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무신
이병모(李秉模)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능으로 행차할 때 5부(部) 구역에 척후(斥堠)와 복병(伏兵)을 배치하는 규정을 정하였다. 【동쪽 교외의 척후를 설치할 곳으로서 흥인문(興仁門) 성벽 위·응봉(鷹峯)·북악(北嶽)·안암동(安巖洞) 뒷봉우리·왕십리(往十里)의 높은 봉우리·석관(石串) 뒷봉우리 등은 경외 각영에서 파견하고, 사아리(沙阿里) 뒷봉우리와 배봉(拜峯)은 진(鎭)에서 파견한다. 복병할 곳으로서 숭례문(崇禮門) 밖 삼거리, 돈의문(敦義門) 밖 삼거리, 벌아치(伐兒峙)의 삼거리 등은 경외 각영에서 파견하고, 사아리 삼거리와 배봉은 진에서 파견한다. ○ 서쪽 교외의 척후를 배치할 곳으로서 숭례문 성벽 위·창의문(彰義門) 성벽 위·흥인문(興仁門) 성벽 위·잠두(蠶頭)·안현(鞍峴)·약현(藥峴)·녹번현(碌磻峴)·북악(北嶽) 등은 경외의 각영에서 파견한다. 복병할 곳으로서 숭례문 밖 삼거리·혜화문(惠化門) 밖 삼거리·홍제원(弘濟院) 삼거리·아현(阿峴) 삼거리 등은 경외 각영에서 파견한다. ○ 남쪽 교외의 척후를 배치할 곳으로서 숭례문 성벽 위·흥인문 성벽 위·광희문(光熙門) 성벽 위·창의문 성벽 위·잠두·응봉·북악·안현 등은 경외의 각영에서 파견한다. 복병할 곳으로서 벌아치의 삼거리·혜화문 밖 삼거리·돈의문 밖 삼거리·이태현(利泰峴) 삼거리 등은 경외 각영에서 파견한다. ○ 북쪽 교외의 척후와 복병할 곳은 서쪽 교외의 경우와 같다.】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75면
【분류】왕실(王室) / 군사(軍事)
10월 2일 기유
원릉(元陵)을 참배하고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지나는 길에 건원릉(健元陵)·현릉(顯陵)·목릉(穆陵)·휘릉(徽陵)·숭릉(崇陵)·혜릉(惠陵)을 참배하고 전교하기를,
"이번에 참배하는 것은 나라의 경사를 고유하기 위해서이다. 종묘를 참배할 때 묘사(廟司)에게 이미 상을 내리는 은전이 있었으니 능사(陵司)인들 무엇이 다르겠는가. 건원릉·목릉·원릉의 능관은 모두 6품으로 올리고, 현릉·휘릉·숭릉의 능관은 모두 한 자급씩 올려주며 혜릉의 능관에게는 상현궁(上弦弓)을 내리라."
하였다.
홍검(洪檢)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행원(尹行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3일 경술
초계 문신(抄啓文臣)들에게 친시(親試)를 시행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백 26통의 상언(上言)에 대해 판하(判下)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양주(楊州)에 최가 성을 가진 여자는, 자기 아비인 최익남(崔益男)이 상소를 한 번 잘못 올린 탓으로 형장을 받다가 죽었으니 유사로 하여금 문적을 자세히 상고하게 하여 특명으로 복관(復官)시켜 달라고 하였습니다. 춘천(春川)에 사는 유학 남려(南鑢)는 말하기를 ‘저의 아비 남옥(南玉)이 익남과 관계를 끊은 사실은 이미 장전(帳殿)의 공초에서 자세히 말하였고, 익남과는 상관이 없다는 내막을 전하께서 통촉하시고 특별히 관대한 율문을 적용하라는 하교가 조지(朝紙)에 명백히 쓰여 있습니다. 그때 대신은 익남을 잡아다가 한 번 대질시킨 후에 참작 처리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저의 아비는 불행하게도 지레 죽었습니다. 지금 대사령의 큰 혜택이 내린 이때 그 당시 함께 죄를 입은 정석오(鄭晢吾)는 벌써 신원되었으나, 저의 아비는 정석오의 공술로 인하여 부당하게 죄에 걸려서 유독 눈을 감지 못하는 원귀가 되었습니다. 하늘 같은 은택을 내려주기 바랍니다.’고 하였습니다.
안동(安東)에 사는 유학 김시전(金始全)은 말하기를 ‘저의 조부 김성탁(金聖鐸)은 무신년 역변을 당하여 많은 선비들을 거느리고 충의를 분발하였으며 역적 징토의 격문이 대부분 저의 조부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을묘년 과거에 급제하던 날 임금께서는 높이 칭찬하며 권장하였고 방을 부르기도 전에 특별히 벼슬을 제수하는 동시에 어제시(御題詩) 1수를 손수 써서 주시기를,
어저께 영남에서 추천받아 온 사람이
오늘 그의 머리 위에 계화가 피었구나
이 어찌 네 부모의 기쁨만 될 것인가
이내 몸 대궐 안의 문학 신하 되었네
라 하고, 이어 저의 조부를 앞자리로 불러 화답하여 올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사년에 시기하는 무리들이 저의 조부가 일찍이 이현일(李玄逸)을 스승으로 섬겼는데도 은총이 너무 지나쳤다고 헐뜯는 글을 올렸습니다. 저의 조부는 그때 마침 옥서(玉署)의 임명이 있었으므로 곧 사임하는 글에 이 혐의를 끌어 대어 말하는 중에 이현일의 일을 좀 언급하였는데, 승지들이 논계하여 국문하는 일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상신(相臣) 조현명(趙顯命)이 두 차례나 상소하여 구제하기를 「김성탁이 망언을 함으로써 죽게 되었지만 실은 이현일이 근본이고 김성탁은 지엽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현일은 제집에서 편히 죽고 성탁은 형장을 받다가 죽는다면 그 본말과 경중의 기준에 있어서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조정에서 애당초 역적죄로 이현일을 처벌하지 않았는데, 역적을 두둔한 것으로 김성탁을 책한다면 백성들을 기만하는 일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글을 올려 구제하기를 「고 상신 이여(李畬)는 당시 판의금부사로서 현일을 놓아줄 것을 청하였고, 갑진년 겨울에 영남 사람 나학천(羅學川)은 왕명에 의하여 올린 상소에서 이현일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였습니다. 전후에 걸쳐 하나의 이현일에 대하여 나학천이 비난할 때는 칭찬하여 등용하고 김성탁이 말했을 때는 처단하였으며, 이현일의 방면을 청한 고 상신 같은 자는 장려를 받아 영수가 되고 김성탁을 약간 언급한 신 같은 자는 역적을 두둔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니, 신은 알지 못하였습니다만 명분과 의리가 때에 따라 경중이 달라지며 형벌이 사람에 따라 오르내림이 있는 것입니까.」고 하였으니, 이상의 두 상소문에서 저의 조부의 억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로 선대왕의 일월같이 밝은 식견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옥문을 살아서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무오년에 섬에서 나와 육지로 배소를 옮기고, 경신년에 고향에 돌아가 부모의 장사를 지내도록 허락하고, 무진년에 특명으로 석방한 것이 모두 성은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저의 조부가 당시에 올린 상소는 별것 아닌 몇 마디의 말 뿐이었는데 혼자서 그지없는 죄를 입었습니다. 특별히 죄안에서 제거하는 동시에 관작의 회복을 명하기 바랍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양주에 사는 최조이[崔召史]의 일은 비록 그 아비를 위한 것이라 하나 어찌 감히 이처럼 무엄하게 호소할 수 있겠는가. 앞서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한 것은 깊이 따지면서 말을 다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의 아비의 일은 법을 적용하여 이름이 죄안에 있는 자와는 다르니, 역시 견딜 수 없거나 차마 견디지 못할 사정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데, 이처럼 끈덕지게 쟁집하며 감히 관직을 회복해달라는 말로 기탄없이 호소하고 있다. 이것이 어찌 자기 스스로 하는 짓이겠는가. 필시 종용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때 올린 상소의 말은 가리지 않고 발언하였을 뿐 아니라 막중한 데 저촉된 말이 있었다. 외면으로 보면 비록 상소문 가운데 운운한 사람을 지적한 것 같으나 전편의 말이 그 어느 것이고 마음에 섬뜩하고 눈을 놀라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선왕조에서는 관후(觀厚)가 상소문의 말을 가리지 않아서 저도 몰래 스스로 그 말이 막중한 곳에 저촉되었는데도 오히려 사형을 적용하였었다. 익남의 상소문 내용을 관후의 상소문과 비교할 때 그 의도와 말씨가 과연 어떠한가. 경 등은 늘 그 여인의 원정(原情)을 서슴없이 써서 들이는데 그것은 또 무슨 의도인가. 근래의 풍조는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관계 없이 오직 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것으로 상책을 삼는다. 이와 같은 사실도 또한 눈을 딱 감은 채 모두 품의 조처하는 일로 돌리고 있으니, 경 등의 하는 일이 매우 마땅치 못하다. 되도록 중하게 추고하고 원래의 공술에 대해서는 받아주지 말라.
춘천에 사는 남려의 일은 신원을 시켜준 정석오의 경우와 그 차이가 있는지 과연 분명히 이해하기 어렵다. 특별히 관대한 율문을 적용한다는 하교가 분명 조지(朝紙)에 있다고 하는데, 만약 그의 공술과 같다면 지금 대사령의 혜택이 널리 파급되는 때를 당하여 어떻게 한 사람에게는 실시하고 한 사람에게는 아낄 수 있겠는가. 경 등은 정원(政院)과 논의하여 그 당시의 기록을 베껴다가 사리를 따져 조처하라. 안동에 사는 김시전의 일은 그 뒤에 선대왕의 하교가 분명한 이상 이는 감히 대사령으로 거론할 일이 아니다. 세초(歲抄) 때 이런 뜻으로 분부하겠다."
하였다.
형조가 또 아뢰기를,
"징을 치고 호소한 남려(南鑢)의 원정(原情)에 대하여 전교에 따라 기록을 상고하여 보니, 경인년 11월 30일 친국(親鞫)에 들어가 신하들이 입시하였을 때 양사(兩司)가 아뢰기를 ‘신 등이 어제 죄인 남옥(南玉)의 일로 하문할 때 여러 신하들의 뒤를 따라 진달한 일이 있었는데, 아까 죄인 남옥의 문목에 대한 전교 중에 관대한 율문을 따르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이에 신 등은 송구한 생각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신하로서 이 하교를 받았으니 어찌 일각인들 대간의 자리에 무릅쓰고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교체하여 물리치기를 명하기 바랍니다.’고 하니, 이 비답에 이르기를 ‘이것은 잘못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한번 그렇게 해본 것인데 무엇이 이상한가. 친국이 벌어지고 있는 때이니 사직도 하지 말고 물러가 처분을 기다리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공술에 이른바 관대한 율문을 따르라고 하교하였다는 것은 대간이 혐의를 피하는 글 중에 있는 말을 지금 남려가 따낸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감히 요행수를 노려 거의 매달 호소하는 것은 정말 무엄하기 짝이 없습니다. 원정을 들어주지 말 것이며, 그의 외람된 죄는 신의 조에서 율문을 상고하여 엄히 다스리도록 하게 하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4일 신해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을 불러보았다. 이복원이 그 아들 이시수(李時秀)가 가 있는 황해 감영에 가기 위하여 하직 인사를 하였던 것이다.
하교하였다.
"정격(政格)을 감히 어기지 못하는 것은 마치 법령을 변동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첫 벼슬에 나선 형제를 한꺼번에 추천할 수 없음은 선왕조 때 경연에서 정한 규정이 엄연히 있다. 한꺼번에 추천하는 것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두어 달 안인 경우에 있어서랴. 생원·진사가 허다한데 하필 정세순(鄭世淳) 형제라야만 하는가. 이 집안이 아니면 안 되겠는가. 이처럼 사정을 쓰는 버릇을 어찌 감히 실현하려 하는가. 전관(銓官)의 일이 극히 방자하다. 이조 참판 홍병찬(洪秉纘)에게 다시 등용하지 않는 처벌을 시행하라."
10월 5일 임자
교리 조진택(趙鎭宅)이 상소하기를,
"신은 삼가 변란의 뿌리가 제거되지 않고 변괴가 겹쳐 일어나는 것을 보고 비록 대궐 뜰에 들어가 호소하는 반열에서는 저지당하였지만 부심하는 아픈 마음은 항상 간절합니다. 이번 정치달(鄭致達)의 처의 변고에 이르러서는 안타깝게도 이것이 또 무슨 일입니까. 신은 생각건대, 우리 성상의 고명하신 식견으로 모든 의리에 대하여 언제 일찍이 털끝만큼인들 어긋난 일이 있었습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하는 것은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실로 전하의 마음 속에는 사심이 공의를 가리기도 하고, 일을 처리할 때에는 은정이 도리어 의리를 가리기도 하여 이와 같은 과오를 범하고 후회가 있게 만든 것이라 봅니다. 후회에 있어서 귀중한 것은 우연히 실수를 범하였다가 즉시 잘못을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후회하는 것이 애당초 후회가 없게 하는 것만은 못하나 이미 후회하고 난 후에는 다시 가책이 없게 되니 이것이 곧 성인이 허여한 이유이고, 제왕의 인격에 있어서 더욱 미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혹시라도 그 과오가 됨을 알면서도 처음에 사심으로 감행하고 종당에 말로만 후회한다면 그 후회가 또한 얄팍한 형식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일을 전하께서 어찌 혹시라도 과오가 됨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더구나 이 조치에 있어 놀랍고 의혹을 자아내는데도 도로상에서 감히 말을 못하고, 비답 지시에서 사실을 감싸는데도 조정 신하들이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여 상하의 사이에 의사가 서로 막혔으니, 이는 이미 하늘과 땅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형상에 어긋난 것입니다. 이 또한 어찌 이른바 위정자가 잘못을 하는 것은 일식과 월식과 같아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보게 된다는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정사와 국법을 시행하는 사이에 믿음으로 근본을 삼고 용단으로 일을 처리하여 일국의 신민으로 하여금 전하의 마음이 하늘처럼 넓고 해처럼 밝아 털끝만한 티끌도 그 사이에서 가리우는 것이 없음을 우러러보게 하시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그리하면 삼사(三司)가 거듭 호소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윤허의 교명이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변란의 뿌리가 시원하게 제거되고 나라 형편이 영원히 안정될 것입니다. 이 어찌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자, 대답하지 않았다.
10월 6일 계축
경기 관찰사 김희(金憙)를 불러 만나보았다.
민종현(閔鍾顯)을 이조 참판으로, 정범조(丁範祖)를 이조 참의로, 윤동섬(尹東暹)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0월 8일 을묘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편전에 돌아와서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받고 제조(提調)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상이 채제공에게 묻기를,
"앞서 성균관 유생에게 제술 시험을 보일 때 다른 사람보다 체격이 월등하게 장대한 사람이 있기에 그 이름을 물어보려다가 물어보지 못하였다."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그는 필시 영남 유생 허일(許馹)일 것입니다. 신이 그 이름을 듣고 불러보니 그는 곧 허목(許穆)의 방계손이었는데, 그 체구의 장대함이 지금 세상에서는 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매일 먹는 것이 겨우 두어 되밖에 안 되므로 배를 채워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글을 잘하므로 붓을 놓으려 하지 않을 것 같으나 그 체구와 여력이 실로 무예를 권장할 만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은 아뢰기를,
"이 사람은 이주국(李柱國)보다 1척이나 더 큽니다. 10년 전에 석저구(石杵臼)란 이름을 가진 자가 있어 키가 매우 컸는데, 그래도 오히려 허일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에게 무예를 권장시키도록 명하였다.
10월 9일 병진
차대가 있었다.
10월 11일 무오
태묘(太廟)의 북쪽 담장문을 고쳐 세웠다. 상이 몸소 그곳에 이르러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북쪽 담장문을 설치한 것은 태종 때였는데, 초하루와 보름에 태묘를 참배할 때마다 이 문으로 출입하였으며 효종 이후에는 이 문으로 다니지 않았다. 예로부터 내전에서 묘현례(廟見禮)를 행할 때 또한 이 문으로 출입하였는데, 지금의 월근문(月覲門)이 대개 이를 모방한 것이다."
하고, 호조 정랑 서탁수(徐琢修)에게 이르기를,
"이 문을 통과하면 재실로 가는 옛길을 찾을 수 있는가?"
하니, 서탁수가 아뢰기를,
"문 안이 바로 산등성이므로 수목이 우거져 옛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갑자년에 태묘를 참배한 것이 벌써 47년이 되었고 기묘년에 태묘를 참배한 것도 32년이나 되었다. 우거진 수목이 어찌 아름이 되도록 자라지 않았겠는가."
하면서, 이어 승지를 시켜 옛길을 살펴보게 하였다. 승지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산등성이를 지나 좀 동쪽으로 가다가 산기슭을 따라 내려가니 수목 사이로 옛길이 있어 분별할 만하였는데 곧바로 전사청(典祀廳)으로 잇닿았습니다. 나무를 베어내지 않아도 남여 채가 지장을 받지는 않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문을 고쳐 세우는 것은 내전의 태묘 참배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지금 초하루 보름으로 참배하던 옛일을 따르려 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김기성(金箕性), 부사 민태혁(閔台爀), 서장관 이지영(李祉永)을 불러 만나보았다. 하직 인사를 올린 것이다.
날씨가 차므로 입직하는 군병으로서 옷이 얇은 자에게 무명과 솜을 주라고 명하였다.
10월 13일 경신
서형수(徐瀅修)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14일 신유
원춘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장계를 올려 해변 민호를 소생시킬 방법을 진술하기를,
"해산물은 옛날에 귀하던 것이 지금은 흔하기도 하고 옛날에 흔하던 것이 지금은 귀하기도 한데, 그것을 바꾸기가 어려워 일정하게 배정할 수 없습니다. 월례로 바치는 것은 천신(薦新)으로 쓰는 제수(祭需)이니 감히 거론할 수 없거니와, 영주인(營主人)에게 주는 정채(情債)를 해변 민호에게 징수하여 신역의 대가로 넘기는 것은 그 명목이 정당하지 못합니다. 지금 만약 정채를 영원히 없앤다면 이는 훗날의 일이라 폐단을 미리 단정짓기 어렵지만 현재 정채를 절반이라도 줄여준 것이 해변의 민호에게 어찌 적은 혜택이 되겠습니까. 그 나머지 정채 1천 6백 냥을 지금 또 삭제해 준다는 것은 아마 방도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영서(嶺西)에서 진상하는 것은 꿩과 꿀·과일에 불과하므로 원래 폐단이 없는 것이나 약재로 바치는 것 가운데 산삼은 생산이 점점 희귀해짐에 따라 값도 함께 뛰어오르므로 이전대로 하는 수밖에는 달리 갑자기 논의하기 어렵습니다. 변통해야 할 문제를 하단에 덧붙여 진술합니다.
1. 각 고을 석전제(釋奠祭)에 쓰는 어포는 대구를 쓰는데, 애초 일정한 수량이 없기 때문에 마리 수가 같지 않습니다. 그 마리 수를 결정해야 하는데 제물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1. 진상하는 물종(物種)을 봉진할 때 봉진관(封進官) 및 사옹원(司饔院)과 감영에 각각 봉진하고 남은 것에 대해 혹은 상정(詳定)해서 그 대가를 주는 고을도 있고 혹은 주지 않는 고을도 있습니다. 두세 고을만 유독 값을 주는 것은 그만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1. 황어(黃魚)와 여항어(餘項魚)는 반드시 봉진할 시기에 임박하여 잡아 말려야 하기 때문에 봉진할 때 사고가 많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마련해 내기 어렵기가 다른 해산물보다 훨씬 더합니다.
1. 북경에 가는 세 사신이 청구하는 어물에 대해서는 저리(邸吏)가 그 값을 대신 바치는데 시가에 비하면 거의 2, 3배에 이릅니다. 이제부터는 그 값을 딱 잘라 결정하여 각 고을에서 그 대가의 돈과 정채를 함께 직접 건량청(乾粮廳)에 바치게 하며, 통신사(通信使)가 청구하는 물종은 한결같이 북경에 가는 사신의 규례대로 결정하며, 영서에서는 비록 물종을 마련하여 보낸다 하더라도 정채는 북경에 가는 사신의 규례에 의하여 규정을 정해야겠습니다.
1. 포구의 민호에게 묵은 빚을 징수하는 것과 육군에 충정하는 일에 대하여 만약 조정으로부터 특별한 방지책이 없다면 두 가지 폐단을 영원히 제거하기란 보장하기 어렵겠습니다.
1. 봉진하는 약재 가운데 황백(黃栢)과 모향(茅香) 두 종류는 전례대로 다 가을분기에 봉진하도록 해야겠습니다."
하였는데, 정채를 절반으로 줄이고 신역의 대가를 변통하는 일을 비변사에서 복주하기를,
"삭감해 준 정채에 대하여 영원히 더 물리지 않고, 대가를 주어 이자를 늘리게 하는 것이 또한 뒷날의 폐단이 없겠는가를 다시 자세히 진술하게 한 다음에 품의 조처하게 하겠습니다.
각 고을 석전제에 쓰는 어포가 고을마다 규례가 다르고 수효도 일정하지 않은 것은 실로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각 고을 제향 때 그 필요한 양에 따라 마리 수를 정하여 일정한 규정을 두게 하겠습니다.
봉진하고 남은 어물에 대하여 혹은 값을 주는 고을이 있는데 이를 없애야 할 것 같다는 일에 있어서는 지금 변통하는 것이 이미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니, 종전에 값을 주지 못한 곳을 비록 일제히 찾아내 값을 주지는 못할망정 전에 지급하던 값까지 도리어 줄여서 없앤다는 것은 과연 합당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황어와 여항어에 대해서는 비록 잡기가 어렵다고 말하나 그것은 본디 토산물이니 막중한 물선을 경솔히 논의할 수 없습니다. 이상 두 가지 조항은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북경에 가는 사신과 통신사가 요구하는 어물을 돈으로 대납하는 것은 사신 일행에 있어서는 별로 손해될 것이 없고 포구 민호에 있어서는 큰 혜택이 될 수 있으니, 보고한 대로 규례를 정하여 실시해야겠습니다.
포구 백성들의 묵은 빚을 징수하고 육군으로 충당하는 것을 엄히 방지하는 일과 내국(內局)의 약재 가운데서 황백과 모향을 다 가을분기에 봉진하는 일은 모두 장계의 소청대로 시행해야겠습니다. 감사가 수정한 절목은 대체로 자세히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나 간혹 지나치게 세밀하여 체면에 손상되는 것이 있고, 간혹 지나치게 조절되어 도리어 폐단을 낳게 하는 것이 있으니, 폐단을 바로잡고 먼 장래를 대비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본사(本司)에서 조항마다 분석 검토하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아 영구히 폐단이 없게 만든 다음에 실시하게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채를 절반으로 줄이고 신역의 대가를 변통하는 일은 경 등의 말도 옳지만 앞질러 억측으로 결정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다시 공문을 띄워 하나로 결정지은 보고가 들어온 연후에 품의 조처하게 하여 해가 지나도록 오래 끄는 한탄이 없게 하라. 이 밖에 여러 조항은 모두 초기(草記)대로 시행하되, 해당 도에서 수정한 세칙을 다시 삭제하고 다듬는 일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 너무 오래도록 결정짓지 못하다가 그대로 방치하는 지경에 이르기 쉬우니, 경은 감사를 엄히 신칙하여 속히 사리를 따져 보고하게 한 다음 즉시 결정지어 답해주는 동시에 그 실태를 초기하도록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봉진하는 물선에 대하여 마련하기 쉬운 것과 마련하기 어려운 것을 감사가 이처럼 나열하였으니, 이런 말을 이미 들은 이상 그대로 둘 수 없다. 그중에 월례로 바치는 것이 일정한 규정이 있긴 하나 시기의 조만에 구애되어 백성들과 고을에 폐단을 끼치게 되는 것은 다른 도에서 새로 제정한 공납 규정에 의하여 그 계절의 생산에 따라 혹은 앞질러 바치기로 하고 혹은 물려서 다른 달에 바치도록 할 것이며, 공납하는 물선에 대하여 절대로 종전처럼 논죄하거나 추고하자는 말로 장계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 밖에도 도내에서 생산되는 물건이 아닌 것을 사서 봉진하는 경우에는 마련하기 쉬운 다른 물건으로 대신 봉진하도록 분부하라.
황어와 여항어의 명목에 이르러서는 묘당에서는 비록 물선 공납의 사체가 중요한 것이라 하여 거론하지도 않았으나, 물고기는 먹고 싶은 것도 아닌데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은 점점 커지니, 제주(濟州)의 절인 전복(全鰒)의 실례대로 특별히 공납에서 면제하라.
그리고 감사가 바친 책자에 의하면 생노루 고기와 말린 노루 고기의 명목으로 달마다 바치는 물선은 납육(臘肉)과 함께 이미 대봉(代封)을 허락하였는데, 유독 물선에 대해서만 특별 지시가 없어 아직까지 이전대로 바치고 있다 하니, 일이 몹시 고르지 못하다. 물선으로 바치는 생노루는 똑같이 대납하게 할 것이며, 말린 노루 고기와 장포(獐脯)는 별로 긴요하지 않으니 전부 봉진하지 말게 하라.
소 잡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는 것으로서 만약 제사에 큰 상을 차리거나 연회에 크게 음식을 차리는 일이 아니면 모두 쇠고기를 쓰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오직 본도의 공납에만 편포(片脯)의 명목이 있으니 이는 필시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여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이제부터 면제해 주도록 하라.
또 본도에서 바친 책자를 보니 공납하는 물종 가운데는 간혹 대가를 주지 않고 거두어 바치는 명목이 많다고 한다. 이 곡절도 묘당으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여 시정해야 할 것은 시정하게 하고, 내국(內局)에 바치는 약재 가운데서도 마련하기 어려운 종목은 약원으로 하여금 그 용처의 완급을 헤아려서 초기를 올려 시정하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또 아뢰기를,
"원춘 감사 윤사국이 보고한 것을 보면 ‘공납하는 물종 가운데 간혹 대가를 주지 않는 것이 있다는 일은, 옛날에 해산물이 매우 흔하고 토산물이 지천일 때 값 없이 봉진하던 것이 이미 고을의 전례로 되어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정채(情債)를 변통하는 일은, 본도는 호남의 각 고을과 달라서 예방 아전은 애초부터 영주인과 상관이 없고 영주인 역시 진상하는 일을 주선하는 일이 없으므로 그 중간에 협잡질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정채의 수량은 항목에 실려 있는 것이라 대신 주는 일을 장계로 보고하게 하여 변통한다면 폐단이 다시 종전처럼 생길 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 장계로 요청한 대로 허락할 것이며, 돈과 곡식의 이자를 늘리는 방법에서는 돈은 인삼 상인에게 맡기고 곡식은 각 고을에 넘겨 거두어 들이고 나누어 주는 일을 감영과 고을에서 주관한다면 폐단이 생기거나 축날 염려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감사가, 석전제에 쓰는 어포는 제사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해조로 하여금 수량을 정해 내려 보내 규정으로 삼게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공납 물종 중 값 없이 거두어 들인 것은 이미 그 사실이 보고된 이상 그대로 두기는 어렵습니다. 산나물과 산과일 이외에 생어물(生魚物)과 생토끼 등의 물종은 규정에 있는 값을 주게 할 것이며, 정채를 대신 주는 일은 명목이 감영의 정채라고 하면서 조정에서 대신 주게 한다는 것은 사리에 합당치 않을 것 같으니 그대로 덮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전제에 쓸 어포는 해조로 하여금 수량을 정하여 알리게 할 것이며 그 나머지 여러 조항은 세목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박천행(朴天行)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경기 유생 김상목(金相穆) 등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상고하건대, 고려조의 안렴사(按廉使) 조견(趙狷)은 곧 개국 원훈(開國元勳)인 조준(趙浚)의 아우로서 아이 때부터 경학(經學)에 열중하였습니다. 고려조의 정치가 문란할 때를 당하여 벼슬이 지신(知申)에 이르렀으며,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심력을 같이하여 왕실을 도왔습니다. 자기의 형인 조준이 새 왕조를 추대하려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이 나라의 교목세가로서 나라가 보존되면 같이 보존되고 나라가 망하면 같이 망할 것입니다. 또 달가(達可)046) 는 이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인만큼 만약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이라도 달가와 달리하기를 구한다면 이것은 국사를 해치는 것이고 나라가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입니다.’고 하자, 조준은 그 뜻을 알고 다시 영남의 안렴사로 내보냈던 것입니다. 그러자 고려의 운명이 끝났다는 소문을 듣고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 속에 들어가 그 이름을 고쳐 조견(趙狷)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개견[犬] 자를 따른 것으로서 나라가 망해도 따라 죽지 못한 것이 개와 같다는 뜻이며, 또한 개는 옛 주인을 생각한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두류산에서 다시 청계산(淸溪山)으로 왔는데, 매번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송경(松京)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였습니다.
태조가 호조 전서(戶曹典書)로 발탁하여 초빙하는 서신을 보내니, 답하기를 ‘송악산의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지언정 성인의 백성이 되기는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태조가 조준과 더불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청계산으로 가서 조준으로 하여금 나오도록 권고하게 하였는데, 조견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조준이 이불을 어루만지면서 이르기를 ‘내가 만나보지 못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형제간의 정의에 어찌 그리운 생각이 없었겠는가.’고 하니, 조견이 이불 속에서 대답하기를 ‘나라도 없어지고 집도 망하여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데 형제를 어떻게 알겠습니까.’고 하였습니다. 조준이 나와서 고하기를 ‘신의 아우의 성품이 편협해서 신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고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나와 옛 친분이 있으니 빈주의 예로 서로 만나볼 수 없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조견은 비로소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았습니다. 태조는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조견은 그 뜻이 금석 같아서 빼앗을 수 없다.’ 하고 청계 한 구역의 땅을 봉해주었습니다.
조견은 양주(楊州) 땅에 옮겨 살면서 자기의 호를 자칭 송산(松山)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송악(松嶽)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조견은 이따금 송도(松都)에 가서 월대(月臺)의 폐허에서 통곡하니, 옛 도성의 유민(遺民)들이 저마다 따라서 슬퍼하였습니다. 조견은 일찍이 철(鐵)·석(石) 두 글자로 자기 두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며 죽을 때 임박하여 경계하기를 ‘나의 묘비에는 고려의 안렴사라고 쓰라.’ 하였으나 여러 아들들이 유언을 감히 따를 수 없어 조선조에서 내린 관직이름을 비석에 썼는데, 얼마 안 되어 비석이 갑자기 절반으로 꺾여져 ‘조공지묘(趙公之墓)’라는 네 글자만 남아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 충절과 도학은 실로 정몽주와 서로 대등합니다. 이 두 신하의 정충 대절(精忠大節)은 신명을 감동시키고 금석을 뚫을 만합니다. 비록 따로 서원을 짓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응당 한 사당에서 제사지내주기를 백이(伯夷)·숙제(叔齊)와 장순(張巡)·허원(許遠)처럼 해야 할 것인데,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야가 다같이 애석히 여기고 있습니다. 특별히 명하여 조견을 숭양 서원(崧陽書院)에서 제사지내도록 해 주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사람의 행적을 어찌 모르겠는가. 여기까지 미처 손을 쓰지 못한 형편이니 이 이외에도 반드시 이와 유사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이나 닦으라."
하였다.
경상도 유생 채학증(蔡學曾)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의 외선조(外先祖) 화산 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은 바로 우리 단종 대왕의 외조부입니다. 그러나 권전의 아들인 예조 판서 권자신(權自愼)이 육신(六臣)에 연루되어 그의 어미 부부인(府夫人) 최씨(崔氏)와 함께 같은 날에 죽었고 국구(國舅)란 신분마저 추탈당하여 평민이 되었습니다. 그의 무덤이 안동부(安東府)에서 북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돌보는 사람이 없어 묘역이 황량합니다. 숙종조에 이르러 고 상신 김재로(金在魯)가 경연에서 건의함으로써 특별히 감사에게 명하여 다른 국구의 규례대로 분묘를 봉축하여 수호군을 정하여 묘역을 지키며 비석을 갈아 세우게 하였는데, 부부인 최씨의 무덤이 좌찬성의 무덤 아래 있다고 합니다. 좌찬성은 바로 부원군의 아버지입니다. 화변 통에 예법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여 묘표와 묘지가 없는 관계로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굶주린 귀신을 면치 못하였으니, 저승에 계신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혼령이 어찌 눈물을 머금지 않았겠습니까. 국조(國朝)의 예법에 국구의 집안을 대접함이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여 4대가 지난 후에도 영원히 부조위(不祧位)로 만들었으며, 또 그 제수에 있어서도 선혜청에서 해마다 일정한 규례로 내주었고 분묘의 수호 또한 세목이 있었는데, 화산 부원군에 대해서는 이미 제사도 받들지 못하였으니 부조위의 의식은 애당초 논의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부부인은 또 그 분묘마저 실전하였습니다.
지금 자손 하나가 있으나 곤궁하여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사당을 세워 봉사할 것이며 또 어떻게 영남까지 왕래하면서 철따라 절사(節祀)를 받들겠습니까. 이제 특별히 그 종손을 시켜 따로 사당을 세우고 국구와 부부인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또 한성의 묘 아래에도 또한 영풍군(永豊君)에게 시행한 근자의 실례에 따라 별도로 하나의 단을 설치하여 부부인을 시사(時祀)하는 곳으로 만들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화산 부원군의 묘를 찾아낸 후에 조정에서 베푼 은례가 지극하였다. 부조묘(不祧廟)를 세워 국구에 대접하는 예우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 무엇 때문에 지시를 받아 처결할 것을 시끄럽게 요청하는가.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이 뜻을 알게 하라. 부부인의 무덤만 아직 찾지 못한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지적한 곳에 단을 설치하고 영풍군에게 실시한 근자의 실례를 따르는 것 또한 어찌 불가하겠는가. 너희들은 이렇게 알고 있으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근래 시골 선비들의 상소에는 외람된 것이 많다. 지금 들으니 공자(孔子)·주자(朱子)의 서원에 관한 상소가 또한 교외에 행차하는 도중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것이 어찌 상소할 일인가. 공 부자는 문묘에 주향(主享)이 되고 주 부자 또한 문묘 안에 배향되어 있는데 다시 무슨 서원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서원이란 명칭은 너무도 근거가 없는 말이다. 여러 유생들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성(尼城) 등지에 서원을 세워 공자만을 제사하는 것은 오직 그 지명에다 흠모의 뜻을 부여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특례 중에도 특례인데 어찌 번번이 이를 끌어다가 적용할 수 있겠는가. 원장(原章)을 아직 보지는 못하였으나 대체로 외람되기 그지없다. 반장(泮長)을 시켜 엄히 꾸짖어 내려보내고 앞으로는 이처럼 터무니없는 요청을 계속 외람되게 진술하지 말라는 뜻으로 각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10월 15일 임술
일차 유생에게 전강(殿講)을 실시하였다.
10월 16일 계해
약원(藥院)의 세 제조를 불러 만나보았다. 상이 도제조 홍낙성(洪樂性)에게 이르기를,
"벼슬길을 틔워주는 정사는 내가 고심하는 일이다. 근래에 전관(銓官)이 된 자는 벼슬길을 틔워조다는 명목을 빙자하여 도리어 사사로운 생각을 실현하려 하고 있다. 정말 자기가 좋아하는 자의 경우는 뒤질세라 끌어들여 등용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마땅히 틔워주어야 할 것도 틔워주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깊은 뜻이 이런 무리의 권세부리는 자료가 되고 있으니, 어찌 철저히 미워할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우러러 본받는 것은 곧 선대왕이 50년 동안 표준을 세워놓은 치도(治道)이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도 또한 모두 이에 감화된 사람이건만 받들어 보좌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근일 홍병찬(洪秉纘)의 일은 방자하고 해괴 하기 그지없다. 밖의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정일상(鄭一祥)의 추천으로 이런 처분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상은 이미 늙었으니 추천을 한 것은 물론 잘한 일이다. 그러나 침랑(寢郞)의 추천에 있어서는 정세순(鄭世淳) 형제가 아닌들 어찌 다른 사람이 없어 이렇게 사정을 쓰는 버릇을 오늘날의 조정에서 감히 부린단 말인가. 그가 무엇을 믿고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 계속 이렇게 한다면 그 자신은 우선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주위의 사람들까지 피해를 면치 못할 것이다. 경 등은 필히 여러 신하들에게 자세히 전달하라."
하였다.
윤행원(尹行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궁중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10월 18일 을축
춘당대에 나아가 전경 문신(專經文臣)의 전강(殿講) 시험과 전경 무신(專經武臣)의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10월 19일 병인
종부시(宗簿寺)가 아뢰기를,
"유학 이헌휘(李憲徽)가 어가의 행차 앞에서 올린 소에 의하면 ‘왕실의 자손들이 나라 안에 널려 있으나 아직까지 대보(大譜)가 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신 등이 자료를 모아 한 질의 보책을 만들어 경향의 모든 족인들로 하여금 모두 거룩한 조상을 추앙하면서 팔도가 한 집안이라는 기상을 이루게 하려고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조경묘(肇慶廟) 이하 16대는 전례와 같이 열서해야 한다.’고 하면서 혹은 목조(穆祖)에서 열성조(列聖朝)에 이르기까지 각파 대군과 왕자 위에 묘호(廟號)만을 써서 다른 책의 목록과 같이 해야 한다 하고, 혹은 해당 권책에 이르러서는 대군·왕자만 첫머리에 쓰고 후손을 열록하여 대동보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장황하게 하는 말이 전연 순서가 없었습니다. 《선원록(璿源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보잘것없는 미천한 것이 감히 외람된 생각을 내어 1년이 지나도록 궐문을 엿보다가 행차하는 길에서까지 성가시게 구는 것입니까. 종부시에는 이미 선원록이 있고 또 귀중한 보첩이 석실(石室)에 보관되어 있는데, 또 어찌 감히 별도의 대보(大譜)를 만들어 사사로이 보관한단 말입니까. 너무도 외람됩니다. 그 일을 주도한 사람을 유사로 하여금 치죄하게 하기 바랍니다."
하니,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0월 20일 정묘
차대(次對)를 가졌다.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금년 나라의 경사에 그 기쁨을 표시하려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조정 관리로서 나이 70세 이상은 모두 삼망(三望)을 갖추어 비답을 내린 후에 3대를 추존할 것을 허락하고, 선비와 서민으로서 나이 80세 이상은 모두 단망(單望)으로 중추부 동지에 붙일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대체로 단망에 붙이는 자는 자신에게만 첩지를 주고 추존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곧 관리 임명의 규례입니다. 그러나 승정원에서는 이런 규례를 알지 못하고 단망에 붙이라는 교지 끝에 3대까지 추증한다고 곧바로 써넣었으니, 이보다 더한 착오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상의 생각에는 그들과 경사를 같이 나누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차마 도로 거두지 못하고 그저 선왕조 때 한 번 잠시 시행한 전례를 따라 사족과 상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단망에 붙인 자는 모조리 동지(同知)로 그의 선대까지 추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족과 상사람이 그 증직의 품계가 같으면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려는 것이 도리어 억울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염려하여 아경(亞卿)·아윤(亞尹)·중추부 동지 등의 직함으로 등급을 나누어 증직한다면 팔도의 장계에 그 법이 일정하지 않은만큼 혹은 품관과 사족을 같이 등록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 혹은 사족과 서민을 같이 등록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 혹은 사족과 서민, 그리고 상사람을 뒤섞어 등록하는 것도 있을 것이니, 이조에서 비록 등급을 갈라 증직하려 하여도 형편상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때 단망으로 벼슬을 임명하라는 전교 내용을 선대까지 추존하는 것으로 잘못 전한 승지는 즉시 고발을 받아 파직시키고, 동지로 추천된 사람 외에 한 사람이라도 뒤따라 단망으로 붙인 자는 규례에 따라 증직하지 말며 사족으로서 문벌이 있는 자를 이조에서 혹시 추후에 발조견했을 경우에는 설사 이미 단망으로 붙인 뒤라 하더라도 다시 삼망을 갖추어 낙점을 받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조정에서는 처음에 허락하였다가 이내 취소하는 혐의가 없을 것이고 사족에게는 실로 가문에 더없는 영광이 되며, 이조와 병조의 관리를 각도에 파견하는 폐단도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의 말이 과연 사리에 맞다고 하겠다. 모두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와 같다면 사족으로서 현직(顯職)에 추증하기에 합당한 자는 증설한 동지(同知)의 자리에 삼망(三望)을 갖추어 낙점을 받은 후 즉시 추증할 것이다. 비록 벼슬을 거듭 내리는 일에 가깝기는 하나 또한 사족들이 크게 기대하는 심정을 충분히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시 이조와 병조로 하여금 알고 있게 하라."
하였다. 채제공이 또 아뢰기를,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이홍운(李鴻運)의 장계에 의하면 ‘신의 병영이 바다 어귀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물이 줄어들 때에는 그만 평평한 육지로 되어버리고 조수가 들어올 때에도 수심이 1척 정도에 불과하므로 허다한 전선(戰船)이 움직이지 못합니다. 돌을 쌓아 올리느라 공연한 비용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병영을 옮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기장(機張)의 대조포(大棗浦)는 선창이 깊고 넓으며 또 그 지형도 병영의 청사와 성지(城池)를 배치하기에 합당합니다. 그리고 관하의 각 진영이 좌우로 나열되어 있어 실로 중앙에 앉아 수응할 만한 지대가 됩니다. 본 수영을 대조포로 이설하는 일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 조처하게 해주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좌수영의 위치가 적합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조정의 의논에서도 또한 말이 많이 나왔으니, 수사가 이처럼 장계로 요청하는 것은 실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병영을 이설하는 것은 그 사안이 몹시 중대합니다. 그대로 두기를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채제공이 또 아뢰기를,
"대체로 나라에 경사가 있을 경우 상소문의 허두에 축하의 말을 붙이는 것은 정례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공경 재상들만 그렇게 하였지, 하급 관리들은 감히 할 생각을 못하였습니다. 근래에는 겉치레가 날로 일어나고 옛날 규례는 점차 무너져 나라의 경사가 있은 지 지금 몇 달이 지났는데도 상소문의 허두에 축하의 말을 붙이는 것이 한결같이 새롭습니다. 이렇게 계속 나간다면 비록 해가 바뀐 뒤에도 누가 자기부터 그만두려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지금부터 상소문을 쓸 때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조정 신하들에게 신칙할 것이며, 이후로 경사가 있어 상소로 축하하는 경우 그달이 지나면 즉시 중지하는 것을 영원히 일정한 규례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오재순(吳載純)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0월 21일 무진
윤대(輪對)가 있었다.
이치중(李致中)을 한성부 판윤으로,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10월 22일 기사
귀국한 사신 황인점(黃仁點)·서호수(徐浩修)를 불러 만나보았다. 상이 황인점 등에게 이르기를,
"경이 만리 밖에 나갔다가 무사히 돌아오고 주청한 일도 뜻대로 되었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다."
하니, 황인점이 아뢰기를,
"하늘과 조종이 돌보고 도와 성상의 후사가 탄생하였습니다. 신 등이 책문(柵門) 밖에 당도했을 때 기쁜 소식을 들었는데 신들만이 기뻐서 손뼉을 치고 춤을 춘 것이 아니라 저들도 모두 와서 축하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제께서 경들을 인조견한 것이 몇 차례나 되는가?"
하니, 황인점 등이 아뢰기를,
"황제 앞에 나간 것이 세 번이고 인조견한 것은 거의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곤명지(昆明池)에서 배를 탔을 때 좌석 차례가 황제의 어좌와 가까웠는가?"
하니, 황인점 등이 아뢰기를,
"황제는 누선(樓船)의 위층에 있었고 여러 각로(閣老)와 안남 국왕(安南國王) 및 신 등은 아래층에 앉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황제가 과연 친히 술을 부어 경 등에게 주던가?"
하니, 황인점 등이 아뢰기를,
"황제가 옥배를 들어 신 등에게 주었는데 시위한 신하들과 대신 등이 모두 말하기를 ‘이는 바로 만수배(萬壽杯)로서 국왕에게 전한다는 뜻이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일어나서 받으려 할 때 황제의 손이 마주 닿았습니다. 연회에 참석한 예부의 신하들이 모두 놀라는 얼굴빛으로 와서 축하하기를 ‘배신(陪臣)이 보탑(寶榻) 위에 근접한 것도 이미 옛날에 없던 은전인데 친히 옥배를 준 것은 더욱 전례에 없는 특별한 예우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열하에 도착한 후 주청하는 자문에 대하여 즉시 황지(皇旨)가 내렸던가?"
하니, 황인점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사직 인사를 드릴 때 이미 ‘복(福) 자를 반포한 후 감축하는 뜻을 황제에게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7월 16일 연회에 참가하였을 때 신 등이 머리를 조아리며 주달하기를 ‘새해 정초에 내려보낸 복(福) 자를 쓴 서한은 곧 천고에 드문 특별한 은전이므로 온 나라 신민이 감축하여 마음에 새기면서 좋은 경사가 있기를 기다리던 중 6월 18일에 과연 소국에 더없이 큰 경사가 났습니다.’고 하니, 황제는 기쁨에 넘치는 안색으로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그러한가. 이는 실로 크게 기쁜 일이며 실로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고 하면서 신 등을 명하여 연회반열에 들게 하였습니다. 군기 대신(軍機大臣) 화신(和珅)이 황제 앞에서 만수표문(萬壽表文) 및 주청자문(奏請咨文)을 받들어 어전에 바쳤는데, 한참 뒤에 표문과 자문을 안남 국왕에게 내보이면서 말하기를 ‘자획이 반듯하고 고르며 지질도 정결하다. 조선이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처럼 경건하니 다른 나라에 모범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어 표문과 자문을 철보(鐵保)에게 전달하면서 이르기를 ‘이 표문과 자문은 이미 어람(御覽)을 거쳤다. 이밖에 의례적인 표문과 자문은 행재소(行在所)의 예부에서 거두어 모아 경사의 예부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표문과 자문이 어람을 거쳤다는 것은 이로 인하여 알고 있었으나 황지(皇旨)가 내렸는지의 여부는 탐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17일 연회가 끝난 뒤에 신 등이 철보를 만난 자리에서 어제 표문과 자문이 먼저 어람을 거치게 된 이유에 대해 언급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어제 사신 등을 불러 접견한 후 예부를 관리하는 군기 대신 왕걸(王杰)이 보고하기를 「조선 사신이 바친 만수표문과 또 다른 자문 1통이 있다.」고 하자, 황상께서 즉시 명하여 가져다 본 후 황지를 내리기를 「국왕이 이처럼 간절히 청하니 윤허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귀국에서 주청한 것이 이미 허락이 났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또 묻기를 ‘그렇다면 귀부의 회답 자문이 어찌 지금까지 오지 않는가?’고 하니, 답하기를 ‘문서가 작성되면 경사에 돌아간 다음 사신들이 떠나갈 때 주어 보내는 것이 전례이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그제서야 주청한 자문에 대하여 즉시 허락을 받았음을 알았는데 예부의 회답 자문은 과연 9월 2일에야 내주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 등이 외국에 나가서는 황제의 만수를 축하하는 자리에 참가하고 복명을 하고는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게 되었으니, 좋은 팔자라고 이를 만하다. 황제의 근력과 용모가 연전에 비교하여 어떠하던가?"
하니, 황인점이 아뢰기를,
"용모는 약간 노쇠하였으나 아직도 60세 남짓한 사람과 같았고, 근력은 이목이 총명하고 걸음걸이도 민첩하였습니다."
하였다. 서호수(徐浩修)가 아뢰기를,
"열하에서 두 번째 신 등을 불러볼 때의 대화가 상당히 길었는데 통관이 계문(啓文)으로 전달하는 말이 매우 서툴렀고 청나라 말로 통역하는 것은 계문으로 하는 것보다도 더 서툴렀습니다. 앞으로는 청나라 말을 하는 역관을 특별히 공부시켜 사신이 갈 때마다 몇 사람씩 뽑아서 데리고 가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청어(淸語)는 당장의 실용가치가 한어(漢語)보다 낫지만 공부를 시키는 방도는 도리어 그만 못하다. 사역원(司譯院)에 신칙하라."
하였다.
황제가 내린 선물의 물목은 다음과 같다.
옥여의(玉如意) 한 자루, 【뒷면에 황제의 어제시(御製詩)가 두 줄로 쓰여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비오고 개이는 것이 모두 때에 맞아 산처럼 언덕처럼 쌓인 곡식 하늘까지 닿으리.[曰雨曰暘總時若 如山如阜齊高旻]’ 하였고, 옆줄에는 ‘신 팽원서(彭元瑞)는 삼가 쓴다.’고 새겨져 있다.】 망단(蟒緞) 6필, 장단(粧緞) 6필, 대단(大緞) 5필, 금단(錦緞) 2필, 섬단(閃緞) 2필, 대방사(大紡絲) 5필, 견전(絹箋) 2권, 먹 2갑, 붓 2갑, 벼루 2개. 【벼루 1개는 송화석(松花石)인데 전면은 병의 모양을 모방하였으며 물소 무늬를 새겼다. 머리쪽 옆면에는 해서로 ‘방송덕수전서문연(仿宋德壽殿犀文硯)’이란 8자를 새겼고, 벼루 밑바닥에는 황제가 지은 명(銘)을 새기기를 ‘금고(琴古)에서 생산된 돌이기에 별 무늬가 온통 아름답네. 기이하고도 진기하여 먼지도 물리치고 찬기운도 물리친다네. 다른 산의 돌로 갈고 갈아 병의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의미를 부쳐 덕 있는 사람의 장수함을 취하였네.’ 하고, 양각으로 ‘기가이정(幾暇怡情)’이란 네 글자와 ‘득가취(得佳趣)’란 세 글자와 두 개의 낙관이 새겨져 있다. 벼루 1개는 단석(端石)으로 만든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78면
【분류】외교(外交) / 무역(貿易)
하교하였다.
"장계에 거론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처 듣지 못하였다가 진하사가 돌아온 지금에서야 보니 선물로 내린 물건 중 옥여의(玉如意)에 ‘비오고 개이는 것이 모두 때에 맞아 산처럼 언덕처럼 쌓인 곡식 하늘까지 닿으리.’라고 써서 내린 어제시가 있고 또 황제가 지은 연명(硯銘)이 있으니, 의당 사례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사례하는 표문을 이미 봉하여 보냈지만 몇 마디의 말을 첨가하지 않을 수 없다. 재표관(齎表官)을 다시 파견하여 사은사에 붙여 보내라."
상이 좌의정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사신이 돌아올 때 옥여의(玉如意) 1자루, 서문연(犀文硯) 1개, 학필(鶴筆) 2갑, 묵(墨) 2갑을 선물로 내렸는데, 그중 옥여의와 서문연에는 어제시와 명(銘)이 있다. 경은 꼭 읽어보기 바란다. 황제가 우리 나라를 위하여 풍년을 기원하고 장수를 기원한 것이 이와 같다."
하니, 채제공이 대답하기를,
"이와 같은 예우는 역사책에서도 아직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신이 그 사실을 몰라서 보내온 장계에 이런 말이 없었으므로 자문 중에 사례하지 못하였다. 이미 선물을 내린데다가 황제의 어제문까지 있으니 의당 사례하는 표문을 고쳐 지어 할 말을 더 써넣어야 할 것이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청나라의 문적에 삼학사(三學士)가 순절한 사실을 쓰기를 ‘숭덕(崇德) 2년 3월 갑진일에 아무개 등을 처단함으로써 대의를 들어 명나라를 두둔하고 맹약을 저버린 채 군사를 일으킨 죄를 바루었다.’고 하고, 나덕헌(羅德憲)의 일도 기재하여 숨김이 없었다. 우리 나라 사람 가운데 어떤 자는 삼학사가 죽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닌가."
하였다.
10월 23일 경오
이조가 아뢰기를,
"순천부(順天府) 유학(幼學) 조형부(趙亨溥)의 상소에 의하여 사적을 널리 찾아 자세히 상고하여 보니, 고 통제사(統制使) 조이중(趙爾重)은 임인년 이전에 죽었고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그 아들 조흡(趙洽)은 붙잡혀 형을 받았는데, 그 아비 조이중이 일찍이 평안 병사로 있었던 사실이 국문하는 공초에서 드러나 대간의 서계로 인하여 관작이 추탈되었으며, 을사년 무옥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을 신원할 때에 이르러 조이중 역시 복관(復官)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신하들은 모두 증직을 받는 은전을 입었으나 조이중만 유독 빠졌습니다. 이는 대체로 여러 신하들은 실로 목숨을 바친 충성이 있으나 조이중은 애당초 화를 입은 일이 없기 때문에 당시의 처분이 이를 구분하는 뜻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손자가 당시 여러 신하들과 함께 목숨을 바쳤다고 말하면서 작위와 시호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옛부터 관작을 추탈당한 사람에게 그 원한을 씻어주고 관작을 회복하는 것은 곧 은전이 되지만, 다시 시호를 준 전례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목숨을 바친 사람에 견주어볼 때 차등을 두는 것이 마땅하고, 시호를 주는 것은 사체가 중한 것이니 경솔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조흡에 대해서는 처음에 체포된 것이 비록 무옥 때문이라 하나 끝내는 변란을 고발하여 여러 사람에게 화를 입히고 이로 인하여 죽음을 면하고 귀양가게 되었으니, 애당초 원통하게 죽은 일도 없고 또 내세울 만한 절의도 없습니다. 표창하여 증직하는 일은 더욱 논할 것이 없으니, 모두 그대로 두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10월 24일 신미
별주(別奏)를 연경으로 보냈다. 사은사 황인점 등이 돌아와서 황제가 우리 나라에 경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기뻐서 축하하는 말이 있었다고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특별히 사례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문임 각신(文任閣臣)을 명하여 특별히 주문과 자문을 짓게 하고 특산물을 갖추어 검서관(檢書官) 박제가(朴齊家)에게 군기시 정(軍器寺正)의 직함을 임시로 주어 그것을 가지고 동지사 일행을 뒤따라 함께 가게 하였다.
별주(別奏)는 이러하다.
"삼가 토산물을 올리면서 외람되게 간절한 충정을 표하는 사안입니다. 신은 바다 한쪽에 외지게 살면서 동쪽을 돌보는 황상의 덕화를 많이 입었습니다. 예우해 주는 것은 여느 변방 나라보다 훨씬 뛰어났고 보살펴 주는 것은 본국과 차이가 없어 사랑하는 마음은 복받기를 기원하셨고 위로하는 마음은 폐를 덜어주시는 등, 그 높고 두터운 은택은 역사에 보기 드뭅니다. 신은 매번 그 은택을 받들 때마다 고마운 생각만 가슴에 새기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성상을 우러러 볼 뿐 보답할 길이 없었습니다.
지난번 팔순의 만수절 경사는 천재 일우의 기회로서 온 천하가 다같이 기뻐하였으며, 산 넘고 바다 건너 모두 다 이르러와 온갖 선물이 대궐뜰에 가득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배신(陪臣)을 보내 축하하는 표문을 올리면서 삼가 생각해보니 의례적인 공물을 바치는 것으로는 하찮은 정성에 만족하지 못한 듯하여 따로 변변치 못한 물건이나마 마련하여 장수를 비는 축원을 드릴까 계획도 해보았으나 공물에 대한 정해진 규정을 감히 조금이라도 지나치게 할 수가 없어 정성을 품고도 펴지 못하고 마음만 간절할 뿐이었습니다.
금년 10월 11일 경사로부터 돌아온 배신 황인점과 서호수 등의 편에 듣건대, 황제께서는 미천한 사신을 여러 차례 만나주고 갖은 사랑을 베풀었으며, 심지어 저희 나라에서 아들을 본 경사에 대해 황제께서 기뻐해 주셨고 은혜로운 말씀은 정중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더구나 여의(如意)와 문연(文硯)을 내부(內府)로부터 내주었는 바, 풍년을 기원하신 거룩한 문장이 옥돌에 아로새겨져 있어 만리밖에 있으나 황제 앞에서 몸소 받는 것 같았습니다. 신은 온 나라의 신민과 함께 더없이 영광스럽고 감격하여 백번 절하며 머리 조아렸습니다.
신은 듣건대 위에서 베풀어주는 것이 있으면 아래서는 보답하는 예가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답례를 노래한 《시경》의 녹명장(鹿鳴章)과 천보장(天保章)이 옛날부터 그러했습니다. 토산물이나 바치는 의식으로 성심껏 보내온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윗사람을 섬기는 구구한 정성을 끝내 드러내지 못하면 이는 스스로 하늘 같은 은덕을 외면하는 것으로서 자기를 친근히 대해주는 사랑을 받드는 도리가 아닙니다. 또 예부에서 보낸 자문과 황지(皇旨)를 전달받은 것에 의하면 사은 방물(謝恩方物)을 받아들일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 하명을 받고 돌아왔으니, 송구한 생각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지정된 공물을 영원히 면제받은 것만해도 이미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이니, 토산물로 정성을 바치는 것쯤은 외람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를 빙자하여 바치니 이러한 명분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오래 전부터 품어오던 소원을 만분의 일이나마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사은 방물은 황제의 뜻에 따라 의례적으로 바치는 것을 그만두고 몇가지 변변치 못한 물건을 가지고 따로 표단(標單)을 갖추어 정성껏 싸서 사은사 편에 부쳐 보냅니다. 균로(筠簵)와 우모(羽毛)는 중국에 있는 것이지만 숙신(肅愼)이 쇠뇌를 바치고 월상(越裳)이 흰 꿩을 바친 것이 역사에 전하듯이 물건은 비록 변변치 못하나 정성은 실로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제께서는 특명으로 받아들여 외공(外供)에 대처하심으로써 소국이 정성을 다해 대국을 섬기며 경사를 만나 축수하는 간절한 정성을 조금이나마 펴게 해 주신다면 못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토산물을 올리면서 외람되게 간절한 충정을 표하는 사안으로 인해 이렇게 삼가 갖추어 주달합니다." 【내각 지제교(內閣知製敎) 이만수(李晩秀)가 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79면
【분류】외교(外交)
별자(別咨)는 이러하다.
"감히 하찮은 정성을 표하여 황제에게 전달해 주기를 바라는 사안입니다. 본인은 해외의 작은 나라의 사람으로서 황제의 하늘 같은 은혜를 보다 많이 입어 전후에 걸쳐 받은 은총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니, 감격하여 떠받들며 기원하는 정성이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팔순이 되는 큰 경사에 만수 성절을 만나 온 누리에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뻐 날뛰고 춤추면서 세월이 무궁하도록 장수를 축원하고자 합니다. 이 소국으로 말하면 가장 많은 은택을 입어 자연 본국과 다름이 없기에 충성을 바치려는 구구한 정성은 내공(內貢) 이외에 별도로 토산물을 갖추어 윗사람을 섬기는 의식을 조금이나마 행하고 복을 비는 정성을 표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예가 일정한 의식과 다르고 그 행동이 외람된 일에 가까워서 주저하기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니 마음에 걸려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진하사가 돌아온 편에 들으니, 돌보아 주는 마음과 온화한 회유가 진지하고도 정중하여 보통 격식을 훨씬 뛰어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여의(如意)와 문연(文硯)을 특별히 내리시고 게다가 어시(御詩)와 어명(御銘)을 내린 특별한 은총까지 겹쳤는데, 풍년을 기원하신 거룩한 내용에 외진 바다 한쪽 모퉁이가 빛납니다.
지난 봄에 써 주신 복(福) 자의 어필만해도 이미 지극히 인자한 사랑을 입은 것인데, 이번에 베풀어 주신 특별한 은택은 더욱 지난 역사책에 없었던 일입니다.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변방 나라가 어떻게 이런 것을 받게 되었습니까. 삼가 대소 신료들과 함께 받들어 구경하며 영광에 감격하여 북쪽을 바라보면서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옛말에 은덕은 꼭 갚아야 하고 말은 꼭 대답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위에서는 하해와 같은 은덕을 베풀어주는데 아래에서는 조그마한 보답도 없다면 실로 예의와 인정으로 보아 감히 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천재일우의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당하여 거듭 옛날에 없던 은택을 입고서도 한갓 무엄하고 외람되다는 작은 혐의만 생각하여 예물을 바치는 지극한 소원을 펴지 못한다면 이는 소국을 사랑하는 황제의 높은 은택을 받드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또 삼가 생각건대, 이번에 입은 은덕이 이처럼 융성하였으니 의당 별도로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삼가 바쳐야 하겠으나, 사은 방물(謝恩方物)에 대해 이미 중지할 것을 명하였으니 법례대로 물건을 바쳐 정성을 표시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몇 가지 변변치 못한 물품을 마련하여 연례로 바치는 공물을 가지고 가는 배신(陪臣) 편에 부쳐 올리니, 비록 하찮은 정성을 표시하는 데서 나온 것이긴 하나 소국의 의무를 집행하는 의례적인 의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오직 당돌한 것이 두려워 이에 감히 별도로 주문을 올리고 또 삼가 따로 자문을 갖추어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올립니다. 여러 대인들께서는 먼 나라의 간절한 소망을 굽어 헤아려서 반드시 황제에게 전달하여 감격하여 보답하려는 소국의 정성을 위에 알려주기 바랍니다." 【홍문 제학 홍양호(洪良浩)가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79면
【분류】외교(外交)
10월 26일 계유
승지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서장관(書狀官)의 문견별단(聞見別單)은 매우 허술합니다. 괴원(槐院)에서 강희(康熙) 이전 서장관들의 문견록을 보니 모두 압록강을 건넌 후부터 일기를 써서 올렸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한두 조목만을 써서 바치는 데 불과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별단을 도로 주어서 고례에 의해 수정하여 들이게 하고 이후의 서장관은 모두 이를 참조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이만수에게 묻기를,
"금일 새벽에 대궐 안에 붉은 빛이 비쳤다고 하는데 이를 본 사람이 있는가?"
하니, 이만수가 대답하기를,
"신이 이른 아침에 궁중의 숲을 쳐다보니 붉은 빛이 하늘에 뻗쳐 위아래가 모두 빛났으며, 날이 환하게 밝을 때까지도 오히려 남은 빛이 있어 조회에 나오는 여러 승지와 하인들도 모두 보고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하였다.
서장관 이백형(李百亨)을 불러 만나보았다.
10월 27일 갑술
춘당대에 나아가 별군직(別軍職)과 선전관(宣傳官)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계속하여 각신(閣臣)·장신(將臣)·별군직 등에게 짝지어 활쏘기를 명한 결과 문신이 무관보다 나았다. 새로 선발된 초계 문신들을 불러 "용문에서 눈을 구경한다.[龍門賞雪]"는 제목으로 칠언 근체시(七言近體詩) 1편씩을 짓게 하고 불에 구운 고기와 큰 술잔을 내렸다. 저마다 모두 취하게 마시고 배불리 먹어 태평시대의 성대한 일이라 하였다.
10월 28일 을해
전교하였다.
"금년은 곧 육상궁(毓祥宮)047) 의 두 번째 환갑이 되는 해이다. 옛날 선대왕께서는 추모하는 마음이 연세가 많으신 뒤에 더욱 독실하여 경연에서 하시던 말씀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기억난다. 그때 선대왕을 섬긴 여러 신하로서 그 말을 들은 사람치고 그 누구인들 금년이 다른 해와 다르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또 선왕조의 고사를 상고하니, 육상궁의 시사(時祀)를 동지(冬至)·하지(夏至)와 춘분(春分)·추분(秋分)에 지냈는데 때로는 특별한 감회로 인하여 간혹 앞당겨 지내는 때도 많았다. 내가 이제 마침 경술년을 당하여 이해 이달 이날에 삼가 고사를 따르고 우러러 선대왕의 뜻을 본받아 몸소 제사를 지낸다면 아마 인정과 예법에 부합될 것 같다. 육상궁의 동지 시사를 6일로 앞당겨 정하되 하루 전에 재실에 나가 제사를 지낸 후, 또 광화문 밖 임시 처소에 나아가 자전(慈殿)의 행차를 맞이하여 육상궁048) 으로 돌아와 자전께서 행례하시길 기다렸다가 행례가 끝나면 환궁하겠다. 해조는 알고 있으라."
전교하였다.
"6일에 자전께서 육상궁에 나아가 행례하는 것은 선대왕의 유지를 따르자는 뜻이다. 예조로 하여금 그리 알고 종묘를 참배하거나 본궁을 참배하는 의식 절차를 상고하여 이에 대한 의주(儀注)를 마련하게 하라. 본궁의 안뜰이 좁아서 내·외 명부(內外命婦)가 비록 규례대로 반열에 참여하지는 못하더라도 중궁전의 행례는 그만둘 수 없다. 6일 중궁전이 육상궁에 나갈 때는 자전께서 육상궁에서 나온 뒤에 떠나게 하되 시각은 적절히 알아서 하도록 하라."
상이 좌의정 채제공에게 묻기를,
"자전께서 행차할 때 나는 광화문 밖에서 맞이할 것인데 맞이한 후 즉시 육상궁으로 모시고 가는 것이 옳겠는가, 아니면 중전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떠나야 할 것인가?"
하자, 채제공이 아뢰기를,
"중궁전께서 이미 자전을 모시고 가기로 한 이상 대가(大駕)는 중전께서 오기를 기다렸다가 떠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명식(李命植)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조정이 존엄해야만 기강이 서는 것입니다. 일전에 원춘 감사가 울진 현령(蔚珍縣令) 이병정(李秉鼎)의 보고 내용을 열거하면서 오래된 환자를 받아내기 어렵다는 일을 논하여 치계하였는데, 현령의 외람되고 두서없는 말들을 모두 베껴 써넣었습니다. 사리로 보아 몹시 외람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자세히 보지는 못하였으나 지금 경의 말을 듣고 보니 실로 몹시 해괴하다."
하고, 도백을 추고할 것을 명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이병정의 문제는 실로 극히 놀랍다. 근일 조정이 무사하고 관리들의 장주(章奏)가 없는 것은 모두 이병정을 외직으로 내보냈기 때문이다. 지난날 이 사람의 권세가 이렇게 대단했던가. 이조 참판으로 있을 때 판서를 무시하고 언제나 인사 행정을 독단하였다. 이것이 무슨 조정의 체면인가. 특별히 외직을 명한 것은 조금 깨우쳐 주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만약 옛날 버릇을 고친다면 어찌 저의 한 가문의 다행일 뿐이겠는가."
하니,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전일에는 온 세상 사람이 벌벌 떨면서 마음을 놓지 못하였는데 요즘은 조정 분위기가 안정되었습니다."
하고, 채제공은 아뢰기를,
"이병정을 처분한 것은 여러 신하들에게 실로 더없이 큰 은택입니다."
하였다.
10월 29일 병자
춘당대에 나아가 장용영(壯勇營)의 훈련을 실시하였다.
장용영의 기병 1초(哨)와 초군 7초를 좌우로 나누어 춘당대 아래 배치하고 장용위(壯勇衛)는 어가의 전후에 시위하고 깃대와 북을 벌여놓았다. 어가가 나아갈 때 포성을 울리고 천아성(天鵝聲)을 불며 배치된 군사는 다 같이 3번 탄환을 쏘았는데, 포성이 3번 나자 요란하게 취타(吹打)를 울렸다. 어가가 작문(作門)으로 나가자 포를 쏘고 천아성을 불며 배치된 군사는 깃대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고함치기를 모두 세 차례 하였다. 어가가 춘당대 위에 이르자 호방(戶房) 이하 군사를 거느리지 않은 장관들이 반열을 나누어 대 위에 이르러 시위하였다. 문이 조금 열리고 취타가 울린 다음 병방(兵房)·지구관(知彀官)·기패관(旗牌官)이 차례로 나와 알현하였다. 순뢰(巡牢)·취고수(吹鼓手)가 반열을 나누어 머리를 조아린 다음 승단포(升壇砲)를 세 번 쏘고 크게 취타를 울리며 뇌자(牢子)는 크게 3번 외쳤다. 그리고 포를 쏘고 북을 치고 꽹과리를 치고 깃발을 올렸다. 군사를 거느린 장수가 차례로 알현하고 나서 호적(號笛)을 거두고 관기(官旗)를 모으고 포성을 듣고 나서는 각각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숙정포(肅靜砲)를 3번 쏜 다음 첫째 신호를 맡은 사람이 당보(塘報)를 뛰우고, 둘째 신호를 맡은 사람이 행군길을 열었다. 세 길로 행군하되 영병(營兵)이 한 바퀴 돌아 아래쪽 군영 앞에서 서로 마주보며 훈련하였다. 장용위(壯勇衛)와 무예청(武藝廳)의 군사가 사면에서 충돌하다가 철수한 다음, 경군(京軍) 3초는 중앙에서 육화진(六花陣)을 치고 향군(鄕軍) 2초는 좌측에서 예진(銳陣)을 치고 아병(牙兵)은 우측에서 원진(圓陣)을 쳤다. 좌측 대열 장용위는 예진을 추격하고 우측 대열 장용위는 원진을 추격하며 무예청은 육화진과 충돌하다가 철수한 다음, 병방(兵房)으로 하여금 경군(京軍) 1초를 거느리고 단 앞에 나아가 방진(方陣)을 치게 하고, 장용위와 난후군(攔後軍)으로 앞길을 막고 구원의 길을 끊었다. 무예청은 충돌하면서 단 아래에 가서 각 진의 구원병과 앞길을 막는 장용위와 서로 추격한 후 각각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군영이 철수하여 자기의 위치로 돌아간 후 훈련을 마쳤다는 인사를 하고 해산하였다. 깃발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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