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기묘
배다리[舟橋]의 제도를 정하였다. 상이 현륭원(顯隆園)을 수원(水原)에 봉안하고 1년에 한 번씩 참배할 차비를 하였는데, 한강을 건너는 데 있어 옛 규례에는 용배[龍舟]를 사용하였으나 그 방법이 불편한 점이 많다 하여 배다리의 제도로 개정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그 세목을 만들어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상의 뜻에 맞지 않았다. 이에 상이 직접 생각해내어 《주교지남(舟橋指南)》을 만들었는데, 그 책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배다리의 제도는 《시경(詩經)》에도 실려 있고, 사책(史冊)에도 나타나 있어 그것이 시작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지역이 외지고 고루함으로 인하여 아직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한가한 여가를 이용하여 부질없이 아래와 같이 적었다. 묘당에서 지어 올린 주교사(舟橋司)의 세목을 논변(論辨)하고 이어 어제문(御製文)을 첫머리에 얹혀 《주교지남》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 지형이다. 배다리를 놓을 만한 지형은 동호(東湖) 이하에서부터 노량(露梁)이 가장 적합하다. 왜냐하면 동호는 물살이 느리고 강언덕이 높은 것은 취할 만하나 강폭이 넓고 길을 돌게 되는 것이 불편하다. 빙호(冰湖)는 강폭이 좁아 취할 만하나 남쪽 언덕이 평평하고 멀어서 물이 겨우 1척만 불어도 언덕은 10척이나 물러나가게 된다. 1척 정도 되는 얕은 물에는 나머지 배를 끌어들여 보충할 수 없으므로 형편상 선창을 더 넓혀야 하겠으나 선창은 밀물이 들이쳐 원래 쌓은 제방도 지탱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새로 쌓아서야 되겠는가. 건너야 할 날짜는 이미 다가왔는데 수위의 증감을 짐작하기 어려워 한나절 동안이나 강가에서 행차를 멈추었던 지난해의 일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또 강물의 성질이 여울목의 흐름과 달라서 달리는 힘이 매우 세차고 새 물결에 충격을 받은 파도가 연결한 배에 미치게 되므로 빙호는 더욱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 몇가지 좋은 점을 갖추고 있으면서 이들 몇가지 결함이 없는 노량이 가장 좋다. 다만 수세가 상당히 높아 선창을 옛 제도대로 쓸 수 없는 점이 결점이다. 이것 역시 좋은 제도가 있는만큼 【아래 선창교(船槍橋) 조항에 보인다.】 염려할 것은 없다. 이제 이미 노량으로 정한 이상 마땅히 노량의 지형을 살피고 역량을 헤아려 논의해야 하겠다.
2. 물의 넓이이다. 선척의 수용을 알려면 반드시 먼저 강물의 넓이가 얼마인가를 정해야 한다. 노량의 강물넓이가 약 2백 수십 발이 되나 【발은 기준이 없으나 일체 지척(指尺) 6척을 한 발로 삼는다.】 강물이란 진퇴가 있으므로 여유를 두어야 하니 대략 3백 발로 기준을 삼아야 한다. 배의 수용 숫자를 논하는 데는 그 강물의 진퇴에 따라 적당히 늘이고 줄이는 것이 실로 무방할 것이다.
3. 배의 선택이다. 지금의 의견에 의하면 앞으로 아산(牙山)의 조세 운반선과 훈련 도감의 배 수십 척을 가져다가 강복판에 쓰고 양쪽 가장 자리에는 소금배로 충당해 쓰겠다고 하나, 소금배는 뱃전이 얕고 밑바닥이 좁아서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5개 강의 배를 통괄하여 그 수용할 숫자를 헤아리고, 배의 높낮이의 순서를 갈라 그 완전하고 좋은 배를 골라 【모두 아래에 보인다.】 일정한 기호를 정해놓고 훼손될 때마다 보충하며 편리한 대로 참작 대처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4. 배의 수효이다. 여러 가지 재료에 【종량(縱樑)과 횡판(橫板) 등이다.】 드는 경비를 알려면 반드시 배의 수효를 먼저 정해야 하고, 배의 수효를 정하려면 반드시 먼저 배 하나하나의 넓이가 얼마인가를 헤아려야 한다. 가령 갑이란 배의 넓이가 30척이 된다면 【5발로 계산한다.】 을이라는 배의 넓이는 29척이 되며, 병과 정의 배도 차례차례 재어서 등급을 나누어 연결하고 통틀어 계산하여 강물의 넓이 1천 8백 척에 【3백 발로 계산한다.】 맞춘다면 선척이 얼마나 수용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각종 재료의 경비도 또한 이를 미루어 추정할 수 있다. 지금 경강(京江)에 있는 배의 넓이를 일체 30척으로 【만약 5발에 차지 않는 것이 있으면 그 척수에 따라 배의 수를 더해주어야 한다.】 계산한다면 강물의 넓이 3백 발 안에 60척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5. 배의 높이이다. 대개 배다리의 제도는 한복판이 높고 양면은 차차 낮아야만 미관상 좋을 뿐 아니라 실용에도 합당하다. 【작은 배는 응당 얕아야 하고 큰 배는 응당 깊어야 한다.】 높고 낮은 형세를 살피려면 반드시 먼저 선체의 높고 낮음을 정해야 한다. 가령 중앙에 있는 갑이라는 배의 높이가 12척이 【2발로 따진다.】 된다면 좌우에 있는 을이라는 배의 높이는 11척 9치가 되며 좌우에 있는 병과 정의 배 또한 각각 몇푼 몇치씩 점차 낮아지게 함으로써 층차가 현저히 다르게 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배 하나하나의 높이가 얼마라는 것을 배열해 놓는다면 한장의 종이 위에 차례로 분배할 수 있고 그리하여 군영의 대오를 정렬한 것처럼 한눈에 들어오게 한다면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배다리는 손바닥 위에 환하게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1푼 1치를 따져 조금씩 줄이지 않다가 갑자기 높아지거나 낮아지게 된다면 미관상 좋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층차가 나는 곳에는 메우기가 힘들고 또 대나무발을 쳐서 미봉해야 할 것이다. 지난해 대나무발의 비용이 천 냥이 넘었는데 매년 이 비용도 또한 감당하기 어렵다. 지금 이 방법을 쓴다면 공석으로 덮는 정도에 불과하니, 이 어찌 비용을 줄이는 한가지 방법이 되지 않겠는가. 다만 배의 높이와 넓이를 미리 기록해 두어야 제때에 가져다 쓸 수 있다. 3월 이후에는 각처의 배가 각자 떠나 바람을 따라 표박하다보니 찾아 붙잡아 쓸 수 없으니 지금 마땅히 오강(五江)038) 의 선주로 하여금 각기 자기 선박이 정박해 있는 곳을 알리라고 하여 그것을 열서하여 책을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이가의 배는 호남 어느 고을에 가 있고 김가의 배는 호서 어느 고을에 가 있다는 것을 일일이 파악한 후 특별히 근실하고 청백한 사람을 【여러 사람이면 폐단이 있을 수 있으므로 한두 사람이면 된다.】 골라 배가 정박해 있는 각처를 돌며 책에 기록된 것을 조사하여 그 배의 높이와 넓이의 척수를 재어 아무개의 배는 아무 배 아래라는 것을 일일이 적어 가지고 오게 해야 한다. 그런데 그 배의 높이를 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물속에 들어간 높이이고 하나는 물밖에 나온 높이이니, 이것을 만약 정밀하게 하지 않으면 어긋나기 쉽다. 물밖에 나온 높이는 수직선으로 재야 하고 물속에 들어간 높이는 곡척으로 재야 하며, 완전한가 완전하지 않은가에 대해서도 또한 충분히 살펴서 공정하게 기록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한 다음에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그 만들어진 책을 대조 검열하여 넓고 좁음을 헤아려 배가 몇척이 필요한가를 정하고 높고 낮음을 헤아려 차례차례 배열할 순서를 정하며, 완전한가 낡았는가를 가지고 취사선택의 표준을 정한다. 그리하면 곧 아무 갑선과 아무 을선이 몇 척이면 배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명목이 이미 정해진 다음에는 각 선주들에게 알려서 배가 뽑힌 사유를 알게 하고 각처에 공문을 띄워 발송기일을 독촉하면, 담당 관리가 한 번 장부를 상고함으로써 배는 기일을 맞추어 모여들게 되고 다리는 하루도 걸리지 않아 완성할 수 있다.
6. 종량(縱梁)이다. 【배 위에 세로로 연결하는 것이다.】 종량을 돛대로 쓰면 세 가지 폐단이 있다. 대체로 돛대는 아래는 굵고 위는 가늘어서 연결할 때 자연히 울룩불룩하게 되고 판자를 그 위에 깔아놓을 때 매우 고르지 못한 것이 첫째 결함이다. 그리고 돛대를 연결할 때 많은 배를 쭉 펴놓기 때문에 1척의 배가 고장나도 【깨어지거나 물에 잠기게 될 때이다.】 옆의 배가 지장을 받아 고쳐 보충하기 불편한 것이 둘째의 결함이다. 그리고 돛대는 곧 상인들의 개인물건이므로 혹시 꺾어지기라도 하면 또한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게 되는 것이 셋째 결함이다. 지금 논의에 의하면 별도로 긴 나무를 깎아서 쓰는 것이 편리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할 경우 두 가지의 폐단은 구제할 수 있지만 1척의 배가 고장이 났을 때 곁의 배가 지장을 받는 폐단은 여전하다. 또 긴 장대는 다른 데서 구할 수 없고 오직 호남의 섬에서만 찍어와야 하는데, 바다로 운반할 때는 강물과 같이 나무를 떼로 매어 물에 떠내려보낼 수 없으므로 부득이 큰 배에 싣게 된다. 그러나 1척의 배를 가로지르는 긴 나무라서 많이 실을 수 없다. 혹은 배의 옆에다 달아 끌기도 하고 혹은 배의 머리에 매게 되는데, 배 하나에 많아야 수십 주를 끌고 오는 것에 불과하다. 천리의 바닷길을 항해하여 무사히 도착한다는 것도 기대하기 어렵거니와, 또 그 중간에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속출하여 여러 고을이 소란스러울 것은 필연적인 형세이다.
이번엔 긴 장대를 쓰지 않고 많은 배를 연결할 때 다만 배마다 장대 1개씩 쓰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배의 넓이가 5발이 되면 종량의 길이는 7발로 기준을 삼아 그 2발의 나머지 길이가 뱃전의 양편을 걸치게 해야 하니, 곧 갑이란 배의 종량이 을이란 배의 종량과 서로 맞붙는 것이 1발씩 되게 하고, 병이란 배의 종량과 맞붙는 것도 1발씩 되게 한다. 또 그 갑이란 배의 종량 끝부분이 을이란 배의 가룡목(駕龍木) 【곧 배 안에 가로지른 나무로서 배 안에 버텨놓아 한 간, 두 간으로 가르는 것이다.】 위에 맞닿아 을이란 배의 종량과 서로 합하게 하고 을이란 배의 종량 끝부분이 갑이란 배의 가룡목과 맞닿아 갑이란 배의 종량과 서로 합하게 한 다음 칡줄로 동이고 탕개로 조인다. 모든 다리를 차례차례 이런 식으로 만든다면 건들건들 유동할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논자들은 오히려 완고한 긴 장대만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 두 종량이 서로 맞닿는 곳에 구멍을 뚫고 빗장을 질러놓으면 더욱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1척의 배가 고장난다 하더라도 양쪽에 동인 밧줄만 풀면 고장난 배를 고칠 수 있으니, 또한 어찌 장대를 길게 놓아 많은 배가 지장을 받겠는가. 【또 기구를 창고에 출납할 때에도 또한 매우 간편할 것이다.】 어로(御路)의 넓이를 4발로 정하였다면 1발 사이마다 1개의 종량을 놓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배마다 5개의 종량이 들 것이며 60척의 배에 들어가는 것은 3백 개가 될 것이다. 장대마다의 길이가 7발에 불과로 1척의 배에 1백 개는 충분히 실을 것이며 따라서 3척의 운반선이면 충분히 실어나를 수 있다. 그러므로 바다를 항해하느라 겪는 고난도 없게 된다. 종량의 크기는 네모로 깎되 면마다 1척으로 표준을 삼으면 쓰기에 알맞을 것이다.
7. 횡판(橫板)이다. 어로(御路)의 넓이가 4발이 된다면 횡판의 길이도 또한 4발이다. 횡판의 넓이는 1척 【곧 지척(指尺)을 말한다. 자의 규격이 영조척(營造尺)에 비하면 8푼이 적고 예기척(禮器尺)에 비하면 2푼이 많다.】 이상으로 표준을 삼고, 두께는 3치 【영조척으로 따진다.】 이상으로 표준을 삼는다. 그리고 강물의 넓이 1천 8백 척에 맞추자면 횡판 또한 1천 8백 장이 들어야 한다. 그 수송 방법은 배 1척이 3백 개를 충분히 실을 수 있다면 불과 6척의 운반선으로 넉넉히 실어나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논의에 의하면 종량과 횡판에 드는 소나무가 적어도 5천 주에 밑돌지 않는다 하고 계사(計士)들과 간사(幹事)들은 그것도 부족하다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계산에 밝지 못하고 간교한 폐단이 속출하는 원인이다. 이상에서 배정한 숫자로 계산한다면 보통 소나무 1주당 종량 2개가 나오고, 큰 소나무 1주당 횡판 4장이 나오게 되니, 보통 소나무는 3백 주이며 큰 소나무는 4백 50주다. 【이는 모두 넉넉하게 잡은 것이다.】 합하여 7백 50주면 충분히 여유가 있으니 5천 주가 든다는 말이 어찌 근사하기나 한 것인가. 종량에 쓸 나무는 장산곶(長山串)에서도 베어 올 수 있고, 횡판에 쓸 나무는 안면도(安眠島)에서도 베어 올 수 있다. 대개 큰 소나무는 주당 판자가 4개만 나오지는 않는다. 설사 몸통이 작은 것이라도 길이는 8, 9발은 넉넉히 되니, 그 절반을 잘라 두 토막으로 만들고 또 그 절반을 톱으로 켜면 1주에 횡판 4개는 나오고도 남음이 있다. 대개 소나무를 작벌할 때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전은 이를 기화로 사정을 쓰고, 상인은 이를 계기로 이익을 본다.
그러므로 해당 수령을 엄중히 신칙하여 직접 검사하고 낙인(烙印)을 찍어서 훗날 적간할 때의 증거로 삼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횡판은 반드시 큰 소나무를 베어 쓰고 어린 소나무는 잘 기름으로써 오래된 것을 쓰고 어린 것을 기르는 방법을 지켜야 한다. 종량에 쓰는 나무로 말하면 그 몸통은 작은 기둥에 불과하고 길이는 7발에 불과하며 나무는 3백 주에 불과하므로 서울근교의 어느 산에서나 편리한 대로 얼마든지 베어다 써도 될 것이다.
8. 잔디를 까는 일이다. 배다리를 놓는 방법을 강구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까지 잔디를 까는 일을 걱정해본 적이 없으니 이는 몹시 소홀한 처사이다. 대개 잔디는 다른 풀과 달라서 한해에 몽땅 떼어내면 5년 동안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지난해의 공사에 첫날에는 5보 이내의 간격으로 떼어냈고 다음날에는 10보 이내의 간격으로 떼어냈는데, 다음날 공력의 성과가 첫날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미루어 금년에 1백 보 밖에서 떼어내고 명년에 수백 보 밖에서 떼어내면 그 공사비용도 따라서 몇배로 늘어날 것이다. 또 역군을 모집하는 방법도 본디 낭비가 많다. 더구나 오합 지졸(烏合之卒)을 일일이 통솔할 수 없는 데다가 복잡하고 소란한 가운데 아전들의 농간이 늘어나게 된다. 매년 배다리의 부역에 잔디를 까는 일이 첫째의 폐단이 된다.
이미 각자의 배를 하나씩 연결하는 방법을 쓰는 이상, 각 배가 모이기 전에, 또 서로 연결하기 전에 즉시 각 배로 하여금 각각 그 배 위에 깔 잔디가 몇 장이나 들겠는가를 계산하게 한 다음, 미리 지나는 길에 【양화(楊花)나 서강(西江)같은 곳이다.】 각 배의 사공들이 힘을 합쳐 떼어내어 각기 자기 배에 싣고 갔다가 배를 연결한 후 각기 자기 배에 깔도록 미리 규정을 정하여, 그 선주들이 거행할 줄을 알게 한다면 이른바 만인이 힘을 합치면 하루도 못되어 완성한다는 격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배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하나 이미 대오를 편성한 【아래 대오를 결성한다는 조항에 보인다.】 데다가 이익까지 보게 되었으니 형편상 마다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삼태기나 가래와 같은 도구는 관청에서 마련하여 각 배에 나누어주고 혹시 그 배가 바뀌게 되면 【아래 상벌조항에 보인다.】 즉시 인계하여 영구히 맡아서 사용하되 연한을 정해야 한다. 혹시 기한내에 분실할 경우 각자 변상대치하도록 일정한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
9. 난간이다. 난간은 어로(御路)의 가장자리에 말뚝을 세워 만드는 것이다. 1발마다 말뚝 1개씩 박는다면 좌우편에 드는 말뚝이 선창까지 7백 개에 불과하다. 그리고 작은 대발로 둘러치는데 대발마다 각각 5발로 기준한다면 좌우편에 드는 대발이 선창까지 1백 5, 60부(浮)에 불과하다.
10. 닻을 내리는 일이다. 지난해의 역사 때에는 닻을 내린 것이 난잡하여 각 배의 닻줄이 서로 엉켰었는데, 만약 풍파가 일 때라도 당한다면 손상되기 쉽다. 닻을 내릴 때에는 의당 갑의 닻줄은 갑의 뱃머리에 닿게 하고, 을의 닻줄은 을의 뱃머리에 닿게 하여 서로 엉키는 일이 없이 간격이 정연하게 한다면 설사 풍랑이 인다 하더라도 자연 뒤엉키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11. 기구를 보관하는 일이다. 배마다의 크기가 서로 같지 않으니 각 배의 기구 【종량 등의 기구이다.】 또한 일정하지 않다. 그러므로 나누어 줄 때마다 쉽게 분별하지 못한다. 마땅히 기구마다 그 위에 대오의 【아래 보인다.】 몇 번째 배, 어떤 색깔, 몇 번째 도구라고 새겨서 각각 종류별로 모아 구별하여 새로 지은 창고에 간직하고 별도로 한 사람을 두어 그 출납을 맡아보게 하며, 또 각 대오로 하여금 인계인수를 명확히 하게 하면 자연 분실하거나 혼란한 폐단이 없을 것이다.
12. 대오를 결성하는 일이다. 대체로 군제에 있어 대오로 편성하여 질서있게 통제하는 법이 없다면 호령을 시행할 수 없고 상벌을 밝힐 수 없다. 지금 10인이 한배를 타도 오히려 사공이 있어 그 배를 지휘하는데 하물며 1백 척의 배가 하나의 다리로 묶여진 상황에 도맡아 통솔하는 사람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모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을 때 누가 그 독촉을 맡으며, 반열이 서로 어그러질 때 누가 그 정돈을 맡으며, 공사가 부진할 때 누가 그 감독을 맡으며, 기구의 분실이 있을 때 누가 그 변상을 맡으며, 파괴된 것을 보수하지 않을 때 누가 그 규찰을 맡으며, 한 사람이 죄를 지고 백 사람이 서로 미룰 때 누가 그 책벌을 맡겠는가.
지금 마땅히 먼저 배의 수효를 정하고 고루 나누어 대오를 만들어야 한다. 가령 60척의 배로 하나의 다리를 만든다면 마땅히 제일 큰 배 1척을 강복판에 높이 세워 상선(上船)으로 정하고 60척을 여섯으로 나누어 각 10척의 배로 1대를 만드는데, 상선 북쪽에 있는 30척을 좌부(左部)의 3대로 삼고, 상선 남쪽에 있는 30척을 우부의 3대로 삼는다. 【배의 수효에 따라 고르게 나누어 명칭을 붙이고 편리하도록 대오를 묶는다.】 다음에는 3대 중에서 제1, 제2, 제3의 번호를 붙일 것이며, 그 다음에는 1대 중에서 제1, 제2로부터 제9, 제10까지 번호를 붙인다. 그리고 한 대마다 한 명의 대장(隊長)을 정하여 【혹은 사공, 혹은 선주 가운데서 골라 정한다.】 10척을 통솔하게 하며, 한 부마다 한 명의 부장을 정하여 【혹은 군교(軍校), 혹은 한산(閑散) 가운데서 골라 정한다.】 3개 대를 통솔하게 하며, 따로 별감관(別監官) 1인을 정하여 【경험이 있고 일을 맡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정한다.】 상선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배다리에 대한 전체의 일을 총괄하게 한다. 그리하여 각기 그들로 하여금 질서있게 통제하게 하고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그들에게서 곤장이나 태장을 맞게 한다. 1개 배에 잘못이 있으면 곧 그 대장(隊長)이 책임을 지고, 1개 대에 잘못이 있으면 곧 그 부장(部長)이 책임을 지며, 혹시 배다리 전체에 잘못이 있으면 곧 도감관(都監官)이 책임을 진다. 그리하면 배다리 안에는 자연 군사제도가 이루어져서 호령이 엄격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일을 열심히 할 것이다. 거둥의 명이 있을 때에는 법대로 거행할 뿐, 조정에서 다시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북을 울리고 떠나기만 하면 무지개같은 배다리는 이미 완성된다. 무엇 때문에 시끄럽게 모여 논의하며 알리기에 급급하여 수많은 사람을 소란하게 하고 많은 돈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는가.
13. 상벌이다. 배다리의 역사는 매우 중대한 일로서 많은 사람들이 부역에 참가하고 많은 사람들이 쳐다본다. 상벌이 있어 권장하고 징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을 추진해 나갈 것인가. 지금 마땅히 서울 부근 포구의 선주(船主)들을 불러 모아놓고 선박 생활의 큰 소원과 큰 이익으로써 앞을 다투어 서로 쟁취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가령 삼남(三南)의 세곡 운반선 및 해서(海西)의 소금 운반선 등에서 그가 가장 하고싶어하는 일을 선택하게 하고 배마다 일단 주교안(舟橋案)에 들어가 대오에 편성될 경우 첩지를 만들어 주고 이권을 차지하도록 허락하면 【한계를 정하여 그것을 벗어나지 않게 한다. 혹시라도 세력을 믿고 위반하는 일이 발각될 경우에는 경중을 나누어 처벌한다.】 백성들이 자연 권장하게 될 것이며, 일단 범죄가 있을 경우 즉시 그 명단에서 제거하고 다른 배로 대신하게 하면 이익이 있는 곳에 벌책 또한 적지 않으므로 형장과 도형·유형을 쓰지 않아도 백성들은 자연 징계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될 경우 오강(五江)의 뱃사람들은 배다리에 편성되는 것을 좋은 직분으로 받들게 되어, 그 기회를 얻지 못한 자는 오직 얻지 못할까 걱정하고 이미 얻은 자는 혹시라도 잃을까 걱정하면서 혹시라도 남에게 뒤질세라 성력을 다해 일에 참가할 것이다. 은혜를 베풀면서도 낭비하지 않고 수고롭게 하면서도 원망을 사지 않고 위엄을 보여도 사나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또 그 부장이나 대장은 몇 번의 행차만 겪은 다음 변장(邊將)이나 둔감(屯監)으로 기용하도록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면 더욱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14. 기한 내에 배를 모으는 일이다. 서울 부근 포구의 배는 언제나 9, 10월 사이에 각처로 갈려 나가 정박하여 겨울을 지내면서 봄조운[春漕]을 기다리는데, 이는 남보다 앞서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지금은 배다리의 문안에 원래 정해진 곳이 있어 이익을 차지하도록 허락해주었으므로 애당초 남과 이익을 경쟁할 일이 없다. 무엇 때문에 앞질러 가서 겨울을 지내겠는가. 봄 거둥은 정월 그믐께나 2월 초순에 하도록 정해졌는데, 비록 3월이 되도록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행차가 지나간 뒤에 조용히 바다로 나간다 하더라도 바람이 순한 때를 만나는 것은 오히려 이르다 할 것이다. 【그대로 1년내 떠다니면서 장사해도 지장이 없다.】 가을 거둥 때는 8월 10일께나 보름께 일제히 와서 대기하도록 특별히 조항을 세워놓고 영구히 준행하게 해야 할 것이다.
15. 선창다리이다. 지금 논의에 선창은 다리로 대신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얕은 물을 다리 밑으로 흘려보내어 그 물이 언덕을 핥아 무너뜨릴 우려가 없게 할 뿐이다. 만약 새로 불은 물이 갑자기 닥쳐와서 물결이 몇 자나 더 불어나게 되면 배다리는 물에 떠서 역시 몇 자나 높아지고 선창배는 그 자리에 박혀 움직이지 않은 채 물을 따라 오르내리지 못하므로 배다리를 쳐다보는 것이 마치 뜰에서 지붕을 쳐다보는 것 같을 것이니 이를 장차 어찌하겠는가. 그 대책으로는 하는 수 없이 배 1척을 뽑아내어 선창머리와 배다리의 머리 사이가 좀 떨어지게 한 다음 긴 판자를 깔아서 길을 연결하여 오르내리는데 지나치게 급하지 않게 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 어찌 위태롭고 군색하지 않겠는가.
지금 장소를 이미 노량(露梁)으로 정하였는데, 노량의 밀물은 언제나 세차서 거의 3, 4척이나 높이 오르며 아침저녁으로 드나드는 바람에 갑자기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여 접응시기를 예측할 수 없으므로 그 방법은 소용이 없다. 여기에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사람들은 혹시 오활하다 하겠지만 실은 아주 안전한 것이다. 대개 그 효능으로 말하면 선창다리가 물을 따라 오르내려 배다리와 서로 오르락내리락하게 하는 것이니, 물결이 1장이나 더 불어나더라도 항상 배다리와 떨어지지 않고 함께 서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 어찌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먼저 길고 두터운 판자 수십 장을 엮되 긴 빗장과 은잠(隱簪)으로 연결하고, 【배의 밑창을 만들 듯한다.】 다음은 큰 나무를 둘러 아래위로 맞대고, 【배의 문을 만들듯이 한다.】 다음은 긴 판자로 뱃전을 각각 2층으로 둘러 막은 다음에 【나룻배를 만들 듯이 한다.】 헌솜으로 틈을 막아 물이 새어들지 못하게 하기를 꼭 배를 만드는 것처럼 한다. 그리고 나서는 그 머리를 배다리 밑에 닿게 하여 수면에 뜨게 하고, 그 꼬리는 곧바로 밀물의 흔적이 있는 경계를 지나서 언덕 위에 붙여놓는데 이를 이름하여 부판(浮板)이라 하고, 다음은 부판 위에 규정대로 다리를 만들되 그 높이와 넓이는 배다리로 기준을 삼아 배다리와 선창다리의 두 머리가 꼭 맞게 하여 평면으로 만들어서 【이전 제도처럼 빈틈이 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 길을 연결해 놓으면 물을 따라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여 배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배다리는 많은 배를 서로 연결하여 그 세력이 서로 버티기 때문에 발로 차고 밟아도 움직이지 않지만, 지금 이 부판은 단순하고 머리가 가벼운 만큼 큰 다리로 내리누르고 많은 말이 밟으면 떴다 잠겼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다. 대개 물에 뜨는 이치는 물체의 밑창이 클수록 물의 압력을 많이 받는다. 지금 부판은 수십 개의 큰 판자를 가로로 연결하여 물에 띄워놓은 만큼 그 물의 힘을 받는 것은 몇만 근 정도가 아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명백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방법이 있다. 먼저 아(丫)자형의 큰 나무 두 그루를 베어다가 두 개의 기둥을 만들어 선창다리의 좌우 머리에 마주 세워놓고 굵은 밧줄로 배다리 배의 【가장 가에 있는 배로서 선창다리와 맞닿는 배.】 가룡목(駕龍木)에다 동여맨다. 【물이 불을 때 주교의 배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면 역시 편리한 대로 고쳐 동여맨다.】 다음은 아주 굵은 밧줄로 부판(浮板) 머리를 매어 【좌우를 다 그렇게 한다.】 세워놓은 기둥의 두 가닥이 진 위에 올려 걸고 밧줄 끝에 큰 주머니를 달아매고 많은 돌덩이를 주머니 속에 채워서 늘어뜨려 추로 만든다. 그리고 추의 무게는 반드시 늦춰지지도 않고 끌어당기지도 않게 하는 것을 한도로 한다. 늦추어지지 않게 한다는 것은 사람과 말이 선창을 밟아도 부판이 조금도 잠기지 않음을 말함이고, 끌어당기지 않는다는 것은 부판이 조금도 저절로 들리지 않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판자는 이따금 떠오를 때는 있어도 【물이 불을 때를 말한다.】 잠겨들 때는 없을 것이니, 이 어찌 안전하고 또 안전하지 않겠는가. 조수가 밀려오는 곳이나 세찬 물이 불어날 때 이 방법을 제외하고는 선창다리와 배다리가 수시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걱정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부판을 이동하는 방법은 부판의 밑창에다 바퀴를 여섯 개나 여덟 개쯤 달면 5, 6인이 끌어도 언덕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 물체가 커서 보관하기가 불편한 것이 문제라면 그것을 두 척, 혹은 세 척으로 나누었다가 【가죽 과녁을 나누었다 합쳤다 하는 것과 같이 한다.】 필요할 때 다시 합친다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이상에서 논의한 여러 가지 일은 넉넉히 여유를 두고 대충 말한 것에 불과하다. 만약 실지 일에 부닥쳐 조치하되 분수(分數)를 참작한다면 또 얼마간의 수를 줄일 수 있으며, 선창다리와 부판에 필요한 물건도 또한 충분히 그 속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주교 절목(舟橋節目)에 ‘배다리를 설치할 때는 나룻길을 먼저 보아야 하는데, 노량진 건널목은 양쪽의 언덕이 마주 대하여 높고 강복판의 흐름은 평온하면서도 깊다. 그리고 그 길이와 넓이도 뚝섬[纛島]이나 서빙고(西氷庫)에 비하여 3분의 1은 적어 지형의 편리함과 공역의 절감이 오강(五江)의 나룻길 중에 가장 으뜸이다. 이에 노량진 길을 온천에 행차할 때와 선릉(宣陵)·정릉(靖陵)·장릉(章陵)에 행차할 때 모두 이 길을 이용할 것을 영구히 결정하고, 헌릉(獻陵)·영릉(英陵)·영릉(寧陵)에 행차할 때에는 광진(廣津)으로 옮겨 설치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노량나루터의 지형은 북쪽 언덕은 높고 남쪽 언덕은 평편하고 낮으며 한결같이 모래사장으로 되어 남쪽 언덕과 북쪽 언덕의 형세가 다른데 양쪽 언덕이 마주 대해 높이 솟아있다고 한 것은 실로 잘못이다. 또 조수의 왕래로 인하여 수면의 높낮이가 조석으로 변하니 배다리 역시 응당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게 되는데, 강복판의 흐름은 평온하면서도 깊다는 말 또한 잘못이며 깊다고 한 말은 더욱 의미가 없다. 그러고 보면 배다리가 물을 따라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것은 사실 괜찮지만 양쪽 언덕에다가 다리를 만든다는 것은 가장 불편하다. 해설은 선창다리 조항에 보인다.
절목에 ‘배다리에 필요한 배는 나라의 배와 개인의 배를 섞어서 써야만 부족할 우려가 없다. 나라의 배는 훈련원의 배 10척과 아산(牙山) 공진창(貢津倉)의 조운선 12척을 쓰고 개인의 배는 서울 부근 포구의 배를 쓰는데, 혹시 큰물이 져서 나루가 불어날 때를 당할 경우 또한 예비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되는만큼 서울 부근 포구의 배 10척만 더 정비해둔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나라의 배건, 개인의 배건 논할 것 없이 재어보기도 전에 어떻게 몇 척이 필요한지 알 것인가. 만약 훈련원의 배와 조운하는 배의 높이가 서로 맞지 않으면 그 중에는 필시 쓸 수 없는 것도 있겠는데, 지금 나라의 배와 개인의 배를 합쳐 42척으로 그 숫자를 결정하니, 이는 너무도 타산이 없는 말이다. 나머지 배 몇 척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일이기는 하나, 양쪽 언덕까지 다리를 만들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면 큰물이 져서 나루가 넓어질 때를 당하여도 나머지 배는 쓸 곳이 없다. 지난번 빙호(氷湖)에 큰물이 졌을 때도 어찌 나머지 배가 없어서 그리된 것이겠는가. 갑자기 큰물을 만나 나머지 배로 연결 보충하려 한다면 두 언덕의 다리를 헐고 다시 만드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판자를 띄워 다리를 만든다는 말도 또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절목에 ‘나라의 배나 개인의 배를 막론하고 정돈 단속하는 규정이 없으면 반드시 기강이 문란할 우려가 있고, 또 배를 부리는 것은 엄연히 강가에 사는 백성들의 생업이니, 그들 중에 부유하고 근실하며 일을 아는 사람을 뽑아 그로 하여금 선계(船契)를 모아 사공을 통솔하는 일을 도맡아 거행하게 하되, 선계에서 집행할 조건은 여론을 참작하여 별도로 절목을 만든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이 조항은 우선 배를 선택하여 완전히 결정한 다음에 다시 여론을 참작하여 편리하게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절목에 ‘아산 공진창(貢津倉)의 조운선 12척을 주교사에 이속하여 선계(船契)로 넘기고, 조운의 규정은 모두 호서의 전례에 의하여 거행함으로써 선계에 든 사람들이 혜택을 보게 한다. 그리고 조운이 끝난 후 다리를 만드는 여가에는 먼 도나 가까운 도의 공적인 짐이나 사적인 짐을 막론하고 또한 한 차례씩 실어나르는 것을 허락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배를 선택하는 조항에 이미 자세히 말하였다.
절목에 ‘개인의 배로서 선계에 든 것은 특별히 살아갈 밑천을 만들어주어서 참가하기를 즐겁게 여기는 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삼남(三南)의 조운선과 각도의 전선·병선 가운데서 연한이 차 못쓰게 된 것을 모두 값을 받고 선계에 든 사람들에게 내주고 그 돈으로 배다리를 놓는 배를 보수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되 전선·병선으로서 연한이 차 못쓰게 된 것은 3년, 조운선으로서 연한이 차 반납된 것은 영구히 선계로 이속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강가에 사는 백성들이 뇌물질을 하면서 도모한 것이다. 이미 세미 조운의 이익을 독차지하고 또 못쓰게 된 배의 이익을 독차지하게 한다면 선계에 든 자는 모두 몇 년이 안 되어 저마다 부자가 될 것이다. 못쓰게 된 전선 1척이면 수하(水下)의 큰 배 2척은 충분이 만들 수 있고, 못쓰게 된 병선과 조선 또한 각각 큰 배 1척씩은 만들 수 있다. 큰 배 1척에 드는 물량이 거의 천금에 가까우니 그 이익이 어찌 만금으로 논할 뿐이겠는가. 비록 값을 받고 내준다 하지만 해당한 값을 다 받지 못하는 이상 그들이 얻는 이익은 엄청날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을진대 다리를 만드는 모든 일을 일체 그 선계로 하여금 전적으로 담당하게 하는 것이 사리로 보아 당연하다. 지금 그 이익을 독차지하게 하고도 또 조정으로 하여금 허다한 돈과 곡식을 이전처럼 낭비하게 한다면 나라와 개인이 함께 이익을 보는 본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조정에서는 1전을 허비하지 않고 그들을 시켜 거행하게 하더라도 반드시 좋아 날뛰면서 남에게 뒤질세라 앞을 다투어 달려들 것인데 지금 감히 한량없는 욕심을 내어 이익 외의 이익을 독점한다면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이는 뇌물질의 소치가 아니면 필시 당상관 등이 속아서 한 말일 것이다.
절목에 ‘삼남에서는 고을의 세곡을 바치는 때로부터 실어나르는 일을 선계(船契)에 넘겨 그들의 생업을 돕고 있으나, 이것은 8개 포구 백성들의 생계이므로 전적으로 선계에 이속시킬 수 없다. 훈련원의 배는 자체적으로 정한 규정이 있고, 조운선은 이미 조세 운반을 거친만큼 더 논의할 필요가 없다. 수하(水下)의 개인배 30척에 대해서는 호남과 호서 두 도 가운데서 거리의 원근과 배값의 고하를 참작하여 절반씩 희망에 따라 떼어주고 주교사(舟橋司)로부터 호조와 선혜청에 공문을 띄워 나누어 보내도록 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경강(京江)의 배가 옛날에는 천여 척이 넘었는데 지금은 수백 척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익을 내는 것이 점차 전과 같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세곡을 나르는 데서 또 이익을 선계에 나누어주게 되었으니, 선계에 든 60척 외에 백 척이나 10척의 뱃사람들은 어찌 본업을 잃고 뿔뿔이 헤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별히 편리하게 살아갈 근거를 강구함으로써 억울해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절목에 ‘나라배와 개인배 52척을 합하여 하나의 선계를 모으고 배의 대장을 만들어 10척마다 각각 선장 1인을 낸다. 나라배 22척에 감관(監官) 1인을 차출하고 개인배 30척에 감관 1인을 차출하며 나라배와 개인배를 아울러 도감관(都監官) 1인을 차출하여 차례차례 통솔할 소지로 삼되, 감관 3인은 3군문의 별군관(別軍官)에 나누어 소속시켜 근무기간을 통산한 뒤에 혹시 빈자리가 나면 선계로부터 공정한 의논에 따라 후보자를 권점하여 주관하는 당상관에게 보고하고 각 군문에 공문을 뛰우며, 선장 역시 권점으로 차출하고 똑같이 보고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배다리에 속한 배가 이미 하나의 선계로 이루어졌다면 나라배와 개인배로 나누어 둘로 만들 필요가 없다. 가령 배가 50척이 된다면 나라배, 개인배를 논할 것 없이 으레 섞어서 쓸 것이며, 10척마다 각각 대장(隊長)을 내고 25척마다 각각 감관 1인을 내어 좌부와 우부로 만들어야 한다. 이에 특별히 도감관 1인을 선출하여 그로 하여금 총괄적으로 거느리게 해야만 피차 서로 미루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감관 3인을 군문에 소속시키는 것은 매우 타당치 못한 것 같고 또 3인이 윤번으로 수직을 서게 되면 직무상 자연 지장을 줄 것이며, 기본관직에 임명하려면 군문 또한 모순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주교사의 벼슬만 전적으로 맡겨서 상근하는 자리로 만들고 차출시에는 그들로 하여금 후보자를 권점하게 하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절목에 ‘관청을 노량진 접경에 짓되 사무보는 청사 8간, 목재창고 15간, 쌀창고 5간, 창고지기와 군사들이 수직하는 집 5간, 대문 1간, 곁문 1간, 헛간 3간으로 할 것이며 주교사에서 물자와 인력을 내어 짓는다. 수직에 관한 일은 감관 3인이 윤번제로 입직하고 하인으로는 창고지기 겸 대청지기 1명, 군사 1명이 영구히 도맡아 보게 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이 조항은 그럴듯하기는 하나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절목에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잡물을 이미 주교사에서 조달하여 쓰기로 한 이상 물자를 해결할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된다. 영남의 별회곡(別會穀) 중에서 대미(大米)를 2천 석씩 매년 떼어내 돈으로 만들어 쓰고, 쌀과 베를 쓸 곳이 있으면 공진창(貢津倉)의 조운미 중에서 적절하게 가져다 쓰도록 한다. 물자를 출납하는 데서 남는 것이 있으면 주관하는 당상관이 특별히 살피도록 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배다리를 설치함에 있어 마땅히 일이 단순하고 비용이 절감되는 것을 첫째가는 계책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대미 2천 석을 해마다 떼어낸다는 것은 대체적 의미로 보아 결함이 있는 것 같다. 포구 백성들의 생업은 조운(漕運)보다 더 앞설 것이 없는데, 일단 선계에 들면 그 이익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머리가 터지도록 경쟁하여 혹시라도 빠질까 염려하며 심지어는 천금을 가지고 뇌물질을 하기까지 하니, 백성들이 크게 원한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미 그 크게 원하는 바를 들어준다면 다리공사가 하루도 안 되어 완성되리라는 것은 또한 손바닥을 보듯 훤하다. 그렇다면 그중에 필요한 약간의 경비는 매년 5백 냥이면 만족할 것이다. 또 전선과 병선, 그리고 조운선을 떼어주는 것은 이미 전에 없던 큰 이익인데, 또 한없이 많은 재물을 내어 한갓 뱃사람들만 더욱더 부유하게 만드는 술책을 쓰는 것은 완전히 몰지각한 처사이다. 쌀은 역부들의 요식 외에는 종전처럼 낭비할 필요가 없다.
절목에 ‘배다리를 만드는 제도는 배 자체의 대소에 따라 차례대로 이어붙인 다음에 닻을 내려 단단히 고정시키고 굵은 칡줄로 동이며, 또 크고 둥근 고리로 각 배의 상하 좌우를 연결하고 가는 칡줄로 꿰어 처맨 다음, 위에는 길이로 연결된 나무를 깔고 가로로 긴 송판을 깔고서 모두 간간이 크고 작은 못을 친다. 그 다음 빈 가마니를 펴 흙을 채우고 잔디를 입히며, 양쪽 가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한계를 만든다. 그리고 배마다 사공 3명씩 나누어 배치하여 불을 단속하고 물을 방지하도록 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다리를 만드는 제도는 의당 배의 높낮이에 치중해야 하는데 배의 대소만을 거론하니 이는 이미 그 방법에 어두운 것이다. 크고 둥근 고리를 다는 것은 한갓 공사만 번거롭고 도리어 흔들흔들 일렁이게 할 염려가 있으므로 더욱 부당하다. 빈가마니에다 흙을 채우는 것 또한 의미가 없다. 배의 높이를 헤아려 잇대어 연결하고 길이로 걸치는 나무의 양쪽 머리를 한데 묶어서 가룡목(駕龍木)에 연결한 다음에 긴 판자를 쭉 깔며 탕개로 바싹 조인 다음 빈가마니를 간간이 펴고 떼장으로 덮게 되면 그 이상 더할 것이 없다. 그리고 갑이란 배는 을이란 배와 밀착시키고, 을이란 배는 병이란 배와 밀착시켜 차례차례로 이렇게 하면 된다. 만약 큰 고리를 마주 박아놓으면 두 배가 연접된 부분에 자연 공간이 생기게 되니, 물결이 부딪칠 때 어찌 흔들리는 폐단이 없겠는가.
절목에 ‘긴 송판 4천 장은 통영(統營)과 안면도(安眠島)의 바람에 넘어진 소나무 중에서 판자를 만들어 쓰되, 판자의 길이는 9척, 두께는 2치, 넓이는 1척 2, 3치로 규정할 것이며, 통수영(統水營)에서 나무를 다듬어 배를 세내어 실어다가 저장해두고 쓰게 한다. 그리고 사용한 뒤에는 당상관과 도청(都廳)이 직접 숫자를 확인하여 입고시키는데, 그중에 만약 파손된 판자가 있을 경우에는 주교사에서 통수영으로 공문을 보내 바람에 넘어진 소나무 중에서 판자로 만든 것을 가져다가 하나하나 보충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긴 송판 4천 장에 대한 말은 너무도 지각이 없다. 또 길이를 9척으로 하고 넓이를 1척 2, 3치로 마련한다는 것은 더욱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노량나루의 넓이가 가령 2백 발이 되고 1발이 6척이라면 곧 1백 20척이 된다. 판자의 넓이가 1척이라면 필요한 것은 자연 1천 2백 장이 되고 이밖에는 더 필요치 않다. 설사 약간의 여분을 둔다 하더라도 무슨 4천 장까지야 되겠는가. 다만 어로(御路)를 4발로 정한다면 판자의 길이도 또한 4발이 되어야만 다리 위를 평면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9척의 판자로 마치 억지로 공간을 보충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실로 잘못이다. 바람에 넘어진 소나무로 말하면 각처에 무슨 바람에 넘어진 소나무가 그리 많겠는가. 조정에서는 비록 바람에 넘어진 소나무가 허다하다고 알리지만 생소나무를 베면서 이름만 바람에 넘어진 소나무라고 하는 것이 의례적인 일이다. 이것이 이른바 이름만 있고 실속은 없는 것으로서 농간의 폐단이 더욱 많아지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필요한 수량을 정해 가지고 해당 도에 엄히 신칙하여 생소나무를 찍어 보내게 하는 것이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무의 길이와 넓이 또한 수심을 재고 배를 잰 자로 재단해야 서로 부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서울에서 자 하나를 만들어 보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통영은 너무 멀기 때문에 장산곶(長山串)과 안면도(安眠島)의 것을 가져다 써야 할 것이다.
절목에 ‘길이로 연결할 나무 4백 주는 그 길이는 25, 6척에서 30척에 이르며 끄트머리의 직경은 7치로 한다. 장산곶에서 찍어가지고 본 고을에서 배를 세내어 실어다가 저장해두고 쓰도록 하되, 숫자를 헤아려 입고시키고 파손된 것을 보충하는 등의 일은 긴 송판의 실례대로 처리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길이로 연결할 나무의 마련도 지나친 것 같다. 모두 30척으로 계산해도 2백 50개면 충분하고 40척으로 계산하면 2백 개로 충분하다. 이것 역시 배의 척수를 측정한 뒤에야 실제의 수를 확정할 수 있다.
절목에 ‘선창에 놓는 다리에 소요되는 나무 1백 개도 또한 길이 20척에, 끄트머리의 직경이 8, 9치가 되는 것으로써 장산곶에서 찍어 본 고을로부터 배를 세내어 수송하고, 주교사에서 보관해두고 보충하는 등의 일 또한 긴 송판의 사례와 길이로 연결하는 나무의 사례에 의해 시행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이 다리는 뱃머리와 서로 맞닿게 되므로 어로의 넓이도 마땅히 배다리의 길 넓이와 같아야 한다. 그렇다면 넓게 깔 긴 소나무 역시 배다리에 깐 긴 판자와 같아야 한다. 지금 20척으로 마련한 것은 기둥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것 같으나, 다리 위에 잡목으로 공간을 메우는 것은 물자만 낭비할 뿐이고 사용한 뒤에는 자연 없어져버린다. 이것 또한 긴 송판으로 배다리에 잇대어 깔았다가 해마다 그대로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절목에 ‘생칡 30사리를 매년 제철에 경기 지역 산골의 생산되는 곳에서 사들여 저장해두었다가 사용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생칡 1사리라도 여러 고을에 배정하면 온갖 폐단이 생길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소한 물자는 서울에서 사서 쓰고 외방 고을에 폐단을 끼치는 일은 일체 없애야 한다.
절목에 ‘선창머리의 다리에 펴는 싸리바자를 2백 부(部) 정도 주교사에서 사들여 쓰게 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긴 송판을 쓰기로 했으니 바자는 쓸 필요가 없다. 빈가마니 위에 흙을 덮는 것으로 충분하다.
절목에 ‘크고 둥근 고리와 각종 철물은 주교사로부터 필요에 따라 사다가 쓰며 이를 두드려 주조할 때에 드는 숯값과 모든 공임비용 또한 주교사에서 마련하여 쓴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철물은 그리 널리 쓰이지 않고 그 중 큰 고리는 더욱 쓸 데가 없다.
절목에 ‘빈 가마니 5천 장에 대하여 별영(別營)에 2천 장, 경기 연변의 각 고을에 3천 장을 미리 배정해놓았다가 필요할 때 가져다 쓰게 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빈 가마니 3천 장은 그 값이 수십금에 불과하지만 이를 나누어 배정하면 폐단을 끼치게 되므로 서울에서 마련하여 쓰는 것이 마땅하다.
절목에 ‘탕개로 쓸 참나무 3백 개는 주교사에서 값을 주고 사다 쓰게 하되 그것을 저장해두고 보충하는 등의 일은 역시 다른 목재의 실례에 의하여 시행한다. 그리고 다리 위의 빈 곳을 메우고 좌우편에 난간을 만들기 위한 약간 작은 서까래나무는 주교사로부터 필요할 때 사다가 쓰고, 난간 위의 가름대나무는 긴 대나무를 사서 쓰되 다 보관해두게 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난간 위의 가름대나무를 긴 대나무로 하는 것 또한 폐단이 있을 것 같다. 약간 가는 서까래나무 중 조금 긴 것을 쓰는 것이 무방하고 또 오랫동안 사용하는 방법이 된다.
절목에 ‘다리를 만들 때의 역군과 흙을 져나르고 잔디를 떠 나를 군정은 선계(船契) 중에서 특별히 장정을 택하여 쓸 것이며, 인부들의 품값은 2전 5푼 정도로 하고 따로 우두머리를 정하여 그가 거느리고 부역에 참가하게 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이 조항은 가장 잘 생각하지 못한 점이다. 부근에서 잔디를 뜨는 것을 해마다 규례로 삼는다면 잔디를 어떻게 감당해내겠는가. 또 허다한 군정을 모아들일 경우 비록 일일이 감독하고 신칙한다 하더라도 허구한 날 품값을 받는 것만 생각한다면 그 돈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더구나 잔디를 뜨는 곳은 점점 멀어져서 공사는 배나 더디므로 그 폐단을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잔디 입히는 조항에 자세히 언급하였거니와 이 방법을 제외하고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절목에 ‘주교사의 도제조는 세 정승이 으레 겸하고, 제조는 병조 판서, 한성 판윤, 세 군문의 대장이 으레 겸하고, 주관하는 당상관은 준천사(濬川司)를 주관하는 당상관이 겸하여 관리하며, 도청(都廳)도 준천사 도청(濬川司都廳)이 또한 겸하여 관리한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제조는 여러 사람이 필요치 않다. 두세 사람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면 책임을 전담시킬 수 있고 명7월 3일 신사
이조 판서 오재순(吳載純)이 좌의정 채제공(蔡濟恭)과 선대의 혐의가 있었기 때문에 대정(大政)을 당하여 찾아가 문의하지 않았다. 채제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대정에 대해 묻는 일을 할 수 없다면 도정(都政) 또한 행할 수 없습니다. 신은 무색하게도 멸시를 당하였으니 신을 물리치소서."
하니, 상이 오재순을 추고하고 참의 정범조(丁範祖)를 시켜 대신 대정을 묻게 하라고 명하였다.
령이 여러 갈래로 나가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또 생각건대 장차 주교사에 혹 사고가 있으면 3정승이 분주히 지시를 기다리게 되고, 여러 당상관들도 모두 중요한 임무로 겸직까지 하게 되니 조정의 처분도 반드시 모순될 것이다. 그 인원을 줄이고 책임을 전담시키는 것이 실로 온당하다.
절목에 ‘다리를 만드는 공사에 재곡(財穀)을 출납하는 것은 주교사의 주관 당상(主管堂上)이 전적으로 관리하여 거행하고, 예겸 당상(例兼堂上)은 다리 공사를 할 때 윤번으로 왕래하면서 검열하며 감독한다. 또 다리를 만들 때 세 군문의 장교 각 3인과 군사 각 6명을 영리하고 근실한 사람으로 정하여 보낸다. 또 다리를 만들 때 주교사의 주관 당상이 나가볼 적에는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 두 군영의 전배(前排)를 전례대로 정하여 보낸다. 또 주교사에서 인장 하나를 만들어 사용한다. 또 원역(員役)은 준천사 원역(濬川司員役)이 겸임하여 거행하고 주관 당상의 하인 1명과 창고지기 겸 대청지기 1명, 군사 1명을 특별히 배치한다. 더 설치한 원역의 요포(料布)와 겸역(兼役)한 원역에게 더 주는 요식에 관한 일은 준천사의 전례에 의해 참작하여 별도로 마련한다. 또 영남의 별회곡(別會穀)을 돈으로 만드는 조항과 아산(牙山)의 조운군에게 주는 베는 준천사와 양사(兩司)에서 돈으로 만드는 규례에 의하여 균역청(均役廳)에서 받아두었다가 주교사 주관 당상의 공문이 있을 때 필요한 수량을 수시로 출납한다. 아산의 세미 운반에 필요한 쌀은 주교사에서 받아 내려보내되, 각 군영 군향색(軍餉色)의 예에 의하여 도청(都廳)이 전적으로 관리하여 거행한다. 조운선을 만약 개조하거나 뱃바닥을 고칠 일이 있으면 균역청의 가외로 떼주는 예에 의하여 안면도(安眠島) 부근 고을의 미포(米布) 중에서 필요한 양을 바꾸어 준다.’ 하였다.
이에 대해 논변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의 여러 항목은 원래 자질구레한 것으로서 배다리의 일을 토의 결정한 다음 적당히 조치할 수 있다."
7월 4일 임오
직접 도정(都政)을 집행하였다. 【 이조 판서 오재순, 참의 정범조, 병조 판서 이갑(李𡊠)이다.】 이조 판서 오재순이 채제공의 규탄으로 인하여 인책하고 들어가니, 상이 엄히 하교하여 패초(牌招)로 불러 입시하게 하였다. 오재순이 자리에 들자 직접 대정을 집행하겠다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금년 이 대정은 예년의 일반적인 대정과 다르다. 대체로 사람을 벼슬시키는 것이 어찌 덕을 보이는 조건이 될 것인가. 나라에 경사가 나자 더욱 관대하게 죄명을 씻어줄 것을 생각한 것은, 조정 안에 너나할 것 없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을 튼 사람은 사모를 쓰지 않는 사람이 없고, 관직에 나가지 않는 집안이 없고, 녹을 먹지 않는 집이 없어 모두들 화기애애한 속에서 살기를 원해서이다. 그렇게 되면 태평시대가 반드시 상고에만 있었던 것으로 불리워지지 않을 것이니, 그 어찌 아름답지 않으며 성대하지 않겠는가. 인화를 이루면 천지도 감응하는 것이니 나라의 운명을 길이 늘이는 근원이 실로 여기에 있다. 아, 너희 전관(銓官)들은 감히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근래에 죄명을 관대히 씻어주는 혜택이 문관과 무관에게는 많이 미쳤으나 음관(蔭官)에게만은 유독 누락되었다. 그리고 충신·명현의 집 후예나 학문하는 가문의 사람들도 할 일 없이 자기집 방안에서 한탄하며 늙어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는 이미 인재등용의 본의를 상실한 것이며 또한 임금의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정책이 아니다. 이밖의 일반적인 주의(注擬)도 또한 구습을 버리지 못함으로써 문무관과 음관 할 것 없이 각각 당파에 구애되어 오랫동안 추천을 받지 못한 사람 또한 필시 있을 것이니, 이런 사람을 모름지기 먼저 발천시켜야 한다. 두 전조(銓曹)의 장관으로 하여금 심력을 다해 나를 받들고 도와 정사에 임하여 거듭 강조하는 뜻에 부응하게 하라."
하였다.
이복원(李福源)을 동지사 겸 사은 정사(冬至使兼謝恩正使)로, 민태혁(閔台爀)을 부사로, 이지영(李祉永)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오재순을 체직하고 하교하기를,
"연석에서 그가 그처럼 간곡히 진술하였는데도 한결같이 그 마음에 싫어하는 것을 강요한다면 남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더구나 직책은 총재이고 자급은 높은 품계가 아닌가. 빨리 곡진히 그 뜻에 맞추어 이해해주는 것 역시 예절로 부리는 도리에 맞을 것이다."
하고, 체직을 허락하였다.
전교하기를,
"한림 권점에서 규탄을 받은 사람은 지금 모두 처리하였고 그밖의 여러 사람들도 6품에 올리기는 너무 이르다. 권점 추천의 일이 박두하였으니 지금 처리해야만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고, 춘기의 한림 권점은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7월 5일 계미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7월 6일 갑신
원자(元子)의 태봉 길지(胎封吉地)를 보은현(報恩縣) 속리산(俗離山) 아래에 있는 을좌 신향(乙坐辛向)의 자리로 정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이 차자를 올려 병이 있음을 진술하고 전대(專對)의 임무를 해임해 줄 것을 청하자, 허락하였다.
7월 7일 을유
원자궁의 태를 묻을 길일을 정하였다. 예조는 경술년 8월 12일 진시(辰時)에 태를 묻되 같은 달 4일에 태를 옮겨갈 것으로 아뢰었다.
오재순이 이조 판서에서 체직되자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대체할 사람을 추천하게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이전 후보자를 열거하면서도 윤시동(尹蓍東)만 빼놓았다. 우의정 김종수가 그에 불만을 가져 후보자를 추천하려 하지 않으므로 상이, 윤시동은 하교를 기다린 뒤에 전관(銓官)의 후보자를 추천할 것을 명하자, 그제서야 채제공과 김종수가 비로소 지시를 받아들였다. 상이 또 판서급의 결원으로 인해 이조 참의 조윤대(曺允大)를 시켜 대신에게 물어보고 후보자를 더 추천하게 하였다. 이에 채제공은 김희(金憙)와 조정진(趙鼎鎭)을 추천하고, 김종수는 이조 판서 추천문제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혐의를 들어 추천하지 않았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내가 즉위하여 대규모의 처분이 있은 후로부터 위엄과 권세가 하부로 옮겨지는데 이르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였었는데, 지금 우의정의 행동은 뜻밖의 일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아마도 그는 이조 판서의 일로 윤시동을 두둔한 남은 감정이 사라지지 않아서 명을 받드는 전관(銓官)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조 판서의 후보자 추천문제는 이미 다 끝난 일인데, 갑자기 형조 판서를 더 추천하는 일에서 명을 받드는 전관을 구박하여 쫓아버렸다. 아무리 자기 당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에 급급하다 한들 높여야 할 임금의 명령과 조심해야 할 신하의 본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제 있었던 이조 판서 후보자 추천에 대해서는 비록 서로가 잘못하였다고 말하여도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의정부의 고사를 거슬러 상고할 때 동료정승끼리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일을 가지고 임금에게 무례하게 행동한 사람이 과연 있었던가. 만약 윤시동의 이조 판서 추천에 있어 하교를 기다려 뽑아 의망하게 한 것으로 불만을 삼는다면 임금에게 숨김이 없어야 하는 도리로써 죽음을 무릅쓰고 차자를 올려 진술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어찌 감히 이조 판서 후보자 추천문제를 가지고 형조 판서 추천하는 일에 옮겨 쌀쌀하게 화풀이나 하는 사람처럼 한단 말인가.
윤시동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일이 윤시동에 관계될 때에는 조정도 안중에 없었으니, 윤시동의 해독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다. 그도 또한 생각이 있을 것인데 이 말을 들으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는가. 우의정 역시 지금 사람인데 무슨 배짱이 그리 세어 감히 이렇게 행동하는가. 이는 다른 이유가 없다.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모두가 내 자신을 반성할 점으로써 모든 일에 있어 너무 지나치게 두둔해준 탓이다. 모든 일을 기어코 자기 마음대로 한 후에 그만두고자 하여 조금이라도 거슬리거나 어긋나면 온갖 패려한 행동이 나와 스스로 큰 죄과에 빠지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전후 그를 구제해준 것이 모두 몇 번이던가. 앞서의 범죄를 씻어주자마자 뒤에 범한 죄가 더욱 크니 이 어찌 몹시 민망한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 후보자 추천을 우상에게 받지 못한다면 이는 임금도 모르고 신하의 도리도 모르는 것이다. 이 연교(筵敎)를 즉시 참의를 시켜 찾아가 전달하고 추천을 받아오게 하라."
하였다.
홍양호(洪良浩)를 이조 판서로, 김희(金憙)를 발탁하여 형조 판서로, 오재순을 안태사(安胎使)로 삼았다.
우의정 김종수가 차자를 올려 그 어미의 병을 진술하고 체직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7월 8일 병술
함경도 관찰사 이문원(李文源)을 불러 보았으니, 하직 인사를 한 것이다.
7월 10일 무자
장령 민이현(閔彛顯)이 소를 올려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의 나라 경사는 천신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때 그대같이 시골에 숨어있는 선비가 어찌하여 조정의 축하반열에 나오지 않고 사직서를 대신 올리는가.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지금 마치 목마른 사람과도 같다. 그대는 모름지기 속히 몸을 일으켜 나의 간절한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해일(海溢)이 있었다. 교동 수사(喬桐水使) 남헌철(南憲喆)이 치계하기를,
"6월 17일 자시(子時)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고 동남풍이 강하게 불었습니다. 마침 조수가 높은 때라 파도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으며 바닷가의 제방 중 곳곳이 무너지고 터졌습니다. 마을이며 들판에 짠물이 넘쳐 온갖 곡식이 김치를 담근 것처럼 절여졌고 민가 10호가 물에 잠겨 무너지고 깔렸습니다. 송가도(松家島)는 모든 곡식이 완전히 물에 잠겨 이미 남은 희망이 없게 되었고 민가 61호가 침몰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자아이 2명과 여자아이 3명이 익사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각도의 농사가 다행하게도 좀 잘될 가망이 있었는데, 본 수영은 바닷가에 위치한 곳으로서 유독 침몰의 화를 입었으니 백성들의 사정이 극히 측은하다. 수해를 입은 민호로서 신역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공사간의 당년 신역과 조세를 견감해주고, 신역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별도로 혜택을 주어 안정시키라. 소금가마에 대한 균역청(均役廳)의 세도 구분하여 탕감해 주라."
하였다.
경기 관찰사 김사목(金思穆)이 장계하기를,
"교동(喬桐)·부평(富平)·김포(金浦)·인천(仁川)·안산(安山)·통진(通津)·풍덕(豊德)·영종(永宗) 등 8개 고을과 진(鎭)은 이달 17일 조수가 불어났을 때 동풍이 갑자기 불며 파도가 높이 밀려오는 통에 바닷가의 제방이 충격을 받아 파손되지 않은 곳이 없으며, 짠물이 넘쳐서 모든 곡식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교동에서는 무너지고 깔린 민가가 71호이고 부평 석관면(石串面)과 모월관면(毛月串面)은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이어서 무너지고 터진 제방이 모두 51개소나 됩니다. 피해를 입은 밭은 40여 섬지기나 되며, 파괴된 소금가마는 20개 정도됩니다. 김포의 검단면(黔丹面)은 여러 곳에 제방을 쌓았지만 피해를 입은 전토는 모두 58섬지기이며, 민가 3호도 무너지고 깔렸습니다. 그리고 소금가마가 9개 정도 파괴되었습니다. 인천·안산·통진·풍덕·영종 등 5개 고을과 진의 바다를 낀 여러 면에서 제방이 무너지고 터져 토지가 피해를 입은 곳이 형언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번에 일어난 해일은 근래에 없었던 일로서 백성들의 사정을 생각하면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무너지고 깔린 민가의 구제는 곡물과 달풀[草薍]로 구별하여 주어서 안정을 되찾게 하고, 무너진 제방과 침몰된 소금가마는 물이 빠지는 대로 고쳐 쌓도록 특별히 엄하게 신칙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교동 수사의 장계로 인하여 금방 글을 만들어 하교하였는데, 부근 고을의 무너진 소금가마와 교동의 기본조세는 감사와 의논하여 즉시 탕감하여 턱없이 세를 징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돌보아 구제하는 것도 또한 교동의 전례대로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경기 감사의 장계를 보니 다른 도도 추측하여 알 만하다. 더구나 다같이 풍년을 맞고 경사를 함께 즐기는 이때에 유독 바닷가의 백성들만이 혜택을 고루 입지 못하게 된다면 되겠는가. 더구나 경기에 이미 시행한 은전을 다른 도라고 논하지 않는다면 또한 어찌 똑같이 보살피는 은전이라 이르겠는가. 해변고을로서 바닷물이 넘친 곳의 민가에 대해서는 당년의 신역을 면제하고 받아간 환자곡이 있을 경우에는 일체 면제해주며 균역청의 세액도 특별히 구분하여 견감해주는 것을 경기의 예에 따라 시행하라. 아울러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자세히 살펴 성의껏 돌보아주게 하고, 묘당에서는 각도에 공문을 띄워 물어보고 거듭 엄한 신칙을 가하여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미치게 하라."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가 장계하기를,
"해변고을에 조수가 넘쳐 가산(嘉山)·박천(博川)·용천(龍川)·삼화(三和)·의주(義州)·선천(宣川) 등 7개 고을의 침수된 민가가 1천 2백 40호에 이르고 익사자도 또한 83인이나 되었습니다. 구휼미는 전례에 따라 내어주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장계를 보니 그중 의주부 해변백성들의 사정이 더욱 딱하다. 수해를 입은 호수가 거의 7백에 가깝고 죽은 사람도 70명이 넘는다고 한다. 기근과 역질을 거친 끝에 또 침수되는 환란을 입었으니, 의주의 백성들을 생각할 때 어찌 편히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신역을 견감하는 등의 일은 감사가 이미 조치하였으나, 그밖의 구제하는 일에 대해서도 의당 특례가 있어야 하겠다. 환자곡과 균역청의 조세를 감면해주는 것은 아침 연석에서 하교한 대로 반드시 지시하도록 해야겠다. 거처를 만들어 주고 안정시키는 것은 비록 고을 수령이 유념하여 주선해줄 일이긴 하나 저 탕실된 살림살이를 어떻게 모아들일 수 있겠는가. 본부의 해변에 사는 백성의 신역과 관에 바치는 조세는 명년까지 탕감해주고 그 시행한 규모를 장계로 보고하라. 죽은 사람은 대부분 호적이 없는 누락된 백성이라고는 하나 사람의 목숨은 다 마찬가지이니 더욱 측은하다. 이 또한 의주부 윤으로 하여금 침수당한 지방에 특별히 하나의 제단을 설치하고 제문과 제주(祭洒)를 장만하여 산 사람의 심정과 죽은 자의 원통함을 위로하게 하라. 그 다음 가산(嘉山)의 신역을 견감하는 것은 의주부의 전례에 따르고, 또 그 다음 두어 고을은 아침에 내린 전교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충청도 관찰사 정존중(鄭存中)이 장계하였다.
"지난달 16, 7일에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서 바닷물이 넘쳐난 것이 평택(平澤)·직산(稷山)·서산(瑞山)·태안(泰安) 등 4개 고을은 비교적 많았고, 천안(天安)·홍주(洪州)·해미(海美)·결성(結城)·신창(新昌)·면천(沔川)·보령(保寧)·비인(庇仁)·당진(唐津)·남포(藍浦) 등 10개 고을은 비교적 적었습니다. 신은 삼가 전교한 뜻을 공문으로 알린 후 피해가 극심한 민호에 대해서는 당년 신역과 환자곡을 감면해주고 균역청의 납세도 탕감하였으며, 돌보아 구제하면서 안정시키는 데 관심을 두어 살피며 신칙하고 있습니다."
흥은 부위(興恩副尉) 정재화(鄭在和)의 상사에 유사가 예장(禮葬)을 청하자, 전교하기를,
"경기 고을의 민폐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박 충희(朴忠僖)039) 처럼 큰 공로를 세운 자에 대해서도 그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어주고 겸하여 고을백성들의 폐단을 생각하여 오히려 경사(京司)를 시켜 대신 지급하게 하였다. 더구나 홍은 부위의 집 일에 어찌 일반적인 격식을 따르겠는가. 한결같이 박 충희의 집에 시행한 전례에 따라 다만 지방관을 시켜 마련하게 하고, 경사(京司)에서 수송하는 물자도 박 충희의 집에 비하여 3분의 1을 줄이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익(金熤)이 죽었다. 김익의 자는 광중(光仲)이니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5대손이다. 영종 계미년에 문과에 합격하였고 이조와 병조의 벼슬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청렴하고 충후하며 가정에서 행실이 독실하여 그 형을 섬기기를 엄한 아비처럼 하여 벼슬이 높아진 후에도 오히려 몸소 형님의 방 아궁이에 불을 넣어 주었다. 정승으로 있을 때 세상일이 다난한 것을 보고 항상 자신을 삼가며 내세우지 않았으나 경연에 나아가 의견을 상주할 때에는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겉으로 나타났다. 이리하여 상이 그를 소중히 여기었고 선비들 또한 그를 장하게 여겨 이복원(李福源)과 함께 선비출신의 정승으로 불렀는데, 이때에 와서 죽은 것이다. 김익이 6월에 죽었는데 유사가 경축이 있을 때와 상치되었다 하여 감히 전례대로 서거의 단자를 올리지 못하였다. 전교하기를,
"지금 내각의 공무로 인하여 직제학 김재찬(金載瓚)의 집에 부의한 사실을 알았다. 그저 슬프고 애석하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근일에 직제학이 들어오지 않기에 그의 숙부의 일 때문이라고만 생각하였는데 어찌 대신이 영영 갈 줄이야 생각인들 하였겠는가. 이제는 그만이다. 다시 살릴 수 없기에 반나절 동안이나 말없이 실의에 빠져 있었다. 대신은 어진 재상이었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또 그와 같은 처신으로 임금을 섬겼다. 앞서 전관(銓官)을 사임한 일은 옛사람이 추밀원(樞密院) 벼슬을 사임한 것과 진배없으나 대신에게 있어서는 소소한 행실에 불과하다. 조정에서 대우한 것도 실로 허술하지 않았는데 어느덧 저승사람이 되고보니 애석할 따름이다. 연신(筵臣)의 말에 의하면 대신의 유언이라 하면서 시호도 청하지 말고 예장(禮葬)도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 충정(趙忠定)040) 과 박 충희(朴忠僖)의 집도 모두 그들의 미덕을 이루어주었으니, 이번에도 어찌 그의 뜻을 억지로 어기겠는가. 해사로 하여금 두 집의 전례를 참고하여 장례비용이나 넉넉히 보내게 하라. 그러나 시호를 내리는 일에 관해서야 어찌 이 대신에게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일에 시호를 의논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다시 생각하니 그와 같이 기록할 만한 선행에 대하여 그 덕망을 적은 글이 없다는 것은 매우 결함이 되는 일이다.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속히 행장을 짓게 하여 그 행장이 도착하는 대로 즉시 시호를 의논할 것이며, 시호를 내리는 날에는 의당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되, 제문은 내가 직접 짓겠다. 녹봉을 그대로 지급하는 것은 다른 예에 의해 거행하라. 대신의 서거 단자를 해조에서 여태껏 계문하지 않은 일은 전에 있지 않았던 일이니 매우 놀랍다. 만약 오늘 위에서 제시하지 않았더라면 어느 때 알게 되었을지 모를 뻔하였다. 요즈음 부위(副尉)의 집도 구애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대신의 집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해당 조의 당상관에게 모두 파직하는 규정을 시행하라."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가 장계하기를,
"사면조치 안에 들어 있는 정즙(廷楫)·건일(健一)·범승(範升) 등 3명의 역적 죄수에 대해서는 신이 우매하고 천박한 소견을 가지고 있기에 교명이 내렸음에도 감히 받들어 거행하지 못하고 따로 소를 올려 처분해주기를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들 중 1명에 대해서야 어찌 글로 번거롭게 표현하고 싶겠는가. 그러나 나머지 2명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중 한 사람은 그와 동등한 죄를 짓고 제주에 귀양갔던 자가 풀려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또 나머지 한 사람은 그와 동등한 죄를 짓고도 법 밖의 일이라 하여 이미 풀려난 사람이 많다. 또 그들의 동생들로 말하더라도 복일(復一)과 함일(咸一)이 차례로 용서를 받았는데 유독 건일에게만 박절하게 하는 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이 장계를 도로 내려보내고 오직 그 집행한 결과만을 장계로 알리게 하라. 만일 지체하면 해당 감사를 엄히 처벌할 것이다."
하였다.
7월 11일 기축
대간청에 나온 대신(臺臣)을 불러 보았다. 집의 성종인(成種仁), 사간 이태형(李太亨)이 앞서 서계한 것을 보고하니, 정즙의 문제에 이르러 비답하기를,
"성급히 따르는 혐의는 작은 것이고 관대히 용서하는 의미는 중한 것이니, 이런 문제에 어찌 일정한 규례만을 고집하겠는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이재간(李在簡)의 일, 영진(寧鎭)의 일, 승렬(承烈)의 일과 신기현(申驥顯)·송익로(宋翼魯)·귀현(龜顯)·이세(二歲) 등 7명의 죄인에 대한 일과 항선(恒善)의 족속인 시겸(時謙) 형제의 일과 박종집(朴宗集)의 일을 아뢰자, 모두 아뢴 대로 따랐다. 사헌부는 이노춘(李魯春)과 오대익(吳大益)에 대한 계(啓)를 정지하고, 사간원은 윤상동(尹尙東)에 대한 계를 정지하였다.
도총관(都摠管) 김한기(金漢耆)가 상소하기를,
"신이 문을 닫은 채 들어앉아 피눈물을 흘리면서 허물을 자책한 지 지금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경사가 난 때를 당하여 그 은택이 널리 퍼져서 뽑아 등용하는 성은이 또한 이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아, 신의 숙질(叔姪)이 말할 수 없는 죄를 입은 것은 인신(人臣)이 있은 이후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천고의 대흉이 집중되고 천하의 극악이 모여 이 한몸에 밀려오므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 성상의 명철하심이 아니었다면 죽어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신의 집안에서 당한 죄명을 논한다면 모두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이지만 일의 실상을 말한다면 실로 애매해서 밝히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오직 우리 성명(聖明)께서 어두운 곳도 살피지 않는 데가 없어 갑진년 가을에 전교를 내리기까지 함으로써 그 높은 성은에 감축(感祝)하여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공론이 격렬함으로 인하여 성교를 선포할 수 없었으니 온 세상이 무엇을 통해 그 이면의 실상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신이 안타까운 마음속을 털어내어 천지와 부모같은 전하의 앞에 통쾌하게 한번 진술할 줄을 모른 것은 아니나, 두려워 조심하면서 꾹 참아온 것은 또한 때를 기다린 것이었습니다. 지금 신은 병들고 늙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루아침에 훌쩍 죽어버리면 영원히 눈을 감지 못할 한을 품게 될까 몹시 걱정되기에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자초지종을 대략 진술하려 하니, 전하께서는 가엾게 여기어 굽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아, 세상에서 신의 집안에 대하여 죄를 성토한 것은 바로 네 가지 큰 죄안이었습니다. 신묘년의 일은 신이 지난 겨울에 올린 한 편의 상소에서 이미 그 대략을 진술하였으나, 비답을 받지 못한 채 끝내 되돌려 받았으므로 구구한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번거롭고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이에 다시 그 대략을 진술합니다. 신은 그때 갑자기 호위하라는 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몹시 놀랍고 또 문안하기에 바빠서 황급히 달려가다가 문지기에게 저지를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표신(標信)이 나온 뒤에 비로소 들어가게 되었는데, 정후겸(鄭厚謙)이 먼저 문안을 드리고 물러갔습니다. 신은 다시 어영 대장에 특별히 제수하고 훈련 도감의 일을 겸하여 살피게 한다는 명을 받고 즉시 진영으로 나왔다가 이튿날 전교를 받고서야 비로소 입시한 사실은 모든 사람이 함께 본 것이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죄로 말하면 있기는 합니다. 신이 진영에 있을 때 신의 조카가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삼가 전하의 하교를 보니 그는 필시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고 사건이 애매하여 그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처분하는 지경에 이르러 하문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모름지기 먼저 호위할 명목이 없다는 것을 진술하고 이어 평소에 품고 있던 마음을 털어놓아 이미 벌어진 일을 명목이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평소에 품고 있던 마음이란 곧 신의 조카가 임진년 상소 중에 열거하여 논한 일로 자전(慈殿)께서 신에게 하교하여 진술하게 한 말인데 역시 일반적인 의리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적 후겸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누설될까 염려되어 할 수 없이 침묵을 지키고 나왔으니, 이것이 곧 신이 선왕을 배신하고 자성(慈聖)을 배신한 죄인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을 죄준다면 신이 어찌 감히 마다하겠습니까.
신사년의 일에 대해서는 성명께서 남김없이 통촉하신 것이며, 갑진년에 죄를 벗겨준 데 대한 하교는 기록에 자세히 실려있으나 다만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사제문(賜祭文)에는 또 ‘지금 여기에 제시하는 것은 역시 그 사실이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히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고 하교하셨으니, 오직 이 은혜로운 말씀이 분명하게 밝혀준 것입니다. 신이 비록 스스로 해명한들 어떻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온 집안이 감읍하여 그 감격이 유명(幽明)에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이처럼 해명해준 성상의 뜻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것으로 말썽거리를 삼은 것은 오직 사건이 궁중에 관련되어 그 자취를 밝혀내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헛된 그림자를 빙자하여 말을 날조하여 사람을 헤아릴 수 없는 구렁에 몰아넣은 것이니, 신이 어찌 성상께서 굽어 통촉하신다 하여 태연히 마음놓고 한마디의 말도 진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때에 신의 형은 거상 중에 있었는데, 마침 궁중에서 내려보낸 어찰(御札)의 회답을 계기로 조신들의 권력 남용을 대략 진술함으로써 성명께서 통찰하여 사람을 쓰거나 버리는 일을 잘 살피시길 바랐을 뿐이었습니다. 사실이 이에 불과하니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윤숙(尹塾)·심낙수(沈樂洙) 등이 계속 성토한 문제에 관해서는 그 말이 조리가 없어 사실 여러 말로 변명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윤숙의 상소에 이르기를, ‘저 두 역적은 귀주(龜柱)와 결탁하고 계희(啓禧)와 일체가 되어 남몰래 재앙의 조짐을 만들어내고 흉론을 꾸며내어 우리 성상을 핍박함으로써 하마터면 세자의 자리에 편히 앉아 있지 못할 뻔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아, 그 말이 어쩌면 그처럼 종잡을 수 없고 음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단서를 헤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여기에서도 한마디의 말로 해명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세자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역적 휘만(翬晩)이 이미 죽었으니, 그가 이른바 신의 조카와 결탁하여 성상을 핍박하여 세자의 자리를 불안하게 하였다는 것이 과연 무슨 말입니까.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도 그가 남을 모함하기에 급급하여 날조를 일삼다가 그 사실과 말의 형세가 자연 허망한 것으로 되는 것을 자신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휘만이 권세를 잡았을 때 신의 조카는 겨우 약관(弱冠)의 나이로 일개 어린아이였습니다. 가령 참으로 흉모를 꾸며 핍박을 모의한 것이 그가 이른 말과 같다면, 이것이 과연 어떠한 일인데 나이 어린 일개 선비와 결탁하여 일을 꾸몄겠습니까. 사정으로 참작하나 이치로 따져볼 때 과연 근사하기나 합니까. 더구나 신의 집안이 휘만과는 그 취향과 기미가 본래부터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 만큼 이처럼 무고하고 날조하는 것은 다만 주위 사람들의 웃음거리를 만들 뿐이니, 그들의 마음인들 무엇이 그리 시원하겠습니까.
그들의 상소에 또 말하기를 ‘회(晦)와 귀주(龜柱)와 더불어 남몰래 논의한 것이 무슨 말이며 경영한 것은 무슨 일이었습니까. 그 흉측한 말과 반역적인 행동을 신은 감히 일일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많은 말로 변명할 것이 못됩니다. 과연 신의 조카에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 남몰래 논의한 것이 무슨 말이며 경영한 것이 무슨 일이라는 것을 무엇이 두려워 솔직하게 지적하여 진술하지 못하고 그저 우물쭈물하면서 두리뭉술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충의에 격분하여 목숨을 바치면서 역적을 징토하는 자가 실로 이와 같습니까.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마음이 흉도에게 충성을 바치기에 급급하여 반드시 건덕(建德)을 위해 원수를 갚고자 했기 때문에 온갖 수단을 다 부려 사람을 강제로 위협하여 죄에 몰아넣었지만 사실의 근거가 없어 꼬투리를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야 그들도 결국 어찌할 수 없었으니, 그 말은 자연 두리뭉술하게 얼버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도 그 진상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심낙수(沈樂洙)의 상소는 그 논조가 오직 윤숙(尹塾)에게서 물려받은 수법으로 신은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들어갈수록 심각하고 그 내용도 너무나 흉측합니다. 이것이 어떠한 말인데 감히 터무니없이 지어내 함부로 전하의 앞에 진술하기를 그처럼 기탄없이 한단 말입니까. 기타 허다한 논의도 대개 모두 난잡하고 혼동되어 전혀 두서가 없습니다. 여러 흉물을 끌어모아다가 한덩어리를 만들어놓고 한 사람을 끌어내어 여러 역적의 편에 붙였으니, 제딴에 교묘히 한다고 한 것은 결국 그들의 속마음만 드러내기에 알맞을 뿐입니다. 슬프기만 할 뿐 족히 변명할 일도 못됩니다.
조성(趙峸)의 일에 관해서는 그가 신의 조카의 막료로 있었는데 곧 동쪽 변방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서유대(徐有大)와 윤중연(尹重淵)의 계청으로 그를 데리고 가게 된 것입니다. 윤중연은 비록 죽었으나 서유대는 아직 생존하였으니, 막하에 있었던가의 여부는 일단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윤구연(尹九淵)의 죽음은 조성(趙峸)의 독수(毒手)에서 나왔기 때문에 온 세상이 모두 통분해 하였습니다. 신의 조카도 가장 그를 미워하여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드러내놓고 여지없이 공격하였으며, 그가 혹 집으로 찾아와 만나기를 청하여도 기어코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도 신의 형과 함께 대장으로 있은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그를 장수의 후보자로는 한번도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원망하여 말하기를 ‘나의 벼슬길이 막힌 것은 이현(泥峴) 때문이다.’고 하였으니, 이현은 곧 신들이 살고 있는 동네 이름입니다. 이런 사실은 조정에 있는 문무관들이 또한 많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본다면 가령 신의 조카가 참으로 역적 종친과 혼사를 할 생각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필이면 세상 사람들이 다 버리고 몹시 미움을 받는 자를 골라서 그의 편이 되겠습니까. 또 신의 조카가 비록 혼사를 하고싶어도 그 사세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자성(慈聖)의 후하신 인품이더라도 그를 덮어주고 용서하려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반마디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 이런 말이 나온 것은 그 원인이 있습니다. 본래부터 흉측한 무리들은 흉악한 말을 지어내 온 세상에 퍼뜨리고 계속하여 또 혼사를 한다는 말을 만들어 자신들의 말을 뒷받침하였습니다. 심지어 심낙수(沈樂洙)의 상소문 가운데는 역적 찬(禶)을 귀주(龜柱)가 옹립하였고 계능(啓能)이 그 모의를 주장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어맥의 귀추는 분명하여 가리울 수 없습니다. 아,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이 무리들의 거리낌없는 그 패역한 무고와 함부로 넘보는 행위가 어쩌면 이처럼 극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더구나 신의 조카는 역적 계능과는 본래 전혀 상관이 없는 처지로서 결국 추대한 역적은 일어날 곳에서 일어났고 역적 계능이 실로 그 모의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억지로 신의 조카를 끌어다가 역적 계능에게 붙이는 것이야말로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허튼 말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그 죄에서 벗어나고 남에게 그 화를 전가시키려는 계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음흉한 심보와 태도는 정말로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습니다.
홍양해(洪量海)·심혁(沈𨩌)의 일에 관해서는, 그는 본래 글공부한 사람으로 자처하는 선비였는데 당시 충청도 사부치고 그 누구인들 신의 집에 드나들지 않았겠습니까. 신의 집이 전에 충청도에 있었으므로 신의 조카가 어렸을 때 또한 몇 차례 상면했을 뿐이고 그후 신의 가족이 서울로 옮겨 살게 되면서 소식조차 없어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조카가 섬에 귀양갔을 때에는 통제가 너무도 엄하여 집안의 편지도 서로 전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호해(湖海)의 천여리 길이겠습니까. 비록 남몰래 흉모를 연락하기 위해 긴밀히 서로 접촉하고 싶더라도 형편상 불가하였습니다. 또 신의 조카가 진정으로 음모를 내통한 사실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 당시 신문한 문건이 의금부에 그대로 있으니 조사해보면 당장 밝혀질 것입니다.
신의 조카가 임진년에 올린 한장의 상소문은 실로 우직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나, 타고난 성품이 고지식하고 악한 사람을 지나치게 미워함으로써 한쪽 사람들의 비위를 많이 거슬렸고 원수진 사람들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병신년에 귀양가게 된 후부터는 감정을 품은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기회를 놓칠세라 돌을 던졌으니 이는 반드시 닥쳐올 형세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모든 죄악이 한곳으로 모이고 독한 칼날과 뭇 화살이 사면에서 이르게 되었습니다. 10여년간 백성들에 대한 걱정과 나라의 계책은 한쪽에 던져버린 채, 그저 신의 조카를 죽이고 신의 가문을 멸망시키는 것을 큰 사업으로 간주하여 날이 갈수록 더 심하게 모함하여 역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간에 은혜를 입었거나 감정을 산 일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성상처럼 명철하신 분이라 해도 어떻게 그늘진 곳의 억울한 사정을 다 살필 수 있겠습니까.
신과 신의 조카는 그 범죄가 똑같은 만큼 생사와 화복도 의당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의 조카는 원한을 품은 채 옥에서 말라 죽었고 신만이 홀로 미련하게도 아직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병세를 보면 생사의 갈림길이 종이 한장 사이에 있습니다. 만약 한가닥의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끝내 한번 머리를 쳐들고 폭로하지 않는다면 살아서만 불충한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죽어서도 불충한 귀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돌아가 신의 조카를 만나겠습니까. 신의 심정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또한 궁하고도 슬픕니다.
아, 온 세상이 기어코 모함하려 할 때 전하께서는 기어코 보전해주려 하였으며, 온 세상이 기어코 죽이려 할 때 전하께서는 기어코 죄를 씻어주려고 하였습니다. 이미 신의 아우에게 서쪽 고을을 제수하였고 또 미천한 신을 도총부로 발탁하였으니, 그 은덕은 지극히 크고도 두텁습니다. 두 손을 모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려 생각해도 길이 없으니, 본분과 의리로 헤아릴 때 어찌 감히 일각인들 망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래의 사정이 이상에서 진술한 바와 같고 이 미천한 몸의 병이 생사를 분별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사정과 병으로 어떻게 조금이라도 받아들일 가망이 있겠습니까. 빨리 파면시켜주기를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연전에 죄명을 씻어주었는데 경의 형제는 무엇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가. 신묘년의 일에 대해서는 작년에 내린 전교에서 이미 자세히 말하였고, 신사년의 일에 대해서는 갑자년의 전교가 기주(記注)와 사제문(賜祭文)에 명백히 실려 있다. 대개 이런 하교를 조정 신하들에게 알리는 것은 자전(慈殿)을 위하여 풀어드리려는 것이니, 어찌 경의 상소내용을 기다리겠는가. 조성(趙峸)의 일에 대해서도 갑진년에 내린 전교 중에 상세히 실려있거니와 이는 더욱 많은 해명이 필요없다. 덧붙여 진술한 무술년의 사건도 원래 관청의 문적으로써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 경의 집안에서 대신 인책할 일이 아니다. 이번에 제수한 것은 자전에게 문안드리는 일이 소중해서이며, 또 갑진년 이후는 역시 자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안드리는 일은 직명의 유무에 달려있지 않으며 신병 또한 억지로 출사하기 어렵다 하니, 새로 제수한 도총관의 직임을 체직한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갑진년의 전교는 중외에만 반포하고 조지(朝紙)에는 내지 않았으니, 그 집안 사람이 전교의 내용을 가지고 한번 사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원소(原疏)에 대해 비록 이미 비답은 내렸으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가 옛날 일에 속하는 것으로써 사그라진 재와 다름이 없다. 모든 사건을 뒤에 와서 새삼 제기하는 것이 될법이나 한 말인가. 더구나 본 사건 중에는 또한 금령(禁令)에 관한 부분도 있지 않은가. 이후부터 병신년 이전의 일을 다시 상소문에 언급한 것은 받아들이지 말뿐만 아니라 계판(啓版)에 쓰기 전에 즉시 태워버리고 슬며시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온 나라가 함께 경하하고 만백성이 함께 즐거워하나 자궁(慈宮)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안을 드려 풀어드리지 못하는 점이 있다면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덕망이 높으신 자궁은 사친(私親)이란 생각을 마음에 두지는 않지만 온갖 정성을 다해야 하는 나의 도리로써는 이때에 어찌 범연히 지나칠 수 있겠는가. 조신들도 이 말을 들을 때 어찌 자신의 일처럼 인정하고 감동하지 않겠는가. 오늘의 하교는 첫째는 위안을 드리려는 뜻에서 나왔고, 둘째는 즐겁게 해드리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앞으로 철따라 문안드리는 것은 궁중의 옛 관례를 수행하는 일이니 그만둘 수 없다. 대개 지난날의 일은 곧 일대변환으로써 참으로 이른바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지나간 옛일이 되었다. 더구나 문안드리는 절차는 관직에 관계가 없지 않은가. 두 집안에서도 이 뜻을 알도록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한번 보고싶어하는 자애로운 마음을 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자궁의 하교에는 비록 만나볼 것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나로서야 어찌 위로해 드릴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일전에 군직(軍職)에 붙일 때 전 승지 홍낙신(洪樂信)의 형제에 대하여 한 사람만 붙이고 한 사람은 그만두었는데 매우 잘못된 일이 아닌가. 그리고 아직 벼슬하지 못한 자가 한 사람 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을 군직에 붙여 문안드리는 길을 열어주는 일에 대하여 그 누가 부당하다 하겠는가. 오늘의 이 하교는 생각해온 지가 오래되었으니 해조로 하여금 알아서 하게 하라."
하였다.
을미년 과거에서 삭과(削科)되었던 자 12명을 복과(復科)하고, 전교하기를,
"연전에 이에 대한 하교에서도 이미 대략 말하였다. 이 일을 가지고 다른 의도로 이용한다면 실로 무엇인가를 노리고 있는 일에 가깝다 하겠지만, 이를 떠나서야 무엇을 구애하고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뿐만 아니라 지금 관대히 베푸는 은택이 널리 미쳐 만물이 모두 소원을 이루고 있으니, 항상 목구멍에 걸린듯이 꺼림칙한 일에 대하여 비로소 한번 유시한다. 을미년 과거의 합격자에 대하여 그 방에서 삭제할 사람과 회복할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너무도 구차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연전에 내린 전교에도 또한 이를 말하였다. 애당초 구별한 것이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대신들과 대간의 의견을 거치기는 하였으나, 대신과 대간들 자신이 이미 몸소 시권(試券)의 성적을 매길 때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이른바 구별하였다는 것은 곧 하나의 어림짐작에 불과하였다. 이미 복과(復科)된 8명은 안정된 지 오래지만 복과되지 못한 12명은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뼈에 사무치는 유감과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원한을 품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그들의 사정에 속한 일이라지만 이미 잘 알고 있는 몇 사람을 통하여 여타의 사람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홍시부(洪時溥)나 이심연(李心淵) 같이 시권에 성적을 매긴 자에게는 죄를 주지 않고 죄를 유독 응시자들에게만 지웠으니, 이밖에도 이와 같이 불공정한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면 이른바 구별하였다는 것이 도리어 구별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복과된 자는 무슨 공적이 있어서 복과되었으며, 삭과된 자는 무슨 흠이 있어서 삭과되었는가. 복과되지 못한 12명을 이미 복과된 8명의 관례에 의하여 시행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사체를 바로잡고 한편으로는 형정(刑政)을 바로잡아야겠다. 대개 의리란 것은 천하의 공유물이니, 오늘날의 입을 가진 자와 후세의 눈을 가진 자가 모두 이론을 제기하거나 소견을 달리하는 일이 없어야만 비로소 공유물이라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삭과에 대한 한가지 일은 《명의록(明義錄)》을 편찬할 때 올리지 말라고 특별히 명한 것이니, 이제까지 조치를 옳게 취하고 의리가 펴지지 않은 적은 없었다. 이번에 이 12명을 다같이 복과한 것은 그 의미가 심장하다. 조신들이야 어찌 반대 의견이 있겠는가. 처분의 본의가 공공적인 의의에 있었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었다.
"을미년 과거에 삭과되고 복과되지 못하였던 12명은 이미 복과된 8명의 사례에 따라 복과하는 문제에 있어서 방목은 성균관을 시켜 수정하여 들이게 하고 시권을 모아들여 붉은 표지로 고쳐 붙이는 동시에 홍패(紅牌)를 만들어 주는 등의 일을 관례대로 거행해야겠으나 복일(復一)에 대해서는 극악한 역적의 자식이고 박종집(朴宗集)은 현재 대간의 대계(臺啓)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똑같이 거행할 수 없습니다."
김희(金憙)를 예조 판서로, 오재순(吳載純)을 판의금부사로, 조정진(趙鼎鎭)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흥양현(興陽縣) 삼도(三島)에 딴 나라배가 표류하여 왔다. 배의 길이는 60척이고 넓이는 16척 5치이며 높이는 6척인데, 소나무를 썼고, 쇠못을 쳤다. 돛대는 2개인데 앞의 것은 43척이고 뒤의 것은 62척으로써 전나무를 사용하였다. 배 안에는 쌀·조·콩·팥·보리·밀·목면·파초를 실었고, 배 안의 사람은 7명인데 충영랑부(沖永良部) 홍희의부촌(鴻喜義富村)의 이명천(伊名川)·전평(前平)·희자부(喜者富)와 묘포촌(畒布村)의 신옥(神屋), 국두촌(國頭村)의 고보(高甫), 출화촌(出花村)의 중정(仲正)·선보(先甫)였다.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이명천이란 자가 약간 문자를 알아 글로 쓰기를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의 사람으로 장사차 본국 산원(山原) 땅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14일만에 이 지방에 와 닿았다." 하였다. 그 사람들은 속에 홑저고리와 홑바지를 입었는데 바지는 면포로 만들었고 저고리는 모시도 아니고 갈포도 아니었다. 그 이름을 물으니 간질사(干叱絲)라 하였고, 그것을 채취하고 다루며 직조하는 방법을 물으니 그들은 손짓으로 형용하면서 대답하였다. 대개 나무껍질을 가지고 가늘게 짠 것인데 마치 우리 나라의 누런 모시와 유사하였다. 곱기는 그보다 낫고 질기기는 그만 못하였다. 겉에는 홑두루마기를 입었는데 그 길이는 정강이에 닿았고, 소매는 넓으면서 짧으며, 옷깃은 둥글면서 좁았다. 푸른색과 흰색의 간질사를 섞어서 짰으며 띠 역시 그러하였다. 혹은 순청색과 순흑색의 띠를 두겹으로 두르기도 하였다.
모습은 우리 나라 사람과 비슷한데 머리털은 복판을 깎고 둘레에만 약간 남겨 그것을 거두어 한 곳에 쪽진 것이 마치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상투와 같았다. 머리털에 기름을 발라 광택이 나고, 비녀가 있는데 은으로 만들기도 하고 주석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머리에 쓰는 갓은 작고 풀로 짜서 만들었는데 북관(北關) 사람들이 쓰는 승립(繩笠)과 같았다. 발에는 버선을 신지 않고 신만 한켤레 신었는데 풀로 만들었고 밑창을 짜기는 했으나 좌우의 운두는 없으며 앞에 고리가 달려 두 발가락이 겨우 들어가게 되어 있다. 갓과 신은 항상 쓰거나 신지는 않았다. 관장(官長)을 보면 일어서서 양손을 마주잡고 무수히 머리를 조아렸으며, 관장이 묻는 말이 있으면 절을 하고 평상시에도 반드시 꿇어앉았다.
밥을 지어 먹을 때에는 종지로 솥의 밥을 떠서 먹는데 혹은 두 종지에 그치기도 하고 혹은 세 종지에 그치기도 하였다. 반찬은 호박과 된장을 먹었으며 닭고기·물고기·기름·초를 줬더니 역시 잘 먹었다. 배 안에는 몇 권의 책자가 있었는데 모두 파손되고 더렵혀져서 알아볼 수 없었으며 혹은 잘고 가는 초서로 갈기기도 하였다. 그 중에 판독할 수 있는 것은 《대판회도(大坡繪圖)》·《대일본연대기(大日本年代記)》였으며, 돈은 2천 4백 74잎이 있는데 ‘관영통보(寬永通寶)’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대개 왜국의 돈인데 그들은 유구국의 돈이라고 하였다. 일본 글자를 써보이니 머리를 흔들면서 대답하지 못하였고 청나라 글자를 써보여도 손을 내저었다. 어느 길로 가려고 하느냐고 물으니 바닷길로 가겠다고 하였다. 《윤도(輪圖)》를 주자 그들 7명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손으로 동남쪽을 가리키며 ‘배를 타고 묘·진·사방으로 가겠다.[船上歸卯辰巳]’는 글자를 썼다.
전라도 관찰사 윤시동(尹蓍東)이 계문하기를,
"그 사람들이 머리를 쪽진 것이나 의복제도가 대체로 왜인과 비슷하고 돈도 왜국의 돈이니 혹시 유구국이 왜국에 복속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많이 주고 그들의 자원에 따라 보내주라고 명하였다.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 이건수(李健秀)가 장계를 올려 지방관이 그들 실태를 잘못 조사하였다고 논박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이 통하지 않아 글로 써서 수작하였는데 이것을 도리어 죄로 삼는가. 으레 표류인이 이르기만 하면 지방관의 죄를 들추어내는데, 이것이 곧 병사와 수사의 버릇으로 되었다. 이후부터는 이렇게 하지 말고 되도록이면 온당하게 처리하라."
하였다.
7월 12일 경인
호조 판서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성당(聖堂)의 조운창고에 대한 일로 본도에 여러 번 물어보기도 하였고 묘당의 의견을 여러 번 들어보기도 하였으나 아직까지 결정나지 않았는데, 이 창고의 고질적인 폐단을 결코 그대로 끌고갈 수는 없습니다. 곡물을 다른 물건으로 바꾸고 여러 방법으로 토색질을 하고 상납할 때 축이 나서 조운군들을 지탱하기 어렵게 하고 조운행정이 점점 무너지게 하는 것은 오로지 조세를 바치는 일과 운반하는 일을 나누어 맡아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를 바로잡는 방도는 성당을 분할하여 함열현(咸悅縣)으로 하여금 조세바치는 일과 운반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든가, 아니면 군산(群山)에다 합설하고 해당 진의 첨사로 하여금 조세받는 일과 운반하는 일을 병행하도록 하는 이 두 가지에 불과한데, 함열에 분속시켜 전담 관할하게 하는 것이 사리에 타당합니다.
그러나 해당 감사의 장계를 보고 또 군산 첨사의 말에 의하면 ‘성당 창고의 위치가 포구의 물이 막다른 곳에 있어 토사가 밀려와 쌓이고 또 군산과의 거리가 1백리나 되는 데다가 중간에는 얕은 여울이 많아 반드시 조수가 불어야만 배가 다닐 수 있기 때문에 짐을 실은 후에도 걸핏하면 수십 일이 걸려야 출발하게 되니 이것이 첫째 폐단이며, 배를 대는 곳은 민물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짠물이 고여있지 않아 선척의 부식이 몹시 심하므로 언제나 연한이 차기 전에 못쓰게 되어 자주 수리하게 될 뿐 아니라 조운재료를 이어대지 못하게 되고, 연한을 채우지 못한 배에 대해서는 으레 사용하지 못한 값을 변상시키는 통에 조운하는 군사 또한 지탱하기 어려우니 이것이 둘째 폐단이며, 해당 현감이 배를 타는 일에 대하여 의견이 같지 않아 즉시 결정하지 못하게 되니 이것이 셋째 폐단입니다.
이 세 가지는 현재의 큰 폐단이 될 뿐 아니라 사토가 점점 쌓이고 포구가 메워지게 되면 오래지 않아 또 용안(龍安)의 덕성(德成) 창고를 옮겨 설치한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미 이와 같은 우려가 있다면 차라리 일찌감치 옮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군산에다 합쳐 설치하면 짐을 싣자마자 즉시 출발하게 되어 포구에서 조수를 기다리는 폐단이 없는 것이 첫째 이익이고, 배가 바닷물에 머물러 부식기간을 좀 늦추게 되므로 혹시 연한이 지나더라도 사용할 수 있고 자주 수리하는 폐단이 없는 것이 둘째 이익이고, 물길 1백리를 오가는 일이 없는 것이 셋째 이익입니다. 나누어 소속시키면 세 가지 폐단이 있게 되고 합하여 설치하면 세 가지 이익을 얻게 되니, 나누느냐 합하느냐 하는데 이해관계가 명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당에 속한 각 고을은 군산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수송의 곤란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감사와 첨사의 의견도 모두 합쳐 설치하는 것이 편리하다 하니 결단코 그 의견을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논자들은 간혹 설치한 지 오래된 창고를 옮긴다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나, 조운 창고의 이전 실례를 상고해보면 조운 창고를 설치하는 데는 오직 물길이 편리한 것만 따랐을 뿐 본래 일정한 곳이 없었습니다. 성당 창고는 본래 용안의 덕성 창고였는데, 물길이 메워짐으로 인해 함열에 옮겨 설치한 것이며, 군산 창고와 법성(法聖) 창고 역시 용안과 나주(羅州)에서 옮겨다 설치한 것이니, 이번에 옮겨다 설치하는 것 또한 새로 만들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개설하는 비용에 있어서도 만약 합쳐 설치하기로 결정한다면 역시 편리한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대신들에게 물어 하루 속히 처결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묘당에 명하여 다시 검토하여 아뢰게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성당 창고의 폐단에 대해서는 신도 또한 익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몇백 년이 된 이 창고를 철거하고 애당초 상관도 없던 다른 진에 합친다는 것은 지장이 많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성당 백성들은 오직 이 창고만 믿고 사는데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게 된다면 딴 곳으로 흩어져가는 상황에 이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사무를 알고 식견이 있는 신하를 파견하여 사세를 두루 살피고 중론을 들어 확정적인 보고를 하게 한 다음에야 뒷날의 이랬다저랬다 하는 요청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의 말 또한 일리가 있다. 일이란 자세히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서울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자세히 살펴보고 와서 확정적인 결론을 짓고 품의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승지 정대용(鄭大容)을 찰리사(察理使)로 삼아 성당과 군산의 창고를 합치는 것이 좋은가의 여부를 자세히 살펴보고 오라고 명한 뒤에 다시 전교하기를,
"어제 대신의 상주로 인하여 특별히 관리를 파견하여 살펴보고 품의 조처할 것을 명한 일이 있었는데, 뒤에 경연에 든 여러 신하들의 말을 들으니, 지금 본도는 대비과(大比科)의 과장을 설치한 곳이 몇 곳이 되고 감사의 지방순찰이 곧 있을 것이라 한다. 이때에 또 관리를 파견하는 것은 폐단이 될 염려가 있을 뿐 아니라 두루 다니면서 살피는 것은 감사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전 승지 정대용의 봉명(奉命)을 그만두게 하고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해당 감사에게 분부하여 그 의견을 나열하여 장계를 올리게 한 다음에 품의 조처하라."
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윤시동(尹蓍東)이 장계하였다.
"신이 고을들을 순찰하는 걸음에 해당 고을 진영으로 길을 잡아 두 창고의 형편을 일일이 살펴보았습니다. 군산창은 옥구(沃溝)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남쪽의 한 갈래 길을 통하여 육지와 연접하였고 그 나머지 3면은 바다와 연접하여 밥을 싸들고 바람을 기다릴 장소의 거리로 30리 정도이고, 연도(煙島)는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인데 겨우 1백 리밖에 안 되므로 뱃길이 편리하고 가깝기로는 이 창고만한 것이 없습니다. 진영 앞 포구는 사철 물이 차 있으니 이는 조운선을 댈 곳이며, 진영 뒤의 창고 밑에는 두 언덕이 바람을 막아주니 이는 조운선의 짐을 싣는 곳입니다. 진영의 서쪽으로 좀 평탄한 곳에는 봉세청(捧稅廳)이 있고 봉세청 좌우에는 7개 고을의 창고가 있으며 그 곁에 7, 8채의 민가가 있는데 만약 이 민가만 옮긴다면 4, 50간의 창고를 더 짓는 것은 충분하겠습니다.
성당창은 함열에서 동북쪽으로 들어가서 산을 끼고 설치되었는데, 창고의 앞과 좌측은 평평한 육지이고 오른쪽과 뒤는 포구를 끼고 있습니다. 이른바 배 대는 곳은 곧 논두렁머리이고 포구의 개펄이어서 질척거리며 경사져서 몸집이 큰 배는 절반은 물에 잠기고 절반은 육지에 얹히게 되어 언덕에 걸친 쪽은 썩고 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 짐을 실을 때에는 포구의 머리를 파서 평평하게 만들지 않는 한 포구까지 짐을 옮겨야 할 형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포구의 앞으로 그 후(帿) 되는 지점에서 물이 두 갈래로 갈라졌고 중간에 초등(草嶝)이 있는데, 그 한 갈래는 성당길이고 한 갈래는 임천(林川) 경계입니다. 물이 많은 곳은 넓으면서 세차고 물이 적은 곳은 고여있으면서 완만합니다. 그러므로 초등에 조수가 오르면 점점 배 대는 곳까지 찰 것 같습니다. 조운군[漕卒]에게 물었더니 그들의 말이 ‘이 물은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의 하류로써 용안(龍安) 완포(薍浦)의 물과 합류하여 창고 앞 배닿는 곳으로 흘러드는데, 갑진년 여산(礪山)의 나암포(羅岩浦)가 막히면서 임천(林川) 망포(望浦)의 물목이 터져 그 물길이 갈려져 곧바로 아래쪽의 건너편 언덕으로 쏟아지게 되고 중간의 초등이 점점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옛날의 사마도(沙麻島)입니다. 그 섬이 육지와 닿는 곳이 바로 임천 땅이며 대장에 올라있는 전답은 갑진년 이후 영영 갯바닥이 되고 말았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조수가 물러갈 때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 보았으나 끝내 바람을 피하여 배를 매어둘 만한 곳을 찾지 못하였으니, 선창의 물길이 이처럼 불편하였습니다. 조운군은 그들의 생업을 생각하고 백성들은 비용이 많을까 걱정하여 말머리를 둘러싸고 함께 호소하기를, ‘이곳에 창고를 설치한 것은 국초부터 시작되었으나 상납하는 일은 아직까지 폐단없이 거행하였습니다. 배가 닿는 곳이 질척거리는 것은 본래 그러한 것이며 이른바 초등의 상황도 지금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또 백마강의 물결은 거기에서 갈라지지만 완포의 물결은 모두 이곳으로 쏠립니다. 미리 장래의 일을 염려하여 오래된 이곳을 버리고 하루아침에 창고를 옮긴다면 비단 조운군 수백 호만이 살 곳을 잃고 흩어질 뿐 아니라 소속된 8개 고을도 모두 말하기를 「각 고을을 조운창에 분속시킨 것은 대개 거리의 편리하고 가까운 조건을 취한 것인데, 성당과 군산은 그 거리가 크게 차이가 나므로 성당을 버리고 군산으로 가는데는 4, 50리를 더 가게도 되고 7, 80리를 더 가게도 된다. 만약 1백리나 2백 리 밖의 먼 고을이라면 짐을 싣고 걸어가는 고통과 숙식의 비용이 몇 배나 될 것이며, 두 창고를 합치면 중심지에서 사서 바칠 때 곡가가 폭등할 것이고, 8개 고을의 창고를 각자 옮겨 짓기에 그 공사비용도 적지 않을 것이다.」고 합니다.’ 하고, 여러 고을에서 보고한 것도 모두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이 두 창고의 형편이며 8개 고을 여론의 대략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속(移屬)하자는 논의는 그 형편으로 말하면 편리한 점이 세 가지이고 물정을 참작하면 불편한 점 또한 세 가지입니다. 세미를 실을 때 수십 일을 지체하는 걱정이 없고 배를 출발시킬 때 백리나 되는 험한 물길을 피하게 되니 이것이 첫째로 편리한 점이며, 선척이 안전하게 정박하고 연한이 찬 뒤에 수리하게 되니 이것이 둘째로 편리한 점이며, 천 석도 실을 수 있어 배값을 줄이고 잡비를 덜 수 있으며 세 고을을 한 곳에 소속시킴으로써 토색질이 없어지게 되니 이것이 세 번째 편리한 점입니다. 납세민들이 포구로 실어내는 일에 있어 세곡을 운반하는 자는 먼 거리를 수송하기에 고생스럽고 돈으로 대납하는 자는 언제나 곱절이나 물릴 것을 걱정하게 되니 이것이 첫째로 불편한 점이며, 포구의 시세는 세 창고가 각각 달라서 법성(法聖)은 군산보다 좀 비싸고 군산은 성당보다 더하니, 지금 만약 합설한다면 성당에 와서 장사하는 상인들이 필시 군산으로 가지 않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무역하는 자가 많아져서 곡가가 앙등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둘째로 불편한 점이며, 성당의 사공과 창고 밑에 사는 1백여 호의 백성들은 창고 밑에 목숨을 걸고 바다를 밑천삼아 사는데 그 창고를 없애고 옮겨 설치하게 되면 부지해나갈 길이 없게 되니 이것이 셋째로 불편한 점입니다.
성당의 형편은 신이 이미 목격한 것인데, 만일 아직 막히지도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성급히 논의할 것인가 하여 지금 그대로 놓아둘 것을 청하였다가 한두 해가 지난 뒤에 물길이 점점 막혀 조운에 낭패를 보게 된다면 신의 죄가 과연 얼마나 크겠습니까. 또 만일 뒤에 반드시 막힐 것이므로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이속(移屬)을 결정하였다가 그 후 몇 해가 지나도 물길이 변하지 않고 배가 여전히 운행할 때에는 그 많은 백성들의 원망을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이 두 가지 의견을 가지고 깊이 생각해보았으나 끝내 합당한 방법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상고하면 용안(龍安)의 득성창(得成倉)은 국초에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 기문(記文)을 지었으며, 세종조 무신년에 물길이 막힘으로 인하여 함열(咸悅)의 덕성창(德成倉)으로 옮겼다가 성종조 정미년에 다시 득성으로 옮겼다 하였고 성당창의 이름은 올라있지 않았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덕성이 곧 성당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용안과 함열 사이가 소의 울음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는 거리에 불과하니, 성당창의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하루아침에 옮겨버린다는 것은 신중히 생각해볼 일입니다. 또 그 물길이 막힌다는 것은 당장 육지로 될 지경은 아니니, 옮기는 일 또한 시일을 다투는 급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몇 년 지난 뒤에 영영 막힐 조짐을 보아 서서히 고칠 생각을 하는 것이 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군산에 합설하지 않고 이전대로 세 고을에서 나누어 관할한다면 묵은 폐단은 여전할 것이니, 차라리 본 고을에 전속시켜 조세를 바치고 배를 타는 것을 한결같이 아산(牙山)의 공진창(貢津倉)에서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폐단을 바로잡는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입니다. 군산으로 말하면 고을과 진영이 서로 겨루고 관리들의 토색질이 갈수록 더하여 고질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창고가 있는 1개 면을 떼어내 단독 진영으로 만들기를 마치 영광(靈光)의 법성창(法聖倉)에서 진량(陳良)을 떼어내듯 한다면, 고을과 진영은 애초부터 관련이 없어 묵은 폐단을 영영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옥구라는 고을은 매우 잔폐하고 또 작은 데도 8개 면 가운데 호구나 전결(田結)이 이 면처럼 많은 데가 없습니다. 만약 이곳을 떼내어 준다면 옥구는 장차 고을의 모양을 갖추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굳이 조처를 취한다면 창고 밑의 1개면 주위의 2, 3리 지역과 조운에 종사하는 3백여 호를 해당 진영에 분속시켜 전담하여 관리하게 하여도 독자적인 진영의 모양을 갖추기에 족하며, 사리로 비추어보아도 또한 구차한 아쉬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합속여부를 막론하고 일단 변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 분부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좌의정 채제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호남의 감사가 올린 장계를 보니 조항별로 들어 논한 것이 자세합니다. 신의 생각은 일이 중대한 만큼 갑자기 변통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사의 장계를 나는 거북하게 여긴다. 만약 창고를 합치지 않는다면 함열 현감으로 하여금 배를 타게 하여도 좋겠는가?"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그것이 정말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함열의 원을 만약 적임자를 얻는다면 자연 고쳐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함열이 기름진 고을이라고 불리는 것은 오직 세미를 돈으로 바치는 데 있는데 본 고을에서 곡식을 팔 뿐 아니라 이웃고을의 사적인 부탁까지 들어주니 정말 해괴합니다. 대체로 창고를 합치기가 쉬운 것 같지만 여기의 것을 헐고 저기로 옮기는 것이 어찌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호조 판서 정민시(鄭民始)는 아뢰기를,
"옮기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자는 곧 창고에 속한 사람들과 고을 수령입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일은 신중히 처리하는 것이 좋으니 훗날을 기다려 품의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정민시가 아뢰기를,
"함열의 원이 배를 타는 일은 한마디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신중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자, 이에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의 적합여부는 다시 여론을 살핀 후에 회계하라."
하였다.
7월 13일 신묘
전교하였다.
"요즈음의 입계 문서에 ‘형벌적용을 기다린다.’는 말이 있다. 이는 지나치게 근신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전례에 없는 일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경향에 신칙하게 하라."
7월 15일 계사
우의정 김종수(金鍾秀)가 차자를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 부모를 봉양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7월 18일 병신
소대(召對)하였다.
이조 판서 홍양호(洪良浩)가 피혐하여 사직소를 올리자, 체직을 허락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이시수(李時秀)가 장계를 올리기를,
"고깃배와 소금배의 세를 탕감해준 수량이 1천 70냥인데 바치는 기한이 6월이었으므로 해변의 각 고을에서는 이미 정해진 실제 총액을 거의 다 받아들였습니다. 아직 미처 상납하지 못한 곳도 있지만, 이미 받아들인 물건을 지금 그 수량을 나누어 되돌려주려면 중간에서 소실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추기 세액을 마련할 때에 가서 춘기에 감해준 수량을 계산하여 감해주는 것이 실로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균역세(均役稅)를 견감해 주는데 대한 명령은 나라의 경사를 함께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각도에서 시행함에 있어서도 마땅히 성의를 다하여 받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도에서는 덮어놓고 몇 냥을 견감해주었다고만 하였는데, 본도에서는 춘기의 세를 이미 다 받아들였기 때문에 되돌려주는 데 폐단이 생길까 염려하여 추기에 부과할 세에서 계산하여 한꺼번에 감해주자고 청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야만 비로소 실효를 거둘 수 있는 것이므로 매우 가상하다. 다른 도에서도 한결같이 해서의 예에 따라 시행하라는 뜻으로 묘당에서 분부하게 하라."
하였다.
7월 19일 정유
차대(次對)가 있은 후 이어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를 시행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일전에 내린 죄인석방의 명은 대개 팔도가 경사를 같이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어떤 죄인인들 용서할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중에 더러는 분수에 지나친 자가 있습니다. 삼사(三司)가 한 말 또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죄인 중에 혹시 전연 거론되지 않은 자도 있었다. 사람들이 징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도리어 사람을 살리기 위한 뜻에서 사람을 죽이는 정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중에 귀양지로 옮긴 것은 그들의 친족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하자,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의금부의 문안을 가져다 보고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았습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정민시가 아뢰기를,
"군산의 조복미(漕復米)는 으레 대동미(大同米)에서 떼어주게 되어 있는데, 해당 진영의 지방관이 매번 본 고을에서 떼어 받을 것을 청하여 햇곡식을 가져다 쓰고 환자미로 조운군들에게 바꾸어주는데, 그가 지방관인 관계로 감히 어기지 못한다고 하니 이것을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조창(漕倉)의 설치는 그 소속된 고을의 곡식 수량을 계산하여 배의 수를 정하지 않습니까. 지금 소속된 고을의 대동미 중에서 조복미를 떼어주면 조운선이 자연 여유가 있게 될 것이며, 만약 자체로 바치는 고을에서 조복미를 떼어보내게 되면 배를 찾기가 몹시 어려운 이때에, 또한 한 고을의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조창의 조복미를 모두 소속된 고을 외에 자체로 바치는 고을의 대동미 중에서 떼어주는 방향으로 규례를 정하여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병조 판서 이갑(李𡊠)이 아뢰기를,
"오랫동안 근무한 자를 이동시키는 규정은 그 편하고 고된 형편에 따라 혹은 도목정(都目政) 때마다 하기도 하고, 혹은 한 차례의 도목정을 건너기도 하고, 혹은 두 차례의 도목정을 건너기도 하고, 혹은 간간이 등용하는 것이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실려 있는데, 근래에는 도목정을 건너거나 간간이 등용하는 곳에서 정기 도목정 때마다 보고해 옵니다. 이후에는 관리이동시 후보자를 추천할 때 구별하여 주를 달 것이며, 간간이 등용한다는 것은 원래 연한을 정한 것이 없어서 거행할 때마다 혼란을 일으킵니다. 이것도 규정으로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었다. 좌의정 채제공이 모두 세 차례의 도목정을 건너서 등용할 것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경기(京畿)·원춘(原春)·황해(黃海)·평안(平安)·함경(咸鏡) 등 도의 가을 조련을 정지하였다.
7월 20일 무술
경상도로 내려가는 경시관(京試官) 정동관(鄭東觀), 도사(都事) 윤득부(尹得孚)와 전라도로 내려가는 경시관 김계락(金啓洛), 도사 서유련(徐有鍊)을 불러보았다. 상이 정동관 등에게 하교하기를,
"선비들의 버릇이 옛날과 같지 않은 것은 시관이 무시를 당할 정도로 형편없는 데도 원인이 있다. 너희들은 반드시 각자가 노력하기 바란다."
하였다.
제주목(濟州牧)에 딴 나라 배가 표류하여 왔다. 그 배는 앞뒤가 높은데 앞에는 해를 그리고 뒤에는 달을 그렸으며, 양쪽 가장자리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다. 난간 밖에는 태극을 그리고 그 왼편에 ‘해상안전순풍자재(海上安全順風自在)’라는 8자를 새겼으며, 돛대 위에는 바람을 가늠하는 깃발을 걸고 태극을 그린 다음 ‘순풍상송(順風相送)’이라는 4자를 썼다.
배 안에는 속미(粟米) 3백 64석, 말 3필, 개 2마리를 실었으며, 또 《논어(論語)》·《중용(中庸)》·《소학(小學)》 각 1책, 《삼국지(三國志)》 6책, 《실어교동자훈(實語敎童子訓)》·《고가집(古哥集)》·《치식(治式)》·《대절용집(大節用集)》이 각각 1책씩 있었는데, 《논어》·《중용》·《소학》은 협주와 구두점이 있는 것으로써 대개 그 나라의 책이었다. 《동자훈》은 범어와 불경의 말이 많았다. 《대절용집》은 판형이 3단계로 되어 상단에 쓴 것은 유합(類合)과 같고, 중단에는 전자(篆字)로 쓰다가 전자가 끝나자 백중력(百中曆)을 이어 썼으며, 하단에 쓴 것은 그림과 같았는데 지사기(知死期)·명기(名棄) 등의 글자로 된 제목이 있었다. 《고가집》과 《치식(治式)》은 겨우 두어 장밖에 안 되는데 글씨가 두서없이 쓰여져 있어 알아볼 수 없었다. 쌀은 공물바칠 물건이라 하였고 공문은 짤막한 종이에다 초서로 ‘묵소검(墨小鈐)’이라고 썼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 중 선주(船主)는 사비가(査比嘉)·경고강렬(慶高江冽)·맹국길(孟國吉)·어다가량(魚多嘉良)·즙취방신성(楫取芳新城)이라 하고, 수주(水主)는 계좌구천(季佐久川)·행비가(行比嘉)·도궁성(桃宮城)·형신의(衡新)·연장령(蓮長嶺)·전신의(全新)·평중리(平仲里) 등 모두 12명이었다. 또 소관안(紹官安)과 모조가명(毛照嘉名)이란 두 사람이 있는데 표가 없었다. 그 사람들은 상투 하나에 비녀 두 개를 꽂았으며 상투밑의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얼룩덜룩한 옷을 입었는데 온 몸을 빙 둘러 감을 수 있게 만들었다.
맹국길이 글을 좀 알기 때문에 글로 써서 문답하였으나 그 글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개 유구국(琉球國) 사람으로 중산왕(中山王)의 도읍 안에 있는 나패부 서촌(那覇府西村)에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연례로 바치는 공물을 그 나라 궁고도(宮古島)로 바치러 가다가 6월 임술일에 풍랑을 만나 같은 달 병자일에 제주의 귀일포(貴日浦)에 닿았다. 닻과 키를 다시 수리하여 하루속히 본국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애걸하므로 제주 목사 이철모(李喆模)가 급보로 상문하였다. 이에 상이 그들에게 음식과 옷을 후하게 주어 돌려보낼 것을 명하면서 회유(回諭)하기를,
"이후부터는 표류해온 사람으로서 수로를 따라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에 대해서는 떠나보내고 나서 장계로 보고하라."
하였다.
7월 22일 경자
진휼청에 명하여 오부(五部) 내의 무너지고 깔린 민가에 휼전을 베풀게 하였다.
7월 23일 신축
특별히 축하연을 베풀 때 올리는 물선(物膳)에 대한 규정을 정하고, 하교하기를,
"이번 축하연의 물선으로써 호서(湖西)에서는 모두 말린 꿩을 올렸지만, 경영고(京營庫)의 진상은 오히려 제철이 아니라 하여 모두 대봉(代捧)을 허락하고 이것을 일정한 규례로 삼았다. 본도 또한 마땅히 주원(廚院)과 상의하여 규례에 따라 올렸어야 할 것인데 감사가 한 일은 몹시 소홀하였다. 이후부터는 특별히 베푸는 축하연의 물선 중에 만약 제철이 아닌 물품은 다른 물건으로 대봉하는 것을 규례로 정하고 과일도 역시 그렇게 하여 똑같이 규례로 정하라. 이로 인하여 한가지 알아볼 일이 있다. 호서에서는 물선과 삭선(朔膳)을 모두 올리지 않고 경청(京廳)에서 대봉하고 있는데, 탁지(度支)에서 만든 규례 중에 삭선가미(朔膳價米)와 건수어가미(乾秀魚價米)라는 명색이 곧 그것이다. 그런데 유독 축하연에 대한 물선만 이렇게 바치는 것은 의의가 없다. 주원과 탁지, 선혜청으로 하여금 그 문적(文蹟)과 경위를 자세히 상고해보도록 하라."
하고, 이어 주원으로 하여금 하나로 단락지을 방안을 초기(草記)하게 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조돈(趙暾)이 죽었다. 전교하기를,
"지조가 굳고 소탈하기 때문에 말할 때에는 언제나 숨김이 없었다. 그러므로 항상 그 성의에 감탄하였고 연전에 있었던 경연의 상주에 이르러는 더욱 노신(老臣)의 충심을 볼 수 있었으며, 막중한 전례(典禮)를 예식대로 잘 치른 것은 중신(重臣)에게 힘입은 바 큰데, 그 이름을 비석에 쓰고 품계를 올려주는 일에는 뜻대로 보답하지 못하였다. 요즈음 서울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한번 불러 만나보고 중추원 직함으로 품계를 뛰어넘어 제수하려 하였는데, 이제는 그만이니 너무도 애석하다. 더구나 그는 경위를 따짐에 분명하였으나 마음을 비워 치우침이 없었으니 또한 정말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 죽은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조치를 어찌 특별히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죽은 봉조하 조돈을 특별히 영중추(領中樞)로 추증하고 홍문관으로 하여금 그의 행장이 이르는 즉시 시호를 의논하게 하며, 그의 아들로서 관직에 있는 자는 복을 끝내는 대로 선발 등용함으로써 조정에서 그를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평안도 병마 절도사 이득제(李得濟)를 파면하였으니, 폄직시킬 진장(鎭將)의 명단에 착오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조금있다가 용서하였다.
7월 24일 임인
부교리 이은모(李殷模)가 상소하기를,
"쌀값의 고하는 그해 농사의 풍흉에 달렸습니다. 풍년이 들 때마다 도하의 가난한 선비와 궁한 백성들은 한 줌의 적은 돈을 가지고도 자루를 가득 채운 많은 쌀을 사서 모두 다 배부른 기쁨을 누릴 수 있었는데, 근래에는 풍년이라 하여도 쌀 한 포대의 값이 3냥 7, 8전에 밑돌지 않아 그만 고정불변한 것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대개 균역청에서 미리 공납할 쌀을 사들이기 때문인데, 이 값으로 일정한 법을 삼고 보니 공납인들은 비싸게 파는 것을 좋아하여 이 값으로 균역청에 팔고, 장사치들도 이를 본받아 이 값이 아니면 팔지 않는 것을 일반적인 규례로 간주하여 풍년이나 흉년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리로 따져볼 때 어찌 개탄할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균역청에서 미리 사들이는 것은 혹은 댓가로 주는 비용으로 삼기도 하고 혹은 흉년을 대비하기 위한 밑천으로 삼기도 합니다. 또 풍년이건 흉년이건 할 것없이 백성들을 도와주는 정사가 되는 만큼 완전히 방지하기는 형편상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팔도의 농사가 모두 풍년이 들어 거의 옛날의 경술년과 비등 한데도 이 한 가지 문제로 인해 쌀값이 내리지 않고 여전히 3냥 7, 8전이 되니 도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한번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균역청의 이 제도는 비록 갑자기 고치자고 의논할 수 없으나, 우리 성상께서 공물바치는 사람들을 돌봐주고 도성 백성들을 염려하는 고마운 뜻으로 일시적인 변통을 하는 것은 안 될 것도 없다고 봅니다. 균역청에 분부하여 금년 8월부터 명년 정월까지 공가미(貢價米)는 사들이지 말게 하고 만일 이전에 미리 사들인 것이 있을 경우에도 또한 달수를 계산하여 분기를 물려 공납가를 지급하게 하며, 이어 공납인으로 하여금 본색으로 마련한 자기 식량 이외에는 전부 시장에 넘겨서 싯가대로 매매하게 하며, 시민에게도 엄히 신칙하여 또한 감히 쌀값을 조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도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쌀 한 말에 3전하는 것이 풍년의 좋은 상서라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균역청의 쌀값 문제는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급선무 중에 급선무라 할 수 있다. 균역청에서 일정한 값을 정한 뒤로는 비록 경술년보다 더한 풍년을 만나도 쌀 한 말에 3전한다는 말은 한갓 당나라에서나 있는 미담이 되고 있다. 또 지금 싯가는 이미 공미(貢米)라 하면 품질이 떨어져서 벌써부터 균역청의 정가에 미치지 못하니 가을이 된 뒤에는 더 떨어질 것이다. 이에 여러 공납인들은 곧바로 균역청으로 달려가서 비싼 값의 이익을 취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균역청에서 정한 가격이 비록 변할 수 없는 규정이고 또 하교받은 세목이 지극히 엄하다 하더라도 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변통하는 조치는 제도를 고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을 이후부터 6개월 동안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대왕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높고 지극한 덕망이라면 금년과 같은 이런 하교는 필시 아래에서 요청하기 전에 특별한 은혜를 따로 내렸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변통의 조치는 고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선대왕의 뜻을 이어받드는 것이 된다.
균역청에 분부하여 금년 8월부터 명년 정월까지는 공가미(貢價米)를 사들이지 말게 하고 만약 앞서 미리 사들인 것이 있을 경우에도 또한 달수를 계산하여 분기를 물려 공납가를 지급하게 하며, 이어 또 저자 백성에게 엄히 신칙하여 싯가대로 매매하게 할 것이요, 값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을 모두 네가 올린 상소의 소청을 따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쌀 한 말에 3전씩 한다는 것은 비록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지금의 쌀값에 비하여 훨씬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도하에 사는 가난한 선비와 궁한 백성들에게 어찌 큰 혜택이 되지 않겠는가. 공납인들 또한 모두 타고난 양심이 있는 만큼 어찌 혹시라도 이에 대하여 다른 의견이 있겠는가. 그러나 쌀을 이미 시장에 넘겨 팔아서 그들로부터 받아들일 쌀이 없으면 역시 모든 백성을 똑같이 보아주는 조정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인들에게 달수를 계산하여 분기를 물려 공납가를 지급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미리 팔지 않은 공납인은 분기를 물려 공납가를 지급받는 혜택을 고루 입을 것 같지 않다. 다시 생각하니, 다 같은 공납인이며 우리 백성들이다. 미리 판 사람이 혜택을 입는 것이 미리 팔지 않은 사람을 도와주는 것으로 될 수 있겠는지 모르겠다. 이에 대해서는 대신이 선혜청(宣惠廳)과 상의하여 별도로 더 베풀어줄 만한 것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경연에 입시할 때 품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경연의 임무를 띠고 있는 그대가 이처럼 백성을 위하여 말하는 것은 근래에 처음 보는 일이다. 매우 가상하게 생각하여 특별히 녹피(鹿皮) 1장을 주는 것이니, 그대는 합문(閤門) 앞에 와서 친히 받으라."
하였다.
7월 25일 계묘
차대(次對)가 있었다. 약원 제조(藥院提調)를 불러 보았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의주부(義州府)에 후시(後市)를 설치한 것은 변경 백성들의 생계를 위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보내는 사신과 특별히 자문을 가지고 가는 사신은 모두 의주부에서 보내게 되어 그 재력을 전적으로 여기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래 역관(譯官)들이 손해를 본다는 이유로 대신이 아뢰어 후시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나 역관에게 설령 약간의 이익이 있다 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사신 행차가 가지고 갈 물건이 나올 곳을 없게 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들으니 후시를 없앤 후 첫해에는 역관들에게 유리한 것 같더니 2, 3년이 되자 별로 그 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앞으로 특별히 보내는 사신과 특별히 자문을 가지고 가는 사신의 행차가 1년에도 몇 차례나 있을런지 모르는데 의주부의 형편은 점점 퇴보하고 있으니, 나라의 걱정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빨리 후시를 부활시키는 일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일찍이 감사와 의주 부윤을 지낸 사람들에게 물었다. 좌참찬(左參贊) 김화진(金華鎭)이 아뢰기를,
"공사간의 이해관계를 막론하고 잠깐 없앴다가 금방 설치한다는 것은 다만 이랬다저랬다 한다는 혐의가 있을 뿐만 아닙니다. 특별히 소상히 살펴 다시는 그대로 두느니 없애느니 하는 의견을 내놓는 문제가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 정민시는 아뢰기를,
"이 일은 교린에 관계되는 데 없앤 지 얼마 안되어 이유없이 다시 설치한다면 이는 국내의 일과 다르기 때문에 신의 생각에는 다시 설치하는 것은 경솔히 논의할 수 없다고 봅니다."
하고, 개성 유수 구상(具庠)은 아뢰기를,
"의주 사람들은 후시를 생계의 근거로 삼았었는데 후시를 없앤 후 생활이 전과 같지 못한 것은 뻔합니다. 생활이 전과 같지 못하다면 민심인들 어찌 전과 같겠습니까. 대신이 아뢰었던 사신 행차에 소용되는 물품을 대어주는 데 관한 일은 오히려 이차적인 문제이고 혹시라도 변경 사람들의 인심을 잃게 된다면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정말 고쳐야 할 일로서 실로 민심을 감복시킬 방법이 된다면 신중치 못한 것을 혐의쩍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후시에 대한 일은 연전에 철폐할 때부터 나는 사실 그 설치의 규정과 전말을 알지 못하고 오직 북경으로 가는 사신 행차의 일을 보는 역관을 주인으로 삼아왔을 뿐이다. 일단 없애는 것이 역관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말한 이상 의주부의 폐단은 오히려 이차적인 일로 되었다. 이것이 없애게 된 첫째 이유이다. 우리 나라의 산천에서 생산되는 이익이 모두 압록강 서쪽 책문(柵門)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국내 백성들의 일용품을 궁핍하게 만들고 있으니 이것은 나라를 생각하는 방법이 아니다. 이것이 없애게 된 둘째 이유이다. 이렇기 때문에 그때의 조치에 대한 비답에 ‘역관을 없애지 않으면 후시를 없애야 한다. 한 나라가 피해를 보는 것이 한 고을이 손해를 보는 것에 비하여 어떠한가.’고 하교하였으니, 조정의 본의는 다만 대체만을 보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경의 진술을 보니 사세가 이미 이와 같다면 이를 취소시키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러나 이를 설치한 문안을 반드시 상고한 다음에 존폐의 가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후시를 없애기 전 근래 모자세[帽稅]가 수량에 맞게 나왔는지의 여부와 다시 설치한 후 세액이 1푼도 축나지 않겠는가의 여부를 상세히 조사하여 간단히 적어 올리라."
하였다. 채제공이 또 아뢰기를,
"모자세를 설정한 그 본의는 우연치 않습니다. 사신들의 공용(公用)이 모두 여기에 의존하기 때문에 1년 동안에 나오는 수가 자연 고정되어 있고, 전에는 묘당에서도 주관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역관들이 겁내는 데가 있어 제멋대로 운용하지 못했으나 근래에는 모자가 전연 나오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이번 절사(節使)의 공용에 대하여 형편상 번거롭게 조정에 청하여 어떤 영문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얻어내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역관들이 만약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세 없는 점포의 모자는 해마다 1개도 축내는 것이 없으면서 공용에 대해서는 남의 일을 보듯 본체만체할 수 있겠습니까. 사역원(司譯院)의 모든 일은 수역(首譯)이 주관하는 만큼 한번 엄중한 처결을 내려야만 여러 역관들도 두려워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은 수역 이수(李洙)에게 귀양보내는 처벌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공적 세액의 모자가 나온 수효를 10년 전까지 소급하여 상고해 보니, 원래 정한 천 개의 수효는 한 번도 전량 나온 해가 없었고 그중에도 후시를 철폐할 전후시기에 이 모자가 나온 수효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장 적은 해와 비교하여 그 수효를 절충하여 보았습니다. 무신년 이후는 바로 후시를 없앤 뒤이고 정미년 이전은 바로 후시를 없애기 전이었는데, 계묘년과 무신년에 모자가 나온 수가 가장 많았으나 무신년도 계묘년에 비하면 감축된 수가 3백 18개였으며, 임인년과 기유년에 가장 적었으나 임인년은 기유년에 비교하면 감축된 수가 7개였습니다. 무신년의 것이 계묘년의 것에 비하여 줄어진 것이 비록 많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후시를 없앤 전후의 햇수가 또 많은 차이가 나는 만큼 후시를 없앤 후에 갑자기 줄었다는 말은 정확한 말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역관들에게 물으니 그들의 말이 ‘모자를 매매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죽에 달려 있고 가죽이 들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후시를 통하게 됩니다. 이것이 후시를 없앤 후에 가죽이 저절로 감축되는 이유인데 가죽이 감축되면 모자 또한 감축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지금 비록 다시 후시를 설치한다 하더라도 무신년 이전에 나온 모자가 한번도 제 숫자를 맞추지 못한 것으로 보아 다시 후시를 설치한 후에도 어떻게 그 숫자를 맞출 수 있으리라고 보장하겠습니까.’고 하는 것입니다. 역관들이 애당초 경솔하게 말하였지만 지금 특별한 하교로 따져 물은 후에도 분명히 지적하여 고하지 않으니 실로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들은 보잘것없는 역관으로서 감히 특별한 하교로 따져 묻는데도 어저께 대답에 처음에는 ‘후시를 없앤 후 세액도 뒤따라 크게 감축되었다.’고 하더니 다시 말하기를 ‘다시 설치하면 세액이 거의 알맞게 될 것이다.’ 하고, 어제 고한 말에는 ‘후시를 없애기 전에도 숫자를 맞추지 못하였는데 다시 설치한 후에 어떻게 그 숫자를 맞출 것을 보장하겠는가.’고 하는 등 이틀 동안의 말이 이처럼 판이하다. 저 미물같이 비천한 것들이 어찌 감히 이처럼 무엄하단 말인가. 후시의 존폐여부는 본래 그들의 말과는 관계가 없다. 국법으로 보아 엄중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부역(副譯) 장렴(張濂)을 역관 명단에서 삭제할 것을 명하였다. 의주 부윤 이이상(李頤祥)이 교체되어 돌아오자, 상이 불러서 묻기를,
"후시는 곧 이종성(李宗城)이 처음 만든 것인데 지금은 없애버렸다. 과연 없앤 보람이 있는가?"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후시는 옛날에 이른바 연복(延卜)인데, 상고할 문적도 없거니와 그 시초도 규명할 수 없습니다. 대개 듣건대 동지사(冬至使)가 중국에 갔다가 돌아올 때 수백 필의 쇄마(刷馬)를 압록강 대안(對岸)의 책문(柵門)으로 보내면 중국 봉성(鳳城)의 장사꾼들이 그 편에 짐을 부쳐 매매하였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연복’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죽은 정승 이종성(李宗城)이 평안 감사로 있을 때 의주부의 채권(債券)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10만 냥 어치의 잡화만을 동지사로 가는 쇄마편에 들여보내어 거기에서 10분의 1만 세로 받아 부채를 충당하였는데, 뒤에 점차 지나쳐서 들여보내는 물품이 30만 냥 어치나 되어 애당초 10만 냥의 정한 숫자와 차이가 나게 되었습니다. 대개 연복과 후시는 실은 한가지입니다. 근래에 후시가 없어져 시행되지 않음으로써 역관들의 짐바리에 이익이 있는 것 같지만, 후시의 물품은 곧 정월 이후 각도의 장사꾼들이 와서 쏟아놓은 물품으로써 이른바 만화(灣貨)란 것입니다. 이는 애초부터 역관들의 짐과는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의주백성들로서 상업을 위주로 하여 이익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낭패를 당해 믿고 살아갈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후시를 없앤 후 관청사정은 어떠한가? 1만 냥으로 이자를 불리는 것은 여전한가?"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후시를 없앤 후로는 이른바 이자를 불리기 위한 1만 냥도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없어져버렸습니다. 의주에는 원래 전결(田結)에서 받아들이는 관청조세가 없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쌀을 거두는 일이 없고 관청에서 제방을 쌓아 백성들의 전결을 보호합니다. 만약 풍년이 들면 제방 세를 징수하여 관청비용에 충당하고, 흉년을 만나면 징수하는 것도 따라서 감축되기 때문에 비용은 대부분 꾸어서 쓰고 있습니다."
하였다.
내의원 제조 홍억(洪檍)이 아뢰기를,
"어전에 쓰는 약에 관한 일은 이 얼마나 엄중한 일입니까. 그럼에도 한번 가삼(家蔘)이 성행한 뒤로는 경상도와 원춘도(原春道)에서 봉진한 것이 대부분 가삼입니다. 특히 원춘도의 경우는 가삼을 첩첩이 덧놓아 온갖 교묘한 방법을 내었으니, 일의 체모를 헤아려 보면 실로 해괴하기 그지없습니다. 겨울분을 봉진할 때부터는 각별히 살펴 선택함으로써 죄에 저촉되는 일이 없게 하라는 뜻으로 두 도의 감사에게 신칙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인삼에 관한 정사가 갈수록 구차스럽게 되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관동 등의 고을에 하나의 명산을 인삼밭으로 만들고 빙 둘러 봉전(封田)하기를 황장목(黃膓木)의 예와 같이 한다면 10년이 못 되어 인삼을 이루 다 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죽은 정승 서지수(徐志修)도 일찍이 이런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하자, 홍억이 아뢰기를,
"인삼이 생산되는 곳으로는 폐사군(廢四郡)만한 곳이 없는데 여전히 경계를 침범하여 몰래 캐가는 폐단이 있습니다. 이처럼 인삼이 극히 귀한 때에는 인삼밭을 봉한다 하더라도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들으니 근래 대과(大科)를 고시할 때 베껴 쓰기가 어렵다 하여 책문(策文)의 경우에는 허두만 써서 바치게 한다고 합니다. 이는 오직 숙유(宿儒)들의 훌륭한 글을 선택할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사리로 보아도 매우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절대로 잘못을 답습하는 일이 없도록 신칙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르고, 하교하기를,
"조목을 따라 박식한가를 시험하고 짜임새를 살펴 풍모를 보고자 하는 것인데 주관하는 관서에서 허두 한 단락만 베껴 쓰고 중간부분까지 보지 않으니, 이런 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책문이란 것은 중간부분에 요지가 들어 있지 않은가. 중간부분을 보지 않는 것은 마치 용을 그리는데 눈동자를 그리지 않는 것과 같다. 대개 책임은 전적으로 시관에 있거니와 응시자가 중간부분 이하에는 유의하지 않는 것도 또한 바로잡아야 할 급선무이다. 이 일로 먼저 시관에게 신칙하고 이어 유생들에게 미리 알려서 이번 과거부터 중간부분 이하에 전력하게 하고 허두를 열 줄이 넘게 쓴 자는 글이 잘되고 못된 것을 막론하고 모두 낙과시키도록 하라. 비록 합격자를 발표한 후라도 경 등이 가져다가 조사해보고 규례를 어긴 자는 또한 빼버리는 동시에 시관도 논죄해야 한다. 옛사람이 말하지 않았던가. 문체에서 세상인심을 볼 수 있다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의미가 있다. 허두에서 힘을 다 빼어버렸으니 무슨 기상이 있겠는가. 내가 이에 대해 일찍부터 잊지 않고 있었는데 마침 경의 진술로 인하여 번거로움도 잊은 채 이와 같이 설명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번에 보이는 과거는 다른 과거와 다른 만큼 문체의 기상도 반드시 여유있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도 국운의 영원함을 비는데 일조가 되는 것이다. 모든 선비들이 이 말을 듣고 감히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 정원으로 하여금 과시를 맡은 경시관(京試官)과 도사(都事)에게 알리게 하였다.
7월 26일 갑진
호조 판서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호남과 호서의 조운선을 창설할 때 모두 6백 석을 싣는 것으로 제한한 것은 바닷길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우선 시험해보려는 생각인 것 같은데, 영남의 조운창은 호남에 비하여 그 물길의 거리가 수천 리나 더 먼데도 천 석으로 제한하였습니다. 호남의 조운선은 신묘년에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2백 석을 더 싣게 하였습니다. 대체로 배는 천 석을 충분히 실을 수 있는데, 가장 거리가 먼 영남은 천 석으로 제한하고 좀 가까운 호남은 8백 석으로 제한한 것이 벌써 의의가 없는 일입니다. 지금 배를 만드는 재목이 점점 귀해져가는 때를 당하여 10여 척의 조운선을 더 제조하는 것은 또한 재목을 저축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또 조운군으로 말하더라도 천 석을 싣게 되면 잡비 역시 따라서 많아져 상납할 때 이익이 많기 때문에 모두 천 석을 싣기를 원합니다. 지금 호남은 사용연한이 찬 배가 13척이나 되어 이를 즉시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여기에 드는 재목은 수천 주나 됩니다. 또 배를 만드는 비용과 재목운반에 드는 비용이 부족하므로 부득이 재력을 청구해야 할 형편이니, 이런 때에 변통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명년 봄 조운 때부터 호남 조운선에도 천 석까지 싣게 하여 사용연한이 찬 배 13척을 다시 만들지 말도록 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장용영 제조(將勇營提調)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선전 관청(宣傳官廳)의 황내취(黃內吹)와 흑내취(黑內吹)는 본디 옛제도에 있는 것으로써 황내취는 곧 서울에 등록된 군사이고 흑내취는 지방에서 뽑아 올린 군사입니다. 근래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흑내취를 대령시키는데 그 폐단이 적지 않아 번포(番布)를 대신 물게 하고 있습니다. 병신년에 고 대장 장지항(張志恒)이 청하기를 ‘오위(五衛)의 제도가 있을 때 흑내취를 오위 장에게 나누어 주어 거느리게 하던 전례에 의하여 군문의 취고수(吹鼓手)를 각각 1패(牌)씩 뽑아 선전 관청에 소속시키고, 황내취의 칭호는 원내취(元內吹)로 흑내취의 칭호는 겸내취(兼內吹)로 고쳐 각 군문의 취고수들이 임금이 거둥할 때 대령하는 폐단을 덜게 하자.’고 하였는데, 겸내취 95명의 초립(草笠)과 황의(黃衣)는 원내취의 예대로 하여 그 칭호를 회복하였으나 경비가 자연 관계됩니다. 이제 겸내취를 본영에 소속시켜 본영의 옛날 복색을 회복하고 거둥시에나 어전에서 의식을 거행할 때 다같이 사용하게 한다면 경비로 보나 민폐로 보아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임시처소의 군사위용에도 별로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겸내취를 본영에 떼어 붙이더라도 세 군문의 겸내취를 전부 이관시키는 것 또한 현임 대장이 건의한 본의에 어긋나니, 한 군문은 이전대로 시행하고 두 군문은 본영에 떼어붙이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영은 사체가 특별한만큼 모든 군사도 신분이 확실한 자를 먼저 선택하여 채워넣고 봉족도 훈련 도감의 봉족을 전용해야겠습니다. 또 금위영은 훈련 도감의 중부(中部)로부터 이관되었기 때문에 언제나 훈련 도감의 다음으로 불립니다. 훈련 도감과 금위영의 겸내취를 본영으로 이관하고 해당 군영의 원료미(元料米)와 봉족들의 옷감 및 수시로 지급되는 각종 물품을 모두 그 수를 계산하여 보내줌으로써 그들을 안정시키도록 할 것이며, 해당 군영의 명부에서도 또한 삭제하고 훈련 도감과 금위영의 겸내취들에게 으레 내려주던 초립(草笠)과 황천익(黃天翼) 같은 물건도 이제부터 그만두게 해야겠습니다. 이것으로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28일 병오
홍양호(洪良浩)를 다시 이조 판서로 삼고, 김광묵(金光默)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7월 29일 정미
구익(具㢞)을 발탁하여 도총부 도총관(都摠府都摠管)으로 삼았다.
7월 30일 무신
종묘(宗廟)와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으니 가을 참배였다. 상이 제물과 제기를 살피고, 하교하기를,
"종묘의 북쪽 담장에 문이 있어 시어소(時御所)와 통하게 되어 있다. 이는 곧 삭망제향(朔望祭享)에 왕래하기에 편리하게 한 길로써 성조(聖祖)의 하교로 인해 생긴 것인데, 근래에는 내전에서 종묘를 알현하는 길로 되었다. 오늘 마침 삭망의 분향을 맞아 고례를 따라 삭망제를 친히 지내고자 하여 제기를 살펴보고 제물을 살펴보았다. 큰 제사 이외에는 친히 제물을 살피고 제기를 살피는 예가 예조의 근래 등록에는 기록되지 않은 것 같다. 오늘의 행례를 역사의 자료로 삼게 하고자 하니 예조로 하여금 알게 하라."
하고, 재실(齋室)로 돌아와 남여를 탔다. 묘사(廟司)를 불러보고 하교하기를,
"종묘의 삭제(朔祭)에 제물과 제기를 살펴본 것은 곧 몇백 년만에 처음 실행한 것이다. 오늘의 참배하는 예식은 겸하여 나라의 경사를 삼가 고하기 위함이니 의당 기쁨을 기념하는 조치가 있어야겠다. 묘사(廟司)는 외직으로 승급 서용하고 참반 묘사(參班廟司)는 각각 1품계씩 올려주라. 경모궁을 참배한 후 또 친히 제물과 제기를 살펴보는 예를 실행해야겠는데, 삼가 고하는 의의가 묘사에서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궁사(宮司) 이하의 표창도 묘사 등의 예에 따라 시행하라. 도제조 채제공에게는 특별히 대표피(大豹皮) 1장을, 제조 정호인(鄭好仁)에게는 녹피(鹿皮) 1장을 내린다."
하였다.
이병모(李秉模)를 예조 판서로, 서정수(徐鼎修)를 이조 참판으로, 구윤옥(具允鈺)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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