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3권, 정조 15년 1791년 7월

싸라리리 2025. 8. 4.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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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갑술

윤대(輪對)가 있었다.

 

수찬 신헌조(申獻朝)가 상소하기를,
"병조 참의 맹지대(孟至大)가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교대도 하지 않고 멋대로 숙직하는 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병조의 숙직을 면대하여 교대하는 것은 본디 숙위(宿衛)를 중시하는 뜻에서입니다. 만약 멋대로 자리를 떠날 경우 곧바로 귀양보내게 되어 있는데 지대는 이처럼 쉽게 법을 범하였으니, 마땅히 법대로 중벌로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전교하기를,
"병조 당상관의 일은 며칠 전에 있었고, 이 옥당(玉堂) 관리는 매일 숙직에 매였던 사람이다. 만약 이 일을 말하고 싶었다면 마땅히 그 날을 넘기지 않았어야 하는데 어디를 가 있었길래 말을 하지 않았는가. 어제 병세를 진찰하는 자리에서 대신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에야 이런 상소를 올렸으니, 앞에서는 말하지 않은 잘못이 있고 뒤에서는 시기가 늦은 책임이 있다."
하고, 그 상소를 기각하고 체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7월 3일 병자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김성구(金成九)를 창원부(昌原府)에 유배하였다. 영남 좌조창(左漕倉)의 세곡(稅穀)을 받아들일 때 창고 관리가 농간을 부리려다 되지 않자, 성구에게 고자질을 하였다. 그러자 성구가 뱃사람을 매질하고 그 쌀과 콩을 땅에 내던졌다. 호조가 그 사실을 적발하여 아뢰자 성구를 조운창이 있는 창원부에 유배하도록 명하고, 이어 도신에게 부(部)를 순행할 때 백성들을 많이 모아놓고 효유한 뒤에 폐단을 끼친 창고 관리들을 곤장치고 모두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사직 채홍리(蔡弘履)가 상소하기를,
"신은 문제가 친족 사이에서 벌어져 양심을 어기고 은덕을 저버림을 면치 못했으며, 그 여파가 혹시 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했고 자취는 도리어 영화를 취하는 혐의를 빚어 행동과 말이 다르고 신분과 명예가 애매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연전에 하유를 전달할 때 마침 봉조하 서명응(徐命膺)을 판부사 서명선(徐命善)이 거처하는 곳에서 만났는데, 봉조하가 손으로 노량(露梁)을 가리키고 지금 좌의정인 채제공의 자를 부르면서 ‘아무개가 지금 저기에 있는데 서로 만날 길이 없다. 지금 조정에서는 무슨 말이 있겠지만 나야 어찌 조정의 일을 알겠는가.’ 하고, 또 ‘오가피주(五加皮洒)는 선방(仙方)에 가깝다.’ 하면서 서로 웃었습니다. 대신이 묻기를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하니, 봉조하가 말하기를 ‘별로 할 말은 없다.’ 하였습니다.
신이 돌아온 뒤에 우연히 이 말을 족숙(族叔)138)  에게 전했는데, 어찌 이 말이 상소 속에 거론될 줄을 알았겠습니까. 일전에 서계(誓戒)하는 반열에서 서호수(徐浩修)가 신에게 묻기에 신이 앞서 말한 대로 대답했더니, 호수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아랫부분의 말은 마땅히 오가피가 선방이라고 한 대화에 속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제 그의 상소 가운데 말한, 좌상이 경연에서 아뢴 것이 신이 문답한 말과 차이가 난다는 것은 대체로 이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아랫부분의 말은 평범하게 주고받은 대화로서 위의 부분과는 관계가 없는데, 좌상이 경연에서 아랫부분을 직접 위와 연계시켰으니, 이는 역시 당초에 신이 말을 애매하게 전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승지 이익운(李益運)에게 이르기를,
"홍리가 어찌 감히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함부로 반박하는 글을 올려 요사스런 작태를 부린단 말인가. 홍리는 그의 숙부와는 그 의리가 부자간과 같은데, 그 숙부가 신축년 이후 재난에 빠졌을 때 홍리의 관직은 갑자기 높아져서 경연, 성균관, 비변사, 강원 감사 등의 관직을 제마음대로 독차지하였으니, 과연 무슨 이유로 그런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가. 숙부를 팔아 영화를 얻고자 이처럼 반대편에 붙어서 그 숙부를 해치는 일이라면 참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좌상의 여러가지 죄안(罪案)은 집안 내의 자잘한 일까지도 어느 것 하나 홍리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있었던가.
그런데 그 중간에 근거없는 말을 주워가지고 돌아가 좌상에게 전해 겉으로 다정한 정이 있는 것처럼 보여 그 자취를 덮으려고 하다가 오늘날의 사단을 만들었다. 내가 지난 십여 년 전부터 대사성의 의망 단자에 끝내 홍리에게 낙점을 하지 않은 것은 이미 은밀하게 벌책을 보인 조치였는데, 그가 감히 얼굴을 바꾸고 사실을 뒤엎어 농락하면서 도리어 좌상을 위해 첩자노릇을 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 마음가짐을 따지자면 말이 추해진다.
들으니, 이 자는 유복자(遺腹子)라 한다. 내가 앞세우는 것은 효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라서 그 어미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자식에게 형벌을 베푸는 일을 차마 못하는데, 개탄스러운 것은 좌상의 일이다. 처음에 그 조카에게 팔려 농락당했으면서도 끝내 또 그를 비호하는 것이야 그래도 그 일이 지친(至親)에 관계되므로 이상할 것이 없지만, 애석한 것은 그가 80의 나이로서 이처럼 내가 믿고 국사를 맡기면 오직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할 뿐 사(私)를 잊어야 할 것인데, 전일 경연에서의 일이 과연 말이 되는가. 서호수가 인사 행정의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 자기를 찾아 묻지 않으면 파직을 요청하거나 삭직을 요청하거나 무엇이 잘못될 것이 있기에 굳이 남의 부자간에 끼어들어 그들의 말을 꼬집어 내어 이처럼 박절한 사태를 초래한단 말인가. 이 어찌 맑은 조정의 충후(忠厚)한 기풍이겠는가.
서 영부사는 좌상에 대해 조회의 반열이나 공회석상에 자리를 함께하지 않고 만나서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제 그 조카에게 억지로 그 숙부가 하지 않았던 일을 하게 하는 것은 결코 예의로써 아랫사람을 부리는 도리가 아니다. 나는 일찍이 호수가 만약 좌상을 만난다면 이것은 곧 숙부와 조카가 주장이 서로 다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를 해직시킨 것은 사실 그런 이유에서였다. 만약 좌상이 전일에 한 말대로라면 이것은 남의 부자 사이를 의견이 서로 다른 지경으로 몰아넣는 것이니, 이 어찌 노성(老成)한 사람으로서 말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런데 이와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로 반나절을 소모하였으므로 그날 경연이 끝난 뒤에 마음이 계속 편치 못했다. 개인의 가정에 관한 사적인 일도 조정의 풍교(風敎)와 관계가 있는 것이니, 나의 이런 말이 어찌 서씨 집안의 처지만을 위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7월 4일 정축

심풍지(沈豊之)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7월 5일 무인

전향 승지(傳香承旨)를 불러 만나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추향 대제(秋享大祭)가 하룻밤 남았는데 몸소 제향에 참여해 잔을 올리지 못하니, 실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 같다는 탄식이 나온다. 게다가 날씨가 이처럼 더우므로 더욱 제물이 정갈하지 못할까 두렵다."
하고, 승지에게 종묘로 달려가 헌관(獻官)·묘사(廟司)·전사관(典祀官) 등을 신칙하도록 명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내가 직접 제사지낼 때는 제기를 받드는 관원이 42원이지만, 대행할 때는 으레 15원을 뽑아 돌아가면서 받들어 올리기 때문에 한 사람이 세 번씩 번갈아 드나들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왕래할 때 동쪽의 신문(神門)으로 나와 남쪽의 신문으로 들어가니, 이런 과정에서 땀이 흘러 정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반드시 제기를 올리는 것이 가끔 중단되는 상황을 부르게 된다. 그러니 이번에는 맨 처음 제기를 올릴 때는 관례대로 동쪽 신문에서 나오되, 두 번째 이후에는 남쪽 신문 밖에 별도로 찬막(饌幕)을 설치하여 희생을 담은 그릇을 미리 봉안해두도록 하며, 제기를 올리는 관원이 첫번째와 두 번째 제기를 올린 뒤에는 동문으로 나오지 말고 곧바로 남문으로 가게 한다면 전사관(典祀官)이 희생그릇을 정리하여 차례로 받들어 전달함으로써 계속해서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영녕전(永寧殿)의 제향관이 있는 곳에도 아울러 효유하여 당부하고 이 하교를 태묘등록(太廟謄錄)에 기록하여 매년 추향 대제에 길이 정식으로 삼아 준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전일 빈대(賓對)에서 말 끝에 채홍리(蔡弘履)가 귀로 듣고 그대로 전해준 말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단지 임금을 부모처럼 믿고 숨김없이 말하다가 얼떨결에 생각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저 서호수(徐浩修)가 신을 찾아와 보거나 보지 않는 것이 어찌 신을 털끝만큼이라도 동요시키고 신에게 손익이 되는 것이 있기에 일부러 이런 말로 꼭 오게 하여 남으로 하여금 그 처신에서 꼼짝을 못하게 하려고 그런 것이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그 일은 이미 옛날 일이고 그 말은 모두 긴요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만 번 말한 것이 모두 합당하더라도 한 번의 침묵만 못하다.’ 하였는데, 하물며 마땅히 해야 할 말이 아닌 것을 연석에서 한 경우이겠습니까. 물러나 곰곰이 따져보고서야 비로소 부끄럽고 한탄스러운 일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번에 서호수가 올린 상소에서는 무턱대고 홍리가 그 당시 전해준 말을 모두 근거없는 것으로 돌리려 하였는데, 그 말이 어찌 그렇게도 씩씩한지 개탄스럽습니다. 더구나 그 말하는 취지가 알쏭달쏭하여 외면으로 보면 홍리를 깔아뭉개는 것 같지만 그 촛점은 모두 은근히 신을 가리킨 것이니, 그가 말한 ‘위협하고 억압하는 칼자루’는 신이 이것을 칼자루로 삼아서 그를 억지로 부르려고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실로 한바탕 웃음거리도 안 됩니다. 또 그가 말한 ‘마음에 준비했다가 모략을 짰다.’는 것은, 신이 이 말을 이리저리 생각해서 미리 꾸며두었다가 그가 다시 이조 판서에 제수되는 날을 기다려 기회를 타서 말을 했다는 것입니까. ‘이것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느냐.’는 등의 문구에 관해서는 성인의 말씀을 잘못 인용했다고 하여 어찌 굳이 그를 크게 책망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은 실로 일소에 붙이고 말겠지만, 한탄스러운 것은 그가 대신 가문의 자제로 대신에게 예의를 차릴 줄 모르니, 맑은 조정의 예절있는 기풍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신은 삼가 사대부를 위해서 걱정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인사 행정을 담당한 전관(銓官)이 인사 행정의 시기에 임하여 대신에게 그에 관한 문제를 묻지 않으면 대신은 그 죄를 가지고 죄주기를 요청하는 것이 사실 옳다. 그러나 그 사람이 경을 찾아본다 하더라도 경에게 영광될 것이 없고 경도 어찌 꼭 그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있겠는가. 그러니 그의 죽은 선고(先故)의 말을 제기하여 그 자제가 전임(銓任)에서 체직된 지 이미 오랜 뒤에 꼭 경을 만나는 것이 의리임을 증명하는 것은, 맑은 조정의 충후함을 숭상하는 정치에 어찌 손상됨이 없겠는가. 하물며 또 자신을 팔면서 증명하는 자는 그 사람됨이 반드시 공정하고 신의 있는 자만은 아니니, 경이 ‘부끄럽고 한스럽다.’고 말한 것을 나는 지나치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였다.

 

이의행(李義行)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천행(朴天行)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오재휘(吳載徽)를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7월 7일 경진

사직(司直) 서호수가 상소하기를,
"이 대신139)  이 처음 재상에 임명되었을 때 오대익(吳大益)을 신의 중부(仲父)에게 보내어 그의 뜻을 전하기를 ‘국사를 담당한 대신이 나와 만나려 하지 않는다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하였으니, 그가 이처럼 절실하게 사귀기를 바란 것이 어찌 신의 집안이 두렵거나 도움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겠습니까. 단지 신의 중부가 가장 먼저 그를 성토하는 의논을 냈기 때문에 그 장애물을 근원에서부터 무너뜨리기 시작하려고 한 것일 따름입니다. 그러다가 신의 중부가 엄한 말로 배척해 끊은 뒤에는 또 신의 형제에게 으르렁거리지 않을 수 없었으나, 눈에 가리운 것이 있자 헛꽃이 어지럽게 일어나 잡아두려는 계책을 서둘러 남의 이미 돌아가신 부모를 끌어대고, 말은 더욱 교묘하여 남의 형제간의 일에까지 미쳐, 터무니없는 말을 경연에서 아뢰기까지 함으로써 기꺼이 스스로 윤기를 해치고 풍속을 망치는 죄를 범하고서도 잘못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대신이 또한 무엇이 괴로워 이런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앞서 이른바 털끝만큼도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진심에서 나온 말이겠습니까. 대체로 백세(百世)의 공론은 한 사람의 사적인 생각으로 흐리게 할 수 없는 것이며, 조정 사대부의 처신을 한 사람의 권세로 위협하고 제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대신이 스스로를 변명하기에 급급하여 반드시 온 조정의 사대부로 하여금 자기에게 따라붙어 머리를 굽히고 숨을 죽여 감히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실로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또 부형이 사귀지 않던 자로서 그 자제에게 위세로 협박하는 것도 부족하여 추한 말로 욕을 보이니, 너무나 심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처음 상소 때부터 말이 정밀하지 못하니, 대신의 밉게 보이는 눈에 능히 질타를 면할 수 있겠느냐?"
하고, 그 상소를 돌려주고 서용하지 않는 벌을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7월 9일 임오

영돈녕 부사 홍낙성(洪樂性)이 상소하여 고령을 이유로 쉬게 해주기를 요청하였으나, 후한 뜻으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7월 10일 계미

큰비가 왔다.

 

평안도 병마 절도사 이한풍(李漢豊)에게 하유하기를,
"도내에 있는 둔전으로서 장용영(壯勇營)에 속한 것이 만약 조금이라도 민폐가 되거나 민전(民田)을 침탈하는 일이 있다면, 그 어찌 본영을 설치한 이후 애써 당부한 본의이겠는가. 그 사례를 조사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한풍은 일찍이 병방(兵房)을 역임하였는데, 둔전이 대부분 병영 근방 고을에 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나온 것이다.

 

7월 11일 갑신

황승원(黃昇源)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선혜청이 납육(臘肉)을 서울에서 공납하게 한 수효를 아뢰니, 전교하기를,
"호서의 납육을 서울에서 공납하게 한 것은 숙종께서 백성을 위해 폐해를 제거하고자 한 거룩한 덕에서 나온 조치인데, 본도의 월령(月令), 삭선(朔膳), 물선(物膳)과 각도의 인삼, 도라지, 말린 숭어의 값을 차례로 서울에서 공납하게 했던 것이다. 이제 여러 도의 납육을 호서의 규례대로 서울에서 공납하도록 하는 일은 더욱 그만둘 수 없는 당연한 조치라는 것을 알겠다. 이 어찌 선왕의 뜻을 계승하는 한 가지 일이 아니겠는가. 금년부터는 이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별단(別單) 중에 호남조(湖南條)에 있는 보전(保錢)이란 명목은 매우 옳지 않다. 경 등은 비록 호남의 진상값을 추가하는 예에 원래 정해진 보인(保人)이 있는 것으로서 호구마다 거두고 논마다 징발하는 것은 아니고 마땅히 받아들일 것에 속한다고 하여 이와 같이 등록했지만, 그것이 선혜청에서 상정(詳定)한 곡물을 계산하여 감해주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또 네 도의 예비 명목을 상정가로 정한 데서 나온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보전은 결코 수입의 항목에 넣을 수 없다. 이 조항을 서둘러 바로잡아서 별단을 다시 수정하여 들이도록 하고, 원래의 보전도 도백으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7월 13일 병술

큰비가 왔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영남 지방의 선가미(船價米)140)  는 바로 정상적인 공납으로서 그 제도를 처음 시행할 때 잡비가 여러모로 들 것을 염려하여 그것을 떼내어 돈으로 바꾸도록 했었는데, 쌀 3천 5백 섬을 공납하는 것으로 새로 규정을 정해 상납하게 한 뒤에 호조에서 반드시 본값을 지급함으로써 마치 서로 매매를 하는 것처럼 되어 도리어 구차해졌습니다. 그러니 값을 지불하는 조항을 영구히 혁파하고 무조건 정해진 숫자대로 상납하게 하는 것이 사체에 정당합니다. 도신이 보고한 글로 보면, 3천 5백 섬을 사는 값이 1만여 냥이 되는데 해마다 1만여 냥을 지출만 하고 수입이 없으니, 앞으로의 형편이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운 걱정이 있습니다. 만약 호조로 하여금 1년 간격으로 돈을 지불하게 한다면 한편으로는 지방의 고을이 국세의 중요함을 알게 되고 한편으로는 조창(漕倉)이 어려움을 겪는 걱정도 면하게 되어 양쪽이 다 편리한 정사가 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7월 14일 정해

각신(閣臣)·사관(史官)·비변사의 문관 낭관 등을 오부(五部)·사교(四郊)·팔강(八江)에 나누어 보내 집이 무너진 백성들을 위로해주고 진휼청에서 구제해주도록 명하였다.

 

전 병조 참지 맹지대(孟至大)를 호남의 해변에 유배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입직하는 병조의 당상관이 감히 멋대로 먼저 나가버릴 생각을 하였으니, 이는 군율에 관계되는 것이다. 만약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적용하기로 한다면 차율(次律)은 바로 멀리 귀양보내는 것인데, 그가 어찌 감히 모면할 수 있겠느냐. 다만 지난번에 용서하는 교지를 내렸다가 지금 다시 유배시키는 것은 일이 혹 질서가 없는 것 같기에 우선 고정 숙직을 서게 하여 교체를 못하게 한 것이다. 대체로 더운 여름날 고정 숙직을 서는 것을 누가 기꺼이 응하겠는가마는, 그러나 지대처럼 기탄없이 멋대로 그냥 나간 자에 대해서 그대로 용서해준다면 국법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그가 만약 조금이라도 나라의 기강을 엄하게 여기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이처럼 방자하고 무모한 행동을 하겠는가. 승정원도 만일 매사를 잘 살피고 신칙했다면, 또 어찌 그 행동거지를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이는 비록 한 가지 일이지만 훗날의 폐해는 장차 이루 말하기 어려울 것이니, 결코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다."
하고, 이런 명령이 있었다.

 

7월 15일 무자

공선 정례(貢膳定例)를 개정하였다. 상이 처음 등극하던 해에 공선 정례를 인쇄하여 반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각도의 납육(臘肉)을 서울에서 공납하도록 규정으로 정하였으므로 그 기록을 수정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병모(李秉模)를 당상관으로, 심능익(沈能翼)을 낭청으로 삼아 작업을 진행하여 책이 이루어지자 반포하였다.

 

7월 16일 기축

궁녀 이씨(李氏)에게 수칙(守則)이란 작위와 정렬(貞烈)이란 칭호를 내리고 그가 살고 있는 곳에 ‘수칙이씨지가(守則李氏之家)’라는 편액을 달게 하였다. 이 당시 도성 서문(西門) 밖에 흐트러진 머리에 더러운 얼굴로 문밖을 나가지 않고 한 노파에게 의지해 사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 노파는 옛날 궁인이었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면서도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경연관 가운데 상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 상이 궁인을 보내 그를 찾아보게 하였는데, 노파가 그 찾아온 뜻을 짐작하고 스스로 진술하기를,
"저 방안에 있는 여인은 내 이질(姨姪)이다. 나는 일찍 과부가 되어 궁중에 들어가 일을 했는데, 조카도 그때 나이 10여 세에 역시 나를 따라 궁궐에 들어가 경진년141)                  에 경모궁(景慕宮)142)                  의 침소를 모셨고 그뒤 얼마 안 되어 나와 조카는 궁 밖으로 나와서 살게 되었다. 소천어동(小川魚洞)에서 이리로 이사온 것도 십여 년이 되었다. 조카는 임오년143)                  부터 죽기로 작정하고 스스로 폐인이 되어 세수도 하지 않고 빗질도 하지 않으면서 항상 이불로 몸을 감싸고 방안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람의 얼굴도 보지 않고 해도 보지 않으며 심지어 대소변을 보기 위해서 문밖에 나간 일도 없고, 개 10여 마리를 길러 도둑을 막았다. 이웃집에 불이나 불길이 집으로 번졌으나 그래도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므로 이웃사람들이 감동하고 기특하게 여겨 다투어 불을 꺼서 죽지 않았다. 지금 나이 45세인데 머리가 이미 백발이 다 되었다. 조카와 내가 내력을 밝히지 않아서 사람들은 나를 조카의 어미로 의심할 뿐 감히 말하지 못하니, 이는 내 죄이다."
하였다. 궁인이 그 얼굴을 보자고 청하자 노파가 말하기를,
"명을 받고 다시 오면 보여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보이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였다. 궁인이 돌아와 그 실상을 아뢰니, 상이 대신·예조 당상·한성부 윤 등을 불러 만나보고 묻기를,
"나는 그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싶은데 예법상 과연 어떻겠는가?"
하니,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이는 뛰어난 행실입니다. 그 집과 마을에 정문을 세우는 것을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하고, 예조 참판        이홍재(李洪載)·참의 서매수(徐邁修), 한성부 좌윤        홍명호(洪明浩)·우윤 이정운(李鼎運) 등은 채제공의 말처럼 특별히 정문을 세우자고 요청하였다. 판윤 홍억(洪檍)은 아뢰기를,
"이 일은 민간의 일과 달라서 정문을 세우는 것은 가볍게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문을 세우는 것은 충신과 열녀에게만 해당되니 이 두 경우에 주는 칭호를 무턱대고 주기는 마땅치 않다. 단지 아무개의 집이라 써서 그 마을에 들어가고 그 문전을 지나는 사람들이 아무개가 사는 곳임을 알게 하면 이것으로 될 것이다."
하고, 전교하기를,
"지난번 오부(五部)에서 혼인을 하도록 권하는 일로 인해, 성문 밖에 과년한 처녀가 있는데 그 일을 감히 제기하지 못하고 그 말을 차마 전하지 못할 처지이며 그의 나이는 30세로서 이웃마을에 그 소문이 퍼지고 관부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을 비로소 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은 뒤로 거의 침식을 잊었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 생각에 ‘어떤 일을 만나던 정당하게만 처리하면 될 뿐이니 사소한 절차상의 문제야 어찌 모두 돌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난처한 점이야 어찌 한두 가지 뿐이겠는가.’ 하였다. 아무튼 이 말을 들은 뒤로 심려가 많이 되어 한밤중에도 여러 번 일어나곤 하였다. 그러다가 엊그제 늙은 궁인을 보내고서야 비로소 그 자세한 내용을 알았는데, 그 뛰어난 사적은 비록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올리더라도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이다. 정문을 세워 표창함으로써 좋은 풍기를 심고 싶은데, 여관(女官)의 좋은 칭호에 수칙(守則)이란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칭호를 내려야겠다."
하고, 드디어 월암(月巖)의 오두막집 앞에다 문을 만들고 ‘수칙모씨지가(守則某氏之家)’라는 편액을 달도록 명하였다. 이어 전관(銓官)에게 명하여 정청(政廳)을 열어 작위를 봉하되 단망으로 추천하고 그 품계는 종2품에 해당하도록 하였다. 또 호조의 당상관과 한성부 윤에게 명하여 몸소 편액을 다는 일을 감독하게 하고, 쌀과 비단과 돈을 넉넉히 주어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얼마 후에 또 소천어동(小川魚洞)에 집을 사주고 문액(門額)을 옮겨 세우게 하였다.

 

민가를 빼앗아 들어가는 것을 금하는 것에 있어 초가의 경우는 따지지 말고 기와집의 경우도 역시 열 칸까지는 금하지 말도록 하였다. 대신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한성부 판윤 홍억(洪檍)이 아뢰기를,
"매 3년마다 호적을 개수하는데, 지방의 고을에서는 반드시 호구수를 늘이려고 하여 그 폐단이 호구수를 누락시키는 것보다 더 심합니다. 혹은 한 집안에서 호구를 나누게 하고 사랑채를 각기 따로 호적을 만들게 하는 등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금지시키고 한결같이 현재 있는 민총(民摠)144)  에 의해 통(統)을 만들고 호적을 작성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윤호(尹㬦)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17일 경인

내의원의 세 제조를 불러 만나보았다.

 

상이 농사의 작황에 대해 언급하고 하교하기를,
"양남(兩南)은 나라 재정의 근본인데 영남의 절반이 하납(下納)145)  으로 돌아갔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은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부국 강병을 패도(覇道)라고 말한다. 만약 제 선왕(齊宣王)처럼 영토를 넓혀 진(秦)·초(楚)의 조회를 받으려 한다면 이는 물론 왕자(王者)가 마땅히 힘쓸 바가 아니나, 영토 안에서 재물을 여유있게 하고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며 병사를 훈련시켜 침략자를 막는 것에 있어서야 어찌 왕도니 패도니 하는 것을 따질 것이 있겠는가.
고 상신 유성룡(柳成龍)이 병사 1만 명을 훈련시켜 5천 명은 상번(上番)하여 서울에 있게 하고 5천 명은 비번으로 둔전에 보내 둔전에서 나는 곡식으로 입번(入番)한 병사들을 뒷바라지하게 하되, 태평한 때는 돌려가면서 쉬게 하고 유사시에는 징발해 쓰도록 요청하였으니, 이것은 옛사람들이 병사를 농민 속에 붙여두는 좋은 제도이다. 이렇게 하면 자보(資保)146)  를 줄일 수 있고 방료(放料)147)  를 없앨 수 있으니, 국가 재정에서 쓸모없는 비용을 줄이는 점으로 볼 때 어찌 보탬이 작을 것인가. 그런데 그 당시 당쟁이 거세게 일어나 그 의견이 저지되어 시행되지 않았고, 금위영을 처음 설치하자 또 쓸데없는 경비만 더 들게 되었으니, 후세 사람들이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대부분 이와 같다.
말을 기르는 정사로 말하더라도 도성의 지척에는 동교(東郊)의 좋은 목장이 있다. 고른 들판이 넓게 뻗어 물과 풀이 풍족하며 석표(石標) 안만 하더라도 수만 마리의 큰 말들을 기를 수 있는데도 까닭없이 비워두고는 해마다 각 고을에 나누어 맡겨 기르게 함으로써 고을들만 힘들게 하고 있다. 내가 옛 원(園)을 참배할 때마다 산을 돌아보느라 말을 타고 장안(長安)148)  을 지나면서 개연히 바로잡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하고, 또 좌의정 채제공에게 하교하기를,
"이번 도목 정사에서 이귀성(李龜星)이 첫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예전에 전 도신(道臣) 김광묵(金光默)에게 들으니, 귀성은 조덕린(趙德隣)의 일로 한쪽 편의 의견에 붙어 도천(道薦)에 들기까지 하였다 하므로 나는 매우 옳지 않게 여겼다. 경은 한번 생각해 보라. 내가 신사·임오년간에 의리를 굳게 지킨 자들에 대한 것이 어찌 오늘의 여러 신하들만 못하겠는가. 덕린의 죄명을 삭제해주는 것은 바로 선대왕의 처분하신 뜻을 계승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어리석고 성급하여 큰 관계가 있는 자의 죄명을 지금 갑자기 없애주는 것처럼 여기니, 이것이 어찌 말이 되는가. 하물며 귀성은 선정(先正)의 후손으로서 이와 같은 말들이 있으니, 반드시 내가 보고 들은 것이 잘못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자를 어찌 벼슬에 제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제주 목사 이홍운(李鴻運)을 삭직하였다. 본고을은 옛날 역적의 자손으로 노비가 된 자들이 많은데, 이들이 서로 간통하여 낳은 자식들이 있었다. 홍운이 방비가 엄격하지 않다 하여 치계로 알리고 또 그들이 낳은 자녀들을 따로 처리하는 방도를 강구할 것을 요청하니, 전교하기를,
"방비를 엄하게 한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스스로 법을 무시하는 결과를 빚었다. 남종이 여종과 간음하고 여종이 남종과 간통하는 것을 일반 백성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 또한 기자(箕子)가 만든 폭력을 금하고 혼란을 막는 좋은 제도와 맞는 것이다. 지금 어찌 백 년이 가깝거나 수십 년이 지난 오래 전의 죄인으로서 여종과 간통하고 남종과 간통한 무리에 대해 조사해내어 형문하자고 말하는 것이며, 또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별도로 처분하는 문제를 유사에게 품의 조처하게 하라고 요청하는 것인가. 너무도 성실치 못한 짓이다."
하고, 그 장계를 기각하라고 명하였다.

 

이복영(李復永)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7월 18일 신묘

태상시(太常寺) 신실(神室)의 헌관(獻官)은 본시의 제거(提擧)나 예조의 참판 가운데서 뽑아 임명하고 대축(大祝)은 본시의 정(正)을 뽑아 임명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태상시의 신실을 개수하는 일이 있었는데, 옛제도에 개수를 고유(告由)할 때는 봉상첨정이 헌관이 되었다. 그런데 상이 그 직책이 낮다는 이유로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또 개수를 할 때는 도제조나 제조 중 한 명이 호조의 당상관 한 사람과 함께 가서 감독하도록 하는 것까지 모두 정식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7월 19일 임진

비가 왔다.

 

예조 참판 홍성연(洪聖淵)을 삭직하고, 관상감 제조 민종현(閔鍾顯)과 전 예조 참판 정범조(丁範祖)를 파직하였다. 이때 태상시의 신실에 비가 새어 수리를 하는데, 종현은 날을 잡지 않았고 범조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개수하기를 청하였으며, 성연은 범조를 대신해 헌관이 되어 임금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먼저 고유제(告由祭)를 지냈기 때문에 이런 명이 나온 것이다.

 

도성 사대문에서 영제(禜祭)를 지냈다.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본국(本局)의 초관(哨官)들이 마병(馬兵)들에게 말을 빌리기 때문에 조사해내도록 했더니, 전원이 연명으로 체직을 요구해왔습니다. 모두 축출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나라에 소중한 것은 오직 재상과 장수이니, 원보(元輔)와 원융(元戎)이란 명칭을 보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장수는 기율(紀律)의 권한이 더 주어져 있어 허리에는 삼군사명(三軍司命)이란 수기(手旗)를 꽂고 있는데, 삼군사명이란 것은 군사들의 생살과 거취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니, 그 임무가 과연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초기(草記)을 보면 경의 일처리는 너무 나약하고 부드럽다. 경이 원망과 욕을 피하는 것은 경 자신에게 있어서는 실로 편하고 좋겠지만, 원융의 임무는 경 일개인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닌데, 이처럼 크게 기율과 관계되는 일에 그들이 범한 잘못이 큰데도 불구하고 죄를 주자고 요청한 것이 내쫓자는 것에 그쳤으니, 실로 경을 위해 너무도 한심스럽다.
대장과 초관의 관계는 군병과 장수와의 관계와 다르다고 말할 법하지만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군중(軍中)에서 등급의 제도는 대장과 막료 관계이건 장수와 군졸 관계이건 그 사이에 털끝만한 차이도 없는 것이다. 죄가 없는 자는 어루만지고 아껴주어 자기 집안사람처럼 정을 쏟아야 할 일이지만 죄가 있은 뒤에 처단하는 것은 장교건 군병이건 막론하고 큰 강령인 기율에 관계되는 것이 있다면 곤장을 쳐도 좋고 참수를 해도 좋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는 대로 내맡겨두어 장교들에 관한 모든 일을 대장이 마치 동료의 일처럼 보아 감히 건드리지 못하니, 도감 전체를 어찌 다만 기율이 없다고만 말하고 말겠는가. 두려운 것은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얼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이 초기를 보고서 반나절 동안 우울했던 이유이다.
경은 지난날 저 해서(海西)와 북관(北關)에서 일어난 일과 근년에 금천(衿川)의 아전과 강릉(江陵) 유생들의 행위를 아는가? 설령 경이 조사를 실시한 일이 법을 벗어난 것이라 해도 감히 그처럼 놀랍고 패악스러운 짓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명색이 초관이고 장수라 하면서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 감히 공갈 위협하는 계책을 내서 온 관청이 떼를 지어 연명으로 작당을 하여 이처럼 전에 듣지도 못하고 있지도 않았던 행동을 하였으니, 이런 버릇을 이대로 놓아둔다면 장차 파급되는 폐해가 어떤 지경에 이르겠는가. 타오르는 불을 끄지 않으면 끝내는 온 들판을 태우는 것이고 불어나는 물을 막지 않으면 끝내는 산도 삼켜버리는 것이다. 경은 어찌 이것을 생각하여 미연에 방지하지 않았으며 이미 상황이 벌어진 뒤에도 또 어째서 이처럼 범범하게 보아넘기는 것인가. 행수 초관(行首哨官)과 담당 초관 등은 병영에 감금해두었다가 처서(處暑)가 지난 뒤에 삼군(三軍)을 모래밭에 많이 모아놓고 훈련을 하는 바로 그날로 곤장 30대를 엄하게 쳐서 교동부(喬桐府)의 능로군(能櫓軍)으로 충군할 것이며, 그 나머지 연명한 초관 등도 모두 도태시키고 병영 근처에 붙잡아놓았다가 역시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날 엄하게 곤장을 치도록 하라.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이미 해이해진 기율을 바로잡고 한편으로는 장래의 폐단을 막도록 하라."
하였다.

 

영암 군수(靈巖郡守) 심갱(沈鏗)을 파직하였다. 심갱이 하직 인사를 한 뒤에 액정서의 하인 중에 그 집에 가서 돈을 받은 자가 있었으므로 정원이 논박하여 아뢰니, 전교하기를,
"대궐 안팎을 엄하게 하는 금령은 곧 하나의 금석처럼 변할 수 없는 법이고, 더구나 연래에 이와 같은 일로 엄중히 신칙하고 금지시킨 것이 과연 어떠했던가. 그들이 어찌 감히 법을 무시하고 붉은 옷차림으로 관원의 집에 가서 돈푼을 요구한단 말인가. 유사에게 넘겨 엄하게 징계해 다스리도록 하라. 하지만 액정서 하인이야 무슨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수치스러운 것은 조정의 관리이다. 이미 그 얘기를 들을 뒤에는 그대로 두기 어렵다."
하고,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진휼청에서 오부(五部)·사교(四郊)·팔강(八江)의 무너진 집들을 구휼하는 일에 대한 회계를 올렸는데, 전 장령 어석령(魚錫齡)의 집도 그 안에 끼어 있었다. 전교하기를,
"조정 관원의 신분으로서 살고 있는 집이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니, 해당 당상관으로 하여금 입고 먹을 물자를 넉넉히 주어 비바람을 가리게 하라."
하였다.

 

박우원(朴祐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7월 20일 계사

비가 왔다.

 

구익(具㢞)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권이강(權以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오재순(吳載純)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가 곧 병조 판서로 옮기고, 김문순(金文淳)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김이소(金履素)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가 곧 체직시키고 홍억(洪檍)으로 대신하였으며, 이민보(李敏輔)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양호(兩湖)와 경기·관동·영남의 도신들에게 효유하기를,
"한 자가 넘는 비가 열흘이 넘어 한 달이 다 되도록 내렸으니, 강가나 산골짜기 부근에서 침수되거나 씻겨나간 전답을 철저히 조사하여 단 한 사람의 토지에 대해서도 억울하게 조세를 징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1일 갑오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를 거행하였으니,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일(忌日)이기 때문이었다.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의 어제 비명(御製碑銘)을 달천사(㺚川祠)에 새겨 세우도록 명하였다.

 

중비(中批)로 이익운(李益運)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좌상(左相)149)  이 지난날 곤궁한 처지에 몰렸을 때 뚜렷하게 남다른 행적을 보여준 사람은 오직 이 사람밖에 없었다."
하고, 이런 명이 있었다.

 

서유성(徐有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헌부의 서리 중에 강가의 백성에게 뇌물을 요구한 자가 있었다. 전교하기를,
"법사(法司)에서 나가 불법을 금하는 것은 백성의 풍속을 바로잡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인데 도리어 백성을 괴롭히고 해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통탄스럽고 가증스러움이 보통의 범죄보다 백 배나 더하다."
하고, 장령 현중조(玄重祚)를 유배시키고 금부의 하인으로서 민간을 침해하는 자는 재물을 훔친 도둑을 처벌하는 율로 단죄하도록 명하였다.

 

7월 22일 을미

날이 개었다.

 

7월 23일 병신

예조가 아뢰기를,
"영제(禜祭)를 지낸 뒤에 영검이 어김없이 나타났으니, 보사제(報謝祭)를 날을 잡지 말고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오래 끌던 비가 이제 금방 개었으므로 선뜻 제사를 거행할 수 없다 하여 잠시 날이 개는 것을 보고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광성군(廣成君) 안정복(安鼎福)에게 부의를 추가할 것을 명하였다. 정복은 세자 시강원의 옛 관원으로서 본디 박식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상이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우 애석해 하며 이런 명령이 있었다. 또 광주(廣州)의 지방관에게 동지(同知) 이관(李灌)의 집에 문안하도록 명하였는데, 이관 또한 세자 시강원의 옛 관원이었다.

 

7월 24일 정유

특명으로 이조 참의 이익운(李益運)을 안악 군수(安岳郡守)로 보임하였다. 익운이 여러 차례 소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경기 고을의 올해 공해(貢蟹)를 중지시키고 이어 수원의 공해는 영구히 면제시킬 것을 명했는데, 장마 때문이었다.

 

구윤옥(具允鈺)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7월 26일 기해

홍검(洪檢)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유의(柳誼)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병모(李秉模)를 예문관 제학으로, 이갑(李𡊠)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7월 27일 경자

남문(南門)에서 기청 보사제(祈晴報謝祭)를 거행하였다.

 

종묘의 신위를 옮겼다가 다시 봉안하는 제사에 대축(大祝)과 궁위령(宮闈令)을 다섯 사람으로 뽑아보내는 것을 규정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호조 판서 조정진(趙鼎鎭)은 월봉(越俸)150)   10등, 호조의 낭관 유준주(兪駿柱)는 금고(禁錮), 감역(監役) 박경수(朴絅壽)는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태묘를 수리할 때 14실에 모두 보계(補階)를 설치하면서 애초에 품의하지 않고 한 것은 제멋대로 하는 행위에 큰 관계가 있다고 여겨 이런 명이 있었다.

 

7월 28일 신축

예조의 여러 당상관을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엊그제 종묘를 개수하는 일로 고유제(告由祭)를 지낼 때 금루관(禁漏官)이 와서 대기하지 않아 시각을 아뢰는 것을 대행하였다 하니, 나는 지금 송구스럽게 여기고 있다. 유사를 책망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마는 듣건대 예조가 금루관에게 알리는 것을 빠뜨렸다고 하니, 결코 그대로 두고 문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조의 여러 당상관을 체직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근래 명과학(命課學)이 모양새를 이루지 못해 전혀 향방을 모르는 자를 구차스럽게 충원하고 있으니, 이것이 말이나 되는가. 고허 왕상(孤虛旺相)151)  의 방법이야 방서(方書)가 매우 많고 그 영역도 넓으므로 진실로 이들에게 기대할 수는 없지만, 생기(生氣)·복덕(福德)과 날씨의 흐리고 개이는 현상은 풍우부(風雨賦)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데 이번 신실(神室)의 개수작업을 하는 날을 잡은 것으로 말하면 잘 살피고 신중히 하지 않아서 이처럼 일을 그르치게 되었다. 관상감에는 제거 한 사람만이 천문학에 관해 약간 알고 있을 뿐이다. 녹을 받는 관원 가운데 술법이 정하고 밝은 자는 그 공로를 살펴서 교수(敎授)로 승진시키고, 학생 가운데 재주가 있어서 가르칠 만한 자는 잘 공부하도록 권장해 성취시키도록 할 것이며, 비록 공부를 권장해도 끝내 성취를 못하는 자는 모두 도태시키라. 공부를 권장해 성취시키는 방법은 몇 해를 기한으로 정하되 바로잡아야 할 제반 사항을 세칙으로 만들어 후일 경연에서 아뢰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이병모(李秉模)를 예조 판서로, 구상(具庠)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남의 민가를 빼앗아 들어가는 것에 대한 법을 거듭 밝혔다. 한성부가 아뢰기를,
"남의 집을 빼앗아 들어가는 일은 아직 범한 자가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난번 판윤의 요청에 대한 처분과 좌상이 거론한 문제를 그대로 시행하게 한 것은 이 역시 법을 제정하신 선대왕의 성대한 뜻을 우러러 따른 것이다. 대체로 몇푼어치 안 되는 가난한 마을의 민가는 본디 국정 속에 포함되지 않으며 좌상이 거론한 문제도 역시 민간의 가난한 집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것을 빙자하여 열칸 이하의 집을 항간에서 사서 아침에 열칸을 늘이고 저녁에 또 열칸을 늘이는 식으로 점점 잠식하기를 마치 을미년 겨울에 처분을 내린 태연(泰淵)의 집처럼 한다면, 이는 가난한 집을 위해 옛법을 밝히는 뜻이 도리어 선대왕께서 만드신 법을 어기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런 뜻을 경 등과 각부(各部)의 관원이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7월 29일 임인

비가 왔다.

 

호조 판서 조정진(趙鼎鎭)을 삭직하여 내쫓고 호조의 낭관 유준주(兪駿柱)를 유배하였다. 이때 태묘를 개수하는 일이 있었는데 준주가 낭관으로서 일처리에 잘못된 것이 많았으나 정진이 감독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나온 것이다.

 

이병모(李秉模)를 호조 판서로, 정창순(鄭昌順)을 예조 판서로, 김상집(金尙集)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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