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1권, 정조 14년 1790년 8월

싸라리리 2025. 8. 3.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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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기유

윤대(輪對)가 있었다.

 

춘당대(春塘臺)에 나가 내시사(內試射)를 거행하였다.

 

경과 증광시(慶科增廣試)의 감시 초시(監試初試)를 보였다.

 

맹산 현감(孟山縣監) 서배수(徐配修)가 상소하여 진술하기를,
"받아내기 어려운 해묵은 환자미가 2만여 석이고 신역을 이중으로 진 군정이 3, 4백 명이나 됩니다. 환자미는 견감해 주고 군액은 줄이거나 다른 고을로 이송하여 소생시킬 방법을 강구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연에 있다가 나가서 백성들의 고통을 이렇게 진술하니, 외직으로 특별히 보임한 본의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성의가 가상하고 그 말은 따를 만하다. 환자미의 폐단과 군액의 폐단이야 어느 고을인들 이와 같지 않겠는가마는, 우선 눈앞에 보이는 불쌍한 것을 살려주는 일은 성인도 오히려 어진 마음이라고 하면서 이 마음이면 임금 노릇도 넉넉히 할 수 있다고까지 하였다. 더구나 맹산이란 고을은 말[斗]만한 조그마한 고을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고통이 더욱 심하다. 비유하면 마치 제(齊)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 조그마한 등(滕)나라와 설(薛)나라 같아서 고을 수령은 세력이 없고 고을 백성들은 호소할 데가 없다. 몇 해 전부터 쌓여온 고통의 소리가 대궐 안까지 들려오므로 지탱하기 어렵다는 것을 대개 짐작할 만하였는데, 지금 너의 말이 또 그러하니 본 고을의 오래된 환자미를 특별히 전부 면제하고 군액은 우선 감영과 병영의 군관들을 2백 명까지 줄여주겠다. 너는 이런 뜻으로 민중을 위로하고 무마하여 곡식이 날로 흔해지고 호구가 날로 불어나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일 경술

춘당대에 나가 장용영(壯勇營)의 활쏘기 시험을 보이고 시상하였다.

 

6월 18일에 창덕궁(昌德宮)의 금호문(金虎門)과 창경궁(昌慶宮)의 집현문(集賢門)·홍화문(弘化門)·동용문(銅龍門)에서 번을 든 군병들의 무예를 북영(北營)에서 시험보이고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이날 선전관(宣傳官) 이희(李爔)가 합격하니, 전시(殿試)에 곧장 응시하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원군(大院君)의 봉사손(奉祀孫)이 과거에 합격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마땅히 고유(告由)의 행사가 있어야 하겠다."
하고는, 친히 제문을 지어 예조 판서 이병모(李秉模)를 보내 대원군의 사당에 고유제를 지내게 하였다.

 

우의정 김종수(金鍾秀)가 차자로 그 어미의 병을 진술하고 정승 자리에서 해임시켜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형조가 아뢰기를,
"신문고를 친 사람인 통진(通津)의 진사 유득로(柳得魯)가 남경용(南景容)의 벼슬을 회복한 실례를 들어 자기 아비인 유채(柳綵)의 죄명을 벗겨달라고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원통함을 호소하니 그의 사람됨이 매우 용렬하다. 어떤 사람은 회복하고 어떤 사람은 회복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남경용의 전례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8월 5일 계축

차대(次對)가 있었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근래에 선비들의 풍습이 옛날과 달라서 과거가 열리기 하루 전에 부(賦)·의(疑)·의(義) 같은 글을 미리 지어놓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뚱한 말로 얽어 맺는 말이 없습니다. 문장을 배열할 시권에 미리 써넣되 더러는 6, 7자씩 비워놓았다가 제목이 나오면 제목 중에 요점이 되는 글자를 비워놓은 곳에 써넣는다고 합니다. 신은 항상 이를 걱정하고 한탄하였습니다. 이번 마지막 시험 날에 유생들이 전하는 말을 들은즉, 전에는 두세 줄을 미리 쓰던 것이 지금은 10여 줄씩이나 미리 쓰는데 곳곳에서 다 그렇다고 합니다. 지금 과거보는 사람들은 앞으로 묘당에 들어올 사람들인데,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시권을 빨리 바치고 속임수로 합격하는 것만을 묘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나쁜 습관이 퍼져서 팔도가 모두 그 나쁜 습관을 본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금법을 엄하게 세워서 첫번 시험이건 마지막 시험이건 관계없이 만약 하단에 미리 글을 짓거나 써넣었다가 심사하는 자리에서 발각되면 그 유생은 연한의 제한 없이 충군(充軍)시킬 것이며, 시관이 만약 살피지 못하였다가 소문에 의해 발각되었다면 그 시관은 중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심환지(沈煥之)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병모(李秉模)를 홍문관 제학으로, 홍양호(洪良浩)를 예문관 제학으로, 김희(金憙)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8월 6일 갑인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춘당대로 돌아와 칠일제(七日製)를 보였다.

 

8월 7일 을묘

칠일제의 시권의 등급을 매기고, 하교하기를,
"이번 칠일제를 특별히 감시 초시(監試初試)의 방이 난 뒤에 실시한 것은 서울과 지방의 유생이 모두 모여 있고 과거시험의 명칭 또한 여느 과거와 다르기 때문이다. 각기 시권에다 자기 도의 이름을 쓰게 한 것은 이미 생각한 바가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개봉해 보니 수석을 차지한 자는 전부 유학(幼學)들이다. 과연 처음 생각한 것이 역시 틀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대과(大科) 급제의 자격을 주는 것을 비록 조화(造化)라고 하지만 소과(小科) 급제의 자격을 주는 것은 특별히 조화 가운데에서도 작은 조화인 것이니, 어찌 전례에 구애받겠는가. 서울 사람으로서 수석을 차지한 최재현(崔在鉉), 경기 수석 윤영길(尹永吉), 원춘도 수석 권옥성(權玉成), 황해도 수석 오익철(吳翼喆), 평안도 수석 이천용(李天用), 충청도 수석 신병(申秉), 전라도 수석 홍중섭(洪重燮), 경상도 수석 유광배(柳光培), 함경도 수석 정지춘(鄭芝春)은 모두 진사방(進士榜)에 응시할 자격을 주고, 서울의 차석인 유학 홍수준(洪秀俊) 등, 경기의 차석인 유학 이동량(李東亮) 등, 원춘도의 차석인 유학 김덕기(金德基) 등, 황해도의 차석인 진사 채일규(蔡一揆) 등, 평안도의 차석인 유학 오맹린(吳孟隣) 등, 충청도의 차석인 유학 이유일(李儒一) 등, 전라도의 차석인 유학 이인광(李寅爌) 등, 경상도의 차석인 유학 최무(崔茂) 등, 함경도의 차석인 유학 윤제겸(尹濟兼) 등 50명은 생원·진사일 경우에는 각각 1점씩 주어 증광동당 초시(增廣東堂初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고, 유학일 경우에는 증광감시 복시(增廣監試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준다."
하였다.

 

8월 8일 병진

춘당대에서 선천 내금위(宣薦內禁衛) 및 서북 별부료(西北別付料)의 활쏘기 시험을 보이고, 칠일제에 합격한 유생을 불러 보았다.

 

경기 관찰사 김사목(金思穆)이 장계를 올리기를,
"본도의 도사(都事) 송익효(宋翼孝)는 하나의 하찮은 일로 인하여 신의 감영 아전을 곤장을 치고서도 애당초 공문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도사의 수종 아전을 추궁하고 사리에 어긋난 행동을 경계하는 동시에 곤장을 사용한 잘못을 신칙하였습니다. 그는 즉시 사직서를 내면서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 보이고 또 감영 아전의 본처를 잡아보내라는 뜻으로 그 본처가 살고 있는 고을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 공문의 내용을 보니 심지어 위세에 눌려 어찌하지 못하겠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욕설을 퍼부으면서 공박하는 것은 체면에도 크게 관계되거니와 도사로서 곤장을 사용한 것도 또한 법에 벗어난 처사입니다. 먼저 파직한 다음 그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근래 도사의 폐단을 끼친 행위를 신칙한 것이 어떠했던가. 연전에 윤행리(尹行履)의 사건을 처분한 후 어느 정도 없어질 줄 알았었는데, 지금 송익효의 소행은 너무도 놀랍다. 경연에 있다가 나가서 위로 감영을 모욕하고 감사의 죄를 가지고 감영 아전의 본처를 대신 다스렸으니 기강을 완전히 무시한 정도만이 아니다. 본처를 가두지 말라는 것은 《대전통편(大典通編)》과 《수교(受敎)》의 기록에 얼마나 엄격하고 분명한가. 그런데 어찌 감히 함부로 범할 수 있단 말인가. 응당 귀양을 보낼 일이나 지금은 귀양간 사람들을 용서해주는 때이니만큼 우선 벼슬을 삭탈하고 1년 동안 금고시켜 기강을 바로 세우고 체모를 엄격히 해야겠다."
하였다.

 

8월 9일 정사

양산 군수(梁山郡守) 남학문(南鶴聞)이 상소하기를,
"근래 군사에 관한 폐단이 본군처럼 심한 데가 없습니다. 신이 부임한 후 이른바 사망한 자와 오래 전에 도망친 자를 하나하나 조사해보니 모두 3백 35명이었습니다. 현재 이를 개선할 방책으로서 그 요령이 세 가지가 있으니, 군역을 조사하여 정하는 것과, 호전(戶錢)을 실시하는 것과, 다른 고을로 떠넘기는 것입니다.
대체로 속여서 등록하는 것을 금하는 법이 매우 엄격하지만 근래에 와서 양민에 속하는 집들이 좀 재산이 있기만 하면 향교나 서원에 투신하거나 혹은 향청(鄕廳)에 의탁하여 선비로 자처하면서 군역이란 명칭이 일단 적용되면 여느 천역과는 좀 다른 선무 군관(選武軍官)이나 별기위(別騎衛) 같은 것도 백방으로 모면하려고 합니다. 지금 만약 국법을 다시 강조하여 철저히 찾아낸다면 3백여 명의 군액이야 충분히 보충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는 일개 수령으로서 독단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이 전에 들으니 관서지방의 두세 고을에서 호전법을 처음으로 실시한 결과 백성들은 원망하거나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고 군은 착취당하는 걱정이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 고을의 사정으로 말하더라도 도망갔거나 죽은 군사들의 신포를 대부분 본 마을에 독촉하여 징수하니, 이는 호포의 명목은 없어도 그 내용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만약 온 고을의 상하 민호를 통산하여 대호와 소호로 구별하고 빈호와 부호를 참작하여 그 민호에 따라 분배하여 보포(保布)를 충당케 한다면 그중 반호(班戶)에서는 처음에는 혹시 싫어하고 고통스럽게 여기겠지만 통행하는 군역이 피차간의 차이가 없을 때는 필시 모두 법령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는 조정에서 한번 명령을 내리기에 달린 것인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겠습니까.
본 고을에는 군액은 많고 백성들은 적은 것이 전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난 무오년에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1백여 명을 안동(安東)·영천(永川) 등의 고을로 떼어넘긴 결과 실로 양산 고을의 막대한 혜택이 되었습니다. 신이 위에서 진술한 두 가지는 어찌 감히 채택되기를 기대하겠습니까만 하단에 진술한 한 가지는 곧 무오년에 이미 시행한 전례이니, 지금 도망갔거나 죽은 3백여 명의 군역에 대해 절반만 도내 각 고을 중 군역이 적은 곳으로 떼어 넘긴다면 당장 죽게 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있어 이만해도 또한 큰 혜택이 될 것입니다.
신이 부임한 뒤에 들으니 본 고을의 조운선(漕運船) 1척이 웅천(熊川) 경계에 이르러 침몰되었다고 하기에 급히 아전과 군교를 출동시켜 갈고리로 건져내게 하였더니 물에 잠겼던 쌀과 콩은 1백 90여 섬이었습니다. 그것을 고을 남쪽 동원(東院) 나루터에 실어다 놓았다고 하기에 달려가 살펴보니 쌀은 형체만 겨우 남아 있고 콩은 이미 썩어서 비단 사람이 먹을 수 없을 뿐아니라 말과 소에게도 먹이기 어려웠습니다. 신이 《대전통편(大典通編)》을 가져다 상고해보니 조선치패(漕船致敗) 조항에 ‘건져낸 쌀이 부패하여 먹을 수 없는 것은 나누어 주지 말며 즉시 건져내지 못한 수령은 관찰사가 장계하여 죄를 논한다.’고 하였으므로 신은 이 사실을 감사에게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감사는 신이 부임한 것이 배가 침몰한 지 닷새 뒤라 하여 법으로 조처하지 않고 전례대로 나누어 줄 것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득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혹은 받아가지고 나가 도로 버리는 자도 있었고 혹은 가져다가 밭에 거름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썩어서 쓸데없게 된 물건을 억지로 받아가게 하고 가을이 된 후에 생판으로 물려 전량을 바치게 한다면 그 원망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늘의 상서가 많이 이르고 나라에 전례 없는 경사가 있자 전하께서는 간절한 윤음을 팔도에 반포하여 하늘과 사람에게 보답하며 경사를 축하하고 기쁨을 기념하는 방도로 삼았습니다. 그 윤음 가운데 물에서 건져낸 열등미를 나누어준 것으로서 가장 오랜된 것은 탕감해주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본 고을에는 을사년에 건져내지 못한 쌀 30여 섬을 그 이듬해 봄에 이미 바쳤으니, 올해에 건져낸 쌀·콩과 건져내지 못한 곡물에 대해서는 이미 조정의 명령이 없는 이상 감히 거론할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건져내지 못한 곡물은 담당관과 배를 부리는 자가 담당하여 마련해 바치게 하는 것이 본디 국법에 실려 있으니 의당 관례에 따라 받아낼 일이지만, 건져낸 쌀과 콩으로서 부패한 것은 백성들에게 나눠주지 말라는 법이 또한 국법에 있으니 어찌 강제로 나누어주고 독촉하여 받아낼 수 있겠습니까. 또 1백 포대도 되지 않는 소량의 쌀과 콩은 국가의 경비에 있어서도 있으나마나한 것이니, 특별히 견감을 허락하기 바랍니다. 이후에는 옛 제도를 철저히 밝혀 조운선을 침몰시킨 고을에서는 3일 내에 능히 건져낸다면 민간에 나누어 주고 그 날짜가 지나도 건져내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본 고을 수령을 중죄로 논하는 동시에 백성들에게 주어 본색으로 바꾸게 하지 말도록 하여 한결같이 정해진 법규를 따르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본 고을의 크고 작은 배는 80여 척인데 모두 균역청(均役廳)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근래에 배 만드는 재목이 극히 귀하여 사용 연한이 지나 썩고 파손되어도 개조할 길이 없습니다. 군영이나 고을에서는 다만 못쓰게 된 배의 낡은 재목을 사다가 수리하고 고치게 하는 방법을 쓸 뿐인데, 관청의 배나 개인의 배를 막론하고 못쓰게 된 배의 재목을 파는 것이 몹시 희귀하여 이것으로 고쳐 수리하는 것은 열에 한두 척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배를 버리고 도망가는 자가 속출하여 세를 바칠 때마다 이웃과 친족에게 징수하니, 이것이 실로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경내의 내포(內浦)의 봉산(封山) 30리 주위에 수백 년 묵은 소나무 중 더러는 바람에 넘어져 저절로 말라죽은 것이 있는데, 본 고을에서 수영(水營)에 보고하면 수영에서는 비장을 보내 낙인을 찍어서 일체 건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모두 3백 50여 그루나 되는데 모두 아름드리 나무로서 비바람에 씻기어 쓸모없이 썩어가고 있으니, 이 어찌 아깝지 않습니까. 특별히 금령을 좀 늦추어 유용한 재목을 영원히 버리지 말게 하고 세가 정해진 배의 백징(白徵)을 면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금년 농사는 늙은 농삿꾼들의 말에 의하면 지난 경술년에 비하여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생각이 짧아 곡식을 아낄 줄을 모르므로 한번 수해나 가뭄을 만나면 그만 이리저리 전전하게 됩니다. 또 농사의 풍흉이 과연 지나간 간지(干支)의 해와 서로 들어맞는다면 내년과 내후년은 모두 걱정스러운 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으로는 전포(錢布)를 맡은 아문과 밖으로는 영읍(營邑)에서 모두 재물을 마련하고 각종 곡식을 무역해두게 하는 것이 실로 좋은 방법이겠으나, 신이 부임한 고을은 원래 재력이 없어 손을 쓸 수 없습니다. 명년 봄의 환자미는 비록 절반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백성들은 필시 받아가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법적인 유치미 이외에 수천여 섬을 더 유치하여 다음해를 대비하는 것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신이 감히 독단할 일이 아니기에 이처럼 번거로이 호소합니다.
영남은 예로부터 산삼이 생산되는 고장으로 일컬어져왔으나, 근래에는 산삼이 점점 귀해져 집에서 심는 것이 풍속으로 되었습니다. 지금 본 고을에 부임하여 들으니 춘기에 바칠 산삼이 세 차례나 약원(藥院)으로부터 퇴짜를 맞았다고 하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담당관이 산삼 상인에게 속아 산삼도 가삼도 아닌 것을 사서 바쳤기 때문에 누차 퇴짜를 맞았고 결국에는 서울 약국에서 사서 바쳤다고 합니다. 비단 본 고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온 도내의 산삼을 바치는 고을은 모두 서울 약국에서 구해오고, 본 고장에서 찾아내 오는 것은 전무하거나 어쩌다 간혹 있는 형편입니다. 옛날에는 흔하던 것이 지금에 와서 갑자기 귀해진 이유는 인구가 불어나고 식량이 어려워 깊은 숲과 큰 골짜기에 화전을 일구고 숯을 굽는 바람에 선초(仙草)가 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벼농사에 이익을 보고 험한 산에 드나드는 수고로움을 꺼려 산삼 캐는 자가 점점 드물어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혹시 본 고을 관청이나 토호들에게 강제로 탈취를 당할까봐 두려워서 본 고장에서 팔지 않고 곧바로 서울 점포로 달려가기 때문인지 모를 일인데, 1냥쭝의 산삼 값이 돈으로 4백 꿰미나 되니 그 값이 극히 비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민간에서 책출하는 경우에는 관아에다 바치는 뇌물 등 잡비가 매번 1백여 금씩이나 되고 만약 퇴짜라도 맞으면 비용이 몇 배로 늘어날 뿐만이 아니며 으레 이른바 약보(藥保)나 약한(藥漢) 등에게 그만큼 더 받아내곤 합니다. 그러므로 해변의 궁한 백성들은 염통의 살점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겪게 되고, 서울에 사는 부유한 장사치들은 돈 상자의 저축을 몇 배로 불리게 됩니다. 이는 신이 항상 분개하여 안타까이 여기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들으니, 영남지방의 삼 폐단으로 인하여 서울의 공물로 만들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신은 무슨 구애되는 일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험삼아 본 고을을 놓고 말하면 모든 백성들이 다 말하기를 ‘서울의 공물로 만들어 시행한 뒤에야 어약(御藥)이 비로소 폐단 없이 봉진되고 영남의 백성들 또한 좀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신의 의견을 두루 물어보고 널리 수소문하여 별도로 하나의 공물로 설정한 다음, 전국 70개 고을 수령들이 한결같이 본래 제정한 삼 값에 의하여 2분기로 나누어 호조로 실어올리면서 해당한 값을 받고 바치게 한다면 바치는 약삼(藥蔘)은 반드시 배나 더 좋을 것이며 각 고을의 쌓인 폐단도 완전히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본 고을의 수해는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지난 계해년에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특별히 1만여 명의 군정을 풀어 큰 둑을 쌓아 긴 강을 가로막은 덕에 수천 섬지기의 토지가 이를 힘입어 이득을 보게 되었는데, 그 후 큰물이 자주 나서 쌓은 둑이 무너졌습니다. 근년에 들어 풍작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매년 초봄이 되면 백성들이 나서서 힘을 합쳐 수축하고 있으나 인부는 적고 공사는 커서 수고만 했지 아무런 도움이 없습니다. 만약 지금 즉시 큰 공사를 일으켜 완전하게 쌓지 않는다면 장차 온 고을이 침몰할 우려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감사로 하여금 인근 고을의 인부를 미리 배정해 놓았다가 봄이 되는 즉시 공사에 임하게 하여 한 고을 백성들이 물고기가 되는 것을 면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측근에 있다가 나가서 백성들의 고통과 고을의 폐단을 이처럼 훌륭히 진술하니 너의 성의가 가상하다. 첫째 조항의 일은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초기를 작성하여 유리한 편으로 품의 조처하게 함으로써 양산 백성들의 절급한 고통을 풀어주게 하겠다. 둘째 조항의 건져낸 쌀에 대해서는 네 말이 실로 당연하다. 금년에 본 고을에서 건져낸 쌀 1백 포대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데야 어떻게 억지로 내주고 백징(白徵)을 할 수 있겠는가. 우선 탕감해 주겠다. 여러 도의 건져낸 쌀에 대해서도 부패한 것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지 말라는 것이 법전에 실려 있으니, 너의 상소문에서 요청한 3일 동안을 기한으로 정하자는 것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초기로 회계하게 하겠다. 셋째 조항의 바람에 넘어진 나무에 관한 일, 넷째 조항의 곡물에 관한 일, 다섯째 조항의 산삼을 바치는 일, 여섯째 조항의 본 고을의 제방을 쌓는 데 부근 고을의 민정을 동원하는 일은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회계하게 하겠다. 너는 더욱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성의를 다할 것이며, 이 밖의 폐단과 고통에 대해서는 조정에 돌아온 후에 자세히 진술하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복주(覆奏)하기를,
"1. 본 고을 군보(軍保)의 폐단을 바로잡는 대책에서 논의한 세 가지 조항 중 호전법(戶錢法)은 전국 70개 고을에서 시행하지 않던 일이므로 관서지방 한두 고을의 실례를 인용하여 갑자기 새로 실시할 수는 없습니다. 군액을 떼어넘기는 일은 비록 전례가 있기는 하나 여기서 줄여서 저기에 보태는 것은 논할 방법이 못 되며 오직 군액을 조사하여 바로잡는 한 가지 일만은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양산이 작은 고을이긴 하나 무수히 투탁(投托)한 자들과 교묘하게 명색을 바꾼 자들을 일일이 조사해 낸다면 3백 명의 수효야 어찌 보충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이미 조사해 바로잡자는 말을 상소문에 드러냈는데 끝내 그 실천 방안을 강구하지 않고 돌려보낸다면 이것은 행동이 말을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각별히 신칙하여 실효가 있게 하소서.
1. 근래에 금령이 해이해져 송산(松山)이 대부분 벌거숭이가 되었으니 실로 민망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묘당에서 연해 고을에 신칙하여 말라 죽었거나 바람에 넘어진 소나무가 산중에서 저절로 썩게 하면서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입니다. 금령을 내린 지 몇 해 안 되어 곧 변경한다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만, 쓸만한 물건이 결국 쓰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아깝습니다. 또 개인의 배가 만약 이 재목을 얻지 못하면 한번 썩은 뒤에는 실로 다시 제조할 가망이 없어 필경 균세(均稅)를 백징하게 될 것을 면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특별히 허락해 주는 것도 불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1. 명년 봄에 쓸 환자미를 법적인 유치미 이외에 수천여 섬을 더 유치하여 다음 해의 저축으로 삼자는 논의는 참으로 적합한 말입니다. 수천 섬 안팎의 곡식을 적당히 더 유치하는 것을 상소문의 건의대로 실시하는 것도 불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1. 연해 고을의 수해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감사로 하여금 거기에 들어갈 군정을 헤아려보고 명년 봄에 가서 인근 고을 60, 70리 안에 사는 장정들을 동원하여 무너진 제방을 수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상소문 가운데 한 조항은 바로 산삼 공납을 서울의 공물로 만들자고 청한 일입니다. 산삼 공납에 대한 폐단이 해마다 증가하므로 서울 약국에서 납공하면 혹시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논이 관리들 가운데서도 또한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삼(羅蔘)은 토산물로 바치는 공물인데 지금 본토의 산삼을 바치지 않고 다만 돈을 거두어 서울로 보내 사서 바치게 하면 공물을 토산물로 바치는 의미가 이로부터 완전히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대체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또 서울 약국은 약원(藥院)에 대하여 혹은 청탁도 하고 혹은 뇌물도 주면서 적당히 해결할 것이므로 어약(御藥)으로 쓰이는 약이 십분 좋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이것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경연관으로서 이전에 약원 제조를 지낸 사람에게 물으니, 좌참찬 김화진(金華鎭)은 아뢰기를,
"영남의 산삼 공납을 서울의 공물로 만들자는 의논이 있으나, 원래 정해 놓은 후한 값이 이미 계획되어 있기 때문에 별로 크게 폐단이 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울의 공물로 만든 후에 또 다시 무슨 폐단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 경솔히 논의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수어사(守禦使) 정창순(鄭昌順)은 아뢰기를,
"영남의 산삼 공납에 있어 값은 영남에서 나오더라도 산삼을 서울 약국에서 산다면 서울 공물로 만든다는 명목은 없으나 그 실체는 있는 것입니다. 서울의 공물로 만들어 넘기는 문제는 제도의 변통에 관한 일이라 감히 하나로 지정하여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정민시(鄭民始)는 아뢰기를,
"영남의 산삼이 비록 토산물로 바치는 공물이기는 하나 중간에 이미 절반은 서울의 공물로 되었으니, 지금 비록 전부 서울의 공물로 만들더라도 사리에는 손상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장래의 이해 관계에 대해서는 미처 자세히 생각해보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단언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이는 제도를 개정하는 일이고 의견 또한 일치하지 않으므로 충분히 토의하여 의견이 일치된 다음에 다시 품의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채제공이 또 아뢰기를,
"상소문에는 또 조운선을 침몰시킨 고을에서 3일 내에 쌀을 건져냈을 때에는 민간에 나누어 주고 3일 지나도 건지지 못할 경우에는 해당 고을 수령에게 중죄를 적용하는 동시에 그 쌀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본색으로 바꾸게 하지 말 것을 한결같이 규정대로 하자고 말하였습니다. 건져낸 쌀로서 썩어서 먹을 수 없는 것을 민간에 나누어 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조정의 은덕이 매우 큰 것입니다. 그러나 나누어 주고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을 날짜를 정해놓고 결정한다면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될지 모를 일이니, 3일로 기한을 정하자는 요청은 시행할 수 없습니다. 그만두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10일 무오

경향의 사형수를 심사하였다.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에서 은애(銀愛)라는 여인이 그 이웃에 사는 안조이[安召史]라는 여인을 흉기로 찔러 죽였는데, 현감 박재순(朴載淳)이 검시한 결과 사실이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은애가 공초하기를,
"제가 시집오기 전에 이웃에 사는 최정련(崔正連)이란 자가 남몰래 나와 간통하였노라고 소문을 퍼뜨리고 안조이를 중간에 내세워 청혼해왔습니다. 허락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로 시집을 가자 최정련은 안조이와 함께 추잡한 말로 무고하기를 더욱 심하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 분을 참지 못하고 밤중에 칼을 들고 안조이의 집에 남몰래 들어가 먼저 그 목을 찌르고 다시 난자하였으며, 이어 최정련의 집으로 가려 하였으나 저의 어미가 말리는 바람에 그만두었습니다. 관청에서 최정련을 때려죽이기 바랍니다."
하였다. 관찰사 윤시동(尹蓍東)이 이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형조가 복계하기를,
"은애가 이미 사실을 자백하였으나 목숨을 걸고 원한을 풀었다 하여 그 죄를 참작하여 낮출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은애의 옥사가 국법으로 보면 어찌 털끝만큼인들 달리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마는, 그 정상으로 보나 나타난 사실로 보나 사건이 일어난 원인으로 보나 칼을 그와 같이 찔러댄 상황으로 볼 때, 죄를 추가할 조건이 되는지 아니면 정상을 참작해 용서할 만한 자료가 되는지 하는 문제는 일개 옥관이 결정할 일이 아니니, 좌상에게 물어서 보고하라."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좌의정 채제공에게 물으니 그는 말하기를 ‘안조이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 이웃사람들에게 퍼뜨렸으니 은애가 평소에 분하고 원통한 마음은 물론 끝이 없었을 것입니다. 시집간 뒤에도 추잡한 말이 더욱 심하였으니 여자의 편협한 성미로 반드시 보복하려는 앙심은 의당 못할 짓이 없을 정도였을 것이므로, 칼을 무섭게 휘두른 것은 응당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약법삼장(約法三章)에 「사람을 죽인 자는 죽여야 한다.」고 하였고, 이럴 경우 그 마음을 참작해 주어야 한다거나 저럴 경우 그 정상을 용서해 준다거나 하는 말은 애당초 없었습니다. 은애로서는 설사 더없는 원한이 있더라도 이장(里長)에 고발하거나 관청에 호소하여 안조이의 무고죄를 다스리게 한들 무엇이 불가하여 제손으로 칼질을 한단 말입니까. 남을 무고한 말이 아무리 통분하다 해도 그 율문이 사형에는 이르지 않으며, 원한을 보복한 일이 비록 지극한 원한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 죄가 살인에 적용된 이상 신은 감히 참작하여 용서하자는 논의를 드릴 수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판부하기를,
"세상에서 살을 에이고 뼈에 사무치는 원한치고 정조를 지키는 여자가 음란하다는 무고를 당하는 것보다 더한 일은 없다. 잠시라도 이런 누명을 쓴다면 곧 천만길 깊은 구덩이와 참호에 빠진 것과 다름없는데, 구덩이는 부여잡고 오를 수도 있고 참호는 뛰어서 빠져나올 수도 있지만 이 누명이야 해명하려 한들 어떻게 해명할 것이며 씻으려 한들 어떻게 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원한이 절박하고 통분이 사무칠 때 스스로 구렁텅이에서 목매어 죽음으로써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는 자가 간혹 있었다.
은애란 자는 18세를 넘지 않은 여자이다. 그는 정조를 지키는 결백한 몸으로 갑자기 음탕하다는 더러운 모욕을 당하였으며, 소위 안조이란 여인은 처녀를 겁탈했다는 헛된 말을 지어내 수다스럽게 추잡한 입을 놀렸다. 설사 시집을 가기 전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목숨을 걸고 진위를 밝혀 깨끗한 몸이 되기를 원할 것인데, 더구나 새 인연으로 혼례를 치르자마자 악독한 음해가 다시 물여우처럼 독기를 뿜어 한 마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자 수많은 주둥이가 마구 짖어대어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모두 자기를 비방하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원통함과 울분이 복받쳐 한번 죽는 것으로 결판을 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저 죽기만 해서는 헛된 용맹이 될 뿐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 염려되었다. 그러므로 식칼을 들고 원수의 집으로 달려가 통쾌하게 말하고 통쾌하게 꾸짖은 다음 끝내 대낮에 추잡한 일개 여자를 찔러 죽임으로써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는 하자가 없고 원수는 갚아야 한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였으며, 평범한 부녀자가 살인죄를 범하고 도리어 이리저리 변명하여 요행으로 한가닥 목숨을 부지하길 애걸하는 유를 본받지 않았다. 이는 실로 피끓는 남자라도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고, 또 편협한 성질을 가진 연약한 여자가 그 억울함을 숨기고 스스로 구렁텅이에서 목매어죽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만약 이 일이 전국 시대에 있었더라면 그 생사를 초월하여 기개와 지조를 숭상한 것이 섭정(聶政)041)  의 누이와 사실은 달라도 명칭은 같은 것으로서 태사공(太史公) 또한 이것을 취하여 유협전(遊俠傳)에 썼을 것이다.
수십 년 전에 해서 지방에 이와 같은 옥사가 있었는데, 감사가 용서해주기를 청하므로 조정에서도 이를 칭찬하여 알리고 즉시 놓아주었다. 그 여자가 출옥하자 중매쟁이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천 금을 내놓고 그 여자를 데려가려 하였고 결국 향반(鄕班)의 며느리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 은애는 이 일을 이미 시집간 후에 결단했으니 더욱 뛰어난 소행이 아니겠는가. 은애를 특별히 석방하라. 일전에 장흥(長興) 사람 신여척(申汝倜)을 살려준 것도 윤리와 기절을 소중히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이고 이번에 은애를 특별히 방면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경우이다. 이 두 사건의 줄거리와 판결하여 내려보낸 내용을 등서하여 도내에 반포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하라. 사람으로서 윤리와 기절이 없는 자는 짐승과 다름이 없는데 이것이 풍속과 교화의 일조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얼마 있다가 형조에 하교하기를,
"지난번 호남지방의 죄수 중 은애는 그 처사와 기백이 뛰어났기 때문에 특별히 방면하라는 하명이 있었는데, 그처럼 강하고 사나운 성질로 그와 같이 분풀이를 하였으니 처음에 손을 대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최정련(崔正連)이 다시 은애의 독수에 걸려들 우려가 없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은애를 살리려다가 도리어 최정련을 죽이게 되는 것이니,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젯밤에 마침 심사하여 내린 판결문을 뒤적이다가 이런 전교를 내리게 되었는데 이는 사실 공연한 생각이다. 공연한 생각이지만 사람의 목숨에 관계되니 해조로 하여금 사실을 낱낱이 들어 밝혀 해당 도에 공문을 띄워 그로 하여금 지방관을 엄히 신칙하여 다시는 최정련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할 것으로 다짐을 받아 감영에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흥(長興) 사람 신여척(申汝倜)이 이웃집 형제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참다못해 발로 차서 죽게 하였는데, 형조가 심문하여 법에 넘길 것을 청하였다. 판부하기를,
"항간에 이런 말이 있다. 종로거리 연초 가게에서 짤막한 야사를 듣다가 영웅이 뜻을 이루지 못한 대목에 이르러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풀베던 낫을 들고 앞에 달려들어 책 읽는 사람을 쳐 그 자리에서 죽게 하였다고 한다. 이따금 이처럼 맹랑한 죽음도 있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주도퇴(朱桃椎)042)  와 양각애(羊角哀)043)   같은 자들이 고금을 통하여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여척(汝倜)은 바로 주도퇴와 양각애 같은 무리이다. 형제끼리 싸우는 옆집 놈들을 목격하고 불덩이 같은 의분이 끓어올라 지난날 은혜를 입은 일도 없고 오늘날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별안간 벌컥 화가 나는 김에 싸우는 와중에 뛰어들어 상투꼭지를 거머쥐고 발로 차면서 이르기를 ‘동기간에 싸우는 것은 윤리의 변괴이다. 너의 집을 헐고 우리 마을에서 쫓아내겠다.’고 하였다. 곁에서 보던 사람이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책망하자, 그는 곧 말하기를 ‘나는 옳은 말로 말리는데 그가 도리어 성냈고 그가 발로 차기에 나도 발로 찼다.’고 하였다. 아, 신여척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법을 맡은 관리도 아니건만 우애 없는 자의 죄를 다스렸다는 것이 신여척을 두고 이른 말이 아니겠는가. 수많은 사형수를 처리하였으나 그중 기개가 있고 녹록하지 않은 자를 신여척에게서 보았다. 신여척이란 이름이 과연 헛되이 얻은 것이 아니다. 신여척을 방면하라."
하였다.

 

경상도 대구부에 사는 서응복(徐膺復)과 서응해(徐膺海) 형제가 함께 사람을 때려 죽게 하였다. 관청에서 조사한 결과 서응복이 주범이었는데 형조에서 사건을 완결지어 아뢰었다. 판부하기를,
"용서할 것인가 용서하지 않을 것인가는 우선 막론하고 조정에서는 이 죄안을 보고 교화가 펴지지 않은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대개 그들 형제가 만약 저마다 죽겠다고 다툰다면 필경에는 다같이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우매한 필부도 알 것인데 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율문에 제정된 중한 형벌을 서로 자신이 지겠노라고 하기를 저 금수만도 못한 자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겠으나, 한때 신문에서조차 서로 미루기를 마지아니하니 이들의 죄는 죽여야지 놓아줄 수 없는 것이라고 이를 만하다. 경은 감영의 뜰에 잡아다 놓고 직접 하나하나 신문하는 한편 형제간의 윤리는 오륜(五倫)에 들어 있다는 것을 타이르면서 무슨 마음으로 반드시 법에 걸려들기를 원하고 서로 구제하려 하지 않는지 그 곡절을 반복하여 자세히 밝힐 것이며, 아울러 우(虞)나라와 예(芮)나라가 송사를 그만두고 교화를 따른 대문을 자세히 해석해준 다음, 만약 자복하거든 즉시 격식을 갖추어 장계 하게 하라."
하였다. 감사가 장계하자, 형조가 복계하기를,
"대구의 서응복 형제는 추국하는 마당에서의 공초에서 서로 변명하고 따질 뿐 아니라 심지어 그 아들에게 신문고를 쳐 그의 숙부를 무함하게까지 하였으니, 동기일체의 윤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숙부는 아비 같고 조카는 자식과 같다는 의리 또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 것은 오히려 큰 문제가 아니고 윤리와 기강은 임금의 교화에 관한 일이니, 서응복 형제는 응당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하니, 판부하기를,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는 법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예절을 숭상하는 고장에서 이와 같은 패륜의 사건이 생겼으니 이는 한 지방의 수치이다. 옛날의 백성들은 형제간에 서로 죽겠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백성들은 형제간에 죽음을 서로 미루고 있다. 백성들의 우매한 것이야 어찌 고금의 차이가 있겠는가마는 위에서 정치를 잘하고 아래의 풍속이 아름답다면 이끌어주지 않아도 자연 서로 죽겠다고 하는 의리를 알 것인데, 그렇지 못하다보니 서로 죽겠다고 하는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서로 죽음을 미루려 하는 것이다. 서응복에게 무엇을 탓하며 서응해에게 무엇을 책망하겠는가. 그래서 조정에서는 스스로 반성하고 스스로 나무라면서 소홀히 보아 넘기지 않는 것이다. 지금 논계한 것으로 인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대체로 정사가 잘 다스려지지 못하고 풍속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실로 조정의 교화가 밝지 못한 탓이다. 성인이 어찌 가르치지 않고 형벌을 내리고자 하겠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조정에서 이와 같은 문안을 보면 그때마다 책을 덮고 시름겨워한 지가 오래이다. 본 사건의 진상만 가지고 말하면 죽은 자가 병이 있었건 없었건 우선 그만두고 공범이라면 공범인 것이고 불분명하다면 과연 불분명한 것이다. 이와 같은 범죄는 흔히 살려주는 조항을 적용하였으니, 감사로 하여금 서응복은 엄한 형장을 쳐서 세 차례만에 놓아주고 아울러 본 고을의 노비에 소속시킬 것이며 서응해 역시 잡아다가 세 차례의 엄한 형장을 가하게 하라."
하였다.

 

8월 11일 기미

윤대(輪對)가 있었다.

 

전 의주부 윤 이이상(李頤祥)을 불러 보고 강계(江界)의 상황을 물으니, 이이상이 아뢰기를,
"삼정(蔘丁)·화전(火田)·초서(貂鼠) 등 세 가지 큰 폐단만 완전히 없애버리면 옛날처럼 많은 인구와 넉넉한 재정을 거의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4천 호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10여 년 전 2만 호가 바치던 산삼을 바치라고 독촉하니, 백성들이 어찌 서로 이끌고 떠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민호가 줄어들고 옥토가 모두 황폐해 가고 있으며 화전을 일구는 것은 거의 없는 형편인데, 오직 비총(比摠)에 의하여 터무니없이 세를 징수하니 백성들이 어찌 억울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산삼을 바치는 것은 곧 정상적인 공납이므로 백성들은 그 정성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으나, 체삼(體蔘)과 미삼(尾蔘)을 으레 사들이는 것을 실로 한쪽 지방의 가난한 백성들에게만 전적으로 책임지우기 어렵습니다. 만약 산삼이 나는 곳으로서 산을 끼고 있는 각 고을과 진영, 북관의 6진(鎭)에 절반쯤 배정해 주고 마련해 내도록 책임지우는 것을 영원한 규례로 만든다면 떠돌아다니는 강계 백성들도 자연 금방 돌아와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화전에 대한 세는 비총에 구애하지 말고 화전을 일구는 대로만 세를 징수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초서와 산삼의 세는 원래 금법으로 되어 있으니 모두 감사로 하여금 신칙하게 하소서."
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의 조처하게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복주(覆奏)하기를,
"비록 원전(原田)이라 하더라도 일단 흉년을 만나면 따라서 재결(災結)을 주고 생판으로 징수하지 않게 하는데, 더구나 경작하고 묵히는 것이 해마다 일정하지 않은 화전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강계에서 비총에 의하여 세를 받는 규정이 무슨 연유로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난한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대체로 짐작할 만합니다. 앞으로는 비총에 구애하지 말고 일구어 경작하는 대로 세를 받는 뜻으로 각별히 신칙할 것이며, 초서세에 이르러는 탐오에 관계되는 일이니 감사로 하여금 특별히 금지시키게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채제공이 또 아뢰기를,
"6진에는 애당초 산삼이 나지 않고 삼수(三水)·갑산(甲山)·무산(茂山)에서만 난다고 하는데, 그곳도 폐사군(廢四郡)과 달라서 혹 나기도 하고 혹 나지 않기도 하여 일정하지 않고, 산을 끼고 있는 읍진(邑鎭)에 이르러서는 근래에 산삼 종자가 거의 없어졌다고 합니다. 강계 백성들이 불쌍하기는 하지만 그 고통을 다른 도와 다른 고을에 전가시킨다면 분할하여 준 곳에서는 혹시 부담을 덜었다고 하겠지만, 분담을 진 곳에서는 또한 골치를 앓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이 일은 매우 곤란하다고 봅니다."
하니, 상이 경연관 중에서 일찍이 평양 감사를 지낸 김화진(金華鎭)과 정민시(鄭民始)에게 물으니, 모두 아뢰기를,
"강계의 산삼에 관한 폐단이 심하기는 하나, 지금 한 고을의 고통으로만 되어 있는 폐단을 두 도에 끼치게 되는 것은 결코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모두 곤란하다고 하니 우선 그대로 두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홍병찬(洪秉纘)을 이조 참판으로, 신익빈(申益彬)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사관(史官)을 수원부(水原府)에 보내 새 고을 유생들에게 글짓기 시험을 보였다. ‘상황이 와서 놀았다[上皇來遊]’라는 제목을 냈는데, 상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나에게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

 

8월 13일 신유

상이 각도의 옥안을 심리하였다. 사형수들 가운데 혹시라도 살릴 수 있는 것을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까 염려하여 경기 관찰사 김사목(金思穆), 전 평안 관찰사 정민시(鄭民始), 전 전라 관찰사 윤행원(尹行元), 전 경상 관찰사 정창순(鄭昌順)·홍억(洪檍), 전 함경 관찰사 이병모(李秉模), 전 충청 관찰사 김문순(金文淳)·권엄(權𧟓) 등을 불러 보고 이르기를,
"경들이 실정을 익히 아는 정도는 필시 서울의 옥관(獄官)들이 어림짐작하거나 멀리서 헤아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니, 각자 관청에 나가서 옥안을 자세히 살펴보고 의견을 갖추어 품계하되 반드시 상세하고 신중히 하여 한 명의 죄수라도 억울하게 걸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4일 임술

이문원에서 재계하며 밤을 지냈다. 수어사(守禦使) 정창순(鄭昌順)이 상에게 고하기를,
"신이 재신 민종현(閔鍾顯)에게 들으니, 6월 임자일에 여주(驪州)에서 3일 간 단이슬이 내렸는데 그의 종제인 민이현(閔彛顯)이 민종현에게 편지로 알려왔다고 합니다. 재신 이민보(李敏輔)의 말에도, 경성에도 단이슬이 내려 그 빛깔은 밝고 빛났으며 맛은 달고 향기로웠는데 실지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두 재신 외에도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해 이달에 고금에 드문 상서를 얻었으니 어찌 경사롭고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사관으로 하여금 특별히 사책에 쓰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년에 큰 경사를 보았고 또 풍년이 든 상서가 있었으니, 단이슬이 내리는 것이야 운운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8월 15일 계해

선원전(璿源殿)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서정수(徐鼎修)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증광시(增廣試)의 문과와 무과의 시관을 불러 보고 공정한 마음으로 공무를 수행하라고 당부하였다.

 

8월 16일 갑자

증광시의 문과와 무과 초시를 보였다.

 

선혜청 제조 정창순(鄭昌順)이 아뢰기를,
"신이 전정(田政)에 대하여 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 있습니다. 신이 북쪽 변방에 있을 때 무산(茂山) 한 고을에 우선 토지 측량을 시도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교체되어 돌아왔습니다. 그후 북백(北伯)이 비변사에 보고한 것을 보니 세입이 배나 많아졌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토지 측량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만 세입의 늘고 주는 문제는 논할 것도 없고 보다 심각한 문제는 전안(田案)의 문란함이 지금과 같은 때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옥토와 박토의 구분이 없고 묵는 땅과 경작하는 땅이 서로 뒤바뀌며 토호들이 토지를 독차지하고 백성들은 고통을 받는 일들이 다 그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서도의 토지는 비록 1등급의 옥토라도 모두 하지하(下之下)의 6등급으로 되고 누락된 토지가 대부분이며 곡식이 잘되어도 조세가 없습니다. 조정에서 백성들을 동등하게 보는 도리로서 남쪽 백성들에게는 조세를 많이 받고 서쪽 백성들에게는 조세를 적게 받는 것이 어찌 ‘조세는 적은 것을 걱정하기보다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한다.’는 본의이겠습니까. 조정에서 토지를 다시 측량한다는 명을 내린 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으나 아직까지 실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각도의 감사들 가운데는 출중한 사람이 많습니다. 만약 3, 4년 기한으로 수령들 가운데서 일을 할 만한 사람을 뽑아 1년에 혹 10여 고을이나 20여 고을씩 고쳐 측량하게 한다면 그 일을 기획 실시함에 있어 자연 잘하는 자도 있고 잘하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웃 고을에서 반드시 유능한 자에게 와서 본을 받아 서로 모방하게 될 것이며, 유능하지 못한 자도 또한 모두 애써 따라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듣건대, 수령들 중에는 토지를 고쳐 측량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드는 지필묵(紙筆墨)의 비용이 많아 이것을 민결(民結)에서 받아내자니 민원을 살까봐 두렵고 자기 주머니에서 내자니 갑자기 마련하기 어려워서 중지하는 자가 간혹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토지를 측량하는 것은 곧 백성을 위한 큰 정책이므로 각기 토지 면적에 따라 비용을 마련하여 바치는 것이 또한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어찌 작은 비용을 아끼어 해야 할 일을 그만 중지하겠습니까. 지금 감사가 된 자로서 그 누구인들 이것을 모르겠습니까마는 조정이 당초에 연한을 정하여 재촉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관망하기만 하면서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경기 감사도 방금 입시하여 경연에서 하교를 받기는 하였습니다만, 그 마음속에는 내가 비록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장에 문책이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고 뒤에 필경 할 만한 사람이 있겠거니 하면서 오늘내일 미루는 것입니다. 지금같이 풍년든 해에 고쳐 측량하는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전정(田政)에 관한 일은 다시 실시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연한을 정하고 경기 고을에 실시할 것으로 사목(事目)을 토의 결정하여 특별히 신칙하게 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는 행정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중대한 일로서 곧 백성을 위하는 급선무이며 요로인 것이다. 전에 내린 하교가 진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사실 경의 말처럼 서로 머뭇거려 오늘도 내일도, 작년도 올해도 그저 미루는 것을 전례로 간주하고 있다. 수령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 도를 맡은 반열에 있는 자가 백성에 관한 일을 보기를 이처럼 소홀히 하니 이 어찌 몹시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공수(龔遂)와 황패(黃霸)처럼 유능한 수령이 나오길 기다려 측량하려 한다면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황하가 맑아지는 날은 있어도 공수와 황패 같은 자를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지금 만약 우선 시행할 만한 곳부터 먼저 착수한다면 다른 고을 수령들 또한 유능한 자는 순순히 따라 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그에 따라가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중에 감당하지 못하는 자와 또 이를 빙자하여 재물에 손을 대어 제 배를 채우려는 자에 대해서는 감사가 있는 이상 그 어찌 작은 일이면 주의를 주고 큰 일이면 논죄하는 조처가 없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하기가 어렵겠는가. 이는 실로 하지 않는 것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토지를 측량하는 일은 곧 내가 일찍부터 백성들을 위하여 늘 잊지 않고 있던 것이다. 마침 경의 말을 들었고 또한 경기 감사에게 명한 것도 있다. 경이 아뢴 것을 거조(擧條)에다 내고 묘당으로 하여금 경기와 영남 호남의 가장 착수하기 좋은 곳부터 먼저 착수하고 그 실태를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그 임기를 길게 한 연후에야 자기의 일처럼 여기게 되고 그 성과도 요구할 수 있다. 고쳐 측량한 고을의 보고가 올라온 후에도 해당 도의 감사는 일이 다 끝나기 전에는 비록 임기가 찼더라도 절대로 교체하지 말 것이며, 수령은 더욱 감사와 다르니만큼 비총(比摠)에 따라 조세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민원과 민폐가 없은 뒤에야 비로소 감사로 하여금 장계로 전보 이동을 청하게 하라. 앞서 거창(居昌) 고을의 수령을 놓고 말하더라도 대간의 규탄이 번갈아 있었지만 한결같이 불문에 부치고 끝까지 그 성과만 기대하였으니, 혹시 잘못하는 일이 없는데 떠도는 비방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또한 어찌 살펴 아는 방법이 없겠는가. 이러한 뜻을 미리 알고 있으라. 3개 도 이외의 각도에 대해서도 어찌 거론되지 않았다 하여 그냥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앞서 조정의 명령이 여간 진지하지 않았으니 실시할 만한 곳은 즉시 실시해야 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계속 조정의 명을 번거롭게 하겠는가."
하였다.

 

증광시의 문과와 무과 초시를 보였다.

 

서울과 지방의 살인 사건을 심리하였는데, 살려준 것이 1백 95명이고 다시 조사할 것이 3명이고 그대로 추문할 것이 4명이었다.

 

8월 17일 을축

안태사(安胎使) 오재순(吳載純)이 복명하니, 상이 불러 위로하고 상을 내렸다. 오재순과 도차사원(都差使員) 보은 현감(報恩縣監) 김재익(金載翼)은 가자하고, 배태관(陪胎官) 조헌택(趙憲澤)은 품계에 걸맞는 벼슬에 임명하고, 본도의 감사 정존중(鄭存中)에게는 호피(虎皮) 1장을 하사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여러 도의 군사를 조련하는 곳의 순찰 점검을 그만둘 것을 규정으로 정하였다. 충청도 관찰사 정존중이 각 영장(營將)의 순찰 점검을 그만두는 것을 장계로 청하니, 전교하기를,
"장계의 요청에 따라 시행하고 다른 도의 경우도 호서의 관례대로 하라. 앞으로는 각도에서 군사를 조련할 때 순찰 점검하는 것을 이중으로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묘당으로 하여금 알고 있게 하라."
하였다.

 

8월 20일 무진

차대가 있었다. 상이 좌의정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수어사(守禦使) 정창순(鄭昌順)이 토지를 측량하자는 의견을 올렸는데 경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서쪽 변방에 감사로 있을 때 백성들이 가을 순찰길을 막고 흉년이 거듭 들었다고 호소하기에, 신이 장계를 올려 급재(給災)하도록 하겠다는 뜻으로 답하였으나 백성들은 들은체만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처음에는 매우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근래에 들으니 본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모두 6등급으로 잡혀 납세가 매우 가벼우므로 급재를 하고 안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관서지방은 곧 변방이므로 애당초 조세를 가볍게 한 것은 옛사람들의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온 도의 토지를 전부 6등급으로 잡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고쳐 측량한다면 고을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킬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이것이 난처한 일의 한 가지입니다. 또 토지를 측량하는 일은 전적으로 고을 수령에게 달려 있는데, 수령이 만약 적임자가 아니라면 아전들의 온갖 협잡을 어떻게 단속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주저하는 이유입니다."
하였다. 정창순이 아뢰기를,
"대신은 실로 지나친 걱정을 합니다. 설사 요(堯)·순(舜) 같은 임금이 위에 있고 후직(后稷)이나 설(契) 같은 신하가 밑에 있다 하더라도 한두 명의 농간부리는 자가 없으리라는 것은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위에서 엄격히 단속한다면 어찌 감히 농간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근래의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한 가지 규모가 있어 수령들이 크게 잘 다스리는 사람도 없고 크게 잘못 다스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있어 충분히 해내고 있으므로 신은 토지를 측량하는 일은 옛날에 비하여 더욱 쉽다고 봅니다."
하고, 호조 판서 정민시(鄭民始)는 아뢰기를,
"대신이 아뢴 말은 소동이 있을 것을 염려하였는데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토지를 측량하는 일은 오로지 경계를 바로잡기 위한 것입니다. 서북지방의 토지의 등급은 이미 정해졌으니 더 올리지만 않는다면 무슨 백성의 소란이 일어날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선 시도해 보는 의미로 먼저 영남과 호남에 실시하라. 경기는 먼저 교하(交河)부터 시작하자는 뜻으로 이미 경기 감사에게 알렸다. 가장 실시하기 좋은 곳부터 시작하되 비록 서북지방이라고 하더라도 자원하는 고을이 있으면 또한 허락하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대개 근래에 모두들 경자년의 양안(量案)을 거론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정민시가 아뢰기를,
"임진년 이후에 처음 측량한 것이므로 거론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후의 양안을 모두 뽑아낼 수 있겠는가?"
하니, 정민시가 아뢰기를,
"팔도의 양안이 모두 호조에 있으므로 뽑아낼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궁방(宮房)에서 토지를 떼어받는 문제는 어찌 고민거리가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는 토지는 더 개간되지 않는데 각 궁방에서 받는 것은 점점 늘어나니 호조에 들어오는 기본 조세가 줄어들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특별히 하사하는 토지는 정해진 한계가 없기 때문에 갈라 받는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니 이 법을 응당 변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대신 줄 것을 강구한 후라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도장(導掌)044)  들에 의하여 사사로이 서로 매매한 것까지 하루아침에 잃게 된다면 이 역시 가엾고 딱한 일이다."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태조 때부터 지금까지 4백 년 동안 내려오면서 갈라 준 토지가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왕자·왕손이 계속 태어나고 또 억만 년에 이르게 되면 갈라 받는 토지가 점점 많아져서 원래의 조세는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이것이 실로 고민입니다."
하였다.

 

어영 대장 이주국(李柱國)을 교체하고 이한풍(李漢豊)으로 대신하였으며, 이방일(李邦一)을 총융사로 삼았다.

 

도형(徒刑)·유형(流刑)에 처한 죄인의 처첩으로서 따라갈 것을 자원하는 자는 율문에 따라 허락해 주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오늘 마침 잡과(雜科)에 합격한 생도를 불러 보고 시험친 대목의 글을 듣다가 《대명률(大明律)》의 유배 죄수 가족에 대한 조항에 ‘모든 유형죄를 범한 자는 처첩이 따라갈 수 있다.’는 문구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경청하게 되었다. 이에 율관을 시켜 그 책을 가져오게 하여 펼쳐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대개 《대명률》의 조항이 엄격하지만 그 엄격한 중에서도 관대한 것으로 조절한 데에서 법을 제정한 본의를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우리 나라의 법이 관대한 것은 바로 선대로부터 물려오는 가법이 아닌가. 선대의 뜻을 계승하려는 나의 마음으로 이미 미처 손을 쓰지 못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상에야 어찌 수정할 방법을 생각지 않겠는가. 근래의 실례로서 도형·유형에 처한 자의 처첩이 따라간 일이 없었다. 가난하여 자력으로 데리고 갈 수 없는 자에게 강제로 데리고 가라고 할 것은 없다. 만약 강제로 데리고 가게 하면 이는 도리어 전가 사변(全家徙邊)의 율이 되므로 논할 일이 아니지만, 만약 사정이 절박하고 또 자력으로 데리고 갈 능력이 있는 자는 율문에 의하여 따라가도록 허락하는 것이 형벌을 신중히 하는 하나의 정사가 될 것이다. 법관으로 하여금 이를 알고 있게 하라. 서울과 지방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방에서 귀양보내는 것도 이에 준하라."
하였다.

 

헌납 권회(權恢)가 상소하기를,
"북관지방은 곧 조종의 왕업이 일어난 고장입니다. 4대 대왕의 후예가 세대가 멀어짐에 따라 벼슬이 오랫동안 끊어짐으로써 평민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벼슬에 등용하는 은전을 베풀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결함이 아니겠습니까. 본도에는 8개의 능과 1개의 전(殿)이 있는데 이에 대한 침랑(寢郞)이 모두 합하여 14자리가 되며 그중에서 초사(初仕)의 자리가 7자리나 됩니다. 만약 이중에서 2, 3자리만 갈라내 4대 대왕의 후손을 뽑아 쓸 자리로 만들고 인망과 학식이 재랑(齋郞)에 합당한 자를 감사로 하여금 각읍에서 골라 후보자로 추천하여 이조로 올려보내 낙점을 받아 차임하게 한다면 참으로 먼 조상을 추모하고 종친의 의리를 돈독히 하는 성세의 거룩한 은전이 될 것입니다. 삼가 헤아려 조처하시기 바랍니다.
전라도의 옛 여수현(呂水縣)은 순천부(順天府)와 좌수영(左水營) 사이에 있는데, 순천과는 1백여 리나 떨어져 있고 수영과는 30리 안에 있습니다. 처음에 여수현이 없어지게 된 것은 수영을 설치함으로 인하여 순천에 합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닷가의 영세한 백성들이 이쪽 저쪽으로 역무를 부담하게 되자 온갖 폐단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지난 을사년에 여수의 백성들이 비변사에 여러 번 호소문을 올렸고 또 대간의 상소로 인하여 수사로 하여금 여수까지 관할하게 하라는 하교를 특별히 받았는데, 이듬해 순천의 아전과 향임이 순천 백성을 여수 백성으로 가장시켜 여수 고을을 회복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뜻으로 상을 기망한 결과 즉시 여수를 없애고 순천에 소속시켰던 것입니다. 이에 여수 백성들은 너무도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순천 아전의 간교한 죄상을 대략 갖추어 다시 상문하려던 차에 순천부에서 그 기미를 알고 추격하여 잡아다 놓고 심한 곤장을 쳐서 5, 6명은 죽고 3명은 귀양가고 8명은 군에 보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수 백성들의 지극한 원한은 이미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영과 순천부 사이에서 생기는 민폐의 대략을 보면 군정을 양쪽에서 같이 보충시키는 것, 환자미를 여기저기서 받는 것, 신역의 대가를 여기저기서 징수하는 것, 부역을 이중으로 지는 것들입니다. 이 밖에도 허다한 고질적 폐단이 모두 전 수사였던 구세적(具世勣)과 이형원(李亨元)의 장계 속에 들어 있는데 그것이 비변사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만약 여수현을 회복하기로 결정한다면 관청 건물과 창고가 고스란히 옛날 그대로 있기 때문에 국비와 민력이 따로 들어갈 것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옹진(瓮津)의 관례에 의하여 수영으로 하여금 여수를 겸해 관할하게 하여 백성을 안정시키고 관방을 굳건히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또 영남의 민폐로 말하면 거제(巨濟)·웅천(熊川)·고성(固城)·김해(金海)·창원(昌原)·진해(鎭海)·칠원(漆原)·남해(南海)·사천(泗川)·곤양(昆陽)·하동(河東) 11개 고을은 모두 한쪽이 바다에 접해 있으므로 백성들의 생활이 다만 고기잡이에 있을 뿐이었는데, 균역청을 설치한 뒤로는 각 해당 고을이 어장의 좋고 나쁜 것을 막론하고 숫자만을 따져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세를 받아 위에 바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병신년부터 통영(統營)에서 관청 비용이 부족하다 하여 11개 고을의 어장세를 3년을 기한하고 균역청에서 빌려냈습니다. 그러나 균역청에 바치는 것은 여전히 그대로 있어 줄지 않고 통영에 바치는 것은 없던 것이 덧붙여져서 더욱 가혹하였습니다. 한 지방에서 두 곳에 세를 바치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무술년에 이르러서는 통영에서 또 백성들의 고질적인 폐단을 창출한 것이 4가지가 있으니, 어장 가운데서 좋은 곳은 각 관청에 분속시켜 영문(營門)에서 팔아버리게 하는 것이 첫째이고, 고기잡이를 할 때가 되면 영문의 장교와 군사들이 감독을 한다고 하고 또 잡다한 어세를 배마다 5냥씩 바치라고 성화처럼 독촉하는 것이 둘째이고, 앞서 신축년에 조정에서 거제(巨濟)에 사는 탁가(卓哥)의 아내가 올린 호소문에 의하여 멸어(蔑魚)의 세를 배마다 5냥씩 바치는 규정을 영원히 없앴는데, 근래에 영문에서 멸어라는 명칭을 소어(蘇魚)라고 고쳐 배 1척의 세를 7, 8냥씩 더 징수하면서 이것을 기본세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셋째이고, 이른바 관청에서 판 것 외에 수입을 잡을 가치가 없는 곳은 모두 쓸모가 없는 지대인데도 세를 받아들일 때에는 좋은 어장과 조금도 차이를 두지 않는 것이 넷째입니다. 한 곳에서 두 차례의 세를 무는 것도 지극히 원통한 일인데, 지금 이 어장의 세는 균역청에 하나가 있고 통영에 셋이 있어 1년 동안에 모두 네 가지나 됩니다. 그리하여 떠나는 백성이 속출하여도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각 포구의 백성들이 참다못해 감영과 비변사에 글을 올리면 비록 공문을 띄워 조사해 보라는 명령이 내려가기는 하나, 통영에서는 어장의 이득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실태 조사는 고사하고 도리어 글을 올린 소두를 잡아다가 반 년씩이나 가두니 옥에서 살아나오는 것만도 다행이고 가산을 탕진하는 것은 오히려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감히 위에 알리지 못하고 위에서는 굽어 살피지 못하니, 이 지극한 원한을 언제 풀 수 있으며 이 고질적 폐단을 언제 없앨 수 있겠습니까. 만약 통영에 조사를 실시한다면 결국 백성들에게 낭패만 안겨주게 될 것입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전하의 결심으로 단안을 내려 각 해당 고을 백성들에게 세금을 이전 규정대로 계산하여 배정한다면 11개 고을 바닷가의 백성들이 만백성을 동일하게 보살펴주는 혜택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 어찌 만대를 내려가면서 칭송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의 조처하게 하였다.

 

증광시 문과와 무과의 초시를 보였다.

 

8월 21일 기사

석왕사(釋王寺)에 비석을 세울 것을 명하고, 하교하기를,
"석왕사 고적은 국사에도 실려 있거니와 국초에는 어필(御筆) 판각이 봉안되어 있었고, 숙묘조와 앞서의 임금 때에는 모두 어제 어필의 비문이 있었다. 그리고 인목 대비(仁穆大妃) 무신년과, 인원 대비(仁元大妃) 무신년과, 왕대비(王大妃) 무신년에 본사를 중수하였는데, 지난번 재계하면서 밤을 지내던 날 앞서 감사를 지낸 사람에게 들으니 과연 그러했다. 내가 고사를 계승하는 뜻으로 기문을 지어 비를 세우고자 하는데 비문은 내가 직접 짓겠다. 비각을 세우고 비를 세우는 것은 먼저 임금 때의 가까운 실례에 의하여 해당 도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고 비문을 내려보내는 즉시 공사를 시작하도록 하라. 백성들에게 폐를 끼칠 수 있는 일들은 각별히 경계하고 공사에 드는 비용은 모두 관청 곡식으로 계산하라."
하였다.

 

8월 22일 경오

사역원(司譯院)·전의감(典醫監)·관상감(觀象監)의 제조와 형조의 당상관을 시켜 잡과에 합격한 사람들을 데리고 입시하게 한 다음 직접 글짓기와 강받기를 시험보였다. 사역원에서는 박사경(朴思敬) 등 5인을, 관상감에서는 피상인(皮尙仁) 등 3인을, 의과(醫科)에서는 김상령(金尙鈴) 등 2인을, 율학(律學)에서는 안택주(安宅周)를 뽑아 모두 급제를 주었다.

 

8월 23일 신미

비변사가 원춘도 관찰사(原春道觀察使) 윤사국(尹師國)의 장계로 복계하기를,
"장계에 의하면 ‘해변의 민호에 대한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어 말끔히 없애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중에도 진상할 때에 드는 정채(情債), 봄가을에 드는 감영의 수요, 특별 공물의 배정, 특별 무역 등 조항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대개 진상을 감영의 공납으로 만들고 매년 일정한 규례로 내어주는 원가가 쌀은 70여 섬이 되고 돈은 70여 냥인데 이것을 받아가지고는 공납을 마련할 가망이 없습니다. 감영과 고을 하인들에게 드는 정채가 임인년에 3천 1백 28냥으로 감축되었으나, 그중 1천 6백 18냥은 명목이 분명하여 다시 더 가감할 데가 없고 1천 5백 10냥은 바로 영주인(營主人)의 노임이니, 그 대가를 지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주인의 정채 1천 5백 10냥에서 1천 냥은 명년부터 탕감하고 5백 냥만 거두게 하되, 탕감한 1천 냥의 대가는 보삼고(補蔘庫)의 돈에서 5천 냥을 갈라내어 26개 고을의 삼상(蔘商)에게 나누어 주어 20분의 2로 이자를 늘려 보태어 해마다 1천 냥을 대신 줘야겠습니다. 그러나 돈의 출납이 오래되면 반드시 폐단이 생기므로 앞으로 6년째인 병진년까지만 시행하면 6년 후에는 변통할 길이 있을 것입니다.
을사년에 인삼 공납을 실시할 때 상평창(常平倉)과 진휼청(賑恤廳)의 곡식을 더 나누어 주고 이자를 불린 속에서 환산한 쌀 1천 5백 섬을 8년을 기한으로 정해 공제했는데 8년 기한은 바로 임자년입니다. 지금 만약 또 4년 동안 기한을 물려서 계축년부터 병진년까지 해마다 1천 5백 섬의 전수량을 보삼고의 환자에 넘긴다면 4년 내에 6천 섬이 될 것이며, 이듬해 정사년부터 시작하여 이자 6백 섬을 상정법 규례에 의하여 돈으로 만든다면 1천 8백 냥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정채의 대가로 준다면, 보삼고 돈의 이자를 늘리는 규정으로 5백 10냥을 거두어 바치는 각 포구의 폐단은 지금부터 6년 뒤에는 영원히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돈으로 만드는 것은 한결같이 시가에 따르되 1천 5백 10냥 이외에 나머지가 있으면 도로 환자미로 만들어 보삼고 환자에 더 등록하고, 감영의 수요에 대해서는 금년 가을부터 시작하여 고기와 미역 등의 물건에서 3분의 1을 감해주도록 허락하여 특별 공물의 배정과 특별 무역을 영영 없애버려야겠습니다.
사찰의 폐단으로 말하면 절이 퇴락하고 승려의 수가 작기는 어느 곳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종이감의 배정, 길잡이를 세우는 것, 하인들을 침해하는 것, 견여(肩輿)를 메는 군정, 돌을 다듬고 나무를 조각하는 등 별의별 부역과 이러저러한 갖가지 관청 공납이 번다하고 과중하기 때문이었는데, 재작년에 이미 조정에서 없애고 금지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바로잡아야 할 폐단은 종이감과 미투리 같은 물건의 상납에 불과하니, 이는 신의 감영에서도 금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안사(長安寺)는 본도에서 가장 오래된 큰 절인데 태반이 퇴락되고 승려들도 4, 5명에 불과하니, 신의 감영에서 물자와 인력을 내어주고 본 고을을 시켜 돈과 쌀을 좀 도와주어 재목을 모아 공사를 시작하게 해야겠습니다. 이 밖에 승려를 머물러 살게 할 대책과 사찰을 소생시킬 방도에 대해서는 우선 감영과 고을에서 충분히 논의한 뒤에 계문하겠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일정한 규례로 주는 원가가 부족한 것과 감영의 공물로 만든 것은 그 형세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정채의 폐단을 변통하자는 조건은 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각 고을의 영주인은 대부분 감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각 고을의 진상 물품이 감영에 도착하면 그 물건의 접수는 반드시 영주인이 하게 되고 감영의 일을 주선하는 것도 또한 영주인을 거치게 되니, 지금 비록 별도로 노임을 주고 정채를 영원히 없앤다 하더라도 시일이 오랜 뒤에는 정채를 무리하게 받아내는 일이 꼭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변통한 후에는 과연 능히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철저히 금하여 영원히 폐단이 없을지의 여부를 다시 물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인들에게 드는 정채 1천 6백 냥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서울 관청에서 부리는 사람들에게 조정에서 규례로 정하여 주는 정채와는 다른 것이니, 이를 줄이든 없애든 어찌 그 방도가 없겠습니까. 그 규례를 그대로 두자는 요청은 사리와 체면에 문제가 있습니다. 해당 감사를 추고하고 이 두 가지 조항을 다시 사리를 따져 장계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감영의 수요에 응하는 물품을 3분의 1로 특별히 감해주고 특별 공물을 배정하는 것과 특별 무역을 영영 없애버리자는 것은 매우 적합합니다. 사찰의 폐단 중 종이감과 미투리를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을 영원히 금지시키고, 승려들을 머물러 살게 하며 사찰을 소생시키는 방도를 감영과 고을에서 충분히 논의하여 장계하겠다는 것은 장계의 요청대로 시행해야겠습니다. 장안사를 수리하는 공사도 또한 감독하고 신칙하여 실효를 거두도록 하라는 뜻으로 다같이 분부해야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장계의 말이 매우 정밀하고 자세하다. 문책할 일은 그만두겠다. 여러 가지 고칠 폐단에 대해서는 한가지로 결정짓고 빨리 항목을 만들어 장계로 보고하여 실효가 있도록 하라. 바닷가 민호에 대한 폐단은 듣지 않았으면 모르거니와 이미 들었고 또 바로잡으라고 명하였는데, 약간의 정채는 감해 주더라도 다시 생겨날 것이니, 역시 위를 덜어서 아래를 보태주는 도리에 어긋난다. 진상 물건과 감영의 수요는 원래 정한 수효를 특별히 바로잡는 일이 있어야 얼마간의 고질적인 폐단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백성은 한가지인데, 육지의 백성은 어찌하여 2필에서 감하여 1필의 신역으로 만들고 해변의 민호는 어찌하여 1년에 1인에게 징수하는 것이 거의 30냥 내외를 넘는다고 하는가. 이런 포악한 정사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본도의 해변 민호에 대한 폐단을 익히 들었다. 본도의 공납으로서 달마다 바치는 물선을 입에 대지도 않은 지가 벌써 오래이다. 입에 대지도 않는 물건을 전례대로 봉진한다는 것은 어찌 너무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지역 토산에 따라 바치는 것은 그 사체가 자별할 것이니 비록 옛 제도를 보존하는 의미로 우선 명목은 그대로 둔다 하더라도 가장 긴요치 않고 쓸데없어 똑같이 폐단만 끼치는 것이라면 적당히 감해주는 것도 또한 불가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팔도 중에 달마다 바치는 생선의 물종이 많기로는 본도가 으뜸이지 않은가. 경들이 물선 공납의 규례를 살펴본다면 그 수효를 알 수 있을 것인데, 그 이유가 혹시 옛날에는 어물과 해변의 민호가 많고도 흥성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많이 배정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폐단을 없애는 것은 공납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도내 산간과 해변 고을에서 경사(京司)에 바치는 것은 달마다 바치는 물선 및 약재, 기타 물종을 막론하고 별도로 책을 만들어 일정한 규례로 값을 받는 규정과 공물을 마련하기가 어렵고 쉽고 하는 등의 사항을 그 명목에 따라 주를 달아 즉시 장계로 보고하게 한 뒤에 본사(本司)에서 사리를 따져 품의 조처하도록 하라. 이에 앞서 폐단을 바로잡으라는 명을 내린 지 이미 오래인데 요즘에야 비로소 계문하였으니, 너무 느리고 소홀히 한다. 이제는 조금도 지체하지 말라는 뜻으로 일체 신칙하라."
하였다.

 

8월 25일 계유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8월 26일 갑술

감시(監試)의 복시(覆試)를 보였다.

 

8월 27일 을해

문관과 무관에게 강받기와 글짓기를 실시하고 일차 유생(日次儒生)들에게 전강(殿講)을 실시하였다. 문과 초시에서 여러 문체에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보았다. 유생 전강에서 순통(純通)을 한 유학(幼學) 서유구(徐有榘)를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하게 하였다.

 

8월 28일 병자

차대(次對)를 가졌다. 이어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를 실시하고 일차 유생들에게 강경(講經)과 제술을 실시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이번에 진사들을 곧바로 전시에 응시하게 한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어서 예조에서 지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품의하여 결정한 후에야 백패(白牌)에 좌차를 써넣을 수 있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명절 때 제술 시험에 합격하여 곧바로 전시에 응시한 경우의 방목으로 좌차를 정하여 원방(元榜)의 밑에 첨부하라."
하였다.

 

이날 응제 유생(應製儒生)들이 나이 순서를 차리지 못하여 좌차가 들쭉날쭉하므로 하교하기를,
"상사(上舍)의 유생은 사학(四學)의 유생과 다르고 더구나 편전에 불러들여 시험을 보이는 것은 특별한 은전이니, 어찌 배나 더 공경하고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대궐 뜰에 들어올 때부터 조용히 걷고 단정히 공수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는 보지 못하였다. 심지어 과제를 내걸고 시험지를 나누어 줄 때에도 앞다투어 가져가 뒤섞여 앉았다. 성균관에서 나이 순서를 높이는 예절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으니, 수치를 끼친 것이 크다. 입궐한 성균관의 장의(掌議)와 색장(色掌)을 모두 정거하고 과장에 나온 승지와 대사성을 추고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일차 유생의 시험에서 제술로 수석을 차지한 생원 이인묵(李寅默)은 본 과목인 강경에서 순통(純通)한 것과는 다르나 일찍이 급제를 준 전례가 없다. 곧바로 회시에 참가하게 하고, 차석을 차지한 진사 김수신(金秀臣) 등 6인에게는 각각 높은 점수를 주라. 증광 초시가 이미 지났으니 형편상 시취하기는 어렵다. 좌차를 정해두었다가 오는 회시 때 초시 명단 밑에 붙여 응시하게 하라. 추도기(秋到記)와 구일제(九日製) 시험에 높은 점수를 얻은 자도 이에 준하게 하라."

 

김기성(金箕性)을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삼았다. 상이 좌의정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청나라 황제가 각별한 은전을 많이 내렸으므로 사신을 골라서 보내려 하는데 대신들은 모두 다 늙었다. 광은부위(光恩副尉) 김기성을 차임하여 보내려 하나, 우리 나라의 전례를 보면 오직 동평위(東平尉) 한 사람밖에는 없었던 일이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
하니, 채제공이 특례로 뽑아 보낼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곧 김기성을 정사로 삼았다.

 

홍병찬(洪秉纘)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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