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병자
팔도와 양도(兩都)001) 에 윤음을 내렸다.
"내가 하늘과 조종(祖宗)의 보살핌과 도움을 받아 지난해 경술년에 세자가 태어났고 그 해 가을에는 풍년이 들었다. 공자가 탄생한 갑자에 세자가 태어나는 큰 상서를 얻게 되어, 내가 온 나라와 더불어 그 경사를 함께 누리면서 백성을 사랑하는 일념은 언제나 은혜를 널리 베푸는 데 있고 거듭 풍년이 들었으면 하는 바람은 금년에 더욱 간절하다.
지금 해가 새로 바뀌어 낮이 점점 길어지고 양기가 돌아와 만물이 화기를 머금고 있는 이때에 만백성을 위해 자나깨나 말없이 축원하는 것은 농사가 잘되라는 것이다.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 새해가 되면 곧 농사를 장려하는 윤음을 내려 삼가 열성조께서 근본을 중시하고 농사에 힘쓰셨던 거룩한 법도를 계승해 왔지만, 내가 이 해 이 달에는 더욱더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고 백성도 나라의 근본이며 백성이 편안해야만 나라가 편안한 법이다. 이것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이치로서 혼연일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나라의 영원한 운명을 비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나는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자 권농(勸農)이란 두 글자를 현재 많은 일 가운데 첫째가는 급선무로 삼고 있다.
계절에 맞추어 들에 나가 밭갈이를 하는 것도 오늘부터 시작되고 만백성과 함께 만세토록 태평한 복을 누리는 것도 오늘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내 어찌 이 해 이 일에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늘의 절기를 따르고 땅의 이로움을 이용하며 사람의 힘을 더하여 깊이 갈고 김을 잘 매는 것은 농부의 일이고, 농사 철을 뺏지 말고 생업을 흔들지 말며 수시로 살펴서 도와주는 것은 지방관의 직분이고, 볕이 나야 할 때는 볕이 나고 비가 와야 할 때는 비가 와 낮은 데는 습하지 않고 높은 데는 메마르지 않게 되는 것은 나 한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대체로 농사는 장려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감독과 통솔을 게을리하는가 부지런히 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시경》에 ‘권농관이 와서 기뻐하였다.[田畯至喜]’ 하였고, 《서경》에 ‘구가로 권장하였다.[勸之以九歌]’ 하였으니, 지금도 지방관의 반열에 있는 자가 권농관의 책임을 다하여 육부 삼사(六府三事)002) 가 제대로 다스려진다면 해마다 풍년이 들지 않을 때가 없을 것이다. 거듭 풍년이 드는 상서가 어찌 주(周)나라 때에만 있는 미담이 될 것인가. 나 한 사람으로서는 지금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늘을 대하면서 삼가고 조심하여 장차 금년 첫번째 신일(辛日)에 엄숙하게 새벽 기도를 드려 아름다운 상서가 우리를 평안하게 하기를 기대하려 한다. 너희 지방관들은 힘쓰고 힘쓰길 바란다. 지방관의 부지런함과 태만함을 평가하여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것은 또 묘당의 여러 신하에게 맡길 것이다. 아, 안에 있는 공경(公卿)과 밖에 있는 지방관들은 정월 초하루에 내리는 나의 하유를 똑똑히 들어보고 각기 진심으로 받들고 도와서 하늘과 조종이 돌보고 도와주시는 새로운 영광과 큰 운수에 보답하도록 하라."
송제로(宋濟魯) 등 나이 70살 이상으로서 부부가 해로한 자 13인에게 쌀과 고기와 비단을 내렸다. 제로는 나이가 가장 많아서 특별히 그 직급을 올려주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게 하였고, 경외의 노인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었다. 【오부(五部)는 조관(朝官)이 13인에 사서(士庶)가 1인이고, 경기도는 조관이 4인에 사서가 47인이고, 원춘도(原春道)는 사서가 93인이고, 충청도는 사서가 80인에 부녀자가 7인이고, 황해도는 조관이 1인에 사서가 61인, 평안도는 조관이 4인에 사서가 2백 10인이고, 경상도는 조관이 2인에 사서가 1백 65인이고 부녀자가 7인이며, 전라도는 조관이 2인에 사서가 91인이고, 강화부(江華府)는 조관이 1인에 사서가 3인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94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윤리(倫理)
1월 2일 정축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함경도 관찰사 이문원(李文源)이 사노비(寺奴婢)의 폐단을 알아보라는 명에 따라 장계하기를,
"안변(安邊)·함흥(咸興)·홍원(洪原)·북청(北靑)·이성(利城) 등 다섯 고을의 노비는 허위로 등록된 경우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신공(身貢)을 거두는 것은 이전의 총수량에 준하기 때문에 이웃이나 친족에게 물리는 억울한 현상이 있습니다. 신이 지금 다섯 고을로 하여금 나이가 젊으면서 누락된 자를 조사하여 찾아내 신공의 액수를 충당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문왕(文王)의 정치는 네 부류의 백성003) 을 우선 돌보아준다 하였는데, 네 부류의 백성은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저 노비들은 도망쳐 행방 불명이거나 나이가 몇 십 몇 백 살이 되었는지 모르는 것이라 죽은 지 오래 되었을 것인데 이런 백골(白骨)에게 세금 징수를 독촉하는 것은 화기를 해치는 것 중에서도 큰 것이다."
하고, 감사에게 명하여 다섯 고을의 선두안(宣頭案)을 거두어 모아 마땅히 삭제해야 할 자는 삭제하되 도의 총수량에 대비하는 규정을 거듭 밝히고 고을의 기본 총수량에는 구애받지 말도록 하였다.
강릉 현감(江陵縣監)을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로, 곡산 현감(谷山縣監)을 도호부사(都護府使)로 복호하였다. 이 두 고을이 강호(降號)된 지 이미 10년의 기한이 찼기 때문이었다.
원춘도(原春道)를 강원도로 복호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이시수(李時秀)가 도내의 기유년의 유민들의 실상을 치계하였다. 【떠도는 자는 9천 3백 45구이고 돌아와 사는 자는 5천 22구인데, 그 신포(身布) 2동(同) 13필, 돈 26냥, 쌀 13석, 환곡 1천 6백 섬을 모두 탕감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94면
【분류】호구-이동(移動) / 재정(財政) / 구휼(救恤)
구익(具㢞)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신응현(申應顯)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1월 3일 무인
차대(次對)를 하였다.
주교사 당상(舟橋司堂上)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주교(舟橋)를 놓는 데 필요한 경강(京江)의 큰 배로서 현재 있는 것이 80척이고 격군(格軍)이 거의 1천 명에 가깝습니다. 이제 이들을 묶어 군제(軍制)를 만들되 매 척마다 각각 영장(領將) 1인을 두고, 배 3척을 1조로 삼아 조마다 조장 1인을 두어 영장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며, 중앙에는 또 도령(都領) 1인을 두되 협총(協摠)이라고 부르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감독하고 다스리는 일을 1명의 협총에게 다 맡길 수는 없으니, 도성에 머무는 장수들 가운데서 적당한 자를 뽑아 주사 대장(舟師大將)이란 칭호를 주어 병조에서 궁궐을 지키는 대장의 예에 따라 삼망(三望)을 갖추어 낙점을 받아 그로 하여금 사전에 나가 전적으로 관할하고 집행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 문제를 여러 장수에게 물었다. 금위 중군(禁衛中軍) 이유경(李儒敬)이 아뢰기를,
"주사(舟師)의 편제에는 호위하는 배와 격군이 없을 수 없으며, 이들을 조직해 세운 다음에야 지휘를 할 수 있습니다. 매 3척을 1조로 만들고 5개 조를 1개 영(領)으로 만들며 그중 1척을 협총(協摠)의 배로 만들되, 앞의 5개 조는 앞의 영장(領將)에게 소속시키고 뒤의 5개 조는 뒤의 영장에게 소속시키며, 나머지 배들은 모두 협총에게 소속시킴으로써 나머지 군사는 예비부대에 편입되는 원칙을 모방하는 동시에 앞뒤의 영장은 다 협총의 통제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일후의 좌우 협선(挾船)도 이에 따라 대오를 짜야 합니다.
협총과 영장은 각기 신호기를 가지며 배마다 각기 2개의 깃발을 꽂되, 한 깃발에는 조별 순서를 쓰고, 한 깃발에는 새매의 형상을 그려야 합니다. 또 풍향을 알아 볼 깃발 두 폭을 배 꼬리에 꽂고, 중앙의 큰 배에는 황색과 흑색의 큰 깃발 두 폭을 달면 실로 격식에 맞을 것입니다. 협총과 영장은 모두 수군(水軍) 장수의 옛 칭호이므로 근거 없는 일이 되는 것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홍명호(洪明浩)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가, 곧 바로 체직하였다.
1월 4일 기묘
종묘와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다. 봄을 맞이하여 참배한 것이다.
조종현(趙宗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지묵(金持默)을 주사 대장(舟師大將)으로 삼았다.
1월 5일 경진
사직단(社稷壇)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사복시의 짐 싣는 말들이 대부분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싣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여 경술년 봄부터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할 때는 세를 내어 쓰는 말이 매번 50필이나 되었다. 이때에 와서 전교하기를,
"본시(本寺)의 말이 유명 무실하게 된 것은 다 한 사람의 제거(提擧)가 잘 신칙하지 못한 탓이다. 말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말이 있으면서도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싣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니, 사복시가 생긴 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지난 봄 이후 낭관이 된 자들이 조금만 마정(馬政)에 마음을 두었던들 어찌 세를 내서 쓰게 되었겠는가. 작년 이후의 낭관들을 먼저 파직한 뒤에 잡아오라."
하니, 도제조 서명선(徐命善)이 차자를 올려 스스로 인퇴(引退)하였다. 비답을 내리기를,
"대신의 책임은 큰 문제에서 직분을 다하는 데에 있다. 사적인 것으로 공적인 것을 덮어버리지 말며 나라를 앞세우고 가정을 뒤로 해야 하니, 하찮은 말이 비리비리한 것이야 작은 일 가운데서도 작은 일이다."
하였다.
1월 6일 신사
사직단에서 풍년을 기원하였다.
상이 거둥 때 작문(作門)이 시끄러웠는데 각신(閣臣)과 승지들이 서로 앞다투어 말을 타려했기 때문이었다. 선상 대장(先廂大將) 서유대(徐有大)가 그것을 적발하여 죄주기를 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이 중일청(中日廳)에 나가 잡아오게 하여 크게 꾸짖었다. 이어 연신(筵臣)들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승지와 각신들이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혹은 말을 타지 않고 도보로 가는 것이 옳다 하고, 혹은 종을 1명도 데려가지 않는 것이 옳다 한다고 하니, 이렇게 하고서야 어찌 체모를 갖출 수가 있겠는가. 오늘 신칙한 것은 단지 따라다니는 사람을 줄이고 떠들어대는 것을 경계한 것일 뿐이다. 경·사대부가 관리의 옷차림을 하고 거리를 걷는 것이 어찌 조정을 욕되게 하고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1월 7일 임오
이윤경(李潤慶)을 삼도 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삼았다. 처음에 비변사에서 이명운(李明運)을 통제사로 추천했으나 상이 명운을 너무 늙었다고 여겨 체직하고 그 후임을 물색하였는데, 비록 아장(亞將)을 지내지 않은 사람이라도 구애하지 말고 의망하게 하였다. 이에 윤경이 북병사(北兵使)에서 옮겨 제수된 것이다.
영중추부사 정존겸(鄭存謙)이 치사(致仕)하자 봉조하(奉朝賀)에 임명하였는데, 존겸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비답을 내리기를,
"즉위한 해에 정승으로 임명한 것은 어찌 아무 뜻 없이 그런 것이었겠는가. 온 세상이 지조가 없어 예악 형정(禮樂刑政)이 모두 권력을 잡은 흉악한 무리의 손에 들어갔을 때 경은 떨쳐 일어나 용단을 내려 거취가 구차스럽지 않았다. 사람들은 간혹 경에 대해 자신만 보전하려 한다고 탓을 잡지만 중요한 기밀은 귀신도 엿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을미년004) 겨울 빈객을 사직하는 경의 상소에 ‘필부로서 죄를 자초한 것은 이미 지난 일이라 어쩔 도리가 없으나 명철한 사람은 기미를 아니 앞날을 경계할 수 있습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하늘에 닿을 듯한 파도는 옆의 빈 배에까지 미치고 활에 상처 입은 새는 굽은 나무만 보아도 놀라는 법입니다.’ 하였으니, 이 몇 구절은 곧 경이 속담을 인용한 것으로서 내가 마음속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이 이제 늙고 병들었기에 특별히 청한 바를 허락한다. 아울러 승지를 보내 효유한 것을 전하게 한다."
하였다. 교서를 내리던 날 그의 아들 정치수(鄭致綏)를 적절히 등용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연신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정 영부사의 소에 대한 비답에 을미·병신년간의 일을 새삼스럽게 제기한 말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내가 한 가지 효유할 것이 있다. 과거의 흉악한 무리는 이미 모두 죽여 없앴으니, 그들의 인척과 친족으로서 죄가 없는 자는 자연 장애될 것이 없는 것이 당연하고,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정관(政官)의 도리로서도 간격을 두지 말고 아무 문제 없는 사람과 함께 의망하여 보통 사람 속에 끼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 홍병찬(洪秉纘)은 이 틈을 타고 단독으로 정사를 주무르면서 반드시 이런 자만을 찾아서는 삼망(三望)에 함께 주의하여 은혜를 팔고 명예를 사는 밑천으로 삼으니 무엄한 짓이며, 저 주의를 받은 자들도 영광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벼슬길을 터주는 본 뜻이겠는가. 현재의 방도로서는 무리끼리 모아 나란히 배열하는 습성을 일체 철저하게 혁파하여 세신(世臣)을 위하고 세도(世道)를 위하는 지극한 뜻에 부응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뜻을 조정의 신하들이 알도록 하라."
하고, 이어 병찬을 전망(銓望)에서 빼버리게 하였다.
장령 박유환(朴猷煥)을 체직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환이 상소하기를,
"지난번에 역적이 섬에서 나올 때 연도의 수령이 혹 그를 영접하고 전송하며 음식을 대접하여 받들기를 마치 특별한 사신을 대접하듯이 하였습니다. 고을의 수령이 된 몸으로써 비록 감히 멋대로 잡아두지는 못하더라도 실로 함께 분개해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감사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 보고하게 하여 엄한 처벌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호남 지방 연도의 수령들에 대한 일은 네 말이 너무도 무엄하고 네 뜻이 너무도 부당하다. 임금의 명을 거역하는 문제는 서울에 있는 유사(有司)에게도 요구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감사에게 요구하겠으며 더구나 보잘것없는 고을 수령들에게 요구하겠는가. 진정 네 상소대로 연도의 수령들이 한결같이 특별한 사신의 관례로 접대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조정의 명을 따른 것에 지나지 않으니, 수령들이 과연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죄인이 오고 간 상황에 대해 애초에 한 마디도 알리지 않고 반드시 간섭하지 않으려 한 감사가 도리어 옹졸하다 하겠다. 비록 당초에 보낼 때 감영을 경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크고 작은 도형(徒刑)과 유형(流刑) 죄인을 유배지에 곧바로 보내는 것은 본디 통행하는 규례이다. 이 때문에 유배지에 도착했다는 장계에 으레 감영을 경과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례에 따라 귀양보내는 것에 대해 앞으로는 감사가 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재작년 그를 떠나 보낼 때는 잡아 죽이는 일이 우선 급하여 금오랑(金吾郞)이 잡아서 은진(恩津) 이남에 이른 뒤에 복명하도록 했으니, 여산(礪山)에다 인계할 때 필시 감영에 보고한 문건이 있었을 것인데 감사는 일부러 모른 체하였다. 신하로서 임금을 섬길 때는 충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 감사의 일은 충직한가, 충직하지 못한가. 네가 만약 입을 놀려 말하고 싶다면 그 말은 마땅히 도백에게 먼저 미쳐야 할 것인데, 도백에 대해서는 감히 털끝 하나도 건들지 못하고 아무런 관계도 없고 의미도 없는 연도의 수령들에 대해 공연히 죄를 주라고 청하였다. 네가 과연 감사를 두둔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기왕 말을 한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이처럼 기준이 없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대간의 수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윤시동(尹蓍東)에게도 꼭 좋은 소식은 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유환이 피혐하여 아뢰기를,
"윤시동은 이미 대신들이 경연에서 아뢰어 죄를 받았고 또 신은 그와 사촌 처남 매부 사이로 마땅히 피혐해야 할 형편입니다. 연도의 수령들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그 사안이 매우 중대하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특별한 사신을 영접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놀랍고 통분스럽기 그지없어 결국 열거하여 논박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관리의 법도가 어찌 타당하지 못한 것이 있겠는가. 그 스스로 변명한 것이란 억지로 꾸며댄 것에 불과하다."
하고, 특별히 체직하였다. 역적이란 곧 신기현(申驥顯)이다.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성균관에서 인일제(人日製)를 실시하였다.
현륭원에 행차할 때 종묘와 경모궁에 사유를 고하는 일과 여러 도의 감사들이 경계에 나와 대기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을 규례로 만들었다. 대체로 밖에서 숙박을 하게 되는 행차는 이틀 전에 종묘와 경모궁에 사유를 고하고 여러 감사들이 나와서 대기하는 것이 과거의 규례였다.
이조 판서 오재순(吳載純)이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체직을 요청하자, 허락하고 홍양호(洪良浩)로 대신하였다.
1월 8일 계미
대사성 정범조(丁範祖)에게 서용하지 않는 법을 가하였다. 인일제를 보일 때 생원과 진사들의 출석 일수가 1백 일이 차지 않았고 성균관의 당상관도 참석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절제(節製)005) 는 성대한 행사이기 때문에 성균관 당상관이 음식을 차려서 왕명을 받고 온 신하를 대접하며, 각기 동서로 앉아 선비들을 시험하는 것이 성균관의 옛 규례이다. 그런데 어제의 과장에는 성균관의 당상관이 없었으니, 수치를 끼친 것이 그지없다. 무슨 면목으로 가르치는 자리에 앉아 사유(師儒)가 될 수 있겠는가. 특별히 간택한 뜻을 저버리고 직무를 망쳤다."
하고, 드디어 이런 명이 있었다. 승지로서 시원(試院)에 참여한 자를 파직하고, 본관(本館)의 낭관 이승운(李升運)을 잡아와 처리하게 하였다. 승운이 옥으로 가는 시간이 약간 지체되자 특명으로 엄하게 가두어 참람하여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죄를 징계하였다.
이홍제(李洪載)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윤득규(尹得逵)를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월 9일 갑신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군병(軍兵)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대간 유하원(柳河源)을 양사(兩司)의 의망에서 깎아버리라고 하교하고,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을 엄중히 꾸짖었다. 이보다 앞서 하원이, 영남 사람으로 선전관에 추천되는 자가 적다는 이유로 논계하자 채제공이 경연에서 그것을 방조(傍助)하였다. 이날 상이 특별히 삼군(三軍)에게 음식을 먹이기에 앞서 선전관 이억(李檍)을 잡아들여 대간을 사주한 실상을 엄하게 묻고, 이어 하교하기를,
"조정에서 영남 사람을 등용하기 위해 고심한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추천된 사람 가운데 영남 사람이 몇 명 있기는 하였으나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으므로 특별히 허일(許馹)의 이름을 수천(首薦)에 써넣었으니, 곡진하게 생각해 준 것은 지극하다. 선전관의 천거가 대간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현재의 가장 중요한 일로 보았단 말인가. 대간에 수치를 끼친 것으로서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서로 다른 의견을 조화시켜 한 집안 식구처럼 어우러져 살아가려는 나의 일념은 미물도 감동시킬 만하다. 내가 혹시 옛날 안목에 얽매여 인재를 등용하고 버리는 것이 시원치 못한 점이 있을 경우 그 잘못을 깨우치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대간과 서로 가부를 다투는 기풍을 재상의 입장에서 보지는 못하고 도리어 대간의 말을 빌어다가 주석을 달고 말을 돌려가며 부연만 하고 있다. 대신이 나를 저버리고 무슨 면목으로 나를 대할 것인가."
하였다. 제공이 죄를 자책하고 나오지를 않으니 하원의 의망을 깎아버리라고 한 명을 취소하여 그를 안심시켰다.
이조 참판 민종현(閔鍾顯)을 유임시켰다. 이보다 앞서 선전관 이만식(李晩植)의 이름이 죄인 이만식(李萬軾)과 음이 서로 같기 때문에 선전관들 가운데 임금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자가 있어서, 만식(晩植)이 이조에 호소하여 이름을 고쳤다. 상의 생각에 만식(萬軾)이 간사한 관리와 결탁하여 죽을 죄를 지은 지 몇 십 년이 되었는데, 이제 갑자기 이름을 바꾸어 줌으로써 벼슬자리를 엿보는 풍조를 열었다고 여겨 종현을 체직하였다가 얼마 뒤에 그가 이전의 후보자이고 또 마땅한 인물이 없다는 이유로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내시 김성언(金性彦)과 고춘희(高春熙)가 길거리에서 벽제하였다는 이유로 병조에서 유사로 하여금 엄하게 다스릴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1월 11일 병술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거행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앞서의 일을 제기하여 상에게 아뢰기를,
"전후의 은혜로운 하교는 보통의 정도를 훨씬 넘었으니 신이 비록 미열하지만 어찌 좋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성상의 뜻을 모르겠습니까. 이제 신의 나이가 늘그막에 이르고 보니 실로 세상의 득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탄핵을 받고 욕을 당하는 것은 신이 실컷 맛보았기 때문에 평범하게 보지만 오직 한 가지 두려운 것은 곧 세상에서 말하는 역적이라는 한마디 말입니다. 우리 나라의 사대부 집안이 대대로 이어지는 것은 마치 옛날 오등(五等)의 제후가 세습을 하는 것과 같아, 하루아침에 죄가 있으면 곧 옛날에 나라를 없애버리던 것과 같이 하니,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아뢰기를,
"올해는 바로 우리 조정이 들어선 지 4백 년이 되는 해입니다. 선대의 업적을 계승하여 우리의 크나큰 왕업을 무너뜨리지 않는 길은 진실로 덕을 열심히 닦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우리 조정이 나라를 세운 규모는 삼대(三代)·은(殷)·주(周)에 있어서는 주나라를 배우고 후대에 있어서는 송나라를 본받아, 예악 문물(禮樂文物)을 찬란하게 두루 갖추었습니다. 다만 예악 문물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쇠퇴하고 위축되는 것입니다. 시험삼아 주나라와 송나라의 예로 말씀드리자면, 주 소왕(周昭王)의 시대에 쇠퇴의 조짐이 이미 나타났고 얼마 안되어 당(堂) 아래로 내려가 제후를 만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며, 인종(仁宗) 이후로는 송나라 왕실이 미약해져서 남도(南渡)하기까지 하였고 마침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그 교훈이 이와 같습니다. 신의 구구한 걱정은 오직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몰아가서 주나라와 송나라가 시들게 되었던 전철을 밟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오늘날의 조정은 겉으로 보면 임금은 높고 신하들은 낮아 머리를 숙이고 엎드려 예법이 질서 정연하지만, 그 내면을 보면 일이 자신에게 이로울 때는 임금과도 승부를 다툽니다. 그리하여 세웠던 위엄이 점차 떨어지고 조정의 기강이 나날이 무너지니, 신은 외적이 두려운 것이 아니고 걱정스러운 것은 국세가 쇠약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였다.
대사헌 조종현(趙宗鉉)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종묘의 헌관(獻官) 이이상(李頤祥)이 엄숙하고 조심해야 할 자리에서 술을 계속 마셔 취안(醉眼)이 몽롱하였고 심지어는 사람을 시켜 부축하게까지 하였으니, 마땅히 삭탈 관직하는 벌을 적용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군직도 역시 관청의 준칙이 적용되는 것인데 일전에 한 감사가 서용될 때 이조가 서반(西班)으로 보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관직을 부쳤으니, 역시 매우 방자합니다. 병조의 당해 당상관을 마땅히 삭직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구전(口傳)을 특별히 내리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혼동하여 거행하였으니, 뒷날의 폐단과 관계가 있다. 파직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성균관에 입학하여 시험을 보게 하는 것은 오로지 선비들을 권장하기 위한 방도인데 근래에는 시험이 공정하지 않고 선비들의 기풍도 날로 쇠퇴해졌습니다. 지난 겨울 성균관 시험에서는 주머니 속의 서찰이 발각되었고 낭관이 대신 등수를 매겼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듣는 사람이 부끄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전 대사성 정범조(丁範祖)에게는 빨리 삭탈의 벌을 시행하시고, 해당 낭청도 조사하여 중죄를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요즈음 경연에 오르는 자들이 모두 이번의 승시(陞試)로 인해 걱정하고 개탄하는 말을 많이 하였으나, 그래도 이처럼 난잡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반장(泮長)006) 이 문인인 데다가 노쇠하기 때문에 시험을 치르는 과정에서 엉성하고 혼암한 잘못을 저질러 이런 대간의 말을 듣게 된 모양이다. 대사성과 해당 낭관을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따져 묻고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양사(兩司)가 연명으로 올린 차자를 도로 돌려주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신이 보지는 못했지만, 간관이 미리 먼저 반열에서 나온 일로 두 승지가 올린 소에서 ‘감사에게 죄를 돌린다.’고 한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일부러 모르는 척 육지로 나오도록 버려둔 것이나 애초에 보고하지도 않고 잡아두려고도 하지 않은 것은 곧 감사의 죄입니다. 그런데 이제 법을 맡은 대간의 말은 마치 죄가 없는데 뒤집어씌운 것처럼 하였으니, 이보다 더 해괴하고 통분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청컨대 그날 연명으로 차자를 올린 여러 대간들에게 모두 삭직의 법을 거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간들의 차자 내용은 신기(申耆) 등의 무리가 한 짓에 비교하면 경중의 차이가 있다. 신기가 범한 죄에 대한 벌을 가까운 곳으로 쫓아내는 정도에 그친 것은 지난번 신식(申湜)의 일에 대해 불쌍한 생각이 들었고 신기에게 노모(老母)가 있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대간의 체통으로서는 차라리 과격할지언정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양사가 승지에게 이처럼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는 말을 하여 남에게 잘 보이려는 짓을 한 것은 크게 훗날의 폐단과 관계된다. 윤허한다."
하였다. 또 경연에 신하들을 불러 접견하는 일과 합계(合啓)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아뢰니, 따랐다. 헌납 이경운(李庚運)과 정언 정최성(鄭㝡成)이 형식을 버리고 내실을 힘쓰며 자잘한 사무를 친히 하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최성이 또 아뢰기를,
"묘당(廟堂)에 계하(啓下)한 모든 상소에 대해 30일이 되도록 복주(覆奏)하지 않으면 해당 당상관을 견책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은 기한을 정해서 독촉할 수 없다 하여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 겨울 통독제(通讀製)를 실시할 때 대사성이 박사 신보(申溥)에게 전적으로 맡겨 뇌물이 성행한 결과 낙방한 유생이 박사의 머리를 잡아 끌고다니는 변괴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청컨대 신보는 관원 명부에서 깎아버리고 유생은 중한 벌에 처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병모(李秉模)를 호조 판서로, 정창순(鄭昌順)을 예조 판서로, 김사목(金思穆)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정범조의 공초에는 ‘청탁하는 편지가 밖에서 드나든 일은 꼭 없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하였고, 신보의 공초에는 ‘방이 나붙기 전에 퇴청하였다.’ 하여 스스로 변명하는 구실로 삼았습니다."
하니, 상이 정범조는 삭직하고 신보는 석방할 것을 명하였다가 다시 성균관의 아룀으로 인해 금부에 명하여 신보가 거짓말을 꾸며 임금을 기만한 실상을 조사하도록 하고, 마침내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다. 범조는 유생이 성균관을 욕되게 하였는데도 즉시 논죄하지 않았다 하여 삭탈 관직하는 벌을 더하였다.
1월 13일 무자
3일 간 야금(夜禁)을 풀고 숭례문(崇禮門)과 흥인문(興仁門)의 빗장을 잠그는 것을 중지하도록 명하여, 도성의 백성들이 성을 나가 답교(踏橋)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얼음을 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조진택(趙鎭宅)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유생 이문연(李文淵)을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신보의 공술에 ‘통독제를 초(抄)할 때 한 유생이 밖에서 공갈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전교하기를,
"성균관은 엄숙한 곳이고 대사성이 방에 있는데 유생이 감히 마루 위로 올라 방에까지 들어갔으니, 이는 문묘(文廟)의 죄인이다."
하고, 문연을 엄하게 조사한 뒤 주모자로 유배하고 신보의 머리를 잡아 끌고 다닌 관서의 유생 강치훈(康致勳)은 본도로 하여금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다.
1월 14일 기축
상이 현륭원의 행차에 여러 날이 걸리므로 상의 복장과 여러 신하의 복장에 불편한 것이 많다고 여겨 비변사에 하교하기를,
"옛날 온천에 행차할 때도 역시 여러 날이 걸리기 때문에 평융복(平戎服)을 입기도 하고 혹은 군복을 입기도 했다. 앞으로 현륭원에 행차할 때의 복장도 이대로 해야겠다. 어가를 따르는 모든 신하들은 머리에는 호수(虎鬚)·공작우(孔雀羽)·영우(嶺羽)·방우(傍羽)를 꽂고 허리에는 화살통과 환도(環刀)를 차니, 젊은 사람도 주체하기 어려울텐데 하물며 늙은 사람이겠는가. 호수의 제도는 그 유래가 오래되지 않았다. 온천에 행차할 때 보리 농사가 잘되었기 때문에 기뻐하는 뜻의 표시로 곁에 모신 신하들에게 각기 한 이삭씩 꽂도록 한 것인데, 그 뒤에 호수로 보리 이삭을 대신하게 한 것이니, 이것이 군복 차림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문관 재상이 찼던 화살통은 온천에 행차할 때 과천(果川)에 이르면 임시로 벗도록 하였으니, 머리에 꽂은 것과 허리에 차는 것 가운데 생략해서 벗을 수 있는 것을 대신들이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는데, 비변사에게 아뢰기를,
"문관 재상의 화살통은 생략해서 벗는 것이 합당하지만, 호수와 환도는 전처럼 꽂고 차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문관과 음관도 모두 화살통을 벗도록 하였다.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이 상께 아뢰기를,
"용주사(龍珠寺) 중들의 군장(軍裝)은 총융청에서 지급하는데, 갑옷·투구·화살통은 붉은 모직을 쓰기까지 하니, 사치스러운 습속을 막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총융사 이방일(李邦一)을 파직하고, 이창운(李昌運)으로 대신하였다. 상이 현륭원에 행차하려고 하면서 자전(慈殿)에게 문안드릴 사람이 없다 하여 김용주(金龍柱)의 죄명을 씻어주었다.
1월 15일 경인
각사(各司)와 각영(各營)에서 경술년의 회계 장부를 올렸다. 현재 황금이 3백 26냥, 은이 31만 8천 7백 79냥, 돈이 87만 5천 1백 90냥, 명주가 98동 38필, 무명베가 3천 6백 41동 35필, 모시베가 63동 33필, 베가 1천 1백 25동 7필, 쌀이 33만 8천 8백 16석, 좁쌀이 9천 64석, 콩이 3만 9천 8백 60석, 피잡곡(皮雜穀)이 8천 5백 11석이 있었다.
암행 어사 정동관(鄭東觀)을 과천(果川)·금천(衿川)·수원(水原)·광주(廣州) 등 길을 닦는 여러 고을에 보내어, 민간의 폐단과 고통을 살피게 하였고, 조진택(趙鎭宅)을 수원에 보내 새 고을의 민정을 살피게 하였다.
1월 16일 신묘
어가가 수원부에 머물렀다. 어가가 막 숭례문을 나왔을 때 비와 눈이 뒤섞여 내리니, 상이 군병들의 옷이 젖는 것을 불쌍히 여겨 관왕묘(關王廟)에 가서 잠시 머무르며 여러 군사들에게 깃발을 길가에 놓고 제각기 비를 피하도록 명하였다.
득중정(得中亭)에 가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 짝을 지어 활을 쏘도록 하였다. 상이 수원부의 고을을 두루 살펴보고 민가가 즐비한 것을 보고서는 부사 조심태(趙心泰)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경의 공로이다."
하고, 중비(中批)로 심태를 승지로 삼고, 김사목(金思穆)으로 대신하도록 하였다.
권엄(權𧟓)을 발탁하여 공조 판서로 삼았다.
1월 17일 임진
현륭원에 가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상이 좌의정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조금 전에 새 고을을 지나오면서 보니, 경외인(京外人)으로 집을 지은 사람들이 많아 지붕이 서로 이어져 번듯한 큰 도시가 되었으니, 매우 다행스럽다. 다만 서둘러 집을 짓느라 그 재산과 생업을 소모하여 내가 집을 지으라고 한 본뜻을 어기지 않았는가 걱정된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크고 작은 것과 사치하고 검소한 것을 제각기 다 힘을 헤아려 했을 것이니, 어찌 본디의 생업을 손상시켰겠습니까."
하였다.
돌아와 수원부에 머무르면서 수원부 내에 집을 지은 유생과 무사를 시험 보여 수석을 차지한 유생 임희존(任希存)과 무사 이동술(李東述)은 모두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상이 원관(園官)은 오래도록 맡겨야만 성과를 바랄 수 있다 하여, 사송(詞訟)의 이력이 있거나 없거나 6품이 된 뒤로 달수가 찼거나 말았거나 6품 및 수령이 되는 자격을 시험하는 강에 합격되었거나 말았거나를 구애하지 말고 곧장 수령에 의망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규정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다.
전교하였다.
"백 리나 되는 길가에 내가 내 손으로 나무를 심지 못하고 고을 수령에게 내 대신 수고를 하게 하였다. 광주 부윤 홍성연(洪聖淵)은 가선 대부로 발탁하고 그 나머지도 차등있게 상을 주어 그 공로에 보답하도록 하라."
서유대(徐有大)를 총융사로 삼고, 중비로 조심태(趙心泰)를 훈련 대장으로 삼았다.
상이 노량(鷺梁)을 지나가는데 사육신의 묘와 사충사(四忠祠) 및 고 충신 박태보(朴泰輔)의 서원이 모두 길가에 있었다. 상이 감회가 일어나 직접 글을 지어 근신(近臣)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 고 현감 신규(申奎)란 사람이 숙종 24년 무인년에 상소하여 단종(端宗)의 위호(位號)를 회복할 것을 요청한 일이 있는데, 상이 이 때에 이르러 신규의 집이 수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대시(臺侍)를 증직하려 하였다가 어떤 사람이 신규가 이미 승지에 증직되었다고 하자, 그 후손을 등용하여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제수하였다.
1월 18일 계사
궁궐로 돌아왔다.
상언(上言) 1백 7건을 판하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홍주(洪州)의 유생 정이원(鄭履元)이 상언하기를 ‘증 찬성(贈贊成) 정뇌경(鄭雷卿)이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친 행적은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 등 세 신하와 다를 바가 없으니, 신주를 체천하지 않는 특전을 요청합니다.’ 하였습니다.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정뇌경의 순결한 충성과 높은 절개는 오달제·홍익한·윤집 등 세 신하와 비교해서 백중을 가리기 어렵다. 그런데 그 마을에 정문을 세우지 않았고 사당의 신주에 훌륭한 시호를 내려주지 못하였으니, 흠이 되는 일을 면할 수 없다. 체천하지 않는 특전은 공신에게 적용하고 충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것이지만 세 신하는 충신인데도 체천하지 않는 특전을 허락하였으니, 충신을 체천하지 않는 것 또한 근거할 만한 전례가 있는 것이다. 특별히 체천하지 않게 하는 것을 허락한다."
하였다. 이어 대신과 문임(文任)을 맡고 있는 관각(館閣)의 신하에게 정문을 세우고 시호를 내려주는 것을 함께 거행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의논하여 아뢸 것을 명하니, 모두 좋다고 하므로 따랐다. 또 특별히 강효원(姜孝元)의 마을에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효원은 곧 세자 시강원의 서리로 뇌경을 따라 함께 죽은 사람이다.
1월 19일 갑오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을 불러서 보았는데 복원이 그의 아들 이시수(李時秀)의 임지인 황해 감영에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상이 고을의 폐단과 백성의 고통에 대해 물으니, 복원은 곡식 장부의 숫자가 고르지 못한 것으로 대답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지평 이경신(李敬臣)에게 서용하지 않는 벌을 내렸다. 경신이 아뢰기를,
"별군직(別軍職) 한광제(韓光濟)는 시위(時偉)·이재간(李在簡)과 결탁하여 지난 병오년007) 영흥 부사(永興府使)가 되었을 때, 영흥의 백성들이 용흥강(龍興江)의 수재로 재방이 터져 물이 범람하자 다함께 광제에게 호소하여 제방을 막고 물길을 바로잡자고 청하였는데, 광제가 글로 쓰기를 ‘큰 강이 물길을 바꾼 것을 어찌 인력으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모두가 하늘이 없애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가 만약 흉악한 무리와 한패가 되어 5월과 9월의 재앙을 요행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어찌 한 강물이 넘쳐흐르는 것에 대해 곧바로 하늘이 없애는 것이라고 말하였겠습니까. 광제에게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벌을 시행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신보(申溥)는 대독관(對讀官)으로서 뇌물을 받았다가 큰길에서 머리털이 잡힌 채 끌려 다녔는데, 도형(徒刑)으로 유배된 것도 너그럽게 벌준 것입니다. 관서의 유생은 낙방한 사사로운 분노 때문에 무리들을 이끌어 모아 통적(通籍)008) 한 사람을 저자에서 머리털을 잡아 끌고 다니면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찼으니, 이는 신보와 똑같은 벌로 처벌해서는 안 됩니다. 신보는 뇌물을 받아 스스로 모욕을 초래한 죄로 다스리고 유생은 무리를 지어 신분에 어긋난 짓을 한 법으로 다스림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한광제의 일은, 그가 글로 쓴 말은 곧 무식한 무관(武官)이 문자에 익숙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를 헤아릴 수 없는 죄로 몰았으니, 이는 서울의 사대부들도 오히려 감히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인데, 너는 같은 도의 사람으로서 이런 나쁜 말을 꺼내 무고한 사람을 치고 잡아 흔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이 하였다. 더구나 ‘만약 흉악한 무리와 한패가 되지 않았다면[若不與]’이란 말은 진회(秦檜)가 ‘그런 사실이 있을 수도 있다.[莫須有]’는 말로 악비(岳飛)를 무함한 것보다 더 심한 말이다. 과거 혼란스러울 때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라든가, 또 ‘반드시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등의 말로 역적의 그물과 모자를 덮어씌웠던 일에 대해 조정에서 철저히 금하고 엄히 배격하였던 것이다.
신보의 일은, 주동자는 엄하게 벌주어 유배하고 공범자는 형신을 가하고 곤장을 쳤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신보를 유배한 것은 시험을 보이는 일에서 유생들이 한 일을 즉시 자세히 진술하지 않았으므로 해부(該府)의 건의에 따라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율을 적용한 것이다. 만약 시관과 응시자에게 똑같은 벌을 준 것이 혐의스럽다면, 서울의 유생 가운데 벌을 주지 않고 유배한 자들을 다시 잡아다가 엄한 형벌을 주어 충군(充軍)하라는 것이냐?"
하였다. 경신이 피혐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관서 유생의 일에 대해서는 요즈음처럼 사람들이 할말을 못하고 있는 때에 입을 열어 말했으니, 그 일은 인정해 줄 수 있으나 한광제의 일에 이르러서는 역적의 무리라는 지목이 얼마나 중대한 죄안인데, 하찮은 글 내용을 가지고 이처럼 역적으로 얽어맨단 말인가. 한 명의 광제야 꼭 말할 것도 없지만, 조정의 형정(刑政)으로 헤아려 보면 이와 같은 습속은 철저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너는 우선 서용하지 않는 벌을 내려 네 고향 사람들로 하여금 조정에서 당파를 편드는 것을 엄하게 금한다는 뜻을 알게 하겠다."
하였다. 대신 채제공이 아뢰기를,
"이는 요망하고 난잡한 말로 지극히 존엄하고 높혀야 할 임금을 범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신하된 자가 감히 글로 써낼 수 없는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관리의 명부에서 빼버리는 벌을 더 추가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1월 20일 을미
정언 정최성(鄭㝡成)이 상소하기를,
"태묘의 대향(大享) 때 하인들이 음식을 젯상에서 물려 제기고(祭器庫)로 옮겨가는데 그곳은 태실(太室)의 동쪽입니다. 제사 고기를 나눌 때 희생으로 쓴 고기를 태묘의 곁채에 낭자하게 늘어놓고 사람들의 소리가 뜨락에 왁자하니,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제사에 쓰는 곡식과 술이며 과일은 전처럼 제기고에 갖다 두더라도 제사 고기는 전사청(典祀廳)에 옮겨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난 겨울 성균관 시험에서 오래 있던 두 낭관의 경우, 하나는 자제들이 모두 뽑혔고, 하나는 인척들이 다 합격했으나 다만 애초에 대독관(對讀官)이 아니었다는 것 때문에 조사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고, 혹은 다른 죄로 말미암아 경미한 처벌을 받거나 혹은 서반(西班)에 태연히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유생 이문연(李文淵)은 마침내 위협을 가해 합격하려고 꾀하였습니다. 작년의 승시(陞試)와 합제(合製)를 파방하소서.
포교(捕校)가 성균관에 숙직하는 것은 단속하고 규찰하는 데는 힘이 될 것 같지만 공자의 엄숙한 사당이자 선비들이 글을 읽는 곳이니, 이런 무리들이 숙직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포교들이 대령하는 규례를 고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제사 고기를 나누는 것은 네 말이 옳으니 그대로 시행하라. 성균관 시험에 관한 일은 대간의 말이 이와 같으니, 그들은 반드시 피혐할 것이다.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던 낭관으로 수령에 임명된 자는 바꾸어 차임하라. 작년 승시에 합격한 자를 파방하는 것은 지나치다. 포교가 번갈아 성균관에 숙직하는 것은 당초에 반드시 법을 정한 뜻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이천(利川)의 유생 한성렬(韓性烈)이 상언(上言)하여, 그의 형 한광렬(韓光烈)과 같은 과거에 합격한 맹의대(孟意大)는 이미 복과(復科)되었으나 광렬은 아직도 합격에서 빠져 있어 원통하다고 하였다. 예조에서 임진년 뒤 정시(庭試)에 급제한 것으로 인정하던 예에 따라 이 뒤의 전시(殿試)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청하니, 따랐다.
수원(水原)에 갔던 암행 어사 조진택(趙鎭宅)이 돌아와 수원에서 시행해야 할 일에 대해 아뢰고, 아울러 아뢰기를,
"일용면(一用面)이 광주부(廣州府)에 속해 있을 때는 그 백성들이 부와의 거리가 멀어서 세금을 내기가 불편했기 때문에 수원의 형석면(荊石面)으로 이사하여 피한 자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비록 수원부로 옮겨 속하게 했으나 잔폐하여 지탱하기 어려우니, 이제 이목동(梨木洞)과 천천리(泉川里) 두 마을을 함께 일용면에 속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좌의정 채제공에게 물었다. 제공이 아뢰기를,
"합병하면 형석면에 불리할 테니, 그대로 두소서."
하니, 따랐다.
1월 21일 병신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재계하는 곳에서 차대(次對)를 거행하였다.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1월 22일 정유
관서(關西)의 회방인(回榜人)009) 박호성(朴好成)을 불러 보았다. 호성의 나이 83세인데 연회와 음악을 내려 영광스럽게 하였다.
백성 박필관(朴弼寬)이 신문고를 쳐서 아전과 백성들이 계(契)를 맺는 것, 상민과 천민들이 거짓으로 족보를 만드는 것, 소를 기준 없이 도살하는 것, 생 소나무를 함부로 베는 것 등을 금지시키도록 청하였다. 또 토호들이 많은 것을 소유하는 폐단을 말하면서 노비는 30구 이상을 넘지 못하게 하고 토지는 30결 이상을 넘지 못하게 하고, 군인에게 베를 거두는 것도 20자를 넘지 못하게 하도록 청하니, 전교하기를,
"정전법(井田法)은 먼 옛날 일이고 한전법(限田法)은 가장 옛 제도에 가까우나 오직 동한(東漢) 시대에만 시행하였다. 토호들이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은 억제하기 어렵다. 토지를 30결을 기준으로 한정하는 것과 노비를 30구로 한정하자는 말은 그 말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시행할 방책을 강구하지 않고 갑자기 제한하는 명부터 내린다면 도리어 소란만 초래하게 될까 염려된다. 베를 거두는 것은 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의견이다. 다만 계를 맺는 것과 거짓 족보를 만드는 것과 소를 잡는 것과 소나무를 베는 것과 같은 문제는 모든 도에 엄히 금지하도록 신칙하라."
하였다.
상이 일찍이 여러 궁방(宮房)에 신칙하여 도장이나 패자(牌子)로 지방 고을들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이때에 와서 경기 감사가 수진궁(壽進宮)의 궁궐 일을 보는 자가 도장을 함부로 사용하여 음죽현(陰竹縣) 백성의 토지를 강점한 일을 아뢰니, 전교하기를,
"금법(禁法)은 오래되면 해이해지는 법이다. 각 궁방의 도장과 패자를 원래의 규정 외에 사용하는 잘못을 답습하는 버릇에 대해 여러 차례 금지하였기 때문에 명이 시행되어 금지되었을 것으로 여겼는데, 이제 이 장계의 글을 보니 매우 놀랍다. 궁방의 도장은 각 관청의 인장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거두어 대궐 창고에 보관해 두고 간사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제 저 무리들이 또 이런 죄를 저질렀으니, 위조해서 도장을 찍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하고, 일을 주관한 내시에게 엄한 벌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이어 묘당으로 하여금 여러 도에 다 함께 신칙하여 그런 일이 드러나는 대로 아뢰게 하였다. 또 군문과 아문에 전교하기를,
"토지를 절수(折受)하는 법은 고 재상 유성룡(柳成龍)이 한때 임시 방편책으로 마련한 대책이다. 임진 왜란 이후 경계가 뒤섞여 주객(主客)을 구분하기 어렵게 되니 이로 인하여 토호들이 많이 차지하여 공전(公田)이 나날이 위축되자, 고 정승이 이 제도를 건의하여 고발한 사람에게 그 고발한 땅을 주고 그에게서 받은 세금을 나라에 바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절수라는 이름이 있게 된 까닭이다. 이제 임진년이 지난 지 2백 년이 되어 토지 경계에 주객이 이미 정해졌는데, 절수라는 칭호를 아직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울러 세금을 내는 법까지도 중간에 포기하여 절수라는 이름만 붙으면 곧 세금을 면제해 주므로 이전부터 크게 유감으로 여겼던 것이다. 다만 원결(元結) 이외의 절수는 병신년 이후 특별한 규례로 궁방에 내려준 예가 없고 무엇보다도 원결의 절수가 폐단이 되고 있으니, 특별한 규례로 주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대신 줄 것을 강구하지 않고 먼저 절수의 제도를 없애버린다면, 도리어 공사(公私)가 다 피폐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 계속 끌어왔으니, 항상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처음 가졌던 마음과 많이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노비 4구를 찾아내면 그 중 1구를 상으로 주는 법과 더 경작하는 토지는 떼어 넘겨달라는 요청에 대해서는 혹 법을 만들어 방지하기도 하고 거듭 깨우쳐 금지하기도 하였으나, 간교한 폐단을 막는 것은 마치 쥐구멍을 막는 것과 같아서 법이 엄하면 엄할수록 간교한 폐단은 더욱 불어난다. 심지어는 오늘날 경기 감사가 궁방의 도장 문제로 보고하는 일까지 일어났으니,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도 나머지 사정을 알 수 있다. 영문(營門)의 일로 말한다면, 장용영(壯勇營)이 새로 개설되었으니 이익을 노리는 무리들이 이것을 빌미삼아 토지를 파는 일이 어찌 없겠는가. 아문의 일로 말한다면, 연전과 근래에 죄를 범한 몇몇 관아에서 범죄 사실이 이미 탄로되었다. 대신의 허물을 묻어두는 뜻에서 끝까지 추궁하지는 않겠으나, 이밖에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이란 것은 알기 어렵지 않다.
대체로 절수라는 것은 토지를 떼어 주어 제각기 받도록 한다는 뜻인데, 임금에게 아뢰어 결재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먼저 서울이나 지방에 공문을 뛰우니, 어찌 이와 같은 나라의 기강이 있단 말인가. 지금부터는 거듭 엄하게 당부하여 궁방·영문·아문 및 조정 신하에게 특별히 내려주는 것들을 막론하고 토지라는 이름이 붙은 경우, 떼주는 공문에 만약 입계(入啓)나 계하(啓下) 등의 말이 없는 것은 수령들이 순영(巡營)에 보고하고 순영에서는 그때마다 장계로 보고하라."
하였다.
사직(司直) 신기경(愼基慶)이 상소하여 당면한 문제 12조항을 올렸다. 첫째는 영남의 조선(漕船)010) 을 경강(京江)에 이속시켜 세곡을 운반하게 하자는 일이고, 둘째는 수원(水原)의 장교와 이졸(吏卒)들에게는 송도(松都)에서 시행하는 법에 따라 매달 급료를 지급하자는 일이고, 셋째는 수원의 군병들은 기병이나 보병을 막론하고 부유한 집의 장정들로 인원을 충당하자는 것이고, 넷째는 임진년과 병자년의 난리 때 창의사(倡義使) 우성전(禹性傳)이 의리를 제창하여 공훈을 세웠고 고 병사(兵使) 김준룡(金俊龍)은 오랑캐를 섬멸하여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주어 장려하자는 일이고, 다섯째는 수원의 새 고을에 마땅히 성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고, 여섯째는 과천(果川)에서 조세 이외의 전결을 면제하여 예전처럼 부(府)의 아전에게 떼어 주자는 것이고, 일곱째는 어물 장사꾼과 그들을 상대로 살아가는 동촌(東村) 객주집 간의 관계에 있어서 어물 장사꾼이 방세를 계산하여 주는 대신 그들이 제값을 받고 팔도록 하자는 것이고, 여덟째는 경비가 필요한 관청이 아닌 경우에 토지를 고발할 때 4분의 1을 상으로 주는 것을 더욱 엄하게 금지하도록 하자는 것이고, 아홉째는 경주인 집에 받아둔 명천(明川) 백성들의 전세(田稅)와 신포(身布)는 애초에 탕감하라는 명에 따라 본읍에 내어 주자는 것이고, 열째는 거창(居昌)의 토지 측량이 공정하지 않았으니 징계하는 조치를 보여주자는 것이고, 열한째는 곽산(郭山)과 선천(宣川)의 오래 묵은 환곡은 당분간 천천히 바치도록 하자는 것이고, 열두째는 의주(義州)의 양하진(楊下鎭)은 진이란 명칭을 없애고 별장(別將)을 두자는 것이었다. 그 상소를 비변사에 내리니, 비변사에서 살펴 아뢰기를,
"수원의 기병과 보병을 부유한 사람을 골라 충당시키는 것과 우성전 등을 포상하는 것과 토지의 고발을 금지하라는 세 조목은 마땅히 그에 따라 시행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두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1월 23일 무술
여러 도에서 환곡을 법에 정한 것 이외에 더 내주는 것을 거듭 금지시켰다.
영남 지방의 1백 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연초에 주는 음식을 더 주도록 하였는데, 모두 5사람이었다.
액정서에 속한 하인들 가운데 민간에서 소란을 일으킨 자를 해당 관청에 보내 엄히 다스릴 것을 명령하였다.
1월 24일 기해
형조가 아뢰기를,
"이현섭(李賢涉)의 여종 상금(尙今)이 그 주인을 위해서 징을 쳤으니 무엄합니다. 형벌로 다스리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만약 이미 신설(伸雪)한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면, 누구는 신설시켜주고 누구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또 그때의 문안을 그대로 두는 것은 더욱 안된다."
하고, 세초(洗草)할 것을 명하였다. 뒤에 의금부의 아룀으로 인하여 현섭을 유채(柳綵)와 남경용(南景容)의 전례에 따라 신설해 주었다.
1월 25일 경자
차대를 거행하였다. 저자의 백성들에게 육전(六廛) 이외에서도 함께 매매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육전은 입전(立廛)·면포전(綿布廛)·면주전(綿紬廛)·포전(布廛)·저전(紵廛)·지전(紙廛)이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도성에 사는 백성의 고통으로 말한다면 도거리 장사가 가장 심합니다. 우리 나라의 난전(亂廛)을 금하는 법은 오로지 육전이 위로 나라의 일에 수응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익을 독차지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빈둥거리며 노는 무뢰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스스로 가게 이름을 붙여 놓고 사람들의 일용품에 관계되는 것들을 제각기 멋대로 전부 주관을 합니다. 크게는 말이나 배에 실은 물건부터 작게는 머리에 이고 손에 든 물건까지 길목에서 사람을 기다렸다가 싼값으로 억지로 사는데, 만약 물건 주인이 듣지를 않으면 곧 난전이라 부르면서 결박하여 형조와 한성부에 잡아넣습니다. 이 때문에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간혹 본전도 되지 않는 값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팔아버리게 됩니다.
이에 제각기 가게를 벌려 놓고 배나 되는 값을 받는데, 평민들이 사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부득이 사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처한 사람은 그 가게를 버리고서는 다른 곳에서 물건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그 값이 나날이 올라 물건값이 비싸기가 신이 젊었을 때에 비해 3배 또는 5배나 됩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채소나 옹기까지도 가게 이름이 있어서 사사로이 서로 물건을 팔고 살 수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음식을 만들 때 소금이 없거나 곤궁한 선비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일까지 자주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도거리 장사를 금지한다면 그러한 폐단이 중지될 것이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단지 원성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겁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지방이 통곡하는 것이 한 집안만 통곡하는 것과 어찌 같으랴.’ 하였습니다. 간교한 무리들이 삼삼오오 떼 지어 남몰래 저주하는 말을 피하고자 도성의 수많은 사람들의 곤궁한 형편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위해 원망을 책임지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땅히 평시서(平市署)로 하여금 20, 30년 사이에 새로 벌인 영세한 가게 이름을 조사해 내어 모조리 혁파하도록 하고, 형조와 한성부에 분부하여 육전 이외에 난전이라 하여 잡아오는 자들에게는 벌을 베풀지 말도록 할 뿐만이 아니라 반좌법(反坐法)을 적용하게 하시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매매하는 이익이 있을 것이고 백성들도 곤궁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 원망은 신이 스스로 감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옳다고 하여 따랐다. 제공이 또 아뢰기를,
"서울과 지방의 공금(公金)을 맡아서 지키는 자들이 전혀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영남 지방의 남창(南倉)의 돈은 원래 숫자가 21만여 냥인데, 이제는 8천여 냥이 되었고, 그나마 이것도 빈 장부일 뿐입니다. 평안도 병영의 군수전(軍需錢)의 부족분이 아직도 3만 냥이니, 매년 5천 냥씩 엄하게 신칙하여 징수하되 관서(關西)의 예를 기준으로 하여 12달로 나누어 매달마다 독촉하여 징수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정호인(鄭好仁)의 지난번 일은 정원에 말을 전해 보냈고 살며시 품의하려고까지 하였으니 제멋대로 행동한 것과는 다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 전라 감사와 같은 자도 지난번 죄를 씻어줄 때 포함시켰으나 호인만 거론하지 않았던 것은 호인을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일은 자연 관계되는 바가 있으니 실로 용서하기가 어렵다. 대체로 자전(慈殿)의 하교가 전후에 걸쳐 간곡했던 것은 하나는 종사를 위해서고, 하나는 내 한 몸을 위해서였다. 지난날 신기현(申驥顯)을 처분한 뒤로 외부에서 시끄러운 말들이 한층 더 일어났기 때문에 자전의 하교에 매번 지나친 근심 걱정이 있으니, 민망스럽기 그지없다."
하였다.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이 아뢰기를,
"안흥진(安興鎭)에 행영(行營)을 설치하기 전에는, 첨사가 으레 수성장(守城將)을 겸임하여 성을 지키는 훈련을 주관하고 홍주(洪州) 등 다섯 고을을 지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행영을 장기 복무하는 자리로 만들었으므로 수령이 훈련에 참가하여 모습을 드러낸다면 서로간에 장애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훈련을 실시할 때는 옛 군산(群山)의 전례대로 수사(水使)의 우후(虞候)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고 수성장은 첨사가 전례대로 겸임하여 주관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서유문(徐有聞)을 주서 추천 명단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신방 급제 조수민(趙秀民)이 처음 급제할 때 유문이 주서로서 수민을 가주서에 의망하면서 성균관에 소속시킬 사람과 함께 배열하였는데, 분관(分館)할 때 승문원 정자 이인채(李寅采)가 ‘수민은 선대에 하자가 있는데 성균관에 소속시켰다.’고 하였다. 이는 대개 수민의 할아버지 조선(趙銑)이 일찍이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문묘의 배향에서 내쫓자는 상소에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상이 조선의 상소는 임금에게까지 올라가지 않았고, 수민의 아버지 조종렴(趙宗濂)은 적신(賊臣) 홍인한(洪麟漢)이 한창 세도를 부릴 때 절개를 지켰다 하여 특별히 수민의 억울함을 신설하여 주었다. 그리고 인채의 그와 같은 일은 사실 유문이 가주서로 의망할 때 성균관에 소속시킬 사람과 함께 배열한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 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고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의 마을에 정문을 세우고 시호를 추증할 것을 명하였다. 예조가 평안도 관찰사의 장계로 인해 복주(覆奏)하기를,
"김경서는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원수(元帥)가 배반하고 한 명의 군사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에 잘못된 소문이 많아 그 외롭게 바친 충성을 밝히지 못해 처음에는 구차스럽게 살아난 이릉(李陵)011) 처럼 의심하였고 나중에는 뒤늦게 죽은 허원(許遠)012) 처럼 탓하였습니다. 결국은 한 번 죽어서 백세 뒤에 당당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으니, 피눈물로 쓴 상소가 아직도 전하고 남겨놓은 서찰도 증거가 될 만합니다. 성조(聖祖)께서 전대에 증직의 은혜를 베푸셨으나 뜻있는 선비들의 논의에서는 여전히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만 그가 주먹을 휘두르며 칼날도 두려워하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김응하(金應河)의 늠름함에 견주어 볼 때 약간 손색이 있지만, 끝내 적을 꾸짖고 국가를 위해 죽은 것은 강세작(康世爵)이 전해준 말이 분명히 있으니, 죽은 것은 선후의 차이가 있지만 목숨을 바쳐 절개를 세운 것은 같고 상을 줌에 이르고 늦은 차이가 있지만 절개를 장려함은 마찬가지입니다. 마을에 정문을 세우고 시호를 추증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선조(先朝)의 명이 있었고, 선비들의 글과 관찰사의 아룀을 통해 공론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따랐다.
1월 26일 신축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 등의 후손을 불러서 접견하고 전조에 신칙하여 그 봉사손을 등용토록 하였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후손으로 시골에 있는 자도 역시 올라오게 하고 이어 여러 종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는데, 이 여러 종실들은 모두 단종(端宗) 때 절개를 지킨 사람들이었다.
전 이조 참판 홍병찬(洪秉纘)을 절도(絶島)에 안치하도록 명하였다. 상은 ‘병찬이 인사 행정을 할 때 벼슬길이 막힌 사람을 틔워준다는 이름하에 오래 등용되지 못한 무리들을 삼망(三望)에 모두 늘어놓아 시류의 환심을 얻으려 한 것은 당파를 없애려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응한 것이 아니다.’ 하여 경연에서 여러 번 엄한 전교를 내렸다. 또 병찬이 생살 위복(生殺威福)의 권한을 주무르려고 한다고 대신들에게까지 말하였는데, 좌의정 채제공이 엄히 국문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교리 조진택(趙鎭宅)이 상소하기를,
"지난번 정호인(鄭好仁)의 일은 그가 임금에게 아뢰지 않고 지레 행동한 것 때문에 성상께서 깊이 염려하여 처분을 매우 엄격하게 하셨다는 것을 신이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호인은 그날 승정원에 품의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멋대로 행동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공족(公族)에게 죽을 죄가 있으면 유사(有司)가 사형에 해당한다고 아뢰기를 세 번 하고 임금은 용서하라는 말을 세 번 하며, 세 번째 용서하라는 말을 하면 유사는 대답을 하지 않고 도망쳐 나가서 교외에서 처형한다. 임금이 사람을 시켜 쫓아가게 하면, 이미 때가 늦었다고 대답한다.’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해석하는 자는 말하기를 ‘유사의 정당함을 굽힐 수 없는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춘추전(春秋傳)》에 「신하는 의를 실행하되 명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대답도 하지 않고 나가서 기어코 처형하는 것이 제멋대로 행동하여 불경한 것 같지만, 그것은 법을 굽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전(經傳)의 가르침으로 남겨 후세에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조정 신하들이 저 역적 종친과 아직도 한 하늘을 이고 살고 있는 것은 실로 옛날 유사의 죄인이 됨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의금부의 신하가 받든 명은 자전(慈殿)의 뜻이지 독단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고 행한 일은 원래대로 돌려 놓은 것이지 죽인 것이 아닙니다. 또 그가 승정원에 나가 아뢰었으니 오히려 대답도 않고 나간 것보다는 느슨한 것입니다. 요컨대 1명의 역적 종친을 쫓아낸 것일 따름입니다. 만약에 그 정상은 따지지 않고 사실만을 탓해 벌을 준다면, 저 옛날 대답도 하지 않고 나가 사형을 집행한 옛날 유사에게는 장차 어떤 법을 시행해야 되겠습니까. 신은 이로부터 법의 제방이 무너져서 끝내는 그 폐단이 역적을 놓아주고 임금을 저버리는 데 이를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명을 거두소서.
홍병찬이 인사 행정을 독단할 때 겉으로는 벼슬길을 틔워준다는 명분을 내걸고 속으로는 은덕을 베풀고 명예를 사려는 폐습을 추구하여 한 번 인사에 삼망을 배열할 때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의망하지 않는 사람을 멋대로 거두어 모으면서 혹시라도 빠뜨릴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목(政目)이 한번 나오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물 끓듯하였으니,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어찌 신하들이 일을 제멋대로 처리하여 권력의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는 상황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의 살 곳을 찾게 하려는 우리 성상의 지극한 정성과 고심이 도리어 정관(政官)이 농간을 부리는 결과가 되어 버렸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대각(臺閣)에 있는 신하가 마땅히 한마디 말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귀를 기울여 들어보아도 아무런 소리가 없으니 신은 저으기 개탄하는 바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말을 하지 않은 양사(兩司)의 신하들에게 서둘러 견책하여 파직하는 벌을 내리고, 전 참판 홍병찬에게는 먼저 변방으로 내치는 벌을 시행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고 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에 진술한 것은 어제 경연에서 대신이 용서하자고 할 때 이미 자세히 말한 것인데, 그대가 상소에 인용한 경전의 취지가 과연 이 일과 적합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홍병찬을 변방으로 내치는 일은, 경연의 글과 말을 보고 들은 자라면 반드시 만백성을 똑같이 사랑하는 나의 고심을 알 것이며 더욱 병찬의 마음과 행적은 차마 바로 보지 못할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나의 골똘한 일념은 무조건 인정하거나 무조건 부정하는 일도 없고 남과 나라는 간격을 두지 않음으로써 당파가 없는 큰 단합을 이룩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저 병찬이란 자가 무슨 속셈으로 이 깨끗하고 공평한 정치 규범을 서슴없이 더럽혀 을미·병자년 간에 왕권이 확립되지 못했던 때보다도 더 간교한 짓을 하고 독단을 부린단 말인가. 그래서 지난번에 약간의 훈계를 내려 홍문관과 대각에 있는 자들에게 시정해 주길 기대한 지 오래 되었는데, 네가 지금 말한 것은 적절하면서도 다소 강력하여 나의 혼몽한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10여 년 전 세상 일이 자주 바뀔 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꼴이 된 것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집안이 아니면 곧 대대로 지체 높아 잘 살아온 가문이었다. 때가 지나간 지 오래 되고 일이 안정된 뒤에는 모두 다 구제하여 감화시키려 마음먹었으니, 이는 곧 내가 하늘에 밝히고 땅에 맹서한 하나의 신조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요체로 삼은 것이었다. 병찬은 임금이 근교에 행차하였다가 궁궐로 막 돌아와 상하가 지쳐있을 때 판서를 내쫓고 이조 참의가 비어 있는 틈을 엿보아 급히 서둘러 사방에서 우연히 드물게 의망했거나 고의로 의망하지 않았던 무리들을 모아 정망(政望)이란 이름 아래 나열해 써서 입계하였다.
그가 만약 칭찬을 얻으려고 그랬다면, 드물게 의망했거나 의망되지 않았던 자들을 애써 찾아내어 장애가 없는 자와 함께 의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이는 한번 대간에 이름을 틔워준 뒤에는 지평과 장령의 의망에 지체가 걸맞는 자만 의망하는 잘못된 규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목에 의망된 자들 또한 어찌 억울한 마음이 없겠는가. 또 만약 서로 반대가 되어 나간 것이라 한다면, 지난날 시비가 서로 엇갈려 각기 처음 의견을 고수하던 때에는 사대부의 기개로 보아 무방한 것이었으나 근래의 형편은 과연 어떠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가 되어 나간다면 그 어찌 섬뜩하지 않겠는가. 그의 망녕된 생각에는, 이처럼 소통해 주는 정도의 일이라면 임금의 마음속은 혹시 그렇게 여기지 않더라도 입으로는 승낙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온갖 속셈과 별의별 술수를 부리더라도 전혀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여긴 것일 뿐이다. 야비하고 용렬한 자의 소행이 이처럼 교활하고 편파적일 수 있는가.
당초의 처분이 가볍게 파직에만 그친 것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추문하여 그 실정을 알아내는 것이 아닌 그 밖의 법조문은 모두 희극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을 살릴 방도로 사람을 죽이는 도리이겠는가. 병찬은 해부로 하여금 절도(絶島)로 압송해 가도록 하라."
하였다. 병찬은 거제부(巨濟府)에 유배하고, 며칠 있다가 조진택을 특별히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에게 신칙하여 효유하고 그것을 삼사의 벽에 써두도록 하였는데, 그 효유에 이르기를,
"마땅히 말해야 할 일이면 말하는 것이 옳으니, 어찌 친분 여부를 돌볼 수 있겠는가. 요즈음 2, 3년 전부터 조정에 폐습이 더욱 고질화되어, 일이 서로 친분이 있는 사람과 관계되는 것이면 설사 말할 만한 죄과가 있더라도 부형들이 서로 말려 입에 올리지 못하게 하고, 일이 본디 잘 모르는 자에 관한 것이면 자질구레한 일은 괜한 혐의를 만들까 두려워서 소홀히 넘기지만 만일 무겁게 논단할 사안이나 기회를 만나면 그 진상과 사실도 묻지 않고 곧바로 헤아릴 수 없는 죄로 몰아넣고 애매한 죄목을 덮어씌워 자기 편은 편들고 다른 편은 공격하는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이루고자 한다. 이로 말미암아 바른말을 할 책임을 지닌 삼사가 관원의 사표가 되는 규범을 무시하고 갑은 갑을 두호하고 을은 을을 편들어 시비 곡직이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 이 어찌 현재의 큰 폐습이 아니겠는가. 이 폐단 이 버릇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장차 허물을 바로잡고 오류를 규정하는 기풍은 없어지고 기회를 틈타 사욕을 부리는 꾀만 열어주게 될 것이니, 이렇게 하고서야 세도(世道)를 어느 때나 안정시킬 수 있겠는가.
오늘 옥당의 상소에서 이른바 말하지 않는 양사를 처벌하라고 한 것에 대해 우선 그에 따라 시행하지 않는 것은 거듭 신칙하여 명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 일이나 다른 일, 이 사람이나 다른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아첨하여 말하지 않는 자, 자신의 자취에 혐의가 생길까 두려워 말하지 않는 자, 추고·체직·파출·삭직 등의 죄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헤아리기 어렵고 애매한 죄안에 대해서는 앞장서서 나서는 자는 발견되는 대로 무겁게 처벌하여 신하로서 임금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풍속을 징계하고자 한다. 지금 이 하교는 법령을 대궐문에 걸어두는 규례를 모방할까 한다."
하였다.
당성 부부인(唐城府夫人)이 죽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당성 부부인이 돌아가셨으니 중궁전(中宮殿)께서 마땅히 거애(擧哀)하셔야 합니다. 예조로 하여금 그 절차를 마련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전하께서 왕비의 부모상에 거애하는 예절이 있습니다만, 당성 부부인 상에 중궁전께서 거애하시는 절차는 경모궁(景慕宮)의 춘향 대제(春享大祭)가 가깝기 때문에 규례에 따라 거행할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부부인의 상사에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고 부의하는 일을 규례에 따라 거행하라. 다만 상주 집의 형편이 요즈음 매우 곤란하니, 비단 10단과 마포(麻布)·면포(綿布) 각 5동, 그리고 돈 5백 냥을 별도로 보내도록 하라. 예문(禮文)에 따라 예장(禮葬)하되 경기 고을에 끼칠 폐단을 마땅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부역하는 백성의 일은 금성 도위(錦城都尉)의 상례 때의 규례에 따를 것이며, 묘지가 있는 고을의 수령이 전적으로 주관하여 살피게 하라."
하였다. 성복(成服)하는 날 친히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하기를,
"시집온 지 30년 동안 유순한 부덕을 지녀 부부간에 금슬이 아주 좋았다. 금슬이 좋으니 만사가 다 원만히 이뤄졌다. 맏아들이 벼슬길에 올라 교명을 내렸거니 혼령은 무슨 유감이 있으랴. 글을 보내 잔 드리는 자리에 올린다."
하였다.
1월 28일 계묘
전 충청 감사 정존중(鄭存中)을 불러 보았다. 본도의 형편을 물으니, 존중이 도내의 폐단을 아뢴 뒤에 무기를 수리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충주(忠州)는 호남과 영남의 중간에 끼어 있어서 마땅히 성을 수축해야겠으나 그 책임을 본 고을에만 맡기기는 어려우니, 감사로 하여금 환곡을 떼어 주어 청주(淸州)처럼 여러 해에 걸쳐 개축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할 것을 명하였다. 존중이 또 아뢰기를,
"석성(石城)의 내수사 노비 9인을 부여(扶餘)의 도천사(道泉寺)와 정산(定山)의 정혜사(定惠寺)에 주어 준시(蹲柿)를 진상하는 일을 돕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아직도 공안(貢案)에 남아 있어서 계속 이중으로 세금을 물리고 있으니, 조사해서 바로잡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준시는 크기가 바둑알만하고 딱딱하기는 돌과 같아 쓸 데가 없으면서 백성에게 피해만 준다. 그러나 반드시 처음에 진상하도록 한 뜻이 있었을 것이니, 감사에게 여러 절간에 두루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존중이 또 아뢰기를,
"균역청에서 올해 사들일 쌀을 만약 올해 안에 바치게 한다면 반드시 그 말수가 더붙고 그 내용이 바뀌어 백성에게 해가 돌아갈 것이니, 우선 중지시켜 면해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1월 29일 갑진
전 지평 신대귀(申大龜)가 상언하기를,
"몸소 어린 세자를 가르쳐 후사(後嗣)를 편안히 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군도(君道)가 지나치게 높아 군신간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총명을 지나치게 써서 건강을 보호하는 일이 혹 소홀하며,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기는 하나 내실을 힘쓰는 데에 약간 결함이 있으며, 상하가 안일에 빠져 모든 사무가 적체되거나 폐해졌으며, 기강이 문란해져 명교가 밝지 못하며, 예법의 규범이 무너져 난신 역적이 두려워하지 않으며, 명예와 절의를 장려하지 않아 염치의 규범이 모두 없어졌으며, 검소한 덕을 닦지 않아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이 습속이 되었으며, 벼슬과 상이 너무 지나쳐 요행을 바라는 문이 크게 열렸으며, 벼슬자리를 아끼지 않아 관아의 준칙이 날로 낮아지며, 의리가 어두워 선비들의 취향이 바르지 못하며, 언로가 막혀서 정당한 논의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보모(保母)와 의관(醫官)을 신중히 선택하고, 서둘러 유현(儒賢)을 조정에 불러들여 세자를 보좌하는 방도를 다하며, 생원 진사를 선발하여 성균관과 사학(四學)에 두고 경전도 강론하고 저술도 하는 규범을 모방해 시행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봉산군(鳳山郡)에 사는 무과 급제자인 이종수(李宗洙)는 선현 이색(李穡)의 후예로서 문학에 뜻을 두어 서당을 짓고 거기에 밭을 사두어 주야로 학문을 강론하면서 선비들을 맞아들였으니, 특별한 은전을 베푸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이어 강령현(康翎縣)의 순위 목장(順威牧場)을 개간할 것과 순천부(順天府)의 옛 여수현(呂水縣)을 회복시켜 줄 것과 해서(海西)의 충순위(忠順衛)를 혁파할 것과 여러 도의 봄보리 종자를 넉넉히 나누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봉성군(鳳城君)은 중종(中宗)의 왕자로서 을사년의 화를 참혹하게 당했는데, 지금 그 자손들이 곤궁하여 제사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니, 거두어 돌보아 주는 조처가 있어야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후사를 안정시키는 계책에 대한 네 말은 매우 좋으니 유념하겠다. 어진 유현을 불러 맞아들이라는 일도 역시 유념하겠다. 생원·진사·유학(幼學)을 일정한 숫자를 정해 뽑아서 달마다 시험보이는 일은, 출석 일수를 계산하는 것이라든지 성균관에 올려보내 시험보이는 것이라든지 공도회(公都會) 시험을 보이는 것들이 모두 학문을 권장하는 좋은 법이지만 잘 거행하는 것이 또한 쉽지 않으며, 더구나 새로이 만들 조치가 어찌 반드시 별다른 이익이 있겠는가. 봉산의 무인 이종수가 사재를 들여 서당을 세운 일이 과연 네 상소의 말대로라면 그 또한 가상한 일이니, 요청한 대로 감사에게 조사해서 아뢰도록 하겠다.
강령현의 순위진 목장(順威鎭牧場)을 경작하도록 허용하는 일은, 이곳이 바로 궁방·아문·영문을 새로 설치하는 곳에서 걸핏하면 떼어 받기를 요청하는 곳이므로 아뢰어 허락받는다는 말은 사리에 근사한 듯하지만 곤란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너도 속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해서의 충순위를 혁파하는 일은, 연전에 서북 지방에서 무예를 숭상하는 정사를 특별히 고려하여 충순위에 베를 바치는 규정을 특별히 혁파하였는데, 해서 지방의 무과 급제자들도 그들과 같은 혜택을 받으려 하는 것은 어쩌면 그럴 듯하다. 여수의 옛 현을 회복시키는 일은, 이런 저런 형편을 우선 논하기 이전에 조정에서 그러한 사정을 다 알고 있는데도 계속 상언(上言)하니, 어찌 이와 같은 백성의 풍습이 있단 말인가. 이 때문에 이번에 신칙하는 하교를 한 것이다. 그러나 네가 백성에게 폐해가 있다고 말을 하니, 분리하느냐 합치느냐 하는 문제를 새로 부임하는 감사에게 넘기도록 허락하겠다. 앞으로 다시 여수에 관한 일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대간에게 알리거나 행차하는 곁에서 번거롭게 호소하는 자가 있다면, 나타나는 대로 해조로 하여금 해당 도에 잡아보내 특별히 엄한 벌을 주게 함으로써 간교한 백성들이 무엄하게 구는 버릇을 없애버리겠다.
여러 도에 봄보리 종자를 넉넉히 지급하는 일과 농사지을 때의 양식을 도와주는 일은, 묘당이 알아서 신칙하게 하겠다. 봉성군의 후손을 거두어 돌보아 주는 일은, 시인이 지은 시013) 와 고 정승 및 고 중신이 경연에서 아뢴 것을 보면 그 사적을 알 만하다. 더구나 선조(先朝)에서 시호를 주고 연회를 베풀어 주라는 명을 내린 일까지 있으니, 조정에서 표창한 조처가 지극하다 하겠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이처럼 곤궁하다고 하니, 듣기에 매우 불쌍하다. 종부시로 하여금 그들을 찾아 진휼청으로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특별히 구제해 주게 하라."
하였다.
1월 30일 을사
오재순(吳載純)을 예조 판서로, 정존중(鄭存中)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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