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기묘
정민시(鄭民始)를 예문관 제학으로, 이갑(李𡊠)을 이조 판서로, 이홍재(李洪載)를 이조 참판으로, 홍억(洪檍)을 형조 판서로, 서호수(徐浩修)를 한성부 판윤으로, 한광회(韓光會)를 판의금부사로, 조집(趙㠎)을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11월 4일 경진
구익(具㢞)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1월 5일 신사
육상궁(毓祥宮)을 참배하고 제물과 제기를 둘러보았다. 이어 봉안각(奉安閣)·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을 참배하고 육상궁으로 돌아와 재계하면서 밤을 지냈다.
11월 6일 임오
육상궁의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친히 지내고서 하교하였다.
"이해 이달 이날 육상궁에서 동향 대제를 지낸 것은 곧 선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고 오늘 두 번째로 맞는 환갑의 큰 영광을 경축하기 위해서이다. 임금을 낳아 기르신 공덕이 여기서 시작되었으니, 나로서 근본을 추모하는 생각을 무엇으로 표시해야겠는가. 증 영의정 최효원(崔孝元)의 집에 예관을 보내 치제할 것이며, 전 병사 최조악(崔朝岳)과 전 수사 최경악(崔景岳)은 산관(散官)이 된 지 이미 오래니 품계를 올려주고 아울러 등용할 것이며, 한량 최정악(崔廷岳)과 삼영(三營)의 권무 군관(勸武軍官) 최윤경(崔允慶)은 걸맞는 관직으로 차임하여 보내라."
왕대비(王大妃)가 육상궁에 나아갔다. 연(輦)을 타고 선정문(宣政門)을 거쳐 돈화문(敦化門)으로 나갔는데 왕비도 연을 타고 따라갔다. 상은 육상궁에서 신무문(神武門)을 거쳐 광화문(光化門)으로 나가 막차(幕次)에 이르러 대기하였다. 그리고 어가를 수행하는 모든 관리들은 미리 순서대로 서도록 명하였다. 자전의 행차가 지나갈 때 상은 모든 관리들과 함께 경건히 맞이하였고, 중전의 행차가 지나갈 때에는 모든 관리들이 경건히 맞이하였다. 상은 다시 광화문을 거쳐 신무문으로 나가 육상궁으로 돌아오니, 자전과 중전이 이미 궁문에 이르렀다. 행례할 때가 되자 의식에 따라 참배하였다. 자전이 연을 타고 궁문을 나오자 중전도 연을 타고 뒤따랐다. 상은 남여를 타고 궁문을 나와 신무문으로 들어가 남여를 멈추고 전 병사 최조악 등을 불러 만나본 다음, 문소전(文昭殿) 옛터에 가서 참배하고 광화문으로 나가 대기하다가 자전의 행차가 지나가자 상이 백관들과 함께 경건히 맞이하고, 중전의 행차가 지나가자 백관들이 경건히 맞이하였다. 조금 뒤에 상이 떠나서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왔는데, 자전과 중전은 선정문을 거쳐 먼저 내전으로 돌아왔다.
어가가 돌아올 때 어떤 사람이 한 줄기에 서른 개의 이삭이 달린 조를 행차 앞에 바쳤는데, 상이 병조에 명하여 그 사람을 엄히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환위 장령(環衛將領)과 고훤 도사(考喧都事)가 능히 이를 금지하지 못하였다 하여 모두 유사에게 명하여 엄히 치죄하게 하였다.
11월 7일 계미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제물과 제기를 살펴본 다음 친히 동향 대제의 예행 연습에 참가하였다. 제관 중에 절을 의식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므로 전교하기를,
"《주례(周禮)》에 아홉 번 절하는 예가 있어서 옛날부터 그러하였다. 더구나 조회 의식과 제향 의식은 더욱 특별하지 않은가. 비록 예법에는 없고 임시 방편으로 만든 일이라 하더라도 당대 임금의 제도이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선왕 때부터 조복차림과 제복차림으로 절을 할 때에는 손을 들어 이마에 붙이는 쓸데없는 습관을 쓰지 못하게 함으로써 공경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하라는 칙교가 여간 엄격한 것이 아니었고, 근래에도 또한 이 일로 신칙한 것이 과연 어떠하였던가. 막중한 예행 연습이요 또 내가 친히 참여하였는데 어찌 감히 잘못된 습관을 답습하는가. 반열을 정돈하는 감찰을 파면하라."
하고, 재계하며 밤을 새웠다.
11월 8일 갑신
경모궁에서 친히 동향 대제를 거행하였다.
이조 판서 이갑을 특별히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보임하였다. 이갑이 의리를 핑계하면서 여러 차례 판서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응현(申應顯)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광묵(金光默)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1월 9일 을유
오재순(吳載純)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11월 10일 병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친히 왕대비의 탄신 축하를 올렸다.
이경일(李敬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11일 정해
윤대(輪對)를 가졌다.
11월 12일 무자
남양(南陽)·안산(安山)·진위(振威)·용인(龍仁) 4개 고을 수령을 현륭원(顯隆園) 제관으로 번갈아 차임할 것을 명하였다.
도총부(都摠府)의 당번들이 책임을 서로 미루는 버릇에 대하여 신칙하고, 도총부의 녹사(錄事)를 중추부에 소속시키도록 명하였다.
승지 신기(申耆)가 경연에 들었는데 술이 몹시 취하였다. 전교하기를,
"다른 재능이 없어도 혹시 여러 관청을 호령할 지위에 그 근력이 조금이라도 합당하면 근래에 사실 자주 임명하곤 하였는데, 면전에서 글을 받아쓸 때 술 냄새가 코를 찌르니 너무도 조심성이 없다. 계설향(鷄舌香)을 구하여 입에 물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이처럼 과음할 수 있단 말인가. 해괴하기 그지없으니 중한 편으로 추고하라."
하였다.
11월 13일 기축
전 강화 유수(江華留守)에게 도성 밖에까지 와서 인신(印信)을 인계할 것을 명하였다.
11월 14일 경인
대신(大臣)과 각신(閣臣)을 불러 만나보았는데, 문안을 드렸기 때문이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사도시 첨정 이만운(李萬運)이 편찬한 《문헌비고(文獻備考)》를 보고 그의 지식이 해박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연한이 이미 지나 지방의 고을도 맡기지 못하니 매우 애석합니다."
하니, 강화 경력(江華經歷)을 내직으로 옮기고 이만운을 차임하여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에 채제공이 아뢰기를,
"경력을 교체하게 되면 강화가 허술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나의 경력을 바꾸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아침 경연에서 강화 경력을 내직으로 옮기는 것이 부당하다고 경솔히 어리석은 소견을 진술하다가 미처 그 말을 끝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방 소보(小報)를 보니 경력을 구두 임명으로 이동시킬 것을 재촉하였고, 또 듣건대, 유수는 반드시 내일 아침에 상경하여 인신을 인계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이에 가슴에 찬 의혹과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아, 역적 종친의 극도에 찬 죄악은 신령과 사람이 함께 분노하는 것이며 국법으로 보아 반드시 처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목숨을 연장하여 섬 중에서 숨을 쉬고 있게 하는 것도 이미 형벌이 잘못 적용된 것인데, 그 방비가 엄밀하지 못하고 규찰이 간혹 소홀한 탓으로 지난 가을에 뛰쳐나가는 변고가 있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응당 더욱 특별히 방비를 엄히 하여 가둬두는 방도를 다해야 할 것인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강화 유수에게 있습니다. 지금 만약 상영(上營)을 잠그고 이아(貳衙)를 비운다면 뜻밖의 근심이 또 지난 가을처럼 생기지 않을런지 어찌 알겠습니까.
또 유수의 인신 인계는 서울에서 하건 지방에서 하건 그 편리함에 맡길 뿐이요 실로 조정에서 지휘할 일이 아닌데, 누차 재촉하는 전교를 내려 도성 밖에까지 불러올리게 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명령이 전도되어 듣는 사람에게 의혹을 품게 하니, 신은 실로 전하를 위하여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지난날 정치달(鄭致達)의 처의 일에 대해서도 여러 사람들의 의혹이 대체로 모두 그러하여 항간의 말들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전하를 독실히 믿는 자로서 아는 것은 ‘성인이 어찌 나를 속이겠느냐.’는 것이지만 그래도 오히려 한밤중에 잠을 설치게 됩니다. 오늘날의 일이 또 어찌하여 신으로 하여금 지난 옛날의 걱정을 잊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다년간 학문을 쌓아 의리를 환히 아시는 전하께서 어찌 혹시라도 이러한 일을 그냥 지나쳐 버릴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신이 미연의 일을 당돌히 말씀드리는 것은 오로지 지나친 염려와 남모르는 걱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굽어살피고 의견을 받아들여 빨리 강화의 전 유수에게 상경하여 인신을 교환하라고 한 하명을 취소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유수가 병으로 교체를 청하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상경하여 도성 밖에서 인신을 인계하게 하였는데도 관망만 하고 망설이면서 지금까지 늦추고 있으니, 어떻게 신칙하는 전교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 경력을 내직으로 옮기는 일에 대해서는 또한 사정이 마침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은 어찌하여 상영을 잠그고 이아를 비운다고 말하는가. 첫째는 아랫사람을 생각해주는 조치이고 둘째는 공로에 보답하는 은전이다. 명령이 타당하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며 듣는 사람들이 모두 고무된다고 말하여야 옳을 것인데, 또 어찌하여 전도되었다고 말하며 의혹을 품는다고 말하는가. 끝으로 정치달의 처의 일을 진술한 데 대해서는 그 당시 경이 면대를 청한단 말을 듣고 즉시 승락하여 바로 결말이 나도록 하였다. 교군들이 도로 가마를 메고 발길을 돌린 것은 길가던 사람치고 목격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경 등은 그대로만 믿으면 될 것이다. 경이 이른바 여러 사람들이 의심한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심이며 항간에서 말한다는 것은 과연 무슨 말인가. 녹록한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 일이건 저 일이건 차자의 내용은 억측이 아닌 것이 없다. 경을 위하여 취하지 않는다."
하고, 이어 사록(司錄)으로 하여금 유시를 전달하도록 명하였다. 한참 뒤에 하교하기를,
"사록을 언제 불렀는데 아직까지도 지체하고 있는가. 당직에 든 승지를 모조리 교체하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을 파직하고 우참찬 송재경(宋載經)과 경기 관찰사 김희(金憙)에게 서용하지 않는 법을 적용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신은 내가 존경하는 바이다. 그러나 성인이 ‘예절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는 것을 사람들은 아첨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의 대신들은 너무 아첨을 멀리함으로써 도리어 예를 다하지 않으며 억측하는 말을 차자에까지 쓰고 있다. 동등한 관계 이하의 사람에게도 미연의 일을 가지고 억지로 억측을 가하면 오히려 서로 존경하는 도리를 손상하는 것인데, 더구나 임금과 재상 사이이겠는가. 대신으로서 이와 같이 본분을 다하지 않는데 나 역시 어떻게 자신을 굽혀 존경하는 예를 베풀겠는가. 지금처럼 기강이 해이해진 때 사람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는 자로서 이처럼 말을 가리지 않는 실수를 범하였으니, 이런 것을 그냥둔다면 뒷날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좌의정 채제공을 파직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앞서 두 중신이 정치달의 처의 일로 전후 번갈아 진술한 글의 내용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올라오는 대로 받아 보류하여 그들이 싫증나면 그만두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대신을 처벌한 후이니, 그 아랫사람들의 실언한 죄도 밝혀서 바루지 않을 수 없다. 우참찬 송재경과 경기 감사 김희에게 빨리 서용하지 않는 법을 적용하라."
하였다.
승지 유당(柳戇)·이민채(李敏采)·신기(申耆)·이홍재(李洪載)를 갈고, 채홍리(蔡弘履)·이만수(李晩秀)·홍의호(洪義浩)·이경오(李敬五)·강원(姜垣)을 승지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향을 전달하는 막중한 일을 품의하지 않고 위에서 물어보게 만들었으니 담당 승지를 교체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문을 여는 것은 본디 일정한 시간이 있는 것인데 잠에서 깨어나는 대로 열어 혹 이르기도 하고 혹 늦기도 하니, 너무 해괴하다. 아침에 출사한 승지도 체차하라."
하였다.
특명으로 신기현(申驥顯)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선전관에게 신표를 주어 보내 강화 전 유수 신대승(申大升)이 차고 있는 밀부(密符)를 빼앗고 아울러 신대승과 중군 경력(中軍經歷)을 함께 압송해 오게 하였다.
서소 위장(西所衛將) 조언빈(趙彦彬)을 가승지(假承旨)로 차임하였다.
부교리 박기정(朴基正), 수찬 박규순(朴奎淳)이 면대를 청하므로 파직을 명하고 이어 공무를 집행하는 삼사(三司)도 함께 체차할 것을 명하였다.
전교하였다.
"가승지049) 는 외람되기 그지없다. 경기 고을 변방 장수에 한 사람의 후보자로 차임하여 보내라."
11월 15일 신묘
승지가 면대를 청하자, 계사(啓辭)를 되돌려주라고 명하였다. 각신(閣臣)이 면대를 청하니, 반수각신(班首閣臣)에게는 파직을 명하고 나머지는 모두 내각 직함을 교체하게 하였다.
승지 이경오(李敬五)를 통진 부사(通津府使)에 보임하였다. 이경오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신기현(申驥顯)은 얼마나 극악한 역적인데 승지의 특별 제수가 갑자기 내린단 말입니까. 성명한 세상에 이런 예사롭지 못한 조치가 있을 줄은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빨리 하명을 거두고 해당되는 율문을 적용하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경오의 경연 진술은 몹시 시끄럽고 외람되다. 통진 부사로 제수하라."
하였다.
승지 홍의호(洪義浩)가 면대를 청하자 체차를 명하고, 남소 위장(南所衛將) 박만첨(朴萬瞻)을 가승지로 차임하였다.
검열 홍낙유(洪樂游)·서유문(徐有聞) 등이 아뢰기를,
"신기현은 극악한 역적입니다. 신 등이 관직은 비록 낮으나 극악한 역적이 옥관자에 관복 차림으로 정원 안에 활개치며 돌아다니는 꼴을 어찌 차마 볼 수 있겠습니까. 빨리 하명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한림의 소행이 너무도 주제넘고 망령되다. 사헌부 대사헌이, ‘비록 전하여 일러오는 고사가 있으나 한림이 계사를 올린 사례는 더욱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어찌 동서를 분간하지 못하는 가승지를 협박하여 이런 행위를 취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엄히 처벌하는 것은 마치 파리에게 화를 내어 칼을 뽑는 데 가까운 일입니다.’라고 아뢰었으니, 이 계사를 그들에게 되돌려주고 그들의 부형에게 각별히 신칙하게 하여 후에는 이처럼 기세를 부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승지 신기현이 공주(公州)에 있으니 역마를 타고 올라오도록 하유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승지 신기현이 지난해 가을에 올린 상소의 내용은 징토에 대한 말을 성대히 진술함과 아울러 의금부 당상이 독단하는 과실을 덧붙여 말한 것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과연 얼마나 좋은 격언인가. 대체로 이 사람을 일찍이 경연에서 보고 자못 그 사람됨이 지나치게 순박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상소를 그가 스스로 만드리라고는 실로 생각지 못하였는데 그가 이 상소를 만들었으니, 결코 잔꾀나 부리는 부류는 아니다. 이 어찌 가상하지 않은가. 이 시기에 이런 사람을 등용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앞서 독단하였다는 일은 비록 길을 막아놓고 물어보더라도 누가 그것을 옳다고 말하겠는가. 그렇다면 이 사람이 과연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때에는 이 사람이 서울에 있지 않아야만 조정의 호소를 중지시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안정시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은밀히 도사를 시켜 그 집에 가서 그로 하여금 편한 곳에 살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하교할 일에 대하여 올린 계사를 보건대, 그 본가가 원래 공주에 있었다 하여 지방에서 올려보내게 하라고 하였으니, 이는 매우 성실치 못한 일이다. 비록 그가 간 곳을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결국 영남이나 호남의 먼 곳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니, 공주 운운하는 것은 너무도 터무니없다. 그 내막을 조사하여 보고하고 즉시 정원으로 하여금 소재처의 지방관에게 유지(有旨)를 만들어 보내 그를 역마에 태워 밤낮없이 달려 상경하게 하라. 정원이 만약 그가 간 곳을 알지 못하거든 두 통의 유지를 만들어 가지고 승정원 관리를 호남과 영남으로 나누어 보내 즉시 찾아 불러오게 하라. 이러는 동안에 본직을 너무 오랫동안 헛되이 비워둘 수 없으므로 지금 우선 체직을 허락한다. 이런 내용도 함께 하유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가승지 박만첨(朴萬瞻)의 소행이 극히 무엄하다. 동부승지를 역마에 태워 상경시키자는 계사에 대하여 내린 전교를 그가 감히 소매 속에서 꺼내어 내 앞에 바쳤다. 말은 비록 미처 다 마치지 못하였으나 그 행동이 이처럼 어리석고 외람될 수 없다. 본직 및 가승지의 직함을 모두 빼앗고 금일 내로 본 고향으로 쫓아 보내라."
전교하였다.
"내일은 바로 동짓날이다. 문을 닫고 조용히 있던 선왕의 뜻을 본받아 떠드는 것을 금지하고 양기를 붙잡는 정사를 생각해야 하겠다. 동지 전후 각 하루와 동짓날에는 각사에서 금패(禁牌)를 거두어 간직하고 긴급하지 않은 장주(章奏)는 일체 올리지 말라."
전교하였다.
"내일은 바로 동짓날이다. 양기가 이를 때에는 조정 분위기를 조용하게 해야 하고 떠들썩해서는 안 된다. 내각·정원·옥당을 비워놓는 것은 매우 불가하다. 더구나 문안드리는 반열이 내일에 있지 않은가. 차임하지 못한 승지의 대임은 앞서의 의망 단자를 들여보내 비답을 받아서 소명패로 불러들여 일을 보게 하라. 각신 및 옥당의 관리로서 체직되었거나 파면되었거나 삭직된 사람들도 모두 용서하여 역시 소명패로 불러들여 입직하게 하라. 조정에서 만약 공손히 처분을 기다린다면 또한 마땅히 이해해주는 조처가 있을 것이나 혹시라도 소요를 야기한다면 의당 각별한 처분이 있을 것이니, 모두 이를 알고 있도록 하라."
11월 16일 임진
문안하러 들어온 각신과 원임 제학을 불러 만나보았다. 오재순(吳載純) 등이 아뢰기를,
"신기현은 그 얼마나 극악한 역적입니까. 엊그제 승지로 특별히 임명된 것은 실로 천만 뜻밖에 나온 것입니다. 신 등이 말할 자리를 얻지 못하다가 지금 다행히 뵙게 되어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빨리 취소를 허락하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번거롭게 진달하는가."
하자, 오재순 등이 아뢰기를,
"지금 새봄의 화기를 맞이하는 때를 당하여 경향이 물끓듯하면서 기상이 스산합니다. 어전에 나아가 면대를 요청한 사람은 모두 엄한 꾸중을 받곤 하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과도한 조치를 취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물러가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어제 내린 전교에 이미 이해하겠다는 말을 하였으니 그 말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 승지의 일에 대한 전교를 그만두는 문제에 대해서는 소청대로 따라줌으로써 안정시키는 뜻을 보이도록 하겠다."
하였다.
강화 유수의 병부는 그 후임을 차출할 때까지 총융사가 겸하여 차고, 경기 감사의 병부는 후임을 차출할 때까지 중군(中軍)에 넘겨주어 겸하여 그 직무를 살피게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제주의 방물단자(方物單子)로 아뢰니, 하교하기를,
"화살통을 바다 건너에서 봉진하자면 필시 폐단을 끼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이후부터는 말의 장구에 대한 전례대로 1부(部)당 노루가죽 몇 장씩을 대신하는 것으로 적절히 규정을 정하여 대신 바치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효종조갑오년050) 에 말의 장구 2부를 활집과 화살통 4개로 대신 봉진하게 했었는데, 활집과 화살통을 지금 또 노루가죽으로 대신 봉진한다면 앞으로는 4부 대신에 노루가죽 10장을 봉진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17일 계사
전교하였다.
"강화 유수의 병부를 총융사가 겸하여 차게 하였으나 서울과 지방에서 관할하는 일은 각기 다르다. 경기 중군이 겸하여 차게 하라."
민종현(閔鍾顯)을 이조 참판으로,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1월 18일 갑오
용산(龍山)의 별영(別營)에 행차하였다. 이날 서도와 북도의 별부료 무사(別付料武士)들에게 모화관에서 활쏘기 시험을 보일 것을 명하였다. 승여(乘輿)가 이미 조비되고 신호를 알리는 북이 울리기 전에 현임·전임 각신과 여러 승지와 약방 제조가 대궐에 들어가 면대를 청하자 모두 파직을 명하고, 이어 병조 판서에게 수어사(守禦使)를 겸임하게 하고 남소 위장(南所衛將) 김정서(金鼎瑞)를 가승지(假承旨)로 차임하도록 명하였다. 지사(知事) 김한기(金漢耆)가 상소하기를,
"신은 삼가 듣건대, 정치달(鄭致達)의 처가 도성에 잠입한 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고 역적 종친이 또 강화도에서 도망칠 기미가 있다고 합니다. 위에 계신 성명께서 단속하기를 지극히 엄하게 하였다면 이런 말이 어떻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아, 을사·병오년간에 역적을 징토한 조치로 윤리가 이를 힘입어 바로 서게 되었고 국세가 이를 힘입어 안정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차차 오래되고 인심이 점차 안일에 빠지자 여기에서 흉악한 무리가 기세를 부리고 난역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한번 변하여 역적 김하재(金夏材)가 되고 두번 변하여 역적 구선복(具善復)이 되었습니다. 음흉한 조시위(趙時偉)와 간악한 우진(宇鎭)에 이르러는 독살스런 손길을 병오년에 뻗쳤고, 요사한 재간(在簡)과 광패한 신기현(申驥顯)은 품고 있던 앙심을 작년 겨울에 드러냈습니다. 실로 그 근원을 따져보면 이 어찌 모두가 을사·병오년간에 내세운 의리가 점차 흐려지고 화근이 되는 역적 괴수가 아직까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오히려 곧 경기에 구류시킨 요물을 뽑아올리고 강화도에 가두어놓은 극악한 역적을 빼어내며 을사·병오년간의 비호 세력을 받들고 병오·기유년의 소굴을 보호하여 그들이 마음놓고 도성 안에 들어와 있게 하려 하니, 이것은 전하께서 이 의리를 능히 밝히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헐어버리는 처사이며 능히 엄하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홀시하는 처사입니다.
저 을사·병오년간의 잔당은 틀림없이 앞으로 기회를 틈타서 날뛰며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나서 도성 안에 있는 것도 부족하여 필경은 대궐에 출입하기를 도모할 것이며, 대궐에 출입하는 것도 부족하여 필경은 홍인한(洪麟漢)과 정후겸(鄭厚謙)의 죄를 씻어줄 것을 도모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내는 왕위를 주고받은 대의를 흐리게 하고 역적 징토의 대의를 혼란시킨 후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저 정치달의 처는 성상을 핍박하고 국권을 농락하였으되 아직까지 이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이것은 형벌을 크게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병오년 여름과 가을의 변란에 이르러서는 저 역적 종친이 실로 흉악한 무리의 소굴이 되어 기어코 나라의 명맥을 끊고 종묘를 남몰래 옮기려 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징계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어코 두 흉물을 측근에 두려 하십니까. 성상 자신이야 비록 대단찮게 여긴다 하더라도 종묘와 자전(慈殿)·자궁(慈宮)의 위신에 대해서는 어찌하시렵니까.
신기현(申驥顯)을 발탁하라는 하명은 이 무슨 일입니까. 이 역적의 범행이 어떠하며 온 조정의 성토가 어떠하였습니까. 그럼에도 지금 갑자기 측근의 직책인 승지를 제수하고 계속하여 칭찬의 하교가 있어 그의 흉언을 일러 격언이라 하고 그 극악한 죄를 일러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역적 기현이 지난날에 올린 흉악 한 상소는 역적 징토를 가탁하여 금부 당상을 처벌할 것을 청하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국사를 독단한다.’고 말하였으니, 그가 노리고 있는 저의가 어디에 있는지는 길 가는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그때 금부 당상이 거행한 일은 곧 자전의 하교를 받든 것인데 자전의 하교는 곧 종묘 사직을 위하고 전하를 위한 것으로서 천지간에 떳떳하고 귀신에게 질정할 수 있는 큰 의리인 것입니다. 모든 우리 나라의 신자(臣子)가 된 자는 다만 종묘 사직과 성상이 있음을 알 뿐이니, 큰 의리와 관계된 일을 어찌 떠받들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것을 받들어 수행한 금부 당상에게 독단한다는 죄명을 씌운다면 이것이 어찌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지위에 계신 분을 핍박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그를 칭찬하시는 것은 지난날 그의 상소에 대한 비답 중 ‘윗분을 핍박할 것이 염려스럽다.’고 한 하교와 어쩌면 그렇게도 상반됩니까.
강화도의 일에 이르러서는 상하 관청과 연변의 두세 고을이 모두 텅 비었는데 죄인이 남몰래 빠져나가는 것을 누가 막겠습니까. 이런 것으로 미루어보면 전해오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여러 날째 귀를 기울이고 들어봐도 아직까지 한 사람도 목숨을 내걸고 힘써 간쟁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온 조정이 잠에 취하고 모든 관리는 혀가 굳어져 밖으로는 전하의 억누르는 위엄에 겁을 먹고 속으로는 사세나 관망하려는 버릇을 품은 데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삼가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신은 병든 몸을 싣고 적을 징토하는 의리로써 처음에는 기어서라도 길을 떠나려 하였으나 병세가 더욱 심하여 감히 이 미천한 신의 자식인 안성 군수(安城郡守) 김용주(金龍柱)를 시켜 승정원에 대신 글을 올리게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런 상소를 어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담당 가승지를 엄히 처벌하고 원소(原疏)는 승정원에서 찢어버리라."
하였다. 교리 성종인(成種仁), 부교리 박기정(朴基正)·윤영희(尹永僖), 수찬 이경운(李庚運)·박규순(朴奎淳), 부수찬 박종래(朴宗來)·김희조(金熙朝)가 상소하기를,
"지금 당장 걱정스러운 일이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습니다. 강화 유수는 이미 추천하였는데도 아직까지 보류하고 있으며, 경기 감사도 방금 추천하였으나 역시 낙점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켜야 할 땅에 그 방비를 비워놓은 지가 지금 며칠째이며 연로에서 죄인의 출입을 금할 자가 과연 누가 있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저도 모르게 뼈가 저리고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방비하는 절차와 규찰하는 방도를 하루 속히 신칙하여 중외의 의심하는 마음을 풀어주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금지하는 것을 무릅쓰고 차자를 어제와 그저께 와서 올린 것도 이미 무엄하기 그지없는데, 또 어찌 감히 상소문을 옮겨 베껴 번갈아 바꾸어 올린단 말인가. 받아들인 승지를 엄중히 처벌할 것이며 원소는 되돌려 주도록 하라. 그리고 옥당 관원들에게는 다시 서용하지 않은 법을 적용하라."
하였다.
진시(辰時)에 상이 융복(戎服) 차림에 가교(駕轎)를 타고 선화문(宣化門)으로 나가자 여러 각신들이 가교를 잡고 길을 막아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번갈아 간하였다. 오재순(吳載純)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오늘날 취하신 처사는 천만 부당합니다. 신 등은 초조하고 황급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비록 파직을 당하더라도 감히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즉시 궐내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고, 정민시(鄭民始)는 아뢰기를,
"날씨가 이처럼 차가운데 교외의 처소에서 행차가 머무는 것은 건강을 돌보는 방법에 크게 어긋납니다. 사람들의 심정이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지금 시원하게 바람쐬는 것을 즐겁게 여기는데 경들은 왜 이처럼 답답하게 고집하는가."
하고, 이어 신하들을 끌어내라고 명하였으나 신하들은 부여잡고 떠나지 않았다. 행차가 협양문(協陽門)에 이르자,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과 영돈녕 홍낙성(洪樂性)이 황급히 앞으로 나갔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장차 어디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하고, 명선은 아뢰기를,
"승지를 모두 체직하고 시신도 갖추지 않은 채 가승지 한 사람과 어느 곳으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이미 말을 하였으므로 승지와 옥당의 처분을 취소하여 그들로 하여금 행차를 따르게 하겠다."
하고, 사알(司謁)에게 명하여 대신을 부축하여 내보내게 하였다. 이어 대신의 관직을 삭탈, 출송할 것과 제신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명하고, 이어 행차를 재촉하여 단양문(端陽門) 밖에 도착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계속 아뢰고 부여잡는 바람에 행차가 전진하지 못하였다. 파자교(把子橋)에 도착하여 승지 홍의호(洪義浩)를 불러 전교를 쓰게 하려 할 때 홍의호가 아뢰기를,
"처분이 정도에 지나치므로 신은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삭직을 명하였다. 숭례문(崇禮門)을 나가 자연암(紫烟巖) 앞길에 이르러 행차를 돌려 염초교(焰硝橋)로 향하였다.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이 아뢰기를,
"어느 곳으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가시는 곳을 알고 싶습니다."
하니, 그를 물리치라고 명하였다. 아현(阿峴)에 이르렀을 때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가 앞에 나서서 말 재갈을 잡고 행차를 돌릴 것을 간청하니 그 죄명을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선두가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하여 어영 대장 이한풍(李漢豊)을 파직하고 서유대를 명하여 대신 통솔하게 하였다. 이어 별영(別營)의 관사(官舍)에 나아가 머물고 문단속을 엄히 하게 하였다.
앞서 은언군(恩彦君)051) 을 데려오기 위해 교자 3채를 꾸며서 강화로 보냈는데, 한 교자에는 내수사 관속 중 가장 용맹이 있다고 하는 자를 태우고, 한 교자에는 의복을 넣은 농짝을 싣고, 한 교자는 빈 것이었다. 각각 사납고 억센 종들을 수십 명씩 뽑아 모두 내구마(內廐馬)를 타도록 허락하고 관원 한 사람이 이를 통솔하게 한 다음, 또 한 사람은 선전관이란 칭호를 가지고 통행 신표를 차고 따르게 하였다. 이렇게 차비를 갖춘 다음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성문을 빠져나가 밤새도록 갑진(甲津)으로 달려갔으나 나루에는 배가 없었고 성장(城將)이 길을 막았다. 해당 관원이 밀지(密旨)를 내보이고 먼저 성장을 결박한 다음에 사공들을 매질하자 여러 배가 모여들어 정비하였다. 즉시 나루를 건너 강화의 성문 밖에 이르렀으나 성문을 3일 동안이나 열어주지 않았다. 전지(傳旨)를 보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통행 신표를 보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말하기를,
"반드시 진짜 선전관이 신표를 받들고 내려와야 말을 들어주겠다."
하였다. 해당 관원이 사실을 갖추어 급히 보고하자, 또 선전관 및 가선전관(假宣傳官)을 각각 한 사람씩 보내 한 사람은 통진(通津)의 수령을 붙잡아 묶어 오게 하고 한 사람은 말을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성 밑에까지 이르렀으나 성문을 굳게 닫고 응하지 않았다. 강화의 수령 구협(具埉)은 뒷문으로 몰래 나오다가 잡혔고 선전관 김진정(金鎭鼎)은 성 위에서 군사들과 백성들이 모여 웅성대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유수만 데리고 발길을 돌렸고, 가선전관도 앞질러 돌아오고 말았다. 상이 곧 따로 선전관을 보내 다시 신표를 전하고 성문을 열게 하였다. 조금 뒤에 또 보냈으나, 데리고 돌아오는 것이 지체될까 염려되어 세 번째로 선전관을 보냈다. 이에 선전관이 신표를 가지고 충돌하면서 성중으로 들어가 가중군(假中軍) 이하 명령에 항거한 여러 장수들을 덮쳐 조리를 돌리고 호되게 곤장을 쳤다. 이때에 와서 해당 관원이 또 급보를 올리기를,
"성문을 열지 않고 굳게 지키는 것을 풀지 않습니다."
하자, 상이 몹시 노하여 이미 앞서 잡아온 유수의 중군부터 우선 군법을 적용하고자 하여 표미기(豹尾旗)를 세우고 기병을 먼저 백사장에다 대오를 정돈하게 하였다. 이때 마침 따로 보낸 선전관이 달려와 성문을 열었다는 사유를 보고하자, 유수와 중군의 군법 시행이 비로소 중지되었고, 먼저 돌아온 가선전관을 잡아들여 곤장 30대를 쳤다. 구협을 잡아들여 성문을 닫은 죄를 문책하니, 대답하기를,
"부의 전례가 본래 그러합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잡아오라는 명령만 전하고 문을 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자, 진정(鎭鼎)과 대질을 명한 결과 진정의 말이 꿀리는 편이었다. 이에 진정에게는 호된 곤장을 치고 구협은 놓아주었다. 이때 말을 탄 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오늘 새벽에 겨우 탈출시켜 교자에 싣고 빨리 달려 팽포(彭浦)에 이르니 자전께서 보낸 내시가 자전의 지시를 받들고 대기하고 있다가 곧장 덤벼들어 전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해당 관원이 어명을 봉행하는 것이라고 외치니, 내시 또한 말하기를 ‘내 머리를 내일에는 바칠 수 있으나 오늘은 자전의 하명을 받든 이상 죽어도 놓아줄 수 없다.’고 하면서 머리로 사람을 받고 손으로 교자를 막으므로 데리고간 하인들도 합세하여 죽을 힘을 다해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내시에 대해서는 자전의 하명이 지중하기 때문에 해당 관원이 손을 댈 수가 없어 우선 빈 교자로 머뭇거리고 있고 사람을 실은 교자를 가지고 사잇길로 빠져 몰래 오려고 하였습니다. 내시가 이 기미를 알고 해당 관원에게 이르기를 ‘이미 부녀자가 탄 교자가 아니니 내가 직접 대면하여 자전의 하명을 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해당 관원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좌우로 가로막으면서 세 교자를 주막집 각 방에다 넣어두었기에 우선 급한 사정을 보고합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50명의 기병을 연로에 염탐으로 깔아놓았는데, 이 소식을 듣고 각 기병의 염탐꾼을 팽포로 달려보내 해당 내시는 전교로 불러오게 하고 세 교자는 다른 길을 잡아 전진하여 양진(楊津)을 건너지 말고 곧바로 삼포(三浦)로 건너도록 하였다.
조금 뒤에 여러 신하들이 뒤따라 와서 문이 닫힌 것을 보고 저마다 문을 밀어젖히고 들어와 바깥 호위 앞에 이르렀다. 상이 사알(司謁)를 시켜 전교하기를,
"문이 닫혔다면 밀어젖힐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문을 지키라고만 하였지 문을 닫지는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함부로 들어오기를 마치 대궐문을 밀치듯 하니 이게 무슨 체모인가. 즉시 문밖으로 물러나가라. 비록 황급한 때라 하더라도 호위는 갖추지 않을 수 없고 반열은 정돈하지 않을 수 없다. 병조 판서는 이를 신칙하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문밖으로 물러나자 전 각신 오재순(吳載純) 등과 전 승지 채홍리(蔡弘履) 등, 전 내의원 제조 정창순(鄭昌順)과 여러 옥당(玉堂) 및 행차를 따르는 재상들과 3품 이상의 관리들이 세 차례나 면대를 청하였으나 모두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옥당이 재차 차자를 올리자, 비답하기를,
"오늘 행차를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고기잡이를 구경하자는 것도 아니며 얼음을 타보자는 것도 아니다. 말은 실천하지 않을 수 없고 명령은 그대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 환궁을 빨리 하느냐 늦게 하느냐는 오직 조정 신하들에게 달렸다. 번거롭게 말하지 말라."
하고, 전 좌의정 채제공이 차자를 올리자, 비답하기를,
"처음 생각에 활쏘기 시험을 보이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머무르려 했던 것으로서 돌발적인 일이 아니다. 이곳에는 식량도 있고 땔감도 있으며 군병이 추위를 막을 도구도 보다 손쉽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중에 지체할 수 없는 문제가 있어 즉시 방향을 돌려 여기에 왔으니 이는 실로 만부득이한 일이었다. 임시 방편중에서도 임시 방편인데 어느 겨를에 위의의 형식을 돌아보겠는가. 모든 일에서 빨리하고 느리게 하는 문제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임시 방편의 적중한 처사라고 이를 수 있다. 내가 비록 덕은 없지만 원하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일이다. 젖은 쌀을 솥에 넣을 새 없이 급히 떠나는 공자(孔子)는 왜 그렇게 서둘렀으며, 3일 만에야 도성을 나간 맹자(孟子)는 왜 그렇게 지체하였는가. 여기에서 성인이 때에 맞게 처신하는 뜻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행차도 만약 호위를 갖추고 대오를 정돈하였다면 내 비록 마음내키는대로 행동하려 한들 그리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번의 거둥은 유람을 하는 것도 아니며 여가를 즐기는 것도 아니다. 심중에 한없이 답답하고 끝없이 초조한 사정이 있어 이처럼 보기 드문 행동을 취한 것이다. 경은 모름지기 이를 이해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 정존겸(鄭存謙)이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전 좌의정이 올린 차자에 대해 내린 비답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말고 이해하기 바란다."
하였다. 대궐을 지키고 있는 각신·승지·병조의 당상관·약원 제조가 태추문(泰秋門) 밖에 나아가 자전께 구전으로 아뢰기를,
"전하는 말을 듣건대, 전하의 행차가 가던 길을 바꾸어 강창(江倉)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신 등은 황급하여 어쩔 줄 모르고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자전이 언문으로 하교하기를,
"역적 종친이 아직까지 해당되는 율문에서 벗어나 가까운 섬에 놓여 있어 처음 먹은 마음을 실현하지 못하므로 이 미망인은 살아 있는 보람이 없다. 국사를 생각하면 밤에도 잠을 이룰 수 없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수라를 들지 못하는 것은 궁중이 모두 아는 일이다. 요즈음 주상의 미간(眉間)을 보면 그 말씨와 얼굴빛이 필시 특별히 정도에 지나치는 행동이 있을 것 같았다. 깊숙한 궁중에 들어앉아 비록 알 수는 없으나, 누차 말려도 듣지 않으니 어찌할 계책이 서지 않았다. 본전의 내시를 강나루와 강 건너로 보내 대기하고 있다가 혹시 역적 종친이 올라오는 일이 있으면 나의 지시를 전하고 다시 압송해 보내도록 하였는데, 만약 상의 지시로 데리고 온다면 ‘이 일에 대해서는 비록 독단에 가까운 혐의가 있지만 돌아볼 여지가 없다.’고 말하게 하였다. 즉시 언문 교지를 내릴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언문교지를 자주 내리는 것은 본의가 아니므로 힘이 자라는 데까지 극진히 할 뿐이다. 조정에선 협력해주기 바란다. 상은 이 기미를 알고 혹시라도 자전의 전교에 따라 되돌려보내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뜻밖에도 교외에 행차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조정에 하명하는 것을 어찌 주저할 수 있겠는가. 만약 아직까지 오지 않았거든 자전의 지시로 되돌려 보내는 동시에 즉시 환궁할 것을 청하고, 만약 이미 도착하였거든 이 언문 교지를 전하여 즉시 되돌려보내게 하라. 나의 성의가 부족하여 상의 뜻을 돌리지 못함으로써 또 이와 같은 거조가 있게 되었다. 비록 병중에 있으나 낮은 내실에 처하여 자책하는 뜻을 표한다. 조정으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각신 오재순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자전의 하교를 우러러 받아들일 것을 간청하니, 비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내 마음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주공(周公)이 다시 태어난다 한들 어찌 다른 말이 있겠는가. 임금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경들의 직책인데, 아쉽게도 경들은 여러 사람들을 따라 밀려다니기만 한다."
하였다. 대신 서명선(徐命善)과 홍낙성(洪樂性)이 자전의 하교가 내렸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면대를 청하자, 전교하기를,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난 대신이 어찌 감히 면대를 청하는가."
하고, 고양군(高陽郡)에 중도 부처할 것을 명하였다. 정원·옥당·재상 3품 이상이 다시 면대를 청하였으나, 모두 번거롭게 굴지 말라고 명하였다. 옥당이 세 차례나 차자를 올리고 좌참찬 김화진(金華鎭) 등 37인과 부사직 조윤대(曺允大) 등 1백 25인이 모두 상소하였으나, 전부 보지 않았다. 전 좌의정 채제공이 상소하자, 비답하기를,
"경은 칠십 노인이다. 지금 추위가 살을 에이는데 지금까지 거적을 깔고 밖에 있으니 너무하다. 내려보낸 비답을 보고서도 이처럼 번거롭게 구니 임금의 좋은 점을 받들어 따르는 옛날 대신들의 의리에 부끄럽지 아니한가. 오늘 내가 하는 일이 비록 지나친 것 같으나, 나의 과실을 살펴보면 내가 어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점이 있을 것이다. 성인의 말씀에 ‘주공(周公)이 과오를 범한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고 하였으니, 내가 본받고자 하는 것은 성인이다. 경들이 나의 뜻을 따르기 전에는 언제까지라도 강변을 떠나지 않겠으니, 경은 이해하기 바란다."
하였다. 지의금부사 정호인(鄭好仁)이 품의하지 않고 도사(都事) 강관(姜)을 시켜 나장(羅將) 15명을 거느리고 양화진(楊花津)으로 가서 죄인을 만나 쫓아 보낼 계책을 세웠는데, 상이 선전관 이현도(李顯道)을 시켜 강관이 간 곳에 뒤따라가서 묶어오게 하였다. 잡아들이니, 전교하기를,
"독단하는 것은 신하로서 극형에 처하는 죄이다. 너처럼 미관 말직에 대하여 어찌 독단 여부를 논할 수 있겠는가마는 독단이란 것은 일을 제멋대로 하는 것을 말한다. 신하로서 이를 범하면 그 죄가 어떠하겠는가."
하니, 강관이 아뢰기를,
"해당 당상관이 자전의 하교에 의하여 보내는데 신이 어찌 감히 가지 않겠습니까."
하자, 전교하기를,
"당상관이 비록 보낸다 하더라도 너는 어찌 감히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곧바로 갔느냐."
하고, 곤장 13대를 치게 한 다음, 전교하기를,
"독단한 죄는 최고 형에 해당되지만 너는 당상관의 지시를 따른 것이니 다음가는 죄에 해당된다. 또 너같은 자에게 무슨 그다지 책망할 것이 있겠는가. 이미 호된 곤장을 쳤으니 관직에서 도태시키라."
하였다. 이어 정호인을 격식을 갖추어 잡아올 것을 명하자, 승지가 현재 대신(大臣)이 없어 문사랑(問事郞)을 차견할 수 없다고 품의하니, 승지에게 문사랑의 책무를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정호인(鄭好仁)을 잡아들이고, 하교하기를,
"독단하는 것은 신하로서 극형에 처하는 죄이다. 지난 가을의 일도 하나의 괴변이었지만 그때에는 자전의 하교가 누차 내림으로써 그것을 존중히 여기는 뜻에서 법대로 처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너는 오늘 또 서슴없이 범행을 저질렀다. 자고이래도 언제 아랫사람이 도사를 보낸 적이 있었던가. 이것을 방치한다면 뒤폐단을 어떻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형구가 갖추어지지 않아 당장 법대로 추궁하지 못하지만 하나하나 솔직하게 진술하라."
하니, 정호인이 공술하기를,
"어찌 독단하는 것이 신하로서 극형에 처하는 죄임을 몰랐겠습니까. 자전의 하교가 내린 후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모두 작년의 실례대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기 때문에 즉시 도사를 보낸 것입니다. 일변 전하에게 품의할 뜻으로 정원에 말하였으나 정원이 들어가 품의하지 않으므로 결국 자신이 직접 나갔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지난해의 일은 괴변에 불과한데 네가 감히 전례로 말하는가.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라고 운운하는 것을 보니 또한 필시 누군가 선창자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을 지적하여 고하라."
하니, 정호인이 공술하기를,
"재상을 비롯한 측근의 신하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지적하여 아뢰겠습니까. 도사를 보내겠다는 뜻은 사실 승지에게 여러 차례 말하였습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승지가 들어와 품의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난날 기원(器遠)이 정승이 되었을 때 가까운 종친을 해친 것도 그의 독단에서 나온 것이고, 정유년에 있었던 망측한 변고도 홍국영(洪國榮)의 독단에서 나온 것이다. 국영과 기원이 과연 어떤 사람인데 네가 그를 본받고자 하는가. 특별히 형구가 대령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법대로 신문하지 못한다. 또 네가 직접 간 것은 도사만을 보낸 것과 다른 점이 있고 본 사건은 또 시행되고 시행되지 않은 차이가 있으므로 다음가는 율문을 적용하여 귀양보내는 조처를 취하는 것이 마땅하나 귀양보내는 율문 또한 아직 적용하고 싶지 않다. 이에 특별히 참작하여 네가 가고 싶은 지방에 서민을 삼아 보내겠다."
하였다. 홍의호가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자전의 전교가 두 번째 내렸고 밤도 이미 깊었는데 아직까지 행차를 돌리라는 하명이 없으시니 아랫사람들의 심정이 답답합니다."
하니, 상이 사알(司謁)에게 명하여 쫓아내라고 하였다. 또 병조 판서 김문순을 잡아들이고 하교하기를,
"조정에서는 의당 기강을 보아야 한다. 대신이 있고 각신이 있고 경재가 있고 시종과 백관이 있어 모두 자기의 직책을 가지고 간하는데, 활이나 메고 칼이나 찬 자가 어찌 감히 행차를 가로막고 번잡스럽게 떠들어댈 수 있겠는가. 네가 병조의 장관으로서 능히 금지하지 못한 것만 해도 너의 죄인데, 이미 너의 조에 넘긴 다음에도 고의로 놓아주어 태연하게 작문(作門) 안까지 따라오게 하였으니, 너의 죄가 얼마나 크냐."
하니, 김문순이 아뢰기를,
"황급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중에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죽어도 죄가 남습니다."
하자, 하교하기를,
"당연히 곤장을 쳐야 하겠으나 삼군이 모이지 않았고 시위도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나는 본래 경계하는 것이 있어 지금은 우선 그만두겠다."
하였다. 자전이 또 언문 교지를 내리기를,
"조금 전에 언문 교지를 조정에 내려 협력해주기를 기다렸는데, 밤이 이렇게 깊어지도록 소식이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행차가 나간 후 날씨가 이처럼 찬데 일을 다잡지 않아 강변에서 밤을 지내야 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실로 뜻밖의 일이라 개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엄히 국법을 밝혀 역적을 즉시 돌려보내고 환궁할 것을 간청하라."
하니, 대신과 각신이 상께 면대를 청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내가 자전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언문 교지가 계속 내려오고 있다. 만약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일이라면 어찌 감히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걸음은 겉으로는 갑자기 한 일인 것 같으나 사실은 많이 생각해온 지가 벌써 오래이다. 유수와 수령을 한 사람도 손상시키지 않은 것은 곧 지난 가을의 일에서 경계를 얻었기 때문이고, 외간에서 들리는 말이 허실이 혼동되어 종잡을 수 없는 것 또한 앞서 파주(坡州)의 일이 여전히 미진함이 많는 데서 나온 것이다. 환궁의 시기가 빠르고 늦는 것은 경들 및 조정 신하들이 나의 간절한 심정을 알아주고 나의 진심에서 나오는 호소를 민망히 여겨 힘써 받아들이고 따라주는 데 있다. 내 또한 무엇 때문에 모진 추위를 무릅쓰고 거치른 강변의 집에 앉아 호위군과 삼군이 추위에 떠는 폐단을 생각지 않겠는가."
하였다. 전 승지 이유경(李儒敬) 등과 옥당, 전 약원 제조 정창순(鄭昌順), 행차를 수행하는 재상 및 3품 이상의 관리들이 면대를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밤 3경에 전교를 받은 선전관과 장영(壯營)·훈영(訓營)의 지구관(知彀官)을 은밀히 불러 전교하기를,
"오늘 밤에 야간 군영의 제도를 실시하려 한다. 병서에는 비록 군영의 주간 행동과 야간 행동 때의 호령이 있으나, 주둔한 군영에서 등불과 횃불을 없앤다는 것은 정확히 지적할 만한 규정이 없다. 군이란 일정한 형식이 없고 중요한 것은 때에 따라 변통하는 데 있다. 긴 영전(令箭) 2대를 쏘아보내고 또 검은 고초쌍등(高招雙燈)을 깃대에 달아 각 군영에 신호하여 각 군영의 등불이 다 켜진 뒤에 곧 등불을 가져다가 원래의 장소에 간직하고 횃불은 이것을 보는 즉시 없애버리도록 하라. 대개 암호는 다 마찬가지지만 이동할 때와 주둔할 때가 좀 다르다. 그러나 작고 짧은 화살을 쓰는 것은 부당하다."
하고, 이어 여러 군교들에게 각기 의견을 말하게 하니, 여러 군교들 가운데 어떤 자는 말하기를,
"검은 신전(信箭) 1대로 긴 화살을 대신하여 돌려 보인 다음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고, 어떤 자는 말하기를,
"긴 영전(令箭) 2대와 작고 짧은 화살 1대를 한꺼번에 쏘지 않으면 안 되며, 긴 화살로는 명령을 내리는 것을 표시하되 2대는 비밀 명령이란 것을 표시하고, 작고 짧은 화살은 급박하다는 것을 표시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어떤 자는 말하기를,
"징과 북의 소리와 깃발의 빛깔을 쓰지 않을 경우 단지 어떤 물건을 전하여 군사를 행동하고 정지하게 하는 것인데, 병서에 이른바 초목의 가지, 돌이나 흙덩이, 닭·개·소·말의 소리로 전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 이런 별다른 물건으로 은밀히 전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어떤 자는 말하기를,
"캄캄한 밤에는 방향을 알리는 빛깔도 또한 마땅히 검은 것을 숭상하여 검은 기로 서로 맞추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는 등 각자의 말이 서로 달랐는데, 야간 군영의 명령은 본디 급박한 것이므로 입을 열어 소리를 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위반하는 자는 일정한 군율에 처하는 것이 병서에 쓰여 있다는 명이 내리자, 군교들이 갑자기 이 명령을 받고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목이 타고 혀가 굳어져 다시는 감히 아무런 말소리도 내지 못하고 시간을 끌 무렵에 그중 장영의 군교 지득귀(池得龜)란 자가 앞으로 뛰쳐나와 낮은 목소리로 말하기를,
"야간 군영이란 말이 이미 장막 밖으로 새어나와 장수와 군사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어 군중이 자못 소란해지고 있으니, 명령 내리는 것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몰래 이동하는 것이 아니며 또 급히 비밀 명령을 내리는 것도 아니므로 중앙 병영에서 작고 짧은 화살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1명만 등불을 지키고 나머지는 모두 초병으로 나열해 서서 이동하지 말아야 하며 검은 신전도 쓰지 말고 검은 방기(方旗)도 쓰지 말아야 합니다. 병서를 보아도 이미 명문이 없는 한 마땅히 옛사람의 방략 가운데서 참고가 될 만한 것을 따라야 합니다. 중군(中軍)이 먼저 영전(令箭) 2대를 가지고 군영 장수에게 전달하면 군영 장수가 각 대장(隊長)에게 알려 한 차례 돌려 전달한 후 앞 초소 제1 대장에게 넘기면 대장이 1대를 뽑아내 1사(司)에 교부하여 파총(把摠)이 가져다 조사해보고, 1대는 그대로 전하여 야간 군영에 도로 내려줍니다. 대개 처음에 2대를 전하는 것은 야간 명령은 주간 명령과 다르기 때문이고 다시 1대를 전하는 것은 반복이 없을 경우 일을 그르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은밀히 전달하는 비밀 명령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본 군영은 지금 호위한 속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장영(壯營)의 긴 영전(令箭) 6대를 가져다가 2대는 가운데 군영에 전하여 관하 사(司)·초(哨)·기(旗)·대(隊)에 차례로 전달하게 하고, 또 2대는 선전관에게 전하여 무예청의 호위하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돌려 전달하게 하고, 또 2대는 바깥호위를 수행한 군영 장수에게 전하여 그가 거느린 군사들에게 돌려 전달하게 합니다. 먼저 2대를 전한 다음에 1대를 전하여 전해 알았다는 것을 두루 알게 할 것이며 언어와 호령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장막 앞에 있는 검은 고초기(高招旗)에 두 개의 등을 달아 높이 신호를 보내고 즉시 등불을 제거하면 각 군영은 일체 상응할 것입니다. 떠들어대면서 정숙하지 않거나 호령이 분명하지 못하면 자연 군중의 규율이 있으니, 이 제도대로 따라 시행하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그 군교는 외모도 훤칠하지 못하고 키도 몇 자 되지 않았으나 자못 담력이 있고 지략이 있다고 자부한다고 하였다. 이날 밤에 그가 주대(奏對)한 것이 정밀하고 자세하므로 상이 매우 가상히 여기어 그 말을 따랐다. 선전관이 긴 영전을 전하여 쌍등(雙燈)으로 점멸 신호를 하여 명령이 끝나자 장막의 안팎의 등불과 횃불이 일제히 없어졌으며 강변의 마을 집까지 새까맣고 한 점의 불빛도 없었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도 또한 군사의 규율이 있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조금 뒤에 또 암호를 전하여 연함문(延艦門)을 열어놓으니 인(䄄)052) 이 탄 휘장을 드리운 교자가 맞은편 마을에 숨어서 명령이 내릴 때를 기다리다가 이때에 그를 썰매[雪馬]에 태워 북안문(北岸門) 앞으로 끌고 가는데 빠르기가 날으는 것 같았다. 이때에 또 짙은 안개가 끼어 호위 군사도 또한 자세히 분별할 수 없었다. 이에 대령하고 있던 각사의 하인들로서 천익(天翼)을 쓴 자 수십 명이 쏟아져나와 교자 안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막고 둘러서서 온통 한덩어리가 되어 전진하다가 물러서곤 하여 좀처럼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얼마 지난 후에 장막 뒤의 방에 이르자 호위하는 장졸들이 그것을 보고 잡인들이 함부로 접근할까 염려하여 금지하려 하였으나 명령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입으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방안에 들여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장막을 걷고 주간 군영의 행동 명령을 내렸다. 선전관이 신호로 포성을 한 번 울릴 것을 품의하자 북소리로 대신하라고 명령하였으며, 다음으로 불을 붙인 화살 하나를 쏠 것을 품의하였으니 이는 등불을 켜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불붙인 화살을 쏘자마자 등불과 횃불이 일제히 켜졌다. 그리고 전과 같이 연함문을 닫으라고 명령하였다. 야금을 알리는 조두(趙斗) 소리는 계속되는데, 여러 신하들은 북문 밖에 있으면서도 전연 몰랐고, 문안과 담장 밖 삼면에는 특별한 명령이 있었다. 상은 여러 신하들 중 군사 지식을 가진 자가 혹시라도 눈치챌까 염려하여 단속을 더욱 엄격히 하게 하는 한편 기병 1명을 급히 달려보내 간편한 교자로 인(䄄)의 어미를 태워오게 하여 서로 만나보게 하였는데, 밤이 곧 새게 되었다. 각신 오재순 등이 거듭 상소하였으나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고, 약원이 환궁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환궁을 청하고 싶으면 먼저 내 뜻을 따라야 한다. 내 뜻을 따르기 전에 경들을 어떻게 불러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옥당이 다섯 차례나 차자를 올리고 정원이 연명으로 아뢰었으나, 모두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11월 19일 을미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좌참찬 김화진(金華鎭) 등이 다시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죄인을 데리고 와 하룻밤을 지냈으나 어찌 마음에 위로가 되겠는가. 더구나 지금 새벽 날씨가 차고 강바람도 이와 같으니, 백관과 군사들의 폐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경 등이 속히 내 뜻을 따른다면 환궁을 어찌 지체하겠는가. 한결같이 맞서기만 한다면 이것이 어찌 될 법이나 한 말인가."
하고, 행 부사직 조윤대(曺允大) 등이 다시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이곳에 와 머문 것이 어찌 하룻밤 같이 지내기 위하여 이런 일을 한 것이겠는가. 너희들이 요청을 거둔다면 내 마땅히 환궁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비록 백 번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와도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니 속히 물러가라."
하였다. 합문을 지키는 승지·각신·경재·백관 이하가 상소에 대해 내린 비답을 보고 문을 밀어젖히고 들어가 바깥 호위 앞에 이르러 사람을 시켜 품의하니, 상이 사알(司謁)을 통해 전교하기를,
"호위가 얼마나 지중한 것인데 이렇게 뚫고 들어올 수 있는가. 내가 오랫동안 심력을 기울여 간신히 단행하였는데 내 어찌 하룻밤을 지내고 그만두겠는가. 경들이 내 뜻을 따라준다면 즉시 환궁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비록 10일이 지나고 20일이 지나도 결코 환궁할 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온돌에 거처하지만 경 등은 차가운 바깥에 앉아 있으니, 과연 오래도록 견딜 수 있겠는가."
하자, 여러 신하들이 덧붙여 아뢰기를,
"합문 밖에서 면대를 청한 것이 이미 하룻밤이 지났습니다. 지금 알고 있기로는, 역적이 전하의 침실에 가까이 있으니 위험이 순간에 닥쳤습니다. 신 등이 어찌 차마 여기에서 한 걸음인들 물러갈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진시(辰時)에 대궐을 지키는 사관이 자전의 하교를 받들고 왔는데, 그 하교에 이르기를,
"오늘날 조정의 거조는 한심하고도 경악할 일이다. 미망인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종묘 사직을 위해서이고 주상을 위해서이다. 주상이 이런 추위를 당하여 밖에 나가 밤을 지내는 행동은 더없이 놀랍고 민망하다. 무슨 마음으로 세상을 살며 쓸 데는 있겠는가. 역적 종친을 속히 축출하고 아울러 간절히 간청하여 기어코 환궁하시도록 하라."
하니, 승지가 승전색에게 청하여 교지를 가지고 들어가게 하였다. 한참 후에 자전의 하교가 연이어 내렸는데, 내전에서 행차하겠다는 명령이 있었다. 여러 승지들이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힘을 합쳐 바깥 호위를 밀어젖히고 들어가 한참 동안이나 서로 버티고 있었으며 여러 신하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들어갔다. 호위하는 군사들이 비켜주자 일제히 들어가 읍청루(揖淸樓) 앞에 이르러 연을 끼고 둘러싸 호위하는 밖에서 높은 목소리로 함께 고하기를,
"신들이 이미 역적이 전하 옆에 가까이 있음을 알고 심장이 뛰고 담이 떨려 안정할 수가 없으므로 이렇게까지 죽음을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지금 위망의 계기가 순간에 달렸습니다. 더구나 자전께서 호위도 갖출 새 없이 행차를 재촉하시니 이것이 무슨 광경이며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빨리 역적 종친을 유사에게 내맡기고 바로 환궁의 지시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자전께서 행차하려 하신다면 응당 대내에서 정지하기를 청해야 한다. 경들이 물러간다면 나도 즉시 환궁할 것이다."
하였다. 여러 각신 및 대사헌 신응현(申應顯)과 옥당 김희조(金熙朝) 등이 일제히 아뢰니, 사알을 시켜 전교하기를,
"경들은 자전을 빙자하려 하는가. 행차의 명령은 응당 대내에서 그만두기를 청해야 한다. 경들이 물러간다면 나도 응당 환궁할 것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이 자전이 행차할 때의 시위 군병에 관한 절목으로 아뢰니, 전교하기를,
"품의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작성하였으니, 죄명을 기록하고 대령하게 하라."
하고, 이어 장막 안에서 나와 창고 안으로 처소를 옮겼다.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나아가 섬돌 밑에 둘러서니 초관(哨官) 조두(趙㞳)를 시켜 호위 군사를 데리고 나가 막게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가 큰소리로 꾸짖기를,
"너도 또한 오늘날의 신하일진대 역적은 막지 않고 도리어 조정을 막으려 하는가. 또 손으로 경사(卿士)를 밀어내려 하는가."
하였다. 승지 홍의호(洪義浩)가 자전의 전교를 받들고 계속 승전색에게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홍의호가 높은 목소리로 고하기를,
"자전의 언문 교지를 받들고 온 지가 벌써 오래되었는데 승전색의 지체로 인하여 아직까지 바치지 못하고 있으니, 더욱 황공하고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하고, 신응현과 여러 옥당들도 높은 목소리로 아뢰기를,
"자전의 전교를 즉시 바치지 못하고 있으니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속히 승전색을 시켜 나와서 받게 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제서야 나와서 받도록 명하였다. 승전색이 자전의 전교를 호위에 둘러싸인 속에서 받으려 하자, 오재순 등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자전의 전교가 얼마나 지중한 것인데 승전색이 감히 자전의 전교를 호위병의 어깨 너머로 넘기려 하는가."
하자, 승전색이 그제서야 나와서 받았는데, 그 자전의 전교에 이르기를,
"이미 본전(本殿)의 내시를 보냈고 또 조정의 협력을 기대하였는데, 죄인을 되돌려보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부러 놓아주었으니 이러한 국법이 또 어디에 있는가. 날이 이미 밝아오는데도 아직 환궁할 기미가 없으므로 비록 천만부당한 거조임을 알면서도 체모를 차릴 겨를이 없다. 내가 곧 친히 가서 역적 종친을 축출하고 주상을 모시고 돌아오겠다. 이 뜻으로 즉시 주상께서 행차하신 곳에 고하고 떠날 연을 대령시키라."
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소리치며 아뢰니, 하교하기를,
"이것이 무슨 나라의 체면인가. 경들에게 모두 중도 부처(中道付處)의 처벌을 내릴 것이니 속히 물러가라."
하니, 신하들이 일제히 아뢰기를,
"역적 종친을 내보내 유사에게 넘기기 전에는 신들은 죽음이 있을 뿐이니, 비록 부처의 죄명을 받는다 하더라도 감히 물러갈 수 없습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이 곧 계단을 부여잡고 곧바로 올라가 힘을 다하여 앞으로 다가가니 호위군 또한 막아내지 못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계단 위에 서서 번갈아 아뢴 지 한참 만에 하교하기를,
"대내로부터 온 소식을 들으니 자전께서 지금 대궐을 떠나 나오신다고 한다. 놀랍고 송구함을 금치 못하겠다. 내 곧 환궁할 것이니 백관들은 속히 물러가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시위(侍衛) 등의 절차를 이미 마련하여 들이라는 명령이 없었는데 어떻게 자전께서 대궐을 떠나 나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병조 판서는 즉시 달려가 내가 지금 환궁한다는 뜻을 아뢰라."
하고, 이어 작은 남여를 타고 처소에서 나와 교자에 올랐다. 오재순 등이 앞에 나아가 번갈아 아뢰기를,
"전하는 지금 비록 환궁하신다 하더라도 역적 종친은 어디다 두겠습니까. 명백히 교시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삼사의 여러 신하들 및 재상 이하가 또 앞으로 나아가니 모조리 물리쳐버리라 하고 계속 떠나기를 재촉하였다. 행차가 약현(藥峴) 앞길에 이르자, 승지 홍의호가 자전의 전교를 바쳤는데, 그 전교에 이르기를,
"승지가 아뢰는 말을 들으니 죄인이 주상의 침소에까지 든 것 같다고 한다. 어찌 이와 같은 나라의 체면이 있으며 어찌 이처럼 분통한 일이 있겠는가. 오늘도 벌써 반나절이 지났으니 환궁은 한시가 급하다. 설사 호위의 절목을 품의하였다 하더라도 필시 나로 하여금 거둥하게 할 리는 없을 것이고 또한 주상의 마음을 돌릴 리도 없을 것이다. 나의 한결같은 마음은 나라를 위하는 데 있을 뿐이니 다른 것이야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비록 위의는 없더라도 지금 연을 타겠으니 일변 전달하는 사람을 연이어 세워 이미 연을 타고 떠났다는 뜻을 주상이 가 있는 곳에 전달하라."
하였다. 상이 이를 받아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급히 행차를 따르는 승지 한 사람을 먼저 달려보내 연이 만약 이미 대궐을 떠났거든 내가 곧 환궁하여 여기에 도착하였다는 뜻을 아뢰라고 명하였다. 행차가 수각교(水閣橋) 앞길에 이르렀을 때 궁궐을 지키던 승지 신기(申耆)가 달려와 아뢰기를,
"대비전께서 금방 대궐을 나오셨습니다."
하니, 상이 또 승지를 시켜 달려가 내가 지금 환궁하여 여기에 도착하였으며 또 하교를 받들어 즉시 환궁한다는 뜻으로 나아가 아뢰게 하였다. 자전이 금천교(禁川橋)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만약 되돌아가려 하였다면 왜 이런 거조를 취하였겠는가. 죄인을 도로 축출하고 다시는 이런 거조가 없다면 도로 들어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가(私家)로 갈 것이다."
하고는, 그 길로 돈화문 밖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만약 종묘 사직에 관계되지 않는 일이라면 어찌 이런 거조가 있었겠는가. 죄인을 도로 보내야만 들어갈 것이다."
하였다. 상이 승지를 명하여, 죄인을 이미 돌려보냈으니 만약 행차를 돌리신다면 뒤따라 환궁하겠다는 뜻으로 나아가 아뢰게 하였다. 행차가 돈령부(敦寧府) 앞길에 이르자 자전의 연은 벌써 돈화문에 닿았다. 상이 교자를 낮추 매라고 하면서 승지를 시켜, 죄인은 도로 보냈으니 즉시 환궁하라는 뜻으로 또 나아가 아뢰게 하니, 홍의호(洪義浩)가 돌아와 아뢰기를,
"대비전께서 금방 연을 돌려 궐내로 돌아가셨습니다."
하니, 상이 뒤따라 나아가 협양문(協陽門)을 거쳐 궐내로 돌아왔다.
의금부가 의금부 도사를 보내 인(䄄)을 강화부로 압송할 것을 아뢰니, 전교하기를,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또 다시 본부에서 주관할 필요가 있겠는가. 돌려보낸 지 벌써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자전의 내시가 벌써 데리고 갔다."
하였다.
전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과 전 영돈녕부사 홍낙성(洪樂性)을 삭출하고 부처(付處)하라는 명령을 취소하였다.
전교하였다.
"비록 군사를 동원시킨 것은 아니나 강화부의 장정들이 군병 노릇을 하지 않은 자가 없었고, 비록 모두가 평상 복장을 하였으나 산성에 분산시켜 세운 것이 대열을 벌여놓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제 겸중군(兼中軍) 구협(具埉)은 전례가 그렇다는 것으로 아뢰었으나 공술한 것이 분명치 않고 사실도 자세히 알지 못하여 우선 덮어두었다. 그런데 이 강화부의 수교(首校)가 공초한 것을 보니, 비록 수교의 지휘를 받았다고는 하나 집행한 자는 구협이다. 그 뒤폐단을 막고 군사 규율을 중시하는 도리상 결코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 강화부의 겸 중군 구협은 새 유수가 부임한 후 백사장에서 위의를 크게 갖추고 곤장 20대를 쳐 강화부의 군정으로 충당하라.
이른바 가중군(假中軍) 한사원(韓思遠), 천총(千摠) 유익(柳瀷)·한방효(韓邦孝)는 혹은 표신을 받는 것을 지체하기도 하고 혹은 성문을 열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다. 일시적으로 대리한 겸중군에 비하면 그 죄가 더욱 중하다. 더구나 구협을 압송해 온 뒤에는 그들이 전적으로 거행하지 않았는가. 역시 새 유수가 부임한 후 선전관과 함께 크게 백성들을 모아놓고 조리를 돌린 후 곤장 30대를 쳐서 강화부의 군정으로 충당하라."
11월 20일 병신
상이 승지 신기(申耆)와 유문양(柳文養)에게 일렀다.
"어제 자전께서 행차하게 된 것은 곧 나의 성의가 부족하여 능히 감동시키지 못한 소치인데, 궁궐을 지키던 승지가 조용히 행동하면서 서둘러 봉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이 돈화문 앞까지만 이르렀다가 되돌아 환궁하였으니 실로 다행한 일이다."
교리 성종인(成種仁), 부교리 박기정(朴基正)·윤영희(尹永僖)·이경운(李庚運)·박규순(朴奎淳), 수찬 박종래(朴宗來)·김희조(金熙朝)가 상소하기를,
"역적 종친의 극에 달한 죄악은 잠시도 용서하기 어려운 것인데 경한 죄를 적용하여 가까운 섬에 옮겨두고 지금까지 목숨을 유지하게 하였으니, 법으로는 굽힌 것이지만 은정은 충분히 베푼 것입니다. 그럼에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부족하게 생각하여 기어코 도성 안에 데려다 두고야 말겠다는 뜻으로 인하여 가장 추운 때에 자전으로 하여금 행차하게 만들었으니, 성명께서도 필시 마음이 언짢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하게도 역적 종친을 축출하였다는 말이 승지가 번갈아가며 보고할 때에 나왔으나 신들의 염려는 아직 전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비록 그 자리에서 압송해 갔더라도 만약 혹시라도 도중에서 탈출하여 돌아온다면 이것이 어찌 자전에게 보고한 본의이겠습니까. 강화 유수와 경기 감사를 빨리 차임하여 보내지 않는다면 지키는 일이 소홀하여 그 우려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기왕의 과실을 뉘우치고 앞으로 닥쳐올 화를 염려하여 즉시 경기 감사와 강화 유수를 차임해서 지키는 일을 거듭 다잡기 바랍니다. 신들이 어제 한 일은 비록 천만부득이한 데에서 나왔으나 호위를 밀어젖히고 상하의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분수에 벗어나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견책과 삭직의 엄명을 받기는 하였으나 결정적인 하명이 아직까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들을 사패(司敗)에 내려 빨리 중벌을 가하여 기강을 바루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에 대해서는 다른 일로 이미 처리하였다."
하였다.
전교하였다.
"구협의 일은 구태여 강화부에 넘길 필요가 없다. 병조 판서를 시켜 교관(郊館)에 나아가 자리를 열고 크게 위의를 갖추어 거행한 후 초기를 올리게 하라. 천총과 가중군을 강화로 내려보내는 것 또한 구차한 일이니, 병조 판서가 본도의 관찰사와 함께 입회하여 역시 교관에서 곤장을 친 다음 조리를 돌리게 하라. 조리를 돌리는 형벌은 바로 삼군에게 돌려보인다는 뜻이니, 만약 군사들이 일제히 도착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못 율문을 제정한 본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경기 군영 관하에 속한 군병 중에서 근년에 새로 들어온 자도 적지 않으니 이들이 모이기를 기다려 거행하라. 본도의 감사는 배치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난번의 처분은 사실 그 감영을 비워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감사를 여섯 번이나 바꾼다는 것도 또한 마땅히 생각해볼 일이니 감사 김희(金憙)를 그대로 유임시키라."
전교하였다.
"한림(翰林)이 아뢴 일이 결국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지지난번 갑술년에 있었던 전례를 어떻게 취용할 수 있겠는가. 설사 말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각기 직무를 수행하는 도리로 붓을 들어 잊지 않고 간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는 것을 본받고자 하는 일은 옳으나, 어찌 감히 이처럼 전례에 없는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당시의 한림을 모두 삭직하고 단속하지 못한 상관도 또한 파직하라."
대궐문을 밀어젖힌 삼사에게 서용하지 않는 처벌을 적용하였다. 하교하기를,
"옛사람들 가운데는 비록 임금의 옷소매를 잡아당기고 말고삐를 끊고 문을 밀어젖힌 사람이 있었으나, 소매를 잡아당긴 데도 여러 가지가 있고 말고삐를 끊은 것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문을 밀어젖힌 것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므로 비록 다급하고 붐비는 때라도 기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께 대궐을 나설 때 대신과 각신들이 길을 막고 나서서 간쟁하자, 일개 대오의 무장한 무관들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간관(諫官)이 해야 할 일을 하였다.
그러나 그때에 내린 명령은 교관(郊館)으로 행차하겠다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대신과 재상들은 비록 언책(言責)이 있는 간관은 아니더라도 일반 관리들과 다르므로 무슨 일이 생길까 미리 염려하는 것 또한 한 가지 도리이겠지만, 그들이 어찌 감히 이처럼 무엄할 수 있단 말인가. 병조 판서는 이미 잡아들여 단속하지 못한 죄를 깨우쳐 주었지만, 그들을 나라의 규율 밖에 보통으로 내버려두는 것은 훗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된다. 병조에 구류된 별군직(別軍職) 등을 모두 병조 판서로 하여금 교관에 모임을 열 때 엄하게 곤장을 친 다음 금부로 보내 해당한 율문을 적용하고 보고하게 하라. 어제 문을 열어젖힌 때의 일로 말하더라도 날이 저문 뒤의 광경은 보기에 너무도 해괴하였다. 대가(大駕)가 머문 처소의 처마와 계단 앞까지 곧바로 핍박하였었는데, 그때에 비록 재상들에게 모두 부처(付處)의 명을 내리긴 했지만 그것은 시행할 수 없는 조치였으므로 도리어 희극과 같은 것이었다.
전교를 비록 써서 내보내지는 못하였지만 그대로 덮어두었으니, 어찌 상하 질서가 있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피를 흘리면서 간했다는 말을 사책(史冊)에서 보기는 하였으나 떠들어대고 서로 충돌하며 에워싸고 격투하면서 일반 관리가 재상들 속에 뒤엉킨 것은 고사에서 찾아보아도 언제 이러한 전례가 있었던가. 그중에 안목을 갖춘 자가 있었다면 또한 어찌 그 잘못된 행동을 개탄하지 않았겠는가. 이미 하나하나 추적해 조사하여 치죄할 수 없는 이상 감독하고 살피지 못한 죄는 의당 간관과 경연관들이 져야 한다. 어제 문을 밀어젖힐 때 뜰 안에 들어섰던 삼사에게 빨리 서용하지 않는 처벌을 시행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말은 망령된 것 같으나 품은 생각을 숨기지 않는 뜻에서 나왔으며 동일한 죄를 진 다른 사람은 이미 등용하였으니, 하나는 등용하고 하나는 등용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참찬 송재경(宋載經)을 등용하라. 벼슬자리를 그대로 보류해 둔 것은 뜻이 있어서였으니, 종전의 벼슬에 그대로 임명하라."
전교하였다.
"명령은 신용이 있어야 한다. 옛날에 어떤 명철한 임금이 우인(虞人)과 사냥을 약속하고 들로 나가려 하다가 비를 만났으나 그래도 자신이 친히 나가서 약속을 파하였다고 한다. 어제 교외에 행차하였다가 도중에 다른 곳으로 갔기 때문에 이미 모였던 무사들로 하여금 하루 종일 기다리게 하였다. 비록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 때문이기는 하였지만 개장한 후에 가겠다고 한 처음의 생각과는 다르게 되었다. 명령을 믿음이 있게 하는 뜻으로 비추어 볼 때 약속을 어긴 것이 되었다. 하루 이틀 이내로 마땅히 서도와 북도의 무사를 불러 시험보이되, 유엽전(柳葉箭)을 한 차례 쏘게 하되 요식을 받는 자를 제외하고는 서울에 있는 자나 공적인 사무와 사삿일로 서울에 올라온 자를 막론하고 모두 참가시킬 것이니, 병조에서 이를 알고 있도록 하라."
전교하였다.
"근래에 관리를 임용하는 방법이 옛날 같지 않아서 혼탁한 자를 배격하고 청렴한 자를 등용한다는 말은 한쪽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만약 언론으로 죄를 지고 여러번 낙점을 받지 못한 자가 있을 경우 빈 자리가 났을 때 수망(首望)으로 추천하는 것은 그래도 언로(言路)를 열어주는 한 가지 방법이 되겠지만 지금은 이와 반대이다. 고을 수령이 되어 백성은 다스리지 않고 고을을 팔아먹은 죄를 저질렀는데도 매번 정사 때마다 수망으로 추천하여 마치 충직함을 권장하고 공로에 보답하듯 하고 있다. 어용겸(魚用謙)이 지은 죄는 그의 공술이나 어사의 보고로는 분명히 알 수 없고 그때의 어사 또한 출도한 것과는 다름이 있지만, 설사 수효가 맞지 않고 용도가 사적인 곳이 아니라 하더라도 금법을 범한 것은 마찬가지이며 잘못을 답습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이 권장할 만한 것이 있고 보답할 만한 것이 있기에 번번이 버리지 않고 정사마다 반드시 추천하는가. 과연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전관(銓官)의 일이 극히 해괴하니, 해당 당상관을 중한 편으로 추고하라."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홍수보(洪秀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1월 21일 정유
윤대(輪對)가 있었다.
이정규(李鼎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조정진(趙鼎鎭)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이번에 행차가 읍청루(揖淸樓)로 향할 때 얼음이 깔린 도랑과 밭두둑이 이따금씩 칼등처럼 협착한 곳이 있었는데 앞을 다투어 달려가기를 마치 평지를 밟듯 하였다. 길가에서 행차를 바라보던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입을 모아 감탄하기를 ‘사람과 말이 나는 것 같아 신병(神兵)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듣기에 매우 가상하였다. 대체로 평일의 훈련에서 지나치게 사정을 보아주지 않음으로써 박절한데 가깝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니나 부득불 획일적인 규율을 적용하여 일찍이 방과한 적이 없었더니 지금에야 그 보람이 나타내게 되었다. 강 건너편에서 진을 치고 명령을 내릴 때 행차 앞뒤에 있는 각 군영의 기병들은 나루 길의 절반쯤 얼어붙은 곳을 꺼려 행여 죽을까봐 전진하지 못하였으나, 장용위(壯勇衛)의 한 부대는 뛰는 말에 채찍을 가하면서 순식간에 강복판에 날아드니, 언덕 위에 가득히 나와 구경하던 사람들이 누구나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져 하는 말이 ‘오늘에서야 더욱 장용위의 용맹을 믿겠다.’고 하였다.
이 어찌 더욱 가상하지 않겠는가. 연래에 비록 훈련을 엄격히 하였다고는 하나 이처럼 굳세고 날렵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이러한데도 포상하는 조치가 없다면 활줄을 늦추고 조이듯 적절히 대처하는 본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분주히 공무를 수행하는 여가에 오늘 말을 타고 달리면서 목표물을 쏘는 중일(中日) 시험에서 또 다섯 번이나 명중시킨 자가 나왔고 적게 맞혀도 서너 번을 밑돌지 않았으며 한두 번 맞힌 자는 아예 없었다. 그중에 다섯 번 맞힌 자는 전례대로 가자(加資)하고 그 나머지 행차를 따른 자는 호조를 시켜 각각 무명베 1필씩 주게 하라."
11월 22일 무술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 조집(趙㠎)을 불러 만나보았는데, 하직 인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승지 유문양(柳文養)이 아뢰기를,
"15일에 내린 전교에 동지를 전후한 하루씩은 긴급하지 않은 상소문은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씀이 계셨는데, 그 후부터 모든 상소문이 아직도 대궐문에서 저지를 당하고 있으니, 더없이 놀라운 일입니다. 병조의 당상관을 추고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23일 기해
이도묵(李度黙)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1월 24일 경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서도와 북도의 별부료 군관(別付料軍官)에게 활쏘기 시험을 실시하였다.
조정 신하들에게 하유하였다.
"하늘과 땅처럼 영원히 변함없는 떳떳한 이치로 볼 때 임시변통이란 말은 용납되지 않는다. 신하로서 독단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고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그 죄는 사형이며 그 율문은 극형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한번 범하기만 하면 실로 용서할 수 없다.
지난 가을에 있은 금부 당상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자전을 빙자하는 데 구애를 받고 작은 일로 큰일을 그르칠까 염려하여 가까운 섬에 잠깐 귀양보내는 것마저 떠나자마자 용서해주고 말았다. 이것은 물론 자전의 혐의를 피하는 것이 장래의 환란을 막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서 나온 조치였지만 그 조짐이 어찌 다만 서리가 장차 얼음으로 변하는 정도라고만 이를 뿐이겠는가. 밤중에도 잠이 오지 않고 생각이 여기에 이를 때면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지곤 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이윤(伊尹)은 성인이고 곽광(霍光)은 충신이었다. 변란을 만나 변란을 처리할 때 어찌 혹시라도 후세에 폐단을 남겼겠는가마는, 그러나 오히려 왕망(王莽)·조조(曹操)·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이 찬역의 음모를 실현할 때는 으레 이윤과 곽광을 들어 남의 입을 틀어막는 구실로 삼았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본디 전례를 거론하는 나라이지 않은가. 이 길이 한번 열리면 오늘의 일을 본받는 후인들이 아무 때에는 아무 실례가 있었다고 끌어다 모방하면서 그 흉악한 심보를 제멋대로 부릴 것인즉, 오늘날 제신들이 비록 만번 처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장차 무엇으로 그 죄를 다 속죄하겠는가. 이 때문에 의리의 경중을 참작하는 입장에서 작년에 의금부 당상관을 석방한 일은 당면한 중한 바에게 중점을 돌린 것이었고 근일에 특별히 그 바른말을 했던 사람을 발탁한 것은 앞으로의 후환을 염려해서이다. 이것을 놓고 불가하다 하면서 쟁집한다면 이것은 왕망과 조조를 기르는 것이며 사마의와 환온을 키우는 것으로서 그 죄는 역적을 위하여 자기 임금을 버리는 것보다도 더한 것이다. 정말 지각이 있는 자라면 누가 감히 입을 벌리겠는가.
그러나 임명의 명령을 우선 취소하고 이전의 승지 벼슬 그대로 역마를 태워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그 처분이 실로 황급한 가운데 감정에 치우쳐서 한 조치가 아니었다. 경연관들로서 그 이면의 내막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어제 경연에서 이러니저러니 함으로써 다시 액정서의 사알을 시켜 특별히 마패를 주어 데려가게 하였으니, 그 의도는 명령을 미덥게 하고 당초의 뜻을 성취하자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미 문적으로 조지(朝紙)에 명백히 나타내 보이지 않았으니, 외정에서 어떻게 알 길이 있겠는가. 사실이 구차하여 너무도 떳떳하지 못하므로 이에 그 의리의 원칙과 처분의 내막을 이와 같이 밝혀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신기현(申驥顯)의 처분 사실을 환히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덧붙여 말할 것이 있다. 일개 보잘것없는 나쁜 무리를 비호하여 그 망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는 것은 부녀자의 인정에 가까운 것으로서 결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죽이는 본의가 아니다.
또 일전에 강가의 관사에서 묵던 날 밤에 은언군과 여러 해 동안 쌓인 울적한 회포를 풀었는데, 그는 주대(奏對)하는 첫 마디 말에서 먼저 송익로(宋翼魯)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이 자기에게 악명을 뒤집어씌우게 되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는 원한이 된다고 언급하였다. 이 말을 듣고서야 나는 비로소 지난날에 지나치게 두루 막기를 일삼은 것이 도리어 좋고 나쁜 것을 밝히는 대의에 소홀함이 되었다는 것을 환히 깨닫고 즉시 앞으로 본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여 관계가 없다는 실정을 드러내보이겠다고 대답하였다. 송익로 같은 자를 지금에 와서 중벌로 다스린다면 은정을 온전히 하려는 본심을 풀 수 있고, 나쁜 길로 나가는 구멍을 막을 수 있어 다시는 괴귀(怪鬼)한 무리들의 농락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대개 송익로는 병신년간에 간사한 아전을 통하여 남몰래 천금의 뇌물질을 하였으며 그 후의 소행은 말하기도 추잡하다. 뇌물을 그 아전에게 되돌려조 것은 조사하면 당장 알 수 있다. 그러나 송익로는 은연중 맺힌 것이 있어 이르는 곳마다 말을 퍼뜨린 결과 끝내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로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이런 일을 말하게 되자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그저 빨리 조사하여 처결해 줄 것만을 바랐다. 이는 정유년과 무술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추잡하고 시시한 일을 가지고 조정 신하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 줄곧 듣지도 않았던 것인데, 이제 와서는 그 일이 그의 사형 죄안에 덧붙게 되었고, 그는 이런 죄명을 뒤집어쓰게 됨으로써 죽어도 깨끗한 귀신이 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의 말은 너무도 불쌍하고 그의 정상은 너무도 비참하였다. 송익로 한 사람쯤이야 무엇이 아까울 것이 있겠는가. 이쪽으로 보나 저쪽으로 보나 이처럼 나쁜 자를 법으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겠는가. 전 별검(別檢) 송익로를 특별히 사형에서 용서하여 먼 섬으로 귀양보냄으로써 소인배들이 틈을 엿보아 나라에 화를 끼치고 형제간의 의를 끊게 하는 모략을 없앨 것이다. 오직 이 처분에 있어 당기었다 늦추었다 하는 것이 어찌 일시적으로 갑자기 생각한 것이겠는가. 후세에까지 영원히 변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 점을 모두 알고 있도록 하라."
교리 이은모(李殷模)가 상소하기를,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여 고금의 역사를 환히 꿰뚫고 있지만 지난 역사책에 과연 그 처지가 역적 종친과 같은 경우가 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데려오는 것도 부족하여 친히 그에게 나가기까지 하였고, 친히 나가는 것도 부족하여 침실 안에까지 끌어들이셨습니까. 전하께서 설사 전에 없던 이런 비상한 조치를 취하셨다 하더라도 그가 어찌 감히 경쾌한 말에 종자를 거느리고 보란 듯이 강을 건너온단 말입니까. 그도 또한 귀가 있고 눈이 있을진대 전후에 걸쳐 내린 자전의 전교를 또한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았단 말입니까. 작년에 있었던 거조를 무관심하게 보는 것입니까.
다만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를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는 단안이 됩니다. 그 흉악하고 패역한 행위가 이처럼 극에 달하였는데도 유수는 신표를 교부하는 일이 없어 어디로 오가는지도 알지 못하며, 군교들은 엄하게 지켰다는 것으로 도리어 명을 거역한 중벌을 입게 되었습니다. 섬에 사는 백성들은 필시 말하기를 ‘우리들이 국가를 위하여 역적을 방비하고 있으나 우리더러 명을 어긴다고 하니 우리는 그에 대하여 어찌할 수 없다. 기현과 같이 법을 어기는 무리들이 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될 것이다.’고 할 것입니다.
또 신이 듣건대, 그날 내수사에서는 역적 종친의 뒤를 따라 짐바리를 날랐는데, 무명·솜·쌀·비단 등 모든 일용 물자가 2백여 바리도 넘었으며 땔나무와 숯 같은 것에도 모두 사복시의 말을 부렸는데 수십 리나 연달았다고 합니다. 역적 종친의 흉악한 성품은 필시 이런 데서 더욱 그 기탄없이 심술을 부릴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조금도 굽어 생각해보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는 시원하게 대의를 들어 결단하여 빨리 삼사의 요청을 따르기 바랍니다.
신은 의금부 당상관 정호인(鄭好仁)의 처분에 대해서도 유감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정호인이 초조하고 황급하여 어쩔 줄을 모를 때 자전께서 내시를 도중에 내려보내 죄인을 쫓아보내게 하고 조정에서 협력해달라는 하교까지 하셨으니, 의금부 당상관이 된 자로서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아시면서도 강화부로 쫓아보내 죄인과 함께 강화도의 하늘 아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를 예로 부리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레와 같은 위엄을 좀 가라앉히고 특별히 석방하여 돌아오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11월 25일 신축
홍양호(洪良浩)를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삼았다.
11월 26일 임인
명광문(明光門)에 나아가 감제(柑製)를 보이고 수석을 차지한 생원 이정현(李廷顯)을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하였다.
헌납 권회(權恢)가 아뢰기를,
"송익로(宋翼魯)의 죄를 어찌 이루 다 처단할 수 있겠습니까. 본디 역적 종친의 앞잡이로서 뇌물을 널리 부리고 은밀히 권세가와 결탁한 죄상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었고, 이미 대간의 계청에 올라 그를 잡아다 국문하라는 요청을 이미 허락하셨는데, 지금 귀양의 명령이 또 여러 사람들이 분개하는 중에 내렸으니 신은 당혹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송익로를 섬으로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빨리 취소하고 이어 의금부로 하여금 엄격하게 신문하여 죄상을 밝혀내도록 하여 해당되는 형벌로 속시원하게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7일 계묘
전교하기를,
"대신의 책임은 임금의 덕성을 성취시키는 데 있다. 그의 말이 비록 억측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 마음은 숨김이 없는 데서 나온 것이다. 전 좌의정 채제공을 서용하여 그 자리에 유임시키도록 하라."
하고, 하유하기를,
"앞서 한 말이 어찌 깊은 뜻이 있었겠는가. 경은 알고 있는 것은 다 말한다는 도리를 따른 것인데, 나는 진언한 것을 다 따라주지 못하여 지금 자책하고 있다. 경에게야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그러나 경은 차자를 한 번 올리고 두 번 올리고 세 번까지 올려 그 내용이 갈수록 심각하여 나의 뜻을 따라줄 생각이 없으니, 이는 경이 나를 너무도 몰라주는 것이다. 이미 지난 일을 무엇 때문에 다시 운운할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 의정부에는 일보는 대신이 없어 여러 가지 공무가 적체되어 조정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이러한 때 이 소임을 어찌 혹시라도 계속 비워 둘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번 납일 대제(臘日大祭)는 내가 친히 종묘에 제향을 올리려 하고 서계(誓戒)가 머지않아 있으니, 주선하는 절차를 경이 앞장서서 감독하라. 경은 모름지기 편안한 마음으로 사양하지 말고 당일로 입성하여 즉시 하명에 숙배하라."
하였다.
서정수(徐鼎修)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가 얼마 안 되어 교체하고 이홍재(李洪載)로 대신하였다.
11월 28일 갑진
좌의정 채제공이 상소하기를,
"오늘날 왕실을 돕는 일은 난역(亂逆)을 엄히 징계하고 국법은 무너뜨리지 않는 것보다 더 앞설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신이 전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 자주 책망하는 하교를 내리기까지 하였지만, 신이 전하를 알아주는 심정을 어제 덧붙여 아뢰는 글에서 명백히 말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일전에 행하신 과오는 마치 일식·월식과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보았고 급기야 잘못을 고침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하였습니다.
지금 조야의 논의는 모두 사태가 안정되어 다시는 근심할 것이 없겠다고 하지만 신은 생각건대, 전하의 깊은 마음속에는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쟁집하는 대 의리를 꼭 따라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털어버릴 수 없는 별개의 생각이 반드시 남모르게 자라는 것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만약 신이 정말 전하를 몰라보는 자가 아니어서 추측한 것이 불행히도 들어맞는다면 앞날의 근심이 지난날의 일보다 더 크지 않을런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이 전일에 한 말이 이미 억측의 죄를 범하였는데 지금 또 이처럼 망령된 말을 하게 되니, 신의 죄는 실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이를 계기로 하여 통렬히 깨우치고 조심하여 자주 전철을 답습하는 후회에 이르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는 전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하교를 다시는 베풀 데가 없을 것입니다. 이 어찌 훌륭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혹시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설사 신이 오늘 전하의 은명(恩命)을 받고 무릅쓰고 나간다 하더라도 훗날 전하의 뜻을 따르지 못하여 크게는 무거운 형벌을 받고 작게는 먼 변방에 귀양가게 되어 반드시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신의 신세를 망치게 됨은 감히 애석하지 않으나 전하께서 거듭 베풀어조 은혜를 저버리게 되어 나랏일을 그르치고 신하의 본분을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 어느 지경에까지 이를지 모를 일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애당초 도성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만 못하겠습니다. 빨리 정승의 직책을 다시 맡겨주신 하명을 거두고 전후에 걸쳐 저지른 신의 죄를 다스려주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억측이란 말에 대해 교훈삼아 경계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또다시 형적도 기미도 없는 미연의 지나친 염려와 억측으로 이처럼 중언부언하고 있으니, 참으로 경을 위하여 몹시 개탄스럽다. 경은 경이고 나는 나로서 경은 경의 길을 갈 것이고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 구구한 이 마음은 저 하늘이 알고 있으니,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겠는가. 편안한 마음으로 사양하지 말고 당일로 입성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이 현(縣)과 도(道)를 통하여 역적 인(䄄)의 일을 상소로 진술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강변에 행차한 것이 어찌 그만둘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경 역시 여러 사람들을 따라 운운하는 것을 면치 못하니, 실로 경처럼 덕이 있고 나이 많은 사람에게 기대하던 바가 아니다. 내가 취한 조치가 옳고 경의 상소가 옳지 못하다는 것은 거듭 설명하지 않아도 무시할 수 없는 공정한 안목과 공정한 여론이 있다. 나는 실로 양심에 부끄럽지 않다. 금년의 겨울 추위는 근래에 처음 보았다. 경은 요즈음 모든 일이 여전한가? 조정으로 돌아올 때 추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날 필요는 없으니 새해가 되기 전에 좀 따뜻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경의 아들 검교 직각(檢校直閣) 이만수(李晩秀)를 경의 생일날에 내려보내겠다. 이 조치는 아랫사람의 심정을 알아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혹시 이해해주겠는가?"
하였다.
11월 30일 병오
진휼청이 아뢰기를,
"서도(西道)의 유민(流民)을 찾아내 돌려보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선전관(宣傳官)과 비변랑(備邊郞)이 데려다 넘겨주는 것이고, 하나는 각도와 각 고을에서 발견되는 족족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이번에 결재하여 내려보낸 계본 중의 유민은 모두 각도에서 찾아내는 대로 곧 되돌려보낸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선전관과 비변랑이 데려다 넘겨준 후 각각 그 도에서 받은 실태 보고서를 가져다가 대비하여 맞추어본 결과 함경도에서 데려다 넘긴 자는 44명인데 그 도에서 받은 자는 52명이며, 평안도에서 데려다 넘긴 자는 39명인데 그 도에서 받은 자는 93명이며, 원춘도에서 데려다 넘긴 자는 1백 27명인데 그 도에서 받은 자는 역시 1백 27명이며, 황해도에서 데려다 넘긴 자는 1백 32명인데 그 도에서 받은 자는 2백 36명이었습니다.
다시 각도에서 발견되는 대로 곧 돌려보낸 보고서와 각 고을에서 돌아와 안주하였다고 보고해온 숫자를 가져다가 서로 맞추어본 결과 함경도에서 되돌려보낸 자는 5백 70명인데 그 도에 돌아와 안주한 자는 1천 5백 74명이며, 원춘도에서 되돌려보낸 자는 40명인데 그 도에 돌아와 안주한 자는 4백 40명이며, 황해도에서 되돌려보낸 자는 5백 5명인데 그 도에 돌아와 안주한 자는 4천 3백 58명이었으며, 평안도에서 되돌려보낸 자는 5백 8명인데 그 도에서는 아직까지 돌아와 안주한 자에 대한 실태를 보고해온 숫자가 없습니다.
이상을 종합하여 본다면 각도에서 돌려받은 자와 돌아와 안주한 자의 숫자가 어느 경우나 데려다 넘긴 것과 되돌려 보낸 숫자보다 곱절이나 됩니다. 이것은 아마도 선전관과 비변랑이 내려갈 때 길가에서 걸식하던 자들이 자원하여 따라간 것과 각처의 유민으로서 보고를 거치지 않고서 소문만 듣고 스스로 돌아간 소치인 것 같으며, 처음에 내린 전교에 의하여 데려다 넘겨조 것과 각도에서 찾아보낸 수는 조금도 도망쳤거나 감축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초봄에 데려다 돌려보낸 후 돌아와 안주한 사실을 여러 도에서 다 이미 보고해왔는데 평안도에서만 아직까지 아무런 보고도 없으니, 이 어찌 처음에는 서둘다가 나중에는 게을러진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보고하는 형편으로 보면 아래에서 거행하는 태도가 좀 풍년이 들었다 해서 마음이 해이해진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더구나 도내의 몇 개 고을은 금년 농사가 흉년을 면치 못하지 않았는가. 또 올해와 지난해의 환자미를 한꺼번에 독촉할 때 또한 어찌 다시 흩어져 떠날 염려가 없겠는가. 아직까지 보고해오지 않은 감사들은 그 과오를 추고하여 지체한 내막을 즉시 사실대로 장계하게 하라.
올 겨울에 도내 각 고을에서 이전부터 토박이로 이름하는 백성들로서 설사 한 명의 남녀라도 딴 곳으로 이사가는 경우에는 도내의 다른 고을이건 다른 도의 다른 고을이건 막론하고, 해당 수령은, 이전에 시종관을 지냈거나 병사·수사를 지낸 사람이면 의금부에서 붙잡아다 곤장을 치게 하고 그밖의 문관·음관·무관인 고을 원이나 변방 장수일 경우에는 곧장 감영에서 붙잡아다가 곤장을 치게 하라.
지금 청천강(淸川江)의 이남과 이북을 가르고 또 산골과 강변을 가르고 또 풍년들고 흉년든 것이 각기 다른 곳을 갈라서 어사를 보내기도 하고 선전관을 보내기도 하고 비변랑을 보내기도 하여 감영과 고을의 근태와 백성들의 안정 여부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작년에 이 도의 수령들과 변방 장수들 중 붙잡혀 파면당한 자가 즐비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고통을 받은 것은 백성들뿐이었다. 이번에는 특별히 이런 폐단을 염려하여 특별히 어사를 보낸다는 이유를 널리 알리지 않을 수 없다. 사전에 알려준다는 것을 알고서 만약 고의로 범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자가 있다면 어찌 가중한 형벌을 면할 수 있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감사와 병사들에게 엄격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상소하기를,
"신이 일전에 올린 상소에 대한 전하의 비답을 보고 두렵고 부끄러운 나머지 죽고싶은 생각이 들어 하늘과 땅 같은 전하의 도량에 유감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대체로 보상(輔相)은 임금의 팔다리이고 심장입니다. 사람이 이미 체구를 갖추고 있는 이상 심장이 나와 관계가 없다 하고 팔다리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할리는 천하에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신이 상소하여 역적 종친을 논박하고 법의 통제를 엄격히 하자고 논한 데 대하여 하유하기를 ‘경은 경이고, 나는 나이다.’고 하셨고, 계속하여 ‘경은 경대로 가고 나는 나대로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런 전교를 내리실 수 있습니까.
옛날에 고요(皋陶)는 죄인을 죽이자고 하고 우순(虞舜)은 용서하자고 하여 이렇게 하기를 두세 번을 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본다면 우순과 고요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것 같지만 《서경(書經)》에는 ‘나로 하여금 소신껏 다스리게 하여 온 나라에 교화가 퍼지게 된 것은 오직 너의 훌륭한 공로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용서하자느니 죽이자느니 하는 것이 때로 일치하지 않은 이유는 오직 우연히 범한 죄와 고의로 범한 죄를 따지는 데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왕실의 역적이 스스로 천벌을 범하였다면 우순이 어찌 고요가 죽이자고 하였을 때 ‘경은 경대로 가고 나는 나대로 가겠다.’고 하겠습니까. 이윤(伊尹)이 그 임금에게 고하기를 ‘나와 성탕 임금은 모두 같은 덕을 지녔다.’고 하였으니, 이는 이윤이 자기 스스로 한 말인데도 그 말이 이처럼 조금도 겸양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임금과 신하가 같은 덕을 지닌 것이 천고의 미담이 되므로 서로 사양하거나 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보통 사람에게도 월등히 미치지 못하는 신 같은 자로서는 감히 의논할 여지도 없지마는 전하의 덕망이야 어찌 유독 성탕(成湯)을 따르지 못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성탕의 덕이 있다면 혹시 임금과 신하가 같은 덕을 지닐 수도 있을 것인데, 지금 곧 ‘너는 너대로 가고 나는 나대로 가겠다.’고 하면서 마치 신을 버리고 외면하는 것처럼 하셨습니다. 신은 비록 족히 말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전하의 팔다리이며 심장같은 신하들을 서로 관계가 없고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은 이 하교를 받든 날부터 가족을 대하기도 부끄럽습니다. 무슨 면목으로 무릅쓰고 백관들의 윗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정승의 직위에서 삭출하고 다시 어질고 덕망 있는 자를 선정하여 임금과 신하가 다같은 덕을 지니는 미덕을 추구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무 지나치다. 그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 임금과 재상이 비록 한몸과 같다고 하나 이는 대의가 그렇다는 것을 지적한 말일 뿐이다. 기질에 따른 감각과 감정의 욕망을 억지로 똑같게 조화시킬 수는 없다. 경이 똑같게 조화시키고자 한다면 수고롭기만 하고 효과는 없어 자못 거울을 뒤집어놓고 밝은 빛을 찾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다. 앞서의 비답 가운데 ‘경은 경이고 나는 나이다.’라고 한 말에 무슨 버리고 외면하는 혐의가 있는가. 그리고 ‘너대로 가고 나대로 가겠다.’는 비유는 주자(朱子)와 육구연(陸九淵)의 아주 친밀한 사이에서도 서슴없이 썼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너무 지나쳤다. 그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 경은 이해하기 바란다. 사양하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즉시 출사하여 일을 보라."
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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