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갑진
영화당(映花堂)에 나가 초계 문신의 강경(講經)과 글짓기 시험을 거행하였다.
윤대를 거행하였다. 상이 이조에서 올린 세초 단자(歲抄單子)를 보고 이르기를,
"이경신(李敬臣)은 남을 무함한 데에 대한 처벌을 면해 준 것만으로도 족하다. 헐뜯고 비난하는 습관은 사족(士族)에 있어서도 오히려 엄히 금하고 있는데, 그의 경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시종안(侍從案)에서 빼 버려라."
하였다.
6월 2일 을사
경주 부윤 강이정(姜彛正)이 조정을 떠나게 되어 부임하는 인사를 하니, 상이 불러 만나보고 이르기를,
"노비안(奴婢案)을 조사하는 일은 백성을 화합으로 인도하는 정사와 관계가 되는 것이다. 만약 노역(奴役)을 피한 지 이미 오래되었거나 평민과 혼인하여 거의 양인(良人)이 된 자까지 모두 쇄환한다면, 이것이 어찌 내 생각이겠는가. 모름지기 애매한 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설령 원래 숫자가 부족하더라도 꼭 밑뿌리까지 추적하여 숫자를 채울 때까지 꼬집어 낼 필요는 없다."
하였다.
오부(五部)에서 혼사를 시켜야 할 남녀의 별단(別單)을 올렸는데 모두 2백 81인이었다. 유학(幼學) 신덕빈(申德彬)의 딸이 유학 김희집(金喜集)과 혼사 말이 오가니 특별히 호조 판서 조정진(趙鼎鎭)과 선혜청 제조 이병모(李秉模)에게 혼인 차비를 갖추고 잔치를 열어 혼례를 이뤄 줄 것을 명하고, 내각에 소속된 관리 중 글을 잘 짓는 사람에게 전(傳)을 지어 그 일을 기록하도록 명하였다.
6월 4일 정미
공조 참의 강유(姜游)가 상소하기를,
"자궁과 원자가 같은 달 같은 날에 탄생하신 것은 우리 조정 이래 처음 있는 큰 경사입니다. 더욱이 올해는 상황이 특별하니 서둘러 진하하는 예를 거행하소서. 자궁과 원자의 탄신일이 같은 달 같은 날에 겹친 경사로 인해 특별히 교서를 내려 온 나라에 반포함으로써 후세에 물려줄 나라의 큰 영광을 빛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자궁의 탄신일에 진하하는 것은 마땅히 거행해야 할 예이지만, 자궁의 마음에 일을 크게 벌이려고 하지 않으시므로 언제나 그 뜻을 받드는 것으로 기쁘게 해 드리는 자료로 삼았다. 올해부터는 원자의 돌이 자궁의 탄신일에 있으니 내가 경하하고 기쁜 마음이 어찌 네 요청만 못하겠는가마는, 초하룻날 입계한 축하 절차를 우선 보류하고 있는 것은 자궁의 마음을 우러러 따르기 위해서이다. 네 상소 가운데 자궁의 탄신일과 원자의 돌날이 같은 달 같은 날에 겹친 것을 경하하여 교서를 반포하라고 요청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교서를 내려 알려야만 알 수 있는 일이겠는가. 네가 전후에 걸쳐 문제가 있을 때마다 숨김없이 말하였으니 그 마음은 실로 가상하다."
하였다.
서얼과 중인(中人)에게 기사장(騎士將) 의망을 허통하도록 명령하였다. 상이 이미 태학의 식당에서 나이 순서대로 앉도록 명하고 또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문관은 돈령 도정(敦寧都正)에, 음관은 부령(部令)113) 에 의망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또 이런 명을 내렸다.
이조원(李祖源)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5일 무신
차대를 거행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또 함창현(咸昌縣)의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화상을 즉각 옮겨 봉안하지 않는 것은 기강에 크게 관계된다는 것으로 말하니, 전교하기를,
"니성(尼城)114) 의 궐리사(闕里祠)도 역시 완전히 옳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전국 3백 60군데의 군현에 다 공부자를 제사지내는 곳이 있는데, 어찌 유독 니성에서만 향교 이외에 별도로 한 사당을 설치한단 말인가. 교화가 지극하지 못하고 풍속이 바르지 못한 상황에서 내가 이왕에 만들어진 사당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으나, 앞으로는 감히 옛 성인의 화상을 그려 봉안하는 서원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예조의 관리에게 지시하여 각도에 공문으로 알리게 하라."
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이런 일들은 다 당파의 버릇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날 그들이 조정의 일을 주무를 때 걸핏하면 빙자하고 등을 대는 일이 있었는데, 유림들의 시시비비는 우선 그만두더라도 군사 제도의 개혁을 하나의 칼자루로 삼아 혹은 경리청(經理廳)을 설치하기도 하고 혹은 정초청(精抄廳)을 혁파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곧 하나의 실례이다. 고 상신 김석주(金錫胄)가 수어사(守禦使)로 있을 때 체부(體府)를 설치하여 서전(西銓)으로 삼고 금위영을 설치하여 병조(兵曹)에 붙이고는 자신이 겸 병판(兵判)이 되었다. 그때 실지 병조 판서는 정사의 명이 내리기를 기다려 정사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의망 단자도 감히 스스로 추천하지 못하고 겸 병판에게 가서 물은 뒤에야 써서 올렸다. 길바닥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비변사의 낭관과 다를 것이 없었으니, 그 당시 실지 병판은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조정에 기강이 있었기 때문에 설혹 어떤 감당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일단 그 직책에 있으면 능히 그 직무를 수행했었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군문(軍門)의 폐단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무술년115) 5월 조참(朝參) 때의 하교에서 백성의 생업을 꾸려가고 군사에 관한 정사를 따져 보는 것으로 첫째 가는 내용을 삼았다. 백성들의 생업을 꾸려 간다는 것은 신역을 고르게 하는 일로서 내가 밤낮으로 한결같이 생각하는 것은 신역으로 내는 필수를 줄여 준 선왕의 훌륭한 은덕과 고심을 우러러 받들기 위한 것으로 오랫 동안 생각을 해 둔 것이 있으나 선뜻 의논할 수가 없었다. 군사에 관한 정사에 있어서는 군문(軍門)을 증설하는 것은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내가 어찌 다시 쓸모 없는 군문을 만들고 싶었겠는가. 장용영을 신설한 것은 내가 본래 깊은 뜻이 있어서이니, 궁궐 호위를 중하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또한 비상시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민간에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자는 하루에 세끼 밥을 먹지만 나는 하루에 두끼만 먹는다. 몇 년 동안 절약하여 경비를 낭비하지 않으며 단속한 보람이 약간 이뤄지고 시설이 한창 벌어지고 있으니, 내 뜻은 장차 기대하는 것이 있다. 이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자야 어찌 내 고심을 알 것인가. 장차 내 뜻이 성취될 날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임금의 큰 정사는 사람을 등용하고 사람을 신임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신임하고 등용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장수와 재상에 관한 것이 더욱 중요하니 ‘의심스러우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것은 옛사람의 격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을 때 숨기고 참는 것이 옳겠는가, 밖으로 드러내보이는 것이 옳겠는가."
하고, 이어서 총융사 이주국(李柱國)을 지적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의 처지는 어떤가. 예로부터 역적 가운데 역적 구선복(具善復)과 같은 자는 없었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 역적을 군대를 거느리는 자리에 두었겠는가. 사세가 어쩔 수 없는 점이 있어서 원통함을 참고 울분을 감추면서 몇 년 동안 맡겨 두었고, 심지어는 그 아우를 별간역(別看役)으로 임명하여 내 주위를 출입하게까지 했으니, 이는 그가 딴마음 가진 것을 안정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역시 내가 남에게 말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 데서 나온 것이다.
병오년116) 에 이르러서야 국법에 의해 처단되었는데 시신을 저자에 버리는 형벌이 어찌 이 역적에게 법을 충분히 적용했다고 하겠는가. 사실은 살점을 씹어 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자도 시원치 않았었다. 그리고 이 역적이 죄를 받은 경위를 어찌 병오년의 일만 가지고 알 것인가. 《명의록(明義錄)》에 들어있는 여러 역적들을 한번 보라. 그가 역적이 된 뿌리를 따져 보면, 모두 대리(代理)117) 를 방해하고 농락하던 한 가지 일에만 그치지 않는다. 조정의 신하들은 아마도 거의 이 하교의 의미를 알 것이지만, 병오년 이전에는 역적 구선복이 끝내는 법에 따라 처단될 것임을 아는 자가 드물었으니, 이 어찌 크게 미혹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총융사의 지체로서 오늘까지 유지하고 있으니 내가 전후에 걸쳐 보전해 준 것이 또 과연 어떠했는가.
바야흐로 역적 구선복이 붙잡혔을 초기에 세상 사람들 어느 누가 총융사를 의심하지 않았겠는가마는, 나만은 그들 종형제간이 평소에 알력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오늘날 총융사에 임명하였으니, 죽을 것을 살려 주고 마른 뼈에 살을 붙여 줬다고 할 만하다. 그러니 그가 만약 조금이나마 감격하는 마음이 있고 조금이나마 스스로 악으로부터 벗어날 생각이 있다면 마땅히 모든 일에 삼가고 두려워하여 한결같이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처신과 행위를 보면 오직 출세에만 급급해 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준수한 기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른바 준수한 기상이란 것이 어찌 장수에게 좋은 조건이겠는가. 지금부터는 반드시 두려워하는 생각을 갖고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고 교리 구인문(具仁文)은 장릉(莊陵)을 위해 절의를 다하여 지금 정승으로 추증되었으니, 역시 시법(諡法)에 따라 시호를 주는 규정을 적용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철옹 산성(鐵瓮山城)의 군량은 당초의 절목에 따라 산창(山倉)과 저창(儲倉)의 군량을 창고에 보관할 때 쌀과 콩을 합쳐 2천 섬으로 규정을 정한다면 급한 사태가 나더라도 거의 의지할 데가 있을 것입니다. 병영(兵營)의 둔창(屯倉)과 운산(雲山)·개천(价川)의 두 창고의 곡물은 그 제도가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바꾸기 어렵습니다."
하니, 모두 옳게 여겼다.
저자의 점포에서 공무(公貿)하는 폐단을 없애도록 명하였다. 옛 규례에는 일정한 공물 이외에 임시로 마련해야 할 것이 있으면 해당 관청에서 호조에 요구하고 호조에서는 저자 점포에 요청하는데, 그것을 공무라고 하였다. 그런데 물건 주인이 시기를 보아서 값을 조종하므로 그 값이 날로 뛰어 올라 점포 사람들이 받는 돈은 결국 그 값의 10분의 1, 2도 안되었다. 상은 그 폐단을 깊이 걱정하여, 무릇 봄 가을로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상방원(尙方院)에서 규례에 따라 오서대(烏犀帶)를 만들어 바치는 일로 단자를 갖추어 취품하면 한 번도 시행토록 허락한 일이 없었다. 이때에 와서는 상이 대신의 말을 받아들여 여러 점포의 도매 장사를 없애고 나니, 점포 사람들은 자기들이 독점하던 이익은 잃어버리고 거두어들이는 것만 수응하는 것을 고통으로 여겼다. 상은 공무가 거두어들이는 것을 독촉하는 원인이 된다 하여 묘당에 물어보고 전교하기를,
"《시경》에 ‘도성 부근 천리 땅은 백성들이 머무는 곳[邦畿千里 惟民所止]’이라 하였으니, 도성 부근도 그런데 하물며 도성 안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도성 안에서는 모두가 놀고 먹는 자들이고 힘들여 일하는 자는 오직 점포 백성뿐이다. 요즈음 인구가 나날이 불어나 생산하는 자와 먹고 쓰는 자의 비율이 서로 맞지 않으니, 저자 백성들의 이익이 적을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생각하면 옛날 선왕의 하교에 ‘만약에 백성들에게 이롭기만 하다면 내 살점을 떼어 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하셨는데, 나는 늘 이 거룩한 가르침을 되뇌이며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저자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 중에서도 근본이다. 지금 그들의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살점을 떼어 주는 것도 아깝지 않을 터인데 하물며 어약(御藥)이겠는가. 이제부터는 저자 전방에서 사들이는 것을 영구히 혁파하도록 하라. 어약에 관해서는, 내가 약이 필요할 때는 그들이 스스로 찾아올 것이다. 그들이 와서 팔려고 하는 것까지 굳이 금지할 것이야 있겠는가. 호조로 하여금 알고 있도록 하라."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민종현(閔鍾顯)을 이조 참판으로,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금화 현감(金化縣監) 홍익렬(洪益烈)은 그의 부모가 모두 80 고령이었다.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돌아가려고 인장과 부신(符信)을 곧장 겸임 낭천현(狼川縣)에 보냈는데, 현감 오상록(吳相祿)은 인장까지 다 보내온 것은 정상적인 법이 아니라 하여 받지 않았다.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익렬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자 상이 대신들에게 물었는데,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익렬은 돌아가 부모를 간호하기에 바빴으므로 곧장 떠난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수령이 고을 경계를 넘어갈 때는 부신만 겸관에게 보내고 인장은 마땅히 차고 있어야 하는데, 익렬은 이 점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부모가 병들면 마음이 어지러워진다.’고 했으니, 설혹 잘못된 일이 있더라도 그 관직을 파면할 것은 없습니다. 겸관도 역시 마땅히 인장과 부신을 다 받고 감사의 지시를 받았어야 할 것인데 받지 않고 그냥 돌려 주었으니, 온당하지 못합니다. 추고하소서."
하였다. 익렬은 처사가 신중하지 못했으나 상은 그 사안이 효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관련된다는 이유로 그 의견을 따랐다.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바닷가에 사는 민호에 관한 폐단을 바로잡으라는 명을 받고 영동지방 9개 고을에서 석전(釋奠)에 제물로 쓰는 건어물이 2백여 마리나 되는 것은 예가 아니라 하여, 글을 올려 그 수효를 줄이고 태학의 격식에 따르도록 하였다. 그런데 사국이 관내를 순시하다가 강릉부(江陵府)에 이르자, 고을의 선비들이 단자를 올리고 길을 막으면서 계속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또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도백은 어떤 사람이기에 기꺼이 성인의 죄인이 되려고 한단 말인가.’ 하였는데, 부사 이집두(李集斗)는 그것을 제지하지 못하고 편지를 사국에게 보내면서 유생의 통문도 함께 보냈다. 사국이 노하여 집두로 하여금 주모자 4사람을 묶어서 보내게 하자 고을의 유생 수백 명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빼앗아 향교에 감추어 두었으며, 1백여 인의 무리를 모아 서울에 가서 상소를 올릴 생각으로 길을 떠났는데도망쳐 돌아갔던 자도 그 무리 속에 끼어서 갔다. 사국이 그 실상을 장계로 알리고 집두를 죄줄 것을 청하니, 상이 놀라며 이르기를,
"선비의 관을 쓰고 선비의 옷을 입은 자들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것도 부족하여 이처럼 패거리를 지어 나쁜 짓을 하니, 나라의 기강과 습속에 관계되는 것이 적지 않다."
하고, 형조에 명하여 본도에 잡아 보내 죄주도록 하고, 집두는 파직시키고 붙잡아 오도록 하였다.
6월 6일 기유
비가 왔다. 금위영과 어영청 두 군영에서 매일 사적으로 훈련하는 것을 비가 오면 상에게 아뢰어 중지하는 것으로 규정을 삼게 하였다.
이조 판서 서호수(徐浩修)가 면직되었다. 호수가 여러 차례 부르는 명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6월 7일 경술
정창순(鄭昌順)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6월 8일 신해
형조 판서 권엄(權𧟓)을 특별히 강계 부사에 보임하였다. 권엄이 병을 이유로 오랫동안 형조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호수를 형조 판서로, 심환지(沈煥之)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의필(李義弼)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고, 이조원(李祖源)·정범조(丁範祖)를 한성부의 좌윤과 우윤으로 발탁하였다.
6월 9일 임자
영남 감영의 남창(南倉)의 돈에 대한 문서를 태워 버려 빚을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영남 감영의 빚으로 인한 폐단은 그곳의 아전과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이 일은 이미 연전에 어사 이시수(李時秀)가 조정에 돌아와 단자로 아뢴 것으로서 그 뒤에, 해를 한정해 처리했으니 오랜 폐단이 모두 시원하게 제거되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요즈음 연석에서 들으니 문서의 기록에는 남아있으나 그저 빈 숫자일 뿐이라고 한다. 영남의 아전과 백성들도 역시 내 백성인데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제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백성의 부모가 된 본의이겠는가.
생각하면 옛날 우리 선왕께서 평안도 감영의 빚돈 때문에 방백을 골라 보내 문서를 태워 빚을 탕감해 주었으니, 평안도의 아전과 백성들이 사경에서 빠져나와 편안히 살게 된 것은 바로 거룩한 은덕 때문이었다. 지금 영남 백성들이 장차 사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옛날 그때처럼 편안한 삶의 자리를 제시하여 주는 것이 어찌 선왕의 뜻을 우러러 계승하는 한 가지 일이 아니겠는가. 영남 감영의 이른바 남창의 빚돈에 대해 즉시 도백으로 하여금 늙은이들과 백성들을 모아 놓고 그 문서를 태워 버려 빚을 탕감해 주게 함으로써 영남 백성들에게 이번 조처가 백성을 위한 선왕의 큰 덕과 지극한 선을 우러러 계승한 데서 나온 것임을 알게 하라."
하였다.
간교한 백성 김보환(金普煥) 등이 홍패(紅牌)를 물에 불린 종이로 본을 떠서 패 하나를 위조하고 또 나무 조각으로 예조의 인장을 위조해 새긴 일이 발각되었다. 형조가 아뢰니 전교하기를,
"삼가 선조(先朝)의 수교를 상고하건대, 어보(御寶)를 위조하였더라도 전자획이 분명하지 않거나 위조한 물건을 압수하여 바치지 못했을 때는 해당 율문을 적용하지 말라고 하교하였다. 종이쪽을 물에 불려 본을 뜬 것이 어찌 전자획이 될 리가 있겠는가. 종이쪽도 역시 찾지 못했으니, 이 두 가지가 이미 하교를 받은 규정에 어긋난다. 위조한 인장 문제는 증거물이 있긴 해도 찍은 흔적과 전자획이 과연 완전히 분명하여 사형에 처하더라도 더 논의할 여지가 없는 범죄인가. 즉시 사리를 따져 회계하라."
하였다. 형조가 위조한 인장의 글자획이 비뚤어지고 이지러져 모양이 갖추어지지 않았고 위조한 인장을 찍은 종이를 증거물로 잡지 못하였다고 아뢰니, 율을 감하여 충군(充軍)하도록 명하였다.
파주 목사 이사렴(李師濂)이 상소하기를,
"본주에 방어영을 설치한 것은 오로지 산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력(萬曆)계사년118) 에 고 상신 유성룡(柳成龍)이 그 지형이 험준한 것을 보고는 도원수 권율(權慄)과 순변사 이빈(李薲)에게 군대를 합쳐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때 왜적이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려고 하다가 지형이 험준한 것을 보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여 드디어 감히 직로(直路)로 지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조정의 의논이 이 곳을 중시하여 특별히 순찰사 유희량(柳希亮)에게 우도 방어사(右道防禦使)를 겸임시켜 성을 수리하여 새롭게 만들 것을 명하였고, 명나라 유격 조우(趙佑)가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뛰어난 지형이고 도성 서쪽의 중요한 관문이다.[天設形勝國西重門]’라는 8자를 직접 써서 현판으로 걸었습니다. 갑신년에 방어영을 이리로 옮긴 것은 이 때문이었으나 역사(役事)가 미치지 못하여 아직도 수리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 판서 홍억(洪檍)과 전 참판 이형원(李亨元)이 이 고을의 목사로 있을 때 모두 실행에 옮기려고 결심은 하였으나 미처 위에 알리지를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이곳은 하늘이 만든 험준한 바위산으로 지형이 가파르고 근처에 마주 대한 산이 없어 그 안을 엿볼 수 없으며 위 둘레는 거의 1천 걸음에 가깝습니다. 동쪽은 철원(鐵原), 서쪽은 갑진(甲津), 남쪽은 행주(幸州), 북쪽은 송경(松京)으로서 한 곳도 막힌 곳이 없어 역력히 굽어볼 수 있습니다. 꼭대기에는 큰 우물이 있는데 깊이가 3장 정도이며 그 아래 우물 두 군데가 있는데 지금은 황폐해졌지만 흙을 파내면 물줄기를 얻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성 아래 사방에도 다 샘이 있으니, 금성 탕지(金城湯池)라고 할 만합니다. 돌로 쌓은 성벽은 완연하지만 반쯤 허물어졌습니다. 지금 당장 급한 일은 오직 서너 계단의 성가퀴와 몇 십 칸의 창고와 사방 주변의 문루(門樓)를 새로 짓는 일뿐입니다.
신이 온 고을의 인사들과 의논해 보았더니 모두 하는 말이 ‘6, 7천 냥 정도의 돈만 있으면 손을 쓸 수 있겠다.’ 하였습니다. 본 고을에 군량 5천 섬이 있으므로 해마다 그 이자를 가져다가 장수와 군졸들에게 주고 그중에 8백 포를 1년 기한으로 꾸어 준다면 신이 여러 방면으로 주선해 보겠습니다. 요행히 일이 이루어지면 방어영을 헛되이 설치한 것을 면하게 될 것이고 중요한 관문은 충분히 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임진(臨津)과 장산(長山)에는 이미 돈대(墩臺)를 만들어 놓은 데다가 수목이 울창하고 임진나루 상류에서 10리쯤 되는 곳에 고랑진(高浪津)이 있어 또한 하나의 큰 길이 되고 있으니, 만약 위급한 일이 있을 때는 차단하여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곳입니다. 별도로 진(鎭)을 하나 설치한다는 것은 사실 감히 쉽게 논의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이 진의 근처에는 총융청의 둔전이 많아서 해당 군영의 감독관이 해마다 와서 농사 수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곳의 남쪽 기슭 한 곳에다 총융청으로 하여금 진의 청사를 지어 놓고 해당 군교와 병졸들이 겸하여 살펴보고 감독하게 한다면 국가의 회계에 있어서는 재정을 허비하는 일이 없고 요충지에는 공고한 방비가 있게 될 것입니다. 나무를 심는 문제에 대해서는 세 군데의 진으로 하여금 함께 힘을 모아 거행하게 하면 앞으로 10년 안에 잡목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거의 목책(木柵)과 다름없게 될 것이므로 방어하는 방도로 보아 완벽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신과 장수들에게 널리 물어서 조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묘당으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게 할 것을 허락한다."
하였다. 비변사가 복주하기를,
"파주 산성은 지역은 요충지이고 형세는 자연의 요새이므로 다시 축조하자는 말이 나온 것은 어제오늘만이 아닙니다. 다만 성을 축조하는 것은 큰 공사이므로 반드시 재물을 미리 비축해 두어 비용이 모자라는 일이 없어야만 비로소 논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상소문에서 말한 필요한 비용은 대략 6, 7천 냥 정도이고, 청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군량미 8백 섬입니다. 그런데 이 8백 섬의 쌀로 6, 7천 냥의 재물을 만들고 꾸어간 쌀 8백 섬은 그 수량대로 오는 가을까지 갚겠다고 하는데 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설령 요행히 성사된다 하더라도 분명히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유사시를 대비하는 것은 장래의 일에 속하고 백성들의 원망은 당장 눈앞의 일이니, 그 요청대로 시행을 허락할 방도가 없습니다. 고랑진에 총융청에서 둔전을 설치하는 것이나 3진에서 나무를 심는 문제는 그곳이 꼭 훗날 힘을 얻을 곳이 된다고 할 수 없으니, 서둘러 설치하는 것은 속절없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상소문 가운데 여러 조항을 우선 그대로 두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6월 11일 갑인
윤대를 거행하였다. 장원서 봉사(掌苑署奉事) 조유선(趙有善)이 품은 생각을 진달하기를,
"본서(本署)는 바로 고 충신 성삼문(成三問)의 옛집이니 마땅히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방도가 있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충정공(忠正公)119) 의 집도 위 정공(魏鄭公)120) 의 옛집을 보상해 돌려준 고사에 따라 선조(先朝)에서 특명으로 해사에게 사서 주도록 하셨는데, 하물며 충문공(忠文公)의 집이겠는가. 지난번에 이 일로 경연관에게 물었더니, 배상하여 돌려줄 만한 곳이 없다고 하여 아직도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 네 말은 자기가 맡은 직책을 가지고 간하는 원칙에서 나온 것이니, 물러가 제거(提擧)와 상의하여 우선 그 옛 사실을 기록해 청사에다 현판으로 내걸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2일 을묘
비가 왔다. 대신 홍낙성(洪樂性)과 채제공을 집복헌(集福軒)으로 불러 만나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단비가 온 뒤에 날씨가 개어 쾌청하기 때문에 경들에게 들어와 원자(元子)를 보게 한 것이다."
하고, 원자에게 곁에 앉으라고 명하였다. 낙성 등이 쳐다본 뒤에 다같이 아뢰기를,
"신들이 직접 태평한 시대를 만나 슬기로운 용모를 뵙게 되었습니다. 준수한 자질과 하늘의 해와 같은 의표를 어찌 감히 만에 하나나마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눈썹과 이마가 우리 선대왕의 모습을 많이 닮았으니, 이는 실로 하늘이 우리 성상의 덕을 돌보아 자손을 주어 우리 동방의 억만년토록 무궁할 경사를 열어 준 것입니다. 신들은 저절로 춤이 덩실덩실 나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궁전은 바로 을묘년121) 에 나의 선고께서 탄생하신 곳이며 선대왕께서 50년 간 거처하시던 방이다. 이전에는 조정 신하를 이곳에서 만난 일이 없는데 이번에 권초관(捲草官)을 처음 만나보았고 지금 또 경들을 접견하는 것이다."
하였다.
6월 15일 무오
기장 현감(機張縣監) 박만첨(朴萬瞻)이 공로가 있다 하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고을살이를 하면서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본도에서 부지런한 공로 때문에 치적 심사에서 상등에다 두니, 전교하기를,
"공로는 공로이고 수령은 수령이다. 기장 백성들이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그를 파직하여 부지런한 공로로 은혜를 입은 자들이 모두 관직에 있으면서 더욱 삼가해야 한다는 의리를 알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7일 경신
서호수(徐浩修)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6월 18일 신유
이날은 자궁의 탄신일이며 원자의 돌이었다. 집복헌(集福軒)에 갖가지 놀이감을 담은 소반을 차려놓았다. 원자는 사유화양건(四斿華陽巾)을 쓰고 자주색 비단 겹저고리를 입었는데 앉은 모습이 의젓하였다. 먼저 채색 실을 집고 다음으로는 화살과 악기를 집었다. 곧 각신과 승지들에게 들어와서 보라고 명하였다. 종실·대신·제신(諸臣)과 대궐에서 수직하는 낭관, 장수·호위 군사 및 서리·하인, 군졸과 큰 길거리에 사는 백성들에게까지 떡을 내렸다.
승지를 보내 태학의 유생들에게 떡을 내리고 이어 어제(御題)를 내려 여러 유생들에게 응제(應製)하도록 하였다. 부(賦)에서 수석을 차지한 권황(權熀)과 송(頌)에서 수석을 차지한 김희화(金熙華)는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상이 경연관에게 이르기를,
"《시경》에 ‘많은 훌륭한 선비들 덕에 문왕께서 편안하리.[濟濟多士 文王以寧]’라 하였다. 태학은 곧 어진 선비들이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의 원기이다. 사흘동안 술잔치를 베풀어 준 것은 옛날에도 그런 사례가 있고, 역대 조정의 경우로 말하더라도 큰 길거리의 백성들에게 음식을 내려 은혜가 부녀자들에게까지 미친 일은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반 백성들에게도 그러했는데 하물며 유생에게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귤을 나누어 준 것도 한때의 특별한 은전이었으나 그것이 규례가 되어 나중에는 유자를 나누어 주었고 또 황대구(黃大口)를 나누어 준 일도 있었다. 그 뒤에는 감제(柑製)의 전례에 따라 과거 시험을 보인 예도 있었는데, 이제 어찌 떡만 나눠 주고 말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숙종조 때 어필로 등급을 써서 급제시킨 고사를 본떠 장원 시험지에 어필로 등급을 썼다. 수원부의 유생에게도 성균관의 유생들과 똑같이 떡을 나눠 주고 과거 시험을 보였는데, 송(頌)에서 수석을 차지한 권의(權倚)와 부(賦)에서 수석을 차지한 심휘진(沈徽鎭)을 급제시키고 활쏘기 시험에서 합격한 무사(武士) 임창옥(林昌玉) 등은 곧장 전시에 응시하게 하였다.
조신(朝臣)으로서 유배죄 이하와 선비와 일반인으로서 도형죄 이하를 모두 방면할 것을 명하였다.
입직(入直)한 장수와 군병들에게 활쏘기를 시험하여 상을 주었다.
이갑(李𡊠)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6월 20일 계해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고 재전(齋殿)에서 차대를 거행하였다.
부수찬 김희채(金熙采)를 파견하여 강릉의 일을 조사하게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이번에 비록 죄를 관대하게 용서해 주는 은전을 베풀었으나 강릉의 일에 대해서는 무거운 벌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 고을의 수령은 유생을 잡아다가 문초하는 데 참여하였는데도 사면령 이전의 문제로 넘긴다면 장차 무엇으로 경계할 줄 알겠습니까. 옛사람이 이천(伊川)122) 지방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친 것을 보고 1백 년 뒤에 그곳이 오랑캐 땅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어는 법이니 그 조짐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도백이 교서(敎書)를 받들고 관하 고을을 순찰하는 것은 그 체모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유생의 무리들이 도백이 머무르는 객사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시끄럽게 굴었으니, 도백이 이른바 ‘별의별 변고가 다 생기겠다.’고 한 말이 어찌 놀랍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 고을의 수령은 수수방관만 하고 한마디도 금지하는 말을 못하였으니, 역시 변괴라 할 수 있습니다. 유생의 무리들은 향교의 대성전을 은신처로 삼았는데, 지금 고을에서 보고한 것을 보면 유생들이 ‘비록 사나운 군교나 용감한 병졸이라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또 ‘수령과 백성간의 명분도 돌아볼 것이 없다.’ 하였으니, 백성으로서 수령과 백성간의 명분도 돌아보지 않는다면 인조 때 있었던 이인거(李仁居)의 변란에 이르지 않을 경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인거는 단지 관청의 병기를 빼앗아 가지고 미친 소리를 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당시에 진압한 자들에게 책훈(策勳)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번 강릉의 사건, 본 고을 수령은 마땅히 멀리 유배되는 벌을 면할 수 없으며 온 경내의 유생들도 모두 정거(停擧)하여 징계해야 합니다. 도백도 죄가 없지는 않으나 지금은 유생과 도백이 서로 다투는 상황이니 만약 도백을 벌주면 유생들은 필시 기세가 올라 저쪽이나 우리가 죄는 똑같다고 말할 것이므로 신의 생각에는 도백은 죄주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온 고을 선비들을 모두 정거한다면 어찌 옥석(玉石)이 다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겠는가."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혹 한 사람이 윤상(倫常)을 범하는 죄를 짓더라도 고을을 혁파하거나 읍호를 강등하는 법인데 하물며 수백 명이 무리를 지어 변괴를 일으킨 경우이겠습니까."
하고, 비국 당상 김화진(金華鎭)은 아뢰기를,
"향교에서 시끄러운 일이 벌어졌을 때 이집두(李集斗)가 능히 명륜당에 들어가 좌정하여 패악한 선비들을 내쫓았더라면 누가 감히 어기고 항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어찌 가련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확실히 집두가 한번 명륜당에 들어갔었더라면 선비들이 저절로 와해되었을 것인데 이렇게 처리를 하지 못했으니, 이는 바로 그가 못나서이다."
하고, 김희채(金熙采)를 어사로 삼아 강릉부에 서둘러 가서 그 사건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뒤에 돌아와 결과를 아뢰자 죄를 범한 유생들은 차등을 두어 형장을 쳐서 유배하고 집두는 잡아다가 심문하고 처벌하였다. 채제공이 또 아뢰기를,
"지난번 전교로 인해 영남 가산 산성(架山山城)의 면포(綿布)를 받아들이지 않은 감사가 누구였는가에 대해 해당 도에 공문을 보내 물었더니, 도신 정대용(鄭大容)이 꾸어줄 것을 허락했던 감사와 받아들이지 않은 감사를 구분하여 책으로 만들어 보내왔습니다. 아울러 그가 말하기를, ‘면포를 돈으로 만들고 돈을 빌려준 것은 혹 서울 관청의 지시에 따라 그렇게 하기도 하였는데 혹은 각처의 공공비용으로 소비되어 남은 것이 거의 없는 데다 그간에 흉년을 만나 그럭저럭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신축년에 빚을 탕감할 때에 가서는 다같이 받지 못한 것으로 섞여들어갔다.’ 하였습니다. 당초 꾸어줄 것을 허락한 도신들은 이미 모두 죽었고, 그뒤에 받아들이지 않은 도신은 무자년부터 경술년까지 해당되지 않은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요새지에서 비상시에 쓸 물자를 이처럼 소홀히 간수한 것은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더구나 어사가 돌아와 이자는 그만두고 기한을 정해 받아들이자고 아뢴 뒤에 점차로 거두어들였더라면 거의 일의 두서가 잡혔을 것인데 계속 그대로 방치한 행위는 더욱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이자를 그만두고 연한을 정한 뒤로 마침 흉년을 만나 장계를 올려 받아들이는 일을 중지하도록 요청했던 감사와 비록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숫자를 채우지는 못했더라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가 아닌 자는 모두 우선 용서하고, 그 나머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전혀 관심을 쏟지 않은 자들은 현황을 보고받아서 파직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군교와 군사, 백성들의 해묵은 빚 가운데 이미 탕감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감영이나 각 고을에서 빌려준 돈과 베를 그 기간이 오래된 것에 관계없이 모두 금년을 기한으로 하여 전부 받아들이게 해야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전에 영남 감영의 채무를 탕감해 준 일을 경과 전 영남 감사가 경연에서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인징(隣徵)·족징(族徵)의 폐해가 죄 없는 일반 백성들에게 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그 증서를 태워버리게 하긴 했지만, 이밖에 감영의 재물을 고을 수령에게 넘겨 빌려 준 것까지 어찌 탕감하는 속에 섞어넣어서 자신을 살찌우는 버릇을 조장할 수 있겠는가. 도백에게 엄히 신칙하여 금년을 기한으로 하여 수습하여 정리하게 하라. 그런 뒤에 비변사 낭관을 보내 찌를 뽑아 고을들을 조사하게 하여 만약 성실하게 집행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해당 도신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따지고 죄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채제공이 또 아뢰기를,
"요즈음 인심은 옛날 같지 않아서 이익을 독점하는 일만 추구하니 도거리 장사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생겼습니다. 도거리 장사를 없애지 않으면 백성의 풍속이 바르게 될 수 없고 백성의 살림이 넉넉할 수 없으며 장사치들이 통할 수 없고 저자가 번성할 수가 없습니다. 조정에서 전후에 걸쳐 내린 금령이 엄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간교한 구멍을 깨부수지 못하여 속임수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번 일로 말하더라도 온 도성 안이 자리잡고 살 수 없을 정도로 뒤숭숭해졌습니다. 만약에 포도청에서 포교를 풀어서 간교한 자들의 우두머리를 잡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장작 값이 어찌 단숨에 옛날 수준으로 돌아갈 리가 있었겠습니까. 요즈음 일반 백성들은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 겁내는 것은 포도청뿐입니다. 그러니 만약 도거리 장사를 없애려고 한다면 그 일을 포도청에 맡기지 않고서는 없었질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나 만약 포도청에게만 다 맡긴다면 폐단이 생길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어떤 물건을 도거리한다는 말이 묘당에 알려지면 묘당에서 포도청에 분부해서 그 실정을 조사하게 하여 도둑을 다스리는 곤장으로 치고, 포도 대장이 들은 말이 있을 경우 묘당에 보고하여 묘당의 허락을 받은 뒤에 법대로 다스리게 한다면 아마도 명이 시행되어 금지될 가망이 있을 것이니, 이와같이 규정을 정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이 명이 한 번 나간 뒤에 능히 스스로 두려워할 줄을 알아서 옛 버릇을 완전히 바꾼다면 그들은 자연 양민이 될 것이고 묘당도 일이 줄어들 것입니다. 옛날 성군이 대궐 문 밖에 법령을 내걸던 전례대로 지금 입법(立法)한 내용을 한문과 한글로 써서 큰 길거리와 네 성문에 내걸어 항간의 백성들로 하여금 법을 몰라 죄에 걸려드는 근심을 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도거리 장사의 폐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처럼 옛날같지 않은 백성의 습속에서 그 간교한 폐단이 점점 심해질 것은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으나 지금 경의 말을 듣고 보니 그야말로 미처 몰랐던 것을 알았다고 할 만하다. 이대로 금법을 만들어 미리 깨우쳐 주도록 하라. 그러나 묘당은 평시서(平市署)와는 다르고 형조·한성부·포도청도 역시 도둑을 다스리는 관청이니, 경이 이른바 묘당이 포도청에 분부하여 조사해 다스리게 한다는 것은 평범한 작은 일들을 계속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반드시 일전에 땔감의 문제처럼 절대로 금지시키고 막아야 할 일로서 법사(法司)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반 백성이 지탱해나가기 어려운 문제라야만 비로소 이 금법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누구나 다 이 금법을 환히 알게 하여 처음부터 법을 범하는 사람이 없게 된다면 지금 이 금법을 만드는 조치는 지상공론(紙上空論)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이 어찌 공사간에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대궐 문밖에 법령을 내거는 것은 곧 형벌은 형벌이 없기를 목적으로 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하는 자는 난민(亂民)이요 간민(奸民)이니, 일반 백성을 위해 난민과 간민을 무겁게 처벌하는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긴 하지만 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이 뜻을 민간에 잘 효유하라."
하였다.
6월 21일 갑자
윤대를 거행하였다.
6월 22일 을축
이병모(李秉模)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예조 판서 서호수(徐浩修), 사직(司直) 이민보(李敏輔)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지난번 종묘의 재전(齋殿)에서 접견을 받았을 때 장악원 제거(掌樂院提擧)로 임명받았고 이어 제사 때 쓰는 악장이 아직도 한 편의 완전한 책으로 된 것이 없다 하여 신들에게 편찬해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신들은 먼저 악장을 서술하고 이어서 가보(歌譜)를 덧붙여 아악(雅樂)과 속악(俗樂) 두 부분으로 편찬하였습니다. 다만 궁제사의 악성(樂成)123) 에 대해서는 삼가 구구한 약간의 의견이 있습니다.
삼가 《악장궤범(樂章軌範)》을 상고해 보니,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의 영신악(迎神樂)은 6성(成)을 쓰고 사직단의 영신악은 8성을 쓰고 종묘와 문묘의 영신악은 9성을 쓰는데, 이것은 《주관(周官)》124) 의 ‘6번 변하면 하늘의 신령이 이르고, 8번 변하면 땅의 신령이 이르고, 9번 변하면 사람의 신령이 흠향한다.’는 글에 근본을 둔 것입니다. 국초(國初)에 신 박연(朴堧)이 상소하여 《주관》 악성(樂成)의 뜻에 대해 말하기를, ‘하늘의 신령에 대한 제사에서 강신악(降神樂)은 4개 궁(宮)의 악이 6성으로 변하니, 6번 변하는 것은 묘(卯)의 숫자 6을 취한 것으로서 환종궁(圜鍾宮) 2성, 고선궁(姑洗宮) 2성, 남려궁(南呂宮) 1성, 태려궁(太呂宮) 1성입니다. 땅의 신령에 대한 제사에서 강신악은 4개 궁의 악이 8성으로 변하니, 8번 변하는 것은125) 미(未)의 숫자 8을 취한 것으로서 함종궁(函鍾宮) 2성, 유빈궁(蕤賓宮)126) 2성, 응종궁(應鍾宮) 2성, 유빈궁(蕤賓宮)127) 2성입니다. 사람의 신령에 대한 제사에서 강신악은 4개 궁의 악이 9성으로 변하니, 9번 변하는 것은 금(金)의 숫자 9를 취한 것으로서 황종궁(黃鍾宮) 3성, 중려궁(仲呂宮) 2성, 남려궁(南呂宮) 2성, 이칙궁(夷則宮) 2성입니다. 매 제사마다 쓰는 강신악의 4개 궁과 악변(樂變)의 숫자는 각기 근거가 있어서 보태거나 빼서는 안됩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대사악(大司樂)128) 의 주소(注疏)를 참고해 보니 ‘하늘의 신령에 제사지낼 때 환종궁(圜鍾宮)을 먼저 연주하면서 6번 변하는 악을 쓰는 것은 환종궁이 묘(卯)에 속하고 묘는 정동(正東)의 상제(上帝)가 나오는 방위로서 묘에서 신(申)까지는 그 수가 6이기 때문이다. 땅의 신령에 제사지낼 때 함종궁(函鍾宮)을 먼저 연주하면서 8번 변하는 악을 쓰는 것은 함종궁이 미(未)에 속하고 미는 서남쪽의 만물을 기르는 방위로서 미에서 인(寅)까지는 그 수가 8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신령에 제사지낼 때 황종(黃鍾)을 먼저 연주하면서 9번 변하는 악을 쓰는 것은 황종궁이 자(子)에 속하고 정북(正北)의 양(陽)이 생겨나는 방위로서 자에서 신까지는 그 수가 9이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정현(鄭玄)이 말한 바 ‘먼저 이 악을 연주하여 신이 이르게 한다.’는 것은 바로 후세의 영신곡(迎神曲)이며 악성의 수를 하늘·땅·사람에게 나누어 붙여 놓은 것은 그 뜻이 매우 미묘한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궁의 제사 절차에 대하여 고금을 참작하여 반드시 정성스럽고 신중히 하시어 인정과 예법에 잘 맞고 그릇 수도 질서를 이루었지만, 유독 영신악의 악성에 있어서만은 예를 관장하는 신하가 3성(成)으로 의논해 아뢴 것으로 인해 가보(歌譜)에 올려 놓아 결국 종묘와 문묘의 악성과 어긋남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정사는 예악(禮樂)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고 예악은 제사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지극히 중대한 예법에 대해서는 마땅히 가장 완전한 내실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아래로 대신과 관각(館閣)에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니, 널리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현임 및 전임 대신과 관각의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좌의정 채제공은 말하기를 ‘악성(樂成)에 있어 6이다, 8이다, 9다 라고 말하는 것은 대체로 하늘의 신령, 땅의 신령, 사람의 신령이 각기 주관하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악성을 9로 하는 것이 이미 사람의 신령에 속하니 궁 제사에는 9성을 쓰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규장각 제학 겸 홍문관 제학 오재순(吳載純)은 말하기를 ‘장악원 제거가 연명으로 상소하여 논의한 것이 이미 분명하고 상고한 것도 자세한 만큼 궁 제사의 악성에 마땅히 9수를 써야 한다는 것은 더 의논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검교 직각 이만수(李晩秀)는 말하기를 ‘음악의 높낮은 등급은 춤추는 대열수에 달려 있고 악성의 수에 달려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존귀하기로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보다 더 존귀한 것이 없지만 악성에 6을 쓰고 9를 쓰지 않았으니,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고 악성의 수도 차등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직책으로 소신껏 아뢴 중신(重臣)의 말이 실로 근거가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직각 서영보(徐榮輔)는 말하기를 ‘악성의 수가 6도 되고 8도 되고 9도 되는 것은 반드시 의의가 있을 것이며 《주관(周官)》에서 규정한 이후 그대로 내려오고 고치지 못했으니, 그 수를 보태거나 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담당자가 올린 상소에 널리 근거한 점이 있으니 어찌 감히 다른 견해가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검교 대교 심상규(沈象奎)는 말하기를 ‘악의 제도에서 그 성수를 혹은 6, 혹은 8, 혹은 9로 하여 하늘·땅·사람에게 나누어 붙인 것은 바로 《주례(周禮)》의 대사악(大司樂)에서 악을 나누어 차례로 늘어 놓고, 이로써 하늘에 제사하고 땅에 제사하고 인신(人神)에 제사하는 예입니다. 대체로 신령은 감동시키기는 쉽지만 이르게 하기는 어려운 차이 때문에 순서를 정한 것이고 9가 8이나 6보다 더 공경스럽다던가 사람이 하늘과 땅보다 더 풍성해서가 아닙니다. 그 의의가 매우 은미하여 함부로 보태거나 빼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악관(樂官)이 건의한 의견은 경전을 인용하고 예법을 상고하여 자세히 진술하였으니 악성에 9를 쓰는 것은 더 이상 의논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예문관 제학 이명식(李命植)은 말하기를 ‘두 중신이 진술한 바가 모두 근거가 있으니 어찌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원임 직제학 이병모(李秉模)는 말하기를 ‘악성에서 혹은 6, 혹은 8, 혹은 9를 쓰는 것은 실로 하늘·땅·사람의 신령이 제사를 받는 것이 각각 그 의의가 있기 때문이니, 정미하고 오묘하여 자연의 이치를 따른 것이라 등급의 높낮이로 말할 수 없고 춤추는 대열수로 대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악관이 인용한 것은 조목별로 자세히 분석하였으니, 신처럼 우매한 사람도 9성의 뜻에 대해 환히 알겠습니다. 지금 물으신 것에 대해 어찌 감히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원임 직각 정동준(鄭東浚)은 말하기를 ‘사람의 신령에게 제사지낼 때의 악성을 6도 아니고 8도 아닌 꼭 9수를 쓰는 것에 대해서는, 중신이 상소문에서 고금의 실례를 끌어 증명한 것이 실로 근거가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원임 직각 윤행임(尹行任)은 말하기를, ‘하늘보다 존귀한 것이 없지만 6성으로 제사지내고, 땅보다 친근한 것이 없지만 8성으로 제사지내는 것으로 보아 음악의 등급은 실로 악성의 숫자가 많거나 적은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혹은 6, 혹은 8, 혹은 9로 하여 하늘·땅·사람에게 나누어 붙인 것은 《주관》의 정현(鄭玄)의 주와 가공언(賈公彦)의 소에서 증명한 곳으로서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니 거기에 더 보태거나 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상께서 처결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사람의 설이 사실 일리가 있으나 다시 하교를 기다리라."
하였다.
사직(司直) 권유(權𥙿) 등 1백 31인이 상소하기를,
"신들의 시조는 바로 고려의 태사(太師)인 권행(權幸)입니다. 그 당시 태사 김선평(金宣平)·장정필(張貞弼)과 살아서는 함께 한 군에서 공을 세웠고 죽어서는 함께 한 사당에서 제향을 받고 있으니, 그 후손으로서는 마땅히 다같이 높이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김 태사의 후손인 전 지평 김양근(金養根)이 한 책자를 만들어 《태사묘사적(太師廟事蹟)》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여 세상에 내놓았는데, 다른 사람의 말을 빙자하여 신들의 시조를 여지없이 무함하고 모욕하였으며 심지어는 ‘성을 하사받고 벼슬에 봉해졌다는 것은 억지로 끌어다붙인 것 같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김씨의 후손으로서 권씨의 시조를 무함하였으니 어찌 크게 풍속을 해치고 의리를 어기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경외(京外)의 여러 종씨들이 서울에 있는 김씨들에게 편지를 보내 여러 번 삭제할 것을 요청했으나 끝내 회답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의 시조의 본성은 김씨이고 딴 이름은 행(行)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입니다. 신라 말기에 고려 태조를 맞이하여 견훤(甄萱)을 토벌함으로써 국치를 설욕하자 고려 태조가 가상하게 여겨 권씨 성을 주고 태사 벼슬을 내렸으며 식읍(食邑)을 주어 조세를 받아먹게 하였는데, 그 사실이 공신록에 실려 있습니다. 문충공(文忠公) 신 유계(兪棨)가 15인의 설을 널리 모아 《여사제강(麗史提綱)》을 편찬했는데, 그 안에 ‘권행의 본성은 김씨인데 임기응변에 통달하여 귀순하였다는 이유로 권씨 성을 내렸다.’ 하였습니다. 또 《동국통감(東國通鑑)》과 《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을 상고해 보아도 그 사적을 분명히 실어 놓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문간공(文簡公) 신 김안국(金安國)이 지은 현덕 왕후 능지(顯德王后陵誌)에서는 ‘왕후의 성은 권씨이다. 그의 먼 조상 김행이 고창군(古昌郡)을 지키고 있었는데 견훤의 반란에 분개하여 그 고을을 가지고 고려에 투항하였더니, 태조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권행이 능히 상황을 판단하고 임기응변에 통달했다.」 하고 권씨 성을 주었고, 벼슬은 태사에 이르렀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근이 만든 책을 보면, 첫머리에 《고려사》 몇 조목을 기록하면서 신의 조상에게 성을 하사한 조목에 대해서는 단락을 따라 가며 삭제하여 조금도 보이지 않으며, 다음으로 고려 태조의 공신록을 기록하면서 신의 시조의 성명이 염태평(廉泰評) 견(堅)의 아래에 분명히 실려 있는데도 또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족보를 인용하여 주석을 달기를 ‘어떤 사람은 「태평(泰評) 아래에 견권행(堅權幸)이란 세 글자가 없다.」 하고, 어떤 사람은 「견권(堅權) 아래에 본디 행(幸)이란 글자가 없다.」 한다.’ 하여, 결국 신의 시조가 공신으로 기록된 것을 의심스러운 일로 만들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또 정시술(丁時述)의 《심원록(尋源錄)》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본성이 김씨이고 이름이 또 행이라면 《고려사》에 어찌 먼저 그 본성명을 쓰고난 뒤에 그 성을 내린 이유를 기록하지 않았겠는가.’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김선평(金宣平)·장길(張吉)은 모두 개국 공신(開國功臣)에 끼었으나 공만은 유독 끼지 못하였으니, 태사에 임명하고 성명을 하사했다는 말은 억지로 끌어붙인 말에 가깝다.’ 하였습니다.
아, 황당하고 괴이한 말을 만들어내어 무함하고 깔보는 계책을 부리려고 하는 것이 어찌 너무도 망령된 짓이 아니겠습니까. 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지은 《삼공신묘기(三功臣廟記)》를 보면, 거기에 ‘성을 내려 권공을 총애하였다.’ 한 것은 바로 신의 조상이 성을 얻었다는 증거이고 ‘공신의 칭호는 세 공이 다 같다.’ 한 것은 신의 시조가 공신으로 등록되었다는 증거이고 ‘태사의 벼슬을 받았다는 것은 유독 권씨 족보에만 보인다.’ 한 것은 신의 시조가 태사에 임명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사실을 서술한 데서는 ‘중한 쪽을 따라 김공을 맨 앞에 놓았다.’ 하였고 의견을 주장한 데서는 ‘일의 중요한 계기가 모두 권공에서 나왔다.’라고 하여 명백히 반복하여 말한 것이 실로 공안(公案)이 되었으니, 어찌 정시술의 망녕된 말을 가지고 선정의 미더운 글을 가려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가 유씨의 설로 증거를 대었으나 신들이 유씨 족보를 찾아 보니 애당초 공신록에 오른 것이 없었고, 그가 정시술의 설로 주장하였으나 신들이 편지로 그 후손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심원록》은 애초에 간행한 책도 아니고 또 집에 보관되어 있지도 않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또 양근에게 물었더니 ‘낡은 상자에 들어 있는 파지(破紙) 속에서 보았다.’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이는 모두 거짓으로 꾸며낸 말입니다.
비록 지난번의 김씨가 보낸 회답 편지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신들이 물은 것은 단지 무함한 것을 해명하자는 것이었는데 그가 회답한 것에서는 오로지 제사에서 술잔을 올릴 때의 앞뒤 순서에 대해서만 논하였고, 또 선정의 기문(記文)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퇴계가 말한 바 태사로 임명되었다는 것이 권씨 족보에만 보인다고 한 것은 곧 정씨가 말한 공만 참여하지 못했다는 말이며, 퇴계가 말한 바 권공과 장공의 이름이 묘판(廟版)과 사서(史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곧 정씨가 말한 본래의 성명을 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선정이 이른바 권씨 족보에만 보인다고 한 것은 대개 태사라는 칭호가 김씨와 장씨의 두 족보에는 보이지 않고 권씨의 족보에만 보이는 것을 의심한 것인데, 이제 도리어 이것을 가지고 신의 조상이 공신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하니,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두 공의 이름이 사서와 묘판이 다르다고 한 것에 관해서는, 의심스러운 점은 단지 이름에 있을 뿐 성에 있는 것이 아니니, 역사 기록에 실려 있는 것은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고치기 전의 것이고 묘판에 쓰인 것은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바꾼 뒤의 것이니, 이름이 서로 다른 것은 사실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김씨의 회답 편지에는 또 그가 신의 문중에서 김공과 장공을 배향(配享)한다는 설을 족보에 써서 간행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김씨가 만들어낸 말로서 애초에 권씨 족보에 실려있지 않기 때문에 지난 병오년에 신의 가문에서 그를 상대해 올린 상소문에서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이미 해명하였는데, 이제 또다시 그것을 제기하니 실로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더구나 문정공(文正公) 신 김상헌(金尙憲)은 일찍이 권씨 세 사람의 묘지명을 지었고 생원 신 김영(金瑛)도 권씨의 비문을 지었는데, 신의 시조의 성씨와 벼슬과 사적을 두루 갖추어 기술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것이 모두 그 문집에 들어있으니, 한번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에 사는 김씨들은 대부분 문정공의 후손이고 양근은 김영의 손자입니다. 자기 조상들이 지은 글은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시술의 근거 없는 말로 없는 사실을 날조하였으니 이는 보통 심정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일입니다. 양근이야 본래 책망할 것도 없지만 저 김이익(金履翼)까지 또 덩달아서 그 책자의 서문을 썼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여러 김씨들이 어찌 감히 그 일에 참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양근이 이 책자를 만든 것은 오로지 제사 때 술잔을 올리는 차례 때문입니다. 온 경내를 죽음으로부터 구제한 것은 모두 신들의 시조의 공덕이었으니 선정이 이른바 ‘유민(遺民)들이 그 공덕을 잊지 못해 하는 것은 특히 권공에게 있었다.’ 한 것은 곧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매번 술잔을 드릴 때면 먼저 중위(中位)에 있는 신들의 시조에게 올리고 다음에 동위(東位)에 있는 김공에게 올리고 다음으로 서위(西位)에 있는 장공에게 올리는 것이 고려 초부터 이미 규례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중간에 내려오면서 김씨의 후손들이 비로소 동위부터 먼저 올리자는 논의를 제기하여 서로 다툰 지가 여러 해 되었습니다. 지난 숙종 임술년에 김씨들의 상소로 청한 것이 허락을 받아 잔 드리는 차례를 바꾸었었다가 그뒤 8년만에 신의 문중에서 맞서서 상소하여 해명한 결과 옛 규례를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영조 정해년에 김씨들이 또 상소하여 다투자 영조께서 그 글을 돌려주면서 예법을 엄격히 지켜 분쟁의 단서를 없애라는 하교를 하셨고, 그 당시 연석에서 또 동시에 잔을 드린다면 선후의 구분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세 자리에 동시에 잔드리는 규례가 시행되어 권씨와 김씨의 분쟁이 사그러들었습니다.
대체로 지금 두 집안 사람들이 만약 선대 임금의 분쟁을 종식시킨 거룩한 뜻을 우러러 받든다면 누가 감히 그 사이에 다른 의견을 갖겠습니까. 그런데 동시에 잔드리는 조치도 오히려 만족스럽지 못해 이겨보려는 마음이 점점 북받쳐오르기 때문에 양근의 책자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허다한 무함이 어느 것인들 원통하지 않겠습니까만 성과 벼슬을 주었다는 것을 억지로 붙인 말이라는 등의 설의 경우에는 더욱 하루라도 세상에 퍼뜨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특별히 처분을 내리시어 양근이 간행한 책자를 유사에게 빨리 명하여 거두어 모아 태워버리게 하시고, 아울러 남의 시조를 무함한 죄를 다스려 신들의 천고의 원통함을 씻어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지난 임술년과 기사년 두 해에 김씨와 권씨들이 서로 상소하여 해명한 건에 관해서 각각 처분이 있었고, 선조(先朝) 정해년에 또 이 일로 김씨들이 상소하여 호소한 것으로 인해 특별히 세 자리에 술잔을 동시에 드리라고 명하였다. 그러니 두 집안 사람들로서는 모두 그대로 받들어 지키고 감히 어겨서는 안 될 것인데, 어찌 근거도 없는 증거로 불필요한 책을 간행하여 이런 번거로운 일을 초래한단 말인가. 더구나 이 상소의 내용은 더욱 잔 드리는 분쟁거리와는 달라 별로 분석하여 결론을 낼 것이 없으니, 그 상소문을 돌려주도록 하라. 이른바 간행했다는 책은 한마디로 말해 불필요한 것이다. 설령 분명한 증거가 믿을 만한 역사책에 있더라도 거의 1천년 동안 미처 손대지 못한 일을 어찌 이제 와서 엮어서 찍어낼 수 있단 말인가. 이 사건의 분쟁을 막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다. 관청에서 보관하고 있는 책은 즉시 교서관으로 하여금 없애버리도록 하라. 각처에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책은 조정에서 거두어 모아 처리할 바가 아니다. 비록 있다 하더라도 관청에 있는 것을 없애버린 뒤에는 근거 없이 떠돌아다니는 문건에 불과할 것이니, 있건 없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두 집안으로 하여금 잘 알아두도록 하고 앞으로는 이와 같이 옥신각신 다투는 상소문을 감히 올리지 말라는 뜻으로 모두에게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6월 23일 병인
경기도 수군 절도사 신철(申㬚)을 삭직하였다. 이때 호남의 법성창(法聖倉) 조운선(漕運船)이 덕적진(德積鎭) 앞바다를 돌아 지나가다가 파선하였는데, 신철이 올린 글이 사실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상이 관서 지방의 여러 진(鎭)들이 피폐한 것을 깊이 걱정하여 진장(鎭將)을 뽑아 보낼 때마다 전신(銓臣)129) 에게 당부하기를 ‘오직 인재를 얻도록 힘쓰고 품계의 높낮이에 구애되지 말라.’고 하였다. 일찍이 수신(帥臣)에게 효유하기를,
"내가 진장들의 성명을 앉은 자리 옆에 써붙여 놓고 항상 보고 있다. 그들이 만약 자기의 성명을 언제나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 직무를 과연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수신이 각진의 성적에 대한 고과를 올리면서 대부분 직책을 잘 수행했다고 칭찬하니, 상이 분부를 내려 가상하게 여기는 뜻을 보였다. 대길호리 권관(大吉號里權管) 홍섭인(洪燮仁)에 관한 보고 속에 술을 즐겨 마신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그를 차송한 전관(銓官) 이갑(李𡊠)을 특별히 파직하였다.
이때 오랫동안 비가 왔다. 오부(五部)에 명하여 무너진 민가를 찾아서 매일 아뢰도록 하고, 진휼청으로 하여금 넉넉히 돌보아 구휼하도록 하였다.
6월 24일 정묘
춘당대(春塘臺)에 나가 자전과 원자의 탄신일에 입직한 장수와 무사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도정(都政)을 거행하였다. 【 이조 판서 정창순(鄭昌順), 참판 민종현(閔鍾顯), 참의 이면긍(李勉兢),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 이윤빈(李潤彬)을 경기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우리 나라 제도에 동지정사는 대신이나 종친·의빈(儀賓) 중에서 뽑아 보냈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상이 대신들은 모두 늙었고 종친과 의빈으로 배정하는 것도 구차스럽다 하여 하교하기를,
"이 일은 매번 융통성 있게 처리하려 했었다. 1품인 중신 가운데서 판중추로 넘겨 뽑아 보내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상은 그래도 사신이란 그 사안이 중대하다 하여 대신들에게 물어본 다음 오재순(吳載純)을 정사로, 이조원(李祖源)을 부사로, 심능익(沈能翼)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6월 25일 무진
탄신일에 입직한 훈련 도감 출신으로서 나이가 70, 80이 된 자에게 한 자급을 더해주고 쌀과 고기를 내렸다.
6월 26일 기사
차대를 거행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도거리 장사를 혁파한 뒤에는 평시서(平市署)가 쓸모 없는 관청이 되어 서리들이 경성 백성들을 착취하는 구멍이 될 뿐이라 하여, 여러번 그 혁파를 주장하던 끝에, 아울러 호조에 소속시켜 판서로 하여금 겸임하게 하고 송사에 관한 것은 한성부로 넘기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만약 평시서를 혁파하면 시정의 백성들이 과연 조세의 징수를 면하게 되어 길목과 저자에서 세를 받지 않는 옛 성군의 정사에 부합되겠는가. 그 이해(利害)의 소재를 분명히 안 뒤에야 비로소 의논할 수 있는 것이니, 대체로 평시(平市)라는 이름이 어찌 실로 좋지 않은가. 이제 비록 그러한 폐단은 있지만, 폐단이 생기는 것은 단지 사람에게 달린 것이고 법이 나쁜 것은 아니다. 또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옛사람의 말에 ‘너는 그 양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를 아낀다.’ 하였는데, 나에게는 그 예를 아껴서 양을 희생으로 쓰는 법을 보존하려는 생각이 있다."
하였다.
호서에서 바치는 삭선(朔膳)130) 은 모두 경청(京廳)에서 대신 바치지만 진하(陳賀) 때 쓰는 음식 재료만은 본도에서 봉해 올렸다. 전교하기를,
"진하가 얼마나 성대한 일인가. 그러나 음식 재료의 문제로 우리 백성에게 폐단을 끼치는 것은 경사를 함께 나누는 뜻이 아니다. 묘당에 물어보도록 하라."
하니, 비변사가 아뢰기를,
"주원(廚院)131) 의 음식 재료 공납 규정을 자세히 살펴보니, 여러 가지 명색 가운데 삭선조(朔膳條)에, 1월에는 껍질이 있는 생전복이 있고 4월에는 황조기가 있고 8월에는 올홍시와 생송이버섯이 있고 9월에는 올홍시와 생전복이 있으며, 물선조(物膳條)에는 탄신일과 동지(冬至)에 모두 생전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전복과 올홍시는 토산품일 뿐만 아니라, 위에 올려 보낼 때 거리도 가장 가깝고 더욱이 본도의 생전복은 여러 도 가운데서도 맛이 가장 좋다는 평이 있으며, 올홍시와 송이도 그와 같은 경우로서 서울의 저자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세 가지는 전례대로 거행하소서. 황조기에 대해서는 본디 소소한 것이라서 또한 규례를 고칠 필요가 없지만 다만 생각건대 성상의 뜻이 오로지 온 나라를 동원하여 한 사람을 봉양하지 않겠다는 데 있기 때문에 묘당의 신하로서는 그저 그 미덕을 받들 따름입니다. 그 값을 쌀로 대신 받는 것으로 규정을 정하는 대상에 붙이게 하소서. 나아가 도계 진상(到界進上)132) 은 수십 년만에 한 번이나 있는 일이지만 물건 종류 가운데 산 노루 2마리가 있습니다. 이번에 규정을 고친 뒤에 다른 도에는 산 노루에 대한 명목은 모두 없어졌는데 본도에만 군살로 남아 있습니다. 이 종목도 영구히 다른 것으로 대신 봉해 올리라는 뜻을 주원과 해당 관청 및 해당 도에 분부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호서 지방에서는 생꿩을 산 채로 잡아서 보내기 때문에 봉하여 올린 뒤에는 매번 산 것을 놓아 준 선왕의 거룩하신 덕을 본받아 곧바로 대궐 숲에 놓아 준다. 그러면 날아갔다가 다시 모이고 한참 뒤에 자유롭게 날아가버리는데, 이것이 곧 궁중의 고사가 되었다. 쓸모도 없으면서 폐단만 생기는 것이 사실 그와 같았으니, 앞으로는 도계 진상에서 생꿩을 제외시키고 영구히 그대로 따르도록 하라. 편포(片脯)133) 는 우금(牛禁)134) 이 매우 엄격하여 비록 크고 작은 연회에 있어서도 특별한 음식 재료로 쓰이는 짐승 이외에는 옛 규례에 쇠고기를 쓰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설사 감영 부근의 푸줏간에서 쇠고기를 올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곧 법이 시행되지 않는 이유가 위에서부터 범하기 때문이라는 경우와 근사하지 않겠는가. 편포도 역시 다른 물건으로 때에 따라 대신 바치게 하라."
하였다.
6월 27일 경오
전교하였다.
"요즈음 농사 실정에 관한 장계를 보면, 양남(兩南)의 비가 호서 지방보다 많았고 경기 지방이 그 다음이다. 강 주변과 산골에 가까운 민가에는 침수되거나 밭두둑이 무너진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이들이 어디에 들어가 살고 농사를 지어먹겠는가. 더구나 모든 백성을 똑같이 보아주는 정사에서 거리의 원근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서울 안의 무너진 집도 오히려 구휼하도록 신칙하였는데 머나먼 지방 고을을 만약 특별히 일깨워 주지 않는다면 과연 실효가 있을지 알 수 없다.
농사에 관한 정사는 반드시 지금 수재를 당한 곳부터 구별한 뒤에야 재해로 인한 피해를 보상해 주는 혜택이 고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삼남(三南)의 도신들을 엄히 신칙하여 무너진 집을 부유한 집과 영세한 집으로 구분해서, 영세한 집은 기본의 규정 이외에 특별히 돌보아 구휼하고 그 수효를 계속해서 글로 아뢰게 하라. 토지는 날씨가 개기를 기다려 각읍의 수령들로 하여금 직접 전답을 둘러 보고 곧바로 본대로 보고하게 함으로써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 할 것이며 그 개략을 별도로 기록하여 연분 장계(年分狀啓)135) 에 갖추어 진달하게 하라. 이와 같이 당부하였는데도 도백이나 수령들이 능히 마음을 다하지 않는 사실이 어사의 순찰에서 발견될 경우에는 정치를 잘해 이룩한 공적이 설사 한(漢)나라의 공수(龔遂)나 황패(黃覇)와 같다 하더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고 중벌로 다스리겠다. 경기의 고을과 관동 지방에서도 혹시 비가 많이 온 곳이 있으면 피해의 규모가 작다 하여 소홀히 하지 말고 삼남 지방의 규례에 따라 거행하라."
대빈궁(大嬪宮)의 제사 물품을 바로잡아 규정으로 정할 것을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원(園)보다 지나치게 하면 사치한데 가깝고 묘(墓)보다 못하게 하면 그 또한 박대하는 것 같다. 당초의 수교(受敎)에서는 신비(愼妃)와 인빈(仁嬪)을 기준으로 삼게 하였으나 지금은 상황이 그때와 다르니, 이렇게 참작하여 마련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겠다. 이로써 규정을 정하라."
하였다.
6월 28일 신미
한성부 판윤 구익(具㢞)을 파직하였다. 한성부에서 남의 집을 빼앗아 들어가 사는 자들을 적간(摘奸)하여 아뢰니, 전교하기를,
"민가를 5일 동안 적간하는 문서로 인해 ‘요즈음은 해이해진 폐단이 없는가?’ 하는 말로 하교를 하였는데, 이는 단지 한번 물어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어찌 이 하교를 근거로 공공연히 금령(禁令)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설사 금령을 내고자 하더라도 마땅히 그 법전 내의 조건에 따라 금해야지, 어찌 달팽이 집이나 게집같은 것까지 포함시킬 수 있겠는가. 조정의 본뜻이 만약 단단히 금지시키려 한 것이었다면 마땅히 단단히 금지시키라는 뜻으로 명백히 말을 만들었지, 하필 단서만 약간 꺼내고 말을 다하지 않았겠는가.
이달 내내 큰 비가 내려, 현재 한편으로 무너진 집을 조사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남의 집을 뺏은 것을 적간하고 있는데 해서는 안 될 정치를 시행했다고 하겠다. 법을 관장하는 관리로서 거행하는 일이 이처럼 상반되었으니, 해당 경조윤(京兆尹)을 파직하라. 이것은 결코 남의 집을 빼앗아 들어가도록 내버려두라는 뜻이 아니다. 이뒤에 별도로 신칙하겠지만, 우선 묘당으로 하여금 이런 내용을 알고서 앞으로 유의하여 살피되 마땅히 금해야 할 것을 금하지 않은 해부의 관원을 묘당이 초록하여 논죄하고 절대로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선조(先朝)가 만들어 놓은 법을 삼가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6월 30일 계유
홍억(洪檍)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성천 부사(成川府使) 서형수(徐瀅修)를 파직하였다. 형수가 사적인 혐의 때문에 좌의정 채제공에게 부임 인사를 하지 않으니, 제공이 차자를 올려 파직하도록 논하였다. 비답하기를,
"수령이 여러 사람이 다 아는 것으로서 반드시 피해야 할 혐의가 없으면서도 대신을 만나보지 않고 내려갔으니 체통에 크게 관계가 된다. 파직하는 법을 어찌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당일 조정에 하직 인사를 한 것은 이미 특별한 분부가 있었기 때문이니, 금명간에 두루 인사하려고 했다가 끝내 하지 못한 것이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경이 차자를 올리는 것이 해당 수령의 행차가 사현(沙峴)을 넘어간 뒤에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한 수령을 위해서 체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천 부사 서형수를 파직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형수의 형인 서호수(徐浩修)가 이조 판서가 되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인사 행정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영부사 서명선(徐命善)이 일찍이 제공을 성토한 일이 있었는데, 호수가 전관(銓官)이 되면 현임 재상과 관계를 갖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굳이 사양한 것이다. 제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신이 기억하건대 병오년 여름 노량진에 물러가 지낼 때 고 봉조하 서명응(徐命膺)이 용산(龍山)에 와서 살았는데 그가 사는 곳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다 보였습니다. 그때 영부사 서명선이 도성 밖에 나와 명응의 집에 함께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채홍리(蔡弘履)가 분부를 전달하기 위해 나가 그와 이야기를 할 때, 명응은 방에 있었고 명선이 마루에 있었습니다. 명응이 손으로 강 건너 숲을 가리키면서 소신의 자(字)를 부르고 말하기를, ‘저곳은 아무개가 사는 곳이다. 내 평소의 지극한 정을 가지고서도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사세에 구애되어 끝내 한번 건너가 만나보지 못하였으니, 내 처지를 돌아볼 때 한탄스럽다.’ 하자, 영부사가 그 말을 듣고 물었으나 딴 말을 하면서 대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명응이 죽음에 임박해서도 신에 대한 정이 줄지 않았음을 이로써도 알 수 있습니다. 호수가 과연 신에 대해 특별히 만나기 어려운 의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호수가 만약 도목 정사를 당해서도 정사에 대해 묻지 않는다면 신은 마땅히 사실을 갖추어 진술하고 기꺼이 퇴척을 하겠지만, 만약 혹시라도 참판을 대신 보낸다면 신이 비록 노둔하나 결단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숙질(叔姪) 사이에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에 지난번에 특별히 호조 판서의 직책을 해임하였는데, 이 역시 예의 염치를 중시하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경의 말을 듣고 보니 전에 곡진히 생각해 줬던 것이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내 일찍이 호수에게 이르기를 ‘만약 가서 인사 문제를 묻게 된다면 한 집안 안에서 그 체모가 어떻겠느냐.’ 하였는데, 이제는 도리어 이것보다 더 엄중한 것이 있다. 내가 애초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어찌 그때에 ‘조롱한다.’ 또는 ‘미안하다.’ 하는 등의 하교가 있었겠는가.
명응이 한 말뜻을 보면 실로 옛사람이 갈대에다 생각을 부쳐 벗을 그리워하던 뜻이 있으니, 호수가 경을 만나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면 이는 부자간에 의견이 다른 것이다. 경이 호수를 상대하는 것이야 무슨 특별히 좋아질게 있겠는가마는 호수로서는 반드시 한번 경을 만나야만 부자가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호수가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삼가 듣건대 지난번에 빈청에서 대신이 신의 처신하는 의리를 논하면서 선신(先臣)136) 에게까지 말이 미쳐, 재신(宰臣) 채홍리를 끌어대 증명하였다고 합니다. 아, 이 무슨 까닭입니까. 대신이 홍리에게서 들었다는 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선신이 대신이 사는 곳을 가리키면서 서로 만날 길이 없다는 뜻을 나타냈다는 것이고, 하나는 신의 중부(仲父)137) 가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선신이 다른 말로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홍리의 말에 이미 선신 형제가 같이 마루에 앉아있었다고 했으니, 이 일의 사실여부는 실로 신의 중부에게 물어서 결정할 수 있는데, 신의 중부께서는 이 말을 처음 듣더니 놀라 벌떡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내 비록 병들고 혼미해 죽음이 가까웠지만, 5, 6년 사이의 일을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느냐. 그때 시골집에서 강변에 와 있은 것이 6월 초하루부터 사흘까지인데, 홍리는 초닷새에 명을 받들고 함께 왔으며, 11일에 판서에 대한 상의 돈독한 효유로 돌아왔다. 그 사이 5, 6일 동안 나는 잇달아 서계(書啓)를 올리느라 자리를 떠날 틈이 없어 선형(先兄)의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선형도 한번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른 뒤에는 일찍이 문밖에 나간 일이 없어 비록 자제들이 사는 곳조차도 왕래한 일이 없다. 이른바 한 방에 있었다는 말이 이처럼 파탄이 났으니,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고 한 것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중부의 분명한 말을 듣고서야 이 일이 있지도 않은 것임을 알았고, 또 며칠전 재계하는 반열에서 홍리에게 물었더니, 위의 한 조목 대화는 신의 중부가 나이가 들어 잊은 것이라고 핑계대고, 아래 한 조목 문답은 평범한 대화였다고 돌려대면서 위의 대화와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일이란 사실이 있으면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것이며, 말은 혹 이랬다 저랬다 하면 꾸며댈수록 더욱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설사 홍리의 말에 가식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처음에 옛 우정을 말한 것은 곧 신축년 이전의 교제를 말한 것이고 끝에 ‘만날 수가 없다.’ 한 것은 임인년 이후 집안에서 한 말을 가리킨 것인데, 상관 없는 말을 억지로 끌어맞추어 남을 위협하는 몽둥이로 삼아 마치 한집안 안에서 의견과 논의가 서로 달라진 것이 있는 것처럼 만들었으니, 그 마음과 술책은 실로 인정과 천리에 벗어나는 것입니다.
더구나 선신 형제가 원래 함께 앉아서 홍리를 만난 사실이 없으며 홍리가 전한 말과 대신이 경연에서 아뢴 것이 또 이처럼 다르니, 그 속임수로 꾸며대 농락하는 실상을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대저 남의 자제가 처신하는 의리를 가지고 이미 죽은 부형을 들먹이면서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내 속에 품은 술책을 부리려고 한 것은 맑은 조정의 충후한 기풍을 크게 손상시키는 행위로서 비단 개인과 한집안의 사사로운 원통함이 될 뿐만 아닙니다. 아, 이런 짓을 어찌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구차하게 조정을 떠나지 않은 결과 선신에게 누를 끼치고 조정을 욕되게 했으니,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러워할 뿐 누구를 허물하겠습니까. 앞으로는 자취를 감추고 영원히 세상과 인연을 끊는 것만이 신이 노년시기를 수습하는 하나의 방도일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름을 조정의 명부에서 지워버리고 고향에 물러가 있게 해 주소서."
하였다.
황해도 병마 절도사 남지묵(南志默)을 파직하였다. 포폄 계본(褒貶啓本)에 이름을 잘못 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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