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2권, 정조 15년 1791년 2월

싸라리리 2025. 8. 4.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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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병오

직각 서영보(徐榮輔), 지춘추 조정진(趙鼎鎭), 검열 홍락유(洪樂游) 등을 강화도에 보내 《광릉실록(光陵實錄)》을 상고하여 오게 하였다. 이때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신하들의 사적을 상고하기 위해 관각(館閣)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도록 명하였다가 다시 상이 관각이 널리 상고하는 것이 실록만큼 자세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여겨 이 명이 나온 것이다. 승지 이만수(李晩秀)에게 이르기를,
"숙종 24년 무인년에 단종을 복위할 때, 고 정승 서종태(徐宗泰)가 문형(文衡)으로서 강화도에 가서 실록을 상고했었는데 이번에는 그 손자가 다시 이 일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이민보(李敏輔)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권엄(權𧟓)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2월 2일 정미

경모궁(景慕宮)에 가서 희생(犧牲)과 제사 그릇 등을 살펴보았다. 내일 춘향제(春享祭)가 있기 때문이다. 명광문(明光門)에 돌아와서 문신에 대한 제술 시험, 초계 문신(抄啓文臣)에 대한 친시(親試), 춘도기(春到記) 유생들의 강경과 제술 시험을 거행하였다. 초계 문신과 선전관들에게 지난해부터 따져서 상을 나누어주고, 유생으로서 제술 시험에 수석을 차지한 심반(沈鎜)과 강경 시험에 수석을 차지한 한영건(韓永建)은 곧바로 전시(殿試)에 나올 수 있도록 하였으며, 초계 문신으로서 강경 시험에 수석을 차지한 윤광안(尹光顔)은 통정 대부의 품계를 올려 주었다.

 

2월 4일 기유

승지 이민채(李敏采)를 목릉(穆陵)의 헌관으로 삼았는데, 제향하는 날 저녁 능관(陵官)에게 향(香)을 전달할 때 잘못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예를 거행하였다가 제사를 지낼 때에야 비로소 천담복(淺淡服)으로 갈아입었다. 감찰(監察) 임무원(林懋遠)에게 적발되자 민채가 상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상이 민채를 법사에 내려 죄를 주도록 하고, 무원은 먼 지방 사람으로서 직책을 다했다고 칭찬하여 수령으로 뽑아보내도록 명하였다.

 

2월 5일 경술

초계 문신에 대한 친시를 거행하였다.

 

2월 6일 신해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영월(寧越) 사람의 괘서(掛書)로 인해 밀계(密啓)를 올렸는데, 회유(回諭)하기를,
"범죄 사건의 실정은 비록 보통 생각으로 헤아릴 수는 없지만, 자기 성명을 써서 스스로 관아에 바친다는 것은 크게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니, 혹 별다른 곡절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른바 흉서를 가지고 온 종과 흉서 가운데 쓰여진 여러 사람들은 과연 이미 붙잡아 조사했는가? 붙잡힌 사정과 맨처음 받은 공초를 서둘러 치계하여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라."
하고, 며칠 있다가 또 하유하기를,
"지난번의 회유에 이미 믿을 수도 없고 의심할 수도 없다는 뜻을 보였지만 사리로 보나 보통 심정으로 보나 전혀 근리하지 않다. 이 때문에 사체의 방만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 경에게 공초를 받아서 아뢰도록 맡긴 것이다. 이것은 경으로 하여금 이 뜻을 잘 받들어 죄 없는 사람들을 혼란시키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이다. 대체로 자기 이름을 스스로 쓴 것처럼 가장했다는 것은 딴 사람을 시켜 바친 것을 보더라도 그 정상이 드러났다 할 수 있다. 영월의 순후한 풍속은 아직 태고적 유풍이 전해지고 있으니, 비록 약간 두각을 나타내는 자가 있더라도 그 생각과 뜻이 한계와 분수를 넘지 않아, 유생이나 향임(鄕任)을 높은 벼슬처럼 보고 군교나 아전이 되는 것을 공명으로 여긴다. 일찍이 관찰사가 경연에서 아뢴 것을 들으니, 엄씨(嚴氏)가 한 고을에서 으뜸가는 반족(班族)이고 그 다음은 고씨(高氏)·신씨(辛氏)·유씨(劉氏) 등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읍의 사무는 자연 이 몇몇 성씨들이 주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필시 이들 몇몇 성씨를 질시하는 자가 이들을 없애 버리고 혼자 그 권세를 차지할 속셈으로 이와 같은 흉악한 말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경의 장계를 본 뒤에 그것을 일소에 부친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 특별히 마음 놓이지 않는 것이 있다. 경이 만약 지나치게 놀라서 앞서 거론한 몇몇 성씨들이 정말로 범한 죄가 있는 것처럼 여겨, 서둘러 먼저 널리 잡아다가 경솔하게 형문을 가한다면 이는 덕(德)을 베풀고 원수를 갚아주기 위해 무지한 산골 백성들에게 공연히 고통을 끼치는 것에 거의 가깝지 않겠는가. 그 가운데 만약 도리도 알고 세상일도 아는 선비가 있다면 조정의 본뜻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모르고 경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이런 일을 한다고 볼 것이니, 웃음거리를 끼치는 것이 실로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아, 간악한 백성이 부박한 풍속에서 나오는 것은 곧 조정의 교화가 밝지 않은 결과이다. 설사 간악한 백성을 당장 잡았다 하더라도 옛날 우(禹)임금이 수레에서 내려 죄수를 보고 눈물을 흘린 일로 헤아려 본다면 너무도 조심스럽고 두렵다. 더구나 죄 없는 자까지 뒤섞여 체포되어 하늘을 부르짖으며 하소연할 곳이 없게 한다면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맛있는 음식을 먹은들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우선 지금 내려보내는 유지(有旨)를 한문과 언문으로 베껴 크게 한 장을 써서 큰 길거리에 내걸고, 아울러 한 통을 베껴 해당 고을의 사류와 백성들에게 선포하여 각자 조정을 믿어 두려워하지 말고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라. 간악한 백성을 곧 붙잡는 문제에 있어서는 천도가 명명백백하여 찾아내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범인을 붙잡는 대로 즉시 시원하게 국법으로 처단하여 영월의 사류와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해줄 생각이니, 경은 이렇게 알고 널리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또 별지에 써서 내리기를,
"의당 심문해야 할 자는 사실 여부를 따질 것 없이 글 속에 적힌 자들을 과연 이미 잡아왔는가? 특별히 하유한 대로 절대 가볍게 형신을 가하지 말라. 만약 얼굴을 직접 대해 따져보고 말을 들어보면 반드시 별다른 것이 없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이니, 그럴 경우 즉시 형틀을 벗기고 보석시켜 결말을 기다릴 것이며, 그 가운데 보석해서도 안 될 자는 당장 석방하라. 흉계를 꾸민 간악한 백성은 조사해서 글로 써서 밀계하되, 긴요하지 않은 일을 보고할 경우 보고 듣기에 번잡스러우니 먼저 공초를 받은 뒤에 보고하거나 간악한 백성을 잡은 뒤에 보고하라. 하유하는 대체적인 개략은 이상과 같다. 내 뜻을 적절히 잘 받들어 거행하는 것과 영월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은 그 책임이 오로지 경에게 달려 있다. 경은 이미 도내의 사정을 대략 살폈을 것이니, 반드시 특별한 하유가 없더라도 알 것이다. 이 별유(別諭)를 받은 뒤에 올리는 장계 속에 경의 의견과 생각하는 바를 하나하나 아뢰어라. 흉서를 쓴 자의 행위는 지난해 동철(東喆)의 무리보다 더 심하니, 경은 각별히 조사해서 알아내라."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자규루(子規樓)를 중건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 누각은 영월부(寧越府)의 객관(客館) 곁에 있는데, 옛 이름은 매죽루(梅竹樓)였다. 단종(端宗)이 동쪽으로 옮겨갔을 때 언제인가 그 누각에 와서 소쩍새 소리를 듣고 자규사(子規詞)를 지었는데, 그 가사가 매우 처절하여 영월 사람들이 슬퍼한 나머지 그 누각을 자규루라 이름하였다. 사국이 고을을 순찰하다가 영월에 도착하여 중건할 계획으로 그 터를 찾아보니 이미 매몰되어 그 자리에 민가가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빈터를 찾아서 측량을 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큰 바람이 불더니 불이 나서 객사 남쪽에 있던 집 5채를 태워버리고 나니 누각의 터와 계단이 또렷이 드러났는데 그 높이가 평지에서 1자 정도 솟아올랐다. 그 당시 날씨가 춥고 눈이 쌓여 목재와 돌을 구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이 다 걱정하던 차에 마침 큰 비가 사흘이나 내려 강물이 크게 불어났다. 그리하여 금장강(錦障江)의 동쪽에서 나무를 베어서 강물에 띄워 흐름을 타고 내려오게 하고, 봉산(蓬山)의 북쪽에서 돌을 캐었는데 진흙이 미끄러워 운반하기가 쉬었다. 경연관 이만수(李晩秀)가 그 사실을 아뢰자 상이 매우 이상하게 여기고 감사에게 하유하여 그 자세한 내용을 물었다. 이때에 와서 사국이 치계하여 그 일을 갖추어 말하니, 전교하기를,
"이상하다. 이상하다. 어찌 한 누각이 허물어진 것을 수선하는 것만이 각기 때가 있다고 말할 뿐이겠는가. 옛터를 찾을 때 갑자기 불이 나서 5채의 오두막을 태우고 바람이 일어나 그 형세를 도와 재와 모래를 쓸어서 날려보내, 옛날 기왓장이 흙 밑에서 드러나고 무늬 있는 주춧돌이 옛터에서 드러났다. 심지어는 한겨울 깊은 산골에 사흘이나 큰 비가 내려 높은 산비탈의 쌓인 눈을 녹여 버려 나무를 베고 돌을 캘 수 있었다. 동지와 섣달 사이에 그것을 실어다가 1월에는 기초를 닦고 2월에는 기둥을 세웠으니, 그 공사의 신속함은 귀신의 이치가 사람의 마음과 잘 어울린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전혀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때마침 생각이 나서 사육신의 충절에 감회가 일어나 사신(史臣)을 보내 금궤 석실(金櫃石室)에 있는 실록을 상고하게 하였다. 그런데 사신이 돌아와 복명한 날이 곧 자규루의 기둥을 세운 길일이었으니, 이것을 우연하고 예사로운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제사를 지내는 일은 바야흐로 관각의 신하에게 별도로 비지를 내려 초기(草記)하도록 하겠거니와, 누각을 다시 짓는 일을 어찌 도백에게 비용을 내도록 하겠는가. 모두 공곡(公穀)으로 탕감해 주도록 하라."
하고, 대신 이복원(李福源)에게는 그 일을 기록하도록 하고 대신 채제공(蔡濟恭)과 이조 판서 홍양호(洪良浩)에게는 상량문을 지어 올릴 것을 명하였다. 또 해마다 능을 봉심하는 예조의 관원으로 하여금 한식에 맞추어 가서 신령에게 사유를 아울러 고할 것을 명하였다. 또 감사에게 자규루의 모양을 그려 올릴 것을 명하고 하유하기를,
"고을 안에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가 있으면 간행본이나 필사본이나 혹은 조각나서 불완전한 글이라도 관계치 말고 능지(陵誌)에 실리지 않은 것이 있으면 거두어 모아서 올려 보내라."
하였다.

 

2월 7일 임자

화유 옹주(和柔翁主)의 아들 황기옥(黃基玉)을 의성 현령(義城縣令)으로 삼았다. 귀주(貴主)의 신주가 통과하는 각 고을에 그것을 지고 갈 장정을 번갈아 내줄 것을 명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주게 하였다. 도위(都尉) 황인점(黃仁點)이 휴가를 받아 부모를 봉양하겠다고 청하자, 말을 주어서 호송하되 대신의 전례를 적용하라고 명하였다.

 

제주 목사 이홍운(李鴻運)이 귀양지를 옮긴 죄인 이회수(李會遂)와 중 신규(信圭) 등이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없어진 사실을 계문하였다.

 

2월 8일 계축

소대(召對)를 거행하였다.

 

문의(文義) 사람 신의청(申義淸)의 나이가 1백 세였다. 경연관이 아뢴 것에 따라 특별히 도총관을 제수하고, 하유를 내려 부르되 관에서 교자와 말을 대주도록 하였다.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아뢰기를,
"양서(兩西)014)  의 각 감영과 개성부의 장계에 대해 그것을 가지고 올 때 마패와 말먹이를 지니고 있거나 내려갈 때 비변사에서 말먹이를 되돌려 주는 경우 및 신의 감영에서 반첩(反貼)015)  을 보내는 것 이외에는 일체 파발마를 불법으로 탄 것으로 논죄하소서. 또 양서 지방에 특별히 배정한 생물을 제외한 영남 지방의 피적(皮荻)과 밤 등을 진헌(進獻)할 때는 모두 각도의 쇄마(刷馬)로 실어서 운반하게 하소서."
하니, 그렇게 하라 하고 이어 한여름 더위 때가 아니면 생물이라 하더라도 파발마를 쓰지 말게 하라고 명하였다.

 

2월 9일 갑인

구익(具㢞)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상이 곤궁한 백성들이 혼사와 장사에 시기를 넘기는 것을 크게 염려하여 한성부에 수소문해 아뢸 것을 여러 번 신칙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한성부가 시기를 넘겨 혼사를 치르지 못한 사람 13인을 아뢰니, 상이 한성부의 당상관을 엄중히 꾸짖어 체직하고 본부의 낭관과 부관(部官)을 모두 잡아가두라고 하였다. 이어 다시 더 수소문해 보도록 한 뒤에 이윽고 한성부의 당상관과 오부 관원과 낭관을 불러 만나보고 전교하기를,
"중춘(仲春)은 곧 화기를 맞이하는 시기이다. 남녀간에 나이가 찼는데도 혼사를 치르지 못한 자와 장사를 제때에 지내지 못한 자를 특별한 규례로 돌보아 주는 것은 진실로 옛 성군들의 인(仁)에 바탕을 둔 정사와 부합되는 것이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부관은 곧 옛날 낙양령(雒陽令)으로 도성 백성들의 고락이 그에게 달려있는데, 관원들은 유달리 고통스러워하는 한탄이 있고 하인들은 믿고 살아갈 터전이 없으니, 성실하고 부지런히 일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오랫동안 변통을 하고자 했으나 하지 못했는데, 대신과 전관(銓官)들에게 서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0일 을묘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치계하기를,
"이 옥사의 핵심은 엄씨의 종에게 있는데, 아직도 체포를 하지 못하여 실정을 알아내는 것이 이처럼 늦었습니다. 엄씨와 고씨의 다툼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데, 지금 엄건중(嚴健中)의 공초로 보면 향임(鄕任)과 교임(校任)을 여러 해 수행했기 때문에 질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원망과 비방이 사방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교활한 무리들이 몰래 그를 없앨 계책을 부리고자 이와 같은 흉패한 짓을 일으킨 것이 아닌 줄 알겠습니까. 바야흐로 이를 여러모로 조사하여 범인을 반드시 잡아내려고 하는데, 여러 죄수들은 대부분이 농부이고 그중에 고진명(高進明)이란 자는 사람됨이 매우 참람되고 교활합니다.
이번에 그들을 사로잡을 때 허다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정보가 이미 신의 감영에서 염탐하는 과정에 들어왔으므로, 그 흉모를 헤아리기 어려워 함께 엄하게 가두어 두었습니다. 엄건중은 비록 이 흉서 속에는 들어있지 않으나, 흉서를 가져온 것이 바로 엄건중의 종이기 때문에 계속 따져 조사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김천중(金千仲)은 엄건중의 종에게 뇌물을 받고 그 아들에게 글을 전하게 했으니, 생각건대 반드시 엄건중의 종과 뒤얽힌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형신을 가해도 사실대로 진술하지 않으므로 건중과 함께 가두었습니다. 이번에 공초를 받은 것부터는 하교에 따라서 밀계(密啓)를 하지 않고, 죄인이 공초한 글을 정미년 추국할 때의 예에 따라서 공초 초본을 올려 보냅니다."
하니, 회유하기를,
"이 공초 내용을 보니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찌 단지 일소에 부칠 뿐이겠는가. 지방 사람들끼리 서로 싸워 감정을 풀기 위해 터무니없는 모함을 하는 무리들을 다스리는 것은 관찰사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니, 애초에 조정에 알린 것은 무엄한 행위임을 면할 수 없다. 연전에 새로 규정을 정해 익명으로 걸어붙이거나 투서한 종이쪽지는 안으로 각 감영과 밖으로 각 영읍에서 곧바로 태워버리고 감히 아뢰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금석(金石)과 같은 법률이니, 설령 쓰여진 글이 놀라운 것이더라도 대신과 서신을 주고받아 밑에서 처리하는 것이 옳지 어찌 자잘한 일을 금법을 무릅쓰고 아뢴단 말인가. 경은 마땅히 무겁게 처벌해야 할 일이나 본 사건을 아직 조사하여 처리하지 못했으므로 우선 무겁게 추고한다. 밀계를 어찌 용이하게 할 수 있으며, 본 사건이 또 어찌 감출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른바 엄건중과 고진명은 우선 감영 근처의 민가에 보석하여 맡겨 두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일체 잠시도 머물려 두지 말고 즉각 내보내 그날로 본토로 돌아가 생업에 안착하도록 할 것이며 역졸은 해당 수령에게 넘기도록 하라.
이 사건은 일단 보고된 이상 계략을 꾸며 남을 모함한 자를 즉시 조사해 찾아내어 백성들을 크게 모아놓고 해당 부사로 하여금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린 다음 큰 길거리에 목을 매달아 지방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는 풍조를 징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긴요하지 않은 공초는 아뢰지 말고, 범인을 잡은 뒤에 단지 자복을 받아 법대로 처단한 내용만을 아뢰도록 하라. 이번 두 번의 밀계는 애초에 은밀히 할 것이 아니므로 정원으로 하여금 규정에 따라 불태워 버리게 하였으니, 경은 그렇게 알라."
하고, 이어 경연관에게 이르기를,
"이 사건은 곧 지방 사람들끼리 벌인 싸움에 불과한데 사사로운 유감 때문에 투서를 하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선조(先朝)에서 매번 이런 일에 대해 내리신 분부가 준엄하였으니, 하나를 징계하여 백을 경계하는 일을 마땅히 이런 무리에게 시행해야 한다. 그들 가운데 주모자는 사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한 달 남짓한 뒤에 사국(師國)이 투서한 자 김재준(金載浚)을 잡아서 신문하니 사실이었다. 그래서 재준을 영월부에서 효수하였다.

 

2월 11일 병진

윤대를 거행하였다.

 

2월 12일 정사

차대를 거행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점포의 폐단을 바로잡아 개혁하는 일은 평시서의 장부를 상고해 보건대, 30년 이래로 생겨난 명목은 단지 두세 가지의 점포에 지나지 않으니, 햇수가 오래되고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한정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육의전(六矣廛) 이외에 백성의 일상 생활과 가장 관계가 깊은 채소와 어물 등의 점포 같은 것은 마땅히 고려해 보아야 할 것들인데 혹 원래의 점포를 혁파하거나 혹은 점포의 이름만 남겨두고 난전(亂廛)은 철저히 금지한 뒤에야 백성들이 살아나갈 수가 있습니다. 또 들으니 신이 경연에서 아뢴 뒤로 어물 등의 물가가 갑자기 전보다 싸졌다고 하니, 개혁을 하고난 뒤에 실효가 있을 것은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하고, 평시서 제조        김문순(金文淳)이 아뢰기를,
"여러 가지 점포들 가운데는 설치한 지 수백 년에 가까워 뿌리가 이미 단단해졌고 위로 국가의 수요에 응하는 것도 있는데 지금 만약 난전을 엄하게 금하여 제각기 매매를 하게 한다면, 여러 점포가 잔폐해져서 혁파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실로 금지하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신이 아뢴 것도 여러 가지 점포와 난전을 모두 철저히 금지하자는 것은 아니고 그중에서 일상 생활에 가장 긴요한 물품을 취급하는 점포에 대해서 말한 것일 뿐이다. 다시 더 헤아려서 속히 이 폐단을 바로잡으라. 난전을 금지한다 하더라도 사적으로 도거리 장사를 하는 것은 형세상 반드시 있을 수 있는 일이니, 다시 적절한 방법을 강구해서 조정할 수 있는 길을 찾으라."
하였다. 제공이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오부(五部)에서 혼사와 장사의 시기를 넘긴 자들에 대해 소략하게 뽑아 아뢰자 신칙하시는 하교가 엄중하셨으니, 이는 성군의 정사입니다. 신이 요즈음 들으니 광주(廣州) 경안면(慶安面)의 양반 정씨(鄭氏) 집에 혼사 시기를 놓친 자가 있는데, 남매의 나이가 혹은 40살에 가깝고 혹은 30살을 넘은 자가 4, 5명이나 된다 합니다. 특별히 관찰사와 지방관에게 신칙하여 각별히 도와 주어 인륜을 폐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채제공에게 일렀다.
"돌아보건대 지금 온 세상 사람들이 우물쭈물하면서 말없이 지내는 것이 일반적인 상태이니 실로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혹시 인재가 점차 격이 떨어져 비실비실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어느 시대이건 인재가 없지는 않은 법이니 떨쳐 일어날 날이 있을 것인가? 비단 인재만 이와 같은 것이 아니다. 요즈음 문체(文體)도 점차 그 수준이 낮아지는데 어떤 사람은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제도를 시행한 뒤로 온 세상이 나쁜 것을 본받아서 그렇다고 말한다. 대체로 초계 문신 제도를 시행한 것은 크게 문풍(文風)을 변화시키는 효과를 보려고 한 것인데 이제 도리어 이와 같은 폐단이 생기게 되었으니, 장차 어떤 방법으로 구제할 수 있겠는가. 문체가 옹졸한 자는 모두 과거 시험에 합격시키지 않는다면 저절로 교정이 되지 않겠는가. 일반 산문의 경우는 사육문(四六文)과 다른데, 또 어찌 볼 만한 작품이 없단 말인가. 경은 유생들을 깨우쳐주어 조정에서 문체를 크게 바꾸려고 한다는 뜻을 알게 하라."

 

유당(柳戇)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김이정(金履正)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13일 무오

영희전(永禧殿)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사간 이운빈(李運彬)이 상소하기를,
"신이 대간으로 선발된 뒤 10년 동안 귀를 막고 입을 다물었으므로 매양 스스로 반성하면 춥지 않은데도 떨립니다. 지난번에 옥당(玉堂)의 상소에서 홍병찬(洪秉纘)의 일을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인데 말하지 않았다 하여 논책(論責)한 바가 있었는데, 신도 역시 말하지 않은 삼사(三司) 관원 중에 한 사람입니다. 병찬의 무엄하고 방자한 죄는 그가 작성한 정목(政目)을 한 번이라도 본다면 누가 놀라고 분통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달이 지나고 한 해가 지나도록 한 사람도 그 죄를 성토한 사람이 없으니 유신(儒臣)이 죄주기를 청한 것도 역시 늦었다고 하겠습니다.
재작년 자전(慈殿)의 엄정하신 하교가 내렸을 때 신은 마침 말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반드시 간쟁해야 한다는 의리를 함부로 고집하여 쫓겨나는 신세를 자초했으니, 지금 다시 생각하면 황공하여 진땀이 등을 적십니다. 아, 지난 겨울 전하께서 강가에 행차하신 일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행궁(行宮)의 지척에서 흉적을 만나본 것은 생각만 해도 뼈끝이 오싹한데 전하의 조정에 진정 충신 의사가 하나라도 있다면 반드시 머리가 깨지고 피를 뿌리는 한이 있더라도 맹세코 이 흉적과는 함께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의 조처는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고 여러 사람의 뒤를 따라 궁궐 문을 밀치고 들어간 것에 그쳤을 뿐입니다. 만약 우리 자전의 지극하신 덕과 정성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어가를 돌릴 수 있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오래되지 않아 잘못을 고치는 것을 성덕(聖德)의 지극함으로 여기지 말고 이런 일이 애초에 없게 하는 것을 성학(聖學)의 공부로 삼으소서.
병신·정유년 이후로 난신 적자(亂臣賊子)로서 어찌 이재간(李在簡)과 같은 자가 있었겠습니까. 역적 시위(時偉)와 한 뱃속이 되어 전후의 중대한 논의를 극력 피하고 역적 구선복(具善復)의 탈을 바꿔 쓰고서 공석에서 사리에 어긋나는 말을 거침없이 하였습니다. 재작년 겨울 현륭원을 새로 옮겨 모실 때 전하께서 슬픔을 자제하지 않고 통곡하시어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자 좌우의 신하들이 울먹거리며 가슴을 태웠고 심지어는 하인들까지도 눈물을 뿌리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도감 당상(都監堂上)으로서 상이 거둥하는 길을 경비하지 않고 병을 핑계삼아 중간에 돌아왔으니, 임금을 업신여기는 그의 마음을 길가는 사람도 다 미워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유사(有司)에게 분부하여 빨리 응분의 처벌을 시행하게 하소서.
전하께서는 매번 형정(刑政)에 있어서는 죄를 거두어 감해 주는 것만 힘써 대체로 공론에서 나오고 대간의 계청에 오른 것에 대해 우선 윤허하셨다가 곧 다시 취소하시는 것이 하나의 격식이 되어버렸으니, 성덕(聖德)에 누가 되고 뒤폐단을 끼치는 점으로 볼 때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범죄가 극히 중하고 계청에 올라와 허락을 받은 것은 법대로 거행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등극하신 초기에는 관직의 제수를 신중히 하고 과거를 드물게 보는 것으로 초기의 규모로 삼으셨습니다. 이때에는 한 자급을 올려 주고 하나의 대간을 제수하는 경우라도 사람들이 모두 영광으로 여겨 글을 못하는 자는 요행을 바라는 기대를 끊고 재주가 있는 자는 더욱 스스로 분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요근래에는 과거가 너무 잦다 보니 요행히 급제하는 자가 많고 6품에 오른 자는 대관(臺官)에 들지 못한 경우가 없으며 이마에 옥관자를 붙이고 허리에 금띠를 두른 자들이 서로 잇달아 은혜를 입습니다. 삼가 듣건대 선왕의 융성하던 때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중신은 두세 사람 뿐이었고 참판 이후산(李後山)은 아경(亞卿)으로서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기로소에 들어가도록 허락받았으나 자급을 올려주는 것은 그만두었다 합니다. 그 당시 벼슬자리를 아끼기를 이처럼 엄격하게 한 것이 어찌 오늘날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걱정하는 것은 바로 당나라 위징(魏徵)의 이른바 ‘정관(貞觀) 초기에 비하면 거리가 멀다.’는 점입니다. 당파의 명목이 생기고부터 아부하는 마음이 우세하여 진실로 그 취향과 의론이 서로 비슷한 자는 그저 두둔해 주는 것만 앞세워 비록 원만하기를 요구하고 가볍게 충고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말하는 자는 미움을 받을까 두려워하고 당한 사람은 자기에게 유감이 있다고 여깁니다. 근래에 박유환(朴猷煥)이 인척 관계임을 핑계삼아 마땅히 논해야 할 것도 논하지 않고 피혐하기까지 한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옛사람의 마음은 공정하고 사심이 없기 때문에 비록 친척이나 친구간이라 하더라도 혹은 경연에 올라 면전에서 책망하기도 하고 혹은 차자나 소를 올려 규탄하기도 했으며, 이를테면 전최(殿最)로 인해 쫓겨났다거나 파직과 삭직의 죄를 논했더라도 그의 자제들이 혐의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의견은, 조정의 신하들이 혐의로 여기는 규정은 대대로 내려오는 원수가 아닌 경우 대수를 제한하여 혐의의 범위를 넓히지 말아야 하고 파직이나 삭직과 같은 가벼운 처벌은 아예 피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전 지평 신대귀(申大龜)의 상소에서 진술한 바 해서(海西)니, 여수(呂水)니 하는 말들은 지금 당장 긴급한 문제가 아니니 그 거만하고 무례한 잘못이 현저합니다. 신은 대귀에게 견책의 벌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수원(水原)의 새 고을은 원침(園寢)을 옮겨 모신 뒤에는 그 형편이 특별한 데다가 삼남(三南)의 요충지이고 산성의 지리적인 이점을 끼고 있으니, 거처할 백성을 모으고 읍의 기반을 튼튼하게 만드는 것은 늦출 수 없는 사안입니다.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 가운데 재력이 넉넉한 자들을 모집하여 집을 짓게 한다면, 부유한 가구가 많아져 그 은택을 입는 자가 배로 늘어날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임금이 효성에서 우러나와 추진하시려는 일이니, 그 누가 기꺼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한나라 때 장안(長安)의 오릉(五陵) 근처에 호걸이 많았던 것도 아마 이 법에 의해서였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에 스스로 인혐(引嫌)한 일은, 요즈음 귀를 막고 입을 봉한 죄가 어찌 다만 그대 한 대신(臺臣)에게만 있겠는가. 다음에 진술한 일은 말할 필요가 없고, 그 다음에 진술한 일은 허락하지 않는다. 끝에 진술한 말은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엿볼 수 있다. 때때로 내 자신을 점검하여 반성해 보면 오히려 처음의 마음을 저버린 것이 많음을 깨닫겠는데 하물며 당면한 정사를 보는 조정의 신하로서 어찌 처음만 못하다는 탄식이 없겠는가. 네 말은 진실로 나를 사랑한 것으로서 너무나도 옳은 말이다. 조정 안에 당파의 버릇과 사적으로 아부하는 폐단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간다고 말할 수 있으니 세도(世道)를 위하는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성과를 거두는 것이야 막연하지만 고심하는 마음이야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조정의 신하가 혐의를 두는 규정에 대해 조정에서 대수(代數)를 결정해 주기까지 한다면 사체가 과연 어떻겠는가. 앞으로는 지나치게 피혐해서는 안 되는 것을 지나치게 피혐하는 사례에 대해 엄히 신칙하여 대신(大臣)과 삼사(三司)가 발견되는 대로 논책(論責)하도록 하며, 파직이나 삭직 등 가벼운 벌을 당하고서 굳이 피혐하는 잘못된 사례는 거듭 엄금하도록 하는 일을 정원으로 하여금 고사(故事)로 삼아 기록해 두게 하겠다. 신대귀를 견책하는 일은 네 말이 옳지만, 그러나 그때의 비답 가운데 ‘속았다[見誑]’고 한 말로서 그로 하여금 스스로 후회할 줄 알게 하는 뜻을 은밀히 보였으니 그만하면 충분할 것이다. 지금처럼 우물쭈물 넘어가는 때에 어찌 꼭 두루 갖추기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수원의 새 고을에 부유한 집을 모아 자리잡게 하는 일은, 이전에도 애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 두서가 잡히지 않았다. 지금 생각으로는 짧은 기간에 민가가 즐비하게 들어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니, 이 때문에 밤낮으로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다시 사람들을 불러들일 수 있는 방법에 더 한층 유의하려고 한다."
하였다.

 

2월 14일 기미

중궁전(中宮殿)의 공제(公除)가 12일에 있었으므로 조정에서 그날 문안을 드리려고 하였는데, 사알(司謁) 백경전(白景旜)이란 자가 승지 홍인호(洪仁浩)를 보고 말하기를,
"문안은 마땅히 내일 해야 합니다. 《상례보편(喪禮補編)》에 그 기록이 있습니다."
하니, 인호가 그 말을 믿고 의정부에 통지하였다. 상은 그 말을 듣고, 사알은 환관과 다를 것이 없는데 승지가 그와 사사로이 말한 것은 내외(內外)를 엄격히 구분하는 도리가 아니라 하여, 인호는 삭직하고 경전은 숙천(肅川)에 유배하였다.

 

2월 15일 경신

전교하였다.
"어제 저녁에 본릉(本陵)016)  에 향사(享祀)를 거행한 뒤 추모하는 마음이 진실로 깊어지니, 금년은 마침 탄생하신 지 1백 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봄에는 홍릉에 행차하겠다."

 

2월 17일 임술

동지정사(冬至正使) 김기성(金箕性)과 부사 민태혁(閔台爀)이 연경을 떠났다는 것을 치계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 위로하게 하고 전교하기를,
"지난 겨울 중국의 역서(曆書)에 관한 자문을 가지고 온 관원을 불러 물어보고 이미 대신에게 말을 전하도록 한 일이 있었으므로 내 생각에는 이번 걸음에는 정사와 부사가 책임을 맡은 역관을 엄중히 신칙하여 그로 하여금 예부에 알려서 기어코 폐단을 바로잡으려니 했었다. 그런데 먼저 온 역관을 불러 물어보니, 장차 책문(柵門)의 사람들이 혹시 유감을 가질까 두려워 감히 한마디 말도 못하고 돌아왔다 하였는데 이는 매우 옳지 않다. 사신들이 책문을 출입할 때에 요즈음 책문 안의 교활한 군교들이 뇌물을 요구하므로 사신의 걸음이 지체되지 않을 수 없고 이러한 과정에서 치욕을 당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번 사행은 이미 돌아오는 중이니 예부에 글을 올리는 것은 비록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으나, 만약 책문을 나올 때 또 종전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정문(呈文)을 보내거나 자문을 띄워 그 간사한 버릇을 철저히 징계하는 일을 결코 그만둘 수 없다. 묘당으로 하여금 돌아오는 사신에게 행문을 보내, 책임을 맡은 역관의 무리로 하여금 감히 종전의 잘못을 답습하여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의 별단(別單)은 다음과 같다.
"황제가 사신을 앞으로 나오도록 하여 친히 국왕의 안부를 물은 뒤에 아들을 낳은 경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기쁘다는 뜻을 보였으며, 정사와 부사를 탑전(榻前)으로 불러 친히 술을 부어 주었습니다. 또 빙희(氷戱)·등희(燈戱)·오산지희(鰲山之戱) 및 연말과 설날의 연회에 참석하도록 하였습니다."

 

황해도 병마 절도사 원후진(元厚鎭)이 관할 내에 있는 소기진(所己鎭)과 위라진(位羅鎭)이 군량을 기준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것은 오로지 절도사가 검칙을 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인데, 끝내 죄가 돌아가는 것은 세력 없고 잔폐한 첨사나 만호에게만 미치니, 전혀 훗날을 징계하는 정사가 아니다."
하고는 특별히 원후진을 파직하였다. 이어서 감사에게 지적해서 받아낼 곳이 없는 무리를 조사하여 아뢸 것을 명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각도에 신칙해서 무릇 편의에 따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낱낱이 보고하지 말도록 하여 각진에서 사람을 보내고 맞는 폐단을 끼치는 일이 없게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곡식이 많은 진(鎭)에서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은 관아의 곡식을 축내는 것보다 심한데, 관서 지방의 각진은 작년에 신칙한 뒤로 곡식을 고르게 조절한 성과가 있는가? 진민(鎭民)도 역시 우리 백성인데, 그들의 고통을 하소연할 길이 없다는 말을 듣고도 그 고통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이 어찌 불쌍한 사람을 돌보는 정사이겠는가. 관서 지방에서 성과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먼저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승(李祖承)을 이조 참의로, 정대용(鄭大容)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전 훈련 대장 이경무(李敬懋)를 특별히 여주 목사로 보임하였다. 경무가 오랫동안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은 것이다.

 

2월 18일 계해

소대를 거행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독하였다. 검토관 이의봉(李義鳳)이 아뢰기를,
"당 태종(唐太宗)의 정관(貞觀) 연간의 훌륭한 정사는 모두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가운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세자로 계실 때 말씀하시기를 ‘태종은 타고난 자품이 총명하여 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언로를 넓게 열긴 하였으나 일찍이 위징(魏徵)을 가리키면서 「장차 이 시골 늙은이를 죽여버리겠다.」 하였으니, 그가 진심으로 간하는 말을 받아들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였으니, 이 하교는 진실로 보통 생각을 크게 뛰어넘은 것입니다. 또 일찍이 사 상채(謝上蔡)017)  가 말한 ‘극기(克己)는 성품이 편벽되어 극복하기 어려운 곳부터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구절을 강론할 때, 천신(賤臣)이 감히 우러러 우리 전하의 성품에 편벽되어 극복하기 어려운 곳을 물었더니 ‘약(弱)이란 한 글자가 바로 내 성품의 편벽된 곳이다.’ 하셨습니다. 신이 그때는 물러나서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전하께서 등극한 이후 확고한 용단을 내리고 훌륭한 정사를 크게 천명하시므로, 신은 당시의 하교는 한때 겸손한 말씀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정령(政令)이 간혹 위축되어 미봉적이고 구차스러운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사형의 율을 적용하겠다고 허락하셨다가도 도로 취소하는 것은 구차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으며, 양사가 논계한 죄수들에 대해 무턱대고 윤허하지 않는다, 또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답하시는 것은 미봉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몇 가지는 혹 나약한데 가까우므로 신은 저으기 걱정됩니다.
지금은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 실로 급선무입니다. 기강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나라가 따라서 망하는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당 태종은 7년 간 훌륭한 정치를 하였는데도 위징은 오히려 열 가지의 좋지 않은 조짐에 대한 경계를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는 등극하신 지 15년 동안 밤낮으로 걱정하고 날이 저물도록 쉴 틈이 없으시지만 저번 대간에게 내린 비답에 ‘점차 처음만 못하다고 한 경계는 실로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셨으니, 그 말씀은 너무나도 위대하십니다. 이와 같은 임금이 계시는데도 좋은 정치를 하지 못한다면 어찌 뜻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이 한탄하고 애석해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양사가 논계한 여러 죄수로 말하더라도 시위(時偉)와 김우진(金宇鎭)을 느슨하게 다스린 결과 요사한 역적 이재간(李在簡)이 나왔으니, 재간의 죄를 또 느슨하게 다스릴 경우 재간과 같은 자가 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홍국영(洪國榮)과 송덕상(宋德相)을 느슨하게 다스린 결과 여러 역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고 마지막에 생긴 폐단은 홍병찬(洪秉纘)의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는 외로운 새새끼나 썩은 쥐같은 자인데도 오히려 임금과 힘을 겨루려는 조짐이 있었으니, 이런 자를 느슨하게 다스린다면 또 어찌 임금과 힘을 겨루려는 자가 다시 나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바른 자를 등용하고 바르지 못한 자를 버리며 착하고 착하지 않은 자를 구별하여 지난날 악에 물든 자들로 하여금 마음을 바꾸고 태도를 고치게 한다면 세신(世臣)을 보전하는 길이 이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형편은 나날이 고단해지고 임금의 위엄은 나날이 떨어져 권력이 아래로 내려가는 조짐이 있습니다. 신이 연전에 일이 있기 전에 미리 경계해야 한다는 것과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장차 언다는 뜻으로 진달한 바가 있습니다만, 그 말이 불행하게도 적중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이 경계가 또 전일처럼 되지 않을 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네가 세자 시강원의 옛 관원으로써 그 당시에 했던 말을 기억하여 이처럼 누누이 권고하고 당면한 정사의 잘잘못까지 언급하였으니, 근래에 처음 듣는 것으로 매우 가상하다. 대체로 그때 ‘약(弱)’이란 한 글자로 경연에서 한탄했던 것은 아마도 조정에 임금을 무시하는 무리가 많은 것이 마음속에 근심과 탄식이 되어 언외(言外)의 의탁한 말로 나타났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병신년과 정유년 이후 세상의 변고가 많아서 세신(世臣)들이 상처가 많았다. 그러니 지금은 무엇보다도 그들을 쉬게 하고 보살펴주어야 한다. 너는 기둥과 큰 배에 쓰이는 재목을 보지 못했느냐. 그 재목은 교목(喬木)이 아니면 쓰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옛사람이 교목을 세신에 견주었다. 백 년을 잘 보살펴 기른다 하더라도 오히려 알맞은 재목을 찾아내지 못할까 걱정이니 이 때문에 기르는 방법이 혹시 서툴지나 않은지, 도끼를 가진 자들이 날마다 침범하지는 않는지 전전긍긍하며 차라리 지나치게 감싸주는 결함이 있을지언정 잘려나가고 휘어지는 손상을 끼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만약 쉬게 하고 보살피는 것이 지나쳐서 퇴폐하고 해이해지는 상황에 이른다면 또한 어찌 그 해당하는 곳에 침을 놓아 정신을 가다듬게 하는 방법이 없겠느냐. 네가 말한 미봉이란 것은 곧 내가 말한 쉬게 하고 보살펴준다는 것이다. 네가 숨김없이 말하였기에 나도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 보여주는 것이다."
하였다. 뒤에 대신 채제공에게 하유하기를,
"요즈음 깨우쳐 주는 말을 듣지 못하던 차에 이의봉이 능히 나를 권고하였는데, 느른하고 나약하다 하였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요즈음 정령(政令)으로 말한다면 혹 고식적인 경향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병신년과 정유년 사이에는 세상의 변고가 많았으므로 부득이 제거하여 다스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들은 모두 고가 대족(故家大族)이었다. 옛사람이 세신을 교목에 비유했는데, 교목을 몇 년이나 쉬게 하고 길러야만 기둥과 큰 배를 만드는 재목으로 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서호수(徐浩修)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이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요청하였으나 너그러운 말로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간 김이정(金履正)이 상소하기를,
"지난 겨울 교외의 처소에서 밤을 지새운 일에 대해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백관과 군민(軍民)이 길거리를 뛰어다녔으며 새벽까지 궁궐 문을 열어젖히고 부르짖었으나 그 소리가 위에 통하지 않았습니다. 궁궐을 지키는 신하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어 서로 끌고서 왕대비전의 문하에 엎드려 있던 끝에 덕음(德音)이 내려서 상의 행차가 도로 돌아오자 잠깐 사이에 나라의 형편이 반석처럼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전의 말씀 가운데 거둥하시겠다는 명은 실로 신하들로서는 감히 받들어 따를 수 없는 것이었으니 우리 자전께서 몇 년 동안 병중에 계시는 몸으로 한겨울에 10리나 거둥하신다는 것은 그 어찌 감히 신하된 마음에 편안한 일이겠습니까. 더욱이 사저(私邸)로 물러가 있겠다는 전교는 더욱 천만 번 두렵고 떨리는 일인데,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금방 장락문(長樂門) 밖에 연(輦)을 준비하여 조금도 신중히 고려하는 점이 없었으니, 이 어찌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전날 합문에 엎드렸던 혈성으로 마땅히 중문 섬돌에 머리를 짓찧으면서라도 자전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이키도록 했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의례적으로 뜻을 받들었으니, 신은 당시 궁궐을 지키던 모든 신하들에게 마땅히 논죄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하여 새삼스레 들먹이며 또 어찌하여 감히 이렇게 끌어대는가."
하였다. 이에 이조 판서 홍양호(洪良浩), 병조 판서 유의(柳誼), 우승지 유문양(柳文養), 검교 대교 심상규(沈象奎) 등이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신들은 바로 그때 궁궐을 지키던 신하들입니다. 그 당시 강가의 처소에서 밤을 넘기실 때 모든 신하들이 서로 이끌고 궁문에서 부르짖었으나 상의 뜻을 돌릴 길이 없던 차에 다행스럽게도 자전께서 하교를 내리시고 심지어 거둥하시겠다는 명까지 있으셨습니다. 병중에 계시는 몸으로 심한 추위를 견딘다는 것이 너무도 걱정스런 일인 줄을 모른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생각건대 상의 어가를 돌이키게 하는 길은 오직 그것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 분부를 거두시라고 삼가 청하지 못하고 결국 마지못해 그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저 대간도 역시 그 당시 다급해 하던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데, 다같은 천성을 타고난 자로써 이처럼 상도(常道)에 어긋나는 논의를 하니, 신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놀라고 이상하여 그 뜻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하였고, 장령 이현도(李顯道)가 또 상소하여 김이정을 배척하기를,
"지난 겨울 강변으로 어가를 옮긴 것은 곧 만백성이 당황하고 온 나라가 술렁이던 때였습니다. 만약 우리 자전의 부득이한 조처가 아니었더라면 당황하고 술렁거리던 것이 언제나 안정되었겠습니까. 아, 저 이정은 유독 무슨 마음을 가졌기에 스스로 신하된 자가 함께 타고난 천성을 위배하고 온 나라가 함께 기뻐하던 심정과 상반되게 감히 말하지 못할 자리에 대고 함부로 말한단 말입니까. 종잡을 수 없고 패려하기가 진정 너무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더구나 자전의 분부 가운데 ‘사저로 물러가 있겠다.[退處私邸]’는 예사롭지 않은 네 글자는 신하된 자가 감히 새삼 언급할 수 없는 것인데 상소문 속에 어렵지 않게 언급했으니, 이처럼 괴상한 무리는 평범하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대사간 김이정을 먼저 절도(絶島)에 유배하는 법을 적용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렇건 저렇건 따질 것 없다. 어찌 시비를 따져 옥신각신할 일이겠는가."
하고, 이에 대신에게 하유하기를,
"이 일은 새삼 제기할 일이 아니다. 또 말이 자전에게 미쳤는데 어찌 이처럼 서로 맞서는 것처럼 할 수 있는가."
하였다.

 

2월 19일 갑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각 영의 장수와 군교·군사들의 활쏘기를 시험하였다.

 

2월 20일 을축

차대를 거행하였다. 이보다 앞서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가 장계를 올려 강계(江界)의 네 가지 폐단에 대해 아뢰기를,
"네 가지 폐단 가운데서도 삼정(蔘政)이 곧 모든 폐단이 생겨나는 원인이 됩니다. 세삼(稅蔘) 15근 가운데 내의원에 바치는 3근과 호조에 바치는 3근은 토공(土貢)에 속하는 것이니 전례대로 캐서 바치게 하고 그밖의 경사(京司)에 바치는 6근 15냥은 각 해사에서 사서 쓰도록 하며, 본도에서 사서 쓰는 몫으로서 감영의 12냥과 병영의 2냥 및 강계부의 지세(地稅)인 1근 3냥은 영원히 감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인(倭人)에게 주는 체삼(體蔘) 35근과 미삼(尾蔘) 25근은 전부 원래 정해진 근수대로 하되, 그 절반은 본읍(本邑)에 맡겨서 연례로 떼주는 값을 삼 캐는 가구에 나누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사서 바치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공물(貢物)로 대치하여 이듬해나 그 이듬해에 미리 주어서 준비할 수 있는 기한을 넉넉하게 줘야겠습니다. 그 절반의 수량을 가지고 거기에 들어가는 값을 계산하면 4만 6천 7백 60냥인데 원가로 주어야 할 값을 제하면 추가되는 값은 3만 냥이 될 것입니다. 매년 본 감영에서 별도로 준비한 몫의 1만 5천 냥과 장리로 얻어진 5천 섬을 떼내어 삼공(蔘貢)으로 삼되 매년 납일(臘日)을 기한으로 하여 본도에서 받아 올려보내고, 삼파절(三把節)에 파수병들로 하여금 삼을 찾아내게 하는 일을 모두 혁파한다면 아마도 혹 백성을 구제하는 한 가지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정(田政)에 대해 낱낱이 조사해 보니, 묵은 토지 1천 3백 결에 대한 조세를 해마다 생판으로 징수하므로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탕감하도록 허락하소서. 군정(軍政)의 폐단에 관해서는 종전의 결원을 이제는 모두 채웠으므로 특별히 바로잡을 폐단에 대해 말할 것은 없습니다. 각 창고의 환자의 폐단에 관해서는 금년에 환자곡을 받아들일 때 허다한 폐습을 일체 철저히 고치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아뢰어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비변사가 복주(覆奏)하기를,
"지금 나라의 저축이 텅 비어 있는 형편에서 따로 준비한 1만 5천 냥은 비록 경비 가운데서 떼어내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좁쌀 5천 섬을 해마다 마련해야 하니 이 수량을 장차 어떻게 조처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변통 대책은 절대로 실시할 수 없습니다. 미삼에 관한 한 조항은 헤아려 시행할 수 있을 것 같아 여러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보니, 모두 말하기를, ‘미삼 5근은 강계부(江界府)에서 모아들일 수 있고, 그 나머지 20근은 왜역청(倭譯廳)에 넘겨서 그들 중에 일에 능숙한 사람을 골라 담당해서 거행하게 하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미삼 1돈의 원가를 2냥으로 하는 것은 약간 부족하니 지금 만약 4냥으로 올려 주면 충분히 운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올린 값의 총액을 계산하면 3천 6백 80냥이 되는데, 이것은 평양 감영의 특별 준비 몫에서 떼어 주더라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삼을 받는 제도를 없애지 않으면 어린 인삼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 이 변통은 강계 백성들의 일시적인 혜택이 될 뿐 아니라, 삼정(蔘政)을 다스리는 뿌리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서울의 여러 관청과 감영·병영 및 강계부의 지세(地稅)를 모두 삭감해버리자는 요청은 조정의 체통과 관계가 있어 아무래도 곤란하니 시행을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삼파절을 찾아내는 일을 혁파하는 것과 묵은 토지 1천 3백 결에 억울하게 물리는 조세를 탕감해 주는 것은 모두 요청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얼마 있다가 전교하기를,
"20근을 줄여 주는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미삼은 일반 삼으로 논할 수는 없다. 조정에서 이미 민가가 흩어지는 실상을 알고 해마다 바치는 공물의 총수를 일률적으로 정한 폐단을 바로잡으려 한다면 그에 따른 조치가 반드시 특별한 성과가 있어야만 백성들이 도로 모여들고 호수가 나날이 증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명목은 비록 바로잡았다 하더라도 사실은 강계의 백성을 기만하는 것이니, 내 마음에 어찌 편안하겠는가. 그러나 그 수량을 중산(中山)이나 북관(北關)에 나누어 배정하는 것은 또 고통을 그곳으로 옮길 염려가 있으니, 공물로 바칠 체삼(體蔘) 조목 중에서 그들의 어깨를 쉬게 할 방안을 강구하는 것만 못하다. 이제 미삼만을 가지고 이미 책임을 다했다 하여 그만둔다면 마치 먹은 것이 목에 걸린 것과 같아서 내 마음이 끝내 시원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강계에서 바치는 단삼(單蔘) 가운데서 체삼 몇 근을 적당히 줄여주게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 채제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강계의 삼을 캐는 백성들이 해마다 혜택을 입은 것은 돈 2만냥을 밑돌지 않는데도 성상의 마음에는 오히려 강계에서 사들이는 체삼에 대해서는 손을 쓰지 못했다고 여기시어, 먹은 것이 목에 걸린 것 같다는 하교까지 하셨습니다. 지금부터는 왜인에게 주기 위해 사는 삼의 원 수량 35근 중에서 5근을 영원히 면제해 주소서. 이렇게 한다면 한 해 동안 추가된 값을 백성에게 거두는 것도 7천 냥이나 줄어들 것입니다. 조정에서 주는 5근의 원가인 3천 3백 60냥으로는 쌀을 사서 환자로 운영하여 훗날 대차왜(大差倭)018)  가 올 때나 통신사(通信使)의 행차에 쓰도록 대비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삼이 영묘한 약초이긴 하지만 역시 사람의 힘으로 기를 수 있는 것이니, 영남 지방에서 집에서 심어 기르는 방법을 배울 만합니다. 평안 감사로 하여금 각 고을에 신칙해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왜인에게 주는 단삼(單蔘)은 전부 옛 규례대로 호조에서 받아들이는 대로 왜학청(倭學廳)에 내줌으로써 묵혀서 썩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모두 옳게 여겼다. 호조 판서 이병모(李秉模)가 나서서 아뢰기를,
"강계 백성들에 대해 염려하시는 성상의 뜻이 이와같이 간절하시니, 중추원·의정부·종친부·의빈부 등 관청에 바치는 삼도 줄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하에게 성심으로 일을 맡기고 아울러 녹을 후하게 줘야 한다는 의리를 소홀히 할 수가 없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무주부(茂朱府)에서 납일(臘日)에 잡은 멧돼지 한 마리를 2년마다 바치게 되어 있는데, 으레 감영 창고의 돈 1백 냥과 본부에서 회감미(會減米) 7섬을 그 경내의 포수에게 내주어 잡게 합니다. 그런데 지난 무신년에 상께서 특별히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시어, 산돼지 한 마리 대신 생꿩 80마리를 바치게 하자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그 뒤 진상할 때가 되어 80마리나 되는 꿩을 한꺼번에 다 잡기도 어렵거니와 시일을 끄는 동안에 또 썩을 염려가 있었으므로 영주인(營主人)에게 부탁하여 사서 바치게 하였더니, 꿩 값이 크게 뛰어 한 마리의 값이 3냥 5전씩 하다보니 그 액수가 도합 2백 80냥이나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혹 전처럼 산돼지로 바치게 할 것을 원하거나 혹은 꿩 한 마리의 값을 2냥으로 정해서 서울에서 공물로 대처하게 할 것을 원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주의 경우가 이와 같으니, 호남 지방에서 대신 바치게 하는 고을들이 어찌 무주와 같지 않을지 알겠습니까. 청컨대 해당 감사에게 공문을 띄워 물어보고 적절히 헤아려 아뢴 뒤에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납일의 멧돼지를 꿩으로 대신 바치게 한 것도 오히려 약간의 민폐가 있을까 걱정하여 총으로 잡은 꿩이나 매로 잡은 꿩이나 암꿩을 불문하고 특별히 동일하게 보아 바치도록 했는데, 감영과 고을에서 그 뜻에 부응하지 못해 폐단이 도리어 전보다 심해졌으니, 어찌 놀랍고 가슴 아프지 않겠는가. 공문으로 물어볼 것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꿩은 생선과 마찬가지이다. 옛날 호서 지방에서 삭선(朔膳)으로 바치던 마른 숭어가 백성에게 폐단을 끼친다는 고 정승의 건의로 인해 그대신 쌀로 값을 쳐서 선혜청(宣惠廳)이 직접 각 전과 각 궁에 바치게 하였는데, 백성을 위하신 성조(聖祖)의 훌륭한 덕을 호서 백성들이 지금까지 입고 있다. 납일의 꿩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경은 선혜청의 당상과 함께 그 수량을 적절히 조정하여 대신 바치는 여러 도에 그것이 편리한가의 여부를 공문을 띄워 물어보는 동시에 선혜청으로 하여금 별단(別單)을 갖추어 아뢰게 하고, 호조와 공선(貢膳)의 정례(定例)로 기록해 두도록 하라."
하였다.

 

이치중(李致中)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장릉(莊陵)019) 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이보다 앞서 경기도 유생 황묵(黃默) 등이 상언하여,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의 충효 대절(忠孝大節)은 육신(六臣)과 다를 것이 없다고 호소하고 창절사(彰節祠)에 추향(追享)할 것을 청했는데, 전교하기를,

"화의군을 그 위치와 그 사당에 추배(追配)하는 것은 귀신의 이치로 보나 사람의 마음으로 보나 다 합당하다고 할 만하나 추배할 사람이 어찌 화의군 한 사람 뿐이겠는가. 얼마 전에 노량(露梁)을 지나다가 육신의 사당과 무덤 곁에서 한참 동안 행차를 멈추고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고, 행전(行殿)에서 묵을 때 감회를 금치 못하여 60구의 제문을 촛불을 들여오게 하여 불러주어 쓰게 하였으니, 그처럼 깊은 감회로 그와 같은 정중한 예를 베풀었었다. 육신은 실로 혁혁하고 뛰어나 사람들의 이목에 젖어 있지만 금성 대군(錦城大君) 화의군의 그와 같은 절의가 종실에서 나왔다는 것은 더욱 특이하고 장하지 않겠는가. 이 두 사람 이외에도 사육신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니 이번에 추배할 때 함께 시행하는 것이 실로 절의를 권장하고 충성을 표창하는 조정의 정사에 부합할 것이다.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공사간에 상고할 수 있는 문헌들을 널리 상고하여 하나로 귀결시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고 정승 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의 시장(諡狀)에는 ‘단종 영월로 손위(遜位)했을 때 공은 순흥부(順興府)에 안치되었는데, 그곳의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남쪽 지방의 인사들과 몰래 결탁하여 상왕(上王)을 복위시킬 계책을 꾸몄다. 하루는 보흠을 불러 격문을 초하게 하였는데, 관노(官奴)가 벽 사이에 숨어서 몰래 엿듣고 공의 시녀와 내통하여 격문의 초고를 훔쳐서 달아났다. 그런데 기천 현감(基川縣監)이란 자가 급히 추격하여 그 격문을 빼앗아 먼저 서울에 가서 고변하였다. 그리하여 공과 보흠은 잡혀 사형을 당했다.’ 하였습니다.

고 판서 신 이기진(李箕鎭)이 지은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의 시장에는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이 왕위 회복을 도모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공도 그 일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함양(咸陽)에 안치되었다가 귀양지에서 죽었다.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과 함께 가족은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하는 화를 입었다. 중종 갑오년에 비로소 선계(璿系)에 다시 포함시켰고, 명종 때 또 관작을 회복할 것을 명하였다. 선조(先朝) 갑인년에 종부시가 「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는 ‘노산군(魯山君)이 손위할 때 시습은 마침 삼각산(三角山) 속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곧 문을 닫고 사흘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자기 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절간에 자취를 의탁했다.’ 하였습니다.

고 정승 신 신흠(申欽)이 지은 산중독언(山中獨言)에는 ‘남효온(南孝溫) 소릉(昭陵)020) 을 복위할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열경(悅卿)021) 을 종유하였다. 열경이 말하기를 「공은 나와 다른데 어째서 세도(世道)를 위해 벼슬할 계책을 도모하지 않는가?」 하니, 효온이 말하기를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아도 늦지 않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고 감사 최현(崔晛)이 지은 이맹전전(李孟專傳)에는 ‘경태(景泰)022) 갑술년023) 즈음에 시사가 크게 변하자, 소경과 귀머거리로 행세하면서 친한 벗들을 사절하고, 매월 초하루에는 항상 아침해를 향해 절을 하며 내 병이 낫기를 빈다고 말했는데, 집안 사람들도 그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고 판서 신 이재(李縡)가 지은 조여(趙旅)의 비명에는 ‘경태계유년024) 에 진사가 되었는데, 하루는 여러 유생들과 작별하고 돌아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숙종 기묘년에 영남의 선비들이 공의 절의를 보고하니 특별히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으며, 사당을 함안(咸安) 백이산(伯夷山) 밑에 세우고 김시습·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과 함께 배향하였다.’ 하였습니다.

고 정승 신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원호의 묘갈명에는 ‘단종 영월로 손위한 뒤에 영월 서쪽에 집을 짓고 새벽과 저녁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을해년에 3년 상복을 입은 뒤 고향집으로 돌아가 문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해서 앉고 누울 때도 반드시 머리를 동쪽으로 두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무인년025) 에 복위한 뒤 의리와 절개로 인해 공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주었다.’ 하였습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이 지은 잡저(雜著)에는 ‘성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아버지의 묘소 아래 숨어 살면서 일찍이 서울에 올라간 일이 없었고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남효온이 지은 허후전(許詡傳)에는 ‘김종서(金宗瑞) 등이 죽임을 당했을 때 그를 불러들여 잔치에 참여시켰는데, 유독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끝내는 유배되어 죽었다.’ 하였습니다.

이정형(李廷馨)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권자신(權自愼)은 상왕(上王)의 외숙인데, 육신과 함께 복위를 도모했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었다.’ 하였습니다.

장릉지(莊陵誌)에는 ‘송석동(宋石仝)은 육신과 함께 잡혀서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하였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 서문에는 ‘권절(權節)은 귀머거리 노릇을 하며 병들었다 핑계하고는 문밖에 나가지 않은 채 일생을 바쳤다.’ 하였습니다.

장릉지에는 ‘정보(鄭保)는 권세 있는 간신을 대놓고 꾸짖다가 거의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할뻔 했는데 세조가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용서해 줬다.’ 하였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조상치(曺尙治)의 묘지(墓誌)에는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일생 동안 서쪽을 향해 앉지 않았다. 비석에 글을 써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포인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 하고 자서(自序)에 이르기를 「노산조라고 쓴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님을 밝힌 것이고 벼슬 품계를 쓰지 않은 것은 임금을 구제하지 못한 죄를 드러낸 것이고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없애지 않기 위해서이며 포인이라 쓴 것은 망명하여 도피한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무덤앞에 세우라.」 하였다.’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당시 제현들이 혹은 죽기도 하고 혹은 살아 있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단지 그 처한 상황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었고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선왕(先王)에게 충성을 바친 의리에 있어서는 살았건 죽었건 간에 마찬가지입니다.

금성 대군 이유는 왕실의 지친으로서 충성을 다해 의리에 죽었습니다. 후세에 논하는 자들이 종실의 친족으로는 금성 대군을 꼽고 조정의 경우는 육신을 꼽으니, 육신의 사당에 어찌 금성 대군의 제향을 빼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화의군·한남군·영풍군 세 사람도 각기 그 본분을 다했으니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금성 대군에 비하면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김시습·남효온·이맹전·조여·원호·성담수 등 6인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인데 혹은 방랑생활로 그 자취를 감추거나 혹은 은둔해 살면서 몸을 깨끗이 하였으니, 그 충성과 그 절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 사당에다 함께 제사지내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도 더욱 특별히 뛰어난 자로서 김시습 세종의 특별한 신임에 감격하여 미친 사람처럼 종적을 숨기고 절간에 몸을 의탁하였으며, 남효온은 소릉(昭陵)의 복위를 요청하고 육신의 전기를 지으면서 그 내용을 완곡하게 쓰고 자기 뜻을 고수하였으니, 그들의 고심과 아름다운 절의는 영원토록 사람들을 격려할 만합니다. 이 때문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에 ‘만약 매월당(梅月堂) 남 추강(南秋江)을 여기에 제사지내고 또 사당 옆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仝) 등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공주(公州) 동학사(東鶴寺)에서처럼 한다면 일이 완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만약에 육신(六臣)을 한꺼번에 모두 제사지내는 것을 선뜻 논의하기 어렵다면 우선 선정이 이미 정한 논의에 따라 김시습 남효온 두 사람을 추향(追享)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이보흠(李甫欽) 권자신은 그 사적은 같지만 제단을 따로 설치하자는 선정의 논의로 볼 때 그 사이에 경중을 둔 것 같으며, 허후(許詡) 등 7인이 이룬 바는 비록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이보흠 권자신에 비교하면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추배(追配)하는 문제는 신들이 감히 독단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홍문관이 아뢰기를,

"신들이 공사간의 문헌을 가져다가 절의가 가장 현저하고 사실을 증명할 만한 것들을 가려낸 결과 육신과 금성 대군·화의군 이외에도 순절하거나 은둔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장릉지에 보이는 자만도 거의 1백여 인이 넘지만 이름만 있고 행적은 없어 대부분 상고하기 어렵고 단지 뚜렷이 드러난 사람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단묘조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鄭苯)은 모두 세종의 고명 대신(顧命大臣)으로 세조의 변란 때 함께 죽어 그 곧은 충성과 큰 절의가 역사책에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은 곧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로서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이 모두 스승으로 섬겼던 사람입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일찍이 세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병자년026) 에 그의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습니다. 도총관 성승(成勝)은 곧 충문공(忠文公) 성삼문의 아버지로서 역시 충문공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상 두 집안의 부자가 이룩한 것이 이처럼 뛰어난데, 중림의 경우는 전하의 무신년027) 에 특별히 시호를 받는 은전을 입었으나 성승은 아직도 시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은 변란 때 황보인·김종서 등과 결탁했다는 죄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사(賜死)되었는데, 영종 때에 이르러 관작을 회복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 장릉지를 살펴보면, 정축년 금성 대군이 상왕을 복위할 것을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었을 때 종친부에서는  유(瑜)028) 와 죄가 같으므로 혼자만 살려줄 수 없으니 안치·금고시키자고 아뢰었고, 종부시에서는 영(瓔)029) ··은 죄가 종사에 관계되므로 왕실 계보에서 삭제하자고 아뢰었습니다. ·의 시장(諡狀)을 살펴보면, ·은 모두 양빈(楊嬪)의 소생인데 양빈은 곧 단종을 젖먹여 기른 사람입니다.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의 복위를 도모한 것이 성공하지 못하자, 가 그 일에 참여하였다 하여 드디어 함양(咸陽)에 안치되었고, 정축년 금성 대군의 일이 발각되자 양빈이 내응하였다 하여 병자년에 모두 화를 당했습니다. 중종 때 명으로 왕실 계보에 다시 속하게 하였고 명종 때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숙종  단종을 복위하면서 시호를 내려주고 예장(禮葬)하도록 하였습니다. 영종 갑인년에 종부시에서는, 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름이 없다고 아뢰었고, 또 호남의 유생들이 상소로 청하기를 ‘저 세 신하가 모두 왕실의 지친으로서 목숨을 바치면서도 절개를 바꾸지 않은 것은 실로 육신과 같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심지어는 엄흥도(嚴興道)와 같이 미천한 자도 오히려 육신과 함께 제향을 받는데, 이 세 신하만은 그 높고 빛나는 충렬이 해와 달을 꿰뚫고 우주를 지탱할 만한데도 표창하는 은전은 도리어 엄 호장(嚴戶長)030) 보다도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상의 문헌으로 상고해 보면    과 마찬가지인데, 금성 대군 청안(淸安) 사당에 화의군만 배향하고 한남군 영풍군을 배향하지 않은 것은 결국 결함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간공(淸簡公) 김시습은 5살에 신동이라 하여 세종의 특별한 인정을 받았고 단종이 손위한 뒤에는 절간에 의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말하기를 ‘절의를 높이 세우고 윤리 강상을 부식한 것은 비록 백대의 스승이라 해도 근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문정공(文貞公) 남효온(南孝溫)은 18세에 글을 올려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하고 드디어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습니다. 일찍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음을 아껴 대현들의 이름을 인멸시키겠는가.’ 하였습니다.

정간공(貞簡公) 원호(元昊)는 집현전 직제학으로 단종 초년에 원주에 은퇴하여 살다가 단종이 승하하시자 영월로 들어가 삼년상을 지냈으며 세조가 특별히 호조 참의를 제수하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숙종 24년 무인년에 특별히 그의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습니다.

정숙공(靖肅公) 성담수(成聃壽)는 교리 성희(成熺)의 아들입니다. 선정신 성혼(成渾) 잡저(雜著)에 ‘ 성삼문의 사건에 연좌되어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파주(坡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그 당시 죄인의 자제들에게 으레 참봉을 제수하여 그 거취를 시험하였을 때 모두 머리를 숙이고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유독 담수만은 끝내 벼슬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전하의 갑진년에 증직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간공(靖簡公) 이맹전(李孟專)은 일찍이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으로 뽑혔으나 경태(景泰)갑술년031) 에 귀먹고 눈멀었다고 핑계하고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전하의 신축년에 시호를 추증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절공(貞節公) 조여(趙旅)는 태학생(太學生)으로 단종이 손위하게 되자 여러 유생들과 하직하고 함안군(咸安郡)으로 돌아가 은둔하여 소요 자적하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숙종 28년 임오년에 특별히 이조 참의를 추증하였고, 전하의 신축년에 이조 판서로 올려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숙공(忠肅公) 권절(權節)은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 서문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여러 번 그의 집에 가서 거사하는 문제를 은밀히 말했으나 귀먹은 체하고 대답하지 않았으며, 은둔하여 한평생을 마쳤다.’ 하였습니다. 숙종 임오년에 강원도 유생들이 상소하여 육신의 사당에 사액(賜額)할 것과 권절을 함께 배향할 것을 청하자 그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습니다. 갑신년032) 에 양주(楊州) 유생들이 또 상소하여 사당을 건립할 것을 청하니, 증직하고 시호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고 집현전 부제학 조상치(曺尙治) 《갱장록(羹墻錄)》 화속편(化俗篇)을 상고해 보니 ‘세조가 일찍이 박팽년 등을 논평하여 당대의 역적이고 후세의 충신이라고 했다.’ 하였고, 그 아래에 ‘부제학 조상치가 상소하여 치사를 요청하니 백관에게 명하여 도성 문 밖에서 전별하도록 하였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묘표에 ‘공은 성삼문·박팽년 제공과 길은 달라도 가는 곳은 같았다.’ 하였고, 그 유사(遺事)에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은 뒤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 스스로 돌에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조상치지묘」라 하였고, 또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자기 뜻을 드러냈다.’ 하였습니다. 고 상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영천사당기(永川祠堂記)에 ‘육신은 죽었고 공은 죽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그 자취가 드러나 쉽게 보이지만, 죽지 않은 사람은 그 마음이 은미하여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단종을 복위한 뒤에도 육신과 함께 노량진의 사당에서 제향을 받지 못한 것은 후세의 공론을 기다린 것이다.’ 하였습니다.

고 교리 성희(成熺)는 곧 성삼문(成三問)의 종숙부(從叔父)이자, 정숙공 성담수(成聃壽)의 아버지입니다. 선정신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표에 ‘ 삼문과 함께 왕실을 보필하여 죽고 사는 일로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삼문 등이 죽자 도 역시 엄한 국문을 받고 귀양갔으며 처자는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했다. 그 뒤 3년 만에 용서를 받았으나 끝내 충성과 의분에 겨워 죽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정보(鄭保)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입니다. 육신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한명회(韓明澮)의 첩으로 있던 서매(庶妹)를 가서 보고 ‘공은 어디에 갔는가?’ 하고 물으니 ‘죄인을 국문하느라 궁궐에 가 있다.’ 하자, 가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명회가 즉시 상에게 아뢰어 세조가 친국을 하고 사지를 찢어 죽이려 하다가 충신의 후손이라 하여 특별히 죽음을 감해 유배하였습니다.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은 곧 문종의 부마입니다. 단종 을해년에 광주(光州)로 귀양갔다가 정축년 금성 대군의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자, 종친부가 ‘정종·송현수(宋玹壽)·어(𤥽)·전(瑔)의 죄는 나라의 법으로 보아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하여 결국 사약을 받았습니다. 영조 무인년에 특명으로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육신이 화를 당하던 날 함께 죽었는데, 영조 때에 와서 함께 시호를 주는 은전을 받았습니다.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 단종의 장인으로서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어 금성 대군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창절사(彰節祠)에 추배(追配)하는 일은 그 예법이 매우 중대합니다. 세 대신033) 의 뛰어난 절의나 박중림 성승 부자가 보여준 특별한 절개는 마땅히 배향할 만하지만, 신주의 순위가 서로 맞지 않으므로 감히 쉽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안평 대군  한남군·영풍군 금성 대군과 같은 형제이니, 다함께 죽계(竹溪)의 사당에 추배한다면 역시 풍속과 교화를 길이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생육신을 사육신과 함께 제사지낸다 한들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만 선정신 송시열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를 상고하건대, ‘만약 매월당 추강을 이곳에 배향하고, 또 사당 곁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仝) 등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대략 공주 동학사(東鶴寺)처럼 한다면 일이 더욱 완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미 선정의 정론이 있어 다시 논의할 여지가 없지만, 나머지 네 신하의 똑같은 깨끗한 절의에 대해서는 역시 함께 배향해야 한다는 공론이 있을 수 있으며 그밖의 사람들도 모두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칭송할 만한 뛰어난 절의가 있긴 하나 이것은 사당의 규례에 관한 일이라 신들이 감히 억측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달 경술일에 사관이 실록을 상고하고 돌아와 아뢰어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자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교하기를,

"육신의 일은 감히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세조의 하교에 ‘후세의 충신이다.’ 하셨고, 영양위(寧陽尉)의 집의 일을 논하면서 ‘난신(亂臣)으로 논할 수 없다.’ 하셨다. 그 훌륭하신 훈계와 계책은 해와 별처럼 환히 빛나 임시 방편에 통달하고 원칙을 부식한 성인의 깊은 뜻을 삼가 엿볼 수 있다. 그것을 천명하고 드러내는 것이 어찌 우리 후인에게 달려 있지 않겠는가. 지난번 행차할 때 민절사(愍節祠)034) 를 지나다가 옛날의 감회가 일어나 관원을 보내 제사지내고 이어서 금성 대군 등 여러 사람을 영월에 있는 사당에 추배하기 위해 사관에게 명산에 깊이 보관되어 있는 실록을 삼가 상고하게 하였다. 그런데 사관이 복명하던 바로 그 날 강원 감사가 자규루(子規樓)의 옛터를 찾아낸 상황을 장계로 아뢰었다. 이 두 가지 일이 공교롭게도 한꺼번에 겹쳐 마치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되었으니 이치란 속일 수 없다. 참으로 기이하고도 이상하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이나 오종영(五宗英)035) 의 높고 큰 충절은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추앙하는 형편이라 누구는 배향하고 누구는 배향하지 않는 것으로 쉽게 취사 선택해서는 안될 것이니, 별도로 예법에는 없지만 예법에 맞는 예를 찾아서 시행하는 것이 역시 옳지 않겠는가.

지난 숙종 무인년에 장릉(莊陵)을 복위했을 때 조정의 신하가 육신의 사당이 정자각(丁字閣)과 너무 가깝다는 말을 하자, 숙종께서 ‘무후의 사당이 길이 이웃에 가깝다[武侯祠屋長隣近]’는 두보(杜甫)의 싯귀를 인용하면서 헐어버리지 말라고 하셨으나, 의론이 서로 엇갈려 끝내는 옮겨 세우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억울함을 되새기는 제사는 동학사의 실례를 취하고 제단을 만드는 제도는 달천(㺚川)의 실례를 모방하되 당시에 절의를 다한 사람들을 합쳐 하나의 사판(祠版)으로 만들어, 본릉(本陵)036) 홍살문 밖에 터를 잡아 매년 한식(寒食)에 함께 제사를 지내며, 고을원으로 하여금 집을 하나 지어서 사판을 보관하게 함으로써 똑같이 제사지낸다는 뜻을 보여야겠다.

아, 예법이란 인정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서 신이나 인간이나 차이가 없다. 저 열렬한 영령들의 가시지 않는 울분이 길이 의지할 곳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장릉의 혼령도 오르내리면서 제물의 김과 향기가 물씬 풍길 때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다. 이 일을 누가 근거 없는 일이라 하겠는가. 본도와 예조로 하여금 이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릉에게 절의를 지킨 사람들을 배향하는 일에 대해 방금 전교를 내렸는데 내각(內閣)에 배식록이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사판은 충신 사판이라 쓰고 제물은 밥은 큰 그릇에 한 그릇, 탕은 큰 주발에 한 주발, 나물과 과일은 각각 한 접시, 술은 한 잔으로 규례를 정하고 제관은 부근의 찰방으로 하며, 예관(禮官)이 내려가기 전에 제단을 만들고 사판을 만들도록 하는 등의 일을 해도에 분부하라. 의례적으로 쓸 제문은 마땅히 지어서 내려보낼 예정인데, 이후에 본릉의 한식제에 쓸 향을 받아갈 때 함께 주어서 보낼 것이라는 것도 해도와 예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제 장릉의 일로 인해 생각해보니, 충정공(忠正公)037) 의 부친 박중림(朴仲林)은 시호가 있는데, 성승(成勝) 충문공(忠文公)038) 의 부친으로 중림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홀로 빠져 있다. 이 어찌 더욱 큰 결함이 아니겠는가. 본관(本館)039) 에 신칙해서 즉시 제사를 지내기 전에 시호를 의논해 올리도록 하라. 고 충신 박계우(朴季愚)는 바로 대제학 박연(朴堧)의 아들인데, 이 악(樂)을 제작한 것은 허 문경공(許文敬公)040) 이 예를 제작한 공과 백중을 이루는 것이다. 문경공의 아들 허후(許詡) 계우와 동시에 순절했으나 는 시호가 있고 계우만 유독 빠졌으니, 혹시 벼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독동(禿同) 윤생(尹生)의 뛰어난 절의 또한 인멸시킬 수 없으니, 아울러 증직하는 은전을 베풀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단종조의 여러 신하가 절개를 지킨 것은 다 같지만 성과에 있어서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순위에도 귀천의 차이가 있다 하여, 장차 별단(別壇)을 설치하는 문제를 내각으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도록 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대신들 가운데 원임 각신에게 물으니, 원임 제학 이복원(李福源)은 말하기를 ‘배향하는 문제는 지극히 엄중하니, 지금 이 명이 비록 묘정에 종향(從享)하는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긴 하나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고 서원(書院)에 배향하는 것에 비하면 의미와 상황이 자연 다릅니다. 그러니 조정에 벼슬한 적이 없거나 벼슬을 받지 않은 자는 비록 뚜렷이 기록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오직 엄흥도(嚴興道) 한 사람만은 육신의 반열에 나란히 세워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드문 은전은 간략한 것이 귀중하니, 간략하면 그 광명한 빛이 더욱 빛나고 확대하면 오히려 혹 근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별도로 한 제단을 만드는 것은 표창하는 의리는 마찬가지이고 불쌍히 여기는 은혜로 인해 나온 조치이긴 하나 배식(配食)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인원수의 많고 적음에는 구애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원임 제학 채제공은 말하기를 ‘내리신 3책 가운데 있는 배향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성상께서 직접 뽑아내신 것은 마치 저울 눈금을 가늠한 것처럼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이들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 아래쪽에 별단을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 물으신 일은 불쌍히 여기고 표창하시려는 성상의 마음을 삼가 이해할 수 있긴 하나 숫자는 많고 사적은 너무 소략하니, 만약 위의 항목에 든 뚜렷한 사람들와 똑같이 함께 제사지낸다면 혹시 예법이 번잡해질 혐의가 있을 듯합니다. 신은 일찍이 영남 지방을 왕래한 적이 있으므로 선배들의 유적을 대략 알고 있습니다. 금성 대군 순흥(順興)에서 화를 당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 부근 고을에서는 평생동안 세상을 등지고서 북쪽 문을 막고 동쪽만 향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자손들이 만약 조정에서 예전에 없었던 은전을 베푼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앞으로 행차하시는 길에 글을 올리는 자들이 더한층 많아져 이루 다 베풀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여기에 뽑아 기록한 자만으로 끊어서 한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에 우리 성조(聖祖)041) 의 하교에 육신의 사당을 본릉(本陵) 홍살문 안에 그대로 두라고 하셨으니, 매우 훌륭한 생각이었다. 이번에 배향하는 규례를 거행하자고 논의하는 것을 가지고 삼가 그 뜻을 계승하는 일단을 스스로 구현하고자 한다. 대체로 제단에 제사지내는 것과 사당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사실 차이가 있지만 함께 제사지내는 뜻은 마찬가지이다.

두 대신이 올린 의견에 혹은 ‘간편한 것이 귀중한 것이다.’ 하였고, 혹은 ‘이루 다 베풀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일을 신중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제 취사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마땅히 절의를 지켜 죽어서 그 자취가 나라의 역사와 능지(陵誌)에 올려져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육종영(六宗英)042) ·사의척(四懿戚)043) ·삼상신(三相臣)044) ·삼중신(三重臣)045) ·양운검(兩雲劒)046) 및 육신과 육신의 아비와 자식 중에 특별한 사람과 허후(許詡)·허조(許慥)·박계우(朴季愚)  문경공(文敬公)047) ·문헌공(文獻公)048) 의 아들과 손자로서 더욱 뛰어난 사람과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 도진무(都鎭務) 정효전(鄭孝全)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상의 31인을 함께 배식할 사람으로 정하고 제사지내는 의식에는 축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밖에 사실이 자세하지 않은 사람과 연좌되어 죽임을 당한 자는 다시 신중히 참작해야 할 것이다. 별단을 설치하는 문제는 대신들의 말이 진실로 일리가 있으니, 충민단(忠愍壇) 등 여러 제단에 담장은 함께 하면서 제지(祭地)는 달리 한 전례가 바로 그것이다. 사적이 자세치 않은 조수량(趙遂良) 등 8인과 연좌되어 죽은 김승규(金承珪) 등 1백 90인은 별단에 제사지내야 할 것이다.

아, 죽음을 각오하고 의리를 떨쳐서 장사를 지내는 일에 힘을 다한 사람은 오직 엄 호장(嚴戶長)049) 한 사람인데, 어찌 순절한 사람의 반열에 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혼자만 배향에서 누락시킬 수 있겠는가. 김 문정(金文正)050) ·송 문정(宋文正)051) 이 묘정에 추배(追配)된 사례가 곧 본받을 만한 뚜렷한 근거이다. 증 참판 엄흥도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라. 또 고 처사(處士) 김시습과 태학생 남효온은 속세를 떠나 은거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변함이 없었으니, 그 맑은 기풍과 굳은 지조는 백세를 격려할 만한데도 모두 이 사당의 제사에서 빠진 것은 미처 조처하지 못한 결함이다. 두 신하를 똑같이 창절사(彰節祠)에 추가로 제향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릉에 배식하는 문제는 지금 수의한 것으로 인해 또 별도로 한 제단을 만든다는 명을 내렸다. 32인의 제단에 지내는 제사에는 마땅히 축문이 있어야 하겠고, 제물은 처음 하교한 대로 거행하라. 사판(祠版)은 ‘충신지위(忠臣之位)’라고 쓰되 감사에게 쓰도록 하라. 별단(別壇)의 경우는 사판 3개를 만들어 계유년·병자년·정축년에 죽은 사람들을 각각 쓰도록 하라. 제사를 지낼 때는 지방에다 성명을 죽 쓰되, 조사(朝士)를 한 판, 맹인·내시·군사·노비를 한 판, 여인(女人)을 한 판으로 해야 한다. 신위의 위치는 중신들의 왼쪽에 두되 조사의 경우는 약간 앞으로 나오게 하고 맹인·무당·내시·군사·노비의 자리는 약간 밑으로 내려야 한다. 제사지내는 의식에 축문을 쓰지 말고 제물은 각기 밥 한 그릇, 탕 한 그릇, 술 한 잔으로 하며, 헌관과 집사는 두 제단의 일을 겸하여 보게 해야 한다."

하였다.

 

 

 

2월 21일 병인

정단(正壇)에 배식한 사람은 32인          【안평 대군(安平大君)            장소공(章昭公)            이용(李瑢), 금성 대군(錦城大君)            정민공(貞愍公)            이유(李瑜), 화의군(和義君)            충경공(忠景公)            이영(李瓔), 한남군(漢南君)            정도공(貞悼公)            이어(李𤥽), 영풍군(永豊君)            정렬공(貞烈公)            이전(李瑔), 판 중추원사            이양(李穰),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충민공(忠愍公)            송현수(宋玹壽), 예조 판서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영양위(寧陽尉)            헌민공(獻愍公)            정종(鄭悰), 돈령부 판관            권완(權完), 의정부 영의정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 의정부 좌의정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 의정부 우의정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 이조 판서            충정공(忠貞公)            민신(閔伸), 병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 판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도총부 도총관            충숙공(忠肅公)            성승(成勝), 증 병조 판서 행 별운검(行別雲劒) 충강공(忠强公)            박쟁(朴崝), 형조 판서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 증 이조 판서 행 승정원 우승지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증 이조 판서 행 형조 참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증 이조 판서 행 집현전 직제학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증 이조 판서 행 예조 참판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증 이조 판서 행 성균관 사예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증 병조 판서 행 도총부 부총관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증 사헌부 지평            하백(河珀), 좌참찬            정간공(貞簡公)            허후(許詡), 집현전 수찬            허조(許慥), 증 이조 참판            박계우(朴季愚), 순흥 부사(順興府使)            충장공(忠壯公)            이보흠(李甫欽), 도진무 정효전(鄭孝全), 증 공조 참판 영월부 호장            엄흥도(嚴興道).】         별단(別壇)에는 1백 98인인데 사적이 자세하지 않은 사람이 8인,          【평안 감사            조수량(趙遂良), 충청 감사            안완경(安完慶), 선공 감 부정 이명민(李命敏), 산릉 장무(山陵掌務) 이현로(李賢老), 형조 정랑            윤영손(尹鈴孫), 이조 좌랑            심신(沈愼), 안악 군사(安岳郡事)            황의헌(黃義軒), 고양 현감(高陽縣監)            고덕칭(高德稱).】         연좌되어 죽은 사람은 1백 90인이었다.          【지부(知部) 김승규(金承珪),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 덕양군(德陽君)            이우량(李友諒), 참판            황보석(皇甫錫), 병사(兵使)            조숭문(趙崇文), 첨지중추원사            이석정(李石貞), 사간원 헌납            이승윤(李承胤), 진무(鎭撫) 원구(元矩), 종성 부사(鍾城府使)            이경유(李耕㽥), 성균관 사예            조충손(趙衷孫), 군기 판사(軍器判事)            윤처공(尹處恭), 직장(直長)            김승벽(金承璧), 직장            황보흠(皇甫欽), 고양 현감            박하(朴夏), 군기 녹사(軍器錄事)            조번(趙藩)·이승효(李承孝)·민보창(閔甫昌)·민보해(閔甫諧)·민보석(閔甫釋)·윤경(尹涇)·윤위(尹渭)·윤탁(尹濯)·윤식(尹湜)·이건금(李乾金)·이건옥(李乾玉)·이건철(李乾鐵)·이백금(李白金)·이수동(李秀同)·조향동(趙香同)·조귀동(趙貴同)·김정(金晶)·하석(河石)·이보인(李保仁)·이차(李差)·김말생(金末生)·안막동(安莫同)·양옥(梁玉)·최노(崔老)·김상지(金尙志)·고염석(高廉石)·조석강(趙石岡)·박이녕(朴以寧)·황보가마(皇甫加麽)·황보경근(皇甫京斤)·김금목일(金金木壹)·김조동(金祖同)·김수동(金壽同)·이계조(李繼祖)·이소조(李紹祖)·이장군(李將軍)·이승로(李承老)·민석이(閔石伊)·윤개동(尹介同)·윤효동(尹孝同)·조계동(趙季同)·이해(李諧)·이심(李諶)·이사문(李沙門)·이주령(李住令)·이모(李謨)·이우경(李友敬)·김산호(金珊瑚)·김갯동(金㖋同)·김득천(金得千)·김복천(金卜千)·황경손(黃敬孫)·황장손(黃長孫)·황석동(黃石同)·이한산(李漢山)·최면(崔沔)·이수정(李守禎)·박수량(朴遂良)·임진성(任進誠)·김겸(金謙)·허축(許逐)·홍적(洪適)·홍구성(洪九成)·홍옥봉(洪玉峯)·최영손(崔泳孫)·최자척(崔自滌)·진유번(陳有蕃)·조유례(趙由禮)·성문치(成文治)·이문(李聞)·이숭례(李崇禮)·신경지(申敬之)·신맹지(申孟之)·신중지(申仲之)·신근지(申謹之)·김옥겸(金玉謙)·김광은(金匡殷), 사알(司謁)            황귀존(黃貴存), 고양 기관(高陽記官)            황중은(黃仲銀), 고양 기관            황식배(黃植培), 집현전 교리            박인년(朴引年), 집현전 수찬            박기년(朴耆年), 도진무(都鎭撫) 이유기(李裕基), 부사(府使)            성삼고(成三顧), 정랑            성삼성(成三省), 성균관 학유            하기지(河紀地), 박사(博士)            박대년(朴大年), 별시위(別侍衛) 이의영(李義英)·이정상(李禎祥), 중추원 녹사            이지영(李智英), 성균 생원 박헌(朴憲), 성균 생원 하소지(河紹地)·성맹첨(成孟瞻)·성맹평(成孟平)·성맹종(成孟終)·박순(朴珣)·박분(朴奮)·이공회(李公澮)·하호(河琥)·하연(河璉)·하반(河班)·유귀련(柳貴連)·유송련(柳松連)·유사수(兪思守)·박숭문(朴崇文)·송석동(宋石仝)·송창(宋昌)·송녕(宋寧)·최득지(崔得地)·최치지(崔致地)·김구지(金九知)·성삼빙(成三聘)·권서(權暑)·권저(權著)·최사우(崔斯友)·정관(鄭冠)·봉여해(奉汝諧)·김감(金堪)·김한지(金漢之)·김선지(金善之)·이호(李昊)·장귀남(張貴男)·이오(李午)·이말생(李末生)·심상좌(沈上佐)·박영년(朴永年)·황선보(黃善寶)·권구지(權九之)·김현석(金玄錫)·허연령(許延齡)·허구령(許九齡)·조청로(趙淸老)·이상손(李祥孫)·박양함(朴良諴), 관찰사            유귀산(庾龜山)·유오산(庾鰲山), 학생(學生) 심희철(沈希哲), 학생 박수명(朴守明), 순흥 품관(順興品官)            안순손(安順孫)·김유성(金由性)·안처강(安處强)·안효우(安孝友), 순흥 기관(順興記官)            중재(仲才), 환관 김연(金衍)·김대정(金大丁)·한숭(韓崧)·지정(池爭)·이귀(李貴)·인평(印平)·유대(柳臺)·윤기(尹奇)·박윤(朴閏)·길유선(吉由善)·최찬(崔粲)·조희(曺熙)·서성대(徐盛代)·엄자치(嚴自治)·김득성(金得誠)·김득상(金得祥)·맹인 지화(池和)·나갈두(羅乫豆), 별감(別監)            돌중(乭中), 전농시(典農寺) 노비 목효지(睦孝智), 순흥(順興) 관노(官奴) 정유재(鄭有才)·범삼(凡三)·석정(石丁)·석구지(石仇知)·범윤(凡尹), 풍산(豊山) 관노 이동(李同), 순흥 군사 황치(黃緻)·신극장(辛克長), 여인으로는 궁녀 양씨(楊氏)·자개(者介), 이오(李午)의 아내 아가지(阿加之), 무녀(巫女) 용안(龍眼)·불덕(佛德)·내은덕(內隱德)·덕비(德非).】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07면
【분류】왕실(王室) / 윤리(倫理)
2월 22일 정묘

홍화보(洪和輔)를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사학(四學)의 유생 이명오(李明吾) 등이 상소하기를,
"온양군(溫陽郡) 설화산(雪華山) 아래에 정퇴곡(靜退谷)이란 골짜기가 있는데, 숭정(崇禎)052) 갑술년053)  에 이 고을 사람 조상우(趙相愚)가 그 지명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별호와 서로 부합된다 하여, 드디어 사우(士友)들과 서원을 건립하고는 문정공과 문순공의 사판(祠版)을 봉안하고 향현(鄕賢) 문장공(文莊公) 홍가신(洪可臣)을 배식하였는데, 서원의 이름은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이 ‘정퇴 서원(靜退書院)’이란 네 글자를 직접 써서 달았습니다. 또 서원 옆에 충효당(忠孝堂)을 세워 증 영의정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과 증 참판 강봉수(姜鳳壽)를 배향했으니, 이는 역시 남강사(南康祠)에 별도로 한 사당을 세워 도 정절(陶靖節)054)  과 진 요옹(陳了翁)055)  을 제사한 전례를 모방한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향현(鄕賢)을 추가로 함께 제사지냈는데 한성 윤(漢城尹) 맹희도(孟希道)도 역시 추가로 제사지내는 속에 들었습니다. 그 위차(位次)는 두 선생을 주벽(主壁)에 모셔 남쪽을 향하고 홍가신을 동쪽에 두어 서쪽을 향하고 맹희도를 서쪽에 두어 동쪽을 향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작년 정월 충숙공(忠肅公) 유관(柳灌)을 추배하는 일로 몇 고을의 선비들이 본 서원에 모여 의논할 때, 맹흠요(孟欽堯) 등 수십 여 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자기 조상인 희도의 위차를 올려 모셔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를 ‘우리 조상은 4백 년전의 명현(名賢)이시니, 마땅히 연대를 중시해야 한다. 어찌 배위(配位)를 낮출 수 있단 말인가. 마땅히 첫자리로 올려야 한다.’ 하였고, 신주를 내오는 고유문(告由文)을 지어 고했는데 그 내용에 ‘동포 선생(東浦先生)의 자리를 아래로 내려놓았으니 조(趙)·이(李) 두 선생의 혼령이 편안히 흠향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하였습니다. 만약 평소에 두 선생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감히 신위를 멋대로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유생들이 감사에게 가서 글을 올렸더니, 감사가 판결하기를 ‘엄격히 금지시키고 그들에게 상소하여 임금의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 하였습니다. 청컨대 위차를 멋대로 바꾸어 혼란시킨 흠요의 죄를 다스리고 희도의 위패는 충효당에 옮겨 제사지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사액도 받지 않은 서원의 위차 문제를 가지고 임금에게까지 번거롭게 하는 것은 외람된 일이라 하여 성균관으로 하여금 소두(疏頭)에게 죄를 주게 하는 한편, 감사가 판결한 말이 일의 체모에 잘못되었다 하여 전 감사도 죄를 주게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지방의 유생들이 올리는 상소는 태학에서 검토한 다음에 바치게 하는 것은 선조(先朝) 때 하교받은 확고한 법이다. 상소 속의 어구가 잘못되었는데도 태학에서는 한마디도 수정하자는 말이 없었으니, 역시 매우 놀라운 일이다. 태학의 재임(齋任)에게 벌을 주라."
하였다.

 

2월 23일 무진

내의원 도제조 홍락성(洪樂性)을 불러 만나 보았다. 낙성이 상에게 아뢰기를,
"신들이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세자를 책봉한다는 명을 내리시는 일입니다. 황제도 왜 책봉을 청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의 근본을 반석처럼 튼튼하게 하는 방도를 지연시켜서는 안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현종과 숙종께서는 6세에 책봉되셨고 나도 8세에 책봉되었는데, 지금 이 전례를 따르고 싶다. 고 재상 정태화(鄭太和)가 말하기를 ‘원자가 탄생하신 날이 곧 나라의 근본이 정해진 날이다.’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좋다. 책봉하는 것이 더디고 빠른 것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2월 24일 기사

호조 판서        이병모(李秉模)가 선혜청 제조를 겸직하기 어렵다 하여, 본직을 체직하고 조정진(趙鼎鎭)으로 대신하였다.


 

 

 

2월 25일 경오

증 좌찬성 정뇌경(鄭雷卿)에게는 충정(忠貞), 증 호조 판서 민성(閔垶)에게는 충민(忠愍), 부제학 조상치(曺尙治)에게는 충정(忠貞), 도총관 성승(成勝)에게는 충숙(忠肅), 여량 부원군 송현수(宋玹壽)에게는 정민(貞愍), 증 병조 판서 박쟁(朴崝)에게는 충강(忠剛)의 시호를 내렸다.
2월 26일 신미

홍릉(弘陵)을 참배하고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창릉(昌陵)과 명릉(明陵)도 참배하였다.


 

 

 

금위 대장 김지묵(金持默)의 벼슬을 삭탈하였다. 거둥할 때는 앞 부대와 뒷 부대의 군병들에게 길에서 행차를 멈춘다는 명이 있으면 장수 이하가 으레 말에서 내릴 수 없는 것인데, 금위영에서 장막을 많이 쳐놓고 금법을 어기고 과일 그릇을 가져갔다. 이 때문에 잡아다가 엄히 꾸짖고 그 직책을 삭탈한 것이다.

 

상언한 문건 40통을 판하하였다.

 

개성부의 족친위(族親衛) 이맹춘(李孟春)은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11대손으로 군역(軍役)을 지게 되었다고 상언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니, 전교하기를,
"의안 대군은 공적도 크지만 그 지체의 중함이 과연 어떤 분인가. 그 아들 찬성공(贊成公)056)  은 왕실의 지친으로서 우리 단종을 섬기다가 동시에 목숨을 바쳤다. 절의가 뛰어난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 모두 다섯이었다. 이 때문에 깊은 감회가 일어나 재작년에 특별히 교지를 내려 찬성공을 장릉(莊陵)에 배향하여 자리를 여섯 번째로 하였으며, 그 제사를 주관하는 후손을 지금 내각에 명하여 수소문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후손이 충군(充軍)되어 이와 같은 하소연을 하고 있으니, 과연 그가 제사를 주관하는 후손이거나 직계손이라면 조정에서 수록하는 일을 어찌 혹시라도 범연하게 할 수 있겠는가. 맹춘의 일을 내각의 책자를 편찬하는 곳에 보내어 조사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7일 임신

전교하였다.
"매번 관원을 시켜 제사를 지낼 때마다 제사지내지 않는 것 같은 탄식이 있었다. 그래서 근래에는 구임 낭관(久任郞官)을 특별히 선발하여 주관하고 단속하도록 규정을 만들었으므로 혹시 조금이라도 실효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어제 창릉(昌陵)의 조과(造果)는 전혀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 내가 직접 행차할 때 섭행(攝行)시킨 제사도 태만하고 소홀함이 이와 같으니, 기일(忌日)이나 시향 때 지내는 제사가 모양새를 갖추지 못한다는 것을 알 만하다.
창릉에 나갔던 전사관(典祀官)을 파직하고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엄히 다스리도록 하며, 제물을 차리는 일을 맡은 제조(提調)는 이처럼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니 체직하라. 구임 낭관은 사판에서 삭직하는 벌을 주라. 예조로 하여금 각 능·원(園)·묘(墓)의 관원들을 신칙하여 이 뒤로는 제물을 준비하고 배열할 때 전사관과 능관(陵官)057)  이 함께 살펴보도록 할 것이며 태만히 하는 자가 있을 때는 빠짐없이 본조에 보고하여 드러나는 대로 초기(草記)하게 하라. 혹시라도 태만히 한 전사관이나 능관이 있으면 똑같이 벌을 내리겠다. 이상의 내용을 각기 재실 벽에 붙여 놓고 항상 보고 정신을 차리게 하라."


 

 

 

사성(司成) 성종인(成種仁)이 상소하기를,
"신의 12대조 교리 성희(成熺)는 바로 충문공 성삼문(成三問)의 종숙(從叔)이며 정숙공(靖肅公) 성담수(成聃壽)의 부친입니다. 일찍이 삼문과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죽든 살든 마음을 바꾸지 말자고 서로 격려하였습니다. 병자년에 성삼문 등이 죽을 때 함께 국정(鞫庭)에 잡혀들어가 16차례나 형을 받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자 영남의 해변에 위리 안치되었으며 처자는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끝내 충분(忠憤)에 겨워 죽었는데, 이는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표에 근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신의 할아버지가 사육신과는 생사를 비록 달리했으나 의리를 다하고 절개를 지킨 점에 있어서는 실로 차이가 없습니다. 요즘 베푼 은전은 천 년만에 한번 있는 기회로 홍문관과 내각에서 널리 상고한 것에 의거하여 모두 배향되는 특전을 입게 되었으나 신의 할아버지 희는 초계(抄啓) 속에 끼인 사람으로서 거기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스스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찌 단지 제 자신에게 있어서만 불초한 자손이 될 뿐이겠습니까. 역시 거룩한 조정의 흠전(欠典)이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할아버지 희의 충절이 매몰되어버리지 않도록 해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12대조인 고 교리 성희의 뛰어난 충성은 당시 순절한 여러 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 더구나 그 아들 담수는 이름이 생육신의 열에 있으니, 이 단에 이 사람을 제향한들 누가 지나치다고 하겠는가. 네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의 거취를 요량해온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엄 호장(嚴戶長) 한 사람 이외에 생육신처럼 그 이름이 사람들의 이목에 널리 알려진 자로서 감찰 정보(鄭保), 교리 권절(權節), 부제학 조상치(曺尙治), 증 군자정(贈軍資正) 독동(禿同)·윤생(尹生), 판중추 기건(奇虔), 감찰 유자미(柳自湄), 예조 정랑 윤시(尹諰), 교리 구인문(具人文), 순검(巡檢) 송간(宋侃)과 너의 선조인 성희 및 성조(成炤) 등은 모두 배향할 만하지만 일을 근엄하게 하는 체통을 지키기 위하여, 그 사건에 죽은 사람이 아닌 경우는 제외시켜서 모두 다같이 신중히 하는 쪽으로 돌렸으니, 이 뜻을 네가 몰라서는 안된다."
하였다.

 

2월 28일 계유

각 능원(陵園)의 전사관을 삼사(三司)의 관원에서 뽑아 임명하는 것을 규정으로 정할 것을 명하였다. 이전에는 전사관을 대부분 서북(西北) 지방의 문관을 뽑아 보냈는데, 대체로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나온 것이다. 이어 전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데서 중요한 것은 제사에 관한 일이다. 제사의 의식이 제물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혼령이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될 판인데 제물까지도 정성을 들이지 못한다면 그 죄송스러움이 과연 어떻겠는가. 전사관이 음식을 만들고 진설하는 일을 도맡아 관장하니, 만약 적임자를 고르기만 한다면 어찌 정결하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가 상소하여 체직을 바라니, 비답하기를,
"경이 임무를 맡은 지 이미 한 해가 지났다. 책임을 맡긴 나의 본의에 잘 부응하여 재물을 갈취하는 고을원이 없어지고 백성들의 양식이 고르고 넉넉해진 것이 지난 해 이전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는가? 그렇다면 즉시 패수(浿水)를 건너와 궁궐에서 나를 만나게 할 것이고, 만에 하나라도 미진한 문제가 있어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있다면 경은 감히 돌아오겠다는 말을 하지 말라. 경이 돌아오는 시기가 늦느냐 빠르냐는 오로지 그 직분을 잘 수행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깊은 대궐 속에 있으니 어찌 5백 리 밖의 일을 알 것인가. 경은 우선 위에 열거한 몇 조항에 대해 사유를 갖추어 정확하게 치계하라."
하였다.

 

2월 29일 갑술

차대를 거행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이문원(李文源)이 장계를 올려 가분(加分)한 모곡(耗穀) 가운데서 쌀 3천 섬을 떼어내 본영(本營)에서 빌려간 것을 갚아주는 비용으로 쓰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가분의 석수(石數)를 확정하는 것은 본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환자를 받기를 원치 않는다면 빚을 놓는 쪽에서는 혹시 폐단이 없어질 수 있으나 환자를 받는 백성들이야 유독 폐단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감사로 하여금 다시 잘 생각해 보고 아뢰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북영(北營)058)  은 변방의 중요한 지대라서 돈을 저축해 두는 것은 실로 위급할 때 비용으로 쓰려는 것이다. 지금 혹시 곡식을 사들여 다음 해의 예비로 비축하는 것은 어쩌면 일리가 있는 듯하다. 이 장계를 보건대 또 돌려받은 모곡을 가지고 채무를 탕감해 주는 비용으로 삼고자 하는데, 한편으로는 돈으로 곡식을 사고 한편으로는 곡식을 가지고 돈을 마련하는 것이 과연 편리한 방안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영영(嶺營)059)  과 완영(完營)060)  과 평곤(平閫)061)  은 모두 채무를 탕감해 주었는데, 북영이 또 빚에 대한 폐단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당초에 돈놀이를 한 것은 감사와 병사의 사적인 일인데 폐단이 생기면 곧 조정에서 해결해 주길 요청하니, 어찌 국가의 체통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민폐가 이미 이렇다고 하니, 경의 말대로 공문을 보내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제공이 또 아뢰기를,
"영남의 가산 산성(架山山城)에 쌓아둔 돈이 21만여 냥이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감사로 하여금 매년 5천 냥씩 산성에 보내 보관하여 원래의 숫자를 채워넣도록 하고, 앞으로 사사로이 돈을 빌려주는 감사는 엄중히 처벌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호조의 재정이 고갈되는 원인은 오로지 비용을 미리 지출하는 데에 있으니, 엄격히 방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에서 살피고 금지한다면 유사(有司)의 신하들은 자연 두려워하고 꺼리는 마음이 있게 될 것이다. 이제 경의 말을 들으니, 묘당의 체통에 매우 잘 맞는다. 호조와 선혜청에서 미리 돈을 지출하고 미리 파는 폐단은 지금부터는 혹 조금은 줄어들겠지만 무엇보다도 핑계로 삼고 있는 균역청의 간사한 폐단은 비록 묘당이라도 속아넘어가기가 쉬우니, 마땅히 폐단의 원인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먼저 균역청에서 고르게 사는 일부터 물러가서 해조의 당상관과 함께 의논하여 조항을 엄격히 세워 일정한 규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사의 하인을 정수 이외에 더 두는 일은 실로 큰 폐단입니다. 또 임시로 설치한 도감(都監)을 해체할 때, 그곳에서 부리던 하인들을 걸핏하면 쌀과 천을 다루는 아문에 전부 떼넘기는 것이 더욱 큰 병폐이니, 이것도 일체 금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전에는 10사람이 먹던 것을 지금은 20사람이 먹는 셈이다. 앞으로 또 다시 떼넘기는 하인을 정원 이외에 더 두겠다는 말을 제기하는 자와 그것을 받은 당상관이나 낭관은 가차없이 왕명을 위반한 율로 논죄하겠다."
하였다.

 

헌납 신대윤(申大尹)을 삭직하였다. 대윤 등이 아뢰기를,
"죽은 죄인 이재간(李在簡)은 올빼미나 사나운 짐승처럼 흉악하고 독사나 전갈처럼 독한 자로서 김우진(金宇鎭)·시위(時偉)와 뒤얽히고 이인(李䄄)·이담(李湛)과 결탁하여 흉악한 계책을 빚어내고 역적 사건을 전개하였으며 흉측한 상소를 비밀리에 사주하는 등 그 실정이 모두 드러났으니, 저자에서 목을 베는 법을 비록 그 자신에게 시행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재산과 처자를 적몰하는 형벌을 역적의 종자에게 늦추어 집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구동성으로 그 죄를 성토하여 허락을 받았기에 거의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전지가 내리지 않았다 하여 아직도 응당 집행해야 할 법을 묵히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대간이 소를 올려 법을 집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도리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받았으니 의리를 펼 길이 없고 형정(刑政)이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재간에게 적몰하는 법을 결단코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대윤 등을 불러들여 전교하기를,
"재간에게 사실 성토할 만한 죄가 있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말하는 사람이 없이 조용하다가 지금 특별히 새로운 죄가 나타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아뢰는가?"
하니, 대윤이 대답을 하지 못하므로 이런 명이 나온 것이다. 이어서 경연관에게 이르기를,
"재간의 일은 지난날 좌상이 차자로 논한 이후 몇 년 동안 나는 누구의 말 한마디도 들어보지 못했다. 나라 사람 절반은 재간의 문제에 말이 미치면 숨기고 피하는 일로 간주하고 있으며, 금대를 띠고 옥관자를 단 관리들도 역시 모두 입으로는 그렇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게 여겨 물러가서는 뒷말이 있다. 대체로 역적은 사람마다 처단할 수 있는 것인데, 역적 김하재(金夏材)를 칠 때는 한편이 싫어하고 역적 재간을 칠 때는 다른 한편이 싫어하니, 역적을 치는 것에도 편당이 있단 말인가. 경연에서는 색목(色目)을 말해선 안되는데,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 이른바 소론(少論)도 점차 같은 꼴이 되어버려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세신(世臣)을 보전하는 것이 바로 내가 고심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지난번 경연에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사람을 죽인다는 뜻으로 말한 적이 있는데, 나의 뜻은 단지 사람마다 이를 경계삼아 크게 반성하고 스스로 구덩이 속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휴지 속에서 베껴낸 이운빈(李運彬)의 상소가 올라와 내가 그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오늘 합계가 또 나왔다. 재간의 일인 것은 마찬가지인데도 불구하고 전에는 죄를 성토하는 사람이 없다가 이제 갑자기 상소와 합계가 번갈아 터져나오니, 이는 필시 누군가 기주관(記注官)과 친밀한 자가 지난번 경연의 말을 퍼뜨려 그렇게 된 것일 것이다. 또 어쩌면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켜서 한 것으로 되어 마치 내 뜻을 받들어 토죄를 청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니, 어찌 통분스럽지 않겠는가. 그리고 사실 뭔가 제구실을 하려고 한다면 그 방안이 어찌 구차하게 책임만 메우려는 이와 같은 논의에 있겠는가. 이른바 합계에서 법조문의 명목은 적몰인데 말한 것은 파직의 죄에 불과하니, 만약 농간을 부리자는 일이 아니라면 결단코 이는 내 뜻을 시험해 보려는 계책이다. 이는 한 대간의 죄가 아니다. 서 판부사(徐判府事)와 같은 처지에서도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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