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임자
내탕고(內帑庫)의 돈 1천 냥을 내려보내, 현륭원(顯隆園)의 나무심는 비용에 대게 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정존중(鄭存中)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2월 2일 계축
원행(園幸) 때에 정리사(整理使)가 가던 것을 없애고, 기백(畿伯)001) ·기랑(騎郞)002) 이 도로와 교량을 적간(摘奸)하고, 사복시의 기군(旗軍)과 세마(洗馬)는 부자내(部字內)에 한해서만 척후를 세우고 복병(伏兵)을 없애는 것을 규례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하교하였다.
"비변사 낭청이 와서 보고한 것을 보건대, 서북 지방의 유민(流民)으로서 고향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수효가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수효보다도 적다고 한다. 이것은 필시 백성들이 조정의 본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혹시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조세와 부역의 독촉에 시달릴까 걱정하여, 주저하고 머뭇거리면서 감히 본고장을 찾아가지 않는 것일 것이다. 그들의 정상을 살펴볼 때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반드시 특별하게 타이르고 깨우쳐야만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본고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진휼청에 넘겨 양식을 주어 보내고, 돌아간 뒤에는 본지방으로 하여금 즉시 진안(賑案)에 올리고 특별히 보살피도록 하라. 그들이 받은 신(新)·구(舊) 환곡과 당년(當年)의 신역(身役)은 모조리 탕감해주도록 하라. 안접(安接)시킨 실태와 거주하는 지방의 면(面)·리(里)를 감영에 상세히 알려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고, 다시 비변사 낭청과 부관(部官)으로 하여금 이곳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백성들에게 거듭 타이르도록 하라. 서울은 사방(四方)의 표준이 되는 만큼, 이와 같이 명령을 내려 엄격히 신칙하고, 삼남(三南)과 경기 등 여러 도에도 그들을 호송하는 절차를 엄히 신칙하여, 안접시킨 실태를 또한 각기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라."
영의정 김익(金熤)이 상소하기를,
"거국적으로 꼭 성토해야 할 역적이 있으나 보복할 만한 힘이 없고, 원수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비통함을 품고도 이를 풀 만한 곳이 없어서, 그저 원한과 울분을 머금고 죽을 때까지 목숨이나 부지할 따름입니다.
전후로 올린 차자와 계사는, 신령과 부모에게 질정하였고, 그 마음을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기로 맹세한 것입니다. 끝에 또한 천지의 원칙으로서 비록 죽더라도 영광스럽다고 마음을 가리켜 맹세를 한 것입니다. 말을 이미 이와 같이 한 이상, 다시는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비록 전하께서 우레와 같은 위엄으로 임하고 무서운 형벌을 내린다 하더라도, 오직 그날로 죽을 따름이고 끝내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은 충성스럽지 못하고 형편없는데다 더없이 미련하고 서툴지만, 떳떳한 천성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타고 났으므로, 스스로 이렇게 마음을 다졌고 스스로 이렇게 말로 맹세를 하였습니다. 더구나 군부(君父) 앞에서 또 이렇게까지 말을 해놓고도 지금 갑자기 벼슬과 녹봉에 동요되고, 위엄에 눌리어 가던 길을 고치고 발걸음을 돌린다면, 이는 전하를 저버리는 것이며 원수를 잊는 것이 됩니다. 천하 후세에 신에 대해 논의하고 신에게 죄를 주려는 사람들이 장차 난적(亂賊)과 같은 죄로 다룰 것이니, 신은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이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두 해 동안이나 낫지 않고 있는 융질(癃疾)이 근래에 와 또 덧쳐서 저승길이 곧 다가오니, 밤낮으로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 죽어 사라지기 전에 곡진히 살펴주시는 은혜를 받아 이 미혹된 결심을 가지고 온전히 지하에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려는 전하의 지극한 덕망과 훌륭한 의리에 빛이 날 것이며, 신 역시 비록 죽었어도 살아 있는 것처럼 지하에서 두 손 모아 전하를 위해 축원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상소 내용을 보니, 병에 관한 얘기 외에 또다시 밀봉해서 돌려보낸 계사 내용을 반복하여 말하였는데, 경은 이점에 있어 너무도 나의 본의를 모르고 있다. 재상이란 얼마나 중요한 직책인가. 이번에 거듭 재상으로 선정한 것은 많은 생각 끝에 나온 일이었다. 그런데 극력 사양하면서 위아래가 서로 버티고 있으니, 이것은 모두가 나의 성의가 미덥게 감동시키지 못해서 그러한 것이다. 자신을 돌이켜볼 때, 부끄럽고 계면쩍어 무어라 형언할 수가 없다.
더구나 지금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갈팡질팡 헤매고 있으니, 먹여살릴 대책을 재상들과 더불어 강구해야 할 때이다. 나라를 몸받는 경의 마음으로서, 이런 때에 이러한 책임을 어찌 회피하려고 하는가. 경이 비록 하루에 열 번 상소를 하더라도 나는 오직 기어코 불러들일 생각뿐이니, 경은 모쪼록 나의 간절한 유시(諭示)를 생각하여 만일 억지로나마 힘을 낼 수 있다면, 즉시 몸을 일으켜 시사(視事)를 하라. 원소(原疏)는 사관(史官) 편에 돌려보내니, 이후로는 다시 제기하지 말아서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라."
하고, 이어 어의(御醫)를 보내어 간병하게 하였다.
2월 3일 갑인
평안도 전 관찰사 정창성(鄭昌聖)과 함경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를 삭직(削職)시키고, 원춘도(原春道) 전 관찰사 이도묵(李度黙)과 황해도 관찰사 이홍재(李洪載)를 파직시켰다. 하교하기를,
"조정이 방백(方伯)을 두고 근심을 나눌 책임을 맡긴 것은, 일이 백성들의 고충을 돌봐주는 데에 관계된다. 풍년이 든 해에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일인데, 하물며 흉년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관할하는 도내의 유민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떠난 수효가 몇 천 혹은 몇 백 명인지 모를 지경이다. 대신이 빈청 연석에서 진달하였고, 심지어 비변사 문무 낭청들을 파견하여 오부(五部)를 찾아 뒤지고 진휼청에 넘기어 양식을 주고 영송(迎送)하는 소동까지 벌였으니, 이는 근래에 없던 일이다. 도백이 감히 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몰랐다는 것이 정말이라면, 이러한 도백에게도 한 지방의 근심을 나누자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지난 선조(先朝) 때에는 관동(關東) 지방의 유민들이 서울에까지 올라왔으므로 자주 적간(摘奸)하는 관원을 보내어 매우 엄한 처분을 하였었다. 회양(淮陽)이나 김화(金化)처럼 서울에 가깝더라도 일정한 거처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보살펴주는 성덕(盛德)을 베풀기 위하여 극진하고도 간절한 은교(恩敎)를 내렸었다. 더구나 서북은 관동에 비하면 얼마나 더 먼 곳인가. 그런데도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애를 이끌고 모여드니, 이 사람들이 곧 굶주림에 시달려 떠나온 진휼 인구가 아니라는 말인가.
대체로 도백을 그 적임자로 채우지 못한 것은 본디 조정의 책임이지만, 일을 이처럼 그르쳤으니 나라에 기강이 있는 이상 어찌 후일을 징계하는 방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도백이 그처럼 세월이나 보내고 앉았으니, 고을 수령들이 제대로 마음을 다하지 않게 되는 것은 형편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 저 호소할 데 없는 백성들이 어찌 ‘조정이 우리를 구제하는 정사에 무심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도백의 일은 구구 절절 모두 형편없으니, 평안도 전 감사 정창성과 함경 감사 이병모를 삭직하라.
비변사 낭청의 수본(手本)을 살펴보면, 서북 지방의 유민으로서 서울에 와 있는 사람은 약간 명에 불과한데, 그 가운데 해서(海西) 사람이 가장 많아서 거의 수백 명이나 된다. 황해 감사 이홍재에 대해서도 다시는 서용(敍用)하지 않는 법을 적용하라. 말은 토착민이라고 하지만 뿌리가 원래 튼튼하지는 못하던 것인데, 임(壬)·계(癸) 연간에도 이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 다른 도의 유민들은 모두 세후(歲後)에 고향을 떴는데 본도는 모두 다 지난 겨울에 올라왔다고 한다. 이것부터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영서(嶺西) 지방으로 말하면, 작년 농사가 흉년이었지만 그래도 양서(兩西)나 북관(北關)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다른 데로 떠나가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모두 자기 직책을 제대로 다하지 않은 죄이다. 원춘도 전 감사 이도묵을 파직하라.
이번의 이 하교는 기강을 정돈하자는 데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이 이전에도 거듭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형편이 매우 절박하였지만 도백과 수령들이 그래도 이렇게까지 멋대로 애쓰지 않는다거나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작년에 법을 위반한 여러 도가 똑같은 것은, 전적으로 조정이 안면 관계에 너무 치우치다보니 나약한 자나 탐오한 자에 대하여 묘당에서 말하지 않고 대간들도 논박하지 않은 탓이다. 오늘도 내일도 이도 저도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각 해당 도에 행회(行會)하여 방방 곡곡에 알려줌으로써, 여러 도의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사과하는 지극한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를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체로 위엄은 청렴에서 생기는 법이다. 그런데 근래의 고을 수령들은 대부분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문관들은 전부 일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고 심지어 무관 출신 수령들도 나쁜 일을 본뜨는 자가 많다. 경은 몇 해 동안에 벼슬이 정경(正卿)에 이르렀으니, 이런 무리들에게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고을 수령을 영송(迎送)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고, 반드시 징계하고 가다듬을 방법을 생각하라. 이것은 관서(關西) 일로(一路) 뿐만이 아니라, 또한 각 도의 본보기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풍속으로 말한다면, 지난번 조엄(趙曮)의 일은 어찌 원통한 것이 아니겠는가. 경은 반드시 은혜에 감사하여 있는 힘을 다할 방도에 대해 생각하고, 요즘 풍속의 고식적인 버릇을 본받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영흥 부사(永興府使) 임흘(任屹)과 곡산 현감(谷山縣監) 김노성(金魯成)을 붙잡아다가 심문하라고 명하였다. 유민들을 안집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민시(鄭民始)를 형조 판서로, 조경(趙瓊)을 예조 판서로, 이명식(李命植)을 판의금부사로, 이시수(李時秀)를 황해도 관찰사로,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4일 을묘
종묘(宗廟)·영희전(永禧殿)·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를 삭직(削職)하라는 명을 취소하고, 그대로 죄를 진 채 시사(視事)하라고 명하였다.
어가(御駕)가 종가(鍾街)를 지나다가 4도(道)의 유민들을 모아놓고 선혜청 제조 서유린(徐有隣)·정창순(鄭昌順)을 시켜 타이르게 하기를,
"너희들의 누더기 꼴과 먹을 것을 달라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처참한 느낌이 든다. 너희들만 보고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였지만 서울에 들어온 사람들이 이처럼 많으니 아직 올라오지 않은 사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지금 너희들이 돌아갈 때 먹을 식량을 지급하고 있는데, 비록 이것이 만분의 일도 도움이 되지 못하겠지만 조정의 한결같은 생각이야 어찌 조금인들 늦춘 적이 있겠느냐. 너희들은 각자 본고장에 돌아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알려주어, 각기 사는 곳에 안착하여 집안을 보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제 고장에 안착하여 생업에 재미를 붙일 수 있는 대책을 물어보니, 유민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환곡을 달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농사지을 양식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하교하기를,
"듣건대, 너희들이 이미 환곡을 납부하였다니, 그것을 중지하거나 감해주라는 명령이 도리어 소용없게 되었다. 너희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 마땅히 올해의 환곡을 주도록 하고 이어 기한을 물려줄 것이며, 신포(身布) 또한 올해분은 탕감해줄테니, 너희들은 믿고 걱정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 어련(御輦) 앞에서 늙은이와 장정에게는 쌀 5두(斗) 씩을 주고 아이들과 허약한 자에게는 쌀 3두 씩을 주었으며, 옷차림이 얇은 사람과 어린애를 안은 아낙네에게는 유의(襦衣) 한 벌씩을 주었다. 곡산(谷山)의 유민 중에 나이 90살이 넘은 사람이 서울에 머물러 있겠다고 자원(自願)하니, 보릿가을 때까지 급료(給料)하라고 명하였다. 비변사의 문무 낭청과 선전관들을 분담시켜 유민들을 데리고 가서 전에 살던 고을에 넘겨주게 하고, 안착한 실태를 각 해당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장문(狀聞)하도록 명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이시수(李時秀)를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서북 지방의 기민(饑民)들을 행차를 멈추고 만나보았을 때 가장 많은 것이 해서(海西) 지방 사람이었다. 이런데도 도신의 장계에는 죄를 수령에게만 떠넘겼으니, 수령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은 유독 도신의 죄가 아니라는 것인가. 두 도의 감사에게는 다 견삭(譴削)하는 벌을 적용하였는데 유민이 가장 많은 해서의 도백에게는 다시 서용하지 않는 벌로 그친다면, 너무 가벼운 셈이 된다. 황해도 전 감사 이홍재(李洪載)에게도 삭직(削職)하는 법을 적용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오늘 어가(御駕) 앞에 대령(待令)한 백성들은 단지 백분·천분의 일이었지만 한 모퉁이를 들어 그 나머지 세 모퉁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위로하고 무마하는 조치가 단지 서울에 들어온 몇몇 사람에게만 취해지고, 진짜로 굶주리고 진짜로 죽어가는 호소할 데 없고 돌아갈 데 없는 백성들은 차별없는 혜택을 입지 못한다면, 이 어찌 감사나 수령들의 책임만 되겠는가. 내가 덕이 없어서 백성들의 부모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된다. 말이 여기에 미치면 밥을 먹어도 어찌 맛이 있으며, 잠을 자도 어찌 편안하겠는가.
만일 길 떠날 차비를 하는 신임 도백이나 처벌을 기다리는 북백(北伯)003) 이 조금이라도 나의 명을 잘 받들어나갈 방안을 생각한다면, 이제부터 가을 추수 이전까지 비록 스스로 편안하고 스스로 한가한 틈을 가지려고 한들 되겠는가. 각기 깊이 생각하고 더욱 힘을 써서, 조금도 해이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오재순(吳載純)을 예조 판서로 삼고, 김사목(金思穆)을 발탁하여 형조 판서로 삼았다.
2월 5일 병진
조정진(趙鼎鎭)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문영(洪文泳)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우포도 대장 이한풍(李漢豊)을 파직시키고 서유대(徐有大)를 그 대임자로 삼았으며, 이주국(李柱國)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도적떼가 경기 지방에 출몰하여 마을을 약탈하였다. 경외(京外)에서 뒤쫓아 붙잡으려 하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양주(楊州)의 중군(中軍) 김취명(金就明)이 붙잡아 바쳤다. 이에 특별히 가자(加資)를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일전 경연 석상에서의 하교는 기한(期限)을 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외읍(外邑)의 토교(土校)가 붙잡아 바치었다. 명색이 포도 대장으로서, 처음에 이미 법을 어기고 내보내고서는 도리어 외방(外方) 사람에게 체포자의 자리를 내주었으니, 이러한 포도 대장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우포도 대장 이한풍에게 다시 서용하지 아니하는 법을 적용하라.
비록 연석(筵席)에 함께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들어서 알지 못했겠는가. 제대로 검칙(檢飭)하지 못한 죄는 똑같다. 더구나 양주의 중군에게 가자(加資)를 한 마당에 와서는, 포도 대장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어떻게 모면할 수 있겠는가. 좌포도 대장 조규진(趙圭鎭)은 1분기 동안 월봉(越俸)하라."
하였다.
2월 6일 정사
서유린(徐有隣)을 판의금부사로, 오재순(吳載純)을 예문관 제학으로, 정호인(鄭好仁)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진휼청이, 4도(道)의 유민(流民)들에게 쌀과 베를 나누어 주었음을 아뢰었다. 【4도의 유민이 3백 42명이었는데 장정(壯丁) 1인당 쌀 5두씩을 주고 어린아이에게는 각기 쌀 3두씩을 주었다. 그 가운데 노약자 45명에게는 유의(襦衣) 대신 면포(綿布) 45필(匹)과 돈 45냥을 주었고, 추가로 넘겨준 1백 45명에게 장정에게는 쌀 3두, 어린아이는 쌀 2두씩을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90면
【분류】구휼(救恤) / 호구(戶口)
2월 7일 무오
정민시(鄭民始)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2월 8일 기미
어가(御駕)가 수원부(水原府)에 머물렀다.
2월 9일 경신
현륭원(顯隆園)에 전배(展拜)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걸어서 원(園) 위로 올라가 좌우 산기슭을 두루 살펴보았다.
수원(水原)의 동헌(東軒)을 장남헌(壯南軒)이라 이름짓고, 내사(內舍)를 복내당(福內堂)이라고 이름지었으며, 사정(射亭)은 득중정(得中亭)이라고 이름지었는데, 모두 임금의 글씨로 현판(懸板)을 썼다.
2월 10일 신유
어가(御駕)가 독성 산성(禿城山城)에 나아가 장대(將臺)에 올라갔다. 운주당(運籌堂)에 이르러 산성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위로하기를,
"그대들 중에는 나이 많은 노인이 많으니 경진년에 어가가 머물렀을 때 구경한 사람이 있겠구나."
하니, 부로들이 아뢰기를,
"경진년에 온천에 행차할 때 어가가 운주당에 머물러 숙소(宿所)로 삼았는데, 신들은 거의 다 의장(儀仗)들을 반갑게 쳐다보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의 일을 너희들은 기억하고 있는가?"
하니, 부로들이 일제히 아뢰기를,
"어가가 머무른 날에 친히 백성들의 고충을 물어보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내려주었으며, 진남루(鎭南樓)에 올라 과녁을 쏘아 연거푸 4발을 맞추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내가 31년 만에 이 산성에 올라 이 집에 앉아서 백성들을 불러 예전 일을 묻노라니, 슬픈 감회를 누를 수 없다. 뜰 안에 들어온 부로(父老) 가운데 온천 행차 때 은전(恩典)을 입은 사람은, 승려이건 속인(俗人)이건 간에 나이를 따지지 말고 특별히 한 자급(資級)씩 올려주고, 성 안의 민가에는 매 호(戶)마다 쌀 한 섬씩을 주어, 이날의 감회가 깃든 뜻을 표시하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득중정(得中亭)에 들러 각신(閣臣)·장신(將臣)들과 더불어 과녁을 쏘았다. 상이 다섯 발을 쏘아 네 발을 맞히고는, 옆에 있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활을 쏜 것이 마침 경진년의 옛 일과 똑같으니, 마땅히 뜻을 보이는 일이 있어야 하겠다."
하고, 지방관 조심태(趙心泰)에게 금갑(金甲) 한 벌을 내려주었다.
2월 11일 임술
문과(文科)·무과(武科) 별시(別試)를 설행하였다. 수원(水原) 사람 3인과 과천(果川)·광주(廣州) 사람 각 1인씩을 뽑으라고 명하여, 이덕승(李德升) 등 5인을 뽑았다. 유생(儒生) 신덕우(辛德羽)·김성운(金星運)·조만원(趙萬元) 등이 처음에 수원 사람으로서 합격을 하였으나 호적(戶籍)이 없었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모두 빼내어 충군(充軍)할 것을 청하니, 상이 난처하게 여겼다.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 등이 모두 법은 신용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고, 대사간 홍문영(洪文泳)은 계사(啓辭)를 올려 극력 쟁집하였다. 이에 상이 그들의 이름을 빼버릴 것만을 명하였다.
서북 지방의 유민 수십 명이 어가가 지나는 길 옆을 지나가니, 상이 길을 멈추고 그들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이제 너희들의 부역과 환곡을 면제해줬으니, 너희들은 고향에 돌아가서 편안하게 살도록 하라."
하고는, 이어 장용영(壯勇營)에서 돈과 베를 주고 진휼청에서 증명첩을 주어 호송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경기 관찰사와 수원 부사에게 유시(諭示)하였다.
"이번 행차에 본부(本府)를 둘러보니, 새 고을의 관사(官舍)는 비록 틀이 잡혔으나 민가(民家)는 아직 두서(頭緖)가 없다. 그 가운데 이른바 약간 지어놓은 집이라는 것은, 땅굴도 아니고 움막도 아니어서 달팽이 껍데기 같기도 하고 게딱지 같기도 하다. 지금 짐작에는, 집들이 줄지어 서고 거리가 번창하여 엄연히 서울 근처의 큰 도회지가 되기란, 본래 짧은 시일에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만약 별도로 방안을 강구하여 사람들을 불러 일으키어 모아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마음을 놓고 생각을 늦출 수 있겠는가. 어가를 옮기는 날에 가마를 멈추고 부로들을 불러 물어보았지만 백성들이 어리석어 대답할 바를 몰랐다. 새 고을의 소재지가 옛적 고을보다 낫게 되자면, 오직 조정에서 꾸려나가기에 달려 있으니, 묘당의 신하들은 십분 토의하여 빈대(賓對) 때에 아뢰도록 하라.
사람들을 모아들이려면 우선 생활할 수 있게 꾸려주어야 하고, 생활을 꾸려주자면 우선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고 그들이 생업에 재미를 붙이게 해줘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토지의 구획을 정해주는 것이고, 그 다음은 힘써 옮기도록 하는 것이다. 반복해서 생각해도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원소(園所)의 국내(局內)·국외(局外)에 토지의 지가(地價)를 너무 바듯하게 정해서 백성들이 억울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지방관이 별도로 조사해내어 여유있게 운영하여, 조금 완전히 모여들고 자리를 잡게 되기를 기다리고, 또 그들로 하여금 힘껏 농사를 짓도록 해주는 외에 다시 직접 장사하여 이익을 보게 한다면, 장차 집집마다 면모가 달라지는 성과가 있게 될 것이다. 숙소에 나아가 있으면서 이 일이 잊혀지지 않아서, 이에 또 촛불을 가져오라고 하여 거듭 유시하는 것이니, 지방관은 공경히 받은 후에 부로들을 모아놓고 일일이 깨우치도록 하라.
소민(小民)은 쉽게 다룰 수가 있으므로 이상과 같이 한다면 혹 안정을 시킬 수가 있을 듯하고, 대민(大民)들이 가게[廛]를 받으려는 바람에 대해서는, 지적해서 억지로 몰아넣어서는 안 될 일이다. 지방관에게도 즉시 알려주어서, 본부의 사민(士民)들을 위해 항시 잊지 않고 있는 나의 고심과 지극한 뜻에 부응토록 하라."
저녁에 과천현(果川縣)에 머물렀다. 아헌(衙軒)을 부림헌(富林軒)이라고 이름짓고, 내사(內舍)를 온온사(穩穩舍)라고 이름지었는데, 어필(御筆)로 현판(懸板)을 썼다.
2월 12일 계해
관왕묘(關王廟)에 들러 돌아보고 환궁(還宮)하였다.
창빈(昌嬪)의 묘소와 고(故)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고 충신(忠臣) 이복남(李福男), 고 충목공(忠穆公) 이상집(李尙)의 묘소와 청해백(靑海伯) 이지란(李之蘭)의 사당에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연로(輦路)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차천로(車天輅)의 묘소가 과천현에 있다는 말을 듣고 하교하기를,
"그는 글을 잘 지을 뿐 아니라, 또 특이한 공로가 있다. 연전에 이미 그의 유집(遺集)을 찾아내어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인쇄하게 하였다."
하고는, 이어 천로와 복남의 자손들을 찾아 물어서 아뢰라고 명하였다.
2월 13일 갑자
전 우의정 김종수(金鍾秀)를 특별히 서용(敍用)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 축현(杻峴)에서 머리를 땅에 쑤셔박고 밭 사이에 엎드려 있는 어떤 사람을 보고, 내심 시골 구석의 선비가 행차를 맞이하는 규례도 몰라서 그런가보다고 여겼는데, 어가가 지나친 뒤에도 자꾸 의아한 느낌이 들어서 승선(承宣)에게 물었더니, 전 우상(右相)이라고 대답하였다.
지난번의 일은, 그의 본심이 어떻든간에 다른 대신의 경우라면 어찌 그처럼 박절(迫切)하게 하였겠는가. 그러나 전임 우상이었던 까닭에 지나치리만큼 그에게 완전하기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처럼 은혜와 대우를 받은 사람이 이러한 사단(事端)이 있었으니, 처분이 무거운 게 아니라 가벼운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일이 꽤 오래되어 정리(情理)상으로도 자연 달라졌으니, 대신을 우대하고 처지를 살펴주는 도리로 볼 때, 언제까지고 그대로 놔둘 수 없는 일이다. 전 우의정 김종수를 서용(敍用)하라."
하였다.
홍억(洪檍)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성연(洪聖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변지건(卞至健)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하교하였다.
"오래된 환곡을 수량을 나누어 받아 들이기로 하면, 한갓 협잡꾼들의 농간만 불어나게 되고, 그렇다고 가장 오래된 환곡을 섞어서 받기로 하면, 그 폐단이 더욱 심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묵은 환곡에 대하여 만약 묘당(廟堂)에서 분배하는 것이 없을 경우, 모두 가장 가까운 해의 것으로 거행하도록 하는 것을 규례로 정하라."
장령 최경악(崔景岳)이 상소하기를,
"요즈음 걱정스러운 일이 일곱 가지입니다. 성상의 학문에 꾸준하고 빛나는 알맹이가 없는 것이 첫 번째 걱정스러운 일이고, 위와 아래가 서로 믿어주는 알맹이가 없는 것이 두 번째로 걱정스러운 일이고, 여러 신하들이 일을 맡아 나서는 알맹이가 없는 것이 세 번째 걱정스러운 일이고, 인재를 찾아 등용하는 알맹이가 없는 것이 네 번째 걱정스러운 일이고, 민생(民生)을 보살펴주는 알맹이가 없는 것이 다섯 번째 걱정스러운 일이고, 언로(言路)가 트여 있는 알맹이가 없는 것이 여섯 번째 걱정스러운 일이고, 기강이 바로잡히는 알맹이가 없는 것이 일곱 번째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오늘날 경연(經筵)의 관원들은 학문에 부족한 면이 많고 성의 또한 모자라서 이따금 책을 끼고 연석에 들어가도 성상의 마음에 필적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강(進講)하는 날이 매우 드뭅니다. 이에 경연은 거의 폐지되다시피 되었고, 관직(館職)은 간혹 비어 있는 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정사하는 요체와 당면한 폐단에 대하여 일찍이 자문(諮問)한 적이 없으니, 성상의 묻기 좋아하는 성의에 처음과 끝이 이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후 신하들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받들어 보좌하는 신하들이 더러는 성실함이 부족하여 믿음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 가운데 애써 건의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나선다고 의심을 하시고, 기절(氣節)을 숭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과격하게 군다고 의심을 하십니다. 여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면 그에게 패거리가 있는 것으로 의심을 하시고, 죄과에 대하여 논척하면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으로 의심을 하십니다. 그리하여 신하들에 대한 통제가 정도에 지나치고 예우하는 대접이 꽤 무너졌습니다. 이 때문에 이름이 조적(朝籍)에 오른 사람은 항상 느긋하고 온화한 기상이 적고 늘 황급해 하고 두려운 생각을 지니다 보니, 임금의 도는 나날이 드세어지고 신하의 도는 나날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국가가 관청을 설치하여 직임을 나눈 바에는 각기 유사(攸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재상이라는 사람들은 묘당에서 토의한다는 것이 고작 자질구레한 사무에 불과하고, 백성과 나라의 이해(利害)에 관한 것은 한 번도 건의하거나 설행한 적이 없으며, 총재(冡宰)라는 자는 나라의 공기(公器)를 자기의 사사로운 물건처럼 보고 있는데도, 그의 큰 세력에 눌리어 누구 하나 감히 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리가 가까운 사람이면 기어코 발탁하여 올리려고 하고, 또 사람을 색목(色目)에 따라 배치하여 마치 보기좋게 구색을 맞추어놓는 듯이 합니다. 홍문관 관원에 선발된 사람은 단지 문지(門地)와 벌열(閥閱)의 고하만을 살피고 문학(文學)이 있고 없고에 대해서는 따져보지도 않으며, 사색(四色) 당파로 참작하여 구차하게 수효를 채울 따름입니다. 간관(諫官)으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임금의 결함과 부족한 면을 보충해주는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고, 자기와 의견이 같으면 패거리를 짜고 의견이 다르면 공박하여, 단지 자기의 사정(私情)만을 이룰 뿐입니다. 이외에 여러 관청의 관원들의 경우도 자기가 맡은 일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른 채, 그저 날이 가고 달이 차서 더 높은 자리로 승진이 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감사(監司)라는 자는, 봄철과 가을철에 고을을 순찰하는 업무를, 유람하며 관광하는 기회로 여기고, 겨울과 여름에 수령들의 치적을 평가하는 일은 형식적인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고을의 수령이란 사람들은 백성들에게 법도없이 수탈하여 자신을 살찌울 일만을 생각하고, 권세 있는 고관(高官)을 잘 섬겨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절도사로 말하면, 형벌을 엄하게 하는 것으로서 자기의 위신을 높이고, 백성들을 모질게 착취하여 자기 생활에 보태며, 진영(鎭營)의 장수(將帥)들은 먼저 군졸이 몇 명인가부터 물어가지고 군포(軍布)의 많고 적음을 가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안팎의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자리나 채우고 있을 따름이니, 이것이 세 번째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수용(收用)하는 일을 급선무로 삼고 있으나, 시속에 맞추어 약삭빠르고 영리하게 구는 자는 항상 선발이 되고,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 벼슬길에 나오는 데 대해 소원하게 여기는 사람은 찾아내는 대상에서 빠집니다. 공경(公卿)의 자제들은 못하는 벼슬이 없는데, 시골의 선비들은 발탁될 길이 없습니다. 도(道)에서 천거한다는 것도 서로의 안면 관계에 따르고 무직(武職) 또한 이력(履歷)만을 따르니, 어떻게 모든 관원을 바로잡아 여러 정사를 빛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네 번째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전하께서는 소민(小民)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할까 염려하고 계시나,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탐오(貪汚)하는 기풍이 성행하다 보니, 암행 어사가 염탐을 하더라도 백성들의 고통을 수소문하여 아뢰는 바가 전혀 없고, 환곡에 대한 납부 기한을 물려주더라도 실질적인 혜택을 받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봄에 꾸어주어 겨울에 받아들임에 쭉정이가 태반이라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모두 시달리게 되고, 군포(軍布)와 신역(身役)을 딱히 받아낼 곳이 없어 이웃과 친족들이 그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궁차(宮差)를 없앤 것은 실로 훌륭한 조처였으나, 관청 하인들의 침탈은 여전합니다. 서울에 바칠 때 인정(人情)을 쓰는 것은 본래 금령(禁令)이 있는데도 관청 서리들의 수탈은 갈수록 심합니다.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장차 유망(流亡)하고야 말 것이니, 이것이 다섯 번째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전하께서는 어떤 일을 당하게 되어도 바른 말을 구하고, 재앙을 만나도 바른 말을 구합니다만, 올린 장소(章疏) 가운데 어쩌다가 전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조금도 가차없이 현저하게 거부하고 배척하며, 또 그런 글을 계속해서 올릴까봐 염려되면 즉시 정원을 시켜 물리치게 합니다. 이 때문에 언책(言責)을 맡고 있는 자는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는 것을 능사(能事)로 여기고, 지방에 나가 있었다고 핑계대는 것을 묘책(妙策)으로 삼습니다. 바른말을 하려는 자에 대해서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하고, 아무말도 하지 않는 사람을 세상에서는 조심성있는 사람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하여 전하의 조정에 바른말이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임금 앞에서 따지거나 조정에서 간쟁하는 것은 바랄 수도 없게 된 지 오래이고, 허물과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일조차 구경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그저 무사 안일한 태도로 날짜만 보내고 말할 길이 막힌 것이 유행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다가는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겠습니까. 이것이 여섯 번째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나라의 기강이 점차 해이하게 되어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고, 간사한 아전들이 나랏돈을 가지고 농간을 부리고, 사나운 군졸들이 조정 관원을 모욕합니다. 과장(科場)을 신칙하는 분부가 엄한데도 난잡한 일은 계속 발생하고,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는 데 대하여 여러 차례 자문을 구하였지만, 거행하는 것이 불성실합니다. 세력이 있고 없음만 살피다 보니 옥송(獄訟)은 억울한 판결이 많고, 잇속만 추구하다 보니 분경(奔競)이 날로 심해갑니다. 심지어 속임수가 유행처럼 되다시피 하여 명령이 시행되지 않으니, 이것이 일곱 번째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무릇 이 일곱 가지의 걱정거리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성상께서 위에서 애를 쓰고 아래에서 좋은 의견들이 수없이 올라가더라도, 실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전하는 보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서북 지방의 유민(流民)들을 살펴보면,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이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데 대해 뭇의논이 다들 그렇다고 말합니다. 장마와 가뭄의 피해를 상주(上奏)할 때에도 이미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고, 기근을 구제하는 대책은 아예 설시(設施)하지도 않았습니다. 10월에 창고를 봉인(封印)하자 온 도민(道民)들이 모두 통곡하면서,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애를 이끌고 흩어져 사방으로 떠나갔습니다. 해서(海西) 지방과 같은 곳은 산골에 가까이 인접한 여러 고을이 바로 큰 흉년이 들었는데도, 방백(方伯)이라는 자는 이를 도외시한 채 그들이 떠나가는 대로 놔두었습니다. 양서(兩西) 도신(道臣)들에 대해 모두 유배시키는 법을 적용해야 마땅합니다.
죄인들을 서북(西北) 지방에만 귀양보내고 있는데, 이런 흉년을 당하여 주객(主客)이 다같이 쪼들리게 됩니다. 농사가 조금 잘 된 남쪽 고을에 이배(移配)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영남(嶺南)의 도신(道臣)은 자기 친척의 원수를 갚으려고 상주(尙州)의 유리(由吏)와 방기(房妓)에게 모두 엄한 형장을 가하여 한 해가 넘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 연전에 암행 어사가 몰래 조사를 할 때에 상주 목사 심기태(沈基泰)의 허다한 잘못된 정사가 유리(由吏)로 인해 숨겨지지 않았고 방기(房妓)를 통하여 사실대로 공초(供招)되었습니다. 이일은 죄줄 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사적인 청탁을 곡진히 따랐기에 이와 같이 중하게 다스렸던 것이니 이로부터 누군들 어사를 두려워하며 사실대로 말하려고 하겠습니까. 또 감영의 청사(廳舍)를 짓기 위하여 제창(濟倉)의 돈 3만 냥을 가져다가 쓰고도 결국은 백성들에게서 거두는 바람에 원성(怨聲)이 하늘에까지 사무쳤습니다.
이상 두 가지 일만 보더라도 그가 사정(私情)에 따르고 불법적인 일을 하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경상 감사 이조원(李祖源)에 대하여 속히 파직시키는 법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욱(李煜)은 자기의 비장(裨將)을 시켜 연로(沿路)에서 소란을 피우게 하였는데 역졸을 잘 달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때려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인명(人命)이 얼마나 중대한 것입니까. 더구나 명령을 전달하는 자리는, 관계된 바가 더욱 어떠한 것입니까. 그런데 감히 이렇게 죽여버리니,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이욱에 대해 삭직(削職)하는 법을 어서 적용하고, 원범인(元犯人)은 기어코 목숨으로 보상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거창 부사(居昌府使) 원택진(元宅鎭)이 환곡을 내다가 팔아먹은 일은 모든 사람들이 다 본 일이고, 양전(量田)을 하면서 돈을 거둔 일은 온 고을 사람들이 다들 원망합니다. 두 명의 첩(妾)이 뒤질세라 앞다투어 뇌물을 받아들이고, 세 건의 살인 옥사(獄事)를 끝내 판결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 종래 사람들의 말이 실로 거짓말이 아니었는데 단지 그가 속여 공술(供述)하는 바람에 그냥 석방되어 제자리에 돌아가서는 도리어 의기양양하여 더욱 보란듯이 탐학(貪虐)을 부렸습니다. 또 본현(本縣)에 보관한 베를 팔아가지고 입본(立本)하여 모조리 자기 주머니에 넣었으며, 작년에 원(園)을 옮길 때 숙마(熟麻)·채품(菜品) 등의 물건들은 고을 수령들이 모두 관청에서 자비(自備)하였는데 오직 저 거창(居昌)만은 원을 옮길 때에 쓰는 물건이라고 하면서 돈으로 대신 인부(人夫)들에게서 받았는데, 그 수량이 거의 수백 냥이나 되었습니다. 또 군사 조련을 한 뒤에는 군사들을 호궤(犒饋)한다는 명목으로 여덟 사람을 내세워 쌀을 거둔 것이 자그마치 80여 석(石)이나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온 고을이 뒤숭숭하여 도탄에 빠진 듯하였습니다. 청컨대 원택진에 대하여 삶아 죽이는 법을 적용하소서.
함안(咸安) 전 군수 장제두(張齊斗)는 권세가를 잘 섬겨 실없이 헛된 명예를 얻었습니다. 일찍이 함안에 재임하면서 그의 친형을 장사치로 꾸며가지고 마포(馬浦)에 매복시켜 두고서 장삿배를 집결시켜 장사를 하여 이익을 본 쌀 1천 5백 석과 밀 1천 5백 석을 전부 자기 집에 배로 실어갔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그를 북방의 도적이라고 불렀습니다. 더구나 재작년에 잠깐 교체되었다가 금세 도로 유임되었을 때 새로 부임할 관원의 쇄마전(刷馬錢)이라고 핑계대고 강제로 5백 냥을 받아내었으니, 그의 탐욕스러움을 알 만합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가 잘 다스리는 것으로 잘못 알고 또 북쪽 고을을 맡겼으니, 이것은 전적으로 즉묵 대부(卽墨大夫)와 아 대부(阿大夫)처럼 헐뜯는 말과 칭찬하는 말이 실제와 상반되는 데에 연유합니다. 장제두에게도 장률(贓律)을 적용해야 하겠습니다.
태학(太學)이란 어진 선비들이 모인 곳이고, 나라의 원기(元氣)가 되는 셈입니다. 공의(公議)를 주장하여 올곧은 기운을 신장(伸張)하므로, 더러 관원에 대하여 벌을 적용함에 언론(言論)이 굽혀지지 않으며, 더러 임금에게 항장(抗章)함에 그 풍모가 볼 만하게 살아나곤 합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선비들의 풍습이 날로 나빠져서, 조정 관원에게 모욕을 받고 임금에서 경시당한 결과, 그들의 말은 성상의 마음에 들지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공자(孔子)를 배우고 있고 그들의 마음은 나라에 쏠려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비답을 내려주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올린 글을 불에 태워버리시니, 어찌 성명(聖明)의 세상에 이처럼 과도(過度)한 일이 있을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외방(外方)의 유생들 가운데 간혹 글을 올리는 이가 있으면 밖에서부터 손을 내저어 물리치고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그들은 달이 지나고 해가 바뀌도록 타고 온 말을 내팔고 입은 옷을 전당잡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태학에서 글을 올리면 반드시 비답을 내리고 불사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고, 외방 유생들의 상소는 후원(喉院)에 분부하여 즉시 봉입(捧入)하도록 해야 합니다.
고(故)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의 충성과 절의(節義)는 세 재상과 여섯 신하들보다 밑돌지 않습니다. 그의 후손을 녹용(錄用)할 데 대해서는,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이미 이러한 논의를 제기하였고, 고(故) 참판 박사정(朴師正)과 유신(儒臣) 신복(申馥) 또한 연석에서 품지(稟旨)하고 상소로 호소하여, 연이어 승전(承傳)이 있었지만 아직껏 조용(調用)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외람되고 잡된 무리들을 살펴보면 일찍이 조상의 음공(蔭功)도 없는 사람들인데, 이런 자들은 벼슬에 등용이 되는 가운데 저들은 등용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사(私)가 공(公)보다 우세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흥도의 후손을 특별한 규례로 수용(收用)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은 것이 오늘날처럼 심한 적이 있었겠는가. 시정(時政)의 잘잘못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민생(民生)의 고락에 대해서조차 자세하게 진술하는 사람이 없으니, 바른말을 듣기 싫어했다는 책임을 내가 피할 수 없다고 하겠다. 너의 상소를 봄에 처음부터 끝까지의 천만 마디 말이 나라를 걱정하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음을 느낄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갸륵한 일인가.
맨 첫머리에 얘기한 문제는, 너의 말이 옳으니 마땅히 명심을 하겠다. 그 다음으로 얘기한 문제인 위 아래가 서로 믿지 않는다는 점도, 정말 네 말과 같으니 이 또한 유의하겠다. 그 다음에 얘기한 시정(時政)의 폐단들은, 한마디 한마디가 약석(藥石)과 같은 말이었다. 여러 신하들 가운데는 일을 맡아 나서는 자가 없고 인재에 대해서는 수용하는 실제가 없다고 말한 두 가지는, 고질적인 병통에 대하여 잘 지적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언로(言路)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너의 말도 역시 좋다. 다만 근래에 이따금 파면, 삭직시키거나 쫓아내 귀양보내는 일이 있었던 것은 이 어찌 그만둘 수 있는 것이었겠는가. 그 허물을 보면 어진지를 알 수 있다는 뜻인 ‘관과(觀過)’ 두 글자에 대하여 너도 부디 생각해 보도록 하라.
나라의 기강이 점차 해이하게 되고 조정이 존엄하지 못한 것은, 바로 오늘날의 첫번째로 유의할 점이다. 여러 가지 얘기한 바가 또한 모두 들어둘 만한 의견이었다. 특별히 형벌과 포상으로 권장하고 징계하는 일에 유의할 생각이다. 끝부분에 얘기한 일 가운데 양서(兩西) 도신을 귀양보내자는 일은, 마땅히 조사하여 보고하는 것을 기다려 처분을 할 것이다.
북도의 백성들이 곤경에 빠져 있다는 말도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많이 들었다. 거듭되는 흉년과 백성들의 사는 형편이 비록 양서(兩西)와는 차이가 있다고 치더라도, 어찌 모두 다 거론하지 않았는가. 서북 지방에 편배(編配)하는 것을 다른 곳에 옮겨 정하라는 일은, 마땅히 도류안(徒流案)을 가져다 보고 나서 구별하여 조처할 것이다.
이조원(李祖源)의 일은, 방백(方伯)은 체면이 중하고 뜬소문이란 아무래도 그대로 믿기 어려운 것이다만, 사적(私的)인 청탁을 갖가지로 들어주었다는 것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제창(濟倉)의 돈을 멋대로 쓰고 백성들에게 근거없이 거둬들이기까지 한 한 가지 일은, 특히 애매하게 놔둘 수 없는 일이다. 마땅히 조사하여 처결하겠다.
이욱(李煜)의 일은, 얘기한 대로 시행을 하겠다. 그 군관(軍官)은 완백(完伯)으로 하여금 잡아다가 엄하게 형신하도록 해서 과연 틀림이 없으면 법대로 처리하여 목숨으로 보상을 시키겠다.
원택진(元宅鎭)의 일은, 정말 이런 일이 있었는가. 네가 이른바 삶아 죽이자고 한 말은 혹시 지나친 말이 아닌가. 일개 택진을 아껴서가 아니라, 백성들의 풍속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조사해서 처리를 하겠다. 그런데 작년의 더없이 중요한 역사(役事) 때에 실·삼·채소·과일 이외에도 백성들의 부조(賻助)라는 명목 하에 공물(貢物)로 거둘 것에 대하여 특별히 모두 면제시켜주고 그 대신 내탕고(內帑庫)의 물건들을 썼으며, 이와 아울러 균역청(均役廳)의 도움을 받았었다. 그런데 거창(居昌) 한 고을에서 백성들로부터 받아냈다고 하니 매우 의아스럽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만약 조금이라도 위반 사항이 있으면 그 죄가 더욱 어떻겠는가. 이 또한 조사를 하여 처결하겠다.
장제두(張齊斗)의 일은, 두 건의 범죄가 이미 조사하여 밝혀내기 어려운 일이 아닌만큼, 만일 비슷하기라도 하다면 그처럼 은덕을 저버린 자에게는 마땅히 갑절로 더한 형률을 적용할 것이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진정(賑政)이 끝나는대로 잡아다가 엄히 신문하도록 할 것이고, 우선 앞의 사건과 똑같이 조사하겠다.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일은, 어찌 좋아서 한 처분이겠는가. 그리고 외방에서 상소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제 이미 신칙을 하였으니, 종전과 같은 폐단은 없어질 것이다.
엄흥도(嚴興道) 후손에 관한 문제는, 전조(銓曹)에 신칙하겠다."
하였다.
경상도 유생 이술현(李述賢) 등이 상소하기를,
"경주(慶州)의 고(故) 이조 판서 경절공(景節公) 손중돈(孫仲暾)은 바로 중묘조(中廟朝)의 명신(名臣)입니다. 김종직(金宗直) 문하에 드나들며 공부하였고, 일찍이 과거에 합격하여 한원(翰苑)에서 벼슬을 하였습니다. 연산조(燕山朝)를 당하여 말 때문에 죄를 얻어 혹독하게 고문을 당했고, 중종 반정(反正) 뒤에 와서야 다시 등용이 되었습니다. 고을을 다스리고 있을 때에는 상주(尙州)의 백성들이 그의 사당을 세우고 선정(善政)을 칭송하였으며, 또 생사(生祠)까지 세웠습니다. 네 차례 방백(方伯)을 맡아서는 청렴한 절개로 스스로 가다듬었고, 누차 헌부(憲府)의 장관(長官)을 지내면서는 간사한 무리들이 숨을 죽였습니다.
중묘(中廟) 을해년에 김전(金銓)·조원기(趙元紀)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직질이 높아졌고, 또 을유년에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다섯 가지 일에 대해 상소를 한 것이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실려 있습니다. 중종(中宗) 기축년에 임금이 제문(祭文)을 내려 이르기를, ‘스스로를 가다듬는 학문을 하였고, 세상의 모범이 되는 틀이었다.’라고 하였으며, 문정공(文正公) 이행(李荇)은 말하기를, ‘학문이 독실하고 행실이 닦였으며 내면(內面)에 수양을 쌓아 외면(外面)에 그 훌륭함이 드러났다.’라고 하였으며,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은 말하기를, ‘강해(江海)처럼 도량이 크고 산악(山岳)처럼 기도(器度)가 위대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선정신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이 그 누이의 아들로서 유년 시절부터 그에게 배워 마침내 동방(東方)의 대유(大儒)가 되었음은, 선정신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문헌공(文憲公) 기대승(奇大升), 문의공(文懿公)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문원공의 행장(行狀)·비문(碑文) 등의 글에 조목조목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돈의 타고난 자질의 아름다움과 학문의 바름은, 백년이 지난 후세에도 알 수가 있습니다.
숙묘(肅廟) 을해년에 도내의 많은 선비들이 동강(東江) 가에 서원(書院)을 지었으니, 그곳은 바로 중돈이 살던 고향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껏 나라에서 사액(賜額)하지 않았으니 이 어찌 성세(聖世)의 궐전(闕典)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신들이 대궐 앞에 엎드려 청하는 까닭이니, 삼가 바라건대 해사(該司)에 특별히 명하시어 사액하는 규례를 거행토록 함으로써 사문(斯文)을 빛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서간(西磵)의 사당(祠堂)이나 익성공(翼成公)의 서원(書院)과 같은 것이 아닌 이상, 특례로 선액(宣額)하는 일을 어찌 섣불리 논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파주(坡州)의 유생 정재간(鄭在簡) 등이 상소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충숙공(忠肅公) 백인걸(白仁傑)과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이 세 선현(先賢)은, 같은 세상에 함께 태어났고 이미 죽은 뒤에는 각기 두어 칸 되는 사당이 건립되었습니다. 충숙공을 제사하는 곳은 월롱산(月籠山) 휴암(休巖) 아래에 있습니다. 문성공은 여러 선대(先代)의 묘소가 자운산(紫雲山) 자락에 있고, 문간공은 일생동안 은거(隱居)하던 곳이 곧 파산촌(坡山村) 안이었습니다. 이에 각기 그들이 살았던 곳에다가 높여 제사하는 도리를 다하고 있었는데 사당의 기둥이 세워진 후에 일부 선비들이 중간에 새로운 의견을 제기하면서 ‘청송(聽松)·휴암(休菴)·율곡(栗谷)·우계(牛溪) 네 선생이 훌륭한 덕망을 지니고 같은 고을에서 함께 태어난 것은 우연치 아니한 일이다. 한 사당에 합사(合祀)하는 것이 예법에 맞는다.’고 하여, 마침내 본주(本州)에 있는 호계(虎溪)의 한 구역을 잡아 사당을 세우고 차례대로 모실 계책으로, 월롱산에 벌였던 역사(役事)를 중지하고 서원을 호계로 옮겨서 지었습니다. 그때 문성공과 충숙공은 호계 서원에 합사(合祀)하기로 하였으나, 문정공(文貞公) 부자(父子)의 사판(祠版)에 대해서는 자손들이 의논하기를, ‘파산(坡山)은 바로 생전에 살던 곳이므로 옮겨 모실 수 없다.’고 하여, 마침내 함께 제향(祭享)하지 못하였습니다. 그후 호계 서원이 무너지게 되자 사론(士論)이 또 ‘네 선현을 이미 함께 제사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각기 옛터에 짓는 것이 낫다.’고 하여, 문성공의 위판(位板)은 자운산에 있는 사당으로 옮겨가고, 충숙공은 예법상 월롱산의 옛터로 옮겨가야 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우선 임시로 파산 서원 안에 봉안(奉安)하였습니다. 이에 청송(聽松)과 동서(東西)로 마주앉아 빈주(賓主)의 위치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바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정한 예법입니다.
충숙공을 처음에 호계에서 제사하다가 나중에 파산으로 옮긴 것이, 비록 한 고을의 선현을 함께 제사하는 의리에 해롭지는 않지만, 옛날에 살던 자운산과 파산 두 서원에다 따로따로 모시는 것에 비하면 부족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지난 을사년에 성 문정공(成文貞公)의 아우인 절효공(節孝公) 성수종(成守琮)을 파산 서원에 추배(追配)할 때에, 그 새로 제사하는 서열(序列)로 보자면 응당 청송의 다음 자리에 있어야 하긴 하였으나, 그 위판(位版)을 배정(排定)할 때에 가서는 이내 충숙공의 윗자리에다 올리어, 빈주(賓主)와 사우(師友)의 좌차(座次)를 거꾸로 두어 문정공(文正公)이 정한 예법을 준행하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소를 올려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재목을 대략 모아 월봉(月峰) 아래의 옛 터에다 두어 칸의 집을 짓고 선생의 사판(祠板)을 옮겨 모시고자 춘조(春曹)에 글을 올렸더니, 춘조에서도 아주 합당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연명(聯名)으로 호소하는 바이니, 부디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특별히 두 글자의 현판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중건(重建)하는 것은, 처음 창건(創建)하는 것과는 다른 법이다. 합사(合祀)하던 것을 어째서 갑자기 갈라서 설치하였으며, 위차(位次) 또한 어찌 지레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이미 반시(頒示)한 수교(受敎)를 어긴 셈이 되고, 한편으로는 이미 정해진 정론(正論)이 아니다. 원우(院宇)를 제멋대로 뜯어 고친 두 서원 유생들의 일은, 모두 분수에 지나친 죄과(罪科)를 범한 것이다. 해당 수창(首昌) 유생은 모두 정거(停擧)하고, 충숙공 백인걸은 이전대로 합사(合祀)하되, 위차는 종전처럼 하라."
하였다.
전라도 유생 박태규(朴泰奎) 등이 상소하기를,
"부안현(扶安縣)에 도동 서원(道東書院)이 있는데 바로 고려조(高麗朝)의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를 제사하는 곳입니다. 명(明)나라 가정(嘉靖)갑오년004) 에 창건하였고, 선조(先朝) 병오년005) 에 이르러 증 영의정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을 추배(追配)하였습니다. 대개 문정공이 생전에 머물러 살았던 곳이고, 충정공을 사모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김구는 고려조 때, 문교(文敎)가 널리 퍼지지 못하여 이단(異端)이 멋대로 횡행하는 시기를 당하여 홀로 유교를 추켜 세우고 사교(邪敎)를 배척하여, 정학(正學)을 천명(闡明)함으로써 우뚝하게 백세(百世)의 사표(師表)가 되었습니다.
권신(權臣) 최항(崔沆)이 《원각경(圓覺經)》의 발문(跋文)을 써달라고 요청하였을 때 김구는 바른 도리를 지켜 굽히지 않고 시(詩)를 지어 나무라고 꾸짖었는데, 최항이 이에 감정을 품고 제주 통판(濟州通判)에 좌천(左遷)시켰습니다. 원(元)나라의 사신이 나왔을 때에는 난신(亂臣) 강윤소(康允紹)가 또한 오랑캐 복장을 하고서 나와 스스로 객사(客使)인 체 굴면서 임금을 보고도 절을 하지 않으므로, 그를 규탄하였습니다. 그때 통역관들이 미천하여 말에 틀리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건의하여 마침내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여 문관으로 하여금 한어(漢語)를 분명하게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만년(晩年)에는 학도들과 더불어 도학(道學)을 강론하고 성리학을 토론하였는데, 도학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까 우려하여 일찍이 《전의발계(傳衣鉢啓)》를 지어서 김인경(金仁鏡)에게 사례하였으니, 그가 옛 성인을 계승하고 후인의 앞길을 안내해준 공로는 참으로 더욱 훌륭합니다. 그러므로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는 그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공적을 쌓았다고 칭송하였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그를 ‘명현(名賢)’이라고 칭송하였는데, 이는 비문(碑文)에 나타나 있습니다.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으로 말하면, 바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명나라의 충신(忠臣)이자 우리 나라의 열사(烈士)입니다. 그의 절의(節義)는 해와 별처럼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어, 신들이 다시 열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분은 도학으로서 다른 한 분은 충절(忠節)로서, 그리고 학문과 행실이 탁이(卓異)한 진사(進士) 최수손(崔秀孫)을 함께 한 서원에 배향하여 백세토록 길이 제사지낼 것이니, 사액(賜額)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어서 액호(額號)를 내려주소서."
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2월 14일 을축
형조가 아뢰기를,
"춘천(春川)의 유학(幼學) 남백승(南百昇)이 상언(上言)하기를, ‘저의 할아버지 남경용(南景容)은, 일찍이 고(故) 판부사 조재호(趙載浩)가 한창 합사(合辭)에 의해 성토를 당하고 있을 때에 연루되어 붙잡혀 죽었습니다. 연루된 이유는, 그 당시의 죄인 엄홍복(嚴弘福)의 공사(供辭)에 「본인이 춘천에 갔을 때 이름은 알 수 없는 남 봉사(南奉事)라는 자도 상신(相臣)의 좌석에 있었다.」고 하였기 때문에, 대사간 이기경(李基敬)이 발계(發啓)하여 낱낱이 논열하면서 어서 붙잡아다 신문할 것을 청한 결과 끝내 모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을미년 봄에 상신의 딸이 신문고(申聞鼓)를 치고 원통한 일을 호소함으로써 은전을 입어 원한을 씻었고 보면, 저의 할아버지가 아직껏 죄적(罪籍)에 올라 있는 것이, 어찌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깨끗이 정리해주는 은전을 특별히 베푸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고(故) 상신(相臣)에 대한 복관(復官)의 명이 이미 선조(先朝) 때에 있었다면, 이 사람이 아직껏 죄적에 올라 있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소원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사직 서유린(徐有隣)이 상에게 아뢰기를,
"고(故) 충신(忠臣) 유응부(兪應孚)는 포천(抱川) 사람이었는데 그가 살던 집터를 고을 사람들이 아직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응부는 어버이를 효심으로 섬기어, 날마다 활을 가지고 꿩을 사냥해다가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드렸습니다. 고(故) 중신(重臣) 이재(李縡)는 그 일을 기록하여 비석을 세우고 드러내 알렸는데, 그 땅이 위전(位田)으로 몰수되어 그의 관작이 회복된 뒤에도 아직 되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청컨대 그 토지를 비석을 수호하는 사람에게 넘겨줌으로써 정성껏 수호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2월 15일 병인
수원부(水原府)의 부로(父老)들에게 유시(諭示)하였다.
"현륭원에 참배하고 돌아온 뒤에도 그 생각이 잊혀지지 않고 또렷하다. 게다가 새 고을에 백성들을 모이게 해서 살림을 꾸려줄 일로 계속 마음이 쓰인다. 고을의 숙소(宿所)에서 촛불을 가져오라 하여 명령을 써서 내려보냈으니 묘당의 신하들은 필시 대책을 강구해놓고 있을 것이고, 따라서 빈청 연석에서는 마땅히 조처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밖에도 제때에 해결해야 할 두 가지 일이 있다. 임금의 말은 신용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백성들의 식량은 넉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첫째는 10년 동안 급복(給復)한다는 것이 유명 무실(有名無實)한 것이 되었고 둘째는 올봄 보릿고개의 양식에 대한 약속이 전혀 알맹이가 없는 것이 되었다.
애초에 급복해주라는 명령은, 바로 토지에 대한 고정적인 조세를 면제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토지세(土地稅)는 토지의 주인이 담당하게 되어 있어서, 토지를 소유한 사람만이 유난히 혜택을 입고 토지가 없는 사람은 이 혜택을 입지 못한다. 이 때문에 급복(給復)의 명목만 있을 뿐 급복의 실속이 없는 것이다. 새 고을에 사는 백성들은 태반이 군교나 아전, 하인이나 종 같은 부류들로서, 이들은 본디 부역이 없는 사람들이라 면제해 주려 하여도 해줄 부역이 없다. 이것은 백성들을 속이는 것에 가까우니, 더욱이 너무도 불성실한 것이 아니겠는가.
예전에 독성(禿城)에 진(鎭)을 설치할 때 별도로 복호전(復戶田) 몇백 결(結)을 떼주었는데, 능복(陵復)·역복(驛復) 등의 규정은 지금까지 주민들이 그에 힘을 입고 있다. 한 성(城)의 이해(利害) 관계는 한 성에 그치는 것인데도 성조(聖祖)의 처분을 아직도 단호히 실행하고 있다. 더구나 본부(本府)는 바로 나의 팔다리인 셈이고 고을이 서울 부근의 큰 관방(關防)이 되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수원의 새 고을에 사는 민호(民戶)에 대하여, 10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는 토지 5백 결을 주어서, 임금의 말을 미덥게 하려는 뜻을 보이라.
식량을 넉넉하게 해주는 일이 비록 신의롭게 하는 일 다음에 있지만 백성들이 하늘처럼 소중히 여기는 식량 문제를 어찌 무관심하게 볼 수 있겠는가. 새 고을의 백성들이 지난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이사를 왔으니 어느 겨를에 가을보리를 심었겠는가. 해가 바뀐 지금까지도 지붕을 이고 담을 쌓는 일에 바삐 애를 쓰니, 봄갈이 때 파종하지 못한 것은 형편상 그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른바 보릿고개의 양식에 대한 약속이 전혀 알맹이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경술년이 다시 돌아온 지금 좋은 상서(祥瑞)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바람이 자나깨나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다. 행여 하늘의 음덕을 받아 팔도에 풍년이 들었을 때, 유독 이 새 고을의 백성들만 봄에는 먹을거리가 바닥나고 여름에는 농사를 못지어, 다 함께 하지 못한다는 탄식이 나오게 되면, 내가 오히려 밥을 대하여 맛있게 먹을 수 있겠으며, 또 먹은들 목에 넘어가겠는가. 경기(京畿)와 인접한 호서(湖西)의 넉넉한 고을에는 창고에 남겨둔 밀[牟穀]이 있을 것이니 새 고을의 민호를 계산하여 한 호에 서너 포(包)씩 나누어주되 환곡을 나눠주는 예에 따르고 가을에 다시 징수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해주려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나는 본부를 마치 팔다리처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글제로 내걸어 선비들을 시험하였는데, 이것은 오히려 외면상 관방(關防)임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선침(先寢)을 이곳에 모신 뒤로부터 이 고을의 이 백성이 집안 사람이나 부자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백성들이 즐겁게 살면 나 역시 즐겁고, 백성들이 생업에 안주(安住)하면 나 역시 편하게 지낼 것이다. 백성들은 아주 어리석은 것 같지만 또한 더없이 신령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지성이면 신령도 감동시킨다고 하였다. 지방관으로 하여금 이 열 줄의 윤음(綸音)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거듭 유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 조치가 선대 무덤을 위하고 나아가 백성들에게까지 미쳐 나가게 하려는 것임을 알게 하라."
정만시(鄭萬始)를 영남 안사 어사(嶺南按査御史)로 삼았다. 상이 만시를 불러 접견하고 이르기를,
"본도의 공무(公務)를 비워놓은 것이 안타까우니, 도백(道伯)에 대해 조사한 일을 먼저 즉시 치계(馳啓)하라. 장제두(張齊斗)에 대한 사실과 상반된 평가 문제와 원택진(元宅鎭)의 일은 정말 대간이 한 말과 같다면 참으로 놀랍고 통분스럽다. 그러니 이를 모두 자세히 캐묻도록 하라. 지나는 연로에 사는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알아내어 가지고 오라."
하니 만시가 아뢰기를,
"일전에 옥당(玉堂)이 연명으로 상차(上箚)할 때, 신은 어미의 병 때문에 강외(江外)에 나가서 차자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간통(簡通)에 대한 회신(回信)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지레 앞질러 차자를 올린 것은 관규(館規)에 위배되는 일인 만큼, 신의 입장으로서는 더욱 편안히 있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김종수(金鍾秀)의 범죄에 대해서는 전후로 삼사가 논단(論斷)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신은 차자를 올릴 때 동참(同參)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또한 말할 만하였으나 말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지난번 여러 대신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명예를 사고 과실을 드러낸다.’는 등의 말을 함부로 하여 명예는 자기에게 돌리고 허물은 위에 돌렸으니, 어찌 이러한 신하의 분의(分義)가 있겠습니까. 전하에게 혹시 허물이 있었다면 여러 대신들이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 또한 전하께 충성된 마음으로 간해야 하는 반열에 있는 만큼, 그것을 바로잡는 도리에 있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날 일에 애당초 털끝만큼도 잘못한 것이 없었고 보면, 어찌 공식 석상에서 이런 흉측한 말을 한단 말입니까.
또 듣건대, 일전 양사의 연명 차자에 대하여 비답을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되돌려주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니, 신은 걱정스럽고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홍문관의 직함을 띠고 있으면서 혼자서만 연명 차자에 빠진 것은, 일이 어떤 이유에서였건간에 홍문관의 관료로서는 마땅히 혐의를 피하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충청도 관찰사 정존중(鄭存中)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백성들이 곤경에 허덕이고 관리의 탐오(貪汚)가 유행이 되다시피 하였으나, 이 또한 본도에 있어서는 둘째 문제이다. 호서(湖西) 한 도는 거의 내버리다시피 된 상태이다. 송덕상(宋德相)·홍양해(洪量海)·심혁(沈𨩌)의 사건이 한 번 발생하고부터 인심이 더욱 들뜨고 갈수록 두려워하던 나머지, 이번의 최가(崔哥) 사건까지 나오게 되었다. 경은 먼저 인심을 진정시키는 일을 급선무로 삼아, 한 도의 인사(人士)로 하여금 모두 조정의 본의를 알게 하라."
하였다.
이조승(李祖承)을 이조 참의로, 이경일(李敬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16일 정묘
옥당이 차자를 올려, 김종수를 다시 임용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 이조(吏曹)에서 서반(西班)으로 보내고 병조(兵曹)에서는 서추(西樞)로 넘긴 데 대하여 논하고, 이조와 병조의 신하를 파면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참판 민종현(閔鍾顯), 병조 판서 이갑(李𡊠)을 체차하였다. 종현 등이 옥당에서 올린 차자를 인하여 혐의를 끌어대면서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잉임(仍任)하라고 명하였다.
부응교 유문양(柳文養) 등이 상차하기를,
"신들은 김종수를 다시 임용하라는 명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할 뿐 아니라, 걱정되고 한탄스런 심정이 듭니다. 아, 저 은혜를 저버리고 나라를 배반한 죄와 본분을 벗어나 윗사람을 능멸(凌蔑)한 그 버릇에 대해서는, 이미 삼사(三司)가 논핵을 하였습니다. 성문(城門)에서 범한 죄와 같은 것은, 그 사람에 있어서는 오히려 작은 사건에 속하지만, 역시 하나의 큰 변괴입니다. 대각(臺閣)이 오래 비어 있어 마땅히 제기되어야 할 논의가 폐기됨을 면치 못하였고, 장차(章箚)를 번갈아 올리지만 도로 내려주고 마는 일이 거의 전례(前例)가 되다시피 한 실정입니다. 나라의 체면이 손상된 것은 이미 말할 것조차 없거니와, 사안(事案)이 아직 종료되지도 않았는데 은전(恩典)이 도리어 거듭 내렸고, 지금은 또 중추부의 직함까지 주어 관질(官秩)이 예전과 똑같으니, 이렇게 하고서야 나라의 기강이 어떻게 진작되겠으며, 권신(權臣)들을 어떻게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정리(情理) 때문에 곡진히 살펴주고 대신이라는 이유로 용서를 해준다면, 정리가 있는 대관(大官)에 대해서는 장차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도록 내맡겨 법을 적용할 데가 없어지게 할 것이란 말입니까. 전후의 성명(成命)을 어서 취소하소서.
그리고 동전(東銓)에서 서슴지 않고 서반(西班)으로 넘기고 서전(西銓)에서 전례대로 관함(官啣)을 부여한 일로 말하자면, 오직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는 것이 공손하다는 것만을 알고 한마디도 쟁집(爭執)하는 말이라곤 없었으니, 깨우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제 정사(政事)에 참여한 이조와 병조의 신하에 대해서는 모두 파면시키는 법을 적용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은 체면이 남다른 법이고, 처분을 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또 이미 길 옆에서 만나보았으니, 그를 서용(敍用)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너희들의 말이 지나치다. 그를 서반으로 보낸 이조 참판과 관함을 부여한 병조 판서를 파면시키자는 것은 더욱 지나친 일이다."
하였다.
승지 홍성연(洪聖淵)이 아뢰기를,
"조총(鳥銃)은 바로 무기(武器)로서 가장 긴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북쪽 변경의 각 고을에는 금지된 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용을 금지토록 한 것이 비록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무사들이 연습삼아 쏘아보는 일까지 폐지하였으므로, 무기고에 쌓아둔 무기에 대해 명색이 군병(軍兵)이라는 자들이 그게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신이 북쪽 고을을 맡아 다스리고 있을 때 이러한 폐단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처결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유사시에 대한 대비책으로는 조총보다 더 요긴한 것이 없는데, 북쪽 변경에서 연습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은 너무도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당초에 금지령을 내린 것도 틀림없이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니,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분부하여 금령(禁令)이 어느 해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로 금령을 느슨하게 하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장문(狀聞)하게 한 다음, 품의하여 처리케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어 경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故) 참판 홍낙인(洪樂仁)이 북평사(北評事)로 있을 때 조총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조 판서가 북관(北關)으로부터 돌아와 진달한 적이 있었다."
하였다. 이어 이조 판서 홍양호(洪良浩)를 불러들여 물어보니, 양호가 아뢰기를,
"연대(煙臺)에서 범이나 사슴을 잡을 때에는 모두 총을 사용하였는데, 습진(習陣)할 때만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유독 습진할 때만 총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의의가 없는 것 같다."
하였다. 이로부터 몇 달이 지난 뒤에 채제공이 다시 상주하기를,
"얼마 전에 승지 홍성연이 아뢴 바로 인하여, 각 고을에서 조총 사용의 금령을 철회하는 것이 좋은가 나쁜가를 도신들에게 장문(狀聞)하도록 하였는데, 함경도 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가 일일이 열거하기를, ‘남병사(南兵使) 이문덕(李文德)의 정첩(呈牒)에는 「삼수(三水)·갑산(甲山)의 진보(鎭堡)에서 사적으로 조총을 쏘았었는데, 강희(康熙)을축년006) 에 월강(越江)에 관한 금령을 범한 뒤로는 육진(六鎭)의 전례대로 관청 창고에 거두어 보관하자는 뜻으로 대신이 연석에서 상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시행한 일은 없었고, 5개월에 한 번씩 점고(點考)하는 절차는 지금까지 폐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총의 기술은 급한 일이 있을 때 믿을 만하므로 각 고을의 진보(鎭堡)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은, 군국(軍國) 정사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북병사(北兵使) 이윤경(李潤慶)은 이르기를, 「강희 을축년에 월강에 관한 금령을 범한 사건 때문에 육진의 조총인 경우에는 민간에서 사용함을 금지하여 관고(官庫)에 보관하여 관부(官府)에서만 총쏘기를 연습해 왔습니다. 저들과 우리는 그 경계(境界)가 강(江)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지금 만약 조총을 지급해 준다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금령이 해제된 줄로 알고 몰래 강을 건너가서 말썽을 일으킬 것이니, 막기가 필시 어려울 것입니다. 총을 지급하여 총쏘기를 연습하는 것은 논의할 만한 것이 아니며, 명색이 군사라고 하면서 조총을 장탄(臧彈)하고 발사하는 법도 모른다는 것은 너무나도 한심한 일입니다. 북쪽 변경의 각 고을에는 10월부터 2월까지 매달 훈련을 하는 규정이 있는데, 조총의 현재 수량은 군사의 정원수에 비하여 여분이 있습니다. 매년의 월과(月課) 조총을 화약(火藥)으로 대신하고 월과 본탄약[本丸藥]까지 아울러 쓰게 해서 다섯 달 동안 연습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서 지키는 진보(鎭堡)에서는 탄약을 마련하기가 각 고을보다 갑절 힘드니, 별도로 처리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본영(本營)의 방군(防軍)도 다섯 달 동안 연습을 시켜서 우수한 자를 뽑아 표창을 실시하고 훈련이 끝난 다음에는 도로 관고(官庫)에 보관한다면, 말썽이 생길 우려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총의 기술은 사냥을 하기에 가장 제격이므로 사람을 죽이는 변고가 일어날까 더욱 우려됩니다. 여러해 금지해오던 끝에 사적으로 쏘게 하는 것은 가벼이 논의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북쪽 변경의 각 고을에 이미 훈련하는 규례가 있는 만큼, 조총을 쏘는 기술이 정예로운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은, 오직 수신(帥臣)이 옛 제도를 다시 강구하는 데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삼수·갑산에서 조총을 거두어 보관하는 규정을 실시하지 않고 단지 점고하는 규례만 있는 것은, 사냥하는 땅이 모두 우리 경계 안에 있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당초 금령을 내린 것은 실로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만두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만약 갑자기 옛 규례를 변경하여 금령을 느슨하게 하는 뜻을 보인다면, 양계(兩界)의 저들과 접한 곳에서는 뜻밖의 걱정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예전대로 그냥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박천형(朴天衡)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새삼 뒤늦게 경에 대해 꺼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지난번의 처분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설령 꼭 알맞지 않은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참아 넘기고 위로해 주는 조치가 없었겠는가. 경이 이렇게 된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으려 하고 나에 대해 어떤 못된 계략을 쓰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명위(名位)가 갑자기 올라가 소홀히 여겼던 것에서 걱정거리가 생긴 것이니,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되어버린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지금 도타이 권면하는 말에 유감스러운 심정을 대략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경이 만약 이 일 때문에 심각하게 인혐하면서 스스로 앞길을 막는 꼬투리로 삼는다면, 이것은 거듭 나를 저버리는 셈이 된다. 그동안 있었던 여러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도 반드시 받아들여 사과함으로써, 자꾸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또한 몸이 자유롭지 못한 하나의 조건이다. 경의 정리(情理)를 보아서도 성 밖에 오래 있게 하기는 곤란하다. 하루빨리 나와서 숙명(肅命)하라."
하니, 종수는 대간의 논핵이 지극히 엄하여 감히 나아가 숙명할 수 없다고 부주(附奏)하였다. 이에 다시 유시하기를,
"경은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였다. 성토하는 말이 번갈아 나오는 것은 흠잡을 만한 것을 가지고 흠을 잡는 것이다. 이는 바로 자기 스스로가 업신여기기 때문에 남이 업신여기는 것이니, 남을 탓할 것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경을 지지하는 것은 권세와 지위 때문이고 경을 미워하는 것은 나의 총애 때문이다. 그와 같은 처지로서 그런 경우를 당했으니, 감히 성은 나되 감히 말하지 않는 것에 비하면 경에게는 오히려 좋은 소식이 되는 데 해롭지 않다. 그런데 심각하게 인혐을 하면서 마치 서로 겨루어 보려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어찌 너무도 생각해보지 않은 처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소차(疏箚)에서의 사실보다 지나친 말들은 이전부터 내려오는 투습(套習)이다. 어차피 경의 입장으로서는 일찌감치 경연 석상에 나와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상책이다. 경은 다시 잘 생각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7일 무진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의 하양 서원(河陽書院)에 ‘금호(琴湖)’라고 사액(賜額)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이에 앞서 경상도 유생 채사현(蔡思玄) 등이 상소하기를,
"세종조의 이름난 재상인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곧 나라의 원로(元老)였고 사림(士林)의 산두(山斗)였습니다. 그가 나라를 경제(經濟)한 공로와 선비들의 표준이 된 덕망은, 실로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주기에 알맞습니다. 그런데 도내(道內) 하양현(河陽縣)에 있는 서원(書院)은 바로 그를 제사하는 곳입니다. 백천사(百川祠)에서 그를 흠앙하는 선비들의 정성을 표시하고 있기는 하나, 두 글자의 화액(華額)에 대하여 아직껏 조정에서 그를 높이고 보답하는 예전(禮典)을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밝은 시대의 결함이 아니겠습니까.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서원은 유생들의 상소로 인하여 즉시 사액(賜額)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대체로 황희와 허조는 한몸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이 하양 고을은 바로 허조의 관향(貫鄕)이며 그가 한평생 살던 곳으로서, 선비들이 꼭 이곳에다 모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선액(宣額)하는 은전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황 익성(黃翼成)·허 문경(許文敬)의 똑같은 재상으로서의 업적은 사람들의 이목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당과 서원에 아직껏 편액(扁額) 이름이 없으니 결함이라고 할 만하다. 더구나 연전에 익성공의 서원에 이미 사액하였으니, 어찌 그때는 허락해놓고 이번 문경공에 대하여는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윤호(尹㬦)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영풍군(永豊君)의 무덤을 수축(修築)하였다. 하교하기를,
"영풍(永豊)의 일에 대하여 삼가 슬프고 갸륵하게 여긴다. 예전 숙묘(肅廟) 때에 장릉(莊陵)을 추복(追復)하면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절개를 지킨 여러 왕자(王子)들인 금성 대군(錦城大君)·화의군(和義君)·한남군(漢南君)을 모두 여섯 신하[六臣]들과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을 포증(褒贈)한 규정에 의하여 예법대로 개장(改葬)하고 좋은 시호(諡號)를 주게 하였는데, 영풍군도 그 속에 포함되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은 다 그 은전을 받았으나 오직 영풍군만은 시호를 내리고 무덤을 손질하는 대상에서 홀로 누락되었다. 이에 선조(先朝) 갑인년에 예장(禮葬)과 연시(延諡)에 필요한 물건들을 주라고 명하였으나 아직까지 시행하지 않고 있다.
요즘 듣건대, 영풍의 무덤이 고양(高陽)의 대자동(大慈洞)에 있고 부인(夫人) 박씨(朴氏)의 무덤이 충주(忠州)에 있는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선영(先塋) 곁에 있는데, 모두 거적에 싸서 장사지낸 채로 있고 비석이나 묘지명(墓誌銘)도 없고, 시호 역시 태상시(太常寺)에 둔 채 미처 주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 어찌 궐전(闕典)이 아니며 흠사(欠事)가 아니겠는가.
경기와 호서의 도백(道伯)에게 명하여, 고을 수령을 보내어 공사를 감독하여 무덤을 수리하고, 사실을 새긴 비석을 세울 것이며, 그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인 이재천(李在天)에 대해서는 고을 수령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임명해 보내어, 그로 하여금 즉시 시호를 맞이하게 하라. 관가에 몰수된 물건들은 모조리 값으로 쳐서 주인집에 돌려주고, 시호를 내려주는 날에는 관원을 보내 무덤에 치제(致祭)토록 하라. 이것이 바로 양조(兩朝)007) 에서 충성을 장려하고 절의를 표창하던 뜻을 이어받드는 것이다."
하였다. 경기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대자동을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수축할 만한 영역(塋域)이 없다고 계문(啓聞)하니, 본 동네에다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제사지낼 물품들을 떼어주라고 명하였다.
2월 18일 기사
응교 정만시(鄭萬始)가 상소하기를,
"신은 조금 전에 영남(嶺南)을 살펴 조사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가서 해야 할 일의 의리가 중하므로 부득이 하직 인사 하는 자리에 나아가기는 하였으나, 신의 사사로운 의리로서는 관함(館啣)에 구차하게 매여 있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어제 동료 관원들이 김종수(金鍾秀)를 다시 임용하는 데 대한 명을 도로 취소하라는 일로 연명으로 단차(短箚)를 올릴 때, 그들이 간통(簡通)으로 물어온 것은 바로 차본(箚本)을 이미 올린 다음이었습니다. 명색이 동료라는 자가 홀로 연명으로 호소하는 축에서 빠졌으니, 이것은 진실로 신이 벼슬자리에 무릅쓰고 그대로 있기 어려운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차자의 내용이 대충대충 형식에 따라 책임이나 때우는 식이었던 것으로 말하면, 더욱 개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종수가 성문의 장수를 질질 끌어낸 것은 오히려 잗단 일에 속합니다. 그는 대관(大官)들이 많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명예를 사고 허물을 드러낸다.’는 말을 함부로 꺼내어 허물은 임금에게 떠넘기고 명예는 자기에게 돌렸습니다. 옛날 사람이 ‘은혜가 나에게서 나오게 하고자 한다면 원망은 누구에게 떠맡길 것인가.’라고 하였던 의리로 따져볼 때, 어찌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한마디 말만 가지고 보더라도 군부(君父)를 능멸하고 신하로서의 분수도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은 논사(論思)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처음에는 연명 차자를 올릴 때 말석(末席)의 의논에 동참하지 못하였고, 나중에는 경연에 올랐을 때 남김없이 소회(所懷)를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비록 하직 인사를 하기는 하였지만, 스스로 숨길 수 없어서 글에다 드러내어 스스로 논열하고 삼가 중한 처벌을 기다리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제멋대로 행동한 잘못은 있지만, 그렇다고 간통(簡通)으로 물은 것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관규(館規)에 위배된다. 옥당(玉堂)의 관원들을 중한 쪽으로 추고(推考)하라. 네가 인혐(引嫌)하는 것 또한 괴이할 게 없는 듯하니, 체차를 허락한다."
하였다.
부응교 유문양(柳文養)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홍문관에 도착한 응교 정만시의 상소문 초본을 보건대, 그 상소에서 논핵한 바 김종수가 여럿이 모인 좌석에서 함부로 꺼낸 얘기를 읽다 보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섬뜩하고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 대체로 허물을 임금에게 떠넘기고 명예는 자기에게 돌리는 자란, 옛날로부터 하나하나 꼽아볼 때 과연 얼마만큼 흉측한 사람입니까. 그런데도 그만 감히 여러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놓고 말하였으며 패려(悖戾)한 말을 공공연히 꺼냈으니, 안중에 임금도 없고 신하의 도리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죄상이 이처럼 숱하게 깔려 있는데도, 신들은 몽매하여 듣지도 알지도 못하여 차자 안에 열거하지 못하였으니, 신들이 성토(聲討)를 지체시킨 죄는 엄중한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 김종수가 종전에 저지른 범죄는 모두 본분에 벗어나고 법을 무시한 죄였지만, 그중에도 ‘명예를 사고 허물을 드러낸다.[沽譽揚過]’는 넉 자로 된 흉악한 말은 더욱이 신하로서 어찌 감히 마음에 싹틔우고 입 밖에 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들이 전후로 올린 소계(疏啓)에서 비록 그 가운데 한두 가지의 죄과를 논급하기는 하였으나, 유독 이처럼 극악한 죄에 대해서만은 언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자책(自責)을 하기에 겨를이 없을 일이니, 동료의 논척하는 상소문에 대해서 어찌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연명 차자를 올리면서 간통을 주고받는 일을 기다리지 않은 일에 대하여, 비난과 배척을 크게 가하면서 지나치게 스스로 인혐을 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생각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신들이 당초 연명으로 차자를 올릴 때에 즉시 정만시(鄭萬始)에게 간통을 보냈으나, 만시는 노량호(鷺梁湖)에 나가 있은 지 벌써 여러날이 된 때였습니다. 일이 이미 밤을 넘겼고 차자를 올릴 시간은 급한데 강을 건너갔다 오자면 많은 시간을 지체할 듯하여, 한편으로는 간통을 보내서 한자리에 모여 차자를 올리게 된 사유를 말해주고 또 사서(私書)를 보내어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는 까닭을 알려주었습니다. 간통과 사서로써 멀리 강건너에까지 연락하는 일이 이미 상규(常規)가 아니지만, 신들은 그래도 서로 존경하는 뜻에서 이렇게 미리 간통을 보냈는데도, 그는 제멋대로 행동을 하고서도 도리어 남을 나무라니, 이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이미 이 일을 이유로 인혐을 하면서 온갖 비난을 늘어놓았으니, 이것만 하더라도 벌써 신들이 무릅쓰고 그대로 앉아 있기가 어려운 일단입니다. 더구나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은 잘못은 더욱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이로 보나 저로 보나 벼슬자리에 태연히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니, 삼가 성명께서는 어서 신들을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간통으로 물은 것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벌써 관규(館規)에 어긋났고, 뒤따라 글을 올린 것도 자기 변명에 가깝다. 원칙을 지키는 도리상 그대로 재직하기가 곤란한 처지이니, 너희들에 대해서 본직(本職)의 체차를 허락한다."
하였다.
2월 19일 경오
임시철(林蓍喆)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차대(次對)가 있었다. 이어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를 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원(書院)을 짓고 사액(賜額)을 청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록 선조(先朝) 때 거듭 밝힌 금령(禁令)이 있었으나, 황 익성(黃翼成)에 대해서 서원을 짓는 것을 이미 허락했기 때문에 허 문경(許文敬)에 대하여도 이번에 또 사액을 하였다. 이것은 하나는 해주고 하나는 해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골 선비들이 금령(禁令)을 아랑곳하지 않고 매번 서원을 짓고 사액해 주기를 청하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서원의 일로 봉장(封章)하는 데 대해서는, 태학(太學)에서 통문(通文)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이르기를,
"예전에도 각 궁방(宮房)에 지급한 전토(田土)가 무려 1천여 결(結)에 이르렀는데 지금 만약 대군(大君)·왕자(王子)·공주(公主)·옹주(翁主)가 국초(國初)와 같이 많다면 무슨 조세를 면제해 줄 수 있겠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재정(財政)을 살펴보면 예전에 비해 절반이나 줄어들었습니다. 산골에서 사사로이 쓸 화속(火粟)까지 모조리 몰수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할 것입니다. 나라를 연 지가 겨우 4백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재력이 이같은 형편이니, 다시 4백 년을 지나면 땅은 떼어 줄 것이 없고 조세는 면제해 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대적으로 변통하지 않으면 안 될 일입니다."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일전에 수원(水原)의 새 고을에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일에 대해 묘당으로 하여금 방안을 강구하여 아뢰도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본부(本府)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원래 가난하게 살아오던 터이어서, 옛 고을의 1천여 호에 가까운 집들이 달팽이집처럼 생긴 오두막뿐입니다. 이번에 고을을 옮기고 나서도 만약 또 예전과 같다면, 거의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을 강제로 내몰아 큰 집을 억지로 지으라고 한다면, 비록 을러대고 권고해도 결코 해내지 못할 것으로 압니다.
길거리를 정연하고 빽빽하게 만드는 방법은, 전방(廛房)들을 따로 짓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선 서울의 부자 20, 30호를 모집하여 무이자로 1천 냥을 주어서, 새 고을에다가 집을 마주보도록 지어놓고 그들로 하여금 장사를 하여 이익을 보는 재미가 있게 한 다음, 몇 해를 기한으로 차차 나누어 갚게 한다면, 조정에도 별로 손해가 없고 새 고을에는 부락을 이루고 도회를 형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은 바로 기와입니다. 옛날 당(唐)나라 위단(韋丹)이 강남(江南)의 서도 관찰사(西道觀察使)로 있을 때 사람들로 하여금 기와집을 짓도록 하였는데, 재목은 산에서 가져오고 도공(陶工)을 불러다가 사람들에게 기와굽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또 재목과 기와를 마당에다 모아놓고 그 비용을 헤아려 값을 정하되 이익을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밥과 간장을 싣고 친히 가서 살펴보니, 기와집을 1만 3천 7백 채나 지어놓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재력이 중국과 같을 수는 없으므로 비록 위단이 한 일을 따르기는 어렵더라도, 만약 1만 냥 안팎의 돈을 시험삼아 본 고을에 내주어 기와를 굽게 하여, 사려는 사람들에게 팔되 절대 이익은 취하지 말고 본전만을 받는다면, 기와집을 어느 정도 세울 수 있고 나라돈도 축내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도백과 본 고을에서 조치를 어떻게 취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익을 마련하는 데는 별다른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을의 근방에다가 한 달에 시장을 여섯 번 세우고 한 푼이라도 절대 세를 거두지 말고 단지 서로 장사하는 것만을 허락한다면, 사방의 장사치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떼처럼 모여들어서 전주(全州)나 안성(安城) 못지 않은 큰 시장이 형성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민들은 저절로 살림에 재미를 붙일 것이고, 비록 다른 고을의 백성들이라도 필시 모아들이기를 기다릴 것이 없이 제발로 찾아올 것입니다. 만약 고을의 모양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여러 재상들에게 물으니, 사직(司直) 김화진(金華鎭)·이문원(李文源), 형조 판서 김사목(金思穆)은 다 제공의 말이 옳다고 하였고, 사직 서유린(徐有隣)은 아뢰기를,
"부자들을 이주시키고 시장을 옮기는 것은, 참으로 백성들을 모아들여 잘살게 하는 방법인 셈입니다. 그러나 전방(廛房)을 따로 짓는 것은, 누원(樓院) 등의 이전의 실례로 미루어 보더라도 서울 시장의 전방과 서로 방해가 될 염려가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였고, 사직 정창순(鄭昌順)은 아뢰기를,
"한(漢)나라 때에도 무릉(茂陵)에다가 군국(郡國)의 호걸(豪傑)들을 이주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비록 백성들을 옮겨 이주하게 할 수는 없더라도 만약 평양(平壤)·송도(松都)·함흥(咸興)과 같이 장사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자원(自願)하는 사람들을 모아다가 이주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틀림없이 따르겠다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미 급복(給復)해 주기로 하였으니 간간이 과거(科擧)도 설행한다면, 유생이나 무사들 중에도 필시 가서 살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고 사람들에게는 장사하는 이익이 있다면, 비록 전방을 따로 세우지 않더라도 틀림없이 여러 가게들을 벌여놓고 번화한 거리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고, 경기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은 아뢰기를,
"전방에 대한 한가지 문제는 혹시 서울과 지방이 서로 지장을 줄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고, 행 부사직 정호인(鄭好仁)은 아뢰기를,
"부락을 정연하고 빽빽하게 만드는 일은 부유한 백성들을 모아들이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고, 그들을 모아들이는 방도는 그들을 고무하여 용감하게 그곳에 달려들도록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먼저 이주(移住)한 백성들 중에서 사람의 됨됨이와 문지(門地)를 보아 적당한 벼슬자리에 특별한 규례로 등용을 한다면, 팔도의 부호들이 마땅히 소문을 듣고 몰려올 것입니다. 전방이나 시장도 설치하게 하여 살림 밑천을 마련하게 한다면, 몇 해 안가서 큰 도회지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고, 부사직 홍수보(洪秀輔)는 아뢰기를,
"백성들을 모아들이고 풍족하게 하는 근본은, 부역을 가볍게 하고 조세를 적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또 장사의 이익이 생기는 바탕을 마련하여 쏠려들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 됩니다. 그리고 이번에 5백 결(結)에 대해 급복(給復)해 주어 고을 백성들로 하여금 10년 동안 조세가 없는 토지를 지어먹게 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유례가 없는 큰 혜택입니다만, 받아야 할 사람과 받지 않아야 할 사람이 서로 엇갈릴 염려가 있으니, 본읍(本邑)에 신칙하여 무릇 분표(分俵)할 때는 충분히 조사하여 고르고 자세하게 함으로써 실질적인 효과가 있게 한다면, 백성들의 살림을 유족하게 하는 데에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고, 모아들이는 방법도 자연 이 속에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을 모아들이는 계책을 시임·전임 고을 수령들에게 물었더니, 그들의 말도 경의 말과 같았다. 지금 이 연석의 여러 의견들도 조금씩은 차이가 있으나 큰 줄기는 그다지 다른 것이 없다. 경은 연석에서 물러나간 뒤에 이 개략(槪略)을 가지고서 척도(尺度)를 정하여, 묘당에서 편할 대로 거행을 할 것은 즉시 결정을 해주고, 품지(稟旨)를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즉시 품처함으로써, 영구히 전할 수 있는 실효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김사목(金思穆)을 형조 판서로, 이헌경(李獻慶)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고(故) 수찬 허조(許慥)의 벼슬을 회복시켜주고 홍문관 부제학을 추증(追贈)하였다. 이조가, 유학(幼學) 허묵(許默)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복주(覆奏)하기를,
"삼가 윤순거(尹舜擧)가 편집한 《장릉지(莊陵誌)》를 살펴보건대, 수찬 허조는 이개(李愷)의 매부(妹夫)로서 모의(謀議)에 참여하였다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으므로 법률에 따라 처단을 하였다고 하였으며,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육신전(六臣傳)》에 의하면, 허후(許詡)의 아들인 수찬 허조가 병자년의 화란(禍亂)에 죽었고 그의 아비인 정간공(貞簡公)은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아비에게 관작을 회복시키고 시호를 준 뒤에도 그의 아들만은 은전(恩典)을 입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조정이 미처 시행할 겨를이 없었던 은전입니다. 허조의 관작을 회복시킬 데 대한 청원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허 문경공(許文敬公)의 서원에 사액(賜額)을 하였고 영풍군(永豊君)의 집에 시호를 준 것이 마침 이때에 있었는데, 고(故) 수찬 허조의 일이 이때에 또 보고된 것은 일이 우연하지 않다. 더구나 그의 아비인 정간공 허후와 죽은 해는 비록 선후의 차이가 있지만, 절의(節義)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는 것이 옛사람의 기록에 이처럼 명백한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아비는 사시(賜諡)의 은전을 받았는데 아들은 아직껏 관질(官秩)을 회복시켜 주지 않은 상태이니, 그들이 호소하는 것도 오히려 늦었다고 하겠다.
고 수찬 허조에게 어찌 관질만 회복시켜 주고 말 수 있겠는가. 마땅히 추증하는 은전도 베풀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광묘(光廟)008) 의 성교(聖敎)에 의하면 ‘만약 허후가 살아 있었다면 여섯 신하가 마땅히 일곱 신하로 되었을 것이다.’고 하였으니, 또한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지금 어찌 규례에 따라 증직(贈職)하는 정도로만 그칠 수 있겠는가. 그 집의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을 본조(本曹)에서 찾아 물어 녹용(錄用)하라."
하였다.
원역고(園役庫)를 화성(華城)에다 설치하였다. 하교하기를,
"원소(園所)와의 정도(程道)가 서울에서 꼭 1백여 리(里)도 넘으므로 향(香)을 전달하기 위해 왕래하는 일도 오히려 먼곳에 있는 능(陵)의 규례를 쓰게 된다. 또 본원(本園)의 제반 일에 대해서는 모두 폐단을 줄이려고 하는 판국인데, 더구나 석물(石物)을 다듬거나 석회를 바르며 비가 새는 집을 고치는 따위의 사소한 일들은 더욱이 탁지(度支)에 그 책임을 지움으로써 경공인(京貢人)들에게 허다한 폐해를 끼칠 필요가 없다. 경기 관찰사가 친히 연교(筵敎)를 받들어 본 지방에서 원관(園官)의 입회 아래 함께 편리한 대로 거행을 하라. 물력(物力)을 저장해 두는 곳도 양주(楊州)의 전례에 의하여 이름을 ‘원역고(園役庫)’라고 하고, 도백(道伯)이 관할하면서 연말에 장부를 마감하여 장계(狀啓)로 보고하라.
또한 해마다 정기적으로 바치는 공물에 따라 공사를 구획하되, 묘당에서는 자세히 헤아려 초기(草記)를 올리고, 호조 선혜청의 당상관과 경기 관찰사는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가지고, 경기 감영으로 하여금 뒤에 써서 장계로 보고하게 함으로써, 폐단은 즉시 제거하고 공사는 반드시 견실하게 하려는 뜻을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유경(柳畊)이 아뢰기를,
"연전에 가체(加髢)를 얹지 못하도록 거듭 금령을 내린 것은, 실로 검박함을 밝힌 선조(先朝)의 뜻을 따라 사치를 숭상하는 일세의 풍습을 없애려는 데서 나온 일입니다. 그러니 비록 시골의 어리석은 아녀자라 하더라도 응당 조정의 명을 받들어 행하고 감히 이를 어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보건대, 길거리에 나다니는 상천(常賤) 여인들도 본체(本髢)의 부피가 처음에 비해 점점 더 커져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혼인(婚姻)을 치루는 사대부들 집에서 가마 앞의 여종의 쪽진 머리에도 세(貰)내어 얹는 물건을 쓰지 않고 본발(本髮)을 위주로 합니다. 이 몇 가지 일만 보더라도 이 밖의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런데도 그냥 둔다면 얼마 안 가서 형편없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서울은 사방의 본보기가 되니, 마땅히 미리 경고하고 단속함으로써, 각도를 신칙하고 오부(五部)에 분부하여 방곡(坊曲)에 효유(曉諭)하되 먼저 거듭 명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 만일 금령을 범하는 자가 있거든 절목(節目)에 따라 무겁게 다스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오부가 방곡에 효유를 하는 것은 한갓 번잡하고 수선스럽기만 할 것이다. 대체로 이런 일은 비록 털끝만한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 죄가 경대부들 집안에 있는 것이다. 항간의 무식한 백성들은 그 잘못을 본뜬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 신하들로 말하면, 대신·중신·재신(宰臣)·하대부(下大夫)들이 있고 옥당·양사 및 아직 청직(淸職)에 못 오른 참상(參上)·참하(參下)의 문신(文臣)들이 있고, 또 무관(武官)·음관(蔭官)도 있다. 이들이 자신의 집부터 법을 지킨 다음 다른 집들에서 금령을 범하는지 범하지 않는지를 살펴보아 묘당에서 신칙하고 법사(法司)에서 단속을 한다면, 비록 금령을 어기는 자를 찾아보려고 해도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 줄로 안다. 이렇게 친히 신칙한 다음 앞으로 효과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 또한 어찌 가늠할 방도가 없겠는가. 마땅히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각자 서로 깨우쳐 주도록 하라.
듣건대, 가마 앞 여종의 쪽진 머리에도 다리[髢]를 얹고 쓰개를 벗어버렸다고 하니, 가마 안 여인들의 머리를 구슬과 비취로 장식하였을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작년의 사목(事目)에서 여쾌(女僧)를 엄히 단속하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을 법사(法司)에서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내용으로 분부를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윤빈(李潤彬)은 천성이 본래 해괴하고 망령된 데다가 행동까지 비루하고 사특합니다. 누차 고을을 맡아 다스리면서 오로지 백성들을 수탈하기만 일삼아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그 아비의 아들로서 조정이 그 죄과를 씻어주고 목숨을 보전해준 은덕이 전후로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도 충성으로 보답할 방도는 생각하지 않고 남쪽 지방의 곤수(閫帥)로 가 있으면서부터는 더욱 기세를 부렸습니다. 매번 고을 수령이나 진영의 장수들을 대할 때면 번번이 ‘별군직(別軍職) 병사(兵使)는 다른 사람과 자별하다.’는 등의 말로 거리낌없이 그 힘을 빙자하였습니다. 작년 가을에 군사 훈련을 마친 뒤에 군기(軍器)를 점열(點閱)한다고 하면서 부하 장수들을 많이 풀어놓아 뇌물이 들어오는 길을 크게 열어놓고는, 그 재물의 많고 적음을 보아 처벌을 가볍게 하기도 하고 무겁게 하기도 하였으므로 관할 고을들이 견디지를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뇌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적간(摘奸)한 비장(裨將)의 말만 치우치게 듣고서 어떤 일에 꼬투리를 걸고 성을 내어, 속읍(屬邑)에 서신을 보내 그를 만나보게 하였는데 그때 끝없는 욕설을 퍼부은 것에 대해서는 온 도가 떠들썩하게 퍼뜨리면서 놀라고 분개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병사(兵使)의 중요한 임무를, 이렇게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전라 병사 이윤빈에게 삭직의 처벌을 내리고, 붙잡아다가 그 죄상을 캐물어 엄하게 처결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떠도는 소문을 어떻게 모두 믿을 수 있겠는가. 사실인지도 포착할 수 없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선혜청 낭청 이지광(李趾光)은, 이재간(李在簡)에 대한 성토(聲討)가 한창 엄하게 진행될 때에 그에게 병문안을 하기 위해 보내는 심부름꾼들이 길에 끊이지 않았고, 그가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자진하여 교외에 나가 송별을 하면서 손을 잡고 귓속말을 속삭였습니다. 무슨 정곡(情曲)이 있기에 의리를 무시하고 이처럼 가깝게 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듣는 사람치고 놀라고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사람과 벼슬이 낮다는 이유로 그냥 두고 따지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지광에게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고 먼 곳에 정배(定配)시키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떠도는 소문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마는, 또한 불분명한 일로 그냥 둘 수도 없으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붙잡아다가 캐물어서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문관·음관(蔭官) 당하관이 가마를 타서는 안 되는 것은 비단 법령이 원래 엄중할 뿐만 아니라, 연전에 신칙한 명령에서도 이만저만 강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수령(守令)이 된 자들은 감히 그럴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해 전부터 이름 있는 관원들이 법을 어기는 바람에, 음관들도 이를 따라서 가마를 타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입니다. 이 일이 비록 작은 문제이기는 하지만 나라의 기강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여러 도의 도신(道臣)에게 엄히 신칙하여 문관·음관 당하관이 법을 어기고 가마를 탈 경우에는 특별히 거듭 단속하되, 발각이 되는 대로 즉시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여 엄하게 처결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원계(原啓) 외에 금번의 연석(筵席)에서 이 폐단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휘장을 드리운 옥교(屋轎)를 음관 출신 수령들도 타고 다닌다고 한다. 문관 출신 수령이라 해도 놀라운 일인데 음관 출신 수령들의 일은 더욱더 형편없기 짝이 없다. 처음에는 각도 도백(道伯)들을 우선 조사하여 파면시키는 조치를 취하려고 하였는데, 우선 성의를 다하여 신칙해야 한다는 뜻을 쫓아, 거듭 금지한 뒤 어떻게 거행하는가를 보려고 한다.
이밖에도 연석에서의 하교가 있었으니, 대신들이 연석에서 물러간 다음 마땅히 묘당에서 엄히 신칙하라. 그리고 이후로 발각되는 자에 대해서는 본인 외에 우선 도백부터 엄중히 처벌하겠다. 또한 암행 어사가 가지고 가는 절목(節目)에도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0일 신미
동지 정사(冬至正使) 이성원(李性源)과 부사(副使) 조종현(趙宗鉉)이 치계(馳啓)하였다.
"신들은 작년 12월 21일에 황제가 영소(瀛沼)에서 얼음타기 놀이를 벌였을 때 서화문(西華門) 밖에서 영접하였습니다. 황제가 가마를 멈추고 ‘국왕(國王)은 평안한가?’고 묻기에, 신들이 ‘평안합니다.’고 대답하니, 황제가 ‘매우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30일에는 보화전(保和殿)에서 연종연(年終宴)을 거행하였는데 신들은 들어가서 기둥 밖에서 참석하였고, 유구(琉球)와 섬라(暹羅)의 사신들은 신들의 아랫자리에 앉았습니다.
올해 1월 1일 신들은 태화전(太和殿) 뜰에 들어가서 예식을 거행하고 연회에 참석하였으며, 6일에는 자광각(紫光閣)에서 세초연(歲初宴)에 참석하였습니다. 10일에는 예부(禮部)에서 신들을 인도하여 건청문(乾淸門)에 이르니, 군기 대신(軍機大臣) 아계(阿桂)·왕걸(王杰)·복장안(福長安) 등이 황제의 탁자(卓子) 동쪽에 벌여서서 조서(詔書) 1통[度]과 전도(戰圖) 2축(軸)을 주기에, 신들은 무릎을 꿇고 고이 받아서 황정(黃亭) 안에 담아가지고 관소(館所)에 가져왔습니다. 종전에는 조서와 칙서(勅書)를 넘겨줄 때 모두 예부에서 내주었으나, 올해에는 대신들이 침전(寢殿)의 정문(正門) 밖에 나란히 서서 황정까지 갖추고 내주었는데, 이것은 황제의 지시에서 나온 일인 듯하였습니다. 전도는 그림이 16폭(幅)이고 시(詩)가 16폭이며 또 그림 16폭에 시를 윗부분에다 썼는데, 황제가 지난 을해년 이후로 이리(伊梨) 지방 및 회자(回子)와 대금천(大金川)·소금천(小金川)을 토평(討平)한 뒤, 그 싸우는 과정과 항복을 받아내는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를 지어 붙여서 무공(武功)을 나열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11일에는 황제가 원명원(圓明園)에 행차하여 산고수장각(山高水長閣)의 오른쪽에 막차(幕次)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어 예부에서 신들을 인도하여 막차 안에 있는 왕공(王公)들의 반열에 들어갔는데, 황제의 어좌(御座)가 바로 지척(咫尺)에 있었습니다. 예부 상서(禮部尙書) 상청(常淸)이 신 성원(性源)을 인도하여 어좌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게 하니, 황제가 탁자 위에 있는 술을 손수 내려주면서 이르기를, ‘올해 내 나이가 여든이므로 만수(萬壽)를 축원하기 위하여 나라 사람들이 일찌감치 사람을 파견하여 표문(表文)을 올려 축하를 하니, 나의 마음이 매우 기쁘다. 그래서 특별히 손수 술잔을 내리는 바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신들이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이어 황제가 이르기를 ‘국왕은 아들을 얻는 경사가 있었는가?’ 하기에, 신은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한창 우러러 바라고 있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황제가 칠언 율시(七言律詩) 한 수(首)를 지어가지고 각국의 사신들로 하여금 화답해 올리라고 하였습니다. 13일에는 황제가 산고수장각에서 등불놀이를 벌였습니다. 예부에서 신들을 인도하여 내반(內班)으로 들어가니, 황제가 손짓을 하여 앞으로 나오라고 불렀습니다. 시신(侍臣)이 두 개의 누런 함(函)을 신들에게 주기에, 신들은 무릎을 꿇고 받은 다음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황제가 이르기를, ‘내가 손수 「복(福)」 자를 써서 보내는 것은, 국왕에게 어서 빨리 자손이 번창하는 경사가 있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기에, 신들은 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황제가 이르기를 ‘국왕은 큰 글씨를 좋아하는가? 「복(福)」 자를 쓴 방전(方箋)을 특별히 보낸다.’고 하기에, 신 등은 머리를 조아리고 받았습니다. 누런 함에 담긴 물건은, 황제가 쓴 「복(福)」 자 1폭(幅)과 옥여의 1자루, 옥그릇 2개, 유리그릇 4개, 사기 그릇 4개, 견지(絹紙) 큰 것과 작은 것 4권(卷), 붓 3갑(匣), 먹 3갑, 벼루 2방(方), 「복」 자가 쓰인 방전 1백 폭, 아로새겨 옻칠을 한 소반 4개였습니다. 옥여의와 옥그릇 같은 것은 전에도 준 적이 있었지만, 황제가 손수 「복」 자를 써서 축원하는 뜻을 나타낸 것은 신들의 더없이 큰 영광일 뿐만 아니라, 이것을 본 그들도 모두 낯빛을 달리하면서 축하를 하였습니다. 19일에 신들이 또 원명원에 나아가 산고수장각에 들어가니, 황제가 앞으로 나오라고 하고서 이르기를 ‘너희들이 본국에 돌아가거든 반드시 나의 말로 국왕에게 안부를 물으라.’고 하였습니다.
세폐(歲幣)와 방물(方物)은 내무부(內務府) 무비원(武備院)에 바쳤습니다. 표문은 모두 ‘알았다.’고 답하여 으레 내려주었고, 팔순(八旬)을 축하하는 표문에 대해서는 비지(批旨)에 이르기를, ‘올해는 내 나이 여든이 되는 해이다. 만국이 모두 기뻐서 축하를 올리며 여러 나라의 왕들도 함께 기뻐하며 축복을 해주고 있다. 지금 왕은 특별히 연례(年例)의 정기적인 공물 외에 더 물건을 갖추어 기한보다 앞서 가져다가 바쳤으니, 공손하고 성의가 있음을 잘 알았다. 도착한 즉시 이것을 받도록 하고, 이것을 모두 다음해 생일날의 정기적인 공물로 대치하여, 돌봐주는 뜻을 보이노라. 해부(該部)에서는 이를 알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동지 정사 이성원에게 유시하였다.
"강(江)을 건너간 후로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먼저 온 인편을 통하여 경의 일행이 탈없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중간에 건강이 나빴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나아가고 있다고 하니 더없이 기쁜 마음이다. 의주(義州)에 당도하는 날이 언제쯤 되겠으며 성(城) 안에 들어오는 때는 내달 20일쯤이 되겠는가? 길을 떠난 후의 안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몇 줄을 대략 써서 보낸다. 경은 겸사(兼史)가 돌아오는 편에 덧붙여 아뢰도록 하라."
하교하였다.
"올해가 황제의 팔순 성절(聖節)이 되는 해이므로 사신을 특별히 차견할 것을 지난해에 보낸 자문(咨文) 안에 이미 덧붙여 써넣었다. 사신 일행의 선래(先來)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마땅히 결정을 해야겠으나, 지금은 대사(大赦)에 대한 칙서가 내려오게 되니, 또 마땅히 진하사(進賀使)를 보내야 할 것이다. 사신 일행이 가져오는 하사 물건 가운데 별다른 특별한 것이 있다고 하니, 또한 사의를 표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성절 진하 사은사(聖節進賀謝恩使)라고 이름하도록 하라."
황인점(黃仁點)을 성절 겸 사은 정사(聖節兼謝恩正使)로, 김노영(金魯永)을 부사(副使)로, 서영보(徐榮輔)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고, 구상(具庠)을 이조 참판으로, 홍병찬(洪秉纘)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창한(李昌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병찬과 창한은 얼마 안 가 체차되고, 이성규(李聖圭)를 대사헌으로, 박천행(朴天行)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경상도 전(前) 관찰사 김상집(金尙集)·김광묵(金光默)을 대구부(大丘府)에 찬배(竄配)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이조원(李祖源)이, 함양(咸陽)의 환곡에 대한 폐단을 바로잡을 것을 계문(啓聞)하니, 하교하기를,
"나라가 백성이 아니면 누구를 의지하며, 백성이 나라가 아니면 무엇을 믿겠는가. 한 쌍의 부부라도 구덩이에 굴러 죽는 데 대하여 백성의 부모된 사람으로서는 차마 그들이 죽을 곳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인데, 더구나 한 고을의 5천 호(戶)가 진구렁에 빠지고 불에 타는 듯한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늘 곡식은 많은데도 백성들은 병들고 있는 폐단을 말할 때면, 먼저 영남(嶺南)을 들고 영남에서도 함양(咸陽)이 첫손에 꼽힌다. 주의깊게 조사하여 기어코 이들을 구해 살리기 위하여 고을 수령을 특례(特例)로 파견하였고, 이어 도백(道伯)에게 신칙하여 사실을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대체로 대대적으로 뜯어고치기 위한 은미한 뜻에서 나온 일이었다.
그러나 이 장계(狀啓)의 내용을 보건대, 처음 볼 때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재차 볼 때는 입이 딱 벌어지고, 보고 또 보게 되면 측은하고 가엾어서 한참동안 말이 없이 앉아 있노라니, 어느새 날이 새는 것도 몰랐을 지경이었다. 해독은 눈썹에 불이 붙은 것처럼 다급하고 원망은 뼈 속에 사무치도록 깊은데도 함양 백성들이 다 죽어 없어지지 않고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정말 상상 밖의 일이라고 하겠다. 혹시 고장을 뜨기를 아쉬워하는 생각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마음보다 절실하여, 조금씩 조금씩 참다가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백성들의 부모된 직책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여, 폐단이 극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하는 소문에서 더듬어 찾아보고는 그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었다. 말이 여기에 미치면 마치 배고픈 사람처럼 허출해진다.
대체로 10만 포(包)나 되는 백성들의 식량이 포대마다 먼지와 흙이고 낱알들이 쭉정이인데다 썩고 묵어 냄새가 나므로, 마소도 먹을 수 없을 지경이다. 고금을 통하여 창고를 설치한 이래로 이 고을의 곡식과 같은 경우가 어디에 있겠는가. 거기에다가 나눠주고 거두어들이는 데서 온갖 폐단이 집중적으로 몰려들어 탐욕스러운 고을 수령과 교활한 서리(胥吏)가 빨아먹을 밑천을 더해주고 있다. 함양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어찌 이런 것을 참아내야 한단 말인가.
고을의 첩보와 도의 장계에서 비록 억지로 구별을 하여 유작조(留作條)니, 발매조(發賣條)니 포흠조(逋欠條)니 하는 항목의 명색(名色)을 강제로 붙이고, 또 낫고 못한 것과 어렵고 쉬운 것을 구별해 놓긴 하였으나, 그 여러 항목에 대해 모두 결론짓기를 ‘삼가 처분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에 묘당에 물었더니 묘당에서도 보고 별다른 이견(異見)이 없었다. 그러나 만의 하나라도 이것을 갈라서 배분할 때에 더욱 지치고 더욱 못살게 군다면, 이것은 이른바 한갓 차마 못하는 마음만 있을 뿐 차마 못하는 정사는 시행하지 않는 셈이 된다. 그러고도 함양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창고 안에 있는 먼지흙과 쭉정이, 축난 것을 갚았다는 거짓 장부는 전부 불에 태워버리고, 장계 가운데에 있는 유작조와 발매조를 통틀어 놓고 키로 까불러서 3만 섬의 수량으로 줄여 정한 다음, 나누어 보관하여 장계에서 요청한 5만 섬의 수량을 맞춘 후에야 비로소 그 절반을 나눠주는 상식(常式)을 시행할 것이되, 감모분(減耗分)은 기록에 남겨두지 말라.
폐단의 근원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연대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병오년 이후부터라는 말들은 이미 도신의 장계에 올라 있는 이상, 조정의 처분이 단지 수령에게만 미치고 도백에 대해서는 곡진히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은 어진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병오년 이후의 장부를 마감한 도백에 대해서는, 도내의 대구(大丘) 땅에 빨리 귀양보내는 법을 적용하고 수령들에 대해서도 유사로 하여금 법에 비추어 처결하도록 하라. 이 전교를 어사가 가지고 가서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한편, 고을 수령과 함께 창고마다 조사해보고 불에 태울 것은 불살라 버리고, 키로 까불러 나눠줄 것은 까불러서 나눠준 다음 복명(復命)을 하라."
하였다.
전(前) 충청도 관찰사 권엄(權𧟓)이 상에게 건의하기를,
"안흥(安興)은 삼남(三南) 지방으로 가는 뱃길의 중요한 길목입니다. 몇 해 전에 진영(鎭營)의 장수를 없애고 수사(水使)의 행영(行營)으로 만든 것은, 관방(關防)을 중하게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오가는 데에 폐단이 있다는 이유로 우후(虞候)를 옮겨보내어 대신 그곳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로부터는 원산(元山)의 경보(警報)를 알리는 지대가 텅 비게 됨을 면치 못하였고, 안흥과 같은 요충 지역은 도리어 통제하는 데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만 하더라도 허술하기가 짝이 없을 지경인데, 진영 부근에 있는 백성이나 전답은 비록 수영(水營)에 소속시켰다고는 하나, 몇 고을을 건너 근 2백 리(里) 길이나 되다보니, 아전의 첩보(牒報)와 백성들의 소송 문제로 왕래하는 일에 폐단이 많습니다.
그리고 영문(營門)은 고을의 진영과 달라서, 친근하게 돌봐주어 마음으로 서로 믿게끔 할 수가 없으므로, 백성들과 군사들은 마치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처럼 점점 흩어져 떠나갈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영의 장수를 다시 둔 다음에야 안착하여 지낼 수가 있다고 합니다."
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2월 21일 임신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비국 유사 당상 정창순(鄭昌順)·이문원(李文源)·김사목(金思穆), 전 경상도 관찰사 김화진(金華鎭)·홍억(洪檍) 등을 소견(召見)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함양(咸陽)의 환곡에 대한 폐단을 바로잡는 일은, 실로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근래 인심이 옛날과 같지 않아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버릇이 되다시피 하였으므로, 만약 이 일로 인하여 고을마다 죄다 전례로 삼을 수 있다고 하면서 쭉정이를 탕감해달라는 등의 말로 혹은 묘당에 소청(訴請)하기도 하고, 혹은 임금의 행차길에 호소하기도 할 사람들이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의 기강이 점점 해이해지고 백성들의 버릇이 점점 무엄해지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사전(事前)에 경계하는 도리에 입각하여, 외방 고을에 엄하게 신칙해서 미련한 백성들이 스스로 와서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영남의 각 고을 가운데 설령 환곡이 거칠다거나 축난 곳이 있을 경우에는, 도신이 각별히 점검하고 수령이 한껏 방편을 취하여 올해 안으로 전부 바로잡은 다음, 묘당에서 제비를 뽑아 적간(摘奸)을 하되, 만일 현장에서 붙잡힐 경우에는 당해 수령을 엄하게 다스릴 것은 물론이고, 도신 역시 중한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내용을 미리 신칙하여, 죄에 걸리는 걱정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의 함양에 관한 처분은 특별히 전례에 없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끌어다 전례로 삼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경이 한 말도 폐단을 막는 뜻에 부합되니,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요즈음 외방 고을의 환곡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축이 났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거칠고 나쁘다고 하는 말이 간혹 흔히 있기는 하지만, 어찌 함양에서의 일처럼 더없이 놀라운 일이야 있겠습니까. 도계(道啓)가 일단 올라오자 성상께서는 놀라고 측은히 여기어, 어사를 시켜 키질하고 까불러서 10만 섬을 3만 섬으로 줄이라고까지 명령을 하였으니, 이것은 전고(前古)에 없는 특이한 은전입니다.
그러나 지금 중춘(仲春)이 다 지나가는데, 민간에 이미 나누어준 수량은 틀림없이 2만 석 안팎일 것입니다. 이번의 이 3만 석에 대한 하교 중에 만약 이미 나누어준 것을 포함시킬 경우, 비록 1만 석만을 마련하면 된다 하더라도 응당 3만 석의 수량에는 부족되는 것이 없겠습니까. 그렇지 아니하고 혹시 이미 나누어준 수량은 우선 그냥 놔두고, 키질하고 까부는 것으로 따로 3만 석을 마련하는 것이라 한다면, 추후에 바쳐야 할 수량은 합쳐서 5만 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뚜렷하게 한가지로 지시하여 어사에게 분부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국법(國法)으로 논하더라도, 도백을 이미 유배시키라고 명하였고 고을 수령도 왕부(王府)에서 준엄하게 감죄(勘罪)를 하는 만큼, 아전들 가운데서 가장 많이 축을 내고 가장 교활한 자는, 어사로 하여금 백성들을 많이 모아놓고 군문(郡門)에서 효수(梟首)하도록 해야만, 간악한 아전들이 징계되어 두려워하게 되고 후일의 폐단을 막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폐단의 근원이 어디로부터 생겼는지에 대하여, 이전에 도백을 지낸 자가 상세히 진달하라."
하였다. 이에 김화진이 아뢰기를,
"당초 폐단의 근원은, 전적으로 교활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는 데에서 말미암았습니다. 이번에 탕감하여 폐단을 없앤 뒤에도 축낸 곡식섬의 수효가 가장 많은 자에 대해서는 법에 따라 처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나라의 법을 엄하게 하고 교활한 무리들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정창순·이문원은 모두 아뢰기를,
"그 폐단의 근원을 구명해보면, 감영의 곡식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언제나 곡식값이 비싼 연읍(沿邑)에서 진행되어 곡식값이 헐한 산협(山峽)에다가 덧붙여 등록하는 데에서 전적으로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해 두 해 이자에 이자가 붙어서 그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만약 폐단을 고치려 한다면, 환곡 장부를 넘겨주고 넘겨받을 때에 그들로 하여금 장계를 올려 청한 다음 거행토록 하고, 제멋대로 옮겨 등록하여 곡식값이 비싸면 팔고 헐하면 쌓아두는 폐단이 없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국곡을 축낸 아전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자는 그만두고라도 그중 가장 많이 축낸 자에게는 ‘보관 책임을 진 자가 스스로 훔친 경우의 법률[監守自盜之律]’을 단연코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령 1만 석을 축낸 아전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죽었으면 그냥 놔두고, 1천 석을 축낸 아전이라도 살아 있을 경우에는 법을 적용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화진과 문원이 모두 아뢰기를,
"축을 낸 아전으로서 본인이 이미 죽은 경우에는 따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살아 있는 자로서 가장 많은 석수(石數)를 축낸 자에 대해서는 법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창순은 아뢰기를,
"비록 1만 석이 넘는 곡식을 축냈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이미 죽은 뒤에는 법을 적용할 데가 없으니 자연 따지지 않게 되겠지만, 현재 생존한 사람으로서 가장 많이 축낸 자에 대해서는 법률에 따라 처단을 해야 합니다. 이번에 유례가 없는 은혜를 베푸는 것은 관대히 용서해 주려는 은전에서 나온 일이니 만큼, 또한 법규를 조금 엄하게 세워 그들로 하여금 두려워 안집할 줄도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홍억은 아뢰기를,
"이번의 처분이 있은 뒤로 비록 눈앞의 실효는 있다고 하더라도, 본부(本府)의 아전과 백성들의 습성으로 보아 몇 해 실행하다가 필시 종전과 같은 버릇을 되풀이할 것입니다. 고을 수령들을 특별히 신칙하여 법조항을 엄하게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국곡을 축낸 아전에 대해서는 일체(一切)의 법을 적용하여야만 사람을 살리기 위한 방도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곡식 총수에 관한 일은 이미 나눠준 것과 통산(通算)하여 3만 석으로 계산하는 것이 실로 법령을 믿음직스럽게 하는 뜻에 합당할 것이다. 이렇게 약간 너그럽게 해준 다음에는 혹시 깨끗한 곡식이 이 수량보다 더 많다고 하더라도 어찌 다 써버리겠는가. 어사로 하여금 잘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라.
국곡을 축낸 아전에 대하여 법을 적용하는 문제는, 대대적으로 뜯어고치자면 호되게 징계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조사를 해서 법을 적용하는 일을 호남이나 호서의 전례처럼 해야만, 은혜와 법이 병행될 수 있을 것이다. 어제의 전교에 이 한 조항을 쓰고 나서 다시 생각을 해보니, 지난날 호남·호서에서는 간악한 아전들 때문에 곡식의 총수가 축나게 되어, 처벌하지 않고서는 그 폐단을 바로잡을 수 없었지만, 본군(本郡)의 경우는 몇십 년 동안 내려오면서 쌓이고 쌓인 폐단이 더욱더 심해졌다. 아전도 어찌 농간질을 하지 않았겠는가마는, 거슬러서 따진다면, 폐단이 쌓이고 또 쌓인데다가 도백(道伯)이 기회를 탔으며, 부정하게 손을 댄 수령들도 그 죄는 납부를 거부한 토호(土豪)들이나 협잡질을 한 아전들에 비하면 서로 어금지금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사판(仕版)에서 삭제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경의 말을 들으니, 역시 일리가 있다. 본읍(本邑)의 사정은 멀리서는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어사가 내려간 뒤 곡식 장부를 조사하고 아울러 폐단의 근원도 널리 탐지하여, 과연 아전들의 작간(作奸)에서 일이 비롯되었고 이전부터 내려온 받아낼 데가 없는 축난 곡식이 천 석, 만 석이 넘어 양호(兩湖)의 전례와 비슷하다면, 수악(首惡)은 법대로 처벌하고 그밖에 대해서는 차례로 등급을 나누어 처벌하라. 그렇지 않으면 묘당에 연락을 취하거나 혹은 사유를 갖추어 장계로 보고하라.
대체로 병오년 이후의 곡식 장부로서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것은 이 어찌 간악한 아전들이 한 짓이겠는가. 틀림없이 교활한 수령들이 범한 짓일 것이다. 어사가 내려가면, 전후의 수령들이 부정하게 손을 댔는지 안댔는지에 대해서도, 특별히 조사하여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전(前) 교리 최현중(崔顯重)을 함양군(咸陽郡)의 선유 겸 사정 어사(宣諭兼査正御史)로 차견하였다.
김이정(金履正)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정창순(鄭昌順)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곡산 현감(谷山縣監) 박천형(朴天衡)이 상소하기를,
"본현은 거듭된 흉년의 피해를 호되게 입어, 가난한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할 것없이, 쌀독과 항아리가 전부 비었습니다. 이미 농사지을 형편이 못된데다가 조세 독촉의 고통까지 당하게 되니, 마침내 솥을 팔고 집을 팔고는 서로 이끌고 도망쳐 흩어진 자들이 무려 4천여 명이나 됩니다. 이른바 자리잡고 살고 있다는 사람들도 칡뿌리로 끼니를 때워 부황(浮黃)이 든 사람들이 많아 또한 편안히 살 여지가 없습니다.
신은 삼가 지난번에 내리신 전교를 백성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안착시키는 방도를 삼고 있습니다만, 곡식이 있은 다음에야 굶주림도 구휼할 수 있고 농사도 장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현의 곡식 총수는 겨우 1만 포(包)에 불과합니다. 이미 나누어준 분량을 제하면, 현재 있는 것은 잡곡(雜穀) 5천 석뿐입니다. 그런데 환곡을 줄 농민들로 뽑아낸 수효는 5천여 호(戶)나 되고, 당장 급히 구제해야 될 대상도 몇천 명을 밑돌지 않습니다. 이처럼 얼마 안 되는 곡식을 가지고 허다한 백성들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한 바가지의 물로 한 수레의 나무에 붙은 불을 끄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변통하는 방법으로는, 단지 곡식을 옮겨오는 한가지 방도 밖에 없는데, 본현의 서북쪽에 있는 여러 고을들은 산골길이 험하고 멀어서 실어올 수 있는 형편이 못 됩니다. 신계(新溪)·수안(遂安)이 가까운 고을이기는 하지만, 다 함께 재해를 입은 지역이어서 창고에 저축된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차근차근 옮겨오려고 해도 열읍(列邑)의 곡식 총수가 곳곳마다 바닥이 나 있는데, 유독 평양(平壤)과 이천(伊川) 두 고을은 옮겨오기에 가장 편한 형편입니다. 지금 만약 평양부(平壤府)의 소미(小米) 2천 석과 이천부(伊川府)의 쌀과 콩 각 5백 석을 떼내어 옮겨준다면, 올해의 구제 방도가 될 뿐 아니라, 이 곡식을 얻어낸 데에다 원래의 환곡을 보탠다면 이 다음에도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니, 실로 작은 혜택이 아닐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잘 살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글을 보고 백성들의 형편이 너무도 불쌍하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되었다. 진정 백성들의 먹는 문제에 유익하다면, 어찌 이 고을 저 고을의 경계에 구애되겠는가. 비록 승선(承宣)의 거조(擧條)를 인하여 방금 관문(關文)으로 묻긴 하였으나, 어 찌 회장(回狀)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는가. 청원한 것을 특별히 그대로 시행토록 하라. 그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두 도의 감사에게 신칙하여 각각 함께 구제할 방도를 생각함으로써, 백성들을 똑같이 사랑하는 나의 뜻에 부응토록 하라. 너도 일에 따라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임하여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말라."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조금 전에 곡산 현감이 올린 상소 내용을 보니,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이 어림잡아 4천여 명이라고 말하였는데, 어림잡은 수효가 이와 같다면 실제의 수효는 이보다 많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른바 고을 수령이 귀머거리도 아니고 장님도 아닌데 고을 안의 백성들이 이처럼 떠돌아다녀도 짐짓 모른 체하여, 조정에서 거리에 나가보고 쌀을 주어 데려가게 하는 일이 있게까지 하였다. 나라가 있고 법이 있는데도 이런 고을 수령이 받아야 될 중죄(重罪)를 받지 않는다면, 이를 나라의 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어떻게 구렁텅이에 굴러 죽게 된 5천여 명이나 되는 백성들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처음 벼슬을 하는 관원일지라도 백성들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둔다면 오히려 이루어내는 것이 꼭 있는 법인데, 1백 리나 되는 고을을 맡아가지고 마음쓰는 것이 이처럼 잔인하고 각박하니, 그의 행위를 따져보면 탐오(貪汚)보다도 더 심하다.
어제 원사(爰辭)에 대해서 규례에 따라 판하(判下)를 한 것은, 대체로 이러한 사실을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지금 갇혀 있는 죄인 김노성(金魯成)을, 격식을 갖추어 엄하게 가두고 해부(該府)로 하여금 정상을 끝까지 조사하여 초공(草供)을 받아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2일 계유
함양 사정 어사(咸陽査正御史) 최현중(崔顯重)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 때에는 영광(靈光)과 충주(忠州) 두 고을에서 나라 곡식을 축낸 아전을 효수(梟首)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죄가 아전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함양(咸陽)으로 말하면, 그 폐단이 벌써 오래되었다. 비록 병오년부터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쌓여온 폐단은 병오년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가장 먼저 나라 곡식을 축낸 아전에게 진실로 죄가 있지만 아주 오래된 일이므로 뒤미처 따질 필요가 없는 일이고, 그후 답습해 온 자들도 비록 용서하기는 어렵지만 어떻게 모두 법대로 처치할 수 있겠는가. 선조(先朝)에서 처분을 할 때 국곡을 축낸 아전 가운데 첫째가는 범죄자만 주벌하였으니, 이에서 성의(聖意)를 우러러 찾아볼 수 있다. 모쪼록 죄인을 생각해주는 조정의 뜻을 받들어 되도록 관대한 처리를 하라.
이번 행차가 비록 암행(暗行)하는 것과는 다르나, 연로의 백성들의 고통이나 풍속·교화에 관계된 것, 형옥(刑獄)의 잘잘못을 비롯한 일체 고을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충을 전부 별단(別單)으로 보고토록 하라. 그리고 호서 지방의 군포미(軍布米)에 관한 일은 폐단이 여러 가지이고 되[升]와 말[斗]의 규격도 저마다 다르다고 한다. 이것도 다 간악한 아전들이 술수를 부리는 폐단이니 반드시 자세히 살펴가지고 보고하라. 그리고 차율(次律) 이하는 보고할 필요없이 모두 혼자 판단하여 처리하라. 만약 법을 적용하여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아서는 안 될 일이 있을 경우에는, 이미 거조(擧條)에 대해 비답한 것이 있고 또 연석(筵席)에서의 지시도 받았으니, 역시 스스로 판단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곡식을 키질하고 까부르는 한 가지 문제는, 무엇보다도 가장 힘껏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다. 만일 곡식이 깨끗하지 못하거나 알차지 못할 경우에는, 뒤에 반드시 어사에게 책임을 돌릴테니, 마음을 가다듬고 받들어 행함으로써 조정에서 위임하여 파견한 본의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함양 어사(咸陽御史) 최현중에게 별도로 유시(諭示)하였다.
"아까 접견하였을 때 대강 말한 것이 있었으나, 물러간 뒤에 곰곰이 생각해보고 다시 이렇게 말하는 바이다. 설령 창고에 남아 있는 곡식이 다 깨끗하고 알차서 3만 석을 넉넉히 채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임금의 말을 미더웁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백성들의 심정을 위로해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이미 나누어준 곡식과 함께 통틀어 2만 석이 되어야만, 비로소 본군의 곡물 품질을 십분 완전 무결하게 하도록 책임지울 수 있을 것이다. 설혹 깨끗한 곡식의 수량이 3만 석을 약간 초과하더라도 백성들을 속인다는 탄식이 없어질 수 있겠는가. 이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라.
그리고 곡식을 축낸 아전에 대한 문제로 말하면, 전례상 축낸 수량이 1천 석, 1만 석을 넘은 자는 법대로 처벌하였다. 그런데 본군의 아전들이 축낸 총수는 1만 2백여 포(包)이다. 영남(嶺南)의 아전 수가 너무 많은 것은 다른 여러 도에는 없는 폐단이니, 허다한 아전들 가운데 한 명이 축낸 것이 결코 1천 포를 넘을 리가 없을 줄로 안다. 과연 짐작한 대로라면, 법대로 처벌하는 일은 쓸데없는 생각일 듯하다. 그러나 반드시 장부를 가지고 다시 조사해보는 동시에, 겸하여 폐단의 근원이 아전에게 있는지 백성에게 있는지를 따져본 다음에야 비로소 속 시원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에게 유시하여 조정에 나올 기일을 물으니, 종수가 부주(附奏)하기를,
"옥당(玉堂)에서 단독으로 올린 소(疏)나 연명으로 올린 소를 아직 얻어보지 못했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시끄럽게 전하는 말에 의하면, 대체로 옥당에서 올린 차자의 내용이 약하다고 합니다. 그런 만큼 신의 죄 만 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은, 갈수록 덮어가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설사 죄를 진 채 나아가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로운 유시가 내렸으나 즉시 받들지 못하게 되어 죽을 죄를 더욱 더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경은 어찌 이러는가? 지난번 전한 유시에 이미 ‘투습(套習)’이란 두 글자를 제기하여 남김없이 분석을 하였다. 만약 신하노릇 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긴다면, 전번에 제기된 말은 그 후에 제기된 말보다 더하다. 실로 이른바 전번이라 하여 부족한 것이 아닌데, 경은 어찌 1만 석의 녹봉은 사양하면서 10만 석의 녹봉은 사양하지 않는가.
지난번에 단독으로 올린 상소나 연명으로 올린 상소는, 모두 자기 혐의를 피하면서 끌어댄 것에 불과하다. 더구나 원래의 상소문은 모두 안에 머물려두고 또한 비답 없이 되돌려주었다고 조보(朝報)에 써서 내었고 보면, 부계(附啓) 가운데 ‘옥당 차자의 글이 약하다고 떠들어댄다.’는 말은 어디에서 들었으며, 무슨 근거로 지나치게 믿는 것인가. 한 번 뜨거운 국에 데었던 경험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고 또다시 전철을 답습한다는 혐의를 밟는다면 그것이 옳겠는가. 경은 모쪼록 지난날의 고집을 버리고, 즉시 조정에 나와서 나의 면유(面諭)를 들으라."
하였다.
이문원(李文源)을 판의금부사로, 남현로(南玄老)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23일 갑술
선성(先聖) 사당에 참알(參謁)하기에 앞서 하교하기를,
"내일 명륜당(明倫堂)에 가거든 저녁 식당(食堂)을 전례대로 명륜당 마당에 설행(設行)하겠으니 동지관사(同知館事) 이하가 유생들을 데리고 나와 참석하도록 하라. 선조(先朝) 을유년 이후 지금까지 반궁(泮宮)을 숙소로 한 것이 무릇 세 번이었다. 을유년에는 저녁 식당에 내가 명을 받들고 그곳을 둘러보았는데, 유생들은 서로 읍(揖)하는 예를 가졌다. 이 또한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서술할 일단(一端)이다. 올봄의 도기(到記)를 내일 설행할 것인데, 이미 석전(釋奠)에 참가할 것으로 거안(擧案)한 사람을 제외하고 서울과 지방의 생원(生員)·진사(進士)들도 모두 아침 식당에서 서로 읍하는 예를 행하게 한 뒤, 그 거안을 도기(到記)에 함께 붙여 명륜당 뜰에서 시험보여 뽑도록 하라.
올해 알성(謁聖)하는 예는 여느 해와는 다르니, 묘정(廟庭)에 참석하는 유생들의 반열을 어찌 이처럼 성기게 해서야 되겠는가. 더구나 제향(祭享) 반열에 참석하지도 않고 먼저 시험장에 들어와 있는다는 것은, 유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 수치스러운 일이 될 뿐더러 조정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허락한 것도 또한 올바르게 인도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성균관으로 하여금 유생들에게 깨우쳐주어 다함께 묘정의 제향 반열에 참가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계성사(啓聖祠)에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할 때의 복색을 곤룡포(袞龍袍)로 갖추자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경은 어쩌면 그리도 고루한가.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는 시조(視朝)를 할 때 입는 옷이고 금관 조복(金冠朝服)은 조회(朝會) 때의 옷이다. 옛날에는 조참(朝參) 때 위아래가 모두 이 옷차림을 하였었다. 만약 이 옷이 소중한 바가 있어서 계성사에서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면, 소중한 것을 위하여 재소(齋所)에 나갈 때의 옷을 제사 전에 지레 바꾸어 입는 것이 어디 될 일인가. 또 한 가지 비유를 들 것이 있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조신(朝臣)들을 접견할 때에는 마땅히 이옷을 입어야 하는데, 접견을 하는 데는 구애됨이 없고 사당 참배를 하는 데는 꼭 갈아입어야 한다니, 모르긴 하나 글쎄 이런 예법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가, 《속오례의(續五禮儀)》에 실려 있는가?
임인년에 곤룡포를 입었던 것으로 말한다면, 필경 선비들을 시험보이는 날에 입었을 것이다. 설사 품지(稟旨)를 하고 싶었더라도 전작(奠酌)에 관한 명령이 내려간 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는데 어디를 갔다가 이제서야 초기(草記)를 내는가."
하였다. 이어 예조 판서 오재순(吳載純)을 무겁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를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처음이나 지금이나 경을 돌봐주고 우대한 것이 정말 어떠하였는가.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는 의리로 볼 때, 내가 경에 대해서 어찌 생각이 있으면서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대체로 포도청 군교에 관한 문제는, 경의 말이 위아래가 모순되는 혐의가 없지 않아서, 나는 사실 옳다고 보지 않는다. 포도청 군교의 상처에 대해서는 경이 필시 캐물어보았을 터인데, 전촉(轉囑)을 하였건 하지 않았건 실정에 지나쳤건 지나치지 않았건 그런 것은 우선 접어두고라도, 이렇게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하였으니 정말 타당한지 모르겠다. 성문을 지키는 장수에 관한 일로 말하면, 비록 권두(權頭)의 무리들이 한 짓이라고는 하지만, 경이 어찌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후의 일은 대신의 체면으로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경의 본색(本色)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긴 하나, 지난번 비지(批旨) 가운데서 ‘사람은 반드시 자기가 자신을 업신여긴 다음에야 남이 업신여기는 법이다.’고 한 말에서 과연 이미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일로 인하여 한때 사람들의 말을 불러일으켰는데, 오늘의 세상 도덕은 경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逆)이란 한 글자를 스스럼없이 남에게 가하는 것은 어느덧 요즘의 흔한 버릇이 되어버렸으니, 이 어찌 개의(介意)할 만한 것이겠는가. 나는 정말 경에게 완전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가깝게 느끼는 생각으로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이러저러한 말을 하였는데, 경은 남이 모르기라도 할까봐 걱정하여 그말을 퍼뜨렸다. 이제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말하지 않겠으나, 이후로는 내가 더이상 지난날에 경을 이해하던 마음으로 경을 이해하지 않겠다. 내가 이미 진정으로 말하였으니, 경 역시 진정으로 모두 진술하라."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신이 전후로 저지른 죄상은 모두 다 스스로 저지른 것이며, 이번의 일에 대해서는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만시(鄭萬始)가 올린 소(疏)에 대하여 아직 비답을 내려주지 않았는데, 경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혹시 처신하기가 곤란해서 그러는 것인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이것은 아무 근거없이 한 말이 아닙니다. 정월 초하룻날 대내(大內)에 불이 났을 때 신은 중추부(中樞府)의 직방(直房)에서 서 판부사(徐判府事)와 이 판부사(李判府事)를 만나보았습니다. 신은 서 판부사와 가장 친하기 때문에 과연 연석에서의 하교를 말하였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허물을 드러낸다.[揚過]’는 두 글자는 연석에서의 하교가 아니었다면 흉측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연석에서의 하교를 세상에 전파한 것은 매우 옳지 않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신의 죄과는 실로 스스로 저지른 것이며, 연석에서의 하교를 거두 절미(去頭折尾)하고 단지 넉 자만 떼내어 전파한 것은 모두다 신이 넋이 나간 탓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체모는 일반 관원들과는 자별한 법이다. 경은 꼭 이런 습관을 고쳐야만 살 길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집에 백세(百歲)된 노인이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감격스러운 눈물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후로는 삼가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김 영부사(金領府事)는 최익남(崔益男)에게 규탄을 당했어도 즉시 출사(出仕)를 하였는데, 경은 어찌 이 문제를 가지고 몹시 혐의쩍게 여기면서 중추부에 맴돌 수가 있겠는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은명(恩命)에 한 번 사례(謝禮)한 후에는 고향집으로 물러나가 지내면서 성상의 은택을 노래하며 사는 것이 변변찮은 신의 소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성 밖으로 나가 산다는 이름만 있고 성 밖으로 나가 사는 실제는 없으니, 아무래도 명예를 취하는 셈이다. 어찌 결함이 아니겠는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이후로는 거취(去就)와 행지(行止)를 상께서 명하신 대로만 따르겠지만, 현재의 사정과 처지는 더욱 위태롭고 급박하므로 곧 어미를 데리고 동쪽 교외로 나가려던 참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3일 갑술
판중추부사 김종수(金鍾秀)를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처음이나 지금이나 경을 돌봐주고 우대한 것이 정말 어떠하였는가.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는 의리로 볼 때, 내가 경에 대해서 어찌 생각이 있으면서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대체로 포도청 군교에 관한 문제는, 경의 말이 위아래가 모순되는 혐의가 없지 않아서, 나는 사실 옳다고 보지 않는다. 포도청 군교의 상처에 대해서는 경이 필시 캐물어보았을 터인데, 전촉(轉囑)을 하였건 하지 않았건 실정에 지나쳤건 지나치지 않았건 그런 것은 우선 접어두고라도, 이렇게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하였으니 정말 타당한지 모르겠다. 성문을 지키는 장수에 관한 일로 말하면, 비록 권두(權頭)의 무리들이 한 짓이라고는 하지만, 경이 어찌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후의 일은 대신의 체면으로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경의 본색(本色)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긴 하나, 지난번 비지(批旨) 가운데서 ‘사람은 반드시 자기가 자신을 업신여긴 다음에야 남이 업신여기는 법이다.’고 한 말에서 과연 이미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일로 인하여 한때 사람들의 말을 불러일으켰는데, 오늘의 세상 도덕은 경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逆)이란 한 글자를 스스럼없이 남에게 가하는 것은 어느덧 요즘의 흔한 버릇이 되어버렸으니, 이 어찌 개의(介意)할 만한 것이겠는가. 나는 정말 경에게 완전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가깝게 느끼는 생각으로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이러저러한 말을 하였는데, 경은 남이 모르기라도 할까봐 걱정하여 그말을 퍼뜨렸다. 이제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말하지 않겠으나, 이후로는 내가 더이상 지난날에 경을 이해하던 마음으로 경을 이해하지 않겠다. 내가 이미 진정으로 말하였으니, 경 역시 진정으로 모두 진술하라."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신이 전후로 저지른 죄상은 모두 다 스스로 저지른 것이며, 이번의 일에 대해서는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만시(鄭萬始)가 올린 소(疏)에 대하여 아직 비답을 내려주지 않았는데, 경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혹시 처신하기가 곤란해서 그러는 것인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이것은 아무 근거없이 한 말이 아닙니다. 정월 초하룻날 대내(大內)에 불이 났을 때 신은 중추부(中樞府)의 직방(直房)에서 서 판부사(徐判府事)와 이 판부사(李判府事)를 만나보았습니다. 신은 서 판부사와 가장 친하기 때문에 과연 연석에서의 하교를 말하였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허물을 드러낸다.[揚過]’는 두 글자는 연석에서의 하교가 아니었다면 흉측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연석에서의 하교를 세상에 전파한 것은 매우 옳지 않다."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신의 죄과는 실로 스스로 저지른 것이며, 연석에서의 하교를 거두 절미(去頭折尾)하고 단지 넉 자만 떼내어 전파한 것은 모두다 신이 넋이 나간 탓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체모는 일반 관원들과는 자별한 법이다. 경은 꼭 이런 습관을 고쳐야만 살 길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집에 백세(百歲)된 노인이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감격스러운 눈물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후로는 삼가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김 영부사(金領府事)는 최익남(崔益男)에게 규탄을 당했어도 즉시 출사(出仕)를 하였는데, 경은 어찌 이 문제를 가지고 몹시 혐의쩍게 여기면서 중추부에 맴돌 수가 있겠는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은명(恩命)에 한 번 사례(謝禮)한 후에는 고향집으로 물러나가 지내면서 성상의 은택을 노래하며 사는 것이 변변찮은 신의 소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성 밖으로 나가 산다는 이름만 있고 성 밖으로 나가 사는 실제는 없으니, 아무래도 명예를 취하는 셈이다. 어찌 결함이 아니겠는가."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이후로는 거취(去就)와 행지(行止)를 상께서 명하신 대로만 따르겠지만, 현재의 사정과 처지는 더욱 위태롭고 급박하므로 곧 어미를 데리고 동쪽 교외로 나가려던 참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이홍재(李洪載)를 하동부(河東府)로 귀양보내고, 김노성(金魯成)을 금고(禁錮)하여 곡산부(谷山府)에 충군(充軍)하였다.
2월 24일 을해
반궁(泮宮)에 나가서 계성사(啓聖祠)에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고, 명륜당(明倫堂)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상이 벽송정(碧松亭) 윗 기슭에 거둥하여 대사성 이면긍(李勉兢)을 소견하였다. 면긍이 아뢰기를,
"태학(太學)에서 존경각(尊經閣)을 짓고 책을 보관하여 여러 선비들의 강습(講習)에 도움을 주도록 한 것은, 그 법의 근본 취지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당초에 인쇄하여 반포한 책이 많았지만 간혹 전수(典守)를 잘하지 못한 탓으로 백에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에 통독(通讀)의 월과(月課) 때마다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운관(芸館)에서 빌려다가 쓰게 되니 매우 구차스럽습니다. 계획을 짜서 찍어내어 절목(節目)을 만들어 전수(典守)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존경각을 건립하도록 한 법의 근본 취지가 분명히 있는데, 책이 완전한 질(帙)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태학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북한 산성(北漢山城)에 있는 경서(經書)를 각기 2건(件)씩, 운책(韻冊)을 5건씩 인쇄하여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매 권(卷)마다 보장(寶章)을 찍어서 존경각에 보관토록 하라. 이후로 본관(本館)의 서적들은 구임 전적(久任典籍)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되, 전수(典守)를 잘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곧 ‘나라돈을 제대로 맡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법률[公貨不謹典守律]’로 논죄하라. 봄·가을의 석전(釋奠) 때 승지가 살펴보고 적간(摘奸)하는 날에, 제비를 뽑아 조사하고 검열하는 것을 규례로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면긍이 또 계청(啓請)하기를,
"사성(司成)을 삼사(三司)의 관원 중에서 융통하여 골라 임명하여 구임(久任)하게 하고, 직강(直講)과 전적(典籍) 각 한 자리씩도 구임(久任)하는 자리로 만들어서 사무와 서적 관리를 나누어 맡아보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도기(到記) 유생들을 시험하였다. 제술(製述)에서 수석(首席)을 차지한 생원(生員) 권식(權烒)에게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상이 명륜당에서 차린 저녁 식당(食堂)에 친히 참석하였다.
홍양호(洪良浩)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2월 25일 병자
상이 문묘(文廟)에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행하고 춘당대(春塘臺)에 돌아와서 문·무과(文武科)를 설행하였다. 문과에서는 김경(金憬) 등 4인을 뽑고, 무과에서는 김흥득(金興得) 등 15인을 뽑았다.
정민시(鄭民始)·오재순(吳載純)을 규장각 제학으로 삼았다.
2월 26일 정축
차대(次對)가 있었다. 문·무과에 새로 합격한 자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이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 수원(水原)에서 설행한 과거 시험에서는 이운행(李運行)을 얻었고, 이번의 방방(放榜)에서는 윤지눌(尹持訥)을 얻었는데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외간(外間)에서는 물색(物色)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지만, 신은 성상의 마음이 필시 하늘에 감통(感通)된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 익헌(鄭翼憲)에 대한 제문(祭文)에서 ‘애리애리한 저 곡유(曲儒)’라는 구절을 경은 과연 읽어보았는가? 그때 남계(南溪)의 나이는 겨우 스무살 남짓하였는데 어찌 감여(堪輿)의 이치를 깊이 알고 있었겠는가. 그런데 유별나게 자기 견해를 내세워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극력 비난하는 것이 정말 미덥지 않게 여겨졌다. 그래서 내가 익헌에 대한 제문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괴원(槐院)의 관원들이 요즘 너무나도 적체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과거에 합격한 지 14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참하관(參下官)으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괴원의 실함(實啣) 및 우관(郵官)을 띠고 있으면서 오래지 않아 6품으로 올라갈 사람을 제외하고는, 10년 이상이 된 사람은 모두 6품으로 올려 조용(調用)하소서."
하니, 따랐다. 제공이 아뢰기를,
"이만운(李萬運)이란 사람은 과거에 합격한 지 벌써 14년이나 되지만 아직도 당후(堂后)에 의망(擬望)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숙묘조(肅廟朝)의 대사헌 이원록(李元祿)의 후손입니다. 원록은 고(故) 판서 이원정(李元禎)과 형제간이었는데 원정은 경신 옥사(庚申獄事)에 관련되었고, 신축·임인년 간에는 원정의 아들 이담명(李聃命)이 ‘아비를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수사(收司)의 율(律)이 원록의 손자에까지 미쳐가 과거에 합격한 후 지금까지 벼슬길이 막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운의 인품과 문예(文藝)는 참으로 아깝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은 윤지범(尹持範)을 윤휴(尹鑴)의 손자라 하여 당후로 의망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세상에서 남의 벼슬길을 막고나서는 이유가 대부분 이와 같은 일들이다. 요즘 경을 등용한 것 때문에 더러는 판국을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인데, 이것은 정말 논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대체로 전에는 한쪽편만 지척(指斥)을 하여 결함이 있다고 한 결과, 신축·임인년의 사건이 있었고, 또 병오년의 사건도 있었다. 순전히 결함이 없는 사람은 역시 보기가 드물다. 설사 흠잡을 만한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5세(世)가 지나 영향력이 없어진 뒤에는 본디 이것을 이유로 영구히 막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쪽이나 저쪽이 그다지 심한 차이가 없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으로서는 각각 자기가 처신을 깨끗이 할 것을 생각하면서 다같이 큰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때의 형편에 맞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작년에 호서(湖西) 지방에 내려갔을 때 평택(平澤)을 지나는 길에 한 여인이 땅을 치며 하늘에 울부짖으면서 원통한 심정을 호소하기에, 신이 사람을 시켜 물어보았더니, 그는 바로 성태주(成泰柱)의 처(妻)였습니다. 듣건대, 그는 시집간 지 사흘 만에 곧 자기의 지아비가 먼곳에 귀양을 갔는데 지금까지 14년이 되도록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혹시 위에 보고되는 일이 있을까 하여 서울에까지 따라와서 여러 날이 지나도록 신의 집에 대고 애걸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비록 좋은 말로 위로하여 보내기는 하였으나, 지금까지도 그를 생각하면 여전히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전번에 들으니, 그가 과연 글을 올린 결과 적당하게 처분하였다고 하니, 그에게 있어 실로 매우 감격스러운 은혜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을 처분한 것이 타당한지 모르겠다. 태주(泰柱)는 병신년에 홍계희(洪啓禧)를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자고 소를 올려 청하였는데, 그때 이의철(李宜哲)·조중회(趙重晦)와 같은 사람들은 소를 올려 계희를 공격하여 배척하기도 하였다.
대체로 계희는 고(故) 판서 이재(李縡)의 문생(門生)으로서, 이재의 문집(文集) 가운데 자기를 비난한 것이 있으면 모조리 삭제해버렸다. 이 때문에 이재의 문도(門徒)들에게 크게 공격을 받았고, 그후 계희의 집안은 드디어 악역(惡逆)으로 낙인 찍히고 태주 또한 귀양가는 처벌을 받았다. 이제 와서 그의 처(妻)가 비록 이처럼 원통하다고 호소를 하지만, 계희를 위해 서원(書院)에 배향하자고 청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번에 석방할 수 있겠는가. 그 처를 그 지아비의 배소(配所)에 함께 유배하려고 하였으나, 만약 너무 오래도록 귀양살이를 시키면 그의 늙은 시어미를 봉양할 사람이 없게 되는 까닭에, 단지 도형(徒刑) 2년으로 감률(勘律)을 하였다. 지난번에 홍섭(弘燮)의 제부(弟婦)가 호소하였을 때에도 특별히 그 지아비의 배소에 함께 유배하였으니, 이 또한 화기(和氣)를 인도하는 방도이다."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정원일기(政院日記)》를 보니, 신해년에 전라 감사가 하직 인사를 할 때, 선대왕(先大王)께서 하교하시기를, ‘무신년 역가(逆家)의 권속(眷屬)들로서 노비가 되었거나 귀양을 간 자들을, 만약 역적의 권속이라는 이유로 진휼(賑恤)을 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아나가겠는가. 비록 죄를 지은 자의 가족일망정 그들이 굶어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또한 어진 정치가 아니므로, 이 점을 특별히 신칙하는 바이다.’고 하셨습니다.
대체로 무신년 역적의 자손들을 어떻게 천지 사이에 숨을 쉬고 살도록 놔둘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위대하신 말씀은 이와 같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堯)·순(舜)처럼 어진 마음으로, 하늘의 명을 이어나가는 아름다움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신은 우러러 찬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반궁(泮宮)에서 인일제(人日製)를 설행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를 거행하였다.
도당(都堂)에서 한림 회권(翰林會圈)을 행하여 심능적(沈能迪)·김이교(金履喬)·정약용(丁若鏞)·정문시(鄭文始)·홍낙유(洪樂游)·윤지눌(尹持訥)을 뽑았다.
2월 27일 무인
도기(到記) 및 일차(日次) 유생 전강(儒生殿講)을 거행하였다. 일차(日次)의 강(講)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이명연(李明淵)과 도기(到記)의 강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 이원팔(李元八)에게 모두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할 자격을 주었다.
2월 28일 기묘
김문순(金文淳)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육상궁(毓祥宮)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올해는 숙빈(淑嬪)이 출생한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상이 봉안각(奉安閣)·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을 일일이 참배하고 나서 궁원(宮園)에서 남여(藍輿)를 타고 청풍계(淸風溪)에 이르러 태고정(太古亭)에서 잠깐 쉬었는데, 이 집은 바로 고(故) 재상 김상용(金尙容)의 집이다. 그의 제사(祭祀)를 받드는 후손을 소견(召見)하고, 전조(銓曹)에 명하여 녹용(錄用)하도록 하였으며, 호조(戶曹)에 명하여 그 집을 수리해주도록 하였다. 또 창의궁(彰義宮)·장보각(藏譜閣)과 의소묘(懿昭廟)를 일일이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화순 옹주(和順翁主)의 집에 이르러 옹주의 아들 김이주(金頤柱)를 불러 만나보았다. 이어 하교하기를,
"환갑날에는 연회(宴會)를 차려주고 시(詩)를 지어주는 것인데, 그가 노쇠(老衰)하기 때문에 맞아들일 수가 없다. 어가(御駕)가 옹주의 집을 지나게 되어 길에서 불러 만나보았는데, 선조(先朝)의 외손(外孫)을 어찌 외조(外朝)의 여러 신하들에게 비하겠는가. 지난날에 직질(職秩)을 올려주려다가 미처 못하였다. 행 부사직(副司直) 김이주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가설(加設)하여 단망(單望)으로 추천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은(謝恩)하게 할 것이며, 김귀주(金貴柱)의 주인집에는 의빈(儀賓)을 보내 치제(致祭)하되, 제문(祭文)은 내가 친히 짓겠다."
하였다.
하교하였다.
"이날 술잔을 올리니 60주년이 거듭 돌아온 데 대하여 감회가 뭉클하다. 선조(先朝)에서도 ‘무술년이 거듭 돌아오게 되었으니 어찌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 해가 다시 돌아오게 된 데 대하여 성효(聖孝)의 추모심(追慕心)이 어떠하였겠는가. 본궁(本宮)의 사친(私親)인 증 영의정의 집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도총관(都摠管) 최동악(崔東岳)을 임기가 다되어 가는 곤수(閫帥) 가운데 빈 자리를 내어 의망(擬望)하여 들이라."
최동악(崔東岳)을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장령 최경악(崔景岳)이 상소하기를,
"신은 최근의 일에 대하여 놀랍고 분한 것이 있습니다. 예원(藝苑)의 선발은 예로부터 참하관(參下官)으로서의 극선(極選)이라고 일컬어온 만큼, 반드시 인망과 재주가 공의(公議)에 맞아야 의의(擬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도당(都堂) 회권(會圈)에서는 더러 사정(私情)에 끌려서 규례를 위반하기까지 하였으므로, 뭇사람들이 대단히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이 회권(會圈)을 주관한 대신(大臣)에 대해서는 격례(格例)에 구애되어 비록 처벌하기를 청할 수 없지만, 회좌(會坐)에 참석한 여러 당상(堂上)들에 대해서는 모두 파직시키는 법을 적용하고, 한시바삐 회권을 다시 개정하도록 명함으로써, 한림 선발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한림 추천의 권점(圈點)은, 사정(私情)에 치우치는 것을 없애기 위한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인데, 권점을 통한 선발에 대해 또 이와 같이 운운하니, 이제는 권점을 삼망(三望)으로 고쳐야만 네 마음에 맞겠는가. 이미 사정에 끌렸다고 하고 또 규례를 위반하였다고 하였는데, 모든 일에서 갑(甲)이 공정하다고 하는 것을 을(乙)은 사정을 썼다고 하는 법이다. 이 한 가지에 대해서는 본래 따질 것조차 없지만, 이른바 규례를 위반하였다는 말은 또 무엇을 가리켜 한 것인가. 여러 대간(臺諫)들을 파면시키자는 말은 우선 놓아두더라도 스스럼없이 대신을 침척(侵斥)하고 나선 너의 행동은 매우 해괴하므로, 관작을 삭탈하는 법을 적용하는 바이다. 청한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조 참판 구상(具庠)이 상소하기를,
"신은 이른 아침에 전하를 배종(陪從)하는 반열에 참가하려고 세 당상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의정부의 하례(下隷)가 앞에 뛰어들어 수청 서리(隨廳書吏)를 잡아 끌어내며 호패(號牌)를 내놓으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것은 신들이 반열에 나아간 것이 대신보다 늦었기 때문에 대신이 호패를 빼앗아 오라고 명령하였고, 하례들이 이를 빙자하여 난동을 부린 것이었습니다. 신이 호통을 쳐서 꾸짖고는, 이어 조례(曹隷)를 시켜 그 호패를 조사하려 하니 또 조례를 밀쳐내고 떠났습니다. 얼마 후 대신이 하례를 시켜 신에게 분부하기를, ‘이조 참판은 반열에 참가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곧 부끄러운 얼굴빛이 되어 물러나왔습니다.
신이 의정부의 하인을 엄하게 꾸짖은 것은 애초에 격노(激怒)해서 그런 것이 아닌 만큼, 대신으로서는 이 사실을 들었다면 의정부 하례를 꾸짖어도 안 될 것이 없을텐데 자세한 내막도 알려 하지 않은 채 하인의 말만 듣고 ‘반열에 참가할 수 없다.’는 말까지 하였으니,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설사 신이 격노해서 그랬다고 하더라도, 신에게 죄줄 것을 청하거나 신의 하인을 다스리면 괜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에게 잘못하였다 하여 배종하는 반열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어느쪽이 더 중하고 경한지를 모르겠습니다. 이에 감히 자송(自訟)하는 글을 올리는 바이니, 어서 신의 벼슬을 깎아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헌부가 글을 올려 대신을 침척(侵斥)한 데 대해 이제 방금 처분을 하였는데, 경의 상소가 또 한 시각도 지나지 않아 연달아 올라왔으니, 경의 일은 대신(臺臣)의 일보다도 더 해괴하다. 근래에 대관(大官)의 위신이 존엄하지 못한 것은 내가 제대로 공경히 예우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경재(卿宰) 이하로부터 이처럼 무시당하고 깔보이면 오늘날 대신노릇 하기가 역시 어렵고 고달프지 않겠는가. 경이 올린 이 상소는, 말은 이렇게 하였으나 그 의도를 엉뚱한 곳에 두어 일부러 말썽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임을 빤히 알 수 있다. 경에 대해서는 파직시키는 법을 적용한다."
하였다.
2월 29일 경진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거행하였다. 이날, 소시(召試)를 거행하려고 할 때에,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채제공(蔡濟恭)과 관각(館閣)의 당상들이 모두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엄한 하교를 내려 전패(前牌)로 급히 부르도록 명하니, 제공이 대궐 아래에서 대명(待命)하였다. 상이 대명하지 말고 어서 입시(入侍)하도록 유시(諭示)하니, 제공이 이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삼가 장령 최경악(崔景岳)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도당(都堂)에서의 한림 권점(翰林圈點) 일로 남들의 비방을 호되게 듣게 되었습니다. 아, 신이 애써 받들어가는 것은 화평(和平)을 유지하시려는 성의(聖意)였고, 선발(選拔)에 한껏 관심을 둔 것은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더더구나 균등하고 방정(方正)하게 하는 것은, 천하를 평안하게 해보려는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로(世路)는 평탄하기가 어렵고 인욕(人欲)은 한량이 없습니다. 이른바 사정(私情)에 끌리고 격식을 위반하였다는 것이, 비록 무슨 사정에 끌렸고 어떤 격식을 위반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심보가 단지 권점(圈點)하는 일을 무효화시키려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권점을 주관한 사람은 신이니, 어떻게 재상의 반열에서 얼굴을 들고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서 위엄 있는 벌을 내리소서.
계속하여 삼가 전 참판 구상(具庠)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비록 그 전본(全本)을 아직 보지 못하였으나, 어제의 반열에 대한 일을 가지고 선수를 칠 꾀를 부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임금이 거둥을 하게 될 때에는, 엄고(嚴鼓)가 울리면 동반(東班)·서반(西班)이 미리 정제(整齊)를 하며, 2엄(嚴)이 울리기를 기다려 대신이 비로소 좌석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나라의 기강이 어디에서고 다들 해이해져, 대신이 비록 반열에 나오더라도 경재(卿宰)들은 거드름을 피우면서 끄떡조차 하지 않습니다. 신이 수삼십 년 전에는 조정의 예의가 이처럼 무질서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제도 2엄(嚴)이 울린 후에 신이 좌석에 나가니, 경재(卿宰)의 반열에 초상(軺床)만 있고 자리를 비워놓은 것이 서너 군데나 있었으므로, 신이 녹사(錄事)로 하여금 적발토록 하고 그 서리(書吏)를 가두었습니다. 구상은 늦게서야 꾸물꾸물 나와서 이조의 하리를 꾸짖고 의정부의 하례를 끌어내어 이조 서리를 잡아가둔 자의 호패(號牌)를 빼앗아 가져갔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곧이듣지 않고 이조의 서리들을 불러다가 따져 물었습니다. 이렇게 캐묻는 과정에 동반·서반이 다들 알게 된 것입니다.
아, 나라가 나라다워지려면 기강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가 의정부에 앉은 채로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붙잡아들인 일은 아주 오랜 옛일이라서 비록 바랄 수가 없지만, 4백 년 동안에 아직 이처럼 해괴한 일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이조의 서리에게 분부하기를, ‘내일 경연(經筵)에 들어가 논죄(論罪)를 할 터이니, 이조 참판은 반행(班行)에 앉아 있을 수 없다. 물러가는 게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사실이 이러하였으니, 구상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물러가 있으면서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글을 올리기에 급급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성상의 비답이 준엄하여 비록 파면시키라고 명하였으나, 신은 파면 따위의 처벌이 이미 무너진 기강을 수습하여 정돈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빈대(賓對)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아무래도 참가할 길이 만무하니, 더욱 처벌을 기다리는 심정만이 간절할 따름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권점(圈點)의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사정(私情)에 치우치는 낡은 버릇 때문이다. 결국 옳게 결말을 짓는 것은 단지 한 번의 호령(號令)에 달린 문제이다.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던 여러 당상들도 모두 이미 부름을 받고 왔는데, 경이 차자를 올려 인혐(引嫌)을 하기 때문에 응시(應試)할 여러 사람들이 대궐 앞에 와서도 아직껏 꼼짝도 못하고 있다. 경은 부디 안심하고 조정에 나오도록 하라.
구상의 일에 대해서도 경이 올린 차자를 보고, 그간 모르고 있던 점을 더욱 알게 되었다. 경의 차자 내용 중에 ‘파면 따위의 처벌이 이미 무너진 기강을 수습하여 정돈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 말은 정말로 옳다. 경이 연석(筵席)에 나오기를 기다려 더 등급을 높여 감죄(勘罪)하겠으니, 이점도 아울러 양찰하기 바란다."
하였다. 이에 제공이 나와서 숙명(肅命)을 하니, 그제서야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보였는데, 전문(箋文)의 제목은, ‘본조(本朝)의 경연관이 한림(翰林) 선발을 추천 방식에서 권점 방식으로 고침으로써 붕당을 지어 자기편을 두둔하고 남과 알력을 일으키는 풍조를 막아버릴 것을 청하였던 데 대하여 논의하라.’라는 것으로 내도록 명하였다. 이에 김이교(金履喬) 등이 글을 지어올릴 마음이 없어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글제에는 중요한 뜻이 담겨 있다. 선대왕(先大王)의 50년 성대한 덕업(德業)이 오직 붕당을 제거하고 삿된 것을 없앤 데에 있었으므로, 한림의 추천 방식을 없앤 일도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한 일과 함께 동일한 대정(大政)이다. 응시하는 사람들이 만약 지어 바치지 않는다면, 그 죄가 어떻게 되겠는가. 너희들은 즉시 지어 올리도록 하라.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물러가서 명령을 어긴 죄를 받은 다음에야 안심할 수 있겠는가. 승지(承旨)와 시관(試官)은 이 내용을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해가 곧 기울 무렵에, 상은 여러 문신(文臣)들이 끝내 지어 바치지 않은 데 대하여 누차 엄절한 하교를 내렸다. 규장각 제학 정민시(鄭民始)가 상주(上奏)하기를,
"한림 권점(翰林圈點)은 곧 신진(新進)들의 극선(極選)이므로 원래 남의 구설에 오르고도 시험에 참여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한림 권점에 참가하였을 때에, ‘인재를 놓쳐버린다.’고 말을 꺼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비록 규탄을 받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사람들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혐(引嫌)을 하였고, 권점을 고치는 조치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권점에 대한 일로 받은 규탄은 예사롭게 이야기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섣불리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애당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너무도 지나치게 독촉을 하시어 민망하고 난처하여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게 만드시니, 신은 삼가 이것이 즉위하신 이후 처음 있는 잘못된 거조(擧措)라고 봅니다. 거조가 이로 말미암아 타당성을 벗어나고, 명기(名器)가 이 때문에 더럽혀지며, 염방(廉防)도 이 때문에 허물어지니, 이는 한 가지 일에서 세 가지 잘못을 저지른 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해해 주소서. 이것이 신의 구구한 바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卿) 역시 잘못이다."
하고는, 이어 하교하기를,
"오늘 대궐에 나오게 된 것은 결말을 보자는 의도에서 나온 일인데, 지금 이 중신(重臣)의 연주(筵奏)는 천만 뜻밖이다. ‘즉위한 이후 처음 있는 잘못된 거조이다.’고 하였고, 또 ‘신진(新進)들을 속박(束縛)한다.’느니, ‘명기(名器)를 더럽힌다.’느니 하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마치 대의 명분에 관한 일이라도 되는 양 따지고 들었다. 이는 과연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관각 당상(館閣堂上) 정민시를 파직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정문시(鄭文始)·김이교(金履喬)·심능적(沈能迪) 등을 내가 직접 심문하겠으니, 격식을 갖추어 대령(待令)토록 하라."
하니, 문시 등이 비로소 글을 지어 바쳤다. 이어 정약용(丁若鏞)·김이교(金履喬)를 뽑았다.
구상(具庠)에게 삭직(削職)하는 법을 추가로 적용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오재순(吳載純)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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