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정축
김노영(金魯永)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확(尹㬦)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4일 무인
상이 백성들의 일을 근심하여 근신으로서 고을 수령으로 있다가 교체되어 돌아오는 자가 있으면 곧 만나보고 조용히 백성들의 실정을 물어보곤 하였다. 이때 승지 박황(朴鎤)이 여주 목사로 있다가 교체되어 돌아와 여주에서 군사를 징발하는 폐단을 진술하여 아뢰기를,
"군사 정원의 총수가 줄어드는 원인은 실로 두 능의 수호군과 향교와 서원의 유생을 정원수 외에 더 두거나 자원자를 받아들이는 데서 생기는데, 바로잡는 조처가 있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능침과 향교가 비록 소중하다 하더라도 능을 지키는 군사와 향교에서 일을 보는 자는 각기 정해진 인원이 있는데, 별도로 정원수 이외의 명목을 만들어 군역을 피하는 소굴로 삼고 있으니, 어찌 이런 법도가 있단 말인가. 갓난아이와 이미 죽은 자를 군사로 뽑는 폐단을 그동안 얼마나 거듭 금지시켰던가. 이미 이런 폐단의 원인을 들었으니 조사하여 바로잡는 것을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대로사(大老祠)에 이르러서는 곧 내가 특별한 감회가 있어 세운 것인데 이제 그 원우(院宇)에도 원납(願納)이란 명목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있으며, 이 고을뿐만 아니라 다른 서원에서도 역시 이런 명목을 붙이는 일이 있다 한다. 그러니 반드시 특별한 분부를 내려 신설한 곳부터 금지하도록 한 뒤에야 다른 서원에서도 두려워할 줄 알게 될 것이다.
네가 아뢴 것은 매우 절실하다. 어찌 한갓 기록에만 실어두고 그치겠는가. 오늘은 비록 재계(齋戒)하는 중이긴 하나 일이 백성들의 고통에 관계되는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엄중히 신칙하는 내용으로 공문을 띄우게 하라. 이렇게 했는데도 본부에 한 명이라도 갓난아이나 이미 죽은 자에게 신포를 거두는 일이 있다면 감사와 수령이 어찌 무거운 처벌을 면할 수 있을 것인가. 능관(陵官)과 향교·서원의 재임이나 유생들도 역시 드러나는 대로 엄히 다스려야겠다. 세초(歲抄)하는 때를 기다려 비변사에서 특별히 본사의 낭관을 보내 그 근만(勤慢)을 조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로사는 곧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사당이다.
3월 5일 기묘
시임과 원임의 대신들과 각신(閣臣)들을 불러 만나보았다. 좌의정 채제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장릉(莊陵) 때 절개를 지킨 여러 신하들 가운데 집현전 교리 구인문(具人文)은 청맹(靑盲) 행세를 하면서 평생을 벼슬하지 않았으며, 온천에 목욕하러 간다는 핑계로 영월에 가서 단종에게 문안을 드렸으니, 그 드높은 충절은 순절한 신하들에 비해 손색이 없습니다. 벼슬을 추증하는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 말을 받아들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함창(咸昌)의 유생이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영당(影堂)에 사액을 요청하여 작년에 거둥하시는 도중에 상소를 올렸는데, 상께서 엄정하게 꾸짖어 곧 철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유생들이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고 바야흐로 건물을 짓는 일을 벌여 놓고, 그중에 의견이 다른 자는 통문을 돌려 벌을 준다고 합니다. 마땅히 엄한 벌을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이르기를,
"신유년에 조정에서 금한 이후로는 의리상 감히 멋대로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공부자(孔夫子)는 소왕(素王)이므로 왕작(王爵)으로 높히고 왕례(王禮)로 제사지내고 있으니, 서원이란 두 글자는 매우 무식한 짓이다. 감사는 추고하고 수령은 잡아다 문초하라."
하였다.
사관과 선전관을 각 능과 원(園)·묘(墓)에 나누어 보내 한식제(寒食祭)의 제물을 살펴보고 나무 뿌리를 조사하도록 하여, 그 결과 직무를 태만히 한 능 참봉과 봉상시 관원들을 차등있게 벌주었다.
3월 6일 경진
1백 세 된 노인 신의청(申義淸)이 명을 받고 이르자 편전으로 불러 만나 보았다. 의청이 그 나이와 자손의 숫자 대로 상에게 술을 바치겠다고 청하고 또 감사와 수령을 신중히 선발하여 백성을 기르고 구휼하는 근본으로 삼도록 아뢰었다. 상이 가상하게 받아들이고나서 궁궐의 음식을 주고 지방관에게 잔치 비용을 내주게 하였으며 그 아들 신병권(申秉權)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3월 7일 신사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서부(西部)의 민가 64호가 불에 탔다. 한성부가 즉시 보고를 하지 않았다 하여 해당 당상관에 대해 한 분기의 녹을 거르는 벌을 내리고, 진휼청으로 하여금 특별히 구호품을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
3월 8일 임오
전교하였다.
"성균관 장의(掌議)의 ‘근실(謹悉)’ 도장을 받지 않고 곧장 정원에 올리는 유생의 상소는 선조(先朝)의 수교(受敎)를 어기는 것이다. 정원은 성균관에 분부하여 이러한 사정을 유생들에게 알려주고 지방으로 내려보내게 하라."
경외(京外)의 유생 이용서(李龍舒) 등이 상소하여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와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3월 9일 계미
김지묵(金持默)에게 다시 금위 대장의 직을 제수하였다.
사간 윤행리(尹行履)가 상소하기를,
"신이 일찍이 《국조보략(國朝譜略)》을 열람하다가 우리 문종 대왕의 왕비 자리가 10년이나 비어 있었던 부분에 이르러 내심 의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고, 지난번 한식절 제향 때 외람되게도 현릉(顯陵)의 전사관(典祀官)이 되어 능침을 우러러 뵈니 사모하는 마음이 더 한층 사무쳤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현덕 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062) 가 승하하신 것은 세종 23년 신유년으로 문종께서 세자로 계실 때인데 세자의 자리에 계시면서 어찌 세자빈의 자리를 하루라도 비워둘 수 있었겠으며, 또 경오년063) 에 등극하신 뒤에도 어찌 한때라도 왕비 자리를 비워둘 수 있었겠습니까. 예법으로 따져 보아도 반드시 그럴 리가 없을 것인데 단지 근거할 만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의문을 의문 자체로 놔둔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 정승 김재로(金在魯)가 명을 받들고 연경에 갔을 때 명나라의 서적을 보니 ‘경태(景泰)064) 경오년에 태감(太監)을 보내 조선 국왕 및 왕비 최씨의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주었다.’ 하는 말이 있어 깜짝 놀라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는 최씨 왕후가 안 계신다.’ 하고 예부에 글을 올리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후 충주(忠州)의 진사 김경지(金敬之)가 상소하였는데 거기에 ‘우리 나라는 근거할 만한 문헌이 없어서 최씨 왕비가 있었는지 몰랐는데, 다행히 중국의 서적을 통하여 상고할 수 있었다’ 하였으므로, 우리 영종 대왕께서 서둘러 사관에게 실록을 상고해보게 하셨으나 최씨 왕비를 세운 일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 일이 중지되었습니다. 신은 그때 상고한 실록이 과연 세종조의 실록이었으며 신유년 이후 경오년까지 과연 빈을 책봉한 일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삼가 연산조 때 대사간 김극뉵(金克忸) 등이 소릉(昭陵)065) 의 복위를 청한 글을 보았더니 거기에는 ‘문종 원비(元妃) 권씨가 죽은 시기는 노산군(魯山君)보다 앞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꺼번에 소급하여 폐위시켰다.’ 하였습니다. 연산군의 시대는 문종조와 시기가 그다지 멀지 않은데 이미 원비(元妃)라는 말을 하였으니, 계비(繼妃)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전주 최씨(全州崔氏)의 족보에는 ‘공빈(恭嬪)’이라 되어 있고 자손이 없다고 하였으며 그 부친의 이름은 최도일(崔道一)로 임영 대군(臨瀛大君)의 처남이라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 혹자는 이분이 곧 문종비로서 세자빈일 때의 칭호인 공빈(恭嬪)을 쓴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구전되는 말이고 문헌이 있는 것이 아니니, 신이 어찌 감히 오늘에 와서 단정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고 상신이 본 명나라 서적과 김극뉵이 말한 원비라는 내용을 가지고 최씨 족보에서 말한 공빈이란 칭호를 참조해보면 우연한 일은 아니지만 끝내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세종조의 실록을 다시 상고하여 신유년 이후 만약 세자빈을 책봉한 일이 있다면 근거로 삼을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더없이 중대하니 묘당에 물으시고 문헌을 널리 상고하여 빠진 사실을 보충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가운데 진술한 문제는 항상 의혹스러워 감히 마음속에 잊지 못하던 일이다. 하물며 요즈음은 장릉(莊陵)에 배식(配食)하는 일로 인해 대략 의리상으로 강구하고 시행하는 조처가 있었으니, 이런 때에 이런 일을 어찌 한층 더 널리 상고하고 물어서 답답한 의심을 풀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일은 매우 중대한 데다가 그 내막은 지극히 아리송하니 이 때문에 말을 하고 싶어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어느덧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네 상소가 올라왔다는 말을 듣고 가져다가 보았더니 처음 서두에서는 나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흐뭇하다가 차츰 읽어내려가 결말에 이르러서는 네 말도 의문인 채로 놔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내 의혹이 이로써 더욱 깊어진다. 고 상신 김재로가 연경에 갔을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은 일찍이 경연관을 통해 접해 보았고 문종께서 등극하실 때 칙서를 받은 사실도 역사서에 실려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며, 최씨 족보에 기록된 것도 역시 상소의 내용과 약간 어긋난다. 다만 《세조실록》에 있는 금성 대군(錦城大君)의 사실 가운데 ‘처족을 왕비로 세우려 하다가 되지 않았고 중궁을 자기가 세운 것이 아니라 하여 갖가지 계책으로 이간질을 하였다.’ 한 말이 있는데, 이것이 조금이나마 근거로 삼을 만한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이른바 처족이란 곧 창승(倉丞) 최도일(崔道一)이다. 또 세우려고 하다가 되지 않았고 자기가 세운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요컨대 문종께서 계비를 세우는 예를 거행한 일이 있긴 하지만 그 계비는 창승을 지낸 최도일의 딸이 아니라는 것도 역시 분명하다.
아, 자규루(子規樓)의 옛터가 오늘에 와서 갑자기 나타난 것도 오히려 기이한 일이라 여겼는데, 이 일이 혹시라도 믿을 수 있는 분명한 근거가 나타나 1백 년 동안이나 미처 하지 못했던 일을 시원하게 거행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어찌 다만 내 마음에만 다행이겠는가. 환하게 오르내리는 신령께서도 반드시 기뻐할 것이다."
하였다. 막 대신과 춘추관의 당상관을 불러 만나보고 근거를 찾는 방법을 모색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때 이미 밤이 깊어가고 또 비가 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특별히 대신과 각신, 춘추관의 당상관과 윤행리를 불러 하교하기를,
"선조(先朝) 때에도 이 일을 상소로 청한 자가 있었는데, 성왕께서 크게 놀라워하면서 실록을 상고해내도록 명하셨다. 나는 이 일에 대해 의문이 계속 쌓여 마음이 답답한 지 오래되었다. 지난번에 장릉의 일로 인해 《세조실록》을 조사해 온 것 중에 최씨의 사실이 있었는데 그 내용으로 보면 최씨는 애초에 빈으로 책봉한 일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중궁은 자기가 세운 것이 아니라고 한 말로 보면 혹시 그때 이미 정해진 왕비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혹시 현덕 성후(顯德聖后)를 두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은 대간이 모른다고 한 사안이자 나도 의심이 나는 점인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고 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예조 참판으로 있을 때 장령 강필신(姜必愼)이 이 일을 임금께 진달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광운은 서적을 널리 상고하고 밤낮으로 오랫동안 깊이 생각한 끝에 깨닫고 말하기를, ‘현덕 왕후가 승하하신 뒤에 문종께서는 육례(六禮)를 갖추어 친영(親迎)하신 빈이 없었다. 경오년 2월에 상중에 접어들어 임신년 4월이 담제(禫祭)를 지내는 달이었는데 승하하신 것은 5월이니, 상중에 중궁을 책봉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예법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이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왕비 자리가 비어 있었던 것에 대해 의심을 하니, 진실로 가소로운 일이다.’ 하고는 이런 뜻을 강필신에게 말하였습니다."
하고, 직각 서영보(徐榮輔)는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고 상신 김재로의 《부연일기(赴燕日記)》를 보니, 임자년066) 에 반포한 《명사(明史)》 가운데 우리 나라에 관한 기록의 등본에 잘못 쓴 것이 많았으니, 문종 왕비의 성을 잘못 쓴 것이 그중에 하나였습니다. 고 상신 김재로가 무오년067) 에 사신으로 간 것은 대개 사서(史書)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고 끝내 그것을 바로잡고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그 사실이 대간의 상소 내용과는 크게 다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래도 한 번은 역사서를 상고하지 않을 수가 없다. 먼저 춘추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선조의 실록부터 자세히 상고해 보면 《세종실록》을 상고한 일이 반드시 그 안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하고, 이어 채제공 등에게 명하여 다음날 춘추관에 가서 선조의 실록을 상고해보도록 하였다. 춘추관이 아뢰기를,
"신들이 선조의 실록을 삼가 상고해 보니, 정묘년068) 12월 충청도 유학(幼學) 박통원(朴通源) 등이 상소하기를 ‘《명사》 열전(列傳)에 왕후에게 고명(誥命)을 내렸다는 문장이 있는데 그 연월을 상고해 보면 문종조에 있었던 일인 듯하고, 또 고양(高陽)에 옛 무덤이 하나 있는데 옛날 노인들이 공빈 최씨(恭嬪崔氏)의 무덤으로 전하고 있으며, 연대로 추정해보면 문종조에 해당하는 듯합니다. 이로 보면 반드시 계비 최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증명할 만한 문헌이 없으니, 문헌을 널리 상고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상이 대신들에게 물어서 의논하도록 명하니, 대신들이 모두 실록을 상고해 보도록 청했으므로 드디어 지춘추(知春秋) 김시형(金始烱), 검열 심관(沈鑧) 등에게 명하여 정족 산성(鼎足山城)에 있는 사고에 가서 세종·문종·단종 세 조정의 실록을 상고하게 하였습니다. 같은 달 22일 시형 등이 별단(別單)을 올리기를 ‘세종 23년 신유년에 세자빈 권씨가 돌아가시고, 9월에 의정부에서 가례색(嘉禮色)을 설치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습니다. 12월에 사정전(思政殿)에서 친히 처녀들을 선발했는데, 판 서운관사 문민(文敏)과 예빈 직장(禮賓直長) 권격(權格)의 딸을 취하여 모두 승휘(承徽)로 삼았습니다. 병인년069)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상에 예조에서 복제(服制)에 대해 아뢸 때, 승휘의 복제에 대한 것만 실었고 빈궁의 복제는 애당초 거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무진년070) 5월에는 동궁에 윤씨(尹氏)를 들여 소훈(昭訓)을 삼았으니, 곧 윤희(尹熺)의 딸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문종(文宗) 경오년(1450)에 태감(太監) 윤봉(尹鳳) 등이 문종의 책봉에 관한 고명을 가지고 나와서 중궁에게 관복(冠服) 차림으로 나오라고 하였고 《의주(儀註)》 안에도 왕후가 나와 직접 조칙을 맞이한다는 말이 있었으나, 여러 사람들이 의논한 끝에 응답하기를 「본디 이런 전례가 없고 더구나 지금은 왕후께서 이미 돌아가셨다.」 하였습니다. 문종께서 승하하신 뒤에 예조에서는 단지 귀인(貴人)·소용(昭容)·공주의 복제만 논의했을 뿐 역시 내전(內殿)의 복제를 마련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아뢰기를 ‘단종 임신년에 강맹경(姜孟卿) 등이 아뢰기를 「내정(內政)은 지극히 중요한데 오랫동안 모후(母后)가 안계시니, 홍 귀인(洪貴人)이 내정을 총괄하게 하소서.」 하였고, 계유년에는 세조께서 수양 대군(首陽大君)의 신분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위로는 모후의 보호해 주시는 힘이 없고 아래로는 현비(賢妃)의 경계해 주는 도움이 없습니다.」 했습니다.’ 하였습니다.
시형 등이 입시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이제 역사를 상고한 등본을 살펴보니, 현덕 왕후께서 빈궁으로 계시다가 승하하신 뒤에는 비록 문씨와 권씨를 선택하여 승휘로 삼은 일은 있었으나 빈으로 책봉한 일은 없다. 병인년 소헌 왕후의 상사 때 단지 승휘 등의 복제만 있었을 뿐 빈궁의 복제는 없었으니, 빈궁의 자리에 책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종의 상사 때도 단지 단종 및 내외 명빈(內外命嬪)의 3년 복제가 있을 뿐 중궁전의 삼년 복제는 없었다. 명부에 대해서도 자세히 썼는데 하물며 왕비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 역시 근거가 될 만한 일이다. 문종께서 세자로 계실 때나 등극하신 뒤에도 공빈 최씨라는 칭호는 전혀 실려 있지 않으며, 또한 당장 해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경오년 태감 윤봉이 국왕과 왕비의 면복을 가져왔을 때, 내전이 영접하는 예에 대해 묻자, 여러 사람들이 「예법에 없는 일이고, 더구나 지금은 왕비가 이미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는데, 이로써 미루어보면 그것은 곧 현덕 왕후의 면복이었고 황제의 글 속에서도 권씨라 부르고 있다. 임신년 7월에 강맹경 등이 단종에게 아뢰기를 「내정은 지극히 중요한데 오랫동안 모후가 계시지 않았으니, 선조의 귀인 홍씨로 내정을 총괄하게 하소서.」 하였으니, 이것은 문종에게 왕비가 안계셨다는 첫 번째 증거이다. 계유년에 세조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정인지(鄭麟趾) 등을 거느리고 청하기를 「위로는 모후의 보호해 주는 힘이 없고, 아래로는 현비의 경계해 주는 도움이 없으시니, 왕비를 들여 세워 후사를 얻어 선왕의 대를 이으소서.」 하였으니, 이것은 문종에게 왕후가 없었다는 두 번째 증거이다. 다음해 정부와 육조가 의논을 올려 현덕 왕후의 존호 6자를 올렸으니, 문종의 왕후로는 단지 현덕 왕후만이 계셨다는 것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10년 동안이나 빈위(嬪位)를 비워 두고 2년이나 왕비 자리를 비워두었기 때문에 왕홍서(王鴻緖)의 《명사(明史)》 기록 가운데 성씨를 잘못 최씨로 썼고 최씨의 족보 가운데 공빈(恭嬪)이라 기록한 것은 의심스러운 기록을 억지로 끌어다 댄 것이었음을 이번 걸음에서 시원하게 알게 되었다. 이로써 왕홍서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고 새로 간행된 「명사」가 믿을 만한 책임을 당장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중외로 하여금 모두 이런 사실을 알게 할 것이며, 호서 유생의 상소는 이제 다시 의심할 것이 없으니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실록에 있는 별단(別單)과 선조(先朝)의 하교를 서로 대조하여 고증해보니, 승휘(承徽)와 소훈(昭訓)을 뽑은 사실은 모두 실려있으나 유독 공빈 최씨만은 빠져있으니, 이것은 《세종실록》을 근거로 하여 의심을 풀 수 있는 점입니다. 고명(誥命)을 영접하는 의식에 ‘이미 돌아가셨다.’ 하였고 복제를 아뢸 때도 왕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니, 이는 《문종실록》을 근거로 하여 의심을 풀 수 있는 점입니다. 이미 귀인으로 하여금 내정을 총괄하도록 청하였고 또 ‘위로는 모후의 보호해 주는 힘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단종실록》을 근거로 하여 의심을 풀 수 있는 점입니다. 나아가 왕홍서의 《명사》로 말한다면 그것은 곧 초고로서 강희(康熙) 이후에 추가하거나 삭제하는 일이 계속되다가 장정옥(張廷玉)이 총괄하여 마름한 뒤에야 비로소 지(志)·전(傳)을 갖추어 천하에 반포하였으니, 이것이 마땅히 정본(正本)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나라에 관한 열전을 상고해 보면, 분명히 왕비 권씨라고 실려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선조(先朝)의 하교에 당장 해명할 수 있다는 말씀이 있게 된 근거입니다.
실록을 참고해 보아도 이미 이와 같고 정사를 고증해 보아도 또 저러한 데다가 선조의 하교 또한 너무도 상세하니, 문종께서 계비를 책봉하신 일이 없고 최씨를 애초에 뽑아들인 일이 없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대간의 상소 가운데 언급한 유생 김경지(金敬之)의 상소문은 실록이나 승정원에 모두 실려 있지 않은 것으로서 근거할 데가 없습니다. 이제 이처럼 실록을 상고해 보라는 하교는 실로 일이 막중하여 반드시 자세하고 신중하게 하자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신들이 각 시대의 실록을 두루 상고해 보아도 끝내 의거할 수 있는 문헌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선조께서 이 일 때문에 세종·문종·단종 세 조정의 실록을 상고할 것을 명하시고, 이어 경연관에게 하교하기를 ‘춘추관의 당상관과 낭관이 복명하기 전에는 옷을 단정히 입고 기다리겠다.’ 하시므로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여러 날 애써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며, 그들이 복명한 뒤에는 윤음을 내려서 중외의 의혹을 깨우쳤다고 하였다.
이 하교가 환하게 선조의 실록에 실려 있는데, 요즈음 사람들이 전고(典故)에 어두워 이번에 대간 윤행리(尹行履)의 상소가 있게 된 것이다. 그 일을 중요시하는 뜻에서 곧 대신들에게 물으니, 대신도 역시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심지어 의심스럽지 않은데 무엇을 점칠 것이냐는 말까지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하교와 문헌을 상고하기 전에는 단지 대신이 경연에서 아뢴 말만 따라 의심스러운 일을 결정짓기가 어려워 선조의 실록을 삼가 상고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경들이 아뢴 말을 보니, 세 조정의 실록에 실려 있는 것과 선조께서 분석하신 윤음은 실로 후세에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그러니 내 어찌 다른 의견이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이를 받들어 믿어서 전날의 의혹을 통쾌하게 풀 수 있겠으니, 이 아뢴 말을 조보(朝報)에 베껴 반포하여 누구나 그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선조께서 춘추관의 당상관과 낭청이 6일 뒤에 복명할 때까지 의관을 바로 차려 입으신 채 기다리셨으며 심지어 밤에도 잠자리에 들 사이가 없었으므로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극력 청해도 듣지 않으셨다 하였다. 이제 실록과 《정원일기》에서 상고한 것을 보니 과연 전에 들은 것과 같아서 선왕을 받들고 추모하는 성덕(聖德)을 우러러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40년 전의 일에 지나지 않는데 세상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요즈음 사람들은 이처럼 고루하다. 앞으로 시대가 조금만 더 멀어지면 오늘날 대간의 의논과 같은 것이 다시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김경지의 상소문은 두루 상고해 보아도 없다고 하니, 이는 대간이 박통원(朴通源)의 상소를 잘못 듣고 말한 것은 아닌가. 이 초기(草記)도 조보에 베껴 반포하여 중외가 모두 사실을 알고 의심을 환하게 풀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0일 갑신
한성부가 혼인하지 못한 자 5인과 혼인을 권고받은 자 68인, 그리고 시기가 지나도록 장사지내지 못한 자 33인에 대해 보고하니, 유사에게 명하여 도와서 성사시키도록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이조원(李祖源)이 창녕 현감(昌寧縣監) 서유풍(徐有豊)의 법을 지키지 않는 실상을 치계하니, 하교하기를,
"금년에 성후(聖后)의 지친(至親)을 어찌 차마 소홀하게 보아 넘길 수 있겠는가마는 공법(公法)은 공법이고 사은(私恩)은 사은이다. 해당 현감 서유풍을 엄중히 처벌함으로써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으면서 법을 받들기를 삼가지 않는 자들의 경계로 삼게 해야겠다."
하고, 이어 잡아다가 엄히 벌주도록 하였다. 서유풍은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종손(從孫)이다.
3월 11일 을유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고 재전(齋殿)에서 장릉(莊陵) 헌관 이치중(李致中)을 불러 만나보았다. 치중이 아뢰기를,
"제단에 제사지내던 날 밤에 달과 별이 밝았고 제사지내는 일도 무사히 잘 치렀습니다. 충신의 자손으로 반열에 낀 자들은 슬퍼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고 늙은이와 젊은 남녀들도 10사람, 1백 사람씩 무리를 지어 와서 참관하고 탄식을 하였으니, 충성스런 혼과 씩씩한 넋이 반드시 저승에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하니,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지난달 27일 예조 판서가 향을 받아서 능 아래에 이르렀는데, 한밤중에 한 줄기 붉은 빛이 정자각(丁字閣)에서 일어나 휘휘 감돌더니 직선으로 제단에 뻗쳤고 땅을 불처럼 환하게 비추자, 능관(陵官)이 불이 난 줄 알고 허둥지둥 뛰어나왔으며 고을 사람들도 멀리서 보고 놀라서 많이 와서 보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 사람 가운데 편안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은 무슨 영이(靈異)가 있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유독 울분이 맺혀서 풀지 못한 경우에는 이따금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으니, 이런 이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영월부의 자규루(子規樓) 옛터가 수백 년 뒤에 나타난 것이 배식(配食)을 상고하여 정한 일과 공교롭게도 같은 날에 맞아떨어져 억지로 끌어대지 않아도 내 마음이 한꺼번에 끌렸으니, 어찌 다만 때가 있는 것이라고만 하겠는가. 이제 종백(宗伯)이 돌아와서 누각을 만드는 일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아뢰었으니, 일을 감독한 관원들에게 마땅히 그 공로를 기록해 상을 주어야겠다. 지방관인 영월 부사 이동욱(李東郁)은 가자(加資)하고 본도의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은 숙마(熟馬) 1필을 대면해서 주고, 헌관인 예조 판서 이치중은 표피(豹皮) 1장을 내려 주라. 대축(大祝)인 부교리 박기정(朴基正)은 육신의 후손으로서 단지 이 집안의 이 사람만이 제사를 치르는 반열에 끼어 있어 매우 희귀한 일이니, 본부의 부사에 제수하라."
하고, 또 기정에게 이르기를,
"육신의 자손이 단지 너 한 사람뿐이니, 내 마음이 서글프다. 이 고을에 너를 제수하는 것은 그 뜻이 어찌 범연한 것이겠는가. 모든 일에 마음을 다하여 조정에서 특별히 제수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광주(廣州)와 용인(龍仁) 등 고을에 있는 지방 창고를 수원부 소재지로 옮겨 세우도록 명하였다. 대신 채제공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신응현(申應顯)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철모(李喆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12일 병술
함경도 관찰사 이문원(李文源)에게 월봉(越俸)의 벌을 내리고, 전 북도 병마 절도사 이윤경(李潤慶)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문원이 남북도의 순회 훈련을 중지할 것을 청하여 상이 허락하였다. 그런데 윤경은 이미 순회 훈련의 길을 떠나 서수라(西水羅)에 이르러서야 훈련을 중지하라는 명을 듣고서 중지하고 돌아갔으며 북관(北關)의 모든 고을에 영을 내려 관아에 모아 놓고 점호를 받도록 하였다. 그러자 비변사에서 종성(鍾城)이하 여러 고을과 진은 이미 병마 절도사의 순회 훈련을 거쳤는데 또 모여 점호를 받도록 함으로써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였고, 문원은 순회 훈련을 중지할 것을 청하고도 제때에 윤경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원과 윤경의 파직을 청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감사의 잘못은 큰 것만 보고 작은 것은 보지 못한 데에 있으니 우선 월봉 3등에 처하고, 모아 놓고 점호하는 것은 순회 훈련을 할 때는 하지 말도록 한 것은 이미 전에 규정으로 정한다는 하교가 있던 것인데 그 규정을 공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서슴없이 법을 범하였으니, 병사는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얼마 있다가 장신(將臣) 서유대(徐有大)가 아뢰기를,
"북쪽 지방의 군병들은 병영에 속한 것도 있고 부(府)에 속한 것도 있으므로 군사 훈련과 관아에 모아 놓고 점호하는 일은 각기 별개의 일이니, 중복해서 시행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여, 윤경의 죄를 없었던 것으로 하였다.
조종현(趙宗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소대를 거행하였다.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朴宗岳)이 송사하는 백성이 글을 올려 자기를 비방한 것 때문에 상소하여 변명하니, 하교하기를,
"송사의 전말이 어떻든 간에 송사 중인 백성이 송사를 맡은 관리를 비방한 것은 풍화(風化)에 관계되는 일이다. 더구나 감사는 고을 백성과 그 지위와 위세의 차이가 얼마나 현격한가. 조금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여 곧 욕설을 퍼부으니 어찌 이런 기강이 있으며, 감사도 어찌 꼭 이런 일로 상소하여 피혐까지 함으로써 완악한 백성의 버릇을 조장한단 말인가."
하고, 그 상소를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이시수(李時秀)가 위라(位羅)·소기(所己)·대현 산성(大峴山城) 등의 축난 곡식 2천여 섬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치계하니, 하교하기를,
"백성이 있어야만 진(鎭)도 성(城)도 환곡도 군량도 있는 것이다. 도망치거나 죽은 지 오래된 자의 것을 이웃이나 일족에게 징발해도 역시 없는 경우가 절반이 넘는다. 그런데 이제 만약 일일이 독촉해서 받아낸다면 진에는 병졸이 없고 성에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니 군량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나아가 가난하여 의지가지 없는 사람들은 이미 금년에 부과된 것만으로도 곤궁한 터인데, 거기에다 같은 진의 이웃이나 일족의 몫까지 부담하게 한다면 그 측은함은 도리어 죽거나 도망가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 자보다 심할 것이다. 모두 탕감해 주도록 하라."
하고, 이어 관리와 백성들을 모아 놓고 큰 거리에서 그 환곡 장부를 태워버리도록 명하였다.
3월 13일 정해
사근역(沙斤驛)의 오래된 환자 곡식 2천 섬을 탕감해 주었다. 이보다 앞서 영남 함양군(咸陽郡)에 환곡의 폐단이 있으므로 상이 특별히 어사를 파견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다. 어사가 돌아와 사근역의 환곡의 폐단이 함양과 다름이 없다고 아뢰니, 상이 감사에게 바로잡아 구제할 계책을 강구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이에 도신 이조원(李祖源)이 아뢰기를,
"본역의 원래 환곡 8천 5백 섬 가운데 정실(精實)한 것 1천 5백 섬을 골라 5백 섬은 본역에 두고 1천 섬은 속역(屬驛)에 나누어 보내 환자로 운영하게 하며 이미 썩어 흙먼지가 되어버린 것 이외에는 모두 돈으로 바꾸어 다른 고을에서 사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그 장계가 분실되어 즉시 아뢰어 처리하지 못했다. 이때에 와서 상이 찰방 유정모(柳鼎模)를 불러 보고서야 그 사정을 알고, 전교하기를,
"내가 사근역의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게 되었다. 내가 만약 진실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내 매우 두렵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함양의 환곡의 폐단은 비록 이미 바로잡았다 하지만 사근역의 환곡도 함양과 다를 것이 없다. 대체로 본역은 본읍에 끼어 있는데, 읍의 백성들은 한숨 돌리게 되었으나 역에 속한 백성들은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으니, 이 어찌 똑같이 보아주는 도리이겠는가. 작년에 어사가 조정에 돌아와 연석에서 아뢰는 말을 듣고 특명으로 감사에게 백성들의 고통을 조사하여 바로잡으라 했으므로, 내 생각에는 감사가 이미 조사하여 바로잡아 역에 속한 백성들도 역시 실질적인 은혜를 받았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 실태에 대하여 듣지 못해 늘 마음속으로 미심쩍게 여겨 지난 가을부터 겨울, 그리고 달포 전까지 경연에서 물은 일이 10여 번 뿐만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묘당과 정원에서는 모르겠다고 하기 때문에 직접 본도에 물어보아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미처 못하였다. 그러다가 엊그제 대신의 말을 듣고서야 본도에서 아직도 회답이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비로소 본도의 백성들이 해를 넘기면서 애타게 기다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어찌 보고가 늦다고 찰방을 죄주었던 본뜻이겠는가. 오늘 찰방을 불러 묻고서야 사실을 자세히 알았으니, 어찌 묘당에서 회계하길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썩어 흙먼지가 된 곡식과 거칠고 나빠서 팔기 어려운 것으로 창고에 남아 있는 것을 모두 탕감해 주도록 하라."
하고, 이어 이조원은 파직하고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 이병모(李秉模)를 삭직하도록 명하였다.
3월 14일 무자
채홍리(蔡弘履)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3월 15일 기축
조강을 거행하였다.
차대를 거행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이시수(李時秀)를 파직하였다. 황해도 봉산(鳳山) 사람 이극천(李極天)이 향전(鄕戰)071) 때문에 투서하여 그와 알력이 있는 사람들을 무고하였는데, 내용이 감히 말할 수 없는 문제에 저촉되었다. 시수가 사유를 갖추어 아뢰면서 익명으로 투서한 법으로 처리하기를 요청하였다. 상이 이 일을 대신과 재상들에게 물으니, 모두들 무고한 자는 마땅히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아룃는데, 좌의정 채제공은 아뢰기를,
"고 상신 이원익(李元翼)이 임금 앞에서 손수 흉서를 태워 버렸는데 그것은 고변(告變)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익명서를 즉시 태워버리지 않고 추문하여 붙잡아서 위에 알린 감사의 일 처리가 잘못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요즈음 향전이 나날이 심해져 얼마 전에는 원주(原州)에서 분쟁이 있었는데 이제 또 황해 감사의 장계가 올라왔다. 이른바 의논하여 보낸다는 글에 이미 성명을 사실대로 쓰지 않는다고 말했으니 이름을 숨기고 쓰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처음에는 익명서는 교형(絞刑)에 처한다는 본율(本律)을 시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 민간의 분쟁 때문에 감히 말할 수 없는 문제까지 언급한 것은 남을 무고하는 간교한 백성의 계책이 이렇게 하여야만 임금에게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가령 감사가 즉시 그 종이를 태워 버렸다면 자연 그 간교한 계책을 미리 꺾어버릴 수 있었던 것인데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하고 처음에 일단 붙잡았고 그 다음에는 또 태워 버렸으며 끝내는 본율을 적용시키자고 청하였다. 익명서가 아닌 것을 알았다면 무엇 때문에 태워 버렸으며, 만약 태워 버리려 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붙잡았단 말인가. 이미 붙잡은 뒤에 또 보고까지 하면서 원래의 글은 지레 태워 버렸으니, 정소(呈訴)한 사람의 자백도 역시 십분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법례로 따져볼 때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황해 감사 이시수를 파직하라. 향전에 대한 처벌을 어찌 꼭 조정의 회답이 내리기를 기다려 결정할 것이 있겠는가. 원래의 장계를 도로 내려보내라."
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에게 이르기를,
"내가 백성들의 고통이 위에 알려지지 않을까 걱정하여 호소할 수 있는 길을 크게 열어 상언(上言)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는데, 근래 방만함이 너무 지나치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는 성 내외에 거둥할 때 일반 백성들이 하찮은 일로 상언하는 것을 엄히 금하라."
하였다.
《무원록언해(無冤錄諺解)》를 간행하였다. 이보다 앞서 상이 《무원록》이란 책은 사형에 관한 옥사를 판결하기 위한 것인데 본문이 까다로와 누구나 쉽게 알기 어렵다 하여, 능은군(綾恩君) 구윤명(具允明)에게 언해를 짓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와서 책이 완성되자 형조에 명해 간행하여 내외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한성부에서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의 서손녀가 시기가 지나도록 혼인을 못한 것을 아뢰니, 해당관으로 하여금 특별히 돌보아주도록 명하였다.
조종현(趙宗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심환지(沈煥之)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경일(李敬一)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3월 16일 경인
고양(高陽) 대자동(大慈洞)에 공빈(恭嬪) 최씨의 묘가 있다고 말한 자가 있어, 그를 수소문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종부시에서 아뢰기를,
"지평 정필조(鄭弼祚)에게 물으니 ‘경혜 공주(敬惠公主)의 묘가 고양 대자동에 있는데, 그 곁에 예장(禮葬)한 큰 무덤 하나가 있으나 옛 비석이 마멸되어 알아볼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경기 감영에 공문을 보내 그 묘지기를 불러 물으니 ‘단지 최빈(崔嬪)의 묘라는 말만 들었고, 빈호(嬪號)는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또 최씨의 후손인 최광억(崔光億)을 불러 물으니 ‘공빈의 묘가 대자동 경혜 공주의 무덤 왼쪽에 있다.’ 하였으나 그 자세한 것은 끝내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다시 믿을 수 있는 문헌을 상고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3월 17일 신묘
육상궁(毓祥宮)을 참배하고 봉안각(奉安閣)을 봉심(奉審)하였으며, 선희궁(宣禧宮)·연호궁(延祜宮)·의소묘(懿昭廟)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장보각(藏譜閣)을 살펴보았다. 상이 근신들과 함께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잠시 쉬면서 술과 음식을 내렸다. 상이 오언근체시(五言近體詩) 1수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짓도록 하였다. 이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임오년072) 에 사당을 지을 땅을 결정할 때 처음에는 이 누각 아래로 하려고 의논하였으나, 그때 권흉(權兇)이 그 땅이 좋은 것을 꺼려서 동쪽 기슭에 옮겨 지었으니, 지금의 경모궁(景慕宮)이 그것이다. 그러나 궁터가 좋기로는 도리어 이곳보다 나으니, 하늘이 하신 일이다. 내가 선희궁을 배알할 때마다 늘 이 누대에 오르는데, 이는 아버지를 여윈 나의 애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누대는 선희궁 북쪽 동산 뒤 1백여 보 가량 되는 곳에 있다.
3월 18일 임진
이문원(摛文院)에서 재숙(齋宿)하였는데 의종 황제(毅宗皇帝)의 기일에 황단(皇壇)073) 에서 망배례(望拜禮)를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반궁(泮宮)에서 삼일제(三日製)를 설행(設行)하였다.
정경순(鄭景淳)을 공조 판서로, 홍성연(洪聖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19일 계사
황단에서 망배례를 거행하였다. 명나라 사람의 자손과 충신의 후손 및 우리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한족(漢族)들을 불러 만나보았다.
이때 석한영(石漢英)·석한준(石漢俊) 형제가 있어 스스로 명나라 상서 석성(石星)의 후손이라 하니, 상이 불러서 그 족계(族系)를 물었다. 한영 등이 대답하기를,
"신들은 석성의 아우 석규(石奎)의 현손(玄孫)인데, 숭정(崇禎)갑신년074) 에 규의 아들 석계조(石繼祖)가 승려 휘정(徽貞)과 함께 폐사군(廢四郡)의 만포(滿浦) 땅에서 안협현(安峽縣)으로 와서 자취를 숨기고 살아 자손들이 거기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고는, 이어 《조주석씨기실(潮州石氏紀實)》이란 책을 올렸는데, 이는 안협 사람 이세영(李世瑛)이 지은 것이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곧 신종 황제가 다시 살려낸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상서 석공 같은 분이 있어 힘써 동국을 구원해야 한다는 계책을 도왔고, 그 뒤에 이 제독(李提督)075) 형제와 양원(楊元)·장세작(張世爵) 두 원수의 큰 승리와 형 군문(邢軍門)076) ·양 경리(楊經理)077) 의 왜적을 소탕한 일들은 모두 석 상서가 이모저모로 주선해 준 덕분이었다. 그 당시 조정의 의견이 많이 갈라지자 상서는 의분에 겨워 맹세하기를 ‘만약 일을 이루지 못하면 죽고야 말겠다.’ 하였다. 그 자세한 내용은 남아있는 전기에 실려 있는데 그 간곡한 정성은 먼 후세까지 사람들로 하여금 감격하게 한다. 상서는 끝내 모함을 받아 옥중에서 죽고 처자는 변방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아, 상서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갚지 못하였다. 그 죽음은 곧 우리 나라 때문이었으니, 우리 나라에서 크게 보답하는 것이 어찌 위에서 말한 여러 명장보다 조금이라도 뒤질 수 있겠는가. 이 제독의 후손도 우리 나라에 넘어와 살고 있는데 연전에 특별히 의리를 높히는 예를 강구하여 사당을 짓고 신위를 만들어 희생을 잡아 제사지내게 하였다. 상서의 경우는 그 종손이 역시 승려 휘정과 바다를 건너와 동쪽 고을에 자취를 감춘 자가 있었다. 지난번 교외에 나갔을 때 비로소 상서의 아우인 규의 손자에 현손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망배하는 반열에 참여하게 했던 것이다.
지금 황단의 재사(齋舍)에서 불러 만나보고 우리 나라로 온 사적을 가져다 보니, 충분히 믿을 만한 증거가 된다. 이날 이 책을 보았으니, 특이함을 표창하는 일을 어찌 차마 이날을 넘겨서 하겠는가. 그러나 상서의 직계 후손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사당과 신위를 별도로 만드는 것을 이 제독 집의 전례처럼 하자고 갑자기 논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일찍이 들으니 무열사(武烈祠)에 봉안된 여러 초상 가운데 상서의 초상만은 본디 얼굴 모습이 또렷하여 살아있는 것 같다 하였다. 안협에 들어가 살고 있는 석한영·석한준 등에게 병조로 하여금 역마를 주어서 오늘 바로 평양에 있는 무열사에 보내 한 번 알현하도록 하라. 만약 소본(小本)이 있다면 그들에게 집을 사서 봉안해 두고 때때로 제사지내는 것을 허락할 것이며, 만약 없다면 지자(支子)가 따로 사당을 세우는 의리를 모방해 적용한다해도 불가하지는 않을 듯하다. 주자(朱子)의 말에도 종손이 다른 나라에 가 있을 경우 남아있는 방계 자손이 그쪽을 바라보면서 제사지낸다는 것이 있고, 《가례(家禮)》에 ‘신주를 반열에 따라 부묘(祔廟)한다.’는 것이나 《통전(通典)》에 ‘묘를 향해서 제단을 만든다.’고 한 것이 다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다. 더구나 영명하여 사라지지 않은 석 상서의 혼령이 있다면 어찌 나라가 망해 버린 중국 땅에서 제사를 흠향하고 싶겠는가. 인정(人情)이 가는 곳에는 예법도 따라가기 마련이다. 한영이 상서를 제사지내는 것이 예법에도 결코 어긋나지 않을 줄로 안다. 이런 내용을 한영 등이 알도록 하라."
하고, 이어 한영 등을 훈련 도감과 어영청의 권무 군관(勸武軍官)에 붙여 요식(料食)을 받게 할 것을 명하였다.
삼학사(三學士)의 봉사손(奉祀孫)을 거두어 쓰도록 명하고, 고 상신 유성룡(柳成龍),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직계 후손으로서 쓸 만한 자를 찾아서 아뢰도록 하였다.
3월 23일 정유
한성부에서 남부(南部)에 거처하는 백성 가운데 혼인하지 않은 사람 24인, 혼사말이 오가는 사람 32인, 장사지내지 못한 사람 103인을 아뢰니, 유사에게 명하여 돌보아주도록 하였다.
3월 24일 무술
이홍재(李洪載)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3월 26일 경자
인정전(仁政殿)에 가서 종묘의 하향 서계(夏享誓戒)를 거행하였다.
3월 27일 신축
비국 당상 조정진(趙鼎鎭)을 불러 만나보고 전교하기를,
"각도의 노비 신공에 대한 폐단은 일찍부터 익히 아는 바이지만, 작년에 함양에서 어사가 돌아온 뒤에 이 폐단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더 자주 듣게 되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시정 조처가 없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선조(先朝) 을해년078) 의 절목(節目)은 실로 더없이 큰 특별한 은전이자 옛날에도 없던 조처로서 1만여 명의 노비가 호조로부터 대급(代給)을 받았으나 유독 성균관과 상의원만은 아직도 신공을 거두고 있다. 특별한 곡절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각도의 노비 신공의 폐단은 진실로 매우 가긍한 일이다. 본조와 내수사의 노비안(奴婢案)을 상고한 뒤에 대신에게 가서 의논하여, 각별히 말을 만들어 각도에 공문을 보내 1명의 남자나 여자라도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라.
내가 처음 즉위하던 해에 특별히 추쇄관(推刷官)을 혁파하였으나 신공에 대한 약간의 폐단은 아직도 시원하게 혁파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항상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다. 낱낱이 조사해 낸 다음 도망쳤거나 죽은 자를 사실에 근거해 기록한 뒤에 본사(本司)에 보고하게 하라. 이 뒤에 적간할 때 만약 탄로나는 것이 있으면, 해당 수령을 법에 따라 엄히 처벌할 것이며, 만약 아뢰어 처리할 것이 있으면 감사가 장계로써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8일 임인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봉사손 이종회(李宗恢)를 서용하도록 하였다. 의안 대군은 국초의 종실 가운데 어진 사람이다.
3월 29일 계묘
좌의정 채제공에게 하유하기를,
"내가 처음 즉위하던 해 먼저 노비의 폐단 때문에 추쇄관을 혁파하여 잡비를 감면해 줌으로써 선조(先朝)의 백성을 사랑하는 뜻의 만분의 일이나마 받들었던 것이다. 경은 그때 유사(有司)의 자리에 있으면서 절목(節目)을 편찬하여 올렸으니, 그 자세한 내용을 경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천하에 하소연할 곳 없는 매우 가긍한 자로는 우리 나라의 사노비(寺奴婢)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숙종 대왕 때부터 그 원통하고 괴로운 실정을 염두에 두어, 노공(奴貢) 2필을 1필 반으로 하고 비공(婢貢) 1필 반을 1필로 감하였다. 또 선조에서는 양역(良役)의 절반을 줄여 주고, 노비의 신공에서도 반 필을 감해 주었다. 갑오년에는 비공(婢貢)을 삭제하고 단지 구전(口錢)만 남겼으니, 이에 이르러 노공과 양역(良役)이 균등해지고 노비는 신역이 없게 되었다.
그 뒤에 어찌 다시 다른 폐단이 있겠는가마는 추쇄관의 폐단이 맹호보다 심하기에 내가 또 추쇄관을 혁파하고 그 일을 각 고을에 맡겼다. 그런데도 폐단은 심해지기만 하고 그치지 않았으며, 그 폐단은 갓난아이에게도 미치고 또 사망자에게도 미치고 있다. 그들의 이름은 노미(老味)·연이(連伊)요 그 나이는 1백 살·2백 살이며, 친족에게 징발하고 이웃에 징발하며 나아가 친족과 이웃의 친족과 이웃에게까지 징발한다. 또 혹은 이른바 두목(頭目)이란 무리는 집안 살림을 다 털어 대신 충당하기도 하며, 심지어 꼬집어서 징발할 곳이 없는 경우에는 관청에서 증인을 정해 모두 받아내고, 그렇지 않으면 창고의 곡식을 떼내어 신공을 대신 바치는 등 온갖 작태들이 고슴도치 털처럼 어지럽다. 이 때문에 노비라는 두 글자는 제정신이 있고 꿈지럭거리는 자라면 누구나 피하려 하는 것이다. 설령 자식을 낳는 일이 있어도 그 형세가 자연 숨기고 빠뜨릴 수 밖에 없는데, 만약 낱낱이 조사해서 찾아내려 한다면 그 폐해는 닭이나 개에까지 미쳐 민가가 스산해질 것이며, 이어 두목의 무리는 뇌물을 받고는 함께 숨겨 주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1, 2년이 지나다보면 태반이 허위 기록이 되고 말 것이니 이처럼 잘못된 일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서북 지방은 그래도 세금을 면제해 주는 법규라도 있지만, 삼남(三南) 등 여러 고을의 경우는 더욱 오래 누적된 폐단이 있다. 백성들의 고통에 관한 문제라면 백 가지 일이건 천 가지 일이건 모두 바로잡아 구제할 길이 있는데 노비의 고통에 대해서는 고을원들도 감히 손 쓸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조정에서도 말을 제기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니, 세상에 어찌 이런 사리가 있단 말인가.
실로 그 원인을 따져 보면 노비라는 이름을 듣기 싫어하는 데에 있는데 사람들도 그들과 어울리기를 부끄럽게 여기니 자연 혼인을 제때에 하지 못함으로써 인륜의 도리가 막히고 마는 것이다. 누적된 폐단을 제거하는 것은 노비라는 이름을 없애버리는 데 있지만, 노비라는 두 글자는 곧 우리 기성(箕聖)079) 이래 몇천 년 동안 내려오는 법으로 명분의 큰 한계가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이름을 없애버리면 사천(私賤)도 본받게 되어 끝내는 명분이 완전히 없어지고 말 것이므로 그 이름을 없애는 것은 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이 때문에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비 신공의 폐단은 의논할 수 없는 것인가. 양인(良人)의 신역에서 어린아이와 사망자에게 지우던 것은 그대로 오히려 한정(閑丁)들에게 책임지워 받아낼 수 있지만, 저 노비의 경우는 단지 이 숫자만이 있어서, 인원수가 서로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의논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쳐서 내버려둔다는 것은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그래도 한두 가지 생각할 만한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지금의 노비안은 갑오년에 결정한 임진년의 것인데, 수십 년 사이에 늙어 죽고 태어난 것이 극도로 문란해져 기준으로 삼기 어렵다. 예로부터 노비안을 고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신해년에는 신해년에 고친 노비안이 있고, 그 뒤에는 을해년에 노비 신공을 감해 준 실제 노비안이 있으며, 그 사이에 또 경오년 노비안이란 명색이 있다. 대체로 신해년과 경오년 사이에 그 노비안이 여러 번 바뀌었기 때문에 을해년 사목 가운데 경오년의 노비안을 기준으로 삼자고 청했던 것이니, 이는 각해의 들쭉날쭉한 노비안을 비교하여 중간되는 노비안으로 결정한 것이다. 지금 비록 60년으로 한정해서 단지 신해년까지의 경우를 들어 말했지만, 만약 소급해서 두루 상고한다면 신해년 이전에 안을 바꾼 것도 몇십 번 몇백 번인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추쇄관을 이미 혁파했으니 조사해서 면제해주려 해도 방법이 없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각도와 각읍으로 하여금 소란스럽게도 말고 다그치지도 말며 서두르지도 말고 늦추지도 말게 하면서 올해 안으로 성의껏 찾아내되 찾았건 놓쳤건 많건 적건 간에 조금도 고집하거나 결정짓지 말고 늙어 죽은 자는 모두 면제해주고 새로 태어난 자는 누락시키지 말아야 한다. 읍비총(邑比摠)080) 을 돌려잡기 어렵다면 도비총(道比摠)을 돌려잡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집행을 제대로 하고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사를 나누어 보내 조사하여 신해년의 실제 노비안을 다시 정하게 한다면 다소나마 이익이 있을 것이다.’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백성들이 이것을 기피하는 것은 일단 이 이름을 뒤집어 쓰기만 하면 도저히 뽑혀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만약 각도로 하여금 노비안에 실려 있는 자 가운데 무술을 익힌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서울 내수사의 노비들에게 【지금의 사족(士族)이나 중인(中人)들도 그 조상이 혹 선두안(宣頭案)에 들어 있기도 하며 그 아래의 종족들도 모두 내수사의 노비안에 들어 있다.】 속량(贖良)하는 규례와 북관(北關)의 사노(寺奴)들에게 벼슬길을 터주는 규례에 의하여 무과(武科)에 응시하도록 하되 지방의 장수나 우두머리들 이외에는 모두 구애받지 말도록 하며, 비록 무술을 익힌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만약 양인이 되기를 자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연한에 준한 신공을 바치게 하고 본인에 한해 양인이 되는 것을 허용한다면 【이를테면 나이가 31세인 자는 다 31필을 바치게 하는 것들이다.】 뽑혀나오는 길을 열어 줄 수도 있고 기피하는 문제도 없앨 수 있다.’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남종의 공포(貢布)와 여종의 구전(口錢)을 거두어 위에 바치는 것은 폐단이 적지 않으니, 만약 북관에서 노비의 공납을 고을 창고에 받아들이는 규례에 따라 모두 곡식으로 계산하여 받아들인다면 【규정한 것에 의하면 남종은 무명 1필 값으로 쌀이 10말이고 여종은 구전 3전 값으로 쌀이 1말 5되이다.】 환곡을 받아들일 때 한꺼번에 받도록 해야 한다. 그 곡물은 균역청에 보내 균역청에서 값을 지급하고, 아울러 균역청에서 묘당에 품의하여 각기 그 도내의 곡식이 많은 고을의 곡식을 규정에 의해 돈으로 바꾸어 쓰도록 하면, 상납의 폐단도 없앨 수 있고 또 비용을 대기 어려운 문제도 없앨 수 있다.’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남종의 신공으로 바치는 것은 비록 목화가 풍년이 든 해라도 품질을 구실로 퇴짜를 놓으므로 그 비용이 적지 않은데 하물며 목화가 잘 안 된 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 뒤로는 목화가 풍년이 들었건 흉년이 들었건 따질 것 없이 모두 돈으로 헤아려 결정한다면 형편이 펴질 수 있을 것이다.’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남종의 신공 1필은 곧 양역(良役) 1필과 같으니, 동등하게 보아주는 도리로서는 더한다든가 덜한다든가 하는 것을 논할 수 없겠으나 이미 노비란 이름을 뒤집어쓰고 또 이 공포(貢布)를 바치니, 늙어서 면제받는 연한을 줄여 주는 것이 마땅하다. 남종의 신공을 16세부터 55세까지로 하여 40필의 수를 기준으로 하면 양역에 비해 5년이 감해지는 것이니, 역시 억울함을 풀어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가령 그들이 천인 신분을 면하고 양인이 된다 하더라도 양역 1필을 바치는 것은 형세상 면할 수 없지만, 노비를 싫어하고 양인이 되려는 것은 그 이름을 싫어해서이다. 이제 만약 노비라는 이름을 바꾸어 보충대(補充隊)라 부르면서 16세부터 60세까지를 별대(別隊)로 만들어 아전 부대의 아랫자리와 종 부대의 윗자리에 두고 해마다 받아들이는 면포 1필이나 돈 2냥을 신공(身貢)이라 하지 말고 신포(身布)라 하여 양인 군사와 똑같이 인정해 준다면 이름이 달라졌으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른바 두목(頭目)으로서 10명 이상을 맡아 관리하는 자가 20년 동안 폐단 없이 찾아내거나 폐단 없이 받아들인 자이면 특별히 신공을 면제해 주고, 만약 뇌동하여 숨기거나 빙자하여 폐단을 만든 자는 적발하여 무겁게 벌을 준다면 또한 고무시키고 징계하는 길이 될 것이다.’ 한다.
지금 이상의 말들은 제각기 일리가 있어 비록 크게 고쳐 새롭게 하는 것에는 견주어 말할 수 없으나 역시 조금이라도 바꾸면 그만한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대부분 미봉책에 불과하다. 첫째 조항에서 노비안을 고치자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혹시라도 노비를 찾아내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는 또 하나의 추쇄관을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니, 그 폐단은 묻지 않아도 알 만하다. 그리고 다소 잘못되는 점이 있더라도 또 다른 이익이 있다는 생각으로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둔다면 협잡이 더욱 심해져서 혜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둘째 조항에서 뽑아내 주는 한 가지 방법은 근거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이 역시 부유한 자에게는 다행이나 가난한 자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셋째 조항에서 쌀 10말을 준비해 내게 하는 것은 돈이나 무명으로 내는 것보다 어렵다. 봉족쌀을 바치는 군사의 정액 외에 더 내게 하는 것도 오히려 철저히 금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쌀을 바치는 노비의 폐단 한 가지를 보탤 수 있겠는가. 선뜻 논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넷째 조항에서 쌀을 돈으로 바치게 하자는 것은 특히 소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다섯째 조항에서 신공을 바치는 기간을 5년을 줄여주자는 것은 역시 조금 위안과 기쁨이 되겠지만 그 이름이 싫어서 신역을 피하는 것은 여전할 것이다. 여섯째 조항에서 말한 보충대는 공천과 사천이 신역을 면한 뒤에 소속에 붙이는 군액(軍額)이니, 그럴 듯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양인(良人)들과 섞어 배정하기 어려우니, 섞어서 배정해 놓고 보충대라고 부른다면 요즘처럼 분수를 지키지 않는 습속으로 보아 그들이 기꺼이 다투어 들어갈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경은 경험이 많고 일을 잘 알아 나의 뜻에 부응할 만한 별다른 의견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앞에 든 여러 조항의 말들을 세밀히 연구해 보고 하나하나 지적해 진술하여 선왕의 뜻을 계승하려는 나의 고심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경외(京外)의 신료들에게 또 돌려가며 물었다. 채제공은 바로잡을 만한 계책이 없다고 대답하였고, 선혜청 당상 서유린(徐有隣)은 의논드리기를,
"조사해 찾아낸 뒤에 각기 힘닿는 대로 몸값을 물어놓게 하며 그들에게서 받은 돈과 물건을 곡물로 바꾸어 각 고을에 보관해 두고 그 절반은 장리를 받아 신공값을 대신 치를 밑천으로 쓰도록 하되 부족한 숫자는 조정에서 충당해 주면 명분에 어긋날 걱정도 없고 해묵은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朴宗岳)은 의논드리기를,
"그 이름을 그대로 두고 신공을 보충할 것이며 노비안은 옛날의 인원수를 그대로 따라 신해년 노비안을 만들고 신공은 새 조항을 만들어 사천 봉족으로 정해줘야 합니다. 대체로 공천과 사천은 한가지이니 사천으로 공천을 보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이고 노비로 노비를 대신하는 것도 명분이 매우 바릅니다. 공천 1사람 당 사천 2사람을 봉족으로 정한다면 공천도 자기들만 고생하는 것을 면할 수 있고 사천들도 역시 기꺼이 따를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한 가지 조처로 두 가지 이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고,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은 의논드리기를,
"시노(寺奴) 가운데 자원하여 대신 종노릇 할 사람을 바친 자는 모두 면천을 시켜준다면 노비라는 이름은 그대로이고 정원수도 줄어들지 않을 것이므로 대대로 종이 줄어든다는 원망도 풀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나머지는 의논드리는 자가 없었다.
경기 각 고을의 가분(加分)한 모곡(耗穀) 3천 석을 경기 감영에 주어, 매년 거둥 때 어가(御駕)를 수행하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조실록32권, 정조 15년 1791년 6월 (4) | 2025.08.04 |
|---|---|
| 정조실록32권, 정조 15년 1791년 5월 (3) | 2025.08.04 |
| 정조실록32권, 정조 15년 1791년 2월 (5) | 2025.08.04 |
| 정조실록32권, 정조 15년 1791년 1월 (6) | 2025.08.04 |
| 정조실록31권, 정조 14년 1790년 12월 (8) | 2025.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