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0권, 정조 14년 1790년 5월

싸라리리 2025. 8. 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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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신사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다.

 

5월 2일 임오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여제(癘祭)를 지냈다. 하교하기를,
"어제 함경도에 나갔던 어사의 말을 들은 결과 북관 백성들의 일이 몹시 불쌍하다. 이태를 거듭 흉년에 시달리고 작년에는 조세 독촉에 곤욕을 겪었는데, 봄이 되자 전염병이 저렇게 극성하다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편안히 앉아 있을 경황이 없다. 여제를 지내도록 하라. 일전에 대신이 입시하였을 때 그로 하여금 관례대로 회계하게 하였는데, 집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으며 호패도 없고 호적도 없어 푯말을 세우려고 하여도 세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강 파고 거적장으로 매장한 일들은 더욱 측은하다. 묘당으로 하여금 일전에 경연에서 내린 지시대로 각각 그 지방 고을에 별도로 하나의 단을 쌓고 원래의 격식대로 여제를 지내는 외에 따로 제사를 차려 지내게 하라. 평안도에서인들 무엇이 다르겠는가. 원 규정대로 지내는 여제 외에 따로 차려 지내는 제사를 북관의 예대로 하라."
하고, 이어 직접 제문을 지어 내려보냈다.

 

내수사(內需司)가 직접 지방고을에 공문을 띄우는 일이 없도록 금지하였다. 앞서 영남에 나갔던 어사의 보고에
"하동의 관둔전(官屯田)에서 같은 토지에 이중으로 과세하였다."
는 말이 있기에, 이 일을 본도에 내려보냈더니 경상 감사 이조원(李祖源)이 장계하기를,
"이 토지는 본디 명선궁(明善宮)의 둔전이었는데, 병신년030)  에 궁의 둔전을 없애고 내수사에 이관한 결과 결복(結卜)은 호조에 넘어갔습니다. 그후에 내수사에서 호조에다 엄한 말로 공문을 뛰우고 한결같이 높은 배율로 조세를 징수함으로써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토지도 경작되는 것이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부터는 경작하는 대로 조세를 거두되 한결같이 백성들의 자원에 따라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하건대, 직접 공문을 띄우는 폐단에 대하여는 본디 금령이 있는 것으로써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리고 내수사는 더욱 외부의 관청과도 다르며, 이른바 관리한다는 사람은 담당 내시이고 명색이 관원이란 자는 서리(書吏) 따위들이다. 설사 중앙관청의 문서라도 모두 서리가 하기 때문에 원래 첩정(牒呈)을 썼고 통관(通關)이 없는데 더구나 지방관청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근래에 지방 고을에 공문을 보내는 등의 일은 큰 월법이 될 뿐만 아닌데 게다가 혹시라도 공문을 직접 띄우기라도 한다면 그 죄가 어떠하겠는가. 이후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법을 어기는 폐단이 있을 경우에는 내수사부터 먼저 엄중히 다스릴 것이며 해당 담당 내시는 형장을 쳐 귀양보내고 행수관리(行首官吏)도 또한 마땅히 형장을 쳐서 귀양보내야 한다. 이것으로 각 관청에 엄히 신칙하여 함부로 위반하는 관리도 마땅히 법에 의해 엄중히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5월 3일 계미

승지(承旨) 홍성연(洪聖淵)이 아뢰기를,
"신이 고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에게 치제(致祭)하는 길에 그의 아내가 당시에 절의를 지켜 죽은 사실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기풍은 들을수록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부조(不祧)를 요청한 데 대해서는 이미 허락을 받았으나 표창의 정문(旌門)을 세워주는 은전은 아직까지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절의를 높히고 권장하는 조정의 도리로 볼 때 결함이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정문으로 표창하는 은전에 대하여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품의 조처할 것을 명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은 말하기를,
"봄에 선비들이 올린 소(疏)를 보았는데 실로 그 남편에 그 아내라고 말할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긴요한 말은 ‘자진(自盡)’ 두 글자에 불과하고 그밖의 늘어놓은 말은 신원하기 전에는 신주(神主)를 매안하지 말라는 부탁뿐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부탁은 물론 몹시 애절하지만 이는 규방에서 말한 사적인 말이며 자진이라 운운한 말에 이르러는 내용이 좀 소략합니다. 수백 년이 지난 뒤인 지금 어떻게 그 당시의 사적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정문을 내리는 것은 중대한 일이고 은전은 마땅히 아껴야 합니다. 부조(不祧)를 명한 것만으로도 벌써 세상에 드문 특별한 은전인만큼 부인의 정문을 내리고 내리지 않는데 따라 그의 절의가 보태어지고 덜릴 것은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김종수(金鍾秀)의 의논도 같았으므로 끝내 중지되고 말았다.

 

전교하였다.
"지금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의 집에 치제(致祭)하고 온 승지의 복명으로 인하여 그 자손들의 참반록(參班錄)을 가져다 보니 자그만치 50명이나 되었다. 참으로 그 자손이 번창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9대손인데 8대 이전까지는 모두 벼슬을 하여, 문관으로는 대간·시종관·참방을 지냈고 음관으로는 수령과 수릉관(守陵官)을 지냈으며, 또 호조 판서·도승지의 증직을 특별히 받은 자도 있었는데, 유독 지금 제사를 받드는 사람만이 초임 벼슬의 직함도 없다. 요즈음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옛날만 못하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만하다. 진사(進士) 김상협(金商協)을 초임으로 등용하라. 또 유생의 참반록을 보니 역시 수백 명에 가까운 많은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반열에 참여하였으니 역시 아직도 선배다운 여풍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서울에 사는 선비로서 이와 같은 모임에 나가지 않는 자들이 이것을 보게 된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고 명신 문간공(文簡公) 박상(朴祥)은 공이 똑같은 사람으로서 그 후손이 서울에 많이 살고 있다 하니, 정원으로 하여금 그의 집에 옛날부터 보관하고 있는 문적을 찾아내 보고하게 하라."

 

5월 4일 갑신

이조승(李祖承)을 이조 참의로, 조원진(曺遠振)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황해도 관찰사 이시수(李時秀)가 장계하기를,
"전 신천 군수(信川郡守) 김반(金鎜), 전 황주 목사(黃州牧使) 홍원섭(洪元燮), 문화 현령(文化縣令) 서명존(徐命存), 송화 현감(松禾縣監) 윤재급(尹載伋), 전 배천 군수(白川郡守) 유병균(柳秉均)은 모두 마교(馬轎)를 탔으며, 서흥 부사(瑞興府使) 한백림(韓栢林), 전 재령 군수(載寧郡守) 홍선양(洪善養), 해주 판관(海州判官) 조명준(曺命峻), 토산 현감(兎山縣監) 김사희(金思羲)는 모두 부담기(負擔機)를 탔습니다. 그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품의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여러 도의 수령을 논죄하는 규정에 작은 죄는 파면시켜 내쫓기만 하고 큰 죄는 우선 파면시켜 내쫓고 나서 처벌을 청하는 것이 바로 일반적인 준례임에도 불구하고 평안 감사가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파면시키는 것을 난처하게 여겨 파면시키지 않고 그저 품의 조처할 것만을 청하였으니, 죄명은 중한 것 같으나 벼슬은 실로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지금 황해 감사 또한 이 수법을 적용하고 있다"
는 내용으로 전교를 내려 엄히 책망하고 추고할 것을 명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교자를 타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는 일은 얼마나 거듭 강조하였습니까. 그런데도 함부로 범하는 수령이 이처럼 많으니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번에 교자를 탄 수령들을 모두 파면시켜 내쫓고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신문하여 중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부담기(負擔機)는 마교(馬轎)와는 좀 다르므로 일례로 처벌할 수는 없겠으나 역시 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탄 것이니, 부담기를 탄 수령도 함께 파직하소서. 배천 군수 유병균은 여러 수령들이 자수할 때 유독 자수하지 않았습니다. 이 몹시 한심한 일이니 먼저 파면시키고 나서 잡아다가 각별히 엄중하게 다스리소서. 금교 찰방(金郊察訪) 최석규(崔錫圭)는 봉명 도사(奉命都事)가 함부로 마교를 타는데도 규례대로 말을 내주고 감영에 보고도 하지 않았으니 실로 매우 해괴한 일입니다. 감사가 이미 파직 출송하였으니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하여 죄를 판정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근래의 정령이 지나치게 두루뭉실하기 때문에 기회를 엿보는 습속이 결국 제멋대로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 바, 이것은 탐욕이 아니면 모두 법을 어기는 것이다. 이러고서도 조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교자를 타는 것에 대한 자그마한 금령은 수명(修明)하는 한가지 조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운 일이어서 죄를 범하는 자가 꼬리를 무는 것인가. 그 가증스럽기가 도리어 법을 크게 어긴 것보다 더 심하다. 더구나 현재 발각된 사람들은 외척이 아니면 인척이며, 전관(銓官)의 아비가 아니면 각신(閣臣)의 숙부이며 감사의 아들이다. 황주 목사(黃州牧使)는 세 가지 죄가 함께 드러났으며 서흥 부사(瑞興府使)는 나라의 은혜를 저버렸다. 이와 같은 무리에게 곱절 더한 율문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금지시키겠는가. 의당 별도의 처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드러난 삼도 밖의 아직 보고되지 않은 여러 도의 감사도 다같이 봉록을 1분기씩 줄임으로써 각각 가까운 시일내로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라. 이와 같이 거듭 금지한 뒤에 진짜로 병이 있는 사람을 위한 방법으로써 마땅히 일정한 규례를 만들어 여러 도에 반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경들은 잘 의논하여 초기(草記)하고 규정을 정하여 각도에 알리라."
하였다.

 

5월 5일 을유

이치중(李致中)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천행(朴天行)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6일 병술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심환지(沈煥之)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홍병찬(洪秉纘)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헌납 이언호(李彦祜)가 상소하기를,
"권유(權𥙿)가 올린 한 장의 상소는 오직 순수한 충심으로써 사실 정의를 붙들어 세우려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윤허를 내리지 않고 도리어 꺾어버리고 또 귀양을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처분이 지나치자 한 대간이 용서를 청하는 계사를 올렸는데, 여기에서 공론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뛰어들어 즉시 정지한 자가 있었으니, 그는 과연 무엇을 하는 자입니까. 오대익(吳大益)처럼 탐오가 낭자한 자도 요행히 받아야 할 율문을 모면하고 대대로 용서하는 조치를 그릇되게 입었으니, 이것이 어찌 법을 집행하는 논의에 있어 감히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붓을 한번 휘둘러 조금도 거리낌없이 두 계(啓)를 함께 정지시켰으니, 당파를 위하여 죽기를 달게 여기는 버릇이 반드시 이처럼 방자 무엄한 후에야 그 마음이 시원하단 말입니까. 이것을 그대로 둔다면 앞으로 닥쳐올 우환이 필경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그때 두 계를 정지시킨 대신을 빨리 사판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고, 권유(權裕)에게는 특별히 은혜로운 용서를 내리며, 오대익(吳大益)에게는 빨리 헌부가 올린 계를 윤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권유의 일에 대하여 좌우로 두둔하기를 이처럼 성실히 하는 것은 당파가 아니고 무엇인가. 설사 이미 석방에 뜻을 두었더라도 너희들처럼 당파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말을 들을 때 ‘물한년(勿限年)’의 귀양도 오히려 너무 경하다고 하겠다. 너희 일이 천만번 온당치 못하다. 이처럼 낡은 습성을 감히 오늘날에 실현해 보려는 것인가. 해부로 하여금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의 죄안에서 권유의 이름 밑에 ‘물한년’으로 고쳐 기록하게 하라.
유운우(柳雲羽)의 일은 그 정계(停啓)를 얼핏 보니 과연 당돌한 혐의가 있다. 다시 원계(原啓)를 상고하니, 참작하여 처리한 뒤에 나온 부계(府啓)가 아니고 바로 최초에 조사할 것을 청한 정원(政院)의 서계라고 한다. 그렇다면 단락이 각각 다르므로 응당 정지할 일에 속한다. 네가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잘 살피지 못한 것이니 이것 역시 당욕(黨慾)에 가리워 사실을 분변치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너에게 다시 서용하지 않는 처벌을 내린다. 그리고 권유의 원계로 말하면 정지하지 않아도 저절로 정지하게 될 것인데, 운우는 추후에 끼어들어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을 도출하였으니, 이것 역시 사적인 것이요 공적인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처신할 때는 안정을 기대할 수 없으니, 역시 서용하지 않는 처벌을 내린다."
하였다.

 

5월 7일 정해

좌의정 채제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국법에 문관의 당상으로 수령이 된 자가 아니면 교자를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위계가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또 교자를 타는 데도 여러가지 구분이 있으니, 덮개는 있으되 좌우의 휘장을 걷어올리는 것이 있고, 휘장은 없고 덮개만 있는 것이 있고, 덮개는 없으면서 밑바탕만 꾸민 것이 있고, 시속에서 말하는 부담기(負擔機)란 것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밑바탕만 꾸민 것은 비록 덮개가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나 이미 두개의 채를 밖으로 나가게 하고 하인들이 그것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비록 승교(乘轎)라는 이름을 붙여도 또한 불가하지 않습니다만, 부담기로 말하면 그 만든 방법이 교자와 다르며 또 밖으로 나간 채가 없으니 단지 다리나 쉬게 하는데 불과합니다. 그런데 감사가 아뢴 것 중에 뒤섞여 거론된 것은 너무나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대개 평안도의 수령은 무관이 절반은 차지하고 문관이 간혹 끼었으며, 당하관의 경우는 문관·음관을 막론하고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지금 직접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것이 이처럼 계속되다가는 도로에 왕래하는 행차가 끊임없이 빈번하여 이조의 정사가 날마다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 추측해보면 삼남(三南)과 관동(關東)의 수백 고을이 거의 모두가 당하관인 음관인데, 직접 고발하는 것이 차례로 이르게 된다면 모면할 자가 그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중에 불량하고 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이로 인해 귀양가는 것이 실로 다행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라면 또한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수령을 교체하는 것이 서울에 앉아서 보기에는 한개의 종이쪽지에 성명을 써내는데 불과하여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관리가 문서를 뒤바꾸고 국곡(國穀)을 도둑질하는 것은 오직 이 기회를 타는 것입니다. 더구나 삼남은 본래 말을 세내는 것이 없는 관계로 신구 수령이 서로 교체될 때에는 그 인부의 삯과 함께 모두 민결(民結)에서 책출하여, 큰 고을은 1천여 냥에 이르고 작은 고을 역시 1천 냥에 가깝습니다. 가령 1년 내에 수령이 두 번 교체되면 백성들에게 거두는 것이 수천 냥이 되니, 불행히도 세 번 교체하게 되면 가난한 백성들에게 폐가 되는 것이 실로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교자를 탄 죄는 엄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지만 부담기를 탔다는 지적을 받은 경우 이미 차대(差代)한 사람은 비록 혜택이 미칠 수 없다 하더라도 앞으로 부임하는 사람은 특별히 관대히 용서하여 숱한 빈자리를 내는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마를 탄 사람에 대해서는 비록 부담기를 탔어도 또한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성명께서 헤아려 채택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일전에 황해도의 수령이 교자를 타고 부담기를 탄 사건으로 인하여 해당 감사가 장계를 올려 논죄를 청하였다. 경들에게 초기(草記)하여 품의 조처하게 한 것은, 앞서 평안도의 수령을 처분할 때에 등급을 나누어 구분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니만큼 마음 속으로 경들의 회계(回啓) 역시 그러하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초기를 보니 약간의 한계를 두기는 하였으나 부담기를 탄 사람 역시 파면시키는 가운데에 들어있었다. 그러므로 그때의 비답을 평안도의 전례에 의하여 조사(措辭)하려 하였는데, 고발 속에 들어있는 자는 모두 응당 형률을 곱절로 적용해야 할 자들이었다. 비록 전관(銓官)을 시켜 차대(差代)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늙고 병든 사람을 용납할 방도가 없을 것을 염려하여 다시 경들에게 잘 토의하여 품의 조처하게 하였던 것이니, 내 생각 역시 교자 타는 것을 금함에 있어 엄히 하지 않을 수 없으나 한계를 또한 두지 않을 수 없다고 본 데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경의 차자를 보니 참으로 일리가 있다. 다시 우의정과 상의하여 하나로 결정지어 회계함으로써 조정의 영이 오래도록 시행되게 하고 여러 수령들 또한 준수하기 편리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사치를 숭상하는 풍속이 점차 성행함으로써 늙은 당하관이나 젊은 당하관을 논할 것 없이 일단 수령으로 제수되기만 하면 서로 경쟁이나 하듯 교자를 타고 좌우에 휘장을 드날리면서 큰 길로 마구 달리니, 이를 징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규율을 엄히 정하여 오래도록 준수하게 해야 합니다. 덮개가 있는 교자를 탄 자는 좌우에 휘장이 있건 없건을 막론하고 율문을 상고하여 귀양보낼 것이며, 밑바탕만 있는 것을 탄 자도 또한 법을 어기고 함부로 탄 것에 속하므로 드러나는 족족 계문하여 논죄 파면해야 합니다. 늙고 병들거나 젊었어도 실지로 병이 있는 자로서 먼 길을 가야 할 경우에 있어서는 의당 곡진히 용서하는 길이 있어야 합니다. 채가 없는 부담기는 그 만듦새가 졸렬하여 원래 사치로울 것이 없으며, 비실대는 말이라도 혹시 도움을 받아야 할 경우에는 부담기를 타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몸도 의지하고 다리도 쉬게 해야 할 것입니다. 봉명 사신의 행차에 병고가 있어 혹시라도 부담기를 탈 경우에는 개인의 말은 탈 수도 있지만 역마에다 짐을 싣는 것은 본디 조정의 금령이 있어 그 죄는 덮개가 있는 교자를 탄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규정을 만들어 공문으로 알려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수원부의 득중정(得中亭)·진남루(鎭南樓)·좌익문(左翊門)·강무당(講武堂)·와호헌(臥護軒) 및 창고와 행랑이 완성되었으니, 모두 3백 40여 칸이었다. 연악(宴樂)을 내려주어 낙성을 축하하게 하였다.

 

5월 9일 기축

제주 목사 이철모(李喆模)가 치계하였다.
"본섬은 지난해 흉년이 들었습니다. 환자곡을 받은 민호에게 그 완급에 따라 차례로 뽑아 구제 대상에 넘겼는데, 걸식하는 기민이 장년과 노약을 합쳐 모두 3백 19명입니다. 신이 따로 마련해두었던 쌀 1백 12섬을 가지고 10일마다 일정하게 분배한 결과 다행히 1명도 굶주리는 일이 없습니다."

 

5월 10일 경인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를 북쪽 후원에서 거행하고 이어 문희묘(文禧廟)에 나아가 거기에서 밤을 지냈다.

 

우의정 김종수가 아뢰기를,
"지난해 섣달 도정(都政) 때에 서배수(徐配修)는 파직대상 속에 있었는데 동벽(東壁)에 추천되어 있었으며, 어제 있었던 정사에서 이언식(李彦植)은 남원 부사(南原府使)로서 황주 목사(黃州牧使)의 수망(首望)으로 추천되었습니다. 음관(蔭官)의 초임 원으로서 군(郡)으로, 부(府)로 승급되었다가 이어 목사로 올라갔는데, 이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그 외람되고 질서가 없음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수십년 전에 대신이 경연에서 주달하여 엄히 방지할 것으로 규정을 정해 놓았습니다. 그후 수차에 걸쳐 그릇된 관례가 있었고 혹은 하교로 인하여 격식을 어긴 적은 있으나 애초부터 정해진 규정을 도로 취소한 것은 아니었는데, 지금 전조(銓曹)가 임의로 파괴해버리니 일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음관으로서 출륙(出六)한 사람은 한 차례의 평가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수령으로 임명한다는 것이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사에서는 한 차례의 평가도 거치지 않은 채 고을에 제수되는 자가 매우 많으니, 이 역시 옛 규정이 점점 없어져가는 하나의 실례입니다. 청컨대 해당 전관(銓官)을 되도록 중한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11일 신묘

문희묘에 친제(親祭)하였다.

 

5월 12일 임진

사간 최훤(崔烜)이 상소하기를,
"윤시동(尹蓍東)을 전라 감사로 특별히 제수하라는 명은 또한 어떻게 된 것입니까. 만약 윤시동이 애초에 이윤욱(李允郁)의 상소가 역모의 계기가 됨을 알지 못하여서 인용한 것이 과연 무지 망작(無知妄作)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의 두 번째 상소는 사단이 환하게 드러나서 성토가 준엄하게 벌어진 뒤에 나왔는데도 오히려 감히 말하기를 ‘이윤욱은 영남 사람으로서 능히 이렇게 할 수 있었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를 의리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며 앞서 올린 상소에 인용한 것에 대해 변명하는 본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천만 번 무엄한 일입니다. 또 도총관(都摠管)으로 특별히 제수된 후에 상소할 때에는 그의 분의상 응당 김상로(金尙魯)와 계희(啓禧)를 성토하고 이윤욱을 엄히 배척함으로써 스스로 변명하고 오점을 씻을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임에도 애당초 일언반구도 이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스스로 변명한 것이란 성상의 하교를 빙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많은 말을 허비해가면서 변명하기를 일삼을 필요가 없다.’ 하고, 특히 그뒤에 한 장의 상소문을 적절하게 말을 구사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자신을 책망하며 사죄나 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 전후 두 차례의 상소를 미루어 볼 때 겉으로는 자복한 것 같지만 그 기본적 관계에 대해서는 아예 조금도 스스로 굽힌 것이 없습니다. 이런데도 오히려 무지 망작으로 돌려 용서하고 죄를 벗겨주는 대상에 둘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은혜를 저버리고 죄를 범한 사람에게 감사의 임무를 맡기는 것은 외직으로 내보낸 것이나 좌천시킨 것이 아니라, 곧 골라서 임명한 것이며 권장하여 등용한 것입니다. 의리가 이로 말미암아 더욱 어두워지고 명령이 이로 말미암아 엄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더구나 지금 원수를 진 달이 닥쳐와서 원통한 마음이 더욱 새로운 때에 어찌 이런 사람에게 몸소 감사 깃발을 날리면서 양양자득한 태도로 수원의 앞길을 지나게 할 수 있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윤시동을 전라 감사로 새로 제수하는 명을 특별히 취소하소서."
하였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개성 유수 구상(具庠)이 상소하여 군영과 고을이 피폐한 폐단을 극력 진술하고 국고에 보관된 돈 5만 냥을 꾸어주어서 소생시킬 밑천으로 삼게 할 것을 청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품의 조처하게 하였다.

 

정언 조진정(趙鎭井)이 상소하기를,
"인한(麟漢)·정후겸(鄭厚謙)·항열(恒烈)·이재간(李在簡)의 일관된 흉계와 지해(趾海)·술해(述海)·상범(相範)·계능(啓能)의 온 집안으로 연결된 역모에 대해서는 이미 처벌의 조치를 취했으나 화란의 근본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정처(鄭妻)031)  의 임금을 해치려는 음모에 대해서도 오히려 아직 서울 근처에서 숨을 쉬고 있게 하며, 귀주(龜柱)의 하늘에 사무치는 대역에 대해서도 끝내 좋은 땅에서 편히 죽게 하였으며, 김상로(金尙魯)의 극악함에 대해서도 대역에 과하는 율을 시행하지 않았으며, 홍양해와 한후익의 승냥이와 이리같은 심보에 대해서도 조사해 밝히는 법을 다하지 않았으며, 홍국영(洪國榮)은 큰 계책을 저해하고 송덕상(宋德相)은 네 글자로 흉악한 말을 하였으나 그 소굴을 깨뜨리지 못해 민심이 빠져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점차 택수(澤洙)와 백망(白望)이 임금에 대해 욕질하게 만들고, 율(瑮)과 복(福)이 공모하여 군사를 일으키게까지 만들었습니다.
역적 김하재(金夏材)의 변고는 하늘과 땅 끝까지 다하고 만고를 통해서 없었던 것인데도 이괄(李适)에게 적용한 율문을 아직도 망설이고 있으므로 흉악한 잔당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김우진(金宇鎭)과 조시위(趙時偉)의 사나운 짐승같은 자에 대하여 혹은 귀양의 벌을 주거나 혹은 위리 안치하는 정도에 그치고 역적 구선복(具善復) 하나만 처단하고 그만두었습니다. 그러고서도 천벌이 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은정으로 정의를 가리울 수 없으며 사사로운 일로 공적인 일을 폐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은혜로운 마음의 우애로 섬에 귀양간 죄수를 보호하고 싶더라도 종묘 사직의 중대함과 신령과 인민의 분개에 대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속히 피를 머금고 올린 청을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오직 저 승열(承烈)은 평소에도 수비를 근실히 하지 않았거니와 최후에 올린 예사로운 상소 또한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에 해당한 율문을 쾌히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요사하고 흉악한 역적으로서 재간과 같은 자는 우진과 시위를 안팎으로 삼고 신기현(申驥顯)·김상로(金尙魯)와 결탁하여 사방에 포진해서 남을 모함하다가 신령의 주벌이 먼저 미쳤습니다. 뭇사람들의 통분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빨리 유사에게 명하여 즉시 그 처자를 종으로 삼는 법을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그 단서를 규명하는 길은 오직 송익로(宋翼魯)를 잡아다가 국문하여 진상을 알아내는 데 있습니다. 신기현(申驥顯)이 상소를 올려 역적의 무리에게 공로를 세우려고 시도하였다는 형조 죄수의 공술을 보니 더욱 저도 몰래 가슴이 섬뜩해집니다. 신은 기현에 대해 국청을 열어 엄히 신문하여 국법으로 결정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이조 판서 홍양호(洪良浩)는 그가 추천되던 초기에 공론에 맞지 않았는데도 제수되는 즉시 태연하게 공무를 집행하니, 여기에서 이미 청렴과 의리는 아예 없다는 것을 엿볼 수 있고, 정망(政望)의 추천에 있어서는 또 해괴하고 분개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저 심낙수(沈樂洙)의 연전 상소는 그 의도가 음험하여 반드시 관리들을 일망타진하고야 말겠다고 하였으므로 이조에서는 관직에 추천하지 않은 지 오래이며 또 더구나 역적 재간에게 빌붙어 정망(政望)에 간여함으로써 온 세상의 지목을 받았으니, 그러고서도 아직까지 당여(黨與)의 주벌을 면한 것은 실로 뜻밖입니다. 그런데 홍양호는 그와 끊기 어려운 무슨 정이 있기에 전랑(銓郞)이 빠뜨린 후보자라고 칭하면서 자기의 죄로 돌리고 계속 다시 관리의 인사가 있을 때마다 청요직의 자리에 추천하여 마치 공로나 갚는 것처럼 한단 말입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돌아보고 꺼리는 마음이 있다면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고응관(高應觀)을 청요직에 허통한 경우는 더욱 그 방자무엄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전 이조 판서 홍양호에게는 삭탈할 것을 명하고 심낙수를 삼사에 의망한 것까지 함께 개정할 것을 명하여 먼 변방으로 내쫓는 규정을 적용함이 옳다고 봅니다.
아, 좌의정 채제공은 전부터 은혜를 저버리고 죄를 범한 것이 과연 어떠하였는데 턱없이 비호하며 죄를 씻어준단 말입니까. 이는 대개 표준을 세우는 전하의 지극한 뜻에서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일단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고부터 밤낮 생각해낸 것이란 공의를 무시하고 사정을 따르는 계책이 아닌 것이 없으며 전후에 걸쳐 주달하고 대답한 것은 모두 방자무엄한 버릇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중에 한두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관각(館閣)의 선발과 사인(舍人)·검상(檢詳)의 직책은 가장 깨끗하고 화려한 것이므로 선발할 때에는 옛부터 망설이고 신중히 하여, 실로 그 문벌과 인품이 십분 합당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추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문벌이 미천한 권평(權坪)과 인품이 용렬한 최현중(崔顯重)이 인척으로 외람되이 참가하기도 하고 문객이라 하여 함부로 허통됨으로써 온 세상이 놀라고 사람마다 침을 뱉으면서 추하게 여기었습니다. 받들어 포양하는 방도와 협력하여 돕는 정사가 과연 이런 것입니다.
오대익(吳大益)의 탐오한 죄에 대해서는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전하께서는 특별히 관대한 은전을 베풀어 그 형벌이 유배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여러 사람들의 심정은 해와 달같이 우러러 보는 전하에 대하여 유감이 없지 아니하며, 대각(臺閣)은 이 때문에 쟁집하여 마지 않는 것입니다. 대익은 바로 대신의 처남입니다. 공적인 것을 위해 사적인 것을 무시하던 고인의 일로 오늘의 신료에게 요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저와 같은 중죄가 불행히 인척에서 나왔다면 대신이 된 자는 응당 침묵을 지키면서 공론의 여하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일전에 경연에서 감히 말하기를 ‘새 향안(鄕案)은 삭제할 필요가 없으며 장물(贓物)도 찾아서 돌려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만약 향안을 그대로 두고 장물을 밝혀내지 않는다면 대익의 범죄는 과연 무슨 죄입니까. 조보(朝報)가 한번 반포되자 놀라고 분개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신이 비록 그를 두둔하기에 급급하다 하더라도 이처럼 아뢰는 것이 어찌 국가를 저버리고 인척을 구원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전일 구상(具庠)의 일을 변명한 글로 말하면 그 처분에 대해 현저하게 불쾌하다는 뜻을 가지고 감히 말하기를 ‘견책 파면 등의 벌로 이미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킬 수 있겠는지 신은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그와 같은 처분으로 그 죄를 징계할 수 없다고 여긴다면 어찌하여 지적해 끝까지 말하지 않고 이처럼 불만스러운 말을 임금에게 고하는 말에 언급합니까. 저 대신은 한갓 상관을 능멸하는 것이 기강을 무너뜨리는 일이라는 것만 알고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 용서할 수 없는 죄가 된다는 것은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남을 책하는 데는 밝고 자기를 책하는 데는 어두운 것입니다.
선비는 나라의 원기입니다. 우리 나라 조정이 4백 년 동안 선비를 대접하는 예는 경하지 않고 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반역죄만 범하지 않았다면 비록 허다한 죄과가 있더라도 조정에서 경계하고 격려하는 것은 다만 정거(停擧) 등의 벌을 내릴 뿐이었으니, 이는 실로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 없다는 대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일전에 교관(郊館)에 거둥하셨을 때 마침 한두 명의 선비가 대신의 앞에서 죄를 범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즉시 하인들을 풀어 뒤쫓아 잡아다가 칼을 씌워 여러날 동안 옥에 가두었다가 여론이 떠들썩한 뒤에야 비로소 놓아주었습니다. 저 대신이야말로 무슨 기세를 가지고 조정에서도 시행하지 못하는 법을 선비들에게 이처럼 거리낌없이 할 수 있습니까. 아, 그가 하는 일로 볼 때 어떻게 능히 건극(建極)의 정치에 도움을 주며 서정(庶政)을 공평히 하고 모든 관리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권평을 삼사(三司)의 후보로 추천한 것과 최현중을 검상으로 선발한 것을 빨리 개정하도록 명하는 동시에 오대익의 장오죄에 대하여 해당 율문을 쾌히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상소를 보니, 좌의정의 성명에 이르러서는 너무도 괴이하고 의혹스러운 데다가 한마디 한마디 말끝마다 화단을 일으키려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당파를 위해 죽는 것도 감수하는 버릇을 어찌 감히 이처럼 시험해보려 하는가. 설사 이러한 상소가 열 통 백 통이 있다 한들 어찌 대신의 머리털 하나 흔들 수 있겠는가. 남을 공격하는 입심으로써 이와 같이 하는 것을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부리는 것은 혹 본 적이 있어도 대신에 대하여서야 어찌 이처럼 조항별로 나열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개 아무개의 일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대신을 위해 하나하나 분석하는 것은 시시할 뿐이라 그대로 두고 언급하지 않거니와 근래 이 대신이 정승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실로 건극(建極)의 고심에서 나온 것이다. 동서 남북의 어느 당파이거나 등용되고 침체되며 불행하고 득세한 자를 막론하고 오직 인품만을 보고 오직 인재만을 뽑아 이들을 함께 수용함으로써 이 나라의 대대로 벼슬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너나없이 모두 나라를 위해 즐겁게 일을 하게 하려는데 너는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항거하면서 지시를 따르지 않는단 말인가. 이런 자를 대수롭지 않게 보고 범연히 대한다면 내 유독 ‘먼 변방도 뜨락처럼 가까이 하고 오랑캐도 한집안처럼 본다.[庭衢八荒胡越一家]’는 전첩(殿帖)의 글과 탕탕평평(蕩蕩平平)이라고 써 붙인 당액(堂額)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밖에 한 중신과 세 옥당(玉堂)을 싸잡아 거론한 것은 이상의 잠꼬대와 같은 말에 비하면 하찮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 대신을 등용한 이상 지금 그를 흔들고 꼬집는 데 대하여 만약 엄하게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방지하고 뒷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하겠는가. 정언 조진정(趙鎭井)을 체차하고 이어 귀양보내는 처벌을 적용하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에게 하유하였다.
"경이 지금까지 남의 중상을 받아온 것만 해도 지루할 것인데, 오늘 조진정에 이르러 여지없이 짓밟히고 모욕을 당하였다. 만약 조절하여 당파를 없애려는 고심과 성의가 신료들에게 믿음을 주었다면 조진정이 무얼 믿고 이런 상소를 했겠는가. 더구나 그의 상소문 속 전편의 모든 조항이 어찌 다만 욕을 하고 헐뜯는 것일 뿐이라 하겠으며, 어찌 다만 자잘한 잘못까지도 일일이 찾아낸 것이라고 하겠는가. 앞서 조진정을 귀양보내라는 하교에서 그 대략의 뜻을 말하여 경이 나와서 명에 응하기를 권면하였는데 어찌 다른 말이 있겠는가. 바라는 바는 사물은 각각의 사물 자체로 놔두고 순조롭게 대응하면서 한결같이 진취적인 본의에 성실하게 매진함으로써 이러한 때에 나에게 수응하는 고충을 끼치지 말라. 촛불을 켜고 하유하노라니 말이 그 의사를 다 나타내지 못하였다. 모두 양해하고 마음 편히 일을 보도록 하라."

 

5월 13일 계사

상이 재계 중이므로 정사를 보지 못하였다.

 

5월 16일 병신

이득제(李得濟)를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5월 17일 정유

현륭원(顯隆園)의 제사를 받드는 향관(享官)에게 말과 노비를 주는 것을 규정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수원 부사(水原府使) 조심태(趙心泰)가 아뢰기를,
"본부의 새 고을 시정(市井)에 점포를 설치하는 일에 대하여 이미 대신들과 여러 재상들의 의견을 들었습니다만 신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널리 물어보았더니, 본부는 삼남(三南)으로 통하는 요로이기는 하나 물산이 본디 적어서 비록 부호(富戶)를 많이 모으고 점포를 설치하려 하더라도 갑자기 생각대로 되기는 어렵겠습니다. 반드시 본고장 백성들 중 살림밑천이 있고 장사물정을 아는 사람을 골라 읍 부근에 자리잡고 살게 하면서 그 형편에 따라 관청으로부터 돈을 받아가지고 이익을 남기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 좋은 대책이 될 것이라고 하니, 이 의견이야말로 한번 시도해 볼 만합니다. 어떤 관청을 막론하고 이자(利子)가 없는 돈 6만 냥을 떼어내 고을 안에서 부자라고 이름난 사람 중에 받기를 원하는 자에게 나누어 주어 해마다 그 이익 나는 것을 거두게 하되, 3년을 기한으로 정하고 본전과 함께 거두어 들인다면 백성들을 모집하고 산업을 다스리는 방법에 있어서 아마 하나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때에 가서 응모하는 사람들과 구획하게 되면 점포란 명칭의 설립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쌀 때 사 비쌀 때 팔면서 시기에 따라 꾸려가게 한다면 새 읍치(邑治)도 완전히 형성될 가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포사(造泡寺) 중들의 생활이 빈약합니다. 그들에게도 다같이 참작해 나누어주고 지혜(紙鞋)를 만드는 본전으로 삼게 한다면 반드시 혜택을 입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니, 대신에게 가서 의견을 들어보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말하기를,
"운영에 매우 조리가 있으니 마땅히 진술한 대로 시행해야 합니다. 전물(錢物)은 균역청과 금위영·어영청 두 군영의 관서별향고(關西別鄕庫)에서 적당히 분배해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우의정 김종수는 아뢰기를,
"수원 부사가 아뢴 말은 정말 헛점을 잘 맞혔습니다. 6만 냥의 돈이 적지 않은 것 같으나 3년 내에 본전을 돌려갚는 조건에서 좌의정의 말대로 균역청과 금위영·어영청 두 군영의 관서별향고에서 참작하여 많은 데서 덜어내어 적은 데에 보태게 하소서. 그중 균역청의 돈은 비록 그 사안이 중한 것 같으나, 여러해 동안 남거나 부족된 수량이 처음에 비하여 몇 곱절이 될뿐 아니라, 서울 각 관청에서 차용하고 10년을 기한으로 하여 보상하는 것은 전부터 이미 이루어진 관례가 있습니다. 더구나 더없이 중요한 일에 들어간 수량을 수년 내에 본전으로 도로 들여놓는데 있어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균역청의 돈으로 떼어주도록 명하였다.

 

5월 22일 임인

현임 원임 대신, 각신, 약원 제조를 불러 접견하였는데 문안하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좌상의 일로 인하여 이루 다 수응할 수 없다. 대간이 올린 글에 운운한 것은 모두가 사적인 당파에 치우친 말이니 이는 매우 옳지 못하다."
하니,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이 아뢰기를,
"신 역시 대각의 상소를 보았는데 근거없는 말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장(黃樟)의 상소에 대해 채 비답도 내리지 않았는데, 이면긍(李勉兢)이 어디서 얻어듣고 이렇게 글을 올려 변명하였는가. 이는 필시 승지나 사관들 중에서 누군가 누설한 것이니 사관들에게 물어 아뢰라. 이후부터는 모든 조신들이 올린 소차는 승지나 사관 이외에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 혹시 재계할 때를 만나 승정원에 머물려 두었더라도 일체 새로 온 승지나 사관에게 새삼스럽게 보이지 말라."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이시수(李時秀)는, 평산 부사(平山府使) 이윤희(李潤禧)가 그 어버이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감영에 보고하는 한편 겸임관에게 병부를 보내고는 이어 즉시 떠났다는 것으로써 장계를 올려 그를 파면시켜 내쫓고 유사로 하여금 논죄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어버이가 병이 났을 경우에는 대궐에서 수직하다가 갑자기 나갔더라도 허물될 것이 없는데 하물며 지방관이겠는가. 비록 겸영장(兼營將)이라 하더라도 이미 면대하여 교대할 만한 고을이 아니면 평상시에도 지장없이 왕래할 것을 허락하는데 유독 정리상 절실하고 다급한 걸음에 이처럼 파면하고 잡아들이자는 요청을 한단 말인가. 이 길이 한번 열리게 되면 여러 도가 거행하기에 필시 당혹해 할 것이다. 해당 감사를 추고하고 장계는 도로 내려보내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대간의 상소로 인해 처분을 기다리면서 강 밖으로 나갔다. 상이 하유하기를,
"비록 재실에 있는 때라도 존경하는 예절의 의의를 특별히 생각하여 종일토록 경의 일에 대해 수응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참으로 내가 평소에 경을 잘못 알고 있었다. 더구나 일전에 돈독하게 타이른 말은 얼마나 진지하고 정중하였던가. 경은 이것을 보았을 때 자신을 잊고 진퇴를 고려해 보려는 뜻을 두지 않는 것이 바로 일반적인 분의로 보나 인정상으로 보나 응당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이와 반대로 집에서 금오(金吾)로 가고 금오에서 다시 성 밖으로 나갔으며 성 밖에서 다시 강 밖의 정자로 나갔다. 매정하기가 갈수록 심해지니 결국 경은 시속사람의 몰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의 결심은 오직 ‘꼭 불러오겠다.[必致]’는 두 글자가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상하가 서로 버티게 되면 오직 듣기에만 시끄러울 뿐이다. 경은 즉시 입성(入城)하여 곧 조정에 나와 직접 나의 권유를 들으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상소하기를,
"신이 의정부에 있은 지 3년에 온갖 후회가 겹쳐 쌓였습니다. 이를 요약하여 세어보면 그 죄가 세 가지 있습니다. 전하를 보좌하는 책임을 염치를 무릅쓰고 받는 이런 도리는 단연코 없는 것인데도 망령되이 스스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의의에 따라 구물구물 조정에 나아가고 태연하게 벼슬살이를 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첫째 죄입니다. 신은 임명받은 이래 우러러 임금을 믿고 그 덕으로 생을 부지해왔지만, 자신을 돌아보면 우익도 없는 외톨이 신세로서 처신에 있어서는 자기 격식을 고치지 않고, 나쁜 것을 미워함에는 분수를 낮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겨울 나무잎이 서리를 맞는 것을 당장 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제몸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주제에 나라를 유지해 나가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의 둘째 죄입니다. 신이 요즈음 혹은 차자로, 혹은 주달로 분수에 맞지 않는 직책을 해임해줄 것을 청해왔습니다. 신이 언제인들 기회를 엿보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잘하지 못한 일은 하루속히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셋째 죄입니다.
신이 이 세가지 죄가 있는만큼 조진정의 상소는 사리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잠영 세족(簪纓世族)으로서 품행이 단정한 권평(權坪)이나, 인품과 학문으로 우뚝 뛰어난 최현중(崔顯重)에 대하여 문벌이 미천하다느니, 용렬하다느니 하여 신과 친근한 사람 중에 신의 해독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처럼 눌러 뭉개고 잡아 꺾어서 한 사람도 완전한 자가 없다보니, 죽은 아내의 삼종오라비를 인척으로 몰았으며 어려서부터 친한 친구를 압객(狎客)으로 지목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신이 인재를 추천함으로 임금을 섬기려고 애쓰던 마음은 끝내 남을 함정에 빠뜨리는 계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비통한 일입니다. 오대익(吳大益)의 일로 말하면 신이 주달할 때 어찌 일찍이 오대익이 모면하기 어려운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한 적이 있으며, 법을 집행하는 대간의 규탄에 대해 옳지 않다고 한 적이 있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조정이 만약 향안 등록을 불태워버리고자 한다면 예전(禮錢)으로 바친 돈을 일일이 추심하여 항안에 참록된 사람들에게 되돌려준 다음에 새 향안을 불태워버리는 것이 사리에 타당한 일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민고(民庫)의 빚을 갚거나 공적으로 지출한 것, 그리고 각방(各坊)의 부역을 막고 성지(城池)와 관청집을 보수하는 데에 지출한 수만 냥을 모두 따지지 말 것을 허락하자고 하였습니다. 가령 이미 4, 5백 냥을 바친 사람에 대하여 다만 1백 냥이나 또는 1백 냥도 안 되는 돈을 주면서 ‘공적으로 지출한 것이라 징수할 곳이 없어서 원액대로 보상할 수 없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공적으로 지출했다는 것은 곧 관청에서 쓴 것인데, 관청에서 이렇게 명령하는 것이 또한 매우 구차하지 않겠습니까. 또 이미 등록해 놓고 이내 도로 불태워버린다면 과연 기분좋게 심복하겠습니까. 신이 우의정과 의견을 달리했던 것은 오로지 국가를 위하는 옛사람의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 작은 혐의나 사소한 절차를 감히 돌아보지 못한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정성이 믿음을 주지 못하여 남의 의혹을 사게 되었으니 자신을 반성할 뿐입니다.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신이 구상(具庠)을 논박한 상소 중의 말들은 그저 손가는 대로 써서 대략 옛사람들의 글쓰는 수법을 본받은 것에 불과하였는데, 이것이 남의 지적을 받는 대상에 들어가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지목을 가하는데 이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세상 인심이 험악하기가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유생(儒生)을 잡아가둔 일에 있어서는 모화관으로 거둥하시던 날 신은 병으로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돈의문(敦義門) 안으로 들어갔을 때 웃옷을 걸치지 않은 두 사람이 서로 팔을 끼고 교자 곁에 서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채로 얼굴을 절반쯤 가렸고, 한 사람은 입에 담뱃대를 가로 물고 있었습니다. 대동한 권두(權頭)가 담뱃대를 빼라고 호령하자 담뱃대를 가로 물고 있던 자가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자를 보고 담뱃대를 빼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권두는 분개함을 참지 못하고 따르던 하인들을 시켜 그 두 사람을 잡아 가두게 하였는데, 신은 잠자코 있었을 뿐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 전옥서(典獄署)에서 죄수를 보고해왔는데, 그들이 곧 김관순(金觀淳)과 김병성(金炳星)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였으므로 아침이 되면 처결하여 석방하게 하려 하였습니다.
밤 3경쯤 되었을 때 옥리(獄吏)가 급히 고하기를 ‘학당의 유생 수십 명이 지금 옥문을 부수려고 하면서 큰소리로 공갈하기를 「만약 두 사람을 석방하지 않으면 우리들이 전옥서의 관리를 죽이겠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신은 그만 놀라서 두 사람을 즉시 형조로 넘겼는데, 다음날 아침에 들으니, 김병성은 곧 돈령부 참봉 김세근(金世根)의 아들이고 김관순은 곧 동부 봉사(東部奉事) 김이의(金履毅)의 아들이었는데, 담뱃대를 물고 패악한 말을 한 자는 바로 김관순이었습니다. 또 들으니, 학당 유생들이 통문을 돌려 아주 심하게 신을 헐뜯고 욕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신이 바야흐로 사유를 갖추어 초기(草記)를 올려 현재 갇힌 자를 엄격히 다스릴 것을 청하려 하고 있을 때 김세근이 신과 친한 사람을 찾아와 보고 매우 진지하게 애걸하였는데 그의 말은 매우 식견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김병성은 애당초 입을 열지 않은 채 부채로 얼굴을 가렸을 뿐이었고 오직 김관순과 함께 팔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즉시 석방하였습니다. 듣건대, 김세근은 돈령부의 수직하던 곳에서 자기 아들을 여러 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볼기를 쳤다고 하니 이는 부형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다고 이를 만합니다. 사흘이 지난 뒤에 김관순의 늙은 할아비는 신과 친근한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집에 패역한 손자를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 근래 사대부들이 자손을 가르침에 전혀 예법으로 아니하여 패악한 짓을 하도록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니 하나의 김관순을 다스리고 다스리지 않는 것이 교화에 관계가 없다면 차라리 그 할아비로 하여금 스스로 다스리게 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신은 그래서 김관순을 또 석방하였는데, 대간의 상소에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체로 욕보일 수 없다는 것은 선비로서 공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 말입니다. 대낮 큰 길가에서 홑옷바람으로 담배를 피워물고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에 대하여 누구도 감히 어찌할 수 없다면, 앞으로 선비라는 이름을 걸고 온갖 패려한 짓으로 용서하기 어려운 죄과를 저질러도 조정에 있는 자로서 그것을 보고도 말이 없어야 곧 잘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에서 논한 일은 오히려 작은 일입니다. 상소문 서두에 운운한 말에 있어서는 그에 관해 무신년에 상께서 명백히 하유하신 뒤로 조정 신하로서는 감히 믿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도 그는 거리낌없이 쉽사리 말하였으니, 신이 비난을 받는 것이야 아무런 상관이 없으나 임금의 말에 손상을 줄까 두렵습니다. 슬피 눈물을 흘리는 외에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신은 마음이 너무도 슬프고 처신이 너무도 불안하여 강교(江郊)로 달려나와 밤낮으로 벌책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하로부터 받은 신부(信符)를 그대로 계속 받들고 있는 것은 더욱 사적인 분의로 보아 감히 할 수 없으므로 10일 동안 재계 중이신 전하에게 날마다 신부를 바침으로써 전하를 성가시게 하였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승선(承宣)을 내보내 함께 오도록 하신 일은 특별한 예우입니다. 신처럼 죄를 진 자가 어찌 감히 이러한 예우를 감당하겠습니까. 신이 현재 맡고 있는 정승의 직책을 빨리 교체하고 이어 신의 전후 죄과를 다스리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재계를 마치고 조회를 기다려 별도의 하유를 내리자마자 경의 사직소가 뒤따라 이르렀다. 이토록 벼슬을 사양하고 혐의를 피하니 경을 위하여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경은 생각해 보라. 서로 뜻이 맞는 것이 이와 같고 경에게 위임한 것이 이와 같은데, 한 때의 생각지 않은 언짢은 말을 가지고 도리어 사물은 각각의 사물 자체로 놔둔다는 원칙을 소홀히 하니, 조정에 나아가면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던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경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쁘게 보이려 하지 않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니, 정승자리에 있은 지 3년 동안 거의 한달도 조정에 편안하게 있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 만약 남의 비방 중상에 따라 하나하나 대꾸하려 한다면 비록 경의 튼튼한 정력으로도 그에 수응해낼 길이 없을 것이며 취향을 달리하는 자들의 배격하는 교활한 계책을 도와주는 일이 될 것이다. 경에게 있어 무익할 뿐 아니라 여태까지 애써 보살펴오던 나의 노력이 여지없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리되면 경은 결국 나를 저버림을 면치 못할 것이니 경이 어찌 차마 이를 하겠는가.
상소문 중에 나열한 것은 어찌 경의 말을 듣고서야 자세히 알 일이겠는가. 유생들의 일에 대해서는 조정의 기강을 존중하는 원칙에서 특별히 조사해 규명하려 하였는데, 경의 말을 듣고 그 넓은 도량에 감탄하였다. 그리고 그의 할아비와 아비가 이미 매를 때려 가르치고 편지를 보내 애걸하였다고 하니 지금 다시 제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수십 명의 학당 유생이 밤중에 떼를 지어 옥문 밖에 가서 그와 같은 해괴한 짓을 하여 선비들에게 수치를 준 것이야 어찌 작은 문제이겠는가. 이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모든 유생의 수치를 어떻게 씻겠으며 앞으로 대신이 어떻게 대신의 일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처결할 만한 죄명으로 사리를 따져 품계하게 하라. 이는 경을 위하는 일만이 아니라, 조정을 위해서이며 성균관을 위해서이다. 대개 야금(夜禁)은 법전에만 실려 있을 뿐 아니라 본디 한 벌의 단서(丹書)가 있다. 이 금령은 일찍이 그냥 지나쳐 넘긴 일이 없어 직제학(直提學) 이하는 으레 단속하는 대상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어두운 밤에 벼슬도 없는 무리들이 이와 같이 무엄하게 싸다니는 것에 대해 그 사실이 이미 위에까지 알려진 데야 어찌 그것을 소홀히 볼 수 있겠는가.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그날 밤 순찰한 영문(營門)을 조사하여 일체 초기를 제출하고 제재를 가하게 하겠다. 이밖의 여러 문제는 한번의 비답으로 다할 일이 아니며 더구나 결심하고 있는 것은 경을 기어이 출사하게 하고야 말겠다는 것이니 경은 모름지기 이 뜻을 이해하고 당일로 입성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그날 전옥서에 남아 있던 관리들을 불러 물어보았더니, 그날 인정종(人定鍾)이 있은 후 학당 유생 10여 명이 본서의 대문 밖에 와서 말하기를 ‘갇혀 있는 유생은 곧 중부학당의 장의(掌議)이며 또 소청(疏廳)의 담당자이다. 너의 관원에게 말하고 대신에게 말을 전달하여 석방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기에, 입직관(入直官)에게 말하였더니, 입직관의 말이 ‘대신이 가둔 사람이라 감히 멋대로 석방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학당 유생들에게 말하였으나 학당 유생들은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서로 으르렁거리고 위협하는 말이 물론 많았는데, 그중에도 가장 해괴하고 패려한 말이 있었으니, 어떤 자는 ‘너희들을 학궁에서 잡아다가 때려 죽인다면 너희들이 어쩔테냐.’ 하고, 어떤 자는 ‘우리가 옥문의 자물쇠를 부수고 빼앗아 간다면 너희들이 어쩔테냐.’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에 전옥서의 관리가 여러 유생들의 공갈을 못이겨 대신에게 가 보고할 때 사실을 더 보태어 대신을 놀라게 할 계책을 쓴 것은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학당의 유생들이 한꺼번에 옥문 밖에 몰려가 죄수를 빼앗아 가려고 한 계책은 이미 선비다운 행동이 아니며, 자물쇠를 부순다는 등의 말도 또한 해괴 망측한 말에 속하는 것입니다.
청컨대 주동자는 종신토록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고 추종한 여러 사람은 10년간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는 뜻으로 성균관에 분부할 것이며, 해당 전옥서의 관리와 학궁의 관리 등 여러 하인으로서 함께 행동한 자는 경중을 나누어 치죄할 뜻으로 형조에 분부하시기 바랍니다. 학당 유생이 몰려간 시간이 이미 인정종이 울린 뒤라면 야금이 엄격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날 순찰을 담당한 영문의 대장을 우선 중하게 추고하고, 해당 구역 내의 패장(牌將)은 각별히 곤장으로 다스릴 뜻으로 해당 대장에게 분부하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성균관은 주동자 이위호(李偉祜)를 종신토록 과거를 못보게 하고 추종자들인 유학(幼學) 조학원(趙學元)·윤선양(尹善養)·원재형(元在亨)·원재행(元在行) 등 네 유생은 1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성균관은 많은 선비들이 거처하는 곳으로써 그곳에 있는 선비들은 옷차림을 제대로 하고 규범적인 행동을 하며 성현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고 예에 어긋나는 사물은 접하지 않는데, 오늘날의 선비는 옛날의 선비와 다르다. 그들의 속을 따져보면 평범한 말과 행동이 일일이 규범에 맞지는 않으나 외형의 몸가짐을 오히려 마음대로 풀어헤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우리 나라가 오로지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규범으로 방지하는 것이 풍습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유생들의 일은 어찌 ‘수치이다.’라거나 ‘변괴이다.’고만 말하고 말 일이겠는가. 길거리에서 행한 해괴하고 패려한 행동은 우선 차치하고라도 어두운 밤에 있었던 몰골은 이 얼마나 한심한가. 근래 선비들의 습성이 이 지경에 이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무엇을 나무랄 것이 있겠는가. 이는 오직 나라의 풍교(風敎)가 무너지고 속상(俗尙)이 야박해진 것이 그 원인이다. 이것을 생각할 때 차라리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주범자를 귀양보내고 나머지 선비들을 과거를 못보게 하는 것이 혹시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할 줄 알게 하고 다른 사람을 경계하는 조치가 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나 온 세상의 숱한 선비를 다 모르게 할 수는 없는 만큼, 정말 시골에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면서 행실을 닦는 자가 만일 이른바 학당 유생들의 일을 듣는다면 자신을 더럽힐듯이 여기면서 그들과 함께 반열에 서지 않으려는 마음이 필시 조정에서 미워하고 배척하는 것보다 열 배나 될 것이다. 대개 과거를 못보게 하는 죄명을 그들에게 적용하는 것도 몹시 개운치 않다. 경은 그들의 유적(儒籍)을 거두어다가 그 이름을 지워버려 그들로 하여금 선비축에 끼지 못하게 하라. 이 비지(批旨)를 서재의 벽에 써붙여 서로 권면하고 아침저녁 늘 눈에 띄게 하여 여러 유생들이 알도록 하라."
하고, 또 김정순(金鼎淳)을 군역에 복무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대사간 심환지(沈煥之)가 상소하기를,
"오늘날 종묘 사직의 원수와 역적을 처단하지 못하였는데 서쪽 언덕의 송백은 아름드리가 되어가고, 임금과 신하의 원한은 흐려졌는데 새 사당의 제사는 몇 번이나 차렸습니까. 토벌과 복수의 논의는 천명(天命)과 인륜의 고유한 데에서 나왔는데, 전하께서 처리하는 것은 지극히 공정한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 있습니다. 대체로 역적의 편에 있어서는 죄가 만인의 입에 올랐는데도 그것을 덮어주고 포용해주며, 의논이 삼사(三司)에서 나왔는데도 그것을 두루 막아주고 보호해주면서 오직 환란의 근본이 혹시라도 흔들리며 흉당이 자라나지 못할까 걱정하였습니다. 나라의 편에 있어서는 대궐에 엎드려 역적을 징토하자고 청하는 사대부들에게 수문장을 명하여 칼을 휘두르면서 위협하여 내쫓게 하였으며, 상소문을 안고 대궐에 호소하는 선비들에게 법관을 달려보내 길을 막고 두들겨 해산하게 하면서 오직 충성스러운 뜻이 해이해지고 사기(士氣)가 혹시라도 자라날까 걱정하였습니다.
아, 성명의 세대에 곧 이와 같은 기상이 있단 말입니까. 우리 문효 세자(文孝世子)는 곧 전하의 대를 이을 자식으로서 선대 여러 임금들의 계통이 매였으며 세 종실의 혈맥이 이어져 있습니다. 아, 역적 인(䄄)은 감히 나라를 훔칠 뜻을 품고 남몰래 나라에 화를 끼칠 흉계를 꾸며오다가 병오년 5월과 9월에 망극한 변고를 일으켰으니, 이는 실로 천지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며 신인(神人)이 함께 분개하는 일이고 조종(祖宗)이 반드시 처단할 일입니다. 그리고 자전(慈殿)의 전교가 선포된 뒤에 장물이 이미 드러났으니, 전하께서 비록 법을 굽혀 은혜를 베풀고 싶으시더라도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분개하고 다같이 말하는 데야 어찌할 것이며 자전의 하교가 해와 별처럼 환히 빛나는 데야 어찌할 것이며, 하늘에 있는 여러 선왕의 영혼이 진노하는 데야 어찌 하겠습니까.
역변이 일어난 것은 홍국영(洪國榮)과 덕상(德相)으로부터 시작하여 상철(尙喆)과 구선복(具善復)에 이르렀고 우진(宇鎭)과 조시위(趙時偉)에 이르렀는데, 그것을 사방으로 확산시킨 요체는 흉악한 할미이며 역적 의원입니다. 역적 담(湛)을 추천한 시준(時俊)과 독약을 보내 담을 죽인 송낙휴(宋樂休)가 역적 종년을 지레 죽였고, 형적을 감추고 입을 틀어막은 자는 조규진(趙圭鎭)인데 혹은 버려둔 채 따지지도 않으며 혹은 국문하였으나 진상을 규명하지 않았으며 혹은 사형에 처하였으나 법에 의거하지 않았습니다. 역적이 있는데 징토하지 않으면 나라에 형정(刑政)이 없는 것이며 원수를 두고 함께 사는 것은 사람으로서 윤기(倫紀)가 없는 것입니다. 나라에 형정이 없으면 망하는 법이며 사람으로서 윤기가 없으면 금수인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뜰에 북면(北面)하고 있는 자들은 들어가면 가정과 시중드는 처첩이 있고 나가면 의관과 거마의 위의가 있는데, 어찌하여 나라가 곧 망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으며 사람이 짐승으로 되어가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조정 신하들은 집에 돌아가 자기 사생활을 보살피면서 오히려 안일에 버릇되어 자신만을 보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우리 전하께서는 어찌 차마 조종의 지대한 왕업이 캄캄한 구렁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입니까.
신은 한밤중에 벽을 맴돌면서 그 해답을 얻지 못하면 또 마음 속으로 혼자 말하기를 ‘성인은 곧 하늘이다. 봄에 만물을 소생시키고 가을에 죽이는 것이 각각 그 때가 있는만큼 장차 기다리는 것이 있어 그러하시는가.’ 하곤 합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이재간(李在簡)과 신기현(申驥顯) 두 역적에게서 이미 드러난 사실을 보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한창 역적 재간의 죄를 벗겨줄 때에는 큰 은혜가 그의 골수에 젖어들었다 할 만하였는데, 어찌 다시 우진과 시위가 짜놓은 틀을 그대로 따라 기현의 흉악한 상소문을 꾸며내리라고 의심하였겠습니까.
승열(承烈)은 역적 죄수를 놓아보내고도 모르는 체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히 뻔뻔스럽게 상소하여 변명하니 그 정상은 실로 시장의 높은 언덕에 서서 좌우의 이득을 노리는 데 가깝고, 이문덕(李文德)은 서울 가까운 교외에 임야를 사유하고 있었는데 감히 세자(世子)의 예장을 저지하고도 태연히 큰 지역의 병사(兵使) 자리를 차지하여 아무런 죄도 없는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있고, 조규진(趙圭鎭)은 외람되게도 평안 병사로 나가는 등 해이해진 나라의 기강이 한심하다고 할 만합니다. 급기야 그가 체직되어 돌아오자 즉시 금위영의 장수로 추천되고 이어 포도 대장의 장래후보자로 지명되어 마치 무슨 공로나 서둘러 보상하는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인이 세상을 바로잡고 법을 세우는 원칙에 있어 더욱 천토(天討)를 빨리 집행하여 화란의 근본을 제거함으로써 그 무엇을 기대하고 관망하는 마음을 끊어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야만 나라의 형편이 안정될 수 있고 대대로 벼슬하는 신하들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명철하신 전하께서 어찌 이를 미처 살피지 못하십니까. 신은 삼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귀현(龜顯) 등 7명의 죄인을 곧 성상의 유지로 하룻밤 사이에 모두 석방하였는데, 승정원의 신하들도 알지 못하였고 법부의 관리들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국가가 관(官)을 설치하고 직책을 분담하여 각각 맡은 책임이 있게 한 것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대궐 안의 한 소신(小臣)이 신표를 받들고 나가기만 하면 만사를 다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일시적인 마음을 만족시키려 한다 하더라도, 유독 끝없는 뒷폐단을 열어놓는 것은 생각지 않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귀현 등 7명의 죄수를 법조(法曹)로 도로 넘기고 역적 인(䄄) 이하 그 이름이 대간의 논계에 들어 있는 여러 역적들은 전부 논계한 대로 윤허해 주소서. 의금부를 엄히 신칙하여 그 진상을 규명하고 근본적인 뿌리를 뽑아버리게 하소서. 송낙휴(宋樂休)와 조규진(趙圭鎭)은 국청을 설치하여 진상을 규명함으로써 국법이 시행되게 할 것이며, 이문덕(李文德)은 사적(仕籍)에서 이름을 삭제하여 사람축에 끼이지 못하게 하며, 조규진과 이문덕을 추천한 전관(銓官) 또한 삭직의 처벌을 적용하소서. 전 승지 권유(權裕)의 상소문을 신이 보지는 못하였으나 대략 그 말을 들으니 역시 사론(士論)입니다. 더구나 권유로 말하면 소원하고 미천한 일개 신하로서 바른말을 할 만한 책임도 없는데 월권을 한다는 책망도 피하지 않고 변방으로 귀양가는 책벌도 감수하였으니, 그것이 어찌 당파의 습성에 끌려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 뒤로부터 대간이 대뜸 용서하여 석방할 것을 요청한 것 또한 각각 직책을 수행한 것이니, 권유(權裕)에게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대간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권유에게까지 율문을 더 적용한 것은 지나칩니다. 진실로 대관(大官)이 기탄없이 방자하게 굴었을 때 대간이 주시하기만 하고 입을 다문다면 세상일이 어떻게 되며 조정의 기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개 대간이 어떤 일을 말할 때에 전하께서는 그 말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볼 뿐이고 그의 마음이 공정한 것인가, 사적인 것인가를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전 정언 조진정의 논의 역시 대간의 풍채가 있으니, 잡아 꺾어 멀리 귀양보낼 것까지는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큰 도량을 베풀어 요즘 말을 하다가 죄를 입은 신하들을 모두 용서하고 등용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심을 가졌거나 당파를 두둔하였거나를 막론하고 임금의 처분에 관계되는 일을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여전히 국사를 말하는 편에 속하지만 너의 상소는 겉으로는 잘못을 바로잡는 것 같으나 내용은 편당에 치우친 의견이니, 어떻게 규례에 따르는 비답을 내리겠는가. 상단에서 사람을 논박한 일에 대해서는 무관 역시 사대부인데 이와 같은 지목을 경솔히 붙이는 것이 어찌 될 법이나 한 말인가. 전관(銓官)도 무슨 처벌할 만한 것이 있는가. 너에게는 우선 견책하여 벼슬을 깎는 규정을 적용한다."
하였다.

 

장령 황장(黃樟)이 상소하기를,
"아, 병신년과 정유년 이후로 사나운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서로 어울려 작당하여 반드시 나라를 없애고야 말려고 할 때 군신 상하가 처음에는 놀라고 분개해 하더니 세월이 점점 오래됨에 따라 언제나 안일한 태도로 지내는 것이 걱정거리였습니다. 화란의 근본인 역적의 괴수가 아직까지 대부분 숨을 쉬고 있고 대역의 주모자들에게 모두 해당된 율문 적용을 아끼고 있습니다. 갑진년 가을에 있었던 역변에 있어서는 천지만고에 일찍이 없었던 지극히 흉악한 역적임에도 괄(适)에게 적용하였던 전례를 여전히 아낌으로써 흉악한 잔당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의리가 더욱 어두워지고 역적의 무리가 날로 극성합니다. 그러다가 병오년의 화변이 또 일어났습니다. 그 악을 같이 하면서 다같이 모든 흉악한 무리들의 기화로 되었건만 혹은 지레 죽기도 하고 혹은 살아 있기도 하였으니 역적의 우두머리를 영영 제거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세력을 합쳐 다 함께 극심한 역적의 괴수가 되었건만 처단에 임하여 서로 피하였으니 그 천토(天討)를 이미 시행하였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우진과 시위가 아직까지 땅 위에 살아있고 의원과 할미의 죄가 다 함께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나라의 기강이 더욱 해이해지고 난적이 두려워할 줄을 몰라 이재간(李在簡)과 신기현(申驥顯)같은 흉역이 오랫동안 역모를 꾸며오다가 기회를 타고 뛰어나와 역적 조시위(趙時偉)와 안팎이 되고 흉악한 김상로(金尙魯)와 결탁하여 천지를 두고 맹세하면서 여러 역적들의 와주(窩主)가 되기를 감수하고 밤낮 수작을 벌이면서 흉역의 괴수에게 공을 세우려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형조 여러 죄수들의 공술을 공공연히 무고하며 핍박하였으니 그것을 생각하면 뼈가 저립니다. 혹은 신령의 처단이 이미 미쳤는데도 여러 자식들을 거두어 종으로 삼는 것을 망설이고 있으며, 혹은 해도에 귀양보내는 경한 죄를 지운 채 저자에서 목 베어 죽이는 극형을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용서받을 수 없는 승열(承烈)이 여전히 편히 누워 숨을 쉬고 있으며, 지극히 흉한 7인의 죄수가 무난히 석방되었습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빨리 천토(天討)를 시행하소서.
앞서 홍병성(洪秉聖)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 올린 상소는 어찌 그리 음흉하고 현란한지 차마 눈뜨고 바로 볼 수 없습니다. 겉으로 역적의 징토를 가장하고 말한 것이 아주 교묘하고 악독한데 그 내용을 자세히 따져보면 정신 골자는 전적으로 시위와 재간을 위하여 편들어 주는 데 있습니다. 그가 말한 ‘우진과 시위가 지휘한 것은 무슨 일이며 재간과 기현이 무고했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고 한 것은 이런 말이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 것이며, 그가 말한 ‘국청의 공술에 명백히 있고 무엇인가 돌아보고 관망하는 것이 이미 드러났다.’는 것은 우진은 신문에서 공술한 것이 있었으나 시위는 이런 공술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 것이며, 그가 말한 ‘차자와 주달이 번갈아 올라가서 무고와 핍박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은 두 정승의 차자와 주달이 강제로 무고하게 핍박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 것이며, 그가 말한 ‘의리로는 충신과 역적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징토하는 의리가 분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며, 상소문의 말미에 갑자기 금주령에 대한 폐단을 말하면서 ‘온 나라가 미치광이처럼 되었다.’고 한 것은 온 세상의 역적을 징토하는 사람을 술취한 것 같고 미치광이 같다는 데로 돌린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다면 설사 백 사람이 금주를 청하더라도 술을 좋아하는 그로서야 어찌 감히 진술하여 간청할 수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세상에는 술을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어찌 ‘온 나라가 미치광이 같다.[擧國若狂]’는 네 글자로 온 세상을 여지없이 매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곧 역적 재간과 이웃을 같이 한 친구이며 역적 시위와 마음을 터놓는 문객으로서 항상 감정적인 마음을 품고 남몰래 그를 옹호하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시일이 차츰 오래된 것을 믿고 대뜸 제주장을 내세우는 흉악한 소를 올려서 제딴에는 하늘도 속일 수 있고 흉악한 음모를 남몰래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정한 눈은 으레 있기 마련이라 흉측한 형체를 가리우기 어려우니, 이것이 어찌 무식한 일개 병성이 독단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을 방치한다면 대의가 더욱 어두워지고 흉악한 무리가 더욱 기세를 부려 장차 몇 사람의 병성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지 모릅니다. 신의 생각에는 홍병성을 빨리 금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엄히 국문하여 기어코 진상을 밝혀내게 하는 것은 결코 그만둘 수 없다고 봅니다.
이조 참의 이면긍(李勉兢)이 그의 처지로서 갑자기 청반 요직에 오른 것은 비록 시위와 재간 두 역적의 입김으로 인한 것이긴 하나 그가 만약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마땅히 마음을 고치고 개선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지난 겨울 기현과 재간의 사건이 터진 뒤에 성균관 월별시험 제목에서 시(詩)는 ‘오늘날의 일이 어떠한가?[今日之事何如]’로 하고, 부(賦)는 ‘거짓으로 옳다고 대답하였다.[佯應曰諾]’로 하여 문답식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는 현저하게 조정을 나무라면서 말로는 그렇다 하고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의 시끄러운 말이 지금까지 가시지 않습니다. 또 연초에 혼자 인사 문제를 취급할 때 감히 역적 시위의 친족으로서 6, 7년간 버림받아 침체했던 윤재순(尹在醇)을 동료 당담관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건방지게 아간(亞諫)032)  의 후보로 추천하였습니다. 어찌 이처럼 극심하게도 방자할 수 있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이면긍의 전부(銓部) 직함과 국자(國子) 관원의 추천을 모두 개정하고 이어 먼 변방으로 내쫓는 처벌을 적용함으로써 그와 함께 살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야만 간사한 싹을 잘라버리고 세상 인심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단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홍병성의 일은 사람을 논박하는 것이 어찌 이처럼 악착스러운가. 더구나 어구의 뜻이 있지도 않은 것을 터무니없이 날조하여 엄중한 죄안을 만들었으니,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악독한 수법이 있겠는가. 너에게 이런 일을 하라고 권고한 자야말로 충분히 이런 어구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면긍의 일에 대해서는 너의 말이 더욱 한판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는다. 상소문의 내용에서 남의 결점을 꼬집어 지적하는 것은 원래 아름다운 풍속이 아닌데, 더구나 시험 제목의 뜻을 가지고 문제 밖의 죄를 억지로 만들어낸단 말인가. 아, 참으로 교활하구나. 너는 버려진 상황에서 다시 기용된 자로서 감히 남의 촉탁을 받아 이와 같이 해괴하고 패려한 짓을 하였으니, 너와 같은 자는 마땅히 변방에 귀양보내 소 란의 근본을 없애야겠으나 이미 소생시켰다가 다시 시들게 하는 것은 도리어 화기(和氣)를 범하는 일이 될 것이다. 또한 네가 어찌 즐겨서 한 일이겠는가. 불쌍히 여기는 뜻을 깊이 느껴 경하게 관직을 삭탈하는 처벌을 내림으로써 네가 스스로 과거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설 방법을 찾게 하노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지평 최중규(崔重圭)의 상소는 규정에 어긋남이 있다. 황장(黃樟)처럼 오랫동안 들어앉아 있다가 다시 기용된 사람은 혹시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대간은 아무런 사고없이 공무를 보며 대각에 나갔던 자로서 갑자기 전에 올렸던 서계를 써서 드린 것이다. 비록 시정하라고는 하였으나, 황해 병사의 일은 이로 인하여 알고 보니 매우 민망한 일이다. 외직에 보임하는 일은 사체가 원래 다르기는 하지만 병사의 직책은 병을 치료하는 장소가 아니다. 어찌 사유를 갖추어 묘당에 정장(呈狀)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미 그 말을 들은 이상 날짜를 넘길 수 없다. 황해 감사 윤숙(尹塾)은 해조로 하여금 구두로 임명하여 내직으로 옮기게 하고, 원후진(元厚鎭)을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게 하라."
하였다. 이때 최중규가 상소하여 이집두(李集斗)를 논박하고 또 윤숙은 눈병으로 직무를 폐지하여 변통을 청하였기 때문에 이 하교가 있었다.

 

5월 23일 계묘

약원 제조(藥院提調) 및 하직 인사를 드리는 병사를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우의정 김종수에게 이르기를,
"유생의 무리가 야금(夜禁)을 범하고 옥문 밖에서 난동을 부린 것은 실로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이거니와, 두 유생이 길거리에서 욕설을 한 일은 더욱 비천한 무리들의 소행이다. 유생들에게 수치를 끼친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정승의 차자에 이미 거론되어 처분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처결할 죄명을 품의하여 아뢰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하니, 김종수가 아뢰기를,
"유생들의 소행이 참으로 해괴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근일 대간의 상소를 보았는가?"
하니, 김종수가 아뢰기를,
"신 역시 대간의 상소를 보았습니다. 홍병성(洪秉聖)이 올린 상소 내용과 이면긍(李勉兢)이 낸 시험 제목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아넘겼는데, 대간의 상소에서 열거 규탄한 뒤에 다시 자세히 보니 과연 깜짝 놀랄 일이었습니다. 대간의 말이 준엄히 나오는 것은 어찌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소의 내용과 시험 제목은 모두 범연한 일이다. 문자간에서 끄집어내어 죄를 만드는 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홍병성은 술 때문에 비난을 사는 사람인데 도리어 술의 폐단을 상소하여 논하였으니 이것이 못마땅하다."
하니, 김종수가 아뢰기를,
"홍병성은 본디 선대 때부터 흠이 있는 데다가 또 역적 계능(啓能)의 친족이므로 그 처지가 이미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그럼에도 지금 그의 상소 내용이 이와 같으니 어찌 여러 사람들의 의혹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대사간이 올린 상소문 중 상단에 있는 말은 그 충의와 의분이 남보다 백배나 더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고, 하단에 있는 말 또한 매우 타당하였는데 윤허는 내리지 않고 도리어 엄한 견책을 가하셨으니, 이 어찌 우리 전하에게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단의 일은 장황하게 말하였으니 어찌 견책과 삭직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종수가 아뢰기를,
"전 황해 병사 윤숙(尹塾)이 눈병으로 직무를 폐지한 실상을 비국(備局)에 보고해 왔는데, 재계를 만나 미처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제 지평 최중규의 상소로 인하여 이미 내직으로 옮기라는 명이 있었으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신을 병사로 좌천 보임시키는 것에 대해 일개 대간이 상소로 변통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켰을 뿐 아니라 대간의 기풍에도 손상을 끼쳤습니다. 중하게 그 과오를 추궁하소서."
하니, 따랐다.

 

좌의정 채제공이 여러 차례 간곡한 권유를 받고도 하명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하유하기를,
"조정에 나오고 도성으로 들어오라는 것에 대하여 나의 정성이 믿음을 보이지 못하고 나의 말이 진실을 보이지 못하였으니, 실로 쉽게 논의할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서울집에 들어와 사는 것조차 하지 않았고 금오(金吾)에서 명령을 기다리는 것 또한 하지 않았다. 나는 초빙하여 맞아들이는 예절을 힘쓰고 있으나 경은 곧 한결같이 매정한 태도로 강 밖의 정자에서 한걸음도 옮기지 않고 있으니, 나 역시 피곤하고 지치지 않겠는가. 분의란 것은 곧 천지와 같이 변하지 않는 법이며 고금에 공통된 의리이다. 여기에서 털끝만큼이라도 흠결이 있다면 그래도 자기의 분의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한마디 비유를 들 말이 있다. 지금 경의 형세가 재작년 처음 제수될 때에 비하여 그 경하고 중함에 있어서와 그 어렵고 쉬움에 있어서 과연 어떠한가? 만약 지금이 경하고 쉽다고 한다면 전에는 힘써 받아들이고 지금은 굳이 거절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모르겠다. 대개 오늘의 일은 나오는 길만 있을 뿐 물러나는 길은 없으니, 경은 생각하여 선택하라."
하였다.

 

5월 24일 갑진

약원 제조를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우의정 김종수에게 이르기를,
"전 강계 부사(江界府使)는 자신을 다스리기를 청렴결백하게 하고 또 사무에도 밝아 강계 한 고을이 근심을 조금 놓게 되었었는데, 지금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애석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그의 후임으로서는 무신·음관·문관을 막론하고 진실로 합당한 자가 있다면 어찌 일반적인 격식에 구애받겠는가. 가장 좋은 것은 청렴하고 명성이 있는 사람이고 다음으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며, 그 다음은 지체가 좋은 사람이다. 이 세가지를 경은 유의하도록 하라."
하니, 종수가 아뢰기를,
"이학원(李學源)이 도리도 잘 알고 자신도 잘 다스렸는데 지금 갑자기 잃게 되었으니, 그 후임이 실로 어렵습니다. 조원진(曺遠振)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원진이 청렴한 것은 가상하다. 그러나 무신을 차임하여 보내기로 한다면 이인수(李仁秀) 또한 합당할 것 같다. 지체와 인품은 쓸 만하나 버려둔 지가 오래되었으니 이런 곳에 등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 민의혁(閔義爀)이 있는데 이 사람은 여러 번 기용되었다가 밀려나곤 하였다. 청렴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나 대개 그 재능은 끝내 버릴 수 없다. 그가 과연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다시는 구현(駒峴)을 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경은 전관(銓官)과 의논하여 차출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요즈음 선비의 습성이 여지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번 학당 유생들의 일은 이 어찌 일대 괴변이 아니겠는가. 학당의 유생은 성균관 유생과 달라서 그 말씨와 처신이 본디 우직하고 과격하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관심을 두어 대접하였다. 이는 지난 일이라 논할 것도 없거니와 근래 패려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심지어 떼를 지어 야금(夜禁)을 범하고 옥문 밖에서 난동을 부리니, 이름은 비록 유생이나 실은 겁탈하는 도적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참으로 말하고 싶지 않으니 다른 것이야 무엇을 논하겠는가. 그런데도 선비로 자처하면서 장차 출세하여 조정에 나와 공경(公卿)이 되려 한다. 조정에서 이런 무리를 데려다가 무엇에 쓸 것인가. 학당 유생의 전강(殿講) 또한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하니, 김종수가 아뢰기를,
"얌전한 선비는 애당초 상소하는 반열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며 또한 재임(齋任)이 되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어찌 다 이러한 행동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꼭 중추부의 직함을 허락하지 않고 의정으로 경을 부르는 데 대해 경은 유감이 없지 않겠지만 나로서는 한가지 일정한 주장이 있다. 근년에 언관으로 있는 자는 오랫동안 자리잡힌 낡은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대신을 향하여 자주 흔들어보려는 흉계를 부렸다. 규탄하는 상소가 일단 나오기만 하면 곧 잠시 해임을 허락하여 이것으로 임시방편의 방법을 삼음으로써 말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알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조정의 분위기가 안정을 기대하기 어렵고 사람들의 마음이 고쳐질 수 없는 것이 애당초 모두 여기에 기인되었으니, 이것이 지난날을 교훈삼고 앞날을 징계하는 일로써 지금 경으로 하여금 의정의 본직으로 도성에 들어와 조정에 나와서 자신을 돌보지 않는 자리에 앉아 정승의 일을 수행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금시 허락하였다가 이내 이전대로 임명하는 것이니, 어찌 정력을 허비하고 마음을 괴롭히면서 종일토록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일전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은 치우친 것이 사실이지만 경의 거취의 기본 원칙에 있어서는 고집을 피울 절대적인 이유가 별로 없다. 그런데 거의 매일 앉아서 예우를 받은 경으로서 어젯밤의 별유(別諭)를 보고서도 선뜻 나올 방도를 생각지 않고 있으니, 옛사람의 처신하는 의리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유식한 자들의 한탄을 면할 수 있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거듭 경중을 잘 가늠하여 즉시 나와서 국사를 살펴보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5일 을사

이조 참의 이면긍이 황장(黃樟)의 상소로 인하여 사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여러 말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알아보지 않겠다. 네 말을 기다릴 것 없이 본직의 교체를 허락한다."
하였다.

 

이조승(李祖承)을 이조 참의로, 윤확(尹㬦)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26일 병오

경상도 관찰사 이조원(李祖源)이 장계하기를,
"민고(民庫)의 설치여부에 따라 폐단이 있는가 없는가를 도내 여러 고을에 공문을 띄워 물어보았습니다. 진주(晋州)·상주(尙州)·거제(巨濟)·김해(金海)·곤양(昆陽)·합천(陜川)·영천(永川)·남해(南海)·신령(新寧)·사천(泗川)·삼가(三嘉)·안의(安義)·거창(居昌) 등 13개 고을에는 보민고(補民庫)·고마고(雇馬庫)·차역고(差役庫) 등 창고가 창설된 지 오래되어 각종 공용을 모두 여기에서 해결하기 때문에 창설 초기에는 혹은 본 고을에서 보충해 주기도 하고 혹은 민간에서 거두기도 하였는데, 돈인 경우에는 본전을 세워두고 이자를 늘리며 곡식인 경우에는 돈으로 만들어 둔전(屯田)을 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력은 한도가 있고 수용은 점차 번다해져서 매년 더 많이 지출하다보니 보충할 길이 없습니다. 현재까지는 우선 이리저리 끌어대어 메꾸어나가고 있으나 앞으로 폐단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경주(慶州)·안동(安東)·밀양(密陽)·창원(昌原)·영해(寧海)·하동(河東)·인동(仁同)·함안(咸安)·흥해(興海)·고성(固城)·영덕(盈德)·의성(義城)·언양(彦陽)·산청(山淸)·칠원(漆原)·고령(高靈)·진해(鎭海) 등 17개 고을은 민고를 설치한 유래가 오래이고 애초에 마련해놓은 재정과 해마다 관청에서 쓸 수량에 대해 세목을 작성하여 이미 규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실 폐단이 생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밖의 고을은 모두 민고를 설치한 일이 없으므로 모든 공용 지출에 해당되는 것은 다만 전관(傳關)과 차역(差役) 등의 조세명목이 있을 뿐입니다.
대개 여러 고을에서 민고를 설치하는 것은 오로지 관청의 경비 지출에 대처할 밑천으로 삼기 위해서인데, 수요가 번다해지고 협잡할 구멍이 점차 넓어지다보니 환자곡을 침범하고 민간에게 마구 징수하는 폐단에까지 이르기 쉽습니다. 신이 여러 고을에 널리 물어 백성을 위해 폐단을 덜어줄 방법을 생각한 결과, 진주 등 고을에서는 민고의 수입으로 지출을 맞추어내지 못하지만 이를 빙자하여 백성들에게 거둘 수는 없고, 해당 고을에서 편리한 대로 마련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개정하여 뒷날의 폐단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다시 엄격히 신칙하였습니다. 경주 등 고을의 민고와 기타 여러 고을의 전관과 차역 등의 조세는 운영에 방법이 있고 시행한 지 오래되어 모두 폐단이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진주 등 고을 민고의 수입이 지출을 맞추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그 고을의 보고문과 도의 장계를 보아 알 만하다. 요즈음 수령들은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러 가지 부정한 명목으로 서슴없이 죄를 범하고 있다. 더구나 민고의 쓰임새를 이쪽에 쓸 수도 있고 저쪽에 쓸 수도 있는 것이니, 어찌 자기에게 절약하고 백성들에게 편리하게 할 리가 있겠는가. 팔도의 모든 수령을 다 의심할 수는 없으나 그들 가운데 능히 조심하는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모든 일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르거니와 이미 어사를 통하여 공문을 띄워 물어 보았고 신칙하여 타이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넉넉하지 못한 곳은 넉넉하지 못한 대로 내버려둔다면 몇 해가 안 가서 두 번 거두고 세 번 거두게 될 것이다. 평안도 고을의 이 폐단에 대해서도 절목을 작성하여 바로잡기를 기하였는데 본도엔들 무엇이 다르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해당 감사를 엄히 신칙하여 영원토록 폐단이 없을 방법으로 1통의 규례를 작성한 후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평안도는 연전에 규정을 처음 만들었는데 지장이 많다고 한다. 전라도는 대신의 경연 주달로 인하여 비답을 내린 일이 있는데 새로 부임한 감사로 하여금 특별히 편리한 대책을 강구하여 속히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5월 27일 정미

차대(次對)하였다. 사은사(謝恩使) 세 사람을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상사 황인점(黃仁點)에게 이르기를,
"황제가 특별히 어필(御筆)을 내려 축하를 표한 것은 실로 평상적인 격식에 벗어나는 일인만큼 의당 특례로 보답해야 한다. 우리 나라 사신은 언제나 일찍 도착하는 것으로 칭찬을 받는데, 이번 행차에도 만약 장마에 막히지 않는다면 반드시 일찍 도착하도록 작정하고 토산물을 바칠 때에도 정성을 다하여 저들로 하여금 머리 조아려 사례하는 뜻을 알게 하라."
하니, 황인점이 대답하기를,
"신들이 어찌 감히 있는 힘을 다하여 주선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말을 그들이 알아듣게 할 수 없으니 이것이 고민일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제가 불러볼 때 입장이 어색하여 머리 조아려 사례하는 것을 제대로 못할 것 같다."
하니, 황인점이 대답하기를,
"신이 저들의 말을 들으니 머리 조아려 사례하는 것 또한 금하는 바 없다 하는데 통관(通官)들이 매번 그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는 때에 따라 주선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부사 서호수(徐浩修)는 아뢰기를,
"연경에 도착한 후에는 의당 표문(表文)을 가지고 예부에 머리 조아려 사례해야 하는데 김간(金簡)이 전후에 걸쳐 정성껏 접대해준 일은 실로 고마우니, 신들이 함께 찾아가 사례할까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가 이미 정성껏 접대하였다면 예로 보아 의당 머리 조아려 사례해야 한다. 김간 이외 우리 사신에게 관심을 갖고 접대해준 여러 사람에게도 또한 모두 몸소 사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김종수가 아뢰기를,
"우리 전하께서 남의 말을 널리 받아들이는 도량은 옛날 성인들과 같이 훌륭합니다. 그러므로 왕위에 오르신 이후 지금까지 말로 인해 죄를 받은 자가 있지 않았는데 갑자기 요즘에 와서 언관의 직책을 맡은 신하들이 귀양을 가거나 벼슬을 삭탈당한 자가 많으며, 성상의 윤음 또한 더러는 중도에 지나치셨습니다. 예컨대 장령 황장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남의 촉탁을 받았다.[受人囑托]’는 네 글자로 하교하셨는데 대체로 대간이란 이름을 가지고 이런 하교를 받는다면 앞으로 예복을 갖춘 채 낯을 들고 간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대한 조정이 사기를 배양하고 언관을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 아마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대체로 홍병성의 상소 내용에 대해서는 물의가 이미 해괴하게 여기고 이면긍의 시험 제목에 대해서도 여러 사람들의 의혹 또한 컸습니다. 그리고 상단의 진술한 일에 관해서는 역시 온 나라가 기어이 징토해야 한다는 의리에서 나온 것인데, 그 네 글자의 비답은 좋은 말을 들어오게 하는 도리에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개 대간의 처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실로 ‘장하도다. 임금 말씀은 실과 같고 밧줄 같네.[大哉王言 如絲如綍]’라는 대의에 흠결이 있으니, 특별히 하교를 거두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황장의 상소 중 상단의 말은 내가 한번 보았는데 마음이 매우 불쾌하였다. 이 죄만으로도 실로 용서하기 어렵거니와 두 사람을 열거 논박한 것에 이르러서는 다시 여지가 없다고 이를 만하다. 이면긍의 일은 우선 그만두고라도 홍병성의 일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협잡하며 사정을 쓰는 일이 옛부터 많았지만 언제 이와 같은 현상이 있었던가. 문자를 끄집어내어 지적하여 사람을 망측한 죄과로 몰아넣으니, 세상 인심에 대한 걱정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억측으로 짐작하여 스스로 주석을 달아가면서 얕은 데로부터 깊은 데로 들어가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역적의 도당으로 밀어넣으려 하여 허다한 말들이 심각하지 않은 것이 없다. 제가 비록 대간이라 한들 사람을 사실에 맞지 않게 무고하고서야 어찌 반좌율(反坐律)을 면할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만약 그 죄를 논한다면 차율(次律)도 오히려 경하였기 때문에 ‘남의 촉탁을 받았다.’는 하교로 족히 책망할 것도 없다는 죄과로 돌렸으니, 이것은 실로 미봉하여 두루 막아대려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상소의 내용이 만약 그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죽어도 그 죄가 남는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이것으로 죄를 성토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있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되겠는가?"
하자,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에 문자를 끄집어내어 지적하여 사람을 망측한 곳에 몰아넣는 것으로 세상인심의 깊은 걱정거리로 삼으시니, 이는 곧 나라의 영원한 운명을 하늘에 비는 대성인의 거룩하고 지극한 덕의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대간의 상소문에서 운운한 말을 정도에 지나쳤다고 한다면 그래도 가하겠지만 남의 촉탁을 받았다는 네 글자의 비답은 대간을 대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하였다. 그제야 황장의 상소에 대한 비답 중에 ‘남의 촉탁을 받았다.’는 말을 ‘동쪽에 끌리고 서쪽에 끌리기에 분주하였다.[擾攘於東提西挈]’로 고쳐 반포할 것을 명하였다.

 

앞서 호조 판서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군직(軍職)으로서 원래의 체아직(遞兒職)이 3백 16자리이므로 본조에서는 이 숫자에 맞추어 녹미(祿米)를 마련하여 병조로 이송하고 병조는 이 숫자에 의하여 녹봉을 붙여주었는데, 근래에 와서 갑자기 원래 숫자 외에 더 지출하는 폐단이 있어 해마다 증가되다보니 지난해에는 더 지출한 미두(米豆)가 1천 5백여 석이나 되었고, 올해 춘기에 더 지출한 것도 벌써 5백 40여 석이나 됩니다. 이렇게 미루어 보면 네 분기에 더 지출한 것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청컨대 이달부터 시작하여 병조로 하여금 한결같이 법전에 따르고 규정 외에 더 지급하지 말도록 하며 해당 창고에서도 또한 원래의 수량 외에 더 지급하지 말도록 할 내용으로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자, 그대로 따랐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조 판서 이갑(李𡊠)이 아뢰기를,
"일전에 호조 판서 정민시와 신이 맡고 있는 병조 군직의 녹봉에 관한 일로 연석에서 품의한 바가 있었는데, 3백 16자리 외에는 넘기지 말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개 이 일은 바로잡을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계묘년 간에 신이 본조에 있을 때 녹봉을 주어야 할 자리 외에도 오히려 나머지 수효가 있었고, 그후 6, 7년 동안에 녹봉받는 자리가 해마다 늘어나고 달마다 불어나서 자그마치 1천 4백 석이나 됩니다. 지금에 와서 아무리 변통하고자 하여도 어찌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달에 줄 녹봉도 전례에 따라 호조에 넘겨보냈더니 호조에서는 연석에서 품의가 있었다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고 되돌려보냈습니다. 녹봉을 당장 주어야 하겠는데 일이 매우 딱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호조 판서 정민시가 아뢰기를,
"서반(西班)의 녹봉자리는 원래 일정한 수효가 정해져 있어 별로 보태거나 줄인 것이 없습니다. 시종관이 숫자가 많다고 하였으나 병신년 이전에 비하면 오히려 그만 못합니다. 이전에는 넉넉하던 것을 근래에 더 지출하게 된 데에는 어찌 그 까닭이 없겠습니까. 가령 경비가 남아돈다 하더라도 규정 이외에 더 지출하는 것은 전에 없던 규례를 새로 만드는 것이라 매우 부당합니다. 더구나 이 원래의 수량이 부족한 때에 어떻게 규정 외의 수요를 수응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시정하는 방법은 오직 병조 판서가 원한을 감당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하고, 우의정 김종수는 아뢰기를,
"녹봉의 자리가 이 수효뿐이라는 것은 예로부터 이미 그러하고 일찍이 가감한 일이 없으니, 가령 새로운 사단이 생기고 경비 또한 넉넉하다 하더라도 의당 품의하여 수효를 늘릴 것이지, 자의로 변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별다른 사단도 없고 국고의 세입은 늘 녹봉을 주기에도 부족하지 않습니까. 병조 판서의 일이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녹과(祿科)를 수시로 변동하는 것 또한 전례가 있다. 병조 판서로 하여금 이것을 잘 알고 원만히 처리한 보람이 있게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지금 만약 더 지출하는 것을 엄금한다면 군직 시종신 중에 가난하여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이 불쌍하지 않은가."
하였다. 민시가 아뢰기를,
"해당 조에는 교체하고 넘겨받는 변장(邊將)의 요미도 본래 적지 않은데, 애당초 나누어주지도 않고 모두 담당 서리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금군(禁軍)의 활쏘기 시험도 원래 정해진 규정이 있는데, 안면 관계에 구애되어 화살 네 개를 맞히지 못한 자에게도 또한 모두 요미를 지급하니, 순찰하는 장수의 액수가 또한 너무 많습니다. 이밖에도 잘못을 답습하는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는 모두 병조 판서가 어려움을 참고 원망을 감내하려들지 않는 탓입니다. 군직 시종관에 이르러서는 원래 녹봉을 주는 규례가 없었는데, 이것 역시 근년에 새로 생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례가 이미 그러하니 시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옥당(玉堂)으로서 군직에 있는 경우는 다른 경우에 비해 자별한 만큼 의당 변통이 있어야 한다. 어찌 고례만 고집하면서 변통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특별히 박종악(朴宗岳)을 발탁하여 도총부 도총관으로 삼았다.

 

5월 28일 무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북병영 친기위(北兵營親騎衛)의 활쏘기와 강받기를 행하였다. 앞서 북병사가 무술에 능숙한 군사를 뽑아 보고함으로써 서울로 올려보낼 것을 명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시험해 보인 것이다.

 

우의정 김종수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정주 향안(定州鄕案)의 일에 대하여 한 번 저의 주견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나 동료 정승이 바야흐로 남의 입에 올라 있었고, 이 일은 신이 본래 의견을 달리하고 있던 만큼 마음 속으로 불안스러운 점이 없지 않아 줄곧 침묵을 지키면서 지금까지 참아왔습니다. 좌의정의 상소 가운데 ‘공적으로 쓴 것을 징수할 곳이 없기 때문에 수량대로 돌려 갚을 수 없다고 하는데 나라에서 그와 같이 지시하는 일이 또한 매우 피곤하고 구차한 일이 아니겠습니까.’한 말을 신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은 동료 정승이 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혹 주밀하지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새 향안에 등록된 사람 중에 서로 결탁하고 뇌물을 써가면서 분수에 넘친 짓을 하려는 자에 대해 그 죄상을 이미 위에 보고한 다음에는 새 향안을 없애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간에 소비해버린 돈에 대해서는 가령 어떤 사람이 1천 냥을 잃었다 하더라도 이는 그의 죄이므로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은 자의 죄가 준 자보다 더 큰 만큼 그대로 둔다면 탐욕스런 자를 부하게 만드는 일에 가깝고 또 탐욕스런 자를 단속하고 뒷사람을 징계하는 정사를 해치기 때문에 오직 추심하여 돌려주게 했을 뿐입니다.
이른바 공적으로 지출한 것을 구별하고 구별하지 않는 것에 이르러서는 곧 해당 도와 해당 고을의 일이요 조정에서 참견할 일이 아닌데 더구나 이것을 가지고 지시를 내리겠습니까. 그리고 도로 갚는다는 것은 본래 민간에 대여한 것에 대해 붙이는 이름입니다. 이 일은 애초부터 대여한 것이 아니니 ‘도로 갚는다.[還報]’는 두 글자는 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수량이 맞고 맞지 않는 것을 무엇 때문에 따져 논하겠습니까. 신이 비록 보잘것없는 사람이나 직책이 대관(大官)입니다. 조정의 명이 일단 내려졌을 때 나라의 체면이 높아지고 백성들이 마음 속으로 복종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자나깨나 지극한 소원이라, 날로 이를 도와드릴 것을 생각하면서도 그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 차마 피곤하고 구차한 일로 성명께 권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비로소 차자를 올리며 덧붙여 진술합니다. 아울러 굽어 살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공적인 지출의 구별 여부를 해당 도에 넘기자.’고 말하고, 동료 정승은 ‘공적으로 쓴 것을 이미 그 수량대로 추심해 주지 못할 것이라면 등록안 또한 불사르지 말아야 한다.’고 하니, 이는 마치 호자(胡子)033)  의 이른바 ‘본체는 같은데 활용은 다르다.[同軆異用]’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다시 차자로 번거로이 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구나 이미 거조와 비답이 있으니 해당 도에서는 잘 살펴 시행하라."
하였다.

 

홍병성(洪秉聖)을 승지로 삼고 하교하기를,
"근래에 남을 공격하는 상소가 얼마나 많은가마는, 황장(黃樟)의 상소를 보고 조정의 분위기와 풍습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생각할 때, 어찌 깊은 걱정과 장래의 염려를 금할 수 있겠는가. 이는 유독 논박을 입은 사람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대개 말 밖의 뜻을 억측하고 지레 짐작하여 주석을 달고 또 주석 외에 다시 한 단계 더 들어감으로써 그 단계가 들어갈수록 깊어져서 역적 도당의 구덩이로 몰아넣고 제 입으로 죄를 꾸며댄 다음 그 꾸며댄 말을 가지고 율문의 이름을 정하니, 한 마디로 말해서 깨끗한 세상에는 결코 이러한 현상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어제 경연에서, 그 원소(原疏)가 만약 자신의 의사에서 나왔다면 황장은 죽어도 그 죄가 남는다고 대신에게 말한 이유이다. 지금 그를 제수한 것은 그를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애매한 처지에 방치해두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새로 제수된 승지 홍병성을 명소패(命召牌)로 불러 일을 보게 하라."
하였다.

 

승지 홍병성이 상소하기를,
"신이 앞서 대사간의 제수를 받고 여러 역적을 열거하여 규탄할 때 단지 몇 자씩만 들어 죄를 규정지었으나 근년에 와서 새 역적의 징토가 더욱 시급하기 때문에 위로 우진(宇鎭)·조시위(趙時偉)·신기현(申驥顯)·이재간(李在簡)에 대해서는 ‘끝없이 흉악한 죄악이 드러날수록 더욱 심하여 그 여파의 남은 종자들이 없는 곳이 없다.’고 말하였고, 아래로 추천된 장수가 상소를 꾸민 것에 대해서는 ‘국문에서 받은 공술이 명백하여 이리저리 재며 관망하는 것이 드러났고 차자와 장주가 번갈아 올라와 속이고 핍박하는 것을 숨기기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새 역적에 대한 징토가 앞서의 여러 흉역보다 배나 엄격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말하는 자는 그 정신골자는 어느 곳에서 성나게 되었으며, 안목과 어맥은 의심을 가지는 것이 무슨 일이기에 두서없는 말이 이렇듯 극도에 이르렀습니까.
신은 실로 무식하기는 하나 고금의 문리에서 ‘이런 일이 없다.[無是]’는 두 글자로 ‘어찌 하(何)’ 자의 주석으로 삼았다는 말을 아직까지 듣지 못하였습니다. 획책한 일이 과연 얼마나 흉패한 문제였습니까. 그러나 국문에서 실토가 나오자 이리저리 재고 관망한 죄상이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꾸며댄 말이 과연 얼마나 간교한 말이었습니까. 그러나 차자와 장주가 나오자 속이고 핍박한 죄안이 더욱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중용(中庸)》과 《시전(詩傳)》 서문은 ‘어찌 하(何)’ 자로 시작하였고, 《공양전(公羊傳)》에는 전부 ‘어찌 하’ 자를 이용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허두를 떼고 아래의 글을 연결시키면서 그 요점을 제시한 것인데, 지금은 ‘무슨 일, 무슨 말[何事何言]’에 대한 대답으로 ‘이것이 없다.[無是]’라고 명백하게 말하였으니, 도대체 무슨 견해입니까. 흉역을 함께 꾀했다고 자복하였으므로 공술한 것이 없이도 공술한 것으로 되어 추천한 장수가 흉악하다고 명백히 말하였는데 지금 그것을 구별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신이 연이어 징토한 죄인을 상고할 만하여 특별히 무고하면서 핍박한 죄를 들추어냈는데, 지금 억지로 돌렸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모두 충성을 바친다고 하나 순수한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보기 드물고, 사람마다 역적을 징토한다고 말하나 그 뿌리와 소굴은 여전히 그대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신이 이른바 ‘충신과 역적을 분간할 수 없다.’는 것인데, 저들이 말한 ‘의리가 밝지 못하다.’는 것도 신의 상소의 말을 잘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술을 멀리하지 못하는 관계로 술에 대한 폐단을 깊이 알아 낭비라는 것을 민망히 여기면서 지나친 것을 제거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엄격히 막게 된다면 우선 신 자신부터 낭패입니다. 그러나 술을 잘 마시면서 금하기를 청하는 것이 어찌 그 폐단을 아는 공정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임금이 내리는 은혜로 술을 마시고서 전폐에서 내려갈 때 부축을 받고, 시인묵객들이 회포를 풀고 명절에 한껏 즐기는 것은 실로 태평시대의 미풍이니 누군들 부러워하고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취기를 빙자하여 어른을 능욕하고 주정을 빙자하여 존귀한 이를 건드립니다. 그리고 간통의 송사와 살인의 옥사에 술이 열에 아홉을 차지하니, 신의 이른바 온 나라가 미친 것 같다는 것은 실로 이러한 광경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흠을 잡는 말이 역적을 징토하는 데로 넘어갈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옛날에 자공(子貢)이 사제(蜡祭)를 지내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미친 것 같다.’ 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한 세상을 톡톡히 무함한 말인데 자공의 당시에도 역적을 징토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산기슭에 있는 신의 집은 실로 역적 이재간(李在簡)이 사는 동네와 이름이 같기 때문에 한동네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라고 한다면 어찌 놀랍지 않겠습니까. 안면이 서로 있다 해서 친구라고 이르는 것입니까, 나이가 서로 비슷하다 해서 친구라고 이르는 것입니까. 취지가 이미 다르고 마음이 서로 맞지 않으며 끝내는 업신여기고 질시하는 것이 점점 더해져서 서로 용납하지 못할 지경에 가까웠습니다. 이러한데도 오히려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까. 또 더구나 역적 시위(時偉)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좌중에서 얼굴을 알았고 반열에서 마주친 것에 불과합니다. 천하에 어찌 그 집을 모르는 문객(門客)이 있겠습니까. 문객이라고 하는 말은 이미 터무니없고 ‘마음을 통했다.[輸心]’는 두 글자는 더욱 변명할 수 없습니다. 두 역적의 가족이 아직까지 살아 있고 온 세상의 공론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대개 신의 고지식한 천성은 어리석어서 변통할 줄을 모르고 권세있는 자리는 겁을 먹은 듯 피하였습니다. 권세있는 높은 벼슬자리를 몇 차례 역임하였으나 한결같이 움추릴 줄만 알았기 때문에 권세에 붙쫓는 자는 지나치게 옹졸하다고 비웃고 요로에 있는 자는 지나치게 편벽됨을 의심합니다. 여러 번 난관을 겪으면서 사경에 임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파직을 청하고 삭직을 청한 것은 그대로 받아들여 원망하지 않겠습니다만 지금의 죄명에 대해서만은 잠시도 견디어 낼 수 없습니다. 빨리 유사에게 넘겨 말한 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동시에 명백하게 해명하여 죽어도 결백한 귀신이 되게 해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조원진(曺遠振)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29일 기유

함경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가 유랑민을 안착시키고 되돌려보내는 일에 대하여 치계하였다. 【안착시킨 것은 1천 7백 32명이고, 되돌려보낸 것은 56명이며, 경내를 통과한 것은 67명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43면
【분류】호구(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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