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임오
경상 감사 이조원(李祖源)에게 관할 고을을 순찰하도록 신칙하였다. 이것은 경상 도 안사 어사(慶尙道按査御史) 정만시(鄭萬始)가 조사를 거행하여 치계(馳啓)하였는데 조원(祖源)의 일이 누락되었기 때문이었다.
영변 부사(寧邊府使) 허근(許), 전 희천 군수(熙川郡守) 정욱세(鄭勗世)·유원 첨사(柔院僉使) 권응직(權應稷)을 귀양보냈다. 이는 유민(流民)들을 제대로 안집(安集)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홍양호(洪良浩)를 홍문관 제학으로, 서호수(徐浩修)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삼일제(三日製)를 반궁(泮宮)에서 설행하였다.
3월 3일 계미
영중추부사 김치인(金致仁)이 졸하였다.
치인의 자(字)는 공서(公恕)이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아들이다. 영종(英宗) 무진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양전(兩銓)을 거친 후 영의정에 이르렀고, 치사(致仕)를 하고서 봉조하(奉朝賀)로 있었다. 병신년에 승습 주청사(承襲奏請使)로 연경(燕京)에 갔었고, 병오년에는 치사(致仕)를 한 것이 취소되고 수규(首揆)009) 에 임명되었다. 해임(解任)되고 나서 또 다시 치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주도 면밀하고 과감한 성격이었으며, 국가의 전고(典故)에 대하여 잘 알았다. 스스로 옳다고 믿기를 좋아하였고, 대체(大體)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재로(在魯)가 영종 초기에 탕평책(蕩平策)을 극력 주장하다가 크게 사류(士類)들에게 비난을 받았는데, 치인이 조정에 올라서고부터는 자못 사류들과의 사이에서 주선을 해주어, 세상 사람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었다.’고들 말하였다. 이때에 와서 졸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70세가 넘는 원로 대신으로서 조정에 40여 년 동안이나 있었고, 재상으로 있은 지도 20년이 넘었다. 사적(事蹟)의 본말은, 모든 사람들이 다들 아는 바이며, 묘당 일에 성의를 다한 점에 있어서는, 선조(先朝)께서 인정을 하셨고 나 역시 칭찬하고 감탄하였었다. 지금 갑자기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무척 슬프고 애석하다. 조문(吊問)하고 치제(致祭)하고 부의(賻儀)하는 것을 규례를 살피어 거행할 것이며, 녹봉(祿俸)은 3년에 한하여 그대로 지급토록 하라."
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가 치계(馳啓)하기를,
"작년 가을 순심(巡審)할 때에 백성들이 1천 명 또는 1백 명씩 떼를 지어, 영남(嶺南)의 곡식 수십만 섬을 급히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영남에서 실어온 것이 3만 포(包)도 차지 않았고 5개월이나 질질 끌다가 겨우 운반을 마쳤으므로, 순심을 중단할 뻔한 적이 한두 차례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만약 영남 곡식에 목숨을 맡기기로 한다면 곤란하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각자 자기 경내(境內)의 곡식을 모조리 찾아내게 하여 혹시 살아날 가망을 기대하는 것이 낫습니다. 만에 하나 요행을 바라는 계책을 내어 적곡(糴穀)의 수량을 맞추어 놓도록 한다면 비록 고을마다 생각대로 되지는 않더라도 크게 잘못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 단천 부사(端川府使) 홍윤복(洪允復)을 논핵하기를,
"그는 고을마다 풍속이 다르고 치소(治所)마다 마땅한 바가 다르다는 점을 알지 못하고서, 백성들의 원망을 책임지겠노라고 자칭하면서도 무어(撫御)하는 방법에 어둡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폐를 끼칠까 염려되어 당분간 죄를 따지지 않을 생각입니다."
하니, 회유(回諭)하기를,
"이 장계(狀啓) 내용을 보고 북쪽 백성의 일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원망을 떠맡아가면서 적곡(糴穀)을 받아내어 영남 곡식을 실어오지 않아도 되게 하였으니, 이 한 가지 일은 비록 공(功)과 죄(罪)가 서로 맞먹는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요즘 연석(筵席)에서 듣건대, 북쪽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모두 ‘작년 적곡의 품질이 전부 빈쭉정이어서 먹을 수가 없는 것들이다.’고 하는 말들이다. 정말 이러하다면, 올봄의 종자곡과 식량을 어떻게 마련하겠는가. 이런 까닭에 절반은 마음이 놓이고 절반은 마음에 걸린다. 백성들의 식량 문제가 해결의 가닥을 잡았다고 스스로 한가하게 지낼 꼬투리로 삼지 말고, 구휼하고 살려낼 대책을 한결 더 강구하여 허물을 종식시킬 방안을 도모하게끔 하라.
경은 비록 단천 부사를 놓고 ‘풍속이 다르고 마땅한 바가 다르다는 것을 모른다.’고 하였는데, 이밖에도 남관(南關)의 여러 지방관들 가운데 곡물값이 뛰어오르기를 노리어 자기 잇속을 채우고자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하면, 그 죄를 어찌 사심이 없는 단천 군수에 비하겠는가.
북청(北靑)의 지방관이 자신을 단속하고 성심을 다하여 3년 동안 한결같이 힘써, 구렁텅이에 굴러죽게 되었던 백성들이 편안하게 발뻗고 살게끔 된 것에 대하여 나는 이 지방관에게 공로가 있다고 본다. 작년 가을 큰물이 지는 재해 때에, 수많은 백성들이 눈 앞에 닥친 위험에 위급하다고 명백하게 보고하였으나 거의 죽어가던 우리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낸 것은 첫째도 경성 판관(鏡城判官)의 공이요, 둘째도 경성 판관의 공이다. 원망을 떠맡는 데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법이지만 경성 판관과 같은 자가 어디에 있겠으며, 나랏일을 받드는 데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경성 판관과 같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쌀로 환산하여 4천 포(包)면 곧 곡물(穀物)로 따질 때 1만여 포나 되는데 작년에 본읍에서는 힘을 다해가면서 실어 날랐다. 조정에서 공로를 표창하는 정사를 이런 사람에게 베풀지 않고 누구에게 베풀겠는가. 우선 그를 가상히 여기는 뜻을 회유(回諭) 가운데 대략 언급하는 바이니, 이 회유를 가지고 도내의 수령들에게 알려주어 유능한 자들은 더욱 힘쓰게 하고 용렬한 자는 두려워할 줄 알도록 하라."
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이상(李頤祥)이 장계(狀啓)를 올려 아뢰기를,
"어천 찰방(魚川察訪) 조형수(曺亨壽)가, 본국에 돌아오는 동지 정사(冬至正使) 이성원(李性源)에게 보내는 유서(諭書) 한 통을 가지고 신의 고을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본도 관찰사가 승정원의 지위(知委)로 인하여 동지 정사에게 관문(關文)을 발송하고 이를 가지고 가서 전유(傳諭)하게 하되 도내의 겸사(兼史)가 사신이 책문(柵門)에 도착할 날짜를 헤아려 가져다 전달하라고 하였으므로, 찰방인 신이 이를 받들고 책문 밖으로 급히 달려가서 전해 주려 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종전에도 대신이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에 사관(史官)이 임금의 유서(諭書)를 받들어다 전달한 적은 여러번 있었으나 한번도 책문에까지 가서 전달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일단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기만 하면 곧 저들의 땅이므로 왕명(王命)을 띤 사관(史官)이 이역(異域)을 섣불리 왕래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에 이 사관이 책문에까지 가려고 하는 것은 전례(前例)로 비춰볼 때 근거할 데가 없고, 더구나 승정원에서도 또 신에게 공문을 보내오지 않았으니, 변경 관문을 조심스레 지켜야 하는 신의 도리로서는 강을 건너도록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중한 전유(傳諭)의 행차를 신의 미혹된 주장만으로 함부로 못가게 붙들어두고 있는 것은 외람된 일인 듯합니다. 이에 황공하여 대죄(待罪)하는 바입니다."
하니, 회유(回諭)하기를,
"너의 처사는 일의 체모에 꼭 맞는다고 할 수 있다.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3월 5일 을유
황해도 관찰사 이시수(李時秀)가 장계(狀啓)를 올려 아뢰기를,
"도내 각 고을의 유민(流民)들이 9천 3백 45명인데 이미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2천 5백 26명이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6천 8백 19명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수안(遂安) 한 고을의 유민들만 해도 1천 6백여 명이나 된다. 조정의 형정(刑政)이 일정하게 시행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당해 수령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영변(寧邊)·희천(熙川)의 유민 수효를 상고(相考)하여 감률(勘律)토록 하고, 봉산(鳳山)의 7백 명도 희천과 비슷하니 똑같이 감률하라."
하였다. 이에 전 수안 군수 이겸환(李謙煥)과 전 봉산 군수 이하보(李夏保)를 유배시켰다.
3월 6일 병술
팔도의 유생들에게 응제(應製)를 명하여 차상(次上) 이상의 9백 89명을 뽑았다. 【 경기(京畿)에서는 유학(幼學) 조륜(趙崙) 등 4백 6명이고, 황해도에서는 유학 홍성조(洪聖肇) 등 79명이고, 충청도에서는 유학 정예(鄭枻)를 비롯하여 1백 74명이고, 원춘도(原春道)에서는 유학 홍상호(洪尙浩) 등 51명이고, 전라도에서는 유학 김낙규(金樂珪) 등 85명이고, 경상도에서는 유학 이달연(李達延) 등 60명이고, 평안도에서는 유학 유학원(劉學元) 등 1백 15명이고, 함경도에서는 유학 남이하(南履夏) 등 18명이었다.】 하교하기를,
"시골 선비들에게 반제(泮製)를 특별히 시험보이는 일은, 학문을 권장하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시권(試券)을 내가 손수 비점(批點)하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특별한 은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각도의 합격자 성명(姓名)을 쓴 방목(榜目) 한 벌에 보인(寶印)을 찍어서 각 도의 장원(壯元)한 자에게 나눠주도록 하라. 상전(賞典)은, 장원(壯元) 및 이하(二下)를 맞은 사람에게는 《팔자백선(八子百選)》 및 지필묵(紙筆墨)을 주고, 삼상(三上)·삼중(三中)·삼하(三下)를 맞은 사람에게는 《정음통석(正音通釋)》과 지필묵을 주고, 차상(次上)을 맞은 사람에게는 지필묵을 주되, 임금이 비점한 시권(試券)과 함께 각 고을에 나누어 보내 지방관으로 하여금 합격한 유생들을 불러들여 나눠주는 동시에 술과 음식을 대접하도록 함으로써 은상(恩賞)을 소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작년에 서북(西北) 백성들의 일 때문에 밤낮없이 마음이 걸렸는데, 이번에 제도(諸道) 유생들에게 응제(應製)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서북 지방의 유생들 가운데 과거에 응시하려고 준비하는 자가 얼마나 되는가를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이제 이번에 바친 시권(試券)을 살펴보니, 서도(西道)에서 온 것이 꽤 많았고 북도(北道)에서도 올라왔으니 일분이나마 위안과 기쁨의 단서가 될 수 있었다. 관서(關西)에서 장원(壯元)한 강동(江東)의 유학(幼學) 유학원(劉學元)이 지은 글로 말하면, 매우 훌륭하여 서울에서 태어난 학자(學子)들보다 나으니 더없이 가상한 노릇이다. 북관(北關)에서 장원한 덕원(德源)의 유학 남이하(南履夏)가 지은 글도 꽤 마음에 든다. 이 두 도에는 다 도내의 참봉(參奉) 자리가 있으니, 두 도의 도백(道伯)에게 하유(下諭)하여 모두 자리가 나는 즉시 단망(單望)으로 올려 임명하도록 하라."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금군(禁軍)의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다. 금군 별장(禁軍別將) 임률(任嵂)이 아뢰기를,
"금군(禁軍)에게 취재(取才) 시험을 보이고 말[馬]을 바치게 하는 규정은, 봄 가을 두 차례의 시취(試取) 뒤 봄과 가을 매 분기(分期)에 한량(閑良)이 말을 바치게 하되 14필(匹)을 넘지 말도록 하고 매 명색(名色)들이 바치는 말도 16필을 넘지 말도록 하며 각 명색들이 원거리에서 활을 쏘는 것도 7명을 넘지 말도록 함으로써, 이 수효로 차차 메꾸어 나간다면 1년 안에 거의 다 정원수를 채우게 될 것입니다. 또 매년 봄·가을마다 어김없이 취재(取才)를 설행하기 때문에 항간의 한량들은 다들 귀가 솔깃하여 부지런히 연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내(一內)가 설치되고부터는 말을 바치는 규정에 있어 절목(節目)의 법의(法意)를 무시하고 무려 1백여 필(匹)이나 마구 바치게 한 결과, 미처 구전(口傳)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적체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취재를 설행하지 않은 지가 4년이나 되었으며 한량들은 아예 활쏘기 연습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취재 시험을 보이고 말을 바치게 하는 법을 예전의 제도로 환원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정원수가 7백 명일 때에 매 분기에 바치는 말을 37필(匹)로 하였다면 지금은 정원수가 6백 명이 되는 셈이니 꼭 37필을 기준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 수효를 참작하여 매 분기에 35필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1년 이내에 정원수를 채우는 점에 있어서도 적체되는 현상이 없을 듯합니다. 혹시 구전을 받지 못한 사람이 적체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종전의 규례에 구애되지 말고 1년에 한 번씩 시취(試取)하도록 하는 일을 다시금 규정을 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후로는 옛제도를 다시 회복하여, 취재 시험을 반드시 봄 가을 두 차례 시험보이고, 말을 바치는 일은 상주(上奏)한 대로 규정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북(西北) 지방에서 무술(武術)에 힘쓰도록 신칙하고 관서(關西) 지방의 무관(武官) 출신의 자손들에게 관청에서 베를 거두는 법을 폐지하였다. 하교하기를,
"서북 지방은 무술을 숭상하는 지역이므로 조정에서 권장하는 정사 또한 마땅히 무기(武技)를 장려해야지 문예(文藝)를 권장해서는 적절하지 못하다. 그런데 일전(日前)의 응제(應製) 때에 여러 사람들의 글을 보니, 매 편(篇)마다 마음에 들고 사람마다 실력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작년에는 흉년이 들었는데도 능히 자력(自力)으로 멀리 서울의 시험에 응시하였으니, 서북 지방 사람들을 위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서 뛰어나게 잘 지은 두 사람을 수용(收用)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그러나 만약 무술에 대하여 별도로 고무시켜 권장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좋은 말은 기북(冀北)에서 구하고 좋은 대나무는 형남(荊南)에서 바치게 하듯 물산이 풍부한 가운데서 양재(良材)를 구하는 뜻에 자못 어긋난다.
대체로 경노(勁弩)를 멀리 쏘는 것이나 기추(騎芻)를 잘하기로는 언제나 서북 사람들을 일컬어왔다. 그런데 지난번에 1백 50보(步) 밖에서 철전(鐵箭)으로 쏘는 시험에서 관서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시험에 응한 사람이 없었다. 여기에서 무술 연습을 팽개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관서 고을이 이러하니 관북 지방 역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갖가지 상처들이 회복되지 못한 실정이니 무술 훈련을 강요하기란 어려운 형편이다. 관서의 경우는 섣달 초순까지 기한(期限)하여 철전(鐵箭)을 2백 보(步)에서 1백 50보까지 능히 쏠 수 있는 사람을, 북관의 경우는 내년 3월까지 기한하여 기추(騎芻)에서 매번 4, 5개씩 맞추는 자를 각 고을에 엄히 신칙하여 뽑아 보고토록 하고, 보고가 올라오거든 그 즉시 조정에 알리도록 하라. 양서(兩西)는 차이가 없이 똑같으니, 해서(海西)에서도 철전을 쏘는 사람을 뽑아 보고하되 역시 관서의 예대로 기한을 정하도록 하라.
이를 인하여 바로잡을 일이 있다. 서쪽 지방 무관 출신의 자손들을 충찬위(忠贊衛) 등에 부직(付職)하는 것은, 애초에는 그들을 위로하고 무마하는 좋은 뜻에서 나왔지만 오늘날에 와서 남은 폐단은 한갓 베나 거두어들이는 고질적인 폐해가 되고 있을 뿐이다. 지금처럼 무사(武事)를 수치로 여기고 유학(儒學)의 길로만 지향하는 풍속으로서는 베를 거두는 고통이 없더라도 오히려 씩씩한 무사(武士)가 예전만 못할까 걱정인데 더구나 침해하는 정사를 조정에서 앞장서 나가는데이겠는가. 이제부터 관서 지방의 무관 출신의 자손들에 대하여 관청에서 베를 거두는 것은 북관 지방의 예에 따라 특별히 폐지함으로써 무사(武士)들을 흥기시켜 권장하는 효과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서 재숙(齋宿)하였다.
3월 7일 정해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를 열천문(冽泉門)에서 거행하였다.
예조가 통례원(通禮院) 관원들의 포폄(褒貶)을 다시 토의하고 마감(磨勘)하여 아뢰니, 하교하기를,
"근래에 인의(引儀)들이 노창(臚唱)하는 재주가 제대로 늘지 못하고 아직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도 성의껏 연습을 하지 않는 것은, 6품 벼슬로 올라가는 원래 정해진 고정 불변의 자리를 남들에게 넘겨주고 있기 때문이 아닌 줄 어떻게 알겠는가. 인의 벼슬이 비록 낮은 관직이고 임시 직원이 많기는 하나, 궁전 섬돌 위에 서서 인도하고 소리치는 그 임무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더구나 크고 작은 향사(享祀)에도 인도하고 소리치는 것을 관장하니, 전후로 신칙했던 하교의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이후로 이조(吏曹)의 당상관으로서 청천(廳薦)을 적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묘당으로 하여금 초기(草記)를 하여 무겁게 감죄(勘罪)토록 하라. 또 차출(差出)할 때의 정망(政望)에도 천주(薦主) 및 연습을 감독한 찬의(贊儀)의 성명을 써내도록 함으로써 새로 제배(除拜)된 사람이 만일 제구실을 못할 경우에는 추천한 사람에게도 함께 죄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3월 8일 무자
전(前) 대사성 민종현(閔鍾顯)을 파직시켰다. 하교하기를,
"태학(太學)은 바로 선비들을 시험하는 곳으로 과거 시험의 글제를 베껴 보관하는 것은 원래부터 본관(本館)의 고사(故事)로 되어 있다. 내가 어린 시절에 본 바로는, 숙묘조(肅廟朝) 때 반유(泮儒)들에게 명하여 아무 때이고 응제(應製)하도록 하였고 성적을 매긴 시권(試券)에서 우등(優等)한 4, 5명에게는 모두 급제(及第)를 내렸다. 그 후 절일제(節日製)에서도 혹은 초시(初試)로 인정해주기도 하고 글제목을 모두 기재하여 두는 등록(謄錄)이 있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들으니, 본관에는 요즘 글제를 기록해두는 책이 없다고 하므로, 특별히 예전처럼 적어두게 하였다. 오래 전의 과거 시험 글제를 다 모아서 베껴쓰기가 어렵다면 병신년부터 시작하여 임금이 낸 글제와 시관(試官)이 낸 글제를 두 책에 갈라 적어두라는 내용으로 규정을 정한 바가 있었다. 오늘 그것을 가져다 보니, 을사년 이후의 것을 이유없이 빠뜨렸다. 거행하는 태도가 극히 태만하였으니, 당해 대사성을 파직하라."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가 삼등(三登)을 비롯한 관내 고을에 돌림병이 부쩍 퍼졌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이미 부쩍 퍼졌다고 했고 보면 한개 고을에도 지금 앓고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수효가 결코 이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수령이 하나하나 다 보고하지 못한 것이 아니면 필시 이장(里掌)들이 숨기고 관가에 보고하지 않은 것이니, 해당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별히 신칙하도록 하라. 죽은 사람에 대해 돌봐주기보다는 차라리 굶주려서 여위었거나 여위어 죽을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 적절하게 잘 구제함으로써 전염되어 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대체로 흉년에는 반드시 돌림병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만약 사전에 먹여주고 제때에 치료하지 않는다면 한 달쯤 전에 데려다가 돌려보낸 백성들이 뜨거운 불덩이 속에 내팽개쳐진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게 되면 이른바 백성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행한 일이 다만 백성에게 가혹하게 구는 정사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말이 여기에 이르면 잠을 잔들 어찌 편안하겠으며 밥을 먹은들 어찌 맛이 있겠는가. 지금 앓고 있는 사람의 수효를 사실대로 보고하도록 신칙하고, 구제하여 살려내는 방안은, 한결같이 몇 해 전에 남쪽 고을에 반시(頒示)하였던 특별 유시에 의거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널리 구제하는 성과가 있도록 하라. 그러면 맡겨 위임한 뜻에 거의 보답하게 될 것이니, 조금이라도 방심을 하지 말고 거듭 감독하고 신칙하라."
하였다.
3월 9일 기축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내시사(內試射)를 거행하였다.
3월 10일 경인
부사직(副司直) 강유(姜游)가 상소하기를,
"신은 특별히 서용(敍用)해주신 은혜를 입어 전하의 얼굴을 가까이서 우러러볼 수 있게 되었는데, 자상하신 옥음(玉音)으로 적곡(糴穀)의 폐단에 대하여 물어주셨습니다. 이번 각 고을의 모작전(耗作錢)은 실로 폐단을 없애려는 훌륭하신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은 온 나라를 통틀어 말하면서 산삼(山蔘)에 관한 폐단까지 언급하고자 합니다.
신이 청송(靑松)에 이르렀을 때 본읍의 적곡에 관한 폐단 뿐만 아니라 도내(道內)에도 이러한 폐단이 많다고 익히 듣고 마음속으로 추측되는 바가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환곡이 가장 많은 고을로서 이자에 이자가 생겨서 큰 고질적 폐단이 되어, 감당할 수가 없는 경우 심지어 살아 있는 아내와 울면서 헤어지거나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산으로 들어가는 정도였습니다. 만약 곡식이 많은 고을의 모조(耗條)를 작전(作錢)하여 경조(京曹)에 직접 바쳐서 삼값에 보태고 경비에 보태도록 한다면 실로 양쪽이 다 편리할 것입니다.
그런데 호조(戶曹)에서 본도(本道)에 왔다갔다 할 적에 각 고을에서는 더러 상납(上納)하는 데에 폐단이 있을까봐 난처해 하기도 하고, 비록 곡식이 많은 고을이 있더라도 또한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경상도는 곡식이 가장 많다고 일컫지만 모작전(耗作錢)이 시행되고 있는 곳이 20여 고을에 불과하고, 관서(關西)에도 그 수가 많지 않으며 그밖의 여러 도에서는 보고된 바가 없으니, 신은 매우 아쉽게 여깁니다. 지금 작전(作錢)하는 수효가 적은 것은 실로 곡식이 많은 고을을 정해주지 않은 데 연유합니다. 신은 각도의 곡식이 많은 고을에 대해서도 한계를 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환곡을 민호(民戶)와 비교하여 매 호(戶)에 원래의 환곡이나 감영(監營)의 환곡으로 남겨둔 분량을 합하여 7석(石)이 되는 것은 바로 곡식이 많은 고을입니다. 왜냐하면, 매 호의 7석은 반분(半分)으로 계산한다면 3석 반에 불과하므로 그리 많지 않은 듯하지만 환자로 나누어줄 때는 비록 매 호마다 나눠준다고 하더라도 받지 못하게 될 호수가 10분의 2일 것이니, 10호로 계산하면 환자를 받는 집이 8호가 될 것입니다. 또 대호(大戶)·중호(中戶)·소호(小戶)·잔호(殘戶)로 나눠준다면, 8의 반분(半分)이 35석이 되니 대호 하나가 6석을 받고 중호 셋이 각각 4석을 받으며 소호와 잔호 넷이 각각 3석 반씩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네 등급의 호(戶) 가운데 간혹 등수가 같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크게 서로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33석으로 추이(推移)하여 골고루 나눠줄 수 있다면 35석에서 남는 것이 2석일 것이며 8호에서 2석이 남으면 8백 호에서 남는 것이 2백 석일 것이고 1만 호되는 고을에서는 거의 2천 석이 넘을 것이니, 이것은 남겨두었다가 고을 안에 공적으로 쓰는 데 소비할 수도 있고, 혹은 뜻밖에 생기는 비용에 대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쓸 데가 없다면 또 원래의 분배에서 더 받게 해야 할 것입니다. 환곡을 받는 민호들이 받는 수량이 6석에서부터 3석 반에 이른다면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계속 이자를 불리기만 하고 헤아려 줄여주는 바가 없다면 10년을 물려 계산할 때에 대호는 6석이 11석 남짓하게 될 것이고, 그밖의 호는 미루어 알 수 있으니 많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흉년을 만나서 백성들이 다들 받기를 원한다면 부족할 염려가 있을 듯하지만, 흉년에는 또 당연히 구제받는 민호가 있어서 꼭 다들 환곡을 받지는 않고 또 절반을 남겨둔 곡식으로 이어나갈 수 있으므로 역시 충분히 분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흉년을 만나 혹시 환곡의 봉납(捧納)을 중지하게 되는 일이 생겨 원래의 환곡이 줄어들고 절반 남겨둔 것도 부족하게 되면, 우선 작전(作錢)을 중지하고 예전대로 모조(耗條)를 불려 원래의 환곡이 제 수량에 차기를 기다려 다시금 작전을 하되, 매 호마다 7석이 차지 않는 고을에서는 우선 모조(耗條)를 불리고 7석이 넘는 고을에서는 원호(元戶)와 함께 분수(分數)를 작전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감영 환곡이 있는 고을에는 원래 환곡 가운데 남은 수량이 비록 매 호마다 7석씩 차지 않더라도 감영 환곡과 함께 7석이 된다면 원래의 환곡을 이 역시 모작전(耗作錢)하도록 하면 됩니다. 그리고 환자 보리가 간혹 한 호에 수십 석 또는 10여 석씩 있는 것도 역시 모작전을 하도록 하고 수십 석이 넘는 경우에는 원래의 환자와 함께 분수(分數)를 작전(作錢)하면 됩니다.
또 각도의 바다와 인접한 고을에는 때때로 교제창(交濟倉) 및 탐라(耽羅)에 서로 의뢰하기도 하겠으나, 재[嶺]로 가로막힌 요충 지역에는 군량(軍糧)이 중요하므로 이런 예를 적용할 수 없습니다. 3분의 2를 창고에 남겨두어서 1분으로는 절반의 모조(耗條)를 감해주고 1분으로는 불시의 수요에 대비하게 하소서. 작전(作錢)의 규례로 말하면, 매년 시장 가격이 같지 않은데다가 아전들이 틈새를 비집고 농간을 부리는 통에 백성들은 거행함에 있어 어리둥절해 합니다. 차라리 원칙에 어긋나더라도 싼 가격을 따르는 것으로 규식을 정하여 영구히 반포(頒布)를 하고, 개창(開倉)을 할 때에 즉시 모조(耗條)를 제(除)하고 작전하게 되면, 백성들은 수량을 알고 거행을 할 수 있으므로 속임수를 당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환곡에 관한 폐단을 불가불 변통해야 하겠는데, 다른 고을에다가 이관(移管)하려고 하는 것도 물론 좋은 방법입니다만, 필시 원하지 않는데 강제로 넘기게 되는 우려가 있을 것이니, 차라리 경조(京曹)에 상납하여 경비(經費)에 보태게 하는 것이 실로 폐단을 바로잡는 중요한 방도가 될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천하(天下)의 보배로서 금(金)과 옥(玉)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금 한 푼[分]의 가격은 겨우 돈으로 6전(錢)입니다. 그런데 유독 인삼(人蔘)만은, 나삼(羅蔘) 한 푼의 가격이 4냥(兩)이고 강삼(江蔘) 한 푼의 가격이 1냥 4전(錢)으로서, 금과 옥보다도 훨씬 더 귀하다는 것은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강삼 한 돈쭝의 가격이 1냥하던 것을 신이 어렸을 때에도 눈으로 보았는데, 지금은 14냥입니다. 옛날의 전례를 상고하면 나삼 한 돈쭝의 가격이 쌀로 3말 5되였는데, 이것은 먼 옛날의 일이어서 말할 것도 없고, 신이 기묘년에 마침 경주(慶州)에 갔을 때 나삼 한 돈쭝의 가격이 20냥이였는데 지금은 40냥이 되었습니다. 또 계묘년에 신이 종성(鍾城)의 지방관으로 있을 적에 북삼(北蔘) 한 돈쭝의 가격이 4냥이었는데 지금은 10여 냥이나 나가고 있으니, 삼값이 본래 오늘날처럼 비싸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보면 조정에서 강삼 한 돈쭝의 가격을 4냥으로 정해둔 것도 많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통신사(通信使)가 머지않아 출발을 해야 하는데, 거기에 필요한 인삼이 2백 60근(斤)이나 됩니다. 신이 몇 해 전에 듣건대, 기영(箕營)과 강계(江界)에서는 자기 경내(境內)에서는 삼을 살 수가 없어서 값을 서울에 보내어 14냥으로 사려고 하니 갑자기 또 15냥으로 값을 올려서야 비로소 팔아넘겼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또 15냥에서 그칠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인삼(人蔘)이란 비용을 들여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서 나는 것을 손으로 캐는 것에 불과한데도 그 가격이 전보다 10배나 올랐으니, 어떻게 삼장사들의 농간에만 맡겨둔 채 금지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비록 가격을 줄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본래 비싸던 것을 강제로 줄이는 것이 아닙니다.
나삼(羅蔘)과 동삼(東蔘)은 사체가 다른 삼들과 다르므로 감히 왈가 왈부할 수 없습니다만, 지금은 삼장사들이 이미 많은 가격을 들였기 때문에 역시 갑자기 헐값으로 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년 가을까지는 현재의 가격을 올렸다내렸다 하면서 팔고 사게 하다가 내년 가을 이후부터는 조정에서 정한 가격 이외에 동전 한푼이라도 더하면 판 사람이나 산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중한 죄로 논함으로써, 사람들이 다들 정해진 가격 외에 더 많은 가격을 받을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감히 종전의 버릇을 되풀이하겠습니까.
어떤 의논하는 사람은 ‘삼값을 떨구어 놓고 나면 필시 삼을 캘 사람이 없을 것이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점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병자년에 목화 농사가 잘 안 되어서 무명 10자의 가격이 1냥이나 되었고 경진년에 목화 농사가 매우 잘되어 무명 30자 값이 1냥이었지만 경진년 때 사람들이 값이 헐하다 하여 무명을 짜지 않았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삼값을 만약 한 돈쭝에 5냥의 예로 적용한다면, 2백 60근의 값이 20만 8천 냥이 될 것이고 만약 10냥의 예로 적용한다면 41만 3천 냥이 될 것이며, 15냥의 예로 계산한다면 62만 4천 냥이나 될 것입니다. 만약 통신사가 곧 출발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경우, 그 값이 가장 비쌀 것이니, 이것은 이미 그랬던 적이 있는 일입니다. 또 왜인(倭人)이 보낸 사신이 오면 번번이 인삼을 소비하게 되는데, 이것도 계속적으로 해나가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이 신이 모작전(耗作錢)으로 삼값에 보태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삼가 신의 의도를 이해하시고 그 어리석음을 살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곡식이 많은 서남쪽 고을에서 모조(耗條)를 작전(作錢)하여 그 늘어난 수량을 나누어서 그 돈으로 통신사의 삼값에 옮겨 보충하자는 네 말도 근거가 있다. 여러 유사 당상들로 하여금 너와 더불어 충분히 토의하고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품지(稟旨)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삼의 값을 고정 가격으로 하자는 일에 대해서는, 이 이전에 묘당(廟堂)의 토의에서 이 판부사(李判府事)·김 판부사(金判府事) 두 대신들도 모두 가격을 더 올리자는 얘기에 난색을 표명하였다. 두 상신(相臣)은 모두 서남(西南) 지방의 도백(道伯)을 지냈기 때문에 소견에 필시 생각한 바가 있었을 터인데, 그때 고(故) 상신 김 영부사(金領府事)가 찬성하지 않아 끝내 가격을 올렸다. 두 의견이 비록 각기 주장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가지런하지 않은 것이 세상의 인심이니, 일정한 규식을 굳이 정해놓는다 해서 문제되는 점이 없어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큰 신발과 작은 신발의 가격이 똑같이 매겨지는 것에 대해서 이치에 통달한 아성(亞聖)의 학식으로도 오히려 실현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한 바 있지만 오늘날의 시장에는 큰 신발과 작은 신발의 가격이 같다. 옛날과 지금의 현실이 각기 다르니, 이런 점을 가지고 따져 본다면 네 말도 혹시 실현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나는 일찍이 고 상신의 말을 옳다고 생각했다. 만약 가격을 정해놓은 뒤에 장사치들이 내다팔지 아니하고 궤짝에 넣어 깊이 감추어놓고서 가격이 오를 경우 긴하게 써야 할 집에 몰래 팔고는 서로 쉬쉬하고 숨겨주어 한갓 신용만 없게 만들어 버린다면, 이에 법사(法司)에서는 금령(禁令)을 내고 거간꾼들은 송사를 일으키어 옛날에 없던 한 가지 폐단을 불러 일으키게 될 것이니, 이것을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확실히 폐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경비에 보탬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의 생활에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대신들과 유사 신하에게 강구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차대(次對)를 할 때에 의견을 한 가지로 집약하여 다시 상주하도록 하라.
이와 관련하여 마음에 언제나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환곡을 나눠주고받아들이는 제도는, 백성들의 식량을 넉넉하게 하고 흉년을 구제하는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이며, 사창(社倉)에 관한 주자(朱子)의 의견에도 우연히 부합되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 곡물 값이 헐한 지역의 곡식이 많은 가난한 집들의 고달픔은 그 고통스런 정상이 갖가지여서 흉년이 들기도 전에 백성들이 먼저 피해를 받게 된다. 어찌 조정에서 알고 있으면서도 폐단을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요체는 첫째는 호수를 따져 곡식을 계산하는 것이고 둘째는 산간 고을의 곡식을 덜어다가 연해 고을에 보태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뜻을 받들어나가는 방도는 역시 묘당에 달려 있으니, 그들로 하여금 똑같이 자세하게 회계(回啓)하게 하라. 너는 백성과 나라에 관한 일로 자신의 지위를 벗어나서 진술한 것이 한두 번만이 아니었으니, 그 성의가 매우 가상하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강유(姜游)의 상소문을 가지고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하였더니, 의논하기를 ‘통신사(通信使)가 한 번 가지고 갈 삼(蔘)은 이미 1년 전에 준비하여 혹은 삼으로 혹은 돈으로 경외(京外)에 보관되어 있으므로 지금 거듭 마련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시작하여 서남(西南)의 곡물이 많은 고을의 모곡(耗穀) 가운데 매년 작전(作錢)해 놓은 것에서 10분의 1만 떼내어 두었다가 다음 통신사가 갈 때 삼을 살 밑천으로 준비해 두는 것은 실로 사의(事宜)에 맞는 일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따랐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상주(上奏)하기를,
"전 부사(府使) 강유(姜游)의 상소문 중에서 인삼(人蔘)의 가격을 고정시키자는 일은,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으로 삼값이 뛰어오른 것보다 더 앞서는 것이 없으니, 조정에서 그 매매 가격을 일정하게 하여 농간을 부릴 수 없게 하자는 것으로서 그 말은 참으로 폐단을 바로잡는 데 있어서의 요체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세상의 인심이란 본래 일정하지가 않아서 사람의 힘으로는 억지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심보가 매우 거짓되고 조정의 기강이 엄격하지 못한 실정이니, 그 뛰어오르는 값을 억지로 받지 못하게 하고 갑자기 턱없이 싼값으로 협의하여 팔고 사게 한다면 아마도 실행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법령을 내놓고 실행이 되지 않으면 도리어 내놓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재신(宰臣)들에게 의견을 물었는 바, 좌참찬 김화진(金華鎭) 등이 다들 실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므로,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제공이 또 아뢰기를,
"어제 강유의 상소문 중에서는 호수를 따져 곡식을 계산하는 데 대한 방도를 극진히 논하였으나, 신의 생각에는 치도(治道)란 정도에 너무 지나친 것만 제거할 따름입니다. 몇 해 전에 곡식이 많은 고을에 대하여 조정에서 작전(作錢)하도록 규정을 정한 뒤, 혹시 산간 고을에 곡식이 많은 곳이면서도 아전(衙前)과 향임(鄕任)들이 내다 팔려고 하지 않아서 작전(作錢)으로 폐단을 없애고자 한 대상 속에서 누락된 곳이 있을 경우에는 도신(道臣)이 필시 보고들은 것이 있을 것이었으므로 그로 하여금 자세히 살펴 고을의 폐단과 백성의 소원을 계속적으로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관례에 따라 바로잡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옳게 여겼다.
추조(秋曹)의 죄수인 남종 이세(二歲), 이시춘(李始春), 박택룡(朴澤龍), 이대열(李大烈), 이집경(李集敬), 신귀현(申龜顯), 정연상(鄭淵尙) 등을 특별히 석방하였다.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이세(二歲) 등에 대해 아직껏 자세히 조사하는 것을 지체시키고 있는 데 대하여 귀신과 사람이 다함께 통분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귀현(龜顯)은 역적 신기현(申驥顯)의 아우이고 역적 이담(李湛)의 인척(姻戚)으로서 그의 흉악한 모의와 음험한 계략은 길가는 사람들까지 다들 알고 있습니다. 성토(聲討)가 한창 전개되고 있는 때에 갑자기 온전히 석방을 하였으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원래의 전교(傳敎)를 응당 되올려야 하겠으나 방금(防禁)이 지극히 엄한 까닭에 비록 반포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충분(忠憤)이 격발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진술하는 바이니, 삼가 특별히 취소하소서."
하니, 도로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형조 판서 김사목(金思穆) 등이 소를 올리고 교리 신헌조(申獻朝)·수찬 김희조(金熙朝) 등이 차자를 올려, 귀현 등을 석방하라고 한 명을 취소하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민태혁(閔台爀)이 죄인(罪人) 조운기(趙雲起) 등을 조사한 일에 대하여 계문(啓聞)하니, 형조(刑曹)가 복계(覆啓)하기를,
"조시위(趙時偉)는 극도에 달한 죄를 짓고도 아직까지 살아있으니, 이것만 해도 벌써 형벌을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그런데다 죄인 조운기는 본래 흉악한 역적의 족당(族黨)으로서 자기를 품어 길러준 은정(恩情)이 있다 하여 편지로 자기의 형과 의논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가서 만나보고자 하였습니다. 나룻터의 단속을 피하기 위하여 장사치로 가장하여 속이고 들어갔고 그와 3년 동안 밤낮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었으니, 흉악한 역적의 사전 준비와 편지로 서로 주고받은 정상에 대해 필시 모르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엄한 고문 아래에서 시종 숨기는 것은 그 정상을 캐보면 너무도 흉악하고 사특합니다.
김도원(金道元)은 시위(時偉)의 집 곁채에 붙어 살고 있으면서 땔감을 전적으로 담당하였었고 그가 이배(移配)됨에 이르러서는 차마 서로 떨어지지 못하여 행장을 꾸려가지고 강진(康津)까지 실어다 주었습니다. 그렇고 보면, 그는 시위의 행동 거지와 음밀한 내막을 자연히 상세하게 알고 있었을 터인데 형장(刑杖)을 참고 발뺌하며 갈수록 더욱 영악스레 굴고 있습니다.
하청기(河淸起)는 천리 밖까지 편지를 전달하고 그 회답을 받아가지고 오다가 수색을 당하게 되자 몰래 방치갑(方致甲)에게 주어서 기어코 전달되게 하려고 한 자이니, 그와 친밀한 정상에 대해서는 덮어가릴 수 없을 만큼 분명합니다. 그런데 감히 나중에는 옮겨 살았다는 것으로 구실을 삼으려고 하니, 정말 교활하고 악랄합니다.
방치갑은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생사를 같이하기로 약속하였고 시위의 말을 끌고 가서 운기(雲起)의 꼴[草]을 져나르는가 하면 섬에 드나들면서 한집안 사람이나 다름없이 굴었습니다. 재차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남몰래 그 편지를 전해주었고 어장(魚醬)과 약쑥[藥艾] 따위를 슬며시 넘겨주면서 자진하여 그의 심복이 되었으니, 이것만 해도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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