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정미
이홍재(李洪載)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2일 무신
정범조(丁範祖)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병모(李秉模)를 지경연사로 삼았다.
12월 3일 기유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 제학 정민시(鄭民始), 검교 직제학 서호수(徐浩修)를 불러 만나보았다. 상이 매월 이날에 서명선 등을 불러보았는데, 이날은 그에게 병이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경이 몹시 쇠약해져 걱정스럽다."
하니, 서명선이 아뢰기를,
"신의 병이 심하여 이 다음 이날에는 다시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12월 4일 경술
홍수보(洪秀輔)를 강화부 유수로, 이한풍(李漢豊)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돈령부 영사 홍낙성(洪樂性)이 차자를 올리기를,
"종묘의 납향 대제에 친히 강신하겠다는 어명이 있었습니다. 한겨울의 된추위에 밤새워 제사를 지내자면 건강을 해치기 쉽습니다. 재계에 앞서 서계(誓戒)할 날도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매서운 추위가 한결같이 풀리지 않으니, 빨리 하명을 거두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동향 대제는 능을 참배하느라고 지내지 못하였는데 납향 대제마저 또 어떻게 대행시킬 수 있겠는가. 또 내가 추위를 견디는 힘이 더운 계절보다 낫다는 것을 경들이 익히 알고 있으면서 어찌 이렇게 자꾸 번거롭게 간청하는가. 더구나 궁(宮)에도 몸소 증사(烝祀)를 지내는데, 인정이나 예법으로도 종묘(宗廟)에 강신술을 직접 드리는 것은 더욱 당연하다. 경은 이해하기 바란다."
하였다.
심환지(沈煥之)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가 얼마 안 되어 교체하고 홍문영(洪文泳)으로 대신하였다.
12월 5일 신해
대사성 홍문영을 파직하고 유당(柳戇)으로 대신하였다.
최경악(崔景岳)을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12월 6일 임자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 납향 대제의 서계를 행하였다.
12월 7일 계축
전교하였다.
"현륭원(顯隆園)의 행차를 위하여 주교(舟橋)를 설치하게 되는데, 듣건대 다리가의 주정소(晝停所)를 노량(鷺梁)에 정하고 이승묵(李承默)의 선조 때부터 대대로 살던 집을 사서 수리한다고 한다. 또 경연관에게 들으니, 이 집은 고 정승 이양원(李陽元)의 교외 정자인데 그는 노량에 터를 잡고 살면서 노저(鷺渚)로 자기의 호를 지었고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사적이 있다고 하기에, 그의 문집을 가져다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옛날 선조(宣祖) 때 조정의 의견들이 서로 갈라지려는 조짐이 있었으나 오직 고 정승만은 지조를 세워 치우치지 않았으므로 선조께서 그를 가상히 여기었다. 한 번은 밤에 만나 앞에 불러놓고 술잔을 나누며 노래를 지어 주었는데, 그 노래에 ‘아흑로백(鴉黑鷺白)’이란 구절이 있었다. 그의 ‘노저’란 호도 대개 여기에 의미를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그 정자가 관청으로 넘어가고 옛 사실을 기념하는 조치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노래를 지어주면서 총애한 뜻을 계승하는 것이겠는가. 또 선왕조 을유년에 이 정자에서 생각이 나서 특별히 제사지내게 하고 술을 내린 거룩한 뜻을 어기는 일이다. 주인집에 이 뜻을 알리고 별도로 그 곁에 정자 하나를 지어 옛모습을 없애지 말고 편액도 옮겨서 걸게 하라."
전교하기를,
"과거에 새로 합격한 조수민(趙秀民)을 승문원(承文院) 권점에서 빼어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될 법이나 한 말인가. 그의 아비가 사리에 밝아 스스로 낮은 지체에서 빠져나와 그처럼 공로를 세운 것은 온 세상 사람이 모두 아는 일이다. 설사 참으로 선대에 하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 하자는 먼 과거의 일이고 공로를 세운 것은 가까운 오늘의 일이다. 더구나 그처럼 하자가 없고 공로를 세운 것이 이와 같은데도 이른바 권점을 주장하는 사람이 갑자기 건덕(建德)을 위해 원수를 갚을 이런 조치를 취했는데 대신도 말하지 않고 간관도 논하지 않으니, 이런 행태가 계속된다면 《명의록(明義錄)》 한 부는 얼마 안 가서 높은 시렁에 묶어두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급제 조수민의 분관(分館)은 승문원으로 시행할 것이며, 해당 정자(正字) 이인채(李寅采)에 대해서는 빨리 벼슬을 삭탈하는 규정을 적용하라."
하고, 다시 분관을 교서관으로 시행하였다.
12월 8일 갑인
수원 새 고을의 민호에게 토지 5백 결에 대한 조세를 제 1등급의 규례대로 면제해줄 것을 명하고, 하교하기를,
"봄에 현륭원을 참배하고 숙소에 돌아와 머물면서 새 고을의 민호에 대해 그 살림살이와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려는 정사에 마음이 간절하여 윤음을 불러 쓰게 하느라 촛불을 여러번 갈아대는 것도 모르고 앉아서 밤을 새웠다. 또 환궁한 뒤에도 특별히 윤음을 내렸는데, 그중 한 조목은 바로 면제해주는 것은 조세이고 부역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새 고을 백성들의 살림에 크게 도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근래에 호조에서 아뢰는 말을 들으니 제 1등급으로 희망하는 수원 백성들의 마음에 실망하는 한탄이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대체로 결세를 면제하는 규례는 일정하지 않다. 왕릉 토지의 면세도 있고, 역참토지의 면세도 있고, 아전들 토지의 면세도 있고, 효자 열녀 토지의 면세도 있고, 기타 잡다한 면세도 있다. 결세·대동세·마초·쌀 등 땅에서 생산되는 것으로서 세라고 불리는 것을 전부 면제해주는 것이 1등급이 된다. 그 다음은 혹 세만 면제하고 공물은 면제하지 않으며, 또 혹 공물만 면제하고 잡비는 면제하지 않는 것으로서 그 단계가 매우 많다. 지금 수원의 백성들에게 중등이나 하등의 규례를 적용한다면 이것이 어찌 내가 처음부터 돌보아주려고 애쓴 본의이겠는가. 수원부 새 고을의 민호에게 5백 결에 대한 세를 면제해주되, 특별히 제1등급의 규례에 의하여 거행하라.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해당 부사에게 공문을 보내 이 전교를 민중에게 반포하여 토지에서 바치는 것은 없고 혜택은 고루 미치게 하였다는 뜻을 환히 알게 하라."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가 장계하기를,
"유랑민을 다시 모아들여 그 거처를 안정시켜 살게 하였으며, 다른 도에서 압송해온 자들까지도 계속 이어져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가을 이후에도 공문 없이 스스로 돌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오가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므로 도로 돌아와 집결한 유랑민들 속에 섞어서 거론할 수 없습니다. 다른 도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자가 8월 이전에는 9백 42명, 9월 이후에는 3백 31명인데, 고을에서 보고한 도망간 백성의 숫자를 다 계산하면 돌아오지 않은 자가 아직도 1천 83명이나 됩니다. 올봄에 사방으로 흩어진 백성들뿐만이 아니고 대부분 종전부터 떠나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다 집결된 다음에 그 실태를 장계로 보고하겠습니다. 이미 진휼청에서 통보해온 것이 있기는 하나 아직 돌아오지 않은 민호는 연말에 구별하여 보고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세는 비록 그럴 것 같으나 강계부(江界府)로 말하면 본디 피폐한 고을로 불리고 있다. 이 고을 수령을 차임하여 보낼 때에는 특별히 그 폐단을 바로잡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이 감사를 특별히 임명한 뒤에도 또한 이미 직접 대면하여 경계한 말이 많았는데, 봄을 지나 여름이 가고 추수를 거쳐 겨울이 되도록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다. 인삼과 벼가 들에 널려서 사람마다 상자에 저축이 넘치고 토지가 모두 개간되어 집집마다 쌀독이 차 있으며, 이미 삭감한 장부에도 인구 수가 증가되고 가장 어지럽던 조세도 백지(白地)에 세를 징수하지 않게 된 것인가. 이 몇 가지에서 만일 한 가지라도 아직 소생되지 못하였거나 바로잡지 못한 사실이 있다면 관리를 골라서 차임하고 거듭 타이른 본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조정에서는 강계 백성에 대하여 한결같이 걱정하는 생각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다. 누구든지 서쪽 땅을 거쳐 올라오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이 고을의 민정을 물어보는데, 어떤 사람은 알지 못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여전하다 한다. 참으로 소생되고 바로잡혔다면 도내의 수령들이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여전하다 하니 갈수록 극심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감사와 이 수령이 아직 이와 같으니 뒤에 부임하는 사람들이 그 누가 책임지고 노력하려 하겠는가. 지금 해가 이미 저물었으니, 강계 백성들로 하여금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찌푸린 눈썹을 펴게 할 기회가 바로 이때이다. 마침 도에서 올린 장계로 인하여 촛불을 밝혀가며 거듭 당부하게 되었다. 본사에서는 이 판부(判付)를 가지고 공문으로 다시 신칙하라. 이상 몇 가지 조항의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의혹되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대로 의견을 갖춘 보고가 있은 후에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수원 부사 조심태(趙心泰)에게 전교하기를,
"경은 수원부의 새 고을을 설치한 공로가 있었으므로 경의 집안 사람이면 이사하였거나 서울에 살거나를 막론하고 이미 모두 본 고을의 과시에 참가하도록 하였는데 더구나 윤씨(尹氏)의 경우이겠는가. 더더구나 해남(海南)은 수원과의 거리가 끝없이 멀지만 요즘 시권(試券)에 이름이 등록된 것을 보니 윤지운(尹持運)·윤지섬(尹持暹)·윤지홍(尹持弘)·윤지익(尹持翼)·윤지식(尹持軾)·윤지상(尹持常)·윤지민(尹持敏) 등의 성명이 있는데, 이 밖의 권솔들로서 등록에 들어 있지 않은 자도 또한 필시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리 길을 이사해오느라 자리잡고 살 경황이 없을 것은 미루어 알 만하다. 식목조(植木條)로 따로 등록한 돈 1천 냥을 특별히 떼어주니 경이 직접 관리하여 혹은 집을 사주기도 하고 물건을 사주기도 하여 곧 즐비한 집들이 마을을 이루게 하라. 그리고 열흘마다 보이는 시험과 앞으로 다가오는 과거시험에는 비록 권속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조상의 직계 후손임이 분명하면 모두 시험에 응시를 허락하겠다는 것을 알리라. 이 전교를 한 통 베껴서 주인집에 주라."
하였다.
12월 10일 병진
춘당대에 나아가 해서 지방 무사들에게 쇠화살로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봉산(鳳山) 사람 곽시복(郭始復)의 처 허씨(許氏)가 징을 치고 호소하였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그의 남편 곽시복이 서울에 사는 차이원(車履遠)과 형조(刑曹)에서 송사를 하게 되어 관청에서 시복을 잡아가니 허씨의 시어미가 허씨의 남편을 붙들고 놓지 않자, 형조의 하인이 허씨 남편의 의관을 찢고 허씨 시어미를 구타하여 방금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사건은 홍수영(洪守榮)과 관련된 것으로서 당상관은 홍최영(洪最榮)의 처남이고 당하관 역시 홍수영과 절친한 사이이므로 허씨를 말려서 호소하지 못하게 하였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차이원과 곽시복이 토지 값을 가지고 송사하게 된 것은 이달 11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곽시복이 도로 물리겠다는 뜻으로 공술하고는 기한이 지나도록 이행하지 않으므로 참의 강이정(姜彛正)이 붙잡아갔는데, 그때에 보기에는 갓은 비록 찢어졌으나 몸에 상처난 곳은 없었습니다. 지금 이 공술을 보면 그 남편이 구타를 당하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형조의 하인이 조용히 압송하지 못하여 갓이 부서진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본조의 하인은 신의 조에서 엄격히 다스리겠습니다만, 본 송사는 호소가 허용된 네 가지 일[四件事]053) 에 들지 않았으니 내버려두기 바랍니다. 허씨 여인은 신의 조에서 법률에 의하여 엄히 다스리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어버이를 위하여 호소하는 것도 또한 호소가 허용된 네 가지 일 이외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송사는 이렇거나 저렇거나 우선 그만두고라도 본 사건은 외척집안의 토지이고 당상관은 외척 관리의 처남이었다. 더구나 하인을 지방에 풀어놓아 이처럼 제멋대로 행패를 부리게 내버려두었지 않은가. 동료 당상관을 두둔하는 경의 마음으로도 오히려 사실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여 쓰고 있던 갓이 부서졌다고 하였으니, 그들이 행패를 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노파가 그 아들을 위해 붙잡고 말리는 통에 상처를 입게 된 것도 사세로 보아 그럴 법하다.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대개 근래에 다른 외척 집안이건 이 외척 집안이건 막론하고 지나치게 으시대며 기세를 부리는 꼴을 항상 남몰래 걱정해왔는데, 이때 마침 이 사실을 듣게 되었다. 홍최영같이 무식하고 패려한 자에 대해서는 마음 속으로 늘 민망히 여기던 자로서 반드시 청탁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겠지만, 그의 형으로 말하면 지방에 있었을 뿐 아니라 자못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최영이야 어떻게 자기의 죄를 모면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횡포를 부리는 버릇은 발각되는 즉시 징계하여야만 허물을 고치지 못하고 있는 옛날 외척과 그것을 본뜨고 있는 새 외척들이 또한 경계할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대사령이 방금 지났으니 십분 참작하여 홍최영은 그 직명을 삭탈하여 문안드리는 반열에서 빼어버리라. 자궁(慈宮)의 겸손한 덕망으로 얼마나 거듭 훈계하였겠는가마는 그의 성명이 사소한 일로 이와 같은 문서에 오르내리니 이 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겠는가.
참판을 자주 사송(詞訟) 관리로 제수하는 것은 처음 제수하였을 때의 명성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뒤에 제수되었을 때가 처음 제수되었을 때만 못하고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문으로 변하여 결국 이처럼 일을 그르치게 되었다. 그 집 어른이 너무도 어질고 유순하여 능히 그 자제들을 단속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다. 본조의 참판 김노영(金魯永)에 대해서는 해부로 하여금 부탁을 받고 송사를 처리하며 하인을 놓아 백성을 괴롭힌 율문을 적용하게 하라. 비록 경으로 말하더라도 참으로 이른바 초록은 동색이다. 애매한 혐의를 받는 것은 생각지 않고 드러나게 감싸주려는 기색만 있다. 더없이 엄격한 것이 송사인데 이처럼 편을 들고 있으니, 너무도 해괴한 일이다. 경은 파직시키겠다. 본 송사는 황해 감사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장계로 보고하게 할 것이며, 그 하인도 황해 감사를 시켜 고문하여 엄히 가두어놓고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이때에 와서 시수가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하였으나 상의 마음에 들지 않아 그 계본을 되돌려주게 하고 회유하기를,
"경이 재상의 지위에 이르고 감사의 부절을 안게까지 된 것은, 대개 병신년 봄 이전에는 경의 이름이 요망한 환관 무리의 입에 거론되지 않았고 을미년 겨울 이전에는 경의 나가는 방향이 외척 집안을 가까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대대로 지키는 가문의 명성을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았다고 보아 수년 동안 의금부 관리로 있는 처지에서 발탁하여 언책(言責)과 논사(論思)의 직책을 거쳐 승지에까지 순차를 따라 등용하였던 것인데, 이 조사 보고를 보면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경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잘못 알았다. 진작 경이 마음을 쓰는 것이 사(私)에 있고 공(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잘못 알았다는 후회가 어찌 오늘에 나왔겠는가. 비단 홍최영 형제의 나쁜 소식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어찌 경의 집에 있어서도 좋은 계기가 되겠는가. 처음 조사하라고 명한 것은 그 토지가 정말 최영의 집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었는데, 경은 차가(車哥)의 부탁에 귀를 기울여 긴요치 않은 일에 간섭하였으니, 평소에 경계한 본의와는 크게 어긋난다.
그리고 곽시복도 비록 시골에 사는 한미한 사람이긴 하지만 듣건대 홍의 장군(紅衣將軍)의 후예라고 하며 또 이른바 이춘로(李春老)도 금년에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내린 집안 사람이라고 하니, 명색이 그래도 사족(士族)이다. 그런데 관청에서 보낸 사람이 곽시복의 어미를 향해 돌입하여 뿌리치고 밀었으니, 이것이 기세를 부린 처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일개 차이원의 송사의 승부가 그렇게도 갈등을 일으키니 이 또한 어찌 까닭이 없이 그렇겠는가. 그때 참판은 설령 알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지난달 초부터 20일경까지 곽시복의 어미가 징을 치고 호소하겠다는 등의 말로 위협하였는데 최영이 어찌 듣지 못하였을 리가 있겠는가. 듣고서 응당 그 처남에게 말을 전달하였을 것이다. 참판이 된 자로서는 그 즉시 송사를 가라앉혔어야 하는데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으니, 그 패려하고 추악한 습성은 손발같이 다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다. 이뿐이 아니다. 금호문(金虎門) 밖 부인의 교자를 사람을 보내 위협하며 끌어내는 것도 부족하여 그의 외로운 아들을 차디찬 옥중에 가두었다. 날씨가 추움으로 인하여 특별히 석방을 명한 후에도 완전히 놓아주지 않았다. 이것은 조정에 임금이 있는 이상 권력이 있는 자도 감히 하지 못하는 일로서 위로는 호소하려는 길을 막고 아래로는 외로운 사람을 박해하였다.
이런 일이 한 가지만 있어도 중벌을 면하기 어려운 것인데 더구나 최영의 처지로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비록 최영이 일일이 지시하여 그렇게 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알면서도 그대로 묵인하였으니 최영의 마음 속에는 ‘겁(㥘)’이란 한 글자는 전연 없다. 그처럼 어리석은 부류가 이와 같이 겁이 없으니, 이것이 곧 내가 차이원이 최영의 집에 끈덕지게 붙어 최영의 집에 청탁한 사실의 전말을 알고자 하여 경에게 넘겨 조사 보고하게 한 이유이다. 그런데 경은 허다한 사관(査官) 중에서도 기어코 필요한 증인이라는 왕한정(王漢禎)을 보내왔으니, 차이원이 비록 토설하고 싶은들 사관이 재갈을 물려놓은 격이라 차이원이 입을 다물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 다물어지고 말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엄한 처분을 내릴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조사하기 시작한 일이라 경의 손으로 결정지으려 하였기 때문에 아직까지 우선 참작하여 다시 조사한 보고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겠다.
곽시복에 대해서는 별로 물어볼 것도 없으니 즉시 놓아보내고, 이른바 차이원은 이번의 공초 외에도 그의 지친이 병신년에 묘자리를 볼 때부터 한번 호되게 다스리려고 하던 자였다. 그러한 자로서 그러한 죄를 저질렀으니 참으로 이른바 용서하기 어렵다. 각별히 엄하게 고문하라. 그가 토지값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최영 형제에게 청탁하였으며 징을 치고 호소하겠다는 말이 나온 후에도 오히려 형조의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갖가지 죄상이 여지없이 탄로되었다. 이 여러 가지 사건이 어느것이나 모두 분명히 캐물어야 할 일인데 경은 일체 은폐하고 이미 환하게 알고 있는 토지의 주객만을 가지고 하나하나 따져 물어서 보고서를 만들었으니, 경의 의사를 알 만하다. 더구나 해당 당상관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또 본 송사의 곡직은 유사에게 넘기라고 하교한 이상 이를 조사하여 보고하는 것은 해당 조의 회답 공문을 쓰면 되는 것인데, 어찌 감히 이처럼 모르는 척하면서 능청맞게 엉뚱한 대답을 하는가. 경은 기질적인 병통을 끝내 각성하고 고치지 않아 구태의연한 전일 그대로의 경이다. 경이야 애석할 것이 없고 애석한 것은 대신이며 경의 집안이다.
이 보고서를 도로 내려보내니 다시 시급히 수정하여 보고하라. 또 혹시라도 저항하거든 차이원을 즉시 진영으로 넘겨 남의 재물을 훔친 것으로 간주하여 먼저 강도의 율문으로 다스리고, 다음은 외척의 세력을 빙자하여 국법을 무시하며 저항한 것을 다스려야 한다. 전교에 의하여 엄히 신문한 결과의 죄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경이 비록 다시 차이원의 낯을 보아주고자 한들 그리할 수 있겠는가. 이 점을 일체 알고 있으라."
하니, 시수가 다시 조사하여 차이원이 뇌물질한 절차를 가지고 치계하였다. 이에 회유하기를,
"자주 조사를 하게 하였으나 본 사건의 곡절을 모르는 것은 아니고 본 송사의 대략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토지는 홍최영의 토지가 아니고 판결도 김노영이 판결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유사가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맡길 것이지, 조정에서 무엇 때문에 수다스럽게 윤음을 내리겠는가. 그러나 한 번 조사하고 두 번 조사하고 계속 밝히기에까지 이른 이유의 하나는 홍최영이 혹시 차이원을 위하여 김노영에게 간접적으로 청탁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혹시 기만하고 엄폐하기에 급급하여 곽시복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조사 보고를 보면 홍최영과 김노영은 이렇다할 범죄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사전에 조심할 줄을 몰랐으니 홍최영도 전연 죄가 없다고 이를 수는 없고 애매한 혐의를 받게 된 것도 전연 소홀히 하였으니, 김노영도 혼매한 죄를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이미 애당초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점이 있는 이상 그대로 중벌을 적용할 수 없다. 전 참판 김노영은 파직시키는 것으로 다시 전지를 받을 것이며, 전 판관 홍최영은 도태시키는 것으로 다시 전지를 받으라. 이른바 차이원에 대해서는 이미 엄한 형벌을 내렸으나 섣달 그믐날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즉시 결단을 내려야겠는데, 속였는가 속이지 않았는가는 막론하고 하찮은 그로 인하여 여러 차례 번거롭게 지시를 내린 것만해도 용서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형조에 뇌물을 바쳤다는 것을 그가 이미 자복하였으니 이와 같은 간사한 소인배는 형장을 쳐 귀양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대사령이 금방 지나갔으니 귀양보내는 대신 속전을 받고 다시 엄한 형장을 가한 후 해조에 압송하여 처결하게 하라.
경은 첫번째 조사 보고할 때 왕한정(王漢禎)을 조사관으로 차임하여 사실을 추적하려고 하였는데 겉으로 보기에도 과연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앞서 내린 유지(有旨)에서 빠짐없이 타이르고 책망하였는데, 그중에는 경으로서 감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본심이 참으로 잘못된 것이 아닌줄 알면서 그대로 억압을 가한다는 것은 자못 사실을 밝히는 본의가 아니며 또한 신하를 예로 부리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앞서 내린 유지 중 한 구절은 다 지워버리게 하였다. 이것은 대신이 안심하고 감영에 있게 하기 위해서다. 경은 이 구절을 지워버렸다 하여 죄를 면하였다고는 생각지 말라. 이후부터는 조정의 명령이 내릴 때면 매사에 성의를 다할 것이며 혹시라도 종전처럼 하여 스스로 죄과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2일 무오
인정전에 나아가 종묘·사직단·영녕전·경모궁에 쓸 향과 축문, 일곱 곳의 제사에 쓸 축문에 친히 서명하여 전각의 계단 아래서 경건히 전송하였다. 이어 종묘에 나아가 참배하고 제기와 제물을 살펴본 다음 망묘루(望廟樓)에서 재계하며 밤을 지냈다.
12월 13일 기미
종묘에 납향 대제를 올렸다.
전교하였다.
"친히 제사지내면서 제10실에 이르러 생각해보니, 명성 왕후(明聖王后)054) 본가의 적장손에게 의당 벼슬을 내리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다. 더구나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055) 의 봉사손이 또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056) 의 봉사손도 되니, 일이 우연치 않다. 마침 오늘을 당하여 등용하는 일은 사심에서가 아니라 사리가 그러한 것이다. 해조로 하여금 이름을 물어 구두 임명으로 등용하게 하라."
이경오(李敬五)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가 장계를 올리기를,
"지금 의주부 윤 서매수(徐邁修)가 이달 9일에 올린 장계의 부본을 보니, 그 내용에 ‘난자도(蘭子島)의 1막(幕) 파수장(把守將) 문현추(文鉉秋)의 보고에 의하면 대국의 여인 1명이 밤중에 얼음판을 건너 중강(中江)의 우리쪽 기슭으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듣기에 매우 놀라워 즉시 훈도(訓導) 김달삼(金達三)을 보내 자세히 물어보니, 그 여인은 본디 산동(山東) 사람으로서 나이는 39세이며 수년 전에 남편을 사별하고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어 모자 세 사람이 각자 걸식하다가 끝내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족을 찾으려고 십리보(十里堡)까지 전전하여 왔다가 갈림길에서 방황하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까지 왔다고 하였다. 가진 물건은 광주리 두 개와 나무로 판 표주박 한 개뿐이며 의복은 너덜너덜 떨어졌는데, 굶주림과 추위에 몹시 시달려 숨이 거의 넘어갈 지경이라 곧 죽을 염려가 없지 않았다. 이에 우선 연청(宴廳)에 머물려두고 옷과 먹을 것을 주어 간호하면서 각별히 지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린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걸식을 하면서 이처럼 얼고 굶주렸는데, 책문(柵門) 밖 무인지경을 얼음판과 눈보라를 무릅쓰고 우리 나라 국경까지 들어왔다는 것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른바 십리보란 것도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고 그가 지나온 길의 거리도 처음부터 따져보지 않았으니, 역관이 내막을 물어보는 데도 소루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비록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는 자도 모두 금지하여 축출하는 것이 원래 수비의 관례인데 지금 그가 들어오는 대로 놓아두었으니, 해당 역관과 순찰하는 장졸을 신의 감영에서 엄중하게 조처하겠습니다. 비록 저 나라 사람과 우리 나라 사람이 고의로 몰래 넘나드는 것과는 다르다 하더라도 변방을 단속하는 도리로 보아 그대로 방치하고 따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해당 부윤 서매수의 죄상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 일은 우리 나라 국경에서 넘어간 것이 아니고 저쪽에서 국경을 통해 건너온 것이긴 하지만 추위에 걸식하던 여인이 어두운 밤에 길을 잃은 데 불과할 것이다. 의주 부윤이 데려다 둔 것은 매우 경솔한 일이 되며 정상을 물은 것은 더욱 어설픈 일이었다. 더구나 그가 입은 옷이 너덜너덜 떨어졌으며 기갈이 들고 추위에 떨어 숨이 거의 넘어갈 염려가 있었다고 하니, 몰래 국경을 넘은 죄를 적용하여 저들 나라로 쫓아보내는 것은 실로 차마 못할 일이고 또한 몹시 의리가 없는 처사이다. 원 장계를 도로 내려보내니, 이는 그야말로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의미에서다.
즉시 의주부 윤으로 하여금 특별히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게 할 대책을 강구하게 하는 동시에 국경을 조금이라도 넘게 되면 그 죄는 사형에 해당된다는 뜻을 역관으로 하여금 거듭 분명히 깨우쳐 조 다음 강 연변의 넘겨 보내기 편리하고 가까운 곳을 택하여 마음대로 인도하되 흔적이 없도록 하게 하라. 수로를 통하여 표류해온 자가 육로로 가려고 하지 않다면 또한 자원에 따라 그대로 보냈으니, 이것 역시 근거할 만한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이런 사항을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즉시 감사와 병사에게 공문으로 통지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14일 경신
차대(次對)가 있었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친히 제사지내는 홀기(笏記)에 이미 임시 처소에 드는 절차가 있으며 이는 예문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데 서 계시게 되니 실로 염려되는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아직 노쇠하지 않았으니 오래도록 위패 앞에 서 있는 것을 어찌 감히 어렵다고 말하겠는가. 옛날 선왕조에서는 매년 친히 제사를 지냈다. 늘그막에 가서야 더러 해마다 친히 지내지 못하였으니, 이는 대개 절차가 번다하기 때문이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일단 강신한 뒤에는 내가 보고자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제향 절차의 번잡한 것을 덜어버리면 좋겠으나 이것 또한 경솔히 의논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12월 15일 신유
경모궁에 참배하였다.
일차유생(日次儒生)에게 보이는 전강(殿講) 시험과 초계 문신(抄啓文臣)에게 보이는 친시(親試)를 거행하였다.
한성부 판윤 구익을 파직하였으니, 홍화문(弘化門) 밖 행차길에 눈을 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치중(李致中)으로 대신하였다.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가 얼마 안 되어 체직하고 정범조(丁範祖)로 대신하였다. 또 다시 체직하고 이홍재(李洪載)로 대신하였다.
상이 경기 관리들의 포폄(褒貶) 계본을 보고 하교하기를,
"도내의 허다한 포폄 제목(褒貶題目)이 대부분 형식을 면치 못하였다. 치민에 너그럽고 위엄 있고 유능하고 서투른 것이 모두 적당치 못하다. 이러고서야 어떻게 용렬한 수령이 목을 움츠리게 하고 현량한 관리가 손을 쓸 수 있게 하겠는가. 학문만 연구한 고리타분한 안목으로는 결국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없다. 경기 감사 김희(金憙)를 서흥 부사(瑞興府使)로 옮겨 제수하라."
하였다.
서정수(徐鼎修)를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12월 17일 계해
민종현(閔鍾顯)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2월 18일 갑자
구근(久勤)의 규정을 수정하여 훈련 도감·금위영·어영청 세 군영의 별무사(別武士)들과 파주(坡州)·양주(楊州)의 장수들은 한 차례의 도정(都政)을 뛰어넘어 등용하고, 그 밖의 경향 각지의 구근자는 두 차례의 도정을 뛰어넘어 등용하게 하였다.
12월 19일 을축
조윤대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20일 병인
직접 도정을 집행하였다. 【 이조 판서 오재순(吳載純), 참판 민종현(閔鍾顯), 참의 조윤대(曺允大),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 이성규(李聖圭)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엄사만(嚴思晩)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홍명호(洪明浩)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구윤옥(具允鈺)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사헌부와 【지평 박길원(朴吉源).】 사간원이 【사간 이운빈(李運彬).】 함께 아뢰기를,
"송익로(宋翼魯)는 한낱 요사하고 불온한 무리로서 처음에는 역적 종친의 앞잡이가 되었다가 끝내는 흉당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그가 남몰래 뇌물질을 하면서 여러 역적에게 빌붙어다닌 죄상은 온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바이며, 사헌부의 계청에 의하여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한 지도 여러 해가 지났거니와 따르겠다는 윤음을 내린 지도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섬으로 귀양보내라는 명령이 갑자기 신문하기도 전에 내리므로 신은 이에 대해 놀라움과 의혹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사간원의 계청이 다시 올라가자 또 마땅히 하교가 있어야 하겠다는 비답을 내린 것도 지금 거의 1개월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결정적인 하명이 없습니다. 국법은 이로 인하여 오래도록 무시되고 여론은 이로 인하여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송익로를 섬으로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빨리 취소하고 앞서 내린 윤음에 의하여 즉시 의금부로 하여금 국청을 설치하여 그 죄상을 밝히고 시원하게 형법을 바루시기를 바랍니다."
하였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과천 현감(果川縣監) 홍대영(洪大榮)을 사판에서 제명할 것과, 금천 현감(衿川縣監) 김동람(金東覽)을 관직에서 도태시킬 것을 명하였으니, 행차길을 수리하는 데 근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교하였다.
"지금 빈자리가 난 것을 통하여 비로소 거창(居昌)이 현감 고을로 강등되고 음관자리로 고쳐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피폐한 고을은 근래에 다스리기 어렵다고 말하니, 일에 경험이 없는 연소한 자를 처음 제수하여서는 결코 소임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 5품인 음직 고을 수령은 본디 자리가 많지 않으니, 거창 현감을 이번 도정부터는 현령으로 칭호를 고치라. 이것은 대개 민읍의 폐단을 위하는 일이니 처음 제수하는 수령을 보낼 수 없다. 호남의 임피(臨陂)와 영남의 의성(義城)의 관례에 따라 차임해 보내라."
12월 21일 정묘
윤대(輪對)가 있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행차가 통과하는 경기 고을 길의 수리 공사를 비변사 낭관을 보내 조사해보니 그 진도가 수원이 제일이고 과천이 다음이었는데, 가을부터 시작하여 지금 전부 끝냈습니다. 그러나 광주의 경우는 가을부터 지금까지 아예 착수도 하지 않았고 여섯 곳이나 되는 교량 역시 내버려 두었으며 쌓인 눈을 하나도 치우지 않았습니다. 일전에 전최(殿最)의 문건이 결재된 후에야 부윤이 비로소 내려가 하룻밤을 자고 즉시 돌아오면서 부의 군교를 머물려두어 6개 면의 민정(民丁)을 동원시켰습니다. 이에 부의 군교들은 조금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곤장을 마구 사용하므로 동원된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날씨가 따뜻할 때에는 무엇 때문에 잠만 자고 돌아보지 않다가 이처럼 얼어붙은 추운 때에 백성들에게 이 고생을 시키는가. 품값은 한푼의 돈이나 한알의 쌀을 막론하고 애당초 얻어볼 수 없다.’고 합니다. 행차길의 수리에 대하여 전후 신칙한 것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럼에도 해당 부에서는 애초부터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었으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민정을 동원하여 부릴 때에도 추위에 손을 부는 괴로움만 있었지, 입에 풀칠할 도움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백성들을 동원시키고 공사를 감독하는 일이 얼마나 긴중한 것인데 자신이 직접 단속할 생각은 하지 않고 군교들에게만 맡깁니까. 그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고 나라의 은혜를 저버린 죄를 그대로 덮어둔 채 논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당 부윤 홍성연(洪聖淵)을 파직하고 그 죄상은 유사로 하여금 엄중하게 처결하게 하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22일 무진
하직하는 병사·수사와 수령을 불러 만나보았다.
이홍재(李洪載)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23일 기사
이홍재를 이조 참의로, 정범조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24일 경오
전교하였다.
"이 해는 경술년이다. 내가 구갑(舊甲)이 거듭 돌아온 것을 보고 어찌 감히 선왕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지 않겠는가. 경향에 은혜를 베풀어 두터운 은전을 베풀던 전일의 순순한 하교를 마치 지금 듣는 것 같다. 지난달 경모궁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루(西樓)를 쳐다보니, 내가 어렸을 적에 사모하던 마음이 더해졌다. 그러나 그때에는 새해가 아직 멀었으므로 잠자코 있기만 하였는데, 때마침 써 붙인 글귀에 ‘전각에는 연이어 오르는 사람이 많다.[靈閣多袞袞之登]’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나의 마음을 먼저 알았을 뿐 아니라, 또한 과연 미리 의논하지 않고서도 의견이 같았다고 이를 만하다. 선왕의 뜻을 계승하는 일을 어찌 해를 넘길 수 있겠는가. 문관 재신 가운데 가의 대부(嘉義大夫)로서 나이 70세 이상이고 이미 참판을 지낸 사람은 특별히 모두 오늘의 정사에서 지중추 부사로 올려 제수하고 그믐날 기영관(耆英館)의 서루에서 숙배하게 하라."
하였는데, 이에 신사운(申思運)·서회수(徐晦修)·정존중(鄭存中)이 모두 참판으로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신대승(申大升)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천행(朴天行)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이상(李頤祥)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호조 판서 정민시가 아뢰기를,
"주교(舟橋)는 지금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창고 또한 지으려 하나 강변 근처에는 설치할 만한 곳이 없고 재력 또한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노량진의 관사를 본사의 관사로 만든다면 편리하겠습니다. 또 석축을 감독하고 목재를 지키는 일도 또한 전담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노량의 별장을 본사에 소속시키고 본사에서 차출하여 감독하게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이 진에 있는 조적미(糶糴米)와 전곡(錢穀)도 종전 그대로 소속시키고 역시 본사에서 관리하게 해야겠습니다. 이 진은 금위영 장교의 구근(久勤) 자리이므로 또한 전부 없앨 수는 없습니다. 총융청에 임진(臨津)·장산(長山) 두 진이 있으니, 그 중 1개 진을 금위영에 이속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그 의견을 따랐다. 총융청이 아뢰기를,
"임진과 장산이 임무는 비록 서로 다른 것이 없지만 임진은 나룻배를 겸하여 관리하니, 노량진의 규례에 의하여 이 진으로 바꾸어 차임하면 실로 편리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임진의 한 자리는 금위영에 옮겨 소속시킨 후 별장 이하 인원들의 매달 급료 및 각종 지출은 종전대로 시행하게 해야겠습니다. 해당 진은 곧 본청의 소속인 우영의 파주 좌국장(坡州左局將)으로서 이미 딸린 군사도 있고 군량도 있으므로 군제를 고치기 어렵고 군량 또한 관리해야 하므로 겸감목관(兼監牧官)의 규례에 의하여 그 관리 성적을 본청에서 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 규례로 정하여 시행하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25일 신미
춘당대에 나아가 장용영의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박종악(朴宗岳)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박종악(朴宗岳)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강릉 현감(江陵縣監) 이집두(李集斗)가 상소하기를,
"고을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으로서 바루고 없앨 수 있는 것은 바로 바다의 폐단과 군사의 폐단이며 조세의 폐단과 인삼의 폐단입니다. 이른바 바다의 폐단이란 것은 어부가 현재 양인(良人)의 신역에 충당되는 것으로서 이는 이중 부담에 속하는 일입니다. 신이 부임한 후 일일이 조사해서 즉시 면제해 주었으며, 그 밖의 폐단도 감사와 상의하여 절목을 정하여 감면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본 고을은 대도호부(大都護府)의 큰 고을로서 경향의 군안에 등록된 군액이 모두 3천 7백 60여 명이나 되는데, 계묘년과 갑진년의 큰 흉년을 겪고 난 후부터 절반 이상이 뿔뿔이 흩어졌고 지금 남아있는 민호는 겨우 2천 5백 70여 호가 될 뿐입니다. 게다가 소위 반호(班戶)가 3분의 1은 되니, 한 사람의 신역을 대신 정하려 하여도 온 면리(面里)가 소란하고, 한 사람이 도망쳤거나 죽어도 이웃과 친척을 침해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를 군적에 등록하고 죽은 사람에게 조세를 물리는데 대해서는 조정의 명령이 비록 엄격하지만 수령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만약 지금 당장 바로잡지 않는다면 결국 빈 고을이 되고 말까 염려됩니다. 이 어찌 민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영서(嶺西) 지방에 화전세와 인삼세가 편중된 것은 가장 산골 백성들의 지탱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근년 이래 자주 흉년을 겪어 흩어진 백성들이 모이지 않고 황폐한 토지가 개간되지 않았으므로 조세의 총액을 옛날대로 복구하기란 전연 기대할 수 없습니다. 현재 징수하는 것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토지의 1부(負)당 바치는 세액은 3전 남짓합니다. 세를 무는 백성들의 부담이 과중하다 하여 장세(場稅)를 창설하여 그 3전 이외의 나머지 수를 감해 준다 하지만 1부당 3전씩 바치는 것은 가감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산협의 가난한 백성들은 경작하는 정전(正田)마저 편안한 마음으로 힘써 경작하지 못하여 끝내는 원 토지의 면적이 해마다 축소되고 산골 마을이 날로 비게 됩니다. 만약 그 세를 좀 가벼이 매겨 흩어진 백성을 소집하지 않는다면 앞날의 폐단은 실로 말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인삼의 폐단에 있어서는, 본 고을은 예로부터 인삼이 생산되는 고장으로 불리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가을 분기와 겨울 분기에 봉진하는 인삼이 55냥쭝이며 기타 각종 명목으로 바치는 인삼도 16냥쭝 남짓합니다. 근래에 이 지방에서 캐는 인삼은 옛날에 비하여 10분의 9는 줄었고 민호의 감축도 전에 비하여 또한 그 절반은 줄었으므로 사세로 보아 감당해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앞서 경인년과 임진년 두 해에 걸쳐 상급관청으로부터 본전 6천 1백 냥을 요청해 얻어서 민간에 나누어 주고 10분의 3의 이자를 취하여 인삼값을 보충하도록 하였지만 그래도 오히려 부족하여 보삼군(補蔘軍)이란 제도를 만들었는데 그 인원수가 7백 56명이었습니다. 한 명당 돈 1냥 5전씩 징수하여 공삼(貢蔘) 1냥쭝마다 47냥을 보태주어 원가 80냥과 아울러 1백 27냥을 만들어 한꺼번에 내주어 공삼 밑천으로 삼게 하였는데, 이로부터 양민의 장정을 찾아내기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오늘날 군사의 폐단이 더욱 극심해진 것은 이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산삼의 폐단을 먼저 없애게 되면 그 밖의 세 가지 폐단은 아마 차차 바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봉진하는 인삼 55냥쭝 내에서 30냥쭝까지는 간성(杆城)에서 인삼을 공급하는 관례에 따라 인삼 1냥쭝의 원가 80냥을 서울의 공물로 만들어 원가 2천 4백 냥을 서울의 관청에 바쳐 서울의 관청에서 봉진하게 한다면 30냥쭝의 인삼에 보태준 값 1천 4백 13냥은 저절로 남을 것입니다. 이 남은 돈을 가지고 화전세와 인삼세를 감해 주며, 토지 1부(負) 당 1전과 보삼군관(補蔘軍官)이 번드는 대가로 내는 돈도 역시 적당히 감해 주고, 여정(餘丁)과 바다의 어부들로서 양인 신역을 이중으로 지는 자를 덜어내어 각 군보(軍保)로서 도망갔거나 죽은 자, 어린아이나 이미 죽은 자에게 신역을 물리는 사례를 일제히 조사하여 대신 보충해 줌으로써 이미 죽은 자에게 물리거나 이웃에 물리는 걱정이 없게 한다면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중대한 일이어서 함부로 변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전례를 적용하여 해결할 한 가지 방책이 있기도 합니다. 도내 환자미의 정량이 언제나 부족되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해마다 수만 섬씩 더 늘릴 것을 장계로 청하는 것이 이미 규례로 되어 있으니, 지금 만약 더 나누어 주는 장리 중 매년 환산한 쌀 1천 40섬에서 5백 20섬을 떼어내 매섬에 3냥씩 돈으로 만들면 1천 5백 60냥이 됩니다. 이것을 본도에서 관리하여 각 고을에 나누어 주었다가 감영 창고에 전부 모아들여 수량을 채워 본 고을에서 관리하는 영공삼상(營貢蔘商)에게 내어 준다면 인삼값을 내주는 수량은 종전과 같이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이전의 화전세와 인삼세는 41결 70부인데, 1부당 1전씩만 감한 것이 합하여 4백 17냥이 되며, 보삼군관의 번드는 대가로 내는 돈이 1천 1백 34냥 남짓하니, 이를 합하여 계산하면 1천 5백 41냥이 자연 견감하는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보삼군의 돈으로 바다 어부의 신역을 면한 대가 및 각종 군보의 도망갔거나 죽은 자에 대한 이중 신역의 결원에 옮겨 보충하고 그 나머지 환산한 쌀 5백 20섬은 원주(原州)에서 인삼값을 더 보충한 관례에 따라 보삼곡(補蔘穀)이라고 이름을 붙여 해마다 이 숫자에 준하여 등록하고 장리에 장리를 내어 우선 8년 동안만 계속한다면 5천 9백 40여 섬은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5천 2백 섬은 그대로 보삼곡의 명칭을 따로 세워놓고 나누어 주었으니, 장리를 늘려 일정한 규례로 산삼값에 보태게 하며, 나머지 곡식 7백 40섬은 원래의 환자로 되돌린 후 더 나누어준 장리 중에서 떼어 쓰는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곡식에는 영원히 손실을 볼 염려가 없게 되고 네 가지 폐단에 대해서도 없앨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빨리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 조처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시종신으로 있다가 지방에 나가 네 가지 조항의 민폐를 자세히 진술하고 아울러 개선할 방법까지 언급하였으니,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민생의 고초가 어느 고을인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관동 1개 도에 이르러서는 토지가 제일 척박하고 백성도 제일 가난하다. 게다가 부역마저 고되며 바다와 육지에서 나는 물건을 모두 받아내고 있다. 이를 생각할 때마다 먹는 것도 달지 않고 잠자리도 편치 못하다. 실로 백성들에게만 이롭다면 사소한 개선은 주저할 것이 없다.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품의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비변사가 해당 도에 공문을 띄워 물어볼 것을 청하자, 그 의견에 따랐다.
12월 26일 임신
사알(司謁) 조정순(趙廷舜)이 이달 8일에 흑산진(黑山鎭)에 이르러 9일에 신기현(申驥顯)과 함께 배를 타고 16일에 육지에 올랐다고 치계하였는데, 그 치계를 승정원으로 내려보냈다. 승지 유당(柳戇)·이조승(李祖承)·이민채(李敏采)·이익운(李益運)·신기(申耆)·유문양(柳文養)이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내려주신 사알 조정순의 장계를 보니, 죄인이 육지로 나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신 등은 서로 돌아보고 깜짝 놀라 걱정과 통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 근래에 바다 섬의 방비가 얼마나 지엄하였는데 이처럼 죄인의 거취를 관섭하는 데가 없고 사알이 역마를 타고 내려갔는데도 하나도 모르고 있었으며 역적의 배가 떠나와도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습니다. 당장에 놀랍고 통분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앞으로 닥쳐올 걱정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감사가 된 자로서는 응당 붙잡아 두고 방계(防啓)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것인데, 지금 곧 알고도 모르는 척하면서 가거나 오거나 그대로 방치하였으니, 이는 과거에 없던 일로서 실로 하나의 변괴입니다. 해당 감사 윤시동(尹蓍東)을 처벌하여 법의 통제를 엄히 하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들이 하는 일은 매우 성실치 못하다. 이미 이달 22일에 그를 찾아다가 자기집에 데려다 두고도 사알은 병이 심하여 제때에 대어와서 복명하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들어왔다. 정원의 서리는 결코 사알과 함께 행동하였을리가 없으니 올라온 지가 필시 오래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까마득하게 오래 전에 육지로 나올 때의 장계를 문제로 삼아 말하면서 어젯밤에 곧바로 장계를 올린 사알이라 하여 유사에게 넘기자고 청하니, 해괴하기 그지없다. 곧바로 장계를 올린 실례가 있고없고는 우선 놓아두고라도 장계를 받아들인지 벌써 4일이 지났는데 갑자기 처벌하라는 요청이 경들의 입에서 나왔으니, 경들의 하는 일이 하나하나 모두 온당치 못하다. 이른바 받아들였다는 것도 또한 관례에 따라 별감(別監)을 불러 입계(入啓)하게 한 것도 아니고 정원의 서리배가 액정서(掖庭署)에 전달하였다고 한다. 이 일을 정원에 있는 경들이 어찌 알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처음에는 무슨 마음으로 알고도 모르는 척하면서 정원 서리에게 밀어맡겼으며, 뒤에는 무슨 심사로 이처럼 문제를 일으켜 이러쿵 저러쿵 하는가. 이면에 있는 사실은 비록 자세히 알수 없으나 외면으로 얼핏 보아서는 경들의 이 서계가 무슨 의도인지 알수 없다. 원계를 되돌려 주니 경들은 자정할 방법을 생각하라."
하였다.
승지 유당·이조승·이민채·이익운·신기가 상소하기를,
"삼가 정원의 서계에 대하여 내린 비답을 보니, 신 등의 죄를 스스로 해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알이 곧바로 올린 장계가 정원에 먼저 도착하였으니 진작 알아서 살펴보지 못하였고, 역적이 육지로 나왔다는 보고를 듣고도 하루가 지났어도 또 즉시 함께 호소하지 못한 채 그만 며칠 뒤에야 대강대강 진술함으로써 스스로 성의없는 죄에 빠졌습니다. 서로 돌아보면서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 없습니다. 연명으로 짤막한 글을 올리고 대궐문을 나갑니다. 빨리 엄한 벌을 내리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원에 술수를 부리는 자가 있어 계사와 상소를 이처럼 함부로 하는 것인가. 귀로 들은 것이면 그 손으로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 감히 자기 입으로 다른 사람을 허물하는가. 조금 전에 내린 비답은 부끄러워할 줄을 알게 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큰소리를 지르지 않을 것으로 앞질러 나가버리는 이유를 삼으면서 마치 동쪽을 묻는데 서쪽을 대답하듯 하니, 이러한 승지는 정원을 욕되게 할 뿐이다. 모두 상소의 말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교리 이청(李晴), 부수찬 이경운(李庚運)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 등이 삼가 정원의 서계에 대해 내린 비답을 보고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으며 계속하여 근심하고 한탄하였습니다. 정원의 서계가 그럭저럭 날짜만 끈 것이 됨을 면치 못하였고 또 말도 솔직하게 하지 못하였으니, 성실치 못한 죄가 실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도는 징벌을 엄하게 하고 법의 통제를 중하게 하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죄인의 왕래가 얼마나 큰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그럼에도 사알을 보잘것없는 미천한 자로서 서슴없이 치계하였고 감사는 1개 도의 막중한 소임을 진 사람으로서 그를 붙잡아둘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국법을 어디다 적용하며 민심이 무엇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이 일에 대해서는 신 등이 이미 성상의 하교를 받아서 감히 거론할 수 없습니다만 이 한 가지 조항은 크게 뒤폐단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보고한 사알이 어찌 중죄를 면할 수 있으며 잘 지키지 못한 감사도 엄한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원에서 전후로 처벌을 청한 것은 당연한 일이니, 다시 재삼 깊이 생각하여 빨리 처분을 내리기를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감사가 어찌 감히 명령을 어기겠는가. 더구나 유지(有旨)가 곧바로 죄인이 있는 곳에 내렸지 않은가. 해당 감사를 엄히 처벌하자고 요청한 것은 승지를 처분함에 있어 그 말이 호되게 나가지 않았다고 인정한 데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사알 또한 과연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심지어 승지들의 해괴한 소행을 도리어 당연한 것이라고 두둔하니, 너희들의 행동 또한 매우 해괴하다."
하였다.
12월 27일 계유
전교하였다.
"경기(京畿)는 다른 도와 다르다. 경중에 있는 현재의 죄수들은 이미 석방하라고 명하였으니, 오늘부터는 명패를 감추어 두고 백성들로 하여금 편히 올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게 하라. 경기의 백성들도 모두 똑같이 보살펴주는 은전을 입어야 하니, 경기 각 고을의 죄수들도 함께 석방하라. 그리고 오는 3일까지 죄인을 다스리는 것을 금지하라. 연해 고을로서 해일의 피해를 입은 여러 곳에 세액의 수량을 나누어 기한을 물려줄 문제에 대해서는 세밑 백성들의 살림으로 어떻게 마련하여 바치겠는가. 특별히 모두 기한을 물려주라."
승지 홍문영(洪文泳)과 유문양(柳文養)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양사(兩司)의 연명 차자가 정원에 이른 것을 보다가 사알과 정원의 관리가 마패(馬牌)를 가지고 나갈 때 극력 쟁집하지 않고 감사에게 그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송구스럽게도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마패를 가지고 갈 때 신 등은 이미 정원에 있던 사람으로서 극력 쟁집하지 못 한데 대한 비난은 응당 받아 죄로 삼아야 하겠지만, 감사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실로 뜻밖의 일입니다. 역적이 육지로 나올때 감사가 된 자로서 왜 제때에 잡아두지 않았습니까. 또 한마디의 방계(防啓)도 없었으니 감사는 실로 죄가 있는 것입니다. 신 등이 비록 자책하는 중에 있습니다만, 어제 대충대충 아뢴 것은 또한 어찌 그만둘 만한 것인데도 그만두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대간들의 공격이 그처럼 자세할 수 없었고 곧바로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것으로 지목을 받았으니, 염치로 볼 때 어찌 감히 태연히 연명으로 상소하고 즉시 나가버릴 수 있겠습니까. 빨리 관직을 삭탈하라고 명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 벼슬을 교체하였다.
차대(次對)가 있었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어제 있었던 일로 말하면 승지를 교체하고 파면시킴으로써 분위기가 쓸쓸하여 걱정되고 개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앞서 내린 전교는 정말 오늘의 신하들로서는 차마 들을 수도 없고 차마 읽을 수도 없는 하교였습니다. 지금 신기현(申驥顯)의 일에 대하여 온 조정의 신료들이 입을 가지고도 말이 없으니 비록 감히 번거롭게 진술할 수는 없으나, 구구한 의견이 있는 이상 어찌 감히 우러러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기현이 올라온 것은 뜻밖의 일입니다. 명령이 정원을 거치지 않았고 오가는 것이 조정과 관계하지 않았으니, 이 어찌 그지없이 해괴한 일이 아닙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패를 이미 정원에서 내어주고도 도리어 감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니, 이것이 몹시 승지를 해괴하게 여긴 이유이다."
하자,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기현이 나온 것을 신은 어제서야 처음 알았습니다. 대개 바다의 섬에 있던 죄인이 배를 타고 육지로 나와 본도의 4, 5백 리를 거쳐 그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하였으니, 감사는 결코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였을 리가 없습니다. 실로 놀랍고 통분한 생각이 있었다면 어찌 화급히 치계하여 그 연유를 알아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끝내 한마디의 규명도 없어 조정 신료들로 하여금 막연히 이런 일이 있음을 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제 전교가 있은 후에야 비로소 서로 돌아보면서 놀라고 한탄하였습니다. 나라의 체면과 신하의 본분으로 비추어 볼때 한심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런 것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앞으로의 우려는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습니다. 전라 감사 윤시동(尹蓍東)에 대해서는 관직 삭탈의 율문을 적용하고 지방관 역시 함께 논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지방관이 만약 혹시라도 감영에 보고하였는데도 감사가 못 들은 체하였다면 이는 지방관의 죄가 아닙니다. 그 보고의 여부는 새 감사가 부임한 후 그로 하여금 조사하게 한 다음에 다시 논죄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비록 경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하교하려 하였다. 이번 전라 감사의 일은 크게 잘못되었음을 면할 수 없다. 역말을 타고 올라오라는 유지가 신기현이 있는 곳으로 곧바로 내려갔으니 처음에 몰랐다는 것은 혹시 그럴 법하나, 바다를 건너온 뒤에는 필시 고을의 보고가 있고 진영의 통보가 있었을 것이다. 경이 아뢴 말 가운데 감사가 그 까닭을 물어본다는 것은 명령을 어기는 데 가까운 일로서 비록 감사로서 감히 할 일은 아니지만, 데려온 실태를 하나하나 들어 보고하지 않은 것은 나라의 체면으로나 뒷날의 폐단으로 보아 그 관계되는 것이 작지 않다. 지방관이 감영에 보고하였는가의 여부는 새 감사를 시켜 사실을 조사하게 할 필요가 없고, 해당 감사를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 심문하여 죄를 주게 하라."
하였다.
훈련 대장 서유대(徐有大)가 아뢰기를,
"이번에 뽑아올린 평안도의 무사 김명흡(金鳴潝) 등 5인과 황해도의 무사 윤도헌(尹道憲) 등 8인에 대하여 신이 장용영의 병방(兵房) 유효원(柳孝源)과 함께 취재 시험을 보였습니다. 서북지방의 3개 도는 세상에서 무예를 숭상하는 지대라고 불리어오는데 이번에 뽑아올린 것은 그 숫자도 매우 적거니와 신체적으로 보아도 원래 건장한 사나이의 모양이 없으며, 활을 쏘는 기예도 능하다는 사람이 1백여 보를 넘지 못합니다. 또 그들이 서울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보아 처음부터 감영과 고을에서 성심으로 권장하지 않고 강제로 인원수나 채워 올려보냈다는 것을 알 만합니다. 실리를 힘쓰는 정사로 볼 때 또한 쓸데없이 그대로 머물러둘 수 없으므로 1백여 보를 넘지 못한 무사 장인성(張仁成) 등 11명은 도로 내려보내야겠습니다.
근래에 서북 지방에도 문학을 숭상하는 폐단이 달로 심하고 날로 성하여 활쏘기를 장려하는 일들은 아예 전폐한 것 같습니다. 감영과 고을에서 그때그때 해결하여 되는 대로 뽑아올리는 것은 실로 여기에 기인된 것입니다. 이번은 처음인 관계로 처벌을 청하지는 않겠으나 거듭 명령하는 뜻으로 기한을 물려 정하고 전교에 의하여 특별히 훈련을 더하게 하는 한편, 무예를 권장하는 정사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감영과 고을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다방면으로 강구하여 일신하는 실효가 있게 하소서. 이렇게 조치한 뒤에도 무예를 권장하는 정사가 들려오지 않거나 뽑아올린 사람이 또 혹시라도 용렬하다면 해당 수령은 엄중하게 치죄하고 감사와 병사도 또한 논죄할 뜻으로 서쪽지방 두 도의 감사에게 분부하소서.
북도가 서쪽의 두 도보다 낫다는 것은 꼭 그렇다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북평사(北評事)의 직책이 비록 교양관(敎養官)이라고는 하지만, 길주(吉州) 이북 지방의 선비와 무사의 권장을 모두 주관하고 있는데, 전후 부임한 평사가 전연 무사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북관의 무사는 그만 사기가 저하되고 말았습니다. 이후부터는 평사가 유념하여 무예를 권장하고 국법을 잘 밝혀 거행하게 하되 앞으로 뽑아올리는 것이 혹시라도 충실치 못하면 감사와 병사, 그리고 수령을 모두 서쪽지방 두 도의 관례대로 처벌을 청할 것이라는 것을 일체 북도의 감사에게 알리는 것이 사리에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일찍이 서북도의 감사에 지낸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에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서북 지방은 활쏘기와 말타기를 숭상하는 고장이었는데 풍습이 요즘은 옛날 같지 않아서 유림(儒林)이라 자칭하면서 향교나 서원에 출입하면 향리에서는 사족의 자손으로 인정하여 군역을 면제받지만, 무사란 명칭으로 활이나 쏘고 말이나 달리면 향리에서 천시하고 또 유생이나 향임의 자리를 얻지 못합니다. 장관이 된 자도 따라서 이쪽을 두둔하고 저쪽을 억눌러 접대가 현격히 다릅니다. 설사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하더라도 여러 해 동안 고생하다가 겨우 수문장·부장·변장이나 지내고 파직되거나 산관이 되어 그만두는 것이 고작입니다. 조정으로부터 비록 뽑아올리라는 명령이 있으나 평소에 무예를 연마하지 않았으니 자연 요구에 응하기 어렵습니다. 두 도의 감사와 수령으로 하여금 오랜 세월을 두고 격려와 권장에 전념하도록 특별히 신칙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부러워하게 만든 다음에야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합격하지 못한 자는 도로 내려 보내되 다시 이 뜻으로 특별히 신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이병모(李秉模)는 아뢰기를,
"서북도의 무예가 점점 옛날과 같지 못한 것은 실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관북 지방에는 거의 다 무관 수령인데도 고을 일을 보는 여가에 무술을 익히는 사람이 전연 없습니다. 군복을 입은 장관이 이와 같으니 고을 안의 무사들에게 무엇을 책망하겠습니까. 격려하는 방도는 오직 감사와 병사 및 수령에게 있습니다. 만약 기꺼이 참가하게 하는 길을 열지 않고 오직 궁시(弓矢)나 갖추고 연습이나 부지런히 하여 뽑아올리라는 명령에 응하게 한다면 누가 감동하여 떨치고 일어나겠습니까. 반드시 상을 후하게 하고 특별히 장려하여 재주 있는 사람은 그 소망을 얻게 하고 재주 없는 사람은 더 부지런히 노력하게 해야만 비로소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 뜻으로 엄히 신칙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좌의정 채제공은 아뢰기를,
"서북 지방은 무예를 숭상하던 곳인데 지금 풍습이 글 읽기를 귀하게 여기고 무예를 천하게 여기는 것은 작은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이번에 뽑아올린 것으로 말하더라도 신체적으로나 기능면으로 보아 모두 보통 사람보다 빼어나지 못하였으니, 선발에서 빠진 자는 더욱 보잘것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감사와 병사, 그리고 수령들이 무여를 권장하는 일이 없었고 조정에서는 격려하는 정사가 적었으며 선비의 길로 나가는 것이 또 향리에서 존경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만약 무사를 뽑아올리라는 명령이 있을 때에도 뽑아 올린 것이 또 이번과 같다면 해당 감사와 병사, 그리고 해당 수령은 중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으로 신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특별히 뽑아올리라고 명령한 뒤에 두 도에서 이와 같이 거행한 것은 당시의 감사가 잘 권장하지 못한 이유만이 아니겠지만 어찌 활쏘는 기술이 격식에도 맞지 않는 미천한 지방 군교들을 되는 대로 미봉하여 올려보낸 것이 아니겠는가. 무예를 배양하는 것은 감사와 병사가 점차 잘못된 풍습을 버리고 연마하는 실효를 거두는 데 있다. 이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운 일인가. 이런 거조로 능히 애써 수행하지 못한 점을 신칙한다면 몇 해 안가서 반드시 괄목할 만한 실효를 거둘 것이다.
앞으로도 또 다시 전일의 폐습을 가지고 보고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먼저 신칙하지 못한 감사부터 보고되는 족족 엄히 처단하는 것을 단연코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비록 큰 개선이 있기 전이라고 하지만 두 도의 넓은 지역으로 볼 때 어찌 이 천거에 응할 만한 자가 한 사람도 없겠는가. 3개월로 기한을 물려서 다시 뽑아 올리게 하라. 만약 신체적으러나 신분상으로나 기예로 보아 모두 합당하다면 변방을 방어하는 병사·수사 같은 군직이 어찌 그들에게만 미치지 않겠는가. 이런 뜻까지 포함하여 글을 만들어 공문으로 알리라."
하였다.
장령 유하원(柳河源)이 아뢰기를,
"당론이 나라를 망친 것은 옛날부터 그러하였습니다. 비록 재상이나 삼사의 관리라 하더라도 만약 당파에 관계되면 그 죄는 죽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군복을 입은 무인이 굳이 당파의 폐습을 본받는다면 세상의 근심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선대왕께서 일찍이 선전관 추천을 주관하는 사람이 당색을 개입시켜 벼슬길을 열어주기도 하고 막기도 하는 것에 진노하여 정문에 나아가서 특명으로 조리를 돌려 징계하고 두려워하게 하였으니, 대성인이 깊이 걱정하고 먼 장래를 염려하는 것이 실로 이와 같았습니다. 근일에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임흘(任屹)과 홍인묵(洪仁默) 같은 무리가 추천을 주관하며 사심을 씀으로부터 공론이 분개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이번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하였으니 그 취사 선택에 전적으로 당색을 개입시켰습니다. 그들은 공청의 모임에서까지 내놓고 말하기를 ‘아무 당파에 속한 사람은 이 추천 대상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들의 방자함은 장차하지 못하는 짓이 없을 것입니다.
그중에도 그처럼 교활하고 나쁠 수 없는 일이 있었으니, 영남 사람으로서 문벌로 보아 당연히 추천 대상에 들어야 할 자가 한결같이 저지를 당하였고 끝내 영남에 살면서도 영남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을 구차히 숫자에 채워넣어 전하를 기만하였습니다. 그 심사의 소재는 뱃속을 들여다보듯 훤합니다. 이것을 엄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나라의 기강을 진작시키겠습니까. 임흘과 홍인묵 및 금년에 추천을 주관한 행수(行首) 선전관 서유화(徐有和)와 부행수(副行首) 오재광(吳載光)을 모두 사판에서 제거하는 벌을 적용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원래 추천한 자를 오늘 안으로 고쳐 추천하게 하라. 사실이 대간의 말과 같다면 무엇이 이보다 더 고약한 일이 있겠는가. 진실로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당색(黨色)’이란 두 글자를 공석에서 발언하는 것은 문신도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인데 더구나 무신의 경우이며, 또 더구나 선전관을 추천하는 경우이겠는가. 선조께서 게시한 수교(受敎)가 또 얼마나 엄격하며 자세하였던가. 예전에 이 관청의 추천 문제로 처분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이런 말이 다시 이 관청에서 나와 대간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미 이런 말을 들은 이상 간단히 처리할 수 없다. 즉시 병조 판서를 시켜 용호영(龍虎營)에서 모임을 열고 연전에 범행을 저지른 여러 사람과 이번에 입을 놀린 여러 사람을 모조리 잡아다가 문초하여 사실을 조사할 것이며, 아울러 곤장치며 심문하여 진상을 알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유하원이 또 아뢰기를,
"죄인을 징벌하고 법의 통제를 엄히 하는 것은 곧 신하로서 의당 성의를 다하고 본분을 다해야 하는 것이며, 명령을 반포하고 관문과 나루를 지키는 것 또한 나라의 법에서 소중한 것입니다. 본 사건에 이르러서는 이미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받았으므로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일이긴 하나, 신이 연석에 들어가기 전에는 생각건대 명령이 정원을 거치지 않고 액정서의 미천한 사알에게만 내렸을 것으로 짐작했다가 연석에 참가한 후에야 비로소 하교를 듣고 보니 애당초 마패를 내준 것은 그날 승지의 손을 거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삼사가 알지 못하고 외정(外廷)이 듣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감사와 수령은 이미 엄한 처분을 받은 이상 성실치 못한 승지가 어떻게 유독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해당 승지로부터 현장 보고를 받은 후 삭직의 처벌을 적용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때의 엄한 하교로 말하면 비록 이보다 더 큰 일이라도 오히려 다시 논란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마패를 내주는 것과 같은 작은 일이겠는가. 그러나 애당초 자기 손으로 내주고 지금 자기 입으로 처벌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처럼 염치도 없고 무엄한 무리는 벼슬을 삭탈하는 것도 오히려 가볍다. 네가 죄주자고 청한 것은 경솔히 먼저 거행한 데 있고 내가 매우 놀라워하는 것은 사실이 앞뒤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승지를 처벌하자는 요청에 어찌 주저하겠는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서회수(徐晦修)를 공조 판서로, 정민시(鄭民始)를 전라도 관찰사로, 서호수(徐浩修)를 호조 판서로, 홍양호(洪良浩)를 예문관 제학으로, 홍명호(洪明浩)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오재순(吳載純)을 규장각 제학으로, 김이정(金履正)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병조가 선전관을 조사 심문한 것으로 아뢰니, 선전관 임흘(任屹)·홍인묵(洪仁默)·서유화(徐有和)·오재광(吳載光)·이경희(李敬熙)를 모두 벼슬을 빼앗고 떼 버릴 것을 명하였다.
12월 28일 갑술
인정전에 나아가 기곡 대제(祈穀大祭)의 서계(誓戒)를 행하였다.
전교하였다.
"어제 있었던 대간의 서계 중 선전관의 추천 문제에 대하여 무신들이 당론을 하는 폐단을 극론한 말을 듣고 매우 가상하게 여겨 말하자마자 즉시 따랐던 것인데, 오늘 비로소 조목별로 베껴 온 것을 보니 ‘영남에 살면서 영남 사람이 아니다.’는 말이 있기에, 마음 속으로 이름은 비록 영남 사람이나 토박이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원 추천서를 가져다 보니 거주지가 영남으로 적혀있다. 그렇다면 영남 사람이 아니라고 한 말은 과연 무슨 말인가. 이것이 당색을 지목하여 말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 무인들의 옛 버릇을 엄금하는 때에 법을 맡은 문신이 도리어 무부의 그릇된 버릇을 본받고 있으니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 장령 유하원(柳河源)을 파직하라."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조실록32권, 정조 15년 1791년 2월 (5) | 2025.08.04 |
|---|---|
| 정조실록32권, 정조 15년 1791년 1월 (6) | 2025.08.04 |
| 정조실록31권, 정조 14년 1790년 11월 (8) | 2025.08.03 |
| 정조실록31권, 정조 14년 1790년 10월 (7) | 2025.08.03 |
| 정조실록31권, 정조 14년 1790년 9월 (6) | 2025.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