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경술
윤대(輪對)를 가졌다.
서도(西道)와 북도(北道)의 권관(權管) 두 자리를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 앞서 사직(司直) 이주국(李柱國)이 상소로 진술하기를,
"당하(堂下) 무관들의 적체가 요즈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성상께서 이를 소통시킬 방법을 생각하여 정원 외의 자리를 많이 설치하였는데, 더 설치한 몇 개의 자리는 이동되는 자리가 적다보니 만약 특별히 변통하는 방도가 없다면 그 적체현상은 여전히 되풀이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앞으로 정원 외에 더 설치한 자리는 결원이 생길 경우 이를 보충하지 말고 두 군영의 파총(把摠) 각 두 자리와 종사관(從事官) 각 한 자리, 좌포청(左捕廳)과 우포청(右捕廳)의 종사관 각 두 자리를 합한 열 자리를 모두 실직(實職)으로 만들어 차례차례 전보하는 단계로 삼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이는 두 전조(銓曹)의 실직과는 달라서 일단 이 자리로 옮기면 다시 후보자로 추천되지 못하기 때문에 명색은 소통시키는 것이라 하지만 전일의 현상과 다름이 없습니다. 두 전조에 엄히 신칙하여 실효를 거두게 해야 합니다. 두 군영의 파총은 자체에서 추천한 것 이외에 각 세 자리라고 《대전(大典)》에 분명하게 실려 있습니다. 지금 혹시 옛 제도를 다시 밝혀 그 세칙을 엄격히 세워서 여섯 자리 중 네 자리는 실직인 파총으로 차출하고, 두 자리는 직무가 없는 파총으로 차임하더라도 전조에서 실직 파총을 다른 실직과 동일한 예로 보아주지 않는다면 여러 해를 한 자리에서 지체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전조를 신칙하여 다 같이 차임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체에서 추천하는 자리에 대해서는 규정을 어기지 않게 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자, 병조에 명하여 품의 조처하게 하였는데, 병조가 아뢰기를,
"편리함을 따라 변통하고자 한다면 참상 실직(參上實職)의 자리를 더 만든 뒤에야 적체를 소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서도와 북도의 권관으로서 참하(參下)로 교체하여 넘긴 것 중 두 자리를 만호로 올리고, 두 군영의 파총으로서 임시 실직으로 만든 것 중 각각 한 자리를 참상의 실직으로 만들면 실로 일시적 방편에 맞는 제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권관은 출륙(出六)의 자리가 여유가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전대로 도로 넘긴다면 출신(出身)들도 억울하다는 한탄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권관 두 자리를 만호로 승격시키는 일은 그대로 시행하라. 임시 설치한 파총 두 자리를 실직으로 만드는 일은 관리의 규정으로 비추어볼 때 사실 부당하지 않겠는가. 이 일은 그대로 두라. 현재 그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은 자체로 추천하는 고을 자리가 비기를 기다려 즉시 차임하여 보내되 감히 위반하지 말라."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이시수(李時秀)가 유랑민이 돌아와 안집(安集)한 것으로 치계하였다. 【도내의 유랑민 9천 3백 45명 중 앞서 돌아와 안집한 사람이 3천 6백 99명이고 나중에 돌아와 안집한 사람이 4백 44명이었다. 이 중에 93명은 공문을 받고 돌아와 안집하였고 3백 51명은 자의로 돌아와 안집하였다. 아직도 돌아와 안집하지 못한 자가 5천 2백 2명이다.】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43면
【분류】호구(戶口)
6월 2일 신해
호조 판서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연전에 받은 성상의 하교에 의하면 궁중에서 쓰는 물건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중관(中官)·액례(掖隷)가 구두로 전하는 분부에 대해서는 봉행하지 말고 ‘계(啓)’ 자를 찍은 것으로 봉행의 준칙을 삼으라고 하였는데, 근래에 와서 이 법이 점차 해이해져 갑니다. 앞으로는 한결같이 연전에 내린 하교를 준행하겠습니다만, 시급한 일과 미세한 물건에 있어서는 역시 매번 번거로이 ‘계’ 자를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매월 보름께 단자(單子)로 기록하여 재가를 받게 되면 허실(虛實)이 서로 뒤바뀌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즉위한 후 호조의 돈이나 곡식에 대하여 아직까지 ‘계’ 자로 허락을 받아서 쓴 일이 없다. 이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록 미세한 잡물이라도 연전에 정한 규정을 거듭 밝혀 ‘계’ 자의 표시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원으로부터 전교를 받게 하였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구두전달에 의하여 거행하는 일이 있다 하니, 너무도 해괴하다. 규정을 정한 이후 중관이나 액례가 구두로 전달하는 분부를 뽑아 적어 들여 상고하여 처분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어용겸(魚用謙)을 공주목(公州牧)으로 귀양보냈다. 그가 향안(鄕案)을 판 데 대해 어사가 열거하여 규탄함으로써 도에서 조사하여 처결하였다.
6월 3일 임자
이문원(李文源)을 함경도 관찰사로, 박종악(朴宗岳)을 예조 판서로, 홍양호(洪良浩)를 예문관 제학으로, 한광회(韓光會)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북도 백성들의 형편을 보면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가을이 된 뒤라 하더라도 과거에 연기해준 것과 당년에 바칠 것을 한꺼번에 독촉하게 되면 무슨 힘으로 당해내겠는가. 더구나 유행병이 극성한 나머지 죽은 인구가 또한 많다고 한다. 죽은 백골에까지 침해하는 것은 더욱 불쌍한 일이니, 과거에 연기해준 것까지 모두 탕감하도록 하라."
광주부 윤(廣州府尹) 윤행임(尹行任)이 남한 산성(南漢山城)은 곧 그의 선조인 윤집(尹集)이 잡혀간 곳이라 하여 사임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이 일을 묘당에 내리자,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학사(三學士)가 남한 산성에서 절의를 세운 데 대하여 지금까지 이 산성을 지나는 자는 그곳을 지적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자손이 그곳의 관리로 부임하였을 때 슬픈 마음이 우러날 것은 당연합니다. 의당 그의 사임을 허락해주어야 하겠으나 예법으로나 전례로 보아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특별히 교체하였다.
6월 4일 계축
좌의정 채제공에게 하유하기를,
"내가 경에게 한마디 할 말이 있다. 분의에 맞게 처신하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데 ‘분의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말한 것은 깊이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경의와 예우를 다하였는데도 경은 마음을 돌리지 않고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깨우쳐도 경은 응하기를 힘쓰지 않으며 오직 세월 보내기만을 일삼으면서 조정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마치 서로 적대시하여 겨루면서 세월을 끄는 사람들 같다. 알 수 없거니와 경은 승부를 걸고 이와 같이 나를 본체만체하고 나의 말을 들은척 만척 하는가. 내 비록 과덕하고 혼암하나 사람을 쓰고 버리는 권한은 나 한 사람에게 있다. 만약 한 사람의 대신을 조정으로 불러들이지 못하고 구차히 앞서의 결심을 굽히거나 억지로 애초의 견해를 바꾼다면 예악(禮樂)과 정벌(征伐)이 조정으로부터 나온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경이 나오고 나오지 않는 것은 경의 재량에 맡긴다. 이에 이르러 경은 또 무슨 말로 대답하겠는가. 경은 깊이 생각하라. 나는 다시 말하지 않겠다."
하였다. 제공이 의금부에서 명을 기다리다가 사관을 보내 유시하자, 제공이 명을 받들었다.
승지 이면긍(李勉兢)을 특명으로 토성 첨사(兎城僉使)에 보임하고, 하교하기를,
"이름이 황장(黃樟)의 상소에 오른 사람은 모두 영광이지만, 이 승지에 이르러서는 애매한 홍병성(洪秉聖)과는 더욱 달라서 사람들의 모함이라는 것을 세상이 다 알고 있다. 또 논박을 당한 직명과는 엄연히 다르다. 특별히 임명하는 마당에 어찌 감히 응하지 않겠는가. 토성 첨사로 제수하여 당일로 조정을 하직하게 할 것이니,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심력을 다하여 환자에 대한 폐단을 바로잡고, 인근의 변장(邊將)으로서 법을 어기며 백성을 못살게 하는 자들도 보고 듣는 대로 다시 그 사실 유무를 확인하여 참으로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자들은 조정에 돌아온 후에 아뢰라. 본진과 기타 고을의 진영을 막론하고 민폐에 관계되는 일이 있을 경우 또한 장문할 것을 허락한다."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 절도사 이득제(李得濟), 강계 부사 민의혁(閔義爀)에게 하유하기를,
"강계 한 지방은 관방(關防)의 요새임은 논할 것도 없거니와 백성들과 나라를 위하는 일에 있어서 관계되는 바가 더욱 중하다. 지금 고을의 폐단과 백성들의 형편으로 보아 그 수령을 잘 고르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이번에 차임하는 것은 전례를 뛰어넘어 특별히 뽑아보내는 것이다. 실로 능란하게 잘 해나갈 줄은 알고 있으나 만약 감영이 일에 따라 도와주지 않는다면 해당 수령이 원망을 사면서까지 심력을 다하고자 한들 될 수 있겠는가. 이 뜻을 평안 감사에게 유시하라. 수령이 비록 적임자라 하더라도 한 고을 안에 이미 열 사람의 진장(鎭將)이 있는 만큼 그들이 백성을 침해하고 관하의 토졸(土卒)들을 괴롭히는 폐단을 통렬히 금하지 않는다면, 토졸 역시 고을 백성이니 그 민호가 회복되어 부유해지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여러 진영 중에도 또한 어찌 잘 다스리는 사람들이 없겠는가마는, 이처럼 잔폐한 형편을 이용하여 사복을 채울 욕심을 부리고자 한다면 그 폐단을 받는 고통은 고을 수령들보다 배나 될 것이다. 지금은 본부(本府)034) 를 위하여 밤낮으로 걱정하는 때라 단지 고을 수령에게만 관심을 두고 변장(邊將)의 유능한가 그렇지 못한가에 대해서는 책망하지 않으니, 폐단을 없애려다가 폐단을 일으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병사는 근시(近侍)의 반열에서 나왔으므로 나라를 받드는 정성이 다른 사람보다 배나 더할 것이다. 업적을 평가할 때가 바로 이때이니, 잘 다스리지 못하는 변장에 대해서는 강계 지방이건 다른 지방이건 가릴 것 없이 각별히 살펴 저조하건 우수하건 한결같이 실적에 의거하라. 강계의 여러 진영에 대해서는 특별히 찾아 살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자를 적발하여 그 죄를 처결함으로써 굶주리고 호소할 데 없는 백성들에게 사죄하며, 가장 잘 다스리는 사람들도 또한 즉시 장문하라. 병사는 새로 도임하여 견문을 넓히는 과정에서 도리어 폐단을 끼칠 수 있다. 감사와 고을 수령은 필시 모두 대충이라도 보고 아는 것이 있을 것이니, 그들과 함께 의논하여 특별히 하유하는 실효가 있도록 기약하라. 각 진영의 폐단을 영구히 없애는 방법 또한 감사와 병사, 그리고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잘 알고 있게 하라."
하였다.
광주 부윤(廣州府尹) 홍성연(洪聖淵), 토성 첨사(兎城僉使) 이면긍(李勉兢)을 불러 접견하였는데 그들이 하직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이면긍에게 이르기를,
"황장(黃樟)의 상소는 전고에 없었던 일이라 이를 만하다. 네가 잘못 걸려든 것은 우선 그만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홍병성(洪秉聖)의 경우는 더 망측하다. 간교한 방법으로 사사로운 감정을 펴는 글이 옛부터 많았지만 황장의 상소처럼 심각하고 터무니없는 것이 또 어디에 있었던가. 내가 일전에 경연석상에서 대신과 주고받은 말이 있지만, 선왕조 50년 동안의 소차(疏箚)를 모두 상고해 보아도 일찍이 이와 같은 장주(章奏)는 없었다. 오늘날의 세상 인심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이렇게 계속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그 형세가 장차 온 세상에 온전한 사람이 없고야 그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우리 나라가 빛나는 덕화를 쌓아 하늘에 영원한 운명을 빌어온 4백 년 동안의 가법이겠는가. 자구(字句)를 끄집어 죄안을 꾸며내고 끝내는 자의로 주각을 내어 기어코 사람을 불측한 죄과로 몰아넣으려 하니 이런 현상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곧 ‘이렇게 보아서는 안 될 곳을 이렇게 보아 해석한 그 죄는 더욱 중하다.’고 말한다. 엄격한 처분을 가하여 퇴폐한 풍속을 바로잡을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특별히 조정하는 대책을 써서 우선 경한 처벌을 시행하고 말았다. 지금 이처럼 누누이 하교하는 것은 대체로 세상 인심을 위하여 심히 걱정되기 때문이다. 나는 너와 홍병성에 대하여 본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찌 붙들거나 억압할 마음이 있어 그러는 것이겠는가. 억지로 강요해서라도 출사하도록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우선 외직에 보임하는 것은 실로 조정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며 아울러 서도의 백성을 위하여 그리하는 것이다."
하였다.
6월 5일 갑인
함경도 관찰사 이문원(李文源)이 한 가문에 관찰사가 3명이 나왔다 하여 사직소를 올렸다. 이때 이조원(李祖源)은 경상도 관찰사이고 이시수(李時秀)는 황해도 관찰사였으므로 이문원이 이 사직소를 올린 것이다. 비답하기를,
"특별히 임명한 뜻을 생각하여 게을리하지도 말고 방탕하지도 말라. 한 가문에 3명의 관찰사가 난 데 대해서는 법전에도 원래 구애됨이 없고, 과거의 사례로 보나 근자의 사례로 보아도 또한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선왕 때에 종형제 간에 함께 관찰사 자리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교체를 간청한 자가 있었으나 특별히 신칙하는 전교를 내렸고 대신 또한 문책할 것을 청하였다. 인용하기에 부당한 사의(私義)를 들어 상소한 것은 외람됨을 면할 수 없으므로 경을 추고한다.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전 함경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가 장계하기를,
"성천강(成川江)의 옛 물길을 만회하기 위한 제방공사를 이제 다 마쳤습니다. 영묘(英廟) 경신년에 정한 규정에 의하여 해마다 보완 축조하고 보고서를 올릴 것으로 세칙을 작성하겠습니다."
하니, 회답하여 이르기를,
"본부(本府)035) 는 이번 기유년의 물길 범람이 옛날 기유년과 다름이 없다. 다행히 옛 물길을 만회하는 제방공사가 완성되었으나 역시 옛날 기유년의 전례와 같다. 지금 만약 전례에 따라 보아넘기기만 하고 거듭 밝혀 엄히 신칙하는 것이 옛날 기유년 이후의 조정 명령에 미치지 못한다면 한 삼태기의 흙 때문에 높은 산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는 교훈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후부터는 제때에 제방을 쌓지 않거나 또한 해마다 장계로 보고하지 않을 경우 감사와 수령을 논죄하는 것 역시 전례대로 하라."
하였다.
6월 6일 을묘
약원 도제조(藥院都提調) 홍낙성(洪樂性)을 불러 보았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외간에 전하는 말이 모두 나라의 경사가 이달에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대소신민들이 모두 좋아 날뛰며 기다립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설청(設廳)의 명령이 내리지 아니함으로써 아랫사람들의 심정이 민망하고 답답해 합니다. 오늘부터 본원이 전례에 따라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은 분명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설청은 하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만인이 이구동성으로 전언하면서 기뻐 날뛰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 어찌 명백하지 않겠습니까. 성상의 의도를 신이 물론 짐작합니다만 이는 나라의 더없이 중대한 경사입니다. 설청을 어찌 지연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든 것이 정상이라 약을 쓸 필요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설청을 하겠는가. 자전에 품의하여 경들에게 알려주겠다."
하였다.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7일 병진
비변사가 아뢰기를,
"함경도 관찰사 이병모의 장계에 의하면 ‘북관지방 기병(騎兵)들의 도시(都試)는 매년 10월에 임시로 설치한 군영에 모아 보이기 때문에 임시 설치한 군영에서 좀 멀리 떨어진 남쪽의 여러 고을은 오가는 길이 1천여 리나 되므로 군사들은 이를 힘들게 여깁니다. 그리하여 지난해 가을에 어사의 서계에 요청한 것으로 인하여 사실 임시 설치한 군영과 본 군영에서 나누어 시험보이기를 친기위(親騎衛)의 전례에 따라 다 같이 시행하자는 뜻으로 변통한 바가 있습니다.
한겨울에 보이는 친시(親試)에 참가하기 위하여 1천여 리 길을 내왕하는 것은 실로 막대한 노고입니다. 이에 조정에서 북관지방에서 시행하도록 허락해준 것은 대개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남관지방의 기병들도 북관지방에서 실시한 전례대로 할 것을 희망하는 것은 군사들의 실정으로 보아 혹 이상할 것이 없을 것도 같습니다만, 감사의 이른바 친기위의 특례는 별로 의의가 없다는 말도 매우 일리가 있거니와, 그 지세도 북관지방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관지방에서 부득이하여 실시한 전례를 별 문제가 없는 남관지방에서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보니, 그만두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가 강계(江界)의 고질적인 폐단에 대해 아뢰기를,
"본부의 인삼 행정의 간교한 술책과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근래에 와서 강계 백성들은 거두어들이는 정사에 너무도 시달리므로 전일에 채삼을 전업으로 삼던 자들은 그 이익이 적고 해가 많음으로 해서 산에 들어가는 사람수가 전에 비하여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인삼에 관한 행정이 극도로 어렵게 된 것이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산(下山)할 때면 수색하는 일이 시집가지 않은 처녀에게까지 두루 미쳐 몽땅 약탈해 가니 남은 이익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위에 바칠 때면 저울질의 농간이 한결같이 아전과 군교에 맡겨지는 결과 1냥의 감축이 많게는 4, 5전씩이나 되며 남은 것은 결국 관청의 용도로 돌아가게 되니 민원이 일 것은 또한 알 만합니다. 많이 캔 사람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캐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 주지만 결국 그 값을 내줄 때에는 원래 정해 놓은 4냥 2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인삼흉년을 만나 채삼자가 본업을 잃게 되면 온 경내를 통하여 거두어들이는 폐단이 번번이 있습니다. 강계 백성이 어찌 떠돌지 않을 수 있으며 조정의 걱정거리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상인들이 남몰래 사들이는 것을 엄금하여 한없이 새는 구멍을 막고 기타 소소한 폐단은 본 고을에서 요량해 조처할 일로 계속 엄한 단속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으레 바치기로 된 원액(元額)의 인삼을 산을 끼고 있는 여러 고을과 북관에 나누어 배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산을 끼고 있는 여러 고을에 어찌 캘 만한 인삼의 종자가 없겠습니까마는 백성들이 본디 본업으로 삼지 않습니다. 지금 만약 연례대로 나누어 배정하는 것을 한결같이 강계 고을에서 하는 것 같이 한다면 또 강계 고을의 폐단을 산을 끼고 있는 여러 고을에 두루 파급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목전에 닥친 다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으나 실은 훗날의 고질적인 폐단을 만드는 것입니다.
북관에 대해서는 연전에 조정으로부터 특별히 강계 백성들의 노고를 걱정하여 그 힘든 것을 덜어주게 하였는데 지금 또 수량을 배정하여 몫으로 떼어준다면 과연 곤란한 점이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인삼의 가격을 통틀어 4냥 2전으로 정하여 일정한 규례로 삼는 것 또한 실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건이 일정하지 않은 것은 물건의 실태로서 그 가격의 높고 낮은 것은 산출의 많고 적음과 품질의 좋고 나쁨이 때에 따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인데, 지금 만약 일률적으로 값을 똑같이 하자는 것은 아마도 고집불통의 의견임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군정에 있어 어린아이를 군적에 등록하고 죽은 사람에게 신역을 물리는 일에 대해서는 본 고을은 본디 면적이 넓고 토질이 비옥한 데다가 인삼과 초피까지 생산되는 이득이 있기 때문에 온 도내에서 살기좋은 곳으로 강계 고을을 첫째로 칩니다. 그러나 고을 수령이 돌보아주며 보호하는 정사를 펴지 못함으로써 백성들이 오랫동안 가렴주구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옛날에는 수만 호가 되던 것이 지금은 4천여 호밖에 안 됩니다.
세력있는 토호는 그 협솔(挾率)까지도 응당 져야 할 신역을 회피하지만, 세력없는 가난한 백성들은 그 노약자까지 군적에 등록하게 되니, 어린아이를 군적에 등록하고 죽은 사람에게 신역을 물리는 일이 왜 그렇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해당 고을에 공문을 띄워 관에서 직접 장부를 잡고 누락된 장정을 조사해내며 필요치 않은 잡색군으로서 강계부에 매여있는 자들을 하나하나 혁파하여 빠진 자리에 대신 보충하여 한두 가지의 신역을 이중으로 지는 걱정이 없게 하고 있습니다.
전결(田結)을 고쳐 측량하는 일에 대해서는 본부의 1만 6천여 결이나 되는 많은 토지를 5천여 호가 다 경작해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형편으로 보아 그럴 법 합니다. 그리고 이미 숲으로 되어버린 땅에 대하여 이웃 사람과 친족들에게 공공연하게 조세를 징수한다는 백성들의 말이 지나친 것 같기는 하나, 지금 강계의 민호가 점점 비는 것으로 보아 또한 무리한 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일일이 조사하여 현재 경작하는 토지에 따라 조세를 거둔다면 백성들은 징수를 원망하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토지측량에 대한 명이 지금 거듭 강조되고 있는 만큼 금방 알려주고 일일이 정신차리라는 뜻으로 본부에 엄중히 당부하였습니다."
하였다.
6월 9일 무오
병조가 아뢰기를,
"원춘도 관찰사(原春道觀察使) 윤사국(尹師國)의 장계에 의하면, 도적을 잡은 장교나 군사 중에서 사나운 도적의 괴수를 잡은 자는 1등으로 치고, 도적의 죄가 좀 중한 것을 잡은 자는 2등으로 치고, 도적의 무리에 추종한 것을 잡은 자는 3등으로 친다고 하였는데, 《대전통편(大典通編)》을 상고해 보니, 명화적(明火賊) 5명 이상을 잡을 경우 그 체포를 지시한 사람은 가자(加資)하고, 몹시 사나운 도적은 1명을 잡아도 강도 5명을 잡은 예에 의하여 논상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1등에 해당한 장교는 마땅히 가자의 은전을 베풀어야 하고 그 나머지는 감사로 하여금 후한 편으로 상을 내리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법전(法典)》에 이미 사나운 도적이면 1명이라도 5명의 예에 의하여 논상한다고 하였으니, 2등에 해당하는 고을의 장교도 그 형세는 사실 3등에 해당한 사람보다 낫다. 의당 구별하여 모두 첩지를 만들어 주어야 하고, 3등을 차지한 장교는 각 해당 고을로 하여금 특별히 승차를 가하여 수용함으로써 징계하고 권장하는 계기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0일 기미
권이강(權以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정범조(丁範祖)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부사직(副司直) 강유(姜游)가 상소하기를,
"수원(水原)은 곧 총융청(摠戎廳)의 바깥 군영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진(鎭)이고 더구나 또 막중한 능침을 받드는 곳이니, 의당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새읍을 옮겨 설치하였으나 성지(城池)의 방어설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번에 옮겨 설치한 것을 계기로 성지도 아울러 경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옛사람의 말에 ‘금성탕지(金城湯池)’라고 한 것은 곧 참호를 설치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기 때문에 어느 곳이나 산을 의지하여 쌓게 되어 참호를 설치할 수 없으니, 이는 옛 제도가 아닙니다. 새읍은 이미 들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므로 과연 성을 쌓고 참호를 설치한다면 실로 성을 설치하는 조건에 맞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여기에 성을 쌓아 독산성(禿山城)과 서로 견제하는 세력을 만들고, 유사시에 협공의 형세를 이루게 한다면 설사 난폭하고 교활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병법(兵法)에서 꺼리는 것임을 알고 감히 두 성 사이를 엿보지 못할 것입니다. 논의하는 사람들이 만약 석성(石城)을 쌓자면 비용이 많이 든다 하여 어렵게 여긴다면, 토성(土城)을 견고히 쌓는 것이 주먹같은 돌을 포개어 쌓는 것보다 도리어 낫습니다. 만약 토성에다가 성가퀴를 설치하고 군데군데 치성(稚城)을 설치하면 방어하는 방도로는 석성이나 토성이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또 듣건대 새읍에 집을 짓는 자는 절반이 유생(儒生)이라 합니다. 위급한 일이 닥쳤을 때 그들과 더불어 성을 지키기 어려우니 역시 군사들을 불러들여 집을 짓게 하고 복호(復戶) 5백 결 내에서 그 절반을 군병에게 떼주어 살아갈 길을 삼게 하며, 또 각 군문으로 하여금 새읍 부근에 둔전을 설치하게 하여 군병들이 농사를 짓게 하고 군문에서 그 세를 징수하게 한다면 토지 없는 군사들이 반드시 앞을 다투어 모집에 응할 것입니다."
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의 조처하게 하였다.
6월 11일 경신
홍명호(洪明浩)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검(洪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이내 교체하여 조정진(趙鼎鎭)을 대사헌으로, 김이성(金履成)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가 기근을 구제하는 일을 끝내고 아뢰니, 하유하기를,
"기근의 구제가 끝나고 보리농사가 고루 풍년이 들었다 하니 봄철에 신음하던 백성의 형편이 이로 인해 소생하리라 생각된다. 만약 하늘이 서쪽 지방의 백성들을 돌보아 비가 내리고 개이는 기후조건을 적절하게 하지 않았다면 구제미로 입에 풀칠이나 하던 데서 어찌 배부른 데까지 왔겠는가. 더구나 장삿배가 바람을 타고 순조롭게 와닿음으로써 곡식값이 따라 내려가니 이는 모두 천신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 어찌 서도 백성들만의 다행이겠는가. 심력을 다하여 성의껏 구제해 냈으니 감사에게 정말 공로가 있다. 특별히 표피(豹皮) 한 장을 하사한다."
하였다.
유생 유운한(柳雲漢)이란 자가 내시(內侍)와 서로 가까이 살고 있었는데, 유운한의 소가 내시의 콩밭에 들어가 콩을 먹은 일로 내시가 욕설을 가함으로써 드디어 큰 싸움이 벌어졌다. 형조가 이를 상문하자, 전교하기를,
"본 송사의 곡절에 대해서는 번거로이 처분을 청할 필요도 없다. 유운한이 내시와 싸움을 일으킨 것은 서로 연관을 가졌다는 사실을 면하기 어려우므로 그 죄가 경하지 않다. 비록 이웃에 사는 일반 백성이라든지 같은 반열의 사족을 상대로 하였더라도, 법을 어기고 구타한 것은 횡포한 행동임을 면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내시야 더 말할 게 있겠는가. 한 차례의 엄형을 가하여 일후의 폐단을 징계할 것이며, 구타를 당한 내시가 유운한에게 붙잡혀갔으니 그가 제발로 간 것과는 다르나, 외부사람에게 구타를 당하여 저희들 무리에게 수치를 끼쳤으니, 내시의 반열에서 이름을 삭제하여 본고향으로 돌려보내라.
그리고 내시 박가란 자가 홧김에 내시를 두둔하여 유운한의 안뜰에 뛰어들어 욕설을 퍼부은 꼴도 매우 해괴하다. 안뜰은 직접 마주대할 수 있는 외실(外室)과 좀 다른만큼 외부인과 연관을 가졌다는 죄는 혹시 용서할 수 있겠다. 내시부(內侍府)로 하여금 조사해내어 처결하게 하라. 앞으로는 내시와 인접해 사는 반호(班戶)가 이번처럼 말로 상접하는 일이 있으면 사건의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곧 내시와 상관한 죄로 처결할 것이다. 한성부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여 혹시라도 죄를 범하지 말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2일 신유
이경오(李敬五)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별재자관(別賚咨官) 장렴(張濂)의 수본(手本)은 다음과 같다.
"본관은 5월 4일 북경에 도착하여 예부(禮部)에 나아가 자문(咨文)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여섯째 아들 질친왕(質親王) 영용(永瑢)이 우연히 곽란병으로 본월 1일에 죽어 황제가 원명원(圓明園)에 가 있으면서 비통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문서가 수일 동안 지체되었다가 6일 황제가 환궁한 후 7일에 예부가 비로소 전주(轉奏)하였고 그날로 황지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예부의 여러 낭관(郞官)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황상께서 자문을 친히 읽어보고 자못 기쁜 기색을 보였다. 너희 나라에서 기일 전에 예부에 자문을 보내온 것은 체면상 매우 좋은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황제의 분부를 등서하여 올려 보냅니다.
그곳의 형편으로 말하면, 2월 8일 황제가 계주(薊州)에 가서 동릉(東陵)을 배알하였고 18일에는 역주(易州)에 가서 서태릉(西泰陵)을 배알하였습니다. 이어 산동(山東)으로 가는 길에 태산(泰山)에 예배하고 궐리(闕里)를 참배하면서 관리를 보내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의 사당에 치제하였습니다. 해자(海子)에 이르러 사냥을 하고 4월 16일에 원명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겨울과 봄 사이에 한방울의 비도 오지 않아 경성(京城) 내외의 가뭄이 아주 극심하였습니다. 8일에 황제께서 북쪽 교외에 나아가 지단(地壇)에 제사하고, 10일에는 열하(熱河)로 갔다가 7월 28일에 경사로 돌아왔습니다. 안남 국왕(安南國王) 완광평(阮光平)이 황제의 팔순만수(八旬萬壽)를 축하하기 위하여 4월 15일 광서(廣西)의 남쪽 지방에 이르렀는데, 황제가 명을 내려 예부의 만주족(滿洲族) 좌시랑(左侍郞) 명(明)을 파견하여 미리 열하로 데려가게 하였습니다. 면전(緬甸)과 남장(南掌) 두 나라의 공물바치는 사신도 또한 4월 17일에 운남(雲南) 대리부(大理府)를 거쳐 경사로 왔다가, 7월 20일 열하에 가서 황제의 얼굴을 우러러보도록 약속하였습니다. 대만(臺灣)의 생번(生番)은 5월 12일에 복건성(福建城)에서 길을 떠나 경사에 와서 황제의 만수를 축하하였습니다. 그밖의 여러 나라의 공물을 바치는 사신들이 경사에 언제 들어올지에 대해서는 각성의 총무(摠撫)로부터 아직 보고가 없습니다."
황제의 분부는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이 공물을 바치는 직분을 정성스럽게 수행하니 그 공순함을 가상히 여긴다. 올해는 나의 팔순생일로 인하여 온 천하가 다 같이 경사로 여기고 있다. 특별히 생일에 바치는 정상적인 공물 외에 따로 공물을 갖추어 성의를 다해 축복해 준 데 대하여 전에 이미 그것을 다음해의 정상적인 공물로 대치하라고 지시하였는데, 지금 또 다시 예부에 자문을 보내 나에게 보고할 것을 간청하며 그대로 생일을 축하하는 공물로 삼아 바칠 것을 희망하였다. 그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 믿음직하고 간절하여 성의를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소청을 자세히 짐작하여 나의 상격에 맞추어 제때에 응당 푸짐한 선물을 내림으로써 변방 나라를 품어주고 먼 나라 사람을 생각해주는 지극한 뜻을 보여야 하겠다. 해당 부에서는 즉시 지시에 따라 준행하라."
6월 13일 임술
좌의정 채제공을 불러 보았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이달은 바로 왕자가 탄생하실 달입니다. 응당 시행해야 할 조치는 실로 나라의 예법에 관계되는 것이라 그 사체가 지중한 것인데도 전하의 하교가 없으므로 아래에서는 거행할 수가 없습니다. 전하의 생각은 비록 신중한 데에서 나왔겠지만 신은 전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경연에서 홍 영돈녕(洪領敦寧)도 이를 청하기에 자궁(慈宮)에게 품의하여 하교를 받은 후에 영돈녕에게 알려 주겠다고 하였다."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한림 추천의 일은 신이 실로 잘하지 못하였습니다만, 검상(檢詳)의 후보자 추천으로 말하면 최현중(崔顯重)의 문벌과 문학이 보통사람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대개 백년 동안 벼슬길이 막힌 뒤에는 사조(四祖)에 드러난 벼슬이 없는 경우가 무척 많으니, 전하께서는 백년 이전을 보고 백년 이후는 보시지 말기 바랍니다. 앞으로는 거둥하거나 차대(次對)할 때에는 참가하겠으나 도당(都堂) 추천에 이르러서는 비록 엄중한 형벌을 받더라도 참가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무 지나치다. 검상 후보자도 추천할 수 없단 말인가?"
하자, 채제공이 아뢰기를,
"검상을 추천하는 것뿐 아니라 설사 묘당추천이라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권평(權坪)은 고 이조 판서 권극례(權克禮)의 후손이니 무슨 벼슬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이처럼 미천하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의 신분과 명예만 그르쳤을 뿐 아니라 자손들에게 이르기까지 세상에서는 필시 미천하다고 지목할 것입니다. 신이 어찌 무고한 사람의 신분과 명예를 그르치겠습니까."
하였다.
전교하였다.
"학문과 문벌이 모두 고문의 직책에 둘 만한 전 지평 김한동(金翰東)을 부교리로 제수하라."
김노영(金魯永)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경상도에서 환자의 폐단을 바로잡은 성책(成冊)을 올렸다. 관찰사 이조원(李祖源)이 장계하기를,
"도내의 함양(咸陽)·상주(尙州)·거창(居昌)·안의(安義)·산청(山淸) 등 5개 고을은 이미 조사가 끝났고, 기타 각 고을 또한 호곡(戶穀)이 고르지 않은 곳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민의를 널리 듣고 곡식장부를 상고하여 특별히 많은 고을은 혹은 이전하기도 하고 혹은 돈으로 만들기도 하여 총수를 줄이고, 특별히 적은 고을은 혹은 넘겨받기도 하고 혹은 매입하여 더 등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혹은 절반을 나누어주거나 전부를 나누어준 곡식을 서로 교환하여 더하기도 하고 감하기도 하였는데, 소미(小米)·대두(大豆)·목맥(木麥)은 본디 연해의 토질에 맞는 곡식이 아니기 때문에 억지로 무역하게 하기가 곤란하므로, 이것은 근래의 실례대로 싯가에 따라 팔아서 호조에 바치게 하였습니다. 바로잡은 고을 민호의 곡식 총수량과 이전하거나 매입하거나 돈으로 만들어 상납한 수량을 새로 정한 규정에 의하여 수정 성책하여 비변사에 보냅니다. 이밖의 20여 고을은 호곡(戶穀)이 서로 맞아 별로 폐단을 일으킬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6월 14일 계해
앞서 함경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에게 명하여 안변(安邊)의 들판마을 화속(火粟)에 대한 폐단을 바로잡을 방법을 논계하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이병모가 치계하기를,
"상정(詳定)으로 등록된 화전(火田)은 도합 3백 6결 95복인데, 매 15복의 조세미는 7승이고 합하면 1백 2석이 됩니다. 갑신년부터 갑진년까지는 조사할 만한 문적이 없으나, 을사년의 조세미는 89석이고, 병오년의 조세미는 90석이고, 정미년과 무신년의 조세미는 89석이고, 기유년의 조세미는 79석이고, 작년의 조세미는 예년에 비하여 가장 적습니다. 백성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잘못 전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들판마을의 화속(火粟) 명칭은 정말로 해괴한 일입니다. 문적이 없으니 어느 해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듣건대 옛날에 땅은 넓고 사람들이 드물 때 평야 중에도 수목이 우거져 있던 곳이 간간이 있었기 때문에 화전세의 명색이 그로 인해 생겼고 그 잘못된 것을 그대로 답습해왔다고 합니다. 상정(詳定)으로 실린 것은 지출해야 할 비용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억지로 줄이게 할 수는 없으나 현임 부사의 보고 중 마땅히 지출할 것의 잘못된 규례는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폐단을 바로잡는 요점을 깊이 착안한 것이니, 규례의 잘못된 것이야 무엇을 꺼려서 고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는 예년 총수량에 대비하는 제도를 아예 없애고 산간 화전의 경작은 경작하는 대로 면적을 계산하며 들판마을의 화전세는 일체 제거하여 들판마을의 명색으로 세를 내지 않게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법령을 시행하는 초기인 만큼 금년 가을 화전세의 총수량은 계산한 면적과 함께 영문(營門)에 보고하게 해야겠습니다. 앞으로 만일 과거 조세의 총수량에 의하여 들판마을 조세의 총수량을 산전의 조세에 넘기게 되면 그 고통은 전례에 따라 총수량을 대비하던 때보다 곱절이나 더할 것이니, 이를 엄히 신칙하여 규정으로 정하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계청한 대로 시행하되 조항을 엄밀하게 세워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5일 갑자
비변사가 아뢰기를,
"거창(居昌)·안의(安義)·산청(山淸) 세 고을 곡식장부의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에 대하여 감사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장계로 보고하게 하였는데, 해당 감사 이조원의 장계에 의하면 ‘그 하나는 거창의 묵은 곡식 1만 1천 3백 석은 아직까지 창고에 쌓인 채 미처 처리하지 못하였습니다. 금년 봄에 이미 나누어준 1만 4천 4백 22석으로 말하더라도 봄에는 빈 쭉정이만 받고 가을에는 잘 여문 것을 바치게 하니 백징(白徵)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남겨두어야 할 본색이 2만 5천 석인데, 묵은 곡식으로서 이미 나누어준 것과 나누어주지 않은 것을 합쳐 계산하면 그 수량 또한 이와 맞먹습니다. 이 묵은 곡식을 남겨두어야 할 곡식으로 만들어 민호마다 고르게 나누어 주었다가 매년 8천 석씩 비용을 제외하고 받아들여 3년을 기한하고 전수량을 전부 받아들이게 되면 여태까지 내려오는 환자의 폐단은 거의 시원하게 없어질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안의(安義)의 묵은 벼 4천 석은 여러 해 동안 묵어 거칠어졌으므로 팔아낸다는 것은 논할 수도 없습니다. 즉시 나누어주고 금년 가을에 절반, 명년 가을에 절반을 기어이 다 받아들이겠습니다. 햇곡식 중 쌀 1천 석과 벼 4천 석은 나누어준 것 가운데서 올가을에 돈으로 만들고, 쌀 1천 석과 벼 4천 석은 창고에 보관한 것 가운데서 내년 봄에 돈으로 만들어가지고 전부 넘겨 쌀 2천 석과 벼 4천 석을 사들여 본색으로 넘긴다면 명년 이후부터는 호곡(戶穀)이 서로 맞아떨어져서 쌓여온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산청의 아전과 종·군교들이 축낸 곡식이 1만 1천 8백 60석인데 지금 엄하게 독촉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바치지 못한 것이 1만 1천 3백 30석인데 가을에 가서 받아내겠습니다.
그리고 원래의 환자 2만 5천 석을 이미 돈으로 만들겠다고 청하였으니, 한결같이 정한 가격에 의하여 자원에 따라 다른 곡물로 대신 바치게 하면 실로 양편이 다 편리하게 될 것입니다. 묵은 환자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이미 무술년의 몫이고 각 사람이 축낸 것이 또 계묘년 이전의 일이기 때문에 십분 정밀히 추려내면 종과 군교들이 축낸 가운데서 친족과 이웃에게 받아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1천 3백 50석인데 그것을 다 청산할 가망은 없습니다. 계묘년 이후 해당 고을 수령들이 잘못을 답습하면서 마감한 죄에 대해서는 유사로 하여금 품의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이 세 고을 곡물의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는 장계의 소청에 의하여 시행해야겠습니다. 그러나 그중 산청의 묵은 환자조로써 지적하여 징수할 곳이 없는 것과, 축낸 조항을 이웃이나 친족에게까지 침해하는 것은 백성들의 형세로 보아서는 몹시 가엾은 일이나 나라 곡식을 축낼 수는 없으므로 각별히 독촉하여 받아내게 해야겠습니다. 축낸 담당 관리들은 준납(準納)036) 을 기다려 감사로 하여금 그 경중을 분간하여 각별히 엄벌하게 해야겠습니다. 각년에 관계되는 해당고을의 수령으로서 이미 죽은 자를 제외하고는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하고 엄중 처결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고 하교하기를,
"현재 고발 중에 있는 수령으로서 심진현(沈晉賢)은 자수하였으니 죄를 논하지 말라. 이는 이미 법전에 있거니와 이번에 조사하게 된 것도 또한 이 사람이 경연석상에서 폐단을 진술하였기 때문이니 용서하도록 하라. 산청의 묵은 환자를 축낸 일에 대하여 경들이 변통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그럴 듯하기는 하나 백성들이 바치지 않은 것과 아전과 군교가 축낸 것에 대하여 도의 장계에 이미 범하지 않은 아전이 없다고 말하였고 또 문적이 없는 10년 이전의 일이다. 함양의 일에 대한 처분도 이처럼 축이 난 빈 장부로 인해 변통한 것이니, 어찌 한쪽은 실시하고 한쪽은 실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함양의 전례에 의하여 계묘년 이전의 허위문서와 옛날 기록은 백성이건, 종이건, 군교이건, 아전이건 할 것 없이 즉시 지방관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모아놓은 앞에서 모두 불태워버리게 하라. 아전이 축낸 것도 함양의 전례에 의하여 생존자로서 범행이 많고 가장 나쁜 자만 감사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 율문을 적용하게 하라. 묵은 환자만 그대로 두고 거론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거위고기를 먹다가 체한 것처럼 시원하지 않을 것이고 또 거창·안의의 백성들이 어찌 섭섭하다는 탄식이 없겠는가. 무술년 이전의 거창·안의·산청 등의 묵은 환자를 전부 탕감해주고 문서도 불태워버리게 하라. 만약 통향(統餉)이 있더라도 일체 구애하지 말라."
하였다.
6월 16일 을축
홍병찬(洪秉纘)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병정(李秉鼎)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병정이 부름에 응하지 않자, 전교하기를,
"현재의 직임이 힘든가. 그렇다면 특별히 울진 현령(蔚珍縣令)으로 전임시키라."
하였다.
홍양호(洪良浩)를 홍문관 제학으로, 오재휘(吳載徽)를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죽은 판서 안윤행(安允行)에게 아직까지 시호를 내리는 은전이 없는 것은 큰 결함이다. 행장을 지어 시호를 청하는 것은 본가에서 할 일이지만, 그 아들을 등용하는 일이야 어찌 그대로 방치할 수 있겠는가. 아들이나 손자 중에서 등용하라."
6월 17일 병인
조정진(趙鼎鎭)을 이조 참판으로, 이창한(李昌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경일(李敬一)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강인(姜)을 회양부(淮陽府)로 귀양보냈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본도의 조사에 의하면 강인의 죄는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습니다. 율문에 의하면 도형(徒刑) 2년 반에 해당합니다."
하니, 판부하기를,
"앞서 지은 죄에 대해 율문을 적용한 후 어사의 보고에 발각된 죄가 앞서 적용된 죄보다 더 중한데, 율문 적용을 강등하여 도형 2년 반으로 한 것은 이미 법관이 교묘하게 꾸며낸 것임이 드러났다. 해당 당상관의 과오를 중한 편으로 추고하라. 이 죄수는 죄를 범한 그 지방에 연한을 정하지 말고 귀양보냄으로써 회양 백성들에게 사죄하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지난날 경연에서 앞으로는 묘당의 추천도 감히 받들어 거행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누차 진술하였는데, 며칠도 되지 않아 의주 부윤(義州府尹) 자리가 비자 신에게 이를 의논하여 추천하지 않는다고 엄한 교지가 여러 번 내렸습니다. 이에 신은 너무도 황송하여 갑자기 희천 군수(熙川郡守) 이득신(李得臣)을 추천하여 수망(首望)에 넣었습니다. 대개 신은 득신과는 정리로 보나 안면으로 보나 친숙하지 못하지만, 전에 들으니 충청도에서 치적이 있었다고 하며 또 근일에는 희천에서 자못 구제하는 일을 잘하였다 하기에 이 사람으로 결정하여 입계한 결과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뒤에 생각하니 이득신은 바로 죄과로 지방관에 보임된 사람이었습니다. 지방에 보임하면 수령이란 명칭을 띠고 있어도 곧 이는 책벌이 해제되기 전이므로 묘당에서 바로 승급시켜 추천하는 것은 나라의 체모상 실로 타당치 못한 것이 있습니다. 신은 그를 의주 부윤 천망에 넣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의 추천은 그 사체가 중한 것이므로 파산(罷散) 또한 구애하지 않는다. 지방관에 보임한 것이 비록 견책의 조치이지만 역시 관직이다. 외직을 외직으로 추천하는 것이라 부당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전례에 없는 일인만큼 이와 같은 처지에는 전례를 따르는 것이 좋다. 피폐한 고을의 수령을 자주 바꾸는 것도 또한 마음에 걸리는 일이니, 차자에 청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6월 18일 정묘
신시(申時)에 창경궁(昌慶宮) 집복헌(集福軒)에서 원자(元子)가 태어났으니, 수빈 박씨(綏嬪朴氏)가 낳았다. 이날 새벽에 금림(禁林)에는 붉은 광채가 있어 땅에 내리비쳤고 해가 한낮이 되자 무지개가 태묘(太廟)의 우물 속에서 일어나 오색광채를 이루었다. 백성들은 앞을 다투어 구경하면서 이는 특이한 상서라 하였고 모두들 뛰면서 기뻐하였다.
원자로 칭호를 정하고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하였다. 현임·원임 대신들과 각신(閣臣), 약원 제조(藥院提調) 및 여러 승지 등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성정각(誠正閣)에서 불러 보았다. 약원 도제조 홍낙성(洪樂性) 등이 아뢰기를,
"하늘과 조종이 묵묵히 음덕을 내려 거룩하신 후사가 태어났으니, 우리 나라 억만년의 무궁한 경사가 실로 오늘에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대성 대현(大聖大賢)이 태어나신 구갑(舊甲)이고 또 자궁(慈宮)의 탄신을 만나 이와 같은 나라의 경사가 있으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일기조차 청명하니 천심을 우러러 알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의 형세는 유지해나아갈 기쁨이 있고 전궁(殿宮)은 손자를 안는 경사가 났으니 그 기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오늘 분만할 줄은 내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낮부터 해산할 기미가 있더니 순산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실로 다행스럽다."
하였다. 홍낙성 등이 아뢰기를,
"거룩하신 후사가 태어났으니, 신인(神人)이 모두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습니다. 중궁전(中宮殿)에서 데려가 아들로 삼아 원자로 정하는 것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이에 감히 다 같은 목소리로 간청하는 바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유빈 박씨가 순산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내전(內殿)에서 데려다 아들로 삼고 칭호를 원자로 정하여 종묘에 고유하고 대사령을 반포하는 일을 해조로 하여금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홍낙성이 또 아뢰기를,
"원자가 탄생하였으니 오늘부터 산실청을 전례에 따라 설치 거행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홍낙성이 또 아뢰기를,
"약원의 세 제조가 이미 숙직하고 있으나 보은 현감(報恩縣監) 박준원(朴準源)과 의빈 도사(儀賓都事) 박종보(朴宗輔)도 함께 숙직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박준원을 숙직하게 하라."
하였다. 홍낙성이 또 아뢰기를,
"산실청을 지금부터 설치 거행하는 만큼 권초관(捲草官)도 규례대로 차임해야 할 것입니다. 이조(吏曹)의 관리를 불러다가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원자의 칭호를 정하였으니, 원자궁에 공급하는 물자를 6월 18일부터 시작하여 봉진(封進)하라는 뜻으로 각 해사(該司)에 분부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칭호가 이미 정해졌으므로 종묘 사직과 신인이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 공급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형식적인 것이고 또 전례가 있으니 하교를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9일 무진
한광회(韓光會)를 권초관으로 삼았다.
6월 20일 기사
현임·원임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영돈녕 홍낙성 등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나라 경사는 곧 종묘 사직의 무궁한 복입니다. 원자의 칭호를 정한 후에는 책봉의 성대한 의식이 곧 순차적인 일입니다. 삼가 국조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를 상고해 보면 당년에 주청한 일은 없으나 이번 일은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연전에 황제의 조칙에 이르기를 ‘아들이 나거든 즉시 주달한 뒤에 세자로 책봉하여 대를 잇고 나라의 경사를 길이 연장하라.’고 하였습니다. 황제의 조칙이 이와 같이 정중하니 우리 나라의 도리로서는 나라 경사가 있은 후 즉시 주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미 주달함에 있어서는 또 사신을 따로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막중한 일이므로 지체할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황제의 칙지에 비록 즉시 주달하라는 말이 있으나 나의 본의는 천천히 좀 자라기를 기다리고자 한다. 이는 경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숙종이 책봉되었을 때의 나이와 내가 책봉을 받을 때의 나이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옛날 대신의 말에 ‘원자의 칭호를 정하는 때가 곧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는 날이다.’고 한 것은 격언이며 지론이라 할 수 있다. 어찌 책봉을 빨리하고 늦추는 데 있겠는가. 그러나 황제의 칙지가 있었으니만큼 즉시 보고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겸하여 반드시 천천히 책봉하려는 의도를 알린다면 실로 두 가지가 다 적합할 것이다. 이렇게 작정한다면 책봉의 의식을 청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사신을 일부러 보낼 필요는 없다. 또 천천히 기다리겠다는 뜻을 말미에 덧붙이게 되면 보고에 있어 외람될 것 같은데 지금 마침 축하하러 가는 사신 행차가 아직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였을 것이니, 이런 뜻으로 자문을 만들어 그 편에 부쳐 보내는 것이 좋겠다. 경들은 문임(文任)과 더불어 이대로 지어 바치라."
하였다.
정민시(鄭民始)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이번 종묘에 고유하고 축하하는 날에 자전(慈殿)과 자궁(慈宮)에 대해 경외(京外)에서 바칠 전문(箋文)의 허두는 이미 계하하였다. 그날 자전과 자궁에게 축하의식을 친히 거행한 다음에 대궐에 나아가 하례를 받겠다."
문관은 시종관 이상, 음관은 당상관 이상, 무관은 변경에 있는 자 이상으로서 파면되었거나 벼슬이 깎인 사람은 모두 죄명을 벗겨주고, 문관은 시종관 이상, 음관과 무관은 당상관 이상으로서 현재 직명이 없는 사람에게는 구두로 군직에 붙여 하례의 반열에 참가하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6월 24일 계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친히 왕대비전(王大妃殿)과 혜경궁(惠慶宮)에게 축하를 올리고 나서 백관의 하례를 받은 다음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나는 팔도의 모든 사람들에게 삼가 알리노라. 지금 나는 하늘의 두터운 은혜와 조종의 말없는 도움을 받아 경술년 계미월 정묘일에 원자가 탄생하였으니, 이해는 성현이 탄생하신 해이며 이날은 자궁의 생신을 축하하는 날이다. 여러날 동안 내리던 비가 갑자기 개이고 햇살이 그림같았다. 채색 무지개는 종묘의 우물에 뻗쳤고 신기로운 광채는 금림(禁林)을 에워쌌으니 이것이 하늘이 내린 기쁨이 아니겠는가. 음율에 맞는 울음소리가 품에서 나오자마자 누가 역마를 타고 명령을 전하듯이 집집마다 알렸는지 어린이 늙은이 할 것 없이 몰려나와 거리를 에웠는데, 그들의 즐거워하는 얼굴빛과 춤추는 모양은 곧 자기 자신과 자기 집안의 복이라 해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준 기쁨이 아니겠는가. 나는 하늘의 복을 누릴 만한 덕이 없고 사람들을 감복시킬 만한 정사도 베풀지 못하였는데, 나 한 사람의 기쁨을 하늘이 기뻐하고 사람들이 기뻐하니 내 장차 무엇으로 하늘과 사람들에게 보답할지 모르겠다. 나는 들으니, 하늘은 마음이 없으므로 사람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 사람의 마음이 다 그러하면 하늘의 마음도 기뻐한다고 한다.
대체로 민생이 안녕을 누리는 것은 나라의 형편에 달렸고 나라의 형편이 공고한 것은 세자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없으면 있기를 빌고 있게 되면 기뻐서 날뛰는 것인데, 이는 타고난 천성에 안 그럴 수 없는 것이고 윗사람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상제가 우리 나라를 돌보아 나의 대를 이을 후사를 내리니, 나라의 운명이 매인 데가 있게 된 것이 오늘부터이며, 조종의 공덕을 유지하게 된 것도 오늘부터이며, 주(周)나라 왕실처럼 자손의 번창을 노래하는 것도 오늘부터이며, 한(漢)나라 종실처럼 반석같이 공고함을 찬양하는 것도 오늘부터이다. 위로는 자전과 자궁의 큰 기대에 부응하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의 고대하던 심정을 풀어주었다. 태어난 해와 태어난 날짜는 또 성인의 생년과 혜경궁의 생일과 맞음으로써 우리의 억만 년 무궁한 영광을 길이 누리게 되었다. 내가 하늘에 보답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늘에 보답하고자 한다면 또 사람들에게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러 번 베풀어 온 은혜를 한번 더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진 정사를 베풀기 위한 조회를 처음 열고 기쁨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게 되니, 이때에 종전에 없었던 혜택을 널리 베풀지 않고 옛날에 드물던 밝은 운수를 발양시키지 않는다면 그 어찌 하늘과 사람에 보답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사령에 있어서는, 이름이 죄안에 등록된 자 1천 1백 53명에게 모두 용서를 허락하니, 이것도 오히려 전례를 따르는 데 가깝다. 담당 관서의 신하들은 경비가 부족하다고 말하지 말라. 사람의 마음이 화합하면 하늘의 마음도 화합하여 비 오고 개이는 것이 때에 맞게 되어 만물이 풍성해지고 풍년이 드는 법이다. 더구나 경술년은 예로부터 여러 차례 풍년이 들지 않았는가. 여러 도의 오래된 환자로써 병신년 봄 이전의 장부에 오른 것과 증열미(拯劣米)037) 로써 가장 오래된 1년 치를 다 면제해준다. 결세(結稅)·어세(漁稅)·염세(鹽稅)·장세(場稅)·사세(寺稅) 등 조세의 총수량에 들어가야 할 것은 그 수를 나누어 감면해 줄 것이며, 경중의 각 공계(貢契)에 이전부터 남아 있는 것은 2만 석까지, 시민(市民)의 부역은 2개월까지, 성균관 하인들의 현방속전(懸房贖錢)은 30일까지 역시 없애줄 것이다. 은전을 베푸는 것은 경사를 같이 나누기 위한 것이므로 모든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게 하겠으니 어찌 늙은 유생과 무사들을 뒷전에 세우겠는가. 날을 받아 과거를 설치하여 인재를 뽑을 것이다. 조정 관리로서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과, 선비나 평민으로서 나이 80세 이상인 사람에게는 각각 한 자급을 더하고 1백 세가 넘은 노인에게는 쌀과 고기를 더 줄 것이다. 너희 팔도 백성들은 자세히 들으라."
하고, 또 교지를 선포하기를,
"운수가 오랜만에 열리자 해산달이 차는 데 대한 기대가 간절하였고, 경사가 해와 달에 맞아 하늘로부터 거듭 내린 복을 받았다. 이에 먼저 호칭을 정하고 널리 고하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과덕한 내가 외람되게도 왕위를 계승하였다. 조종의 위대한 업적을 이어받아 중대한 부탁이 깊이 염려되었고, 나이가 늦어가는 때를 당하여 아직 자손의 번창이 늦어지고 있었다. 주(周)나라 왕실의 자손이 번창함을 찬양한 시를 추억하면서 물론 경사가 끊이지 않을 것은 알았지만, 복희(伏羲) 《주역》의 제사받드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오히려 애타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다행하게도 하늘이 말없이 도와주는 복을 힘입어 후사가 잘 태어나는 기쁨을 보게 되었다. 세 조종의 혈통을 이으니 위로 오르내리는 선왕의 영혼을 위로하게 되고, 두 내전의 기쁨에 찬 얼굴이 비로소 열리니 밤낮 기대하던 마음에 크게 부합하게 되었다. 경술년의 좋은 운을 만나 마침 선성(先聖)이 탄생한 해와 부합되고, 태어날 때의 우렁찬 목소리의 들림이 또 자궁(慈宮)의 생신날에 있었다. 재앙도 없고 피해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하루에도 두 번씩 묻는 기회를 기다리며, 잘도 닮고 너무도 똑똑하니, 실로 세자의 인격에 부합되었다. 이에 한(漢)나라 명덕(明德)의 고사를 따르고, 주(周)나라 원자(元子)의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원자가 대견스러우니 나라의 근본이 이로부터 안정되고, 팔도의 사람들이 춤추면서 날뛰는 것을 생각하니 민심이 쏠리는 데가 있어서이다. 천부적으로 빼어난 의젓한 자질로 태어났으니 나라의 기반은 더욱 반석처럼 다져질 것이며, 날로 빛나는 칭송이 높아가니 성스러운 수명은 상전벽해를 세듯이 장수를 기약하리라. 이에 종묘에 고유하고 나서 다시 여러 지방에 널리 고하노라. 선왕의 업적이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으니 실로 끝없는 경사를 유지할 것이며, 신민의 기대에 잘 맞았으니 어찌 경사를 함께 하는 일을 늦출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큰 운수가 열리는 기쁨을 장식하고 모든 죄를 씻어주는 혜택을 베푸는 것이다. 아, 자손에게 남겨주는 계책이 어찌 돌보아주는 하늘의 명에 부합되겠는가마는, 깊은 생각을 담은 윤음은 길이 온 나라의 환성을 일으키리라."
하였다. 【예문관 제학 정민시(鄭民始)가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61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47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구휼(救恤) / 재정(財政) / 인사(人事)
[註 037] 증열미(拯劣米) : 세미 운반선이 파선되어 물에서 건져낸 쌀.
대사령으로 풀려난 자는 모두 1천 1백 54인이었다.
산실청 도제조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는데, 산실청 도제조 홍낙성에게는 안장을 갖춘 말 1필을 직접 주고, 제조 오재순(吳載純)에게는 품계를 올려주고, 부제조 홍억(洪檍)은 정경(正卿)으로 올려 추천하였다. 권초관(捲草官) 한광회(韓光會)와 보은 현감(報恩縣監) 박준원(朴準源)은 품계를 올리고, 가주서(假注書) 유사모(柳師模)는 6품으로 올려주었으며, 의관(醫官) 등은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또 임신년의 전례에 의하여 도제조의 아들·사위·아우·조카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자전(慈殿)·자궁(慈宮)에게 축하를 올릴 때 전문(箋文)을 받들어 드린 승지 정동준(鄭東浚)과 이정운(李鼎運)은 품계를 올리고, 축하할 때의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조승(李祖承)은 임신년 9월에 그의 증조부가 좌승지로 있었는데, 이번의 나라 경사에 그의 증손자가 또한 좌승지가 되었으니 그 일이 우연치 않다. 예방 승지의 품계를 올린 것 또한 증거할 만한 전례가 많으니 함께 품계를 올리라. 선교관(宣敎官) 유문양(柳文養) 또한 증거할 만한 전례가 있으니 품계를 올리며, 좌통례(左通禮)와 우통례(右通禮)는 준직(準職)을 제수하고 이미 준직에 있는 자는 승급하여 서용하라. 찬의(贊儀) 및 동·서창(東西唱)과 인의(引儀)도 승급 서용하며, 산실청에서 대령하며 파수한 별군직(別軍職)의 장교와 군병들도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며, 대령한 내시 및 각전에 소속된 사람들로서 그 기간에 번을 든 자도 모두 허락을 받아 시상하며, 축하문을 올린 관리는 6품으로 올리라."
하였다.
궁중에서 수직한 신하들 및 서리·하인·군졸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산실청을 철수하였다.
전교하였다.
"태를 묻을 길일을 가까운 날로 받도록 하라. 백성과 고을에 폐를 끼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해당 관서의 제조 한 사람을 시켜 전례를 상고하여 되도록 검소하게 하도록 하라. 이것 역시 국운이 영원하기를 비는 뜻에서 나온 것인 만큼 그 장소를 품의하여 결정하기를 기다린 후에 묘당으로 하여금 공문을 띄워 태를 봉안할 해당 도에 엄하게 신칙하라."
전교하였다.
"창경궁(昌慶宮)과 창덕궁(昌德宮)에 수직드는 장수와 군사들은 오는 달에 활쏘기 시험을 보이되, 창경궁에 수직드는 무사는 유엽전(柳葉箭)과 작은 과녁으로 각각 한 돌림 쏘고 군사들의 무예시험은 두 가지 재주로 하며, 창덕궁에 수직드는 무사는 유엽전으로 한 돌림 쏘고 군병들의 무예시험은 한 차례로 할 것이니, 이런 내용으로 분부하라."
홍검(洪檢)을 한성부 판윤으로, 홍양호(洪良浩)를 형조 판서로, 권도(權噵)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서울과 지방의 조관(朝官)으로서 나이 70세 이상과 선비와 평민으로서 나이 80세 이상은 각각 1등급씩 올려주었는데, 모두 2만 5천 8백 10인이었다. 【백세 이상은 89인, 90세 이상은 2천 3백 75인, 80세 이상이 2만 2천 8백 90인, 70세 이상은 4백 56인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62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47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호구-호구(戶口)
6월 25일 갑술
성절 진하사(聖節陳賀使) 황인점(黃仁點) 등이 치계하기를,
"신 등 일행이 비변사의 공문에 의하여 의주부에 머무르면서 회답 자문을 기다리고 있던 중 성경(盛京)을 지키는 장군이 북경(北京) 예부(禮部)의 자문으로 인하여 조선국의 공물을 바치는 사신에게 지시한 공문에 의하면 ‘안남(安南)·남장(南掌)·면전(緬甸) 등 나라에서 만수절(萬壽節)의 공물을 바치러 오는 사신이 모두 7월 10일에 열하(烈河)에 도착하여 미리 축하연을 준비하기로 하였으니, 조선국의 사신도 빨리 달려 열하로 가되, 반드시 7월 10일 이전에 도착할 것이요 북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아울러 봉황성(鳳凰城)·요양성(遼陽城)의 수위(守尉)에게 신칙하여 조선국의 공물 사신이 경유하는 곳에는 요원을 파견하여 공물 사신이 그 지역에 도착하면 필히 예부의 자문에 의하여 빨리 가도록 재촉하는 동시 그 지방을 통과하는 날짜를 급히 보고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 등은 이미 비변사의 공문을 받았으니 응당 회답 자문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사리에 마땅하겠으나, 예부의 지시에 이미 7월 10일 이전에 빨리 열하에 도착하라고 기한을 정하여 지금 날짜가 7월 10일까지는 20일도 남지 않았습니다. 내일 즉시 압록강을 건너 밤낮으로 달려간다 하더라도 도착해야 할 날짜가 너무도 촉박하여 제때에 미치지 못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득불 내일 압록강을 건너 책문(柵門)에 들어가야 하고 책문에 도착한 뒤에는 교자를 버리고 수레를 타고 밤낮으로 질주하여 기필코 7월 10일 안으로 열하에 도착할 계획입니다. 지금 앞질러 출발하는 것은 사세가 너무도 급박한 까닭이기는 하나, 조정의 명령이 있음에도 이처럼 멋대로 행동하게 되어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통역을 의주에 머물려 두어 자문이 내려오기를 기다려 밤낮 질주하여 신 등이 도착한 곳으로 오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예부가 성경(盛京) 등의 곳을 진수(鎭守)하는 장군 아문(將軍衙門)에 보낸 자문은 다음과 같다.
"좌례사(左禮司)는 건륭(乾隆) 55년 6월 18일 자로 예부의 자문에 준하여 각처에 자문을 보내는 일이다. 주객사(主客司)의 공문에 의하면, 금년 5월에 조선 국왕이 차임하여 보낸 재자관(齎咨官) 장렴(張濂) 등의 자문에 준하여 본 예부에서 황제에게 주달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 나라 국왕이 만수성절(萬壽聖節)을 맞이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바치겠다는 일들이다. 이에 본 예부에서는 물건을 갖추어 황제에게 주달하여 허락을 받아 시행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지금 안남(安南)·남장(南掌)·면전(緬甸) 등의 나라가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한 공물 사신을 다 같이 7월 10일에 열하에 도착하여 미리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상응하는 자문을 성경의 장군에게 급히 보내는 만큼, 성경에 있는 장군은 조선국의 공물 사신에게 이첩 신칙하여 길을 재촉하여 열하로 달려가되 반드시 7월 10일 이전에 도착하게 하라. 북경에 도착하였다가 다시 출발하여 되돌아올 필요는 없다. 공문을 보내게 된 것이 이런 사유에서다. 전례대로 이에 상응한 자문을 조선 국왕에게 급히 보내니, 자문이 도착하거든 예부의 자문 내용에 따라 귀국의 공물 사신을 7월 10일 이전에 앞질러 열하에 도착하여 연회에 참가하게 하고 조금도 어기지 말도록 하라. 이밖의 해당 나라 공물 사신에게 알려 반드시 예부의 자문에 따라 속히 길을 재촉하여 어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사유로 자문을 보내게 된 것이다."
성경 등의 곳을 진수하는 장군 아문에 지시한 차자는 다음과 같다.
"좌례사(左禮司)에서 예부의 자문에 준하여 보내온 공문에 의하면 ‘주객사(主客司)에서는 금년 5월에 조선에서 차임하여 보낸 재자관 장렴 등의 자문에 준하여 본 예부에서 황제에게 주달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 나라 국왕이 삼가 만수성절을 맞으면서 공물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바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본 예부에서는 물건을 갖추어 주달하고 허락을 받아 그대로 공문을 보낸다. 이번에 안남·남장·면전 등 나라에서 성절을 축하하기 위한 공물 사신을 모두 7월 10일에 열하로 도착시켜 미리 연회에 참가할 준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상응한 자문을 성경의 장군에게 급히 보내는 만큼 성경 장군은 조선국의 공물 사신에게 이첩 신칙하여 빨리 길을 재촉하여 열하로 가되 반드시 7월 10일 이전에 도착하게 할 것이요, 북경에 도착하였다가 다시 길을 돌아가게 할 필요는 없다 이에 상응한 자문을 급히 보내는 만큼 조선 국왕은 자문이 도착하는 즉시 예부의 자문내용에 따라 나라의 공물 사신을 신칙하여 반드시 7월 10일 이전에 속히 열하로 달려가 연회를 대비하게 하고 조금도 지체하지 말도록 하라. 이밖의 공물 사신을 신칙하여 반드시 예부의 자문에 따라 길을 재촉하여 어기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차자로 봉황성(鳳凰城)·요양성(遼陽城)의 수위(守尉)와 사계협령(査界協領) 등에게 신칙하여 자문이 도착하는 대로 즉시 조선국의 공물 사신이 경유하는 곳에 관리를 파견하여 그 나라의 공물 사신이 도착하면 예부의 자문을 보여주고 길을 재촉하게 하며 지체하지 않게 하라. 그리고 경계에서 만난 날짜를 속히 보고하여 확인할 수 있게 하라. 이 예부의 자문을 본 아문에서는 금년 6월 8일에 접하고 그날로 역마를 내어 즉시 조선 국왕에게 자문을 보냈다. 아울러 소속된 각처에 알려주어 자문으로 예부에 보고함과 동시 성경 예부에 알려 우병사(右兵司)에게 넘기라고 밝혀 말하였다.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자문이 1통이고, 봉황성에 신칙한 공문이 1통이고 조선국 공물 사신을 신칙한 공문이 1통이다. 자문은 성경 병부에 보내어 즉시 역마를 번갈아 대어 날마다 5백 리씩 체송(遞送)하게 하고, 공물 사신을 신칙하는 공문은 반드시 도중에서 만났을 때 넘겨주면 된다. 이상과 같은 사유로 공문을 보낸다."
이민보(李敏輔)를 발탁하여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6월 26일 을해
전 의주 부윤 이이상(李頤祥)이 치계하기를,
"성경 장군의 자문에, 예부의 자문에 준한 것이라 하면서 해당 나라의 공물 사신은 가까운 구관대(九關台)를 거쳐 반드시 7월 10일 이전에 빨리 열하로 달려가라고 하였으나, 여기에는 역참이 없기 때문에 기일을 어길까 염려되므로 의주 기민지방관(義州旗民地方官)에게 튼튼한 수레와 건장한 말을 미리 준비하여 행차에 대비할 것을 급보로 신칙하였기에 이를 도로 봉하여 승정원에 올려보냅니다. 그리고 치통(馳通)은 관례를 따른 데 불과하므로 전례에 따라 머물려 두었습니다. 대국 사람의 말에, 공물 사신에게 신칙한 공문은 도중에서 사신 행차를 만나면 전해주고 오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이런 사유로 치계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진하사의 노정에 대하여 이런 내용의 자문이 왔으니, 어제의 예에 의하여 즉시 지제교(知製敎)로 하여금 회답자문을 만들어 발송하되, 어제와 오늘의 회답자문으로써 성경에 보내야 할 것은 감사하다는 뜻으로 꾸며야 할 것이며, 별도로 1통을 만들어 북경 예부에 보내는 것이 체면에 합당할 것이다. 이 내용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6월 27일 병자
진하 겸 사은사(陳賀兼謝恩使) 황인점(黃仁點) 등이 치계하였다.
"신 등이 이달 22일 압록강을 건너 60리 지점인 온정평(溫井坪)에 당도하니 봉성 갑군(鳳城甲軍)의 역사가 급히 지나가다가 예부의 자문과 봉성 장군에게 신칙하는 공문 및 성경 장군의 공문을 보여주었는데, 공문은 신 등에게 알리는 것이므로 즉시 뜯어보았습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성경 장군이 사신의 길을 재촉하는 일이다. 안남·남장·면전 등 나라의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한 공물 사신이 모두 7월 10일 이내에 열하에 이르러 연회를 준비하게 되었으니, 조선국의 공물 사신도 반드시 7월 10일 이전에 열하에 도착해야 하겠다. 삼가 이전 45년 황제의 칠순 만수절(七旬萬壽節)을 상고해 보니, 해당 나라의 사신은 8월 초순에야 비로소 열하에 도착하였다. 사신이 지금쯤 길을 떠났을텐데 만약 길을 재촉하여 기한에 미치지 못한다면 체면에 손상이 있을까 걱정된다. 반드시 밤낮 길을 재촉하여 10일 이전에 열하로 달려가 각국의 공물 사신과 함께 연회에 참가하여야 한다. 통과하는 연도에 미리 관병(官兵)을 파견하여 도와주도록 하였다. 만일 구관대(九關台)를 거쳐 열하로 오는 경우에는 그 길에 모두 역참이 없으므로 이미 의주 기민지방관(義州旗民地方官)에게 미리 튼튼한 수레와 건장한 말을 준비하여 사신에게 넘겨주어 빨리 달리도록 함과 동시에, 조양(朝陽)·적봉(赤峯)·건창(建昌) 등 현에 신칙하여 함께 준비하게 하였으니, 해당 나라의 공물 사신은 반드시 예부의 자문에 준하여 밤낮 질주하라.’ 하였습니다.
원 공문은 의주부에 보내 베껴서 치계하게 하였는데, 길을 재촉한 내용은 공문과 다름이 없고 경유하는 지방에 수레와 말을 준비하라는 등의 말만은 전보다 자세하였습니다. 공문을 가지고 나온 갑군들은 모두 요동(遼東) 사람으로서 열하의 길을 잘 아는 것 같기에, 그 거리를 자세히 물어보았더니 열하는 심양에서 1천여 리이며 만약 빠른 말과 가벼운 수레로 심양에서부터 7, 8일만 밤낮으로 달리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부터 따져보면 10일까지는 아직 보름이 남았으니, 책문에 들어선 다음 계속 재촉하여 달리면 아마도 미치지 못할 걱정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일행이 지금 온정평에서 말을 먹이고 있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고 방물도 일제히 도착하지 못하였으므로 우선 기다리고 있는 연유를 치계합니다."
성경 등의 곳을 진수하는 장군 아문에 보낸 자문은 다음과 같다.
"사신에게 길을 재촉하라고 통지하는 일이다. 좌례사(左禮司)에서 금년 6월 21일에 예부의 자문에 준하여 보내온 자문에 의하면 ‘금년에 안남·남장·면전 등 나라에서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한 공물 사신이 모두 7월 10일 이전에 열하의 연회에 도착하기로 되었다. 조선국 공물 사신에게도 앞서 성경 장군에게 공문을 띄워 해당 공물 사신을 신칙하여 7월 10일 이전에 열하로 달려가 각국의 공물 사신과 함께 연회에 참가하게 하도록 하였다. 이번에 본부에서는 이달 14일에 행재예부(行在禮部)가 황제의 지시를 받은 바, 해당 나라 사신이 만약 7월 10일 경에 열하에 도착할 수 있으면 오게 하고 도착할 수 없으면 그들의 편리에 맡겨두고 또한 독촉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공문이 부에 도착하거든 이에 상응한 자문을 성경 장군에게 보내어 해당 사신들이 7월 10일 이전에 열하에 도착할 수 있거든 기일 내에 가서 함께 연회에 참석하게 하고, 아울러 해당 나라 공물 사신이 어느 날 길을 떠나고 어느 때 북경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까지 먼저 본 예부에 자문으로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기에, 전례대로 이에 상응하여 속보로 알리는 것이니 조선 국왕은 이를 준행하라. 이런 사유로 자문을 보내게 되었다. 이상은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자문이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지금 전 함경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의 장계를 보니, 그 장계에 ‘내수사 노비의 선두안(宣頭案)을 개정할 때 매인당 5전씩 받은 것은 너무 지나쳤음을 면치 못합니다. 선두안에 오른 장노비(壯奴婢) 2만여 명을 매인당 3전씩만 받아 1전은 해당 고을에 떼주어 초안을 작성할 당시 왕래하는 비용으로 쓰게 하고, 2전은 감영에 바쳐 정안(正案)을 작성할 때에 들어가는 비용을 삼게 하며, 사노비(寺奴婢) 및 관아·향교·서원의 노비에 이르러서는 6년에 한 차례씩 중심이 되는 고을에서 수정하는 데 그 비용이 그리 많지 않으므로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초안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그리 많지 않고 왕래할 때의 비용도 그다지 대단하지 않으니, 만약 매인당 2전 5푼씩으로 정한다면 받는 것이 거의 6천 냥에 가까울 것입니다. 초안을 작성할 때 왕래하는 비용과 안책을 수정하는 비용 또한 여유가 있을 것이니, 그대로 규례를 정하도록 하고, 사노비안의 잡비는 원래 많지 않으므로 별로 개정할 것이 없으니 그대로 두도록 다 같이 분부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상동(尹尙東)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이상(李頤祥)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6월 29일 무인
관서·해서·관북에서 기민(飢民)의 구제를 실시하였는데, 관서는 정월에 시작하여 5월에 마치고 해서는 2월에 시작하여 4월에 마치고 관북은 정월에 시작하여 6월에 마쳤다. 【관서에 대한 나라의 구제는 의주(義州)·용천(龍川)·삭주(朔州)·창성(昌城)·구성(龜城)·영변(寧邊)·성천(成川)·운산(雲山)·희천(熙川)·순천(順川)·덕천(德川)·영원(寧遠)·맹산(孟山)·양덕(陽德)·은산(殷山)·철산(鐵山)·자산(慈山)·초산(楚山)·강계(江界)·위원(渭原)·강동(江東) 등의 고을과 어천역(魚川驛)·인산(麟山)·청성(淸城)·천마(天摩)·창주(昌洲)·시채(恃寨)·안의(安義)·위곡(委曲)·유원(柔院)·영성(寧城)·토성(免城)·옥강(玉江)·수구(水口)·청수(靑水)·방산(方山)·구령(仇寧)·막령(幕嶺)·식송(植松)·용연(龍淵)·건천(乾川)·대길호리(大吉號里)·묘동(廟洞)·어정탄(於汀灘)·운두리(雲頭里)·갑암(甲巖)·우현(牛峴)·차령(車嶺)·아이(阿耳)·신광(神光)·상토(上土)·고산리(高山里)·평남(平南)·종포(從浦)·추파(楸坡)·벌등(伐登)·외괴(外恠)·오노량(吾老梁)·산양회(山羊會)·가헌동(加軒洞)·직동(直洞)·마마해(馬馬海) 등 진(鎭)의 기민은 모두 8십만 8천 5백 1명이고 구제미는 8천 5백 72석이었다. 민간인이 수행한 기민 구제는 평양(平壤)·안주(安州)·정주(定州)·벽동(碧潼)·가산(嘉山)·곽산(郭山)·개천(价川)·박천(博川)·상원(祥原)·증산(甑山)·삼등(三登)·태천(泰川)·순안(順安) 등 고을과 만포(滿浦)·노강(老江)·선사(宣沙)·서림(西林) 등 진과 금성 별장(金城別將) 등 기민은 모두 22만 8천 7백 98명이고 구제미는 7천 4백 40석이다. ○ 해서에 대한 나라의 구제는 곡산(谷山)·수안(遂安)·장연(長淵)·봉산(鳳山)·서흥(瑞興)·신계(新溪)·평산(平山)·해주(海州)·토산(兎山)의 기민은 모두 15만 3천 3백 76명이고 구제미는 6천 9백 32석이었다. ○ 관북의 남관에 대한 나라의 구제는 안변(安邊), 덕원(德源)·문천(文川)·고원(高原)·영흥(永興)·정평(定平)·함흥(咸興)·홍원(洪原)·북청(北靑)·이성(利城)·단천(端川)·장진(長津)·삼수(三水)·갑산(甲山) 등 고을과 거산역(居山驛)·이동(梨洞)·쌍청(雙靑)·황토기(黃土岐)·혜산(惠山)·운총(雲寵)·동인(同仁) 등 진의 기민은 모두 24만 6천 6백 68명이고 구제미는 1만 9천 3백 93석이다. 북관에 대해 민간인이 구제한 것은 길주(吉州)·명천(明川)·종성(鍾城)·부령(富寧)·무산(茂山)·회령(會寧)·온성(穩城)·경원(慶源)·경흥(慶興)·경성(鏡城) 등 고을과 성진(城津)·고령(高嶺)·볼하(乶下)·유원(柔遠)·미진(美鎭)·황척파(黃拓坡)·영달(永達)·훈융(訓戎)·아산(阿山)·서북(西北)·건원(乾原) 등 진의 기민이 모두 12만 5천 5백 71명이고 구제미는 1만 1천 3백 55석이었다.】 3개 도의 감사가 구제를 마쳤다고 아뢰자,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였다. 관서에서는 희천 군수(熙川郡守) 이득신(李得臣)에게 숙마(熟馬)를 내리고, 운산 군수(雲山郡守) 서유봉(徐有鳳)은 도내의 수령으로 승진 천임하고, 벽동 군수(碧潼郡守) 정학경(鄭學畊)은 내직으로 승진 천임하고, 청수 만호(靑水萬戶) 김양희(金陽禧)는 오위 장(五衛將)으로 제수하고, 구제미를 자원하여 바친 진사(進士) 이진성(李鎭成) 등은 가자(加資)하였다. 관북에서는 북청 부사(北靑府使) 유지양(柳知養)은 특명으로 가자하고, 경성 판관(鏡城判官) 조운기(趙雲紀)는 준직(準職)을 제수하고, 명천 부사(明川府使) 정우붕(鄭宇朋)은 가자하고, 부령 부사(富寧府使) 이여절(李汝節)과 단천 부사(端川府使) 홍윤복(洪允復)에게는 옥새를 찍은 글과 옷감을 내리는 은전을 베풀었으며, 덕원 부사(德源府使) 조계(趙𡹘)는 승진 서용하고, 성진 첨사(城津僉使) 이익순(李翼純)은 현재보다 높은 직위에 조용하고, 고령 첨사(高嶺僉使) 강응환(姜膺煥)은 승진 서용하고, 유원 첨사(柔遠僉使) 박천주(朴天柱)와 아산 만호(阿山萬戶) 유유청(柳維淸)에게는 숙마를 내리고, 황척파 권관(黃拓坡權管) 오경량(吳敬良)과 건원 권관(乾原權管) 강취일(康就日)에게는 상을 내리고, 서북 첨사(西北僉使) 조제릉(趙齊崚)과 이동 만호(梨洞萬戶) 박도증(朴道曾)에게는 아마(兒馬)를 내리고, 북평사 군관(北評事軍官) 유석주(兪碩柱)는 가자하고, 2백 석 이상을 자원하여 바친 자는 가자하고, 1백 석 이상을 자원하여 바친 자에게는 상을 내리고, 50석을 바친 자는 증명서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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