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신해
판중추부사 이성원(李性源)이 죽었다. 이성원의 자는 선지(善之)인데 복원(福源)의 종제(從弟)이다. 영종 계미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번 지방관을 지내고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세밀하였으며 특히 군정을 다루는 데 우수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죽은 것이다. 전교하기를,
"그를 정승에까지 발탁한 것은 그의 강직하고 방정한 점을 취한 것이다. 더구나 근년에 와서는 그에 대한 예우가 대부분 보통의 격식에 벗어났으니 더 이상 말할 것이 있겠는가. 죽은 대교(待敎)를 끝까지 등용하지 못한 것도 애석한데, 대신이 또 뒤따라 갈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만리 밖에 사명을 띠고 나갔다가 병든 몸을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왔으므로 조금 차도가 있으면 경연(經筵)에 나올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이제는 끝났으니 섭섭한 마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더욱 측은한 것은 그의 집에 상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는 점이니, 그의 죽음을 측은히 여기는 은전을 특별히 베풀어야 하겠다. 판부사 이성원의 집에 승지를 보내 조문하도록 하라. 그는 일찍이 규장각(奎章閣)의 직함을 띠고 있었으니 별도의 치제(致祭)가 있을 것이다. 봉록은 3년까지 보내주고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은 성장하기를 기다려 등용하라."
하였다.
상이 경기에서 올린 죄인 석방 여부에 대한 장계 중 사사로이 남의 무덤을 파낸 자의 귀양지를 옮겨준 일이 있는 것을 보고 하교하기를,
"사사로이 남의 무덤을 파낸 자는 가벼이 방면하지 말라는 선조(先祖)021) 의 수교(受敎)가 지엄하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자의 경우라면 사면해주는 지시가 있어야 할 듯하여 다시 초기(草記)를 상고하니, 경기에서 올린 장계에는 귀양지를 옮긴 날짜만 쓰고 원래 귀양간 연월은 쓰지 않아 매우 허술하다. 앞으로는 귀양지를 옮긴 자에 대해서는 원래 귀양간 연월도 써넣도록 하라."
하였다.
4월 3일 계축
앞서 흥양 현감(興陽縣監) 양완(梁垸)이 외방 창고를 순찰할 때 신세효(申世涍)란 백성이 술에 잔뜩 취해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성주 성주여! 나 좀 보소, 나 좀 보소." 하였다. 양완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개 표재(俵災)022) 가 고르지 못하다고 원망하는 것이었다. 양완이 그가 등자를 붙잡고 소리치는 것에 분노하여 15대의 형장을 쳤는데, 신세효가 두어 걸음 걸어가다가 갑자기 쓰러져 눈·코·입·귀 등에 온통 피를 흘리며 죽었다. 전라도 관찰사 민태혁(閔台爀)이, 신세효의 아들이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자 그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기를,
"15대의 형장으로 치죄한 것을 가지고 형벌을 남용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세효의 호소가 이미 재해의 정사로 인해 나온 만큼 먼저 관리의 비리를 조사해 보아야 할 터인데, 도리어 혹독한 형장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유사로 하여금 여쭈어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살인한 자는 죽인다는 법조문이 비록 엄하다 하더라도 고을 백성과 수령 간의 명분 또한 중하다. 그가 처음에 나 좀 보자고 한 말과 고을 원 앞에 대들어 등자를 붙잡은 처사는 무엄한 소치가 아닐 수 없다. 고을 원으로서 한번 신문하여 다스리려고 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또 그가 신문하여 다스린 것은 며칠이 지난 뒤의 일이고 시행한 형장 역시 15대 뿐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공초를 보아도 형장의 굵기가 손가락만하다고 하였으니 규격에 벗어난 형장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형장을 쳤다는 조항은 논의할 것이 못되며, 그가 스스로 쓰러져서 기절한 증거가 분명하니, 함부로 죽였다는 조항은 더욱 말할 만한 것이 못된다. 이런저런 정황으로 볼 때 특별히 죄를 줄 만한 단서가 없는데 이를 지나치게 죄로 처결한다면 태형(笞刑) 50대까지는 자체로 결정한다는 법조문을 장차 어디에 사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죄를 다스리는 문제는 정상을 참작하여 용서한다."
하였다.
4월 4일 갑인
정범조(丁範祖)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서호수(徐浩修)를 지경연사로 삼았다.
각 군영의 장수들이 화살통과 활을 겉치레로만 숭상하는 폐습을 금지하였다.
북청 부사(北靑府使) 유지양(柳知養)이 상소하기를,
"지난 봄에 북도의 백성들이 아사(餓死)를 면하게 된 것은 모두 우리 성상의 하늘 같은 은택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을과 겨울에 이르러 농사는 흉년이 들고 관청의 창고는 이미 바닥이 났으니, 오는 해에 백성을 구제할 대책은 오직 환자곡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설사 장계로 청하여 영남에서 수만 포대를 옮겨오게 하더라도 그것은 큰 바다에 한 톨의 곡식에 불과합니다. 감사가 걱정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신 또한 감히 그르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섣달 초순이 되어 환자를 받아들이는 사무를 겨우 끝내자마자 백성들의 형편이 더욱 급박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한 채의 관아를 비우고 의지할 데 없는 가장 궁한 백성들을 모아놓고 구휼하였는데, 열흘마다 구제하는 대상자만해도 3천 명이 넘습니다. 이것은 모두 감사가 요청하여 얻어낸 곡식이고 신이 스스로 마련한 것은 아닙니다.
근처에 도피하였던 백성은 거의 모두 돌아와 안정하였으나 먼 곳에 유랑하는 백성은 아직 더러 돌아오지 않았는데, 얼마 안되는 관청 곡식으로 간신히 분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목마르게 애타는 때에 감사가 나라 돈을 빌려 영남 곡식을 사다가 헐한 값으로 방매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신 역시 7, 8백 포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경사(京司)에 새달까지 돈을 바쳐야 하는데, 만약 굶주림을 참고 농사를 지으면서 목숨을 구제하기에 여념이 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이 돈을 바치라고 독촉한다면 형세상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해당 관청에 특별히 명하여 이 돈을 독촉하는 지시를 당분간 늦추어 주고 가을에 가서 마련하여 바치게 한다면, 신은 마땅히 힘을 다해 성상의 뜻을 선양하여 위로는 나라 돈에 손해가 없게 하고 아래로는 굶주린 백성들이 힘입어 살아가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신은 특별히 염려되는 일이 있습니다. 유랑민으로서 본래부터 살아갈 수 있는 일정한 밑천이 없는 자에 대하여 만약 특별히 보살펴주는 휼전이 없으면 지금은 비록 안정한다 하더라도 끝내는 필시 아무런 보람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내년은 바로 신해년이니 지난 자취를 거슬러 상고하면 또 그때와 같은 흉년이 닥칠까 지레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옛날 한나라 소열 황제(昭烈皇帝)는 1냥짜리 돈을 만들었는데, 그 제도는 1푼을 1냥 대신으로 쓰게 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재정이 넉넉하고 백성이 안착하였으니, 이것은 위급할 때에 알맞은 훌륭한 구제책이었습니다. 지금 만약 이 돈을 주조하여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고 각각 인구를 계산하여 쌀을 사들이게 한 다음 별도로 한 창고에 저장하여 흉년에 대처할 계책을 미리 강구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백성과 나라를 위한 훌륭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또 신은 서너 가지 계속 진술할 조항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선비의 교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북도 사람들은 우둔한 데다가 거칠고 성급하여 조금이라도 충격을 받으면 대뜸 목을 매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물론 애처로운 일이거니와 명색이 선비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미 견문의 도움이 없는 데다가 이끌어주고 가르쳐주는 공효가 없다 보니, 이 역시 지방관이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신이 부임한 후부터 훈장(訓長)을 배치하여 달마다 《소학(小學)》을 강론하면서 망령되이 예의(禮義)로 격려의 방법을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의 후사를 잇는 자는 반드시 예조에 문건을 바쳐 허락을 받게 하고, 혼례를 이루는 자는 반드시 교배례(交拜禮)를 행하게 하였는데, 수년 동안에 예식을 따라 행하는 자가 겨우 서너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계속하여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해 몸바치는 도리로 인도한다면 훗날의 효력이 또한 반드시 여느 도에 밑돌지 않을 것입니다. 매년 공도회(公都會) 시험에 《소학》을 읽은 자 한두 사람을 뽑는 것은 여러 도에서 공통으로 시행하는 규례인데, 오직 본도만이 이를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먼 지방에 있는 선비들이 이 책을 읽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만약 과조(科條)를 세워 유생으로서 《소학》을 읽지 않은 자는 대과·소과의 응시 등록에 들지 못하게 하고, 또 도회(都會)에 한두 명의 응시 자리를 만들어 이 책을 읽은 자로 하여금 참방(叅榜)하도록 한다면 아마 격려하는 방도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군사 장비를 엄격히 갖추는 일입니다. 신의 고을은 세 군영의 요충 지대이며 한 도의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그중에서도 마병(馬兵)으로서 이른바 충무학(忠武學)이란 것은 변란을 대처하는 데 가장 긴요한 것인데, 전마(戰馬)와 장비의 비용이 다른 군사에 비해 10배나 되므로 그 충원의 걱정 또한 미루어 알 만합니다. 옛날 인조조 때 무신 신원(申瑗)이 병사(兵使)로 있으면서 비로소 이 병제(兵制)를 제정한 것인데, 충무학이란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을 유학(幼學)과 반열을 같게 하여 높은 표창으로 격려하고 활쏘기를 권장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향원(鄕員)의 자제에게 그들의 자원에 따라 참가할 것을 허락하고 이어 초관(哨官)·천총(千摠)·파총(把摠)의 소임으로 승급시켜주도록 하였습니다.
이때에는 대오에 날쌔고 용감한 미풍이 있었고 결원의 보충에 어려운 현상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 명칭만 있고 실속이 없다 보니, 향인이 무학을 보병과 다름없이 보아 조금 행세하려는 사람은 죽어도 모면하려고 꾀하는 바람에 3백 명 정원 중에 절반은 빈 장부입니다. 이에 신이 감히 완비해볼 계획을 가지고 하루는 여러 무사를 모이게 한 다음 무학 가운데 가장 오래 근무한 두 사람을 뽑아 한 사람은 별장(別將)으로, 한 사람은 천총(千摠)으로 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온갖 무반(武班)의 직임과 한두 사창(社倉)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이전에 무학을 거친 사람을 차례로 조사하여 의망하였더니, 잠깐 동안에 무학에 귀속하기를 자원하는 자가 1백 3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선임하는 방법과 군사의 씩씩한 모습은 친기위(親騎衛)와 거의 다름이 없었으나, 도시 시험에 급제시키는 규정에 온 도를 통틀어 1명만 뽑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마도 무사를 격려하고 권장할 수 없을 것 같기에 지난해 어사가 왔을 때 신이 공문으로 사유를 갖추어 자세히 진술하면서 시험을 보이고 사람을 뽑는 방법을 한결같이 친기위(親騎衛)의 제도를 모방하였으면 하니 위에 전달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사가 경연에서 건의할 때에 북관(北關)에 대해서만 논하고 말았습니다. 똑같이 베푸는 조정의 혜택이 어찌 남관(南關)과 북관(北關)의 차이가 있겠으며 남관의 삼수(三水)·갑산(甲山)이 또한 어찌 북관의 경흥(慶興)·회령(會寧)만 못하겠습니까. 소문을 듣고 크게 기대하던 사람들도 이로 인하여 억울해 하며 개중에는 이미 귀속하였다가 후회하는 자도 있습니다. 만약 금년부터 도시 시험을 역시 북관의 규례에 의하여 시행한다면 일도의 무학이 정예롭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정예로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군포를 바치는 인원수에 있어서는 각 군영에 바쳐야 할 수량을 합산하면 3천 7백 88냥 남짓한데, 만약 이 돈을 한 경내 7천여 호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징수한다면 매 호에서 바치는 돈은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선배들의 호포(戶布)에 관한 논의인데 신역을 균등히 하는 방안이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대오에 결원이 생겼을 때에는 결원이 생기는 대로 보충하되 그 성명을 기록해 놓았다가 전쟁에 쓸 인력으로 대비하고 다시금 베를 내는 고통이 없도록 해야 하는데, 이게 실로 폐단을 보완하고 백성을 소생시키는 하나의 큰 정사입니다. 그러나 지금 상하가 모두 지쳐 있고 상처가 미처 아물지 않았으므로 이런 때에 갑자기 다시 뜯어고치는 의견을 채용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신이 뜻을 두고도 감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의 고을에 경기와 다른 도에서 들어온 유랑민이 모두 6호인데, 그 가운데 2명은 신역이 있으니 의당 조정의 지시대로 베를 감해주어야 하겠습니다만, 그 나머지 가까운 고을에서 모여든 자들도 처음 전하의 분부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기뻐 날뛰면서 살게 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신이 지금 일일이 구휼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이름이 군적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만약 다같이 베를 감하여 준다면 각 군영의 비용을 지탱해 쓸 수 없는 형편이고 만약 종전대로 이들에게 다그쳐 받아낸다면 떠돌아다니다가 죽기는 쉬워도 돈을 바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신이 자체적으로 감해주고 다른 명목의 것을 옮겨 그 숫자를 메우려 하여도 빈약한 창고가 이미 바닥이 났기 때문에 손을 쓸 길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 전하께서 그들을 특별히 불쌍히 여기어 무슨 방법으로든지 돈 4, 5천 냥을 3년을 기한으로 대여해 준다면 신은 마땅히 이 돈으로 창고 하나를 세우고 방편을 세워 이자를 늘려 군사와 백성들의 각종 폐단을 보완해가면서 감할 만한 것은 감하고 구휼할 만한 것은 구휼하겠습니다. 신이 교체되어 떠난 후라도 이대로 준수하게 한다면 오랜 폐단이 점차 사라지고 빈약한 형편이 이를 힘입어 보존될 것입니다.
셋째는 곡식의 장부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신의 고을 환자곡 중에 이른바 당미(唐米)023) 란 것이 있는데, 임술년 큰 흉년이 든 뒤로 이것이 변하여 피당(皮唐)024) 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명칭은 비록 쌀이나 실은 겉곡식입니다. 단지 그 이름이 당미이기 때문에 관청에서 쓸 때에는 전미(田米)025) 와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흉년이 들 때마다 당미가 익으면 하는 수 없이 환자곡을 다른 곡물로 대신 받을 것을 허락하는데, 그 값을 따진다면 당미는 콩이나 조와 그다지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대신 바치는 곡식은 간혹 당미보다 곱절을 받거나 또는 곱절 이상을 받습니다. 저 불쌍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어떻게 곱절의 값으로 바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당미 조항에 대하여 적절히 감해 쌀로 환산하는 규정을 만들어 전미와 현저한 차등이 있게 하면 명칭과 사실이 비로소 서로 부합될 것이며 혜택이 장차 아래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넷째는 산간 지방의 폐단을 더는 일입니다. 신의 고을이 거의 수백 리나 되는데, 21개 사(社)로 나누고 2, 3사 안에 각각 창고 하나씩 설치하였으니, 이는 대개 백성들로 하여금 환자곡을 내고 들이기에 편리하게 한 것입니다. 그중에 교제창(交濟倉)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바다를 끼고 설치하여 흉년에 곡식을 운반하는 밑천으로 보탬을 주고 있으니, 그 설치한 의미를 논하면 다른 창고에 비하여 아주 특별합니다. 거기에 저장한 곡식도 3분의 2는 남겨 두고 3분의 1을 나누어 주는 것을 영구한 규례로 삼고 있으며 곡식의 질과 두량(斗量)도 가장 양호하고 정확하다 할 수 있고 섬을 묶고 포장하는 데에도 십분 힘을 들였기 때문에 전부터 온 고을 사람들이 공평히 나누어 가져 어느 한쪽만 고통을 받는 걱정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창고와 본부와의 거리가 40리나 떨어져 있고 산협에 가까운 3, 4개의 사(社)는 본부와의 거리가 혹 1백여 리나 되므로 봄에 내주고 가을에 받아들일 때 반드시 5, 6일의 품을 허비하게 됩니다. 삼가 생각건대, 삼남(三南)에서 곡식을 옮기는 일은 혹은 5, 6년, 혹은 10여 년 간격으로 하는데 비록 그때를 당하더라도 한 창고의 곡식 전량을 옮길 것은 없습니다. 만약 그 곡식의 절반은 그 창고에 그대로 놔두고, 또 산협에 가까운 중간쯤 되는 곳에 별도로 하나의 창고를 설치하여 그 곡식의 본전을 놔두었다가 곡식을 옮기는 때를 만나게 되면 산간 지대의 창고에서 해변 창고로 옮기는 것은 일시적인 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간에 사는 백성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수고하는 것에 비한다면 어느 쪽이 좋고 나쁘다는 것이 판이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신에게 따로 창고 하나를 설치할 것을 허락하고 또한 교제창(交濟倉)이라고 이름을 붙여 산간 백성들이 왕래하는 비용을 없애게 하고, 곡식을 옮길 때에 이르러 그곳 백성들을 시켜 해변 창고에 일제히 옮기게 함으로써 운반하는 조건을 만들어준다면 관청과 민간이 다같이 편리하고 산간과 해변이 고루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이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 조처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북관 백성들의 일은 자나깨나 관심거리였는데 때마침 그대가 올린 소를 보았다. 첫번째 조항에서 중앙 관청에 돈을 바치는 기한을 조금 늦추자는 일은, 중앙 관청에서도 손해날 것이 없고 북도 백성들에게는 큰 이익이 될 것이므로 시행할 것을 특별히 허락한다. 두 번째 조항에서 1냥짜리 돈을 주조하자고 청한 일은 성급히 의논할 수 없고, 인구를 따져 쌀을 사들이겠다는 일은 그대의 말이 매우 좋다. 다시 감사와 면대해 의논하거나 서면으로 문의하여 타당한가를 익히 토론한 다음에 이어 감사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세 번째 조항의 공도회(公都會) 시험은 다른 도의 규례대로 《소학(小學)》도 아울러 시험보게 하면 필시 우매한 사람들을 깨우쳐 주는데 도움이 있을 것이다. 담당 관서에 내려보내 품의 조처하게 하겠다. 네 번째 조항의 군사 대비를 엄히 하는 일은 본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충무학(忠武學)을 설치한 본의가 오늘에 와서 완전히 없어지고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려하여 권면하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연전에 어사가 북관만 과거보이는 길을 열어줄 것을 논하고 남관만 빼놓았다는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섯 번째 조항에서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고질적인 폐단은 듣기에 매우 불쌍하다. 지금 군역(軍役)의 폐단은 어느 도를 막론하고 모두 그러하다. 그대의 고을에서 과연 폐단을 구제할 수 있는 대책이 있다면 무엇을 주저하고 아낄 것이 있겠는가. 역시 감사와 의논해 보고 나서 그에 대한 편리 여부에 대해 의견을 자세히 진술하도록 하라. 올봄에 도로 돌아온 유랑민들의 신포(身布)와 환곡(還穀)에 있어서는 자연 논의하지 말라는 대상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상소의 내용을 보면 구별해서 취사선택하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인가? 여섯 번째 조항의 다른 곡식으로 대신 받는 폐단과 일곱 번째 조항의 산간 지대에 교제창을 별도로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묘당을 시켜 품의 조처하게끔 하겠다. 대체로 북청 백성들에 대하여 밤낮으로 근심하던 것을 조금이라도 풀게 된 것은 고을 원을 적임자로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모든 일을 다부지게 처결하여 내가 전일에 칭찬하고 가상히 여긴 하교에 부응하라."
하였다. 이어 명하기를,
"유지양은 임기가 찬 뒤에도 그대로 유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와 예조가 복주(覆奏)하기를,
"공도회에서 《소학》을 시험보이는 일에 대해서는, 도에서 올린 장계에 의하여 1년은 남관에서 《소학》을 시험보이고 북관에서 사서(四書)를 시험보이며, 또 1년은 남관에서 사서를 시험보이고 북관에서 《소학》을 시험보여야 하겠습니다. 인구를 계산하여 쌀을 사들이는 일과 군포를 거두는 일과 당미(唐米)를 대신 받는 일과 교제창에 대한 일은 모두 그만두고 충무학에 대한 일은 감사에게 명하여 방안을 논의하여 다시 보고하게 하소서."
하였다.
4월 7일 정사
이치중(李致中)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천행(朴天行)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함양(咸陽)에 나갔던 어사 최현중(崔顯重)이 다녀왔다고 보고하고 나서 글을 올리기를,
"문서를 위조했거나 관곡을 축낸 것을 조사하여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상고할 만한 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위조했다는 병오년의 문서에서 중미(中米)와 대두(大豆)의 합계가 7천 7백 56섬인데, 이것은 바로 그해 한 해에 벼 한가지만을 대신 받아 이듬해 봄에 즉시 도로 나누어준 것이며, 정미년에 위조한 문서에는 중미와 대두의 합계가 4천 8백 32섬인데, 이것도 그해에 벼 한 가지만을 대신 받아 다음해 여름에 역시 도로 나누어준 것이었습니다. 제멋대로 벼 한 가지만을 받은 것은 비록 법을 어긴 처사이지만, 기왕 실지로 받았들였고 실지로 나누어준 것이 있는 만큼 전혀 받지 않았거나 허위로 나누어준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아울러 축난 관곡 속에 들어있기에 참으로 의심스러워 감색(監色)에게 캐물었더니, 그들의 말이 ‘벼 한 가지만을 대신 받아들인 것이 이미 법을 어긴 처사인지라 조사 보고할 때 감히 사실대로 써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앞서의 고을 원이 모두 문서 위조로 처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내부에서 마감한 것에는 사실에 근거하여 부족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곡식을 까부는 일에 있어서는 본래 창고에 보관된 것이 7만 3천 1백 섬인데 그중에서 이미 나누어준 것이 1만 6천 80섬이니 현재 창고에 남아 있는 것은 5만 7천 20섬입니다. 쌀은 1만 4천 98섬인데 까불러서 9천 4백 91섬을 만들고, 콩은 2천 3백 83섬인데 까불러서 1천 4백 14섬을 만들고, 벼는 4만 5백 41섬인데 까불러서 1만 1천 4백 53섬을 만들었습니다. 세 가지 곡식을 까불러 만든 것이 모두 2만 2천 3백 58섬인데, 거기에 이미 나누어준 곡식 1만 6천 83섬을 합치면 3만 8천 섬이 됩니다. 각 창고에서 일을 끝낸 뒤에 곧 1등품의 환자곡을 나누어주어 종자로 쓰게 하였더니 백성들이 좋아서 날뛰었는데 그 상황을 이루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쭉정이는 그때마다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타고 남은 재의 높이가 거의 창고의 높이와 같았습니다.
총계 3만 섬을 이미 나누어준 조항에 대해서는 거조(擧條)에 나와 있기 때문에 민간에서도 다 들어서 여러 가지 곡식을 까부른 뒤에는 이미 나누어준 곡식과 수량을 따져서 감해줄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원래 정한 3만 섬 외에 이미 남은 것이 있으니, 특별히 손익(損益)의 의의를 지켜 끝까지 혜택을 보인다면 하늘과 땅 같은 큰 은덕에 더욱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또 이른바 미조(米條)라는 것은 이름은 쌀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순수한 벼에 약간의 쌀이 섞인 것인데, 가을에 받아들여 순수한 쌀로 맞춘다는 것 또한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나누어준 1만 6천 섬에서 세 가지 곡식을 각각 3분의 1을 감해 준다면 그 수량이 5천 3백 61섬이 됩니다. 이는 신이 독단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성상의 특별 지시 중에 통틀어서 수량을 계산하라는 하교를 받들어 시행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 뜻으로 방방곡곡에 하유하여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성은이 그지없다는 것을 알게 하였습니다. 3분의 1에 해당되는 수량을 제한다면 실지로 남은 수량은 3만 3천 3백 섬인데, 전후에 걸쳐 문서를 위조했거나 축낸 것으로 허위 장부에 기록된 것은 전부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전들이 축낸 것까지 모두 불태운다면 너무 막연한 것 같기에 수량을 갈라 대품(代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이미 장계를 올려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를 본 고을 군수에게 알려 십분 정밀하게 뽑아 기한 내에 독촉하여 받아들이되, 한 명의 남녀라도 아전의 족속이라 해서 백성들에게 대신 물리지 말라는 내용으로 각별히 공문을 띄워 신칙하였습니다. 신이 떠날 무렵에 받은 것은 5백 20냥에 불과한데, 형세가 이미 다한 형편이라 귀양보내기 전에는 절대로 더 받아낼 가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삼가 전하의 하교 중 ‘아전들의 간사한 행위를 징계하려다가 도리어 백성들이 곤란을 받게 된다.’는 내용을 가지고 이민(吏民)에게 효유하였습니다. 이미 받아들인 돈 5백 20냥 외에는 일체 애당초 ‘문서 위조나 축낸 것은 모두 불태워버리라.’는 전하의 하명에 따라 모두 따지지 않고 법을 적용하기를 기다려 시급히 귀양지로 떠나보내게 하였으며, 이미 받은 돈은 한결같이 본 관청에서 처리하라는 내용으로 본도의 감사에게 공문을 뛰웠습니다. 그리고 관곡을 축낸 아전들을 규례에 따라 귀양을 보내기만 한다면 결국 여러 사람을 깨우치는데 미진할 것 같아 ‘곡식 까부르는 일을 끝낸 뒤에 백성을 많이 모은 다음 기를 세우고 숙정패(肅靜牌)를 세워놓고 나서 관곡을 축낸 여러 사람들과 매년 창고 관리의 책임자를 잡아들여 그중에서 가장 많이 축내어 사형에 처해야 할 자 네 명을 뽑아낸다. 그들을 군법에 의하여 얼굴에 재를 바르고 귀를 꿰매가지고 북을 치는 사람의 뒤를 따르게 하면서 그들의 죄상을 널리 폭로하고 대중 앞에 조리를 돌린다. 그리고 나서 모두 큰칼을 씌워 고을 옥에 단단히 가두고 등급을 나누어 법을 적용하라.’라는 뜻으로 본도의 감사에게 공문을 뛰웠습니다.
그리고 창고를 실사한 뒤 나머지를 쓸어낸 곡식의 각 연도에 따른 수량에 대하여 각 분기의 유리(由吏)와 감색(監色)에게 캐물었더니, 무술년 분의 각종 곡식 2백 60섬과 임진년 분의 1백 10섬은 그 당시 군수 이은창(李殷昌)이 썼으며, 신축년 분의 1백 20섬, 임인년 분의 2백 섬, 계묘년 분의 3백 50섬은 그 당시 군수 이한주(李漢籌)가 썼으며, 을사년 분의 1백 30섬은 그 당시 군수 임희우(任希雨)가 썼으며, 병오년 분의 4백 40섬은 그 당시 군수 이득준(李得駿)이 썼으며, 무신년 분의 8백 80섬은 그 당시 군수 김노악(金魯岳)이 썼으며, 기유년 분의 2백 50섬은 전 군수 김사석(金思䄷)이 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처리할 때 민고(民庫)에 넘기기도 하고, 구제의 밑천에 보태기도 하며 관청에서 쓰기도 하고 개인이 쓰기도 하였는데, 그중에서 애초부터 간섭하지 않은 자는 오직 신홍주(申鴻周)·장집소(張集紹)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비록 그릇된 전례를 답습한 것이라고 말하여도 일이 이미 드러난 이상 법으로 용서하기 어려웠으므로 모두 해당 관서로 하여금 법대로 엄히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환자곡을 받지 않으려고 쓰는 뇌물건에 있어서는 본 고을 군수가 부임한 후 올 봄 환자곡을 나누어 줄 때부터 엄하게 금지하였는데, 곡식이 정실(精實)하자 받기를 원하지 않던 무리들도 지금은 모두 받기를 원하고 있으니, 누적된 폐단은 없애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고을의 민호(民戶)는 옛날에는 5천이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3천도 채 못되는데 대체로 환자곡의 폐단으로 인하여 도피자가 속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따뜻한 유시가 한번 선포되자 온 고을이 한결같이 태평의 지대로 변화하였으므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백성들이 차례차례 모여들고 있습니다. 본 고을의 풍속은 대부분 기절(氣節)을 숭상해 왔는데, 지난 무신년에는 충의로 일컬어진 사람이 좌랑(佐郞)으로 추증된 정희운(鄭熙運)과 정(正)으로 추증된 박춘봉(朴春奉)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요즈음에는 촌락에서 또 감군은(感君恩)의 노래가 지어져 도처에 전파되었는데, 그들이 감격하여 보답할 것을 도모하여 험난함도 피하지 않으려는 뜻이 있습니다."
하였다. 최현중이 또 별지의 보고서를 올리기를,
"사노비(寺奴婢)에 대한 폐단은 조정에서도 환히 아는 일입니다. 신이 함양에 나갔을 때에 날마다 책상에 가득 찬 문건은 모두가 도망친 자나 죽은 자에게 구실을 근거없이 물리는 억울한 정상을 호소한 것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아들의 무덤을 파서 시체를 지고 와 송사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본군의 노비 대장을 보니, 남자는 악지(岳只)로 이름을 붙이고 여자는 조시(助是)라고 하여 한 장부에 실린 사람이 거의 2백 명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전부 같은 이름이었으며 주소도 달지 않고 부모의 성명도 쓰지 않은 채 각각 이름 아래에 같은 족속과 인척이라는 것만 써넣었을 뿐 세대가 멀고 가까운 것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라도 사노로 들어가면 일족이라 하여 한 사람이 더러 7, 8명의 베를 담당하게 되고, 이름이 사안(寺案)에 기록되면 나이가 3, 40이 넘어도 사람들이 그와 혼인하지 않기 때문에 시집가지 않고도 과부가 되고 장가 안가도 홀아비가 됩니다. 간혹 이름을 숨기고 혼인하였더라도 발각될 경우 마치 사나운 호랑이를 피하듯 아내를 버리고 도망치는가 하면 심지어는 물에 빠져 죽거나 약을 먹고 죽는 일까지 있습니다. 산 사람의 원한과 백골에게 세금을 물리는 일은 위로 하늘의 화기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이 함양 한 고을로 미루어 보아 다른 도도 다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폐단을 바로잡을 만한 좋은 계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지금 만약 노비의 명목을 없애고 사보(寺保)라는 명칭을 붙인 다음 한결같이 해마다 양정(良丁)을 뽑는 규례에 따라 빈 자리가 나는 대로 보충하면 나라에는 경비가 줄지 않을 것이고 백성들은 고무되어 즐거워할 것입니다. 이를 묘당에 문의해서 처치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1. 호미로 파서 늘려 경작하는 명목으로 세금을 받는 것을 엄히 금지하라고 주의시킨 일입니다. 신이 함양에 있을 때 산골 면에 사는 백성들이 대부분 한 필지의 전답에 세 가지 세금을 받는다고 원망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백성들이 번성할 때에 화전에 대한 세금이 상정(詳定)되어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 산에서 화전을 일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전이 세금을 매길 때 매년 배당해 왔던 액수를 그 면에서 충당하라고 책임지우기 때문에 반드시 원 전지의 기록 곁에다 협기(挾起)라는 명목을 붙이고 세금을 더 매기고 있는데, 이것은 호미로 파서 늘려 경작한다는 명목으로 세금을 받는 것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연전에는 김 판서(金判書)의 집 사패지 둔전세(賜牌地屯田稅)라고 하면서 이 땅을 와서 잡았는데, 무지하고 우매한 백성들이 둔전으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부가의 폐단이 감해질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실지로 있지도 않은 화전을 허위로 써서 바친 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년에는 이른바 둔전세라는 것이 호조의 원 토지에 환속되었으므로 받아낼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 역시 협기의 명목으로 세금을 징수하는데 이른바 협기라는 것은 근거없이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장부에 등록된 토지의 기본 세금 외에 화전세를 보태고 또 둔전세까지 덧붙이게 되니, 그들이 원망하는 바가 실로 가엾습니다.
화전세를 붙이는 폐단은 본 고을 군수가 엄금할 수 있으나, 둔전세의 건은 이미 호조에 귀속되었으므로 지방 고을에서 임의로 감면시킬 수 없습니다. 묘당에 하문하시어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1. 운봉(雲峯)·남원(南原)·하동(河東)에는 다같이 궁가(宮家)의 둔전이 있었는데, 병신년에 궁방을 없앤 뒤로 모두 호조의 원래 세금에 귀속되었으나 그후에도 해당 궁가에서는 세금을 또 받아갔습니다. 때문에 이것 역시 한 필지의 전지에 두 가지 세금을 내게 되어 백성들이 견디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주(全州)에서 내수사(內需司)의 화전세를 겹쳐 받는 것은 궁가에 딸린 둔전의 경우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밖의 여러 고을에서도 이러한 폐단이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균등하게 세금을 물리는 원칙으로 보아 마땅히 한 차례 조사해 바로잡아서 원 토지와 궁가의 세금 간에 하나로 귀착되게 하는 것이 아마도 왕도 정치에 합치될 것 같습니다.
1. 함열(咸悅)의 성당창(聖堂倉)은 한번 차사원을 따로 임명한 다음부터 온갖 폐단이 한꺼번에 일어나 백성들의 고통이 갈수록 심합니다. 이는 대체로 돌아가며 차임하여 임명된 차사원은 거의 지나가는 길손과 같아서 운반을 주관하는 것 또한 자기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여기므로 말과 섬이 축나는 것과 하부 관리가 가렴주구하는 것은 사세상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전담해서 조사 검열하고 이어 운반해다 바치게 하되, 이 또한 아산(牙山)의 관례에 의하여 2년을 기한으로 하여 자리를 이동하게끔 정한다면 세 고을이 나누어 관리하는 폐단이 없고 한 고을이 책임지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실로 납세하는 9개 고을에서 공통적으로 희망하는 일입니다.
1. 안흥진(安興鎭)을 수영(水營)에 이관시킨 후 끝내 서로 티격태격하는 바람에 아전과 백성들이 통제받을 데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판결을 받아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수영으로 가야 하므로 사람들이 답답해 하고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를 바로잡을 방책은 관장(官長)을 도로 두어 물품을 공급하여 구제하는 방법을 다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모든 공급은 한결같이 첨사(僉使) 때의 전례처럼 하고 방어사(防御使)를 겸임시켜 진무(鎭撫)하게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관청은 이랬다저랬다 변경하는 혐의가 없고 백성은 의지할 데가 있어 즐거워할 것입니다. 묘당에 명하여 여쭈어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어사의 서계를 보니 남원·운봉·하동 등 고을에서의 궁둔전(宮屯田)의 폐단을 열거하여 논한 것이다. 이미 호조에 세금을 냈다고 했는데 지금 궁감(宮監)이 와서 세금을 받아간다고 한 말은 필시 떼어받은 토지가 있어서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은 사례가 있겠는가. 이는 백성들의 고통에 크게 관계되는 일이니만큼 결코 회계(回啓)를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전주에서도 내수사의 화전에 대한 세를 겹쳐 받는 폐단 역시 그러하다고 하는데, 이는 더욱 의심스러운 일이다. 모두 감사로 하여금 직접 조사하여 규명하게 하되, 토지가 있고 없는 것을 구별하고 세금을 이중으로 받는 내막을 탐문한 다음 한결같이 보고 들은 대로 즉시 사리를 따져 장계로 보고하라고 전라 감사와 경상 감사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최현중이 아뢰기를,
"여러 고을의 군보미(軍保米)에 대한 일은 별지에 진술하였습니다. 대개 충청도에는 군보미를 되는 말이 있고, 전라도에는 세금의 쌀을 되는 말이 있는데, 이른바 7두니 8두니 하는 것은 관청에서 쓰는 말로 되면 9두나 10두에 밑돌지 않습니다. 이는 이미 조정에서 특별히 금지하였던 본의가 아닌 데다가 받아들이는 말수도 아직까지 일정한 규례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라 감사는 6두만 받아들이라고 여러 고을에 공문을 띄워 신칙하였고, 충청 감사는 대략 7두를 받아들이라고 수령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말의 크고 작은 것이 그처럼 일정하지 못한 데다가 받아들이는 수량도 늘었다 줄었다 하는 등 이처럼 고르지 못하니, 만약 특별히 고쳐 바로잡지 않는다면 지방 고을이 집행하기에 혼란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또한 위대한 성인이 말과 저울을 동일하게 하였던 의의에 어찌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묘당에 문의하여 일정한 규례를 만들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에는 대신이 경연에서 아뢴 것으로 인하여 특별히 엄하게 신칙하긴 했지만 금년 봄에 또 하유함으로써 너무 심한 폐단은 제거되는 보탬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분명하게 법을 세워 획일적으로 금령을 설정하지 못하는 것은 대개 쌀을 바치는 규정을 고치지 않고서는 시원하게 바로잡는 효과를 책임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쌀로 받는 것은 돈으로 받는 것과 다르니, 속담에 이른바 익은 음식이란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게다가 이른바 1두란 것도 그 크기가 한정이 없는데, 지방 고을에서는 이에 맞추어 받아내기 때문에 한갓 중앙 관청의 비용만 깎이게 만들고 있다. 이는 백성들은 혜택을 입지 못하고 경사(京司)에서도 모두 원망을 품고 있는데, 결국 무고한 백성들의 고혈이 고을 아전이나 뱃사람에게로 새어들어가는 것이다. 이게 밑없는 솥에 물을 붓는 것과 그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때문에 경연을 열 때마다 반드시 폐단을 바로잡을 좋은 방법을 물었던 것이다.
군량미로 받아들인 양이 금위영과 어영청이 가장 많았다. 지난해와 올해에는 어떻게 거행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지방 고을의 말과 섬에 관한 폐단에 대해 이제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우선 그 일부터 바로잡아야 하겠다. 묘당으로 하여금 쌀을 바치는 여러 도에 특별히 엄한 신칙을 가하게 하겠다. 조정의 명령이 거듭 내려가는데도 수령의 신분으로 애당초 그대로 준행할 생각을 하지 않아 서계(書啓)가운데 거론되기까지 하였으니, 두 고을 수령을 먼저 파면시키고 나서 잡아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함양에 나갔던 어사 최현중의 서계에 대해 복계(覆啓)하기를,
"군보(軍保)에게 쌀이나 베를 받는 일에 대하여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은 말하기를 ‘군보미의 폐단 원인은 말의 크기가 일정하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 제도에 말과 저울이 비록 들쭉날쭉한 것이 없지 않으나 이 일은 오직 한 마디의 호령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호조로 하여금 각 군문(軍門)의 군보미를 되는 말을 가져다가 그 용량을 절충하여 말을 만들어서 각도 감영에 내려보낸 다음, 각 고을에 분부하여 모두 감영에 모아 놓고 이것으로 표준을 삼게 하되, 감영에서 낙인(烙印)을 찍고 부서진 것은 다시 만들게 한다면 고르게 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곡식은 돈과 달라서 남지 않으면 축나기 마련입니다. 6두를 받는 것 외에 1두를 더 받는다면 원 수량에 축난 것을 보충하거나 중앙 관사에 대한 정채(情債)도 저절로 그 가운데서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어사의 서계 중에 말의 제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은 참으로 마땅하지만 중앙 관사에서 전일처럼 정채를 요구한다면 그 폐단이 끝없을 것이니, 차라리 고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묘당에서 심문하여 만약 제멋대로 농간을 부렸을 때는 담당 색낭관(色郞官)과 아전이 죄를 받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장도 그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으로 미리 신칙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포보(砲保)가 바치는 면포에 있어서는 작년과 금년의 면포값이 무척 비싸서 2냥의 돈으로는 마련해내기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알겠습니다. 만약 3냥 4, 5전을 가지고 사게 되면 아주 넉넉할 것인데, 선물의 잡비는 이중에 들어있지 않으므로 이를 합하면 4냥 1, 2전이면 넉넉히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사의 서계에 열거하여 논한 것으로 보면, 전주(全州)·금구(金溝)·여산(礪山)·함열(咸悅)·천안(天安)·직산(稷山)에서는 더러 4, 5냥을 초과하기도 한다는데, 그것은 간사한 관리들의 농간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1필에 대한 부역은 2냥이 되어야 하는데, 때마침 면포가 귀해져서 배로 징수하니 이것만도 가련한데 더구나 3배 가까이 징수하는 자도 있으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 수령이 비록 체차되어 갔다 하더라도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결코 6개 고을의 수령을 먼저 파직하고 나서 잡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어사가 듣고 본 것은 연로에 지나지 않으니 이 밖의 곳도 각각 해당 감사로 하여금 각별히 탐문한 다음 장계로 보고하여 조처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 논의한 것은 목화 농사에 있어 면포가 아주 귀한 상황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 면포가 풍성할 때에도 조정에서 정한 가격이라고 핑계대면서 끝내 이것을 일정한 법규로 간주한다면 1필을 감해주는 성대한 은덕을 장차 베풀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년에는 잡비까지 합하여 2냥 5, 6전 이외에는 감히 털끝만큼도 함부로 받아서는 안된다는 내용으로 다시 거듭 신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우의정 김종수(金鍾秀)는 말하기를 ‘큰 말을 따로 만들어 고을마다 규례가 다른 폐단은 제때에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각 고을에서 전세를 받는 말이나 관청에서 쓰는 말은 진휼할 때 쓰는 말과 크기가 너무나 차이가 나는가 하면 심지어 환자곡을 받아들이고 나누어 줄 때의 말도 다릅니다. 지금 만약 말의 제도를 자세히 조사하고 절충하여 놋쇠로 말을 만든 다음 각도와 각 고을에 나누어 보내어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게 한다면 국가의 모든 사람들이 중정(中正)의 도에 모여들고 그 도에 귀의하여 제도도 같아질 것입니다. 관속들이 농간을 부리는 폐단 또한 엄히 과조를 세워야 영원토록 성과를 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생각건대, 새로 반포된 말의 제도가 아무리 절충한 것이라 하더라도 군보미를 중앙의 군영에 바칠 때에는 본래 곡물을 말 위로 높이 올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각 고을에서 받아들일 때에 만약 바칠 것을 따져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뱃사람들에게 터무니없이 징수하지 않으면 반드시 군병들이 억울하다고 호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의 수량 외에 각종 소모 비용을 넉넉히 마련해야만 이런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또 듣건대, 중앙 군영에 바칠 때에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각 군영마다 서로 같지 않다고 하는데, 이것 또한 철저히 금지하여 일치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함양의 산골 백성들에게 한 필지의 전지에 세 가지의 세금을 물리는 일에 대하여 신 채제공(蔡濟恭)은 말하기를 ‘만약 어사의 서계에 열거하여 논한 것과 같다면 바로잡는 일을 잠시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만 도중에서 듣고 본 것이니, 각도에 분부하여 폐단의 원인을 자세히 살피게 하고, 이 외에 여러 고을의 이러한 폐단에 대해서도 열거하여 보고하게 한 다음에 품의하여 조처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신 김종수는 말하기를 ‘원 전지의 세금 외에 근거없는 세금을 매기고는 협기(挾起)라고 일컫는 폐단은 엄히 금지하지 않아서는 안되겠습니다마는, 한 필지의 전지에 세가지 세금을 물린다는 말에 있어서는 그럴 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서계 중에 김 판서의 사패지란 것은 곧 신을 가리킨 것입니다. 신은 화전을 떼어받을 때 즉시 호조로 하여금 초기하게 하고 관례대로 세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화전이 척박하고 세금이 중하였기 때문에 호조에 납세한 뒤에 전주(田主)에게 돌아가는 것은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데, 이는 화전의 원래 세금 내에 9할은 호조로 들어가고 1할은 전주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원래 이중으로 징수한 것이 아닌데, 백성들이 이미 한 필지의 전지에 세 가지 세금을 냈다고 말하였으니, 어사가 갑자기 듣고 놀란 것은 당연한 형세입니다. 한 필지의 전지에 세 가지 세금을 낸 데 대한 여부도 감사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장계로 보고하게 한 후 조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사노비(寺奴婢)의 일에 대하여 신 채제공은 말하기를 ‘어사가 폐단을 바로잡기에 급급하여 이와 같은 임시 방편의 요청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생각건대, 사보(寺保)라고 칭한 뒤에도 노비의 수효를 쉽게 채우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이 점차 양보(良保)로 가버리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사세가 아무리 가긍하다 하더라도 임시 변통의 길이 없으니 이전 대로 두는 외에 다른 계책이 없을 것 같습니다.’하고, 신 김종수는 말하기를 ‘각 고을의 사노비 중에는 자손이 지나치게 많은 곳이 있는가 하면 자손이 전혀 없는 곳도 있습니다. 만약 그 실지의 수효를 알아낼 방도가 있어서 새로 출생한 수를 이미 죽은 수와 비교해 본다면 큰 숫자는 서로 맞추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대를 세우고 나서 사망 등록을 하는 법이 있는데, 그것은 원래 힘든 일도 아니지만 사노비라는 명칭을 백성들이 모두 회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재산이 있으면 숱한 자손을 두고도 후사가 없는 것으로 등록합니다. 그러므로 재산이 없으면 죽어도 백년이 지나도록 사망 등록을 못하여 친척이나 이웃에게 대신 받아내기까지 하니, 이는 천하에 지극히 억울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서계한 의견이 아주 타당하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이처럼 양역(良役)이 모자란 때를 당하여 명목을 새로 만드는 것은 반드시 소요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사보(寺保)를 새로 만든 후에는 노비의 두목이 아이 하나라도 낳아 바칠 리가 없을 것이므로 몇십 년이 안 가서 사노비란 말이 반드시 없어질 것이니,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안의(安義)·산청(山淸)·거창(居昌) 세 고을 환자곡의 폐단에 대하여 신 채제공은 말하기를 ‘이는 모든 백성을 똑같이 사랑하는 성조(聖朝)의 정사가 될 만하니 특별히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 값은 얼마나 감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감사로 하여금 민정을 세밀히 살펴 열거하여 장계로 보고한 다음 다시 품의 조처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신 김종수는 말하기를 ‘곡식 수량의 다소와 민폐의 천심이 함양에 비하여 현저하게 다르니만큼, 고쳐 바로잡을 때에 비록 대략 함양의 전례에 따라 하더라도 충분히 사실을 조사하여 일체 간편하게 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함열의 성당창에 대한 일과 안흥진에 대한 일에 관해 신 채제공은 말하기를 ‘성당창에 해당 고을 수령이 실어다 납부하는 것은 변칙적인 제도에 속하는 일이니 아마도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안흥진을 수영(水營)에 이속시키는 일은 조정의 체면으로 보아 이랬다저랬다 하는 혐의가 있으니 우선 하회(下回)를 보아 조처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고, 신 김종수는 말하기를 ‘성당창과 안흥진의 일은 신이 일찍이 널리 물어보아 익히 아는 것인데, 신의 얕은 소견으로는 모두 옛날의 제도대로 회복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에 동료 정승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서계 중에 요청한 대로 모두 받아들여 시행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함양의 전후 수령의 일에 관해 신 채제공은 말하기를 ‘함양의 전후 수령들이 바로잡아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옛날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일삼다가 이미 드러났으니, 어찌 중한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죄의 경중은 또한 공용(公用)이었는가 사용(私用)이었는가에 달려 있으니, 담당 부서로 하여금 잡아다가 사실을 조사하고나서 처리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신 김종수는 말하기를 ‘창고를 정리하고 남은 곡식이란 그 명색 자체가 이보다 더 부정한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 다 받기도 전에 수량을 억지로 정하고 원래의 수량 안에서 도적질하여 쓰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기에 신이 평안도에 재직하고 있을 때 공문을 띄워 각 고을에 금령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남도 고을의 폐단 또한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비록 옛날의 잘못된 일을 답습한 것이라 하더라도 무엄한 일이니, 전후 수령을 서계의 소청에 의하여 모두 잡아다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안도에서 아직까지 금령을 따르고 있는지의 여부와 영남의 다른 고을, 그리고 6개 도에서도 이 폐단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 본사에서 공문을 띄워 조사하여 보고 나서 규정을 엄격하게 세워 일체 철저히 금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 같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첫 번째 조항의 군보미와 군포에 대한 일은 모두 좌의정과 우의정의 의논에 의해 시행하도록 하라. 그런데 각 군문에서 군보미를 되는 말을 호조에서 가져다가 고쳐 만들어 분배하는 일에 대하여 좌상의 의논이 좋기는 좋다. 그러나 지난해 좌상이 경연에서 아뢴 일로 인하여 듣자니 중앙 군문에서 쓰는 말이 고르지 못한 폐단이 있고, 중앙 군영 중에서는 간혹 큰 말을 쓰기도 하여 호조의 놋쇠말만 못한 곳이 있다고 한다. 대개 농간을 부리는 폐단은 따로 있다. 지금 만약 그 제도를 균일하게 하려다가 혹시라도 도리어 더 크게 만든다면 고을 아전과 뱃사람들이 이것으로 구실거리를 삼아 더 거두는 폐단이 없겠는가. 대개 나의 생각에는 처음부터 쌀로 받아들이는 폐단을 없애지 못하면 혜택을 받을 수 없다고 여겼다. 대체로 쌀은 속담에 이른바 익은 밥과 마찬가지이니 익은 밥을 훔쳐먹는 것은 실로 금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백성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생각한 끝에 한두 가지 생각해낸 것이 없지 않으나, 인재가 드문 때에 갑자기 의논하기란 어렵다. 경은 말의 규격을 고치는 일에 대하여 충분히 토의하여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어 후회를 남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지방의 말의 규격에 있어서는 감사라는 명색을 띠고 일도(一道)를 순찰하면서 이 폐단을 혁파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 건은 특별히 공문을 띄워 엄중히 신칙하도록 하라.
두 번째 함양의 산간 면에서 한 필지의 전지에 세 가지 세금을 징수하는 일에 대해서도 좌의정과 우의정의 의논에 의해 시행하라. 운봉·남원·전주·하동 등의 고을 궁세(宮稅)에 대한 일은 이미 어사가 다녀와 복명을 하던 날 별도로 하유하였으니, 해당 도가 이미 조사하여 서계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세 번째 조항의 사노비의 일에 대해서는, 늙어서 남편이 없이 과부로 있다면 참으로 천하의 곤궁한 백성이다. 그들의 공물을 감해준 덕의는 훌륭하고도 장하다. 백성들 또한 이성(彛性)이 있으니만큼 못잊어하는 생각이 왜 없겠는가. 내가 즉위한 후 감히 선왕을 계술(繼述)하는 의의에 따라 즉위 원년에 교령을 반포하여 즉시 추쇄관(追刷官)의 일을 없앴다. 좌상은 이 일에 참여하여 자초지종을 들었으니, 재계하던 날 저녁에 서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경이며, 절목을 만들어 올린 것도 경이다. 이미 내수사를 턱없이 줄이는 명색을 없애고 도에서 남은 노비를 총괄하는 제도를 다시 세움으로써 백성들이 어깨를 쉬고 궁중의 내속들이 혜택을 입게 하였다. 그래서 이 뒤로는 군영과 고을에서 이 제도를 준행하는 것이 추쇄관이 다니면서 행패를 부릴 때보다 백곱절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근년에 들으니 감사가 어물거려 넘기고 수령이 우물거리면서 아전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데 일임하고 있다 한다. 심지어 북도에서 경성(鏡城)의 사건이 있어 추쇄관 제도의 회복을 원한다는 말이 백성들의 호소에 오르기까지 하였으며, 남도에서는 고부(古阜)의 사건이 있어 모두들 없애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하는가 하면, 현재 해남(海南)에서도 조사하여 서계하는 일이 일어났다. 법이 시행되지 않고 영이 서지 않는 것이 이러고서야 백성들이 어찌 금석(金石)같이 믿을 수 있겠는가. 지금 어사의 서계가 올라온 기회에 특별히 거듭 금지하는 명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오직 경들이 어떻게 나의 뜻을 받들어 잘 보좌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니 경들은 노력하라.
어사의 서계 중 군보로 만들자는 말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자기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였다. 그의 생각은 아마 서도(西道)에서 이(里)를 제정한 제도를 모방하려는 데 있는 것 같다. 서도의 군사로서 첫째 이름은 청산(靑山)이라 하고 둘째 이름은 백운(白雲)이라 하는 자가 있다는데, 어찌 참으로 그런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백성들이 곤란을 받지 않았으니, 이것이 내가 죽은 정승과 죽은 중신이 태평할 때 시기적절히 처리한 의의를 깊이 허여하는 바이다. 더구나 이 일은 해당 고을의 자체 방편에 의해 한 것이므로 조정에서는 듣고도 모르는 체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게 하도록 방임할 수는 없다. 보(保)의 한 글자에 대해서는 더욱이 경솔히 말할 수 없다. 우리 나라가 오로지 명분을 숭상하고 있는데 남은 것은 곧 노비라는 이름뿐이니, 오늘에 와서 기자(箕子)가 남긴 제도를 갑자기 고칠 수는 없다. 또 사리로 말하면 그 명색을 없애지 않고라도 양민과 똑같이 간주한다면 무엇 때문에 늙도록 남편이 없는 원한이 있겠는가. 노비의 폐단은 여러 도 가운데서도 북관과 영남이 가장 극심하고 영남 중에서도 좌도는 그렇지 않은데 우도가 유독 그러하니 어찌 더욱 의심스럽지 않겠는가. 이 한 가지 조항에 대하여 어느 도 어느 고을에서 폐단이 심하고 헐한가를 두루 들어 공문을 띄워 물어보고 고을마다 조항별로 나열 장계한 후 특별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을해년에 법을 개정한 후 모두 도에 따라 총수를 썼으니, 면적이 넓은 본도로서 만약 총수 밖에 여유의 수량을 얻으려 한다면 작은 고을에 급대(給代)하는 것이야 무슨 망설일 일이 있겠는가. 더구나 본 고을은 개벽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유독 노비들만이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도 가긍한 일이다. 그리고 고을 노비의 총수를 따져보면 각각 1백 호도 못되니 급대하는 것은 더욱 쉬울 것이다. 해당 고을의 허위로 기록된 장부 중에 악지(岳只)니 조시(助是)니 하는 것들은 감사로 하여금 그 원안(原案)을 거두어 모아서 불에 넣어버리고 현재 생존한 무리로써 특별히 보고 들었던 실태를 작성하여 장계로 상문하도록 하라.
네 번째 조항에 말한 세 고을의 환자곡 폐단에 대한 일은, 안의(安義)는 듣건대 몇 번 개정하였다 하고, 거창(居昌)도 듣건대 적임자를 만났다고 하는데, 오직 산청(山淸)의 환자곡 폐단이 안의나 거창보다 곱절이나 심하다. 방매하기도 어렵고 값을 감하기도 또한 어렵다. 더구나 현재의 수령은 졸렬한 선비와도 같아 쇄신할 것을 요구하기가 어려운 자이겠는가. 이러한 일들은 적임자를 얻은 후에야 폐단을 없애는 것을 의논할 수 있다. 해당 고을의 수령은 해조로 하여금 어느 한가한 고을 원의 임기가 찬 곳에 옮겨주고 그 후임으로는 음관(蔭官) 중 여러 고을을 역임한 자로서 강직하고 공적이 있는 사람을 구두로 임명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 감사로 하여금 세 고을 곡식 장부의 폐단을 고칠 방법을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계문하게 할 것이다. 함양의 전례를 어찌 혹시라도 계속 본받게 하겠는가. 비록 이것이 없더라도 자연 잘 다스릴 방법이 있을 것이니 또한 이점을 알려주도록 하라.
다섯 번째 조항에 함열의 성당창에 차사원을 차임하는 일과, 여섯 번째 조항에 안흥진을 다시 설치하는 일은 우상의 말이 좋았다. 이 또한 전 전라 감사 및 전라 병사와 논의한 일이 있으나 오직 기회가 없어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 경은 다시 좌상과 상의하여 훗날 차대(次對)할 때에 품의하여 처리하라. 그리고 원 서계 중 말미에 진술한 수령을 논죄하자는 일은 모두 좌상, 우상의 논의에 의해 시행하도록 하라. 그중 문건 위조에 대한 일은 곧 살펴보아 조사하는 것이 제일가는 방책이다. 그들의 공술한 말을 어사의 서계와 대비해 보고서야 비로소 처음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로 폐단을 일으킨 죄인의 괴수를 따진다면 그 첫째는 병오년에 수령으로 있던 이득준(李得駿)이다. 그 사용처에 대한 공사 여부는 우선 제쳐놓고라도 이 일에 대한 죄를 이득준이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조정의 법령이 하찮은 담당 아전들에게만 적용되고 수령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되겠는가. 그가 폐단을 일으킨 죄에 대해서는 다른 고을에서의 공적이 있다 하여 용서될 수 없다. 이득준은 도형(徒刑) 1년에 처하여 곧 그 지방으로 귀양보낼 것이며, 그후 각년 부사(府使), 군수(郡守)로 있었던 자들은 해당 부서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 처결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함열에서 세금을 받아들이는 차사원을 윤번으로 할 것을 애당초 경연의 주달에 따라 규정으로 정한 것은 우선 시도해 보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폐단이 있을 경우에는 감사로 하여금 다시 논계하여 없애버릴 것을 허락하기까지 하였다. 지난번에 해당 감사가 조항별로 본사에 보고한 것을 듣고 또 조운군(漕運軍)이 글을 올려 호소한 것으로 인해 적절히 헤아려 조처하겠다는 하교도 있었다. 형편을 세밀히 따져보면 혁파하는 것이 오히려 편리한데, 혁파하려면 시행하더라도 폐단이 없을 다른 방도를 우선 강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만약 본 고을 수령에게 도로 소속시킨 다음 이전에 하던 대로 세금만 받고 배를 타지 않게 한다면 곡물 품질의 깨끗하고 거친 것과 섬 안에서 늘고 주는데 대하여 누가 관심을 두어 조사하고 살펴내겠는가. 또 조전(漕轉)의 폐단으로 말하면 이른바 군산 첨사(群山僉使)는 허수아비와 다름이 없으니 실어다 놓거나 창고에 넣을 때에 온갖 폐단이 뒤따라 생길 것이다. 차사원이란 이름을 함열에 돌렸으니 그에게 맡겨 실어다 보관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며, 세금받는 권한을 본 고을에 넘겼으니 역시 그에게 맡겨 창고에 넣게 해야 옳을 것이다. 모든 백성을 동등하게 간주하는 조정의 도리로서 음관이건 무관이건 무슨 차이를 두겠는가. 무관이 능히 할 수 있는 해운(海運)을 음관인 고을 수령이 어찌 할 수 없겠는가. 비록 거리의 멀고 가까운 차이는 조금 있다 하더라도 아산(牙山)의 전례를 또한 상고하여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성당과 군산 두 창고는 운반해야 할 곡식섬이 1만 섬을 넘지 않는데 차사원을 별도로 내는 것은 실로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모름지기 두 창고를 합치는 것의 가부를 결정한 다음에야 시원하게 결정할 수 있을 것인데, 만약 합설(合設)하게 되면 군산 첨사도 마땅히 오래 근무하는 자리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
경들은 이 여러 가지 조항을 타당하게 하나로 결정하여 보고하라. 그리고 안흥진(安興鎭)에 첨사를 도로 두는 데 대한 일에 이르러서는 관방(關防)이란 것보다도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여기는 고질적 폐단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연전에 대신의 회계에 나누어 설치할 것으로 요청한 것은 소강(所江)의 관방을 모방할 것만 생각하고 백성들에게 폐단이 되는 것은 미처 두루 생각지 못한 것 같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혐의는 가볍고 회보(懷保)하는 정사가 중하니만큼, 한 마디로 말해서 이전대로 두어야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충과 이와 같은 사세로 보아 진장(鎭將)의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폐단을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폐단을 끼치게 될 것이니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앞서 차임해 보낸 사람들은 늙어서 제대로 일을 보살피지 못하거나 무능하여 소임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면, 대개 세력이 없고 하등의 평가를 받아 허물을 씻고자 방어사의 길에 올라 있는 자들로서 조세 운반을 호송하는 일에는 명실이 부합되지 않으므로 수시로 교체되었다. 만약 군산의 변경 수령 자리를 이곳에 옮겨 소속시키지 않는다면 별도로 방어사의 한 자리를 설치하는 것 또한 불가하지 않을 것이다. 방어사 자리는 본래 좁지만 지형이 영종도(永宗島)보다 못하지 않기 때문에 변경 방어사의 이력으로 쳐주는 자리를 설치하려는 것이다. 다만 좀 망설이는 이유는 방어사 영을 설치하려면 특별한 경비에 대해 유의할 만한 무슨 문제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니, 경들은 또한 자세히 더 헤아려보고 품의하여 처리하라. 경연에 올라 주달하고 답변하고 할 때에는 늘 말로써는 의사를 다 표출하지 못하므로 글로 자세히 써서 복주(覆奏)하는 것이 제일 낫다. 묘당으로 하여금 이 점을 알도록 하라."
하고, 며칠이 지난 뒤에 빈청(賓廳)의 접견을 가졌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성당과 안흥 두 창고에 대한 일은 경들이 보기에는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성당창은 신이 목격하지는 못하였으나 일찍이 수령을 지낸 사람들 가운데서 대략 의견을 가지고 있는 자와 세밀히 따져 보았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 창고의 폐단을 바로잡을 방법을 찾으려 한다면 차사원이 윤번으로 수령해 오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신이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흥창에 다시 첨사를 두는 일에 있어서는, 신이 지난해 호서(湖西)에 갔을 때 백성들의 의견을 들어 보니 모두 이전대로 하였으면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정사는 법령이 나오면 반드시 시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만약 고친 지 오래되지 않아서 또 다시 이전대로 환원한다면 보고 듣는 사람들이 아마도 종잡을 수 없이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그 일이 타당하다면 자주 변경하더라도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수어청(守禦廳)은 내가 설치하였다가 도로 들여오는 등 출입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 옛날에도 그러하였는데 지금 혐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나의 생각은 다시 첨사를 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성당창에 대해서는 함열 군수를 영운 차원(領運差員)으로 삼아 배를 타고 호송하게 하면 어떻겠는가? 옛날에는 수운 판관(水運判官)이 있었고 또 도사(都事)가 해로로 운반한 사례가 있었다."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감사의 장계 내용은 2건의 일인데, 하나는 함열 군수로 하여금 배를 타게 하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당창을 군산에 넘기자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군산과 법성(法聖)의 두 첨사가 모두 배를 타는데 유독 이 음관 수령만이 배를 탈 수 없단 말인가?"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음관과 무관은 결국 같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아산(牙山)에서 운반할 때에는 험난한 손돌목[孫石項] 한 군데만 거치기 때문에 배를 타고도 올라올 수 있으나, 호남에 있어서는 여러 곳의 험한 파도를 거치게 되므로 말로는 배를 탄다고 하지만 명령의 시행이 좀 오래되면 육로를 따라 몰래 오는 폐단이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흥진은 첨사를 차출하여 보낼 때에 늙고 무능하여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 아닐 경우 하등의 평점을 받고 그 죄를 씻으려는 부류들이다. 이 때문에 온갖 폐단이 다 생기는데, 지금 다시 설치하고자 한다면 변경 방어의 이력으로 쳐주는 자리로 만들어야만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안흥은 신이 일찍이 가본 곳인데 그 지형은 해안에 자리잡은 작은 형국으로 지휘할 수 있는 지대가 아니니 애당초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할 곳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변지에 설치한다면 그래도 의논해 볼 만합니다."
하였다. 우의정 김종수(金鍾秀)가 아뢰기를,
"만약 방어영을 설치한다면 지출에 소비되는 재정이 매우 많이 들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없던 걱정을 사서 한단 말입니까."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안흥진을 다시 설치하는 일은 전 감사 권엄(權𧟓)이 경연에서 극력 진술하였고, 이번 어사의 서계에서도 청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안흥을 수영(水營)에 이관시키는 것은 구애 되는 점이 없지 않으므로 논의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시 설치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도 지난해 홍주(洪州)에 갔을 때 말을 뒤따라 오면서 호소하는 자는 모두 그 진의 백성들로서 첨사를 다시 둘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조정의 정사에 있어서 종잡을 수 없이 변경하는 혐의가 없지 않으므로 잠시 앞으로의 상황을 보아가며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형은 신이 어사로 갔을 때 두루 보았습니다. 큰 바다를 앞에 두고 절벽 위에 성루가 있어 마치 제비둥지와 같으므로 방어의 요새지가 될 수 없었습니다. 혹시 뜻밖의 우환이 있을 경우 주장(主將)은 태연하게 앉아서 적을 막아야 할 텐데 어찌 반드시 돌격하는 장수처럼 물에 임하여 적을 맞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자, 김종수가 아뢰기를,
"신도 이에 대해 익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종잡을 수 없이 변경하는 혐의는 작고 폐단을 바로잡는 정사는 크니 이 때문에 구애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어청과 총융청 두 군영도 출입이 일정치 않았다."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수어청과 총융청 두 군영을 설치하거나 폐지한 일이 과연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도성에서는 당시의 형편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대략 알 것입니다만, 먼 지방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은 사세가 그러했다는 것은 모르고 한갓 제도를 빈번하게 고치는 것만 알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것을 어렵게 여깁니다."
하자, 김종수가 아뢰기를,
"안흥진이 수영에 예속된 지도 여러 해가 되어서, 장수와 군사들에게 공급하는 비용도 안흥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갈라서 둘로 만든다면 지장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리에서 물러간 후 여러 무장(武將) 및 총융사와 같이 상의하여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8일 무오
좌의정 채제공에게 하유하였다.
"근년 이래로 대신들의 거취 문제로 인해 거의 논란하지 않은 달이 없었다. 세상에는 물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물결이 이는 수가 있으나 경들 또한 어찌 스스로 반성할 점이 없겠는가. 경들이 모두 나의 말을 받들어 보좌할 것을 늘 유념하여 일마다 잘 대처해서 정사를 베풀고 나에게 수응의 고달픔을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을 늘 염두에 두었다면 설사 갈등을 일으키고 싶어도 사세상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경은 요즘 들어 병이 있다는 말을 어찌 그리도 자주 한단 말인가. 불의에 오는 병은 실로 면하기 어렵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이는 절대 평소 경에게 책임을 맡긴 본의가 아니다. 더구나 조정은 사리와 체면을 앞세워야 하는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묘당의 의망(擬望)하는 일로 말하면 열흘이 지났는데도 추천하지 않았으며, 자주 하명하여도 응하지 않으면서 병이 났다느니 병이 심하다느니 하는 통에 언제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지 기대하기 어렵다. 모르겠다만 의정부에 이전에도 이와 같은 사례가 있었는가? 이 때문에 경을 위해 개탄해 마지않는다. 더구나 상부(相府)의 사무는 근력에 관계되는 것도 아니니 누워 도를 논하는 것이 본래 그 직분이다. 삼망(三望)의 이름을 불러 추천하는 것은 아홉 글자에 불과하다. 어찌 이를 해내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하루 이틀 경들에게 맡기고 있으나 결말이 나지 않으니, 참으로 걱정되고 한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경은 빨리 전일의 고집을 버리고 즉시 후보자를 추천하라."
구상(具庠)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삼았다.
4월 9일 기미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요즈음 귀양지에 도착했다는 문건이 계속 꼬리를 물고 올라오고 있는데, 이는 사사로이 남의 무덤을 파서 관을 드러낸 죄인들의 건이다. 이는 비록 나라의 금령이 무너져 없어진 소치이기는 하나 미련스레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지(山地)로 송사벌이기를 좋아하는 무리가 또한 어찌 반드시 옛날에는 적고 지금은 많아서 그러한 것이겠는가. 이는 대개 각 해당 감사들이 원망을 사더라도 일벌 백계(一罰百戒)의 정사를 시행하려 하지 않아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해괴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선왕께서 법을 제정하여 신칙하고 금하는 것이 지극히 엄격하였고 보면 여러 도에서 어찌 이처럼 감히 거행할 수 있단 말인가. 이 후로는 각도에서 1년 안에 이 일로 인하여 귀양보내는 사람이 많을 때에는 해당 감사를 잡아다 처벌할 것이며 금하지 않은 수령도 같은 죄로 논할 것이다. 해조에서 여러 도에 엄히 신칙하여 다시는 범하지 말게 하라."
4월 10일 경신
초계 문신(抄啓文臣)들에게 직접 시험을 보였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홍병신(洪秉臣).】 이 아뢰기를,
"언로(言路)가 열리고 닫기는 데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한 사람도 바른 말을 하다가 죄를 입은 자가 없었으므로 여기에서 사람들이 바른 말을 하도록 유도하고 간하는 말을 하게끔 하신 전하의 덕의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전 승지 권유(權𥙿)가 공론을 모아가지고 자기의 지위를 돌아보지 않고 조항별로 규탄한 것은 온 나라의 공정한 의논이었지, 윤선도(尹善道)의 집에 사사로운 원한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전하께서는 받아들여도 되고 버려도 되는데 어찌하여 그 말을 꺾어버렸습니까. 꺾어버리고도 부족하자 귀양을 보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게 어찌 전하에게 기대하던 것이겠습니까. 권유에게 내린 귀양의 명을 빨리 회수하소서.
전 정주 목사(定州牧使) 오대익(吳大益)은 본래 거칠고 패려하며 탐욕스럽고 비루한 성품으로 도임한 후 선정(善政)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토색만 일삼았습니다. 기세를 업고 영문(營門)의 세력에 의지하여 향안(鄕案)이란 명목으로 백성 가운데 부호(富戶) 4백여 명을 모집하여 향안에 등록해 놓고 예전(禮錢)이란 명목으로 사람마다 5, 6백 냥씩이나 강제로 받아냈습니다. 그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치 관청의 빚이라도 징수하듯이 마구 매질을 하여 온 경내가 아우성을 치는 통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소란스러웠습니다. 원래 향안에 등록된 자들은 그들과 한 대오에 있기를 부끄럽게 여겨 영문에 호소해 오는데, 영문에서도 간섭한 일이 없지 않기 때문에 그 자취를 엄폐하고자 향족들끼리 하는 싸움이라고 핑계대고 형장을 쳐서 귀양보내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탐욕스럽고 이욕을 즐기는 따위는 이미 체차되었다 하여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오대익에게 장오(贓汚)의 법을 시행하고 민간에서 받아들인 돈도 일일이 찾아내 돌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권유의 일에 대해서는 일전에 처분하여 내린 전교 중에 처분의 본의를 자세히 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두둔하며 구제하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한다는 혐의만 있을 뿐이니, 너무도 타당치 않다. 오대익의 일에 있어서는, 이러한 일이 먼 지방에서 풍문으로 들려온 것이므로 다 믿기 어려우나 진실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 죄가 어디에 해당되겠는가. 더구나 향안의 건은 연전에 조정의 금령이 있었던 만큼 고을 수령이 설사 그렇게 하자고 하는 말이 있었더라도 감영에서 그대로 시행하였을 리가 없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조사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감사에게 지시하여 상세히 조사해서 장계로 보고하게 한 다음 품의를 거쳐 조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강인(姜)을 해남현(海南縣)으로 귀양보냈다. 원춘도 관찰사(原春道觀察使) 윤사국(尹師國)이 장계하기를,
"본도에 복정(卜定)한 황장판(黃腸板)을 경차관(敬差官)이 이미 수량에 맞추어 지정하였으며, 지정받은 각 고을에서는 아직까지 함부로 베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회양부(淮陽府)에서는 43판을 더 베어 산골짜기에 묻어 두었습니다. 봉산(封山)의 사체가 얼마나 중대하며 특명으로 신칙함이 얼마나 엄격한 것인데, 수령이 제멋대로 마구 벤단 말입니까. 전 회양 부사 강인과 전 양양 부사(襄陽府使) 홍구서(洪九瑞)의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품의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명색이 수령이 되어 황장판을 도벌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 강연이 40여 판을 남몰래 산골짜기에 묻은 일에 있어서는, 법을 무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조정에 큰 수치를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조회를 열기를 기다려 엄히 신문하여 구두의 공초를 받되, 솔직한 공술을 받아 보고하라."
하였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전 회양 부사 강인이 공초하기를 ‘황장판을 봉하고 남은 것이 2장이었고 그 밖에 쓸모없이 퇴짜맞은 판과 찍고 남은 끄트머리를 가지고 전부 판을 만들게 하였는데 도합 40여장이었습니다. 이를 그대로 산속에 두고 미처 처리하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전하의 처결을 바랍니다."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천만금을 탐하여 백성들을 해치고 자신을 살찌운 탐욕스러운 수령은 옛날에도 있었다고 하지만, 명색이 관장(官長)이 되어 이처럼 나무도둑질을 하였단 말인가. 이미 도벌해 놓고 또 남몰래 땅에 묻기까지 하였으니, 그 처사는 사대부다운 청렴한 기풍이 조금도 없고 조정에 누를 끼치기에 알맞은 자다. 어제 전교를 내릴 때만 해도 매정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그의 공초를 보니 더욱 형편없다는 것을 알겠다."
하였다. 이어 연한을 정하지 말고 먼 변방에 귀양보내고 금고의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4월 11일 신유
주강(晝講)에 차대(次對)와 윤대(輪對)까지 아울러 거행하였다. 참찬관 유문양(柳文養)이 아뢰기를,
"형조의 죄수를 석방하라는 영이 밤중에 갑자기 내렸습니다. 이게 어찌 성상에게 기대하던 바이겠습니까. 유언호(兪彦鎬)와 홍주익(洪柱翼)과 같이 죄를 지은 사람을 석방하기도 하고 죄명을 벗겨주기까지 하였으니, 신은 형벌의 정사가 타당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동지 경연사 이병정(李秉鼎)은 형조 죄수의 석방이 불가함을 극력 말하였는데,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김종수(金鍾秀)가 아뢰기를,
"이병정이 특별히 말한 것은 가상히 여길 만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도리어 체차의 견책을 받았으니 신은 취소하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따랐다.
엄사만(嚴思晩)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행원(尹行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문순(金文淳)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시호를 내렸다. 증 이조 판서 이연경(李延慶)은 정효(貞孝), 증 예조 판서 김주(金澍)는 문정(文靖), 증 영의정 이기(李墍)는 장정(莊貞), 증 좌찬성 정기원(鄭期遠)은 충의(忠毅), 상원군(祥原君) 이세녕(李世寧)은 충렬(忠烈), 지중추부사 송립(宋岦)은 장정(壯靖), 증 병조 판서 이익필(李益馝)은 양무(襄武),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은 충희(忠僖), 우의정 한흥일(韓興一)은 희온(僖溫), 대사헌 권상일(權相一)은 희정(僖靖)이라 하였다.
4월 12일 임술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권무 시사(勸武試射)를 행하고 대신·각신·승지·사관 및 시위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렸다. 이날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가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과녁을 맞혔는데, 상이 그가 대장으로서 나이가 60이 되었는데도 치닫는 것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전지를 내려 칭찬하고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4월 13일 계해
승지 신기(申耆)를 면천군(沔川郡)으로 귀양보냈다.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가
"전임 관찰사 정창성(鄭昌聖)에 대한 조사문제는, 서로 인수 인계하였던 의리로 보아 무릅쓰고 감당할 수 없다."
고 상소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도에서 조사할 것을 경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는데 심이지가 상소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승지와 사관이 경연에서 들은 말을 전달한 것이다."
하고, 그날 입시한 승지와 사관에게 물어서 아뢰라고 하였는데, 승지 신기(申耆)가 과연 심이지에게 서면으로 알려주었던 것이다. 하교하기를,
"이런 것을 엄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엿보고 억측하는 버릇을 어떻게 단속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귀양보낼 것을 명한 것이다.
4월 15일 을축
김이주(金頤柱)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가 장계를 올리기를,
"신이 평안도로 오던 날 정주목(定州牧)에서는 지난해 향안(鄕案)을 작성하였다는 말이 노상에 떠들썩하여 듣는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을 정도였습니다. 감영에 부임하고나서 비로소 고을 백성들이 낸 호소의 글을 보고난 뒤 본 고을에 탐문해 보니, 그들의 떠드는 말이 도리어 듣던 말보다 더 심하였는데, 모두들 ‘거둔 돈의 수량이 10만 냥이라고 하지만 실은 이보다 훨씬 많다.’고 하였습니다. 대오에 편입된 부류로서 향안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아비를 바꾸고 할아버지를 바꾸는 등 윤리를 무시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갖가지로 있었습니다. 민심이 흉흉하여 아직도 안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좌수(座首)들을 잡아다가 엄하게 형장(刑杖)을 치면서 따져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이 고백하기를 ‘본 고을 각 민고(民庫)는 근년에 모두 바닥이 나서 온갖 용도에 손을 쓸 수 없었으므로 온 고을이 일제히 모여 소생시키고 구제할 방책을 토의하였습니다. 이때 목사가 영문에 나아가 의논한 끝에 백성들의 향안 등록을 허락하고 그 사례금을 거두어 각 창고를 채우라는 뜻으로 고을 안에 지시한 다음 사무를 처리할 사람 80여 명을 차출하여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향안에 등록할 수 있는 조건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통청(通淸)으로서 한산(閑散)을 모집하는 것이고, 하나는 올려서 등록하는 것으로서 향인의 서자들이고, 하나는 옮겨 등록하는 것으로서 다른 고을에서 이사해온 사람들이고, 하나는 이어서 등록하는 것으로서 조상을 이어 끼어드는 것이고, 하나는 공문(公文)이 있는 사람으로서 향청에서 증명서를 작성해 준 자입니다. 이리하여 등록된 총수는, 고을 대장에는 3백 84명이고 영문 대장에는 3백 64명입니다. 그리고 향안을 작성 등록할 때에 유사(有司) 80여 명 외에 본 고을에 사는 전 장령 백인환(白仁煥), 전 감역(監役) 신점(辛漸) 등 6, 7명이 여러날 동안 동헌에 들어가 머물러 있으면서 조용히 작성 등록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문벌 고하에 따라 예전(禮錢)의 다소를 정하였는데, 받아들인 예전 총액이 4만 6천 8백 49냥이었습니다. 이를 각 창고에 내주어 묵은 빚을 갚게 하기도 하고 각방(各坊)에 넘겨주어 이자를 늘려 신역을 면제시켜주기도 하였으며, 혹은 문루(門樓)와 장대(將臺)를 보수하기도 하고 혹은 무기와 침구류를 새로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 고을을 순찰하면서 문루와 장대의 보수한 곳을 보니, 서까래와 기와를 약간 고쳐 놓고 비용은 엄청나게 기록해 놓았는데 이는 모두 허위로 숫자를 늘린 것으로서 틀림없이 모두 마구 거두어 들이는 데에 들어간 것입니다. 대개 향록(鄕錄)이란 백성들의 재물을 거두어들이기 위한 가장 교묘한 방법이며 토색질에서도 가장 혹독한 것입니다. 조정의 금령도 무시하고 남의 비방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온 고을 백성들의 재물을 모두 관고(官庫)에 실어들이면서 축난 것을 보충하고 폐단을 구제한다고 핑계댑니다. 그러나 태반이 명목이 바르지 못하고 사용한 곳이 분명치 않습니다. 수입 지출 등의 관리를 한결같이 간사한 향리에게 맡겨 멋대로 어지럽히게 놔두고 있으니 너무나도 놀랍고 통탄할 일입니다.
해당 목사 오대익(吳大益)은 금령을 무릅쓰고 향안을 등록하여 조금도 거리낌없이 백성들의 재물을 거두어 들임으로써 그 해독이 온 고을에 미쳤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떠드는 추한 비방을 막을 수 없고 온 도가 지금까지 침뱉으며 욕해 마지않고 있습니다. 그 죄상에 대하여 빨리 유사로 하여금 엄히 감정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전 장령 백인환(白仁煥), 전 현감 조경보(趙慶輔)·신보겸(辛普謙), 전 전적 김문서(金文瑞), 전 주서 승경항(承慶恒), 전 감역 신점(辛漸), 전 첨사 이양필(李良弼), 전 참봉 조경일(趙慶一) 등은 모두 원래 이 고장의 토박이로 조정의 사적에 들어 있습니다. 관가의 그릇된 일을 요행으로 여겨 감히 재리를 노리는 간사한 버릇을 부렸으니 더욱더 통분하고 놀랍습니다. 일체 엄하게 처결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풍속의 교화를 면려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탐욕을 징계하는 정사가 없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오대익 같은 자가 어찌 감히 법을 요행히 모면할 수 있겠는가. 일전에 대간의 진달을 풍문으로 치부하였다가 조사하라고 명하자마자 먼저 보내온 본도의 서계를 보았다. 나라에 법과 기강이 있는 것을 그가 깨달았다면 어찌 혹시라도 이와 같은 죄를 범할 수 있겠는가. 향안 등록 건에 대해서는 새로 제정된 조정의 금령이 매우 엄하고도 명확한데 그가 어찌 감히 옛날에 없던 이런 일을 한단 말인가. 더구나 아전의 공초에 이른바, 각 창고에 묵은 빚을 갚았다느니, 각 방에 넘겨 이자를 늘린다느니, 그밖의 관청과 무기를 수리하였다느니 하는 말은 모두 허위로 그저 착복한 것이라고 하니, 오대익이 이를 어떻게 변명하겠는가.
이처럼 악독하고 불법을 저지른 관리를 법으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탐욕을 징계하는 일을 장차 어디에다 시행할 수 있겠는가. 다른 고을 수령의 징계를 논하기에 앞서 우선 서도의 백성들이 어찌 조정에 확고한 법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전 목사 오대익을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형틀의 격식을 갖추어 탐오한 관리를 가두는 옥에 엄히 가두라. 나쁜 자들끼리 서로 싸고돌면서 덩달아 학정을 도와 서도의 사대부들로 하여금 모두 윤리를 무시하고 도리를 어긴 죄를 범하게 하였으니, 이들의 소행이 더욱 가증스럽다. 백인환·조경보·신보겸·김문서·승경항·신점·이양필·조경일 등도 해부로 하여금 나졸을 파견하여 잡아오게 한 다음 일체 형틀의 격식을 갖추어 엄히 가둔 후 초기(草記)를 제출하라. 그 나머지 이른바 향인(鄕人)으로서 여러날 동헌에 들어앉아 은밀히 돈을 거두는 일을 논의하였다는 일에 대해서는 감사로 하여금 직접 잡아들여 다시 엄한 형장을 가하여 공초를 받아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경기 관찰사 김사목(金思穆)이 서도와 북도의 유랑민을 찾아내 본 고장으로 돌려보내는 일에 대하여 장계를 올렸는데, 그 장계의 내용이 자세치 못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번잡하기만 하고 긴요한 것을 놓쳤으니 강원 감사만도 못하고 또 황해 감사만도 못하다. 그러므로 경을 추고한다."
하였다. 이어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에게 하유하기를,
"장계의 내용이 정밀하고 자세하여 경기 관찰사보다 배나 더 낫다. 임무 수행의 근실 여부를 보아 정사의 업적이 어떠한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니, 경은 어느 곳이나 생각을 쏟아서 하라. 앞서 황장목(黃腸木)의 금령을 범한 수령을 논죄한 것에서도 법을 준수하는 일면을 볼 수 있었는데 이후에도 필시 금송(禁松)에 관한 행정을 더욱 단속하고 살펴서 할 줄로 여긴다. 도내에 바로잡아야 할 폐단은, 첫째가 포구 백성들의 일이고 둘째가 사찰(寺刹)의 일이니, 이 두 가지 폐단부터 기어이 제거해야 할 것이다. 포구의 폐단에 대해 다만 경의 소견대로 장계를 올리라고 하명하였는데, 그동안 과연 조처하여 진척된 바가 있는가? 이 뜻도 잘 알기 바란다."
하였다. 또 황해도 관찰사 이시수(李時秀)에게 하유하기를,
"경이 부임한 이후부터 주달한 문서가 모두 소상하고 진실되어 황해도 백성들의 일이 눈에 보이는 것 같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다. 보릿가을이 지나갔다 하여 조금도 방심하지 말고 이후부터 도내의 모든 일을 한결같이 부지런히 하여 오늘날 칭찬하는 하유를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4월 16일 병인
차대를 하고 이어 경서를 전공한 문신 및 시강 차례가 된 유생들에게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오대익의 일에 대해서는 그 당시 감사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오대익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감사이다. 조정의 형벌을 쓰는 정사에 있어서 먼저 감사의 죄를 다스려야만 오대익이 비로소 죄를 승복할 것이다."
하니,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은 이 일에 혐의가 있어서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서 대간의 계사가 제기된 후에 오대익에게 물어보니, 그가 하는 말이 근거가 없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약 공초를 받아 본다면 환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오대익은 채제공의 처남이었다. 우의정 김종수가 아뢰기를,
"해당 관찰사에게서 직접 자백을 받고 파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호조 판서 김이소(金履素)에게 이르기를,
"경이 그때에 평안 감사로 있었던가?"
하니, 김이소가 아뢰기를,
"신이 서도에 있을 때 오대익이 와서 말하기를 ‘민고(民庫)가 바닥이 나서 변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계책이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향안을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감영의 돈 4만 냥을 꾸어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동고(大同庫)의 토지를 방매하는 일이다.’고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향안을 만드는 것은 조정의 금령이 있으니 의논할 수 없고, 감영의 돈은 꾸어줄 만한 것이 없고, 전토 역시 마음대로 방매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순찰하는 길에 정주(定州)에 이르니 오대익이 다시 전에 한 말을 되풀이하므로 전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또 본 고을 재임(齋任)이 호소문을 올려 향안 등록의 허락을 요청하였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정주의 일은 감사의 장계를 보니 이미 영문(營門)에 공문이 왔었다고 하였고 보면 이는 알면서도 금하지 않고 폐단을 일으키도록 그냥 놔둔 것이니, 실로 감사에게 죄가 있다. 조정에서 징계하거나 장려하는 정사는 벼슬이 높은 사람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더구나 감영과 고을은 서로 견제하는 위치에 있는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 고을에서 향안을 처음 등록할 때의 감사를 승정원으로 하여금 이름을 밝혀내게 하고 해부에서 잡아다가 신문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이어 채제공 등에게 이르기를,
"차대를 경들과 함께 할 수 없다. 나라의 위상과 경연의 체모가 지금에 와서 다시 여지가 없이 되었다. 호조 판서는 감히 묻지도 않은 일을 경연에서 마구 변명하였고, 더구나 잡아다 문초하라는 명령이 내렸는데도 나가지 않았다. 경들은 이런 일을 목격하고도 팔짱을 끼고 옆에서 보고만 있은 채 깨우쳐주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경들의 이른바 시체(時體)가 과연 이런 것이며 나더러 경들이 할 일을 대신 하라는 것인가? 잘못을 서로 충고하고 바로잡아주는 것은 조정의 미풍인데, 사사로운 안면 관계로 입을 열지 않아 자신을 보호하는 하나의 계책으로 삼고 있으니, 경들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관서의 일을 물은 데 대한 대답이 너무도 자질구레하고 또 변명에 가깝다. 그런데도 경연에서 한 마디라도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이러한 경연의 체통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행 호조 판서 김이소(金履素)를 파직하라."
하니, 채제공과 김종수가 황공하여 물러갔다. 상이 빨리 김이소와 오대익의 공초를 받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오대익이 공초하기를,
"무신년 8월 정주에 부임하였을 때 민고(民庫)에 전부터 내려오는 축난 빚과 앞으로 써야 할 경비가 거의 수만 냥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마련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영문에 달려가 영문의 돈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아전과 향소임이 백성들에게 거두어 보충하자고 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초봄에 고을 사람 수십 명이 향안을 개수하고 예전(禮錢)을 받아 민고를 보충하겠다는 내용으로 영문에 글을 올려 허락을 받아 본 고을에 넘겨왔는데 그때의 감사는 바로 김이소였습니다.
전후의 향안을 가져다 보니 계사년·임술년·무술년에 만든 세 가지의 향안이 있었는데, 임술년 향안은 바로 목사 김치후(金致垕)가 민고를 보충하기 위하여 향안을 수정한 것이었습니다. 그후 목사 이계(李溎)와 정창순(鄭昌順)도 모두 민고의 고갈로 인해 향안을 수정하고 예전을 받아 민고를 보충한 다음 10년이 지나면 다시 수정한다는 뜻으로 절목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술년부터 지금까지 12년이 되므로 관찰사가 허락한 것이며, 전례가 이처럼 근거할 만하므로 부득이 시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별도로 주(州) 안에서 관리 대장에 오른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을 각 성씨별로 1명씩 특별히 뽑았는데 도합 80여 명이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원자를 뽑게 하였더니, 3백여 명에 달하였고, 받아들인 예전은 4만 5천 3백 냥 가량 되었으며 이를 적절히 헤아려서 민고에 각각 분배하였습니다. 본주(本州)에는 군액이 너무나 많고 부역이 매우 번다하기 때문에 매호에 각각 한두 냥씩 주어 그 동네로 하여금 본전은 두고 이자만 가지고 부역을 감하고 베를 바치는 밑천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세칙을 만들었습니다. 한 건은 향족들이 감영으로 가지고 가 호소하여 책으로 만들어 감영에 보관하였는데, 그때의 관찰사는 정창성(鄭昌聖)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건은 책을 만들어 고을에 간직해 두었습니다. 향안에 등록된 사람이 몇 명이며 받아들인 예전이 몇 냥이며 빚을 갚고 공용으로 지출한 돈이 얼마인가 책에 환히 적혀 있는데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무기를 개수하고 관청을 수리한 것에 대해서도 각각 일을 맡았던 사람이 있으니, 한번 조사하여 물어보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4만여 냥의 수량을 모두 백성을 위해 썼는데 그냥 긁어모아 치부한 것으로 몰아부쳐 마치 공용을 빙자하여 사리를 취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신이 비록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어찌 차마 이런 도적질을 하겠습니까.
6, 7인이 동헌에 들어와 거처한 일에 있어서는, 향안을 정서할 때 향인들이 소란을 피우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었으므로 동헌에서 약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을 맡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나절 동안 들어가 글씨를 쓰게 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판의금부사 이문원(李文源)에게 이르기를,
"오대익은 오광운(吳光運)의 친조카이다. 선조(先朝)에 하교하기를 ‘오광운은 사직에 공로가 있으니 10대 동안 죄를 용서해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제 선왕을 계술하는 뜻으로 비록 형벌을 시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 다시 공초를 받아서 만약 처음에 공초한 것과 상반될 경우 나라의 법을 굽힐 수 없으므로 마땅히 중한 처벌을 받게 되리라는 내용으로 엄하게 신칙하고 다시 공초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김이소가 공초하기를,
"신이 평안 감사로 있을 때 정주 목사 오대익이 향안을 수정하는 일로 두 차례나 와서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4, 5일 뒤에 이어 파직되었기 때문에 그 후의 일은 실로 알지 못합니다. 그가 면대하여 요청할 때에는 민고(民庫)가 탕갈되었다는 이유로 청하였는데, 이를 허락하지 않자 또 감영의 돈 4만 냥을 꾸어달라고 청하였으며, 또 민고전(民庫田)을 방매하겠다고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호소를 허락하였다는 일에 있어서는, 허다한 백성들의 호소문을 다 기억할 수도 없거니와 이미 여러 차례 있었던 수령의 요청도 굳이 거절하였는데 어찌 백성들의 호소를 허락해줄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사리를 따져보고 허락하였건, 두 가지 일을 재어서 말하였건 논할 것 없이 향안을 만들도록 권한 것이 아니라면 알고도 금하지 않은 것이다. 오대익이 또한 어찌 없는 일을 날조하여 모함하겠는가. 향안의 허락 여부와 금지 여부에 대해 다시 엄하게 신문하여 공초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오대익이 다시 공초하기를,
"혼미하고 망령된 소치로 향인(鄕人)들에게 종용을 받아 지나치게 받은 예전이 절반이나 사적인 소비로 들어가 마침내 망측한 죄에 빠지고 말았으니 오직 빨리 해당되는 벌을 받고자 합니다. 향인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맡아본 자는 백인환·신점·이양기(李良基)·김치복(金致福)이며 그 밖에도 조사받은 사람이 많으나 참가만 했을 뿐입니다."
하니, 판하하기를,
"이는 불법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사형에 속한다. 비록 현재 바친 문서에 공사간에 처리한 것이 나름대로 조리가 있다고는 하나 이것을 가지고 성급히 처결할 수는 없다. 어떤 법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지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품의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오대익에게 무슨 법을 적용해야 타당할지 대신에게 의론해 보았습니다. 여러 대신은 병으로 의론을 드리지 못하고, 우의정 김종수는 말하기를 ‘오대익이 다시 공초한 말 중에 「절반이나 사적인 용도로 들어갔다.」는 말이 바로 단안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그가 현재 바친 문서 중에 공적으로 쓴 돈의 숫자를 늘려서 기록한 것은 이제 논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문서에 적힌 숫자 내에서 공적인 명목으로 기록해 놓고 실지 사적인 용도로 들어간 것이 얼마인지 엄하게 따진 다음에 그 탐오한 수량을 계산하여 법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의논해 보라는 전교가 사적으로 쓴 데 대해서만 자복을 받은 뒤에 갑자기 내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을 살리기 좋아하는 전하의 덕의를 우러러 볼 수 있으나, 나라의 법이 매우 엄한데 신이 어찌 감히 전하의 뜻을 순종하기에 급급하여 말을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예로부터 만족을 모르고 탐욕을 부리는 불법적인 관리가 물론 많이 있었다만 모두가 최후의 결과를 잘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범한 자들이다. 그러나 오대익에 있어서는 어찌 그렇게도 이와 상반되는가. 요즈음 공초한 내용을 보고 이 일을 범한 소행으로 참작해 보면 그처럼 미련하고 고지식한 사람은 옛날에도 듣지 못했고 오늘에도 보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현재 사형 안건은 바로 향안에 등록한 일이다. 그 고을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고 감영에서도 공문을 보내왔으니 그에 있어서는 충분히 구실을 잡고 발뺌할 만한 조건이 된다. 더구나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며 죄를 두려워하고 형벌을 피하는 것은 누구나 다같이 타고난 본성인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의 처음 공초에는 모호하여 분명하게 변명한 바가 없다. 다시 공초할 때에는 금지하지 않은 감사를 우선 엄하게 다스리려 한다는 것과 또 옛날의 처지를 깊이 생각하여 법대로 신문하려 하지 않는다는 뜻을 그에게 알려주게 하였는데, 그가 이 기회에 자기의 말을 뒤집어 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일을 자신이 책임지고 나서서 돈의 절반은 사적인 용도에 들어갔다는 등의 말로 서슴없이 공초하였다.
그래서 또 명하여 기록된 책을 가져다가 검열하도록 하였더니, 이른바 사적으로 썼다는 것에서 건물 보수에 든 수량과 댓가로 준 수량을 제외하면 그밖의 처리한 것은 구걸하는 이들에게 주고 아전과 종들에게 준 것에 불과하며 실지로 자신이 착복하고 자신이 손대어 심하게 비난할 만한 일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 액수를 공평히 따진다면 또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가 정말 무슨 마음으로 달갑게 중벌을 받고자 한단 말인가. 이 때문에 이해가 안 가 도리어 웃음만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허망하고 증거없는 죄안에 대하여는 비록 법을 적용하고자 해도 적용할 만한 율이 없기에 공론을 들어보기 위하여 대신에게 수의(收議)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헌의한 것을 보니 대신의 뜻도 그러하였다. 다만 의견 속에 ‘다시 문서를 가져다 정확히 쓴 실지의 액수를 엄하게 따지라.’고 한 말은 대신이 그의 공초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더구나 이른바 그가 바쳤다는 문서에 인장도 찍지 않고 두서도 없었으니, 이것을 밝히는 자가 그처럼 허술하였단 말인가.
이밖에도 망설이며 잘 헤아려야 할 일이 또 있다. 그의 숙부는 죽은 참판 오광운이다. 오광운은 지난 무신년에 나라에 특별한 공로를 세웠는데, 선왕께서 그가 사직에 공이 있다고 칭찬하시면서 ‘10대 동안 죄를 면책하라.’고 추켜세웠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을 단서(丹書)에 올려 대신 철권(鐵券)으로 삼았는데, 지금 그 조카가 미련스럽게도 스스로 큰 죄에 빠지고 말았다. 설사 그 정상이 십분 용서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사형의 조항에 대해서는 고려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 범죄가 장오(贓汚)와 비슷하나 그 장오를 포착할 수 없다. ‘의심쩍은 죄는 가벼운 편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이런 일을 대비해서 한 말이라고 하겠다. 더구나 그를 사흘밤이나 가두어 두고 한나절 동안 으름장을 놓았으니, 이것만 해도 타인에게 적용한 매의 숫자에 따라 형장을 치고 여러 사람 앞에서 매를 때린 정도는 될 것이다.
비록 그가 오광운의 조카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와 같이 지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열 명이나 백 명을 사형에 처해도 어떻게 뒷날을 징계하고 다른 사람을 경계할 수 있겠는가. 죄인 오대익은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외딴 섬으로 귀양보내되, 날이 밝아 파루가 울리고 성문이 열리거든 즉시 내보내도록 하라. 정주 백성들이 떠드는 것은 오로지 예전(禮錢)과 잡다한 비용에 쓴 것 때문이니, 만약 일일이 추징하여 백성들에게 되돌려주지 않는다면 어찌 도에 감사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문서 중에 있는 여러 조항을 일일이 추심하여 되돌려 주도록 하라. 이를 근실하게 거행하였는지의 여부는 앞으로 어사를 파견하여 조사하겠다. 본부에서는 특별히 공문을 띄워 감사를 엄히 신칙하여 모두 수습한 후 그 사실을 장계하라고 지시하라."
하였다. 오대익을 남해(南海)로 귀양보냈다. 김이소가 다시 공초하기를,
"외람되게도 감사의 직위에 있으면서 불법의 말을 듣고도 철저히 엄단하여 조항별로 따져 처결하지 못하였으며, 백성들의 호소를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이 역시 엄히 막지 못함으로써 점차로 탐오한 관리로 하여금 이를 빙자하여 죄를 범하게 만들었으니, 엄하게 방비하지 못한 죄는 만번 죽어도 가볍습니다."
하니, 판하하기를,
"전에 발탁해 쓴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이었는가? 첫째도 그가 맡은 지역을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고 둘째도 그가 맡은 지역을 다스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법을 지키고 공사를 수행하는 일이라면 어떻게 털끝만큼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관할 고을 수령에게 이와 같이 불미한 소문이 있으면 의리상 꾸짖고 바로잡아 기어코 법을 범하지 않게끔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초 그 고을 수령이 면대하여 요청할 때에 엄히 막지 못하였고, 또 백성들이 일제히 호소할 때에도 비록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막아내지 못한 건에 대해서는 그의 공초에서도 명백히 밝히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오대익이 불법적인 행위를 한 것은 감사가 금하지 못한 소치이다. 불법을 행하도록 지시했다는 율로 곧장 처결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으나 그보다 가볍게 적용한다면 그가 감히 거부할 수 있겠는가.
또 조정에서 임용한 것과 자신의 인품으로 말한다면 과연 어느 쪽이 중하고 어느 쪽이 가벼운가. 앞의 일로 보나 뒷일로 보나 이런 사람에게 배의 율로 적용하지 않고 오대익처럼 몰지각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에게 위엄을 보이고 법을 세우고 만다면 그야말로 파리가 덤비는 데에 성내어 칼을 뽑는 격이니, 세도에 무슨 도움이 되며 다른 수령들에게 무슨 경계가 되겠는가. 어제 경연에서 아뢴 무엄한 말에 대해서는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옳으니 그르니 하는 과정에 첫 번째 공초와 두 번째 공초가 이와 같이 서로 다르니 이 또한 은혜를 저버리는 하나의 단서이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영해(嶺海)의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조치는 중한 죄를 가볍게 벌주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갇혀 있는 죄인 김이소에게 관서 지방으로 귀양보내는 벌을 시행하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과 우의정 김종수가 차자를 올려 자신들에게 벌을 내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와 같은 풍습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너무 과격한 탓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경계를 생각지 않은 채 어제 경연에서 더 잘하라고 한두 마디 말을 하였다만 이게 어찌 꼭 경들로부터 시작된 일이겠는가. 그러나 조정은 체모보다 중한 것이 없으므로 직위가 높더라도 참으로 무엄한 일이 있을 경우 그 죄로 처벌해야 하는 것이다. 추고할 때 안면을 보아서 하면 뒤에는 반드시 파면당하는 죄를 짓게 될 것이다. 이번에도 안면을 보아서 할 경우 또 점차로 자만심이 커지게 될 것이니, 공사간에 어찌 좋은 현상이겠는가. 이러한 분수에 대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경들은 그것을 허물로 여기지 말고 공무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판의금부사 이문원(李文源)이 아뢰기를,
"정주에서 향안을 수정할 때에 죄인 신점(辛漸)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맡아보았다는 사실이 오대익과 여러 죄수들의 공초에서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맨 먼저 향안을 만들자고 권한 자도 필시 이 사람일 것입니다. 백인환(白仁煥)은 그가 비록 먼 시골의 사람이기는 하나 일찍이 시종의 직을 거친 자로서 조금도 거리낌없이 불법을 자행하였으니,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밖의 여러 죄수들은 받은 뇌물의 액수가 많고 적은 것으로 그 죄의 경중을 구별해서는 안 되니, 모두 먼 섬으로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었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이미 기록한 향안은 지워버릴 수 없고 이미 흩어진 돈은 도로 징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향안을 지워버린다면 처음에 이 때문에 패가 망신(敗家亡身)한 데다가 지금 또 다시 백성을 기만하게 되고 도로 징수한다면 비록 흙 껍데기를 다 벗긴다 하더라도 다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니, 이게 어찌 매우 난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갇혀 있는 여러 사람들은 관리이건 관리가 아니건 간에 그들이 비록 이 일을 하고 싶어도 본 고을 수령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으며, 본 고을 수령이 아무리 이 짓을 하고 싶어도 감사가 허락하지 않으면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정의 형정은 감사와 수령만 처벌하면 됩니다. 하찮은 고을 사람들에게 언성을 높여가며 치죄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중에서도 반드시 억지로 등급을 나누자고 한다면 신점을 주동자라고 하는 것 또한 억측한 말에 불과하고, 일찍이 시종관을 지낸 자가 이 일에 참여하였으니, 이 사람을 죄수 중 주모자로 삼아야만 사리로 보아 구차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김종수는 아뢰기를,
"금부 당상이 신점을 주동자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앞장서서 주동한 자에게 적용할 법의 등급을 더 높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나머지는 마땅히 추종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중에도 백인환은 바로 시종신이므로 어리석은 일반인과 견주어 논할 수 없으니, 특별히 엄하게 처벌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인 돈을 찾아내 환급하는 일에 있어서는 법으로 보아 당연할 뿐 아니라 또한 사람들을 크게 징계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새 향안과 옛 향안을 없애버리는 일과 감사의 일에 대해서는 원칙에 맞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향안을 없애기로 한다면 백성의 돈을 변상하는 것은 본디 순차적인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여러 죄수들 중에 주동자와 추종자를 구별한다면 일찍이 시종직을 거친 자를 주동자로 삼아야 할 것이니, 백인환을 앞장서서 주동한 자로 율을 적용하라. 신점에 대해서는 경들을 위시한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그가 주동자라고 내가 그에게 관용을 베풀자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신수채(辛受采)가 선왕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을 내가 직접 보았다. 지금 그의 자손이 죄를 범했는데 특별히 생각해주지 않는다면 이게 어찌 《소학(小學)》에 이른바 ‘부모가 사랑하던 것을 역시 사랑한다.’는 의의이겠는가. 어제 경연에서 경연관이 비록 ‘부모가 기르던 개나 말이라면 오히려 그럴 수 있다고 하겠지만, 그 개나 말의 새끼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데 가깝다.’고 말하였으나 망설여지는 것은 생원(生員)·진사(進士)에 합격한 것은 별과에 급제한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과거에 합격한 후에 행 좌승지, 호조 참판으로 임명되어 옥관자와 큰띠의 차림으로 수레에 앉아 관청에 나오던 모습을 내가 그때 명을 받고 들어가던 길에 거리에서 보았다. 비록 오광운의 집을 대대로 용서해주는 의의와 동일하게 볼 수 없으나, 지금 그를 형추(刑推)하고 귀양보내는 것은 실로 차마 할 수 없으니 그가 살고 있는 지방으로 귀양보내라. 그리고 전 수령이 받아들인 예전(禮錢)의 절반이 거의 부역을 면제시켜주거나 빚을 갚게 하는 데 들어갔으니만큼, 그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에 있어서 그로 하여금 일을 차분히 정성껏 하여 속죄하게끔 하라. 지금 만약 탐오를 징계하기 위하여 도리어 이미 백성들에게 풀어 놓은 빚을 거두어들인다면 이에 따른 소요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이것은 오직 감사의 처결 여하에 달려 있는 것으로 조정에서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좌참찬 김화진(金華鎭)이 아뢰기를,
"지난해 조운(漕運)의 폐단을 바로잡을 때 세곡(稅穀)을 바치는 백성들의 쌓인 고통에 대해 대략 그 실상을 진술하였습니다. 그런데 재결하여 내려보낸 절목을 보니, 진영의 장수를 이력으로 쳐주는 자리로 승격시키고 조운군이 특별한 혜택을 받는 데 불과할 뿐이었고, 조운하는 각 고을 백성들의 허다한 폐단에 대해서는 거론도 되지 않았습니다. 불쌍한 저 백성들을 생각할 때 어찌 실망하며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조운의 폐단은 전적으로 사공(沙工)이 충실치 못하고 쌀값이 점점 뛰어오르는 데 있습니다.
사공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차임되려고 진 빚이 거의 수백 냥에 이르렀다면, 아래 것들이 이를 기화로 토색질한 것도 매우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공이 된 자는 세곡을 받아들일 때마다 빚을 갚고 이익을 엿보는 기회로 삼아 아전이나 향소임과 짜고서 제 마음대로 퇴짜를 놓거나 지나치게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방납(防納)하는 쌀값이 날개 돋친 듯이 점점 뛰어오릅니다. 그리고 세곡을 바치는 각 고을에서는 더러 관청에서 쓸 결미(結米)를 포구에 내놓은 세곡에서 함께 징수하면서 전적으로 값을 배로 높여 이익을 노리는 등 갖가지 폐단이 모두 여기에서 나옵니다. 만약 폐단을 바로잡으려 한다면 사공들이 차임되기를 노리는 것과 세곡의 방납에 대하여 규정을 엄하게 세워 일체 금지해야만 고질적인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흉년을 만났을 경우 배를 세내어 직접 바치는 고을에서도 전액을 돈으로 만들어 서울에 와 곡식을 사서 바치는 걱정거리도 없지 않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발견되는 대로 엄중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도에서 살펴 신칙하는 방법으로 말하면 비록 감사가 있기는 하나 반드시 조운에 대한 일을 한 사람에게 전담시켜야만 어느 정도 관심을 두고 폐단을 없애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도사(都事)가 해운(海運)을 겸하여 관장한 전례가 있으니 간혹 시종신을 각별히 골라 보내되, 한결같이 북평사(北評事)가 중국과 무역하는 일을 겸하여 관장하던 것처럼 조운을 할 때에 일일이 탐지하고 살피게 하여 법을 어기는 수령은 아뢰어 중벌로 논죄하고 농간부리는 아전은 법대로 철저히 징계하게 한다면 혹시 폐단을 바로잡는 조그마한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의 의견이 아주 좋다. 진의 장수의 품계가 올라가고 조운군이 혜택을 입는 것이 절실한 고통을 겪는 일반 백성의 폐단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더구나 간사한 행위로 인한 허다한 폐단은 모두 수령이 범한 것이므로 이와 같은 폐단을 들을 때마다 나 자신도 모르게 대신 얼굴이 붉어진다. 그들도 사대부이며 조정 관리이다. 그런데 하찮은 이끗에 군침을 흘리어 이처럼 도리에 어긋나고 파렴치한 짓을 기꺼이 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다른 사람이 듣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수령들이 그칠 줄을 안다면 하찮은 간사한 아전들이야 그 사이에 낄 것이 있겠는가. 백성들에게 유익하게 하고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은 오직 묘당에 달려 있다. 훗날 차대 때 정확히 품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정민시(鄭民始)를 호조 판서로 삼았다.
수어청이 사강절목(射講節目)을 올렸다. 앞서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각 군영에서의 활쏘기 모임은 그 이름과 실지가 서로 걸맞지 않아 점차 놀이나 하는 일처럼 되어가고 있는데, 각 군영 장관들의 활쏘기 기능이 향상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후로는 매월 두 차례 활쏘기를 할 경우에는 한 번은 전에 하던 대로 천으로 만든 과녁에 쏘게 하고, 한 번은 유엽전(柳葉箭)으로 가죽 과녁에 쏘게 하라. 그리고 한달에 한 번만 할 경우에는 지난달에 천으로 만든 과녁을 쏘았다면 이번달에는 가죽 과녁을 쏘게 함으로써 서로 번갈아 시험을 보이게 하라. 이와 같이 한다면 상벌 또한 마땅히 천으로 만든 과녁을 쏘는 것과 차이를 두어야 할 것이다. 각 군영과 상의하여 하나로 결정지어 초기를 올리라. 천으로 만든 과녁의 길이와 너비로 말하더라도 군영마다 각각 다르다. 일찍이 들은 바로는 수어영이 가장 크다고 하니, 각 군영의 장수들이 상의해서 그중에서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게 만든 것을 가져다가 그 척도를 제정하여 각 군영이 균일하게 한 다음 감히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별군직청(別軍職廳)과 선전 관청(宣傳官廳)에서도 활쏘기 모임을 할 때에는 모두 이 규정을 적용하라."
하자, 수어청이 아뢰기를,
"전하의 하교에 의하여 각 군영의 장수들과 상의하고 각 군영의 활쏘기 시험보이는 규례를 상고하여 토의를 결정지었습니다. 천으로 만든 과녁의 규격은 훈련 도감의 것이 바로 옛날의 규격이므로 그 크기에 의해 일정한 규정을 삼고, 상벌의 절목도 함께 만들어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연한이 찬 당하관으로서 기한이 없이 참가시키는 것은 너무도 의의가 없다. 만약 강태공(姜太公)이 오늘날까지 살아있다고 한다면 우리 나라에서 강받기와 활쏘기를 면제받을 때가 없을 것이다. 이후로는 60세 이상은 강받기를 면제하고, 활쏘기는 저번에 어장(御將)의 활쏘는 재주를 보니 70세 노인도 견디어낼 만하였다. 이것은 이전대로 하되 포상만 논하고 벌은 논하지 말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절목을 올려 시행하였다.
4월 17일 정묘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서 전경 무신(專經武臣)의 활쏘기 시험을 행하였다. 이날 활쏘기 시험에 참가한 무신으로서 화살 4대도 채 과녁을 맞히지 못한 사람이 많아 상이 병조 판서 이갑(李𡊠)에게 명하여 그들의 죄를 곤장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이갑이 아뢰기를,
"무관이란 이름을 띤 사람이 유엽전(柳葉箭)을 열 번이나 쏘아 4대도 맞히지 못하였으니, 이와 같은 무신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전후에 걸쳐 신칙한 것이 어떠하였는데 그들은 두려워할 줄도 모릅니까. 평소 전연 활을 잡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니 해괴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대개 당하관들에게 삭시사(朔試射)의 법을 실시한 것은 실로 그들을 권장하고 징계하는 조정의 정사에서 나온 것인데, 계묘년간에 신이 본조에 있을 때 한 차례 시행하고 그 뒤에 이내 폐지하였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입니다. 지금부터 공명한 옛법을 계속 시행하여 무신 당하관의 삭시사를 규례대로 실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인재가 옛날 사람만 못하긴 하나 오랫동안 내버려두었던 나머지 인재를 놓쳐버린 경우가 필시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사로운 인정이 앞서는 때에 이른바 옛날대로 회복하여 정해 놓은 규례를 그들이 제대로 준수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오래된 규례집을 보았는데, 무신 당상관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일 때 점수가 없는 자는 파면하고, 1점에서 3점까지는 무겁게 추고하게 되어 있었다. 지금도 이 전례를 모방하여 당하관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일 때 점수가 없는 자만 파면시키고 그밖에 4대도 못맞힌 자는 곤장을 치든지, 혹은 능마아청(能麽兒廳)에서 병서를 강받을 때 세번 통과하지 못할 경우에 적용하는 전례에 의하여 분기별로 주는 녹봉을 거르게 함이 좋겠다. 이는 무예를 성취시키는 데 관계된 일이니, 대신 및 무장들에게 물은 후 그들의 의견 끝에 경의 의사를 첨부하여 논리적으로 초기(草記)하여 그것을 일정한 규정으로 만들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하교에 의해 대신과 수의하고 무장들에게 물었더니, 좌의정 채제공은 말하기를 ‘명색이 무관으로서 삭시사의 규례에 화살이 모두 50대인데 그중 4대도 맞히지 못한 자는 무관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도태시킨들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벼슬길과 일신상의 생계로 보아 특별히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병조 판서가 삭시사를 법대로 시행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하교를 받고 보니, 당상관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이던 오랜 전례를 인용하면서 조금씩 차등을 두어 벌칙을 시행하고자 하는데 이는 변통하는 법도에 해될 것이 없습니다. 점수가 없는 자는 도태시키지 않을 수 없지만 그밖의 화살 두 대, 세 대를 맞힌 자에 대해서는 벌칙으로 곤장 다섯 대로 그치게 하면 조정으로서는 충분히 권면하고 징계하는 정사가 되고, 그들에게 있어서도 필시 연습할 방도를 생각하게 될 것이니, 이렇게 제도를 정하는 것은 실로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또 생각건대 화살이 목표에 이르는 것은 힘인데, 사람이 늙으면 힘은 쇠하기 마련입니다. 문신이 경서를 강하거나 제술하는 데도 또한 연령의 제한이 있는데 어찌 무신에게만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하 무관의 삭시사를 60세로 제한하고 61세부터 특별히 면제한다면 그것은 한 번 당기고 한 번 늦추는 절충의 방법에도 적절할 것 같습니다.’ 하고, 우의정 김종수는 말하기를 ‘인재는 비록 옛날만 못하다 하더라도 화살수를 규정한 것은 본래 가혹하고 높은 것은 아니고 옛법을 고친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전하의 뜻이 실로 여러해 동안 오래도록 폐지한 끝에 무신의 재주가 떨어져가는 안타까운 점을 염려하신다면, 우선 세 번, 혹은 다섯 번에 한하여 점수가 없는 자를 도태시키는 전례를 임시 방편으로 시행하는 것도 혹시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고, 어영 대장 이주국(李柱國)은 말하기를 ‘명색이 무신으로 화살 네 대도 맞히지 못한다면 그를 장차 무엇에 쓰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달마다 실시하여 네 대도 맞히지 못하는 자는 옛법대로 시행하고, 연로한 사람인 경우에는 근력이 이미 쇠약해졌기 때문에 연소한 사람들과 같이 요구할 수 없으며, 60세 이상인 사람에 대해서는 당상관의 삭시사의 규례에 의하여 연만(年滿)으로 주석을 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는 말하기를 ‘무신 당하관의 삭시사를 근래에 와서 일체 폐지함으로써 나이 젊은 무신들이 전연 활쏘기를 익히지 않으니, 네 대의 화살을 맞히지 못한 자를 의법 처단한다면 아마 활쏘기 연습에 힘쓰도록 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인재가 옛날만 못하다 해서 점수가 없는 자만 도태시키고 곤장을 치며 분기의 봉록을 거르는 등의 방법을 참작하여 되도록 경하게 처리한다면 무예를 권장하고 경계하도록 책하기 어려울 것이며, 옛날 제도 역시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총융사(摠戎使) 이한풍(李漢豊)은 말하기를 ‘무신 당하관의 삭시사는 원래 나이를 제한하는 규정이 없으니 당상관의 삭시사에 비추어볼 때 규정을 정한 것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네 대를 맞히지 못한 자를 처벌하는 것은 이미 바꿀 수 없는 전례인데, 지금 당상관 삭시사의 오래된 전례를 적용하여 점수가 없는 자만 도태시킨다면 무예 연습을 중지한 이때를 당하여 더욱더 해이해질 염려가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대신과 무장들의 의견이 간혹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요즈음 무사들이 출신한 후 활쏘기와 말타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혹시 전하가 직접 시험을 보일 때에도 낙제하는 자가 수두룩합니다. 조정에서 특별히 불쌍히 여기는 의도로 항상 융통성있는 정사를 실시해왔으나, 그들은 오히려 감사한 줄은 모르고 더욱 나태한 버릇을 제멋대로 부리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옛법을 다시 밝혀 매달 삭시사를 시행하고 네 대도 맞히지 못하는 자는 규례에 의해 도태시켜 징계하고 두려워할 줄 알게 하는 동시에 성과를 이룰 것을 책한다면 아마 사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성상께서 재량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당하관의 삭시사(朔試射)를 매월 실시하여 옛날 제도를 회복하려면 편리하고 실행하기 쉬운 규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어찌 화살 네 대를 맞히지 못한 자를 도태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무예를 익히는 데 지장이 되겠는가. 곤장을 치는 것 또한 충분히 부끄럽다는 것을 알아 조심할 것이다. 연로한 사람에 있어서는 더욱 불쌍히 여겨야 한다. 이만 못한 각 군영의 활쏘기 모임에도 특별한 하교에 따라 오히려 나이 제한을 하고 있는데 더구나 관직을 지닌 자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여러 사람의 의논이 비록 일치하지는 않으나 이로 인하여 중지할 필요는 없다.
이제부터 삭시사를 시행하되, 삼복 더위를 제외하고는 옛 규례를 회복하여 달마다 실시하라. 날짜는 매월 10일 전에 편리한 대로 시행하되, 하루 전에 단자(單子)를 올려 허락을 받도록 하라. 그리고 규칙은, 유엽전을 일곱 차례만 쏘는 것은 너무 적으니, 편전(片箭)으로 두 차례 쏘는 중에서 한 차례는 유엽전으로 쏘게끔 하라. 논죄에 있어서는, 점수가 없는 자와 계속 세 차례를 쏘았으나 네 대도 맞히지 못한 자는 도태하고, 첫 번째, 두 번째 쏴서 네 대도 맞히지 못한 자는 그 시험장에서 시험이 끝난 다음 여러 무관들이 보는 앞에서 곤장을 치도록 하라. 연한은, 60세 이상인 자는 특별히 활쏘기를 면제해 주는 것으로 규정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수원부(水原府)의 삼색군(三色軍)에게 급료를 주는 것은 곧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할 때 호위를 시키기 위한 것이다. 비록 행차할 때가 아니더라도 관청문 앞에 줄곧 서있는 군사에게 주는 급료를 대동미(大同米)에서 지출하는 것은 오랜 전례와 가까운 전례가 많다. 더구나 어부미(漁夫米)를 바치게 하는 것은 수원 백성들에게는 몹시 고통스러운 폐단인데 한 포대의 용량이 수십 두를 넘으니 지금에 와서 그 어깨의 짐을 벗겨 주게 된다면 어찌 수원 백성들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매년 바치는 어부미를 전부 급료로 주는 몫에 넘기고 부족한 숫자는 대동미에서 떼어놓음으로써 3백 섬의 수량을 채울 수 있다. 이와 같이 한 뒤에 만약 사옹원(司饔院)에서 침해하는 폐단을 모조리 없애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거양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각별히 신칙하라. 본부의 사체가 어찌 통제사(統制使) 군영의 요새지에다 할 수 있겠는가. 저기에는 시행하라고 허락한 전례가 있는데 더구나 본부이겠는가. 본부에서 바치는 어염세(魚鹽稅)를 특별히 본부에 이관시켜서 군사들에게 주는 급료에 보탬이 되게 하라."
수찬(修撰) 성종인(成種仁)이 상소하였다.
"사신 일행이 말을 세내는 것은 건량(乾糧)을 실어가기 위한 것인데 그 수가 82필이고 말 한 마리에 각각 말을 모는 사람이 딸리게 되니 그 수도 같습니다. 사신 행차가 있을 때마다 의주부(義州府)에서 사람과 말을 마련하도록 요구하는데 말 한마리의 값은 22냥이고, 왕복에 소요되는 여비도 의주부에서 은자를 내어주는데 말 한 마리와 사람 하나에 소요되는 돈은 12냥 6전입니다. 말을 모는 사람들로 말하면 모두가 일정한 거주가 없이 법을 무시하고 어지러움을 틈타 이끗을 취하는 무리입니다. 봄과 여름이 교체될 무렵에 말값을 미리 받는데 그것을 내어줄 때에는 절반이 농간부리는 아전에게로 들어가고 받아간 뒤에는 모두 사적으로 써버리는 것입니다. 급기야 사신 일행이 의주부에 도착하는 날에는 혹은 인척의 말을 빼앗기도 하고 혹은 다른 사람의 말을 속여서 가지기도 하여 그 숫자를 채우곤 하는데, 절반 이상이 비루먹고 병들어서 짐바리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심양(瀋陽)에 도착하기 전에 거의 다 쓰러지므로 끝내는 수레와 나귀를 세내어 간신히 운반해가곤 하니, 그 낭패한 모습이 말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말을 모는 사람들은 왕복할 여비를 국경도 넘기 전에 다 써버리고 점포에 들 때마다 도둑질을 일삼으며 북경에 도착해서는 꾸어쓸 생각만 합니다. 결국 돌아올 때에는 방세도 내지 못하여 미리 도망쳐서 오곤 하므로 찾아와 호소하는 저 나라 사람들이 꼬리를 물게 됩니다. 엄히 단속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변상을 요구할 방책이 없습니다. 부득이 비상시에 쓸 은자를 꿔주어도 80여 명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2, 3냥에 불과하고 보니 겨우 일시적 급한 대목이나 메꾸고는 또 다시 전과 같습니다. 나라 망신치고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개 이들이 매년 북경에 가게 되는데 대관(大官)쯤은 아예 무서워하지도 않고 장사하는 호인들을 서슴없이 때리고 욕질하니 나라를 욕되게 하고 사단을 일으킬 것은 필연의 사세입니다. 급기야 의주에 돌아와서 꿔주었던 은자를 독촉하여 징수하면 대개 모두 친족들에게 물리게 되니 실로 의주 백성들의 큰 고통거리입니다.
지금 이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말값의 돈과 여비의 은자를 가지고 그 나라에서 세내어 쓰게 되면 수레를 빌리는 값은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말하기를 전적으로 수레를 세내어 쓴다면 수레세가 해마다 오를 것이라고 하는데, 그 나라 연도와 객관에서 유숙할 때 80여 명의 식량과 80마리의 말먹이에 대한 비용도 매우 방대합니다. 지금 만약 우리측에서 그 비용을 공제해주기로 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편리하게 여길 것입니다. 이 기회에 예부(禮部)에 공문을 띄워 그들의 통행하는 수레삯을 일정한 규례로 만들어 놓게 되면 그들은 필시 즐겨 받아들이고 흔쾌히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통역관들의 이문이 없게 되는 것 또한 인원이 많은데 기인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8포대라는 수량은 본래 채우기 어렵거니와 일행에 따라가는 인원은 거의 30명에 가까우며, 이밖에도 또 신의 군관(軍官) 및 의관(醫官), 화원(畵員), 사자관(寫字官), 의주 군관(義州軍官) 등이 있는데, 이들에게도 으레 모두 포대가 있습니다. 사람은 많고 포대는 적고 보니 군색하기란 형편상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경에서 선물을 받을 때 그 선물을 받는 정식 관리는 30명 밖에 안됩니다. 선물은 제한되어 있는데 이것을 골고루 분배하니 어찌 그 걸음으로 인해 이득을 보리라고 바랄 수 있겠습니까.
사신을 파견하는 일로 말하면 통역을 맡은 두서너 사람 이외에는 모두 꼭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 사신은 수종인이 극히 적은데 유독 우리 나라만이 3백여 명이나 되어 소란을 피우게 됩니다. 긴요하지 않은 인원은 모두 줄여버리고 통역과 응당 가야 할 인원만으로 되도록 간략하게 배정하여 30명을 넘지 않게 할 것이며, 이밖의 사람들에게는 포대를 나누어 주지 않게 하면 아마 폐단을 바로잡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도 항상 원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국경 내에서 이미 역마와 음식물을 제공하는 폐단을 줄인 이상 그 나라에서도 식량을 대주고 말먹이를 공급하는 비용을 덜어주는 것은 그것이 하찮은 일이긴 하나 실로 적합한 조치에 관련됩니다. 빨리 재량하여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북경으로 갈 때의 말에 대한 폐단과 사신을 수행하는 인원수에 관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이번 사신 행차를 계기로 좋은 의견을 들어 초기하여 품의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가 장계를 올리기를,
"강계(江界) 고을은 궁벽한 변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근래에 이 고을 수령은 하나도 잘하는 일이 없는 데다가 작년에 또 흉년까지 만나 백성들의 형세는 황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런데 전 부사 김정우(金廷遇)가 부임하자 인삼과 초피(貂皮)의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쳤고 오랜 병으로 인하여 행정을 아전들에게 내맡겼는데 지난해 환자를 받아들일 때에는 온갖 협잡이 다 드러났습니다. 이런 때에 후임으로 온 사람은 전철을 답습하지 말고 성의껏 백성을 돌보아야만 민심을 진정시키고 민생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인데, 현임 부사 안정현(安廷玹)은 이전 사람 같은 나쁜 정사는 없으나 모든 일을 진작시키는 새로운 효과는 볼 수 없습니다. 창고의 농간질을 먼저 살피고 금지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의 말썽이 자주 터져나오는데도 그대로 덮어두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자신이 처결해 주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면임(面任)들에게 명령하여 처결하게 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환자를 받을 때 곡식 대신 돈을 받아서 보관하고 또 소금과 도토리를 섞어 받은 죄는 전임 수령에게 있다 하겠지만, 봄 환자를 방출할 때 소금과 도토리를 먼저 나누어줌으로써 민심을 거슬렸고, 그 후에도 두차례나 연거푸 순전히 돈으로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고을은 사면이 다 막힌 지대이므로 곡식을 무역해 들여올 길은 전혀 없습니다. 환자를 받은 백성들이 돈을 가지고 길가에서 웅성거리고 있다고 하기에 신이 벽동(碧潼)의 곡식 2천 섬을 시급히 육로로 실어나르게 하였습니다. 기근을 구제하는 정사로 말하더라도 굶주리는 백성들을 뽑아 보고하는 과정에서 빠뜨리거나 터무니없이 적어넣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죽을 쑤어 먹이는 것으로는 굶주림을 구제할 수 없고 양식을 나누어 주면 절반이 빈쭉정이입니다. 앞으로 폐단을 바로잡고 백성을 살려내는 일을 이 사람에게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부사 안정현을 파직하고 그 죄상은 유사로 하여금 품의 조처하게 하소서. 강계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것은 인삼에 관한 정사에 있는 것만은 아니고 고을 수령의 탐욕과 횡포가 실로 초서(貂鼠)에 있으니, 반드시 청렴 결백하고 강직하여 인삼과 초피를 탐내지 않는 사람을 얻은 후에야 강계 백성을 소생시킬 수 있고 고을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각별히 선택하여 내려보내게 하소서.
전 위원 군수(渭原郡守) 유증만(柳增萬)은, 앞서 고을 백성이 관청 뜰에서 칼을 빼든 일이 있었는데, 이는 실로 더없이 큰 괴변으로서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은 그에게서 기인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2백 결의 표재(俵災)가 애당초 1파(把), 1속(束)도 백성들에게 미친 것이 없고 부역을 면제하는 데 썼다고 말하고는 몽땅 자기 사복을 채웠습니다. 아랫사람들의 급료를 긁어내어 관가의 경비에 보태었으며, 창감(倉監)이 뇌물을 많이 받은 후환은 환자를 바치는 백성들에게 미쳤습니다. 기타 좁쌀로 백미를 맞바꾼 일이라든가, 호미농사의 토지까지 일반 비율로 조세를 받은 것은 모두 법을 어기고 원망을 초래한 원인입니다. 그중에서도 재결(災結)을 사사로이 써버린 것은 그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습니다. 유증만의 범죄 사실을 유사로 하여금 엄격히 신문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특별히 평안 감사를 맡겨준 지도 벌써 달포가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하루의 책임이라도 말막음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싶다. 일전에 정주 사건에 대하여 대간의 아룀이 있을 줄 알았는데 경이 이때에 먼저 발의하였고, 강계(江界)에 대하여 조항별로 거론한 것은 다른 사람의 의사보다 좀 낫다. 이미 죽은 자는 꼬집어 말할 필요가 없겠으나 장계에 이러저러한 말은 실로 문제 밖의 일이 아니다. 새 수령이 이처럼 잘못 다스려서 스스로 은혜를 저버리는 죄과에 빠졌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종성(鍾城)에서의 치적이 크게 홍주(洪州)에 미치지 못했고 태만하고 소홀히 한 태도가 이미 드러났으나 앞날을 두고 보기 위하여 결정하여 내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경연 석상에서 어렵게 망설이면서 내린 하교를 그에게 알렸으니 그는 필시 얻어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거의 죽게 된 강계 백성에게 불과 물 속에 든 사람을 구제하듯이 하는 다급한 정사를 시행하려 하지 않고 있으니, 이 어찌 어진 사람의 마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을 오직 직무에 충실치 못한 데 대한 율문으로만 다스릴 수 없다. 본 고을 부사 안정현(安廷玹)은 파직하고 나문하는 것만으로는 경하니, 1년 동안 금고의 형을 시행하라. 정관(政官)을 불러 선발하는 모임을 열고 후임을 특별히 골라 차임함으로써 강계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내지 않을 수 없다. 장계에서 요청한 대로 인삼과 초피를 탐내지 않는 자를 특례로 추천하도록 이미 특별한 하교가 있었으니, 음관(蔭官)이나 당하관(堂下官)이라 하더라도 구애받지 말라.
위원(渭原)에 대한 일은 경이 이미 본도에 감사로 있으니 그 자세히 아는 것이 서울 사람과는 다를 것인데, 이번에 거론하여 단안을 내린 것은 그만둘 만한 것을 그만두지 않은 것이나 아닌가. 그 고을 백성이 칼부림을 하는 변고가 일어나게 한 것은 그 까닭이 없지 않다고 한 말은 경의 말이 옳다. 여러 가지 밉살스럽고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우선 거론하지 않더라도, 작년 같은 흉년에 본 고을 수백 결의 표재(俵災)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굶주린 위원 백성들의 입에 풀칠을 할 물건이었는데 이것마저 손을 대어 자기 사복을 채웠으니, 삶아 죽이는 처벌을 벗어나기 어렵다. 더구나 수백 결이나 되는 중에서 백성들에게는 1파(把)나 반 속(束)도 돌아가지 않았으니 이처럼 완악하고 탐욕스러운 것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와 같이 먼 지방에 있는 자로서 만약 특별히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유가 없고서야 감사도 감히 범할 수 없는 것을 일개 수령이 어찌 이처럼 무난히 저지를 수 있겠는가. 대개 ‘탐오를 징계한다.[懲貪]’는 두 글자는 곧 조정에서 고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범죄는 같아도 정상이 다른 경우에는 으레 구별이 있는 법인데, 그가 저지른 죄는 한 마디로 말해서 죽여도 아깝지 않다. 유증만(柳增萬)을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엄히 가둔 다음 보다 엄하게 고문하여 정직한 공술을 받아 계문하게 하라. 만일 자백하지 않을 경우 그가 감히 살아서 옥문을 나가기를 바라겠는가. 판금오(判金吾) 이하는 이것을 알고 있으라. 또 곧바로 평안 감사에게 회유(回諭)하되, 해당 고을에 이 회유를 베껴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알리고 재해지의 결전 및 불법으로 거두어들인 물건을 일일이 추징하여 민간에 도로 돌려주게 하라.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빠뜨린 것이 있어 별도로 파견한 어사에게 발각되면 경부터 먼저 그곳에 귀양보내는 처벌을 받을 것이니, 명심하고 거행하여 먼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에 법률이 있고 기강이 있음을 알게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유증만이 공술하기를 ‘무신년 6월에 평안도의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자 곧이어 흉년을 만났습니다. 재해지 2백 20결을 보고한 결과 과연 그 숫자대로 전부 승인되었습니다. 재해에 의해 조세를 감해줄 때에는 환자를 바치는 3천 4백여 호에 대해 매호 5되씩 감해주어야 하겠으나, 경주인(京主人), 감영 주인(監營主人), 병영 주인(兵營主人)에게 주는 신역값을 매년 환자를 바치는 민호 중에서 내게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자원에 따라 이것을 제하고 주었습니다. 아전의 말을 잘못 들음으로써 끝내는 1파나 1속도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중 10여 결은 전례에 의해 도서원(都書員)에 떼어주고, 30여 결은 역시 전례에 의해 관둔전(官屯田)의 재결(災結)로 감하였습니다. 기유년의 재결에 대해서는 감영에서 삭감하고 60결만 떼어 받았는데, 10월에 교체되어 돌아왔기 때문에 미처 재해지의 조세를 감해주지 못하였습니다. 아랫사람들의 급료를 깎아냈다는 일은 공장인(工匠人)들과 향소임(鄕所任)들의 급료를 줄여서 사노(寺奴)의 백징(白徵)을 보충하려 하였으나 원성이 일어나는 바람에 즉시 중지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뇌물을 받았다는 일은 창감(倉監)을 차출할 때 한결같이 향인의 추천에 따랐을 뿐 애초부터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또 백미와 좁쌀을 맞바꾸었다는 일은 곧 본 고을의 전례인데, 풍년에는 좁쌀 2석 반으로 백미 1석을 바꾸고 흉년에는 2석으로 1석을 바꾸게 되어 있습니다. 작년에는 좁쌀값이 올라서 백성들이 모두 받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2석의 좁쌀로 백미 1석을 바꾸었습니다. 도에서 올린 장계 중에 서로 맞바꾸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애당초 그런 일이 없었고, 호미농사의 조세를 전년 조세의 총 수량에 준하게 한 일에 대해서는 강변의 화전이 모두 산전(山田)이기 때문에 호미농사가 절반이 넘어서 구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한결같이 각 고을의 공통적인 준례에 따라 하는 수 없이 전년 조세의 총 수량에 의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어리석어 잘못 처리한 죄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이 2백 결의 표재(俵災)가 백성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모두 사복을 채웠음이 모조리 드러나 스스로 변명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전하의 처결을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이기에 감히 특별한 전교로 엄히 신문하는 자리에서 교묘히 꾸며대고 농간을 부린단 말인가. 이른바 자복이란 것이 모두가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었다. 두려움도 없고 겁내지도 않는 이런 완악한 자를 즉시 그에 상당하는 법으로 시원히 처결하여 이를 갈고 손가락질하는 위원 백성들의 원한에 사죄하지 않는다면 어찌 조정에 조세를 균등하게 하는 법이 있다 할 수 있겠는가.
본 고을 1천여 결의 토지 가운데 총 2백여 결의 조세를 면제해준 것은 많고도 후하다 할 수 있다. 만약 실지대로 재해를 입은 민결(民結)에 미치게 하였다면 얼마간의 목숨을 구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먹을 것을 찾아 울부짖는 저 불쌍한 사람들이 먹여주기를 바라는 것이 여기에 있었던 것인데, 자신이 목민관이 되어 어찌 차마 1파나 1속인들 손을 댈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가 떨어진 옷을 깁듯이 꾸며대며 변명하여도 백성들에게 전혀 재결의 혜택이 미치지 못하게 한 일은 숨길 수가 없다. 설사 그의 말과 같이 참으로 저리(邸吏)에게 방납해 주었다 하더라도 그 명목이 각각 다를 뿐 아니라 그 사이에는 으레 어떤 간교한 내막이 있었을 것이다. 대개 토색질하는 잔학한 방법으로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사복을 채우는 것이 비록 그의 재간이기는 하나, 명목이 재결을 떼어주는 것에 있어서 조정의 금령이 지극히 엄한데 이처럼 기탄이 없으니, 어찌 그 소이연이 없겠는가. 이런 처지에서야 제 아무리 법망을 피하여 목숨을 보존하고자 한들 그리될 수 있겠는가.
이밖에 창감에게 뇌물을 받은 사실, 곡식을 돈으로 바꾸어 만든 일, 호미농사에 세를 매긴 일들은 재결을 훔쳐먹은 행위에 비하면 오히려 하찮은 일에 속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백성들의 재물이요 관청의 곡식이니만큼 그 내막을 조사하여 밝히는 것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의 크고 작은 범죄는 손가락으로 이루다 꼽을 수 없는데 감사가 나약하여 만분의 일도 거론하지 못하였다. 어사를 특별히 파견하여 다시 샅샅이 조사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에 밝혀져 보고된 몇 가지 사건으로 말하더라도 충분히 법안으로 처리할 대상이 된다. 그 밖의 사건들은 일일이 따지지 않더라도 이것으로 보나 저것으로 보나 그가 죽느냐 사느냐에 대해 결판난 지는 이미 오래다. 이러한 처지에 와서 그의 변명은 자신에게 해가 있을 뿐 이익은 없다. 하루 동안에 두 번씩 형장을 치는 것은 법률에 없는 일이니 고문 기한이 차기를 기다리며 규정된 날짜에 형장을 쳐서 기어이 격식대로 다짐을 받아야 하니 다시 위세를 펼쳐 엄하게 신문하여 아뢰라."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에게 하유하기를,
"유증만(柳增萬)이 위원에서 탐욕을 부리고 패려한 짓을 한 죄악은 어찌 용서없이 죽이고만 말 뿐이겠는가. 근래에 비록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하나 저와 같이 하찮은 무관이 불법을 자행하여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쳤으니, 위원 백성들이 과연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경은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이제서야 겨우 계문하였는데도 이른바 장계의 내용은 긴밀한 것 같기도 하고 허술한 것 같기도 하여 엄격하고 명확한 내용이 없다. 유증만을 무슨 아낄 가치가 있어 이처럼 완만히 하는가. 여기에서 더욱 남모르는 중에 그의 권력이 경향(京鄕)에 널리 뻗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증만이 제 마음대로 행동하여 범하지 않은 일이 없고 탐욕을 부리지 않은 곳이 없는데 지금 일일이 찾아내 백성들에게 돌려주라는 조정의 명령이 있었으니, 그것이 재해지에 대한 것이건 제반 범행이건 막론하고 우선 그가 공술한 내용과 경의 장계 내용에 따라 기한을 정해 찾아내 돌려주게 하라. 그러나 현임 수령 역시 무관이므로 인수 인계의 안면 관계에 구애되어 받지 않은 것을 받았다 하기도 하고 주지 않은 것을 주었다 하기도 한다면 해당 고을 수령을 의금부에 잡아다가 엄하게 형장을 쳐서 진상을 밝혀내는 일은 결코 그만둘 수 없다. 경은 이미 받아냈거나 돌려준 실태의 보고가 올라온 후 감영의 비장을 별도로 보내 그의 입회하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되, 관청에 넘길 만한 것은 해당 고을에 회부하여 그대로 기근을 구제하는 밑천으로 삼게 하라.
유증만은 이제 사형수가 되었는데 나약하고 주저하는 병통이 있는 경인들 무엇을 그리 재는가. 그의 친척이나 아객(衙客)을 막론하고 감영의 옥에 단단히 가두고 성화같이 닥달하여 받아낼 것이며, 규정된 날짜에 고문하는 것 또한 다른 경우에 비추어 거행하여 규율이 점차 펼쳐지고 탐하는 습속이 조금이나마 가셔지게 하라. 그리고 경이 장계한 내용 외에 미처 밝혀내지 못한 허다한 사단은 특례로 엄하게 조사해 밝혀서 장계하라. 유증만은 지금 격식을 갖추어 가두어 두고서 계속 엄한 형장을 가하여 기어코 낱낱이 자복하게 할 생각인데 만약 죄수의 공초에서 실토한 일이 도의 장계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어찌 평안도에 감사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뜻을 명심하여 알고 있으라.
탐욕을 징계하기 위하여 내린 전교와 유증만의 공초 내용에 대해 전후에 걸쳐 판하(判下)한 것을 하나의 책자로 만들어 큰 글씨로 쓰고 인장을 찍어 도내의 각 고을에 나누어 주어 각자가 항상 읽어보고 과오를 고칠 줄 알게 하라.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것은 유독 수령의 부정에 있을 뿐만 아니다. 변방 장수에 있어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본도의 경우는 초피와 인삼이 생산됨으로 인하여 토졸(土卒)과 진영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게 되니, 더욱 가긍한 일이다. 관하 여러 진영에 엄격히 신칙하고 이어 병사(兵使)로 하여금 또한 불법을 자행하는 부류를 염탐하여 큰 죄는 장계로 보고하고 작은 죄는 잡아다가 엄히 곤장을 침으로써 기어코 징계하는 실효가 있도록 하라."
하고, 이어 여러 도 관찰사에게 하유하기를,
"평안도에서 마침 사건이 생긴 것과 관련하여 죄에 저촉되는 고을 수령이 꼬리를 물고 있다. 남도의 고을에서는 입본(立本)하는 폐단이 평안도에서 향안을 팔아먹는 것보다 심하다. 이밖에도 부정한 명목으로 사리에 어긋나는 토색질을 하는 것이 어찌 유독 서도만 그러하겠는가. 그러나 즉시 적발하지 않고 있다. 조정에서 먼저 밝혀 알게 된다면 이러한 감사들이야 어찌 엄한 처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어사는 자기의 행색을 감추기가 극히 어려워서 여러 고을의 웃음거리가 되곤 한다. 요즈음에는 다 몰래 갔다가 몰래 와서 조정에 돌아온 후에 비로소 서계하게 하며 혹은 서계마저 제출하지 않게 한다. 오늘날에 수령이 된 자가 비록 방심하고자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를 공포하여 알리지 않는다면 백성들을 속이는 것과 다름 없으므로 이처럼 하유하는 것이니, 경들은 명심하고 각각 관하 여러 고을에 알리라."
하였다.
조경(趙瓊)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학원(李學源)을 불러 접견하였는데, 이학원은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의 아우이다. 음관(蔭官)으로 발탁하여 임명하고 상이 이르기를,
"나는 그대를 근래의 음관들 중에 가장 훌륭하다고 보아 특별히 발탁하였다. 다스리는 방법은 위엄이 있어야 하는데, 그 위엄이란 청렴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모름지기 사방으로 흩어져간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 다시 모여와서 뚜렷이 면목을 달리한 연후에 비로소 맡겨준 뜻에 부합될 것이다."
하였다.
4월 18일 무진
대구부(大邱府)에 귀양보냈던 죄인 김상집(金尙集)과 김광묵(金光默)을 방면하였다.
4월 20일 경오
응교 유문양(柳文養)이 상소하기를,
"신은 탐오를 범한 죄인 오대익(吳大益)을 정배하라는 명에 대하여 너무도 개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근래에 청렴 결백한 관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볼 수 없고 탐욕이 유행한다고는 하나 어찌 오대익처럼 거침없이 탐욕을 부려 서도 백성들의 골수에 사무치는 원수가 된 자가 있겠습니까. 나라의 금령을 무시하고 향안을 만든다는 핑계로 예전을 강제로 징수한 것이 6만여 냥의 거액에 달하였으며 허위 명목만 늘어놓고 몽땅 제 주머니를 채웠습니다. 1대의 형장도 치기 전에 낱낱이 자백하였으니, 의당 삶아 죽이는 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전하께서는 그가 훌륭한 숙부의 조카라 해서 섬으로 귀양보내는 경한 벌로 조치하였습니다. 사형에 처하는 벌칙을 이런 자에게 시행하지 않는다면 탐욕을 부리는 사람과 부정을 일삼는 수령을 무엇으로 징계하며 두렵게 하겠습니까. 정배의 명령을 속히 거두고 사형을 시행하기 바랍니다.
오늘날 대신(臺臣)들은 형정(刑政)이 잘못되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항의하여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찌 이렇게까지 함묵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양사(兩司)의 제신들에게 모두 파직의 벌칙을 적용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장령 고응관(高應觀)이 헌부에 나와 공무를 본 것은 어떠한 변괴입니까. 그가 대간에 추천된 것이 합당치 못하다 하여 그 잘못을 지적하는 의견이 후반(候班)026) 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준엄히 발표되었으며, 전관(銓官)들이 이 일로 인하여 인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미천하고 무식하다 하더라도 직책은 곧 깨끗한 조정의 이목인 대간인만큼 의당 자존심을 죽이면서 자정(自靖)할 도리를 생각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거짓 모르는 체하고 헌부의 청사로 들어갔습니다. 사대부다운 처신을 그런 무리에게 요구할 수는 없으나 조관들에게 수치를 끼친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신은 장령 고응관을 체직하여 대간의 선발을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오대익의 일에 대해서는 유독 대대로 용서해주는 의리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그의 범죄는 오로지 지각이 없는 데서 기인한 것이고 법전을 상고해 보아도 장물을 관청에 귀속시킨 자는 사형에서 면제할 것을 허락한다고 하였다. 그간에 소비한 것을 이미 일일이 당사자들에게 돌릴 것을 명하였으니 이것이 관청에 귀속시킨 것이 아닌가. 참작해서 처리한 일은 곧 짐작한 것이 있어서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양사의 관리를 파직하자는 일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일에 대해 대간으로서 일단 의사를 세워 쟁집하는 것은 고례로 보아 무방한 일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살옥(殺獄)도 참작하여 처결하는 입장이니 이 법이 폐지된 지도 벌써 오래다. 이 어찌 공무를 집행한 대간의 잘못일 뿐이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고응관의 일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으니, 그대가 경연에 들어오는 때를 기다려 의당 물어보겠다."
하였다.
정창성(鄭昌聖)에게 극변으로 귀양보내는 형벌을 추가하여 삭주부(朔州府)로 귀양보냈으니, 이는 정창성의 막비 윤창문(尹昌文)과 김남초(金南楚)가 칙사 접대비 10만여 냥을 멋대로 주물러 남은 돈에 손을 댄 것이 1만여 냥이었는데 평안 감사 심이지가 적발하여 계문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창성에게 가율을 명하고 윤창문 등은 사형수의 규례에 의하여 엄한 형장을 치며 신문할 것을 명하였다.
4월 21일 신미
윤대를 하였다.
이창한(李昌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문순(金文淳)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4월 23일 계유
무산부(茂山府)에 정배했던 죄인 민치화(閔致和)를 방면하였다. 우의정 김종수(金鍾秀)가 차자를 올리기를,
"의금부의 복계에 대해 내린 결재서에서 정배 죄인 민치화를 방면하라는 하명이 있음을 보고 신은 그 괴이하고 걱정스러움을 참을 수 없습니다. 아, 민치화가 범한 죄는 홍문관 차자 중에서 ‘사특한 말이 광망하여 그 불측함을 형언할 수 없다.’고 한 말로만 보더라도 놓아줄 수 없는 죄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애당초 다시 심문하지도 않고 지레 짐작하여 결정한 자체가 이미 형벌을 대단히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나라의 걱정거리가 많고 세상 풍속이 날로 무너져가는 때를 당하여 이처럼 음험하고 흉패한 무리를 결코 다시 서울에 근접시킬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는 다시 깊이 생각하여 내리신 명령을 빨리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신은 지나치게 생각하는 걱정이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아 죄를 무릅쓰고 성총을 모독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역시 엄한 책벌을 빨리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민치화를 석방한 일이 소인의 요행수에 가깝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명색이 용서하는 은전을 베푼다고 하면서 북관에는 한 사람도 거론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지금 경의 차자에 ‘나라에 걱정거리가 많은 때 음험 흉패한 무리를 다시 서울에 접근시킬 수 없다.’고 말한 것을 보니, 이것이 세상 풍속을 위하는 뜻에서 나온 뜻임을 알 수 있다. 소청을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으나 대사령(大赦令) 또한 신용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곧 해부로 하여금 참작하여 다른 도로 옮기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홍양호(洪良浩)가 상소하기를,
"지난번 대관을 허통(許通)한 일은 창졸간에 우연히 고응관(高應觀)의 이름이 예조 낭관의 명단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듣건대 그는 호남의 이름높은 가문이며 등과한 그의 친족들은 거의 대관에 허통되었다 하기에, 별다른 생각없이 헌부의 장령에 의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추후에 듣건대, 그의 지체가 미천할 뿐만 아니라 그 친족들 중에는 향소임을 지낸 자도 있다 하니, 애당초 대관의 선발 대상으로는 비슷하지도 않은 자입니다. 또 역적 조시위(趙時偉)의 제자로서 평소 그의 양육을 받아왔으므로 시중드는 노속이나 다름이 없어 사람들이 모두 지목한다는 말이 같은 반열의 입에서 나오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은 여기에서 저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아, 저 조시위는 얼마나 극악한 역적입니까. 신도 몇 해 전에 또한 일찍이 그 죄를 성토하여 그의 당여와 부하에 이르기까지 미처 배척하여 끊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더구나 저 고응관은 보잘것없고 미천한 자로서 흉악한 역적과 일당이 되어서 본래 의관의 반열에 둘 수 없으니, 설사 낮은 벼슬자리라 하더라도 의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신은 여러 해 동안 집안에 들어 앉아 있어 귀와 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그를 대관의 청현직에 의망하고 보니 평소 손을 뻗쳐 엄격히 성토하던 것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죄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는 거의 죽을 날이 박두하여 하늘이 그 넋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재신이 개연히 발분하여 조정에서 발언함으로써 몽매한 자신을 깨우치고 벼슬길을 깨끗이 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법의 통제를 더욱 엄하게 할 수 있고 추물들이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응관의 대관 천망을 즉시 삭제하는 한편 일을 그르치고 직무를 옳게 수행하지 못한 신의 죄를 엄중하게 처결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처음에 이병정(李秉鼎)이 고응관에게 청환(淸宦)을 허통하는 일로 반열 안에서 말을 꺼내자, 홍양호가 상소하여 자기 변명을 하였다. 이에 상이 준엄히 질책하고 그 상소를 도로 내려주니 홍양호가 재차 상소하여 자신의 죄를 인책하였다. 이에 비답하기를,
"고응관의 일은 경이 비방하는 의견에 대해 받아들이고 사죄를 받아들였으니 이미 지나간 일이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애매한 죄과에 버려둘 수 없으니 그 곡절이 과연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자세히 조사하여 초기(草記)하라."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고응관의 동생 고응록은 영광(靈光) 고을의 좌수(座首)로 있으면서 세곡을 가로채 먹은 죄로 감영의 보고에 따라 귀양보냈습니다. 그 동생의 죄명 또한 이와 같거니와 고응관은 역적 조시위(趙時偉)와 친밀한 정상이 공론에 준엄히 발의되어 여지없이 드러났고, 또 그의 동생이 향임(鄕任)으로 있었다는 것이 문안에 분명히 실려 있으니, 그 형을 대각(臺閣)의 반열에 둘 수 없습니다. 신이 처음 올린 상소에서 요청한 대로 시행하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다면 시위의 사건으로 인하여 귀양간 것과 좀 다르다. 혹시라도 율명(律名)이 본정과 서로 틀리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특별히 구애될 만한 조건이 없다. 평소에 친밀하게 지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해당 도에 조사해봄으로써 애매한 죄과를 면하게 하는 것이 실로 분명히 규명하는 정사에 맞을 것이다. 그리고 친밀하다는 것도 여러 가지가 있다. 평소에 왕래하면서 얼굴이나 알았을 뿐이고 다른 언론이나 행동에서 서로 결탁한 자취가 없다면 역시 꼭 구애될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조 참판 조정진(趙鼎鎭)이 상소하기를,
"지난날 후반(候班)에서 고응관을 장령으로 통청(通淸)하는 일에 대하여 공론이 준엄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고응관의 인품과 문벌이 보잘것없는 것은 실로 논할 여지도 없거니와, 그가 시위의 제자로 세인의 지목을 받고 있는 만큼 낭서(郞署)의 헐한 직책에도 그대로 둘 수 없는데, 더구나 대관으로 새로 통청할 수 있겠습니까. 아, 역적 조시위는 얼마나 흉악한 큰 역적입니까. 그럼에도 오늘에 이르도록 한 하늘 밑에 있으니, 반드시 처단해야 할 의리와 함께 분개해 하는 심정은 신이 다른 사람보다 백 배나 더합니다. 만약 고응관이 이 역적의 집에 드나드는 것을 알았다면 응당 놀라 달아나서 그를 멀리하였을 것입니다만, 신은 고응관에 대하여 지면도 없고 소문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문벌의 미천함과 역적의 집과 친밀하다는 것을 애당초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를 의망에 넣도록 허락할 때 멍청하게도 가부를 말하지 않았으니, 신의 죄는 여기에서 만번 죽어도 오히려 경합니다. 때마침 재계하는 날이어서 자신을 규탄하는 글도 즉시 올리지 못하였으며, 엄한 명령 앞에서 감히 다시 사임도 하지 못하고 인사 문제가 있을 때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판서가 상소하는 데도 신은 죄가 같은 사람으로서 태연하게 직무를 보았으니, 황송하고 부끄러워 어찌할 줄을 몰라서 죽으려 하여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신이 맡고 있는 전직(銓職)을 우선 삭탈하고 이어 유사로 하여금 중죄로 다스리게 하는 동시에 고응관에 대한 대관의 의망을 빨리 고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고응관의 문벌이 어떻다는 데 대해서는 반드시 물의를 믿을 것도 못되며 또 그 동생의 정배 역시 세곡 창고의 사건에 기인한 것이라 하였으니, 더욱 이것으로 구애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른바 사람들이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은 설사 본의 아닌 비방에 가까운 것이라 하더라도 해명할 필요가 없는 일로 넘겨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전에 정패(政牌)로 부를 때 무단히 어긴 것은 이미 과오를 받아들여 자신의 죄로 삼으려는 의도에 어긋나는 것이며 도리어 불만스러워하는 태도에 가까웠다. 이는 실로 잘못된 생각이다. 더구나 그때에는 정석(政席)에만 참석하였으므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아도 그 정상을 이미 환하게 알 수 있는데, 하필 내놓고 정의의 처신을 내세우면서 마치 서로 길고 짧은 것을 대보기라도 하여야만 비로소 그 풍모에 규각이 있다고 하겠는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런 일에 있어서는 그저 머리 숙이고 사과하는 것뿐이다. 요즈음 풍습은 오직 서로 대결하여 이기는 것을 잘하는 일로 여기니, 그 외람된 버릇과 무엄한 태도는 지난날 당파싸움이 한창 벌어졌을 때보다 심하다. 이는 지금 이조 참판의 일만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상소를 도로 돌려주고 조정 신하들의 이러한 습성에 대해 각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이치중(李致中)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경일(李敬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24일 갑술
이조 판서 홍양호, 이조 참판 조정진을 교체하였으니, 굳이 그 자리에 두기 곤란한 형편이기 때문이었다.
오재순(吳載純)을 이조 판서로, 이병정(李秉鼎)를 이조 참판으로,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이의행(李義行)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병성(洪秉聖)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25일 을해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다.
차대(次對)를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홍양호의 일은 어찌 천만 번 온당치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응관을 통청한 것에 대한 언관의 말을 어찌 감히 규탄할 수 있겠는가. 첫 번째 올린 소에서는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데 대하여 마치 부당하게 남의 말을 들은듯이 반박하는 글을 올려 도리어 꾸짖기까지 하다가, 엄한 전교가 내린 뒤에야 비로소 두 번째로 소를 올리면서 너저분하게 사과하였다. 하루 동안에 올리는 소의 내용을 두 번씩이나 바꾸었으니, 이것이 어찌 말이 되는 일인가. 그 습성은 지난날의 당쟁과 다름이 없다. 하물며 조정진의 상소에 거론한 것은 더욱 그처럼 무엄할 수 없음이겠는가. 그 뜻은 전적으로 남의 말에 발끈 성을 낸 데서 발로되어 이와 같이 불만스러워 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일이 조시위와 관계된 만큼 그의 처지로서는 응당 천만 번 송구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인데, 감히 한 번 상소하고 두 번 상소하여 마치 남의 말에 승부를 겨루듯이 하니, 그는 필시 조시위를 두둔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취하기까지 하였을 것이다. 이 어찌 방자하지 않은가."
하니, 우의정 김종수는 아뢰기를,
"신은 금시 초문인데 일이 몹시 해괴하여 그 조짐을 길러서는 안되겠습니다. 홍양호는 10년 동안 버림받은 사람으로서 지금 이 관직을 맡고서도 이처럼 스스로 근신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런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세상 인심의 걱정이 어찌 끝날 날이 있겠습니까."
하고, 좌의정 채제공은 아뢰기를,
"홍양호와 조정진은 모두 죄가 없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김종수에게 이르기를,
"내가 경에게 특별히 당부할 말이 있다. 경의 말은 공평한 마음에서 나왔더라도 그 누가 공평한 말이라고 하겠는가. 지난날 윤시동(尹蓍東)의 일로 말하더라도 기어이 등용하려고 서두르는 통에 갈등을 일으키게 하였다. 윤시동으로 하여금 공연히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 그 누구의 탓인가. 이 때문에 경의 입에서 말이 나왔더라도 공평한 말이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청나라 황제의 시에 이르기를 ‘조회하러 오는 사람 응당 시를 잘 지어야 한다.[覲謁應來能句人]’라 하였으니, 이는 이번에 가는 성절사(聖節使)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사정도 여느 때에 비하여 각별하니 문임(文任) 중 비록 정경(正卿)이라도 강세황(姜世晃)의 전례에 의하여 특별히 차임하여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4월 26일 병자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가 장계하기를,
"교자 타는 것을 금하도록 신칙한 후 죄인을 압송하는 금오랑(金吾郞) 신식(申湜)은 마교자(馬轎子)를 타고 역마에 메워 다녔으며, 용강 현령(龍崗縣令) 장지현(張至顯), 증산 현령(甑山縣令) 오재두(吳在斗), 순안 현령(順安縣令) 정문재(鄭文在), 강서 현령(江西縣令) 이익영(李翊永), 양덕 현감(陽德縣監) 송준재(宋俊載), 태천 현감(泰川縣監) 김효건(金孝建), 강동 현감(江東縣監) 정만시(鄭萬始), 은산 현감(殷山縣監) 이경운(李庚運)은 혹은 마교자를 타기도 하고 혹은 부담기(扶擔機)를 타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단지 교자에 뚜껑이 있고 휘장이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조정의 금령이 막 반포되었는 데에도 말을 타려 하지 않은 것 자체가 너무도 해괴한 일입니다. 전 강동 현감(江東縣監) 강세륜(姜世綸), 전 맹산 현감(孟山縣監) 윤치성(尹致性)이 상경할 때 뚜껑이 있는 교자를 탔으니, 함께 유사로 하여금 품의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나라의 기강이 이처럼 다 없어졌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금령을 내리자마자 앞을 다투어 어기는 것으로 재주를 삼으니, 조정에 벼슬하고 백성을 다스린다면 무슨 일을 해내겠는가. 그 중에서도 죄수를 압송하는 도사(都事)가 교자를 타고 왕래한 것은 변괴라고 말할 만하다. 해당 도사를 엄히 가두고 공초를 받아 계문하라. 의금부 도사인 자신이 먼저 법을 위반하였으니 작은 일도 이처럼 임금을 속이는데 장차 무슨 낯으로 의기 양양하게 경연을 출입하겠는가. 이와 같은 심성과 행동으로 고을 수령 노릇을 하려 한들 마음속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없겠는가. 이른바 담기(擔機)란 것은 마교(馬轎)와 약간 다르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병이 중하거나 혹은 연로한 자는 똑같이 책할 수 없다 하더라도 새 영이 내린 처음에 어찌 감히 먼저 범할 수 있겠는가.
장계의 내용 중에는 마교자와 부담기에 대한 구별이 없으나 이들이 법을 위반한 것에 대해 다시 조사해서 처리할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시종신으로서 금령을 범한 수령은 모두 먼저 파직하고 나서 잡아다 신문하라. 김효건(金孝建)은 여러해 동안 기주관(記注官)으로 있어서 감화를 받은 것이 각별했으니 그 법을 받들어 지키기를 어느 사람보다 배나 잘 해야 할 것인데 어찌 차마 이처럼 분수에 넘치고 임금을 기만하는 행동을 하여 그 이름이 조사 장계에까지 오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있는 바로 그곳에 정배하라. 음관으로서 금령을 범한 수령으로 말하면 시종신이 이와 같으니 그들이 본받을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다. 의당 등급을 나누어 처결하여 감사로 하여금 구분지어 장계하게 하라. 파직 출송한 전 현감 강세륜과 윤치성은 다 함께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 국문하여 처치하게 하라.
평안 감사의 일은 그처럼 해괴할 수 없다. 수령이 법을 위반하는 것을 목격하고도 금하지 않고 심지어는 교자를 탄 금오랑(金吾郞)이 제멋대로 다니게 내버려두었다. 이와 같은 사소한 일에서도 무난히 금령을 무시해버리곤 하니, 이보다 더 큰 일에 대해서야 속이고 숨기는 데 무엇을 꺼리겠는가. 조정에서 이 중신에 대하여 재주를 지나치게 아껴 요즈음 약간 관대히 대해주었는데, 은혜를 저버림이 이와 같으니 실로 그를 위하여 한탄할 일이다. 평안 감사 심이지의 봉록을 10분기 감봉함으로써 탐욕을 부린 자에게 명주를 주었던 일을 모방하려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신식(申湜)을 서수라(西水羅)로 귀양보냈다. 신식이 서리를 면대하여 공술하였는데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그 죄를 의논하게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좌의정 채제공은 말하기를, ‘금오랑(金吾郞)이 사명을 받들고 나가는 길에 교자를 타고 떠난 것도 실로 천만 해괴한 일인데, 엄히 신문하는 앞에서 감히 부담기를 탔다는 말로 거짓 꾸며서 공술하다가, 의금부의 관리가 곧바로 진술한 후에 가서야 범죄의 진상이 비로소 탄로되었습니다. 함부로 탄 것은 오히려 일시적인 범법 행위에 속하지만, 임금을 기만한 데 대해서는 어떤 율문을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기본 율문은 유삼 천리(流三千里)에 해당되나 만약 등급을 더 높인다면 절도 정배(絶島定配)를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의정 김종수는 말하기를 ‘봉명 사신이 비록 어사와 같이 높다 하더라도 애당초 감히 역마에 교자를 메울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인데 신식은 제멋대로 교자를 탔으니, 설사 덮개가 없다 하더라도 방자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엄히 심문하는 앞에서 거짓을 꾸며 임금을 기만한 정상이 그 자리에서 탄로되었으니 기본의 죄 이외에 곱절 더한 율문을 적용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일정한 규정에 비하여 함부로 탄 율문을 약간 간접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또한 경하지는 않다고 생각되는데, 법부(法府)의 낭관에게 등급을 높여 조처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일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해당 부에서 서리를 시켜 낭관의 증인이 되게 하는 것은 비록 진실을 밝히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체면을 손상시킨 것 같으니, 해당 당상관을 되도록 중하게 추고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전하의 처분을 바랍니다."
하니, 판하하기를,
"참하(參下)의 금오랑(金吾郞)이 죄인을 압송하는 길에 교자를 탄 것은 더없이 큰 변괴인데, 더구나 변명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허튼소리로 기만하기까지 하였다. 이 중에 한 가지 사실만 있더라도 그 죄는 용서하기 어렵고 그 율문도 경하지 않은데, 하물며 한꺼번에 드러나고 두 사실이 겹친 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대신들의 여러 의견 또한 다름이 없거니와, 함부로 탄 기본 율문은 유 삼천리(流三千里)에 해당된다고 하므로 등급을 더하고자 하여도 섬은 도리어 변방보다 가까우니, 서수라 권관(西水羅權管)의 지방에 연한을 정하지 말고 귀양보내라. 의금부 당상관을 추고하는 일은, 서리가 자식이나 종이 아니니 특별히 대질할 수 없는 혐의나 법이 없다. 또 더구나 그가 떠날 때 있었던 사실을 곁에 있던 의금부 서리에게 물은 것을 또한 어찌 대증(對證)으로 말할 수 있으랴. 이것을 잘못이라 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였다.
서호수(徐浩修)를 진하 겸 사은 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삼았다.
액정서(掖庭署) 하인이 삿갓을 쓰고 대궐문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였다.
대사간(大司諫) 홍병성(洪秉聖)이 상소하기를,
"아, 저 일종의 흉악한 무리는 김상로(金尙魯)·계희(啓禧)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수법을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에게 물려주었습니다. 한번 뒤쳐 홍국영(洪國榮)·덕상(德相)의 저지 음모를 꾸미었고, 두번 뒤쳐 김하재(金夏材)와 명의(明誼)의 참독한 글이 나왔습니다. 기화(奇貨)를 끼고 흉악한 기도를 한 것은 또한 병권을 잡은 구선복(具善復)과 명겸(明謙)에게서 나왔습니다. 심지어 우진(宇鎭)과 조시위(趙時偉)가 장수를 추천하고 평소부터 지휘해 온 것은 무슨 일이며, 이재간(李在簡)과 신기현(申驥顯)이 상소문을 만들어 암암리에 서로 짠 것은 무슨 말이었습니까? 드디어 해도(海島)에 번듯이 누워있으면서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아, 성인이 변란을 막고 화를 방지하는 데는 특별히 법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뭇사람들의 마음을 거스르고 큰 법을 굽히는 것입니까. 근일 형조의 죄수 처분에 이르러 그 정도가 극에 달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결단을 내리시어 임금의 권한을 밝히고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풀어주소서.
아,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는 것에 앞설 것이 없습니다. 해서(海西)와 관서(關西)의 곡식은 단지 수해와 한재의 대비로만 될 뿐 아니라 또한 뜻하지 않은 변란을 대비하는 것과도 관계됩니다. 중앙 조정의 경비는 상정미(詳定米)에서 마련하였는데, 근일 탐오 행위가 전적으로 서도(西道)에 치우쳐 있는 것은 대개 재물의 유통이 다른 도에 비하여 가장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 수년 동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이처럼 흩어져 유리하고 몇 해 동안 탐욕을 징계하였는데도 이처럼 함부로 탐오하는 것은 수령들을 모두 세밀히 살펴 선택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식량에 대하여 원대하게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상정미를 돈으로 만들어 언제나 절약하고 저축하는 방법을 유지하며 문관과 무관의 수령들을 특별히 청렴 검소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선임하여 백성들의 식생활 문제를 후하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국가를 다스리는 계책은 재정을 넉넉히 하는 것보다 앞설 것이 없는데, 식량을 낭비하는 것으로 술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근래 도성 안에 큰 술집이 골목에 차고 작은 술집이 처마를 잇대어 온 나라가 미친듯이 오로지 술마시는 것만 일삼고 있습니다. 이는 풍교(風敎)만 손상시킬 뿐 아니라 실로 하늘이 만들어준 물건을 그대로 삼켜버리는 구멍이 되고 있습니다. 마땅히 너무 심한 것은 제거할 생각을 하여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나라의 금령을 알게 한다면 몇 달 안에 5부 안에서 몇 만 섬의 곡식을 얻어내게 될 것입니다. 이 어찌 작은 보탬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덧붙여 진술한 상정미를 돈으로 만들어 절약하고 저축하는 방도에 대한 일은 묘당에 물어보게 하겠다. 말미에 진술한 일은 곡식을 낭비하는 것이 비록 폐단이 되나 어찌 온 나라가 술을 마시는 데까지야 이르렀겠는가. 요즈음 조정 반열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보니, 우상(右相)과 판금오 이외에는 덕장(德將)의 풍모를 갖춘 사람을 보지 못하였으니, 술에 대한 정사가 역시 옛사람만 못하여 그러한 것인가?"
하였다.
사간(司諫) 송전(宋銓)이 상소하기를,
"삼가 송(宋)나라의 옛 제도를 상고하니, 대간에 들어간 지 1백 일이 되도록 바른 말을 올리지 못하면 대간을 욕되게 한 데 대한 처벌이 있었습니다. 신이 이 직책에 임명된 지 거의 1백 일이 되었는데도 한결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그 언책(言責)을 저버린 죄가 어찌 다만 대간을 욕되게 한 것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른말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지적에는 신이 언제나 첫째입니다. 일전에 유신(儒臣)들이 상소하여 논박할 때에도 이미 그 직책에 있었으니 어찌 감히 미처 출사하지 않았다 하여 스스로 용서하겠습니까. 바로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도 본직에 무릅쓰고 앉아 있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신의 직책을 빨리 삭탈하기를 바랍니다.
아, 7명의 중한 죄수를 전원 석방하는 데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한 원계(原啓)가 있는 만큼 신이 감히 번거로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귀현(龜顯)은 이 얼마나 흉악한 무리의 친동생이며 가까운 인척입니까. 애당초 잡아 가둘 때에는 그 의도가 진상을 규명해 내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단서가 드러나게 되고 여러 죄수들의 공술도 참작할 만하였는데 갑자기 특명으로 석방하여 제가 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야 흉악한 무리를 장차 무엇으로 두렵게 하며, 여러 사람들의 울분을 언제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대간의 아룀을 속히 윤허하고 이미 내린 명을 도로 거두기 바랍니다.
아, 기강이 엄숙해지고 염치가 장려되면 중인 이하는 명예와 절의를 깨끗이 가지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명(明)나라의 관리는 모두 청백함으로 불리웠고 아조(我朝)의 선발은 청렴 근실을 가장 중하게 여기었으니, 관직에 있는 자로 하여금 명예를 돌아보고 의리를 두려워하여 격려되는 바가 있게 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오늘날의 고관 대작은 몸소 오명과 탐욕을 범하여 위로는 조정에 모욕을 주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거듭 괴롭힙니다. 이 어찌하여 청명한 세상에 이처럼 법을 무시하는 풍습이 있게 되었습니까. 관서의 일에 대해서는 특별히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곤궁함으로 인하여 자신의 아픔을 느끼듯 밤낮으로 걱정하고 있으며, 감사의 조사와 어사의 보고가 연달은 데 대해 거듭 신칙하고 있는데도 이와 같은 탐오의 행위가 먼저 드러났습니다. 이밖의 여러 도와 각 고을에도 어찌 이와 같은 범죄가 없다고 보장하겠습니까. 근래의 습속이 사치를 숭상하여 한 차례의 고을 수령을 지내고 나서 큰 집을 짓고 전장을 장만하지 못하면 용렬하다고 지목함으로써 너나없이 꾀하는 것이 오로지 이욕에 있을 뿐입니다. 이러고서도 그 나라가 장차 나라 구실을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먼저 관직에 있는 자를 신칙하여 사치를 숭상하는 풍습을 단호히 제거하기 바랍니다. 모든 음식과 의복에 관해서도 모두 검소함을 숭상하여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사대부의 풍모가 검소한 데 있고 사치한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사대부간의 명예와 지조가 그 장려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장려될 것입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성인의 아름다운 덕목이며,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은 더없이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탐오한 관리의 돈꾸러미를 계산하여 율문을 적용하는 것에는 국법이 지극히 엄한만큼 함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현재 잡힌 모든 관리들은 한결같이 탐오를 범한 액수의 다소에 따라 단연코 중죄로 처치하기를 바랍니다. 또 듣건대 외관직으로서 가장 양심이 없는 자는 부유한 백성들의 재물을 강제로 빌려가기 때문에 약간의 재산이 있는 자들은 이로 인해 본업을 잃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데 해서와 관서가 더욱 심하다고 합니다. 이는 향안을 팔아먹는 부류에 비하여 한술 더 뜨는 격입니다. 또한 마땅히 여러 도에 엄히 신칙하여 나타나는 대로 중벌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환자곡은 조적(糶糴)이 아니면서도 곡물값을 조절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사창(社倉)이 아니면서도 미리 준비하는 실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령들이 이를 잘 감독하여 지키지 않음으로써 아전들과 향소임이 이를 계기로 농간을 부리는데 그 폐단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수령이 자주 교체되고 백성들이 사방으로 떠돌게 되는 것은 모두 이 환자곡 때문이니, 실로 지금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백성을 위한다는 것이 백성들에게 재앙을 주기에 알맞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고을에서 자체로 거두어들이고 나누어 주는데, 그것을 거두어들이는 자가 이노(吏奴)들이니만큼 좀벌레처럼 축내고 쥐굴을 뚫듯하는 농간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바칠 때에는 하나같이 알차고 깨끗한 것으로서 수량도 곱절이나 되지만 나라에서 받을 때에는 빈 쭉정이와 흙먼지이며 수량도 반드시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그러므로 살점을 떼어내 상처를 치료한다는 원성을 풀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산골 고을에는 곡식이 남아돌고 연해 고을에는 곡식이 동이나는 폐단은 실로 감영에 바칠 곡물을 돈으로 대신 바치는 폐단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감사로 있는 자는 곡식장부가 고르지 못한 것을 생각지 않고 오직 쌀값의 높고 낮은 것만 따지면서 부하 군교들만 파견하여 염탐하고 각 고을에 신칙하여 값을 올리고 내리곤 합니다. 배나 수레가 통하지 못하는 고을에는 계속 묵어 썩는가 하면, 싯가가 앙등하는 고을에는 창고의 저축이 온통 바닥이 나는 것을 이번 함양의 사례로도 족히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불쌍하게도 저 농가에서 1년 내내 힘써 농사를 짓지만 거두어들이는 것이야 그 얼마나 되겠습니까. 동짓달도 되기 전에 곡식 항아리가 모두 텅 비는 것입니다. 이에 송아지를 팔고 솥을 팔아도 부족하여 열집에 아홉 집은 사람이 비는 상황이 가는 곳마다 다 마찬가지이니 이를 바로잡는 방법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이미 대대적으로 뜯어고치지 못하는 입장에서 우선 당장의 급한 것을 구제하는 방도로서는 산골 고을의 곡식을 떼다가 연해 고을에 보태주는 정사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쪽의 것을 옮겨 이쪽으로 실어가는데 혹은 거리가 먼 폐단도 있고, 동쪽에서 받아다가 서쪽에 바치노라면 필경 썩은 곡식을 억지로 내주는 폐단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십분 소상히 밝혀 방편을 강구하지 않으면 비록 장래의 실효가 있다 하더라도 눈앞의 곤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한결같이 고을과 고을의 거리에 따라 백성들의 소원대로 차례차례 옮기게 하고 절대로 무리하게 명하거나 강제로 내주지 말며, 또 해당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배정해 주게 하되, 혹시라도 네 고을 백성, 내 고을 백성을 구분하지 말고 알찬 것과 거친 것을 고루 분배하라는 뜻으로 각별히 신칙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덧붙여 진술한 관서와 이외 여러 도의 탐오에 대한 일은 그대 말이 매우 훌륭하니 유념하겠다. 사치스러운 풍습에 대한 일도 그대 말이 매우 훌륭하다. 이는 말로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닌만큼 필시 솔선수범이 미진함으로 말미암아 그리되었을 것이다. 만약 궁중에서 거친 포백(布帛)의 옷을 입는 교화를 보였더라면 오늘날의 사치를 숭상하는 풍습이 왜 이처럼 극한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이야말로 스스로 노력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고 감동하도록 해야 할 일이다. 탐오한 관리의 돈꾸러미를 따져 처벌하는 데 대한 일은 일전에 어떤 고을 수령에게 적용한 율문이 정배에 그치고 말았는데 이는 법을 굽힌 것이 아니다. 수령이 부유한 백성들의 재물을 강제로 차용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특별히 신칙하게 할 것이며, 곡식 장부에서 많은 데 것을 떼어 적은 데 보태며 거리가 멀고 가까운데 대한 것을 한결같이 백성들의 소원에 따르자는 일에 대해서는 소청에 따라 묘당으로 하여금 해도에 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4월 27일 정축
사헌부가 【지평 이경심(李敬心).】 아뢰기를,
"남해현(南海縣)에 귀양보낸 죄인 오대익(吳大益)에게 사형에서 감하여 귀양보내는 것으로 참작 처리한 것은 실로 우리 전하께서 그의 숙부를 추념하는 훌륭한 의도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탐오한 것이 이미 4만여 냥에 이르렀으니, 나라에 법이 있는 이상 결코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빨리 앞서 내린 명령을 거두고 쾌히 해당되는 율을 시행하소서. 근래에 대간의 통청(通淸)이 비록 혼란되었다고는 하나 고응관(高應觀)처럼 비천한 자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가 역적 조시위(趙時偉)에게 섬기기를 그의 하인이나 다름없이 한 것은 이미 전관(銓官)이 스스로 탄핵한 글에 자세히 드러났으므로 신은 다시 필설(筆舌)을 더럽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비 고가현(高可賢)은 일찍이 창감(倉監)을 지낸 사람으로서 갑자기 시종관의 아비가 되어 성은의 고명(誥命)이 내려가 크게 조정에 수치를 끼쳤으니, 결코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고가현(高可賢)에게 품계를 뛰어넘어 가자한 교지(敎旨)를 즉시 회수하게 하기 바랍니다.
고응관은 여러해 동안 낭서(郞署)에 있으면서 전관(銓官)들의 집에 찾아가 벼슬자리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전관을 거친 사람이면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전 이조 참판 조정진(趙鼎鎭)이 감히 그의 얼굴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입에서 말이 나오자 온 정석(政席)에서 전해 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그가 감히 가부를 논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혼란하고 황급한 통에 말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원소(原疏)를 돌려주었기 때문에 신이 보지는 못하였으나 떠도는 말이 자자하여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조정진에게 삭탈 관작(削奪官爵)의 벌을 시행하기 바랍니다.
수찬 민창혁(閔昌爀)은 자신이 경연의 시신으로서 저인(邸人)의 돈을 강제로 받아내기 위해 지나친 형장을 쓰고 해괴한 행태를 부렸다는 소문이 항간에 전파되어 조정 사대부에게 수치를 끼쳤으니, 사대부다운 염치가 전혀 없습니다. 죄를 추고하고 관작을 삭탈하는 율을 시행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왕명을 출납하는 책임이 그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백사근(白師謹)의 용렬함과 구수온(具修溫)의 비천함과 남주로(南柱老)의 탐오는 물정에 맞지 않습니다. 이들을 모두 승지의 의망에서 개정하기 바랍니다. 대각(臺閣)은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하는데 전 헌납 이상도(李尙度)는 어제 숙배하고 오늘 명령을 어기니 그 처신이 두서를 잃었습니다. 서용하지 않는 벌칙을 적용하기 바랍니다.
감찰(監察)의 임무는 곧 옛날 전중 어사(殿中御史)로서 음관(蔭官)의 좋은 벼슬치고 그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감찰 채윤전(蔡潤銓)은 지체가 비천하여 임관 원칙에 어긋납니다. 다른 관서로 바꾸어 보내 옛 규례를 보존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근래 대사령이 있을 때마다 도형(徒刑), 유형(流刑)의 죄안을 효주(爻周)하라는 하명이 있는데, 효주는 곧 방면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듣건대, 이름이 단서(丹書)에 올라 있는 무리가 효주의 은전을 입기만 하면 곧 복관(復官)으로 간주하고 신주나 호적(戶籍)에 함부로 직함을 써넣는다고 합니다. 제도를 무너뜨리고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의금부와 한성부에 엄히 신칙하여 일일이 바로잡게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해변 근처의 소나무에 대한 금령은 매우 엄중합니다. 더구나 세칙을 새로 반포하였는데, 신칙하라는 하교는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그러나 요즈음 듣건대, 호서 연해 지대의 소나무에 대한 금령이 극도로 해이해져서 산에서 남벌하는 일이 허다하며 그 숫자도 많다고 하는데, 남쪽 지방에서 오는 사람 가운데 그 일을 말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본도로 하여금 사실대로 조사하여 남벌을 범한 간사한 백성은 율문에 따라 처벌하고 해당 수사를 위에 계문하여 논죄하게 하기 바랍니다.
지방 장관의 임무는 참으로 중대합니다. 혹은 온 도내 백성들의 실정을 두루 살피기도 하고, 혹은 열읍의 군정(軍政)을 주관하기도 하므로 더욱 노쇠한 사람에게 맡길 수 없는 것인데 나라의 법에 지방 장관의 나이를 제한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잘못된 것 같습니다. 묘당에 하문하여 지방 장관의 임명 역시 연한을 정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오대익(吳大益)의 일은 탐오한 것이 4만 냥이나 되는데 법률로 조치하지 않겠는가. 참작하여 조처한 일은 대대로 용서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이른바 사용한 문서로 보아 실로 자기 주머니를 채웠다고 억지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고가현에게 교지를 주지 말라는 일은, 만약 흠이 있다면 그의 아들을 논박함으로써 공격하기 전에 저절로 무효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지, 그의 아비까지 끼워서 논박하는 것은 지나치다. 윤허하지 않는다. 조정진(趙鼎鎭)의 일은 판서가 참판에게 위임하였다는 말이 이미 조회하는 자리에서 나왔었다. 이 말이 어찌하여 이에 이르렀는가. 일전에 그가 취한 행동은 전일에 알고 있던 것과는 아주 상반된다. 아뢴 대로 하라.
민창혁(閔昌爀)의 일은 만약 저인(邸人)의 돈을 강제로 받아냈다면 일전 묘당의 초기(草記)에 어찌하여 거론하지 않았는가. 지나치게 형장을 썼느니 해괴한 행동이니 말하면서도 꼬집어 지적하여 말한 일이 없다. 어찌하여 아무 일, 아무 일이라고 지적하여 진술하지 않고 사람을 애매한 죄에 빠뜨리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백사근 등을 개정하는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이상도의 일은 체례(體例) 간의 일에 불과하다. 아뢴 대로 하라. 채윤전의 일은 서로 고집하면서 계속 아뢰고 있으나 그로서는 속히 그 자리를 떠나는 것만 못하다. 즉시 바꾸도록 하겠다. 도형과 유형 문안에 효주한 다음 함부로 직함을 쓰는 것을 시정하자는 일은, 이미 죄명마저 효주하라는 하명이 있었으니, 다만 정배의 문안에서 성명을 효주하라고 하명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제 와서 하필 일일이 조사해낼 것이야 있겠는가. 비록 어느 집의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써놓은 신주를 일일이 고친다면 그 자손된 자는 그 마음속의 아픔이 생전에 귀양간 것보다 백배나 더할 것이다. 그 집안의 정리를 특별히 생각해서만 아니라, 조정의 후한 풍속으로 볼 때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다. 그 주장을 속히 중지하라.
호서 연변의 소나무 금령에 대한 일은, 호서에 세 군영이 있는데 어느 군영의 관할 연변을 가리키는 것인가. 또 사실의 여하는 막론하고 이미 소나무에 대한 금령이 엄하지 못하다고 말하였으니, 정원으로 하여금 그대에게 물어보게 하고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하게 하겠다. 지방 장관의 임명에 연한을 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치적과 활동력은 연한의 길고 짧음에 달려 있지 않다. 이에 대한 계문이 이미 나온 이상 필시 혐의를 피하여 사임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리가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하나로 지정하여 초기를 올리게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지평 이경심(李敬心)에게 물으니 그의 말이 ‘남포 현감(藍浦縣監) 정우태(丁遇泰)가 간사한 백성들이 남벌을 범한 것이 낭자한 일로 감영에 보고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보면 충청 수사(忠淸水使) 유문식(柳文植)은 능히 살피고 경계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대신(臺臣)의 대답이 이와 같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즉시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조에 명하여 초계 문신(抄啓文臣)으로 서장관(書狀官)을 의망하게 하였다. 누차 의망하였으나 늘 의망을 개정할 것을 명하곤 하면서, 송상렴(宋祥濂), 윤영희(尹永僖)를 의망에 넣어 들이라고 하였다. 이에 전관(銓官)이 의망하기를 좋아하지 않자, 전교하기를,
"이들 두 문신은 그 문예가 뛰어날 뿐 아니라 이력이 모두 문관으로서의 선발을 겪은 만큼 시에 능한 사람을 보내고자 하면 이들보다 앞설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밤이 지나 아침이 되도록 끝내 집행하지 않으니 해괴하기 그지없다. 해당 전관(銓官)을 중하게 추고하고 속히 의망에 넣어 들이라."
하고, 끝내 송상렴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우의정 김종수가 아뢰기를,
"서장관 송상렴은 연좌된 죄가 경하지 않으므로 전후 전관의 의망에 한번도 거론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번에 전조(銓曹)의 당상관들이 그를 수망(首望)으로 추천한 것은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사신은 그 임무가 중한만큼 그가 감히 무릅쓰고 받을 수 없는 것은 도리상 당연한 것입니다. 서장관 송상렴을 바꾸어 차임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라 이백형(李百亨)을 대신 임명하였다.
4월 28일 무인
비변사가 아뢰기를,
"지방 장관의 임명에 연한을 정하지 않은 것은 나라의 법전에서 빠뜨린 것이 아닙니다. 지방 장관은 그 임무가 중하여 오직 대체적인 일만 집행하는만큼 몸소 자질구레한 일을 집행하는 수령과 동등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으면 꼭 나이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는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기면 고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지방 장관의 연한을 정하지 않음으로써 당장의 폐단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대간이 아뢴 말에 대해서는 그대로 두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방 장관의 나이를 제한하는 규정이 없는 것이 어찌 궐문(闕文)이며 누전(漏典)이겠는가. 임무가 크기 때문에 체면도 중하여 자질구레한 잡다한 업무까지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옛날에도 80세의 늙은 방백과 곤수가 있었으니 대간의 논의는 옳다고 볼 수 없다. 경들의 복주(覆奏)를 보니 묘당의 체모를 제대로 지켰다.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권이강(權以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병조 참판 유의(柳誼)가 아뢰기를,
"호위 군관이 입직할 때 30명이 장패(將牌)를 차고 출입하게 되는데, 거둥할 때에 더 늘린 입직원 15명은 장패를 차지 않습니다. 장패 15개를 더 만들어 대장소에 보관해 두고 만약 입직을 늘릴 때에는 차고 들어왔다가 끝난 뒤에 도로 대장소에 보관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사간원이 권유(權𥙿)·오대익(吳大益)에 대한 계청을 정지하였다.
4월 29일 기묘
차대(次對)가 있었다. 이조 당상과 의금부 당상을 불러 접견하고 이어 초계 문신들에게 친히 시험을 보였다. 상이 이르기를,
"민창혁의 일은 그 실수가 전라 감사에게 있다. 일가이건 아니건 막론하고 약간의 돈을 꾸어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데 하물며 종형제간이겠는가. 전라 감사는 본래 부유한 도의 감사인데 4백 냥의 돈을 마련하여 보상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정월에 있었던 조사 보고에서 겨우 모면한 후 아직까지 처리하지 않아서 오늘의 대계(臺啓)가 있게 하니, 이 어찌 말이나 되는가. 조정은 의당 대체를 보아야 한다. 당당하고 깨끗한 조정의 홍문관 안에서 저리(邸吏)에게 부채를 진 것 때문에 죄를 입게 된다면 비록 파직이나 벼슬을 깎는 작은 처벌인들 어찌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하니, 좌의정 채제공, 우의정 김종수가 아뢰기를,
"참으로 성상의 하교가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계에서 성명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충청 감사는 안심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니, 김종수가 아뢰기를,
"근일 전라 감사와 충청 감사는 모두 자리에 앉아 있기가 불안할 것이니 몹시 민망한 일입니다. 곤수(閫帥) 역시 나이가 넘은 사람이 있는데 그는 곧 변지건(卞至健)으로서 대차고 명민하여 일을 그르칠 위인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봉명 선전관(奉命宣傳官)으로 있으면서 평양 서윤(平壤庶尹)을 파출하였으니 기백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호남에는 오랫동안 적임자를 얻지 못하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오랫동안 맡겨 성과를 거둘 만한 사람을 얻어야 하겠다. 내 생각에는 정경(正卿)으로 선발하여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니, 대사간 권이강(權以綱), 헌납 유운우(柳雲羽) 등이 차례로 전계(傳啓)하였다. 말단의 일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이는 비답을 내릴 만한 계(啓)가 아니다. 차례를 넘어 계속 진술하는 것은 곧 요즈음의 전례이다. 다른 계를 진술하라."
하니, 권이강 등이 아뢰기를,
"삼사(三司)의 계체(啓體)는 지극히 엄합니다. 이미 비답을 받지 못하였으니 어찌 감히 계속 진술하겠습니까. 근래 입시한 대간이 혹시 비답을 받지 못하고도 다른 계를 앞질러 진술하는 예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규례입니다. 신들이 어찌 감히 받들어 거행하겠습니까."
하고, 김종수는 아뢰기를,
"대간의 말이 실로 원칙에 맞습니다."
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대사간 권이강, 헌납 유운우를 체차하라."
하니, 장령 오태현(吳泰賢), 부교리 김희조(金熙朝)가 번갈아 하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도 관찰사 민태혁(閔台爀)을 파직하였다. 비변사가 수찬 민창혁(閔昌爀)이 저리의 돈을 강제로 받아들인 일을 조사하여 아뢰면서 민창혁에게 파직의 벌칙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민창혁이 고성(固城)에서 체임된 지 지금 15년의 오랜 기간이 지났으니, 그가 빈궁하게 지낼 것은 뻔하다. 조사 보고된 4만 냥은 엄청나서 논할 수도 없거니와 단돈 4냥인들 그가 어떻게 마련하겠는가. 종형제 또한 지친이다. 마침 지친이 부유한 도의 감사로 있음을 계기로 약간의 돈을 꾸어쓴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저리에게 추징한 한 가지 일은 과연 크게 금령을 어긴 것이다. 아우가 형을 위해 그 잘못을 숨겨주는 도리로 보더라도 지금 4개월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그 빚을 갚지 않아 앞서 조사할 때 겨우 모면한 죄과가 이번 대계(臺啓)에서 또 드러났다. 민창혁을 법을 굽혀 비호하기 위하여 이 전교를 내린 것이 아니라 조정으로서는 응당 충후하고 친족을 도타이 하는 정사를 권면해야 한다. 그 실수를 논한다면 전라 감사에게 있지, 민창혁에게는 있지 않다. 더구나 경연에 출입하는 자이겠는가. 4백 냥의 돈을 저리에게 빚졌다 해서 그 사람을 견책하고 그 관직을 깎는다면 홍문관 안의 사람들은 모두 돈냄새를 혐의할 것이다. 당당한 맑은 조정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는가. 민창혁의 논죄에 대한 일은 그대로 둘 것이며, 즉시 변통하여 갚아주지 않은 해당 도신에게 견책 파면하는 벌칙을 시행하라. 저리의 일은 비변사가 엄격히 신칙하고 날짜를 정하여 즉시 보상해주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경연 석상에서 이미 의사를 표시하였거니와, 본도의 감사는 근년 이래 대체로 적임자를 얻지 못하였고 잦은 교체 또한 근년 같은 때가 없었다. 모름지기 숙련되고 진중한 사람으로서 임기까지 오래 맡겨 두지 않는다면 호남 한 도는 앞으로 인재를 얻을 때가 없을 것이다. 지금 자급에 구애하지 말고 차임하여 보내려고 한다면 마땅히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는 사람 중에서 재능이 있는 자를 취해야 한다. 직책상으로 좌천이며 외직에 보임하는 것이니 행 부사직(行副司直) 윤시동(尹蓍東)을 전라도 감사에 제수하라."
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윤시동을 불러 접견하였다. 그가 떠나는 인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완성되었다. 무예에 관한 여러 가지 책에 실린 곤봉(棍棒), 등패(藤牌), 낭선(狼筅), 장창(長槍), 당파(鎲鈀), 쌍수도(雙手刀) 등 여섯 가지 기예는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왔는데, 선묘(宣廟) 때 훈련 도감 낭청 한교(韓嶠)에게 명하여 우리 나라에 출정한 중국 장수들에게 두루 물어 찬보(撰譜)를 만들어 출간하였고, 영종(英宗) 기사년에 장헌 세자(莊獻世子)가 모든 정사를 대리하던 중 기묘년에 명하여 죽장창(竹長鎗), 기창(旗鎗), 예도(銳刀), 왜검(倭劒), 교전(交戰), 월도(月刀), 협도(挾刀), 쌍검(雙劒), 제독검(提督劒), 본국검(本國劒), 권법(拳法), 편곤(鞭)棍) 등 12가지 기예를 더 넣어 도해(圖解)로 엮어 새로 《신보(新譜)》를 만들었고, 상이 즉위하자 명하여 기창(騎槍), 마상 월도(馬上月刀), 마상 쌍검(馬上雙劒), 마상 편곤(馬上鞭棍) 등 4가지 기예를 더 넣고 또 격구(擊毬), 마상재(馬上才)를 덧붙여 모두 24가지 기예가 되었는데, 검서관(檢書官)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에게 명하여 장용영(壯勇營)에 사무국을 설치하고 자세히 상고하여 편찬하게 하는 동시에, 주해를 붙이고 모든 잘잘못에 대해서도 논단을 붙이게 했다. 이어 장용영(壯勇營) 초관(哨官) 백동수(白東脩)에게 명하여 기예를 살펴 시험해 본 뒤에 간행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 차례는 열성조가 군문을 설치하고 편찬한 병서(兵書)와 궁중 후원에서 시험을 거친 《연경월위(年經月緯)》 등을 널리 상고하여 사항에 따라 순차로 배열한 뒤에 《병기총서(兵技摠敍)》라는 명칭을 붙여 첫머리에 싣고, 다음에는 척계광(戚繼光)과 모원의(茅元儀)의 약전(略傳)인 《척모사실(戚茅事實)》을 싣고, 다음은 한교(韓嶠)가 편찬한 《기예질의(技藝質疑)》를 실었다. 이어 한교가 훈련 도감에서 일한 경위를 그의 견해와 합쳐 《질의》 밑에 실었다. 다음에는 인용한 서목을 넣었고, 다음은 24가지 기예에 대한 해설과 유래와 그림이 있고, 다음에는 모자와 복장에 대한 그림과 설명을 붙였다. 또 각 군영의 기예를 익히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고이표(考異表)를 만들어 그 끝에 붙이고 또 언해(諺解) 1권이 있어서 책은 모두 5책인데 어제서(御製序)를 권두(卷頭)에 붙였다. 이때에 이르러 장용영에서 인쇄하여 올리고 각 군영에 반포한 다음 또 1건은 서원군(西原君) 한교(韓嶠)의 봉사손(奉祀孫)에게 보냈다.
4월 30일 경진
함경남도에 나갔던 암행 어사 서영보(徐榮輔)가 복명하면서 서계(書啓)를 올려 회양 부사(淮陽府使) 강인(姜), 금성 현령(金城縣令) 어용겸(魚用謙), 이성 현감(利城縣監) 장제두(張齊斗), 거산 찰방(居山察訪) 고은태(高殷泰)의 위법 사항을 규탄하고, 또 안변 부사(安邊府使) 어석정(魚錫定), 함흥 판관(咸興判官) 유한돈(兪漢敦), 홍원 현감(洪原縣監) 민사선(閔師宣), 영평 현령(永平縣令) 이명섬(李命暹)의 과오를 말하고, 또 북청 부사(北靑府使) 유지양(柳知養), 단천 부사(端川府使) 홍윤복(洪允復) 등이 치적이 있음을 말하였다. 영보(榮輔)가 또 별지의 단자를 올리기를,
"1. 작년에 남관(南關)의 농사가 흉년으로 판정된 것은 오직 수해 때문이며, 수해가 나지 않은 곳은 전연 수확이 없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듭 흉년이 든 나머지 관청이나 민간 할것없이 모두 빈털터리가 되었는데, 고을 수령들이 애당초 조처하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데다가 환자곡을 받아들이기를 너무 조여댔기 때문에 백성들이 크게 지쳐 흩어져 사방으로 떠난 자도 있고 가산을 탕진한 자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아우성치며 조석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우리 전하께서 굽어살피시어 식량을 주었으며 관리를 파견하여 호송하고, 진휼이며 환자곡도 자원에 따라 실시하였으며 감사와 수령에게 책벌을 내림으로써 목민관(牧民官)들이 두려워하면서 직무에 솔선하게 되고 북도의 백성들은 안도할 뜻을 두게 되었습니다. 이에 장삿배가 많이 모여들고 쌀값이 정상으로 돌아갔으며 밀과 보리가 잘 여물고 경작의 시기를 잃지 않아 민간의 형편이 점차 회복되어가고 있습니다. 데려다준 유랑민들은 각 지방에 도착하는 즉시 구제대상에 넣고 돌봐주는 것도 다른 구제대상보다 가일층 염려하고 있습니다. 선전관이 데려온 이외의 도내 각 고을과 각 도에서 쇄환(刷還)한 사람들, 그리고 제 발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점차 안정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떠도는 자로서 형편이 넉넉한 부호(富戶)들은 채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이들은 토지와 집을 다 팔고 소와 말에 짐을 싣고 남쪽 땅에 이사하여 영구히 자리잡고 살기를 작정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리를 북도의 사람들은 남쪽으로 이주해간 사람이라 지목하고 유랑민과 구별하고 있습니다.
1. 《자휼전칙(字恤典則)》은 곧 우리 성상께서 나의 아이를 생각하여 남의 아이에게까지 미치게 한 성대한 은덕인 것입니다. 작년 이래 유랑민이 버린 어린 아이들이 대부분 읍 소재지의 주막에 얹혀 있었는데, 큰 마을과 부유한 집들로서 의식이 약간 넉넉한 사람들이 선뜻 거두어 기르기 때문에 들판에 버려지는 신세를 면하였습니다. 지난달에 감사가 각별히 신칙함으로써 모두 측은한 생각으로 거행하고 있습니다.
1. 본도의 역질이 근년에는 없었는데, 철령(鐵嶺) 이북과 마천령(摩天嶺) 이남에는 어느 한 곳도 깨끗한 곳이 없습니다. 굶주린 사람이 먼저 걸려 요행으로 죽기를 면하기도 하지만 흙을 얇게 덮거나, 거적으로 덮은 무덤이 서로 바라보이는데 본토민과 유랑민을 섞어 묻음으로써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원산(元山)과 함흥(咸興)에 더욱 많았으며, 떠돌아다니다가 죽은 자는 모두 호패나 호적이 없기 때문에 푯말을 세운 곳이 극히 드뭅니다.
1. 작년에 유랑하는 민호가 생긴 것은 전적으로 환자곡을 가혹하게 받아 들인 데서 기인하였습니다. 민력이 이미 지친 데다가 기어코 다 받아들이기 위하여 매질하면서 끌어내어 밤낮으로 독촉하였습니다. 가난한 백성이 여기에서 서로 이끌고 도망하게 되고 그리하여 세금을 마을에다 물리고 일가에게 물리는 통에 부유한 민호 역시 멀리 도피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함흥과 영흥에서 가장 많이 도망하고 가장 먼저 동요하였으니, 이는 환자곡을 받아들이기를 가장 융통성이 없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장 억지로 충당하도록 한다 해도 오히려 일을 망치게 될 것이니 깨끗하고 알찬 것으로 받기란 기대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신이 보기에는 안변(安邊)과 단천(端川)이 좀 깨끗하고 알찬 셈이고, 문천(文川)과 이성(利城)이 가장 거칠지만 그래도 전부 빈 쭉정이는 아닙니다. 지금 민호가 믿고 목숨을 이어가는 것은 오직 이 한 가지뿐인데, 문천의 운림창(雲林倉) 하나는 전부 빈 쭉정이뿐이므로 백성들이 받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1. 진상하는 녹용의 값이 날개 돋친 듯이 해마다 뛰어오릅니다. 수년 전에 단천에서 바치는 녹용이 1대에 4냥중 되는 것이 있었는데, 당시 감사가 다른 고을의 녹용은 다 물리치고 모두 4냥중을 기준으로 삼게 한 결과 모든 고을에서 큰 곤욕을 치르고 간신히 사서 바쳤으니, 녹용값이 터무니없이 비싼 것이 실로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장사꾼들이 사사로이 서로 매매하는 값은 기껏해야 7, 80냥에 지나지 않는 것을 나라에서는 1백 냥까지 올려주고 보니 비싼 값 중에 비싼 값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 고을에서 바치는 것이 검사에서 한번 퇴짜를 맞으면 다시 다른 것을 구하여 순조롭게 바치려고만 합니다.
이와 같이 할 때 값을 언제 따지겠습니까. 월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각 고을의 색리(色吏)들이 모두 녹용값을 마련해 가지고 영저(營邸)에 모여드는데, 도매상에서 파는 것이 아니면 바칠 수가 없습니다. 녹용이 생산되는 육진(六鎭)의 고을에서도 반드시 함흥에서 사서 바치곤 하니, 이는 모두 영주인(營主人)과 도매상들이 몰래 서로 짜고 백방으로 농간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조정의 영이 있은 후 감영이나 고을에서도 여간 신칙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이권이 있는 곳에는 죽기를 무릅쓰고 범하니, 그 정상을 따지면 실로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엄히 형장쳐 귀양보냄으로써 훗날을 징계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1. 절간의 노비는, 추쇄관(推刷官)을 혁파한 후에는 이들도 평민에 끼일 수 있고, 혼인을 제때에 할 수 있으므로 감사해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각 고을의 공물을 거두는 색리(色吏)도 반드시 절간 노속 중에서 차출하여 손수 거두어들이게 하므로 다른 아전들이 간섭하지 못합니다. 설사 탐관오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 폐단이 쇄관처럼 혹심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1. 북도의 각 고을에는 화전(火田)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북도의 백성들은 오직 속전(續田)에 대한 백징(白徵)을 걱정할 뿐, 화속(火粟)에 대해 강제로 납세하게 하는 일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독 안변(安邊) 한 고을은 거의 한 뙈기도 조세가 없는 땅이 없습니다. 산꼭대기의 메마른 땅이라도 일단 불태운 흔적만 있으면 곧 원대장에 올려 그 자손들에게 전해가며 이웃에 물리고 친족에게 물립니다. 조정의 지시가 있은 후 몇 해 동안 이 폐단이 조금 완화되었다가 작년부터 섞어서 징수합니다. 안변에는 또 평사화속(坪社火粟)027) 의 명목이 있는데, 대개 평사에는 화전을 일굴 만한 곳이 아주 적습니다. 그러므로 전부터 세를 거두는 일이 없었는데 15, 6년 사이에 비로소 세를 거두는 법이 생겨 한 자 한 치의 땅도 끝까지 찾아내 평균 세율로 매겨 일단 정해지면 끝내 변동이 없습니다. 이것이 실로 백성들에게 미치는 큰 폐단이니 속히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음관(蔭官)인 당하관이 교자를 타는 폐단에 대해서는 근일 조정의 지시가 내린 뒤에 감사가 각읍에 알림으로써 홍원·북청·함흥 등 고을에서는 모두 덮개와 휘장을 제거하였습니다. 문천 군수(文川郡守) 이현도(李顯道)는 3월 초순 감영에 오갈 때 덮개가 있는 교자를 탔다고 하며, 금성 현령(金城縣令) 어용겸(魚用謙)은 신이 그곳을 지날 때 그가 교자를 탄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전후의 신칙이 얼마나 엄격하였습니까. 그런데 법종(法從)을 지낸 신하가 먼저 금령을 범하였으니 모두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1. 《흠휼전칙》은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제정한 법입니다. 모든 신하들이 만약 이를 고이 받들어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중한 것입니다. 이성(利城) 고을에서 환자곡을 분배하던 날 이른바 대동미 감관(大同米監官)이란 자가 환자곡을 받으러 온 백성들 중 대동미를 바치지 않은 자를 잡아놓고 엄하게 곤장을 치면서 바치라고 독촉하였습니다. 비록 수령이라 하더라도 군무(軍務)가 아니면 곤장을 쓸 수 없는 법인데, 하찮은 향소임이 제멋대로 곤장을 쓰는 것은 규정을 크게 위반한 것입니다. 해당 고을 수령은 그들을 능히 단속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1. 모든 영흥(永興)에 관한 일은 그 어느 시기에 있었던가를 막론하고 신의 사적인 의리상 감히 지적하여 거론할 수 없습니다. 신이 이미 유랑하는 민호의 실지 수효를 탐지하여 회주하라는 하명을 받고서 실제로 일일이 탐지한 결과 각 마을의 총수를 책으로 만든 것이 모두 2천 6백 10호 내에서 이미 돌아와 거주한 호수는 1천 1백 75호이고 아직 돌아와 거주하지 않은 호수는 1천 4백 35호입니다. 본 고을의 일을 신이 거론하게 된 이상 그 폐단의 보다 심한 것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첫째로는 속전(續田)에 대해 터무니없는 세를 징수하는 것인데, 이로 인하여 산간 마을에서 모두 뿔뿔이 흩어져갈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 상신 민정중(閔鼎重)이 감사가 되었을 때 도내의 결전(結田)을 고쳐 측량하였으니 이것이 곧 병오양안(丙午量案)인 것입니다. 산전(山田)으로서 약간 낮은 곳에 위치한 것을 정전(正田)이라 하고 약간 높은 곳을 속전(續田)이라 하여 모두 원 대장에 올라 있습니다. 그중에도 산간 마을에 위치한 속전은 모두 응달진 비탈과 후미진 골짜기로서 수확이 실하지 못하므로 묵히고 버리는 곳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근년에 와서 흩어지는 가구가 날로 생겨서 받아낼 데가 없는 조세를 남아 있는 민호에다 나누어 물립니다. 또 더러는 갑(甲)이란 사람의 밭 열흘갈이를 묵혀버린 것을, 을(乙)이란 사람이 와서 하루갈이를 개간하면 열흘갈이의 조세를 전부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겁을 먹고 감히 개간할 생각을 못합니다. 신이 들은 바로는 이 폐단이 가장 심하다고 합니다. 다른 고을에도 산간 마을에 속전이 있는 곳은 모두 그렇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오직 도내 천(川) 자의 이름을 가진 세 고을에서는 전정(田政)이 가장 정밀하여 비록 삼[麻]을 심을 만한 좋은 밭이라도 일단 묵히면 세가 없으니, 다른 고을에서도 이 규례를 적용한다면 아마 민생을 소생시키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북도는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서 한 해의 소출로 한 해의 식량을 지탱하기에 부족합니다. 이것이 막대한 걱정거리가 되는 것인데 그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묵은 밭을 개간하는데 힘쓰고 그 묵은 밭을 다 개간하려면 개간하여 경작한 것만큼 조세를 받는 법을 시행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1. 영흥(永興)은 가솔군관(假率軍官)의 수효가 너무 많아 무사들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설립할 처음에는 자원자를 모집하고 그중 건장한 자를 택하여 가솔군관이라 부르면서 감영·병영과 본 고을에 소속시켜 유사시의 소용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신년 이후부터는 원하건 원하지 않건 묻지 않고 고정으로 정원수를 설정해 놓고 본인이 죽어 자리가 비면 강제로 색출하여 대신 메우곤 함으로써 그만 하나의 군역(軍役)이 되어버렸으며 병영에 소속되어 번서는 대신 무는 돈이 가장 많아 더욱 고역으로 불립니다. 안변서부터 함흥까지 7개 고을 중에 영흥이 특별히 많아서 그 인원수가 7백 명에 달합니다. 이는 실로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니, 금후부터는 병영의 가솔군 정하는 법을 영원히 없애고 옛규정대로 자원에 따라 채워넣는다면 실로 큰 다행이 되겠습니다.
1. 바닷가에서 발을 치는 것은 실로 큰 폐단입니다. 본도의 어민들이 옛날에는 후리그물을 썼는데 20년 전에 영남으로부터 백(白) 가 성을 가진 자가 와서 사람들에게 발을 치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원산 포구에서 시작하여 상당히 이익이 있게 되자, 덕원(德源)·문천(文川) 백성들이 저마다 휩쓸려서 발을 치는 숫자가 나날이 늘어나 원산 포구 내에는 지금 1백 90여 곳에 이릅니다. 그 숫자가 많아지다 보니 고기가 잡히는 것은 전적으로 줄어들고 발을 치는 데 드는 인력의 비용은 수백 냥이 소요됩니다. 이는 모두 빚을 내는 길밖에 없습니다. 발에 따라 또 균역청에 바치는 세가 있기 때문에 일단 실패를 보게 되면 가산을 탕진해가면서 빚을 갚아야 하며, 마을에다 물리고 친족에게 물리면서 세를 바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발을 치는 일이 있는 고을은 그 피해를 받지 않는 백성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는 실로 더없이 큰 걱정거리입니다. 평민들은 본업을 포기하고 장사로 쏠리며, 협잡이 날로 늘어나고 도둑이 난무합니다. 발을 치는 일로 인하여 해마다 소를 잡는 숫자를 계산하면 수백, 수천 마리에 밑돌지 않습니다. 그 폐단이 많다 보니 덕원·문천 백성들은 하나같이 모두 없애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세가 균역청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감히 밑에서 마음대로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만약 특별히 처분을 내려 속히 금지하고 균역청에 바치는 세도 면제해준다면 덕원과 문천 백성들이 아마 소생할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바닷가 여러 고을에서 발을 친 것이 있는 곳은 일체 금지하게 하소서.
1. 신이 염탐했을 때 죄를 줄 만한 교활한 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출도하지 않고 그저 꾹 참았을 뿐입니다. 함흥 윤후삼(尹厚三)의 경우는 영남의 쌀을 사들이는 일을 주관하면서 사사로이 배 1척분을 실어 왔다는 말을 입이 있는 자는 다 말하므로 함경도 백성들은 모두 이를 갈면서 그의 살점을 씹으려고까지 합니다. 경성(鏡城)에서는 한(韓) 가 성을 가진 경주인(京主人)과 최(崔) 가 성을 가진 영주인(營主人)이 있었는데, 하나는 경성에 살고 하나는 함흥에 살면서 멀리서 서로 내통하며 모리를 좌우하고 있습니다. 육진 수령이 세포(細布)·초피(貂皮)·인삼(人蔘) 등의 금물(禁物)을 실어오는 것은 모두 이 두 사람의 하는 것이라, 도내의 재물을 당기고 푸는 것이 그들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권한은 감사를 능가하고 수령을 지휘하곤 하니, 이것이 또 향리 중에 교활한 무리이며 민생을 해치는 좀벌레입니다. 이상 3인에게 그 경중에 따라 각별히 법을 적용하는 조치를 그만둘 수 없습니다.
1. 본도의 역참(驛站)은 역시 변방을 방비하는 데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찰방을 선발할 때 대부분 적임자를 고르지 못한 결과 금법이 점차 해이해져서 역마를 함부로 타고 파발을 늘리며 말먹이를 훔쳐내는 통에 역참은 재정이 피폐되고 줄어들어 점점 제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건대,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역참몫의 토지가 복사(覆沙)에 밀려들어가고 있으나 호수(戶首)가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는 것이며, 둘째는 말먹이를 공급하는 것을 각 역참에서 해결하는데 그 값을 본 고을에서 받아내는 것입니다. 전토가 피해를 입은 곳은 모두 고쳐 측량하여 편리한 대로 조치를 취해야겠습니다. 말먹이를 공급하는 일은 십수 년 전부터 역참의 길이 지방 관아와 거리가 좀 먼 곳에는 고을에서 역참까지 나가는 것이 형편상 미칠 수 없어 주객(主客)이 곤란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말먹이의 공급을 언제나 역로에게 해결하게 하고 일이 끝난 뒤에 고을에서 값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수령과 교활한 아전들이 늘 조절하여 될수록 값을 삭감합니다. 이 법을 시행하면서부터 각 고을에서는 폐단이 크게 줄었지만 역로는 점차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만약 관리 한 사람을 특별히 정하여 각 역참의 길 옆에 살면서 초료(草料)028) 를 소유한 이상의 사객(使客)을 담당하여 접대하게 하고 고을로부터 나중에 계산해 주게 하면 고을과 역참이 둘다 편리할 것이니, 이것이 사리에 적합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김종수, 비국 유사 당상(備局有司堂上) 정민시(鄭民始)·이문원(李文源), 병조 판서 이갑(李𡊠), 이조 참판 이병정(李秉鼎), 북도 암행 어사 서영보(徐榮輔)를 불러 접견하였다. 김종수가 아뢰기를,
"북도에 전염병이 돌아 앓지 않는 집이 없어 그 정상이 참혹하다고 합니다. 전에는 이럴 때에 여제(癘祭)를 지낸 관례가 있었으니, 해조에 분부하여 향축(香祝)을 내려보내 제때에 지내게 하소서. 거적 장사를 지낸 사람들 가운데 유랑민으로서 호패도, 호적도 없는 자는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그 도신이 여러 고을에 신칙하여 일일이 묻어주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김종수가 또 아뢰기를,
"북도의 민심이 모두 토지를 측량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어사의 서계에서 명백하게 갖추어졌습니다. 추수가 끝난 후 그들의 소원에 따라 완급을 참작하여 차례로 측량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대개 토지를 측량하는 일이 부유한 사람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합니다. 그 측량의 요청을 받을 때 각별히 사실을 조사하여 착오가 없도록 할 뜻으로 엄한 신칙을 내리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어진 정사는 반드시 토지의 구획을 바로잡는 데서 시작된다. 온 고을과 온 도의 토지를 고쳐 측량하는 것이 당장의 급선무가 아닌 것은 아니나,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논의할 수가 없다. 이 일은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농사가 원활하게 되고 고을 수령을 적임자로 얻은 후에, 먼저 실시할 만한 고을부터 차례차례 시행하게 하라. 북도에서 속전(續田)에 대해 세를 징수하는 폐단에 관해서는 이미 들었다. 만약에 백성을 괴롭히지 않고 편리하게 바로잡을 계책이 있다면 당장 시행한들 무엇이 어렵겠는가. 도내 각 고을에서 모두 단천(端川)에서 시행한 편리한 예를 사용하고 있으니 다른 고을에 옮겨 시행하는 것은 실로 양쪽이 다 편리하게 하는 정사에 맞을 것이다. 고을에서 예년 조세의 총수량에 비교하는 일은 각 고을에 물어 금년부터라도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종수가 또 아뢰기를,
"진상하는 녹용값을 조정에서 보태준 액수에 대하여 어사의 서계 중에도 역시 비싼 값 중에서도 비싼 값이라고 하였습니다. 녹용값이 점점 더 비싸지고 각 고을에서 고달프게 핍박당하는 것은 모두가 영주인(營主人)과 독점 상인들이 공모하고 영리를 독점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정의 혜택이 이들의 농간으로 인해 막혀서 시행되지 못하니, 참으로 매우 가슴아픈 일입니다. 신이 지금 약원(藥院)에서 일을 보면서 들으니, 나삼(羅蔘)이 극히 귀해지는 폐단 역시 영남 감영의 관속과 독점 상인배가 이권을 독점하고 조종하기 때문이며, 5,6배의 높은 값을 주고 사서 진상하는 것도 모두 가삼(家蔘)이기 때문에 계속 퇴짜를 맞는다고 하니, 일이 너무도 한심합니다. 지금 사실을 조사하여 엄히 징계할 계획이었는데, 북도에서 녹용을 독점하는 상인의 폐단에 대하여 어사가 이미 목격하였습니다. 소청에 의하여 감영 근처의 독점 상인들을 조사해내어 형장을 쳐 귀양보내소서."
하니, 따랐다. 김종수가 또 아뢰기를,
"북도의 화속(火粟)에 대해서는 아무런 폐단이 없는데, 유독 안변 한 고을의 폐단이 가장 심한 데다가 평사 화속(坪社火粟)의 명목이 더욱 해괴합니다. 각별히 사실을 조사한 후 그것을 바로잡아 수습할 방도까지 강구 열거하여 장계로 상문하라는 뜻으로 감사에게 분부하소서."
하니, 따랐다. 김종수가 또 아뢰기를,
"북도의 속전(續田)에 대한 폐단은 영흥(永興)과 홍원(洪原)이 가장 심한데 반하여 단천(端川)·명천(明川)·문천(文川)은 유독 폐단이 없으니 필시 곡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사가 비록 영흥·홍원에다 단천 등 고을의 예를 적용하자고 요청하지만 헤아리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감영과 병영에 가솔군관(假率軍官)을 창설한 것은 본디 군사에 대해 지출하는 비용을 위한 것인만큼 없앤다는 것은 논할 수 없으나, 영흥 한 고을에 7백 명이란 수효는 참으로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덜 데 덜고 보탤 데 보태어 고루 분배하는 방법에 혹시라도 미진한 곳이 있는 경우 백성들이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 역시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청컨대 감사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장계로 상문한 후 품의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김종수가 또 아뢰기를,
"북도의 해변 고을에서 발을 치는 실지의 숫자가 한결같이 균역청의 세안(稅案)에 매여 있어 다시 가감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폐단이 이와 같습니다. 균역청의 세안도 모두 도의 조세 총수량에 비교하는 방법을 적용하되, 감사가 만약 세밀히 조사하여 실태를 밝혀서 저 고을에 새로 늘어난 것을 가지고 이 고을의 옛날 폐지한 것을 보태어 준다면 수량이 서로 알맞게 되고 백성 또한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온 도를 통틀어 발을 없애고 그물을 쓰게 하는 것에 있어서는 설령 백성들의 소원이 다 같다 하더라도 균역청에서 전부 놓쳐버리는 조세를 다른 조항으로 조처할 길이 없습니다. 감사로 하여금 조사 보고한 후 품의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김종수가 또 아뢰기를,
"함경 감사 이병모(李秉模)는 진휼에 대한 행정 조치를 조기에 실시하지 못하고 환자곡에 대한 행정에 있어 받아들이기를 너무 급박하게 독촉함으로써 백성들이 아우성치며 가산을 탕진하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다행하게도 성상께서 특별히 그에게 죄를 주심으로 인해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으며 백방으로 구제한 결과 유랑하던 백성들이 점차 모여든다고 합니다. 병모는 중신으로서 측근에 있다가 나간 만큼 그 심력을 다해야 하는 도리와 전하께서 그에게 기대하며 권면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다르지 않습니까. 잡아다가 신문하고 조처하소서."
하니, 따르고 전교하기를,
"앞서 좌의정의 주달에 의하여 이미 진휼을 끝내기를 기다려 잡아오라는 명이 있었으니 이는 백성을 위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어찌 그와 다르게 할 수 있겠는가. 진휼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즉시 비변사에 보고하게 한 후 해부에 분부하여 도사(都事)를 출발시켜야겠으나 10일 동안 교대 임명한 수령이 그 진휼 사실의 우열과 치적의 가부를 상대하여 논의하기 전에 밀봉하여 아뢰게 하라. 죄를 처결하는 것은 그대로 죄를 처결하는 것이고 백성들의 일은 그대로 백성들의 일인 만큼, 만일 이로 인해 정의롭게 처리함에 있어 사실대로 자세히 보고하지 않으면 해당 감사는 전후를 합쳐 두 가지 죄가 한꺼번에 발로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곧 그 지방에 부처(付處)하는 법을 적용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다. 이렇게 엄중히 신칙하라."
하였다. 이조 참판 이병정(李秉鼎)이 어사의 서계를 가지고 복계(覆啓)하기를,
"안변 부사(安邊府使) 어석정(魚錫定), 문천 군수(文川郡守) 이현도(李顯道), 홍원 현감(洪原縣監) 민사선(閔師宣), 평강 현감(平康縣監) 이명섬(李命暹)은 모두 파면하고, 이성 현감(利城縣監) 장제두(張齊斗), 함흥 판관(咸興判官) 유한돈(兪漢敦), 금성 현령(金城縣令) 어용겸(魚用謙), 거산 찰방(居山察訪) 고은태(高殷泰)는 모두 먼저 파면시키고 나서 잡아들이며, 전 회양 부사(淮陽府使) 강인(姜)은 다시 나문하여 중한 형률로 다스리기 바랍니다."
하니, 모두 따랐다. 이병정이 또 아뢰기를,
"경성(鏡城) 경주인(京主人) 한(韓) 가란 자가 도내의 재물을 제손으로 쥐었다 폈다 한다는 말을 신도 들었습니다. 그가 비록 분배를 장려한 공로가 있으나 그의 아들 한재욱(韓再郁)을 첨사(僉使)로 차임하여 보내는 것은 매우 부당한 듯하니 고쳐 차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는 신의 조에서 회계(回啓)할 일이 아니나 마침 말이 나온 김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따랐다.
병조 판서 이갑(李𡊠)이 아뢰기를,
"병조의 무관 임명에서 매년 출륙(出六)한 수효를 가져다가 상고하니, 갑술년029) 에는 사산감역(四山監役)을 삼도참군(三道參軍)으로 개정하였고, 또 북도참군(北道參軍)을 설치하였는데 각각 30개월 된 뒤에 출륙하였습니다. 근년에는 또 선천내금위(宣薦內禁衛)의 정령(正領)을 1년 도목(都目) 때마다 각각 1명씩 출륙하여 모두 6자리가 되었으며, 그밖에 선천내금위에게 봄 가을 두 분기에 활쏘기 시험을 보이는 것과 선전 관청의 활쏘기와 강받기에서 출륙하는 것 같은 제도는 모두 근년에 창설한 것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직무가 없는 빈 사과(司果)의 숫자가 해마다 달마다 늘어나게 됩니다.
지난해에는 증설한 자리와 비변랑(備邊郞)·종사관(從事官) 등의 관직을 이미 변통 처리한 것이 거의 30명에 가까운데 나머지가 또 18명입니다. 정체를 소통시키는 방법에 대하여 누차 경연 석상에서의 하교가 있었고 신도 성실히 받들어 시행하였으나 사람은 많고 자리는 적다 보니 변통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선전관 추천인 내금위의 봄 가을 활쏘기 시험에서 합격한 자를 6품으로 올리지 말고 법전(法典)의 ‘활쏘기 시합에서 으뜸을 차지한 자와 활을 쏠 때마다 명중시킨 자로서 그가 과거에 합격한 경우에는 가자(加資)한다.’는 예에 의하여 한결같이 모두 가자하는 특전을 주었으면 합니다.
오늘의 문제를 바로잡는 방도는 6품 이상으로 올리는 길을 좀 넓히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두 군영의 종사관 두 자리를 실직으로 바꾸고 해당 군영에서 반드시 참상 실직(參上實職) 중에 자체 추천으로 임명한다면 응당 실직의 자리로 될 것입니다. 포도청의 종사관에 있어서도 모두 실직자로 차출하게 된다면 충분히 6품 벼슬의 길을 변통하는 조건이 될 것입니다. 군기시(軍器寺)의 판관(判官)과 첨정(僉正)이 모두 네 자리로 되었는데 첨정 두 자리를 병조에 넘기고 판관 두 자리는 여전히 자체로 추천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전 관청에서 보이는 활쏘기 시험과 강받기 시험으로 말하더라도 활쏘기와 강받기 두 길에서 각각 수석을 차지한 자를 승급시키거나 6품으로 올리는 규례가 있습니다. 이후부터는 활쏘기와 강받기에서 수석을 차지한 자는 참상(參上)인 경우에는 응당 승급해야겠지만, 참하(參下)인 경우에는 활쏘기와 강받기에서 다같이 장원한 자를 제외하고는 근무기간이 찰 때까지 기다려 6품으로 올린 다음에 서용하는 것이 실로 6품으로 올리는 길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길일 것입니다. 준직(準職)으로 말하더라도 다만 훈련원 정(訓鍊院正) 한 자리가 있을 뿐이기 때문에 신분의 여하는 막론하고 승전(承傳)이 있기 무섭게 훈련원 정으로 밀어넣게 되니, 관리 위임이 문란하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군기시 정을 옛 규례대로 선출하여 통틀어 차임하면 참상(參上)으로 올라가는 첨정 및 두 군영의 종사관을 합쳐 모두 다섯 자리가 되므로 해결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관이 출륙(出六)한 후 빈 사과(司果) 자리에 침체되어 있으니 민망한 일이다. 근년에 임시 가설한 자리로 변통하고 있는데, 겉으로는 수용하는 것 같으나 사실 적체되기는 일반이다. 품계를 올리거나 지방관으로 나가거나 또는 도태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앞서 추가로 설치한 것도 미처 배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새로 6품으로 오른 사람들은 여전히 가득 차있다. 만약 당상관의 자리와 외직의 자리를 새로 늘리거나 출륙(出六)의 길을 점차 줄이는 조치가 없이는 그 폐단은 영원히 가실 때가 없을 것이다.
대체로 관리 임명은 지극히 중한 일인만큼 흐리멍덩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종사관(從事官)·비변랑(備邊郞)·파총(把摠)과 같은 빈 직함을 한때 임시 실직의 자리로 만드는 것을 항상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겨왔고, 그 종사관이라는 명칭으로 영영 실직으로 만드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지금 경이 두 군영 종사관의 녹과(祿窠)를 그대로 실직 자리로 눌러두자고 청하였는데, 이는 그대로 시행하되 그 녹봉을 가지고 실직으로 만들면 그만이다. 자체로 추천하는 일은 감목관(監牧官)의 전례에 의하여 각종 실직 중에서 통틀어 자체로 추천하여 임명하는 것이 좋겠다.
포도청의 실직 종사관 네 자리에 이르러서는 침체되어 있거나 벼슬에서 떨어진 자에게 녹봉의 혜택을 주는 밑천으로 삼아왔던 것인데, 저쪽에서 빼앗아다가 이쪽에 주는 것 역시 민망한 일이니 그대로 두라. 군기시 첨정에 대한 일은 근래 장용영(壯勇營) 초관(哨官)을 이동시키는 규정이 있어서 중인이나 서자에 있어서는 실로 전에 없던 혜택을 입게 되었는데 사람들의 마음은 만족을 모르고 있다. 군기시 첨정을 서반 실직(西班實職)으로 옮기는 일도 몹시 난처하니, 이것 역시 그대로 두라. 군기시 정을 다시 설치하는 일은 옛날에 있던 것을 지금에 없애어 공연히 문신을 위해 대사(大射)의 이름을 붙여놓고 쓸데없는 자리로 남겨두는 것보다는 지금 벼슬자리가 적은 때에 와서 다시 설치하는 것 또한 좋겠다. 그대로 시행하라. 선전관에게 활쏘기와 강받기 시험을 거쳐 출륙(出六)하는 일에 대해서는 경의 말에 의하여 활쏘기와 강받기에 모두 장원한 자는 6품으로 올리고 그렇지 못한 자는 벼슬만 올려주었다가 6품으로 승급된 후에 서용하라. 이로 인해 규정으로 정할 것이 있다. 다섯차례를 연이어 과녁을 맞혔다는 것은 곧 한차례도 실수가 없이 순전히 맞힌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요즈음 해당 관청의 별지 보고에는 다섯차례 중 사이를 뛰운 것도 또한 다섯차례 연달아 맞힌 규례를 적용하고 있다. 이후에는 이러한 규례를 엄금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전교하였다.
"부채를 반포할 날이 내일인데 양사(兩司)에는 공무를 볼 사람이 없다. 전례를 보존하는 의리에 있어 너무도 볼 모양이 없으니, 정사를 열어 차출하라."
정호인(鄭好仁)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조승(李祖承)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조실록30권, 정조 14년 1790년 6월 (5) | 2025.08.03 |
|---|---|
| 정조실록30권, 정조 14년 1790년 5월 (4) | 2025.08.03 |
| 정조실록29권, 정조 14년 1790년 3월 (3) | 2025.08.03 |
| 정조실록29권, 정조 14년 1790년 2월 (5) | 2025.08.03 |
| 정조실록29권, 정조 14년 1790년 1월 (8) | 2025.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