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1권, 정조 14년 1790년 9월

싸라리리 2025. 8. 3. 20:02
반응형

9월 1일 무인

윤대가 있었다.

 

9월 2일 기묘

춘당대에 나아가 장용위의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증광 감시의 회시(會試)를 보였다.

 

도당(都堂)에서 한림 추천의 권점 모임을 가졌다. 【 춘추관 감사 채제공(蔡濟恭), 홍문관 제학 홍양호(洪良浩), 지춘추관사 이갑(李𡊠), 동지춘추관사 민종현(閔鍾顯)·엄사만(嚴思晩).】  4점을 얻은 자는 서유문(徐有聞)·심능적(沈能迪)·홍낙유(洪樂游)·이중련(李重蓮)이었다.

 

경기 관찰사 김사목(金思穆)이, 내수사 별제(內需司別提)가 명령을 받았다고 핑계하면서 교자를 가지고 정처(鄭妻)045)  를 안치해둔 곳에 이르러 죄인을 싣고 서울로 올라가게 하였다는 이유로 파주 목사 정언형(鄭彦衡)을 법에 의해 엄히 치죄할 것을 장계로 청하니, 하교하기를,
"파주 목사는 그저께 활쏘기 시험을 치르는 일로 불러 대기시켰다가 날이 저물어 하루 이틀 동안 더 기다리게 하였으니, 비록 자리를 이탈하지 않으려고 한들 되겠는가. 더구나 올라올 때 순영(巡營)에 보고한 것도 파주목의 아전이었으니, 이 파주 목사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또 더구나 파주 목사는 중로에까지 달려가 죄인을 데리고 본 고을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경은 은근히 그 공로를 고양(高陽) 원에게 돌리고 있다. 경의 종제에 대해서는 두둔하기에 여념이 없고 무죄한 파주 목사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그 죄를 성토하려 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벼슬은 비록 낮다 하여도 역시 왕명을 수행하는 관리인데 일개 지방관이 어찌 감히 앞길을 막고 말이 끄는 수레를 함부로 막고 나선단 말인가. 이는 다만 망녕되고 경솔하다고만 말할 수 없다.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훗날의 폐단을 방지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징계하는 조치가 없을 수 있겠는가. 고양 군수 김사의(金思義)는 현재 그가 있는 지역에 귀양보내라. 그리고 대령하라는 명이 있었는데도 무단히 앞질러갔으니 죄가 없을 수 없다. 파주 목사 정언형도 잡아다 심문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과 삼사(三司)의 제신들이 면대를 청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일이 이미 순조롭게 끝났으니 물러가라."
하였다. 제신들이 그래도 합전에서 물러가지 않으므로 모두 교체할 것을 명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면대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지금은 소요를 일으킬 때가 아니다. 이미 이렇게 갈등이 있는 이상 서로 맞설 필요가 없으므로 특별히 면대를 청한 본의를 따르겠으니, 즉시 물러가라."
하였다.

 

교리 이정운(李貞運), 부교리 김한동(金翰東), 수찬 이석하(李錫夏)가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기를,
"조금 전에 면대를 청한 것은 전에 없던 변고를 보고 전하의 마음에 호소하여 우러러 처분을 청하려던 것이었으니, 이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떳떳한 도리상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응당 굽어 살펴야 할 일인데 승지를 지레 교체하고 대간을 엄하게 물리쳤으니, 어찌하여 이와 같은 과도한 조치를 내리십니까. 아, 유사 이래 정치달(鄭致達)의 처와 같이 극도로 흉악한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국법을 펴지 못한 것도 오늘과 같은 적이 또 언제 있었습니까. 삼사의 규탄이 지금 몇 해를 끌어가면서 나라의 역적과 한 하늘 밑에 살고 있는 것은 모두 신 등의 죄입니다만, 오늘날 독단으로 행동한 행위에 있어서는 실로 천만 뜻밖의 일입니다. 지금 이 행위는 누가 그렇게 시켰습니까. 역적 인(䄄)이 몰래 빠져나가는 변고를 오늘에 와서 다시 볼 줄은 실로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전하의 뛰어난 식견으로 이 일이 사리로 보아 천만 부당하다는 것을 환히 알고 계실 것인데 이번에 또 서슴없이 시행하였으니,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그 난역의 뿌리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처분이 더없이 과도하게 되고 국법이 더없이 무시되고, 사람들의 분노가 더없이 격해지고, 보고 듣기에 더없이 해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유식한 사람이 볼 때 오늘날의 조정을 어떠한 세상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면대를 청한 비답에서 대신에게는 ‘특별히 본의를 따르겠다.’ 하셨고, 여러 신하들에게는 ‘일이 이미 순조롭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 등은 감히 특별히 따르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며, 순조롭게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신하들의 생각은 모두가 역적을 빨리 처단하여 화근을 영원히 끊어버리자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전하의 하교 중에 ‘특별히 따르겠다.’ ‘순조롭게 되었다.’는 것이 과연 여기에 있습니까. 오늘날 신하된 자로서 피를 뿌리고 머리를 부수어 소청을 허락받고야 말겠다는 것이 바로 면대를 청한 본의였는데, 호소할 길이 막혔으므로 우선 대략 차자로 진술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승지와 대간의 교체 명령을 빨리 취소하고 곧 면대를 허락하여 여러 신하들의 황급하고 울적한 심정을 풀어주소서."
하였는데, 차자가 들어가자 승정원에 명하여 차자를 폐기 처분하게 하였다.

 

9월 3일 경진

경기 감사 김사목을 서민으로 만들고 전 파주 목사 정언형을 사판에서 삭제하고 전 고양 군수 김사의는 그대로 유임시키도록 명하였다. 김사목이 장계를 올리기를,
"지금 받은 파주 목사 정언형의 첩보에 의하면 죄인을 2일 유시(酉時)에 쫓겨나가 있는 곳에 돌려보낸 후 지키는 절차를 각별히 신칙하였다고 합니다. 해당 목사에 대해서는 이미 붙잡아다 조치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운창(李運昌)을 겸관(兼官)으로 차임하여 성화같이 달려가 엄히 지키라는 뜻으로 공문을 띄워 분부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설사 도저히 봉행하기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일변 무턱대고 계문하고 일변 무턱대고 가두어 두었더라면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자신이 감사로서 어찌 감히 제멋대로 돌려보낼 수 있단 말인가. 또 파주에 옮겨다 둔 것은 또한 조정 신하들이 다같이 아는 일도 아니며 조정 신하들이 청하는 것은 곧 극형이다. 그렇다면 감사가 된 사람이 그가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은 더욱 독단이며 방자한 짓이 된다.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감사들이 오늘의 일을 구실로 삼아 명령을 어기며 제멋대로 하더라도 무슨 수로 금지하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니 가슴이 선뜩하다. 이것이 어찌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이른다는 조짐이 아니겠는가. 김사목은 사판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즉시 선전관(宣傳官)과 도사(都事)를 보내 신부(信符)를 빼앗은 다음 성화같이 잡아다가 의금부로 하여금 엄격히 따져 문초하여 구두 공술을 받아 계문하게 하라.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앞질러가서 참관한 장단 부사도 죄가 있으니 함께 잡아오는 동시에 해조로 하여금 후임을 차출하게 하라. 고양 군수에 대해서는 감사의 장계에서 처분하는 조치가 있었다는 것만 보았다가 추후 내막을 들어보니 자기 경계를 통과하는 것을 정말 알지 못하였고 초료(草料) 외에 말먹이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 과연 무슨 죄가 있겠는가. 고양군에 귀양보낸 죄인 김사의의 죄를 용서해 주라."
하였다. 의금부가 김사목의 구두 공술을 아뢰니, 판부하기를,
"제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신하로서 극형을 받아야 할 죄인데 감사의 체면은 간관(諫官)과도 더욱 다르다. 어제 죄인을 놓아주어 돌려보낸 조치는 그 명령이 승정원을 거치지 않았고 그 조치도 또한 일정한 격식을 벗어났다. 감사가 된 자로서 설령 참으로 놀랍고 격분한 생각이 있어 죽을 죄를 무릅쓰고라도 받들어 행하고 싶지 않다면, 한편으로는 교군을 만류하여 우선 전진하지 못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법맡은 관청에 가서 항명한 죄를 청하는 것이 곧 놋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일반 사람들의 당연한 처사이다. 이렇게는 하지 않고 감히 망령되고 방자한 생각으로 서울에 가 있는 해당 고을 원을 재촉해 보내 봉명관원(奉命官員)까지 귀양지로 압송하여 돌아갔으니, 그 표면에 나타난 꼴을 보면 해당 고을 원은 금오랑(金吾郞)과 흡사하고 압송하여 돌아온 것은 귀양지로 떠나보낸 것과 다름이 없다.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정말 말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을 것이다. 율문을 상고하여 통쾌히 다스려서 그 죄를 바룰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오히려 일말의 고려하는 뜻이 있는 것은 그의 집을 생각해서이다.
이 밖에 또 장계에 쓴 내용으로 말하더라도 사실과 판연히 상반된다.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 어찌 이처럼 교묘하고 흉참할 수 있겠는가. 교자가 고양읍을 10여 리쯤 지나가서 파주 목사 정언형을 만나 비로소 데리고 갔다고 하였는데, 그는 고양원이 붙잡아 두었다고 사실을 뒤집어 조정을 기만하였으며, 오직 고양원에게만 공을 돌리고 파주 목사에게 죄를 덮어씌움으로써 일을 잘 처리한 묘술로 자처하였다. 본 죄에 비교하여 볼 때 비록 작고 큰 차이는 있다 해도 역시 죄에 죄를 더하는 것이라 이를 수 있다. 전후 사실로 볼 때 결코 너그럽게 사면을 단행하는 때라 하여 요행히 법망을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귀양을 보내는 것은 실로 신중히 하려고 망설이고 있다. 현재 갇혀 있는 죄수 김사목을 곧 그곳 파주 지방의 서민으로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엄사만(嚴思晩)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이상(李頤祥)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9월 4일 신사

하교하였다.
"이번 경과(慶科)는 다른 과거와 다르다. 초시 합격자 중에서 나이 70, 80이 된 사람은 은전을 내리는 규례에 의하여 별도로 앉히고 시험보여 뽑을 것이며, 초장은 이미 지났지만 초장의 유생으로서 70, 80살 된 사람이 있으면 오늘 시권을 거두기전에 별도로 앉히고 다시 시험보이도록 하라."

 

박종악(朴宗岳)을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부수찬 이의봉(李義鳳)이 상소하기를,
"조지(朝紙)를 받아보니, 전 경기 감사 김사목의 장계에 파주목에 안치한 죄인 정치달의 처가 제멋대로 이탈하여 떠나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 정처(鄭妻)의 범행이 어떠한데 이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 신이 춘방(春坊)에 있을 때 부마 도위(駙馬都尉) 매은(梅殷)의 일을 가지고 진강하던 글의 뜻에 따라 진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역적 후겸(厚謙)의 역모가 채 드러나지 않았어도 신은 일을 앞질러 염려한 나머지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언다는 경계를 약간이나마 드러냈던 것입니다. 지금 역적 후겸은 비록 처단되었으나 그 어미가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국법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것만으로도 신과 사람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한데, 더구나 제멋대로 이탈하여 나가서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살 생각을 한단 말입니까. 감사가 막고나선 것은 당연한 자기 직책인데 이에 대한 처분을 과도하게 하였고, 옥당에서 차자를 올린 것도 또한 공정한 논의였는데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승지를 시켜 세초(洗草)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4백 년 동안에 일찍이 없었던 일로서 삼가 전하를 위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빨리 취소의 명령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네가 춘방에 있을 때 매은(梅殷)의 일을 진강하던 글의 뜻에 따라 진술한 것을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일을 앞질러 염려한 것이나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이른다는 경계를 드러냈던 것은 그때의 상황에 맞는 일로서 너의 정성이 가상한 것이었으나 오늘에 있어서는 문제를 벗어난 진부한 말이다. 대사령이란 명목으로 방면하면서 그 방면하는 조치가 외부의 사람에게만 미치고 가까운 친척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세룡(世龍)의 처를 용서하여 석방한 것도 또한 법을 존중하는 하나의 단서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일이 이미 안정되었으니 더이상 이러쿵저러쿵 문제삼을 것이 없다. 옥당의 차자를 세초하게 한 것은 정말 지나친 일이었다. 비답을 내리고자 한다."
하였다.

 

양사(兩司)가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정처의 일을 논박하기를,
"작년에는 역적 인(䄄)의 사건이 있었는데, 지금 또 정처의 변고가 생겼습니다. 일식·월식이 끝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는 것이지만 처음부터 아예 이런 일이 없음으로써 훌륭한 덕이 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빨리 재삼 생각하여 모든 크고작은 일을 처리할 때에는 반드시 처음을 조심하는 면에 유념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과연 처음에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번 후회하는 일이 많게 된다. 경들의 말이 약석(藥石)이라 이를 만하다. 앞으로는 더욱 처음을 조심함으로써 경들로 하여금 그 사이에 이의가 없게 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후회하는 일이 절대로 없게 된다면 이 어찌 실로 상하가 모두 편하지 않겠는가. 지금 이렇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힘쓰고 있다."
하였다.

 

교리 윤광보(尹光普)가 상소하여 정처의 일을 논하고, 끝으로 김사목(金思穆)의 죄목과 정언형(鄭彦衡)을 귀양보내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윤광보의 행동은 너무도 해괴하다. 김사목에게 제멋대로 한 죄가 없다고 한다면 신하로서 권력을 독단해야만 잘하는 처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심상하게 넘길 수 없다."
하고, 파직하였다.

 

전교하였다.
"옛날에는 각 군문이 5일 간격으로 활쏘기 모임을 가졌는데 이름만 있고 실속이 없었다. 비록 그 행사를 실시할 때 액정서(掖庭署)의 하인이 나가서 획지(劃紙)를 가져온 연후에 간혹 포상의 은전이 있기는 하였지만, 근래에 특별히 세칙을 만들었다. 포상으로는 품계를 올리거나 쌀과 활을 주는 규례가 있고, 책벌로는 곤장을 치거나 벼슬을 삭탈하는 규례가 있다. 그러므로 충분히 매달 실시하는 삭시사(朔試射)와 맞먹는다. 앞으로는 각 군영의 장수들이 당하관들의 삭시사에 참가하지 않도록 규정을 만들라. 선전관들이 매월 세 차례씩 활쏘기 모임을 갖는 것은 각 군영에서 한두 차례 진행하는 것보다는 나으나, 상벌이 각 군영과 좀 달라서 재주가 없는 자를 낙방시키는 벌은 장관의 준례에 의하여 면제시켜 주고 있으니, 너무 헐한 것 같다. 앞으로 삭시사를 시행할 때에는 해당 관청이 해당 달의 활쏘기 모임중에서 한 차례만 옮겨 실시하고 그 점수 계산을 보류하였다가 연말에 한꺼번에 계산하도록 하라."

 

9월 5일 임오

좌의정 채제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어제 저보(邸報)를 통하여 양사의 연명 차자에 대한 비답을 읽어 보고는 잘못을 금방 고치는 대성인의 미덕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신(儒臣)이 올린 차자에 대한 비답을 읽어보니 자신의 주장을 계속 감싸는 뜻이 없지 않습니다. 전하의 마음속에 이미 이러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상 오늘 이후에도 또 자주 후회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양사에 내린 비답에 말한 것은 특별히 그 말을 미화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이 어찌 깊이 걱정하고 개탄하지 않겠습니까. 경사가 있을 때 대사령을 내리는 것은 나라의 중대한 법이긴 하지만 한편 ‘잡범(雜犯)으로서 사형수 이하는 다 용서해 준다.’고 하였지, 역적까지 다 용서한다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일단 역적에 관계되었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살아 있을 수 없는 것은 외인이건 혈족이건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혈족이라면 조종의 신령이 용서하지 못할 죄인 중에서도 큰 죄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이미 용서 못할 죄인으로 구별하여 놓고도 또 외인들과 함께 석방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마치 의리에 불가한 것처럼 여기고 계시니, 역대의 여느 군왕보다 뛰어난 전하의 식견으로서도 혹시 이런 의리에 대해서는 우연히 살피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처음에는 사사로운 은정을 끊어버리지 못하였고 지금은 전하의 마음에 결국 그리워하는 데가 있어 말하는 사이에는 현연히 화평을 잃고 처분하는 즈음에는 혹시 과격할 때가 있으므로 조정 신하들은 서로 돌아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종묘 사직이 말없이 도와주고 하늘의 경사가 한창 이르고 있습니다. 난역의 근원을 더욱 막아야 하고 법의 통제를 더욱 엄히 하여 요사스러운 역적의 무리들이 다시는 엉뚱한 생각을 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위로는 하늘의 뜻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나라의 형세를 굳건히 하는 좋은 방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거조는 도리어 난역의 근원을 따르고 법의 통제가 무너진 것을 가지고 하늘에 나라의 영원한 복을 비는 방도로 삼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이 합문 밖에서 면대를 청하였으나 대궐 뜰 안에 한걸음도 들어서지 못하였으므로 오늘은 빈대(賓對)를 계기로 하여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갖추어 진술하려 하였는데, 빈대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짤막한 차자를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지난 일을 깊이 뉘우치고 훗날의 일을 더욱 염려하여 후회를 완전히 없애겠다는 말이 종이 위의 형식으로만 되지 않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홍문관에 내린 비답은 터놓고 말한 것이고 대간의 차자에 대해서는 완곡히 깨우쳐준 것이다. 터놓고 말한 것과 완곡히 깨우쳐준 것이 어감은 다르지만 그 본의는 마찬가지이다. 처음을 더욱 조심하여 후회를 완전히 없애겠다고 한 것은 대체로 용서하여 방면하던 처음에 신중히 살피지 못한 점이 많아 도로 귀양지로 떠나보내게 한 것에 대한 후회를 과거처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경은 무엇 때문에 곧장 잘못을 고치라고 하며 또 어찌하여 말을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가. 차자 속에서 진술한 내용은 이미 지난 일에 속하므로 번거롭게 여러 말을 할 것이 없다. 면대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이미 결말이 난 일이기 때문이고, 빈대를 뒤로 물린 것은 몸조리를 하기 위해서이다. 이 모두 경이 양해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오재순(吳載純)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삼사(三司)가 【대사간 이이상(李頤祥), 사간 윤행리(尹行履), 장령 이득휴(李得休), 헌납 박기정(朴基正), 정언 최수침(崔守忱)·심규로(沈奎魯), 수찬 이의봉(李義鳳).】 정처(鄭妻)의 일을 합계하였는데 앞서 계문한 것에다가 덧붙여 쓰기를,
"지금 천만 뜻밖에도 안치된 곳을 제멋대로 이탈하여 서울 근처에까지 올라왔던 일로 인하여 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 모두 벌벌 떨고 있습니다. 아, 신 등이 이 역적과 한 하늘 밑에 살다가 이처럼 흉참하고 요사한 일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모두 신 등의 죄입니다. 그러나 또한 갈수록 거리낌없는 행동이 이처럼 극도에 이를 줄은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이런 때에 빨리 국법을 시행하여 화근을 영영 제거하지 않는다면 과연 나라에 신하가 있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결코 일각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사간원이 【대사간 이이상, 사간 윤행리, 헌납 박기정, 정언 최수침·심규로.】  아뢰기를,
"전일 안치된 정처가 제멋대로 이탈하여 길을 떠난 것은 갑자기 생긴 일이어서 감사된 자가 비록 일변 잡아서 머물려두고 일변 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본의를 따져보면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분개해 할 일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승정원으로부터 내려온 명령을 감히 제멋대로 거역한 것과 다른데 어찌하여 성상께서는 도리어 책벌을 가하여 이처럼 서민으로 만드는 조처까지 내렸습니까. 지금 이 처분은 아마도 과도한 것 같습니다. 김사목을 서민으로 만드는 명령을 특별히 취소하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비답을 내리지 않고 모두 그 직을 교체하였다.

 

9월 6일 계미

춘당대(春塘臺)에 나가 구일제(九日製)와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보였다. 증광 감시(增廣監試)와 회시(會試)의 1소, 2소의 시관에게 입시하여 합격자를 발표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이번의 과거는 경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옛날 선왕조 갑오년 증광시(增廣試)와 식년시(式年試) 때 아주 늙은 유생으로서 초시에 합격한 자를 특별히 생각해주어 급기야 합격을 시킨 일이 있었으니, 은사(恩賜)나 다름이 없었다. 이번 감시 초시에 합격한 유생으로서 70, 80세가 된 자를 따로 앉히고 뽑은 것도 이번의 경사를 기념하면서 고사를 계승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두 과장 시관의 말을 들으니, 늙은 유생의 시권은 모두 합작으로서 이미 2백 명의 정원수 안에 편입시켰다고 하였는데, 비록 다행한 일이긴 하나 5명의 늙은 유생이 합격함에 따라 다른 유생의 시권 5장이 줄어드는 일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친히 임하여 명단을 여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므로 예차시권(預差試券)을 어제 넉넉히 가져오게 한 것은 그만한 의도가 있어서였으며, 다같이 명단을 열어 합격자 속에 포함시키도록 하였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시관의 피혐으로 인하여 까닭 없이 시험을 중지당한 자가 있다고 한다. 이번 과거는 다른 과거와 다르다. 무엇 때문에 상례를 따르겠는가. 특별히 다음 식년 감시로 넘기겠다."
하였다.

 

9월 7일 갑신

경기 관찰사 박종악(朴宗岳)이 장계를 올리기를,
"지금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겸임한 홍상덕(洪尙德)의 보고에 의하면, 이달 7일 진시(辰時)에 내수사 별제(內需司別提)가 하나의 빈 교자를 가지고 본 고을 사목리(沙鶩里)의 죄인을 안치한 곳에 이르러 교자를 꾸며 가지고 대문 안에서 나오므로 현감이 친히 군졸을 거느리고 온갖 방법으로 막았으나 세력을 빙자하고 공갈하는 통에 형편상 맞서기 어렵게 되어 밀려가기도 하고 막기도 하면서 서작포(西作浦)에서 10리쯤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그 안치된 죄인의 죄악이 과연 어떠한데 제대로 방비하지 못하여 이처럼 길을 떠나게 하였는지 너무도 놀랍고 통분합니다. 엄격하게 막아서 도착하는 곳에 잡아두고 감히 전진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으로 엄히 신칙하는 동시 겸임 현감 홍상덕을 파직하여 내쫓고 그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엄히 다스리게 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승지 서영수(徐瀅修)·박성태(朴聖泰) 등이 대궐에 나아가 면대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내수사 관원이 빈 교자를 가지고 가 궁인(宮人)을 태워온 것이 도대체 무슨 큰 일이기에 감사는 잡아두고 길을 막으라고 서둘러 장계하는가. 해괴하기 그지없을 뿐만이 아니다. 너희들이 이 일을 가지고 면대를 청하는 것은 더욱 외람된 짓이다. 면대를 청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데, 일개 궁비(宮婢)를 태워온 일 때문에 합문에 나와 면대를 청하기까지 한단 말인가. 정원을 욕되게 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 너희들을 모두 교체하겠다. 명령을 받든 행차를 어찌 감히 막는단 말인가. 해당 현감을 잡아다 문초하고 엄중히 처결하라. 이미 명령을 받든 관원으로 하여금 교자의 휘장을 활짝 걷어올리게 하고 해당 고을 다모(茶母)를 불러다가 궁비의 모습을 증명해 보이게 하였다. 만약 정말로 안치한 죄인이라면 어찌 이와 같이 의혹을 풀어주는 일이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감사의 장계가 어찌 너무도 형편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책임이나 때우려는 계책과 남을 흉내내는 일에 불과하다. 이 사람이 어찌 감히 이처럼 눈가림이나 하는 수단을 쓴단 말인가. 감사를 삭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철모(李喆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오재순(吳載純)을 판의금부사로, 김희(金憙)를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9월 8일 을유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돌아오다가 춘당대에 나아가 신구 초계 문신들에 대한 친시(親試) 및 시사(試射)와 도기 유생(到記儒生)들의 강경과 제술시험을 보였다. 도기 유생들이 과장 안으로 들어올 때에 신방(新榜)은 오른편에 서고 구방(舊榜)은 왼편에 서서 한 줄로 들어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강경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 김석태(金錫泰), 표(表)에서 수석을 차지한 진사 강빈(姜儐), 부(賦)에서 수석을 차지한 생원 심봉석(沈鳳錫)을 모두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하였다.

 

9월 9일 병술

병조가 《실록(實錄)》 및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봉화 사고(奉化史庫)에 봉안하러 갈 때 세 도의 감사와 병사들에게 앞뒤의 사대(射隊) 3초(哨)와 연(輦)을 호위하는 포수 20명씩 준비하여 각각 자기 도의 경계에서 대기하도록 선전관이 표신과 병부를 가지고 가서 알릴 것을 품의하니, 전교하기를,
"농사가 다행히 어느 정도 풍년이 들긴 하였으나 군사 조련이 박두하였으니 백성들을 사역하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행례 절차는 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소중한 의미 또한 있으니 연(輦)을 호위하는 군사는 전례대로 거행하되, 전후 사대군(射隊軍)은 모두 제거하고 속오군(束伍軍) 20명만 전후로 나누어 호위할 것으로 각도에 공문을 띄워서 명령이 있기 전에 미리 대기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 이 밖에 동원시킬 군정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간 이철모(李喆模), 사간 송전(宋銓), 헌납 김희채(金熙采), 정언 윤제동(尹悌東)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 등이 어제 죄인이 머물러 있는 곳에서 꾸민 교자가 대문 안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 놀랍고 통분하여 면대를 청하였던 것인데, 급기야 성상의 하교를 받은 바 임금의 말은 믿을 만한 것이라고 간곡히 타일러주셨습니다. 아, 신 등은 너무도 황송하여 감히 궁비(宮婢)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머문 곳은 교자가 출입하는 곳이 아니며 궁비는 또 교자를 탈 만한 사람이 아니니, 죄인의 문간에서 꾸민 교자가 나왔다는 것이 어찌 보고 듣기에 해괴하고 의혹을 살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왕명을 받든 내수사 관원이 오늘 궁비 하나를 태워내가고 내일 또 궁비 하나를 태워내가는 일이 벌어지는데도 감사가 감히 중지시키지 못하고 현감이 감히 막지 못한다면 가령 궁비가 아닌 딴 사람이 교자를 꾸며 대문을 나오는 자가 있을 경우 누가 감히 저지하며 붙잡겠습니까. 아, 일전에 홍문관이 올린 차자에 대해 내린 비답에서 집안 사람에게만 유독 은전이 미치지 않았다는 하교는 측은하고 간절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범죄를 턱없이 용서하여 방면하게 된다면, 역적은 누구나 다 원수로 여기는 의리와 법에 의해 집행되는 처벌이 앞으로 왕실의 지친에게는 시행될 수 없단 말입니까. 옛날의 주(周)나라의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은 성왕(成王)의 지친이지만 그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므로 끝내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후세에 교훈삼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밖에서는 감사가, 안에서는 대신·삼사(三司)가 고집하여 다투는 것은 실로 종사를 보호하고 국법을 엄히 하자는 의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무엇 때문에 격분하시어 처분이 더러 과도함에 이르게 하십니까. 이 어찌 하늘과 땅 같은 큰 도량에 유감이 없겠습니까. 앞으로는 왕명을 받든 내수사의 관리가 궁비를 데리고 오가는 것을 일체 금지하여 사람들의 의혹을 풀고 국법을 엄하게 하기 바랍니다."
하고, 여러 홍문관의 관리들이 차자를 올려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경계할 것을 진술하니,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고 비답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라 병사가 도시(都試)를 설행하려는 장계에 비답하기를 ‘근래 각도에서 수석을 차지한 자는 별장(別將)이 아니면 파총(把摠)이나 초관(哨官)들이고 이른바 기병 가운데는 한 사람도 합격한 자가 없다. 장령(將領)을 만약 출신자(出身者) 중 지체가 좋은 사람으로 차출한다면 그 폐단은 없애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 없어질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그 편리 여부를 물어 한 가지로 단락지어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여러 도의 감사와 병사의 장계가 이제서야 전부 올라왔습니다.
수어사(守禦使) 정창순(鄭昌順)은 말하기를 ‘기병의 장령은 각 고을이 보고한 바에 따라 출신이건 한량이건 구애하지 말고 각별히 골라서 임명하되, 앞으로 한량 장령으로서 매년 도시에서 완전히 수석을 차지한 사람은 특별히 조사하여 만약 자기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정으로 차지한 일이 있을 때에는 발각되는 족족 과장에서 사정을 쓴 율문으로 처결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전 총융사(摠戎使) 김사목(金思穆)은 말하기를 ‘만약 출신자를 모두 기병의 장령으로 차임한다면 도시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려는 폐단이 영원히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복무한 자들을 일시에 모두 도태시키는 것은 아마도 그들을 위로해 주고 기쁘게 해 주는 방법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자리가 나는 대로 차임하여 채워야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전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윤득규(尹得逵)는 말하기를 ‘장령이 소재지의 출신자이면 계속 장령으로 차임하고 장령의 자리는 있으나 출신자가 없는 고을에는 반드시 한량 중에서 합당한 자를 골라 차임하되 규정에 의하여 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 남지묵(南志默)은 말하기를 ‘출신자가 있는 고을은 출신자로 장령을 차출하고, 출신자가 없는 고을은 한량으로서 그 무예의 수준이 장령이 되기에 합당한 자로 임명해야 합니다. 시험에 참가시키는 한 가지 조항에 대해서는 시행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폐단을 막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경상도 관찰사 이조원(李祖源)은 말하기를 ‘기병의 장령을 모두 출신자로 차출한다면 과연 모순되는 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만, 한량을 시험에 참가시키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규정을 준수하는 뜻에서 나오기도 하고 과장의 폐단을 방지하는 방법에서 나오기도 한 것입니다. 대체로 이 과거를 설치한 것은 오로지 기병을 위한 것이니, 한량인 장령이 비록 이 시험에는 응시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과거에는 응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응시를 허락하지 말자고 한 좌병사의 논의는 수석을 부당하게 차지하는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전 전라도 병마 절도사 이윤빈(李潤彬)은 말하기를 ‘기병의 별장과 초관은 출신자를 골라 임명하되, 첫 번째로 선발된 자는 제외하고 도시 시험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게 하고, 우등자를 뽑아서 품계를 올려 임기가 찰 때까지 그대로 유임시킨 후 또 우등자를 차례차례로 승진시킬 것이며, 출신자가 없는 고을은 진영(鎭營)으로부터 자기 관할 여러 고을 중에서 합당한 출신자를 이동시켜 변통하게 한다면 참으로 고르게 부리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전 전라도 관찰사 윤행원(尹行元)은 말하기를 ‘노령(蘆嶺)의 이남 이북을 막론하고 출신자로서 지체가 좋은 사람들을 기병의 별장과 초관으로 차출하는 것이 아마도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충청도 병마 절도사 김인서(金麟瑞)와 전 충청도 관찰사 권엄(權𧟓)은 말하기를 ‘근래에 기병은 억지로 숫자만 채워넣어 모두가 나약하고 용렬합니다. 특별히 각읍에 신칙하여 옛날 제도를 거듭 밝히고 한가히 놀면서 무예를 익힌 자를 골라서 차례차례 정원을 채우며, 출신자로 장령을 삼되 빈자리가 나는 대로 보충시키며 그 장령으로 하여금 봄가을 농한기에 무사들을 모아놓고 활쏘기 시험을 보이게 하고, 도시 시험 때 기병 가운데 만일 합격자가 없을 경우 해당 장령을 곤장쳐서 징계하는 것을 영원한 규례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전 평안도 병마 절도사 이동엽(李東燁)은 말하기를 ‘각 고을의 출신자로는 장령의 자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출신자가 이미 부족한 이상 형편상 한량으로 대체해야 할 것인데 기병의 도시 시험은 전적으로 기병에 속해 있습니다. 이른바 장령은 출신자나 한량을 막론하고 기병의 시험이 끝난 다음 응시를 허락하여 수석을 차지한 자와 화살을 모조리 명중시킨 자를 뽑아 포상도 하고 승급시켜 임명하기도 한다면 또한 격려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전 평안도 관찰사 정창성(鄭昌聖)은 말하기를 ‘출신자가 있는 곳에는 장령의 자리를 모두 출신자로 차임하고, 혹시라도 부족할 염려가 있으면 전례대로 한량으로 충원하여 일률적으로 응시를 허락하되, 차임하는 과정에 출신자를 놓아두고 한량을 취하는 일은 일체 엄금해야 할 것입니다. 무예를 시험할 때도 각별히 부정을 규찰한다면 장령만 수석을 점거하는 폐단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전 함경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 북도 병마 절도사 이윤경(李潤慶), 전 남도 병마 절도사 이문덕(李文德)은 말하기를 ‘기병에 대해서는 별장과 초관을 모두 출신자로 차출하고, 무학(武學)에 있어서는 별장은 출신자로 차출하고 초관은 전례대로 자체에서 차출하는 것으로 영원한 규례를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원춘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은 말하기를 ‘기병의 장령은 출신자가 있는 모든 고을에서는 출신자로 차출하고 출신자가 없는 여러 고을에서는 기병 중 합당한 자를 차출해야 합니다. 도시 시험을 보일 때에는 도안(都案)을 자세히 상고하여 분명 그가 기병으로서 승급된 것을 확인한 다음에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만약 다른 군교(軍校) 가운데서 임시로 속이고 들어온 자가 있으면 즉시 적발하여 중한 율문을 적용하는 것으로 영원한 규례를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전 황해도 병마 절도사 윤숙(尹塾), 전 황해도 관찰사 이홍재(李洪載)는 말하기를 ‘임인년 도시 시험을 보이기 시작한 후부터 기병만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장령은 원래 시험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본도 기병의 장령은 출신자로 다시 골라 차임할 필요가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감사와 병사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 일치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체를 논한다면 판부(判付)의 내용에 출신자 중 지체가 있는 사람을 차출한다는 하교가 있었으니, 이 도나 저 도를 막론하고 실로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이 될 것이요 별로 모순되는 점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출신자가 없는 고을에는 장령의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모두 기병 중에서 감당할 만한 자를 차례차례 차임하여 대오에서 뽑아 추천하는 뜻을 보인다면 격려하는 방법과 농간을 막는 방도에서 두 가지 다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감사와 병사에게 분부하소서. 그중 해서(海西)에서는 장령이 원래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고 하니 변통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이전대로 두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10일 정해

차대(次對)가 있었다.

 

병조 판서 이갑(李𡊠)이 아뢰기를,
"구근(久勤)의 변장 자리는 대부분 경력으로 쳐주는 자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구근자가 적체되었습니다. 창주(昌洲)·가덕(加德)·갈파지(乫坡知)의 세 진을 구근 자리로 바꾸어서 적체를 해소하는 정책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좌의정 채제공은 아뢰기를,
"창주진은 옛날 병영(兵營)이 있던 자리이므로 청사는 크지만 속은 텅 비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필시 가기 싫어할 것입니다."
하고, 좌참찬 김화진(金華鎭) 등은 아뢰기를,
"갈파지와 창주는 잔폐한 진이어서 원치 않는 자리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고,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 등은 아뢰기를,
"가덕진의 형편은 아직 잔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 많고 이름난 무관들은 혹시 가기를 원할지 모르지만, 창주진과 갈파지진은 모두 가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경군문(京軍門)의 구근자도 가기를 원할 리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구근 자리로서 경력으로 쳐주는 자리로 된 곳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유대가 아뢰기를,
"군산(羣山)·고군산(古羣山)·법성(法聖) 등 4, 5개 진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구근 자리는 마땅히 대신할 사람으로 바꾸어주어야 하겠으나 병조 판서가 지극히 잔폐한 진으로 품의한 것은 곤란한 일이다. 물러가 여러 장신들과 충분히 의논하여 의견의 일치를 본 후에 좋은 편을 따라 품의하라."
하였다. 겨울 10월에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이 아뢰기를,
"앞서 구근자는 적체되고 변장 자리는 적다는 것으로 전 병조 판서가 연석에서 아뢴 일이 있었는데, 다대포(多大浦)·법성·군산·고군산·장진(長津) 등 여러 진은 본래 구근자리인데 혹은 변장 자리로 넘어가기도 하고 혹은 수령으로 승급시키기도 하였기 때문에 구근 자리 수는 여전하나 변장의 자리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변장의 자리 중에서는 아이진(阿耳鎭)을, 경력으로 쳐주는 자리 중에서는 가덕진(加德鎭)을, 교체하는 자리 중에서는 신광진(神光鎭)과 평남진(平南鎭)을 모두 구근 자리로 만들어서 서로 변통하여 임명하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를 대신들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채제공에게 묻기를,
"신광진과 평남진의 교체하는 두 자리를 모두 빼앗아 구근지로 만든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억울해 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고군산을 변장의 자리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본다. 호조 판서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데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채제공이 아뢰기를,
"군사는 구근 첨사(久勤僉使)가 조련시키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하니, 호조 판서 정민시(鄭民始)는 아뢰기를,
"그렇다면 수사(水使)와 우후(虞候)를 시켜 조련을 감독하게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그 대임이 극히 어렵습니다. 좋지 않은 자리라서 모두 다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상관 자리는 역시 국경 요새지에 많으니 관리의 규정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다시 논의하여 품의 조처할 것을 명하였다. 11월에 병조가 아뢰기를,
"아이·가덕·신광·평남 등 4개 진을 모두 구근지로 만드는 데 대하여 좌의정 채제공에게 의논한 결과 좋다고 하였습니다. 규정으로 정하여 시행하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신광·평남은 교체하여 붙여줄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잃는 것이 교체하여 붙여주는 자리에 붙여주지 않는 데 불과하므로 실직 자리가 까닭없이 한산 자리로 되는 것과는 다른 점이 있으나 수령이나 찰방 자리를 얻지 못하는 이들은 이 자리를 쉬어가는 자리로 여기는데, 지금 만약 여기 것을 옮겨다가 저기에 붙여준다면 오뉴월 화로불도 쬐다 말면 섭섭하다는 옛말과 같이 그들이 어찌 서운하게 생각지 않겠는가. 또 벼슬자리를 설치한 본의로 말하면 구근으로 차임하여 보내는 법은 곧 백 년전후에 새로 만든 것이지만, 교체하여 붙여주는 법은 몇 백 년이 되는지 모른다. 이 때문에 초기(草記)에 대한 비답을 아직 보류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허다하게 많은 자리를 승격시켜준 뒤이니 자리가 적어지는 것이야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와서 변통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형편이니 아이와 가덕의 문제는 아뢴 대로 시행하고, 고군산을 변장 자리로 만드는 일은 실로 중신의 말과 같이 그다지 긴요치 않다. 수군의 조련은 우후가 가서 통솔하여도 불가하지 않을 것이다. 안흥(安興)을 도로 구근지로 만드는 일 또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에 가깝지만 진영을 없앨 때 대신이 연석에서 품의하여 규정으로 정한 일로서 과연 그것이 옳았다고 할 수 없다. 민폐가 이미 이러하고 자리가 비는 것을 바로잡으려하는 것이니,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야 혐의할 게 뭐가 있겠는가. 두 자리 역시 도로 구근지로 만들도록 하라. 또 만호(萬戶)에 대한 일은 경이 연석에서 아뢴 말이 또한 일리가 있으니, 이는 다시 한 가지로 결정지어 초기(草記)를 올리라."
하고, 조금 있다가 전교하기를,
"안흥진을 도로 구근 자리로 만든다 하더라도 만약 인물을 각별히 골라 보내지 않으면 또 여전히 자주 교체하게 되어 그 폐단은 앞으로도 이전과 같을 것이다. 나이가 수령의 정년을 넘었거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 자들은 절대로 차임하지 말 것으로 규정을 정하여 구근 책자에 올림으로써 새로 임명된 병조 판서도 모두 알 수 있도록 하라. 가덕(加德)과 벌등(伐登) 또한 이에 의하여 시행하라. 안흥진의 변장을 자주 교체하는 것은 전적으로 세미 운반선을 호송하는 일 때문이다. 변장은 고을 수령과 달라서 전심하지 않는 죄를 다스릴 때 곤장을 치는 것이 파직시키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앞으로는 변장이 세미 운반선을 호송하는 지방인 경우 그 배를 침몰시킨 자에 대해서는 전심하지 않은 데 해당하는 율문을 적용하여 감영에 붙잡아다가 중한 편으로 곤장치는 것을 규례로 정하여 시행하라. 자주 교체하는 폐단은 수령이 변장보다 곱절은 더하다. 백성들과 고을에서 받는 고통을 어찌 일개 진의 이해에 견줄 것인가. 전심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당상관 및 시종에서 나간 수령은 규례대로 파면시키고, 당하관은 곤장으로 대신하되 환자미와 군량에 관한 행정에서 하등급을 차지한 예에 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것은 변장의 일로 인하여 갑자기 생각해낸 것이다. 이와 같이 규례를 정한다면 과연 모순되는 점이 없을지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호조와 선혜청의 당상관과 함께 적합 여부를 상의하고 의견을 갖추어 논리적으로 초기를 올리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세미 운반선을 침몰시켰을 경우 호송하는 지방관을 으레 파면하게 되는데 교체가 잦아서 고을 백성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특별히 법의 내용이 지극히 엄해서 감히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만, 지금 당하관을 곤장치는 것으로 대치하는 것은 실로 백성과 고을의 큰 다행입니다. 감영에서 곤장을 치는 것은 곧 저자거리에서 매맞는 창피와 같으니, 파직하거나 나문하는 데 비하여 결코 경하지 않고 자주 교체하는 폐단을 영원히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호조와 선혜청의 생각 또한 모두 좋다 하니 하교하신 대로 규례로 정하여 실시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만호(萬戶)를 구근 자리로 넘기자면 다른 곳은 적합한 곳이 없고 다만 서수라 권관(西水羅權管) 한 자리가 있을 뿐입니다. 이 자리를 만호로 올리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겠습니다. 또 들으니 함경도의 감사와 병사는 모두 수군 절도사를 겸하고, 수군의 변장에 이르러서는 조산포 만호(造山浦萬戶) 한 자리가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미 수군이 있는데 한 사람의 변장만으로 관할한다는 것은 정말 구차한 일이니, 서수라 권관을 만호로 올려서 수군의 변장으로 삼는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구근자로 임명하여 보낼 수는 없으니, 선전관 추천자를 교체하여 붙여주는 자리중에서 벌등 만호(伐登萬戶)와 서로 바꾸어 임명하여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듣건대 잡과에서는 《대전통편(大典通編)》을 가지고 강을 시험하고, 문과 복시에서는 종전대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가지고 한다고 합니다. 다같이 강받는 시험인데 책명이 각각 다르니 그 일의 구애됨이 어떠하겠습니까. 일률적으로 《대전통편》을 쓰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르고, 전교하기를,
"근래에 예조는 하나의 쓸 데 없는 관청이 되었다. 강을 받는 책은 더없이 중요한데 이처럼 통일하지 않고 있으니, 해당 당상관을 조사해 밝혀서 추고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정민시가 아뢰기를,
"연전에 영남의 풍락송(風落松)을 전부 산속에서 저절로 썩게 한 것은 대체로 송금(松禁)을 엄히 하고 훗날의 폐단을 막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좌수사 최동악(崔東岳)의 보고서를 보니, 왜관(倭館)을 보수할 재목으로 부근에 있는 풍락송을 날라다 쓰려고 하나 동래(東萊)에 있던 7백여 그루와 울산(蔚山)에 있던 50여 그루가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해당 두 고을 수령을 감사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이름을 들어 고발하게 해서 엄중히 처벌하는 동시에 통제사(統制使)와 좌수사(左水使)를 신칙하여 각 고을에 소재한 풍락송을 일일이 검열하고 책자를 만들어 보고하게 하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7백 그루와 50그루는 많고 적은 것이 큰 차이가 있으나 금령을 범한 것은 두 고을이 똑같다. 연전에 죽은 정승이 연석에서 주달하여 규례로 정한 것이니, 설사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외방 고을에서는 어김없이 준수하여 거행해야 하는데, 공문을 뛰운 지 얼마 안 되어 한 그루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기강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야 어찌 유독 수령뿐이겠는가. 감사와 병사도 그 죄는 똑 같다. 대신이 살아 있을 때 조선 재목으로 풍락송을 쓰라는 것이 새로 만든 절목의 응용조(應用條)에 들어 있지만 그래도 나무를 잘라 넘겨준 다음 문관인 비변사의 낭관을 보내 검열할 것을 청하였다. 그때 조정에서는 이미 오래지 않아 해이해질 폐단을 염려하여 검열 행차의 발송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경의 말을 들으니 이전에 염려하던 일이 우연히 적중하였을 뿐 아니라, 외방 고을의 소행이 전에 염려하던 것보다 배나 심하다. 아마도 두 고을 백성들이 대신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는 바 없이 이처럼 몰래 베어간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관리들이 손을 대지나 않았는지 어찌 알겠는가. 철저히 금지하기는 물론 어렵겠지만 하나도 남김없이 만드는 것이야 또한 어찌 놀랍지 않은가.
대신은 곧 조정이 존경하는 사람이다. 명분상 대신이 연석에서 아뢴 것을 공문으로 알린 것인데 외방 고을에서 이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 이후의 폐단을 막는 도리로 볼 때 범범하게 간주할 수 없다. 수령의 죄만 다스려서는 너무 경하다. 해당 수사도 감사로 하여금 이름을 들어 고발하고 엄히 다스리게 하며, 해당 감사도 또한 조사해 내어 다섯 분기의 봉록을 감하도록 하라. 그리고 두 고을 이외에 다른 고을에 대해서도 일제히 조사하는 문제는 옳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현 한 군을 더 적발해 내면 결국 수치스러운 일만 더하게 되니, 현재의 수효만 가지고 보고한 뒤에 품의 처결하라. 대체로 민가의 근처에 있는 풍락송은 백성들이 날로 사용하는 땔감이 되는 것인데, 이를 일체 금지하여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왜국처럼 온돌 만드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내린 뒤에야 논의할 수 있는 일이다. 왜국의 풍토도 지금은 옛날과 달라서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집을 온돌로 꾸민다고 하는데, 더구나 우리 나라의 기풍과 습속이야 더 이상 말할 것이 있겠는가. 풍락송을 땔감으로 쓰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엄격히 할 것인가의 여부를 묘당으로 하여금 하나로 결정지어 회계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 영의정 김익(金熤)에게 문정(文貞)의 시호를, 고 판돈녕 안윤행(安允行)에게는 충헌(忠憲)의 시호를, 고 판서 홍상한(洪象漢)에게는 정혜(靖惠)의 시호를 내렸다.

 

전 경기 관찰사 박종악(朴宗岳)에 대한 삭직 명령을 취소하고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보임시켰다.

 

9월 11일 무자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증광감시 복시의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전라 병마 절도사 이장한(李章漢)이 제주(濟州)에서 보인 무과 초시에 합격한 한량(閑良) 홍범서(洪範瑞) 등을 치계하니, 전교하기를,
"큰 바다를 건너 능히 시험 기일에 닿을 수 있었으니 매우 기쁜 일이다. 합격한 사람이 3명밖에 안 되는데 어찌 반드시 다시 회시에 응시하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모두 곧바로 전시(殿試)에 참가하게 하라."
하였다.

 

9월 12일 기축

이문원에서 재계하며 밤을 지냈다.

 

동지춘추관사 민종현(閔鍾顯)과 검열 이중련(李重蓮)이 《영종실록(英宗實錄)》과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받들고 태백산 사고로 떠났는데, 상이 곤룡포 차림으로 이문원 문밖에서 경건히 전송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에 진사로서 나이 80이 된 사람들을 어떻게 각권(角圈) 그대로 내려보내겠는가. 70살이 된 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생원 성이집(成爾潗)·강명래(姜命來)·정행언(鄭行彦)·이택로(李宅魯) 등을 모두 가자하여 80세가 된 사람은 오위 장(五衛將)의 자리를 만들어 그 자리에 추천하여 들이고, 70세가 된 사람은 첨추(僉樞)의 자리를 만들어 그 자리에 추천하여 들이라. 고향에 돌아간 뒤에는 지방관을 시켜 쌀과 고기를 넉넉히 주게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이갑(李𡊠)을 파면시켰다. 시위 반열에 제때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문순(金文淳)을 병조 판서로, 이성규(李聖圭)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호(尹㬦)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9월 13일 경인

선원전에 작헌례를 거행하였다.

 

새로 합격한 생원·진사들을 춘당대에 불러들여 보았다.

 

호남에서 시행하려던 육지의 군사 조련을 정지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윤시동(尹蓍東)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밤에 편전(便殿)에 나아가 승지 윤행임(尹行任)에게 이르기를,
"달빛이 매우 밝은데 과거에 새로 합격한 사람 중에는 필시 풍악을 벌이며 거리를 누비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불러보고 싶다."
하고는 통화문(通化門)을 잠그는 것을 보류하고 주서 서유문(徐有聞)을 시켜 나가 보게 하였다. 한참 뒤에 유문이 진사 서준보(徐俊輔)와 서임보(徐任輔)·서노수(徐潞修)·심응규(沈應奎)·이노익(李魯益)·이존수(李存秀)와 함께 들어왔다. 서준보와 서임보는 판서 서유방(徐有防)의 아들이고, 서노수는 영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의 아들이고, 심응규는 고 직제학 심염조(沈念祖)의 아들이고, 이노익은 판서 이병모(李秉模)의 아들이고, 이존수는 판서 이문원(李文源)의 아들이다. 상이 이르기를,
"너희들이 어린 나이에 경과(慶科)에 진사가 되었으니, 나는 몹시 가상히 여긴다."
하고는 드디어 응제(應製)를 명하고 술과 음식을 내렸다. 글을 다 지어올리자 상이 친히 고평하고, 제생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이 시권을 가지고 돌아가 부형들에게 보이라."
하였다.

 

9월 14일 신묘

하교하기를,
"호남 유생 이인광(李寅爌)의 일은 아무래도 가련하다. 절일제(節日製)에서 뽑힌 각도의 차석을 차지한 이하 사람들은 감시 회시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였는데, 회시의 방을 열 때 해조에서 문건을 잘못 만든 관계로 이름을 불렀다가 즉시 빼어버렸다. 이것이 어찌 그 사람의 죄이겠는가. 그러나 회시에서 떨어진 것은 그가 글을 잘 짓지 못한 탓이니 과장을 엄중히 하는 도리로 볼 때 무단히 소과(小科)에 넘기는 것을 허락할 수는 없으나 이튿날에 도기(到記)의 높은 점수를 얻은 사람을 빼어버린 것은 사실 문제가 있다. 과장에 들어온 것이 죄가 될 수 없고 빼버린 것 또한 가련한 일이다. 도기방(到記榜)에서 빼버린 것은 특별히 사정하여 원방(原榜)에 부표를 붙여 합격한 제생들의 예에 따라 동당 회시(東堂會試)에 붙여줄 것을 허락한다."
하였다.

 

9월 15일 임진

증광문무과 회시를 보였다.

 

9월 16일 계사

앞서 사간원이 김사목(金思穆)의 죄명을 도로 취소할 것을 청한 서계에 대해 상이 삭제해버릴 것을 명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대간이 연이어 아뢰었으나 상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물러가게 하였다. 대간들이 대간청에서 밤을 새우면서 물러가려 하지 않자 대간청에 나온 대간들을 모두 교체할 것을 명하여 장령 이유수(李儒修)와 헌납 윤서동(尹序東)을 모두 교체하였다.

 

9월 17일 갑오

정의현(旌義縣)에 귀양보낸 죄인 회수(會遂)와 안치한 죄인 정철(貞喆)은 호남의 다른 섬으로 배소를 옮기고 대정현(大靜縣)에 연한이 없이 귀양보낸 죄인 신규(信圭)는 도내의 좀 가까운 섬으로 배소를 옮길 것을 명하였다.

 

9월 18일 을미

춘당대에 나아가 궁중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이치중(李致中)을 발탁하여 도총부 도총관으로 삼았다.

 

9월 19일 병신

상이 연융대(鍊戎臺)에 나아가 서총대(瑞蔥臺)의 활쏘기 시험을 보이고, 활쏘기 시험이 끝난 다음 편여(便輿)를 타고 사정(射亭)에 나아가서 시위한 제신과 장신, 군교와 군사, 그리고 승장(僧將)과 승군에게 음식을 내리고 돌아오다가 세검정(洗劍亭)에 이르렀는데, 정자에는 영종(英宗)의 어제시(御製詩) 현판이 있었다. 상이 차운하여 칠언 절구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릴 것을 명하였다.

 

덕산(德山)에 사는 유학(幼學) 맹내원(孟來遠)이 상언하기를,
"선대왕조 임진년 9월 20일에 보인 정시(庭試)의 급제자 20인 중 지방 선비는 한사람도 뽑히지 않았으므로 21일에 후정시(後庭試)를 보였는데, 서울에 있으면서 시골에 호적을 두었거나 시골에 있으면서 서울에 집이 있는 자와, 시골에 있으면서 서울에 집은 없어도 현재 벼슬하고 있는 사람의 아들은 전부 응시하지 말 것으로 하교하였습니다. 신의 아비 맹의대(孟意大)는 이 세 조항에 하나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할 수 있었는데, 급기야 급제자를 발표할 때 하교하기를 ‘맹의대는 필시 맹만택(孟萬澤)의 손자일 것이다. 서울 재동(齋洞)에 집이 있는데 어찌 감히 무릅쓰고 응시했단 말인가. 빼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아비는 이미 맹만택의 직손이 아니고 또 서울에 집도 없이 덕산에서 대대로 살았는데 빼버리는 데까지 이르게 되어 온 세상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하였습니다. 계사년 정월에 고 상신 이사관(李思觀)이 아뢰기를 ‘맹의대는 사실 맹만택의 직손이 아니며 덕산에서 대대로 산 지 오래인데 빼버린 사람들 속에 섞이게 된 것은 정말 억울합니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정승이 아뢰는 말을 들으니 그 친족에 불과하고 원래 시골에 있었다고 한다. 특별히 빼버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아비가 빼버리지 말라는 하명으로 인해 이름이 급제자 명단에 있는 이상 당연히 급제자와 함께 전시(殿試)에 참여하여야 할 것인데, 그 당시 해조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에 곧바로 전시에 참여하라는 말이 없었다.’ 하고 미적거리면서 품의조차 하지 않은 채 3개월을 끌었습니다. 신의 족숙(族叔) 지대(至大)가 새로 급제함으로 인하여 입시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정시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는데 너에게 어떻게 되는 사람인가?’ 하자, 지대는 ‘신의 6촌 동생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상께서 다시 회시에 응시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곧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없었으며, 신의 아비는 끝내 원한을 품은 채 저승으로 갔습니다. 지금 나라에는 옛날에도 보기 드문 경사가 있어 만물이 모두 뜻을 이루는 때를 당하여 특별한 은전이 죽은 사람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이에 성상의 자애로운 은혜를 입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자세히 상고하여 초기를 올리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덕산에 사는 유학 맹내원의 상언으로 인하여 등록을 가져다 보니, 그의 아비 맹의대는 과연 임진년 9월 후정시에 입격하였으나 맹만택의 손자였기 때문에 전교에 의하여 빼버렸고, 계사년 정월 8일에 빼버리지 말라는 전교가 내렸습니다. 그때 본조에서는 응당 전시에 넘겨야 했으나, 곧바로 전시에 응시시키라는 하명이 없었기 때문에 전례에 따라 거행하지 못한 것이 과연 위에서 말한 내용과 같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관한 일은 지극히 엄하고 또 중대할 뿐 아니라 지금 여러 해가 지난 뒤에 와서 복과(復科)하는 일은 더욱 경솔히 논의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내버려두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초기를 보니 그때의 일이 과연 어렴풋이 기억난다. 대개 빼버리라는 분부를 했다가 다시 빼버리지 말라고 한 경연에서의 하교는 그의 집안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은혜로운 성교이다. 이제 그 사실을 안 이상 어찌 과거 시험의 일이 중대하다 하여 그대로 버려둘 수 있겠는가. 경의 조에서 초기를 올릴 때는 그가 처음 합격하였을 때 급제를 주었는가의 여부와 그후 경연에서 내린 전교를 반포하여 알린 조지(朝紙)의 문적을 하나하나 상세히 조사하여 품의 조처하는 것이 실로 일을 신중히 처리하는 도리에 맞을 것인데, 이 초기는 너무도 소략하다. 공공연히 곧바로 시행하지 말자고 청한 것은 너무도 소홀한 처사이니, 다시 상세히 상고하여 초기를 올리라."
하였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다시 등록을 상고하니, 임진년 9월 21일 과차(科次)로 입시하였을 때의 전교에는 ‘이수일(李秀逸)의 아들 이주명(李柱溟)은 어제 하교하였거니와 매우 놀랍다. 현임 시종관의 아들로서 어찌 감히 과거에 응시한단 말인가. 특별히 빼버리고 5년 동안 과거 응시를 정지하라. 맹의대는 필시 맹만택의 손자일 것인데 또한 어찌 감히 무릅쓰고 응시했단 말인가. 그러나 이수일의 아들과는 차이가 있으니 명단에서 빼버리기만 하라.’ 하였고, 이듬해 계사년 정월 8일의 전교에는 ‘지난번 후정시 때 맹의대는 맹만택의 손자라 하여 빼버릴 것을 명하였으나 지금 정승이 아뢴 말을 들으니 그의 족친에 불과하고 또 지방에서 대대로 살았다 한다. 더구나 탕평 조처 이후의 과거에 입격한 자이지 않은가. 특별히 빼버리지 않음으로써 나의 뜻을 보이라.’ 하였고, 같은 해 윤3월 25일의 전교에는 ‘오늘에서야 들으니 맹의대에 대하여 비록 이름을 빼버리라는 명령은 취소하였으나 결정적인 처분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 과거에 참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미 빼버리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이름조차 없으니, 이것은 해조가 이번 회시 때 의당 품의해야 할 것을 품의하지 않은 것이다. 그대로 과거가 정지되었고 또한 이번 증광시에도 참가하지 못하였으니 특별히 곧바로 회시에 응시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맹의대에 대하여 처음에는 비록 빼버리지 말라는 하명이 있었으나, 다시 곧바로 회시에 응시하게 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니, 지금 이 복과시키는 일은 경솔히 논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상언한 문제를 이전대로 내버려두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수석을 차지하면 응당 급제를 주는 대상에 들어가야 하는데, 나중에 회시에 곧바로 응시하게 하라는 명을 한 이유는 다만 빼버리라는 명령을 취소한 후 해조가 즉시 전례에 의하여 전시에 넘기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때 마침 또 정기적으로 보이는 회시를 당하였기 때문에 회시에 붙이라는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두 차례의 경연에서의 하교와 전교로 볼 때 이미 원래의 방목에서 빼버리지 말 것을 허락하였고 또 회시를 함께 보이라고 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복과에 대한 일은 의심할 것이 없으니, 그대로 알아서 거행하라."
하였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맹의대에 대하여 이미 복과를 명하였으니 방목은 성균관으로 하여금 수정하게 하고, 시권에 붉은 부전을 붙이며 홍패를 작성하여 주는 등의 일은 규례대로 정원과 이조로 하여금 품의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9월 20일 정유

인정전에 나아가 증광문과 전시를 보여 이문회(李文會) 등 47인을 뽑고, 춘당대에 나아가 무과 전시를 보여 김창신(金昌信) 등 2백 11인을 뽑았다. 아울러 서총대(瑞蔥臺)에서 보인 시험에 응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추후로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한광회(韓光會)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9월 23일 경자

잡과 복시에서 점수는 같으면서 방목에 끼이지 못한 사람을 원래의 방목에 넣으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감시에서 예차(預差)를 모두 무과에 붙이는데 점수는 같으나 합격하지 못한 자를 추후 시험에서 모두 잡과에 붙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일체 원방에 넣어 함께 창방할 것을 분부하라."
하였다.

 

9월 25일 임인

차대(次對)가 있었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원자의 백일날이 며칠밖에 남지 않아 아랫사람들의 심정은 더욱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방에 있는 재상들도 문안에 참여하고자 모두 상경한다고 하는데, 전례를 상고해 보니 비록 조정에서는 문안한 적은 없으나 이번에 특별히 처음으로 실시하여 아랫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에는 단지 첫 7일, 두 번째 7일, 세 번째 7일에만 문안하였고 백일날에는 문안한 전례가 없었다. 을묘년의 전례도 또한 그러하였던가."
하니, 채제공이 그러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앞서 개성부 유수 구상(具庠)이 장계하기를,
"본 개성부는 지역이 좁아서 교장(敎場)을 장단(長湍) 송서면(松西面)에 설치하는 형편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땅은 본디 개성부의 땅이었으니 송서면 분지천(分地川) 서쪽을 도로 개성부로 넘겨주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좌의정 채제공이 복주하기를,
"송도의 병영은 근래에 몹시 피폐해졌는데, 지금 이 장계의 내용도 아마 손쓸 곳이 없음으로 인하여 한 번 호소하고 두 번 호소하면서 그칠 줄 모르는 것으로 생각되니, 범연하게 볼 수 없다고 봅니다. 본부의 교장이 다른 고을에 있는 것은 형편상 구차할 뿐 아니라 송도 백성들의 지극한 소원도 전적으로 송서면을 떼어받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의 개혁에 관계되는 일이니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서 처리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정민시는 아뢰기를,
"이 땅을 떼어받음으로써 송도가 옛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면 사소한 문제까지 고려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개성 유수가 아뢴 것을 들어보면 비록 이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개성부에는 이익이 없는데 백성들의 심정이 그 땅을 얻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개 면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전결(田結)도 있고 군액(軍額)도 있는만큼 호조에서는 전결이 감축되는 손해가 있게 되고 장단에서는 군액을 까닭없이 잃는 폐단이 있게 됩니다. 송도 백성들의 분묘를 쓸 고장으로 만들어주기 위하여 이미 경계가 정해져 있고 또 아무 이익도 없는 다른 고을의 경계를 떼어붙이는 것이 어찌 사리에 맞는 일이라 하겠습니까. 이는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구상(具庠)은 아뢰기를,
"송도 군영의 폐단을 바로잡는 제일의 계책은 바로 크고작은 남쪽의 면에 있는데 이는 전에 이미 누차 진술한 것입니다. 송서면은 개성 백성들의 소원일 뿐 아니라 곧 교장을 만들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채제공은 아뢰기를,
"송도의 일이 비록 염려되기는 하나 호조 판서가 아뢴 말이 사리에 맞습니다. 신 역시 다시 할 말이 없습니다. 개성 유수가 장계로 요청한 내용을 보류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호인(鄭好仁)이 아뢰기를,
"개성부에서 빚을 놓을 때 군교와 아전에게 위임하였다가 결국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면 모두 탕감해주곤 하였는데, 지금 만약 다시 빚을 놓게 되면 군교와 아전이 또 손을 댈 것입니다. 그러니 개성부를 반드시 소생시키려면 금천(金川)의 크고작은 남쪽의 면을 떼어붙여 그 세를 거두어 보태는 것이 실로 막대한 이익이 될 것입니다. 또 개성부는 옛날의 수도이고 금천은 일개 현에 지나지 않으니 하찮은 이해 관계야 무슨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정민시는 아뢰기를,
"애당초 빚을 탕감해준 것은 오로지 명예를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고 처음부터 묘당의 공문을 거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조정에 요청할 것인데, 조정에선들 이에 대하여 어찌 보고하는 대로 억지로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채제공은 아뢰기를,
"이것은 모두 묘당의 책임입니다. 개성부 유수를 만약 신중히 선발하였다면 어찌 이와 같은 폐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9월 26일 계묘

인정전에 나아가 문과와 무과의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9월 27일 갑진

진하 정사(進賀正使) 황인점(黃仁點)과 부사(副使) 서호수(徐浩修)가 장계하기를,
"신 등은 관문 밖으로부터 길을 잡아 곧바로 열하(熱河)로 향하였고, 그 밖의 역관(譯官) 및 부하들은 토산물 수레와 인부와 말을 거느리고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곧바로 북경(北京)으로 향하였습니다. 6월 28일에 심양(瀋陽)에 도착하고 7월 2일에 백기보(白旗堡)에 도착하였으며, 4일에 신점(新店)에 도착하여 대흑산(大黑山)의 큰길을 버리고 백대자(白臺子)의 지름길을 취하여 광녕(廣寧) 지경과 의주부성(義州府城)을 거쳐 7일에는 관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9일에는 조양현(朝陽縣)에 도착하였으며 12일에는 건창현(建昌縣)에 도착하였는데, 각로(閣老)인 화신(和珅)이 군기(軍機) 장경(章京)을 보내 신의 길을 재촉하여 말하기를 ‘만일 4백 리 이내의 거리에 있을 경우 밤낮으로 달려간다면 15일에 대어갈 수 있다. 대경연례(大慶宴禮)가 16일에 있으므로 반드시 그전에 가 닿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건창현에서부터 밤낮없이 걸어서 15일 신시(申時)에 열하에 다달았습니다. 신 등은 표문과 자문을 받들고 예부(禮部)로 향하였는데, 만족(滿族)의 시랑(侍郞) 철보(鐵保)가 말하기를 ‘여러 나라의 사신들이 모두 표문을 어전(御前)에 직접 바쳤으니, 본국의 사신도 내일 연회 때 직접 바치라.’ 하고 철보는 신 등을 인도하여 먼저 만수절 축하 표문을 받들고 대궐뜰로 들어갔습니다. 이에 화신이 ‘표문은 황제의 지시를 기다려 직접 바치게 된다.’고 하면서 신 등만 먼저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철보는 표문을 통관(通官)에게 되돌려주고 신 등을 인도하여 대궐뜰 아래 서게 하였으며, 각로 화신·복장안(福長安)·왕걸(王杰) 등은 좌우에 시립하였는데, 황제는 침향탑(沈香榻) 위에 나아가 뒤로는 침향병(沈香屛)을 의지하고 바닥에는 누른 주단을 깔았습니다.
화신이 나와서 ‘사신 등은 앞으로 나오라.’는 황제의 지시를 전달하자, 신 등이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황제가 묻기를 ‘국왕은 편안한가?’고 하기에 신 등이 대답하기를 ‘황상이 베푸신 큰 은덕을 힘입어 평안합니다.’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묻기를 ‘국왕은 아들을 얻는 경사가 있었는가?’고 하기에 신 등이 대답하기를 ‘금년 설날에 황제께서 복(福) 자를 쓴 서한을 내림으로써 국왕이 감격하여 명심하고 밤낮으로 축원하던 끝에 과연 6월 18일에 아들을 보았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런가. 이는 참으로 몹시 기쁘고 기쁜 일이다.’ 하고 또 신 등의 성명과 품계를 묻자, 화신이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대답하였습니다. 신 등은 이어 연회 반열에 나아갔는데 반열에는 제왕 패륵(諸王貝勒)·각부 대신(閣部大臣)들이 동쪽 좌차에서 겹줄로 서쪽을 향하여 앉아 북쪽을 상좌로 삼았으며, 몽고 48부왕(部王)·회회(回回)·안남 국왕(安南國王) 및 조선(朝鮮)·안남(安南)·면전(緬甸)·남장(南掌)의 사신과 대만(臺灣) 생번(生番)은 서쪽 자리에서 겹줄로 동쪽을 향하여 앉아 북쪽을 상좌로 삼았습니다. 대궐앞 3층 전각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광대놀이를 벌였는데 모두 경사를 맞아 장수를 축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음식을 내린 것이 모두 세 차례였는데, 첫 번째와 세 번째는 황제의 식탁에 놓았던 떡과 고기를 나누어주었고, 두 번째는 각각 한상씩 차렸는데, 묘시(卯時)에 연회를 시작하여 미시(未時)에 끝냈습니다.
연회를 시작한 다음 화신이 만수성절을 축하하는 표문과 원자가 탄생한 후에 보낸 자문을 가져다 몇 차례 읽어보고 황제 앞에 바쳤습니다. 한참 뒤에 다시 철보에게 전달하기를 ‘이미 어람(御覽)이 끝났다. 이 밖의 표문과 자문은 행재예부(行在禮部)로부터 받아가지고 유경예부(留京禮部)로 보낼 것이다.’ 하고, 또 표문과 자문을 가지고 안남 국왕인 완광평(阮光平)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자획도 반듯하고 종이의 품질도 정결하다. 조선에서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처럼 경건하니 다른 변방 나라의 모범이 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17일에도 신 등이 연회반열에 참석하였는데 그 석차와 의식은 그 전날의 연회 때와 같았습니다. 18일에 신 등이 또 연회에 참석하였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연회가 끝난 다음 나는 돌아가겠으니 너희들은 먼저 경사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19일에 신 등이 또 연회의 반열에 참석하였고, 20일에 예부의 지시에 따라 신 등은 안남 국왕 및 각국 사신들과 함께 문묘(文廟)를 배알하였는데, 문묘는 건륭(乾隆) 초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서 장엄하고 화려하기가 연경(燕京)의 태학(太學)과 똑같았습니다.
신 등이 열하(熱河)에 머문 것은 5일 간이었는데, 신등과 수행한 관원과 사람들의 음식은 모두 내무부(內務府)로부터 공급을 받았으며, 각국 사신들도 다 같았습니다. 21일에 예부에서 큰 수레 13채를 보내주어 일행이 나누어 타고 행구(行具)까지 싣고 출발하여 이튿날 고북구(古北口)로 들어가서 25일에 황경(皇京)에 도착하였습니다. 26일에 원명원(圓明園)에 가서 황제의 행차를 기다렸는데 30일에야 황제가 돌아왔습니다. 신 등은 행궁(行宮)의 동문 밖에서 2마장쯤 떨어진 곳에 가서 맞이하였는데, 화신이 황제가 탄 수레 옆에 나아가 ‘이들은 조선국 사신이고 이들은 안남국 사신이다.’고 하면서 각국의 사신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니 황제는 돌아보며 웃었습니다.
8월 1일에 신 등은 경풍도(慶豊圖) 연회의 반열에 참석하였습니다. 날이 밝을 무렵에 대궐로 들어가 이중문을 통과하여 경풍도 앞 개울에 이르니 4척의 작은 배가 있었는데, 제왕 패륵(諸王貝勒)·각부 대신(閣部大臣)·회회(回回)·안남 국왕(安南國王) 및 각국 사신들이 나누어 타고 장주각(藏舟閣)·금오교(金鰲橋)와 옥동교(玉蝀橋)를 지나 거의 3마장쯤 가서 천향재(天香齋) 앞에 이르러 배에서 내렸습니다. 관희전(觀戱殿)의 서쪽 협문으로 들어가 연회 반열에 참석하였는데, 희각(戱閣)의 규모 및 반열의 좌차와 연회의 의식은 열하에서와 같았습니다. 다만 몽고의 여러 왕들은 열하에서 곧바로 본부로 돌아갔습니다.
2일 신 등은 날이 밝자 궐내로 들어가 연회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예부 낭중(禮部郞中)이 와서 신 등을 인도하여 근정전(勤政殿) 뜰로 들어갔는데 이곳은 곧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의 동쪽이 되고 경풍도(慶豊圖)의 서쪽이었습니다. 황제는 강진향탑(降眞香榻)에 앉아 뒤로 무일병(無逸屛)에 기대었는데 무일병은 곧 황제의 어필이었습니다. 제왕 패륵은 전내 어좌의 동쪽에 서서 서쪽을 향하였고 각부 대신은 어좌의 서쪽에 서서 동쪽은 향하였으며, 회회·안남 국왕과 각성(各省)의 독무(督撫)들은 전폐의 아래에 서서 서쪽을 향하였고 신 등 및 안남·면전·남장의 사신들은 전폐의 아래에 서서 동쪽을 향하였습니다. 문관과 무관으로서 이동시켜야 할 관리들은 각각 전폐의 아래에 꿇어앉아 자기의 경력과 문벌을 아뢰었는데, 무관은 활을 한 번 당긴 후에 아뢰었습니다. 내각과 이부와 병부의 제신들은 어탑 전에 꿇어앉아 황제의 지시에 따라 보고하였습니다. 이윽고 의식이 끝나자 황제는 견여(肩輿)를 타고 희전(戱殿)으로 나아갔고, 여러 신하들은 물러나 어제 배를 타던 곳에 이르러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서 희전 앞에 나아갔다가 즉시 연회의 반열로 들어갔습니다. 아계(阿桂)가 황제의 지시로 흰 고라니 한 쌍을 끌고 각국 사신들에게 보였는데 그 형체는 말의 머리에 소의 몸뚱이고 꼬리와 뿔은 사슴과 같았으며, 하지(夏至)에 겉뿔은 빠지고 속뿔이 벌써 한 자 남짓하게 자랐습니다. 이는 성경(盛京)의 장군이 바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연회가 끝난 뒤에 또 황제의 지시에 의하여 각로(閣老) 아계·화신·복강안(福康安)·복장안(福長安) 및 안남 국왕과 조선·안남·면전·남장의 사신·부사들은 모두 복해(福海)에서 놀도록 하명하였습니다. 신 백형(百亨)은 객사로 돌아갔고 신 등은 아계 등과 2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금오교와 옥동교로 향하지 않고 곧바로 동남쪽의 개울을 따라 복해에 배를 뛰웠다가 영훈정(迎薰亭) 앞에서 내렸습니다. 화신이 신 등을 인도하여 구경을 시켰고 내시는 또 황제의 명에 의하여 청다(淸茶)·서과(西果)·빈과(蘋果)·포도(蒲萄)·도금(桃檎) 등의 과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유시(酉時)에 객사에 돌아오니 상례로 주는 선물과 특별히 주는 선물이 벌써 내무부로부터 보내왔습니다.
7일과 8일은 연일 재계를 만나 연회를 베풀지 못하였고, 9일은 황제가 만수산(萬壽山)에 행차하게 되므로 신 등은 서쪽 금원(禁苑) 대궐 밖에서 맞이하였는데, 황제는 먼저 안남 국왕을 불러 하명하고 자주 신 등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각국 사신들도 모두 행차의 뒤를 따르라.’고 하므로 신 등이 뒤를 따라 근정전을 지나 곤명지(昆明池) 가에 이르니, 붉은 칠을 한 용배가 이미 강가에 대여 있었습니다. 배 위는 2층의 다락으로 되었고 뱃머리에는 금빛의 용을 그린 누런 깃발 한 쌍을 세웠습니다. 황제는 먼저 위층에 오르고 아계·화신·복강안·복장안·회회·안남 국왕 및 각국 사신은 아래층 창밖 기둥 안쪽에 탔는데, 배가 갈 때에는 좌우에 있는 사공들이 모두 뱃노래를 불렀습니다. 내시는 황제의 명에 의하여 향차와 진귀한 과실을 나누어 주었으며, 화신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신 등을 불러 앞으로 나오라 하여 연수사(延壽寺) 북쪽 산기슭을 가리키며 ‘이것은 만수산이다.’ 하고, 곤명지의 서쪽 산을 가리키며 ‘이것은 옥천산(玉泉山)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수산과 옥천산의 서북쪽 봉우리를 가리키며 ‘이것은 향산(香山)이다.’ 하였습니다. 배가 연수사 앞에 닿자 황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배에서 내려 구경하도록 하였는데, 내시 수십 명이 각기 다과를 가지고 언덕을 넘을 때나 계단에 오를 때마다 내어주곤 하였습니다. 서산(西山)의 안팎에는 전각이 매우 많았는데 이를 모두 구경하고 나서 대궐 북쪽 문으로 나갔습니다.
10일에는 신 등이 연회의 반열에 나아갔고, 12일에는 황제가 경도(京都)로 돌아가므로 신 등이 대궐 밖 큰 저자거리에서 전송하고 즉시 성내의 남쪽 객사에 들었습니다. 원명원(圓明園)으로부터 서안문(西安門)까지의 길 양쪽에는 채색 가설물이 길게 뻗어 있었는데 단청과 비단으로 장식하였습니다. 13일 새벽에 신 등이 정관(正官) 30명을 거느리고 태화전(太和殿) 뜰로 들어가서 오른편에 있는 9품의 품계 표시 곁에 자리잡고 만수절 축하 의식에 참가한 다음 정관은 도로 객사로 돌아가고 신 등은 좌측문으로 나와 영수궁(寧壽宮) 동쪽에 설치한 놀이터에 이르러 반열에 참가하였는데, 희전(戱殿)의 규모 및 반열의 좌차와 연회의 의식은 원명원과 꼭 같았습니다.
15일 신시(申時)에 황제께서 석월단(夕月壇)에 친히 제사하고 환궁하였으니 추분일(秋分日)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신 등은 부성문(阜成門) 밖 광항가(光恒街)에 이르러 황제를 맞이하고 전송한 다음 다시 원명원으로 향하였습니다. 16일에 황제가 다시 원명원으로 돌아왔으므로 신 등은 또 황제를 맞이하였습니다. 17일에는 만수절을 축하하는 표문 및 황은에 사례하는 특산물 표문에 대한 황지가 내렸는데, 축하 표문에 대한 황지에 이르기를 ‘국왕이 축하한 것을 보고 잘 알았다. 금년은 짐의 나이 80이 되는 해이다. 본 국왕이 기일에 앞서 토산물을 갖추어 바쳤을 때 지시를 내려 받아들이도록 하는 동시에 다음해 생일날의 정식 공물로 대처하게 하였는데, 지금 또다시 표문을 갖추어 축하하고 특산물을 바쳐 왔다. 이는 사실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나 또다시 그대로 싸가지고 돌아가게 하면 이는 본 국왕의 축하하는 정성을 받아주는 예가 아니기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니, 해부에서는 그리 알라.’ 하고, 황은에 사례하는 표문에 대한 황지에는 이르기를 ‘국왕이 사례하는 표문을 보고 잘 알았다. 표문에 딸려 바친 특산물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해부는 그리 알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처음에는 예부에 글을 바치고 아울러 특산물을 받아달라고 청하려 하였으나 예부의 상서(尙書)와 시랑(侍郞) 등이 말하기를 ‘연전에 황제께서 이미 앞으로는 사례하는 특산물을 영원히 바치지 말도록 하라는 하명이 있었고, 이번에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황제의 지시도 특별한 은전에 관계되는 것인데 배신(陪臣)으로서 어찌 감히 글을 바치겠는가.’고 하므로 그만 중지하였습니다. 18일에 황제가 또 무신으로서 승진시키거나 이동시킬 관리들을 근정전에서 불러보았는데 신 등도 나아가 참석하였습니다.
20일에는 정대광명전 연회에 들어가 참석하였는데, 연회석의 식탁은 모두 겹줄로 놓아 동서로 마주 향하게 하였습니다. 제왕 패륵·몽고왕과 회회·안남 국왕은 전내의 황제 자리 동쪽에 위치하고, 연성공(衍聖公) 및 1품 문무 만(滿)·한(漢) 대신(大臣)은 황제 자리 서쪽에 위치하고, 각성의 독무(督撫)와 도륵(圖勒)·포특(布特)·토사(土司)는 궁전 뜰 동쪽에 위치하고, 신 등 및 안남·면전·남장의 각국 사신과 대만 생번(臺灣生番)은 궁전 뜰 서쪽에 위치하였습니다. 음악은 중화소악(中和韶樂)과 평장악(平章樂)을 연주하였는데, 차를 내오거나 술을 올릴 때에 모두 음악을 연주하였습니다. 궁전 뜰에는 화문주단을 깔고 여러 나라 사람들의 재주를 연기하는 장소로 만들었는데, 먼저 포고(布褲)의 재주를 보이고 연이어 여러 나라의 재주 공연을 계속하였습니다. 황제가 여러 왕과 대신에게 술을 줄 때는 호위하는 대신 화신이 황지에 의하여 신 인점(仁點)과 신 호수(浩修)를 불러 전내에 오르게 하여 황제의 자리 서쪽 계단 아래에 서게 하였습니다.
황제가 연성공을 불러 술을 준 다음 신 등을 부르므로 황제의 앞에 나아가 꿇어앉으니, 황제가 술을 부은 옥배를 손수 잡고 직접 주었습니다. 이에 신 등은 일어나서 받아가지고 꿇어앉아 마신 후 연회의 반열로 돌아왔습니다. 조금 후에 황제께서 또 신 등 및 신 백형(百亨)을 부르므로 황제의 자리 앞에 나아가 꿇어앉으니, 황제께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의 말로 국왕에게 돌아가서 안부를 물으라.’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직접 너희 나라 국왕이 세자를 얻었다는 자문을 보니 내 마음이 몹시 기뻤다.’고 하므로 신 등이 머리조아려 사례하였습니다. 화신의 안내로 원래의 반열로 돌아왔는데, 세자 책봉의 의식이 있기도 전에 황제께서 먼저 세자라고 호칭하므로 좌우에서 호위하는 대신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연회가 끝난 다음 내무부 관리가 신 등을 인도하여 궁전 뜰 서쪽 누른 장막 아래에 이르러 선물을 나누어 주었으며 원명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20일 신 등 및 수종자들의 음식 공급 역시 열하에서처럼 내무부에서 마련하여 보냈습니다. 이날 오후에 일행이 모두 철수하여 성안 남쪽 객사에 들어가 축하하기 위한 특산물은 태화전(太和殿) 앞에 있는 어고(御庫)에 수납하고, 황은에 사례하기 위한 특산물은 전례대로 임시로 남쪽 객사의 이웃에 사는 진실한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나머지 물건들은 각 창고의 관리, 통관(通官), 대사(大使) 등에게 전례대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9월 1일 예부에서 신 등에게 말하기를 ‘각국 사신은 이미 지난달 20일 정대광명전의 연회가 끝났기 때문에 이번에는 도착 연회와 작별 연회가 없다. 안남 국왕과 그의 수종신은 이미 지난달 24일에 떠났고 면전(緬甸)의 대신도 또한 오늘 떠난다. 귀국의 사신 일행과 남장 사신은 4일에 떠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2일에는 예부에서 회답 자문 12통을 보내왔는데, 원자가 탄생한 후 자문을 보낸 데 대한 황지에 이르기를 ‘군기 대신 태학사(軍機大臣太學士)이며 예부의 사무를 관리하는 왕걸(王杰)은 황지를 받들어 해당 국왕의 소청을 조회하여 허락해 줄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곧 7월 16일 열하의 연회 석상에서 황제가 친히 읽어 보는 앞에서 주달하여 허락을 받은 것인데, 전문 1통을 따로 올립니다. 황은에 사례하는 표문은 모두 전례대로 황지가 내렸습니다. 4일에 일행이 북경을 떠났습니다."
하였는데, 회유하기를,
"듣건대 경 등의 일행이 무사히 돌아온다 하고 자문을 올려 요청한 것도 또한 뜻대로 되었다고 하니, 공사간에 천만 다행이다. 부사의 아들은 이번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더욱 기쁜 일이다. 경 등의 복명은 언제 있겠는가? 날짜를 정하여 장계로 보고하라. 황제의 은혜는 갈수록 깊어지니 우리 나라의 도리상 역시 범연히 지나칠 수 없다. 동지사의 행차는 경 등이 돌아온 후 당장 출발시켜야 하겠다. 경 등이 압록강을 건넌 후 자문을 먼저 역관에게 부쳐 파발을 달려 올려보냄으로써 즉시 회답 자문을 정서할 수 있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 진하사(進賀使)가 먼저 보낸 장계를 보니, 은혜를 받은 것 외에도 자문으로 주청한 것을 즉시 그에 맞추어 시행할 수 있도록 소원대로 허락해주었다. 우리 나라의 도리상 그 은혜에 감사하는 조처를 소홀히 할 수 없다. 회답 자문은 이미 압록강을 건넌 후 먼저 올려보내도록 하였으니, 동지사의 배표(拜表) 일자를 10일 이후로 앞당겨 길일을 택하여 정하라."
하였다.

 

9월 28일 을사

조식당(朝食堂)을 춘당대에서 설행하게 하고 이어 유생들에게 응제(應製)를 명하였다.

 

새로 합격한 사람 중 나이 50 이상된 자를 직장(直長)의 단일 후보로 추천하고 추천이 끝난 다음 전례에 따라 승륙(陞六)할 것을 명하였다.

 

9월 29일 병오

현임 대신과 각신을 불러 만나보았다. 영돈녕(領敦寧) 홍낙성(洪樂性) 등이 아뢰기를,
"원자의 백일이 이미 닥쳐왔으니, 신들의 기쁜 마음을 어떻게 다 말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신 행차의 선두가 이미 도착하였는데 황제께서 자문 중의 소청을 허락하였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홍낙성 등이 아뢰기를,
"황제께서 우리 나라의 소청에 대하여 매사를 모두 들어주었으니, 실로 다행입니다."
하고, 좌의정 채제공은 아뢰기를,
"이번 진하사가 돌아오면 그 은혜에 사례해야 할 것이 세 가지이니, 하나는 요청한 자문에 대하여 허락해 준 것과 특별히 유시해 준 것이고, 하나는 선물을 더한 것이고, 하나는 사신을 연회에 참석시켜 준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은혜를 사례하기 위해 특산물은 마련하지 말고 하절사(賀節使)의 행차에 부쳐보내는 뜻으로 해조와 해원에 분부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응제에서 합격한 유생을 연생문(延生門) 밖에서 불러보고 표(表)를 지은 사람은 왼쪽에, 부(賦)를 지은 사람은 오른쪽에 반열을 지어 차례로 서게 하고 하유하기를,
"임금이 친히 식당에 나와서 응제를 보이고 고평한 것은 기쁨을 기념하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옛날 숙종 때 관학(館學)의 유생들에게 수시로 응제를 보이고 급제를 내린 실례가 있다. 더구나 여느 때와 다른 오늘에 있어서랴. 또 임금이 직접 고평한 것은 그 사체가 자별하다. 의당 표와 부에서 장원한 사람은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하고 삼하(三下) 이상은 곧바로 회시(會試)에 응시하게 하며 차상(次上) 이상은 종이를 하사할 것이니, 각기 이렇게 알고 있으라."
하니, 유생들이 모두 4배하였다. 이에 떡과 과일을 하사하여 각기 품에 품고 돌아가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경과(慶科)에서 새로 합격한 자를 마침 어제 식당에서 돌아보았는데,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다. 식당을 친히 마련한 것은 기쁨을 기념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응제를 고평한 것 또한 경사를 기념하는 아름다운 뜻에서 나온 것이며, 합격한 유생을 불러보고 특별히 떡과 과일을 하사한 것은 태학(太學)에 있어 매우 성대한 일이 된다. 상을 내림에 있어 어찌 반유 응제(泮儒應製)의 전례만을 따르겠는가. 부에서 장원한 유학 임헌(任)과 표에서 장원한 진사 민치재(閔致載)는 특별히 전시에 응시하도록 한다."
하였다.

 

특별히 김사목(金思穆)을 용서해 주고, 하교하기를,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다. 이번 대사령에서 각도에 귀양보낸 죄인들을 이미 다 용서하여 놓아주었다. 저지른 범행이 비록 놓아주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해서만 유독 논의하지 않는 과에 내버려둘 수 없다. 파주(坡州)의 서민 김사목을 특별히 용서한다. 수군(水軍)으로 초시에 합격한 자도 군역을 면제해 주는데, 서민의 아우로서 어찌 회시(會試)에 응시할 수 없겠는가. 초시에 입격한 김사식(金思植)과 피혐으로 인해 추후에 붙여준 다른 유생들도 다같이 회시에 참가하도록 허락한다."
하였다.

 

9월 30일 정미

영중추부사 정존겸(鄭存謙)이 상소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만나보지 못한 지 오래되어 경을 그리는 마음이 자못 깊던 차에 올린 글을 보니 한 번 만나본 것과 다름없다. 상소문 가운데 나이를 핑계한 요청에 대하여 어찌 되도록이면 들어주어 경이 전부터 간절히 생각해 오던 뜻을 이루게 해주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경의 나이가 예경(禮經)에 규정한 연한에 비하면 아직도 몇 달이 모자란다. 대신의 거취가 얼마나 신중한 것인가. 예경의 규정을 벗어난 일은 성급히 논의하기 어렵다. 경은 모름지기 이 지극한 뜻을 받들어 마음놓고 몸조리나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이 상소하기를,
"신이 정미년 봄에 처음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글을 올렸는데, 삼가 직접 타이른 말씀을 받드니, 그 말씀에 이르기를 ‘나라의 형편이 공고하지 못한데 경은 무엇 때문에 떠나려고 하는가.’고 하였습니다. 그 후 신의 아들 이만수(李晩秀)의 급제를 창방(唱榜)하던 날 신이 하명을 받고 입시하여 외람되이 불안한 사정을 진술하니, 성상께서는 또 조금 기다리라고 하교하였습니다. 대체로 전후에 걸친 간청이 비록 계획한 대로 즉시 허락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덕음(德音)이 분명하시므로 이 심정을 헤아려주실 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은 이에 전하의 하명을 받들어 가슴에 간직하고 밤낮 기다려왔습니다. 지금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도와 나라의 근본이 완전히 정해짐으로써 경사스럽고 기쁜 마음은 온 나라가 같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신이 특히 사사로이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참으로 경사의 덕분으로 만물이 모두 소원을 성취하는 때라 신이 여러 해 동안 계획하고 염원하던 것도 이때에만은 꼭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가 신의 치사를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경연에서 자세히 말하였거니와 경은 정력이 아직 왕성하다. 현임·전임 대신들 중에서 건강한 사람은 경 하나뿐이다. 이때에 경을 놓아준다는 것은 논할 수 없는 일이다. 경은 모름지기 물러가겠다는 간청을 철회하고 내 뜻을 따라주기 바란다."
하였다.

 

규장각(奎章閣)의 직각(直閣)과 대교(待敎)의 선출을 위한 권점(圈點)을 시행하였는데, 직각으로서 5점을 맞은 사람은 서영보(徐榮輔)·이면응(李冕膺)·정동관(鄭東觀)이고 대교로서 5점을 맞은 사람은 심상규(沈象奎)와 서유구(徐有榘)였다

 

서영보를 규장각 직각으로, 심상규를 대교로 삼았다.

 

의정부에서 강경과 제술에 참가한 문신 조득영(趙得永)·윤지눌(尹持訥)·김경(金憬)·최벽(崔璧)·신성모(申星模)·송지렴(宋知濂)·이희갑(李羲甲)·정노영(鄭魯榮)·김이재(金履載)·이명연(李明淵)·서유구(徐有榘)·박종순(朴鍾淳)·한용탁(韓用鐸)·엄기(嚴耆)·정약전(丁若銓)·김달순(金達淳)·홍수만(洪秀晩)·윤행직(尹行直)·박종경(朴宗京)을 뽑아 보고하였다.

 

농사가 대풍이 들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