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2권, 정조 15년 1791년 5월

싸라리리 2025. 8. 4.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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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을해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고 이어 희생과 제기들을 살펴보았다. 대궐로 돌아올 때 금군(禁軍)의 행군 대열이 법대로 되지 않아 금군 별장 신대겸(申大謙)을 잡아들여 처리할 것을 명하고, 삼사(三司)의 관원이 어가 앞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하여 모두 체직하였다.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아뢰기를,
"영릉(永陵)의 공해(公廨)를 개수하는 일을 한결같이 현륭원(顯隆園)의 규례대로 거행하라는 것으로 이미 명이 있었습니다. 본 고을에 있는 상평창과 진휼청의 곡식 2천 섬을 갈라내어 개수하는 비용으로 삼되, 매년 이자를 받아 쓰도록 하고 쓰고 남은 숫자를 매년 겨울에 별도로 글을 올려 보고하게 하는 것으로 규정을 만드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여러 능·원·묘의 공해를 개수하고 관리하는 것은 그 일을 주관하는 곳이 각기 달라 서로 미루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므로 지난 기유년부터 능관(陵官)에게 책임을 전담시켜 차례로 수선하게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개수할 곳은 능관이 경기 감영에 보고하고, 경기 감영은 호조에 공문을 보내 그 재력을 헤아려 능관에게 개수를 하도록 맡기며, 도백 중에 봉심(奉審)하는 걸음에 정성을 들이지 않는 자를 살펴 즉시 글을 올려 파직하며, 예조에서는 그 사안의 경중에 따라 전최(殿最)할 때 경계를 보이도록 하는 것을 규정으로 정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개수한 뒤에 점검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사체를 중시하는 뜻이 아니다. 또 일정한 기한이 없을 수 없으니, 한결같이 모든 공역(公役)에서의 정해진 기한대로 따르되 그 기한 안에 무너져 파손될 때는 당시의 담당 낭관과 공사를 감독한 당상 및 낭관을 차등 있게 죄를 주도록 하라. 도백이 봄 가을 봉심하는 걸음에 만일 범연하게 보거나 덮어둔 사실이 승지를 보내 봉심할 때나 사관이나 선전관을 보내 적간할 때 발견된다면, 당해 도신을 정원으로 하여금 곧바로 잡아들여 처리하도록 전지를 보내라. 앞으로 침랑(寢郞) 중에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는 자가 있을 경우 경기 감사로 하여금 그의 파면과 승급에 관한 일을 전담하도록 할 것이니, 이 뜻을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남지묵(南志默)을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이때 황해도에 크게 돌림병이 돌아 금위영(禁衛營)에 새로 번을 든 황해도 군사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런 때에 황해도의 백성들은 모두 쉬도록 하는 것이 옳으니, 병이 없더라도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해야 한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대신 번을 들게 하면 훈련 도감의 군사들이 특별히 그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홍화문(弘化門)은 장용영(壯勇營)의 보졸로 대신 숙직하게 하고 서영(西營)은 어영청의 신영(新營)의 지방 군사로 대신 숙직하게 하라."
하였다.

 

5월 2일 병자

이조 판서 이갑(李𡊠), 이조 참판 박우원(朴祐源)을 파직하고 이조 참의 이홍재(李洪載)를 체직하였다. 이갑은 전에 청주 목사로 보임되었을 때 조정에 돌아오는 것이 너무 지체되었고, 우원은 여러 차례 불러도 오지 않았으며, 홍재는 서용하지 않는 죄에 해당되는 사람을 서용을 청하는 대상 속에 섞어 넣었기 때문이다.

 

서호수(徐浩修)를 이조 판서로, 민종현(閔鍾顯)을 이조 참판으로, 이조원(李祖源)을 이조 참의로, 김이희(金履禧)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경기 양성(陽城)과 황해도 황주(黃州)·평산(平山)·곡산(谷山)·김천(金川) 등 고을의 화재를 당한 민가를 특별히 구휼하도록 명하고, 신포(身布)도 모두 면제시켜주도록 허락하였다. 아울러 황해 감사를 추고하였는데 즉시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월 3일 정축

상이 국사를 돌보는 여가에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열람하고 그 서법(書法)·논단(論斷)·사실(事實)·명물(名物) 가운데 의문난 것들을 뽑아 문목을 만들었는데, 모두 6백 95개 항목이었다. 그것을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어 한 사람이 각기 한 항목씩 조목별로 대답을 짓도록 하고, 다시 초계 문신 심진현(沈晉賢) 등에게 대답한 말을 산삭하고 요약하여 문목밑에 붙여 책을 만들고 이름을 《강목강의(綱目講義)》라 하였다.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서영보(徐榮輔)와 사성 성종인(成種仁)을 불러 만나보고 전교하기를,
"내가 《자치통감강목》 가운데 문제를 제기할 만한 것으로 직접 문목을 지어 유생들에게 조목별로 대답하게 하였는데, 이는 유생들과 더불어 역사를 논란하여 그들의 의론과 식견을 보고자 한 것이다. 이제 이미 책이 이루어져 그것을 정서해야겠는데 직각(直閣)이 마침 어제(御製)의 글을 교정하는 일을 관장하느라 틈이 없는 것 같다.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책을 교열하거나 베껴 써서 올리는 것은 곧 우리 나라의 고사(故事)이니, 경서 중에 존경각(尊經閣) 판본으로 가장 좋은 것은 모두 태학생들이 쓴 것이다. 선정 이이(李珥)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영락대전본(永樂大全本)을 가지고 구두점을 찍은 일이 태학에 미담으로 전해 오며, 요즘 일로 말하더라도 《주자대전》과 《주자어류》 또한 유생들이 베껴 쓴 것이 있으니, 이번에 이 《강목강의》를 써내는 것이 어찌 더욱 영예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사성과 대사성은 거재생(居齋生)이나 외방에 있는 사람을 가리지 말고 글씨를 잘 쓰는 자를 뽑아서 나누어 맡아 써서 올리도록 하라. 지난번 《강목강의》를 내려보내 써 올리게 할 때 먼 지방의 선비들도 오히려 참여했으니, 하물며 서울에 있는 유생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니, 만수가 아뢰기를,
"이는 유생들에게 있어서 큰 영광이니 반드시 기꺼이 응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30세 이상인 자는 나누어 쓰게 하고 40세 이상은 대조하게 하라. 성균관에 기숙하는 늙은 유생도 대조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종이 첫머리에 각기 글씨 쓴 사람의 성명을 써서 올릴 것이며 대사성과 사성, 그리고 직강 김희조(金熙朝)는 모두 일찍이 초계 문신을 지낸 사람이니, 일을 마친 뒤에 본관에 모여 교정해서 들이도록 하라."
하고, 또 종인에게 전교하기를,
"전 대사성의 말을 들으니 지난번 식당에서 나이 순서대로 앉는 예법을 시행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이러쿵저러쿵 하는 논란이 없어졌는가?"
하니, 종인이 아뢰기를,
"지금은 의견이 통일되어 서로 다른 의론은 없는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대(三代) 때에는 일반 백성 가운데 뛰어난 자들도 천자의 원자(元子)와 함께 나이순으로 앉았으니, 천자의 원자가 어찌 우리 나라의 사대부들만 못해서 그랬겠는가. 또 우리 나라의 전례(典禮)로 말하더라도 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할 때에는 유관(儒冠)에다 유복(儒服) 차림으로 여러 유생들과 마주서서 세 번 읍을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한 가지 일로써 군신·부자·장유(長幼)에 관한 세 가지의 좋은 도리를 알게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조정이 장차 태학에서 나이를 따지는 예를 시행하고자 하는데 유생들이 이를 생각한다면 감히 깨달아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감독 신칙하지 않고도 감동해 깨닫기를 기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점을 여러 유생들에게 효유하라."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고 대제학 양성지(梁誠之)가 규장각을 설치할 것을 요청했었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서 크게 느끼는 점이 있기 때문에 내각으로 하여금 그가 지은 글들을 모으게 했는데 듣건대 그 책이 이미 이루어졌다 하니 장차 간행을 해야겠다."
하니, 영보가 아뢰기를,
"그가 직접 쓴 서찰 몇 폭을 그 후손에게서 얻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문집을 간행할 때 그것을 책 뒤에 함께 새겨서 넣도록 하라. 서문은 내가 지금 구상하는 중이다."
하였다. 또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에게 발문을 지어 올릴 것을 명했는데 그가 규장각을 세운 초기에 제학을 지냈기 때문이다.

 

5월 4일 무인

이조 참판  민종현(閔鍾顯)을 외방에 있기 때문에 체직하고, 전 참판 박우원(朴祐源)을 유임시켰다.

 

법성창(法聖倉)의 조운선(漕運船) 4척이 안흥진(安興鎭) 앞바다에서 침몰되었다. 상이 많은 조운선이 침몰된 것은 기강에 크게 관계된다고 여겨, 묘당으로 하여금 사례를 뽑아서 회계하도록 명하였다.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짐을 선적하여 출발한 날짜가 있는데 이제서야 안흥 앞바다에 이르렀으니, 이는 때가 지체된 것이며, 배 한 척에 싣는 1천 석의 정량 이외에 더 많은 양을 실었으니 이는 초과 선적한 것이며, 바다 가운데서 침몰하였는데도 사공은 한 사람도 익사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의심스러운 일이며, 바람이 자기를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일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더라도 법에서는 실로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난파한 여러 배의 감색(監色)과 사공을 엄한 형벌로 문초하여 사실을 알아내야 합니다. 배 안의 여러 가지 일은 모두 도사공(都沙工)이 하는 것이니, 그 사실을 알아낸 뒤에 효수(梟首)의 벌을 시행하고, 영운차원(領運差員)인 법성 첨사(法聖僉使) 신섬(申暹)은 파직하여 내쫓고 조운을 끝마친 뒤에 금부로 잡아다가 서둘러 도배(徒配)의 법을 시행할 것이며, 선적을 늦춘 책임도 자연 돌아갈 곳이 있으니 해당 도신(道臣) 정민시(鄭民始)는 무겁게 추고하고, 호송 장교와 감색 등은 엄한 형벌로 징계해야겠습니다. 배가 도내에서 침몰되었으니 단속하지 못한 잘못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충청 감사 박종악(朴宗岳)도 추고해야겠습니다. 곡물에 대해서는 건져낸 아문에서 그 상태를 구분하여 격식을 갖추어 계문한 뒤에 다시 아뢰어 처리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이어 명하기를,
"건져낸 쌀 가운데 말려서 쓸 수 있는 것은 배를 구해 실어 돌려보냄으로써 연해의 백성들에게 강제로 나누어 주는 폐단을 조금이나마 없애도록 하라. 이 뒤로는 물에서 건져낸 곡식 가운데 볕에 말려 밥을 지을 만한 것은 올려 보내고, 썩어서 가축의 먹이로도 쓸 수 없는 것은 그 도에서 글을 올려 탕감해 줄 것을 청하게 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윤행원(尹行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흥해현(興海縣)의 어민이 표류하여 일본에 들어갔다가 한 해가 지난 뒤에야 돌아왔다. 그들 가운데 익사한 자의 환자곡과 신포(身布)를 모두 징수하지 말도록 하고 그것을 규정으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바다에 표류하는 자들이 간혹 고의로 그렇게 하기도 하니 앞으로는 전의 습관을 그대로 답습해 다른 나라에 수치를 끼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연해의 여러 고을에 신칙하여 고기잡이와 수산물을 캐는 자들을 절대로 먼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장령 권평(權坪)이 상소하기를,
"삼가 며칠 전에 내리신 전교를 보니, 관서 지방의 무사 가운데 한 사람도 선발에 합격하지 못한 것 때문에 감사와 병사를 충군(充軍)한 일이 있었으니, 대성인의 깊고 원대한 생각은 보통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아, 오랫 동안 태평을 누리어 사람들이 깊은 생각이 없다 보니 감사와 병사로 있는 자들은 언제나 고식적인 생각으로 무술에 대한 장려를 소홀히 하고 관례에 따라 상을 주는 것 또는 간혹 사실대로 하지 않으며, 수령으로 있는 자는 더욱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고서야 무사들을 어떻게 격려하고 권장할 수 있으며, 인재를 어떻게 키워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관서 지방이 이렇다면 다른 도도 미루어 알 만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규정을 엄격하게 세워서 각도의 감사와 병사가 매달 직접 무예를 시험하여 뛰어난 사람은 특별히 포상하게 하고, 각 고을의 수령들도 매달 무예를 시험하여 만약 연달아 몇 차례 뛰어난 성적을 올린 자는 감영에 보고하여 상을 주게 한다면, 몇 해 안가서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서북 지방의 별부료(別付料)를 뽑아 올릴 때는 무예는 따지지 않고 대부분 사사로운 청탁을 따라주므로 그 이름만 있고 실속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서북 지방의 별부료는 복무 기간의 많고 적은 것은 따지지 말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을 두루 시험하여 우수한 성적을 낸 사람을 취해 매 도목(都目)에 변방의 장수로 뽑아 보내면, 무예가 없는 자는 애초부터 뽑혀 올라갈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고 무예가 있는 자는 오랫 동안 복무하는 고생이 없어서 역시 반드시 기꺼이 올라오려고 할 것이니, 이것이 무예를 장려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이제 대비과(大比科)가 앞으로 몇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 폐단을 바로잡는 방안을 미리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로 선비들의 풍습이 바르지 못한 것은 오로지 시관들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니 그 자신이 바르지 못하고서 남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인재가 옛날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과거 시험 한 가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인재가 어찌 없겠습니까. 언제나 고시관으로 의망되면 사정에 치우쳐서 공정하지 않으므로 과방(科榜)이 한번 나오면 온 나라에 말이 시끄럽습니다. 시험장 밖에서 글을 팔아 먹거나 봉함을 속이는 등 간교한 버릇은 더욱 가증스럽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전부(銓部)와 법조(法曹)를 미리 신칙하여 전의 습관을 다시는 답습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신이 일찍이 남쪽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때 시험보이는 고을의 폐단을 익히 알았습니다. 대체로 응시자들이 임시 거처를 정한다는 핑계로 다투어 민가를 차지하고 시험 기일 4, 5개월 전에 읍내에 시끄럽게 모여듭니다. 그 가운데 무뢰배들도 간혹 기회를 틈타 많이 차지하고서는 자리를 파는 계책을 삼으니, 신의 생각에는 읍과 감영에 거듭 신칙하여 미리 엄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니, 묘당에 아뢰어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5월 6일 경진

의릉(義陵)104)  의 석물(石物)을 개수하는 역사가 끝나 함경도 관찰사 이문원(李文源)에게 특별히 하유하기를,
"지난 병인년에는 이번처럼 공사가 정밀하지 못해서 곧 기초가 물러나고 말았는데 경은 그 잘못된 원인을 자세히 알아 묵은 흙을 제거하고 석회를 써서 돌이 있는 곳까지 채운 뒤에 그쳤고, 중앙의 봉분을 쌓은 곳까지 거리가 15척 정도는 넉넉히 된다고 하였으니, 매사를 이처럼 신중하고 치밀하게 하는 것이 실로 가상하다. 더구나 경이 감사로 있기 때문에 막중한 일을 전담시켜 북방의 백성들로 하여금 능역(陵役)이 있는 줄도 모르게 했으니, 이 또한 일거양득이라 하겠다. 이는 비록 매번 실례로 적용할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도백이 공사를 감독한 것은 처음 있었던 일에 속하니, 모름지기 사례(事例) 한 통을 만들어 본도에 두고 근거자료로 삼도록 하라. 대체로 옛날과 지금은 제도가 다르다. 전부 흙으로 채우든지 석회로 쌓든지 간에 지금 제도를 따르는 것이 곧 사리에 합당하니, 이 한 조목도 역시 새로 편찬하는 사례 속에 자세히 기록하라.
정릉(定陵)105)  ·화릉(和陵)106)  의 문석(文石) 두 쌍과 장명등(長明燈) 2좌(坐)를 구리갑으로 감싼 것이 보기에 과연 거슬리지 않는가? 의릉의 담장 밖의 부근에 있는 무성한 나무를 몇 걸음 정도 제거했다고 했는데, 그것 역시 과연 잘한 일이다. 연전에 고 상신 정홍순(鄭弘淳)이 본도로 명을 받고 나갈 때 봉분 앞에 있는 나무를 적당하게 베어 넓히도록 했었는데, 경은 별다른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도 때에 따라 적절히 처리했으니, 이런 점 등에서 경은 내 마음을 알아준다고 하겠다. 또 듣건대 봉분을 고쳐 쌓을 때는 으레 옹가(甕家)107)  를 쓰기 마련인데 경은 또 유둔(油芚)108)  과 무명 차일로 대신 썼다고 하니, 이것은 선조(先朝)께서 헌릉(獻陵)을 봉축(封築)하실 때 임시대책으로 그렇게 하였고 나도 원릉(元陵)을 개축할 때 그 사례를 따랐었다. 경의 생각이 의논하지 않고도 같은 것은 실로 북도 백성들의 다행이다. 이 뒤로는 반드시 이렇게 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았으면 하는데 경의 뜻은 어떤가? 이것도 함께 조목별로 사리를 따져 아뢰도록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석왕사(釋王寺)는 왕업이 일어난 곳이므로 다른 곳에 비해 소중하기가 각별하다. 일찍이 들으니, 국초(國初)에는 나라에서 준 토지와 그에 딸린 백성이 있어 그 수가 모두 5백이 넘었으므로 절의 재력이 넉넉하였으나 철권(鐵券)의 빛이 바랜 뒤로는 토지 1결, 노비 1구(口)도 주지 않아 절 형편이 옛날 같지 못한다고 한다. 이제 만약 토지 몇 결 정도, 노비 몇 구 정도를 떼주면 적절하겠는지 경은 지방 수령과 자세히 의논하여 하나로 결정지어 아뢰라."
하였다. 얼마 후에 별단자(別單子)로 인해 도신 이문원에게 내구마(內廐馬)를 내리고, 능관(陵官)과 지방관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5월 8일 임오

약원(藥院)의 3제조와 시임과 원임 대신, 그리고 각신을 불러 만나보았다. 좌의정 채제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태학의 식당에서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똑같이 나이의 순서대로 앉게 한 것은 실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는 정치입니다. 조정에 있어서는 재주가 중심이 되어야 하니, 서얼이라 해서 재주가 있는데도 그의 진출을 막아버리는 것은 하늘이 인재를 이 세상에 낸 뜻이 아닙니다. 다만 집안에서는 적자와 서자가 엄연히 차등이 있으니, 역시 이 점은 문란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야 스스로 식견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적자의 집이 꼭 모욕을 당하는 일이 없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나 먼 지방의 경우 태학에서 나이 순으로 앉히는 일 때문에 집안의 분의(分義)를 문란시켜도 무방하다 여긴다면 그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한 차례 분명히 효유하여, 조정과 개인 집의 경우는 각기 정해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분간해 깨우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아뢴 말이 매우 좋다. 학교는 학교이고 가정은 가정이다. 만약 이 일을 끌어다가 저 일에 적용하여 분쟁의 단서를 만든다면 지금 백 년을 내려온 잘못된 풍습을 바로잡으려는 좋은 뜻이 도리어 폐단을 만드는 빌미가 될 것이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묘당에서 중외에 알려 각기 서로 예로써 상대하고 분수에 따라 몸가짐을 갖게 하여 화평한 복을 다함께 누릴 수 있게 하라."
하였다.

 

5월 9일 계미

약원의 3제조와 각신을 불러 만나보았다. 이때 혜경궁(惠慶宮)이 종기가 났다가 곧 회복되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들어가 하례하였다. 상이 약원 제조 오재순(吳載純)에게 이르기를,
"자궁(慈宮)의 종기에 우분고(牛糞膏)를 붙이기 위해 전생서(典牲署)의 검은 소를 사복시에 들여다 길렀는데 이제 이미 효과를 보았으니, 이 소는 방옥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검(洪檢)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경오(李敬五)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조종현(趙宗鉉)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대사성에게 40세 이하의 유생을 태학에 불러서 경사(經史)의 문의(文義)를 조목별로 대답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상이 일찍이 순제(旬製)를 여러번 시행하였는데, 응시자는 비록 합격되지 않은 자라도 그 성명을 기록해 두고 ‘방휘(榜彙)’라고 이름하였다. 이때에 와서 대사성에게 그 중에서 대상자를 뽑아내 조목별로 대답하게 할 것을 명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학문을 장려하는 방안에 대해 늘 관심을 갖고 있으므로 비록 평범한 시험인 순제일망정 응시한 사람을 이처럼 책자에 기록해 두고 수시로 펴보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 선비들은 대부분 공부를 부지런히 하지 않아 내 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양공(良工)이 혼자 마음만 고달프다는 꼴이다. 이제 이 《강의(講義)》를 태학생들에게 조목별로 대답하여 올리도록 명하였으니 장차 《태학강의(太學講義)》라고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이 어찌 실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 일을 태학 고사(太學故事)에 올리도록 하라. 유생들이 조목별로 대답한 것을 내가 나중에 직접 살펴보겠다."
하였다.

 

5월 10일 갑신

약원 제조를 불러 만나 보았다.

 

충청도 수군 절도사 김명우(金明遇)가 법성창(法聖倉)의 조운선(漕運船)이 침몰한 일로 장계하여 침몰된 곳의 지방관을 벌주도록 요청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조운선의 사안은 세운선(稅運船)과 분명히 다르지만 한꺼번에 여러 척이 침몰한 것은 더욱 훗날의 폐단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비록 배가 침몰된 곳의 지방관 등을 파직하지 않는다는 새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새 규정을 고집할 수가 없어서 특별히 모두 파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명을 받들어 행하는 절도사의 도리로는 마땅히 한결같이 새 규정에 따라서 처리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옳은데, 이 장계의 글을 보면 예전대로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아뢰어 조처하도록 요청하고 있으니,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또 침몰된 지방의 수령과 변장(邊將)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에 대해 애당초 거론하지 않았으니, 명을 내린 초기부터 규정을 이처럼 어겼다. 이 장계를 받아들인 승지와 해당 절도사를 무겁게 추고하라."
하였다.

 

새로 인쇄한 《병학지남(兵學指南)》을 장용영(壯勇營)의 지방 무사가 있는 고을에 내려 보내 공부를 장려하도록 하였다.

 

5월 11일 을유

비가 왔다. 묘당에 하유하기를,
"가뭄 끝에 비가 왔다. 관서의 돌림병은 수그러들었다는 보고가 있는가? 감사의 장계에 이것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너무도 태만하다. 묘당은 그에 대해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2일 병술

이홍재(李洪載)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대빈(大嬪)의 묘를 개수하는 일로 아뢰니, 전교하기를,
"연전에 서울에 있는 사당이 무너졌을 때 특별히 개수하게 하였는데 제물은 으레 봉상시에서 차렸고 수직(守直)하는 자는 정식 관원이 없어 체모가 매우 옳지 않았다. 그러므로 특별히 내시와 수복(守僕)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사당을 청소하고 모든 일들을 보살피게 하였다. 요즈음 절향(節享)109)  으로 인해서 무덤 주위가 황폐해졌다는 말을 듣고 지방관에게 수리하도록 한 것인데, 이제 경의 말을 들으니 일을 해야할 곳이 그처럼 거창하다. 해조로 하여금 날을 잡아 수리하게 하고 내시를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수직하는 절차는 묘감(墓監) 두 사람을 뽑아 보내 보살피게 하되 내수사에서 전적으로 담당하여 차출하도록 하고, 묘감의 요식(料食)은 지방에서 적절히 헤아려 공곡(公穀)으로 내주도록 하라. 수묘군(守墓軍) 가운데 2명은 수복이라 부르라. 앞으로 개수 등의 일은 묘감이 순영(巡營)에 보고하고, 순영에서는 지방관에게 분부하여 거행한 뒤 장계로 보고하라. 위토(位土)는 경이 조사해내어 묘감에게 떼어 주라."
하였다. 얼마 뒤에 명하기를,
"대빈궁(大嬪宮)은 한 해 건너 보수하고 묘소는 봄가을로 살펴보며, 묘감과 하인들에게는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주고 묘소에 제사지낼 때 제물은 나물류를 쓰도록 하라."
하고, 또 사당 제사에 노루고기를 쓰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니 돼지고기로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5월 13일 정해

상이 재계하는 중이라서 정사를 보지 않았다.

 

5월 22일 병신

시임과 원임 대신, 약원 제조, 호조와 선혜청 당상, 형조 판서와 조정을 떠나는 수령 등을 불러 만나보았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흑산도(黑山島) 백성들이 양향청(糧餉廳)에 바치는 닥나무의 폐단으로 징을 쳐 원통함을 호소한 일로 아뢰기를, ‘본도는 땅이 척박하여 닥나무의 뿌리가 거의 없어졌는데, 매번 종이를 뜨는 일이 생길 때면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에게 닥나무 껍질 1만 2천 9백근의 댓가로 돈 5백 냥을 규정으로 정해 받아들이는 것이 잘못된 규례가 되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외딴섬의 민폐를 변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종이 나는 곳으로 지정한 것을 영원히 혁파해 주고 양향청에서 쓰는 것은 호조로 하여금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금위 대장 김지묵을 장용영 병방(壯勇營兵房)으로 삼고 전교하기를,
"장용영을 설치한 것은 궁궐의 호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다. 직명은 우선 정하고 싶지 않으나 이제는 군제(軍制)가 약간 갖추어졌으니, 군사를 거느리는 중책을 인망이 없고 자급이 낮은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다. 마땅히 장수의 경력이나 아장(亞將)인 포도 대장의 경력을 가진 사람 중에서 뽑아 임명해야 한다. 병방(兵房)이란 칭호가 과연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고사(故事)로 볼 때 승정원의 병방도 오히려 오위(五衛)의 군사 훈련을 관장하였으니, 임시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안 될 게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금위영을 설치하기 전에는 정초청(精抄廳)이 별장(別將)에게 임시로 통솔하게 하거나 간혹 경리청(經理廳)에 소속시켜 금위 대장의 종조부(從祖父)가 임시로 그 일을 본 적도 있다. 대체로 군영에 일정한 제도가 없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하였다. 장수나 아장들 가운데 마침 적절한 인물이 없으므로 금위 대장을 가까스로 병방에 옮겨 임명하게 하였는데 군사를 통솔하는 일을 겸하게 할 수 없으니, 금위 대장 김지묵을 본직에서 체직하도록 허락한다. 이 뜻을 묘당으로 하여금 알고 있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용영 병방의 체제에 관해 방금 묘당에 내린 전교가 있었는데 군기(軍器)와 군량은 그 경비가 많지 않으므로 조처할 일이 있을 경우 제조가 주관하겠지만, 그 아래에 출납하고 관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직 일정한 제도가 없으니, 사체가 매우 구차스럽다. 그러나 문신 낭관은 대부분 임무에 익숙치 못하고 무신 낭관은 대부분 나이가 적어 모두 적합하지 않으니, 경리청(經理廳)의 전례대로 음관(蔭官)의 자리로 만들어서 문벌이 좋고 지방 수령을 여러번 맡았던 사람으로 뽑아 의망하라. 군색(軍色)과 향색(餉色)은 꼭 나눌 것 없이 군향색 낭청(軍餉色郞廳)이란 명칭을 붙이고 한 관원이 겸해 관장하도록 하라.
비록 장관(將官)으로 말하더라도 요즘 시속에서는 군사 제도를 몰라서 영문(營門)이 있으면 반드시 천총(千摠)을 두는 것을 바꿀 수 없는 법으로 알고 있으니, 진실로 고루한 것이다. 파총(把摠)으로 곧장 영장(營將)을 잇게 하면 되니, 병서의 이른바 오영 오사(五營五司)의 제도가 이것이다. 유독 이 전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 오위(五衛)의 제도를 보더라도 여수(旅帥)와 대정(隊正)의 위에는 단지 부장(部將)과 위장(衛將)이 있을 뿐이니, 이것이 또한 분명한 증거이다. 조정의 본뜻은 각영(各營)의 천총도 오히려 없애 쓸데없는 관리를 제거하려는 입장인데 더구나 본영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반드시 한 차례 제기하여 분부해야만 의혹을 깨우칠 수 있겠다.
이제부터 본영의 파총은 가선 대부에서부터 방어사의 경력이 있는 사람까지 통틀어 임명하고, 변방의 경력이 있는 자로서 지략이 있거나 혹 문벌과 인망이 있는 자는 특교(特敎)로 임명하되 이 격식에 구애받지 말고 방어사의 경력을 가진 사람을 곧바로 절도사에 의망하는 규정은 그대로 시행하라. 병방을 임명함에 있어서는 용양위 대장(龍驤衛大將)이나 호분위 대장(虎賁衛大將)의 전례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비록 호위 대장(扈衛大將)으로 말하더라도 밑에서 감히 의망할 수 없다. 그러니 또한 이 규례에 의해 결원이 생기면 장관이 와서 정원에 통고하고 병방 승지(兵房承旨)가 비답을 받은 뒤에 전교를 반포하도록 하라.
장신(將臣)으로서 가장 먼저 생긴 것은 용양위 대장·호분위 대장·포도 대장이다. 옛날에는 군사 제도에 모두 호부(虎符)와 장패(將牌)와 전령패(傳令牌)가 있었는데, 오직 포도 대장만 지금까지 그것이 있다. 병방의 직명을 아직 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나중에 더 참작해보기 위해서이지만 그가 차는 신표(信標)가 없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 명소패(命召牌)의 제도에 관해 말한다면 특별히 삼경 이후에 대신을 부르는 신표이다. 장신(將臣)이 명소패를 차면서 신표가 없다면 으레 나라를 경영하는 선비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이제 마땅히 참작하여 적용할 규정을 마련해야 하니, 호부(虎符) 하나와 전령패 하나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규정을 삼으라."
하였다.

 

장용영에 전교하였다.
"이제와서는 체제가 자연 전과 다르므로 기호(旗號)에 정식(定式)이 없을 수 없다. 수기(手旗)는 용양위 대장과 호분위 대장의 사례에 따라 황색 띠에 황색 바탕을 쓰도록 하라. 자호(字號)를 사명(司命)이니, 사령(司令)이니 하고 부르는 것은 다 속스러워 본뜰 것이 못되니, 군영(軍營)의 칭호나 혹은 명명(命名)한 칭호를 깃발에 쓰도록 해야겠다. 이는 중국의 제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고사에도 뚜렷이 상고할 만한 것이 많으니, 이제부터 수기(手旗)에는 ‘장용(壯勇)’이란 두 글자를 쓰도록 하라."

 

각도에서 납제(臘祭)에 쓰는 고기를 진상하는 규정을 고쳤다. 선혜청이 아뢰기를,
"좌의정 채제공이 납제의 고기를 꿩으로 대신하게 하자고 아뢴 것으로 인해 전부 호서(湖西)에서 말린 숭어 값으로 바치는 예에 따르는 것이 편리한가의 여부를 대신 바치는 해당 각도에 공문을 보내 물어서 하나로 귀결지어 아뢰라고 명하셨습니다.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는 아뢰기를 ‘납제의 돼지고기를 돈으로 대신 바치는 것은 묵은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지만, 그 덧붙이는 값이 관청 경비에서 나오기도 하고 민간에서 나오기도 하여 그 규정이 일정하지 않으니, 이제 말린 숭어의 예에 따라 값을 대신 바치도록 하면 각 고을이 모두 편할 것입니다.’ 하였고,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朴宗岳)은 아뢰기를 ‘납제 고기의 덧붙인 값을 본 회감(會減) 이외에 관청 창고에서 내기도 하고 민간에서 내기도 하는데 전부 말린 숭어의 예에 따라 그 값을 돈으로 바치는 것이 편합니다.’ 하였고, 함경도 관찰사 이문원(李文源)은 아뢰기를 ‘추가된 값을 관청에서 내기도 하고 백성에게 징발하기도 하는데 그때가 되어 사려고 하면 값이 폭등하니, 이제부터는 여러 고을에 엄히 신칙하여 기한 전에 미리 사둔다면 거의 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고,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는 아뢰기를 ‘납제에 쓰는 고기를 꿩으로 대신해 각읍에서는 영저리(營邸吏)에게 맡겨 바치게 하는데, 덧붙인 값을 주는 고을은 혹 있기도 하고 혹 없기도 합니다. 이른바 덧붙인 값은 백성들의 토지에 의하여 받아내거나 관청 창고에서 대기도 하여 그 규정이 일정하지 않으나, 생돼지를 바칠 때와 비교해보면 특별한 폐단은 없습니다. 이제 만약 본가(本價)를 바치게 한다면, 비단 여러 고을에서 모두 불편하다고 말할 뿐 아니라, 전주(全州)의 백성 형편으로 말하더라도 살아갈 방도가 매우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단지 이 영저리의 일뿐이므로 값에 맞춰 서로 전해주는 것이 서울 공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익의 많고 적음을 논할 것 없이 이 담당했던 물건마저 놓쳐버리면,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 장차 어려울 것이니 본가(本價)를 바치는 것도 곤란한 문제가 있습니다. 덧붙인 값은 없애고 본 회감 값만 지급하여 감영에서 준 돈과 함께 영저리에게 주도록 하소서.’ 하였고,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은 아뢰기를 ‘생꿩 한 마리의 정가가 9전이므로 상정(詳定)에 따라 내줄 것 같으면 감영이나 읍에서 값을 덧붙여줄 것이 별로 없습니다. 꿩은 곧 산골 읍에서 나는 것이므로 꿩이 귀한 때라도 값이 부족할 걱정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이 여러 사람의 말이 차이가 없지 않은데 경기·충청 두 도는 마른 숭어 값의 규례에 따라 바치는 것이 편하다 하니, 요청한 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해야겠습니다. 함경도에서는 이미 폐단이 있다고 했으니 경기·충청의 규례대로 거행하도록 하고, 전라도에서는 덧붙인 값을 없애고 본 회감 값만 주어 감영의 돈과 함께 영저리에게 내주어 생활할 수 있도록 하자고 청하였습니다. 강원도는 영구히 폐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백성들과 고을에서 모두 편리하다고 하였으니, 억지로 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 보고한 대로 시행하게 해야겠습니다.
단 경기와 호서의 각 고을에서는 생돼지 1마리당 본 회감 값이 쌀로 5섬인데, 5섬을 대동미 값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30냥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으로 꿩 80마리를 사자면 1마리당 3전에 불과하여 값이 맞지를 않습니다. 함경도에서는 생돼지 한 마리당 본 회감 값이 안변(安邊)은 55냥, 영흥(永興)은 40냥, 북청(北靑)은 40냥, 길주(吉州)는 속포(續布) 60필이며, 생사슴 1마리당 본 회감 값이 고원(高原)은 40냥, 덕원(德源)·정평(定平)·함흥(咸興)은 각각 20냥, 명천(明川)·경성(鏡城)은 속포 각각 30필입니다. 꿩을 대신 바치게 한 규례는 돼지 한 마리에 꿩 80마리, 사슴 1마리에 꿩 30마리이고 각 고을의 값이 서로 달라 꿩을 사들일 때에 혼란스러움을 면할 수 없으니, 일정한 제도가 없어서는 안됩니다. 경기·호서·북관 지방을 막론하고 꿩 1마리의 값을 7전으로 정하되, 전에 관청에서나 백성들이 덧붙여주고 부당하게 거두어들이던 값을 모두 없애버릴 것이며 매년 12월 초하루에 본 선혜청에서 각 전궁(殿宮)에 바치는 말린 숭어값의 규례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기왕 백성과 고을을 위해 폐단을 바로잡자고 말린 숭어 값을 쌀로 받아들이는 예를 준용하기로 한다면, 그저 서울 관청의 본 회감 값은 서울 관청에서 처리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고 나면 이른바 덧붙여 준 값이 도리어 폐단이 되는 것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이전에 영남에서 꿩으로 대신 바치려 하지 않은 것이나 이번에 호남에서 영저리의 폐단을 걱정한 것은 모두 조정의 본의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관동의 경우는 산골 고을이 많아서 토산물과 다름없으나 한 도만 유독 혜택을 주지 않는다면 온 나라를 똑같이 보아주는 뜻에 어긋나는 점이 있고, 또한 폐단의 근원을 제거하는 방안이 아닌 것이다.
고 선혜청 당상 김좌명(金佐明)은 고 상신(相臣)110)  의 아들로 백성과 고을을 위해 호서에서 말린 숭어를 진상하는 폐단을 없애자고 청하여 숙종께서 허락하셨다. 이 어찌 오늘날 삼가 계승할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경기와 호서에서의 납제의 고기로 쓰는 생돼지 이외에 원래 있던 것을 도로 없앤 일은 더욱 오늘날 본받을 점이 아니겠는가. 경기·호서·호남·영남·북관·관동의 납제에 쓰는 고기와 관계된 생돼지·생사슴·생노루 및 원래 바치던 꿩, 대신 바치던 꿩은 모두 대신 바치던 이전의 본 회감에 따라 지난날 말린 숭어 값의 폐단을 바로잡던 때의 사례와 똑같이 서울의 관청에서 각 전궁에 올리도록 하라. 이렇게 바로잡은 뒤에도 덧붙인 값을 백성이나 고을에서 내게 하는 경우에는 각도의 해당 감사에게 엄히 신칙해서 즉시 혁파하도록 하고, 만일 과거의 관행을 따르는 일이 있으면 값의 다과를 따지지 말고 해당 수령을 장계로 보고하여 엄히 다스림으로써 조정에서 옛날 민폐를 영구히 제거하고자 한 뜻을 우러러 받든다는 것을 알게 하라.
호남의 영저리(營邸吏)가 삭선(朔膳)으로 바치는 물선(物膳)도 역시 원공(元貢)의 하나로서 그 권리를 비싼 값에 매매하여 대대로 전하니, 경공인(京貢人)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해마다 봄에 참배하는 행차 때 저자거리에 연(輦)을 멈추고 경공인들에게 고통을 물어보는 것을 규례로 삼았는데, 대체로 조정에서는 서울이나 지방을 똑같이 보고 있다. 기왕 여기에 생각이 미쳤으니 한 차례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조치가 있어야겠다. 연전에 무뢰배들이 함부로 호남 영저리의 공물에 대한 권리를 엿보아 감히 서울의 공물로 만들 계책을 부렸던 일은 항상 놀랍고 가슴이 아팠다. 앞으로 또다시 이런 무리가 있을 경우에는 상언(上言)한 자나 정소(呈訴)한 자를 막론하고 그 주모자를 묘당으로 하여금 법사(法司)에 넘겨 엄히 처벌하여 섬에 유배하고 사면령이 내릴 때도 그 대상에 포함시키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 호남의 도백에게 향공인(鄕貢人)들에게 이 점을 효유해줘 마음놓고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게 하였다. 선혜청이 또 아뢰기를,
"이번에 변통을 한 뒤에는 서울의 관청에서 바칠 것이니, 꼭 섣달로 기한을 정할 것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말린 숭어나 인삼 값의 규례대로 매년 정월에 한꺼번에 바치게 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돈·베·쌀의 수량을 나누어 마련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그것을 대신들에게 의논했더니 말하기를, ‘말린 숭어와 인삼 값은 다섯 등분해서 둘은 쌀로, 둘은 베로, 하나는 돈으로 바치는 방식을 정했지만, 납제에 쓰는 고기에 대해서는 여섯 도가 회감하는 쌀과 돈의 값이 제각기 다르므로 다섯으로 나누어 서로 참작하는 과정에서 자연 모순되는 점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돈과 쌀을 대략 반반씩 내는 규례를 모방하여 편리한 대로 요량해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청컨대 이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서유대(徐有大)를 금위 대장으로, 이방일(李邦一)을 어영 대장으로, 이주국(李柱國)을 총융사로 삼았다.

 

5월 23일 정유

수어사(守禦使) 정창순(鄭昌順)이 아뢰기를,
"이재간(李在簡)은 천지간에 용납하기 어려운 큰 역적입니다. 들으니 재작년 가을 역적 재간이 도감 당상(都監堂上)으로 있을 때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공공연히 흉측한 말을 꺼내기를, ‘조정에서 병오년111)   5월과 9월의 일은 계속 엄하게 성토하면서도 모년의 일은 역적을 성토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오늘날 신하된 자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흉측한 말입니다. 그런데 귀신의 처단이 먼저 가해졌는데도 징벌이 미처 시행되지 않았고 그밖의 역적 행위를 끝내 밝혀내지 못했으니, 어찌 천만번 분통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듣건대 그 당시 이조원(李祖源)이 그 흉측한 말을 함께 들었다고 하기에 자세히 물어보려던 차에 마침 이시수(李時秀)를 경모궁(景慕宮)의 제향관(祭享官) 반열에서 만나 물었더니, 시수도 역시 말하기를, ‘언젠가 조원이 전한 말을 듣고 알았다.’ 하였습니다. 신은 며칠 뒤 빈청 모임에서 대신에게 말하고 함께 경연에 나가 토죄를 청하려 하였으나, 울분이 치밀어올라 지금 우선 번거롭게 아뢰니, 빨리 마땅히 시행할 벌을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청에도 일이 없고 촌에도 일이 없는 것이 좋은 것이니, 하필 이처럼 드러내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서유성(徐有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삭주부(朔州府)에 유배한 죄인 심이지(沈頤之)를 양덕현(陽德縣)으로, 개천군(价川郡)에 유배한 죄인 이득제(李得濟)를 중화부(中和府)로 옮겨 유배하였다. 평안 감사가 도내에 돌림병이 도는데 삭주와 개천이 특히 심하다고 치계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5월 25일 기해

권이강(權以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26일 경자

승지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영변부(寧邊府)는 성지(城池)가 험준하고 견고하며 강 연변의 여섯 고을의 길이 모두 여기로 모여들기 때문에 조정에서 시설한 것들이 자성(慈城)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성의 군량만은 아직도 일정한 규모가 없습니다. 대체로 산창(山倉)과 저향창(儲餉倉)은 성의 군량을 비축하는 장소인데, 평야 지대에 있는 7개 면은 산창에 소속되고 산간 지대에 있는 6개 면은 저창(儲倉)에 소속되어 쌀과 콩을 각각 1만 섬으로 한정하여 두 창고에 나누어 받아 들여서 3년에 한 번씩 곡식을 바꾸는 제도를 시행해 온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다만 쌀을 마련하기가 어렵고 돌길로 짐을 운반하는 어려움 때문에 백성들이 반드시 부근에 있는 창고로 옮겨 바치려고 하여 격식대로 바치는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또 그 곡식의 품질이 가장 좋기 때문에 감영과 읍에서 쌀을 팔 때는 아전과 향임(鄕任)들이 농간을 부려 반드시 이 창고의 곡식부터 먼저 파니, 사리로 따져볼 때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지금은 본부의 곡식 수가 전에 비해 약간 줄어들었으므로 쌀과 콩을 각각 1만 석씩 옛 규례대로 회복하려면 봄에 환자곡을 나누어 줄 때마다 두 해를 묵힌 곡식은 많고 외창(外倉)에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은 부족하여 혹 폐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지난해 가을 두 창고에서 받아들인 쌀과 콩이 도합 4천 8백 70섬인데 올봄에는 그대로 두고 환자곡으로 나누어 주지 않았으니 올 가을에도 작년의 예에 따라 떼어 받아 1만 석을 채운 뒤에 3분의 2를 남기고 그 나머지를 나누어 주는 법을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밖에도 병영(兵營)의 둔창(屯倉)과 운산(雲山)·개천(价川)의 두 창고가 있습니다. 운산창의 회계부에 올라 있는 절미(折米)는 2천 6백 3섬이고 개천창의 회계부에 올라 있는 절미는 6천 2백 60섬인데, 모두 반은 남겨 두고 반은 환자곡으로 나누어주는 곡식입니다. 병영의 둔창은 콩과 쌀을 합쳐서 4천여 섬인데, 병영의 비장이 감독해서 받아들임으로 본읍에서 또한 일률적으로 조절하지 못해 창고를 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도로 곧 전부 나눠 줘버려 시급한 때에 쓰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 만약 본부에 소속시켜 운산·개천의 두 창고와 함께 모두 3분의 2를 남기고 그 나머지를 환자곡으로 나누어 주는 법을 만든다면 비록 흉년을 당하더라도 자성의 곡식을 처리하는 예에 따라 조정에 아뢴 뒤에야 비로소 환자곡으로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그리고 둔창의 모곡(耗穀)은 병영에서 쓰는 물자이니 혹 다른 고을에서나 혹 본 고을의 외창에서 원래 정해진 수량대로 떼 주어 모곡을 가지고 그것을 보충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관서 지방의 곡물은 어느 것인들 비상시에 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하늘과 땅이 만든 자연의 보루로 만세토록 금성 탕지(金城湯池)인 곳은 오직 철옹 산성(鐵甕山城)이다. 이런 성이 있으면서도 쌓아 둔 곡식이 없다는 것은 실로 이웃 나라의 귀에 들어갈까 겁나는 일이다. 저 자성의 형편은 철옹 산성에 버금가는 곳인데도 나누어 주고 남겨 두는 제도가 오히려 저렇게 엄밀하여 비록 재작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도 보릿고개에 식량이 없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때를 제외하고는 감사도 역시 감히 환곡을 더 늘려 주자고 요청하지 못하였는데, 철옹 산성의 그와 같은 일이 어찌 말이나 되는가. 연전에 부사 서용보(徐龍輔)가 조정에서 하직 인사를 할 때 그로 하여금 거듭 백성들을 깨우쳐 성의 창고에 곡식을 들이도록 하게 한 것은, 내 생각이 이 성에 군량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들으니 1,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예전과 다름없이 텅 비어있다고 한다. 지난 번에 거듭 효유한 것은 바로 앞으로는 반드시 전처럼 팔아 없애서는 안되겠다는 말이었는데, 내가 이 점에서는 영변 백성들을 기만한 것이 되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그뒤에 환자곡을 나누어 준 관찰사와 병사 및 해당 부사를 적발하여 등급을 나누어 처벌하려고 했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3년 만에 한 번씩 곡식을 바꾸는 구례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되었고 중간에 큰 규모의 구제와 상평창에 바치는 때를 겪었으므로 조사하는 일은 우선 잠시 참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지금 경연에서 너에게 묻는 것은 반드시 옛 제도를 엄히 신칙하여 실효를 거두게 하기 위해서이니,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마땅히 시행해야 할 보관 관리 문제를 네가 아뢴 것과 참작하여 이치를 따져 초기(草記)하도록 할 것이며 이 비답과 함께 해당 부에 베껴 보내, 현판으로 걸어 두고 항상 눈여겨보면서 감히 어기지 말도록 하라. 덧붙여 아뢴 군영에 소속된 둔창의 모곡을 옮기는 일도 역시 묘당으로 하여금 아울러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금군(禁軍)을 6개 번으로 세우던 옛 제도를 회복하였다. 전교하기를,
"무릇 호령을 내릴 때는 우선 폐단을 바로잡는 것 자체가 폐단이 되지 않을 방도를 찾고 다음으로는 옛날 것을 본받고 새로 만들어내지 않는 원칙을 생각하여 분명히 유익한 것이라면 서둘러 결단력 있게 시행해야 한다. 군사 제도는 국가가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인데, 요즈음은 각 군영에 폐단이 없는 곳이 없고 그중에서도 용호영(龍虎營)의 금군이 가장 심하다. 처음 설치했을 때야 어찌 혹시라도 이러했겠는가. 1백 사람을 당해내는 용맹을 지니고 두 몫을 해내는 무술을 지니고서 집에 있을 때는 물금패(勿禁牌)를 차고 번을 설 때는 당운혜(唐雲鞋)를 신으며 등급은 정직(正職)과 같고 절은 반드시 대청에서 하였으니, 비록 한(漢)나라 때의 금군인 기문(期門)과 우림(羽林)인들 그 영예와 총애가 이보다 더했겠는가. 그런데 시대가 점차 멀어지자 옛 규범이 모두 없어져 복장이 남루하고 말들이 병들어가는 것이 해가 바뀔수록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들을 보는 것이나 그들이 스스로 보는 것이 어찌 깔보고 불만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군대란 기세를 앞세우는 것이므로 격려하고 장려시킨 뒤에야 실제로 써먹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옛사람이 ‘용감하게 앞장선다.[倡勇敢]’는 세 글자를 나라를 운영하는 좋은 계책으로 삼았다 한다. 의미있는 말이다. 어찌 나를 속이는 말이겠는가. 조정에서 금군의 여러 가지 병폐에 대해 항상 염려해 마지않아 별장(別將)을 직접 만나 당부하기도 하고 혹은 각번 군사들을 불러서 사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말을 해도 소용이 없고 명을 해도 따르지 않아 직접 만나 당부한 것이 당부하지 않은 것만도 못하고 불러서 사열한 것이 사열하지 않은 것만도 못하였다. 그래서 초봄에 7백 명의 금군을 상림(上林)에 모두 모아 놓고 활쏘기를 비교하고 말타기를 시험하였으나 한 순(巡)에 다섯 번 맞힌 자가 없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넘어지는 것만 보았다. 그때 크게 바로잡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일이란 처음 시작을 잘 도모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부득이 지금까지 신중하게 생각해 왔는데, 이제는 계책이 이미 완성되었다.
하나는 쓸모없는 것을 쓸모있는 것으로 만들어 정병(精兵)을 만드는 것이고 하나는 7백 명을 6백 명으로 바꾸어 옛 제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한 것은 후일에 기대를 건 것으로서 진영이 처음 열리고 병사와 말이 단련되었으니, 저쪽에서 옮겨 이쪽에 속하게 하면 그 도움이 매우 클 것이다. 6백 명으로 구성한 옛 제도는 용호영에도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다. 수효가 적으면 전일하고 전일하면 정예로워 자연 간단하여 통제하기 쉬운 묘리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일거양득이란 것이다.
듣건대 오늘 금군의 녹사(祿射)들이 교관(郊館)에 모인다 하는데 옛것을 본받고 폐단을 바로잡는 본의를 알려주는 것은 지금이 적기이므로 때를 넘길 수 없다. 지금부터 금군의 번드는 수는 내금위(內禁衛), 우림위(羽林衛), 겸사복(兼司僕)에서 각 2개 번으로 세운 옛 제도를 회복하라. 매개 번은 50인을 윤번으로 세우되 1개 번은 장용영에 소속시켜 먼저 50인을 옮겨 소속시키고, 또 50인을 각 번에 나누어 소속시켜라. 그 가운데 오래 근무하여 늙은 사람을 늙어서 능력 없고 말도 건장하지 못하다 하여 각번에 분속된 등급에 돌릴 것 같으면, 가는 자나 받는 자가 모두 근무하는 기간이 다 뒤로 물려질 것이다. 하루나 한 달 정도 물려지는 것도 오히려 측은한 판인데 더구나 반드시 하루나 한 달 정도에 그치고 말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병폐를 제거하려다가 그저 병폐를 보태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이속한 50인 가운데 오래 근무하고 나이가 많은 사람은 비록 사람이 늙고 말이 수척하더라도 거두어 쓸 방도에 유의하여 모두 장용영에 소속시켜라. 나머지 수십 인은 각 번에 붙여 자원을 받아보고 출신 내력을 상고해 실지 임명으로 할 것인가 예비 임명으로 할 것인가를 선택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5월 27일 신축

양빈(楊嬪)에게 특별히 민정(愍貞)이란 시호를 내리고 한남군(漢南君)의 후손에게 신주를 새로 만들어 제사지내도록 명하였다. 양빈은 단종을 어려서 보육한 공로가 있었고 끝내 안평 대군·금성 대군과 함께 의리를 위해 목숨을 던진 미덕이 있었다. 상이 그 굳은 절개를 가상히 여기고 제사받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신주를 새로 만들게 한 것이다. 양빈의 옛 칭호는 혜빈(惠嬪)이기 때문에 그 시호를 바꾸어 주고 전교하기를,
"중국 역사 기록에 그와 같은 사례가 많으니, 비빈(妃嬪)은 물론이고 공주에게도 오히려 시호가 있다. 그러니 양빈에게 어찌 시호를 내려 주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신주에 민정빈 양씨(愍貞嬪楊氏)라고 쓰도록 해조로 하여금 주인집에 분부하게 하라."
하였다.

 

충장공(忠壯公) 심대(沈岱)의 사당에 ‘표절(表節)’이라는 현판 이름을 하사하였다. 전교하기를,
"요즈음 듣건대 삭녕군(朔寧郡)에 고 감사 충장공 심대가 죽은 곳에 사당이 있다고 하여 그 시장(諡狀)을 가져다 보니, 임진년의 난리를 당해 그 공적과 절의가 뛰어나게 늠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책을 덮고 공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영의정에 증직하고 부원군에 추록(追錄)한 일이 비록 선조조(宣祖朝)에 있었지만, 정문을 허락하고 시호를 내린 일은 숙종조에 와서야 고 옥당(玉堂) 이정신(李正臣)의 건의에 따라 허락하였다. 그러나 주손(主孫)의 집이 영락하여 봉상시(奉常寺)에 시장을 가지고 가서 알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선조(先朝) 경인년에 이르러서야 특명으로 그 시호를 의논하게 하였는데 그간에 시호를 맞아들인 일이 있었는지 또 알 수가 없다. 도백으로 하여금 그 후손들이 흩어져 사는 지방을 탐문해서 감영에 불러다가 자세히 물어보고 장계로 아뢰게 하라.
삭녕 지방의 심대가 전사한 곳에 있는 옛 사당집을 수리해서 배식(配食)하는 사람들과 함께 전사한 그날에 1년에 한 번씩 제사지내게 하라. 함께 죽은 군교(軍校)는 과연 고을의 고사(故事)에 따라 요즘도 함께 제사를 지내는지 이 또한 도백으로 하여금 해당 고을에 물어보고 옛날대로 제사지내게 하라. 이미 해마다 제사지내고 사당을 수리하게 하였으니 사당에 편액이 없을 수 없다. 편액을 내리는 날에 관원을 보내 제사하게 할 것이며, 제사지낼 때 제문(祭文)은 입시한 승선(承宣)에게 지어 바치게 하고, 편액도 역시 입시한 각신에게 쓰게 하라. 승선은 바로 고 옥당 이정신의 증손자이고 각신은 바로 충장공의 일족 종손(從孫)이니, 이 또한 우연한 일이라 할 수 없다. 편액을 내려보낼 때 이 전교를 함께 기록해 보내게 하라."
하였다. 이때 승지 이만수(李晩秀)와 각신 심상규(沈象奎)가 마침 경연에 나왔기 때문에 이런 전교가 나온 것이다. 【심대는 임진년의 난리를 당해 보덕(輔德)으로서 호종하였으며 가장 먼저 나라를 수복할 계책을 건의하였다. 자청하여 양호(兩湖)로 가서 백성들을 효유하여 군대를 모아 행재소로 갔다. 적이 서울을 점령하자, 경기 감사로 삭녕군에 주둔하면서 서울 백성들을 불러 모아 힘을 합쳐 적을 섬멸할 계책을 세웠다. 이때 성여해(成汝諧)란 자가 적의 간첩이 되어 그 계책을 누설함으로써 적이 습격하여 함몰되었다. 심대는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고 종사관 윤경원(尹敬元)·강수남(姜壽男)·양지(梁誌)와 함께 죽었는데, 그 얼굴빛이 산 사람처럼 60여 일 동안이나 변하지 않았다. 선조조에 영의정과 청원 부원군(靑原府院君)을 추증하였고, 숙종조에 경연관이 진달한 것으로 인해 정려하고 시호를 내렸으나 미처 시행되지 못하였다가, 선조 경인년에 예조 당상관의 말로 인하여 비로소 명하여 거행하였다. 삭녕 사람들은 그가 순절한 곳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23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외교(外交) / 군사(軍事)

 

좨주(祭洒) 김이안(金履安)이 죽었다. 그의 후손을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이안의 자는 정례(正禮)로 고 좨주 김원행(金元行)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문장으로 과거 시험장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음직으로 고을 수령이 되어서는 가는 곳마다 청백하고 삼가하여 백성들에게 깊은 사랑을 남겼다. 기품이 청수하고 고결하여 세속의 기운이 없었으며, 일찍이 집안의 학문을 이어 유림의 촉망을 받았다. 만년에 임금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5월 28일 임인

비가 왔다.

 

병조에서, 3번(番)의 내금위 1백 인 가운데 오래 근무하고 나이가 많은 자로서 15년 이상 부지런히 출사한 자 16인을 뽑고, 그 나머지 실지 임명자 34인과 예비 임명자 34인을 각번의 금위군 가운데서 자원을 받아 출신 성분과 거주지를 구별하여 기록하고, 나머지 50인은 각번에 나누어 소속시켜 아뢰니, 전교하기를,
"지난밤에 내린 단비는 마치 기름과 엿과 같았다. 이 어찌 7백 명 금군의 울분을 풀어준 빠른 효과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폐단을 바로잡을 것은 단지 50인을 장용영에 옮기고 50인을 각번에 나누어 소속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경은 별장(別將)과 충분히 의논하고 이어 묘당 및 여러 무장들과도 의논하여 반드시 괄목할 만한 방안을 만들어 자세히 아뢰도록 하라. 이번에 나누어 소속시킨 50인도 일내번(一內番)에 임시로 붙여두었다가 각번의 자리가 날 때 여러 군데의 구전(口傳)을 받지 못한 자리에 분배해서 메꾸도록 하라. 일내번의 한량(閑良) 전원과 출신(出身)으로서 자원하는 자는 정원 외에 옮겨 붙이되, 6개월의 기준을 채우지 못한 자라도 구애받지 말고 직책을 임명하도록 하라.
무사들이 출세할 수 있는 길도 역시 마땅히 널리 열어 놓아야 하니, 이 뒤로 장용위(壯勇衛)에서 취재(取才)를 할 때는 각번에서 현재 출사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오래 근무하고 나이가 젊은 자와 외방의 궁마(弓馬)에 익숙한 자는 모두 다 천거하여 응시할 수 있도록 하라. 대체로 무예를 장려한 뒤에야 정예롭게 되는 것이고, 정예롭게 된 뒤에야 용맹을 날릴 수 있는 것이다. 지난번에는 훈국(訓局)의 중순(中旬)112)  도 특교(特敎)로 허락했는데 더구나 금군이겠는가. 시기가 비록 더운 여름이긴 하나 비가 온 뒤에는 반드시 날이 맑고 좋은 법이니 금군 등에게 중순 활쏘기 시험을 즉시 거행할 것이며, 앞으로는 혹시라도 전처럼 폐지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9일 계묘

조정을 떠나 부임하는 수령들을 불러 만나보았다. 상이 강계 부사 이의필(李義弼)에게 이르기를,
"관서 지방의 고질적인 폐단은 곧 환곡은 많고 백성은 적은 것 때문이다. 이제 먼저 강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니, 반드시 백성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개혁할 방도를 생각하여 호구는 나날이 늘고 폐단은 나날이 줄도록 함으로써 조정에서 크게 염려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또 상이 이르기를,
"선천(宣川)·삼화(三和)·영종(永宗)은 모두 직계(直啓)를 하고, 심지어 동래(東萊)와 의주(義州)도 방어영이 아닌데도 오히려 직계를 허락하고 있다. 더구나 본부는 방어를 겸한 변방인데도 유독 이런 예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어 강계부를 단독 진영인 방어영의 규례에 따라 직계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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