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계유
윤대가 있었다.
9월 2일 갑술
각신(閣臣)의 자제들 가운데 발해(發解)166) 한 자를 불러들여 상 앞에서 직접 시험보였는데, 정대용(鄭大容)의 아우 정수용(鄭脩容)과 서영보(徐榮輔)의 아우 서경보(徐耕輔)가 응제(應製)하여 상의 마음에 들었다. 전교하기를,
"법이란 시종신들부터 잘 지켜야 한다. 임금의 말을 미덥게 하는 도리로 보면 마땅히 처음에 말한 것을 실천해야겠으나 감시의 초시에 합격한 자가 단지 두 사람뿐이므로 오늘 그들을 앞자리로 불러 접견하고 그들에게 시와 문을 응제로 짓게 한 것이다. 앞으로 대신·각신·재상·간관·시종신들의 자제가 모두 이처럼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쓴다면 그 이하 임금과 관계가 소원한 자들도 자연 감동을 받고 노력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태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이다.
근일에 경연관들 중에 내가 직접 시험할 것을 요청한 자가 많았으나 아직까지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은 별도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설령 올 가을에 혹 한두 명 요행으로 합격한 자가 회시(會試)에 나오는 경우가 있더라도 여가를 십분 활용하여 공부한다면 앞으로 6, 7개월 동안에 반드시 괄목할 만한 성취가 있을 것이니, 이 어찌 양쪽이 다 적합한 일이 아니겠는가. 만일 또다시 요행을 바라고 여전히 게으름을 부리다가 내년 봄의 학례강(學禮講)167) 과 제비를 뽑아 대신 글지을 때 규정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우선 군사(君師)의 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여러 선비들을 위해 정말 걱정스러울 것이고 그 부형들 또한 어찌 잘 가르치지 못한 책임을 면할 것인가. 이 전교를 묘당에서는 베껴 써서 내외에 널리 알리라."
하였다.
전교하였다.
"선왕조 정해년에 조흘강(照訖講)에 대해 분명히 밝힌 수교(受敎)가 있는데, 식년과(式年科)가 있을 때마다 그것을 시험 장소에 게시해 놓고 시험을 보이기 한 달 전에 조흘강을 여는 것이 이미 규정으로 되어 있으니, 근래에 과거 시험 직전에 강을 받는 것 또한 법을 어기는 한 가지 일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수교와 원래의 절목(節目)을 가져와 상고하고 지금의 규정을 참고하여 내외에 반포하도록 하고, 예조로 하여금 과거 시험 절목 속에 기록하고 학례 강절목(學禮講節目)도 일체 정리하여 반포하게 하라."
시관 윤영희(尹永僖)와 김희순(金羲淳)을 하옥하였다가 곧 석방하였다. 상이 영희를 애매한 처지에 방치할 수 없고, 희순은 영희와 함께 시험을 주관하는 시관으로서 시험 시기가 임박했다 하여 자리를 나누어 앉아 각각 강을 받았는데 신집(申㠎)이 응시할 때 희순이 비록 약간 먼 자리에 있었긴 하나 역시 그 일을 알았을 것이라 하여, 모두 옥에 가두고 따져 물었다. 영희가 공술하기를,
"강경에 통과를 시킨 뒤에야 비로소 그 명단을 보니 신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시관 심상규(沈象奎)를 돌아보고 의논하였더니, 상규는 단지 변괴라고만 말할 뿐 별로 배척해서 물리쳐야 한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이어 명단을 사관에게 보냈는데 사관들도 문제를 제기해 말하지 않고 있다가 제가 갑자기 나간 뒤에서야 그 문제를 따졌으니, 사관들이 과연 놀랍고 경악스러운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즉석에서 물리치지 않았단 말입니까."
하니, 판부하기를,
"이 공술을 보니 사실이 분명하다. 강을 받은 것은 비록 명단을 서로 비교해 보기 전이지만 강에 통과를 시킨 뒤에 즉시 가까이 앉아 있던 심상규를 돌아보고 의논하였는데도 상규가 대답한 말이 그처럼 애매하였으니, 이는 상규가 영희와 하나이면서 둘이라고 할 수 있다. 영희가 또 서유문(徐有聞)에게 명단을 보냈는데, 유문은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대로 받아두었다가 글쪽지를 돌린 일이 터져 영희가 그냥 나가버리자 유문이 신집의 성명을 들고 나와 여러 시관들에게 두루 의논하였다 하니, 이것은 유문이 상규와 둘이면서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물음에 따라 아뢴 글 속의 말과 사직소를 억지로 반포한 것과 같은 문제는 모두가 똑같은 편이 되는 것을 달게 여긴 것으로서 그 아비에게 청탁하는 일까지 빚어냈으니, 이는 홍낙유(洪樂游)의 죄이다. 그는 유문·상규와 역시 둘이 아니라 셋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경 등은 간(姦) 자의 뜻을 보지 않았는가. 세 여인의 간사함도 오히려 재앙을 빚어내는데 하물며 세 연소배들이 이처럼 간사한 짓을 했으니, 어찌 없는 속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내지 않았겠는가. 영희의 공술 가운데 ‘사관이 만약 놀랍고 경악스러운 마음을 가졌다면 어찌 즉석에서 물리치지 않았느냐.’고 한 것과 또 ‘제가 갑자기 나간 뒤에서야 그 일을 따졌다.’고 한 것은 핵심을 찌르는 말이라 하겠다. 간사한 일을 꾸민 세 사람은 입이 열 자라도 어떻게 변명을 하겠는가. 지금에 와서 영희가 역적의 자식을 봐준 죄를 따지려고 한다면 마땅히 세 사람도 함께 따져야 하고 고의가 아닌 사정을 용서하려 한다면 마땅히 세 사람을 함께 용서해야 하니, 여기에서 취사 선택을 하는 것은 자기 패거리를 비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희순은 공술하기를,
"영희가 자리를 나누어 강받는 것을 반드시 기회를 탈 수 있는 틈으로 보고 남몰래 역적의 자식을 잡아끌어 무난히 강을 통과시켰고, 시관들이 그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영희가 선수를 쳐서 남을 제압할 생각으로 글쪽지를 돌려보였다는 것을 핑계삼아 소장을 올리고 곧장 나가버렸으니, 그 속셈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실이 애매하지만 다시 꼭 물어볼 것은 없다."
하고, 영희는 보방(保放)하고 희순은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상규와 유문을 잡아다가 영희와 대질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민보(李敏輔)를 파주 목사로, 김노영(金魯永)을 수안 군수(遂安郡守)로 특별히 보임하였다. 상이 민보 등이 금부 당상으로서 영희의 공술을 받을 때 조종하였다 하여, 이런 명령이 있었다.
9월 3일 을해
차대가 있었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장용영(壯勇營)에서 군병들의 수용 물품을 마련하기 위해서 저자에서 직접 쌀을 사는데, 선혜청은 경비를 마련하고 공민(貢民)을 위해서 생긴 것이긴 하나 호서청(湖西廳)이 장용영의 핑계를 대면서 공인(貢人)들에게 강제로 쌀을 염가에 팔도록 합니다. 또 균역청에서 미리 살 때도 규정을 어기고 정채(情債)를 지나치게 거두어 갖가지로 폐해를 끼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각영의 급대(給代)를 위해서 균역청에서 미리 공미(貢米)를 사는데 이것이 이른바 이납(移納)이다. 이것은 공인(貢人)들에게 심각한 고통일 뿐 아니라, 도성 사람들에 있어서도 그 폐단을 이루 말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비록 곡식이 해마다 풍년이 들더라도 이 균역청의 이납하는 규정이 있는 한, 쌀 한 말에 3전씩 하게 될 가망은 없으니, 이것이 내가 항상 걱정하는 마음으로 반드시 그 병폐를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근래에 장용영을 창설한 것은 특별히 생각한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즉위한 첫해의 윤음(綸音)에 어찌 먼저 균역청의 쌀 폐단과 군량미가 많은 것에 대해 제기했겠는가. 중외(中外)의 사람들이야 장용영이 제도를 미처 완전히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 근본 취지를 모를 수 있지만, 선혜청의 당상으로 있는 자가 이 점을 알아서 시행하지 못한다면 이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조정의 본뜻을 만약 경의 말이 없었다면 공인(貢人)과 도성 백성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경이 아뢴 것을 묘당에서 베껴 써서 각 공인에게 반포하게 하라.
균역청에서 이납하는 폐단은 초봄에 일체 엄금하고 30개월을 기한으로 정해 굳게 지키도록 하였는데, 정해진 기한 내에 간사한 폐단이 또 이처럼 자행되고 장용영에서 사는 쌀이라고 핑계를 대니 천만 가증스럽다. 선혜청의 당상과 낭청을 의금부로 하여금 엄히 문초해서 구초(口招)를 받도록 하고, 이납을 엄금한 이후 당상이나 낭청을 불문하고 만약 직접 깨끗하지 못한 일을 범한 자는 곧바로 법에 따라 엄히 처벌하게 하라."
하고, 이어서 경연관에게 이르기를,
"내가 장용영을 만든 것은 숙위(宿衛)를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또 군제(軍制)를 늘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의 고심을 지금까지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장용영의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마치 나 한 개인의 사적인 일처럼 여겨져 왔다. 병신년 이후 쌀 한 섬, 베 한 필을 감히 낭비하지 않고 있는 정력을 다 들여 경영한 끝에 이제서야 겨우 두서가 잡혔다. 바깥 조정의 신하들과 의논을 하였더라면 마치 길가에 집을 짓는 것처럼 말이 많았을 것이니, 어찌 빨리 성취될 가망이 있었겠는가. 유사로 있는 자는 과연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가. 선혜청 당상 이병모(李秉模)와 해당 관원을 삭직하라."
하였다.
구윤옥(具允鈺)을 판의금부사로, 홍억(洪檍)을 한성부 판윤으로, 윤행원(尹行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9월 4일 병자
이경오(李敬五)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오재순(吳載純)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태학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윤영희(尹永僖)의 일을 논하려 하였으나 궁궐문에서 막혀 올리지 못하자, 서로 이끌고 권당(捲堂)168) 하고 나가 생각한 것을 써서 올리기를,
"극악한 역적의 자식이 보통사람처럼 의기양양하게 강을 받으러 나왔는데, 윤영희는 시관으로서 감히 정성을 다해 비호하여 관례대로 강을 통과시켰으니, 아, 앞으로는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고 사람은 사람답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영희의 흉악 간사하고 패역한 작태는 일조 일석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연전에 익환(翼煥)의 상소문은 그 내용이 매우 패악스럽고 그 심술이 극히 악독하여, 실로 하나의 큰 변괴였습니다. 그런데 저 역적 영희는 유독 무슨 마음인지 강가로 달려가 술과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은근히 작별의 정을 표했으니, 평소에 서로 관계를 맺고 모의한 자취가 환하여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요행으로 국법을 피해 처벌을 받지 않은 것만 해도 만물을 살리기 좋아하는 하늘땅의 은덕에서 나온 것이니, 그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은혜를 생각하고 감격하여 더욱 두려워하고 삼가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감히 나라를 안전에 두지 않고 명분과 의리를 원수처럼 보아, 역적의 자식이 강에 응하는 것을 목격하고도 마치 아무런 하자가 없는 유생이 관례대로 과장에 들어온 것처럼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실정이 탄로나게 되자, 도리어 피하지 않아도 될 혐의를 피함으로써 남을 선수로 제압하려는 계책으로 삼아 소장을 던져 올리고 곧장 나가는 등 행동거지가 난잡하였습니다. 그 심술은 곧 하나의 악독한 역적이니 그를 하루라도 이 세 상에 그대로 둘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의금부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 국법을 바로잡도록 하시고 전후로 내리신 금령을 거두시어 성덕(聖德)을 빛나게 하소서. 신 등은 온 종일 궐문에 엎드려 기다렸으나 문에서 저지를 당했습니다. 신 등의 상소가 전달되지 않은 이상 결코 다시는 감히 식당(食堂)에 들어가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당당한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처럼 전례가 없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니, 어찌 너무도 한심하지 않겠는가. ‘금령에 구애되어 그 성명을 숨겼다.’고 말하지 말라. 대체로 태학에서 상소를 올리는 것은 그 체모가 과연 어떤 것인데,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자를 어찌 논박할 수 있단 말인가. 금령을 내린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이유에서 나온 것이지만, 금령이 있다는 것 때문에 수많은 선비들이 수문장에게 퇴짜를 당하고 대궐 밖에서 방황을 하였으니, 이 또한 태학이 생긴 이후 들어보지 못했던 일이다. 제생들이 자신을 경시하고 자신을 모욕한 일은 우선 그만두고라도 조정에 누를 끼치고 문묘를 욕되게 한 것은 또 어떠한가. 그러니 상소를 올린 제생들의 죄는 어찌 단지 북을 쳐서 우리 무리에 끼이지 못하게 하는 정도에만 그치겠는가.
또 더구나 윤영희의 일은 그것이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간에 강을 받고 통과시킨 그 죄가 어찌 역적까지 될 수 있는가. 술병을 차고 가서 오익환을 전별한 것이 이 일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처럼 가혹하게 그를 몰아대는 것인가. 이번 일은 진실로 분명한 자취가 있다. 그와 대화를 한 자가 있고 그 명단을 받은 자가 있다. 만약 영희를 논죄하려면 마땅히 사관과 시관을 함께 논죄해야 한다. 그런데 감히 편당에 치우친 버릇을 자제하지 못해 누구는 취하고 누구는 버리며 누구는 부추기고 누구는 억눌러, 마치 역사의 시비를 논단한 춘추필법처럼 하고 있으니, 또한 너무도 무엄하고 뻔뻔한 짓이다.
소두(疏頭) 유생은 우선 무기한으로 정거시키라. 권당(捲堂)한 반수(班首)는 처음에는 똑같이 처벌하려 했으나 다시 생각하니, 태학 유생들의 상소가 헛되게 오고갔다는 말은 내가 듣기에도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명색이 유생으로서 어찌 감히 식당에 태연히 들어갈 수 있고 기숙사에 거처할 수 있겠는가. 이런데도 불구하고 처분하는 것은 성균관을 중시하는 뜻이 아니니, 다른 유생들을 즉시 들어오도록 권하고 식당을 계속 열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금령을 내린 것은 시끄러움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는데, 상소를 올리는 것에만 급급해서 부득이 성명을 숨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옥당의 차자도 그렇고, 대간의 말도 그렇고, 태학의 상소도 또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금령이 한쪽 사람들에게만 짐을 지우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마냥 떠들어대니, 금령을 설치한 본의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이 뒤로는 다시 그 일로 상소하는 자는 비록 성명을 숨긴 경우라도 일체 엄히 금한다는 내용을 정원으로 하여금 베껴 써서 삼사(三司)에 나눠주고 태학에도 잘 알고 있도록 하라."
하였다.
9월 5일 정축
상이 승지 서매수(徐邁修)에게 이르기를,
"태학의 상소가 대궐 문지기에게 거절당하고 거리를 방황했으니, 조정에 누를 끼치고 문묘를 욕되게 한 죄가 과연 얼마나 큰가. 제생들이 금법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린 것 그 자체가 이미 죄가 있고 가슴속에 생각하고 있는 자의 성명을 숨긴 것은 더욱 성실하지 못한 짓이다."
하니, 매수가 아뢰기를,
"상소문 가운데 성명을 쓰지 않은 것은 글을 올리기에 급급한 데서 그런 것이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역적을 징벌하고 성토하자는 것입니다. 또 유배를 당한 신하들도 역시 상에게 알릴 길이 없기 때문에 그처럼 부득이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관직은 대각(臺閣)이고 그들의 말은 역적을 징벌하고 성토하자는 것이니, 잘 살펴주소서."
하였다. 물러나와 상소하기를,
"선비란 나라의 원기이므로 규탄하거나 처신하는 점에 있어서 차라리 과격할지언정 굽히지는 않는 것입니다. 태학에서 상소문을 만든 것은 역적을 징벌하고 성토하기 위한 의리에서 나온 것인데 일개 수문장에게 저지를 당해 대궐에 올리지 못하고 그 소를 들고 헛되이 돌아왔으니, 이는 실로 우리 나라 4백 년 동안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고 보면 제생들이 의리에 입각하여 권당(捲堂)을 한 것도 사리상 실로 당연합니다. 비록 그 상소문 내용 속에 다른 사람의 잘못을 답습한 문제는 물론 성상의 하교와 같은 점이 있긴 하지만, 마땅히 성내지 않고 가르치는 뜻을 보여주고 한창 자라나는 기세를 북돋아주어야 할 것인데, 갑자기 꺾어버리는 비답을 내리고 딴 유생들에게 들어오도록 권고하라는 명령까지 계셨으니, 신은 천지처럼 큰 아량에 대해 유감이 없지 않습니다.
또 이번 양사의 차자는 실로 대각에 수치를 끼친 것을 면치 못하였으나, 그 본심을 따져보면 단지 역적을 성토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임금에게 알릴 길은 없고 해서 스스로 불성실한 죄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만, 그들의 관직은 대각이고 그들의 말은 의리입니다. 그런데 언관을 우대하는 성상의 덕으로서 그들을 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여기저기로 귀양보내셔서 분위기가 참담하고 보고듣는 사람들이 걱정하니, 실로 성스러운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그 상소문을 받아들인 승지를 멀리 유배한 문제도 너무 과중한 처벌이니, 모두 그 명을 즉시 철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문묘를 높이고 선비들을 우대하는 본의를 나 역시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겠는가마는 나라에 엄연히 국법이 있다. 권당하고 나간 이유가 상소문을 안고 헛되이 돌아간 데서 생긴 줄은 알지만 부득이 식당을 도로 개설하게 하였다. 네 소의 말이야 옳다 하겠으나, 제생들이 금법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림으로써 삼사(三司)의 일을 대신한 일 또한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는가. 그 외에 덧붙여 진술한 여러 조항은 네 어찌 이처럼 두호를 하는가. 병이 든 승지에 대해서는 내가 사실 그렇다는 것을 알고 이미 가까운 곳으로 귀양지를 옮기도록 하였다. 이 상소는 관례대로 비답할 수 없는 것이긴 하나 그 말의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 전에 근래의 상소 가운데서는 상당히 조리가 있으므로 아끼고 보살펴주는 뜻을 깊이 생각해서 처분을 내리지는 않겠다."
하였다.
선혜청 제조 김문순(金文淳)이 상소하기를,
"선혜청의 낭청을 임명할 때는 선혜청이 설치된 이래로 반드시 수망(首望)에 ‘위(爲)’ 자를 쓰는 것은 당상관이 의망하는 데서 나름대로 헤아리고 조정한 것이 있기 때문에, 비록 존귀한 대신으로서도 믿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또 결국은 단망(單望)으로 계하(啓下)하는데 이는 삼망(三望)을 갖추어 낙점을 받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네 낭청을 임명할 때, 도제조가 한 낭청에 대해서는 부의(副擬)에다 ‘위’ 자를 썼습니다. 그래서 백여 년을 전해 내려온 격식이 신에 이르러 무너져버렸으니, 이는 모두 신의 위인이 하찮고 명망이 가벼운 소치입니다. 다시 누구를 허물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이처럼 전에 없던 일을 당했으니, 이런 모습으로 어찌 당상이라고 하면서 선혜청의 자리에 얼굴을 들고 앉아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의 혜국의 임무를 빨리 삭제하여 관청의 격식을 보존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혜청 낭관의 일은 지난번 연석에서 말이 오간 것이니, 경에게 있어서야 어찌 크게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공무를 거행하라."
하였다. 상은 문순이 이때 동지성균관사의 직책을 띠고 권당하고 나간 성균관 유생들을 도로 들어가도록 권고하는 중이므로 다른 관청을 함께 관장하기 어렵다고 여겨 곧 체직하였다. 이보다 앞서 좌의정 채제공이 입대하여 선혜청 낭관을 의망할 때 수망이 아닌 자에게 ‘위’ 자를 건너뛰어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극구 말하기를,
"도제조가 도리어 제조의 심부름꾼이 되고 있으니, 상께서 낙점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굳이 그럴 것이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경의 뜻에 맡긴다."
하였다.
9월 6일 무인
호조 판서 조정진(趙鼎鎭)이 관례상 겸임하고 있는 선혜청 당상관으로서 상소하여 혜국의 낭관을 의망하는 일로 면직을 요청하니, 전교하기를,
"경연에서 아뢴 말로 인해 경연에서 하교가 있었으니 이는 정탈(定奪)169) 과 다름이 없는 일인데, 이처럼 인혐하는 것은 실로 지나치다. 더구나 실직 당상관의 체직을 허락한 것은 성균관의 직책에 방해가 될까 염려해서이니, 이것을 꼭 이유로 삼을 것은 없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니, 호조의 바쁜 사무가 겸임하고 있는 일로 인해 지연된다면 서로 방해되는 점이 성균관 직책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찌 하나는 허락하고 하나는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호조 판서가 겸임한 혜청의 직책을 당분간 해임시키도록 하라.
해청에 현재 당상관이 없으니, 본청의 사무는 대신이 자연 주관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공가(貢價)를 올리고 내리는 등의 일은 우의정이 대신 집행하는 것이 선혜청의 규례이니, 낭청을 대신 임명하는 것과는 더욱 다른 점이 있다. 도제조가 즉시 거행하도록 할 일을 선혜청의 도제거에게 말하라."
하였다. 얼마 있다가 대신의 건의로 인하여 잉임시켰다.
성균관에서 제생들이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 일이 어찌 선비들이 상소할 일인가. 설령 시관이 딴 마음을 먹고 강을 통과시켰다 하더라도 대간도 오히려 일제히 제기하지 못할 문제로서 옥당의 행위가 이미 지나쳤는데 하물며 성균관 유생이겠는가. 제생들이 스스로 가볍게 처신하는 것이 이렇기 때문에 태학 상소문의 체모도 따라서 존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엊그제의 처분은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제생들의 도리로서는 그저 마땅히 그 뜻을 이해하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인데, 어찌 감히 쫓지 않는데도 나가고 부르는데도 오지 않는단 말인가. 만약 소두(疏頭)를 정거시켰다 하여 스스로 인혐하는 것이라면, 제생들의 일은 매우 오활하다고 할 수 있다.
경향 각지에서 상소문의 연명 속에 미처 끼지 못한 자가 몇천 명뿐만이 아닐텐데, 여러 번 하교한 뒤에도 연일 식당을 비워 정거를 푸는 조건으로 삼고 있으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단 말인가. 해당 동지성균관사는 월봉(越俸) 1등의 벌을 내리고 속히 식당에 들어오도록 권고하게 하라.
과거 시험을 치르는 것은 피하지 않으면서 식당이라면 도망치는 것은 어찌 더욱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양소(兩所)의 시험장에 들어간 유생은 수십 인에 지나지 않으므로 우선 이 유생들부터 식당에 들어가게 하라. 소두 한 사람만 정거를 시킨 것은 처음 생각에 융통성있게 하려 했던 것인데, 제생들의 행동이 갈수록 더욱 어긋나니 이 객기를 적당히 억눌러 놓아야만 원기를 배양할 수 있겠다. 소두 이외에 소색(疏色)으로서 글씨를 쓴 자, 글을 지은 자 등 여러 유생을 모두 정거시키라."
하였다.
전 판의금부사 구윤옥(具允鈺)을 잉임시켰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심상규(沈象奎)·서유문(徐有聞)·윤영희(尹永僖)를 대질시켰습니다. 영희가 상규에게 말하기를 ‘지난달 14일 2경에서 3경 사이에 한 유생이 강을 받으러 왔기 때문에 찌를 뽑아 강을 통과시킨 후 명단을 살펴보니 신기현(申驥顯)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돌아보고 내가 말하기를 「신기현의 아들이 강을 통과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했을 때, 네가 「일이 변괴에 관계된다.」고 대답하지 않았느냐.’ 하니, 상규가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말한 것은 야루(夜漏)가 거의 끝날 때였다. 네가 말하기를 「기현의 아들로서 강에 응시한 자가 있다.」 하였지, 처음부터 「어쩌면 좋겠느냐?」 하는 말은 없었다. 내가 즉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큰 변괴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영희가 말하기를 ‘기현의 아들이 강을 받고 통과한 뒤 일어나 나가기 전에 어찌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너에게 말한 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뜻이었다.’ 하니, 상규가 말하기를 ‘기현의 아들이 강에 응시한 것은 말할 수 없는 큰 변괴인데 무슨 남과 의논한 뒤에야 알 것이 있느냐. 또 더구나 애당초 어쩌면 좋겠느냐고 한 말은 없지 않았느냐.’ 하고, 영희가 말하기를 ‘이것이 말할 수 없는 큰 변괴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너에게 말한 것이지, 만약 변괴가 아니라면 하필 너에게 묻겠느냐. 네가 변괴라고 한 것은 곧 내 마음과 같다. 난 갑자기 그런 일을 당해 어떻게 처리할 방법을 몰라 너에게 물은 것이다. 설령 네 말대로 내게 역적을 두호하는 실상이 있었다면, 네 어찌 즉시 성토하지 않고 내가 곧장 나간 뒤에야 비로소 추궁하였느냐?’ 하니, 상규가 말하기를 ‘역적의 자식이 강을 통과한 것을 어떻게 처리할 줄 몰라서 나에게 물었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네가 별 뜻 없이 지나가는 말로 나에게 말을 했기 때문에 나는 마음속으로 「역적의 자식이 감히 와서 강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자도 역시 분통스럽고 미워서 나에게 말을 하는구나.」 하고 여긴 것이다. 다음날 아침 방목을 수정할 때에야 비로소 역적의 자식 명단을 보고 놀라 여러 시관의 강을 받은 책자를 보고서야 네가 한 일인 줄 알았다. 그때는 이미 네가 앞질러 나가버린 뒤였다. 안 뒤에야 비로소 성토할 수 있는 것이지, 알기 전에 어찌 성토를 할 수 있겠느냐.’ 하였습니다.
영희가 유문에게 말하기를 ‘14일 신집을 강에 통과시킨 뒤 심상규에게 말을 하고 명단을 넘겨주었는데, 14일 밤부터 15일 신시(申時) 뒤까지 별로 딴 말이 없다가, 저녁을 먹을 무렵 내가 앞질러 나온 뒤에 밤에 들으니, 네가 여러 시관을 불러서 이 일을 의논했다 하였다. 너는 어찌 단자를 받지 않았단 말인가?’ 하니, 유문이 말하기를 ‘네가 만약 직접 단자를 전했다면 반드시 받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만약 하인을 보내 전했다면 반드시 하인 가운데 받은 자가 있을 것이니, 이는 가려내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역적의 자식을 통과를 시킨 것은 네 자신이 주장한 일이고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명단을 보고서야 비로소 놀라고 분개하여 여러 시관과 성토할 것을 서로 의논하는데 너는 천만부당하게 별 의미 없는 서찰을 스스로 가져다 보고는 갑자기 나가버림으로써 의혹을 자아낼 꾀를 미리 썼던 것이다. 나에게 물론 성토를 늦춘 죄가 있지만, 네가 며칠이 지난 뒤에 문제를 따졌다는 말로 터무니없이 무함한 것은 너무도 고약하다.’ 하였습니다.
영희가 말하기를 ‘애초에 강을 받을 때 시관으로서 단자를 사관에게 보낸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14일부터 그날 밤까지 단자를 바친 자들의 수효가 수백 명뿐만이 아닌데, 시관이 어찌 반드시 하나하나 직접 전한단 말이냐. 이는 하인을 시켜 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제 와서 나에게 유독 하인에게 보냈다고 하는 것이 어찌 말이 되느냐. 조흘강도 역시 시험보는 곳인데 너희들이 사적인 편지를 보낸 것은 과연 옳은 일이냐. 또 내가 그것을 스스로 가져다 보았다는 네 말은 어찌 말이 되느냐. 너의 문계(問啓) 속에, 여러 사람에게 돌려보였다고 하였고, 또 더구나 나에게 전갈을 보내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했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과연 내가 사적으로 스스로 가져다 본 것이냐. 대체로 강을 받은 뒤에 명단을 사관에게 보내면 사관은 방목을 수정하는 것이 곧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에서 통행하는 일이다. 내 어찌 네가 신집의 명단을 누락시키고 못 보았줄 알았겠느냐.’ 하니, 유문이 말하기를 ‘강을 받은 유생의 단자를 한 곳에 모아놓고 방목에 옮겨쓰는 것은 애초에 내가 하나하나 상고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단지 불(不)을 맞은 사람의 단자만을 하인을 시켜 내 앞에 갖다놓게 했으니, 사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목격한 일이다. 네가 만약 조금이라도 놀라운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네 손으로 직접 전하지 않았느냐. 어리석은 하인을 시켜서 잔뜩 쌓여 혼잡한 곳에 뒤섞어 보내게 한 것은 어찌 교묘한 계책이 아니겠느냐. 어찌 그 자를 통과시키는 것이 가한가의 여부를 물으려 하면서 다른 사람의 명단과 뒤섞어 보내 보든지 말든지 방치할 수 있느냐. 이번에 강을 받을 때 여러 시관들이 반드시 먼저 강을 받는 선비의 명단을 본 다음에 강받을 대목을 출제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중으로 들어오거나 대강(代講)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강을 통과시킨 뒤에 비로소 단자를 보았다고 한 네 말은 이 어찌 남몰래 비호해 주기에 급급하여 유독 이 단자만 먼저 강을 통과시킨 뒤에 단자를 본 것이 아니냐. 서찰을 보낸 일은 사실 실력 있는 인재를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서로 권고하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애당초 너를 지적해서 너에게 보내 보여준 일이 없다. 하인이 그것을 다른 시관에게 전해 보여주러 가는 길에 네가 스스로 가져다 보고는 전갈을 보냈다고 운운하니, 이는 더욱 맹랑한 일이다.’ 하였습니다.
영희는 당초에 강을 통과시킨 것이 그 자신의 손에서 나온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제 대질을 할 때에 한 마디 말로 꾸며대니 너무도 놀랍습니다. 상규의 강석에서 주고받은 말과 유문의 단자를 받았는지의 여부는 그 진술이 애매합니다. 상께서 처결하소서."
하니, 판하하기를,
"대질의 가장 중요한 관건은 서로 주고받은 말과 단자를 받은 것이 사실인가 거짓인가에 있을 따름이다. 시간이 약간 빠르거나 늦는 것, 명단을 주고받기를 직접 하였거나 남을 시켰거나 하는 따위는 이 사건을 규명하는 데 애당초 관계가 없다. 심상규와 말을 주고받은 일에 대해 영희는 2경과 3경 사이였다고 했고 상규는 야루(夜漏)가 끝날 무렵이었다고 하여 서로 다투면서 끝내 주장이 일치되지 않았는데, 상규의 하는 짓은 교묘하게 하려 하다가 도리어 졸렬한 꼴이 되었다고 하겠다. 3, 4경은 야루가 끝날 때와는 오십 보로 백 보를 비웃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가 어찌 시간이 언제였는가는 그처럼 분명히 알면서도 주고받은 말에 대해서는 분명히 가려내지 못한단 말이냐. 영희의 말을 그가 과연 들었다면 이는 그와 영희가 거취를 함께할 문제인데, 그가 어찌 감히 동문서답을 할 수 있겠는가.
서유문이 단자를 받은 일에 대해서 영희는 즉시 유문에게 명단을 보냈다 하고 유문은 방목을 수정할 때 비로소 무더기로 쌓여 있는 가운데서 보았다 하면서 각기 자기 말을 주장하고 하나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문이 그 단자를 본 것이 만약 다음날 저녁 영희가 갑자기 나가기 전이었다면, 그의 죄는 사실 마찬가지이다.
두 죄수가 공술한 것이 긴요한 대목은 모두 우물쭈물하고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아 온통 핵심 이외의 두리뭉실한 말 뿐이다. 그런데 경 등은 옥관이란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 어찌 이처럼 말도 되지 않는 공초를 멋대로 받아들였는가. 무겁게 추고하겠다. 다시 반복해서 엄히 신문하여 기어코 사실을 알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상규와 유문을 다시 문초한 뒤에 영희와 각각 대질시켰으나, 전에 공초한 것과 같았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심상규는 신집이 부당하게 조흘강에 참가했다는 말을 듣고도 즉시 수소문하여 토죄하지 않은 자로 매우 놀라운 일이며, 서유문은 설사 그가 공술한 대로 늦게서야 비로소 알았다 하더라도 이미 안 뒤에 역시 즉각 성토하지 않았으니, 역시 늦추고 소홀히 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모두 법에 비추어 무겁게 처벌하소서. 윤영희의 경우는 역적의 자식이 부당하게 참가한 것을 알고도 강을 받고 통과를 시키기까지 한 자로서 관계되는 바가 극히 중하니, 가볍게 논할 수 없습니다. 다시 엄중히 조사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판하하기를,
"윤영희가 무함을 당한 것은 고의적으로 강에 통과시켰다는 한 가지이지만, 여러 시관 중에 그자만 유독 먼저 강을 받은 뒤에 명단을 살펴보았으니, 이것은 그의 죄를 벗겨줄 증거이다. 명단을 살펴보아 그의 이름을 본 뒤에 곧바로 심상규에게 대책을 물은 것은 더욱 할 말이 충분히 있게 되었다. 그의 공술이 의금부에 기록되어 있으니, 옥석(玉石)은 저절로 구분될 것이다. 유문이 서찰을 주고받은 일은 명단을 보고 말을 내놓은 다음에 있었으니, 영희를 성토한 것이 반드시 영희를 공격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돌릴 수 없으나 그 뒤의 사건은 그가 비답을 받지 않은 사직소를 격식을 어기고 베껴 공표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가 늦게 성토한 죄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고자 승지에게 부탁을 해서 갈등을 빚어낸 죄를 어찌 감히 피할 수 있겠는가.
영희가 상규에게 말한 것이 과연 확실하다면 영희의 말이 어찌 거짓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영희는 그가 비록 본 문제에서는 죄가 없다 하더라도 서찰의 일로 당한 모욕은 강을 받은 일로 무함을 당한 것에 비할 때 그 경중이 과연 어떻겠는가. 그때 앞질러 나가면서 올린 상소에 그 일까지 함께 거론하여 미리 혐의를 막지 못함으로써 참외밭에서 신을 고쳐 신는 혐의를 자초하였으니, 신칙을 전혀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공죄(公罪)로 처벌하라.
유문은 여러 시관에게 말한 일을 영희에게는 묻지 않았으니 연소한 자의 일처리가 어찌 이처럼 정직하지 못하단 말인가. 딴 마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따져보자면, 영희는 과연 딴 마음이 있었고 그는 과연 딴 마음이 없었단 말인가. 여기에서 공죄냐 사죄냐를 구분하기 어렵지 않으니, 사죄(私罪)로써 무겁게 처벌하라.
상규는 죄에서 벗어날 만한지의 여부가 분명치 않지만, 요는 영희가 지장없이 행세한다면 그도 응당 지장없이 행세해야 할 뿐이다. 그러나 유배되어 영평(永平)과 금화(金化) 지방을 빙빙 돌면서 가는 길을 늦추고 돌아오는 것도 지체하여 오직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니, 하나하나가 매우 가증스럽다. 사리로 보면 마땅히 다시 유배를 보내야겠지만 그는 연로한 증조모와 조모가 있으므로 비록 유배지에 가더라도 법전에 있는 대로 자연 곧 용서를 받을 것이다. 실질적인 정사를 성실히 하기 위해서 그의 유배를 법전에 의해 속전(贖錢)을 받고 용서하는 대신 사적(仕籍)에서 영구히 삭제하여 내각 직함이나 초계 문신의 반열에 끼이지 못하게 하라. 홍낙유만 유독 유배에 둘 수 없으니, 그 또한 고신(告身)을 모두 추탈하고, 사죄(私罪)로 처벌하라."
하였다.
해주(海州)·연안(延安)에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거위알만하였다. 재해를 당한 백성들을 세금을 줄여주고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9월 7일 기묘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를 불러 보고,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사관을 보내서 양천(陽川) 백성들을 위로하고 효유하여 각기 믿고 안정되게 살도록 하였다. 이제 가을도 늦어가니 세금을 줄여주고 구제할 시기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 미루고 있었던 것은 도백이 산하 고을들을 순행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이제 조정으로 돌아온 기회에 백성들의 실정을 자세히 물으니, 전에 들은 것과 차이가 없다. 재해를 특히 심하게 당한 양천의 면리(面里)에 대해서는 환곡과 신포(身布)를 탕감해주고 기한을 물려주는 것을 마땅히 조정의 명령대로 거행하되, 비록 물려주거나 탕감해주는 등급에 끼지 못한 자라도 반드시 규례대로 징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그들도 환곡과 신포를 3분의 1은 기한을 물려주고 군량미는 받아두도록 하라.
부평(富平)·김포(金浦)·금천(衿川)·고양(高陽) 등 강변 고을의 면리(面里) 가운데 재해를 특히 심하게 당한 곳은 비록 양천과 많고 적은 차이는 있지만, 재해를 입은 곳의 백성들 실정이 황급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니, 구제해주는 정사를 어찌 한 곳에는 실시하고 한 곳에는 실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앞의 네 고을은 면리 단위로 등급을 나누는 일반 규례에 구애받지 말고, 한개 면 한개 리 가운데서도 각별히 가려내고 정밀하게 조사하여 양천의 사례대로 세금 징수를 중지하고 감면해주도록 하라. 그 수량도 꼭 3분의 2에 구애받지 말고, 비록 절반 이하라도 도백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절충해 배당함으로써 한 명의 백성이라도 소외를 당한 탄식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윤영희를 홍문관 부교리로 삼았다가 곧 진안 현감(鎭安縣監)으로 보임하였다. 전교하기를,
"한 명의 백성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오히려 자기가 그를 시궁창으로 밀어넣은 것처럼 생각한다는 경계가 있는데, 하물며 인재를 아껴서 장려하고 뽑은 영희이겠는가. 이제 만약 그를 한가롭게 놀도록 버려두고 서용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요즈음 몇 번이고 당부한 본의이겠는가. 부교리 윤영희를 패초(牌招)하여 직무를 보도록 함으로써 조정의 신하들에게 사람이 부당하게 죄에 빠지는 원통함이 없고 세상에는 잘못 손해보는 무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라."
하였다. 영희가 패초에 응하지 않자, 전교하기를,
"앞서 삼망(三望)에서 그를 낙점한 것은 특별히 장려하고 위로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뜻은 단지 그를 구제하자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를 구제한다는 뜻을 취한 이상 마땅히 시종 은혜를 베푸는 것이 옳다."
하고, 드디어 특별히 보임하는 명이 있었다.
9월 8일 경진
관서 지방의 변방에 관한 금법을 신칙하였다. 의주 부윤 이동욱(李東郁)이 치계하기를,
"이달 초이튿날 봉성(鳳城)의 갑군(甲軍)들이 청성(淸城) 경계에서 거슬러 올라가 청수(靑水) 경계에 이르렀을 때 몰래 와서 나무를 베는 자 2인이 뗏목 1척을 타고 상류로부터 내려오자, 갑군들이 추격해서 붙잡아 결박하여 배에 싣고 뗏목은 잘라서 강으로 흘려보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저들은 강을 따라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계속 순찰하기를 이처럼 부지런히 하는데, 우리 나라는 변방에 대한 금법이 해이해져서 사군(四郡)의 아름드리 나무가 그저 도벌꾼의 밑천거리만 될 뿐 금지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나라가 금법이 해이해진 까닭에 저들이 우리 나라 변방 수령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였으니, 이와 같은 변방 수령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비변사는 도신과 수신을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치계하여 목화 농사가 흉년이 든 사정을 아뢰고 각사와 각영에 바치는 군보(軍保)의 포를 내년 가을까지 전부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전교하기를,
"이것은 남쪽 백성들로 하여금 솜이 없더라도 추위를 잊게 하기 위해서이다. 고정적인 조세도 오히려 이처럼 대신 바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이보다 중요하지 않은 목화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경외를 막론하고 만약 여전히 독촉해 받아들인다면 어찌 나라에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혹시 부자와 세력가들이 감영 고을의 큰 길목을 모두 장악하여, 앞서 영남에서 했던 것처럼 도성의 목화 값이 금처럼 귀하게 된다면 아래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고심과는 어찌 크게 상반된 것이 아니겠는가. 도신에게 이 점을 분부하라."
하였다.
경기·호남·영남·호서의 묵은 환곡을 수납하는 것을 중지시키고, 영남과 호남의 수재를 당한 여러 고을의 밭곡식에 대한 조세를 면제하고 환곡과 신포를 모두 감해주었다.
9월 9일 신사
반궁(泮宮)에서 구일제(九日製)를 실시하였다.
홍인호(洪仁浩)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승지 민태혁(閔台爀)이 상소하여 윤영희의 일을 논하기를,
"옥서(玉署)170) 의 청직과 좋은 지방의 수령자리를 마치 죄없는 자를 용서하고 공있는 자에게 보답하듯이 내주었습니다.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은 오직 합당한 것만 출납하는 직책이라 불리는데 그 명을 도로 봉해 올리지 못했고, 죄인을 심의하는 의금부는 극악한 자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의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인데 또한 재삼 논란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그 상소를 돌려주고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9월 10일 임오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가 곧 이면긍(李勉兢)으로 대신하였다.
9월 12일 갑신
이문원(摛文院)에서 재숙(齋宿)하였다.
9월 13일 을유
선원전(璿源殿)에서 작헌례를 거행하였다. 영묘(英廟)의 탄신일이었기 때문이다.
상이 내의원의 세 제조를 불러 만나보았다. 상이 윤영희의 일을 채제공에게 물으니, 제공이 아뢰기를,
"대신의 체모는 삼사(三司)와 다릅니다. 삼사에서 이른바 역적이라 하는 자도 대신이 그렇지 않다고 하면 용서할 수도 있고 삼사에서 이른바 죽여야 할 자라고 하는 자도 대신이 혹 꼭 죽일 필요가 없다고 하면 용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대신으로 있는 자가 혹 이런 말을 하면 삼사가 다투어 일어나 곧장 역적을 두호하는 죄로 몰아넣으니, 이런 상황에서 대신이 설사 의견이 있더라도 어찌 감히 전부 진술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영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이 죽었다. 명선의 자는 계중(繼仲)으로, 서명응(徐命膺)의 아우이다. 영종 계미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을미년171) 겨울 세손에게 정사를 대리하도록 하라는 명이 내렸을 때, 홍인한(洪麟漢)이 정후겸(鄭厚謙)을 끼고서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三不必知之說]로 그 일을 막고 나서자 상하가 모두 놀라고 통분해 했다. 그리하여 금상의 궁료(宮僚)인 홍국영(洪國榮)이 조정의 관원 가운데 능히 홍인한을 성토할 사람을 찾았으나 인한의 세력이 한창 드세어 아무도 호응하는 자가 없었는데, 명선이 전 참판으로서 상소하여 인한의 죄를 논박하였다. 영종이 그를 불러 만나보고 크게 칭찬한 뒤에 그 아비에게 제사를 지내주고 드디어 인한 등을 축출함으로써 의리가 비로소 확정되었다.
상이 즉위한 뒤에 그에 대한 대우가 나날이 높아져 익대 공신(翊戴功臣)에 비길 정도였으며 몇 년 동안에 구경(九卿)172) 과 융원(戎垣)173) 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상이 매년 12월 3일에는 반드시 서명선과 홍국영·정민시(鄭民始)·김종수(金鍾秀) 등 여러 사람을 불러 음식을 내리고 따뜻한 말로 은근하고 친밀하게 대하면서 ‘동덕회(同德會)’라 불렀으니, 그것은 그의 상소가 들어온 날이기 때문이다. 명선은 일처리에 재간이 있는데다 기지가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능히 정후겸을 물리쳐버리고 마침내 을미년과 병신년에 내세운 의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때에 와서 죽으니 상이 애석해 하고 전교하기를,
"이 대신이 이룬 업적이야 어찌 하교가 있은 뒤에야 알겠는가. 백 대의 공론이 엄연히 있을 것이다. 이 대신의 덕을 그린 글은 시장(諡狀)이 아니라, 곧 《명의록(明義錄)》이니, 이 한 권의 책에서 그 인물을 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부의하는 것은 이미 내탕고에서 주선해 보냈으나 예장(禮葬)에 부의하는 것도 즉시 유사로 하여금 규례를 살펴 거행하게 하라. 시호를 내리는 조처는 어찌 명정을 세우는 날을 넘길 수 있겠는가. 홍문관으로 하여금 시장이 들어오길 기다릴 것 없이 당일로 시호를 의논하게 하라."
하니, 홍문관에서 시호를 의논한 결과 ‘충헌(忠憲)’이라 하였다.
영돈녕 홍낙성(洪樂性)을 호위 대장으로, 오재순(吳載純)을 판의금부사로,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참의로, 이철모(李喆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9월 14일 병술
지평 한상신(韓商新)·최시순(崔時淳), 정언 장지현(張至顯) 등이 서경(署經)하는 자리에 갔다가 병을 핑계로 앞질러 돌아가고 대청(臺廳)으로 가지 않았다. 전교하기를,
"양사의 조방(朝房)은 곧 옛날의 성상소(城上所)이다. 다시(茶時)도 여기에서 가지고 분대(分臺)도 여기에서 하니, 그 체모가 대청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패초를 받고 조방에 와서 서경 모임에 참가할 자들이 갑자기 간 곳을 모르게 되었으니, 이는 편리한 것만 취한 것이다."
하고, 무겁게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9월 16일 무자
호남의 도신에게 도내의 이름있는 석학의 자손으로서 학문으로 대를 이어 오는 사람, 곤궁하게 살면서도 글을 읽어 행검이 있다고 소문난 사람, 힘이 세고 체격이 좋은 사람을 수소문하여 보고할 것이며, 또 곡식이 많은 고을은 타도에다 옮겨 파는 제도에 따라 그 곡식을 곡식이 적은 고을로 옮겨 팔도록 명하였다. 이는 경시관(京試官) 이면응(李冕膺)의 요청을 따른 것이다.
양사가 윤영희를 엄히 국문할 것을 계청하니, 전교하기를,
"비록 신기현(申驥顯)의 본 문제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기현의 일이 아니었다면 그 자식이 어찌 강에 응시할 수 없겠는가. 기현의 본 문제를 말하지 않았다 하여 금령에서 제외된다고 볼 수는 없다."
하고, 그 계본(啓本)을 돌려주고 여러 대관과 승정원에 있던 승지를 모두 삭직할 것을 명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치계하여 함양군(咸陽郡)에 서리가 일찍 내리고 우박이 쏟아진 사정을 아뢰니, 전교하기를,
"조정에서 함양의 백성들에게 온갖 심력을 다 들이고 있으므로 조금이나마 어깨의 짐을 벗을 가망이 있으려니 여겼는데, 올해 수재가 경상도 70고을 중에서 가장 심했으며 또 서리도 가장 먼저 내리고 우박도 또 가장 심하다. 백성들의 실정을 생각하면 마치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만약 시종 돌보는 은택을 특별히 베풀지 않는다면 함양의 백성들이 어찌 조정에서 돌보는 것이 처음과 다르다고 하지 않겠는가. 구제하고 감면하는 정사는 비록 판부하고 지시한 것이 있긴 하지만 본군은 다른 고을의 예를 따르지 않아야만 내 마음이 조금 놓이겠다. 제반 공부(公賦)와 사역(私役)은 전군을 대상으로 삼아 특별한 규례로 등급을 나누어 기한을 물려주거나 면제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7일 기축
이형원(李亨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충청 도사(忠淸都事) 한용탁(韓用鐸)을 호서의 연안에 유배하였다. 용탁이 시험을 주관할 때 다른 고을의 간사한 아전을 데리고 들어가자, 유생들이 크게 의심하여 그 아전을 빼앗아 마구 때리고 이어 용탁을 대놓고 욕하며 기왓장과 돌을 일제히 던졌는데, 용탁은 그것을 저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여러 가지로 자신의 혐의를 해명하였다. 도신이 이 사실을 보고하자, 상이 왕명을 욕되게 하고 수치를 끼쳤다 하여 이렇게 명한 것이다. 이어 유생들을 무겁게 처벌하고, 지방관과 참시관(參試官)·금란관(禁亂官) 등을 모두 처벌하도록 명하였다.
9월 18일 경인
전교하였다.
"대간이 윤영희의 일에 대해 말을 하느냐 침묵하느냐 하는 것으로 책임을 미루는 밑천거리로 삼고 있으니, 보기에 한심하다. 오늘부터 양사는 감히 정병(呈病)174) 하지 못하게 하고, 비록 재계하는 날이라도 감히 집에 있지 못하게 하라."
조종현(趙宗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천형(朴天衡)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9월 19일 신묘
윤영희의 일을 신기현의 예에 따라 금령을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양사가 계본을 올렸는데 정원에서 받아들였다가 도로 내주니, 양사가 상소하여 스스로 인혐하고 아울러 정원의 잘못을 논하였다. 전교하기를,
"지금 이 대간들의 상소는 천만 방자한 짓이니, 이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은 짓을 하는가. 대간의 계본을 돌려준 것은 비록 드문 일이라 할 수 있으나 원래의 계본이 과연 말이 되는 것인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처럼 드문 조처를 취한 것이다. 대체로 요즈음 전교를 많이 내린 것은 신기현의 부자를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닌데 더구나 관계가 소원한 윤영희를 위해서이겠는가. 기현의 성명을 근래에 제기하지 않은 것은 모두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이니, 안정시킨다는 것은 또한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이 지겨워 이처럼 애매한 명을 내린 것이 아니다.
기현을 공격하는 자들은 걸핏하면 그 일의 중요성을 빙자하는데 지난번의 전교에서 한 차례 명백하게 보여주었으니, 이것이면 족하지 않은가. 그 뒤에 또 조정의 신하들에게 엄히 신칙해서 다시는 입밖에 꺼내지 못하게 하였으니, 기현의 아들 신집이 과거를 본 것이 과연 크게 잘못된 일인지 모르겠다. 설사 기현을 준열하게 공격하는 자가 신집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싶더라도 어찌 굳이 강을 받은 시관까지 함께 논죄할 필요가 있겠는가. 가볍게 살짝 논박하는 것도 오히려 지나친데, 하물며 역적을 두호한다는 이름을 붙이고 엄히 국문하는 법을 적용할 것을 요청한단 말인가. 행동거지는 자연 본말이 있어야 하고 범법자를 심리하는 것도 주모자와 추종자를 가려야 하는 것이다. 기현은 그대로 있는데 영희가 먼저 기현도 받지 않은 죄명을 입었으니, 조정에서 금령을 두어 엄하게 책망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설령 영희가 정말 역적을 두호하는 자취가 있어서 강을 통과한 자가 이미 그 명단에 끼었다면, 명단을 받은 서유문이나 대화를 나눈 심상규는 어찌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만약 영희를 문제삼는 계본을 올린다면 마땅히 유문과 상규도 다같이 논열해야 하는데, 유문 등은 끝내 손을 쓰지 않고 유독 영희에게만 이와 같이 하니, 대간들의 일은 매우 잘못되었다. 나라의 체통과 임금의 기강이 비록 모두 없어졌다 하지만 만약 여러 대간들이 하는 그대로 일임한다면 어찌 나라의 체통이 있다고 하겠으며 임금의 기강이 있다고 하겠는가.
대간도 역시 신하로서의 본분이 있는 것인데, 오늘 엄한 하교를 듣고서도 어찌 감히 돌려주었다거니, 돌려받아서 가져갔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 의리를 지키는 문제로 삼아서 상소문에 올린단 말인가. 이 대간들은 조정이 깨끗해질 때까지 결코 체직되거나 면직될 리는 없는 것이다. 원래 상소는 되돌려주고 정원에 있었던 승지는 모두 체직하라. 이 뒤로는 상소문이건 계사건 막론하고 윤영희의 일에 관계되는 것은 신기현의 예에 따라 금법을 설치한다는 것을 삼사와 각 궁문의 수문장에게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제도에 파견된 궁방의 차사원과 둔전의 감독들이 세금을 생판으로 징수하는 폐단을 신칙하였다. 전라도 도사 신헌조(申獻朝)가 궁방의 토지와 군영 둔전의 폐단을 진술하니, 전교하기를,
"공적이며 정상적인 조세도 오히려 민폐를 걱정하여 토지에 대한 재해를 특별히 잡아주는데, 하물며 궁방의 전장(田庄)이나 영문(營門)의 둔전이겠는가. 서울에서 내려간 궁방의 차사원이나 혹은 둔전의 감독들이 이번에 신칙한 명령의 취지를 모르고 만약 과거의 총수에 따라 토색질하여 함부로 징수하고 생판으로 물리는 폐단을 초래한다면, 궁방의 차사원과 둔전의 감독 등을 연전에 내린 전교에 따라 곧장 감영에서 정해진 법대로 엄히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사직 신기경(愼基慶)이 상소하기를,
"황정(荒政)175) 가운데 큰 것은 용도를 줄이고 낭비를 없애며 위를 덜어서 아래를 보태는 것 이상이 없으니, 금주법(禁洒法)을 시행하여 술도가를 없애 백성들의 식량을 넉넉하게 하고 표재(俵災)를 하되 중앙의 것을 나누어줌으로써 실다운 혜택을 받도록 하소서.
수원(水原)의 민가를 보살펴주는 정사로서는 본부에 보관중인 전세(田稅)를 적절히 헤아려 발매하되 기근 구제법처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전에 과거 시험의 폐단은 이루다 셀 수 없을 정도이고 향교와 서원의 분쟁은 보는 사람이 대신 부끄러운 정도였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소학(小學)》을 강구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서울은 사학(四學)에서, 시골은 단체의 모임에서 이 책을 외우는 것으로 예비 시험의 합격을 주는 법으로 삼았으니, 참으로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그것을 가르치고 익히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백성의 풍속이 아름다워질 수 있겠습니까. 이번 과거 시험에서 《소학》을 강받도록 신칙하였으나 혹 곡례(曲禮)를 전례(典禮)로, 친지(親指)를 시지(視指)로 읽는 자가 있었으니, 이 어찌 관리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안으로는 사학(四學)에서, 밖으로는 각 고을에 이르기까지 각별히 《소학》을 공부시키고 평가를 엄격히 하게 하며 그 공부한 것을 시험보아 꼴찌에 해당하는 자는 서울의 경우는 승학시(陞學試)를 보지 못하게 하고 시골의 경우는 유안(儒案)에 끼이지 못하게 하면, 서울의 방탕한 젊은이들과 시골의 신역을 겁내는 자들이 반드시 장차 마음을 가다듬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게 될 것입니다.
훈국(訓局)은 수백 년 동안 병력을 훈련시켜 그 정예로움이 한 나라의 강한 군사가 되었고, 그 급료로 주는 베도 약간 후하여 충분히 살아갈 만하므로 군부(軍簿)가 부실할 염려는 없습니다. 다만 가장 걱정되는 것은, 무예를 시험보일 때 몰기자(沒技者)176) 에 대해 급제시키는 규례입니다. 군졸 중에서 발탁하여 벼슬을 시키는 것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좋은 법이긴 하지만 지금은 단지 중(中)의 성적을 얻기만 하면 급제를 주고 있습니다. 그 요포를 잃는다는 것은 그 자신도 바라는 바가 아니고 국가도 군정(軍丁)만 잃어버리게 되니, 이 어찌 국가나 개인이 모두 손해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묘당에 물어서, 만약 기예가 뛰어난 자가 있을 경우 후한 상으로 대신하고 급제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정예로운 군사들이 적을 막는 데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국력을 헤아리지 않고 서울 관아에서 군대를 너무 많이 양성하면 그 피해가 반드시 백성에게 미치게 될 것이니, 이는 사리상 필연적인 것입니다. 각 고을의 군사는 하나도 믿을 것이 없기 때문에 서울에 설치한 영문이 7개소나 늘어났는데 그중에서도 수어청과 총융청 두 영문은 이름만 있고 내실이 없습니다. 이 두 영문의 둔전이 곳곳에 널려 있는데 가을 농사가 끝난 뒤에는 교활한 군교와 억센 군졸들이 오직 많이 거두어 이익을 쓸어가는 것을 능사로 삼아 백성들이 그 명령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둔아병(屯牙兵)177) 에 대한 신역(身役)은 실로 특별히 고통받는 점이 있습니다. 노아병(奴牙兵)의 경우 쌀 3말이고 양아병(良牙兵)의 경우 쌀 6말로 와서 바치는 즈음에 그 숫자를 배로 들여넣으니, 가난한 백성이 일단 거기에 들어가면 매번 도망을 치게 되고 한 명의 백성이 도망치면 온 동네가 다 시끄럽게 됩니다. 그리하여 지금 둔전에서 지나치게 거두어가는 폐단과 아병(牙兵)의 신역으로 유달리 고통받은 원망과 북성(北城)의 군량미에 대한 환자곡으로 인해 경기 백성들이 점차 구제할 길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두 영문의 피해가 어찌 이처럼 극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묘당에 널리 물으셔서, 둔전의 세금을 걷는 것은 해당 고을에서 맡아 거두어 바치게 하고 영문의 군교와 병사들을 절대로 파견해 보내지 못하게 하소서.
우리 나라의 군현에 관한 제도는 혹은 지형에 따르기도 하고 혹은 요충지에 따르기도 하여 개의 이빨처럼 서로 맞물리는 형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리가 멀리 떨어져 폐단이 매우 심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의 소망에 따라서 바로잡았으니, 영양(英陽)과 순흥(順興) 등의 고을이 그런 경우입니다. 옛 영풍현(永豊縣)은 안변(安邊)의 한쪽 구석에 위치하여 안변과의 거리가 수백 리인데, 높은 산이 빙 둘러 있고 중앙에는 큰 들판이 열려 있어 수천 호의 주민들이 매우 부유하게 살지만 관부(官府)가 너무 멀리 떨어져 원통한 일이 있어도 하소연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대책을 묘당에 물어 선처하소서.
옛날의 밀성현(密城縣)은 상주(尙州)와 예천(醴泉) 사이에 있었는데, 어느 때 혁파해서 상주에 속하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간에 또 단밀(丹密) 등 네 면(面)을 나누어 상주에 붙이고, 다인(多仁) 등 네 면은 예천에 소속시킴으로써 두 고을의 소재지까지는 거리는 다 백여 리나 되는데, 그 여덟 면에 사는 사람들은 7천 호로 토양이 비옥하고 마을이 흥성하며 고을 소재지였던 옛터와 관리의 자손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지형으로 말하면 예천이 다인과는 용궁현(龍宮縣)을 넘어서 삼강(三江)이 그 사이를 갈라 놓고 있으며, 단밀이 상주와는 거리가 매우 떨어져 있고 두 강이 그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요충지로 말한다면 동래부(東萊府)로 통하는 직로(直路)가 전부 이 두 경계 사이에서 모이니, 진정 한 지역의 요충지입니다. 비안(比安)·함창(咸昌)·상주·예천과의 거리는 거의 2백 리에 가까운데, 공연히 텅 비어 있습니다. 과거 임진 왜란 당시 왜적들이 승승장구한 것도 이 길에 가로막고 지키는 시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당시 미리 한 군을 설치하여 견고한 만경(萬景)과 비봉(飛鳳) 두 산으로 차단하고 험난한 위수(渭水)와 낙동강의 세 나루를 끼고서 높이 성을 쌓아 죽음으로써 굳게 지켰더라면 그들이 어찌 감히 이처럼 처참하게 돌파하여 유린할 수 있었겠습니까. 밀성현의 읍을 복구하고픈 소망은 모든 백성들이 한 입처럼 말합니다. 백성들의 심정이 이와 같으니, 비록 약간의 어려운 점이 있더라도 어찌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환자곡의 제도를 설치한 것은 백성을 위한 큰 정사이자 나라의 좋은 제도입니다. 그러나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법이라서 양남(兩南) 지방의 곡식 장부는 허위 기록이 절반이 넘고 있는 곡식도 쭉정이가 많으니, 이와 같은 곡식을 가지고서야 어찌 능히 흉년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적절히 헤아려서 원래 환곡의 숫자를 줄여주고 나머지만 정밀하게 받아들여 쓸모있는 곡식으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에게 고르게 나누어주어 어느 한쪽만 치우치게 고통받는 일이 없게 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잡기(雜技)의 피해는 투전(投錢)이 특히 심합니다. 위로는 사대부의 자제들로부터 아래로는 항간의 서민들까지 집과 토지를 팔고 재산을 털어바치며 끝내는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게 되고 도적 마음이 점차 자라게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경외에 빨리 분명한 분부를 내리시어,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금법을 어기고 죄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시고, 투전을 만들어 팔아서 이익을 취하는 자도 역시 엄히 금지하소서.
폐사군(廢四郡)은 수백 리에 걸친 지역으로서 좋은 재목이 많아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 다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큰 강으로 경계가 지워져 자연스럽게 남북이 구분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대로 버려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종조에 4군을 개척하고 숙종조에는 두 진을 다시 설치하는 등 설치했다가 다시 혁파하기를 반복한 것은 반드시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숙종조의 고사에 따라 우선 2군을 설치하여 곤궁한 백성 중에 의지할 곳이 없거나 유랑민 중에 땅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가 살게 하소서.
수차(水車)의 제도는 비용도 많이 들지 않으면서 그 이로운 점이 매우 많습니다. 신이 그 제도에 대해 들으니, 큰 수차는 물을 세 길 높이까지 끌어올리고 작은 것도 1, 2길은 끌어올린다 합니다. 우리 나라 팔도 안에 냇물이 깊고 땅이 높은 곳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만약 이 제도를 한번 실시한다면 어느 땅이든 수확하지 못할 곳이 없을 것이므로 가뭄이 재앙이 되지 않고 농사는 반드시 해마다 풍년이 들 것이니, 어찌 백성을 이롭게 하고 재물을 넉넉하게 하는 일대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그 제도를 깊이 아는 자를 찾아서 먼저 수차 8대를 만들어 팔도에 나누어줌으로써 널리 보급하여 이익을 넓히는 길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재물을 낭비하고 곡식을 축내는 것은 술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경의 말이 과연 좋다. 너무 지나친 것을 금하는 것은 해당 관원이 있다. 재해를 당한 전결(田結)에 관한 일은 내분(內分)·외분(外分)을 막론하고 이미 모두 방백에게 맡겼으니, 이제 무슨 특별히 분부할 것이 있겠는가. 수원의 새 고을에 유호(儒戶)·장호(匠戶)·노비호(奴婢戶) 등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에게, 곡식을 팔아주는 예에 의해 돌보아 주자는 문제는 이미 10년 동안의 부역을 면제하고 또 생업을 보조하는 재물을 나누어주었다. 이 뒤로 그들이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주는 것은 해당 부사가 어떻게 여러모로 잘 요량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수어청·총융청 두 영문의 일은 갑자기 묘당에서 품의하여 처리할 일이 아니다. 둔전세(屯田稅)의 폐단은 방금 특별히 칙교를 내린 일이 있다. 각도에 환곡이 많고 적은 것이 고르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어찌 경의 말을 듣고서야 알겠는가. 지금 백성을 위해 폐단을 바로잡아야 할 것 중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이다. 그러나 많은 데서 덜어내 작은 데를 보태주는 정사가 아직도 일신되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한층 더 유의하고자 한다.
잡기 가운데 투전(投錢)으로 인한 폐단의 문제는 사대부들까지 모두 거기에 빠져 있다고 하니, 한 마디로 말해서 수치스러운 일이다. 집안에는 각기 부형들이 있을 것인데 그 부형들이 그것을 보고서도 막지를 않으니, 어찌 세상의 도의를 위해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경외에서 《소학》을 익히도록 신칙하는 일, 활쏘기 시험에서 몰기(沒技)한 군사들에게 급제를 내리는 대신에 후한 상을 주는 일, 영남의 밀성현(密城縣)과 북도(北道)의 영풍현(永豊縣)을 다시 설치하는 일, 폐사군(廢四郡) 가운데 먼저 두 군을 설치하는 일, 수차(水車)에 관한 일은 모두 묘당에 넘겨 신칙할 것은 신칙하고 아뢰어 처리할 것은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겠다.
경은 극노인으로서 한번 경연에서 만난 뒤로 자주 숨김없는 말을 올리니, 그 정성이 가상하다. 즉시 도백으로 하여금 음식물을 넉넉히 내리도록 하겠다. 앞으로도 만약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 부디 종전처럼 하고 게을리하지 말라."
하였다.
9월 20일 임진
홍억(洪檍)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이치중(李致中)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경상 도사 김계락(金啓洛)이 돌아와 상주(尙州)·거창(居昌)·진주(晉州)의 환곡에 관한 폐단을 진술하니, 진주의 환곡은 3분의 2는 남기고 3분의 1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규정을 삼도록 하고, 상주의 곡식은 적절히 헤아려 돈으로 만들고, 거창의 곡식은 수량을 나누어 돈으로 바치게 하라고 명하였다.
호서(湖西)의 살인 사건 죄수 김계손(金啓孫) 형제를 특별히 방면하였다. 계손은 전주의 백성이다. 그들의 아비가 남의 발길에 채여 하룻밤에 죽었으므로 고발하여 옥사가 이루어졌으나 그 원수가 곧 풀려나 도망쳐 숨어버렸다. 계손과 그 아우 김성손(金聖孫)은 쇠꼬챙이와 단도를 소매 속에 숨기고 한 해를 넘게 그 뒤를 추적하여 노성(魯城) 땅에서 찔러 죽였다. 충청 감사가 이 사실을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 문건을 보건대, 그 효성은 극히 감동스럽고 그 사정은 극히 측은하고 그 마음은 극히 애달프고 그 정성은 극히 가련하고 그 뜻은 극히 칭찬할 만하다. 이 중에서 한 가지만 있더라도 법에서는 마땅히 용서해줄 일인데 하물며 형제 두 사람이 이 다섯 가지 뛰어난 행실을 갖추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조정에서 만약 범범하게 보아넘기고 관례에 따라 ‘원수를 제 마음대로 죽이면 형장 60대를 친다.’와 ‘사실을 규명하기 전에 원수를 제 마음대로 죽이면 사형을 감하고 유배한다.’는 등의 법조문을 끌어댄다면 그 어찌 풍속을 돈후하게 인도하는 정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그 광경을 보고는 즉시 몸을 던져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반드시 보복을 하고야 마는 경우는 가끔 있는 일이지만, 계손 등은 예리한 칼을 만들어 각기 품속에 감추고서 많은 세월을 소모하고 많은 생각을 하던 끝에 원수가 적당히 처리되어 옥에서 나왔을 때 가까이 있으면 가까이서 지키고 멀리 도망가면 멀리 따라다니다가 끝내는 형제가 함께 손을 써서 복수를 하였다. 먼저 찌른 것은 형이고 다음에 찌른 것은 아우인데, 원수를 죽인 뒤에는 형제가 또 함께 관청에 자수하여 법에 따라 죽임을 받기를 청하였다. 옛사람의 이른바 ‘비분강개한 속에 죽기는 쉬워도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기는 어렵다.’ 한 말은 바로 계손 형제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의 사적은 비록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에 올리더라도 사실 지나치다는 혐의가 없을 것이다.
충청 감사에게 분부하여 즉시 계손 등을 석방하고 감영으로 불러들여 판부(判付)한 것을 베껴주는 동시에 원거주지인 전주목에 넘겨주도록 할 것이며 또한 감사에게 그의 처지를 살펴보아 특별히 거두어 등용하도록 하라. 호남과 같은 문명(文明)한 지방에는 반드시 인재가 많을 것이기 때문에 경시관(京試官)이 조정에 돌아왔을 때 본도의 인재에 대해 물어보고 거조(擧條)에 올려 하유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그런 뒤로 며칠이 되기 전에 이 계손 등에 관한 문건을 보았으니, 계손도 역시 인재가 아니겠는가. 지금도 작년 신여척(申汝倜)의 일에 관한 문건과 은애(銀愛)의 일에 관한 문건이 생각나는데, 그때에도 특별히 칭찬해주었지만 그들도 모두 인재였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인재를 찾는 일을 늦출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알 수 있다. 풍속을 돈후한 쪽으로 인도하는 측면으로 볼 때 즉시 도내에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 본조로 하여금 이 문건과 판부한 글을 열거하여 전라 감사에게 내려보내 즉시 선포하게 하도록 하였다.
9월 21일 계사
현직과 전직 각신(閣臣)을 불러 만나보고 어진(御眞)을 그리는 일을 길일을 택해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내각이 아뢰기를,
"어진을 그리는 일을 10년마다 거행하는 것은 일찍이 선대왕 때 정해진 규정이며, 신축년178) 에 전교하시기를 ‘선대왕 때 이미 시행한 규례를 따르고 오늘날 계승하는 뜻을 부여하여 지금부터 10년마다 한 벌씩 그리되, 송(宋)나라 때 천장각(天章閣)에 어진을 봉안한 예에 따라 규장각(奎章閣)에 봉안하라.’ 하셨는데, 올해가 그 차례에 해당됩니다. 교지를 내리시기를 아룁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허락하였다. 전교하기를,
"도감을 설치하는 것은 일이 너무 거창하니 단지 각신과 상방 제조(尙方提調)가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각신 채제공·오재순(吳載純)·서영보(徐榮輔)에게 감독을 하도록 명하였는데, 재순이 상소하여 사의를 표하니, 박우원(朴祐源)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영남 경시관 서영보가 돌아와 아뢰기를,
"풍기(豊基)·순흥(順興) 등 고을에는 회계 장부에 있는 좁쌀을 벼로 바꾸어 바치게 한 것이 몇해 전부터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벼는 좁쌀과 맞출 수가 없다는 이유로 또 다시 본색(本色)으로 바꾸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좁쌀은 토산 곡물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사오므로 백성들이 장차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런 말을 어찌 이처럼 뒤늦게야 들었단 말인가. 어려운 처지에 처한 민생을 구하는 일이라면 많고 적은 것을 따질 것이 없다."
하고, 해도에 좁쌀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9월 22일 갑오
경기의 각 고을에 사들여 보관 중인 곡식 2만 4천 석을 환자놀이로 이자를 받아 현륭원에 행차할 때 드는 비용을 대게 하였다. 경기 감사 서정수(徐鼎修)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9월 23일 을미
평안도 병마 절도사 이한풍(李漢豊)이 치계하여 서림(西林) 등 다섯 진의 환곡이 썩어버린 실정을 아뢰고 진장을 처벌하도록 요청하니, 상은 그 햇수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썩어버린 곡식은 모두 탕감해주고 진장은 책임을 묻지 말도록 명하였다.
9월 24일 병신
사릉(思陵)179) 을 참배하기에 앞서 전교하기를,
"선대왕께서 병진년180) 에 사릉을 참배하신 이후 거의 60년이 지나 또 이 능을 참배하니, 어찌 감히 선대왕 때 이미 실시한 고사를 계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 여흥 부부인(驪興府夫人) 경혜 공주(敬惠公主), 반성위(班城尉) 강자순(姜子順),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의 묘에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여량 부원군의 묘에는 작은 표석을 세우고 묘지기 두 가구를 두었다. 또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묘에도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강원 도사 윤치성(尹致性)이 돌아와 관동 지방의 민폐 4조항을 아뢰었다. 첫째는 영서 지방에서 서울에 바치는 무명을 전부 돈으로 대신 바치도록 허락하는 것이고, 둘째는 양구(楊口)에서 나는 백점토(白粘土)의 값을 올려주자는 것이고, 셋째는 홍천(洪川)의 귀보리 환자를 돈으로 갚도록 하자는 것이고, 넷째는 통천(通川)에서 말을 빌리는 돈을 탕감해주자는 것이었는데, 모두 따랐다. 전교하기를,
"가장 불쌍한 것은 강원도 백성들만 유달리 고통을 겪는 것이고 가장 가증스러운 것은 사옹원의 분원(分院)에서 멋대로 침해하는 것이다. 분원에서 구워 만든 것은 주원(廚院)181) 에 진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요즈음은 이른바 갑기(甲器)니 화기(畵器)니 하는 허다한 명칭들이 모두 전에는 없었고 요즘에 생긴 것들이다. 또 주발 하나 접시 하나도 진상에다 쓰는 것은 없으니, 이처럼 폐단을 끼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앞으로 백점토를 진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주원과 의견을 교환하여 그 사실을 조사해보고 수량을 줄여 정해주도록 하라. 만일 또 종전과 같은 일이 있을 때는 해당 감번관(監燔官)182) 을 양구 지방에다 정배(定配)하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이어 경기 감사로 하여금 광주 부윤을 시켜 분원에서 폐단을 일으키는 것을 조사하게 하는 동시에 괴상한 모양의 그릇을 법을 어겨 비밀히 만드는지의 여부를 특별히 사람을 보내 적간(摘奸)하고 만약 적발한 것이 있으면 모두 공적인 소유로 소속시킨 뒤에 장계로 알리도록 하였다.
9월 25일 정유
사릉에 가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해평 부원군의 자손 중 유생에게 건(巾)을 갖춘 복장으로 치제할 때 함께 참가하게 하였다. 정씨(鄭氏)의 11개 분묘를 능관(陵官)에게 전부 보살펴 땔나무를 하거나 소먹이는 일을 금하게 하도록 명하고, 그것을 능지(陵誌)에 싣도록 하였다. 정운기(鄭運耆) 등을 불러 만나보고 위로해주고 이어 운기를 본릉의 참봉으로 제수하였다. 또 영양위와 여량 부원군의 후손을 등용할 것을 명하였다.
어제(御製) 칠언 사운으로 된 율시(律詩)를 재실에 현판으로 걸고, 어가를 수행한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9월 26일 무술
승지를 보내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묘에 치제하였다.
사릉에 행차하였을 때 송계교(松溪橋)에 머물러 있으면서 별대(別隊)의 기병으로 하여금 먼저 주정소(晝停所)로 달려가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별장 임흘(任屹)이 사람에게 말재갈을 잡히고 종 둘을 끼고서 어가 곁을 지나 갔으므로, 임흘을 경기 연안에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朴宗岳)이 상소하여, 홍주(洪州) 등 31개 고을의 포병 봉족이 바치는 군포(軍布)를 전부 돈으로 바치고 청주 등 23개 고을의 포병 봉족의 절반에 대한 군포를 전부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백성의 정상을 중시하여 특별히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상언(上言) 24건을 판하하였다.
9월 27일 기해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였다.
규장각에서 아뢰기를,
"어진(御眞)을 그릴 때 여러 신하들이 들어가서 봉심(奉審)을 하는 예가 있는데, 삼가 각해의 전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숙종 계사년183) 에 초본(草本)을 봉심할 때는 시임과 원임 대신, 국구(國舅)와 2품 이상의 도위(都尉), 승지·대사간 그리고 옥당(玉堂) 1원이 참가하였으며, 상초본(上綃本)을 봉심할 때는 시임과 원임 대신, 문무 2품 이상, 육조 당상관 그리고 시임과 원임의 옥당 4원이 참여하였고, 표제(標題)를 쓸 때에는 시임과 원임 대신, 종신(宗臣), 문무 2품 이상 그리고 전임 옥당 관리와 전임 양사(兩司)의 관리 중에서 군직을 갖고 있는 자들이 봉심하였습니다. 선왕조 갑자년184) 에는 정본(正本)을 표구한 뒤에 시임 대신과 약원 제조(藥院提調)와 예조 판서가 들어가 보았으며, 계미년185) 에 정본을 장정한 뒤에는 대신과 비국 당상, 편집한 사람, 승지들, 경연 특진관, 옥당의 상하번(上下番)이 들어가 보았습니다. 계사년186) 에 초초본(初綃本)을 봉심할 때는 봉조하와 시임과 원임 대신, 육경(六卿), 여러 승지들, 내의원 제조가 참가하였고, 상초본을 봉심할 때는 단지 도감 당상관만 들어가 보았으며, 표제를 쓰기 하루 전에 봉조하, 시임과 원임 대신, 구경(九卿), 비변사 당상관, 승지들, 서울에 있는 옥당, 정1품 종신·도위(都尉), 양사의 장관 및 2품 가운데 들어온 사람과 옥당을 지낸 사람 중 들어와 기다린 사람들이 들어가 참가하였습니다.
계축년187) 과 정축년188) 두 해에는 일기(日記)를 두루 상고해 보아도 들어가 본 신하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계축년의 일기는 나중에 보충하여 기록한 것이므로 그것이 소략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정축년에는 어제(御製)의 글 가운데 이미 어용(御容)에 관한 일로 하교가 있으셨으니, 그 당시 편집했던 사람과 근신들은 필시 들어가 보았을 것이나, 일기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 또한 반드시 기록을 소략하게 했기 때문일 것인데 지금은 달리 상고해 볼 길이 없습니다.
전하의 어진을 그릴 때는, 초본을 봉심할 때는 시임과 원임 대신, 각신이 들어가 참가했고, 표제를 쓸 때 봉심은 시임과 원임 대신, 각신, 비변사 당상, 도위가 들어가 참가하였는데 이번에는 어느 해의 전례를 따라 마련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삼가 살펴보니, 숙종 계사년 초본을 봉심할 때는 하루 전날 문무 종신, 여러 차례 입시한 사람, 옥당의 직을 전에 지냈던 사람들을 정원에서 뽑아 아뢰었습니다. 품지(稟旨)하여 거행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의식 절차는 마땅히 간략하게 해야 하니, 내일 초본(草本)을 그릴 때 상초본을 만드는 것도 겸해 시작할 것이며 들어와서 보는 신하들에 대해서는 그 대상을 뽑아 아뢰는 규례가 고금이 서로 다른 법이니, 이번에 초본을 들어와 볼 때는 시임과 원임 대신, 각신·종친·의빈(儀賓)·정부의 서벽(西壁)189) , 육조의 장관이 들어와서 보도록 하라. 정본(正本)의 경우는 소중한 곳에 모셔 봉안할 것이니, 의식 절차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시임과 원임 대신, 각신·종친·의빈·문관과 음관 출신의 정경(正卿) 이상, 무신·장신(將臣)·옥당이 들어와 참가하게 하라."
하였다.
양사가 유생들에 대한 정거(停擧)와 대간들에 대한 유배와 수문장이 상소문을 막도록 한 명을 철회할 것을 청하였다. 헌납 이경운(李庚運)이 또 아뢰기를,
"각문의 수문장들이 금법에 어긋나지 않는 상소문이라도 혹시 상소문 속에 금지령에 저촉되는 말이 끼어들어가 있을까 염려하여 칼을 잡고 문을 막아서는 일까지 있어 국가의 체통을 크게 손상시키고 보고 듣기에도 해괴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명색이 대간이고 명색이 연명 차자라고 하면서 성실하지 못하기가 불경(不敬)에 가까웠으니, 법을 한 등급 감해준 것만도 대간들의 입장으로서는 관대한 법 중에서도 관대한 법이라 할 수 있다. 어찌 감히 날짜가 조금 지났다 하여 입을 열어 속을 엿볼 생각으로 이처럼 어려워할 줄 모르고 말을 한단 말인가. 너의 행위는 천만 온당치 못하다. 더구나 유배한 자들을 곧바로 석방하는 조치를 내린다면 몇백 년 이어온 대간의 기풍이 장차 모두 없어질 것이니, 이를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
수문장의 문제는 사실 그런 일이 있다면 금법을 설치한 본뜻과는 전혀 틀린 것이다. 당당하게 국사를 말하는 상소문이 수문장에게 저지당했으니, 어찌 이런 원칙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병조의 당상관이 능히 신칙을 하지 못한 결과이니, 요즈음 입직한 당상관을 추고하라. 이것은 원칙을 유지할 문제는 유지시키고 금령을 굳게 지킬 문제는 굳게 지키고자 하는 뜻이다. 만약 이 신칙하는 분부로 말미암아 금령까지도 함께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는 일이 있다면, 병조 당상관을 엄하게 처벌하고 수문장을 죄주는 조처를 반드시 시행하겠다. 이 뜻을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직산현(稷山縣)의 객사에 있던 전패(殿牌)를 분실하였다는 것으로 충청 감사가 치계하니, 하유하기를,
"만약 형벌이 가혹하지 않고 정사가 각박하지 않았더라면 비록 사람 통행이 많고 풍속이 사나운 본 고을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풍속이 사나운 고장을 다스릴 때는 마땅히 엄격해야 하고 관대해서는 안되는 법이지만 엄격하게 하는 것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다. 풍속을 다스리는 적절한 방법을 모르면 반드시 자신이 먼저 잘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간악한 백성이 농간을 부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런 수령을 처벌하는 데는 법에 구애될 것이 있겠는가. 전패를 분실한 것에 대한 본률(本律)로 처벌하고 싶지만, 완악한 풍속이 이로 인해 더 기승을 부릴까 염려되어 우선은 처분을 내리지 않겠다. 그로 하여금 기한을 정해놓고 범인을 잡아내도록 하고 기한 내에 잡지 못하면 규례에 따라 다시 만들게 하라."
하였다. 현감 이유수(李儒修)는 정사에서 가혹하게 하는 것을 앞세우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나온 것이다.
9월 28일 경자
서향각(書香閣)에 나아가 어진(御眞)의 상초본을 그렸다. 규장각이 아뢰기를,
"삼가 상고하건대 선대왕 갑오년에 그린 한 폭은 관대(冠帶) 차림이고 신축년에 그린 한 폭도 관대 차림이었으며 계축년에 그린 두 폭 가운데 한 폭은 곤복 차림이고 다른 한 폭은 관대 차림이었습니다. 갑자년에 그린 세 폭 가운데 두 폭은 면복 차림이고 한 폭은 곤복 차림이며, 계유년과 그후 5년 뒤인 정축년에 그린 두 폭 가운데 한 폭은 사립도포(絲笠道袍) 차림이고 한 폭은 관대 차림이었으며, 계미년에 그린 한 폭은 원유관(遠遊冠) 차림이고 계사년에 그린 두 폭은 모두 곤복 차림이었습니다. 전하의 신축년에 그린 어진은 곤복 차림이었는데 이번의 경우는 어느 해의 전례대로 거행해야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선대왕께서는 나이 50세 때 그린 어진부터 비로소 면복 차림을 갖추셨는데, 나는 금년에 아직 선대왕께서 면복 차림을 하셨던 나이가 되지 않았으니, 강사포(絳紗袍) 차림을 해야겠다."
하였다. 상이 들어와 어진을 본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도감을 설치하지 않은 것은 일을 크게 벌이지 않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훗날에도 역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그 일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뒷사람들이 앞으로 기준을 삼을 곳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의 격식을 약간 높여 뒷사람들에게 법도를 보여주자는 것이다."
하였다.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서총대(瑞蔥臺)의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다.
평안 도사 김방행(金方行)이 돌아와 도내의 폐단 가운데 민고(民庫)가 가장 큰 폐단의 근원이라고 진술한 뒤에 또 아뢰기를,
"충장위(忠壯衛)와 충찬위(忠贊衛)는 전사자의 자손과 공신의 자손으로 충정하는 것인데, 경사(京司)에서 엄히 독촉하는 것 때문에 순안현(順安縣)의 경우 덧붙여 보고한 것이 매우 많아서 폐단이 한량없습니다. 다 도신에게 특별한 규례로 구제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충익위 등에 대하여 규정을 정해 공납을 줄여준 뒤에도 이들에게는 명칭이 약간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과 똑같이 공납을 면제해주지 못했으나 이들은 다 공신과 순절한 사람의 자손인데도 아무 관계도 없는 침탈을 그들만이 혹독하게 받고 있으니, 어찌 불쌍하지 않겠는가. 본도에 엄히 신칙하여 무인년에 상정(詳定)한 것 외에는 다시 거론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황해 도사 유성한(柳星漢)이 돌아와 폐단이 되고 있는 염전·둔전·군정(軍丁)과 돌림병에 대해 고을의 보고 속에서 누락된 일 등을 진술하였다. 상이 불러 만나보고 자세한 내용을 물은 뒤에 묘당에서 품의하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성한이 아뢴 것이 너무 복잡하니 만약 그대로 시행하자면 이는 곧 제도의 개혁이 됩니다. 한(漢) 문제(文帝)가 ‘말을 시행할 수가 없는 것이면 내버려두라.’고 말했는데, 신도 역시 이 일은 내버려두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하였다.
9월 29일 신축
정태을(鄭太乙)이란 자가 자신은 시노(寺奴)가 아닌데도 시노로 침해를 당했다 하여 징을 쳐서 원통함을 호소하니, 형조에서 태을은 시노가 아닌 것이 사실이라고 복주(覆奏)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 사정(査正)은 백성들을 위해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지극한 정성과 고심에서 나온 것인데, 이 때문에 도리어 소동이 잇따르게 되었으니, 조정에서 백성을 속인 것을 모면할 수 없게 되었다.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여러 도에 사정을 빙자하여 멋대로 양민을 침탈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김방행(金方行)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팔도에서 장마로 무너지고 깔린 집을 구제해준 수효를 올렸다. 【경기에는 9백 42호에 구제해준 것은 벼가 6백 37석이고, 충청도는 6백 48호에 구제해준 것은 벼가 3백 88석이고, 전라도는 2천 1백 69호에 구제해준 것은 쌀이 1천 22석이고, 경상도는 1천 6백 38호에 구제해준 것은 벼가 1천 10석이고, 강원도는 1백 38호에 구제해준 것은 쌀이 63석이고, 황해도는 31호에 구제해준 것은 쌀이 14석이고, 평안도는 1백 81호에 구제해준 것은 쌀이 84석 10두이고, 함경도는 33호에 구제해준 것은 쌀이 15석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45면
【분류】과학-천기(天氣) / 주생활(住生活) / 구휼(救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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