줄곧 굳이 얽매여서는 안 될 것이다. 함양과 상주 이외의 부득불 바로잡아야 될 곳에 대해서도, 반드시 차례차례 폐단을 바로잡아 나감으로써, 영남 백성들로 하여금 생업에 안착해서 즐겁게 살아가도록 하라."
하였다.
홍수보(洪秀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호(尹㬦)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27일 무인
제릉 참봉(齊陵參奉) 이국주(李國柱)를 소견하였다. 지덕사(至德祠)에 현판을 사액(賜額)하고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제사를 받드는 후손을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제 대군(大君)의 봉사손(奉祀孫) 이국주(李國柱)가 입시한 것으로 인하여 사적을 상세히 들었다. 진안 대군(鎭安大君)의 사우(祠宇)가 충주(忠州) 땅에 있는데 가난하여 수호하지 못한다고 한다. 익안 대군(益安大君)의 집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제수(祭需)를 떼어주고 있는데 이 집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선대 임금의 뜻을 이어나가는 도리이겠는가. 사당의 봄·가을 시제(時祭) 때에 관청에서 제수를 지급하며, 수호하고 보수하는 데에도 마땅히 일정한 규정이 있어야겠다. 매년 본 고을에서 돈과 곡식을 지급할 것이며, 풍덕산(豊德山)에 있는 제위(祭位)에 대해서도 또한 적당량을 지급토록 하라.
대군은 지극한 덕과 훌륭한 행실을 지녔으나, 무덤길을 찾지 못하다가 이제 몇 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이처럼 보수하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봉사손을 제릉 참봉으로 임명하면 그 신령도 필시 반가이 여길 것이다. 어찌 슬픔을 누를 수 있겠는가. 사실을 기록한 문서가 없어서는 안 되겠으니, 본가의 근거할 만한 문적(文跡)과 금년 봄 이후 어제(御製) 및 판비(判批) 문서로부터 제식(祭式)·제품(祭品), 관청에서 지급한 물종(物種)에 이르기까지 책으로 만들되, 서문이나 발문은 경기 감사가 찬(撰)하고 깨끗이 베끼어 주인집에 주어서, 사당과 묘소에 보관하게 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영구히 준수해나갈 바탕으로 삼으라.
이와 관련하여 생각하건대, 양녕 대군(讓寧大君)의 사당에는 숙종(肅宗) 때에 ‘지덕(至德)’이라고 이름을 달았는데 효령 대군은 바로 양녕 대군의 형제로서 즉위한 이후에 한 번 치제(致祭)를 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두 대군 집의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과 지덕사(至德祠)에 선액(宣額)한 사적을, 모두 정원에서 찾아가 알아보고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양녕 대군의 봉사손 이지광(李趾光)에게 물었더니, 지덕사라는 사호(祠號)를 준 뒤에 선액(宣額)은 아직 받지 못하였고, 효령 대군의 사당에는 ‘청권(淸權)’이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봉사손인 고(故) 현감 이제붕(李齊鵬)은 이미 죽은 몸이 되었고, 그의 아들이 함창(咸昌)에서 살고 있으나 그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날짜를 가려 선액을 하되, 선액하는 날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어제(御製) 사기(祠記)도 게판(揭板)을 하라. 청권사(淸權祠)에도 같은 날 치제를 하고, 봉사손을 해조로 하여금 찾아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인릉군(仁陵君) 이재협(李在協)이 죽었다. 하교하기를,
"초계 문신(抄啓文臣) 이내현(李來鉉)의 일로 인하여 비로소 대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이 대신의 품성과 자질을 나는 칭찬한 바이고, 그를 발탁해서 수상(首相)까지 지내게 하였으니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시기하여 남을 오해하는 마음이 흉중에 없는 것을 높이 샀던 것이다. 이제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애석한 심정을 무슨 말로 다하겠는가. 근래에 비록 강교(江郊)에서 서성거렸지만 그의 벼슬은 재상이다. 그런데도 해조에서 아직껏 한마디도 보고하지 않은 것은, 사체와 뒤폐단에 크게 관계된다. 예조의 당상에게, 서용(敍用)하지 않는 법을 한시바삐 적용하라. 고(故) 인릉군의 집에 조제(吊祭)하고 치부(致賻)하는 등의 일을 규례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12월 28일 기묘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고, 지나는 길에 문희묘(文禧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들러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29일 경진
판중추부사 김익(金熤)이 차자를 올려, 먼저 제맘대로 처리한 죄를 자핵(自劾)하고, 다음에는 역적을 성토하고 복수해야 한다는 의리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며, 끝으로 원수인 역적이 아직도 살아 있는 한 차마 반열에서 어정거릴 수 없다고 하면서, 영영 물러가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오랫동안 비답을 내리지 않고 있다가 이때 와서 하교하기를,
"여러 달을 안에다 머물려 둔 것이, 어찌 공경하고 예우하는 의리를 무시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듣고자 하지 않는 뜻에서 나온 일이었다. 경은 어찌하여 이점을 이해하지 않는가. 원래의 차자를 이제 사관(史官)을 시켜 도로 전하게 하는 바이니, 경은 모쪼록 내일 반열에 참석하라."
하였다.
지충추부사 김한기(金漢耆)가 상소하기를,
"신은 가슴속에 쌓아둔 채 차마 꺼내지 못하는 말이 있는데 이에 감히 말미(末尾)에 말하겠습니다.
아, 신묘년의 한 가지 일은 신에게 있어 해명하기 어려운 문제로서, 성상의 분부가 내렸으니 어찌 감히 자기 변명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전하는 그 당시 어가(御駕)를 수행하지 않았으니 그 사실에 대해서 혹시 통촉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저 여우나 쥐와 같은 무리들은 스스로 꼬투리를 만들고 일을 꾸며, 일이 혹시 성사되지 않으면 남에게 화를 덮어씌우는 것이 본래의 수법입니다. 그 꿍꿍이야말로 참으로 교묘하고 참혹합니다. 그날 신은 바야흐로 집에 있는데 하인이 와서 고하기를, 대가(大駕)가 옛 저택으로 가고 있다고 하였고, 이어 호위하라는 명이 내렸습니다. 신은 몹시 놀라고 황송한 마음으로 문안하는 데에 급급하여, 허둥지둥 달려나갔으나 작문(作門)에서 저지를 당했습니다. 조금 후에 표신(標信)이 나와서 비로소 문안을 올리는 처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정후겸(鄭厚謙)은 벌써 먼저 문안을 올리고 물러나왔습니다. 작문의 초관(哨官)은 직책 수행을 잘하였다는 이유로 표창까지 받았으며, 신은 느닷없이 어영 대장에 특별히 임명을 받은 데다가 계속해서 훈련원을 겸하여 살피라는 명까지 있었기에 곧바로 진(陣)으로 나갔다가 이튿날 전교(傳敎)로 인하여 군복을 입고 비로소 입시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본 일이니,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에게 죄가 있기는 합니다. 신의 조카가 호위하는 까닭을 편지로 물었기 때문에 난보(爛報)를 보내주었으며, 신의 조카가 또 편지를 보내기를 ‘성상의 분부로 보건대 저 사람은 필시 죄를 면할 수 없겠는데 이것을 가지고 죄를 삼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복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천하 후세의 의혹을 풀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끝내 처분하는 지경에 이르러 전하가 묻는 일이 있게 되거든, 반드시 먼저 호위한 것이 명분이 없다고 진술한 다음, 이어 그의 평소의 죄악을 드러냄으로써 이미 벌여놓은 거사가 명분이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평소의 죄악이란 바로 신의 조카의 임진년 상소 가운데 말한 여러 문제인데, 그때 자성(慈聖)이 신에게 하교하여 진달하게 한 것도 역시 이것과 똑같은 의리입니다. 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한 데다가, 역적 후겸이 곁에 있어 누설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만 잠자코 있다가 물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와서 거슬러 생각하면, 신은 선조(先朝)를 저버리고 자성을 저버린 죄인입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신이 연전에 한 통의 상소를 한 것은 어리석고도 망령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굳힌 뜻은, 바로 군부(君父)를 위하여 무함을 해명하려는 것이었는데, 그때에 대신들과 삼사(三司)에서 신을 원수처럼 보고 흉악한 상소라고 하면서 극률(極律)에 처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심보이겠습니까. 불순한 무리들의 여론(餘論)을 대충 듣건대 ‘역적 김하재(金夏材)의 흉악한 말은 해명할 것도 없다.’고 하였는데, 만일 그것을 무함한 것이라고 하면 도리어 그 말을 인정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무함을 해명한다는 말은 민진원(閔鎭遠)에게서 나왔으니 민진원도 역시 역적이다.’고 하였는데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역적 하재의 말을 이미 무함한 것이라고 하지 않은 데다가 또 무함을 해명하는 상소를 도리어 몰아부치니, 장차 선대왕(先大王)과 전하를 어떤 지경에 놓으려는 것입니다.
비록 조태구(趙泰耉)나 유봉휘(柳鳳輝)와 같은 흉악한 무리들조차 오히려 김일경(金一鏡)을 섬에 유배할 때에 그 죄를 때늦게 다스린 것으로 자책하였는데, 고(故) 상신(相臣)은 누차 상소하여 무함을 해명하면서 이렇게 공척(攻斥)하였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상소 한 통에 대해서는 몰아내기에 급급하여 이처럼 도리에 어긋나고 터무니없는 말을 지어내어 무함을 하면서, 제딴에는 대단한 꾀로 생각하고 그것이 도리어 역적 하재와 같은 꼴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또 태구와 봉휘의 죄인으로서,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아, 신하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신하의 분수이니, 또한 다시 무엇을 한탄하겠습니까. 다만, 신이 깊이 우려하는 것은, 고 상신의 변무(辨誣)하는 상소는 단청(丹靑)처럼 뚜렷하여 말이 엄하고 의리가 바르건만, 그 말이 시행되지 않은 까닭에 흉악한 역적 잔당들이 을해년에 이르러 극에 달한 것입니다. 신의 상소는 말이 엄하고 의리가 바른데서 고 상신의 상소보다 훨씬 못한데도 또 불에 던지라고 명하셨으니, 만약 끝내 반포하지 않는다면 후일에 흉악한 무리들이 장차 무슨 괴변을 꾸며낼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전 상소까지 포함하여 즉시 반포하도록 명하여, 이 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오랑캐나 짐승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전편(全篇)이 대부분 눈에 거슬린다. 긴요치 아니한 아래 문제야 어찌 상소할 필요가 있겠는가. 대신의 차자도 오히려 돌려주었는데 더구나 이 상소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30일 신사
우의정 김종수가 상소하기를,
"신은 뜬소문을 경솔히 믿은 결과, 필경에는 조사한 일이 헛일이 되어,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지고 씻을 수 없는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아, 간사한 생각을 품고 사사로운 마음을 끼고서 위로 성상을 속이는 것은 신이 평소 매우 미워하던 바인데, 죽을 날이 가까워진 나이에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갔으니, 한평생 손을 대어 전하를 섬겨온 것이 이제 모두 헛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고 마음과 행동이 서로 어긋났으니, 바라건대 신을 법관(法官)에게 넘겨주어 신의 죄상을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나간 일은 말하지 않는 법이므로, 뉘우치는 생각도 마음속에 오래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경은 부디 안심하고 반열에 참석하라."
하였다.
이병정(李秉鼎)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선원전(璿源殿)에 전배를 하고 이문원(摛文院)에서 재숙(齋宿)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과 채제공(蔡濟恭)을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안 대군(鎭安大君)의 일을 경 등은 들었는가?"
하니, 복원이 아뢰기를,
"이것은 실로 훌륭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녕 대군(讓寧大君)의 덕행과 의리는 태백(泰伯)이나 중옹(仲雍)과 같지만, 만약 영묘(英廟)께서 온전히 보전해 준 은혜가 아니었으면 역시 어떻게 그 아름다움을 이룰 수가 있었겠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관악산(冠岳山) 제일봉(第一峯)에서 경복궁(景福宮)이 바라보입니다. 양녕 대군도 필시 여기에 올라 바라보았기 때문에 아직도 차일(遮日)을 쳤던 흔적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염주대(念主臺)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하였다.
한성부에서 백성의 수를 보고하였다.
서울에는 민호(民戶)가 4만 3천9백 29호,
인구(人口)가 모두 18만 9천 1백 53명인데, 그 중에
남자가 9만 6천 1백 69명,
여자가 9만 2천 9백 84명이다.
경기에는 민호가 15만 9천 1백 60호,
인구가 모두 64만 2천 69명인데, 그 중에
남자가 32만 4천 8백 88명,
여자가 31만 7천 1백 81명이다.
강원도는 민호가 8만 1천 8백 76호,
인구가 모두 33만 2천 2백 56명인데, 그 중에
남자가 16만 7천 3백 84명,
여자가 16만 4천 8백 72명이다.
황해도는 민호가 13만 7천 41호,
인구가 모두 56만 7천8 백 13명인데, 그 중에
남자가 30만 4천 9백 47명,
여자가 26만 2천 8백 66명이다.
충청도는 민호가 22만 1천 6백 25호,
인구가 모두 86만 8천 2백 19명인데, 그 중에
남자가 42만 7천 8백 31명,
여자가 44만 3백 88명이다.
전라도는 민호가 31만 9천 1백 60호,
인구가 모두 1백 22만 8백 4명인데, 그 중에
남자가 57만 5천 4백 85명,
여자가 64만 5천 3백 19명이다.
경상도는 민호가 36만 5천 2백 20호,
인구가 모두 1백 59만 9백 73명인데, 그 중에
남자가 72만 5천 62명,
여자가 86만 5천 9백 11명이다.
평안도는 민호가 30만 9백 44호,
인구가 모두 1백 29만 6천 44명인데, 그 중에
남자가 63만 9천 2백 29명,
여자가 65만 6천 8백 15명이다.
함경도는 민호가 12만 3천 8백 82호,
인구가 모두 69만 6천 2백 75명이데, 그 중에
남자가 34만 6천 3백 81명,
여자가 34만 9천 8백 94명이었다.
경외(京外)의 총 민호는 1백 75만 2천 8백 37호이고,
인구가 모두 7백 40만 3천 6백 6명이며,
남자가 3백 60만 7천 3백 76명,
여자가 3백 7만 6천 2백 3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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