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임오
팔도와 양도(兩都)에 윤음(綸音)을 내렸다.
"올해는 바로 원로 농민들이 말하는 바, 대풍(大豊)이 들었다는 경술년이다. 옛날 우리 성조(聖祖)들은 훌륭한 덕망과 지극한 정성이 능히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므로 시절(時節)이 좋아서 가을이면 대풍이 들었었다. 나라에는 수많은 창고에 곡식이 넘치고 들에는 주워가지 아니한 이삭들이 많았으며, 쌀 한 말의 가격이 3전(錢) 밖에 되지 않았다는 훌륭한 이야기가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내가 덕이 없다 보니, 어찌 감히 조상들이 이룩한 업적을 제대로 계승해 가고 있다고 하겠는가마는, 태평 성대가 오기를 축원하는 것은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섣달에 눈이 내리는 상서(祥瑞)와 이성(犁星)이 나타나는 길조를 기다리지 않고도, 큰 풍년이 들 것임을 정월 초에 징험할 수 있다. 그러나 시절이 길(吉)하고 풍우가 순조로운 것은 하늘이 하는 일이고, 때맞춰 갈고 씨부리며 형편에 맞게 농사를 장려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농사일에 힘쓰지 않고 가을에 추수할 수 있다는 말은 내 들어보지 못하였다. 더구나 지금 호남과 영남에는 약간 풍년이 들기는 하였으나 상처가 아직 남아 있고, 서도와 북도 지방은 거듭 흉년이 들어 쌀독과 항아리가 모두 비었다. 궁색한 살림을 소생시키고 미리 저축하는 정사는 오직 새해에 달려 있다.
아, 너희 방백과 수령들은 올해는 풍년이 들 것이라고 말하지만 말고, 내 말을 으레 하는 말이라고 여기지도 말 것이며, 농부들에게 명하여 곧 농사터에 나가서 농기구를 바삐 놀려 농사일을 대대적으로 시작하도록 하라. 농번기를 빼앗지 말고 그들을 들볶지도 말아서, 거들고 신칙하여 사람이 할 일을 다 함으로써, 하늘의 경사가 저절로 이르도록 하라. 우리 나라의 지난 경술년과 올해 경술년을 주(周)나라의 빈(豳)에서 풍년이 거듭 들었던 것과 같이 되도록 하라.
화창한 양기가 피어나고 만물이 소생하는데, 밤낮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하나 백성들의 먹을 것에 대한 문제이다. 이제 방금 첫째 신일(辛日)의 제사를 지내고 나서 다시 새 봄의 윤음을 내리는 바이니, 무릇 백성들의 어른인 나의 관리들은 힘쓰도록 하라."
하교하였다.
"올해 경술년은 바로 공 부자(孔夫子)와 주 부자(朱夫子)가 난 해이다. 성인이 태어나고 현인이 나신 옛날 경술년이 다시 돌아왔으니, 마땅히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겠다. 문묘(文廟)에 나아가 선성(先聖)을 참알(參謁)하고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들을 뽑을 것이니, 다음달 초로 날을 잡도록 하라."
하교하였다.
"천봉(遷奉)을 한 뒤에 처음으로 신정(新正)을 맞게 되니, 어린애나 다름없는 그리움이 더욱 깊어진다. 19일에 출궁(出宮)하여 생신(生辰)에 맞춰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다가 수원(水原)의 새 고을에 머무는 날에 수원 등 세 읍(邑)의 유생과 무사들에게 과거를 설행하여 시취(試取)하겠다. 이로부터 해마다 빠짐없이 원행(園幸)을 할 것이다. 갖가지 폐단을 덜어주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강구하여 정한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거행하여 털끝만큼이라도 폐단을 끼치지 않도록 경외(京外)에 신칙하라."
통명전(通明殿)에 불이 났다.
1월 2일 계미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을 소견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 등이 아뢰기를,
"통명전이 재해를 입었으므로 사람들이 놀라고 걱정을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불조심을 하지 않은 탓이다. 방(房)과 난간[軒], 옆채[翼廊]를 합해서 모두 1백여 칸이 넘는 것이, 잠깐 사이에 다 타버렸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임진년의 병화(兵火)에도 양화당(養和堂)은 우뚝 남아 있었는데, 금번에도 역시 통명전과 가까이 있는 이 양화당에 불이 옮겨붙을 뻔하다가 결국 화재를 면하였으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다. 그때의 불길은 인력(人力)으로 잡을 수가 없었던데다 설날 아침에 화재가 났다는 것은 참으로 경계심을 가질 만한 일이다."
하였다. 김익(金熤) 등이 아뢰기를,
"놀란 뒤끝에, 재계(齋戒)에 앞서 행하는 다짐[誓]을 친히 행하다가는 혹시 건강을 잃을 수도 있으니, 청컨대 대신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3일 갑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풍년을 기원하는 대제(大祭)의 재계에 앞서 다짐을 하였다.
평안도 자산부(慈山府)의 민가 1백 20호(戶)가 불탔다. 도신(道臣)이 이를 계문하니, 각별히 돌봐주고 신포(身布)와 환곡의 봉납을 중지하거나 감면해주라고 명하였다.
정민시(鄭民始)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1월 4일 을유
하교하였다.
"풍덕(豊德)에 있는 제릉(齊陵)과 후릉(厚陵), 여주(驪州)에 있는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에 행행(幸行)할 때와 온천에 행행할 때, 연로(沿路)의 각 고을에서 으레 아침 저녁의 찬공(饌供)과 주물상 등을 준비하고 있는데 선조(先朝)께서 여주에 행행하였을 때와 경오년에 온천에 행행하였을 때로부터 모두 없애도록 명하고, 서울에서 적당히 날라다가 거행하였었다. 더구나 본원(本園)에 거둥할 때에는 매사에 폐단을 모두 줄이려고 하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금번의 거둥 때부터 수원·과천 두 고을에서 준비해 오던 음식물 공급은 전부 다 없앨 것이며, 혹시라도 이를 위배(違背)하는 경우에는, 지방관과 도백이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본부(本府)는 새로 창설한 고을이어서 모든 것이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였으니, 비록 선비를 시험보이는 날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남한 산성(南漢山城)이나 송도(松都)의 규례를 적용하겠는가.
경신년의 행행 때 풍덕 부사가 과외(科外)로 공급한 일로 처분이 지엄하였다. 이것 또한 선대의 뜻을 계승하는 일단(一端)이다. 더더구나 어공(御供)조차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는데, 여러 신하들에게 사적으로 공급하는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 점을 묘당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고 해당 도백 및 부사에게 행회(行會)하도록 하라."
하교하였다.
"일전에 불을 끌 때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모여 들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애를 쓴 사람들로서 성균관의 전복(典僕)들 만한 이들이 없었다. 조정이 평상시에 돌보아준 것이 비록 자별(自別)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이런 상황을 당하여 그렇게 하였으니 그 마음씨가 더없이 갸륵하다. 반촌(泮村) 사람들에게 푸줏간에 내는 세금을 보름 동안 탕감해주고 그들의 고통과 고질적인 폐단에 대해서도 성균관 당상을 시켜 물어보아 아뢰도록 하라."
1월 6일 정해
춘당대에 나아가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경기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진안 대군(鎭安大君)의 묘소에 비석을 세웠다고 보고하니, 지방관 및 그 일을 감독한 신하들을 차등있게 표창하라고 명하였다.
1월 8일 기축
상이 감기 증세가 있으므로 풍년을 기원하는 대제(大祭)에 대신을 보내어 대리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1월 9일 경인
약원(藥院)의 세 제조를 수정당(壽靜堂)에서 소견하였다.
1월 10일 신묘
약원의 세 제조를 수정당에서 소견하였다. 도제조 채제공이 아뢰기를,
"삼가 우리 전하께서 쓰시는 이불을 보고 우러러 존경하다못해 황송하고 부끄러운 생각까지 듭니다. 우리 성상의 검박한 덕은 본디 나라 사람들이 다들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처럼 검박한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전하는 한 나라의 임금 자리에 계시어 만백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렇게도 검박함을 숭상하고 있는데 신들은 도리어 그렇지 못합니다. 일반 사람들 중에도 대부분 명주로 이불을 만든 사람들이 많은데 어찌 황송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장복(章服)에 대해서는 정결한 것을 취하지만, 조용히 거처할 때는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검박함을 숭상한다기보다도 아조(我朝)의 가법(家法)을 준수하는 것이다."
하였다.
양사가 【 대사헌 홍수보(洪秀輔), 대사간 윤호(尹㬦), 장령 이석하(李錫夏), 헌납 어석령(魚錫齡)이다.】 합계하기를,
"물고(物故)한 죄인 이재간(李在簡)은 본래 사납고 거친 본성에다가 독사 같은 독기(毒氣)까지 겸하여,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의 수법을 두둔하고 신치운(申致雲)과 심악(沈)의 심보를 물려받았습니다. 의리를 원수처럼 보고 임금을 배반하여 패거리에 목숨을 바친 것이 바로 그의 한평생 재주였습니다. 그리고 김우진(金宇鎭)·조시위(趙時偉)와 한통속이 되고 이인(李䄄)·이담(李湛)과 결탁하여, 엉큼하게 일을 꾸미고 슬그머니 배포(排布)를 한 것은, 본래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병오년 겨울에 자전(慈殿)의 언문 교서가 특별히 내렸을 때,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고 온 조정이 들끓었으니, 누군들 억울하고 통분하면서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도리어 역적의 괴수를 은근히 두둔하고 풍병(風病)이 있다는 핑계 아래 조방(朝房)에 버젓이 누워있으면서 빈청의 계사(啓事)와 정청의 호소에 끝내 한번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늦게야 한 번 올린 소는, 속셈이 교활하여 거물 괴수의 역적 행위에 대해서는 아예 일언 반구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또 우진과 시위의 흉측한 음모에 대해서도 지적을 하지 않았으니, 그 심보가 어디에 있는가는 길가는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전의 휘호(徽號)를 청하는 날에는 태연히 집에 있으면서 유독 와서 참가하지 않다가, 이튿날 견여(肩輿)를 타고 사사로이 다니는 데는 여전하였습니다. 정월(正月)에 욕의(縟儀)를 거행할 때는 또 꾀병을 부려 하반(賀班)에 참여하지 않다가 밤이 지나 탁지(度支)에 임명하자 나와서 숙사(肅謝)를 하였습니다. 불만을 품은 속심과 못되먹은 태도는, 수많은 사람들이 불을 보듯이 환히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가 패거리들과 굳게 결탁하여 그 기세가 하늘에 닿을 듯하고 세상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아 놓았으므로, 누구도 감히 어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작년에 와서 태학(太學)이 권당(捲堂)을 하였을 때에, 공의(公議)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준열한 성토(聲討)가 터져나왔습니다. 그러니 그가 만약 자그마한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응당 마음과 태도를 고치고 예전의 버릇을 개전했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신들이 연명으로 청하고 관리들이 다 함께 호소할 때에는 또 다시 전일의 짓을 되풀이하여 묵은 병을 핑계로 온종일 벌어지는 대론(大論)에 일체 회피하면서, 마치 믿는 데가 있어서 무슨 절의나 지키는 듯이 하였습니다.
정원의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멋대로 흉악한 말을 꺼내어 하교를 받들고 역적을 성토하는 대신들을 그는 도리어 사형에 처하자고 제의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다들 가슴이 섬찍하고 담이 떨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나운 천성과 독살스러운 버릇은 갈수록 더욱 심하였고, 마지막에는 또 역적 신기현(申驥顯)의 흉측한 상소까지 꾸며내어 자성(慈聖)을 무함하고 조정을 떠보았습니다.
형조에서의 공술이 일단 나오자 죄상이 모조리 드러나서, 천 번 죽이고 만 번 처단하여도 오히려 신인(神人)의 분노를 풀기가 부족하였는데, 단지 가볍게 유배시키는 죄를 적용하였고, 가는 도중에 객관에서 지레 죽어 끝까지 조사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또 다시 극악한 역적이 있어 제 스스로 죽도록 놔두고, 추후로 처자들을 처단하는 규정을 금령(禁令)에 구애되어 그냥 실시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역적 무리들에 대해서는 끝내 적용할 법이 없다는 말입니까. 민심의 분노는 더욱 끓어오르고 공의는 갈수록 격렬해지는데, 저자에 내다 죽이는 형벌을 비록 본인에게 가하지는 못하였어도, 역적의 흉악한 종자들은 천지 사이에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물고한 죄인 재간의 처자들을 처단하는 규정을 한시바삐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재간의 일을 이미 이전의 계사를 베껴내어 이렇게 가율(加律)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1월 13일 갑오
장령 김이익(金履翼)이, 우의정 김종수(金鍾秀)가 동소문(東小門)의 호군(護軍)과 부장(部將)을 묶어 간 일을 가지고 소를 올렸는데, 미처 비답을 내리기도 전에, 종수가 이익의 상소 내용을 이유로 인피를 하면서 대명(待命)하였다. 상이 도승지 김재찬(金載瓚)에게 이르기를,
"김이익 상소의 내용을 우상이 누구를 통하여 들었는가?"
하니, 재찬이 대답하기를,
"녹사(錄事)가 와서 우상의 말을 전하기를, ‘위에서 만약 상소문 내용을 들은 곳을 물으시거든, 상소문을 올린 대간의 집에서 들었다는 내용으로 대답하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장(疏章)에 비답을 내리기 전에는 감히 누설해서는 안된다는 것에 대하여, 이미 선대왕(先大王)의 수교(受敎)가 있다. ‘알려준 사람이나 들은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역률(逆律)을 적용한다.’는 지극히 엄격하고 중한 명령이, 정원의 벽에 명백히 걸려 있다. 대신이 비록 오늘의 조정을 경시하더라도 선대왕의 금석(金石) 같은 법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김이익의 상소는 입계한 지 며칠 되지만 내가 지금 조섭하는 중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읽어 보지 못하였다. 대신이 지금 갑자기 금법을 어기고 대명(待命)한다고 핑계대면서 기어코 이기려고 대드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지위와 관작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어찌 감히 이렇게까지 방자하고 무엄하단 말인가.
호군·부장에 대하여 조정에서 만약 붙잡아다가 다스릴 일이 있으면, 반드시 표신(標信)을 보내어 번(番)을 교체한 다음에야 비로소 붙잡아 오게 되어 있는데, 대신은 무슨 생각으로 제멋대로 붙잡아 가서 성문(城門)에 한나절 동안이나 지키는 사람이 없게 하였는가. 이 대신이 아무리 두렵고 무섭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홍국영(洪國榮)에게 비하면 그만 못할 듯한데 국영도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하였다. 그렇다면, 국영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근년 이래 대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내가 모두 뜻을 굽혀가며 그대로 들어주었다. 말한 것은 시행하지 않은 것이 없고, 계책은 실현시켜 주지 않은 것이 없다. 막상 그들의 세력이 형성되고 위신이 서서 대신의 자리에 이른 다음에는, 그만 도리어 임금을 멸시하고 조정과 맞서 겨루면서 기어코 명예와 잇속을 차지하고야 말려고 하니, 이러한 심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신이 일찍이 자기는 태양증(太陽症)이 있노라고 하였는데 나에게도 역시 태양증이 있다. 명색이 대신이라고 하기 때문에 비록 극한 말 만큼은 하지 않겠으나 그 다음가는 처분은 어찌 할 방도가 없겠는가. 만약 몸과 집안을 성히 보전하고 싶거든 이후로는 감히 이렇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을, 사관(史官)이 가서 대신에게 전달하고, 대간의 글을 얻어들은 곳을 이어 하나하나 상세히 물어가지고 오게 하라. 김이익도 패초(牌招)하여 누설된 내막을 물어보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김이익에게 물었더니, ‘부신(符信)은 임금의 명령에 관계된 것이고 성문(城門)은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부신과 성문을 경시하는 것은 결코 신하로서 감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눈앞의 놀라운 일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걱정스럽고 한심스러운 것을 대략 진술하였습니다. 대신이 이른바, 신의 상소 말마디를 대간의 집에서 얻어들었다고 하는 말은, 듣고서 매우 놀랐습니다. 신은 소를 올린 뒤에 문 밖에 나간 일이 없었고 찾아온 손님들도 아주 드물었습니다. 더구나 대신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본래 신의 집에 내왕한 일이 없었다는 것은 형세상 뻔한 것입니다. 신이 비록 누설하고자 하더라도 그런 길이 만무한데, 지금 대신은 누설시킨 죄를 신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하니, 이 또한 구차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기는 하지만, 나라의 금법을 위반해서는 안 되고 대간의 체면을 훼손시키면 안 된다는 것을 약간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글을 올려놓고 스스로 누설하여 대신으로 하여금 그 긴요한 말마디를 얻어들을 수 있게 하고 겉과 속이 다르게 동으로 서로 설친다는 것은, 신이 실로 감히 하지 못할 짓이며 또한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어 생각건대, 신의 일편 단심은 단지 임금을 사랑하고 임금을 속이지 않는 것만 알았을 뿐, 거실(巨室)이 두렵다거나 위세를 무서워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금번에 한마디의 말로 인하여 뜻밖의 구설을 초래하였으니, 신의 평소 말과 행동이 만약 사람들에게 무게있게 보였다면 어찌 이렇게 될 리가 있겠습니까. 자신을 돌아보면서 부끄럽고 송구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원 상소는 마침 몸조리를 하느라고 그 개략적인 얘기만을 들었다.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비답을 내리려고 하였다. 비답이 아직 내리지 않은 소차(疏箚)를 미리 누설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은, 선조(先朝) 때 금칙(禁飭)한 수교(受敎)에서 극률(極律)을 적용하라고까지 하였으며 정원의 벽에도 게시되어 있다. 그런데 아침에 우상이 갑자기 대명(待命)을 하면서, 와서 전달한 말의 출처를 김이익의 집에 왕래하는 사람에게 돌리면서 그 녹사(錄事)로 하여금 정원에 와서 보고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문계(問啓)하는 일을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이 답변을 살펴보면, 구구 절절 자기 변명을 하여 마치 애당초 이런 일이 없었던 듯하였는데, 대신이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따지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으나, 나라의 체면이 있는 이상, 결코 그냥 덮어두어 대신으로 하여금 자꾸 불안한 생각을 가지게 할 수는 없다. 해방 승지를 추고하고, 각별히 엄칙하여 기어이 자수(自首)하게 하라. 그래도 다시 흐리멍덩하게 말하게 되면, 대청(臺廳)은 어디에 쓰겠는가. 문계(問啓)하는 일은 의금부가 있는 만큼, 이 일이 마무리되기 전에는 한갓 수응하기만 번거로울 터이니, 해방을 엄히 신칙하라."
하였고, 이익은 애당초 누설한 일이 없다고 스스로 변명했다는 이유로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1월 15일 병신
각사(各司)·각영(各營)에서 기유년의 회계 장부를 올렸다. 호조·양향청·선혜청·병조·훈련 도감·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에 현재 있는 황금이 3백 22냥(兩), 은이 41만 8천 8백 76냥, 돈이 1백 4만 4천 6백 33냥, 명주가 88동(同) 33필(匹), 무명이 2천 7백 1동 27필, 모시가 60동 33필, 베가 1천 67동 43필, 쌀이 32만 3천 2백 25석, 좁쌀이 9천 3백 25석, 콩이 4만 9백 98석, 겉곡·잡곡이 8천 9백 69석이었다.
1월 18일 기해
우의정 김종수에게 서용하지 아니하는 법을 적용하고, 병조 판서 김상집(金尙集)을 함창현(咸昌縣)에 유배하였다.
이에 앞서 장령 김이익이 상소하기를,
"월전(月前)에 대신이 성 밖으로 나갈 때, 한 가지 하찮은 일로 인하여 혜화문(惠化門)을 지키는 호군과 부장을 질질 끌어내어 성 밖의 몇 리(里)까지 가는 바람에, 거의 죽게 되었다가 살아나서 가까스로 풀려나 돌아왔습니다. 부장이 비록 낮은 벼슬이라고는 하나 바로 부신(符信)을 받들고 군사를 거느리어 성문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정말 죄가 있다면 초기(草記)를 하여 따져서 감죄(勘罪)해도 좋을 것이고 다스리도록 분부해도 좋을 것인데, 어찌하여 부신(符信)의 소중함을 고려하지 않고 마치 종이나 하인처럼 질질 끌어내어, 부장은 까무라쳐 정신을 못차리게 만들고,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은 저마다 놀라 숨어버리게 하여 더없이 중요한 성문을 한나절 동안이나 비워놓게 하였단 말입니까. 대신이 그날 무슨 분하고 성낼 일이 있었기에, 갑자기 문을 지키는 부장에게 유례없는 이런 짓을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문에 관한 모든 일은 무엇이든 본병(本兵)이 주관을 하는데, 귀가 막힌 듯이 듣고도 못들은 체하였고, 날짜가 이미 오래된 다음에도 기어코 덮어두려고 하였으니, 사리로 따져볼 때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병조 판서 김상집에게 파면시키는 법을 한시바삐 적용하는 것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체로 성문에 대한 거취(去就)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 소중한 것이다. 비록 명령을 받들어 여닫는 때에도 선전관은 표신(標信)을 가지고, 금군(禁軍)은 부험(符驗)을 가지고서 양쪽이 서로 맞춰보아야 한다. 한쪽이라도 없을 때는 명령을 따를 수 없는 것이 엄연한 국법이다. 그런데 대신이 부험을 가지고 있는 성문의 장수를 잡아내어 몇 리 밖의 교외에까지 끌고 갔으며, 성문을 지키는 군졸들은 놀라 달아나는 통에 한나절 동안이나 성문이 비어 있었다고 한다. 정상적인 마음과 이치로 헤아려볼 때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시끄러운 풍속은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고 뜬소문은 원래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은 법이다. 어찌 혹시라도 그렇기야 하겠는가마는,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법이란 공적인 것인 만큼, 어찌 대신이라는 이유로 굽히거나 흔들리겠는가. 어차피 하루 속히 마무리를 짓지 않을 수 없다. 병조 참판으로 하여금 즉시 개좌(開坐)를 하여, 성문을 지키는 장수에게 사실을 캐물어서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병조 판서를 파면시키는 일은, 조사하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당분간 그대로 둘 것이다.
너로 말할 것 같으면, 언책(言責)에 있는 사람으로서, 할 말이 있으면 숨기지 않는 것은 어찌 높이 살 만한 점이 아니겠는가마는, 어떤 일에 나아가 문제점을 논할 때 어찌 알맞고 적당한 말이 없어서 걱정이겠는가. 그런데 상소 가운데 한두 마디 어구는 함부로 내뱉는 말에 가까우니, 매우 온당치 못하다."
하였다. 이에 장령 김이익이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상소에서 대충대충 끝부분에 진술한 내용은 눈앞의 걱정스러운 점을 약간 말씀드렸던 것인데, 삼가 비답을 받고 보니, 그만 ‘한두 마디 어구는 함부로 내뱉는 말에 너무 가깝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신은 이를 읽어보고 놀랍고 황송한 나머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체로 대신의 그날 행동으로 말하면, 실로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 근본은 전적으로 기세를 요란스레 부리면서 꺼리는 바가 없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신이 상소에서 말한 것은 단지 사건의 전말만을 거론하여 병조 판서의 죄를 청한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나약하게 처신한 잘못에 대하여 부끄러운 점이 많은데, 또 무슨 약간이나마 말을 마구 내뱉을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대신이 이른바, 신의 상소문의 말마디를 신이 누설시켰기 때문에 들어 알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더욱 신이 불안하게 여기는 일단(一端)입니다. 신이 상소 내용의 한 구절도 다른 사람에게 말해준 일이 없었다는 것은 이미 일전의 문계(問啓)에서 밝혔으며, 신의 상소가 정원에 머물러 있은 날짜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이 대신의 위세와 권모 술수로 애초에 어찌 갖은 방법으로 탐지해본 일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처음에는 태연하게 대궐에 나아와 아무일 없는 사람처럼 굴다가, 막판에 가서 느닷없이 대명(待命)을 하면서 남에게 죄를 떠넘길 꿍꿍이를 부렸습니다. 제 딴에는 선수를 쳐서 남을 제압하려던 것이 이제는 약삭빠르게 굴려다가 도리어 어설프게 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못나고 어리석지만 어찌 차마 그와 더불어 이러쿵저러쿵 따지겠습니까.
그리고 또 뜬소문이 사실과 어긋나지 않다는 데 대해서는, 또 한가지 사실로서 증명할 수 있고, 한마디 말로 밝힐 수가 있습니다. 신이 근일에 또 듣건대, 대신이 신의 상소가 정원에 도착한 뒤에 권두(權頭)를 보내어 그날 끌려다닌 부장을 곡진히 위문하고, 여러모로 모든 일을 덮어주고 감싸줄 것을 요구하면서, 또 부장에게 손을 댄 하인 한 명을 매질해놓고는 사람을 시켜 그를 데리고 가서 부장에게 매맞은 흔적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신의 풍격으로 이런 일까지 하였으니, 어찌 묻지 않고도 알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부장은 어떤 사람이고 대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부끄러움도 모르고 이처럼 애걸하는 것입니까. 자기로써 남을 헤아려볼 때, 신이 누설하였다고 말한 것도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신이 정말 누설시켰다면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애걸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이 정신나간 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설령 이런 짓을 하려고 하더라도 유독 국법의 지엄함을 두려워하지 않겠으며, 또한 일신(一身)을 스스로 더럽히는 것을 고려하지 않겠으며, 또 깨끗한 조정에 수치를 끼치게 되는 것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보잘것없는 탓에 임금에게 미덥게 보이지 못하고, 남들에게 가볍게 보여 이처럼 대신에게 호된 무함을 당하였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체차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따랐다. 병조가 아뢰기를,
"혜화문에 수직하는 호군 이병천(李秉天)과 부장 송윤계(宋允桂)에게 캐물으니, 지난달 26일에 우의정이 성밖으로 나가는 길에 병천과 윤계가 영송(迎送)을 하지 않고 직소(直所)에 숨어 피했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하인을 시켜 머리채를 끌고 성 밖의 몇 리 되는 곳까지 갔다가 곧 가두어놓게 했으며, 결국 풀어 주었는데, 그 뒤에 다시 하인을 보내어 깍듯이 사과하면서 소문을 내지 말라고 타일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부험 제도는 병부(兵符)와 똑같은 것이다. 왼편의 한쪽은 대내(大內)에 두고 오른편의 한쪽은 성문을 지키는 장수에게 주었다가, 만약 쓸 일이 있을 때에는 두쪽을 맞춰보고 서로 맞은 다음에야 명령에 나아가는 것이다. 지금 이 사계(査啓)를 보면, 우상의 일은 너무도 꺼리는 바가 없다. 부험 제도가 이처럼 형편없으니, 병부(兵符) 역시 그러할 것이다. 모든 이가 바라보는 자리임을 생각하지 않고 이처럼 법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였으니, 대신을 위해서는 차라리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갈도(喝導)를 보내어 부드러운 말로 사과한 것은 관청과 마을이 무사케 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 같은데, 대간이 피혐하는 글에서 논열한 내용은 정도에 지나쳤다.
여하튼 그날 성 밖으로 나가는 길에서 아무 관계없는 성장(城將)에게 지나치게 기세를 부린 것은, 그 자취로 볼때 가장 눈에 거슬린다. 비록 대신이 자신을 위하는 계책이라도 마땅히 법사(法司)에 가서 응당 받아야 할 죄를 받기를 청했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나라의 기강과 군대 규율에 관계되는 것이고 후일의 폐단에 대해서도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우의정 김종수에게 서용하지 않는 법을 한시바삐 적용하라. 그에게 특별히 일을 맡긴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사리로 헤아릴 때 감히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알고서도 말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도인가. 만약 이러한 점을 대수롭지 않게 봐넘긴다면, 낮에도 문을 지키지 않고 밤에도 자물쇠를 채우지 않았어도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야 하겠는가. 병조 판서 김상집에게 먼 곳에 유배하는 법을 적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나라의 기강을 존엄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군대의 규율을 엄격하게 하라."
하였다. 조금 지난 후에 상집에 대한 처분을, 서용하지 않는 규정으로 고치라고 명하였다.
이갑(李𡊠)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1월 19일 경자
김익(金熤)을 의정부 영의정에 임명하고 채제공(蔡濟恭)을 좌의정에 임명하였다. 특지(特旨)로써 거듭 임명한 것이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전 우의정 김종수를 삭출하였다.
삼사가 【 대사헌 홍수보(洪秀輔), 장령 이석하(李錫夏), 대사간 윤호(尹㬦), 헌납 어석령(魚錫齡), 정언 김성준(金聖準), 부제학 이병정(李秉鼎), 응교 서배수(徐配修), 수찬 민창혁(閔昌爀)·이청(李晴), 부수찬 오태현(吳泰賢)이다.】 합계하기를,
"전 우상 김종수는 본래 외람되고 교활한 천성에다가 거칠고 패려한 버릇까지 있습니다. 기세를 부리고 방자하게 구는 것은 대신의 체모답지 못하고, 큰소리로 떠들 때에는 연석(筵席)의 경건함도 전혀 모르니, 그가 깨끗한 조정의 재상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본디 일세(一世)의 공론이 되어왔습니다.
비록 이번의 일로 말하더라도, 부험이 중요하다는 점을 아랑곳하지 않고 성문을 지키는 장수를 질질 끌어내기까지 한 결과 더없이 중요한 성문을 한나절 동안이나 비워놓았으니, 국가의 체면이나 군사 규율에 비추어볼 때 벌써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날 성밖에 나가는 일 자체가 시시콜콜하고 갑작스러운 것이었는데, 성문의 장수에게 무슨 화낼 것이 있기에 그렇게 해괴한 짓을 했단 말입니까.
원망과 불만을 품어온 생각과 법을 멸시하고 분수를 어긴 행위는 실로 용서받기 어려운 죄로서, 스스로 자기 죄를 알고서 성문의 장수에게 좋은 낯으로 사과하고 애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가인(家人)을 시켜 추켜세우기도 하고 으름장을 놓는 뜻을 현저히 보이면서 사실대로 보고하는 길을 막기도 하였습니다. 그 미봉하고 엄폐하는 꼴은 말하는 사람이 도리어 낯이 붉어질 정도로서 방자하기 짝이 없으니, 이것은 국법으로 엄격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병조 판서에게 귀양보내는 법을 낮추어 서용하지 않는 법을 적용한 것만 해도 너무 가볍게 처리한 것인데, 주모자에 대해서 어떻게 줄곧 가볍게만 처결하고 말 수가 있겠습니까. 전 우의정 김종수에게 관작을 삭탈하고 문밖으로 내치는 법을 적용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김종수 일은 죄다 스스로 저지른 것이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는가. 더없이 엄격한 것은 공적인 법이고 나라의 체면이니, 아뢴 대로 함으로써 조정에 기강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정말 용서하기 어려운 죄과가 있다면 몸이 언책(言責)에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대관(大官)이라 하여 눈치를 살필 것이 있겠는가. 이번의 전 우상의 일은, 그가 마치 놀란듯이 조심하라는 훈계를 아랑곳하지 않고 믿는 데가 있어 두려워함이 없었으니, 그 해괴한 거조가 어찌 나의 은혜를 저버리고 나의 알아줌에 흠낸 것일 뿐이겠는가. 그렇다면 바로잡아주는 의논에서 어찌 사헌부 상소가 결정되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일전 대사헌 상소는 앞서지도 않고 때늦지도 않았으니 이는 기회를 엿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비록 오늘의 합계(合啓)로 말하더라도, 농담을 섞어 쓴 넉자의 어구는 딱이 당사자가 말재간으로 막아버릴 단서를 주기에나 알맞은 것이다. 이렇게 하고서야 조정이 어떻게 존엄해지겠는가. 그 어구를 고쳐 바치게 하였으나 결국 한 마디도 지웠거나 고쳐쓴 것이 없으니, 역시 이런 사체가 어디에 있겠는가. 한 가지 일에 세 가지를 잘못하였으니 대간의 품위를 크게 손상시켰다. 그날 대청에 나갔던 대신(臺臣)들을 체차하라.
근일 말하지 않고 있는 책임은 부제학 이하가 그 죄가 똑같다. 그들도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합계 내용에 처음에는 "머리를 내두르고 눈알을 굴리며[搖頭轉目]"라는 네 글자가 있었는데, "기세를 부리고 방자하게 군다.[乘氣恣行]"로 고쳐서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86면
【분류】인사(人事) / 사법(司法)
1월 20일 신축
김광묵(金光默)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문영(洪文泳)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각각 삼았다가, 곧이어 문영을 병조 참의에 유임시키라고 명하였다.
삼사가 【 대사헌 김광묵(金光默), 장령 신대윤(申大尹)·박유환(朴猷煥), 지평 심규로(沈奎魯), 헌납 이병철(李秉喆), 정언 정만석(鄭晩錫)·심집(沈鏶), 교리 이백형(李百亨)·유문양(柳文養), 부교리 박기정(朴基正), 수찬 윤광안(尹光顔)·신헌조(申獻朝), 부수찬 김희채(金熙采)·이희관(李羲觀)이다.】 합계하기를,
"아, 통분합니다. 김종수의 죄를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전후 범법 행위는 이미 대각(臺閣)의 계사에서 다 알려졌는데도, 처벌 규정을 적용하지 않고 씻어주는 은혜를 과도하게 베푼 결과, 좋은 벼슬을 두루 거치고 어느덧 정승 자리에 올랐습니다. 만약 조금이나마 신하로서의 의리가 있다면, 마땅히 마음을 고쳐먹고 은혜에 보답할 생각을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외람되고 교활한 버릇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우롱하려는 잔꾀를 늙어갈수록 더욱 부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손아귀에 권한을 틀어쥐고 있으므로 세상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린 지가 이미 오래이고 안중에 군부(君父)도 없다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 가리기가 어렵습니다. 기분이 서로 맞으면 이름이 대간의 규탄에 올랐어도 서슴없이 관원 후보자로 추천하고, 의견이 비위에 거슬리면 결함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기어코 벼슬길을 막았습니다. 위복(威福)을 제 마음대로 부리면서 전혀 거리낌이라곤 없었지만, 그의 기세에 눌리어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합니다. 그러니 연석(筵席)에서 무엄하게 구는 것이라든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행동 따위는 단지 하찮은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근일의 일로 말하더라도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말을 지어내어 감히 성상을 속였고, 나중에는 부험을 경시하고 군대 규율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을 속이는 행위가 이 지경에 이르렀고, 법을 무시한 짓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하루이틀의 원인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명색이 대관으로서 포도청 군교에게까지 청탁을 받고, 성문을 지키는 장수에게 애걸까지 하였으니, 비단 조정에 수치를 끼친 정도뿐이 아닙니다. 그의 속셈을 따져보면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라곤 전혀 없고, 그의 죄과를 논한다면 실로 용서하기 어려운 죄안이니, 삭출(削黜)하는 정도로만 가볍게 벌주고 끝낼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삭출한 죄인 김종수를 우선 중도 부처(中道付處)하는 법을 적용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김종수 일은, 종전에 그에게 베푼 은혜와 대우는 우선 놔두고라도, 그가 스스로 위험한 지경에 빠질 때마다 번번이 구출하기 위해 애쓴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에서 신물이 난다. 정말 조금이라도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번 일이 왜 생겼겠는가. 백 사람을 죄다 용서해 주어도 이 사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를 온전히 보전하는 방법은 국법을 신장시키고 공론이 행해지도록 하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 영남의 바닷가에 귀양보내는 법을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하교하였다.
"이 일과 저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사실에 입각하여 논의를 해야만 비로소 공정한 말이고 공정한 의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 대간의 합계는 내용에 순서가 없었으므로 이미 양사에 대한 처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가율(加律)하자는 논의는 단지 내용이 적절하지 않다고만 말할 수 없다. 정말로 그와 같으면 그야말로 죽어도 남는 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어찌 전후로 신칙한 본의이겠는가.
자세히 갖추어 쓴 글 가운데 어구들을 함부로 지워버렸다. 대청에 나온 대신(臺臣)들은 죄다 서용하지 않는 법을 적용함으로써, 형률(刑律)을 반드시 그 죄에 합당하게 적용하려는 본의를 알도록 하라."
1월 22일 계묘
상의 체후가 비로소 쾌유하였으므로 약원의 도제조와 예조 당상을 소견하였다.
이에 앞서 판중추부사 정존겸(鄭存謙)·서명선(徐命善)·이복원(李福源)·채제공(蔡濟恭), 영돈녕부사 홍낙성(洪樂性) 등이 말하기를,
"금번에 전하께서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넘도록 건강이 좋지 못했는데 증상이 하찮은 감기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탕제(湯劑)를 여러번 고쳐 토의 결정하였고, 대소 신민(臣民)들이 온종일 초조하고 황급하였던 것은 실로 어극(御極)하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상제(上帝) 곁에 있는 조상의 신령이 도우셔서 전하의 건강이 빨리 회복되었습니다. 전하 앞에서 물러나온 사람들은 누구나 다 흔연히 기뻐하는 낯빛이었습니다.
상전(常典)을 상고하고 여러 사람들의 성의를 참작할 때, 전에 없는 경사를 만나 응당 거행해야 할 예식의 거행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짐작컨대 우리 자전과 자궁은 며칠동안 병날까 근심하던 끝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심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어버이를 기쁘게 하고 뜻을 받드는 전하의 효심으로 볼 때, 어찌 뭇사람의 심정에 따라 성대한 의식을 빨리 거행하여 하늘이 준 기쁨에 보답하고 자전과 자궁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서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해조로 하여금 길일을 가려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뜻하지 않은 질병을 조심하라던 훈계를 소홀히 하여, 자식이 병날까 걱정하는 염려를 끼쳐드렸으니, 나는 지금 자신을 책망하느라 겨를이 없다. ‘건강이 회복되었으니 진하(陳賀)를 하자.’는 청을 어찌 전례(典禮)에 있다는 이유로 따라줄 수 있겠는가. 경들은 양해하라."
하였다. 예조에서도 임금의 건강이 회복된 데 대한 진하를 전례대로 거행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와서 약원의 도제조 채제공, 예조 판서 서유린(徐有隣), 예조 참판 이헌경(李獻慶), 예조 참의 조원진(曺遠振) 등이 청대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임금의 체후가 회복된 뒤에 경하(慶賀)를 하는 것은 곧 마땅히 거행해야 되는 전례(典禮)입니다. 그런데 일전에 연명으로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약원이 수직하는 일이 없었어도 사당에 고하고 경하를 한 전례가 아주 많았습니다. 숙묘(肅廟) 경신년과 선조(先朝) 을해년에도 다 허락하였으니, 오늘날 신들의 청을 특별히 허락하는 것도 역시 선대 임금의 뜻을 계승하는 훌륭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이 들어줄 만한 것이라면, 일전에 올린 경들의 차자에 대해 어찌 즉시 따르지 않았겠는가. 대체로 크게 벌리는 일은 본래 하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또 원침(園寢)을 옮겨 모신 뒤로 처음 탄신일(誕辰日)을 맞았다. 그러므로 꼭 이날에 참배하여 정례(情禮)를 조금이나마 펴볼까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뜻하지 않은 병에 걸려 뜻대로 하지 못한 데다가, 사당에도 예절을 갖추지 못하였고 대비와 혜경궁께도 근심을 끼쳤다. 한 번씩 생각이 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느낌에 여념이 없는데, 경하한다는 것을 어떻게 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유린 등이 아뢰기를,
"오늘의 경사는 바로 즉위하신 후 처음 있는 일일 뿐 아니라, 이것은 나라에서 응당 행해야 할 전례인만큼 특별히 여러 사람들의 청을 들어주기 바랍니다."
하고, 제공이 또 극력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을유년 겨울 동안에 여러 달 편찮다가 섣달 그믐날에 가서야 낫게 되었다. 선조(先朝)께서 매우 기뻐하시어 심지어 사당에 고하고 사면을 반포하기까지 하시었다. 춘저(春邸)에 있을 때 이미 거행한 것을 지금이라고 왜 망설이겠는가. 그러나 옛날에 있어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지금으로서는 실로 그럴 수 없다.
어젯밤에 자궁(慈宮)이 나와 보고 말씀하기를, ‘외정(外庭)에서 경하를 하자고 청할 듯하다.’고 하기에, 내가 사정을 고하였더니 자궁 역시 옳게 여겼다. 그러니 지금 어떻게 경들이 청한다고 하여 허락을 하겠는가."
하였다.
1월 23일 갑진
의금부가, 김종수(金鍾秀)를 원춘도(原春道) 울진현(蔚珍縣)에 부처(付處)하겠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공법(公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으나 정리(情理)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이미 아뢴 대로 하라고는 하였으나, 법전(法典)으로 헤아려 볼 때 귀양을 보낼 수는 없다. 더구나 대관인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부처에 대한 명은 특별히 분간(分揀)을 하라."
하였다.
1월 25일 병오
한광회(韓光會)를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윤득규(尹得逵)를 붙잡아다 처리하고, 이격(李格)을 그 대임자로 삼았다. 득규가 포폄(褒貶) 계본(啓本)을 봉진(封進)하면서 뒤늦게 들어갈까 염려하여 기일보다 앞서 급히 보냈으므로, 도백(道伯)의 계본과 함께 마감(磨勘)할 기한이 어긋났다. 그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은 것이다.
1월 26일 정미
윤상동(尹尙東)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제도(諸道)의 봄철 군사 훈련을 중지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호남의 전 도신(道臣) 서용보(徐龍輔)가 연석(筵席)에서 세 가지 폐단에 대하여 아뢰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호남 지방의 조세와 대동미(大同米)를 운반할 때 선박을 세내는 폐단을 자세히 진술하고, 이어 차원(差員)을 정하여 제창(濟倉)에 받아서 보관하고 호조로부터 선박을 골라 내려보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차원을 골라 정하는 일과 제창에 날라다 보관하는 것은, 본래 시행하기 힘든 일이 아닌데 선박을 세내는 한가지 문제는 아무래도 좋은 대책이 없습니다. 이번에 도신이 청한 것은, 바로 지난해에 강구한 바 작대(作隊)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시행한 지 한 해도 채 못되어 그 폐단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곧 정파(停罷)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다시 설행한다는 것은 사세가 적절하지 못하니, 섣불리 논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또 하나는, 전주성(全州城) 안팎의 공해(公廨)와 민가(民家)에 원래 조세를 면제하는 규정이 없음을 자세히 진달하고, 이어 토지 50결(結)에 해당하는 조세를 감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감영(監營)이 있는 고을을 처음 설치할 때에는 성첩(城堞)을 축조하지도 않았고 민가 또한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그 비어 있는 토지에 대하여 규례대로 조세를 받았으며, 그후 성이 완비되고 민가들이 많아진 후에도 조세는 그대로 받아왔습니다. 50결의 조세를 면제해 주면 비록 경비(經費)에 관계되기는 하지만, 진정 해야되는 일이라면 어찌 따라주지 않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호남과 관동에는 성터의 한계가 없고 민가와 토지들이 대부분 감영 가까이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성이 있다는 이유로 면세(免稅)해주고 저기에는 성이 없다는 이유로 조세를 받는다면, 감영 부근인 점은 똑같은데 어찌 불공평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감영 가까이에 있는 공해(公廨)와 민가에 대하여 조세를 면제하는 것이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는, 제도(諸道)에 사문(査問)한 뒤 다시 품하여 처리하겠습니다.
그 가운데 또 하나는, 남원(南原)의 종이와 관련한 폐단을 자세히 진술하고, 이어 쌀 5천 석(石)을 떼내어 주되 환미(還米) 3천 석과 이자를 불린 값으로 보태진 2천 석을 10년 기한으로 더 나눠주고 이자를 받아 본색(本色)을 갚아나가도록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본부의 종이와 관련한 폐단은 전에 고을 백성들이 하소연할 때에 이미 보고된 것이지만, 이번에 도신이 직접 듣고 보고서 이러한 상주(上奏)를 하였으니, 조정이 어찌 5천 석의 곡물을 아끼어 한 고을 백성들의 고통을 돌봐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청한 대로 허락해 주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또 하교하기를,
"전주성 안에 대하여 조세를 면제하는 일은, 다른 도에 어찌 근거할 만한 유례가 있겠는가. 그러나 본부는 왕업(王業)이 시작된 곳이어서 두 전(殿)을 봉안(奉安)하고 있으니, 사체가 자연히 남다른 면이 있다. 그러니 올해부터 특별히 면세(免稅)를 허락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을 파직시키고, 형조 참판 유당(柳戇)과 형조 참의 박천형(朴天衡)은 모두 체차하였다. 강화옥(江華獄)에 가둔 죄수(罪囚)의 형벌 집행을 지체하였기 때문이었다.
1월 27일 무신
삭출(削黜)한 죄인 김종수를 특별히 석방하였다. 하교하기를,
"왕정(王政)에 우선시되는 것은 효도로써 다스리는 일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더구나 백세(百歲)가 된 노부모를 봉양하는 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으며, 더더구나 전에 대관으로 있던 사람에게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 부모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들은 이상, 돌아가서 만나보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삭출한 죄인 김종수를 풀어 보내고 그로 하여금 편하게 병을 간호하도록 하라."
하였다.
중비(中批)에 의하여 김이익(金履翼)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조금이라도 사정을 봐주는 것이 있으면 사람들은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근일의 고치기 어려운 고질적 폐습이다. 얼마 전에 전 우상이 전에 없는 죄를 범했을 때, 명색이 병조 판서라는 사람도 오히려 그와 사이가 척질까봐 두려워서 눈치를 보며 사실을 숨겼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원래 그다지 나무랄 것도 못되거니와, 언책(言責)을 띠고 있는 자로서도 입 밖에 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가 바로 앞장서서 바로잡아 주었다. 서슴없이 말하는 것을 장려하고 나쁜 습속을 바로잡는 방도에 있어, 마땅히 특별히 발탁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 이러한 명이 있은 것이다.
심이지(沈頤之)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충청도 관찰사 권엄(權𧟓)이 장계(狀啓)를 올려 아뢰기를,
"부여(扶餘)의 고(故) 현령 김광악(金光岳)은 어미를 섬기기에 효성을 다하였습니다. 그 어미의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여 생명을 연장시켰고, 상사를 당해서는 나이가 이미 일흔이었지만 여막살이를 하면서 죽을 먹고 지냈습니다. 흡곡(歙谷)의 원으로 있을 때에는 상의 체후가 편치 않아 자줏빛 게장[紫蟹醬]을 먹고 싶어하시자, 관문(關文)이 도착한 날 고을 사람들이 여름 게는 장이 없다고 고하는데도 광악은 몸소 포구(浦口)를 돌아다니면서 자줏빛 게장을 구해서 봉진(封進)하였습니다.
회인(懷仁)에 사는 아이들인 박팽령(朴彭齡)·우호득(禹好得)·이육섭(李六燮) 세 아이는, 자기 부모가 병이 들었을 때 모두 다리살을 베어 먹인 결과, 병이 즉시 완쾌되었습니다. 미풍 양속을 장려하는 도리에 있어, 마땅히 선행을 포상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효자와 열녀에 대해 보고한 것을 보면 대부분 내용이 비슷비슷한 관계로, 유사(有司)가 품제(品題)를 할 때 취사(取舍)가 곤란하다. 그러나 부여의 고 현령 김광악은, 집에서는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다하였고, 조정에서는 신하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특이한 사실과 탁월한 행실이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기다리지 않고도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한다. 특별히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도록 하라.
회인에 사는 세 효동(孝童)의 탁월한 행실 또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역시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먹을 것을 넉넉하게 주도록 하라."
하였다.
부사직 조림(曺霖)이 졸하였다. 조림은 고(故) 교리 조위(曺偉)의 후손이다.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선발되어 경연관과 사헌부 벼슬을 지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가난한 생활을 참고 독서를 함에 있어 늙도록 해이함이 없었다고 칭송하였다.
1월 28일 기유
지평 유한우(兪漢㝢)를 조적(朝籍)에서 삭제하였다. 한우가 상소하기를,
"김종수가 성문 지키는 장수를 질질 끌어낸 것은, 실로 전에 없던 하나의 변괴였습니다. 그날 성 밖으로 나간 걸음 자체가 벌써 죄가 되는 일이었으니, 마땅히 두려워하고 위축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기세를 잔뜩 부리면서 폭행을 가해서는 안될 자리에다 가한 결과,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놀라 달아나고 도성문이 비어 있게 하였습니다.
아, 저 대신이 어찌 성문에 관한 규정이 엄격하다는 것과 부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정말로 몰랐겠습니까. 대체로 그는 권세를 믿고 패거리를 세워 누구도 감히 어쩌지 못하므로, 기세를 부리고 위엄을 보이면서 세상에 어려워하는 일이라곤 없었습니다. 금번의 일로 말하면, 나라를 저버리고 법을 무시한 죄를 더욱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付處)할 데 대한 법을 이미 허락하였다가 금세 취소하였고, 문외로 출송한 벌까지도 갑자기 완전히 석방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높은 관리에게 있을 경우, 법을 장차 적용할 데가 없다는 것입니까. 청컨대, 그를 분간(分揀)하라는 명과 석방하라는 명을 어서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소패(召牌)로 부를 때 서울에 있는 사고없는 사람으로서 무단히 오지 않았으니, 관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번 상소에서 전 우상을 향해 이처럼 참혹하게 공박을 하였는데, 이 또한 기회를 엿본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어제의 소패로 오늘 다시 부른 것은, 이 상소를 보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란 말인가.
신하로서 함부로 헤아리거나 몰래 엿보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다. 그런데 너는 나이 어린 풋내기 관리로서 서슴없이 이처럼 비루하고 패려하며 무엄한 짓을 저질렀으니, 통탄스럽고 놀랍다는 말은 오히려 흔한 얘기에 속한다. 유배시키는 법을 너처럼 설쳐대는 무리에게 적용하지 않고 어디에 쓰겠는가. 그러나 효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세상에서 어찌 대관(大官)·소관(小官)의 차별을 두겠는가. 듣건대, 무척 늙고 병든 부모가 있다니, 우선 가볍게 처벌하는 중에서도 한껏 가볍게 처벌하여, 너의 성명을 전조(銓曹)로 하여금 사적(仕籍)에서 삭제하도록 하는 바이다. 앞으로의 세월은 네가 숨을 죽이고 움츠려 있으면서 너의 조부(祖父)인 옛 재상의 가문이나 보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병정(李秉鼎)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29일 경술
차대(次對)가 있었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근래에 들으니, 서북 지방의 유민(流民)들이 도로에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고을 수령들이 만일 성의껏 돌봐주었다면, 저 본고장을 떠나기 싫어하는 무리들이 비록 상을 준다 해도 어찌 제 고향을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지겠습니까. 조정에서 이미 알게 된 다음에는, 특별히 타이르고 안집(安集)시키는 대책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사방으로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삼삼 오오 패를 지어 어느 도(道)와 어느 읍(邑)에 가서 걸식(乞食)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안으로는 오부(五部)와 밖으로는 경기, 삼남(三南), 혹은 관동 여러 도에 각별히 수소문하여 식구를 계산해서 식량을 주고, 향해 가는 고을에 차례차례 넘겨 보내줌으로써 본고장에 이르도록 하고, 그들이 고향에 돌아가면 도신(道臣)이 그 수효를 파악하고, 본읍(本邑)으로 하여금 특별히 보살피어 안착하게끔 한다면, 백성들을 정성으로 보살피는 우리 성상의 고마운 뜻이 저 호소할 데 없는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미치게 될 것입니다.
또 듣건대, 요즈음 도신과 수령들은 백성들이 떠돌아 다닌다는 소문이 서울에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혹은 요로(要路)를 막아 옮겨가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길 밖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정사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엄하게 금지시켜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지금 경의 말을 들으니, 서북 지방의 민정(民情)을 미루어 알 만하다. 이미 들은 뒤에는, 어찌 한 시각인들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는가. 받아들여 구제할 대책을 도백(道伯)에게 각별히 신칙하여 꼭 실효가 있도록 하라. 유민들을 도로 안집시킬 일에 대해서는, 경이 상주(上奏)한 대로 즉시 경외(京外)에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지난날 홍병찬(洪秉纘)은, 신이 연석(筵席)에서 규정(糾正)한 것과 관련하여 나중에 대응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말이 실상(實狀)과는 상반(相反)됩니다. 그때 병찬이 신에게 이르기를, ‘외부의 의견이 이조 판서의 후보자 추천에 누락된 사람이 있다고 한다.’ 하기에, 신이 그게 누구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바로 조시준(趙時俊)과 윤시동(尹蓍東)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신은, 시준은 말을 하다 보니 곁들여 언급한 사람인 줄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말이 하도 뜻밖에 나온 것이어서 너무도 놀랍고 의아스러운 감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잠자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있었더니, 그는 그만 일어나서 절하고 가버렸습니다. 이외에는 한마디도 나눈 얘기가 없었는데, 지금 상소 내용에는 여러가지로 이러쿵 저러쿵 지껄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생각이 모자란단 말입니까.
신이 규정(糾正)을 한 것은, 본래 병찬을 시준의 패거리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응 상소 가운데에서는 미처 알지 못한 것은 스스로 폭로한들 어찌 안될 게 있기에, 친구가 책망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입으로 말하지 않은 말을 만들어내어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데에까지 이르는 것입니까. 이 어찌 몹시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 일은 체통(體統)에 관계된다는 이유로 병찬을 파직시켰다.
수찬 한광식(韓光植)이 아뢰기를,
"일전에 여러 동료들이 연명 차자를 재차 올렸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고 되돌려 주었습니다. 차자에서 논열(論列)한 것이 어떤 내용인지는 비록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김종수가 지난번에 저지른 죄는 바로 신하로서 전례가 없는 변괴였습니다.
이것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외람되고 교활한 태도가 천성과 행동에 뿌리를 두었고, 우롱하는 버릇에다 음흉한 방법을 써가면서, 손에는 위복(威福)의 권세를 쥐고 안중에는 군부(君父)도 없습니다. 두둔하여 감싸주는 성상의 은혜를 믿고, 더욱 설치어 내두르는 기세를 부리는 까닭에, 세력은 아래에서 형성되고 권한은 위에서 높아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식견있는 사람들의 한숨을 자아낸 지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성상의 따끔한 처결에 의하여 국법이 시행을 보게 되었는데, 채 며칠도 못가서 금세 싹 없어지고 이미 적용한 법률마저도 다시 취소가 되었으니, 이러고도 오히려 권세있는 간흉(奸凶)들이 자취를 감추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다시 들이는 전후의 차본(箚本)에 대하여 어서 비답을 내리시고, 아울러 청한 바를 윤허하셔야 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신응현(申應顯)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심이지(沈頤之)를 평안도 관찰사로 각각 삼았다.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에게 하유하기를,
"서도(西道) 고을의 민사(民事)가 매우 마음에 걸린다. 이것은 다 고을 수령들을 제대로 얻지 못해서, 백성들이 고달픔을 겪고 고장에서 안주를 못한 채 그처럼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다. 만약 이전의 도백(道伯)이, 조정의 명령을 제대로 받들어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수령들에 대해서는 문관이건 무관이건 막론하고 즉시 개차하여 징계하고 두려워할 줄 알게 하였더라면, 어찌 오늘날의 말썽거리가 있겠는가.
또 듣건대, 요즈음 유민(流民)들이 대부분 토지도 있고 집도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고을 수령들이 제 구실을 못한다는 것을 더욱 증험할 수 있다. 신임 도백은 도임하는 날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을 크게 떠서, 고을 수령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데에 따르는 폐단은 걱정하지 말고 꼭 따끔하게 일깨우는 보람이 있도록 하라.
오늘 빈청(賓廳) 연석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다들 사신을 파견하여 유민들을 안집(安集)시키자고 말을 하는데, 이것은 신임 도백이 곧 관할 고을을 순찰하게 될 것이므로 임금의 명령을 선포하는 책임을 우선 도백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뒤따라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고을 수령들의 근만(勤慢)을 조사할 것이다. 그렇다면 안집시키고 보살펴 돌보는 일이 도신과 수령의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안집시키고 보살펴 돌보는 데에도 또한 여러가지 방안이 있을 것이다. 우선 토착민(土着民) 중에 살림살이가 알찬 가호(家戶)에 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다독거려 놓이게 함으로써 편안하게 생업에 재미를 붙이게 하라. 그렇게 하자면 역시 그들의 감정을 사납게 하지도 말고, 앞뒤 안가리고 무작정 다독거리지도 말고, 무관심하지도 말고, 성급하게 조장(助長)하지도 말고, 뒤흔들어 귀찮게 하지도 말고, 농사철을 빼앗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 한 집을 무마하고 내일 한 마을을 무마하는 식으로, 정성이 미치는 곳에 마음속으로 감동을 느끼게 한다면, 비록 날마다 매질하면서 떠나가라고 다그친들 어찌 흩어져서 사방으로 떠나갈 생각을 하겠는가.
굶주리어 죽게 된 백성들로 말하자면, 입을 벌리고 먹여달라고 하면서 바라는 것은 주린 배를 달랠 쌀 한 됫박과 물 한 보시기에 불과하다. 진정 정해진 규정대로 먹여주고 후하게 구휼함으로써, 떠나가면 죽고 떠나지 않으면 산다는 점을 알게 한다면, 어찌 반걸음이나마 발길을 돌려 떠나고자 하겠는가. 그들을 살려내는 길은, 역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 일에서 성과를 거두기가 쉬울 것이다. 명색이 고을의 수령이라고 하면서 고을 안 백성들의 목숨을 구원하지 못하여 유리걸식한다는 말이 연석(筵席)에까지 들리게 한다면, 서도의 고을에는 수령이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해서(海西)의 서너 고을 민사(民事)도 관서 지방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도백(道伯)이 어떤 조처를 취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관청의 구제이건 사적(私的)인 구제이건 간에 아직까지 보고된 것이 없으니, 이 또한 매우 의아스럽다. 대체로 풍년이 든 해에 곡물을 저축하는 것은 흉년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관서와 해서의 도백이 곡식을 이렇게까지 아끼는 것은 역시 상정(常情)이 아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또 북관(北關)의 도신(道臣)에게 하유하기를,
"북관 지방의 민사(民事)는 경에게 모조리 위임하였으니, 생각건대 무마하는 데 방도가 있고 곡식을 제때에 꾸어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곤궁하여 허덕이며 떠돌아 다니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요즈음 연석(筵席)에서 듣자니, 어린 것을 안고 늙은이를 끌고서 북쪽으로부터 오는 자들이 하루에 몇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가을과 겨울철에 조세 독촉에 시달리고 옷도 없고 집도 없는 사람들이 딴 곳으로 떠돌아다니게 한 것만 해도, 도백과 수령들이 백성들을 보살펴 돌보는 책임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였다고 말할 만하다.
이제는 환곡에 대한 정사가 이미 끝났고 구제하는 일이 시작되었으니, 살림이 튼실한 가호는 환곡에 붙일 수 있고 가난한 백성들은 먹여달라고 하기에 바쁠텐데 이때에 유랑민이 세전(歲前)보다 더 많은 것은, 어찌 사리로 보나 형편으로 보나 의외가 아니겠는가. 만약 그 이유를 찾아본다면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방금 묘당으로 하여금 여러 도에 관문(關文)으로 신칙하여 희망하는 대로 돌려 보내도록 하였는데, 경이 만약 성의를 다하였다면 어찌 오늘같은 말썽이 생기겠는가. 경이 한 일은 단지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그 자세한 내막을 사실에 입각하여 장계로 보고하라.
그리고 또 열읍(列邑)에 엄히 신칙하여 특별한 규정을 통하여 안집(安集)시키되, 만일 죄를 모면하려고만 하여 백성들을 잔뜩 얽매어 놓고 손발조차 제대로 놀리지 못하게 한다면, 그 해독은 도리어 그보다 더 심할 것이다. 아울러 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1월 30일 신해
서영보(徐榮輔)·윤광안(尹光顔)·서배수(徐配修)·김희조(金熙朝)·유문양(柳文養)을 문관 비변사 낭관으로 차임하였다. 그들을 오부(五部)에 파견하여 유민들을 찾아내어 양식을 주고 본고장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구익(具㢞)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오재순(吳載純)을 형조 판서로 각각 삼았다.
충청도 관찰사 권엄을 파직시키고, 결성 현감(結城縣監) 한규혁(韓奎爀)을 먼저 파직시킨 후 붙잡아 오게 하였다. 권엄이 밀계(密啓)하기를,
"결성 현감 한규혁이 비밀리에 보고하기를, ‘본현(本縣)의 최덕교(崔德敎)가 자기 동네에 사는 전 현감 이영운(李榮運)의 행동이 수상하다고 와서 말하므로 그로 하여금 써서 바치게 하였는데, 그 내용이 몹시 위험하므로 이영운과 그의 아우 이일운(李一運)을 지금 막 붙잡았고, 최덕교는 칼을 씌워 엄하게 가두어 놓았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이영운·이일운·석기(錫期)·조선재(曺善才)·정호걸(鄭豪傑)·우걸이(禹傑伊)·최덕교 등 7명을, 신의 감영 군교(軍校)들을 급히 보내어 불시에 덮쳐서 붙잡았습니다. 최덕교가 써서 바친 원정(原情)을 올려 보내어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장계 내용을 보건대, 경의 행동이 어쩌면 이다지도 소홀한가. 이른바 최가(崔哥)가 써서 바쳤다는 원정(原情)은 말에 순서가 없고 모색(摸索)할 만한 단서가 전혀 없다. 그 가운데 첫째 핵심 부분은 관광(觀光)하러 나가는 길에 후익(後翼)의 사촌들과 동행하다가 그들이 붙잡혔다는 기별을 듣고 즉시 말머리를 돌려 집에 돌아온 일에 불과하다. 이것을 놓고 본다면, 이영운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자세히 살피고 상세히 따져보면, 최가는 틀림없이 감정을 끼고 남을 무함하려는 생각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 벌이기를 좋아하고 재난을 일으키기 즐기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사람을 역적으로 몰아넣은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최가는 반좌율(反坐律)에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꼭 사형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최덕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철저하게 가두어놓고 처분을 기다리라. 이영운으로 말하면, 털끝만큼도 죄줄 만한 꼬투리가 없을 뿐 아니라, 명색이 조정 관원인데, 여쭈지도 않고 체포한 것은 너무나 망령된 행동이며 후일의 폐단에도 관계된다. 경은 무거운 처벌을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영운은 도착한 곳에서 즉시 풀어 주도록 하라.
또 이일운과 같은 사람은 무슨 죄로 잡아왔는가. 석기(錫期)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잡아온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각각 붙잡아 오다가 이른 곳에서 풀어 내보낸 다음 장계로 보고하라. 비록 지방관으로 말하더라도, 행동이 비겁하고 처사가 엉뚱한 것은 우선 논외로 치더라도, 이미 시급한 일이 아닌 이상 감영에 달려가서 면대하여 사유를 말하는 것이 사리에 당연할 터인데, 그만 이처럼 해괴하게 수선을 피웠으니, 이와 같은 수령에 대해서는 영송(迎送)하는 것을 돌봐 주기 곤란하다."
하였고, 또 하교하기를,
"조정에는 엄연히 규례가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이를 어긴다면 후일의 폐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같은 동네에 사는 자를 고소하고 고자질하는 데 대하여 지레 저 피고에게 죄를 씌우는 것은, 벌써 법의 본의가 아니다. 더구나 일찍이 조정 관리를 지낸 사람을 제멋대로 처단하여 가두어 놓은 것은, 더욱 경솔하고 얼뜬 행동에 가깝다. 살인 사건이 아니고야 어찌 이와 같은 격례(格例)가 있겠는가. 후일의 폐단에 관계된 일이니, 처분이 없을 수 없다. 충청 감사 권엄에게는 파직시키는 법률을 어서 적용하고, 해당 수령은 먼저 파직시킨 후 붙잡아 오라."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조실록29권, 정조 14년 1790년 3월 (3) | 2025.08.03 |
|---|---|
| 정조실록29권, 정조 14년 1790년 2월 (5) | 2025.08.03 |
| 정조실록28권, 정조 13년 1789년 12월 (3) | 2025.08.02 |
| 정조실록28권, 정조 13년 1789년 11월 (8) | 2025.08.02 |
| 정조실록28권, 정조 13년 1789년 10월 (6) | 2025.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