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계묘
단풍정(丹楓亭)에 나아가 초계 문신에 대한 친시(親試)와 시사(試射)를 실시하였는데 여러 문신들이 대부분 활을 쏘지 못하니, 시험을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여러 문신들에게 모화관(慕華館)·연융대(鍊戎臺)·성북둔(城北屯)·북영(北營)·훈련원 등에 나누어 숙직하면서 활쏘기를 익히도록 명하였다.
고 부원군 구사맹(具思孟), 판중추 정세호(鄭世虎), 부원군 박응순(朴應順)의 묘에 치제하였는데, 그 묘가 사능(思陵)에 행차하는 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10월 3일 갑진
이조 참의 심환지(沈煥之)를 파직하고 서용보(徐龍輔)로 대신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이문원(李文源)이 길주(吉州)·명천(明川)·부령(富寧)·경성(鏡城) 등 네 고을의 수재 상황을 아뢰니, 떠내려갔거나 무너진 민가에 대해서는 모두 신포(身布)를 줄여 줄 것을 명하였다.
10월 4일 을사
전교하였다.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묘비에 효종(孝宗)의 어휘(御諱)가 실려 있으므로 선대왕께서 비각을 세워 덮도록 명하셨는데, 이제 들으니 비각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경기 감사에게 다시 고쳐 세우게 하라."
10월 5일 병오
어용겸(魚用謙)을 경기 연안에 유배하였다가 이어 속전을 대신 바치도록 허락하고, 의금부 당상 정존중(鄭存中) 등에게 서용하지 않는 벌을 실시하였다. 이보다 앞서 용겸이 종묘의 대축(大祝)으로서 재실로 가던 길에 재신(宰臣) 김지묵(金持默)을 만나 말에서 내리지 않으니, 지묵이 용겸이 데리고 가던 하인에게 매를 쳤다. 용겸은 데리고 가던 하인이 매를 맞은 것이 불결하다 하여 재실로 가지를 않았다. 하옥하고 심문하니 사실대로 공술하였다. 판부하기를,
"데리고 가던 하인이 매를 맞은 일이 그가 깨끗이 재계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감히 되지 않는 말로 방자하게 공술하는가. 듣건대 나이 많은 부모가 계신다 하니 경기 연안에 도 일년(徒一年)으로 유배하되, 속전으로 대신 바칠 수 있도록 허락한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용겸이 공술한 말은 상식에 가깝지 않다. 그처럼 중대한 죄를 지은 그가 이와 같이 당돌한데도 당당한 의금부가 그가 놀리는 입만 쳐다보고 있었으니, 금부 당상관에게 서용하지 않는 처벌을 빨리 시행하라."
하였다.
지평 최중규(崔重圭)가 아뢰기를,
"전일 양사의 연명 차자는 대체로 국법을 엄격하게 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같은 대간으로서는 더욱 응당 한 목소리를 내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것인데, 여러번 통문을 보냈는데도 시종 교묘하게 회피하면서 단지 수문장에게 저지당한 상소문 문제만 가지고 비방을 모면할 밑천거리로 삼았습니다. 전 대사헌 신응현(申應顯), 전 지평 김경(金憬)에게 서둘러 사적(仕籍)에서 명단을 삭제하는 처벌을 적용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흉년에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는 재해에 관한 정사가 가장 중요한데, 표재(俵災)를 할 때 해당 아전이 그 수량을 늘려 수령에게 보고하고, 수령은 거기에다 또 늘려 감영에 보고하고, 감영은 거기에다 또 늘려 비변사에 보고합니다. 그러다가 구제곡을 나누어 줄 때는 감영에서부터 해당 아전까지 차례차례 절반씩 떼내어 모두 개인의 주머니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국가의 경비만 손상시키고 백성들에게는 실다운 혜택이 없었습니다. 청컨대 금년부터는 여러 도의 재해에 관한 정사에는 어사를 별도로 보내 공평하게 나누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신응현·김경 등의 일은 성명을 숨기고 쓰지 않는 것은 일정한 격식에 어긋난다 하여 그들과 연명을 하지 않은 것이니, 장려할 일이지 죄줄 일은 아니다. 빨리 정계(停啓)하라. 말단의 일은 명색이 감영으로서 어찌 절반을 떼낼 리가 있겠는가. 비록 어사를 별도로 보내 표재(俵災)를 감독한다 하더라도 어찌 어사 한 사람이 3백 60개 고을의 면(面)·리(里)마다 돌아다니면서 매사람에게 구제곡을 나누어 줄 수 있겠는가. 경차관(敬差官)도 오히려 폐단이 있어 옛날에는 있었던 것이 지금은 없어졌는데, 하물며 어사이겠는가. 폐단을 방지하자는 뜻은 실로 이해하겠으나 이는 결코 따르기 어려운 요청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정언 박윤수(朴崙壽)가 아뢰기를,
"동료 대간들이 수문장이 상소문을 막는 일을 가지고 이미 새로 아뢰는 일을 시작하였으나 성상의 비답을 받고 보니 따르겠다는 하교는 단지 금지 조항 이외의 것에만 해당되었습니다. 그 뒤 대각에 들어간 신하들은 마땅히 연명 차자를 올려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상소를 막는 일에 대해 정계(停啓)한다는 말이 조보(朝報)에 실려 반포되어, 보고 듣는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정계한 대간들에게 파직의 벌을 적용하소서.
한 달에 여섯 번씩 접견하는 것은 법의 의미가 중요한데, 빈연(賓筵)에서 아뢰는 일이 중지된 지가 거의 한 달이 지났습니다. 올 가을 농사가 희망이 없게 된 것을 보면, 그에 대해 계획하고 대처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해당하는 날을 건너뛰지 말고 전례대로 접견하게 하소서.
삼수(三水)·갑산(甲山)·이성(利城)·단천(端川) 등 네 고을은 오랜 장마로 손상을 입은데다가 이른 서리로 재해를 당했으니, 지금 백성들의 실정은 참혹한 흉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특별히 구제하는 방책을 강구하게 하소서.
국법은 탐오를 징계하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두기 때문에 그 죄를 범한 자는 비록 석방되는 은전을 받더라도 전조(銓曹)에서는 감히 규례대로 의망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그 법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전 군수 신엄(申曮)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은데도 유배되자마자 곧 용서를 받았고, 그런 지 얼마 안되어 열흘 이내에 있었던 인사 행정 때 곧장 의망하여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하였으니, 해당 전장(銓長)을 무겁게 추고하소서.
1백 세 노인 신의청(申義淸)에게 특명으로 총관(摠官)을 제수하고 포백(布帛)을 넉넉히 준 것은 사실 노인을 우대하고 돌봐주는 거룩한 덕에서 나온 것인 줄 알겠습니다만, 그 아들 신병권(申秉權)은 문벌이 한미하고 인물 또한 어리석은데 거두어 등용하라는 명이 있으셨으니, 은전이 너무 지나칩니다. 교관(敎官) 벼슬로 말하면 본디 음관의 깨끗한 벼슬자리로서 누구에게나 함부로 제수할 수 없는 것인데, 전조에서 갑자기 그를 여기에 의망해 넣었으니, 관리 임용의 법칙에 어긋납니다. 청컨대 교관 신병권을 빨리 체직하도록 명하시고 해당 전관(銓官)을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정계(停啓)한 대간의 문제는 정계를 할 만하면 정계를 하는 것이니, 어찌 한 번 제기하면 감히 멈추지 못하는 대간의 체모가 있는가. 차대(次對)를 하는 문제는 요즘 대신이 매일 조정에 나오기 때문에 묘당에서 계책하는 일들이 하나도 정체되는 것은 없으나, 네 말은 옳다. 북도 네 고을에 관한 문제는 일전에 이미 도백에게 특별히 효유하였으나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해당 도에 신칙하게 하여 구제해 주는 대책을 사리를 따져 장계로 아뢰게 하겠다.
신엄을 의망한 문제는 그가 범한 죄가 장오죄와는 약간 다르지만 지난번 어용겸(魚用謙)의 일로 처분을 받은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또 어찌 감히 이와 같은 일이 있단 말인가. 해당 전관(銓官)의 일은 극히 놀랍다. 의례적으로 추문하는 것만으로 그칠 수는 없으니, 함사(緘辭)하여 무겁게 추고하라. 교관 신병권을 체직하자는 것과 전관을 추고하자는 일은 지나치다. 그의 문벌은 문제될 것이 없다. 더구나 교관은 침랑(寢郞)190) 과 달라 일찍이 등용한 관례가 있고 또 더구나 특명이 내린 경우이겠는가. 네가 이미 지나치다고 했으니 그를 적절히 처리하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신병권은 해조로 하여금 6품으로 올려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6일 정미
양사에서 여러 유생을 정거시킨 명을 거두고, 신응현 등을 사적에서 삭제하고, 금령을 내린 것을 빨리 중지시키고, 유배시킨 대간들을 용서해 놓아주고, 정계를 한 대간들을 견책하라는 등의 일을 연계(連啓)하니, 전교하기를,
"말을 하게 하면 금령에 관계되는 계사가 종일 터져나오고, 이런 것이 없으면 감히 다른 말은 하지를 않으니, 와서 말을 하게 한 뜻이 도리어 말을 막아버리는 단서만 열어놓게 되었다."
하고, 계사를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민종현(閔鍾顯)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호서의 노비 공납을 전부 돈으로만 거두는 것으로 규정을 정할 것을 명하였다.
10월 7일 무신
어진(御眞)이 완성되었다. 서향각(書香閣)에 나아가 여러 신하들에게 들어와서 보고 예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또 어진을 규장각의 주합루(宙合樓)에 봉안하도록 명하고 이어 경모궁(景慕宮)을 참배하였다. 어진 소본(小本)을 본궁의 망묘루(望廟樓)에 소장하였으니, 영조가 소본을 육상궁(毓祥宮)의 봉안각(奉安閣)에 소장한 고사를 따른 것이다. 일을 감독한 모든 신하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는데, 일을 도맡아 추진한 각신 채제공에게는 내구마(內廐馬)를 지급하고, 감독한 각신 박우원(朴祐源)과 상의원 제조 정창순(鄭昌順)·서호수(徐浩修)와 부제조 서매수(徐邁修)에게는 표피(豹皮)를 내려 주었고, 도청(都廳)인 각신 서영보는 당상관 3품직으로 승진시켰다. 전교하기를,
"지사 윤동섬(尹東暹)은 72세 때에도 그림을 그렸고 82세가 되어서도 또 그렸는데, 그 필력이 더욱 힘차니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의복거리와 음식물을 넉넉히 지급하라. 호조 참의 조윤형(曺允亨)은 전날 계방(桂坊)의 옛 관리로서 나이가 거의 70인데 아직도 3품의 반열에 있으니, 총관(摠官)으로 의망하여 들이라."
하였다.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입직(入直)한 각신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어진을 그리는 거룩한 의식도 순조롭게 끝나고 경모궁에 문안드린 행차도 무사히 돌아오니, 경사스러운 복이 많이 찾아와 만백성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선대왕 계축년의 고사를 따라 금년에 또 한 폭을 그렸다. 이것이 비록 조상의 뜻을 계승하는 하나의 일이 될 수는 있겠으나, 지난 10년 동안에 정사와 교화가 나날이 융성해진 성과가 있었으며 세상의 도리가 나날이 새로워진 아름다움이 있었으며 시속의 기상이 나날이 안정되는 기미가 있었으며 백성들이 나날이 안녕을 누리는 기쁨이 있는가? 공평하게 따져보면 예전과 다름없고 다만 희끗희끗하던 머리가 하얗게 변하여 화공(畵工)의 붓끝에 흰색을 섞어 사용하였으니, 부끄럽고 또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소본(小本) 한 폭을 경모궁의 망묘루(望廟樓)에 소장하여 아침저녁으로 살펴보는 예를 가늠하고 나의 우러르고 의지하는 생각을 붙일 수 있게 되었으며, 나머지 한 폭은 또 장차 현륭원의 재실에 소장하려고 하니, 이것이 바로 기쁘게 여기는 까닭이다."
하였다.
10월 8일 기유
우레가 쳤다. 반찬 가지수를 줄이고 구언(求言)하였다.
장령 박서원(朴瑞源)이 아뢰기를,
"충청우도의 시험을 관장한 것이 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으니, 마땅히 파방해야 합니다. 신기경(愼基慶)의 상소는 비루하고 외람된 말이 많으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파방하는 일은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신기경의 일은 초야에 묻힌 노인의 말을 어찌 꼭 깊이 책망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경연을 오랫동안 중지하여 강론하고 품의하는 일은 한갓 겉치레가 되었고 홍문관의 관직은 결국 쓸모없는 한 관직이 되었으며, 우유부단한 습속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징계하고 성토하는 공정한 의논까지도 거의 폐기되는 등, 온 세상이 그에 휩쓸려 그만 말이 없는 조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일전에 신칙하신 하교는 바른말을 들어오게 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꼭 오늘 한 마디 말을 진언하고 내일 또 한 가지 일을 논의하게 하신 것이 마치 글을 배우는 생도들에게 일정을 갈라 과제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계속 이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은 외람되고 잡스러운 것을 아뢰게 되어, 구차하게 책임을 메꾼다는 비난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하께서 독촉하시는 것은 아마 정성을 쌓아 도움을 청하시는 것이 더 올바른 것만 못할 것입니다.
사안이 엄중히 성토할 일에 관계되는 것은 금지 조항을 만드셔서 당당한 언로를 무식하기 짝이없는 무사에게 넘겨 상소문의 취사와 출납을 그의 역량에 맡겼으니, 이 한 가지 일은 아마도 입을 틀어막는 큰 관건이 될 것입니다.
관작은 군주가 세상사람을 격려하고 무딘 것을 날세우기 위한 큰 권한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조급하게 벼슬길을 다투는 것이 습속이 되고 요행수나 바라는 것을 일삼은 결과 금띠를 두루고 옥관자를 단 사람은 조정에 가득 찼지만 문학과 정사를 아는 자는 몇 사람이 안 됩니다. 전장(銓長)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데 본디 이력도 없는 사람을 천거하기를 어렵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까. 또 중비(中批)는 매우 신중히 하셔야 할 일인데도 내외의 관직을 제수할 때 지나친 은혜를 베푼 경우가 많습니다. 음직으로 처음 벼슬길에 나가는 자는 곧 장차 수령이 될 사람이니 아무에게나 가볍게 줄 수가 없습니다. 명색이 향천(鄕薦)이라 하지만 연줄을 타고 수령자리를 얻으려는 무리들이 있고, 가문의 공로로 보임되는 경우에도 너절하고 더러워 어울리지 않는 폐단이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에게 백성과 사직을 맡긴다면 그들이 과연 임금과 근심을 나누는 책임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기강이 잡히지 않아 천한 자가 귀한 자를 능멸한다는 탄식이 있고, 사치가 점차 만연되어 백성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는 폐단이 있습니다. 예악 문물은 찬란하게 빛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실다운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상서로운 현상이 보이지 않으니, 하늘에 응하기를 성실함으로 해야지 형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있어 과연 성상의 마음에 겸연쩍으심이 없으시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한층 더 마음을 가다듬고 기강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재변을 바꾸어 상서로움으로 돌이킬 방도를 깊이 생각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당면한 정사에 대해 나열한 여러 조항은 무슨 일과 어떤 사람을 지적하여 진술한 것인지 하나 하나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말은 모두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경연에 관한 문제는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다. 지난 번 전 옥당 이의봉(李義鳳)이 입시하였을 때 비로소 내 본의를 다 말하였는데 그것은 의봉이 주연(胄筵)191) 의 옛 관리로서 처음으로 옥당의 관리가 책을 펴고 강론하는 자리에 올라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을 한번 말했을 따름이다. 말이란 문자와는 달라서 조정의 신하들만 그 뜻을 모를 뿐 아니라, 너희들처럼 나의 가장 측근에 있는 사람도 여전히 깜깜한 형편이므로 또한 부득이 간략하게 깨우쳐줬던 것이다.
상소문을 문에서 막는 일에 이르러서는 너희들의 말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런 처분을 내린 것이 또한 어찌 하고 싶어서였겠는가. 한 수문장이 삼사(三司)의 상소를 막는 것이 어찌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삼사가 만약 내 뜻을 받들어 따른다면 금령은 저절로 철회하게 될 것이니, 너희들은 이를 삼사에 말해주길 바란다."
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성학(聖學)을 부지런히 하고 언로를 열고 징계와 성토를 엄격히 하고 기강을 세우고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는 것을 수양하는 방도로 삼기를 청하니, 너그러운 말로 비답을 내리고 좋게 받아들였다.
양사가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기를,
"승지들은 부당한 왕명을 반납하는 원칙을 알지 못하고 대간들은 면전에서 반대하고 조정에서 간쟁하는 기풍을 몰라 목구멍과 혀의 기능이 원활하지 않고 귀와 눈의 기능이 장차 막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재앙을 부른 근본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크거나 작은 일을 막론하고 대간 한 사람이면 할 수 있는 문제도 걸핏하면 다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고 있으니, 이는 옛날 법도가 아니다."
하고, 정원에서 엄히 금지하도록 신칙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차자를 올려 삼 정승 자리를 충원할 것을 청하기를,
"군왕의 기강이 나날이 가벼워져 가는데 그것을 위엄있게 할 사람은 누구이며, 공론이 거의 없어졌는데 그것을 감독할 사람은 누구이며, 조정 대신들 사이에 청렴한 기풍이 완전히 없어졌는데 그것을 규찰할 사람은 누구이며, 사대부의 집에 문학하는 사람들이 거의 끊겼는데 그것을 교화할 사람은 누구이며, 백성들 가운데 원망과 탄식이 자주 일어나는데 그들을 무마할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군왕의 기강과 공론과 청렴한 기풍과 문학을 하는 기풍과 백성들의 걱정 등은 곧 당면한 정사 가운데 먼저 손꼽고 먼저 힘을 써야 할 것들이다. 그것을 위엄있게 하고 감독하고 규찰하고 무마시키는 일은 경이 책임지고 내 뜻을 받들어 보좌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상이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한쪽 말만 들으면 간사함이 생기고 혼자에게만 맡기면 변란을 초래하는 것이지만, 경에 대해서야 내가 어찌 이런 걱정이 있겠는가."
하니, 채제공이 머리를 숙여 사례하였다.
10월 9일 경술
천둥이 치고 비가 왔다. 상참(常參)을 받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백척간두(百尺竿頭)의 급박한 처지에서 한 걸음 호전되는 쪽으로 나가는 것으로는 성상의 자질 가운데 부족한 점부터 깊이 반성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시경》 기욱장(淇澳章)의 ‘슬혜한혜(瑟兮僩兮)’라는 대목을 주자께서 해석하기를 ‘슬(瑟)은 엄밀한 모양이고 한(僩)은 강인한 모양이다.’ 하였습니다. 삼가 보건대 성상의 모든 정사에 관한 명령과 조처하시는 데서 부족한 것은 강인한 점입니다. 강인한 점이 부족하기 때문에 왕자의 기강이 나날이 가벼워지는 걱정이 있으며 나라의 정사가 위축되는 조짐이 많은 것이니, 이러고서야 어찌 가히 ‘혁혁하고 성대하여 끝내 잊을 수 없다.’라고 한 성과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정문일침(頂門一鍼)이라 할 만하다. 대체로 당면한 현상이 이와같은 것은 왕자의 기강이 바로잡히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그 파급되는 폐단은 자연 기풍이 위축되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 상황은 옛날의 시대 상황과 다르다. 이른바 사대부들이라 하는 자들의 꼴은 마치 한겨울에 따뜻한 방안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추위에 떠는 병든 노인과 흡사한데, 이런 자들에게 서리나 눈처럼 매서운 위엄을 가하면, 어찌 단지 ‘무슨 풀인들 시들지 않으리.’ 하는 탄식만 있을 뿐이겠는가. 이 때문에 감싸주는 것이 병통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승기탕(大承氣湯) 같은 강력한 처방을 못하는 것이니, 한밤중에도 일어나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하지 않은 때가 없다.
이처럼 때아닌 우레가 계속 울려 자신을 수양하고 반성해야 할 때에 분발하고 힘써야 한다는 뜻을 극진하게 말해 주니, 그 말은 바로 내 병통을 치료하는 값진 처방이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대사헌 조종현(趙宗鉉)이 아뢰기를,
"승지들이 상의 뜻만 받들어 따르고 대간은 말이 없이 적막하여 전혀 내실을 힘쓰는 뜻이 없습니다. 대간의 계사를 되돌려준 것은 장차 한없는 폐단을 열어놓을 것이니, 후세에 편안함을 물려주는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표재(俵災)는 막대한 정사이므로 감영과 고을에서 분배할 때는 고르게 하기를 힘써야 할 것인데 아전들이 그 과정에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전에 대간의 계사에서 ‘절반을 떼어낸다.’는 말은 수령도 오히려 차마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도백이겠습니까. 그 말이 매우 해괴하니, 지평 최중규(崔重圭)를 파직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물론 그 말이 사실을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인 줄 알지만 경의 말도 옳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부제학 민종현(閔鍾顯) 등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염치보다 더한 것이 없고 사대부가 숭상하는 것으로는 명예와 절개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는 명예와 절개가 없어지고 염치와 예법이 무너졌습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매우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역시 남에게서도 소중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일전에 대간이 논한 급재(給災)의 문제로 보더라도 한 시대의 모든 방백과 수령을 염치없고 명예를 먹칠한 지경으로 몰아넣는데, 그 말이야 비록 족히 책망할 것도 못 되지만 그 세도(世道)를 위한 걱정이 되는 것은 큽니다. 삼가 바라건대 염치를 배양하고 명예와 절개를 부식함으로써 조정이 환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대간의 논계는 그 사안이 각별하므로 아뢰는 것을 중지하거나 계속하거나 하는 것은 한결같이 공론에 맡겨야 하니, 비록 존귀한 군부라 하더라도 어찌 그 과정에서 지휘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이 쓸 만한 것이면 오직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그 말이 쓸 만하지 않으면 역시 마땅히 내버려두어서 너그럽게 용납하는 방도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일전에 대간의 계사를 되돌려주라고 하신 명령은 실로 천만번 중도에 지나친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명을 거두시고 아울러 다시 들여오도록 명하여 비답을 내리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겨울철에 우레가 치는 걱정은 무엇보다도 다음 해와 관계되는 것이니, 곡식을 비축하는 방도를 조금도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모두 좋게 여겨 받아들였다.
정창순(鄭昌順)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교리 이청(李晴)이 상소하기를,
"대체로 전하의 총명하고 지혜로우신 성덕(聖德)으로 오늘날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을 보면 능히 만에 하나라도 전하의 생각을 받들지 못할 것이니, 혼자서 신통한 기략을 운용하시면서 여러 신하들을 낮게 보시는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순(大舜)과 같은 덕으로도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취해서 자신의 선으로 삼았으니, 어찌 당시 사람들이 모두 순임금보다 훌륭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순임금이 순임금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주역(周易)》의 괘상(卦象)으로 말하더라도 천기(天氣)가 아래로 내려오고 지기(地氣)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태괘(泰卦)가 되고 천기가 위에만 있고 지기가 땅에만 있는 것이 비괘(否卦)가 되니, 기운이 막히느냐 통하느냐 하는 것은 단지 위 아래가 서로 사귀느냐 사귀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신이 임금의 권한이 너무 높은 것에 대하여 근심하는 까닭입니다.
지금의 중요한 방도는 오로지 인재를 골라서 책임을 나누어 맡기는 데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관직의 여러 업무를 모두 임금께서 친히 하시려 한다면 소소한 일들이야 제대로 된다 해도 대체에는 손상이 있게 됩니다. 총명을 너무 번거롭게 쓰면 정신이 쉽게 손상되는 것이니, 성상께서 비록 이런 일을 즐겨 피로를 모르는 열성이 있다 하더라도 사실 건강을 돌보는 방도에는 결함이 됩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자신을 가볍게 생각하시더라도 저 종묘와 자전 및 자궁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삼가 요즈음 언관으로서 국사를 논열(論列)하는 것을 보면 항상 상의 뜻이 어디로 향하는가를 보아서 그것으로 의리를 결정합니다. 천하의 의리란 지극히 공정하여 본디 확고부동한 명분이 있는 법이니, 수시로 이리 저리 바꾸어서 오직 임금의 뜻에 맞추는 것만을 일삼는 것이 그 어찌 의리의 바른 모습이겠습니까.
관직을 위해 인재를 고르는 것은 하늘이 맡겨준 직무를 수행하고 민생을 위해서입니다. 우리 전하의 고심과 성의는 간곡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인재를 등용하고 버릴 때 능히 사적인 인정을 돌아보는 경우가 없지 않아 진퇴시키는 과정에 혹 사적인 은혜와 사랑이 개입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재주와 기량이 마땅한가의 여부를 미처 신중히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덕망이 높고 낮은 것에 대해 간혹 미처 저울질하여 살피지 못함으로써 요행의 길이 점차 열리고 관직을 제수하는 길이 많이 난잡해졌습니다. 방백으로서 죄를 지은 자가 다시 방백으로 보임되고 수령으로서 죄를 지은 자가 도로 수령으로 보임되며, 사람들이 혹시 참람한 관직이라고 말하면 다시 그 관직을 올려주고 만약 내직(內職)에 싫증이 나서 기피하는 자가 있으면 곧 기름진 고을을 맡겨줌으로써 맑은 조정의 관직 이동이 마치 희극과 같습니다. 옆에서 보는 자도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그 관직을 받은 자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니, 이 어찌 옛날 성군들이 벼슬과 녹을 중시하던 뜻이겠습니까. 이 점에 더욱 힘쓰시어 하늘에 실속있게 응하는 방도를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말이 다 좋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그러나 모든 신하들을 낮추어 본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비록 부덕하지만 이 폐단을 깊이 경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서도와 북도의 먼 지방 사람을 접견할 때도 반드시 상번 춘추(上番春秋), 하번 춘추(下番春秋)라고 부르고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른 적은 없다. 이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직책의 이름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하물며 이들보다 나은 뭇 신하들이겠는가. 다만 너희 삼사(三司)의 반열에 있는 자 가운데 간혹 자기 자신을 무시하고 가볍게 보는 자가 있어, 그 하는 소행을 그대로 맡겨둘 수 없기에, 혹 상황에 따라 바로잡아주는 일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너는 도리어 그것을 가지고 낮추본다고 여기는가. 그러나 너의 말도 꼭 약석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므로 더욱 노력하겠다."
하였다.
10월 10일 신해
이보다 앞서 대간 한영규(韓永逵)가 아뢰기를,
"육례(六禮)를 갖추어 맞이하면 아내가 되고 오다가다 만나면 첩이 되는 것은 고금의 떳떳한 법입니다. 그런데 유생 황종오(黃鍾五)는 이씨(李氏) 집에 두 번째로 장가든 지 약간의 시일이 지난 뒤에 문벌이 서로 대등하지 않다는 이유로 억지로 낮춰 첩으로 삼았으니, 풍속과 교화에 어긋납니다."
하니, 상이 예조로 하여금 조사를 하게 하였더니 사실이었다. 이에 대신과 예조·형조에 그 문제를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좌의정 채제공이 의논드리기를,
"사람의 도리는 오륜(五倫)보다 큰 것이 없는데 부부는 오륜의 하나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조금이라도 제 맘대로 바꾼 것이 있다면 이는 오륜이 무너진 것이니, 사람이 사람다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황종오가 이씨 딸에게 장가들 때 이미 혼서(婚書)를 보내고, 납채(納采)를 하고, 전안(奠鴈)을 하고, 초례(醮禮)를 올렸습니다. 2월에 혼인을 맺어 6월에 신행례(新行禮)를 행하였으니, 그 사이 다섯 달 동안 응당 아내를 대접하는 예로 대접했을 것이고 또 종오의 아들과 며느리도 응당 어머니, 시어머니로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윤기의 관계가 얼마나 정중합니까. 첩으로 낮춘다는 말이 6월 신행례를 거행하던 날 비로소 나왔으니, 그 이전 다섯 달 동안 아내로 대접하고 어머니며 시어머니로 부르던 일을 장차 어디에다 씻어 버리며 어디에다 불살라 버리겠습니까. 예법에도 없는 일이고 이치에도 부당한 것이니, 첩으로 낮춘다는 것은 논의할 것도 없습니다.
더구나 종오의 처부(妻父)가 공술한 것으로 보면, 이전에 혼인을 맺은 사람들은 모두 양반 가문이라 합니다. 이제 만약 종오의 말대로 첩으로 낮춘다면, 일찍이 전에 혼인을 맺었던 양반 집들은 모두 장차 한 세상에서 버림을 당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게 되니, 조정의 처리가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소견으로는 다른 양반 가문이 혼인을 맺은 집을 유독 종오만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지금 비록 종오로 하여금 부부의 윤리를 보존하게 한다 하더라도 남자는 밖에 있고 여자는 안에 거처할 것이니, 종오에게 무슨 누를 끼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예조 참판 홍수보(洪秀輔)는 의논드리기를,
"황종오가 이씨에게 장가들 때 이미 납폐(納幣)를 하고 전안(奠鴈)을 해서 아내로 삼았으니, 부부의 윤리가 정해진 것입니다. 이제 여러 달이 지난 뒤에 사적으로 첩으로 낮춘 것은 풍속과 교화에 관계됩니다. 신행례를 생략하고 혼서를 되돌려준 것은 오로지 그 아내의 문벌이 낮다는 뜻에서 나왔지만, 이미 거행한 예는 엄연히 그대로 있는데 나중에 와서 후회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조정의 처분은 마땅히 윤리를 유지하고 풍속을 돈후하게 하는 것뿐이라고 봅니다."
하고, 예조 참의 이의필(李義弼)은 의논드리기를,
"황종오가 이미 예를 갖추어 맞아 아내로 삼은 뒤에 사적으로 첩으로 낮춘 것은 떳떳한 법도에 어긋나고 또 훗날의 폐단과 관계됩니다. 예법에 근거하여 바로잡는 것이 사리에 적합할 듯합니다."
하고, 형조 판서 김상집(金尙集)은 의논드리기를,
"부부의 윤리는 예법을 통해 이름을 정하는 것이므로 혹시라도 그것을 무너뜨린다면 풍속과 교화를 손상시키는 것이 됩니다. 지금 황종오가 이씨 집과 혼인을 맺을 때 폐백으로 맞고 전안을 하며 예법대로 함께 초례를 치루었으니, 배필의 의리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몇 개월 뒤에 갑자기 그 칭호를 낮춘 것은 그 처사가 놀랍고 망령스러워 실로 한 시대의 변괴이며 윤리로 따져 보더라도 천만 부당하게 상도에 어긋나는 것이니, 조정의 처분은 단지 응당 그 큰 윤리를 정하면 그뿐인 것입니다. 그가 말한 문벌이 높고 낮은 문제는 애당초 따질 것이 없습니다."
하고, 형조 참판 서유대(徐有大)는 의논드리기를,
"이미 예법을 갖추어 아내로 삼았는데 지금에 와서 낮추어 첩으로 삼는다는 것은 일이 윤기에 관계되므로 섣불리 논의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형조 참의 안정현(安廷玹)은 의논드리기를,
"배필의 의리는 크고 문벌의 차이는 가볍습니다. 지금 종오가 단지 문벌의 차이에만 구애되어 부부의 의리는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고 윤기에 크게 관계됩니다."
하고, 예조 판서 정창순(鄭昌順)은 의논드리기를,
"이번에 황종오와 이명유(李命裕) 등이 서로 다투는 문제는 윤기에 관계되며 양자의 공술도 많이 상반됩니다. 설사 종오의 말이 옳다 하더라도 아내로 맞이했다가 첩으로 낮추는 것은 오늘에 처음 보는 일입니다. 부부의 윤리는 인륜의 시초인데 아내와 첩의 구분을 마음대로 올리고 내리며 적서(嫡庶)의 칭호를 제멋대로 주었다 빼앗았다 한다면 이런 길이 한번 열리고부터는 훗날의 폐단을 막기가 어렵고 배필이 정해지지 않아서 원망하는 여인이 반드시 많아질 것입니다. 인륜을 제정하는 성인의 교화로서는 마땅히 법을 세워 엄히 막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상의 처결을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안건을 판결하는 원칙은 한마디로 말해 ‘윤상(倫常)’ 두 글자이다. 황종오가 이씨 집 딸과 전안례를 치르고 술잔도 나눈 그 때가 곧 종오와 종오의 아비, 그 아들, 그 아들의 아내가 지아비, 시부모, 아들, 며느리가 되어 천륜과 인륜이 이미 결정된 날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문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그 칭호를 깎아 내려 첩으로 삼아 부자와 부부와 시부모의 명칭과 지위를 바꾸는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오랑캐들도 부끄럽게 여길 일인데, 어찌 당당한 예의의 나라에서 이처럼 교화를 더럽히고 윤기를 망가뜨리는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종오의 후처인 이씨 문제는 한결같이 이미 정해진 천륜과 인륜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예조 판서 홍억(洪檍)이 종오가 혼인을 취소하여 바꾸려는 소청에 대해 허락하였는데, 대간이 이 일을 문제삼아 아뢰어 그에게 서용하지 않는 처벌을 내렸다.
10월 11일 임자
윤대가 있었다.
관상감 제조 서호수(徐浩修)가 아뢰기를,
"인조조 때 고 상신 김육(金堉)이 처음으로 《시헌력(時憲曆)》을 쓸 것을 요청하였고, 효종조에 이르러 비로소 신법(新法)으로 해와 달의 운행을 추산하였고, 숙종조에 이르러 비로소 신법으로 오성(五星)의 운행을 추산하였으며, 선대왕조 초년에 와서 비로소 《시헌력》 후편의 법을 썼습니다. 그러나 술법을 처음 만들고 술서(術書)에 익숙하지 못하여 팔도의 태양이 운행하는 시각과 절기의 조만에 대해서는 아직 별도로 확정하여 역서(曆書)에 기록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미비한 제도중에 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전후로 연석에서 팔도에 해가 뜨고 지는 시각과 절기를 북경의 시각과 혼동하여 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므로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는 분부를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신은 삼가 관상감 생도들과 함께 《역상고성(曆象考成)》의 신법에 따라 추산하고 확정하여 상께서 열람하시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역서를 만드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고도 조심스러운 일이다. 이미 찍어내어 반포하는 법이 있는데 유독 거리의 원근에 따라 해가 뜨고 지는 시각과 절기의 조만이 다른 것을 구별하지 않았으니, 이는 매우 미비된 일이다. 이를테면 입춘날 자정 시각의 한계점은 관계되는 바가 특히 중요하다. 올해부터 역서를 반포할 때는 이를 덧붙여 써서 찍어내도록 하라."
하고, 이어 겸교수 한 자리는 명과학(命課學)에 전속시켜 일관(日官)들을 권장하고 징계하는 방안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또 연경에 가는 사신 행차에 의기(儀器)를 사오도록 명하였다.【하늘과 땅이 호호 망망하지만 거리가 서로 맞아떨어진다. 땅의 경도와 위도가 각각 2백 리씩 떨어질 때마다 하늘의 경도와 위도는 반드시 1도(度)씩 차이가 난다. 북극의 높낮이에 따라 밤낮의 시각이 서로 다르고, 적도의 동서 위치에 따라 절기의 조만이 차이가 난다. 이는 곧 《시헌력(時憲曆)》에서 먼저 연경의 절기 시각과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을 취하여 경도와 위도의 표준으로 삼고 다시 각 성(省)의 절기 시각과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을 나열해 놓은 이유이다. 우리 나라는 동서의 거리가 1천여 리이고 남북의 거리가 2천여 리이므로 직선으로 계산하면 경도의 차이는 2, 3도를 넘어야 하고 위도의 차이는 4, 5도를 넘어야 할 것인데, 관상감에서 추산한 것은 단지 《역상고성(曆象考成)》에 실려 있는 한양의 북극 고도와 동쪽으로 치우친 도수에 의하여 북극의 고도로 한양의 해뜨고 지는 시각을 추산하고, 동쪽으로 치우친 도수를 연경 절기의 시각에 가산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각 도의 북극 고도와 동쪽·서쪽으로 치우친 도수는 이미 추산하여 확정해 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역서를 맡은 사람들은 한양의 절기 시각과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가지고 가감을 할 줄 모르고 있다. 이것은 바로 경기 지방 이내의 역법이고 팔도에 통용되는 역법은 아니다. 지난번에 받든 상의 분부에 ‘가령 한양의 입춘이 자시 초삼각(初三刻) 끝에 든다면 동쪽으로 1도 치우친 지역에서는 당연히 하루 늦게 들게 되고 자정 초각의 초에 든다면 서쪽으로 1도 치우친 지역에서는 당연히 하루 앞당겨 들게 될 것이다. 입춘은 두 해가 서로 갈라지는 한계점이므로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요하다.’라고 하였는데, 성인이 한마디 말로 역상(曆象)의 원칙을 포괄한 것은 해뜨는 것을 맞이하고 해뜨는 것을 보낸다는 《서경》 요전(堯典)의 취지와 서로 안팎을 이루는 것이다. 지금 임금의 가르침에 따라 추산하되, 《여지도(輿地圖)》의 곧은 길에 의하여 백리척(百里尺)으로 측정하였다. 관북 지방은 북극 고도가 40도 57분인데 동쪽으로 1도가 치우쳤고, 관서 지방은 북극 고도가 39도 33분인데 서쪽으로 1도 15분이 치우쳤고, 해서 지방은 북극 고도가 38도 18분인데 서쪽으로 1도 24분이 치우쳤고, 관동 지방은 북극 고도가 37도 6분인데 동쪽으로 1도 3분이 치우쳤고, 호서 지방은 북극 고도가 36도 6분인데 서쪽으로 9분이 치우쳤고, 영남 지방은 북극 고도가 35도 21분인데 동쪽으로 1도 39분이 치우쳤고, 호남 지방은 북극 고도가 35도 15분인데 서쪽으로 9분이 치우쳤다. 이는 모두 감영 소재지에서 관찰한 것으로 근거를 삼은 것이다. 절기의 시각을 구하는 법은 1도마다 시간을 4분씩 계산하며, 동쪽으로 치우친 경우는 보태고 서쪽으로 치우친 경우는 감한다. 또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을 구하는 법은 경도의 절반과 해당 지역에서 본 북극 고도와 곡선의 정절선(正切線)192) 및 그 날 위도(緯度) 곡선과의 정절선, 그리고 적도의 정현[赤正弦]193) 으로 시각을 변경해가며 묘시(卯時)194) 와 유시(酉時)195) 에 더하거나 빼거나 한다. 이것을 역서에 실어 금상 16년 임자년부터 시작하여 팔도에 반포하여 시행하였다.】 다시 또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팔도의 시각의 차에 관한 법은 폐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10월 12일 계축
우레가 쳤다. 전교하기를,
"밤에 우레가 약하게 친 경고가 있었다고 아침에 관상감의 단자가 올라왔으나 나는 전혀 몰랐다. 잠자리에 든 때도 아니었는데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모두 내 성의가 한 순간 소홀하였기 때문이니, 만약 하늘을 경외하는 일념이 혹시라도 중단되지 않았다면 관상감에서는 들어서 안 것을 나는 어찌 모를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이 반성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안 것보다 배나 되는 이유이다. 예전에 겨울 우레가 며칠 사이에 계속 칠 경우, 상선(常膳)을 줄이지도 않고 직책에 따라 경계를 올리는 것도 요구하지 않았던 것은 전교가 너무 번다하면 도리어 하늘에 대해 무례한 것이 되기 때문이었으나, 지금은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자신을 자책하고 폄하하는 조건으로 삼고자 한다. 주원(廚院)으로 하여금 오늘 상선을 줄이게 하고 간관과 홍문관의 관리들에게 좋은 경계의 말을 해 주기를 바라니, 각자 모두 알아서 부응하게 하라."
하였는데, 승지 이형원(李亨元) 등은 아뢰기를,
"실다운 마음으로 실다운 정사를 행하여 하늘의 뜻에 응하고 재앙을 해소하는 요체로 삼아야 합니다."
하고, 옥당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분발하고 힘써 형식만 갖추는 폐단을 경계하고 성실하고 근면히 함으로써 재앙을 해소할 방도를 다하소서."
하니,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간 성덕우(成德雨)가 상소하기를,
"황종오(黃鍾五)의 일은 세상의 변고 중에서도 큰 변고입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이민행(李敏行)이란 자는 본디 재물이 많다는 소문이 있어, 서울의 사대부들이 간혹 그 재물에 끌리고 혼수를 탐내 그와 혼인을 맺은 자가 많았다고 하니, 이것 자체만도 이미 풍속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종오가 그 집에서 부인을 얻으려 한 것은 어찌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닌 줄 알겠습니까. 그리고 급기야 육례를 갖추고 장가를 든 뒤에는 첩으로 낮추고 다시 장가들겠다고 소청하였는데, 이 또한 어찌 속셈에 차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 줄 알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민행이 재물이 많고 황종오가 그것을 탐냈다는 등의 말을 속에 있는 대로 모두 나열하여 말한 것은 너무 옹졸한 것에 가깝다. 이미 종오와 이씨 여자를 방금 윤기를 회복하도록 하였는데, 도리어 또 이런 저런 명목을 그의 아비와 남편에게 씌워 치죄하거나 유배한다면, 여인이란 성질이 편협하여 본디 두루 융통성을 갖기 어렵다. 만에 하나라도 그 사건이 자신 때문이라는 원망을 하고 독한 마음으로 자살이라도 한다면, 이 어찌 사람을 부르면서 문을 닫는 것과 다르겠는가. 이것이 대신이 ‘무슨 누가 되겠느냐.’는 의논을 내었고, 내가 판부 속에 ‘자세하고 완곡하게 전하라.’는 등의 말을 집어 넣은 까닭이다. 더구나 종오에게 그와 같이 죄준다면 그 나머지 열 세 사람 집의 아들과 손자들이 너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앞날의 형세를 생각할 때 너를 위해 매우 두렵게 여긴다."
하였다. 이민행은 곧 이씨 여자의 할아버지이며 이씨 집과 사돈을 맺은 사대부는 열 세 집이라 한다.
온릉(溫陵)196) 경내의 성씨(成氏) 집안 분묘에 대한 한계를 정해 주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생 성열(成烈)이 상언하기를,
"8대조의 분묘가 온릉의 화소(火巢) 안에 있는데, 본릉의 능호를 복구하던 날 영조께서 산도(山圖)를 가져다 보시고 이르기를 ‘온릉을 복구한 것은 국가의 큰 경사이지만 성씨에게는 참혹한 재앙이니, 한결같이 사릉(思陵)197) 의 전례에 따라 성씨의 산에는 단지 석물만 제거하라.’ 하셨고, 또 한계를 정해 주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민(常民)들에게 점거당해 빼앗겼으니, 그 수목들을 제거하고 몰래 쓴 무덤을 파버리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거룩하구나. 성인의 분부가 죽은 백골에까지 은혜를 미친 점에 대해 우러르게 된다. 더구나 사릉의 능호를 복구한 뒤의 전례를 인용하고 한계를 정해 주라는 명이 온릉을 추후로 수축한 뒤에 있었으니, 상민들이 그곳을 빼앗아 장사지낸 것은 놀라울 뿐만이 아니다. 비록 능관(陵官)의 입장으로 말하더라도 그 무덤의 나무들이 묘역에 빽빽하게 들어차고 풀부리가 뼈를 휘감게 했으니, 이 어찌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조정의 명을 준수하는 뜻이겠는가.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부정한 사실을 적발해 아뢰게 하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또 전교하기를,
"성씨는 바로 신씨(愼氏)의 외손이고 신씨는 본릉에 대해서는 곧 친족이다. 지난번 온릉을 추후로 수축할 때 선대왕의 분부가 이미 이처럼 간곡하였고, 또 게다가 사릉 경내에 있는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198) 집안의 여러 정씨들의 무덤에 대해 조처했던 일이 또 어찌 성씨 산소를 보호해 줄 근거가 아니겠는가. 능에서 수십 보 이내에 있는 정씨 산소도 규례대로 보호하는데 백 보가 넘는 성씨 산소를 나무뿌리가 뒤엉키도록 내버려 둔다면, 체면상 천만 부당한 것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귀신의 이치와 사람의 심정은 본디 차이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온릉의 오르내리는 혼령이 반드시 이것은 측은하게 여기실 것이다. 이미 그 말을 들은 이상 어찌 전처럼 무성하게 자라게 놓아두어 오르내리는 혼령의 생각으로 내 생각을 삼는 도리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전에 민회묘(愍懷墓)199) 의 곁에 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무덤이 매우 가까이 있었는데, 역시 사릉 근처의 정씨 무덤이나 온릉 근처의 성씨·신씨의 무덤처럼 봉분도 쌓지 않고 나무도 심지 않은 데다가 칡덩굴과 가시나무가 온통 덮여 있어 길가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므로 특별히 그 지방의 고을 수령에게 잡초를 제거하여 다듬고 봉분을 수축할 것을 명했었다. 하물며 지금 본릉의 사체는 존엄하기가 어찌 민회묘에 비기겠는가. 그러니 그 친족으로 하여금 본가와 외가의 산소에 대해 그 묘역을 잘 지키게 하지 못한다면 어찌 너무도 형편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능관과 고을 수령에게 엄히 신칙하여 나무뿌리를 뽑아 버리고 한계도 정해 주게 하며 망제(望祭)를 지낼 수 있는 적절한 장소도 사릉 부근의 정씨 산소에 대한 전례대로 정비하게 한 뒤에, 도백으로 하여금 도내의 수령을 헌관(獻官)으로 정해 성씨와 신씨 두 집안 가운데 본릉과 가장 가까운 친족이 되는 산소에 제사를 지내게 하라. 본릉에도 마땅히 그 사유를 고하여 혼령을 위로하는 예를 행해야 할 것이니, 또한 본조에서 날을 가려 거행하게 하라.
그 구역의 모든 땅은 다 성씨의 산이다. 신씨 집안에서 그 안에 들어와 장사지낸 것도 오히려 주객(主客)의 차이가 있으니, 훔쳤거나 팔았거나를 막론하고 천인들이 그 땅을 훔쳐 점거한 것은 민간의 풍속이 가증스럽다. 속히 파서 옮기도록 하라. 이 판부를 베껴 성씨에게 주어 장래의 증거 자료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경기·호남·영남 세 도의 감사에게 하유하였다.
"표재(俵災)와 정적(停糴)200) 과 대봉(代俸) 세 가지 일은 모두 형편에 따라 처리하게 하였는데, 요즈음 들으니 표재 한 가지 이외에 정적과 대봉은 조정의 명으로 구분해서 나누어 준 숫자가 아직 반포되지 않았다 하여 여러 도에서 지금 망설이고 있다 한다. 사실 이런 일이 있다면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세 가지 가운데서 어느 것은 형편대로 처리하고 어느 것은 조정의 처분을 기다릴 것인가. 연말에나 가서 정적과 대봉을 실시한다는 것은 결코 참다운 보람이 없을 줄 안다. 비록 약간 부유한 고을 중에서도 어찌 하소연할 곳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풍년 거지가 없겠는가.
세금을 재촉하기 전에 대봉을 하도록 해야 빈곤한 백성들이 힘을 덜고 아전의 농간이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 만약 농사 형편에 대해 올린 장계의 회답이 내리기만 기다린다면 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경들은 모두 내각의 반열에 있다가 도백으로 나간 사람들이니 타도에서 어떻게 거행할지 몰라 당혹해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혹시 경들도 역시 그렇지 않을까 걱정되어 이처럼 당부하는 것이다. 경 등은 잘 알아두라."
10월 13일 갑인
사헌부가 【 대사헌 조종현(趙宗鉉), 집의 임도호(林道浩), 장령 박서원(朴瑞源), 지평 한영규(韓永逵).】 아뢰기를,
"정승은 음양을 조화롭게 하는 자리인데 재상의 자리에 혼자서만 수고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이조는 좋고 나쁜 사람을 선별하는 곳인데 인물을 감식하는 안목이 부족합니다. 대궐문이 앞에 있어도 상소문이 올라가지 못하고 음식에 검박함을 숭상하는데도 경비를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죄를 성토하는 대의는 막혀서 펴지지를 않고 재물을 절약하는 실효는 오래되어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문화(文化)를 일으키고자 해도 구양수(歐陽脩)의 공정한 안목을 어디에서 얻어 오겠으며 군사 장비를 실하게 하고자 해도 곽자의(郭子儀)의 위풍과 인망을 오늘날 구하기 어렵습니다. 홍문관의 관리로 말하면 겨우 어(魚)자와 노(魯)자를 구분할 정도이고 대각의 관리로 말하면 거의 의장대의 말과 같습니다. 온 나라에 왕명을 전달하는 직책과 한 고을에 법을 잘 집행하는 인재가 있다는 말은 전혀 귀에 들리는 일이 없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아름다운 상서가 스스로 찾아들고 재변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인재를 얻어야 한다는 요구는 물론 좋다. 그러나 벼슬자리마다 반드시 갖출 것은 없고 오직 적임자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니, 참으로 이른바 ‘기(夔) 하나면 족하다.’는 것이다. 어찌 반드시 그 인원수를 모두 갖춰야만 음양을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경들은 근년 이래 농사 상황을 보았는가? 올해는 비록 비가 너무 많이 내린 것 같지만 지난 신해년에 비기면 그래도 기대한 것보다는 훨씬 좋아 작년과 재작년에 밤낮으로 걱정했던 마음이 약간 풀어지게 되었다. 나는 지금 그 덕을 재상이 음양을 조화시킨 성과로 돌리면서 그를 기대고 의지하기를 강을 건널 때 배의 노와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다. 언관이란 비록 간언의 대상으로 선택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갑자기 은연중에 재상에 대한 비난을 당면한 폐단을 조목별로 나열한 속에 삽입하여 초나라 장왕(莊王)이 구정(九鼎)의 무게를 물은 것처럼 외람하기 짝이 없으니, 경들을 위해서 개탄스럽다. 약간 경계를 주어 대신을 더욱 전적으로 신임하는 뜻을 보여주고 싶지 않는 것은 아니나 대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그냥 참는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장령 박서원(朴瑞源)의 계사로 인해 호서 지방의 감시 초시(監試初試)를 파방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더니, 좌의정 채제공은 의논드리기를 ‘이른바 간리(奸吏)는 유생들이 마지막 날 과장을 열 때 붙잡아 주머니 속에 있던 종이 쪽지에 기록된 사람의 성명이 드러났으니, 그뒤의 방목이 나갈 때 기록된 자가 그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만약 파방한다면 방목에 든 사람들은 원통해 하지 않겠습니까. 파방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하였고, 참판 신 홍수보(洪秀輔)는 의논드리기를 ‘간리의 주머니에서 나온 종이에 기록된 자들은 이미 많은 선비들에게 붙잡혀서 농간을 적발해 죄를 다스리는 조치가 모두 과장을 열고 제목을 내걸기 전에 있었고, 또 더구나 방목이 나간 뒤 선발된 자는 그 종이에 이름이 기재된 자가 아니니, 방목에 든 모든 선비들은 별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시험을 주관한 자를 조사하여 이미 무겁게 처벌했으니, 지금에 와서 파방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고, 판서 신 정창순(鄭昌順)은 의논드리기를 ‘과방을 취소한다는 것은 사안이 가볍지 않습니다. 일찍이 선대왕 때 「죄가 시관에게 있으면 시관을 죄주고 죄가 응시자에게 있으면 응시자를 죄준다.」는 분명한 규정이 《통편(通編)》에 실려 있습니다. 지금 이미 시관을 파직했는데 어찌 전체를 파방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대간의 논의는 선대왕 때의 법령을 몰라서 그런 듯합니다. 파방하는 일은 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상께서 결정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주머니에 있던 종이가 들통이 난 것을 보면 합격한 자들은 혐의가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더구나 죄가 시관에게 있으면 시관을 죄주고 죄가 응시자에게 있으면 응시자를 죄준다는 것이 이 일을 판결하는 기준이 될 수 있으므로 내 생각도 수의(收議)가 모두 들어온 뒤에 이것으로 결정하고자 했었다. 예조 판서의 말은 이 뜻과 맞는 것으로서 다시 의논할 것이 없다. 예판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
대체로 그때의 대간이 아뢴 말은 전혀 분명하지를 않았고, 또 더욱이 《속전(續典)》의 법령은 선대왕께서 세상의 도리를 위하고 분쟁의 소지를 막고자 하신 불변의 원칙이니, 비록 대간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라 처사가 서툴러서 그랬다 하더라도 법을 전혀 모르고 율문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죄는 신칙하지 않을 수 없다. 장령 박서원은 먼저 체직한 뒤에 금부에서 추고하여 떳떳한 법을 높이고 대간의 기풍을 격려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박윤수(朴崙壽)가 상소하기를,
"관서 지방은 탐욕을 부리는 수령들이 죄를 받는 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조진명(趙鎭明)의 불법과 탐욕을 부리는 작태는 관서에서 오는 사람치고 침을 뱉고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로 있는 자가 덮어두고 보고를 하지 않은 결과 평양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나라에 법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이 끝내 해당한 법에서 벗어난다면 어떤 사람이 두려워서 징계될 것이며 백성들이 어떻게 편안히 살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조진명은 잡아다가 엄히 사실을 밝히고, 그것을 덮어두고 방치한 도신에게는 삭직하는 벌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진명의 일은 탐욕을 부리고 불법을 자행한 것에 대해 이미 그와 같이 성토한 뒤에 그것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은 도신까지 죄주기를 요청하였으니, 국가의 체통으로 보아 불가불 엄히 사실을 규명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어 조진명은 잡아다 가두고 공초를 받아서 보고함과 동시에 전 도신 심이지(沈頤之)는 잡아다 문초할 것을 명하였다.
구윤옥(具允鈺)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0월 14일 을묘
구익(具㢞)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신기(申耆)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심이지를 평양부에 유배하고 조진명은 금갑도(金甲島)에 귀양보냈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전 평양 감사 심이지의 구두 공초에 ‘조진명이 3년 동안 재임하면서 좌수(座首)·별감(別監)·도감(都監)·집헌(執憲)·약정(約正)을 뽑아 차출한 숫자가 6백 60여 인입니다. 그 중에는 향천(鄕薦)으로 차출한 것도 있고 면보(面報)로 차출한 것도 있고 백성의 구제를 도운 공로로 차출한 것도 있는데, 이 숫자는 도합 1백 70여 인이며, 이들은 돈을 바친 일이 없습니다. 또 사적인 안면으로 남의 청탁을 받고 차출한 것도 있고, 혹은 아전이나 향임(鄕任)에게 속아서 차출한 것도 있고, 또 간혹 아객(衙客)들이 중간에서 차출받으려 한 것도 있는데, 도합 4백 90여 인으로서 이들이 바친 돈이 3만 4천 600여 냥이나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또 향청(鄕廳)에서 관례로 준 것도 있고 차출을 도모하여 뇌물로 준 것도 있고, 중간에 없어진 것도 있습니다. 올해 2월 조진명이 체직되어 떠난 뒤에 그에 관한 소문이 파다하였으므로 너무도 놀랍고 분통스러워 체지(帖紙)를 받은 사람들을 잡아다가 돈을 주고받은 사실을 따져 물었더니, 돈은 모두 일을 맡았던 간사한 향임과 아객들의 손에 들어갔으나 아객과 아전, 향임들에게서 그 금액을 다 받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허다한 차출 체지가 모두 진명에게서 나왔고 허다한 간사한 폐단도 모두 진명에게서 생겨난 것이라, 이 때문에 진명에게서 받아들이게 한 것이 1만 1천 4백여 냥이며 아전과 향임에게 받아낸 것은 3천 8백여 냥이었습니다. 무뢰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서로 결탁하여 속임수로 가져간 수량에다가 또 형편을 관망하고 도피한 자도 있으므로 이것은 잡아다가 받아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다 받아낸 다음에 사실에 근거하여 보고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끝내기 전에 먼저 은혜로운 견책을 받아 서둘러 유배지로 가게 되었으므로 결국 그럭저럭 덮어둔 죄를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그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판부하기를,
"어제 대질시키라고 한 전교에 이미 대략 말하였지만, 이 공초를 보니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감영의 관하에 이런 아객의 수중에 빠진 탐욕스런 수령이 있는데도 한 도를 규찰하는 자리에 앉아 즉시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 관직에 있을 때 만약 한마디 말로 엄하게 금지하였더라면 진명은 결코 따르지 않을 리가 없다. 이 때문에 ‘부족한 사람을 벼슬에 임명하는 것은 그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는 성인의 말씀을 심이지에게 인용하여 유시하는 것이다. 진명의 죄악을 차츰차츰 조성시킨 것도 심이지이고 평양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전(禮錢)을 마련하여 바치느라 소란을 피우게 한 것도 역시 심이지이다. 특별히 제수되어 나간 자가 이토록 내 뜻을 저버렸으니, 먼 변방에 유배되는 벌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현재 옥에 갇힌 심이지는 평양 그 지방에다 서둘러 유배하는 벌을 시행하라."
하였다. 금부가 또 아뢰기를,
"전 평양 서윤 조진명의 구두 공초에 의하면 ‘친지의 사적인 안면에 구애되어 청탁을 들어주기에 이르렀고, 아객인 박지온(朴志溫)을 너무 믿어 장교(將校)와 향임을 차출할 때 그 간교한 실정을 살펴보지 못하여 3년 동안에 차출한 숫자가 많았습니다. 전 감사가 이미 아객과 그때 함께 나쁜 짓을 한 향임들을 엄중히 조사하여 예전(禮錢)·잡비전(雜費錢)·뇌전(賂錢)을 일일이 받아내 도로 나누어 주고, 저에게서 받아간 것이 1만 4천 6백 냥입니다. 간사한 향임과 교활한 아객에게 농락을 당했든 당하지 않았든지 간에 전 도신이 조사한 숫자가 이미 명백하니, 장오죄에 대해 어찌 감히 변명을 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하니, 판부하기를,
"대간의 상소에 이미 탐오한 사실을 말하였기에 내 생각으로는 그가 공금을 멋대로 썼거나 향임(鄕任) 자리를 멋대로 주물러 장오죄를 범한 것으로 여겼으므로 어제와 오늘 그 사실을 따져 물어 밝히라고 여러 차례 신칙하는 명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이 공초를 보건대 여러 번 물어볼 것도 없겠으니 그가 한 행동과 그 문제의 전말을 말마다 사실대로 아뢰고 구절마다 자신이 책임지고 있다. 그의 공초를 통해서 비로소 공금을 축낸 것도 아니고 향임자리를 판 것도 아니며, 바로 세세한 약정·집헌 등을 차출하면서 받은 예전(禮錢)에 관한 일임을 알았다.
그러니 그의 소행을 탐욕이라 말하는 것이 옳겠는가, 장오죄라 말하는 것이 옳겠는가, 불법이라 말하는 것이 옳겠는가, 기만을 당한 것이라 말하는 것이 옳겠는가. 고금을 통해서 어찌 그의 행위처럼 무지하고 염치없고 터무니없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또 전 도신 심이지의 공초를 보면, 이른바 예전을 준 것은 모두 내력이 있는데 그에게서 받아낸 것은 약간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아객들에게서 받아냈으며 새 도백이 내려가 또 아직 받아내지 못한 나머지를 받아냈다고 하였다. 저 아객들이 만약 남모르게 농간을 부려 진짜로 삼켜먹은 것이 아니라면 요즘처럼 옛날같지 않은 인심으로서 몇 차례 신문을 받았다 하여 어찌 생판으로 준비하여 바치고 감히 한마디도 책임을 미루는 말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도백의 공술도 편들어 줄 수가 없다. 이 죄수가 말한 전 도백과 현 도백이 조사해 낸 것을 되돌려 준 숫자는 이미 감영에 도장을 찍은 문서가 있다고 하였으니, 끝내 자기 돈으로 만들었다고 억지로 지목할 수는 없다. 부당하게 취한 재물의 수효를 계산하는 문제는 논의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간사한 계책으로 옆에서 충동질하는 것에 빠져들어가 기꺼이 함께 나쁜짓을 한 결과가 되었으니, 이처럼 국가의 은혜를 저버린 자에 대해 만약 죄를 배가하는 법을 쓰지 않는다면, 악을 징계하고 완악함을 막는 원칙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곧바로 사형의 율을 적용하려 해도 죄에 꼭맞는 율이 없으므로 그를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에 대해 마땅히 대신과 옥관들에게 널리 물어 처리해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죽일 수도 있고 죽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특별히 그의 숙부인 충정(忠定)201) 을 생각해서 내 뜻을 굽혀 가벼운 쪽을 따른다. 이는 비록 고요(皐陶)로 하여금 이 옥사를 다스리게 하더라도 너무 지나치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죄인 조진명에 대하여 법을 어긴 장오죄를 법을 어기지 않은 장오죄에 준하여 처단하라. 대체로 장오죄로 사형을 당하는 법에다가 법을 어기지 않은 조항을 하나를 따로 두고 또 준(準)이란 한 글자를 준비해 두었으니, 사실은 같아도 실정이 다른 경우에 이 준이란 글자를 적용하면 죽을 사람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법을 제정한 본의가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조진명을 이 율로 적용시킨 것은 다섯 가지 형벌이 다 바르게 된 가운데 이 좋은 형벌을 거울삼도록 하자는 뜻이니, 경 등은 이에 따라 알아서 거행하라. 그러나 매를 쳐서 유배하는 것은 너무 가벼우니, 사형을 감해 절도(絶島)에 유배하도록 하라. 간사한 짓을 한 아객 등은 해당 도의 감사로 하여금 법에 비추어 엄중히 처벌하게 한 뒤에 이른바 예전을 돌려준 내용과 함께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대간의 계사로 인해 물러나겠다고 청하니, 비답을 내리고 위로하여 타일렀다.
10월 16일 정사
사헌부가 【 대사헌 구익(具㢞), 집의 임도호(林道浩), 장령 이태현(李泰賢), 지평 유숙(柳), 정언 박윤수(朴崙壽).】 아뢰기를,
"천주학(天主學)은 바로 이치에 어긋난 이단으로서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이는 것 가운데 가장 심한 것입니다. 연전에 조정에서 엄히 금지시킨 뒤에 그 뿌리가 영원히 끊어질 줄 알았으나 민간에는 남몰래 숭배하는 자들이 간혹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이미 해괴한 일인데 요즈음 듣건대 호남 진산군(珍山郡)에 명색이 선비라는 자 몇 사람이 그 학문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며 심지어는 윤리를 손상시키고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합니다.
읍의 수령이 엄하게 잡아가두고 통문이 태학에까지 이르러 온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경외를 막론하고 그들의 유혹에 걸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빠져들어가게 되면 장차 금수의 지경으로 정신없이 들어가고 말 것이니, 엄격히 타파하여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진산에 가둔 죄수는 도신으로 하여금 특별히 엄하게 조사하여 그에 해당한 율을 적용하게 하시고, 한성부로 하여금 오부(五部)를 엄하게 신칙하게 하여 만약 발견된 자가 있으면 그 책은 불태우고 그 사람은 죄줌으로써 민심을 바로잡고 혼란의 근원을 막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하필 위에서 번거롭게 처리할 것이 있겠는가. 도백에게 넘겨 그 죄에 따라 법대로 엄히 처벌하여 윤리를 높여야 할 것이다. 연전에 ‘이단이 도처에 만연한 것은 바른 학문이 밝지 않기 때문이다.’고 나의 비답에 거듭 말하였기에, 그 이후 밝지 못했던 것이 점차 밝아지고 만연하던 것이 수그러들 줄 알았었다. 풍문을 비록 전부 믿기는 어려워도 대간의 말은 반드시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일 것이다. 미혹을 깨우치고 바로잡는 대책으로 볼 때 마땅히 막고 물리치는 강도를 한층 더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중국의 경우는 온 나라 밖에도 오히려 한량없는 땅이 있기 때문에 설사 우리 유학(儒學)과 배치되는 것이 그 사이에서 싹트더라도 마치 태양 앞의 반딧불같아 자질구레하게 금하지 않더라도 피해를 끼칠 것이 없지만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다. 풍토가 좁게 막히고 산천이 서로 얽혀 있어 가증스런 말쟁이들이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이것이 조정에서 반드시 엄금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태학은 곧 모범을 보이는 곳인데 달려나가는 방종한 마음과 객기(客氣)를 능히 통제하지 못하고 이따금 제 본분을 벗어나 외람된 행위를 하는 일이 있으므로 조정에서 그들의 방자한 짓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어 부득이 경고와 책망을 약간 보였었다. 그런데 입으로 외고 귀로 듣기만 하는 껍데기 학업마저 거의 내팽개쳐버려 당당한 태학을 지키고 있는 자가 나이 80세 된 늙은 학구(學究)가 아니면 곧 서북 지방의 객지살이를 하는 두세 명의 유생뿐이니, 이는 실로 너무도 한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괴상한 말과 부정한 설이 움추러들고 겁내도록 하는 문제는 그 책임이 꼭 태학에서 과거 공부를 하는 무리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고 범이 무서워 아욱을 캐지 못하는 형세는 진정 초야에 묻혀 글을 읽는 선비가 필요하다. 내가 현인을 대우하는 정성이 부족하여 비록 군자가 초야에 묻혀 있게 하더라도 시골마을과 항간에서 진실로 자신의 몸만 잘 지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부모는 그 자식을 가르치고 형은 그 아우를 격려하며 더 나아가 인척과 친지에게까지 힘이 미치는 대로 바른 도리를 일러 주고 밝혀 서로 갈고 닦는다면 그 성과가 장차 집집마다 사람마다 눈으로는 옳지 않은 책을 접하지 않고 입으로는 성인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내가 비록 부덕하지만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므로 마땅히 이렇게 하는 것으로 노력하겠으나 또한 초야에서 행실을 닦는 선비들에게도 기대하는 점이 있으니, 각자 노력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17일 무오
홍화문(弘化門)에 나가 유생들에게 일차 전강(日次殿講)을 실시하고 아울러 상재생(上齋生)의 제술 시험을 보였다. 수석을 차지한 진사 임한호(林漢浩)를 특별히 전시(殿試)에 나올 수 있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요즈음 유생들이 본분에 벗어나는 혐의를 염두에 두지 않고 대각의 일을 대신한 것은 물론 놀라운 일이다. 명색이 유생의 상소문이 수문장에게 거절당해 상소함을 품고 되돌아간 것은 4백 년 동안 없었던 일이라 할 수 있다. 문금(門禁)을 설치한 것은 내가 부득이해서 취한 조처이나 유생의 상소문은 그 체모가 중대하기 그지없는 것인데 금방 올리려고 했다가 곧바로 돌아갔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한 뒤에, 또 전교하기를,
"절일제(節日製)202) 도 아닌데 특별히 문에 나와서 시험보인 것은 선비들을 육성하기 위한 뜻에서이다. 또 특별 분부로 급제를 내려주는 것은 법전에도 충분히 그만한 근거가 있다."
하고, 한호에게 급제를 내렸다.
10월 18일 기미
하직 인사를 하는 곤수(閫帥)를 불러 만나보았다.
이경옥(李敬玉)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10월 20일 신유
차대가 있었다. 동지사 3인을 불러 만나보았다. 좌의정 채제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요즈음 성상께서는 반드시 언로를 널리 열어놓기 위해 양사에 대해 매일 대각에 나와 각기 의견을 올리라고 신칙하셨습니다. 다만 그 의견을 올리는 것이 마치 매일 치르는 과제와 같아 실로 계속 이어대기가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자연 말을 잘 고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조지(朝紙)에 나온 계사로 논하더라도 경연의 유신들을 ‘겨우 어자와 노자를 구분한다.[僅分魚魯]’는 말로 단정지었습니다. 이 네 글자는 그 얼마나 무식하고 용렬하다는 지목인데, 이것을 논사(論思)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갖다 붙인단 말입니까. 그 이외 자질구레한 일들도 대간의 계사에 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체로 억지로 의견을 올리게 하는 것은 마치 속박을 하는 것과 같아서 세세한 일까지 낱낱이 들추어냄으로써 이처럼 정사의 대체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기고 양사의 과정에 구애받지 말고 일이 생기는 대로 간언을 올릴 것을 신칙하였다. 채제공이 또 아뢰기를,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이는 서양학은 반드시 빨리 무겁게 처벌한 뒤에야 ‘중국에 함께 살지 못하게 한다.[不與同中國]’는 의리에 어긋남이 없게 될 것입니다. 다만 서학(西學)은 특별히 꼬투리를 잡을 만한 형적이 없는데, 만약 남을 공격하려는 마음으로 서학과 관계도 없는 사람을 지적하여 ‘저 사람도 일찍이 이것에 종사했다.’고 말한다면, 이는 실로 밝혀 내기 어려운 일이며 훗날 필시 세상일의 걱정거리가 안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관계없는 사람을 공격하려는 계책을 부리는 일이 있다면 이는 떳떳한 법도에 벗어난 것이다. 만약 이런 폐단이 있을 경우 경이 발견되는 대로 아뢴다면, 응당 자세히 조사하여 엄중히 조처하겠다."
하였다.
고 영의정 김익(金熤)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 주었다. 김익이 효성으로 소문났는데, 사대부와 선비들이 예조에 글을 올리고 예조에서 아뢰니, 상이 대신에게 물었다. 채제공이 마땅히 정문을 세워 줘야 한다고 아뢰자, 상이 따랐다.
대사헌 구익이 아뢰기를,
"지난번 대간의 계사 가운데 ‘겨우 어자와 노자를 구분한다.’는 문구는 옥당의 신하들이 나오기 어렵게 만든 큰 요인이 되었으니, 대간을 추고하고 옥당으로 하여금 공무를 보도록 신칙하소서. 성덕우(成德雨)가 상소하여 황종오(黃鍾五)를 논박하였는데, 이른바 혼수를 탐내었다느니, 욕심에 차지 않았다느니 하는 말은 너무나 말을 가리지 않았고 또 억측으로 한 말로서 사대부의 말씨에 대한 품격을 손상시켜 수치를 끼친 것이 매우 큽니다. 성덕우에게 파직하는 처벌을 시행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정존중(鄭存中)을 한성부 판윤으로, 이갑(李𡊠)을 이조 판서로, 심환지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대사간 신기(申耆)가 상소하기를,
"당면한 걱정거리와 시속의 풍조가 마치 물처럼 점점 젖어들어 구제할 수 없는 것이 대체로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기강이 무너진 문제입니다. 흉악한 괴수와 역적은 아직도 처단되지 않았는데 삼사(三司)의 계사는 이미 휴지가 되었고, 탐관오리들이 전혀 법을 겁내지 않아 백성들의 재물이 개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름이 나라의 죄인 문서에 오른 자도 사건이 오래되면 곧 죄명을 씻을 계책을 품고, 한 시대에 버림받은 자들도 세월이 조금 지나면 감히 분수 밖의 기대를 갖습니다. 어약(御藥)은 관계되는 바가 막중한데 가삼(家蔘)을 가짜로 만들어도 끝내 적발하지 않으며, 연경의 사행에는 본디 금지하는 물품이 있는데 금은 보화를 마치 당연히 들여올 것처럼 가져옵니다. 경외에서 소송에 진 백성들은 신문고를 울리는 건을 빙자하여 관장(官長)을 협박하고, 먼 곳에서 지방싸움을 하는 자들은 뜬 소문을 만들어 서울에까지 알립니다. 종과 주인은 명분이 엄격히 구분되는데 무슨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배반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고, 귀천에 따라 의복의 제도가 있는데 살림이 약간 여유가 있으면 모두 외람되게 법도를 넘깁니다. 상놈이 재상을 능멸하는 것을 예사로운 일로 보고, 간사한 무리가 지주를 모략하여 쫓아내는 것을 묘책으로 여깁니다. 이 어찌 크게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두 번째는 풍속이 무너진 문제입니다. 명문 거족들은 애당초 남의 모범이 되는 행실이 없어 공적인 모임이나 사적인 집회에서 농지거리나 지껄입니다. 경조사에 서로 축하하고 위문하는 것은 예속(禮俗)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예절인데 혹 폐지하기도 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서로 구제하는 것은 향약(鄕約)의 두터운 의리인데 끊겨 그런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고을 수령을 한 번만 지내도 많은 토지와 가옥을 두는데 그중에 약간 청렴하다는 소문이 난 자는 고지식하다고 지목하며, 처음 대각에 들어간 자는 우유부단한 것을 다투어 배우면서 조금이라도 바른말을 하려는 자가 있으면 긴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지목합니다. 시속에 따라 오르내리는 것은 군자가 부끄러워하는 바인데도 조금이라도 이해에 관계되면 아침에는 동쪽에 있다가 저녁이면 서쪽으로 가고, 기회를 틈타서 남을 넘어뜨리는 것은 소인들이 하는 짓인데도 조금이라도 혐의가 될 만한 꼬투리가 있으면 사실을 날조하여 모함합니다. 요행으로 합격하는 과거가 많아서 서당에는 글읽는 선비가 없고, 벼슬길이 잡다하여 항간에는 분수를 지키는 사람이 적으니, 이 어찌 크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세 번째는 생계가 궁핍한 문제입니다. 바닥이 난 관청의 창고는 올해가 지난해보다 심하고 어려운 민간의 살림은 오늘이 어제보다 한층 더합니다. 좁쌀과 멥쌀, 명주실과 삼실은 값이 비싼 것이 물론 당연하고 고기와 소금, 땔나무와 나물 또한 값이 크게 뛰어오릅니다. 부유한 자들은 베푸는 의리를 모르고 이웃과 친척들 간에 빌리고 빌려주는 길이 끊겼으니, 선비가 어찌 곤궁한 속에서도 꿋꿋하게 독서를 할 수 있고 관리된 자가 어찌 청렴하여 탐욕스럽지 않을 수 있겠으며 기본 재산이 없는 자가 어찌 못하는 짓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당하관으로서 군직을 받은 자는 오래도록 녹을 받지 못하다 보니 시골에 살다가 부름을 받은 자들은 마치 다락에 올려 놓고 사다리를 치워버린 것과 같으며, 군영의 적은 요미(料米)는 그나마 모두 세력 있는 자에게 돌아가 객지에서 벼슬길을 구하는 무리들은 마치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몰래 장사하는 자들이 자꾸 많아져 역관들이 지탱할 수 없는 폐단이 있고, 난전(亂廛)을 금하지 않아서 시전 상인은 역에 대처할 형편이 없습니다. 이 어찌 크게 민망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네 번째는 인재가 적은 문제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선비를 뽑는 법은 오로지 과거 시험에만 의존하고 벼슬에 제수하는 규정은 그저 문벌만을 앞세웁니다. 옛날 번영을 누리던 시대에는 과거 시험으로 합격한 사람 가운데도 간혹 경전에 대해 조예가 뛰어난 선비가 있었고, 문벌이 좋은 집안에서도 역시 재능이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접어들면서 풍속이 옛날같지 않아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는 정문(程文)203) 을 익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다가 일단 합격한 뒤에는 책을 무용지물로 봅니다. 부형들이 자제에게 일러주는 것은 살림을 윤택하게 만드는 계책에 지나지 않고 선배가 후생들을 권고하는 것은 처세하는 방법일 따름입니다. 간혹 약간 시속의 테두리를 벗어난 자가 있더라도 역시 모두 큰소리나 치고 빈말이나 하여 사리와는 거리가 먼 부당한 말뿐입니다. 그러니 문장과 정사에서 그 인품과 벼슬이 서로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더구나 내관과 외직을 막론하고 아침에 임명했다가 저녁에 갈아버리므로 자신이 맡은 직무와 규례조차 오히려 두루 알지 못하는데 공사간의 이해문제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만일 변방에 사건이 발생하여 국가의 안전이 당장 위협받게 된다면 그에 대응하는 조치에 전혀 대책이 없을 것이니, 비록 나라에 인재가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정말 기강이 무너진 것을 걱정하신다면, 오직 마땅히 큰 뜻을 분발하고 용단을 내려 스스로 천벌을 범한 자는 빨리 해당한 율문을 적용하고 장오죄의 정도가 특히 심한 자는 모두 떳떳한 법으로 조치하시며, 행차하는 길에 호소하는 것이 혹시 외람된 것이라면 법에 비추어 엄히 다스리고 벼슬길에 끌어들이는 것이 만약 사정에 의한 것이라면 논박하여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하시며, 약원(藥院)에서 약재를 물리치고 받는 것을 십분 신중히 하여 뇌물로 되는 것이 없게 하고 만부(灣府)204) 에서 사행의 짐꾸러미를 수색하는 것을 더욱 엄히 단속하되 우선 자신부터 바로잡도록 해야 합니다. 그 나머지 자기 본분을 어기고 법을 무시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경외에 특별히 신칙하여 차례대로 엄히 징계한다면 조정의 명령이 시행되고 나라의 기강이 일어설 것입니다.
정말 풍습이 무너지는 것을 걱정하신다면, 응당 백성을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통제하며 충후한 선비들을 부추켜 진출시키고 경박한 무리들을 멀리 내쳐야 합니다. 조정의 반열에는 해괴한 행동이 없게 하고 항간에는 질박함을 숭상하는 도리를 알게 하며, 대소 관원들은 오직 청렴과 근면을 힘쓰고 신진 소년들은 기품과 절의를 자부하게 하며, 이익을 따라서 몸가짐을 바꾸는 무리는 동류들 속에 끼이지 못하게 하고 틈을 타서 남을 공격하는 습관을 일체 깨끗이 씻어내며, 과거 시험을 반드시 드물게 실시하여 요행을 바라는 길을 열지 말고 관직의 제수를 반드시 신중히 하여 부적격자가 뒤섞이는 문제가 없게 하신다면, 경박한 기풍이 사라지고 순후한 풍속이 이를 것입니다.
정말 생계가 곤궁한 것을 걱정하신다면 마땅히 정사에서는 우선 검소함을 숭상하고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며, 의복과 음식에 사치를 부리는 습관을 높은 관리들부터 경계하시고 공사간의 재물을 저축하는 방도를 내외에 두루 신칙하셔야 합니다. 기회를 틈타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시키고 충성스럽고 진실한 자에게 녹봉을 후하게 주어 각자 맡은 일을 힘쓰게 하며, 먹는 문제가 어렵고 생업을 잃게 되는 한 세상의 여러 가지 폐단에 대해 그 원인을 자세히 살펴 특별히 고치고 바로잡는다면 백성들의 먹을 거리가 여유있게 될 것입니다.
정말 인재가 적은 것을 걱정하신다면 마땅히 도학을 숭상하고 숨어있는 선비들을 선발 등용하되 절대로 사람을 위해 관직을 고르지 말며, 뽑아 등용하는 방법은 오로지 경학(經學)을 위주로 하되 경학이 있는 사람중에서도 실무를 아는 자를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자리만 차지하고 녹을 받아먹는 자는 차례로 물리치고 나라만 걱정하고 집안을 잊는 자에게 책임을 맡겨 성과를 요구해야 합니다. 신진들 가운데서 옛글을 읽고 자신의 명예를 아끼는 자를 널리 선발하여 먼저 당하관이나 군정과 농정, 재정에 관한 정사를 익히게 하고 그 능력 여부를 살펴 장점에 따라 발탁 등용한다면 사람들이 저절로 분발할 것이며 인재가 나날이 진출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엊그제 양사에서 천주학의 일로 논계를 하여 비답을 받았는데, 윤음(綸音)이 해와 달처럼 명백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권(權)·윤(尹)205) 양적(兩賊)은 유자라는 이름을 지니고 또 내력도 있는 집안입니다. 설사 그들이 요망한 학술을 주장하고 유학을 배반하기만 하였더라도 사실 천만 가증스러울 일인데, 신주를 멋대로 태워 버리고 부모의 시신을 팽개쳐 버렸으니, 이는 실로 강상(綱常)의 죄인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한 순간도 용납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양사의 신하들은 ‘세상을 현혹하고 백성을 속였으며 윤기를 손상하고 의리를 거스렸다.’는 따위의 말로만 간단히 말하였으니, 이런 흉악한 무리들에게 무엇이 두려워서 그렇게 한 것입니까. 더구나 그들은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 학술에다 죽음을 제 고향에 돌아가듯이 여기는 마음을 겸하였으니, 어찌 저 관동 지방의 귀신을 부린다는 적이나 해서 지방의 산 부처라는 요물처럼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패거리를 모아들이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 또 들으니 경외의 무지한 무리들이 그 교리를 비밀히 전파하여 서로 물든 자가 이미 적발된 이들 양적 뿐만이 아니고 심지어는 과장의 대책(對策)에서까지 그 글을 주워모아 쓴다고 합니다. 세상일을 생각할 때 남모르는 걱정과 깊은 우려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호남의 도신에게 권·윤 양적을 엄히 형문(刑問)하여 실정을 알아내 법에 따라 처단할 것을 신칙하고 경외에서 몰래 이 학술을 숭상하는 자들을 유사로 하여금 특별히 엄히 찾아내게 하여, 그 책을 불태우고 그 사람들을 죄주어 근본을 뽑아버리고 근원을 막아야 한다고 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술한 여러 조항은 마땅히 유념하겠다. 덧붙여 진술한 이단의 폐단은 바로 일전에 대간의 계사에 대한 비답에 자세히 말한 일이 있으나 그 가운데 두 가지 범죄가 만약 소문대로 사실이라면 그 죄는 더욱 말할 것도 없으니, 금수나 오랑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도백에게 엄히 신칙하여 법에 따라 엄히 처벌하게 하겠다. 경외에서 몰래 숭상하는 무리들도 역시 요청한 대로 엄히 금지시키고 발견되는 대로 처단하게 하겠다."
하였다. 아침 연석에서 대신도 그에 관해 아뢴 것이 있었는데,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낱낱이 지적하여 엄금하게 하였다.
10월 21일 임술
윤대가 있었다.
10월 22일 계해
형조가 아뢰기를,
"남부(南部)에 사는 백성 김득량(金得良)이 날이 저물어 술에 취해 귀가했다가 자기 아내가 불평하는 말에 화를 내어 낫을 가지고 자살하려 하다가 마침내 술기운 때문에 아내를 찔러 죽게 했는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마땅히 법대로 조처해야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과거에 남편이 아내를 죽인 옥사에서 정상으로 보아 용서할 만한 점이 없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대부분 살려 주어 가벼운 처벌을 내렸었다. 이것은 국법을 따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의 마음을 돌이켜 따져 보아서 죽은 사람의 마음에 반드시 그 남편이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을 원통하게 여기고 통쾌하게 여기지 않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대체로 목숨으로 갚게 하는 것은 그 죽은 사람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잘못 죽은 것을 위로하기 위한 것인 만큼, 아내가 남편을 위하는 마음은 생사간에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인데 떳떳한 법만을 고집해 지키고 참작해 주는 것을 생각지 않는다면, 성왕(聖王)께서 형법을 제정한 본의와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중 팔구는 똑같이 법을 굽히게 한 것이다.
이 옥사의 경우는 그 정상이 매우 가증스럽고 그 사실도 더욱 숨기기 어렵다. 혼인한 지 수십 년 동안 한 집에서 어렵게 살아오다가 갑자기 술에 취해 놀린 손에 마침내 살인하는 변고를 빚었으니, 그가 가난에 찌들어 실성했다는 이유로 그 사이에 참작을 할 수가 없다. 더구나 사형의 벌은 다만 그 사실만을 따지면 그만이고 실정이란 말은 결코 간단히 논의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문건을 자세히 살펴보고 또 사실 이외에 본심을 따져보면,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꼭 죽이겠다는 본심은 없었고 흉악한 행동을 하게 된 이유가 술에 취하고 실성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실정을 사실과 비교해 보지 않는다면 과거에 마땅히 죽을 자로서 죽지 않은 자들도 하나 하나 추가로 다스려 모두 사형에 처한 뒤에야 고르지 못함이 없게 될 것이다. 본조에서 그를 조사할 때 여러 번 신문할 것도 없이 신문관들이 합동하여 신문하는 첫 공초에서 하나 하나 승복하였으니, 더구나 그 양심이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죄수에게 이미 적용한 전례에 따라 차율(次律)을 쓰는 것이 혹시 너무 형을 가볍게 한 잘못을 범한 것이나 아닐지 모르겠다. 죄인 김득량은 형신을 세 번 가한 다음 사형을 감해 절도(絶島)에 유배하고, 길이 관노(官奴)로 삼으라."
하였다.
이집두(李集斗)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10월 23일 갑자
지평 한영규(韓永逵)가 아뢰기를,
"서양의 간특한 설이 언제부터 나왔으며 누구를 통해 전해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이며 윤리와 강상을 없애고 어지럽히는 것이 어찌 진산(珍山)의 권상연·윤지충 양적과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제사를 폐지하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위패를 불태우고 조문을 거절하는 것으로도 그치지 않고 그 부모의 시신을 내버렸으니, 그 죄악을 따져보자면 어찌 하루라도 이 하늘과 땅 사이에 그대로 용납해 둘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흉적을 고을 옥에 맡겨두는 것 자체가 실로 형벌을 크게 그르치는 것입니다. 또 해당 고을 수령으로 말하더라도 자기 경내에서는 이 얼마나 큰 변고입니까. 마땅히 조정에 급히 알려 다스려야 할 것인데도 전혀 놀라는 일이 없이 태연하게 있다가 도리어 유생의 통문이 먼저 태학에 이르게 만들었으니, 그 윤리를 짓밟은 행위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 들으니 조사(朝士) 홍낙안(洪樂安)과 유생 성영우(成永愚)가 각기 장문의 편지를 만들어 사대부와 선비들에게 돌린다고 합니다. 영우의 편지는 신이 미처 보지 못하였으나 낙안의 편지는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말하기를 ‘이전에는 나라의 금법이 무서워 어두운 골방에서 모이던 자들이 지금은 밝은 대낮에 제멋대로 다니면서 공공연히 전파하며, 예전에는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써서 겹겹으로 덮어 싸 상자속에 넣어두었었는데 지금은 멋대로 간행하여 경외에 반포한다.’ 하였고, 또 ‘그 가운데 교주(敎主)가 바로 그들의 괴수이다.’ 하였고, 또 ‘빨리 천당에 돌아가는 것이 극락이 되고 칼날에 죽는 것이 지극한 영광이다.’ 하였고, 또 ‘오도(吾道)를 이단이라 지목하는데, 오도에서 사류축에 끼이지 못하는 것이 곧 그들의 소원대로 되는 것이다.’ 하였고, 또 ‘감히 간특한 학술을 하면서 그 무리를 많이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선봉이 되어 일을 시도하고 있다.’ 하였으며, 심지어는 ‘만약 이렇게 10년이 지나도 변고가 없으면 헛된 말을 한 죄를 받겠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른바 교주와 신도는 이미 편지를 낸 자가 있으니, 한 번만 물어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진산에 구금한 죄수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 등을 빨리 법조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사실을 알아내 나라의 법을 제대로 세우고 해당 군수는 귀양보내는 형벌을 시행하게 하며, 전 별검(別檢) 홍낙안과 진사 성영우도 역시 해부와 해조로 하여금 구두 공술을 받아 조사하여 엄히 처벌하게 하소서."
하고, 사간 이언호(李彦祜)와 헌납 이경운(李庚運)도 역시 권·윤 양적의 일을 논하였는데, 헌부가 아뢴 내용과 같았다. 비답하기를,
"이단의 피해는 홍수나 맹수보다 더 심하니, 만약 발견되는 대로 엄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세도(世道)와 사문(斯文)을 위해 걱정되는 것이 과연 어떻겠는가. 이것이 일전에 특별히 한 장의 윤음을 내린 이유이다. 그러나 소문을 하나 하나 다 믿을 수 없으며 용서할 수 없는 죄든 아니든 간에 설혹 그 소문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상도를 어기고 법을 범한 시골의 하찮은 한두 명의 무리들에 대해서는 그것을 처리하는 것은 한 명의 도신이면 충분하다. 법을 바르게 집행하여 죽여도 좋고 죄를 밝혀 형장을 쳐도 좋은 일이지만, 이는 모두 사실을 따져 살핀 뒤에 할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법조로 하여금 해도의 일을 대신하게까지 하는 것은 비단 실제 진실이 호도될 걱정이 있을 뿐만이 아니다. 공자께서 ‘이단을 공격하면 해로울 뿐이다.’ 하지 않았던가. 공격이란 말은 전적으로 다스린다는 말이다. 전적으로 다스리기를 일삼는 것은 도리어 중국은 오랑캐를 치기를 일삼지 않는다는 뜻과 어긋나는 것이다. 이미 노출된 자에 대해서는 이미 도백에게 맡겨서 엄히 규명하도록 했으니, 설혹 적발되지 않은 자가 있더라도 차마 끝까지 찾아냄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고치는 길을 막아버릴 수 없다.
또 홍낙안 등의 문제도 사적인 편지의 문구를 가지고 묻는다는 것은 국가의 체통과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 그 안에 별다른 내막이 있는지 어찌 알겠는가. 해당 수령의 문제는 이렇건 저렇건 사건이 본 고을에서 일어났으니, 역시 어찌 죄가 없겠는가. 조사하는 일이 끝난 뒤에 처분하겠다."
하였다. 홍낙안이 채제공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기를,
"합하(閤下)께서는 오늘 진산의 양적의 일을 어떤 변괴라고 보십니까? 대체로 서양학의 설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고 그 내용도 이미 충분히 들어 싫증이 날 정도입니다. 또 그 학술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가까운 친구들 가운데서 나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이목에 익숙해서 크게 놀랍게 여기지 않으니, 비유하면 마치 물이 새는 배 안에 함께 앉아 있으면서 장차 함께 물에 빠질 것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심장과 뼈가 다 서늘합니다.
이른바 사학(邪學)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윤리를 무시하고 어지럽힘으로써 그 여파로 인한 해독이 참혹하고 유혹하는 것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것은 합하께서도 이미 다 통찰하셨을 것이니, 어찌 소인의 여러 말을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요즈음 들어 크게 번성하여 그속에 빠지지 않은 자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합하께서 어떻게 모두 통촉하시겠습니까. 합하의 문하에 출입하는 자 가운데 곧고 바른 말과 깊은 우려로써 합하의 임금을 보좌하는 정치를 돕는 자가 있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이 문제는 친구들과 관계되는 일로서 비방을 피하는 데만 급급한 세상에 누가 기꺼이 합하를 위해 서둘러 말하겠습니까.
오늘날 도성의 경우부터 우선 말하면 친구사이의 사대부와 선비들은 대부분 거기에 물들었고, 다른 동네의 길을 잘못 들어간 젊은이들에게도 파급되었습니다. 특히 총명하고 재주있는 선비들이 열에 여덟 아홉은 거기에 빠져버려 남은 자가 거의 없으며, 서로 친하다가 서로 욕하는 것이 술 취한 것도 같고 미친 것도 같습니다. 이전에는 나라의 금법이 무서워 골방에서 모이던 자들이 지금은 환한 대낮에 멋대로 돌아다니며 공공연히 전파하며, 이전에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써서 겹겹으로 덮어 상자 속에 숨겨 놓았던 것을 지금은 공공연히 간행해서 경외에 반포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무지한 하천민과 쉽게 현혹되는 부녀자들은 한 번 이 말을 들으면,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 지상에서 살고 죽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원한 천당 지옥설에 마음이 끌려 일단 끌려 들어간 뒤에는 현혹된 것을 풀 길이 없습니다. 특히 경기와 호서 지방의 경우는 한없이 넓은 그물에 모든 마을이 다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니, 지금 손을 쓰려고 해도 해진 대바구니로 소금을 긁어 담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 가운데 교주는 곧 그들의 괴수로서 선물 꾸러미가 산더미처럼 쌓이는가 하면 명령이 뜻대로 시행되어 한 번 통고를 하면 역마를 둔 것보다 빠르며 밤낮으로 돌아다녀 촌락이 뒤숭숭합니다. 이는 모두 호서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이면 말하지 않는 자가 없는 사실로서 소인이 근거없이 억측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소인이 무신년에 조정에서 임금을 뵈었을 때 황건적(黃巾賊)과 백련교(白蓮敎)의 사건을 끌어다가 증명하였는데, 그 당시 반박하는 말들이 남을 해치려는 생각이 있다고 하여 사방에서 비난하는 소리가 지금까지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으로 보면 소인이 그 당시에 한 말은 사실 지나친 말이 아니었습니다. 소인이 지금 또 감히 오늘날 교주가 반드시 장래의 역적이 될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천하에 지극히 무궁한 것은 사태의 변화이고 절실히 삼가야 할 것은 조짐이라고 봅니다. 간사하고 착하지 못한 무리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그들이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는 힘을 빌어 그 흉계를 꾸미게 된다면 저 살기를 싫어하고 죽기를 즐기는 무리와 윤상을 무시하고 어지럽히는 자들이 무슨 생각을 갖지 않고 무슨 변괴를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성왕께서 이 세상을 인도해 가는 것은 예악 형정(禮樂刑政)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인데, 이 무리들은 임금과 아비를 길가는 사람처럼 보고 윤상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니, 이미 예악으로 감화시킬 만한 대상이 아니며, 또한 빨리 천당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극한 즐거움으로 여기고 칼날에 죽는 것을 지극한 영광으로 알고 있으니, 역시 형정(刑政)으로 인도하고 다스릴 자들도 아닙니다. 설령 소인의 말이 모두 착각이고 지나친 생각으로서 황건적이나 백련교와 같은 변고가 없다손치더라도 윤리와 강상이 이미 사라지고 사람의 도리가 끊어져 없어진 것에 이르러서는 실로 돌이켜 깨닫게 할 희망이 없어 그들이 오랑캐와 짐승으로 바뀌는 것을 앉아서 그냥 보고만 있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어찌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고 교화와 정치가 청명한 시대에 갑자기 근거없는 변괴가 생겨 성스러운 시대의 풍교(風敎)를 뒤흔들 줄 알았겠습니까. 합하께서는 위로는 세상에 드문 성상의 총애를 받고 아래로는 한 시대의 종장으로 계시면서 그것을 장차 수수방관하고 한결같이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미뤄버리실 것입니까. 지난 무신년 가을에 합하께서 조정에서 아뢴 것이 간곡하고 절실하여 실로 한 시대를 경각시키는 지침이 되었으니, 그 때 이단의 설이 약간 수그러들 줄 알았던 것은 사실 이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당시의 금령이 단지 그들을 사류 속에 끼워주지 않는 처벌에 국한된 점입니다. 명령이 엄하지 않고 형벌이 준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쉽게 깔보고 범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아서, 얼마 안되어 또 다시 전처럼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저 무리들은 오도(吾道)를 가리켜 이단이라 하고, 오도에서 사류에 끼워주지 않는 것이 바로 그들의 지극한 소원대로 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두려워할 줄 알고 조심할 줄 알겠습니까. 또 한스러운 것은 그 당시 합하의 아뢴 내용이나 이 대간(李臺諫)의 상소문이나 소인이 선비들의 시험문제로 내놓았던 말들이 모두 단지 그 교리만 공격하고 사람을 공격하지 않은 점입니다. 이 때문에 그것이 모두 근거도 없고 결론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던 것인데, 당시의 의견들은 또한 어찌 그 사람들이 친구간이라 하여 의견들은 고의로 덮어두고, 비호하려는 생각에서 그랬겠습니까. 다만 그 사실은 비록 매우 뚜렷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대부분 겉치레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 하나 조사해 낼 수도 없고 또 이런 종류의 성토는 범죄사건을 조사해 내는 것과 달라 몰래 염탐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드러난 것만 가지고 말하기 때문에 모두 적당히 넘어가는 혐의를 모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윤지충의 무리들이 나온 것은 실로 죄인을 잡았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것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곧 강상입니다. 우리 나라는 예의로 나라를 세워 지금 수천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지극히 패란하고 무도한 자가 있더라도 부모가 살았을 때는 섬기고 죽으면 장사지내는 예를 감히 어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혹 예법에 틀리고 어긋나는 일이 무식하여 함부로 행동하는 저 시골구석의 천민들 속에서 나오더라도 오히려 동네에서 배척하고 수령이 징계하여 한 치도 이를 어기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저 윤지충의 무리들은 오히려 감히 스스로를 오랑캐와 짐승에 붙이면서, 조상의 신을 소귀신과 뱀귀신에다 빙자하여 제사를 폐지하는 것도 모자라 초상을 당하더라도 혼백(魂帛)을 세우지 않고 부모가 죽어도 조문을 받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기까지 합니다. 그런 줄을 모르고 가서 조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대답하기를 ‘축하할 일이지 위로할 일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아, 실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천리가 생긴 이후 어찌 이런 변괴가 있었겠습니까.
율문에 이르기를 ‘남의 신주를 손상시킨 자는 그 죄가 살인과 같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제 손으로 그 조상의 신주를 태워버렸으니, 이는 시역(弑逆)의 변괴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설령 윤지충의 무리가 본성을 잃고 미쳐서 이런 변고를 일으킨 것이라 해도 사형죄를 면하게 할 수 없는데, 더구나 이단의 설을 빙자하여 오도(吾道)에 대항하여 선왕(先王)이 만든 예를 원수처럼 보고 흉악하고 패역스러운 짓을 기꺼이 하는 자이겠습니까. 그 죄악을 따져 보면 흉역보다 백 배나 더하니, 이런 것을 분명히 처벌하지 않는다면 삼강 오륜은 다시는 찾을 길이 없고 4백 년 동안 예의를 지켜 온 우리 나라가 장차 침몰해서 짐승과 오랑캐의 구역이 되고 말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어찌 가슴이 막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단에 종사하는 자들은 모두 침을 흘리면서 윤지충의 무리들이 한 짓에 감복을 하면서도 다만 예법이 두렵고 형벌이 앞에 있기 때문에 그래도 망설이고 두리번거리며 감히 멋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 권철신(權哲身)이 체천하지 않은 신주를 묻어버린 것과 이윤하(李潤夏)가 조상의 제사를 폐지한 것과 같은 일은 비록 소문은 있지만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조정에서 지충을 헐하게 처벌하는 것을 보게 되면 반드시 골짜기로 달리는 여울물이 일단 터지면 걷잡을 수 없는 것처럼 될 것입니다. 합하께서는 장차 무슨 방법으로 그 형세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듣건대 본 고을의 수령이 이미 그 집에 편지를 보내 합하에게 전달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합하께서는 과연 어떤 모양으로 결정하여 지시하셨습니까?
지금 도리를 모르는 자들은 혹 말하기를 ‘스스로 자기 몸을 망쳐 그의 집안에 변괴를 저지른 한두 명의 유생에 대한 문제를 어찌 조정에까지 올릴 것이 있겠는가.’ 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지충과 차이가 거의 없는 자들입니다. 지충은 이미 병으로 실성한 자도 아니고 또 전부터 패란했던 자도 아닙니다. 또한 감히 천주학을 믿어 자기의 무리를 늘릴 심산으로 스스로 선봉이 되어 인륜을 끊어버리는 일을 시험해 보는 것이니, 천하의 변고 중에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서리를 밟으면 장차 얼음이 얼 조짐이라는 것은 오히려 의례적인 말에 불과하고 황하가 터지면 물고기가 짓이겨지는 것과 같은 상황이 눈앞에 닥쳤는데, 합하는 또한 어찌 조금이나마 지체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만약 그 죄를 다스리더라도 그 율에 합당하게 하지 않는다면 더욱 치죄하지 않는 것만 못하여 적의 기세가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참으로 다스리고자 한다면 시행으로만 그친대서야 어찌 말이 되겠습니까. 마땅히 큰 길거리에 목을 매달아 놓고 적의 무리를 호령하며 그 집터를 파서 못을 만들고 그 고을을 혁파하기를 마치 역적을 다스리는 법처럼 한 뒤에야 이단을 믿는 자들이 조금이나마 목을 움추릴 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10월 24일 을축
좌의정 채제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양사가 함께 제기한 논계를 보니 이단을 물리치는 논의가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감복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오로지 홍낙안(洪樂安)이 쓴 장문의 편지를 근거로 삼은 것인데, 이른바 장문의 편지란 바로 신에게 보낸 것입니다. 신이 이미 그 속사정을 알고 있는 이상 어찌 침묵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이단의 간특한 설 가운데 양주(楊朱)나 묵적(墨翟) 같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양주는 스스로 의리를 가탁하고 묵적은 스스로 인애를 가탁하였으니, 언제 임금이 없어도 되고 아비가 없어도 된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까. 맹자(孟子)가 그들을 변론하여 물리치지 않았다면 그 재앙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더라도 사람들이 쉽게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서양학은 부모를 도외시하고 임금을 소홀히 하는 것을 하나의 의리로 삼아 세상 사람들의 자식들을 모조리 망치려고 하니, 그 피해는 실로 양주나 묵적보다 백배나 됩니다.
신은 그 학술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일찍이 글을 지어 분명하게 논변하였고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간절히 경계하였으며, 또 재작년 연석에 올랐을 때도 반복해 아뢰어서 영원히 그 근원을 막아버릴 것을 바랐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홍낙안의 편지를 받고서 비로소 호남에 권상연·윤지충 두 자가 사판을 태워버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심장이 놀라고 간담이 떨려 반드시 천벌을 빨리 내리게 하고픈 생각이 어찌 낙안보다 못하겠습니까. 다만 이단을 물리치는 것은 가상한 일이긴 하나 만약 이로 말미암아 한층 더 젖어들고 뻗어나갈 걱정이 있게 된다면 이는 군자가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한유(韓愈)가 좋은 말을 하였는데, 곧 ‘그 사람을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고 그 책을 불태워버리고 그 거처를 민가로 만들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단의 책은 물론 불태워버려야 하고 이단을 믿는 자들이 거처하는 곳은 응당 민가로 만들어야 한다 하였으나, 유독 이단을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사람을 죽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그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한유가 이단을 배격하는 것이 엄격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대체로 사람이 만약 이전에 하던 일을 부끄럽게 여기면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될 수 있고 사람이 만약 태도를 바꾸고 마음을 바꾸면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될 수 있으며 사람이 만약 형벌이 무서워 감히 못된 짓을 하지 못하면 역시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니, 옛날 현인들이 글을 저술하고 논리를 전개하여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 또한 어찌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권·윤의 죄가 과연 전하는 자의 말대로라면 이는 오랑캐나 짐승만도 못한 짓으로서 사람이라 하여 사람으로 인정하지 못할 자이니, 나라에 떳떳한 형벌이 있는 이상 다시 더 논의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낙안의 글은 옳은 말을 하면서도 잘 가리지 못하고 문제 이외의 것을 부질없이 언급하였습니다. 노나라의 술맛이 박하여 한단(邯鄲)206) 이 포위당하고 장공(張公)이 술을 마셨는데 이공(李公)이 취했다는 말처럼 이는 천고에 그럴 이치가 없는 말입니다. 낙안은 나이가 아직 어려 사실 깊이 책망할 것이 없지만 그의 말은 어찌 이처럼 근거가 없단 말입니까. 더구나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셔서 조정이 편안하고 국내에는 시끄러운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장각(張角)과 백련교(白蓮敎) 등의 말을 장황하게 끌어대 사람을 무섭게 만들면서 마치 국가의 재난이 당장 눈앞에 박두한 것처럼 하였으니, 비록 이단을 배척하는 마음이 급해서 말을 적절히 헤아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유독 민심이 쉽게 놀라고 의심하는 것은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지금 그 글이 온 세상에 두루 퍼져 대각의 계사에 급한 편지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낙안이 스스로 만들어 취한 것입니다.
사특한 학술은 물론 응당 깊이 미워하고 엄히 처벌하여 종자를 퍼뜨리지 못하게 할 일이지만 만약 무슨 의도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친다면 꼭 세상일에 관한 걱정이 되지 않는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전에 낙안이 낸 통문속에 쓸데없는 말이 들어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신이 신의 자식에게 신의 이름을 삭제하게 하였으며 나중에 그 말을 고쳐 권·윤만 배격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또 신의 자식으로 하여금 신의 이름을 함께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한 번은 삭제하고 한 번은 기록하게 한 것이 신은 스스로 대략 참작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또한 이것을 가지고 두 끝을 잡고서 그 가운데를 취하는 우리 전하의 정사를 우러러 돕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엄하게 대처하고 밝게 살피시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정치를 밝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어제 대간의 계사에 대한 비답을 보았는가? 이단이라 불리는 것은 비단 노자(老子)나 석가모니나 양주나 묵적이나 순자(荀子)나 장자(莊子)나 신불해(申不害)나 한비자(韓非子)뿐만 아니라, 제자 백가(諸子百家)의 수많은 글들로서 올바른 법과 떳떳한 도리에 조금이라도 어긋나 선왕(先王)의 정당한 말씀이 아닌 것들은 모두 해당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 때는 사특한 설이 횡행하는 것이 맹자 때와 같은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 맹자는 이단을 홍수와 맹수, 난신 적자(亂臣賊子)처럼 배척하였으나 공자는 단지 평범하게 그것이 해롭다고만 말하였는데, 그 이유는 각기 처해 있는 시대가 같지 않았기 때문이고 처지가 바뀐다면 반드시 다 그렇게 할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소인의 마음으로 성인의 마음을 헤아려, 마치 탕서(湯誓)와 태서(泰誓)의 글이 각기 여유있고 각박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여기니, 공자가 진짜 이단에 들어가지 않은 제자 백가들까지도 오히려 이단이란 명목을 처음으로 만들어 교훈을 보여주고 미리 막으려 했던 것을 너무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논어》의 본지가 어찌 《맹자》의 호변장(好辯章)보다 더 엄격하지 않은 것이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공자 때와는 천수백 년이나 떨어졌으니, 그 오도의 본지를 드러내 밝히고 이단을 배격하는 책임이 우리 무리의 젊은이들에게 있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패관 잡기(稗官雜記)부터 금지해야 하고 패관 잡기를 금지하려면 먼저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문집들부터 금지시켜야 한다.’ 하였다. 대체로 그 근본을 바르게 하는 것은 오활하고 느슨한 것 같아도 힘을 쓰기가 쉽고, 그 말단을 바로잡는 것은 비록 지극히 절실한 것 같아도 공을 이루기가 어려운 것이다. 지금 내가 금지하려는 것이 근본을 바르게 하는 데에 하나의 도움이 안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공자가 지위를 얻어가지고 도를 행하여 제자 백가의 설들이 경전과 함께 행세할 수 없었더라면 맹자가 무엇 때문에 그처럼 많은 이야기를 해서 당시 사람들에게 논변을 좋아한다는 비평을 받았겠는가.
마침 경의 차자로 인해 다시 대간에 대한 비답 가운데 미처 다하지 못했던 곡절을 거듭 밝혔다. 경은 묘당에서 국가의 대계를 세우는 자리에 있으니, 모름지기 명말 청초의 문집과 패관 잡기 등의 모든 책들을 물이나 불 속에 던져 넣는 것이 옳겠는가의 여부를 여러 재상들과 충분히 강구하도록 하라. 이것을 만약 명령으로 실시하기가 혐의가 있다면 연경에 가는 사신들이 잡서를 사오는 것을 금지시키는 문제를 추진하는 것이 경의 뜻에는 어떻겠는가?
서양학의 고질적인 폐단에 대해서는 경의 차자 가운데 심지어 ‘그 학술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글을 지어 분명히 논변하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깊이 경계하였다.’고까지 하였는데, 경은 일찌감치 인심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성학(聖學)을 밝히지 못한 것을 가지고 도리어 자신의 책임으로 삼는 것은 정말 지나치고 또 지나친 것이다. 내가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바른길로 인도하여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답게 만들지 못하였으니, 경이야 무슨 책임이 있겠는가. 또 홍낙안 무리의 사적인 글 가운데 한두 구절 비유로 취한 말은 어제 대간의 계사 속에서 사실 보았지만 사방에서 알고 의혹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쓸데없이 드러내 쓰지 말고 즉시 수정하도록 하였었다. 나이 어린 신진들의 말만 잘하는 병통을 경은 어째서 그대로 방치하려 하는가. 이 점은 도리어 내가 경에게 개탄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10월 25일 병인
차대가 있었다. 상이 좌의정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이단을 공격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한 것에서 성인의 깊은 뜻을 엿볼 수 있고, 중국은 오랑캐를 치기를 일삼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비록 오호(五胡)로 하여금 중국을 침입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진한(秦漢)처럼 전쟁을 지나치게 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일전에 대간의 계사에 대한 비답에 참작한 것이 있었던 것인데, 외부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서 반드시 내가 느슨하게 다스린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단은 오랑캐와 같은 것이니 또한 어찌 끝까지 다스릴 수 있겠는가.
홍낙안의 긴 글은 과연 무슨 의도에서 나온 것인가. 말로 경에게 얘기하는 것이 무슨 안될 문제가 있기에 굳이 긴 글을 보냈단 말인가. 우리 나라는 모두가 사적인 싸움에 용감한 것으로 볼 때 낙안의 글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대간의 계사에 대해 내린 비답 속에 기관(機關)207) 이란 문구를 썼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경은 그 편지를 보고서도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엊그제 빈연(賓筵)에서 남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아뢰었는데, 나도 역시 그 말의 은근한 뜻을 짐작하였다. 현재 이미 드러난 자는 빨리 엄하게 다스림으로써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자에게 스스로 잘못을 고칠 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다.
경의 차자 가운데 장각(張角) 등에 대한 말은 너무 지나친 것 같다. 오늘날 올바른 학문은 나날이 쇠미해 가고 세상의 도리는 나날이 잘못되어 가는데, 이러한 간특한 설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한다면 일만 그르칠 뿐이다. 경의 지위로서 만약 문제를 잘 다스려 그들이 스스로 없어지게 하려 한다면 어찌 그만한 방법이 없기에 문자로 써서 한 세상에 전파하기까지 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서양학은 실로 불서(佛書)와 대동소이합니다. 요즈음 풍속이 경박한 것을 추구하여 이상한 글을 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간간이 미혹되어 돌아올 줄 모르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진산(珍山)의 두 죄수에 관한 문제는 그 고을 수령이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 관해 들어 보았는데, 윤지충(尹持忠)이 신주를 불태우고 시신을 내버렸다는 말은 전한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었습니다. 장례를 치를 때 예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하는데 가난한 자가 예를 갖추지 못하는 것은 형편상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사판을 새로 만들지는 않았으나 이전의 신주는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만약 조사해 보면 그 사실 여부를 가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권상연(權尙然)의 문제는 그의 친족인 권상희(權尙熺)가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조상의 사판에 절을 하려고 상연의 집에 갔는데, 사판이 없어서 깜짝 놀라 상연에서 물었더니, 그가 「그대로 두는 것이 소용이 없어 이미 처리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처리한 곳을 물으니 「물에다 던지면 남이 찾을까 두렵고 땅에 묻으면 여러 친족이 반드시 파내어 다시 받들어 모실 것이므로 별도로 처리했다.」 하였으니, 아마도 태워버린 것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이미 드러난 자는 법에 따라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대간의 계사 속에 교주(敎主)와 도당(徒黨)이란 말이 있는데 비록 조정에서는 조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이 만약 낙안에게 조사해 물어본다면 반드시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이는 다 알아내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 속에 비록 서양학을 하는 자가 있더라도 선비의 갓을 쓰고 선비의 옷을 입고 있으니, 외면으로는 조사해 알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낙안의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반드시 엄히 다스리려고 한다면 변고가 생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윤리의 변고입니까. 이제 만약 그 사실을 잡아주지 못하고 그 사람을 지적하여 ‘네가 서양학을 했지?’ 한다면 어찌 스스로 승복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된다면 얼굴을 맞대놓고 조사하는 과정에 줄줄이 체포되어 곧 큰 옥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같은 맑고 공평한 세상에서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남을 무함하면 반좌법(反坐法)에 걸리기 마련인데 고발을 당한 자가 혹시 용서받아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면 남을 무함한 자가 어찌 반좌법에 걸려 응당 죽게 되지 않겠습니까. 홍낙안의 편지만 가지고 보더라도 ‘사대부들 가운데 천주학을 하는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은 된다.’ 하였으니,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서양학이란 것이 어떤 것이기에 그렇게까지 사람의 마음을 속이고 현혹시키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그 학술은 오로지 천당과 지옥의 설이 중심인데, 그 본뜻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자는 것에서 생긴 듯하나, 그 폐단은 마침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른바 아비가 없다고 한 말은, 아비로 섬기는 것이 셋이 있는데, 그중에 상제(上帝)를 높여 첫째 가는 아비로 삼는 것은 그나마 서명(西銘)의 ‘하늘을 아버지라 부른다.[乾稱父]’는 뜻에 속하지만, 조화옹(造化翁)을 두 번째 아비로 삼고 낳아준 아비를 세 번째 아비로 삼는 점에 있어서는 윤리가 없고 의리에 어긋나는 설입니다. 임금이 없다고 한 말은, 그 나라의 풍속은 본디 임금이 없고 일반 백성 가운데 뛰어난 자를 골라서 임금으로 세운다 하니, 더욱 흉악합니다. 또 그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선을 행한 자는 천당으로 돌아가지만 악을 행한 자는 지옥으로 빠진다. 그러니 비록 제사를 지내더라도 천당으로 돌아간 자는 반드시 기꺼이 와서 흠향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지옥에 빠진 자는 또한 와서 흠향할 수가 없다. 그러니 쓸데없는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는 예의의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요망한 설에 미혹되니, 실로 가증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사특한 설을 중지시키고 편벽된 이론을 막는 책임은 오로지 경에게 달렸다. 어떻게 하면 그들로 하여금 저절로 일어났다가 저절로 소멸되어 모두 스스로 새롭게 되는 길을 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지금 그 학술에 대해 특별히 시행할 방도가 없고 또 근거를 잡아 조사할 만한 형적도 없습니다. 오직 드러나는 자부터 다스려 그 책을 태워버리고 그 사람들을 사람답게 만들면 자연 수그러들 것입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비록 그 책을 물이나 불 속에 던져 넣는다 하더라도 만약 몰래 감추어 두는 자가 있으면 어찌 모두 수색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진 시황의 형법으로도 오히려 서책을 전부 금지하지 못했는데, 몰래 감추어 두는 것을 어찌 모두 다 금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금지령을 너무 엄하게 세워 사형으로 처결한다면 도리어 법이 시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금지 조항을 명백하게 보여주어 스스로 사라지도록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낙안의 편지 속에 명령의 전달이 역마를 두어 전달하는 것보다 빠르다느니, 민간을 소란케 한다느니 하는 등의 말은 실로 지나친 것입니다. 모든 일이 지나치면 문제를 일으키는 법이니, 우선 내버려두고 따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에게 이 자리에 있도록 한 것은 경이 가진 의리가 틀리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번 백년의 수치를 씻어내게 하려 했는데 지금 이단의 학술이 갑자기 경이 재상으로 있는 시기에 터져나왔고 그것을 공격하는 자나 배우는 자들도 모두 경이 아는 사람들이다. 경이 이 문제를 조정하지 못한다면 어찌 그 책임을 피할 수 있겠는가. 일을 진정시키는 방도는 오로지 경에게 달렸다. 경은 모름지기 이단을 배척하여 뿌리를 빼고 근원을 막아버림으로써 세상의 도리가 다시 바로잡히고 인심이 크게 안정되게 하여 서로 치고 흔들어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홍낙안은 그 말이 오로지 이단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므로 허튼 말을 한 것으로 죄를 줄 수 없으나, 직접 와서 얼굴을 맞대고 말하지 않고 이런 긴 편지를 쓴 것은 참으로 잘못하였다. 진산의 두 죄수는 사실을 조사한 뒤 만약 억울하다면 어찌 꼭 죄를 따질 것이 있겠는가. 해당 고을 수령은 늙은 학구(學究)라 말할 수 있으니, 어찌 깊이 책망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두 죄수의 죄는 신문해 보면 밝혀질 것입니다. 만약 억울한데도 불구하고 죄를 받는다면 어찌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해당 수령은 경학(經學)으로 자부하는 사람으로서 일찍이 예산(禮山)에 있을 때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 엄히 신칙하여 금지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이 일로 죄를 준다면 그의 본심이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여러 재상들에게 물으니, 좌참찬 김화진(金華鎭)이 아뢰기를,
"신이 을사년 당시 형조에 재직할 때 이단에 깊이 빠진 자들을 모두 형을 가하여 유배했는데, 그 때 10여 인이 앞을 다투어 승복하면서 처벌을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지금 진산의 두 적은 이전의 그들보다 더욱 심하니, 엄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수어사 정창순(鄭昌順)은 아뢰기를,
"신이 대간의 말이 나온 뒤에 홍낙안의 장서를 얻어보았는데, 이른바 사대부와 선비 가운데 물든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라 했습니다만, 그들은 친지들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온 세상이 다 미혹되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책자를 간행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우니 빨리 조사해 내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권·윤 두 죄수는 윤리의 적인데 대신은 이미 긴 편지를 보고도 어찌 연석에서 아뢰지 않았단 말입니까."
하자, 제공이 아뢰기를,
"연석은 막중한 자리인데 어찌 소문을 가지고 갑자기 아뢸 수 있겠습니까. 자세히 알아본 뒤에 아뢸 생각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학술을 하는 자나 그 학술을 공격하는 자를 막론하고 한편으로 미혹을 깨우치고 한편으로 진정을 시키는 것은 모두 좌상의 책임이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진정시키는 방도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지금 이 간특한 설은 반드시 저절로 일어났다가 저절로 소멸될 것이므로 성상께서 너무 염려하실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사신이 명·청(明淸) 문집 등의 책자를 사오지 못하도록 신칙할 것을 명하였다.
10월 26일 정묘
장령 한흥유(韓興裕)가 상소하여 먼저 언로를 여는 도리를 진술하고 또 서양학이 인심을 현혹시키는 변고를 논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언로를 열라.[開言路]’는 세 글자는 네 말이 절실하다. 덧붙여 진술한 일은 해당 도에서 조사하기를 기다려 사실 여부를 따져본 뒤에 윤리를 바로잡고 법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나머지 사족(士族) 가운데 그 학설을 전파하거나 어리석은 백성으로서 거기에 잘못 물든 자들은 어찌 소홀히 보아넘길 수 있겠는가. 어제 특별히 차대를 행하여 이 문제를 묘당에 넘겨 금지시키도록 하였다. 옛날 인조 계미년과 숙종 병인년에도 서양학의 사건이 있었는데, 그 때의 문헌을 찾아보면 상고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흘러들어온 자에 대해서도 묘당에서는 오히려 공문을 보내 잡아보내자고 청하는 상황인데, 더구나 지금 폐단이 되고 있다는 말이 이미 대간의 계본과 상소에까지 올랐으니, 나타나는 대로 엄히 다스리는 것을 어찌 네 말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27일 무진
권이강(權以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서호수(徐浩修)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관서의 무사(武士)로 도시(都試)에서 수석을 차지한 자와 몰기인(沒技人)208) 은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도록 하고, 앞으로 도내의 과거 시험에서 활을 특별히 멀리 쏜 사람은 비록 격식에 맞지 않은 경우라도 이름을 써서 보고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관상감에서 삼학(三學)에 대해 개정한 절목을 올렸다.
【1. 삼학에 주는 요포(料布)는 다음과 같다. 천문학에는 삼역관(三曆官)은 단료(單料)를 받는 자리가 24자리인데 삭포(朔布)가 24필이다. 당상관은 녹을 받는 자리가 2자리이고 교식술(交食術)을 익힌 자는 녹을 받는 자리가 1자리이다. 교수·훈도·체아 교수(遞兒敎授)·겸교수는 요식을 받는 자리가 합쳐서 5자리, 일과 감인(日課監印)·성경 감인(星經監印)은 요식을 받는 자리가 3자리, 대통추보관(大統推步官)은 요식을 받는 자리가 4자리, 총민관(聰敏官)은 요식을 받는 자리가 2자리, 취재(取才)에 합격한 자는 요식을 받는 자리가 9자리이다. 지리학에는 교수·훈도는 요식을 받는 자리가 2자리, 간산 사용(看山司勇)·화회 사용(和會司勇)은 요식을 받는 자리가 합하여 2자리, 취재에 합격한 자는 요식을 받는 자리가 2자리이다. 명과학에는 훈도·체아 교수·성경 감인(星經監印)은 요식을 받는 자리가 합하여 3자리, 택일(擇日)하는 체아 사과(遞兒司果)는 요식을 받는 자리가 1자리인데 삭포(朔布)가 5필이며, 취재에 합격한 자는 요식을 받는 자리가 2자리이다. 이전에는 화회 사용(和會司勇)과 체아 교수를 지리학과 명과학 두 곳에 번갈아 소속시켰는데, 화회와 체아는 모두 같은 사용으로서 이곳 저곳에 번갈아 돌리는 것은 한갓 문서만 번거롭게 할 뿐이므로 지금부터는 화회 사용은 지리학의 자리로 하고 체아 교수는 명과학의 자리로 정함으로써 번갈아 돌려가며 소속시키는 방식을 없앤다. 1. 이미 《시헌력(時憲曆)》의 신법(新法)을 쓰기로 했으니 《대통역법(大統曆法)》은 응당 익히지 말아야 하는데, 관청을 설치하고 또 관원을 두고서 대통추보관(大統推步官)이라 한 것은 명칭과 실지가 맞지 않는다. 또 더구나 추보관은 모두가 제거의 개인적인 안면으로 인해 백도(白徒)209) 들로 구차하게 채우다 보니 매년 동지(冬至) 때마다 써서 바친 일과는 《칠정(七政)》 몇 권 뿐이고 일년 내내 하는 일은 없이 4자리의 요식만 낭비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대통추보청에 《대통일과(大統日課)》를 줄이게 되면 수술관(修述官)이 추보(推步)를 겸해 관장하고, 동지에 역서(曆書)를 올릴 때 함께 써서 올리게 하되 《대통칠정(大統七政)》을 줄인다. 요식을 받는 4자리에서 2자리는 수술관에게 넘기고 2자리는 명과학에 넘긴다. 1. 매년 책력을 인쇄하는 수량은 위에 올리는 것과 각 관청에 나누어 주는 것과 본 관상감에서 사적으로 갖는 것을 합쳐 1만 4천 6백 70축(軸)이다. 그런데 명과학의 실직 관원이 받는 고정적인 요식이 매우 박하여 약간 여유있게 해주는 방도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다. 천문·명과 양학은 이미 신법을 쓰게 되었으므로 그것을 권장할 밑천거리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고 대령일관(待令日官)의 수고에 대해서도 구채(丘債)210) 를 별도로 생각해 주지 않을 수 없으며, 관청에는 매년 특별히 지출함으로써 축이 난 수량을 보충해 주지 않을 수 없다. 대통추보관(大統推步官)이 받은 책력 5백 축은 곧 1만 4천 6백 70축 안에 포함된 것이므로 지금 그것을 관청에 넘겨서 이자 2백 80냥을 늘려, 그 가운데 80냥은 천문학과 명과학에 4분기로 권장하는 상전(賞錢)으로 삼아 본청에 보관하고, 1백 20냥은 대령일관의 구채로 삼아 명과학에 보내고, 50냥은 관청에서 특별히 지출함으로서 축이 난 수량을 보충해 주는 조목으로 삼아 관청에 보관한다. 그리고 6백 30축을 더 인쇄하게 해서 명과학의 실직 관원에게 나누어 주되 세 역관의 예에 의해 각기 90축씩 나누어 주며, 차후로는 1만 5천 3백 축을 인쇄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는다. 1. 삼학에 돌려가며 임명하는 겸교수는 명과학에 전속시켜 45개월이 차면 6품으로 승진하는 자리로 삼고, 지리학의 경우는 을축년에 줄였던 번포(番布) 5질을 환원하여 마련해 준다. 그러면 천문학으로 말하면 이미 45개월에 한 번 승진해 가는 겸교수가 있으니, 이 15년 만에 한 번 옮기는 돌림자리를 잃어버린다 해도 별로 손해볼 것이 없고, 지리학으로 말하면 15년 만에 한 번 승진해 가는 겸교수와 매달 받는 번포 5필을 바꾸는 것이므로 역시 목전의 실속이 있는 계책이 된다. 나아가 명과학으로 말하면 7인을 정밀하게 선출하여 요포를 지급하고 또 45개월이면 6품으로 나가는 겸교수를 둔다면 아마도 그들을 고무 진작시키는 방도가 될 것이다. 1. 삼학에 대한 과거 시험과 취재 시험에는 각기 해당하는 책이 있다. 천문학에서는 지금 《시헌력》을 쓰는데도 《태초력(太初曆)》과 《대연력(大衍曆)》을 강론하고, 명과학은 지금 길일을 가리는 일을 관장하면서도 오로지 《녹명(祿命)》만을 강론하니, 배운 것이 써먹는 것이 아닌 형편에 어찌 성취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과거 시험은 법전에 실려있는 것이라서 갑자기 의논할 수 없지만, 취재 시험은 지금부터 녹취재(祿取才)·별취재(別取才)를 막론하고 천문학은 《수리정온(數理精蘊)》·《역상고성(曆象考成)》으로, 명과학은 《협기변방(協紀辨方)》·《상길통서(象吉通書)》로 하고, 이전에 강했던 책 이름은 모두 삭제한다. 천문학의 과거 시험에서 쓰던 《칠정내편주(七政內篇籌)》는 《칠요신법주(七曜新法籌)》로 바꾸지 않을 수 없고 《보천가(步天歌)》는 《신법보천가(新法步天歌)》로 바꾸지 않을 수 없다. 1. 지리학과 명과학은 본디 정원수가 없으므로 과거 시험에 합격했건 안했건 막론하고 출근하기만 하면 바로 실직 관원으로 불렸으나, 지금부터는 마땅히 정밀히 골라 뽑아서 양학의 실직 관원수를 각기 7인으로 정하여 모두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으로 임명하고 천문학의 예에 따라 별선관(別選官)을 겸임할 수 없게 하라. 천문학과 명과학 양학은 이미 신법으로 바뀌었으니, 반드시 과목을 정하여 권장한 뒤에야 비로소 통달할 수 있을 것이다. 명과학에는 수임(首任)을 훈장(訓長)으로 삼아 매달 한 번씩 《협기변방》·《삼길통서》를 가지고 관청에 있는 여섯 사람을 가르치도록 하고, 천문학에도 수임을 훈장으로 삼고 삼역관과 수술관(修述官) 가운데 역리(曆理)에 통한 사람을 부훈장으로 삼아 삼역관·수술관 및 전함(前啣)이나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 가운데 가르칠 만한 사람 30인에게 매달 한 차례씩 《수리정온》·《역상고성》을 가르친다. 양학에서 각기 그 시험보인 결과를 조사하여 도표에 기록하고 네 계절 마지막 달에 제조가 시험보여 취재하고, 석 달 동안 받은 점수를 통계하여 각각 3사람씩 뽑아서 상을 주되, 일등은 5냥, 그 다음은 3냥, 그 다음은 2냥을 준다. 천문학은 연말에 12개월 동안의 점수를 합산하여 삼역관들이 일등을 하면 겸교수 자리가 비었을 때 채워넣고, 수술관 중에서 일등을 한 자는 삼역관의 자리가 비었을 때 채워넣고, 전함 중에서 일등을 한 자는 수술관 자리가 비었을 때 채워넣는다. 1. 겨울과 여름의 두 차례 녹취재(祿取才)에는 삼학(三學)에 현재 근무하면서도 녹이 없는 사람을 모두 응시할 수 있게 하되, 6월에는 천문학은 《칠요산(七曜算)》과 《수리정온》으로 시험해 뽑고 지리학은 《금낭경(錦囊經)》과 《명산론(明山論)》으로 시험해 뽑으며, 12월에는 천문학은 《칠요산》과 《역상고성》으로 시험해 뽑고 지리학은 《청오경(靑烏經)》과 《호순신(胡舜申)》으로 시험해 뽑는다. 명과학의 경우는 두 번 다 《협기변방》과 《상길통서》로 시험해 뽑는다. 천문학의 삼역관·수술관·별선관(別選官)·부연관(赴燕官)을 취재할 때는 모두 《칠요산》·《수리정온》·《역상고성》 가운데 한 가지 책을 시험보이고 지리학의 실직 관원과 별선관은 모두 예전에 강했던 네 가지 책 가운데 두 가지 책을 시험보이고 명과학의 실직 관원 및 별선관·부연관·겸교수의 취재는 모두 《협기변방》·《상길통서》를 시험보인다. 녹취재의 경우는 제조 한 사람과 예조의 당상과 낭관이 함께 나와 시취하고, 그 나머지 별취재의 경우는 영사(領事)나 혹은 한두 제조가 시험하여 뽑는다. 1. 옛날 규례에는 부연관(赴燕官)을 매년 뽑아 보냈는데, 근년에는 3년에 한 번씩 보내는 것을 규례로 삼고 있다. 천문학에서 책력을 정리하는 일과 명과학에서 날받는 법은 모두 중국의 술서와 기구를 의존하는데, 중국에 오가는 일이 드물어 보고 듣는 것이 적으므로 비록 재주가 뛰어난 자가 있어도 발전할 길이 없다. 그러니 이제 옛 법도를 회복하여 천문학과 명과학 양학에서 번갈아 매년 보내되, 한 번은 취재해서 보내고 한 번은 좌목(座目)211) 의 순서에 따라 보낸다. 천문학에 일과(日課)와 감인(監印) 두 자리가 있는데, 이 역시 알짜배기 자리이므로 서로 자리다툼을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하나는 전례대로 삼역관에 새로 부임한 자로 임명하고, 하나는 본학 가운데 부연관 취재에서 이등을 한 사람과 본학의 좌목에 두 번째인 사람을 번갈아 임명한다. 1. 명과학의 규정을 변경하는 것은 오로지 나라에서 날받는 일을 위한 것이므로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이번에 개정할 때는 이전부터 명성이 있는 자나 나이 젊고 총명한 자 한두 사람을 제조들이 합석해서 뽑고, 앞으로는 7인 가운데 빈 자리가 있으면 절목(節目)에 따라 시험보여 뽑아서 임명한다. 그리고 매번 날을 받은 뒤에는 예조에서 아무개 일관(日官)이 날을 받은 것이라고 써서 아뢰고 훈장은 문서로 기록해서 그 재능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아 한 번 틀리면 포(布)를 한 번 주지 않고 두 번 틀리면 요식과 포를 모두 주지 않으며 세 번 틀리면 겸교수 취재에서 빼버린다. 여러 번 틀려서 끝내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는 기록하여 도태시킨다. 1. 삼학(三學)의 실직 관원 가운데 혹 영구직으로 맡겼거나 혹 분기를 뛰어넘었거나 혹 변고를 당한 사람이 있어 남은 요포(料布)가 있는 경우는 우선 취재(取才)의 자리에 임시로 붙여두고 도로 붙여줄 때를 기다리게 한다. 1. 천문학의 삼역관 35원과 수술관 6원, 그리고 지리학과 명과학 두 학의 실직 관원 각 7원 가운데 결원이 있으면 취재 시험 합격자로 충원한 뒤에 겨울과 여름의 녹을 받는 관원의 예에 따라 계하(啓下)하고,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지방 사람 가운데 혹시 술법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연석(筵席)에서 아뢴 뒤에 비로소 뽑아 임명하도록 한다. 그러나 천문학의 별선관 30원, 총민관(聰敏官) 10원과 지리학·명과학 두 학의 별선관 각 10원은 단지 취재 시험 합격자로만 뽑아 충원한다.】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55면
【분류】과학-역법(曆法) / 인사(人事) / 출판(出版)
[註 209]【1. 삼학에 주는 요포(料布)는 다음과 같다. 천문학에는 삼역관(三曆官)은 단료(單料)를 받는 자리가 24자리인데 삭포(朔布)가 24필이다. 당상관은 녹을 받는 자리가 2자리이고 교식술(交食術)을 익힌 자는 녹을 받는 자리가 1자리이다. 교수·훈도·체아 교수(遞兒敎授)·겸교수는 요식을 받는 자리가 합쳐서 5자리, 일과 감인(日課監印)·성경 감인(星經監印)은 요식을 받는 자리가 3자리, 대통추보관(大統推步官)은 요식을 받는 자리가 4자리, 총민관(聰敏官)은 요식을 받는 자리가 2자리, 취재(取才)에 합격한 자는 요식을 받는 자리가 9자리이다. 지리학에는 교수·훈도는 요식을 받는 자리가 2자리, 간산 사용(看山司勇)·화회 사용(和會司勇)은 요식을 받는 자리가 합하여 2자리, 취재에 합격한 자는 요식을 받는 자리가 2자리이다. 명과학에는 훈도·체아 교수·성경 감인(星經監印)은 요식을 받는 자리가 합하여 3자리, 택일(擇日)하는 체아 사과(遞兒司果)는 요식을 받는 자리가 1자리인데 삭포(朔布)가 5필이며, 취재에 합격한 자는 요식을 받는 자리가 2자리이다. 이전에는 화회 사용(和會司勇)과 체아 교수를 지리학과 명과학 두 곳에 번갈아 소속시켰는데, 화회와 체아는 모두 같은 사용으로서 이곳 저곳에 번갈아 돌리는 것은 한갓 문서만 번거롭게 할 뿐이므로 지금부터는 화회 사용은 지리학의 자리로 하고 체아 교수는 명과학의 자리로 정함으로써 번갈아 돌려가며 소속시키는 방식을 없앤다. 1. 이미 《시헌력(時憲曆)》의 신법(新法)을 쓰기로 했으니 《대통역법(大統曆法)》은 응당 익히지 말아야 하는데, 관청을 설치하고 또 관원을 두고서 대통추보관(大統推步官)이라 한 것은 명칭과 실지가 맞지 않는다. 또 더구나 추보관은 모두가 제거의 개인적인 안면으로 인해 백도(白徒) :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고 관원이 된 사람.[註 210] 구채(丘債) : 구가(驅價), 녹봉 이외에 관리가 하인을 부리는 비용 등으로 쓰도록 주는 돈.[註 211] 좌목(座目) : 관리의 등급.
10월 28일 기사
각신 서영보(徐榮輔)를 보내 함흥(咸興)과 영흥(永興) 두 본궁(本宮)을 봉심(奉審)하고 아울러 제사지내고 수호하는 현황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다. 함흥과 영흥에 태조(太祖)가 임금이 되기 이전에 살던 옛 저택이 있었는데, 한(漢)나라의 원묘(原廟) 제도를 모방하여 ‘본궁’이라 이름하였다. 제사지내고 수호하는 일들을 모두 유사를 번거롭게 할 것 없이 내수사에서 관원을 보내 주관하게 하면서 ‘별차(別差)’라 이름하고 지방 관리는 거기에 관계하지 않았다. 상이 제례는 지극히 중요하므로 한 명의 별차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하여 영보로 하여금 봉심하고 아뢰게 하였다.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0월 29일 경오
오재순(吳載純)을 예문관 제학으로,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10월 30일 신미
대사간 권이강(權以綱)이 상소하여 서양학(西洋學)의 문제를 논하기를,
"일전에 있은 대간의 계사에 홍낙안의 장서를 인용한 말에 책자를 간행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책자를 간행하는 일은 공사가 복잡하고 일처리가 거창하여 한두 사람이 간단히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공사를 감독한 사람과 그 시설을 설치한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낙안이 이미 문자에 그 말을 올렸으니, 어찌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은 것이 없겠습니까. 신은 낙안에게 한 차례 물어서 근원을 찾아 그 판목을 헐어버리고 그 사람은 처벌하여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요즘 이 일에 대한 처분에 분명한 결단을 내리지 않은 것은 사적인 편지는 공적인 증거와는 달라서 완전한 조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네가 이미 책을 발간했다는 문구를 잡아내서 이처럼 상소로 사실을 조사하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네 말이 사리에 맞는 것으로서 지난번 네 동료 대간이 여러 말을 전부 베껴 범범하게 진술한 것과는 다르다."
하고, 정원으로 하여금 책을 간행한 것이 누구의 소행인지를 전 가주서 홍낙안에게 물어서 아뢰도록 하였다.
윤호(尹㬦)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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