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계묘
비가 왔다. 이때 장마가 한 달이 넘게 계속되어 상이 깊이 근심한 나머지 계속 근신을 보내 강 주변의 농사 상황을 자세히 살피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양천(陽川)의 농사가 가장 수해를 많이 입었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상은 그 고을이 작으면서도 재해를 많이 당했다 하여 즉시 입시한 사관을 보내 효유하기를,
"세금을 경감하는 방도를 마땅히 강구할 것이니, 이를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다.
8월 2일 갑진
지평 박재순(朴載淳)이 상소하기를,
"과거 시험에서 격식에 맞는 글이 점차 옛날만 못해 전혀 볼 만한 것이 없는 것은 오로지 빨리 시권을 거두고 빨리 내도록 하는 데서 생긴 폐단입니다. 올가을 대비과(大比科)를 치를 때는 그 폐단을 바로잡는 계책이 오직 시권을 제출하는 기한과 출방(出榜)하는 시기를 늦추는 데 있으니, 과거장에 이 점을 거듭 밝혀 효유하고 전처럼 하지 않게 한다면 실력을 위주로 인재를 뽑는 방도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교자를 타지 못하게 하는 금법(禁法)은 본디 엄중한 것인데, 신의 집이 시골에 있으므로 가서 보면 민간의 백성들도 딸을 시집보내고 며느리를 얻을 때 옥교(屋轎)를 타는 것을 어렵지 않게 여기며 심지어는 관청의 종이나 역졸들도 모두 그렇습니다. 그중에 심한 자는 평상시 나들이할 때에도 옥교를 탑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팔도에 공문을 보내 법을 들어 금지시키고 한 번이라도 위반한 자가 있을 때는 본율(本律)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첫번째 사항에서 시험답안지를 빨리 바치는 등의 폐단은 곧 세도(世道)와 큰 관계가 있으니, 어찌 단지 문체나 선비의 기풍이 옛날과 같지 않을 뿐이겠는가. 그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를 묘당으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도록 허락한다. 두 번째 일도 묘당에게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과장의 폐단 중에서 가장 시급히 금지시켜야 할 것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수종(隨從)으로, 혹은 짐을 지게 하고 혹은 심부름꾼으로 부리는데 갖가지 변괴가 모두 여기서 생겨납니다. 둘째는 과장 밖에 있는 자로, 규정상 과장에 들어갈 수 없는 자를 거느리고 들어가려고 하니 그 계책이 매우 교묘합니다. 셋째는 서책으로, 과거장에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넷째는 문체로, 글제목이 있는 이상 글 체제는 자연 거기에 맞는 순서가 있는 것인데, 요즈음 과거 공부를 하는 자들은 오직 빨리 짓는 것만을 위주로 하여 시(詩)·부(賦)·의(義)·의(疑)를 막론하고 서두와 전개하는 부분에서 반드시 제목 글자를 써서 곧바로 제목의 뜻을 노출시킴으로써 옅은 곳에서부터 깊이 들어가는 맛이 전혀 없으며, 그 중에 전개와 서두를 반대로 구성하는 문체는 더욱 해괴합니다. 문체가 제모양을 이루지 못한 것은 그래도 여사에 속합니다. 성대한 시대의 음성에서 귀중한 것은 완만한 것이니 서두르고 급한 문체는 마땅히 금지해야 할 것입니다. 글을 반드시 빨리 바치려 하는 것도 역시 서두르는 데서 오는 것이니, 생각이 촉박하기 때문에 시는 18구를 채우지 못하고 부도 30구를 채우지 못하며, 의(疑)와 의(義)는 하단에서 4, 5절(節)을 말꼬리를 바꿔가며 발명한 것이 없이 그대로 제출하며, 시관으로 있는 자도 애당초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합격자 속에 포함시킵니다. 심한 경우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무 관계가 없는 글을 과거장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시권 하단에 써넣기도 합니다. 모두가 다 이런 식인데도 이런 일로 쫓겨나는 자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이는 역시 시관이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생긴 결과입니다.
이번의 경우는 경향을 막론하고 합격한 시권 중에 이런 일이 있을 경우 시관을 엄중히 처벌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폐단을 바로잡는 대책은 오직 이른아침에 과장의 문을 여는 일에 있습니다. 한낮에 수종(隨從)을 알아보고 책을 적발하는 것은 이른새벽에 조사하는 것과 비교하면 어렵고 쉬운 차이가 크게 다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향공(鄕貢)152) 의 옛법을 복구하기 전에는 천 가지로 폐단을 말하고 만 가지로 바로잡는다 하더라도 모두 말단적인 것만 다스리는 것이 될 것이지만, 말단적인 일이라 하여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는 목이 메인다 해서 밥먹는 것을 그만두는 것과 같으니,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요즈음 법의 기강이 나날이 해이해지고 있는데, 특히 가장 심한 것은 선비들의 기풍과 과장의 폐단이다. 이것을 올해도 또 놓아둔다면 어찌 나라가 있고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예의(禮義)로 다스리지 못하고 형벌과 법으로 통제하려 하는 것은 어찌 실로 왕정(王政)의 수치가 아니겠는가마는, 《중용(中庸)》 경문(經文)의 첫머리에 ‘도를 닦는 것을 교화라 한다.’ 하였고 주자가 장구(章句)에서 해석하기를 ‘교화란 형벌과 정사이다.’ 하였다. 대체로 교화에 복종하지 않는 무리에게 마지못해 형벌을 쓰는 것은 옛날 성군의 정치에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하물며 오늘날 같은 선비들의 기풍과 과장의 폐단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중외에 특별히 신칙하되 이 관대한 명을 알고서 각기 어기는 자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치계하여 도내에 수해를 당한 상황을 아뢰었는데, 떠내려가고 무너진 가구가 7백여 호이고 익사한 사람은 30여 인이었다. 상이 수해를 당한 각 고을의 신구 환곡과 신포(身布)에 대해 중호(中戶) 이상은 기한을 물려주고 소호(小戶) 이하는 탕감해주며, 익사한 사람의 환곡과 신포는 모두 징수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8월 3일 을사
개성부 유수 구상(具庠)을 내직인 이조 참판으로 옮기려 하자, 좌의정 채제공이 송도(松都)가 요즈음 매우 잔폐했는데 구상이 그것을 바로잡은 일이 많았으므로 그대로 맡겨두고 성과를 거두게 하자고 하여 그대로 따랐다.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가 곧 체직하고 심환지(沈煥之)로 대신하였으며, 이조원(李祖源)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요즈음 날씨가 관심사라 경기 연안의 여러 고을에 들판 사정을 알아보는 관원을 나누어 보냈는데, 그 결과 대체적으로 생각했던 바와 거의 크게 상반되지 않았다. 조정에서 한가한 틈이 없는 것이 이런 상황이고 보면 직접 그 지역을 지키는 수령으로서는 마땅히 수륙(水陸)으로 다니면서 직접 논밭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두 수령을 제외하고는 부지런히 힘쓰는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자기의 집을 관아로 삼는 자가 아니면 모두 동헌(東軒)에 번듯이 누워만 있는 자들이다. 이런 수령은 먼저 특별히 곤장을 치는 벌을 시행하여 저자에서 매맞는 수치를 맛보게 하고 싶지만 그들이 오가는 과정에 관직을 비게 되는 병폐만 끼칠 것 같아서, 요즘 또 사관을 보내 다시 그 근면하고 태만함을 살피게 하였다. 서울과 가까이에 있는 경기 지방의 수령들조차 이처럼 편한 것만 취하는데 하물며 먼 지방 고을 이겠는가.
또 하물며 올해의 농사형편은 한 도내에서도 연해와 들판이 다르고 한 읍 안에서도 면과 이(里)가 서로 다르며, 같은 면 같은 이 안에서도 수전(水田)과 한전(旱田), 이쪽 경계와 저쪽 경계에 따라 각각 판이하게 다르니, 표재(俵災)를 수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 그저 자신만을 살찌우고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지 않는 요즘 수령들로서 어찌 마음을 다해 두루 살피겠는가. 우선 묘당으로 하여금 경기·관동·해서·삼남(三南) 등 도백들에게 엄히 신칙하여 벌판을 살피는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아 재해를 당한 논과 결실이 잘된 논을 혼동시킨 도내의 수령을 적발해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이 하교가 내린 뒤에 만약 어사가 안찰하는 행차에서 적발되었는데도 도백이 즉시 장계하지 않았다면 도백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금년에 보내는 어사도 비밀히 왕래하게 함으로써 그 자취에 따라 행동하는 폐단을 막고자 하니, 각기 이 점을 잘 알도록 하라.
근래에 대사령으로 죄를 널리 용서해준 것으로 인해 탐오한 수령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요행으로 피한 자가 여전히 그대로 있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들이 국법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본다면 이 어찌 백성을 기만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오늘 이 하교는 새벽으로써 대사령의 시한을 마치려고 하는 것이다. 대체로 사물의 이치는 극도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서는 법이다. 따뜻하게 감싸주는 정사를 어찌 매번 규례로 삼을 수 있겠는가. 어사에게 발각되는 것보다는 도백이 그때 그때 즉시 논죄하는 것이 나으니, 이 어찌 폐단을 줄이는 데 얼마간의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사방의 방백들에게 엄히 신칙하라."
경상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도내에 수재를 당한 현황을 아뢰니, 호남의 예에 따라 세금을 줄이고 구제해주도록 명하였다.
8월 4일 병오
서울에서 보내는 시관과 시험을 주관할 도사(都事) 등을 불러 만나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문체는 선비들의 기풍에 따르는 것이고, 선비들의 기풍은 곧 국가의 원기이다. 격식에 관한 문제는 오히려 여사에 속하는 것이니, 인재를 뽑을 때 반드시 문체를 우선하도록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너희들은 경연관으로 있다가 나가는 것이니 어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백성의 고통이나 고을 수령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는지의 여부에 대해 보고할 만한 것이 있으면 복명할 때 서계(書啓)로써 조목별로 진술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남에 큰비가 왔다. 영광군(靈光郡)은 수몰된 집이 2백 17호이고 익사한 사람이 11인이었으며, 구례현(求禮縣)은 수몰된 집이 1백 55호이고 고부(古阜)는 수몰된 집이 10호였다. 다른 고을의 예에 따라 세금을 감면하고 구제해주도록 명하였다.
8월 5일 정미
태학(太學) 동무(東廡)의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위판이 순서가 바뀌었는데, 앞서 개수를 하고 다시 봉안할 때 제대로 살피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일을 담당한 유생에게 기한을 정하지 않는 정거(停擧)를 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추도기(秋到記)에 따른 과거를 실시하려 하면서 승지에게 명하여 반궁(泮宮)에 가서 석채도기(釋菜到記)를 가져오게 했는데, 참석하지도 않고 멋대로 이름을 쓴 자가 많았다. 상이 그것을 조사해서 벌을 주도록 명하였다가, 다시 하교하기를,
"사실대로 자수한 자는 벌을 받고 속이고 숨긴 자는 요행히 죄를 면한다면 애석한 것은 성균관의 명칭이다. 학사에게 비단을 내려 우대했던 고사를 특별히 생각하여 정거를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여러 유생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게 하려 한다."
하였다.
8월 6일 무신
호조 판서 이병모(李秉模)를 불러 만나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태묘를 개수할 때 평상을 사용하는 것이 간편하다. 보계(補階)에 비해 크게 간편하니, 앞으로는 이것을 들여다 쓰라."
하였다.
사간 권회(權恢)가 상소하기를,
"생각건대 저 관동 도신 윤사국(尹師國)의 상소는 비록 그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으나, 본 사실로 따져볼 때 그저 어리석어 잘못한 죄를 똑바로 진술하고 처벌을 기다려야 마땅한데, 감히 방자하게 말을 늘어놓아 마치 정당한 것을 변명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또 성묘(聖廟)153) 의 제향은 매우 중대한 예법인데 전 강릉 부사(江陵府使) 이집두(李集斗)는 당초에 신중히 하지 못하고 제물의 가짓수를 멋대로 조정함으로써 유생들의 경악스러운 행동을 초래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당초에 어포(魚脯)의 수효를 조정해 놓은 것은 감영과 고을의 충분한 논의를 거친 것으로서 이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사가 복명한 뒤에는 도신의 죄는 삭직을 모면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성상께서 도백과 유생을 동시에 죄를 주려 하지 않으셨으니, 도신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크게 감격하며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달포가 지나서야 장계를 올려 변명하니, 너무도 뻔뻔스럽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윤사국은 빨리 유배의 처벌을 적용할 것이며 이집두에게 내린 처벌도 너무 가볍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유배하는 법을 적용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다고 봅니다.
재작년 명천(明川)의 수재는 옛날에 없었던 일로서 2천여 명의 사람이 익사했고 5백 결의 전토가 흙모래에 묻혔습니다. 도신의 장계로 인해 대신과 비변사의 당상관이 경연에서 아뢰어, 제사를 지내 그 죽은 넋을 위로하고 세금을 감면하여 산사람들을 구제하게 하였으니,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은혜를 베푸심이 지극하고 극진했습니다. 그런데 공문을 보내기도 전에 탕감해주기로 한 전 고을의 신포(身布)를 남김없이 경주인에게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대신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이미 보내온 신포를 지금 만약 돌려보낸다면 그저 경주인들의 농간거리만 되고 결국 해당 고을 백성들은 실제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니, 호조와 선혜청으로 수납시켜 경술년 몫으로 바꾸어 대신 탕감해주는 것만 못합니다.’ 하여, 해당도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작년의 몫은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는데, 해당 부사 정우붕(鄭宇朋)은 수납을 성화처럼 독촉하여 해부(該府)에 전량을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원망과 비난이 크게 일어나고 떠도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감영에서 어찌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장오죄(贓汚罪)에 대한 법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있는 이상 이런 무리들은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명천 부사 정우붕은 빨리 장오죄에 대한 법을 적용하고, 함경 감사 이문원(李文源)은 파직의 법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윤사국의 일은 책망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이집두의 일은 하급 관원이기 때문에 유독 처벌을 당한 것이나 그 행적과 죄를 비교하면 처벌이 오히려 지나쳤던 것이다. 그러니 네가 모두 유배시키기를 요청한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정우붕과 이문원의 일은 네가 필시 풍문을 지나치게 믿은 것일 것이다. 대신이 올린 문서와 도백의 장계가 있는데 탐오와 기만을 당했다는 명목은 전혀 근거없는 말이라 할 수 있으니, 너는 묘당에 한번 물어보라. 요즈음 입을 다물고 있는 풍조 속에서 능히 입을 열려고 하였으니, 이는 가상하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국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백을 아직도 용서해주고 있는 것은 고을 유생들과 함께 처벌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상소와 공문으로 스스로 변명한 것은 한갓 그 졸렬한 점을 스스로 드러냈다는 것만 알겠다. 어찌 감히 뻔뻔하게 말을 늘어놓아 마치 아무런 잘못이 없어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변명하는 것처럼 한단 말인가."
하고, 소에 대해 답을 하지 않았다.
8월 7일 기유
태묘와 경모궁(景慕宮)에 참배하였다. 상이 몸소 태묘를 개수하는 일을 하는 곳에 아침부터 정오 때까지 나가 있었다. 이때 날씨가 매우 무더워 시신이 조금 쉬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다시 위패를 봉안할 때 제2실의 신여(神輿)가 제1실을 지날 때는 낮추어 메고 지나갈 것이며 나머지 각실의 경우도 그와 같이 하라."
하였다.
8월 8일 경술
부총관 이관(李灌)을 불러 만나보았다. 이관은 나이가 80세였는데 은명(恩命)을 받고 사례를 하러 왔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계방(桂坊)154) 에 있을 때 나에게 도움되는 바가 많았었고 나이든 신하에게 간언을 구하는 것도 역시 고사이니, 어찌 권고하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니, 이관이 대답하기를,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학문을 강구하지 못하는 것이 내 근심이다.’ 하셨고, 《중용(中庸)》에서는 ‘성(誠)이란 하늘의 도리이고 성하려 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다.’ 하였으니, 성이란 실다운 마음으로 실천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하려고 하는 방도는 오로지 정신을 보존하고 아껴 조용하고 전일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잗단 일에 정신을 너무 소모하게 되면 정신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전일하지 못하게 되고 큰일에 부딪혔을 때는 도리어 권태증을 느끼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또 이르기를,
"내가 즉위한 뒤로는 사실 경연에 자주 나가지 못하였다. 혹 조강(朝講)도 하고 혹 주강(晝講)도 하긴 하였으나, 이 역시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선대왕께서 56세 이후로는 경연에 자주 나가시지 않다가 66세에 이르러 다시 경연에 나가시되 비바람과 추위 더위를 가리지 않고 매일 나가셨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차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경도 반드시 짐작할 것이다. 그때의 일기(日記)가 아직도 춘방(春坊)에 있는데, 그 뒤부터는 ‘하루 세 번 강한다.[日三講]’는 말만 들으면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날아가 스스로 안정을 하지 못한다. 내가 사냥개나 말, 음악이나 여색을 즐기지 않으니, 어찌 문자에 뜻이 없겠는가마는 근래에 이르러서는 국사가 복잡하여 자주 나가지 못한다."
하고, 이어 도신에게 명하여 말 두 마리가 끄는 교자를 꾸려 주어 돌려보내 주게 하였다.
8월 9일 신해
비국의 유사 당상 이병모(李秉模)와 한성 판윤 이민보(李敏輔)를 불러 만나보았다. 상이 여러 신하에게 과거 시험의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안을 물으니, 민보는 면대하여 시험치르는 법과 남의 손을 빌어 시권을 쓰는 것을 금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고, 병모는 시권을 시한을 정해서 받아들일 것을 청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신들이 여러 조목의 과거 폐단을 많이 진술하였는데 그것들이 사실 정확한 것이긴 하나 빨리 올리는 것을 만약 그대로 둔다면 그 밖의 여러 폐단들이 모두 여기에서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니 지금 빨리 올리는 것을 금지시키자면 먼저 빨리 짓는 폐습부터 바로잡는 것이 가장 쉽게 시행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체로 문체는 세도(世道)와 관계되는 것으로 잘 다스려진 시대의 음악은 평온하고 완만하며 어지러운 시대의 음악은 조급하고 빠른 것이다. 요즈음 공령(功令)155) 은 평온하고 완만한가, 아니면 조급하고 빠른가? 이전에는 밥을 몇 번 지을 동안에 시권을 먼저 바쳤었는데 이제는 물 한 사발 마실 시간에 바치고 있으니, 어느 겨를에 수정하고 윤색하는 데 힘을 쓸 수 있겠는가. 나라가 있고 기강이 있다면 어찌 혹시라도 그 방자한 버릇을 마냥 방치하고 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번 가을 대비과(大比科)부터는 먼저 바치는 시한을 적절히 헤아려 정해서 여러 선비들로 하여금 이것이 바뀌지 않는 제도임을 분명히 알게 한다면 이른바 쓸 만한 실력있는 인재도 뜻하는 대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빨리 바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을 때와 비교해 볼 때 늦게 거두는 것이 이처럼 좋고 나쁜 차이가 현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비들이 오히려 법령을 믿지 않고 시권을 끼고 과장 주변에 떼 지어 모여 시한이 되기를 기다린다면 명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선비들 스스로가 범하는 것이니, 어찌 합격시키고 떨굴 때 구별이 없을 수 있겠는가. 감시(監試)의 초장과 종장 시한에 관해 대신과 문임(文任)의 신하들은 의견을 아뢰라."
하니, 좌의정 채제공이 의논드리기를,
"과장에서 서로 앞다투어 빨리 바치는 그 풍습이 해괴할 뿐만이 아닙니다. 만약 옛날 남의 나라의 치란을 엿보는 사람에게 논의하게 한다면 시운(時運)이 쇠퇴한 것을 여기에서 단언하지 않으리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성상의 생각에 반드시 그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시는 것은 실로 사물이 극한에 이르면 반드시 되돌아간다는 뜻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지금 또 시권을 받아들이는 시한을 적절히 정하라는 하교를 받들었는데, 신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전의 과장에서도 시한을 정해놓고 모두들 하라고 소리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두 번째 작품과 세 번째 작품까지도 시한 이전에 모두 써놓고 기다리는 자가 수없이 많았으며, 바치는 시간이 되기만 하면 앞에 있는 자가 시권을 바치자마자 뒤에 있는 자들이 가시울타리 위에다 마구 던져넣고, 서리와 하인들이 그 시권을 훔쳐서 감추는 것이 몇 장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과장이 복잡하고 혼란스럽기는 시한을 정하지 않을 때보다 더 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만약 전교로써 시한을 특별히 정한다면 시관이 소리쳐 바치게 하는 것과는 사정이 크게 다르니, 요즘 같은 사류 풍습이라 하더라도 혹 조금은 옛날 습관을 바꾸는 길이 될 것입니다. 글을 지어서 쓰는 시간은 오시(午時)까지로 제한하고 미시가 된 뒤에 바치게 한다면 재주가 민첩한 자는 여유가 있을 것이고 비록 둔한 자라도 생각을 해서 다듬는 겨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법령으로 정해 모든 과거의 격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다만 친림(親臨)하여 방방(放榜)하는 과거는 당연히 이에 따를 수 없습니다.
신은 이 점에 대해 따로 소견이 있습니다. 지금 물 한 사발 마실 동안에 시권을 제출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수(書手)156) 를 데리고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심한 경우는 과장에 들어오기 전에 시험지를 풀로 붙이지 않고 각 장을 따로 가지고 들어와 서수 몇 사람이 나누어 쓰고 다 쓴 뒤에야 풀로 붙여 인두로 눌러서 꼭 붙도록 만들기까지 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이제 만약 남의 손을 빌려 쓴 자는 시권에다 차필(借筆)이라 쓰게 하고 자기가 직접 쓴 사람은 자서(自書)라고 쓰게 한 뒤에 시관이 각 시권을 비교하여 살필 때 남의 손을 빌려 쓴 자는 비록 모두 낙방시키지 않더라도 규정을 엄하게 적용할 것이며, 자기가 직접 쓴 자는 시간이 늦더라도 허물하지 말고 비록 자구(字句)에 약간 문제가 있더라도 조 상국(曹相國)157) 이 하급 관리를 대하듯 너그럽게 덮어둬야 합니다. 그래서 방이 나온 뒤에 직접 쓴 자가 열에 여덟이나 아홉을 차지하게 하고 남의 손을 빌려 쓴 자는 겨우 하나나 둘만 차지하게 한다면 실다운 재주를 가진 자가 누가 남의 손을 빌려서 쓰려고 하겠습니까. 이처럼 직접 쓰게 한 뒤에는 빨리 제출할 길이 전혀 없으니, 꼭 막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막아지는 방안은 이 이상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남의 손을 빌려쓰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을 내각(內閣)에서 일단 반포하면 선비들은 그 당시에는 두렵게 여겨 생각을 바꿀 의향을 가지겠지만 이 일에서도 또 금방 명을 내렸다가 금방 중지하고 만다면 그 뒤로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설득하더라도 결코 믿고 따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법만 만들어 놓았다 하여 시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관이 된 자가 사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비록 남의 손을 빌려 쓴 것이라도 서로 아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두호하려고 할 것이고 직접 쓴 것이라도 그 필체가 혹 낯설면 물리치려 할 것이니, 사류의 풍속을 바로잡고 과장을 엄하게 하는 방안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그 남이 쓴 것인가 직접 쓴 것인가에 대해 찌를 뽑아 시험하는 문제는 합격자를 발표한 뒤에 의논하면 될 것입니다."
하고, 홍문관 제학 오재순(吳載純)은 의논드리기를,
"근래 과거장의 폐단은 시권을 빨리 바치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그 폐단을 바로잡는 도리는 그 시한을 적절히 헤아려 정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극히 둔한 인재라 하더라도 3시각 동안이면 한 편을 쓸 수 있으니, 제목을 내건 뒤 3시각으로 시간을 정해 그 시한 전에는 시권을 제출하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확고한 제도로 삼는다면 유생들이 어찌 감히 법을 범하겠습니까. 이렇게 했는데도 오히려 혹 시권을 끼고 시간을 기다리는 무리가 있으면 이는 유생으로 대접할 수가 없으니, 특별히 논죄하여 처벌해야 합니다. 이렇게 오래 시행하면 아마도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예문관 제학 이병모는 의논드리기를,
"일곱 걸음 안에 문장을 짓고 말에 기대어 격문(檄文)을 초잡는 것은 옛날 일을 낱낱이 헤아려보아도 겨우 하나나 둘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과거 시험생들은 매일 수십 수의 시·부·의(義)·의(疑)를 짓는 것을 능사로 여기는데 자기집에서부터 그와 같이 익혔으므로 과장에 들어와서는 더욱 심합니다. 이러한 기풍을 바꾸지 못하면 폐단을 지적한 수많은 말이나 폐단을 바로잡자는 수많은 조처가 모두 한담설화로 돌아갈 것입니다. 성상의 하교 가운데 빨리 바치는 폐단을 금하자면 먼저 빨리 짓는 버릇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셨으니, 참으로 우러러 탄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다만 그 빨리 짓는 버릇을 바로잡는 방안으로는 또 시한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지금 사류들이 끝내 믿지를 못하는 것은 이번 과거는 비록 이렇게 한다 하더라도 나중에 보이는 과거는 이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약 그것을 규정으로 정하여 영원히 굳게 지킬 법으로 만들고 초장과 종장에 시권을 바치는 시한은 모두 오시로 결정하여 그것을 몇 차례 식년시에 시행할 것 같으면, 반드시 실효를 거두어 성급하고 추솔한 병폐도 저절로 제거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고질이 된 사류의 습관은 결코 한 번의 과거에서 변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과거가 끝난 뒤에 여러 가지 의논에는 반드시 ‘기한을 정한 것 때문에 실다운 인재들은 모두 낙방했다.’고 말할 것이나, 이 점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문제는 오직 그 규정을 오래 유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제목을 내거는 때가 조금 이르거나 늦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니, 미시패(未時牌)를 내거는 것으로 먼저 바치는 시한을 정한다면 혹 구애되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홍문관 제학이 제안한 대로 제목을 내건 뒤에 3시각으로 제한하자는 말이 온당하다. 이로써 정식을 삼도록 예조에 분부하여 과거 절목(科擧節目)에 기록하게 하라."
하고, 이어 한성부에 하교하기를,
"방금 내린 전교의 왼쪽에 먼저 바치는 시한을 기록하여 각 마을마다 알려주도록 하라. 시권에 각기 자필인지 남을 손을 빌어 쓴 것인지를 기록하게 하자는 문제에 있어서는 좌상의 의견이 좋기는 하나 쓸데없는 잡인을 데리고 들어와 그의 손을 빌어 시권을 쓰는 자는 과장에서 본디 법으로 금지한 것으로서 적발되면 자연 처벌을 당하게 마련이니, 꼭 새로운 예를 자꾸 만들 것이 없다."
하였다.
8월 10일 임자
부수찬 이우진(李羽晉)이 상소하기를,
"부안(扶安) 고을의 지형은 사방으로 뻗은 변산(邊山)의 기슭에 둘러쌓였고 삼면은 해변에 바싹 닿아서 온 경내의 백성들이 산에 살지 않으면 포구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는 마을이 잔폐하여 열에 일곱 여덟 집은 비었기 때문에 산전(山田)은 태반이 묵정밭으로 황폐해지고 해세(海稅)는 해마다 줄어드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이는 오로지 백성은 적고 관청은 많아서 백성들이 관청의 침해를 감당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본 고을에는 세 진(鎭)이 있는데 검모진(黔毛鎭)과 격포진(格浦鎭) 두 진은 산밑에 있으면서 모두 송정(松政)을 관장합니다. 검모진의 진장(鎭將)은 전선(戰船)을 관할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약간의 도움을 받아서 폐단을 끼치는 일이 비교적 적지만, 격포진의 경우는 진이란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 애당초 배가 없어서 진장에서부터 교졸(校卒)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는 밑천으로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는 송금(松禁)이라는 명분을 빌려 산간과 해변 백성들을 위협하는 것뿐입니다. 염전과 고깃배에는 자연 일정한 값이 정해져 있고 산골의 나무꾼들도 역시 항상 수탈을 당하고 있습니다. 수탈에 만족할 줄 모르고 갖가지 명목으로 등치고 뺏으니, 이는 실로 부안 백성들의 뼈에 사무치는 폐단입니다.
지형의 사정으로 논하더라도 격포진은 바다 속으로 쑥 들어가 앞에는 칠산(七山) 바다에 닿아 있고 경내가 전부 양호(兩湖)의 경계에 걸쳐 있으므로 행궁(行宮)이 설치되어 있기까지 하고, 또 봉화대의 경치가 뛰어나다고 소문난 곳이니, 해문(海門)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배도 없는 진장(鎭將)과 맨손의 수졸(水卒)들을 장차 유사시에 어디에 쓰겠습니까. 검모진은 격포를 거쳐 항만을 따라 40리를 들어가 물이 없는 곳에 진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곳은 곧 육지로서 바다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해안 방비란 이름으로 전선을 두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신은 이전에 영남의 고을 수령을 지냈기 때문에 송정(松政)의 폐단을 대강 아는데, 관장하는 책임을 맡은 곳이 너무 많은 것이 송정을 좀먹는 가장 큰 하나의 이유입니다. 더구나 한 산의 송정을 두 진의 관할에 두었으니, 이는 간사한 좀벌레들을 키우고 민폐만을 끼칠 뿐입니다. 요즈음 산의 나무가 헐벗게 된 것은 꼭 이 때문만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두 진을 합쳐 하나로 만들되, 격포진의 별장(別將)은 혁파하고 검모진을 바다 어귀에 위치하여 전선을 관할하는 격포진으로 옮겨 요충지를 쉽게 통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녹봉을 받는 교졸(校卒)들에게 산림만 관할하여 보호하고 살피게 하되, 백성을 침탈하는 폐단을 엄히 금하고 수탈하여 거두는 습관을 완전히 고치게 한다면 장졸들은 생계거리가 있게 되어 그 형세가 반드시 이전과 같은 행동을 하는 데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고을 백성들의 근심과 고통을 줄일 수 있고 요충지의 방어가 소홀히 될 걱정도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8월 11일 계축
춘당대(春塘臺)에 나가 도기(到記) 유생에게는 강경과 제술 시험을, 초계 문신에게는 친시(親試)를, 문신에게는 제술 시험을 실시하였다. 도기 유생의 제술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윤기(尹愭)와 강경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한기유(韓耆裕)는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계청하기를,
"함경도의 시험보는 고을은 거리가 매우 머니, 시험을 관장할 도사(都事)는 과거 시험이 있기 40, 50일 전에 뽑아보내는 것을 규정으로 정하소서."
하니, 따랐다.
8월 12일 갑인
진휼청에서 오부(五部)의 무너진 집에 대한 구제 대책을 아뢰었다. 【 오부의 무너진 집 1천 2백 60호에 대해 베 13동 32필, 돈 1천 6냥, 쌀 25석 13말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36면
【분류】구휼(救恤) / 주생활(住生活) / 재정(財政)
8월 13일 을묘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함창현(咸昌縣)의 공주 서원(孔朱書院)의 일을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도신과 고을 수령이 이미 정배(定配)한 자들은 놓아보내고, 이미 속전을 받은 자들을 다시 유배했다 합니다. 이는 천신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 같으니 체통에 관계됩니다."
하니, 상이 경기 감영에 명하여 영남의 유생 가운데 유배길을 떠난 자들을 도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은 월봉(越俸)하고 함창 현감 나열(羅烈)은 하옥하도록 하였다.
중비(中批)로 김희순(金羲淳)을 홍문관 수찬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요즈음 문신들은 경의(經義)를 마치 무용지물로 간주하고 있는데, 지난번 《중용(中庸)》에 관한 책문(策問)과 이번 《대학(大學)》에 관한 책문에 수석을 차지하여 성균관 유생들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게 하였으며 경서의 뜻 외에도 물으면 곧 만족하게 답변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은 고문(顧問)의 책임을 맡은 자리에 두는 것이 합당하다."
하고, 이어 이런 명이 있었다.
조종현(趙宗鉉)을 예조 판서로, 구익(具㢞)을 공조 판서로, 이명식(李命植)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조흘강(照訖講)158) 의 규정을 신칙하고, 이어 시관은 시종신을 뽑아보내는 것을 규정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우리 나라의 제도에 생원시와 진사시의 초시를 보기 며칠 전에 조흘강을 실시하여 《소학(小學)》을 강하는데,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로 하여금 이 시험을 보아 강을 통과한 자에게는 체문(帖文)을 주어 비로소 과거장에 들어가게 하고 승문원의 국자관(國子官)이 시험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법이 오래되자 기강이 해이해져 강을 통과하지 못하고 체문이 없는 자가 멋대로 과장에 들어가니, 과거가 이로부터 엄격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때에 이르러 옛법을 거듭 밝혀, 묘당으로 하여금 체문이 없이 과장에 들어오거나 강을 통과하지 않고 합격자 속에 포함된 자는 발견되는 대로 엄히 처벌하도록 명하고, 사관(史官)을 나누어 보내 강규(講規)를 살피게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와 병마 절도사 이한풍(李漢豊)이 치계하기를,
"봉성(鳳城)의 장수가 변방을 순찰할 때, 장도(獐島)와 신도(薪島)에 몰래 숨어드는 자들을 우리 나라에서 능히 검칙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청컨대 신도를 수색해서 토벌하는 것을 규정에 구애받지 말고 이따금 들어가 살필 수 있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신도는 용천(龍川) 지방에 있으며 고기잡이하는 호인(胡人)들이 이곳에 많이 모여드는데 쫓아내면 금방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그러나 한 해에 한 번씩 수색하는 규정에 구애되어 마음대로 쫓아낼 수 없었으므로 병사가 아뢴 것이다.
8월 14일 병진
이문원(摛文院)에서 재숙(齋宿)하였다.
8월 15일 정사
선원전(璿源殿)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숙종의 탄신일이었다.
장령 최창국(崔昌國)이 상소하기를,
"올봄에 장릉(莊陵)의 제단을 쌓고 제사지낸 일은 보고 들은 사람이면 누가 감복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의 고택(古宅)이 아직도 몰수된 채로 있으니, 이 어찌 거룩한 시대에 부족한 점이 아니겠습니까. 빨리 돌려주도록 명하여 충신을 높이 보답하는 방도를 강구하소서.
수원의 치악산(鴟岳山)은 바로 현륭원(顯隆園)의 산맥이 나오는 주산(主山)으로 현륭원과의 거리가 10리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봉우리와 골짜기에 나무가 없는 민둥산으로 나무의 벌채를 금하고 보호하는 속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서둘러 원대한 계획을 생각하시어 미진한 한탄이 없도록 하소서.
새 읍안에 백성을 모집해 들어와 살게 한 것은 대체로 촌락을 크게 만들어 원릉(園陵)을 수호하자는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와서 사는 선비들에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역시 그들이 기꺼이 옮겨와 민가가 즐비하게 하려고 한 까닭에서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온 집안이 이사를 한 것이 아니라 태반이 집은 그대로 두고 호적만 옮긴 것이니, 단지 옮겨산다는 이름만 있을 뿐 이사한 실속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거듭 신칙하여 실효가 있게 하소서.
사포서(司圃署)의 위전(位田) 가운데 송도(松都)에 있는 것은 떼어받은 지가 이미 3백여 년이나 되었는데 법의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고 아전과 군교들이 농간을 부림으로써 세납이 줄어들어 공공의 비용을 대기가 어렵습니다. 빨리 사포서로 하여금 낭관을 보내 다시 측량하여 바로잡도록 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과장의 시권을 받아들이는 기한을 제목을 내건 뒤 3시각으로 기준을 정했는데, 그 시간이 되면 기를 쓰고 앞으로 나와 서둘러 시권을 내느라 여기저기서 땅바닥에 쓰러집니다. 또 먼저 낸 자가 축(軸)을 미처 다 만들기 전에 뒤에 온 자가 도리어 앞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선후가 뒤바뀌게 되고 영민한 자와 둔한 자가 똑같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한꺼번에 동시에 올린 시권을 선후의 순서가 없이 뒤섞음으로써 각자가 축을 만들고 남의 힘을 빌리지 못하게 하면, 반드시 앞다투어 시권을 내느라 스스로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먼저 이런 내용을 시험장에 들어온 유생들에게 알려주고 시험을 주관하는 사람을 특별히 선임하여 혼잡한 가운데 몸을 다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올해는 홍수와 장마로 수재를 당한 백성들로서 반드시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는 자가 많을 것이니, 팔도에 모래로 덮히고 냇물이 넘친 곳에는 수령들로 하여금 몸소 조사하게 하여 거두어들일 것이 없는 땅에 세금을 징수하는 일이 없도록 다시 신칙하소서.
외방 고을의 병기들은 전혀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 못한데, 마군(馬軍)의 장비가 특히 엉성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각도의 도신과 수신(帥臣)에게 각별히 신칙하여 각 고을을 순행할 때마다 반드시 병기와 장비를 직접 점검하여 실효가 있도록 하고, 이로써 고과(考課)의 근면하고 태만함을 판단토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경향에 있는 40개의 역참은 대부분 피폐했지만 그중에서도 오수역(獒樹驛)이 가장 심합니다. 역마를 위한 위토(位土)를 해마다 팔아치워서 사전(私田)으로 잘려들어가니, 거의 만 석에 가까운 환자곡이 태반이나 간사한 아전들이 훔쳐먹는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전들의 숫자가 늘어나 다른 역참까지 침해하고 복결(復結)을 소모해버려 그 피해가 역졸 가구에까지 미칩니다. 그밖에 역가청(驛價廳)이나 지대청(支待廳)이나 보급청(補給廳) 등의 각종 돈과 곡식도 모두 그들의 뒷바라지 때문에 한없이 계속 들어가고 있으니, 이는 한 명의 역승(驛丞)이 능히 바로잡아 개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여 특별히 강단있고 똑똑한 관원을 선정하여 폐단의 근원을 자세히 조사함으로써 역참을 보존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첫번째 문제인 성삼문의 옛집을 돌려주는 일은 어찌 네 말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형편상 우선 공공관청으로 두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네 말이 매우 훌륭하다. 세 번째 수원 새 읍의 선비들 가구에 관한 문제는 네 말을 경기 감사로 하여금 해당 수령에게 알리도록 하겠다. 네 번째 사포서에서 떼어받은 토지를 조사하는 문제는 꼭 급선무는 아니다. 연전에 간사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폐단을 만들어 지금까지 그 해독이 양민에게 미치고 있다. 너는 법을 담당하는 관원으로 있으면서 도리어 금하라고 청하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다섯 번째 과장의 유생들에게 알려주고 시관을 특별히 선발하라는 문제는 옳은 말이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일은 한결 더 유념할 생각이다. 여덟 번째 오수역의 문제는 도백으로 하여금 신중히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전교하였다.
"조정에 잘못된 일이 없어 간하는 글이 올라오지 않더라도 오히려 참다운 치세(治世)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요즈음 임금의 잘못에 대해 간하는 말을 듣지 못하고 관리들이 서로 잘못을 바로잡지 않는 것은 반드시 내가 자만해 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나는 실로 반성하고 겸손한 생각을 가지는 한편 침묵하는 언관들을 책망하려 했으나, 국사에 대해 말하는 책임을 맡은 대간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은 알이 깨질까 아끼는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두세 명의 대간들을 용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 용서해주다 보니 올바로 간하는 말은 들리지 않고 고루한 요청만 계속 올라온다.
심지어 오늘 사포서의 토지 문제에 대한 일은 대간이 더욱 실언한 것이다. 설사 조정에서 이런 명령이 있다 하더라도 대간으로서는 마땅히 한사코 반대해야 할 일인데 허다한 임금의 잘못과 현 정사에 대해서는 내버려둔 채 이처럼 제기해서는 안될 일을 말하였다. 장령 최창국을 무겁게 추고하도록 하라."
8월 16일 무오
차대를 하였다. 이어 유생들에게 일차 전강(日次殿講)과 제술 시험을 실시하였다.
대사성의 임기를 길게 하는 규정을 결정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지금 문풍(文風)을 크게 바꾸려면 마땅히 먼저 성균관의 장관을 잘 가려야 한다. 그런데 대사성은 전조(銓曹)로 들어가는 첫단계이므로 문학의 소양이 없으면서도 대사성이 되는 자가 있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하니, 좌의정 채제공, 병조 판서 오재순(吳載純) 등이 모두 변통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문체를 바로잡는 문제는 책임자가 어떻게 사람을 올리고 내치는가에 달려 있다. 그 일을 전적으로 맡고 요직에 앉아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성과를 거두지 못한 자는 대사성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 문학과 정사는 사실 똑같은 성격이 아닌 것인만큼 사소한 격식에 얽매여 재능에 따라 일을 시키는 도리를 전혀 소홀히 한다면, 그 어찌 태학에서 인재를 교육하는 아름다운 뜻이겠는가.
지금 경연에서 대신과 일찍이 전조의 당상을 지낸 자들에게 물으니, 여러 의견들이 별로 차이가 없었다. 대체로 시험 성적을 매기는 안목이 어찌 옛날 이름난 석학들보다야 낫겠는가마는 시관도 지금 사람이고 제생(諸生)도 지금 사람이니 지금 사람으로서 지금 글을 심사하는 것은 만약 그 적임자를 얻어 오래 그 임무를 맡긴다면 반드시 잘 길러서 성취하는 보람이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대사성은 삼전(三銓)159) 에 들어가는 첫단계로 삼는 격식에 구애받지 말고 반드시 문학의 소양이 있는 선비를 취해 오래 맡겨두며, 비록 다른 관직에 임명되더라도 본직을 그대로 겸임하되, 내각의 직각(直閣)과 강서원(講書院)의 유선(諭善)의 규례에 따르도록 하라. 이 규례는 본디 좨주(祭洒)에서 생겨난 것인데, 지금 그것을 모방하는 것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변통하는 도리에 합치한다. 전조에 분부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삼전(三銓)으로 들어가는 첫단계에 대해 해조로 하여금 대신에게 가서 의논하여 초안을 만들어 규정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예조 참의를 이조 참의가 되는 첫단계로 삼고, 대사성은 부제학이 되는 첫단계로 삼았다.
조흘강(昭訖講)의 시험관 윤영희(尹永僖)와 적간 사관(摘奸史官) 홍낙유(洪樂游)·서유문(徐有聞)을 잡아다 문초하였다. 윤영희가 상소하기를,
"어제 대흥(大興)에 사는 서환선(徐煥善)이란 자가 조흘강에 응시했는데, 구절마다 틀려서 문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부득이 불(不) 자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쪽지가 들어왔는데, 사관 서유문이 신을 큰소리로 부르며 그것을 던져주기에 보았더니 서환선이 억울하게 되었다는 글이었습니다. 그 글에 ‘혹시 무슨 변통할 길이 있겠는가?’ 하는 말이 있었고 대체로 그 내용은 마치 신이 고의적으로 떨어뜨린 것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신이 비록 못났지만 어찌 조흘강을 심사하면서 사적인 마음을 갖고 올리거나 내리거나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자세히 물어 아뢰도록 명하자, 정원이 아뢰기를,
"낙유와 유문 등이 말하기를 ‘전교에 실력있는 인재가 혹시 떨어질 수도 있다는 뜻으로 신칙하셨습니다. 신 낙유는 그때 실력있는 한 사람이 일소(一所)의 강석(講席)에서 불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혹시 너무 가혹하게 흠을 잡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유문에게 쪽지를 보내 말하기를 「실력있는 아무개도 낙방을 면치 못했으니, 이로 미루어보면 반드시 원통하다고 말할 소지가 있을 것이다.」 하였고 유문은 이것을 여러 시관들에게 두루 보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사람들이 다 본 것이니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시관 윤영희는 태연히 앉아 있기가 어렵다고 핑계대고 갑자기 일어나 나간 뒤에 멸시당했다 하여 서둘러 상소를 올렸으니, 이는 실로 뜻밖의 일입니다. 무슨 곡절로 일부러 소란을 야기하기 위해 선수를 써서 남을 제압하려는 계책을 꾸몄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그의 의도는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의 상소문이 내려오지 않아서 지금 감히 조목별로 변론하지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과거 시험을 보일 시기에 임박하여 조흘강을 실시하는 것은 과장에 들어갈 때 그 인원수를 세는 것과 다름이 없다. 과장과는 상황이 약간 차이가 있지만 이미 시관이 있고 또 등수를 매기는 것인만큼 역시 나라의 시험이다. 비록 두 공부(杜工部)160) 나 소동파(蘇東坡)161) 가 낙방한다 하더라도 사관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적간하는 사관은 곧 암행 어사나 마찬가지이니, 설사 시관에게 참으로 합격시키고 불합격시키는 데 사가 개입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마땅히 복명한 후에 서계(書啓) 속에 넣어 논하면 될 것이다. 어찌 감히 공당(公堂)의 시험보이는 자리에서 입을 놀리고 아울러 사적인 글을 주고받으며 여러 사람에게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이들에게 만약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명을 받들고도 삼가지 않는 무리들을 어찌 징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젊은 사람들의 행동거지가 비록 방자한 것 같더라도 시험보는 자리는 체통이 중요한데 어찌 감히 멋대로 나간단 말인가. 너무도 놀라운 일이다. 실력있는 인재를 혹시 빠뜨리지 않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신칙하는 하교가 있었는데 낙방을 하게 만들었고, 또 낙방한 자가 다른 곳에 가서 호소하는 것을 금지하지 못하였으니, 이러나 저러나 그대로 둘 수 없다."
하고, 모두 일이 끝난 뒤에 잡아다 문초하도록 명하였다.
8월 19일 신유
강원 감사 윤사국(尹師國)이 남의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직하니, 곧 그곳의 수령으로 보임시킬 것을 명하고 아울러 속현을 순행하라고 신칙하였다.
8월 20일 임술
비가 내렸다.
8월 21일 계해
전교하였다.
"예로부터 승지가 적간하는 조목 속에는 감시(監試)의 시험장 안에서 적간하는 일이 있었다. 이는 전해 오는 옛 규례인데 근년에는 오랫동안 시행하지 못했다. 이번에 사관을 보내 유생들이 과장에 들어오고 나갈 때 혼잡스러운 폐단을 살펴 금지시키게 하였는데, 엊그제 초장(初場)에서 과장의 두 곳에 적간을 하러간 봉명 사관(奉命史官)들이 과장에 들어간 뒤 정복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관 이하 각 차비원(差備員)들에게 명함을 받지 않고 왔다고 한다. 요즈음 신진들은 전혀 체제를 모르니, 만약 그렇다면 암행 어사도 관복을 미처 가져가지 않았다 하여 출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인가. 옛날 사관들은 감시의 시험장 안을 적간할 때는 벼슬한 지 얼마되지 않은 자도 앞다투어 나갔는데 지금은 이런 전례를 모를 뿐만 아니라, 응당 받아야 할 명함도 받지 않았다. 사관들은 일이 끝난 뒤에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한 다음 처리하게 하라. 일소(一所)의 시관은 이미 사관이 과장안에 들어온 것을 알면 마땅히 명함을 바쳐야 하는데 와서 바치지 않았으니, 당상인 시관과 감시관 이외의 시관 및 차비관들을 우선 엄하게 추고하라."
8월 22일 갑자
춘당대에 나아가 장용영(壯勇營)의 가을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반궁(泮宮)에서 칠석제(七夕製)를 실시하였다.
호조 판서 이병모(李秉模)를 체직하고 다시 조정진(趙鼎鎭)으로 대신하였다. 병모가 이때 선혜청의 제조를 겸임하여 함께 관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8월 24일 병인
호조가 연분 사목(年分事目)162) 을 올리니, 전교하기를,
"모든 일은 미리 대비를 하면 이루어지는 법인데 미리 대비하는 정사로는 민사(民事)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주역》 예괘(豫卦)의 말처럼 예비라는 시간성과 의의는 매우 큰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환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중지하라는 명이나 창고를 봉하기 전에 조세를 다른 물건으로 대신 바치게 하는 조치를 매번 특교(特敎)에 의해서 취했으니, 이는 실지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고 간사한 자들이 농간을 부리지 못하게 하자는 데에 나의 깊은 고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의 농사는 밭곡식이 곳곳에서 모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을 각도에서 농사 형편에 관해 올린 장계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대체로 일반 백성들이 일년 내내 고생하여 손에 넣고 입에 넣는 물건은 바로 밭곡식이다. 그런데 그 곡식이 저처럼 피해를 당하였으니, 앞으로 닥쳐올 민간의 살림살이가 내년 봄은 그만두고라도 올 겨울을 나는 것조차 이어대기 힘들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그 고통을 내 자신이 당하는 것 같다.
해마다 호조에서 반포하는 연분 사목은 국가의 중요한 정사이다. 위로는 제사지내는 비용을 대고 다음으로는 백관의 봉록을 나누어주고 다음으로는 삼군(三軍)의 식량을 대주어야 하므로 유사가 가능한 한 종전의 통계를 고수하면서 너무 줄이지 않으려 하는 것도 역시 국가의 경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여느 해와는 다르다. 그런데도 전례를 고집하면서 변통을 할 방안을 생각지 않는다면 그러고도 조정이 백성을 어린애를 보호하듯, 내 자신이 아픔을 당하듯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사목을 보면 표재(俵災)의 조항이 도리어 기유년의 홍수가 졌던 때만도 못하니, 아무리 이리저리 변통하여 꿰맞춘다 해도 제대로 분배하여 나열하기 어렵다.
지금 여러 도백들은 모두 수령들의 청탁을 달게 들어주거나 경비가 넉넉하건 부족하건 염두에 두지 않는 자들이 아니니, 일단 책임을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말은 오늘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 같다. 올해의 재해 총액에 대해서는 모두 도백에게 맡겨 충분히 잘 뽑아서 아뢰게 한 뒤에 묘당으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게 하라. 조정에서 이미 도백에게 경차관(敬差官)의 임무를 임시로 겸임하게 하였으니, 지금 이처럼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어찌 사체와 관계가 있겠는가. 각기 마음을 가다듬고 거행하도록 하라.
밭농사에 대해서는 표재(俵災)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은 한 해에 반드시 두 번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금년에는 장마가 여러 달 동안 계속되었으니, 강가의 여러 곳에는 이삭 하나도 거두지 못한 경우가 반드시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격식에 구애되어 표재를 주지 않아야 할 논농사에 대해 표재를 준다면 결코 실속을 앞세우는 도리가 아니다. 더구나 비에 무너지고 떠내려간 집들도 오히려 모두 각별한 휼전(恤典)을 베풀었으므로 그들에게 보탬이 된 것은 몇 식구 가진 농가가 생산한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농사짓는 백성들에게만 굶주림 속에 짐을 꾸려 그 형세가 반드시 죽지 않으면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전혀 그들을 구제할 계책을 거론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모든 백성을 똑같이 보는 정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밭농사를 짓는 농민 가운데 입은 재해가 특히 심한 자와 약간 덜한 자에 대해 각 도백으로 하여금 수령들을 엄히 신칙하여 세밀하게 비교하고 차등을 나누어 집이 무너진 자들에 대한 은전의 예에 준해서 시행하도록 하며, 가장 불쌍하고 가장 딱한 것은 무엇보다 수몰된 밭이니, 특별히 목화밭의 급재(給災)하는 규례에 준해 시행하도록 일체 분부하라. 밭과 논의 각종 곡식으로서 대신 바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미리 수량을 갈라서 시행하게 하라.
이렇게 하교한 뒤에 급재를 하는 것이나 환자곡을 받아들이는 것을 중지하는 것이나 대신 바치게 하는 등의 문제가 연례로 하는 재해를 등급별로 아뢰는 장계 속에 다시 오르지 않게 된다면 조정에서는 수고를 많이 덜 것이고 백성들에 있어서도 도움되는 것이 또한 클 것이다. 이렇게 한 뒤에 실지 성과가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와 이 명령을 제대로 잘 시행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는 오로지 지방을 안찰하는 도백에게 달려 있다. 만약 하나라도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그러고서도 어찌 감히 다시 대궐에 들어와 외람되게 향안(香案) 앞에서 나를 대할 수 있겠는가. 호조 판서는 지금 판부(判付)한 것을 대신에게 가서 보이고 즉시 문장을 만들어 감사와 수령들에게 공문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조정에서 수원부(水原府)를 도성의 오부(五部)처럼 보는 처지에서 그곳에 고통이 있다면 어찌 범연히 볼 수가 있겠는가. 해당 부사의 말을 들으니 오래 묵은 밭이 백여 결이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설사 금년에 새로 결정한 재결(災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당연히 전부터 묵혀 버려진 토지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니, 백성들이 어찌 그 혜택을 입을 것이며 토지가 어찌 그 세금을 감면받겠는가. 그렇다면 본부 지방은 비록 재해로 인한 혜택을 받는 대열에 들어가지 않았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니, 이 어찌 조정에서 본부를 위하는 뜻이겠는가. 수원부의 오래 전부터 묵힌 토지는 그 실제 수효만큼 즉시 면제시켜주도록 하라.
본부에서 비용으로 쓰는 것도 역시 별도로 조치를 취할 것이 있다. 옛날에는 세금을 거두었더라도 지금은 중요한 곳이라 하여 부세를 면한 것이 과연 얼마나 되며, 그밖에 햇수를 제한해 세금을 면제하는 등 각종 조건으로 부의 비용을 줄여준 것이 또한 얼마나 되는가? 비록 다른 고을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급대(給代)163) 를 해야 할 터인데 하물며 본부이겠는가. 조정이 경황이 없어서 지금까지 조처를 취하지 못했다. 그러니 좌상은 전 부사와 현 부사에게 물어 연한을 정해 급대할 것과 햇수를 따져 추후로 급대할 것과 영원히 급대할 것을 차등을 나누어 구분해서 아뢰도록 하라."
8월 27일 기사
전교하였다.
"본원(本園)164) 과 관계되는 크고 작은 조치들은 모두 백성에게 편리하게 하여 천만년토록 유구하게 시행되도록 하는 것으로 마음먹은 것이다. 화소(火巢)165) 의 구역을 넓고 멀게 정한 것도 역시 소중한 것을 위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때문에 경내에 본디 있던 백성들의 무덤도 깎아버리거나 옮겨가게 하지 말고 단지 다시는 금표(禁標) 안을 침범하지 못하게만 한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듣건대 해부에서 본디 있는 백성의 무덤 가운데 주인이 있는 무덤의 제초(除草)까지 엄금하고 아울러 무겁게 처벌하도록 요청하였다 하니, 이는 조정의 본뜻이 아니다. 그들이 비록 감히 산에서 제사를 지내지는 않겠지만 잡초를 제거하는 것이야 어찌 꼭 엄금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을 엄금한다면 백성들의 무덤 위에 비록 수목이 마구 자라더라도 손을 쓸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의 사적인 정은 차치하고 사리로 따져보더라도 이는 도리어 애초에 옮겨가게 했던 것만 못하다. 앞으로는 제초를 절대 금지하지 말라. 이렇게 하면 그들이 모두 수호군(守護軍)이 되는 것이다. 각기 자신들의 일을 위해 돌보더라도 으레 공을 앞세우고 사를 뒤로 할 것이니, 그 수목을 지키고 보호하는 방도를 위해서도 어찌 더욱 힘을 다해 정성스럽게 하지 않겠는가. 비록 오랜 훗날에라도 혹시 금표 안의 토지를 침범하여 무덤을 쓰는 자가 있을 경우 그들로 하여금 관청에 알려 엄히 금하게 할 것을 규정으로 정해 효유하라."
검열 홍낙유(洪樂游)와 서유문(徐有聞)이 연명으로 상소하기를,
"허위를 사실로 날조하고 없는 것을 있는 일로 만든 경우가 예로부터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마는, 어찌 윤영희(尹永僖)와 같이 행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신 등이 지난번 하문하는 것에 대해 아뢸 때는 의리와 명분을 두려워하고 또 영희의 상소문이 아직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속에 있는 말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원래 상소를 보니, 음험하게 말을 만들고 멋대로 꾸며대어 곧바로 강을 받는 선비를 위해 청탁을 한 죄로 몰아넣었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른바 청탁이란 것은 곧 시험표를 나누어주지 않았거나 합격자 명단이 작성되기 전에 친한 사람을 위해서 은밀히 알선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 등은 조흘강에 응시한 선비와는 본디 얼굴도 본 적이 없고 다만 혹시 실력있는 인재가 낙방하면 임금께서 당부하신 본뜻을 어기게 될까 염려한 것에 불과합니다. 신 낙유는 귀로 들은 것을 그대로 전했고 신 유문은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보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희는 신 낙유의 글 속에 처음에는 ‘울분과 탄식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말이 있었고 또 끝에는 ‘혹시라도 변통할 방법이 있겠느냐.’는 등의 말이 있었다 하였으니, 전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어쩌면 이렇게 손쉽게 만들어낸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런 일은 그에게 있어서 오히려 하찮은 일에 속하는 것이고 말할 수 없이 원통한 한 가지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이번 시험에 함부로 응시할 수 없는 역적의 자손이 방자하게 응시를 하였는데, 저 영희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보아넘겼을 뿐 아니라, 도리어 곡진하게 두호하여 마침내 태연히 강을 통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속셈을 헤아려보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다가 공론이 일시에 일어나자 말씨와 눈치로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짐작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부당한 갈등을 만들어내어 눈속임의 계책을 꾸며낸 것이니, 이는 열 사람의 손이 지적하고 열 사람의 눈이 본 것보다도 더 분명합니다.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젊은 신진들이 어찌 감히 이렇게 한단 말인가."
하고, 그 소를 되돌려주라고 명하였다.
8월 28일 경오
정언 박길원(朴吉源)이 아뢰기를,
"언관(言官)의 거취는 염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소금 가게와 땔나무 가게 등 두 가게에 패(牌)를 내준 일로 그 당시 사헌부 관원들은 정배(定配)의 처벌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평 조각(趙恪)은 똑같은 죄를 범한 사람이면서도 단지 서계(書啓) 속에 끼지 않은 이유로 요행히 죄를 모면했습니다. 그 패를 내준 서리는 이미 유배의 처벌을 받았으니 그 자신의 도리로서는 응당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번에 관직에 제수하는 명이 내리자 스스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나와서 숙배하였습니다. 염치를 지키는 것에 관계가 있으니, 조각을 빨리 삭직하는 법을 적용하소서.
이번 감시(監試)에 새로 정한 제도는 족히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고 과장의 질서를 엄격히 할 만한데, 조태림(趙台霖)의 문제는 평범한 범죄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은 비록 이미 처벌을 받았지만 이는 그 한 사람의 죄만은 아닙니다. 그 아비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조연덕(趙衍德)은 조정의 반열에 있으면서 지방관의 책임을 맡고 있는 자로서 그 고을의 선비를 실어보내 그 패역한 자식을 돕게 하여 심지어 과장에 대신 들어가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또 그 아우 조태영(趙台榮)은 외람되게 승정원 주서로 있으면서 연석에 출입했으니, 새로 내린 명이 엄중하고 신칙하는 하교가 간곡한 것을 그가 어찌 못 들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막지를 못했으니, 이처럼 무엄하게 법을 깔보는 무리를 시종의 반열에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광주 목사 조연덕과 전 가주서 조태영은 모두 사판에서 영원히 삭제하는 벌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각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조연덕과 조태영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태림의 죄는 곧 글씨를 빌린 것일 뿐 대신 지은 것이 아니며 그것도 또한 진짜 글씨를 빌린 경우와는 차이가 있으니, 범법이라고 논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그 아비와 그 아우 때문에 특별히 더 무거운 죄를 준 것이니, 그가 충군(充軍)된 것도 오히려 원통한 것이다. 그의 뜻하지 않은 죄로 인한 처벌이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의 아비와 아우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하였다.
관서 지방의 강변 다섯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8월 29일 신미
상이 훈련 도감과 금위영의 습사기(習射記)를 보고 전교하기를,
"경 등은 무인들로서 평소에도 항시 전쟁에 대비할 뜻을 가져야 하는데, 이처럼 안일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어찌 벽돌을 나르며 몸을 단련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던 진(晋)나라 도간(陶侃)의 죄인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어 금위 대장 서유대는 월봉(越俸)하고 훈련 대장 조심태(趙心泰)는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신응현(申應顯)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유당(柳戇)을 강화부 유수로 삼았다.
부응교 이태형(李太亨), 교리 임도호(林道浩)·윤광보(尹光普)와 수찬 송익효(宋翼孝) 등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듣건대 이번 조흘강 때 역적의 자식이 멋대로 응시하여 강을 통과했다 합니다. 아, 이 무슨 변괴입니까. 요즈음 국법이 너무 관대하고 기강이 점차 무너져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저같은 자가 조금도 거리낌없이 멋대로 과장에 들어오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의 방자하고 무엄함은 이미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관이 된 자가 그 명단을 보았으면 마땅히 놀라고 분통스럽게 여겨 법사(法司)에 이송해서 죄를 바로잡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 윤영희는 과연 무슨 마음으로 예사롭게 보고 전례에 따라 강을 받고 곡진히 두호해서 끝내는 시험을 통과하게 하였단 말입니까. 그가 이들에게 무슨 좋은 감정이 있기에 이처럼 돌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자를 그대로 둔다면 의리가 캄캄해지고 역적의 자식이 딴 마음을 먹을 것이니, 장차의 걱정이 어떤 지경에까지 이를지 모를 일입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사성 윤영희는 엄히 문초하여 실정을 알아낸 뒤에 죄에 걸맞는 율을 적용하고, 함부로 응시한 역적의 자식은 외딴섬에 멀리 유배하는 조치를 절대로 그만둘 수 없다고 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른바 그와 같은 자라고 한 것은 누구를 말하는 것이고, 이른바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자라고 한 것은 역시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너희들도 이름을 모르는 자를 윤영희라고 어찌 혼자 알겠는가. 비록 너희들에게 시관을 시켰더라도 강을 받아야 할 것이면 마땅히 강을 받을 것이고 통과를 시켜야 할 것이면 마땅히 통과시켰을 것인데, 지금 강을 받고 통과를 시켰다는 것으로 윤영희의 죄를 삼으니, 너희들이 하는 일은 옹졸한 생각이라 하겠다. 만약 이름을 알면서도 차자 속에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성실하지 못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일을 진정시키려는 뜻으로 너희들에게 그냥 속아넘어가 주려고 우선 일반적 사례대로 비답을 내린다. 그러나 이름없는 사람에게 죄주기를 청한 것은 예전에도 없고 지금도 없는 일이니, 이 차자가 한번 조지(朝紙)에 나가면 너희에게 적지 않은 수치가 될 것이다. 너희들은 스스로 인책할 길을 생각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어제 본 한 장의 상소는 내용이 매우 수상하다. 말을 이리저리 뒤집는 꼴이 옥당의 차자와 다를 것이 없었으나 특별히 문제를 진정시키려는 뜻을 가지고 환급하라고만 명하였다. 그들의 잔인한 짓이야 무슨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그 명칭이 사람이고 환급한 것은 상소문이다. 그것을 본 자는 반드시 의심이 났기 때문에 오늘 옥당의 차자가 있게 된 것이다. 그 소를 만약 반포하지 않았다면 어찌 차자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
하고, 이어서 사관의 상소를 반포한 승지를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8월 30일 임신
승지 홍명호(洪明浩)를 하옥하고 이어 서용하지 않는 벌을 적용시켰다. 명호는 홍낙유의 아비이다. 상이 이번의 사건은 사관의 상소에서 나온 것인데 명호가 멋대로 상소를 반포하여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하여 이런 명이 나온 것이다.
대사간 유의(柳誼)는 남해현(南海縣)에, 지평 신응호(申膺祜)는 강진현(康津縣)에, 헌납 이석하(李錫夏)는 삭주부(朔州府)에, 정언 홍병익(洪秉益)은 창성부(昌城府)에, 박길원(朴吉源)은 종성부(鍾城府)에, 승지 이서구(李書九)는 울진현(蔚珍縣)에 유배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윤영희의 일을 논하였으나, 회보를 하지 않았다. 양사가 다시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간쟁하자, 전교하기를,
"경 등의 차자 가운데 ‘비록 그 성명은 모르지만, 이미 이런저런 말들이 있다면 어찌 함부로 과장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하였는데, 고금을 통틀어서 어찌 이처럼 불성실한 말이 있겠는가. 경 등은 정말로 모르는가? 만약 모른다면 모르는 문제를 무엇 때문에 억지로 말했으며, 만약 안다면 또 무엇 때문에 감히 금하는 것도 무릅쓰고 상소를 올려 놓고는 단지 그 성명에 대해서만 숨기는 것인가? 불성실한 것은 불경(不敬)에 가깝고, 불경의 죄는 마음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경 등에게 불경죄를 적용시켜 한 등급을 감해서 우선 멀리 유배하는 벌을 내린다."
하였다. 이서구는 승지로써 그 차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먼 변방에 유배할 것을 명했다가 곧 그에게 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 지평현(砥平縣)에 유배하는 것으로 그쳤다. 역적의 자식은 곧 적신(賊臣) 신기현(申驥顯)의 아들인 신집(申㠎)이다. 집이 조흘강에 응시하려고 시관 윤영희에게 명단을 올렸는데, 영희가 그에게 강을 받고는 합격을 시켰다. 다른 시관이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상소로 논하려 하다가 미처 올리지 못하고 있을 때 영희가 그 기미를 눈치채고, 사관이 쪽지를 여러 사람에게 공람시킨 것을 가지고 응시자들이 억울해 하고 있는 것은 모두 자신에게 관계되는 것이므로 감히 태연히 앉아 있을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갑자기 일어나서 나가 상소를 올려 스스로를 변명하였다. 사관 서유문과 홍낙유 등이 하옥되었다가 풀려나와 상소로 그 일을 말하자, 삼사에서 잇달아 논계하게 된 것이다. 이보다 앞서 상이 상소를 올릴 때 금지 사항을 만들어 기현의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무시하고 쓴 자는 수문장이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윤영희를 논박한 여러 신하들도 감히 역적의 자식 이름을 바로 쓰지 못한 것이다.
검열 서유문은 제천현(堤川縣)에, 홍낙유는 강령현(康翎縣)에, 검교 대교 심상규(沈象奎)는 고성군(高城郡)에 유배시키고 전교하기를,
"작금의 갈등은 이 무리들에게서 생겨난 것이니, 이들이 어찌 태연히 재직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규도 역시 명을 받들고 함께 시소(試所)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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