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임신
상이 경모궁(景慕宮)에 가서 재숙하였다.
11월 2일 계유
경모궁의 동향제(冬享祭)를 몸소 거행하였다.
11월 3일 갑술
초계 문신에 대한 친시(親試)를 거행하고, 이어 성균관 유생들에게 응제(應製)하도록 명하였다.
평택 현감(平澤縣監) 이승훈(李承薰)과 양근(楊根) 사람 권일신(權日身)을 잡아다 문초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전 가주서 홍낙안(洪樂安)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신이 무신년212) 정대(廷對)에서 사학(邪學)을 크게 배척한 뒤에 서학(西學)을 하는 자들이 신을 원수처럼 질시하여 서로 교류가 끊어진 것이 마치 다른 나라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책을 간행하고 베낀 것을 어찌 자세히 알겠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들으니 이 학술이 다시 성해져서 활자로 간행됐다는 말이 역시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달포 전에 전 승지 이수하(李秀夏)가 호서에서 상경하여 신의 집에 머물렀는데, 서학에 말이 미치자 신에게 근심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 고향에는 이런 근심이 더욱 심하다. 베낀 책들을 집집마다 감추어 두었을 뿐 아니라 간간이 활자로 인쇄한 책도 있다 한다. 내가 비록 목격하지 못하여 전적으로 믿기는 어려우나, 매우 성행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나도 형세를 보아 상소를 올리려 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종전에 전해 들은 것은 비록 하천배나 아녀자들의 근거없는 말이었지만, 이것으로 참고해보면 반드시 근거의 뿌리가 있는 것임을 알겠기 때문에 대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범범하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신이 만약 그것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심지어 백간(白簡)213) 에까지 오를 줄 미리 짐작했다면, 어찌 한 글자 반 구절이라도 신중히 하지 않았겠으며, 또 어찌 감히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 이외에까지 언급했겠습니까. 신이 대신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단지 서로 흉허물없는 의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소문으로 어렴풋이 들은 말까지 빼놓지 않고 낱낱이 말하였으며, 편지를 보낼 때 또 작은 서찰을 마련해 본 뒤에는 즉시 돌려주기를 요청하였고, 신 역시 감히 한 사람에게도 전하거나 보여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이 답서를 보내지도 않고 또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자 와서 보여달라는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혹 말하기를 「대신의 집에서 이미 대략은 보았다.」 하였기에 신도 역시 굳이 피하지를 못하고 비로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온 세상에 두루 유행된 것을 신의 허물로 돌리니, 신은 역시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또 일전에 대신이 그 아들을 신에게 보내 책을 간행했다는 사람에 대한 말이 나온 곳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설령 간행한 자가 있더라도 금령(禁令)이 나온 뒤에는 반드시 자취를 숨길 것이니, 내가 유사가 아닌 바에야 어떻게 탐지해 내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잇따라 대간이 소장을 올려 신문하기를 청하면서 기필코 신에게 허망(虛妄)의 죄를 돌리려고 하였습니다. 이제 이 일을 살핌에 있어서는 마땅히 이 학술을 전문으로 공부한 자에게 물어야 할 것이니, 그러면 간행 여부를 한번의 조사로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간은 성스러운 조정의 이목(耳目)을 담당한 관원인데, 어찌 이 학문을 한 사람의 이름 하나를 전혀 모른 채 반드시 신처럼 귀멀고 눈먼 사람에게 얻어 들으려고 한단 말입니까. 이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간의 신하가 말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신이 그것을 진술해 볼까 합니다. 간행하는 것은 오히려 여사(餘事)에 속합니다. 대개 그 아버지의 사행(使行)에 따라가 수백 권의 사서(邪書)를 널리 가져와 젊고 가르칠 만한 사람들을 그르친 자가 있으니, 바로 평택 현감 이승훈이 그 사람입니다. 신은 승훈과 본래 사이가 좋았지만, 이 일이 있은 뒤로는 사사로운 원수처럼 미워했습니다. 분명히 승훈은 을사년214) 봄에 스스로 형조에 가서 변명한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뉘우칠 줄 모른 채 정미년 겨울에 몰래 반촌(泮村)에 들어가 젊은이들을 속여 유혹하면서 그 가르침을 널리 폈습니다. 신의 친구인 전 지평 이기경(李基慶)이 직접 보고 돌아와 신에게 걱정을 하며 탄식을 하기에, 신은 「성균관이 어떤 곳인데, 어찌 이런 무리들이 이런 짓을 하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하며 곧바로 동지(同志)들을 불러모아 글을 올려 엄히 토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승훈이 곧 놀라 도망치는 바람에 신이 미처 글을 올리지 못하고 이어 대책(對策)의 글에서 진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사학(邪學)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모두 승훈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책을 간행했는지의 여부를 승훈이 절대 모를 리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일전에 특별히 차대(次對)를 거행한 것은 이단을 물리치는 일과 두루 다스리는 책임을 대신에게 직접 효유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대신이 간행한 사람을 찾으려고 아들을 그에게 보내 질문한 것에서 대신의 고심을 볼 수가 있다. 하물며 대사간의 상소가 마침 이때 나와 간행한 사람을 조사하기를 요청하였으니, 그 정도(正道)를 보위하고 사설(邪說)을 없애는 도리에 있어서 그 말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말을 따르고자 한다면, 그에게 묻지 않고 누구에게 묻겠는가.
그런데 이번에 대답한 말을 보면 간행에 관한 한 조목에 대해서는 ‘목격하지는 못하였고, 전해준 이수하의 말과 단지 세상에 전하는 말만을 들었을 뿐이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사서(私書) 가운데 간행했다고 말한 것은 과연 길거리에 전해지는 것을 주워모아서 말을 했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가 장서(長書)에서는 자세히 말하다가 대답하는 글에서 애매하게 한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만일 그런 일이 없는데 이런 말을 했다면 그 스스로 망령되고 경솔한 죄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계사(啓辭)는 시행하지 말고 다시 본원으로 하여금 그를 계판(啓板)215) 앞에 불러다가 반복해 물어서 사실대로 조목조목 대답하게 하라. 그리고 이승훈을 모른 체 놔둘 수 없으니, 왕부(王府)에 명해 잡아다가 신문한 뒤 실정을 아뢰는 공초를 받아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정원이 다시 아뢰기를,
"홍낙안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신이 전 승지 이수하에게 들었던 말을 가지고 다시 수하에게 물었더니, 전의 말과 똑같았습니다. 수하가 사는 곳은 바로 호서의 보령현(保寧縣)입니다. 그곳은 사학이 더욱 성행해서 현감 이일운(李日運)이 10여 인을 징계해 다스렸으나 역시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매번 그 간행본을 찾아서 진짜 증거물로 삼으려 했으나 그들이 매우 치밀하게 숨겨놓아서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진산 군수(珍山郡守) 신사원(申史源)이 전에 예산(禮山)을 맡고 있을 때, 민간의 요서(妖書)를 거두어 모아 관청의 아전에게 맡겼다고 전에 신에게 말하였습니다. 또 이번에 신에게 답한 편지 가운데 말하기를 「예산의 촌백성들이 갖고 있는 언문 번역서나 베낀 책을 곧 형리(刑吏)의 상자 속에 맡겨 두었는데, 그 중에 《성교천선(聖敎淺說)》과 《만물진원(萬物眞源)》 두 책은 모두 증거가 있다.」 하였습니다. 신은 이 두 책이 간행된 것인지 베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촌백성들에까지 미쳐 그 성행함이 이와 같으니, 몰래 간행한 것도 역시 의외의 일은 아닙니다.
또 정미년 겨울 이승훈이 성균관에서 설법(說法)할 때도 역시 책을 끼고 간 일이 이기경(李基慶)에게 직접 목격되었고, 또한 왕복한 편지도 있으니, 기경에게 물어보면 그 대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간행했다는 증거는 못된다 하더라도 그들이 금서를 사사로이 감추어 놓았다는 한 가지 증거는 될 것입니다. 만약 목격도 하지 못하고서 사서(私書) 속에 올린 것으로 죄를 삼는다면 신은 진실로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신의 사서에 나오는 한 마디 말이 설사 착오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대간의 신하가 꼭 이 말을 끄집어 내어 말을 만들어내려 한단 말입니까. 그 책을 간행했다는 한 조목은 자취를 없애고 감추면 찾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이 한 조목을 없었던 일로 만들어 신의 편지 전체의 말 뜻을 모두 허망한 것으로 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의사를 따져보면 분별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신이 이 편지를 보낸 이래로 인척들은 자취를 멀리하고 친구들에게는 절교를 당하였는데 심지어는 재앙을 일으킬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까지 지목을 당하였습니다. 신은 바야흐로 원한이 맺히고 쌓인 채 마치 곤궁하여 의지할 곳 없는 자와 같은데, 이와 같은 형편에 어디에서 이 일의 허실(虛實)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사학이 매우 성행하고 있는 것은 책을 간행하였거나 베껴쓴 것과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현재 교주(敎主)가 되어 있는 자를 한 차례 징계하여 다스린다면 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들은 이상 어찌 감히 숨기겠습니까. 양근(楊根)의 선비 권일신(權日身)은 신의 편지 가운데 드러난 자일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서는 온 세상에 전파되어 말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 도정 목만중(睦萬中)이 지은 통문(通文)과 진사 목인규(睦仁圭)가 사림에 보낸 편지에서 그가 스스로 교주가 된 죄를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일신은 바로 고(故) 동지(同知) 안정복(安鼎福)의 사위입니다. 정복은 경술(經術)과 유행(儒行)으로 우뚝이 학자들의 스승이 된 사람으로, 일찍이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지어, 그 유폐가 큰 환난이 될 것이라 말하였고 심지어는 풍각(風角)216) 이나 부수(符水)217) 에 비기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연경(燕京)에 가서 책을 사온 것은 승훈의 허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일신과 정복의 관계는 서로 인연을 끊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일신의 아들 세 사람은 바로 정복의 외손자인데, 30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모두 그 외조부의 장례에 가보지도 않았으니, 그 스스로 교주로 자처하는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하겠습니다.
또 예산의 백성 이존창(李存昌)이란 자는 이미 본읍에서 형벌을 받고도 한결같이 뉘우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인의 교화를 해치고 인륜(人倫)을 망치는 것으로 보면 책을 간행한 것보다 더 심한 점이 있다 할 것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기호 지방에 사설의 피해가 가장 심하게 된 것인데, 그 사실을 규명하고자 한다면 유사가 한 번 손을 쓰면 될 것입니다. 신은 근심과 개탄스러움이 가슴에 가득하여 또 망언(妄言)을 하고 말았으니, 참람된 죄 스스로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책자의 일과 관련하여 진짜 증거물이 드러났다면 조정에서는 유사에게 맡겨 그 법대로 처리하면 될 뿐이다. 어찌 이처럼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갑의 말로 을을 잡아다 조사하고 을의 공초로 갑을 잡아다 따질 것이 있겠는가. 이번 일을 한결같이 묘당에 맡긴 것은 뜻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이 문답을 비랑(備郞)218) 을 불러서 주어 묘당에 전하도록 하고,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홍낙안과 홍낙안이 대답한 말 가운데 증거로 댄 여러 사람들을 불러다 묻도록 하되, 이른바 책자에 관련된 중요한 사항을 하나하나 지적해 초기하도록 하라.
양근의 권일신의 일은, 비록 책을 간행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이른바 교주(敎主)라는 두 글자가 이미 주대(奏對)하는 말 가운데 나왔으니, 어찌 이미 조사가 완결된 권철신이나 윤지충에게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교주가 되었다는 증거문에 대해 편지를 내고 통문을 낸 사람들에게 묻게 한 뒤 해조로 하여금 바른 법을 규명해 아뢰도록 하라. 예산 백성의 행위가 진실로 이와 같다면 매우 가증스러운 일이나, 도신에게 맡겨서 처리하면 족할 것이다. 그 죄가 마땅히 죽일 것이면 조정에 보고하게 하고, 그 실정이 가히 유배로 끝낼 수 있는 것이면 곧바로 도신이 결정하도록 할 일을 해도에 분부하라."
하였다.
잡서(雜書)와 무늬 비단을 연경에서 사오는 것을 거듭 금지시켰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무늬 비단을 금지시키는 것은 선조(先朝)의 금제(禁制)를 거듭 밝히기 위한 것일 뿐만이 아니다. 우리 나라의 쓸모있는 물건으로 이처럼 사치스러운 것을 사오다니, 재물의 낭비가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세속에 이른바 가지주(可只紬)라는 것에 문항라(紋杭羅)가 있고 문추사(紋皺紗)가 있는데, 연전에 거듭 금지시킨 것은 바로 이 몇 가지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명령이 이미 나갔는데 이 자잘한 비단을 사오는 일에도 시행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웃 나라가 알게 해서는 안될 일이다. 이 뒤로 범할 경우에는 수역(首譯)을 의주에 내려보내 엄히 매를 쳐서 돌려보이도록 하라."
하고, 이어 연경에 들어가는 사신들에게 특별히 유시하기를,
"잡서와 무늬 비단 등 무릇 금물(禁物)에 관계되는 것을 제대로 살피지 못할 경우, 의주부 윤은 그곳에다 죽을 때까지 충군(充軍)할 것이며, 사신 역시 엄히 처벌하겠다."
하였다.
11월 4일 을해
영숙문(永肅門)에 나가 초계 문신의 시사(試射)와 선전관의 강사(講射)를 거행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 오재순(吳載純)과 훈련 대장 조심태(趙心泰)에게 이르기를,
"중일각(中日閣)에서 포를 쏘면 명례문(明禮門)의 정면을 향하게 되니 마음에 매우 죄송스럽다."
하고, 드디어 심태 등으로 하여금 중일각의 약간 오른 쪽의 공한지로 살펴 정하도록 하였다.
11월 5일 병자
비변사가 아뢰기를,
"하교에 따라 여러 사람들을 불러 신문하였더니, 홍낙안(洪樂安)은 말하기를 ‘제가 만약 간행한 책을 목격했다면, 어찌 문계(問啓) 가운데에 낱낱이 진술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사사로운 편지에 불과하니, 비록 착오가 있다 하더라도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제가 아는 것은 단지 권일신이 교주라는 것뿐입니다.’ 하였고, 이수하(李秀夏)는 말하기를 ‘저의 집은 호서(湖西)에 있는데, 사대부가 서학(西學)을 한다는 소문은 못 들었고, 단지 염전의 일꾼과 농부들 중에 미혹된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서울에 올라간 뒤에 친지들과 말하는 가운데 단지 통탄스럽고 놀랍다는 뜻만을 말하였을 뿐, 책을 간행한 것에 대해서는 눈으로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해서는 말도 한 일이 없습니다. 실로 무슨 이유로 이름이 문계 가운데 들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말한 것으로 따져 보면, 책을 간행한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시 규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권일신이 교주라는 말은 홍낙안의 문계 가운데 명백히 나왔을 뿐만이 아니고 지금 직접 공술할 때에도 분명히 단정지어 마지않았으니, 이는 허실을 명백히 규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만중과 목인규가 바로 통문을 내고 편지를 보낸 사람이기 때문에 만중을 문초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권일신이 사학(邪學)에 빠졌다는 것은 친지들이 모두 들어서 아는 바입니다. 일찍이 을사년에 형조에서 김씨 성을 가진 중인(中人)을 조사할 때, 일신이 사대부의 자제로서 스스로 형조의 뜰에 들어가, 김씨 성을 가진 사람과 함께 죄를 받기를 원하였으니,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그의 죄를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 때문에 친지들이 모두 그와 절교를 하였습니다. 이른바 교주란 관직도 아니고 임명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가 힘을 기울여 주관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 가운데 높이고 믿는 자들이 교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매우 가슴아프게 여겨 이 때문에 통문을 낸 것입니다. 천한 제 아들 인규는 응제(應製)를 보러 가서 아직 성균관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가 홍낙안에게 보낸 편지에 역시 권일신을 교주라고 한 것은 제가 보낸 통문 속의 뜻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이기경(李基慶)에게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저와 이승훈·홍낙안은 함께 공부한 절친한 친구입니다. 정미년 겨울 승훈과 함께 성균관에 있을 때, 이른바 서양서(西洋書)라는 것을 승훈과 함께 보았으니, 만약 책을 본 것이 죄가 된다면 저와 승훈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 간혹 좋은 곳도 있었지만, 이치에 어긋나고 윤리를 해치는 일이 그 가운데 많이 있기에 있는 힘을 다해서 논척(論斥)하고 승훈에게도 많이 경계시켰습니다. 그 뒤 홍낙안과 얘기를 할 때 이것을 말한 일이 없지 않으나, 이것은 증거를 서 준 것과는 다르고, 단지 붕우 사이에 절차탁마하는 의리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대저 일신이 스스로 형조에 들어와 함께 죄를 받기를 원한 것은 명백한 증거가 되는 일로서, 그가 요학(妖學)의 와주(窩主)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을사년 이후라도 그가 만약 회개하여 자책하고 정학(正學)으로 돌아왔다면, 온 세상이 어찌 이렇게까지 지목하겠습니까. 이를 엄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사설을 단속할 길이 없게 되고 인심을 안정시킬 수 없을 것이니, 권일신을 해조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율(律)대로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6일 정축
육상궁(毓祥宮)에 가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연호궁(延祜宮)과 선희궁(宣禧宮)을 차례로 참배하였다.
관학 유생 송도정(宋道鼎) 등이 상소하기를,
"책을 사온 이승훈은 빌미를 처음 제공한 흉적이요, 교주 노릇을 한 권일신은 바로 호법(護法)하는 괴수입니다. 그 나머지 권철신·이윤하(李潤夏) 및 서로 전해주고 익힌 자들은 한결같이 왕법(王法)으로 처리하고, 신사원(申史源)이 지방관으로서 비호한 죄는 늦추어서 논죄하지 않을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이에 전하께서 크게 윤음을 내리셔서 이단을 물리치고 정도를 넓히는 뜻을 효유하시면서 묘당에 오로지 맡겨 조사해 다스리는 책임에 힘쓰도록 하셨으니, 오늘날 성상을 받들어 보좌하는 책임을 맡은 자로서는 역시 끝까지 규명하고 통렬하게 다스려 성상께서 맡기신 뜻에 부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요즈음 조정은 조용하고 한가하기만 할 뿐 불에 탄 사람을 구하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뜻은 전혀 없으며, 고개를 숙이고 이리저리 살피기나 하여 밝은 눈으로 간담을 토로하는 의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규명하여 다스리는 일이 도리어 사학을 키우는 길을 열어서 다시 지난해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조정에서 물리치고 배척하고 금지하고 죄주는 것을 어찌 너희들의 말을 기다려서야 하겠으며, 또 혹시라도 어찌 너희들보다 소홀하게야 하겠는가. 조정에서는 먼저 조정의 사체(事體)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선조(先朝) 무인년219) 에 황해도 지방에서 사학(邪學)이 생겨 거의 집집마다 사람마다 사당을 허물고 제사를 폐지하는 등 황해도에서 강원도에 이르기까지 그 신도가 많아져 중외가 자못 두려워하고 의심스러워 했으나, 선조께서는 일찍이 연석에서나 윤음 가운데 조금도 개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스스로 일어났다가 스스로 없어지는 것으로 넘겨버리셨다. 그때 한 연신(筵臣)이 그 일을 조사하기를 청하자, 그때야 비로소 어사를 보내 조사해 다스리게 하시되, 단지 앞장서 말한 자 한 사람을 죽이게 하였을 따름이었다. 그때 연석(筵席)에 있던 사람 중에 고 대신 이종 성(李宗城)과 고 중신 이익보(李益輔)는 조정은 가볍게 힘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어사를 보내지 말 것을 힘써 주장하였고, 고 대신 이천보(李天輔)는 관찰사가 일찍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해서 조정에서 처분하도록 만들었다고 강경하게 말하면서 도신을 무겁게 처벌하자고 청하였다. 그런데 이번 일로 말하면 조정에서 말로 교시한 것이 선조 무인년의 처분에 비교하면 이미 배나 힘을 쓴 것이다. 이것은 나름대로 《논어》와 《맹자》의 훈계에 따라 늦추거나 엄히 하는 데에 차별을 둔 것이라 하겠다.
너희들이 수선(首善)의 땅에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성스러운 조정의 성학(聖學)에 누를 끼침이 있을까 걱정해 처벌하고 토죄하자는 말을 진술할 생각을 한 것이니, 그 정성이 가상하고 마음이 가상하다. 그러니 어찌 몇 줄 만든 말이 꼭 하나하나 다 적중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끄집어내어 허물할 것이 있겠는가. 요청한 대로 조사 결과가 나오면 마땅히 수종(首從)을 가려 밝게 처분을 내리겠으니,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아 더욱 열심히 위정 척사(衛正斥邪)의 방책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7일 무인
이치중(李致中)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죄인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을 조사한 일을 아뢰기를,
"지충이 공술하기를 ‘계묘년220) 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갑진년221) 겨울 서울에 머무는 동안, 마침 명례동(明禮洞)에 있는 중인(中人) 김범우(金範佑)의 집에 갔더니, 집에 책 두 권이 있었는데, 하나는 《천주실의(天主實義)》이고 하나는 《칠극(七克)》이었습니다. 그 절목(節目)에 십계(十誡)와 칠극(七克)이 있었는데 매우 간략하고 준행하기 쉬워서, 그 두 책을 빌려 소매에 넣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베껴 두고는 이어 그 책을 돌려보냈습니다. 겨우 1년쯤 익혔을 때 떠도는 비방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 책을 혹 태워버리기도 하고 혹 물로 씻어버리고 집에 두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혼자 연구를 하고 학습을 하였기 때문에, 원래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곳이나 함께 배운 사람도 없습니다.
천주(天主)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공경하고 높이는 뜻이 못됩니다. 그런데 사대부 집안의 목주(木主)는 천주교(天主敎)에서 금하는 것이니,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집안에 땅을 파고 신주를 묻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 앞에 술잔을 올리고 음식을 올리는 것도 천주교에서 금지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서민(庶民)들이 신주를 세우지 않는 것은 나라에서 엄히 금지하는 일이 없고, 곤궁한 선비가 제향을 차리지 못하는 것도 엄하게 막는 예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주도 세우지 않고 제향도 차리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단지 천주의 가르침을 위한 것일 뿐으로서 나라의 금법을 범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나아가 조문(吊問)을 거절했다는 일로 말하면, 내 부모가 돌아가신 것을 위문해 주었으니 감사하고 애통스러워 맞아 곡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하거늘 어찌 차마 거절한단 말입니까. 만약 믿지 못한다면 조문한 손님이 있으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부모를 장사지내는 일로 말하면 관곽(棺槨)·의복·곡읍(哭泣)·천효(穿孝)222) 는 천주교인일수록 더욱 두텁고 근실하게 하는 것인데, 어찌 감히 부모를 장사하는 일을 소홀히 했겠습니까. 상여를 잡는 예와 4척의 높이로 무덤을 만드는 것은 풍속대로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5월에 모친상을 당했는데도 8월 그믐날에야 기한을 넘겨 장사를 지낸 것은 집안에 마침 전염병이 돌아 외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근의 친구들은 비록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였어도 동네의 평민들은 모두 와서 거들어 주었으니, 이것도 한 번만 물으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소문은 정말 황당무계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상연은 공술하기를 ‘저는 윤지충과 내외종(內外從) 사이로 같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천주실의》와 《칠극》을 수 년 전 윤지충의 집에서 얻어 보았는데, 그 때는 지충이 책을 태우거나 씻어버리기 전이었습니다. 제례(祭禮)는 이미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았습니다만, 사판(祠版)은 훼손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일찍이 부모를 잃었기 때문에 그동안 부모를 장사지낸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학문을 한 이후로 일가의 여러 종족들이 모두 「네가 이미 제사를 폐지했으니 신주도 역시 반드시 훼손해버렸을 것이다. 너 때문에 족당(族黨)에게 피해가 미칠 것이다.」 하면서 못하는 말없이 꾸짖고 책망하였는데, 이에 없는 일이 부풀려져 비방이 떠돌아다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지충과 상연을 다시 자세히 문초하고 매 30대를 치니, 지충이 공술하기를 ‘양대(兩代)의 신주를 과연 태워버리고 그 재를 마당에다 묻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묻었다고 공초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8월 모친 장례 때에도 신주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승으로부터 전해 받았다는 한 조목으로 말하면, 그 책을 얻어 그 학문을 익힌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전해받은 스승이 있겠습니까. 교주(敎主)라는 말은 서양(西洋)에 있다고는 들었어도 우리 나라에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을 지목하여 하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홍낙안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도를 많이 늘렸다는 말은 더욱 애매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스스로 터득하는 학문일 뿐 애초부터 권하고 가르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형제처럼 친한 경우에도 본래 전해주지 못하는데, 어떻게 신도를 늘렸겠습니까. 또 망령되게 증거하지도 말고 남을 해치지도 말라는 천주의 가르침이 계율(誡律) 가운데 있으니, 더욱 다른 사람을 끌어다가 증거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상연은 공술하기를 ‘저의 집의 신주를 애초에 땅에 묻으려 하였으나, 이목이 번거로울까 두려워 남몰래 불태워버리고 그 재를 무덤 앞에 묻었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책은 지충에게 빌려보았을 뿐 애초에 베낀 일이 없는데, 어떻게 감추어둔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충의 동네 사람들을 또 추문(推問)했더니, 회격(灰隔)223) 과 횡대(橫帶)224) 를 예대로 했고, 시기를 지나 장사지낸 것도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천하의 변괴가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마는, 윤·권 두 사람처럼 극도로 흉악한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시신을 버렸다는 것은 비록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낙착되었지만, 그 위패를 태워버린 것은 그 자도 역시 실토하였습니다. 아, 이 두 사람은 모두 사족(士族)입니다. 그리고 지충으로 말하면 약간이나마 문자를 알고 또 일찍이 상상(上庠)225) 의 유생이었으니, 민간의 무지스러운 무리들과는 조금 다른데, 사설(邪說)을 혹신(酷信)하여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린 채 단지 천주가 있는 것만 알 뿐 군친(君親)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나아가 평소 살아계신 부모나 조부모처럼 섬겨야 할 신주를 한 조각 쓸모없는 나무라 하여 태워 없애면서도 이마에 진땀 하나 흘리지 않았으니, 정말 흉악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제사를 폐지한 것 등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속합니다.
더구나 형문을 당할 때, 하나하나 따지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형조 판서 김상집(金尙集)과 참판 이시수(李時秀) 등을 불러 보고 이르기를,
"이제 전라 감사가 조사해 아뢴 것을 보면,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태워버린 한 조목에 대해서는 이미 자백하였다 하니, 어찌 이처럼 흉악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 있겠는가. 대저 경학으로 모범이 되는 선비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점차 물들어 이처럼 오도되기에 이른 것이니, 세도(世道)를 위해서 근심과 한탄을 금할 수가 없다.
선조(先朝) 무인년 연간에 이른바 생불(生佛)이란 자가 해서(海西)에서 나왔을 때 어사를 보내 단지 그 괴수를 죽이도록 명하였을 뿐, 일찍이 윤음을 내려 제시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번 일에 대해서 이미 많은 교시를 내렸으니, 이는 《논어》·《맹자》의 가르침을 모방해 늦추고 엄격하게 하는 데에 차별을 두려는 것이었다. 이 뜻은 이미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비답 가운데에서 언급했었다. 대개 이번 일이 대부분 좌상(左相)이 아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나왔기 때문에 외간에서는 혹 내가 좌상의 얼굴을 보아준다고 말하는 듯도 하다마는, 이 일이야말로 위정 벽사(衛正闢邪)에 관계되는 것인데, 내가 어찌 한 대신을 위해서 치죄를 소홀히 하겠느냐.
조사하는 일이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닌데 사학을 하는 자가 어찌 권·윤뿐이겠는가. 그러나 지금 만약 낱낱이 조사하여 사람마다 따지고 든다면, 이는 가르치지 않고 처형하는 것과 비슷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다만 마땅히 하나를 징계하여 백을 경계시키는 법을 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드러난 자들을 법대로 처벌한다면, 이것은 살리는 도리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한 뒤에 방방곡곡에 효유하고 금조(禁條)를 엄격히 세우는 일을 결단코 그만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좌상의 차자 가운데 ‘동요시킨다.[敲撼]’는 두 글자야말로 어찌 더욱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진실로 동요시키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 죄로 처벌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어찌 감히 동요시킨다는 두 글자를 글로 나타내어 팔방(八方)에 반포함으로써 마치 먼저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한단 말인가. 엊그제 유생들의 상소에서도 묘당이 토죄를 늦추고 있다고 하였는데, 대신은 마땅히 그것을 과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일이 대부분 대신의 친지와 관계되어 있으니, 대신이 어찌 형적에 혐의가 없을 수 있겠는가.
들으니 유생들의 상소문을 내도록 통문을 돌린 것은 바로 목인규(睦仁圭)인데, 끝내는 상소의 내용 중 대신을 핍박하는 것이 있다고 하여 그 이름을 깎아버리고 내놓았다 하니, 참으로 이른바 탄문서(呑文書)226) 라고 하겠다. 채홍리(蔡弘履)가 처음으로 이런 짓을 하더니, 이수하(李秀夏)·이기경(李基慶)이 또 이런 짓을 하기를 어렵지 않게 여기니, 정말 경악스럽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일신을 추문할 때에는 책을 간행했는지의 여부를 마땅히 문목(問目)에 넣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책을 바친다면 간행한 것이건 등사한 것이건 따질 것 없이 수화(水火) 가운데 던져넣은 뒤에야 길이 근본을 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이 일은 형정(刑政)만으로 다스릴 수는 없다. 사학(邪學)을 물리치려면 무엇보다도 정학(正學)을 먼저 밝혀야만 한다. 그러므로 일전에 책문(策文) 제목을 내면서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문집에 대한 일을 성대하게 말했던 것이다. 대체로 명·청 시대의 글은 초쇄기궤(噍殺奇詭)227) 하여 실로 치세(治世)의 글이 아닌데, 《원중낭집(袁中郞集)》이 가장 심하다. 요즈음 습속을 보면 모두 경학(經學)을 버리고 잡서를 따라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세상에 유식한 선비가 없어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보고 느끼는 바가 없게 된 것이다. 내가 소설(小說)에 대해서는 한 번도 펴본 일이 없으며, 내각에 소장했던 잡서도 이미 모두 없앴으니, 여기에서 나의 고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11월 8일 기묘
비가 왔다.
호남의 죄수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하고, 진산군(珍山郡)은 5년을 기한으로 현(縣)으로 강등하고,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을 그 지방에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경외에 효유하여 집안에 서양 책을 소장한 자는 관청에 자수하게 하고, 묘당과 각도(各道)로 하여금 각기 글을 읽고 행실을 닦는 선비들을 천거하도록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대신에게 문의하니, 좌의정 채제공은 의논드리기를 ‘윤지충과 권상연의 흉악하기 그지없는 죄가 소문에 자자하였으나, 신은 생각하기를 「일단 사람의 모습을 갖췄으면 똑같은 양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도 사람인데 어찌 그렇게 심한 악행을 저질렀겠는가.」 하면서 나름대로 반신반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도신의 계문을 보니, 그 부모의 시신을 버렸다는 것은 비록 낭설로 전해진 것이라 하더라도 사판(祠版)을 불태워버린 것은 모두 자복을 했습니다. 이단 사설(異端邪說)이 남의 자손들을 해침이 예로부터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마는, 이처럼 지극히 흉악하고 패륜한 일은 인류가 생긴 이래로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극률(極律)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인심을 맑게 하고 윤리를 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윤지충과 권상연 양적(兩賊)은 도신에게 분부하여, 여러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부대시(不待時)로 참형에 처하고 5일 동안 효수함으로써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강상(綱常)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사실과 사학은 절대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대명률(大明律)》의 사무 사술(師巫邪術)을 금지하는 조항을 보니 ‘무릇 모든 좌도(左道)로서 정도를 어지럽히는 술수나, 혹 도상(圖像)을 숨겨 보관하거나, 향을 피우고 무리를 모아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거나, 겉으로 착한 일을 하는 체하면서 민심을 선동하고 미혹시키는 경우, 괴수는 교형(絞刑)에 처한다.’ 하였고, 발총(發塚) 조에는 ‘부조(父祖)의 신주를 훼손한 자는 시신을 훼손한 법률과 비례한다. 자손이 조부모나 부모의 시신을 훼손하고 버린 경우에는 참수하되, 두 죄가 함께 발생한 때에는 무거운 쪽으로 논죄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윤지충과 권상연 등을 보면 요서(妖書)의 사특한 술수를 몰래 서로 전해 익히고, 심지어는 부조(父祖)의 신주를 직접 태워버렸으니, 흉악하고 패륜함이 이를 데 없어 사람의 도리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위의 율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호남의 죄수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하도록 이미 옥관의 의견에 따랐는데, 그들의 지극히 흉패함은 매장하지 않았다는 한 조항이 낭설이라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불에 태웠건 묻었건 따질 것 없이 사당 가운데 있던 신주에 의도적으로 손을 댔으니,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자라면 무슨 짓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사형에 처하는 것만도 오히려 헐한 처분이라고 하겠다.
요즘 백성들의 뜻이 나날이 투박해지고 정학(正學)이 나날이 황폐해가고 있지만, 그래도 이처럼 윤상(倫常)을 없애는 일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하였다. 어찌 다만 불손(不遜)하고 불친(不親)하다고만 말하겠는가. 무인년 해서(海西)의 일은 단지 촌 백성과 노파들이 무지하고 부끄러움을 몰라서 범한 일이었다. 그런데 권·윤 두 사람은 더욱 천한 무리들과는 다르니, 그 떳떳한 이륜(彛倫)의 변고가 마땅히 어떻다 하겠는가. 이것이 형조의 문안을 판하(判下)하면서 먼저 정치의 교화가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탄식했던 까닭이다.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는 방도로 볼 때 별도로 악을 징계하는 처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강상(綱常)에 관계되는데 어찌 격식에 구애받을 수 있겠는가.
전라도 진산군은 5년을 기한으로 현으로 강등하여 53고을의 제일 끝에 두도록 하라. 그리고 해당 수령이 그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었는데 그가 감히 관청에 있어서 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가 먼저 적발했다는 것을 가지고 용서할 수는 없다. 일전에 대간의 계사에 대해서 역시 일의 결말을 기다려 처분하겠다고 비답하였으니, 해당 군수는 먼저 파직하고 이어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법에 따라 무겁게 처벌토록 하라.
그리고 그 책을 태우라는 요청에 대해서는 이미 형관(刑官)이 연석에서 아뢴 말에 따라 불태우도록 하였다. 그러나 어찌 한갓 법이 저절로 시행될 이치가 있겠는가. 집에 소장한 자는 관청에 알려 자수하도록 하되 자수한 자는 따지지 말고, 오늘 새벽으로 시행하는 시점을 설정토록 하라. 이른바 그 서책이 다시 새벽 이후에 적발되는 경우에는 무거운 벌을 시행하되 가장(家長)도 함께 처벌하며 결단코 용서해주지 말도록 하라. 이상의 내용을 금석 같은 법전에 기록한 뒤 묘당에서 먼저 오부(五部) 안의 마을에 엄히 밝혀 알리도록 하고 외방(外方)에도 똑같이 반포토록 하라.
이제 처리를 이미 엄하게 하여 이른바 사학의 일을 모두 결말지었다. 다시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을 공거(公車)에 올려 번거롭게 응수하게 한다면 오히려 아예 일삼지 않는 의리가 못될 것이니, 이렇게 분부하는 것이다. 지난번 대간의 계사와 재상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정학을 보위하라.[衛正學]’는 세 글자로 신신당부하며 사설을 물리치는 급선무로 삼도록 했었는데, 그 말이 비록 오활하고 먼 듯하지만 실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을 처형한 뒤에 정학을 부식(扶植)하고 천발(闡發)하는 계책을 오활하고 멀다고 하여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지난번 초계 문신의 대책(對策) 가운데 답안지 하나를 보니 ‘산림에서 자취를 숨기고 있는 사람을 먼저 낭잠(郞潛)228) 과 읍리(邑吏)로 시험적으로 써서 바로잡는 방법으로 삼으라.’ 하였는데, 매우 조리가 있는 견해여서 이번 일의 조사가 끝나 결말이 난 뒤에는 그 말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니 현재 진산의 빈 자리에 뽑힌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보내도록 전조(銓曹)에 분부하라.
또 연석(筵席)에서 근본을 바로잡는 방안을 말할 때, 대신이 ‘경전을 학습하고 정(程)·주(朱)를 존중하며 곤궁한 속에서도 꿋꿋이 유속(流俗)에 물들지 않은 자를 특별히 뽑아서 진출시키라.’고 했는데, 대신의 말이 참으로 좋다. 묘당으로 하여금 책을 읽은 선비들을 뽑아서 아뢰도록 하라. 식년시(式年試)가 멀지 않으니, 지금이 그 적기이다. 몸을 신칙하고 행실을 닦는 도내의 선비들에 대해서도 역시 묘당으로 하여금 각도의 방백들을 엄히 신칙하여 실다운 마음으로 그 명령에 부응하도록 하라. 먼저 낭잠(郞潛)에 시험해도 능히 감당을 하고 다음에 지방관으로 시험해도 적합하고 미루어 고문(顧問)의 지위에 올려도 넉넉히 감당할 만한 자를 식년마다 원래 천거하는 숫자 이외에 뽑도록 하되 비록 한두 사람이라 할지라도 각각 찾아서 반드시 연내에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라. 사서(邪書)를 관청에 보고하는 것은 서울은 20일을 기한으로 하고, 각도는 각기 명령이 도착한 날부터 따져 20일 후를 기한으로 하라."
하였다.
영천(榮川)·함양(咸陽)·안동(安東)·양산(梁山) 등 고을에 제방이 무너졌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장계로 민정(民丁)을 징발해 수축하기를 요청하니, 전교하기를,
"흉년에 백성을 부역시키기는 어려우나, 백성을 기르기 위한 목적으로 백성을 부리는 것이니, 이는 왕정(王政)에서 그만둘 수 없는 일과 관계되는 것이다.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유생 목윤중(睦允中) 등이 상소하여, 태학의 상소 가운데 대신을 핍박하는 어구에 대해 의견이 같지 않아서 각각 소를 올리게 된 뜻을 밝히니, 전교하기를,
"태학의 통문(通文)도 없이 11인이 연명으로 상소를 한 것은 전에 듣지 못했던 일이다. 감히 이처럼 도리에 어긋나고 외람된 짓을 할 수 있는가. 그 가운데 목인규(睦仁圭)는 초기(草記)와 문계(問啓)에서는 그 이름을 드러내었는데, 홀연히 어제 녹명(錄名)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가, 오늘 상소 아래에 이름을 넣었으니, 어찌 매우 가증스럽지 않겠는가. 소두(疏頭)는 정거(停擧)하고, 인규는 그 학업을 금지시키는 동시에 향리로 내쫓아 다시는 성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수찬 신헌조(申獻朝)가 상소하기를,
"홍낙안이 무너져가는 흐름 속에서 몸을 떨쳐 일이 일어나기 전에 환란을 염려하였으니, 성인의 무리가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신이 그에 대해 깊이 책망할 것도 없는 자라고 배척했으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저 대신으로 말하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혼자 재상 자리에 앉아 있는데, 전례가 없는 변고가 그 친지들 가운데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낙안의 사신(私信)이 있었으면, 편지를 본 뒤에 진실로 곧바로 진달(陳達)하여 위정 벽사(衛正闢邪)할 도리를 생각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는 하지 않고 마치 병을 피해 의원을 꺼리는 것처럼 하면서 정론(正論)을 편 낙안까지도 마치 배척하는 것처럼 행동했으니, 저으기 대신을 위해서 개탄하는 바입니다.
신이 또 삼가 관학 유생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니, 선조 무인년에 있었던 해서 지방의 요설(妖說)을 가지고 오늘의 일을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해서의 일은 단지 어리석은 백성들이 한때 잘못한 것인만큼 그때 대신들이 힘써 진정시킨 것은 사체(事體)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갓을 쓰고 책을 읽는 나라 안의 선비들이 서로 돌아가며 미혹된 나머지 똑똑한 사람치고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은 경우가 없으니, 세도(世道)를 걱정하고 훗날을 걱정함에 있어 어찌 해서의 일과 동등하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날에 지난날의 규범을 이끌어 대는 것은 평성(平城)이 포위되었을 때 간척무(干戚舞)를 추는 것과 거의 가깝지 않겠습니까.
신이 삼가 전교를 보건대 감사가 조사해 아뢴 데 따라 권상연·윤지충 두 적에 대해 빨리 죄안을 결정해 법대로 바로잡으라고 명하시면서 사설을 사라지게 하고 어지러운 풍속을 징계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이 학설에 점차 물든 것이 이미 시일이 오래된 만큼 거기에 휩쓸려 따르는 자들이 필시 권·윤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교주인 권일신(權日身)과 최초의 빌미를 만든 이승훈(李承薰)을 엄히 국문해서 실정을 알아내고 하나하나 규명하여 차례로 처형해야만 세도(世道)를 일으켜 세우고 혼란의 싹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학(學)이란 한 글자는 그 체면이 자별한 것인데 서양의 술법을 감히 학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일전의 차자와 계문에서 혹 그 말을 쓴 경우가 있기에 신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유생들의 상소를 보니 또 이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부 무군(無父無君)의 술법을 학이라 부른다면, 공자·맹자·안자(顔子)·증자(曾子)의 학문은 어떤 글자로 불러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제대로 살피지 못한 실수라 하더라도 너무나 근거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앞으로 상소나 아뢰는 말에 학이란 한 글자를 서양의 술법에 쓰는 것은 일체 금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국문[鞫]이란 한 글자는 요즈음의 나쁜 습속인데, 그것을 입에 올리거나 글로 쓰기를 어렵지 않게 여기고 있으니, 그것이 도리어 세도와 관계가 있다 하겠다. 그리고 끝에 가서 상소나 아뢰는 말에 양학(洋學)이라 말하지 말고 양술(洋術)이라 부르라고 청한 일은, 그대의 말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학문에 정학(正學)과 사학(邪學)이 있는 것은 마치 ‘일덕(一德)’이라고 할 때의 덕과 ‘덕이 둘 셋이면 흉하다.’고 할 때의 덕과 ‘악덕(惡德)’이라고 할 때의 덕이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도(道)는 하나일 뿐이고 성(性)도 선(善)일 뿐이나 곧기가 마치 화살 같은 경우도 있고 굽기가 마치 자[尺] 같은 경우도 있다. 이(理)도 역시 성(性)이고, 기(氣)도 역시 성이다. 그러나 굽은 길이 직로(直路)에 무슨 누를 끼치며, 기(氣)가 어찌 이(理)에 뒤섞일 수 있겠는가. 나를 열어주고 물 대주는 곳에 있는 그대가 이처럼 고루한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였다.
이승훈(李承薰)을 삭직하고, 권일신(權日身)은 사형을 감해서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도록 명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이승훈이 공술하기를 ‘홍낙안(洪樂安)의 문계(問啓) 가운데 저를 모함한 것이 무릇 세 조목입니다. 하나는 책을 사왔다는 것이고, 하나는 책을 간행했다는 것이고, 하나는 성균관에서 회합했다는 것입니다.
책을 사왔다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계묘년229) 겨울 부친을 따라 연경에 가서, 서양인이 사는 집이 웅장하고 기묘해 볼 것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여러 사신들을 따라 한 차례 가보았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바로 자리를 파할 무렵에 서양인이 곧 《천주실의》 몇 질을 각 사람 앞에 내놓으면서 마치 차나 음식을 접대하듯 하였는데, 저는 애초에 펴보지도 않고 돌아오는 여장에다 넣었습니다. 그리고 말이 역상(曆象)에 미치자 서양인이 또 《기하원본(幾何原本)》 및 《수리정온(數理精蘊)》 등의 책과 시원경(視遠鏡)·지평표(地平表) 등의 물건을 여행 선물로 주었습니다. 귀국한 뒤에 뒤적여 보았습니다만 점차 말들이 많아지자 을사년 봄에 저의 부친이 종족(宗族)들을 모아놓고는 그 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여러 의기(儀器)들도 역시 모두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도 드디어 이단을 배척하는 글을 지어서 통렬히 배척하기를 남김없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낙안은 재가 된 수십 권의 책을 수백 권의 요서(妖書)라고 억지를 부리고, 구하지 않고 저절로 얻게 된 물건을 의도를 갖고 사온 일로 날조했고, 글을 지어 물리친 사람을 속임수로 유혹해 교세을 넓혔다는 말로 무함했으니, 그의 말이 오로지 화심(禍心)에서 나온 것임을 여기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대개 그 뜻은 제가 이미 태워버린 책을 가지고 오늘날 이단이 나오게 된 근본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학설이 유래되고 그 책이 전파된 것은 수백 년 이래의 문헌에서 상고할 수 있으니, 제가 드러내 변명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온 세상이 보고 들은 바가 있을 것입니다. 비록 이단 사설(異端邪說)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자신이 독실하게 실천한 뒤에야 다른 사람들이 그 가르치고 유인하는 말을 믿는 법입니다. 스스로 물리치는 글을 짓고서도 그 가르침을 널리 펼 수 있었던 경우는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한 조목으로 말하면 그의 말이 이치에 벗어난 것임을 자연히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을 간행했다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낙안의 문계(問啓)를 본 뒤에야 비로소 책을 간행했다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는 비단 아무 증거가 없는 것일 뿐만이 아닙니다. 공연히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 낸 뒤 억지로 남에게 씌우면서 그가 모를 리가 전혀 없다고 한다면 어찌 천하에 살아 남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가 한 말을 그가 반드시 스스로 알 것입니다.
성균관에서 회합했다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경자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 성균관에 들어가 원점(圓點)을 한 것이 몇 번인지 모를 정도인데, 그가 꼭 정미년 겨울이라고 말한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책을 태운 뒤로는 애당초 한 권의 책자도 없었고 보면 책을 끼고 갔다는 말이야말로 정말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그 증인으로 내세운 사람이 바로 그 친구인 이기경(李基慶)이고 보면 이미 공평한 증인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기경의 생각이 음험하고 말하는 것이 허황된 것은 낙안보다도 열 배나 됩니다. 제가 벗을 취함이 아무리 단정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기경이 이미 낙안의 절친한 친구가 된 이상 또 어떻게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함께 연마한 절친한 친구라고 한 그의 말도 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개 절친한 친구[切友]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그 말이 무함이 아님을 분명히 증명하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 또 그가 함께 책자를 보았다고 한 것도 속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개 함께 보았다[同看]는 두 글자를 가지고 그 일이 사실임을 증명하려고 한 것일 따름입니다. 또 그가 이른바 경계시키고 권면했다는 말도 대개 스스로의 격조를 높이면서 눈도 깜짝하지 않고 남을 해치려고 한 것입니다.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길가는 사람들도 다 아는데 그만 팔다리 사이에 끼고 농락하려 하다니, 진실로 한 번의 웃음거리도 못된다 할 것입니다.
그들이 애초부터 아무런 흔적도 없는 일을 가지고 서로 화답하고 증명하는 것은 반드시 얽어매어 모의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 것입니다. 그가 꼭 정미년 겨울이라고 한 것은 을사년에 책을 태운 일을 없었던 일로 돌리려고 한 것이고, 그가 꼭 성균관에서 설법했다고 한 것은 막중한 성묘(聖廟)의 지역을 등대고 저의 죄를 더욱 무겁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이목을 가리기 어렵고 남의 비난을 막기가 어려운 곳으로 말하자면 성균관 같은 곳이 없는데, 어찌 가르치는 장소를 크게 열어 팔을 휘두르면서 설법한 일을 기경 한 사람 이외에는 누구 하나 본 사람이 없고 낙안 이외에는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그리고 편지를 서로 왕복했다고 했는데 그것도 무슨 속셈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절친한 친구가 아니고 또 그런 사실도 없고 보면 이 역시 혼자 나서서 증거를 대고 허구를 날조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공술하기를 ‘이단을 물리치는 글은 을사변 봄에 지었는데, 원래의 초고는 평택(平澤) 부임소에 가지고 가서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이제 공술을 드리자니 정신이 혼미해서 전편의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을 말한다면 「천하의 학문은 정사(正邪)를 가릴 것 없이 이해(利害) 관계가 있은 뒤에야 사람들이 마음을 기울여 따르게 마련이다. 만약 서학(西學)에 천당(天堂)·지옥(地獄)의 설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어찌 패관 잡설(稗官雜說) 보다도 못하게 여겼겠는가.」라고 한 것이 있고, 「서양에서 온 학술은 반드시 천당과 지옥으로 주를 삼아 천하의 수많은 사람들을 기만한다.」 한 것이 있고 「서학에 가짜 천주(天主)가 횡행한다는 말이 있으니, 요사스럽고 허망하기가 이와 같은 것이 없다. 이미 하늘이라 말하면서 가짜가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내가 반드시 그 학설로 그 학설을 깨겠다.」 한 것이 있습니다. 일찍이 을사년에 형조에서 서학을 다스릴 때 이 글을 지어 그때 형조 판서였던 김화진(金華鎭)에게 보내 보여주었고, 또 책을 태운 뒤에 시를 짓기를 「천지(天地)의 경위(經緯) 동서 갈랐는데, 무덤 골짜기 무지개 다리 아지랭이 속에 가렸어라. 한 줄기 심향(心香) 책과 함께 타는데, 멀리 조주묘(潮州廟) 바라보며 문공(文公)230) 을 제사하노라.」 하였습니다. 이제 이 글과 시야말로 더욱 제가 이단을 물리친 뚜렷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판하하기를,
"수백 권이라 해서 죄가 더 많아질 것도 아니고 수십 권이라 해서 반드시 적어질 것도 아니다. 그가 받아서 돌아오는 보따리 속에 넣어 가져와 뒤적여 본 것에 대해서는 그도 변명을 하지 못하니, 이 한 조목은 바로 그의 죄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 아비가 일족을 모아놓고 그 책을 모두 태워버렸는가 하면 그도 그 학술을 비방하는 글과 시를 지었는데, 그 일이 을사년 조사 문서에 분명히 실려 있고 그 글은 해조 판서의 눈을 거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니 이제 책을 간행한 일이 없었던 일로 밝혀진 셈이다. 그런데 뒤에 다시 이미 불태운 서책의 일을 가지고 재가 된 묵은 불씨를 일으키려 하는 것은 정실(情實)로 볼 때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법리(法理)로 따져보아도 명령이 있기 전과 후의 구별을 두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기경(李基慶)이 함께 보았다는 말이 증거가 될 듯도 하지만, 문계(問啓)와 초기(草記)가 크게 상반되는데다가, 저 기경으로 말하면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염량(炎凉)의 세태를 따르는 자이니 어찌 족히 믿을 수가 있겠는가.
이 죄수는 단지 잡서(雜書)를 받아 온 죄로 무겁게 처벌해야 하겠다만, 이것도 역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대저 그 책이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은 이미 수백 년 전의 일로서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이미 그 학설을 비평한 말이 있는데 홍문관의 장서각(藏書閣)에도 들어 있다. 그러니 요즈음 경외에 유포되는 것을 그가 전한 때문이라고 억지로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본율(本律)에서 한 등급 감하여 그를 삭직하고 석방해서 스스로 반성하도록 천천히 도모하라."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권일신이 공술하기를 ‘서양 책을 보기를 좋아해서 연전 금령이 내려지기 전에 《직방외기(職方外紀)》 등의 책을 보았는데, 그 사이에 좋은 곳도 있고 혹 좋지 않은 곳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 학술을 숭봉(崇奉)한다는 지목도 받았지만 애당초 특별히 외워 익히거나 매혹되어 빠진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본조(本曹)에 와서 스스로 변명한 일은 이렇습니다. 을사년 연간에 그 이름을 잊어버렸으나 김씨 성을 가진 중인(中人)이 서학(西學)을 높이 받든 일로 심문을 당할 때, 저와 김가가 서로 친한 사이이고 그때 저와 김가가 함께 《천주실의》를 보았던 까닭에 자못 여러 사람들의 지목을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모른 체하고 스스로 피하기에는 미안한 점이 있기에 과연 몸을 드러내 형조에 자수했는데, 요는 변론하여 해명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대저 그 학술은 천주(天主)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그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일을 삼가하는 의리가 고서(古書)의 「어두컴컴한 새벽 남 모르는 곳이 더욱 드러나니 엄히 공경하고 경건히 두려워하라.」는 가르침과 은연중 합치되기에 그때 과연 열람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금법(禁法)이 반포된 뒤로는 이런 종류의 책을 보기가 매우 어려워져 일체 보지를 못했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공술하기를 ‘이번에 올라올 때 대략 홍낙안의 무리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낙안은 바로 저의 8촌 족조(族祖)인 권부(權孚)의 외손입니다. 비록 얼굴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안부는 서로 통하였는데, 교주라는 이름을 저에게 돌리다니 실로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전 도정(都正) 목만중(睦萬中) 부자와는 원래 서로 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됨이 원만하지 못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항상 친구들을 대하면 그 단점을 배척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관계가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처럼 증거를 서는 행동을 하다니, 이는 필시 기회를 타서 유감을 풀려고 하는 것으로서 좌도(左道)에 미쳐 미혹되었다는 죄과에 빠뜨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실로 드러난 죄가 없는데, 무슨 연고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교주란 반드시 주장하는 것이 있고 또 따르고 사모하는 사람이 있어야 그렇게 지목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저는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이 학술을 말한 적이 없는데, 실로 어떤 원수진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필시 저에게 유감을 풀려고 하는 것이니 저는 정말 애매하기만 합니다.’ 하였습니다.
세 번째 공술하기를 ‘시골에서 올라올 때 동생이 중도에 마중 나와서 대략 홍낙안과 목만중 두 사람의 일을 알려주어 이로써 알았습니다만, 저와 저의 장인인 고 동지중추부사 안정복(安鼎福)이 서로 사이가 어긋났다는 말은 모두 시속의 부박한 자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천주문답(天主問答)》 한 가지 일로 말하더라도 장인이 분명히 이 책을 지었으나, 그와 더불어 강론할 때 입론(立論)이 준엄하지 못해 인심을 격려하고 경계시킬 수 없다고 말을 주고받은 일이 있으니, 제가 이 학술을 위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자식이 외조부의 상을 당했을 때 장례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그때 마침 제가 중병에 걸려 사경(死境)에 처했기 때문에, 힘을 다해 구호하느라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어 가서 참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초상 때에는 두 아들이 모두 가서 호상(護喪)하였고, 또 장사지낸 뒤에도 계속 왕래를 하였으니, 이로써 애초부터 서로 어긋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네 번째 공술하기를 ‘야소(耶蘇)는 그 책에서 그 나라의 현인(賢人)이라 불리는 사람인데, 제가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고 같은 나라에 있지 않아 그 행적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이상 그가 어진지 사악한지는 변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사람의 오륜(五倫)에 벗어나니, 반드시 사교(邪敎)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사악함을 일단 분명히 알지 못하는 이상 어떻게 남이 하는 대로 구차하게 좇을 수 있겠습니까. 권상연(權尙然)은 애초부터 서로 모르고, 윤지충(尹持忠)은 약간 안면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만약 과연 사판을 태워버린 일이 있다면, 이는 진실로 놀랍고 망령된 짓입니다. 조상을 섬기는 한 조목은 특히 그 학술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제사를 예법대로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생일에도 제물을 올리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치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사판을 태워버린 사람은 어떤 책을 보고서 이처럼 패역스럽고 망령된 일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실로 이해하지 못할 바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섯 번째 공술하기를 ‘제가 만약 그것이 사학(邪學)임을 진정으로 알았다면, 어찌 그것이 요사스럽다고 말하기를 어려워하겠습니까. 그 책 가운데 「밝게 천주를 섬긴다.」든가 「사람들에게 충효(忠孝)를 느끼게 한다.」는 등 몇 구절의 좋은 말 외에는 다른 것은 실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억지로 요서(妖書)라고 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여섯 번째 공술하기를 ‘본 책자는 단지 《직방외기(職方外紀)》와 《천주실의》 두 책인데, 금법을 설치한 뒤로는 다시 보고 익히지 않았습니다. 금서를 간행한 일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으니 소문이 허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소(耶蘇)의 사람됨의 사정(邪正)은 비록 그 책의 전체적인 대의는 모르지만,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으로 「엄숙 공경하고 삼가 두려운 모습으로 천주를 받들면 법이 없어도 자연 임금에게 충성하고 명령하지 않아도 자연 그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사람되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듯합니다. 이것이 이치에 벗어난 사설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 사람이 삿되다고 배척해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스스로 교주로 자처하거나 타인이 교주라고 불렀다면, 반드시 근거할 단서가 있은 뒤에야 바야흐로 진실한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교주라는 두 글자가 뜬소문에서 생긴 것을 죄로 삼아 형장(刑杖) 아래에 귀신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한다면, 정말 애매합니다.’ 하였습니다.
일곱 번째 공술하기를 ‘그 학술은 대체로 공(孔)·맹(孟)의 학문과 달라 인륜에 어긋날 뿐더러 나아가 제사를 폐지하고 사람의 마음을 빠뜨리게 하였으니, 이 점에 있어서는 사학(邪學)입니다.’ 하였습니다.
그가 교주라는 칭호에 대해서는 뜬 소문으로 돌려 극구 변명을 하면서도, 유독 야소에 대해서는 끝내 그가 사특하고 망령되다고 배척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엄한 매를 치면서 묻는데도 전과 같은 말만 되풀이하니, 그가 그 학문에 빠져 미혹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엄한 형장을 시행한 뒤에 비로소 사학(邪學)이라는 두 글자의 자복(自服)을 받았지만, 교주와 서책에 관한 두 가지 일과 관련하여 그가 변명한 것을 근거로 믿을 수가 없으니, 더욱 엄히 형문(刑問)하여 반드시 자백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판하하기를,
"홍낙안이 이른바 교주라고 말한 것은 꼭 무리를 모아 설교(說敎)했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거기에 빠져서 떠받들고 믿는 것을 지적한 것인 듯하다. 그의 두 번째 공술 가운데 ‘이는 이치에 벗어난 사설(邪說)이 아니다.’고 한 것을 보면 그의 실정이 저절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 번 추문을 받은 뒤에 비로소 ‘사람의 오륜에 어긋나며, 나아가 제사를 폐지한 것은 사학이 되는 것이다.’ 하는 등의 말로 공술을 하였고 보면, 이것이 유가(儒家)의 말을 하면서 묵자(墨者)의 행동을 하는 것은 오도(吾道)의 죄인이 된다고 하는 것과 똑같다고 하겠으나, 척사(斥邪)에 한 발자취를 세운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령 그가 입으로만 그렇다고 하고 마음으로는 그렇다고 하지 않으면서 이처럼 묻는 데 따라 적당히 대답한 행동을 한 것이라 하더라도 꾸짖고 욕하는 말이 이미 그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상 그가 잘못 배운 십 년의 공부가 저절로 햇빛을 받아 녹아내린 얼음이 되어버렸다고 하겠다. 마음과 입이 진짜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왕정(王政)에서 힘쓰는 바는 그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만한 것이 없다. 그 집에 있는 잡서들은 별도로 관원을 보내 즉시 조사한 뒤 가져와 형조의 뜨락에서 태워버리고, 그는 고신(拷訊)의 기한이 차기를 기다려 다시 엄히 형문한 뒤에 제주목(濟州牧)에 사형을 감해 위리 안치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이와 함께 목사에게 명하여 초하루와 보름에 점고할 때 글이나 말로 반드시 사학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형적을 보이도록 하고, 자주 감시하는 사람을 보내 그 행동거지를 살피되 만일 옛날처럼 개전의 모습을 보이지 않거나 혹 다른 사람을 미혹시키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목사가 직접 심문을 하고 곧바로 결안(結案)을 받아 먼저 참(斬)한 뒤에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가 또 최필공(崔必恭)과 양윤덕(梁潤德) 등의 공초를 아뢰기를,
"윤덕은 철모르고 무지해서 남에게 속임수와 유혹을 당한 듯합니다. 그러나 필공은 흉악하게 굳게 참으면서 목석(木石)처럼 완악하기만 한데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큰 부모를 위해 죽는 것이 실로 효도가 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밖에는 비록 배를 치거나 협박을 하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 말을 하게 해도 아무 것도 모르는 자처럼 굴고 있으니 미혹을 깨우쳐 살려줄 길이 전혀 없습니다. 율을 상고하여 품처(稟處)토록 하소서."
하였다.
11월 9일 경진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상이 서학(西學)의 일을 가지고 누누이 채제공(蔡濟恭)에게 하교하며 미혹을 깨우치고 분쟁을 조정할 책임을 맡겼다. 채제공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이는 신의 죄입니다. 저 무리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이런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아래에서 막을 수 있었던 것인데, 이제 조정에까지 올라오고 말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래에서 덮어두었기 때문에 조정에까지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까지 올라온 것이 유익하지 않을 줄 또한 어찌 알겠느냐. 다만 일찌감치 아래에서 금지하여 애당초 이런 일이 없었던 것만은 못하다."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강계(江界)의 삼정(蔘政)으로 말하건대 올해 15근을 줄여준 것 이외에 다시 5근을 줄여주어서 강계의 피폐함이 거의 바로잡힐 듯하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해마다 삼을 사는 값으로 지급하는 쌀이 9천 1백 15석(石)인데, 1천 1백 20석을 금년 봄에 줄여준 5근의 값으로 쳐서 해마다 회계에서 제외해 별도로 기록해 두었다가 장래 용도가 있을 때를 대비하면, 실제로 남는 것은 7천 9백 95석이 됩니다. 대저 삼 1전(錢)의 값을 돈 11냥(兩)으로 정하면, 5근의 값은 8천 8백 냥입니다. 그러니 이제 삼을 사는 쌀을 가지고 여러 고을의 환곡을 바쳐야 할 백성들에게 팔면 평년의 경우 값이 결코 4냥이 안될 리가 없고 게다가 만약 흉년이라도 들면 비록 5, 6냥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상정(詳定) 이외에 남길 것을 만약 단지 1냥씩으로 하도록 법식을 정한다면, 반드시 넉넉하게 여유가 있게 될 것입니다.
7천 9백 95석의 숫자에서 남길 것 1냥 씩을 추산하면 돈도 당연히 7천 9백 95냥이 됩니다. 또 상정에 정해진 원래 숫자에서 으레 사도록 원가로 주는 것으로 말하면 본래 4냥 2전이 삼 1전의 값이니, 그 돈도 3천 3백 60냥이 됩니다. 앞의 잉여로 남기는 돈 7천 9백 95냥에 원래 지급하는 돈을 합치면 1만 2천 1백 60냥인데, 이 가운데에서 5근 값 8천 8백냥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 숫자는 3천 3백 60냥이 됩니다. 여기에 또 운파점(雲坡店)의 세금 5백냥을 해마다 보충해 넣으면, 매년 남는 돈의 숫자가 3천 8백 60냥이 될 것입니다. 무릇 이 수효를 평양 감영에서 자세히 따져 빠뜨리지 말고 매년 8백 80 냥을 왜청(倭廳)에 지급한 뒤에 나머지는 비변사에 보고하되, 마치 칙고(勅庫)의 돈을 감히 다른 곳에 옮기지 못하는 것처럼 봉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비치하여 의외의 경비에 대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5근을 감해준 이자로 강계의 피폐함을 영구히 제거해 줄 수 있게 되면서 그것을 변통하여 처리함에 있어서도 여유가 작작할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조절할 것이 있습니다. 무신년에 통신사가 쓸 삼값 8만 냥을 강계에 봉해 두었는데, 이 조항 가운데서 차례차례 해마다 으레 삼을 사는 값을 제해 쓰고, 원래 값으로 주는 쌀을 파는 것은 우선 중지하도록 했었습니다. 이는 내명년까지 끌다가 다시 돈으로 바꾸게 되어 있는데, 현재 강계부의 돈이 아직도 4만여 냥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그대로 보관하는 조항으로 삼아 수요에 응하게 하고, 으레 삼을 사는 값으로 주는 쌀은 연한이 다 차기를 기다리지 말고 올해부터 규례대로 작전(作錢)하고, 상정(詳定)에 정해진 원래 숫자는 으레 사는 원가로 내주고, 잉여의 매 석(石) 당 1냥을 삼 5근의 값에 보태준 뒤에야 서로 모순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처리하면 강계 백성들이 10년 간 부담하는 것이 단지 세삼(稅蔘) 15근과 으레 사는 체삼(體蔘) 15근뿐입니다. 폐지된 4군(郡)의 4백, 5백 리 안에서 캐는 것이 어찌 30근도 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11월 11일 임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권엄(權𧟓)이 상소하여 읍의 폐단을 진달하기를,
"신이 고을 경계에 들어선 뒤에 말[馬]을 에워싸고 길거리에서 하소연하거나 문서를 가지고 동헌 뜨락에 찾아오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고을은 원래 수만 호(戶)였으나 지금은 수천 호로 줄었고, 남은 사람들조차 짐을 싸서 짊어지고 떠날 형편이 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삼정(蔘政)의 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거기에 군포(軍布)·전세(田稅)·조적(糶糴)의 세 가지 큰 폐단이 더해지니, 그 형세가 장차 고을이 텅 빈 뒤에나 그칠 것이다. 작년에 조정에서 특별히 진전(陳田) 1천 3백 결(結)의 세금을 줄여주는 동시에 경작하는 대로 세금을 거두라고 명하였고, 올해는 또 무역하는 삼 가운데 체삼(體蔘) 5근과 미삼(尾蔘) 20근을 줄여 주었으니, 하늘과 같은 은혜가 뼛속까지 스며들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형편과 장래의 반드시 닥칠 걱정은 전과 다름이 없으니 끝내는 살아남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삼을 캐러 산에 들어갈 때면 사람 수를 점호해 기록하고, 산에서 나올 때는 캔 삼을 모두 거두어 모아 그 수량을 재기 때문에, 그 해에 캔 것은 한 뿌리도 새어 나가지 않는다. 못 캔 사람과 많이 캔 사람의 것을 합쳐 평균적으로 통계하면, 이른바 잘 캔 해에는 서울 각 관청과 각 군영에 세금으로 바치는 15근을 제외하고도 혹 근량(斤兩)에 여유가 있어 으레 사서 바칠 몫을 보충할 수 있다. 그러나 잘 캐지 못한 해에는 세금으로 바칠 것도 혹 부족한데, 으레 사서 바칠 것을 본가(本價)만 받는 상황에서 돈을 더 거두어 사서 바쳐야 하는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이다. 대개 갑진년의 별무조(別貿條)와 정미년의 신삼조(信蔘條)231) 를 기준대로 다 바치지 않게 했다 하더라도 3등급으로 나누어 가구마다 거둔 돈이 몇 만 냥인지 알 수가 없어 온 고을 경내가 거의 남은 것 없이 텅 비고 말았다. 그 뒤 3년 동안 으레 사서 바치는 삼 30여 근을 해마다 기준에 못 미치게 바쳤어도 독촉을 하지 않는 것은, 비록 돈을 거두고자 해도 실로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으레 사서 바치는 것을 3년 동안 기준에 미치지 못하게 한 것이 혹 반이 되기도 하고 혹 반이 넘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또 요즈음의 예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금년 체삼 5근과 미삼 20근을 특별히 감해준 것에 대해서조차 도리어 현재 은혜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를 인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나라가 삼을 사는 것을 오로지 강계의 백성들에게 책임지운 것은 본래 좋은 법이 못됩니다. 그리고 폐단이 생긴 뒤에 점진적으로 회복시킬 계책을 쓴 것이 또한 많았습니다만, 구제하면 할수록 더욱 고질화된 것은 일체 바로잡아 고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전부터 회복시킬 계책을 꾀하는 자들은 번번이 ‘수량을 줄여주자.’고 했으나, 감해주고 또 감해주어도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고식적(姑息的)인 정사라 할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값을 더 쳐주자.’고 합니다만, 조정에서 비록 경비를 아끼지 않고 시가(時價)대로 사도록 한다 해도, 만약 강계 백성들에게 사서 바치게 한다면, 강계의 삼값이 나날이 뛰고 다달이 오르는 상황에서 결국은 강계 백성들에게 반드시 돈을 거두게 될 것이니, 이것도 계속 행하기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리고 바로잡아 구제할 계책을 꾀하여 말하기를 ‘관서 지방과 관북 지방의 인삼이 나는 여러 고을에 분정(分定)하되, 영동 지방과 영남 지방의 고을에서 사서 바치는 것처럼 하게 하자.’고 하는데, 진실로 그렇게만 된다면 강계 백성들에 있어서는 폐단이 제거되겠지만, 조정에서 매번 폐단을 옮기는 것이라 하여 어렵게 여기고 있으니, 신은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일은 경법(經法)을 준수한 뒤에야 처음의 도모와 끝맺음을 잘하여 모두 바르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릇 토산물(土産物)로서 외방에서 진헌(進獻)하는 것들은 공물(貢物)로 삼아 바치도록 하는 것이 나라의 경법입니다. 그런데 삼으로 말하면 동래부(東萊府)에서 쓰이는 것으로서 국가의 교린(交隣)에 필요한 중요한 물건인데, 경법을 버리고 오로지 강계 백성에게만 책임지우고 있으니, 처음에 계책을 잘못한 점은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경법을 버리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삼도 공물처럼 처리해야 하는데, 그 법을 시행하려면 평상 가격에 비해 넉넉히 이익을 붙여준 뒤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동래부에 쓰이는 것은 중품(中品)의 세삼(細蔘)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1전(錢)의 값을 13냥으로 하고 미삼 1전의 값을 7냥으로 하여 본도 감영에 공물법을 시행한다면, 서북 지방의 삼상(蔘商)들이 바람에 쓸리듯 구름처럼 모여들테니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난 뒤라도 교활하게 부정을 저지르는 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강계의 예무조(例貿條)는 체삼 30근과 미삼 5근인데 이 값으로 마땅히 주어야 할 돈이 2만 2천 4백 40냥이니, 여기에 4만 5천 5백 60냥을 더 보태면 공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값이 3배나 되는 만큼 국가 경비를 침범하지 않고서는 마련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 동안 바로잡아 고칠 의논을 낸 사람들이 공물로 하자는 말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전 도신 심이지(沈頤之)가 처음으로 절반을 공물로 하자고 논계하였는데, 그가 구획하여 시행할 방도로 본 감영의 별비조(別備條) 1만 5천 냥에 모조(耗條) 5천 석을 덧붙여서 하자고 청하자, 묘당에서 곡식 장부를 손상시킬 것이라 하여 우선 취소시키고 시행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어찌 허다한 첨가 액수를 국가 경비 중에서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저으기 생각건대 재물을 만드는 도리는 꼭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으니, 해마다 가져다 써도 다하지 않는 것은 도내의 소미(小米)입니다. 경비에 보충해 쓰는 것과 각 관청에서 요청하는 것들을 막론하고 해마다 팔아서 돈을 만드는데, 그 숫자가 적지 않습니다. 매년 팔아서 돈으로 만들라는 명령이 나오면, 서울 관청에서 파견되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청탁을 해서 감영으로 와서는 그 이익을 나누어 갖는가 하면 열읍(列邑)의 아전들도 시가(時價)를 줄여 보고해서 그 덕택을 톡톡히 보니, 지금 세상에서 이른바 고생하지 않고도 횡재하는 방법으로는 바로 관서에서 돈으로 만드는 일에 끼어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대체로 도내의 물정을 듣건대 비록 평년이라도 소미 1석의 값이 3냥이 더 나가고, 곡식이 귀한 해에는 6냥, 7냥, 8냥까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가령 해마다 파는 것이 수만 석이라면, 상정(詳定) 이외로 남는 것이 몇만 냥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만약 곡식을 생산하는 백성이나 곡부(穀簿)를 관장하는 아전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사소한 것들이라면 조정에서 혹 문제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경상세(經常稅)의 곡식을 팔아서 시가(時價)로 돈을 받아 쓰는 것으로서 명분도 바르고 말도 순리(順理)로운데, 하필이면 상정 이외에 남은 것이라 하여 허다한 공비(公費)를 모리배(牟利輩)들의 잡비로 녹여 없애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부터는 팔아서 돈으로 만들 곡식의 수량을 경사(京司)에서 본도에 공문만 보내고 차인(差人)은 보내지 말도록 해야 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리하여 곡식이 넉넉한 고을을 살펴 시가를 결정해서 공문을 보내고 돈을 만들어 받아들인 뒤에 상정에 따라 상납(上納)한 이외에 남은 것은 별도로 무삼고(貿蔘庫)를 세워 저축했다가 삼을 살 때 첨가의 비용으로 쓰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평년에 남는 것으로도 4만 5천여 냥의 첨가 액수를 충분히 감당할 것이며, 혹 곡식이 귀한 해라도 무삼고의 비축량으로 충당하는 등 이루 다 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동래부에 쓰이는 것으로 말하면 들어오는 대로 보내는 것인데 지부(地部)232) 에 비축한 것이 해마다 감소한다 하니, 이는 비용을 절약하는 도리가 못됩니다. 매년 들어오는 대로 본도에 삼공(蔘貢)을 바치도록 한다면, 체삼 30근과 미삼 5근을 꼭 매년 기준에 맞출 필요가 없으니, 풍년에는 조금만 무역하고 흉년에는 많이 무역하면, 이 역시 이재(理財)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별무삼(別貿蔘)이나 신사삼(信使蔘)의 경우는 항상 수요가 있는 것이 아닌 만큼 해마다 으레 쓰는 것을 공물로 삼아 바치게 하는 것과는 전연 다릅니다. 영동·영남·관서·관북이 삼을 생산하는 것은 한가지이나, 동남 지방은 품질이 좋기 때문에 고을마다 공물로 바치는 반면 서북 지방은 품질이 나쁘기 때문에 읍에서 공물로 바치는 규정이 없습니다. 따라서 국가에서 중요한 쓸 일이 있을 때 한꺼번에 사서 바치게 한다면 혹 값이 서로 맞지 않을지는 몰라도 동남 지방에 비해서는 별로 폐단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별무조나 신사조를 시행할 때 마땅히 그 때 필요한 양을 관서나 관북의 삼이 나는 고을에 배정하면서, 강계에 다른 고을보다 조금 넉넉히 배정한다 하더라도 강계 백성들이 한 때의 일이 무겁다는 것 때문에 꼭 곤궁해지거나 도망치기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치면 예무조(例貿條)는 삼공(蔘貢)이 되고 별무조와 신사조는 분정(分定)하는 것이 되어, 오직 세삼(稅蔘)으로 경사와 각영에 바치는 15근만 강계에 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현재의 민호(民戶)를 가지고 그 장정 식구의 많고 적음에 따라 3등으로 나누어 15근의 숫자를 배정하되, 캐서 바치건 사서 바치건 따질 것 없이 호역(戶役)으로 해마다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강계의 백성 가운데 이사를 갔다가 다시 돌아온 자는 3년 간 부역을 면제한 뒤에 하호(下戶)의 삼을 징수하고, 다른 고을 백성으로 새로 들어온 자는 5년 간 부역을 면제한 뒤에 중호(中戶)의 삼을 징수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산에 들어가는 자를 일일이 점고할 것도 없고 산에서 나오는 자를 꼭 수색할 것도 없이 그들 마음대로 왕래하게 하고 스스로 바쳐야 할 것을 바친 이외에는 자기 소유로 삼게 해서 생활을 하게 한다면, 백성을 모으는 길이 될 것입니다.
강계 백성 가운데 이 10년 동안 이주해 피해간 자들은 애초부터 멀리 도망친 것이 아니고 항시 오가면서 밭을 경작하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이 비옥한 땅을 내버리고 타향을 떠도는 것이 어찌 좋아서 하는 일이겠는가. 농사를 그만두고 삼을 캐도 터럭만큼도 개인이 갖지를 못할 뿐더러 끝내는 돈까지 내야 한다. 돈을 마련하기가 이미 어려운데다 또 이웃과 일족의 몫을 징수하기까지 하니 이것이 두려워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합니다.
그리고 현재 거주하는 백성 가운데 관청의 일을 약간 아는 자의 말을 들어보면 ‘갑진년과 정미년에 허다한 돈을 거둬 간 뒤로 강계 백성들이 모두 거덜이 났다. 이 때문에 무신년 이후 3년 동안 예무조(例貿條)를 반 이상이나 기준에 못미치게 바쳤는데 아직도 독촉을 하지 않는 것은 우선 좀 쉬게 하려는 정책에서 나온 듯하다. 그러나 만약 기준대로 바치게 한다면 남은 백성들도 장차 떠날 것이다. 또 만약 별무조나 신삼조를 갑진년이나 정미년처럼 받아들인다면, 이 고을이 분명히 텅 빌 것이다.’ 하는데, 그 말 역시 거짓이 아닙니다.
조정에서 삼을 사는 세 조항과 관련하여 우선 나날이 줄고 해마다 주는 대로 내버려둔 채 지금에 이르러서도 변통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강계 백성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우선 그만두고라도, 장래 꼭 필요한 수용을 감영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며, 호조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며, 묘당에서는 어떻게 의논하여 처리할 것입니까. 이것이 신이 크게 걱정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진술한바 공물로 만드는 것과 재물을 만들어내는 것과 분정(分定)하는 방법에 있어 혹시라도 성상의 마음에 맞는 점이 있다면 번거롭게 의논을 묻지 마시고 곧바로 처분을 내리소서.
그리고 가령 전폐·군폐·환곡의 세 폐단이야 어느 고을인들 없겠습니까마는 이 고을이 가장 심합니다. 다른 고을은 세 폐단이 각각 다른 근원이 있으나, 이 고을은 삼폐(蔘弊)가 세 폐단의 근원입니다. 삼폐가 바로 백성이 줄어드는 원인이 되고 있는데, 백성이 적다고 해서 원전(元田)의 결세(結稅)를 줄일 수는 없고, 백성이 적다고 해서 원액(元額)의 군총(軍摠)을 줄일 수는 없고, 백성이 적다고 해서 원수(元數)의 환곡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징(隣徵)이나 족징(族徵)이 해마다 관례화되어 실속을 차리는 백성들이 가장 먼저 이사하여 도망치고 남은 백성들도 더욱 곤궁해져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만약 근원의 폐단을 제거해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게 한다면 전토는 다시 경작되고 군액도 점차 보충되고 환곡도 점차 고르게 분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만약 근원적인 폐단을 통렬히 개혁할 것을 허락하신다면, 세 가지 폐단을 개혁하여 다스리는 계책은 신이 삼가 차례차례 조목별로 아뢰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한 글을 보니, 강계 백성들을 반드시 죽음의 구렁에서 꺼내 안정시키려 하고 있는데, 계책이라는 것이 공물로 만드는 것과 값을 주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공물로 삼는 데 따른 이해 관계는 미리 예견할 수 없으나 값을 주는 방략(方略)은 그런 방법이 있기는 하겠다. 다만 각 아문에서 파는 곡식에서 남은 숫자를 가져다 쓴다는 것은 국가의 체통으로 볼 때 정말 구차하니 이에 대해서는 경의 말을 따르기가 어렵다. 묘당에 물어서 별도로 조처를 하도록 하겠다.
본부(本部)에서 납부하는 예무삼(例貿蔘)과 관련 이전에 줄여준 것 이외에 올해 줄여준 것이 20근인 만큼 나머지는 겨우 15근밖에 안되니 이 뒤로는 서쪽을 걱정하는 마음을 조금은 놓겠다. 경은 이것이 강계 백성을 위한 고심과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임을 알도록 하라. 민호(民戶) 가운데 다른 곳으로 간 자들을 안심시켜 불러들이고, 전야가 황폐한 곳에 농사를 권장해 다시 경작시킨 뒤에야, 민호가 즐비하던 옛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경은 특별히 생각해서 임명한 뜻을 저버리지 말고 모쪼록 더욱 삼가 나의 뜻을 선양토록 하라."
하였다.
헌납 송익효(宋翼孝)를 파직하였다. 익효가 이승훈(李承薰)이 사서(邪書)를 사올 때 그 아비 이동욱(李東郁)이 행대(行臺)233) 로 있으면서 실제로 그 아들에게 주었다 하여, 상소로 논하고 동욱에게 회시(回示)234) 의 율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동욱은 의주부 윤(義州府尹)이었다. 상이 회시하는 율은 행대에게 시행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그 상소문을 돌려주고 개정하도록 하였는데, 익효가 ‘엄히 신문해 실정을 알아내고 무거운 벌로 처벌하라.’고 고쳐 써서 올리니, 전교하기를,
"일단 행대라고 한다면 행대도 역시 대간 시종의 신하이며, 또 만윤(灣尹)이라고 한다면 만윤은 곧 2품의 관원이다. 대시(臺侍)와 2품의 재신(宰臣)에게 ‘회시’라는 두 글자를 가한 것 자체가 남에게 웃음거리가 되겠기에 율명(律名)을 즉시 고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다만 그날로 와서 피혐하며 현임(現任)을 갈아달라고 요청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교를 받자마자 곧바로 고쳐 서둘러 칼로 문질러 지우면서, 대간의 체통이 더욱 무너지는 것은 생각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나 진실로 의도를 가지고 사 온 자취가 있다면 이동욱을 무겁게 처벌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사실을 들어보니, 서학에 관한 여러 책을 서양 사람이 선물로 세 사신에게 고루 전해 주었으므로 삼사가 모두 받아 왔다고 한다. 처음 생각으로는 그 때의 세 사신을 모두 처분하려 했으나, 추후에 형조의 문안(文案)을 보니, 모두 우리 나라에 유행하는 서목(書目)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이었고 그 사행(使行)에서 처음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우선 참작해서 용서한 것이다.
끝에 이기경(李基慶)의 죄상을 진달한 것은 말이 과연 좋다. 그가 눈을 깜박이며 행동하고 농단을 부리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은 실로 매우 가증스러워 바로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무리들이야 어찌 책망할 가치가 있겠는가. 뒤에 일을 논한 말에 취할 만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앞의 말로 비웃음을 초래한 죄는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헌납 송익효를 파직하고 원래 상소는 돌려주도록 하라.
동당(同堂)은 동기(同氣)간과 오십보 백보의 관계라 할 것이다. 그러니 대의멸친(大義滅親)의 일이 아니라면, 어찌 혹시라도 갑작스런 논의에 대해 파격적으로 혐의를 그대로 넘길 수 있겠는가. 상소 가운데 ‘회시한 뒤에 율대로 처단한다.’든가 ‘한 사람 죽이는 것이야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다.’는 등의 말이 비록 황급해서 살피지 못한 때문이라 하더라도 대방(代房)의 다른 동료에게 떠넘기지 못한 것은 우물쭈물한 잘못을 면할 수 없다. 해당 승지를 체직하라."
하였다. 승지는 바로 동욱의 종형인 이동현(李東顯)이었다.
형조가 아뢰기를,
"체포한 사학 죄인(邪學罪人) 정의혁(鄭義爀)·정인혁(鄭麟爀)·최인길(崔仁吉)·최인성(崔仁成)·손경윤(孫景允)·현계온(玄啓溫)·허속(許涑)·김계환(金啓煥)·김덕유(金德愈)·최필제(崔必悌)·최인철(崔仁喆) 등 11명을 혹 형조의 뜰에서 깨우쳐 감화시키기도 하고 혹은 그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간곡히 깨우쳐 회개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중인(中人)들로서 잘못 미혹된 자들에 대해 반드시 그 소굴을 소탕하고자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자는 것이요, 한편으로는 백성을 교화시켜 좋은 풍속을 이루려는 뜻을 담은 것이다. 대개 중인의 무리들은 양반도 아니고 상인(常人)도 아닌 그 중간에 있기 때문에 가장 교화하기 어려운 자들이다. 경들은 이 뜻을 알아서 각별히 조사하여 혹시 한 명이라도 요행으로 누락시키거나 한 명이라도 잘못 걸려드는 일이 없게 하라. 요컨대 모두 새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니, 그러면 경들은 하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하고, 이어 권일신(權日身)과 최필공(崔必恭) 등에게도 의리를 깨우쳐 새 사람이 되게 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2일 계미
수찬 윤광보(尹光普)가 상소하여 정학(正學)을 밝힘으로써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근본으로 삼으라고 하고, 또 홍문관에 소장한 여러 책들을 큰 거리에서 태워버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처음에 진술한 일은 유념하겠다. 다음에 진술한바 홍문관에 소장한 서양의 여러 책들을 큰 거리에서 태워버리라는 일은 네 말이 매우 옳다. 그러나 어찌 꼭 멀리 큰 거리에까지 내갈 것이 있겠느냐. 즉시 홍문관에서 태워버리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가 또 권일신과 최필공 등에게 권유해서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했다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성인의 훈계에도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정의 바라는 바는 단지 공자(孔子)를 배우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들은 직책이 사사(士師)235) 에 있으니, 또한 설(契)과 고요(皐陶)를 배우고자 마음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일명(一命)236) 의 인사라도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둔다면, 사람을 반드시 구제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하물며 오랑캐를 바꾸어 중화로 만들고 귀신에 홀린 것을 사람으로 만들 때, 어찌 지리한 것을 고생으로 여겨 혹시라도 시종 은혜를 베푸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양반 가운데 괴수인 일신과 중인 가운데 괴수인 필공이 만약 통렬하게 스스로 후회하여 정학(正學)으로 돌아 온다면, 다른 무리들은 바람을 만난 홍모(鴻毛)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경들은 더욱 이 뜻에 부응해 드날릴 방도를 생각하라."
하였다. 뒤에 또 전교하기를,
"예악(禮樂)으로 교화시키는 가르침을 어찌 교화를 거부하고 윤리를 없앤 죄인에게 적용하겠는가마는, 이번에 반드시 말로 깨우치려고 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임금이 된 이래 죄안을 판결할 때 법이라는 한 글자 이외에는 전혀 다른 말을 받아들인 일이 없었는데, 이 때문에 혹시라도 원통한 일이나 지나치게 한 일이 없을까 걱정되어 한 밤중에 일어나 서성이지 않는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말하면 그들의 본정(本情)이 크게 흉악한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닌 만큼 그래도 한 줄기 감화시킬 길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차마 한결같이 법으로만 몰아댈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11월 13일 갑신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전 정언 이기경(李基慶)을 경원부(慶源府)에 유배하였다. 이기경이 상소하기를,
"상중(喪中)에 있는 목숨으로 죄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입장에서 주사(籌司)237) 의 초기(草記)가 윤하(允下)된 뒤 즉시 스스로 해명해야 한다는 것을 모른 것은 아니나, 대신이 이미 연석에서 아뢰겠다는 응낙이 있었기에 속으로 참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도로 내주신 대간의 글이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정(私情)의 곤궁함을 대신이 전에 변명해줄 것을 응낙하고서도 그런 소문이 전혀 들리지 않으니, 신이 먼저 문계(問啓)와 초기(草記)가 서로 상반된 까닭을 아뢰고, 다음에 이승훈이 무함한 것을 해명하고자 합니다.
전일 사문(査問)을 할 때 신이 제일 뒤에 사문을 당했는데, 뜰에 들어가니 대신이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말하기를 ‘스스로를 보기에 정말 어떠한가. 시종을 지낸 사람이 상복을 입고 조사를 받으니, 국가의 체통에 손상됨이 없겠는가.’ 하기에, 신이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여기며 ‘이미 조사하라는 명령이 있은 뒤에 와서 어찌 이렇게 머뭇거리나.’ 하면서 드디어 응답하기를 ‘변괴가 붕우(朋友) 사이에서 일어나 조사하라는 명을 받기에 이르렀으니, 묻든 묻지 않든 오직 헤아려 처리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였습니다.
대신이 또 묵묵히 앉아 있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단지 책을 간행한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였으니 별 관계가 없다만, 이 일에 대해서만은 반드시 장차 잡아다 물어야 한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잡아다 묻는 정도가 아니고 국문(鞫問)하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단지 직고(直告)할 따름입니다.’ 하고는, 신이 마침내 묻기를 ‘홍낙안(洪樂安)의 문계에는 뭐라고 하였고, 이제 물어보려 하는 것은 어떤 일입니까?’ 하니, 대신이 말하기를 ‘낙안이 아뢴 것에 그대가 승훈을 근심하고 한탄했다고 하였기에 묻는 것이다.’ 하면서도 끝내 문계와 비지(批旨)는 내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또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홍낙안에게 말한 것은 과연 그런가? 그러나 장황하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분명히 낙안에게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일찍이 그 책을 보니 간혹 좋은 곳이 있긴 했으나, 대체로는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 책을 본 것만으로 어찌 죄가 되겠습니까?’ 하니, 대신이 말하기를 ‘그렇다. 그 책을 보고 그것이 진실로 이치에 어긋난 점을 안 뒤에야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도 역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말하기를 ‘《천주실의》는 그 학술 가운데 초학자들이 입도(入道)하는 책입니다.’ 하니, 대신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초학이든 말학(末學)이든 따질 것이 없다. 주자(朱子)도 노불(老佛)의 책을 보았다.’ 하였는데, 이렇게 하는 동안 본래의 일은 버려두고 마침내 서양 책의 학설에 대해 강론을 하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훈을 어디에서 보았는가?’ 하기에, 신이 ‘반촌(泮村)입니다.’ 하니, 대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째서 승훈에게 말하지 않고 낙안에게 말했는가. 어쩌면 부끄럽지도 않은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어찌 그에게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더구나 똑같은 친구이니 어찌 꼭 부끄럽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신이 또 말하기를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고는, 이어 말하기를 ‘그렇다면 간절히 타일렀다고 해도 좋고 책선(責善)했다고 해도 좋으나 증거로는 되지 않는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증거로 되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니, 대신이 말하기를 ‘예를 들어 전토(田土)를 매매할 때 증명서에 이름을 써서 뒷날의 근거로 삼는 것 같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말하기를 ‘그 당시에야 어찌 오늘과 같은 일이 있을 것을 알고 미리 증거를 삼을 생각을 했겠습니까.’ 하니, 대신이 이어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대저 신이 이미 문계와 비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지 대신이 묻는 데 따라 답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초기를 보니 ‘승훈과 별로 다른 점이 없다.’ 하였고, 또 이른바 ‘간절히 타일렀다.’고 한 것이 마치 신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기(草記)를 윤하(允下)하신 날 신시(申時)부터 저녁까지 두 번이나 대신에게 편지를 보내 말이 잘못 기록된 것을 변론하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차자를 올릴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 대략의 내용은 ‘어째서 승훈과 같은 처지로 몰아넣는 것이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 당시 문답 내용을 말하면서 장황하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이나 반드시 잡아다 물어야 한다고 한 것이나 부끄러운 일이라고 한 말 등을 편지 속에서 질문하여 말하기를 ‘바야흐로 당시 낙안을 도와 함께 상소를 올리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만 한데 도리어 누설한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는가.’ 하였더니, 대신이 답서하기를 ‘뒷날 연석에 올라 아뢰겠다.’고 하였습니다. 가령 초기의 말 뜻이 한결같이 신의 말과 같았다면, 어찌 문계와 서로 상반되기에 이르렀겠으며, 대신도 어찌 연석에 올라 건의하겠다고 이처럼 서둘러 사죄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승훈이 공술한 말을 보면 신을 깔아뭉개고 사실을 농락하여 뒤집으면서 정미년 반회(泮會) 조차도 곧바로 애초부터 없었던 일로 모질게 돌리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저 이 일은 낙안과 승훈이 서로 상대가 되고 신이 말의 뿌리가 되었으나, 말의 뿌리의 뿌리는 바로 반회라는 한 가지 사건입니다. 당초 반회의 모임에 참가해 승훈의 행위를 본 자는 비단 신 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그러니 사문(査問)할 때 대신이 묻건 묻지 않건 간에 하나하나 자세히 진술했어야 마땅하지만, 신은 이렇게 하기에는 지극히 난처하고 지극히 불행하게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경황없는 가운데 단지 물음에 따라 대답하는 것이 공손함인 줄만을 알았을 뿐 숨김없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은 생각하지를 못했습니다.
이른바 난처하고 불행하게 여겨졌다는 것은, 그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두 끄집어내기가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모임에 참여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전 정언 정약용(丁若鏞)과 진사 강이원(姜履元)입니다. 반회의 일을 만약 대신이 묻는 것 이상으로 다 말하자면 부득이 이 사람들까지 끌어넣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신이 조사하는 곳에 들어갔을 때 꼭 겁먹고 위축되어 감히 그렇게 못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들과의 관계에 구애되어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이 맨 처음부터 말씀드릴까 합니다. 계묘년 겨울에 승훈이 연경(燕京)에 갈 때 신도 한 번 전송을 하러 갔는데, 승훈이 말하기를 ‘내가 서양 책을 사오고 싶은데 재력(財力)이 부족하니, 혹 서로 도울 방도가 없겠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내가 무슨 재력이 있겠는가.’ 하고는, 돌아오면서 생각하기를 ‘연경에 가서 책을 산다면 좋은 책도 많은데 하필이면 서양 책일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이때 단지 모기령(毛奇齡) 등처럼 기이함을 숭상하는 종류의 책이려니 여기고, 시를 지어 경계하였는데, 거기에 ‘양주와 묵적을 물리침은 치란(治亂)의 운세와 관계가 있고, 주자와 정자를 전함은 계왕개래(啓往開來)의 공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가령 승훈이 서양 책을 사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시의 뜻이 어찌 이러하였겠습니까.
갑진년 봄에 승훈이 돌아왔을 때 신은 미처 승훈을 만나보지 못했는데, 정약용이 신과 반촌(泮村)에서 만났을 때 먼저 승훈이 서양 책을 사왔다는 말을 하기에 신이 그 책을 보자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승훈과 서로 친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약용과 더욱 절친한 것만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약용이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성세추요(聖世蒭蕘)》등의 책을 신에게 보내 왔으므로 신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뒤로 약용을 만났을 때는 이 책들에 대해 논급하지 않은 일이 없었는데, 혹 그 허황함을 배척하기도 하고 혹 그 신기함을 인정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을사년 봄 금령(禁令)이 내린 뒤에 승훈이 분명히 책을 태워버리기는 하였으나, 정미년 10월 무렵부터는 승훈의 무리들이 다시 천학(天學)을 숭상한다는 말이 귀에 시끄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마음 속으로 저으기 의아해하기를 ‘전에 빌려본 것으로 보건대 크게 미혹될 만한 것이 없는데, 이 무리들이 이와 같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반드시 그 책을 다시 자세히 살펴 오염된 원인을 찾아 보아야겠다.’ 하고, 드디어 승훈에게 서양 책을 빌려달라고 청하니, 승훈이 말하기를 ‘그 학문은 하지 않고 단지 그 책만 보겠다는 것인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좋아하든 배척하든 보고 나서 결정할 문제이니, 책을 빌려주기만 하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승훈이 하루는 소매에 등본(謄本)인 《진도자증(眞道自證)》 3권을 넣고 저녁에 와서 하루를 묵고 갔습니다. 신이 시험삼아 그 책을 보니 ‘세상 사람들은 단지 부모가 길러주는 것만을 알고 천주께서 돌보아주심이 부모보다 더 크다는 것은 모르며, 단지 임금이 다스리는 것만 알 뿐 천주의 주재하심이 임금보다 더 크다는 것은 모른다.’ 하였고, 또 ‘빵과 술로 하늘에 제사하고, 빵을 그의 고기처럼 먹고 술을 그의 피처럼 마신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도 모르게 한심한 생각이 들어 그 책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즉시 돌려줘 버렸습니다.
그 뒤 열흘이 지나 승훈과 약용이 강리원(姜履元)과 함께 반궁(泮宮)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서 여러 차례 신에게 와서 함께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이 세 사람이 반촌 김석태(金石太)의 집에 모여 때때로 식당에 들어가지도 않고 오직 그 책만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마음속으로 분통스럽게 여기기를 ‘승훈이야 병이 깊으니 족히 책망할 것이 없고, 이원은 교분이 없으니 꼭 말할 것도 없지만, 약용에 대해서만은 말할 만하고 구제할 만하다.’ 하고, 드디어 김석태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세 사람이 의관을 차리고 서로 마주하다가 신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책상 위의 물건을 수습(收拾)한 뒤 신을 마중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말하기를 ‘와서 모인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표(表)를 몇 수나 지었는가?’ 하니, 약용이 단지 두 항목에 대해 지은 한두 수를 보이면서 말하기를 ‘단지 이것뿐이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와서 모인 것이 며칠인데, 겨우 이것만 지었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그 자리에서 준열하게 이야기하려다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오직 약용뿐이라서 곧바로 집에 돌아온 뒤 막 약용을 불러내서 조용히 면계(勉戒)하려 하였으나 마침 감제(柑製)238) 를 당해 과거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앉은 것을 보니 또 이 세 사람이었고, 내걸린 제목을 보니 한(漢)나라 분유사(枌楡社)239) 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지금 모두 외울 수는 없지만, 대체로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승훈이 팔짱을 끼고 묵묵히 앉아 있더니 일부러 백지를 내기에, 신은 괴이하게 여겨 캐물어 보니, 그가 대답하기를 ‘천주학에서는 천주 이외에 다른 신을 제사하지 않으며, 비단 제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록 글로 짓는다 해도 역시 큰 죄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 나머지 그날 밤에 승훈과 함께 묵으면서 되풀이하여 논척했으나 끝내 회개하지를 않았습니다. 신이 또 약용을 경계시키고자 두 번이나 그 집에 갔으나 다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낙안을 방문하여 이 일을 언급하면서 함께 근심하고 한탄하였더니, 낙안이 친구들에게 크게 소문을 내면서 상소하려고 하였으므로 그 당시에 말들이 일시적으로 시끄럽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원(履元)과 진사 성영우(成永愚)가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약용이 분명히 그대에게 유감이 있다고 했으며, 우리에게 와서 말하기를 「기경이 나와 과거장에서 약간 명성이 있기 때문에 시기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이런 말을 전파했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 마음은 그를 사랑하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는가.’ 하고는, 드디어 무신년 인일제(人日製)에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약용이 신에게 편지를 보내 깊이 사죄하였는데, 그 대략에 ‘더욱 형이 대동(大東)의 인물임을 믿게 되어, 문득 이렇게 속 마음을 토로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미 한 번 버렸으니 두 번 버리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마는 시험삼아 다시 거두어 달라.’ 하였습니다. 원래의 편지가 아직 있으니,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정미년 반회(泮會)의 일입니다.
그러다가 이번 일이 나왔는데, 낙안이 신을 문계(問啓) 가운데에서 끌어대었으므로 신이 상중에 있다가 경황중에 몰려서 조사받은 곳에 들어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와 약용에게 편지하기를 ‘이미 조사하라는 명이 있어서 감히 반회의 일을 숨기지 못했다.’ 하니, 약용은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하였습니다. 과연 승훈의 말과 같이 애초부터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약용과 승훈은 처남 매부간인데, 약용의 앞 편지와 뒤의 편지가 어찌 이러했겠습니까.
그 뒤 승훈의 공초를 보니, 여지없이 신을 무함하고 멸시하였는데, 그 이른바 이단을 물리치는 글이라는 것은 더욱 분통스럽고 놀라웠습니다. 그 글에 ‘이해(利害) 관계가 있은 뒤에야 추향하는 것이니, 가령 서학에 천당 지옥의 설이 없다면, 사람들이 보고서 어쩌면 패관(稗官)보다 낮게 보았을 것이다.’ 한 것은 분명히 그 천당 지옥의 설이 큰 이해 관계가 있어 반드시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서학은 반드시 천당 지옥으로 속인다.’ 하였고, ‘거짓 천주’라고 하였으니, 이는 천주학이 아니면서 불가(佛家)처럼 천당 지옥의 설을 따로 만든 것을 공격해서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그가 진짜 천주학을 위해 깃발을 든 것을 알 수 있을 뿐 그가 물리친 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
또 삼가 듣건대 서학(西學)의 법에 반드시 나보다 먼저 영세(領洗)를 받은 사람에게 영세를 받은 뒤에야 교도로 들어간다 하는데, 영세란 것은 불교의 연비(燃臂)와 같은 것입니다. 진실로 승훈이 천주관(天主館) 안에서 서양 오랑캐의 손에서 영세를 받아오지 않았다면, 그 뒤 일신(日身)이나 존창(存昌) 등 무리와 허다한 괴귀(怪鬼)들에게 과연 누가 영세를 주었겠습니까. 지금 만약 일신과 존창의 무리들을 엄히 심문하여 영세를 받은 곳을 물으면, 한두 번 건너가지 않아서 저절로 승훈에게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신이 동료들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사설(邪說)을 물리쳐야 한다는 말을 힘써 제기하였기 때문에, 그 동안 이 무리들이 깊은 유감을 품고 항상 반드시 보복을 하고야 말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에게 의심스러운 말과 현혹시키는 말로 갖가지로 무함한 것이 이제 5년입니다. 신은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근본이 외로워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 실정을 따져 보면 반드시 동서(東西)를 아울러 잡자는 계책은 아니었지만, 그 자취를 보면 자연 염량세태(炎凉世態)에 추피(趨避)하는 모습이 되어 버렸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신의 죄상에 분명한 처벌을 가해서 남의 신하로써 추향해야 할 바를 모르는 자들의 경계로 삼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조연(朝筵)에서 승선(承宣)이, 이기경이 초토 죄인(草土罪人)240) 이라고 칭하면서 승정원에 상소를 했다고 하였다. 오늘이 어떤 날인데 이런 때에 번독스럽게 한단 말인가. 상중에 근신하는 일과 신하의 본분이 모두 허물어졌다. 그러나 사기(事機)가 급박한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상소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알고도 모른 척하며 미결(未決)에 넘겨버리는 것은 요즈음 고심해서 처분하는 뜻이 아니라고 여겨지기에 가져다 보았더니, 이전의 전교 가운데 내가 ‘그 말이 두세 가지로 다르다.’ 한 것이 너무나 헐후하게 보아준 잘못된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천 가지 억 가지로 몸을 바꾼다고 해야만 바로 그의 제목에 맞을 것이다.
대저 그의 상소에서 스스로를 변명한다고 한 것의 핵심은 오로지 그가 대답한 말과 초기(草記)의 말이 각기 서로 어긋난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다시 초기와 그의 상소를 가져다 서로 비교해 보니, 몇 줄 보기도 전에 감히 바로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 그가 어쩌면 이렇게도 자기를 치는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의 상소에 ‘일찍이 그 책을 보았다.’ 한 것은 초기에도 역시 그랬다 하였고, 그 상소에 ‘그 책에 간혹 좋은 곳이 있었다.’ 하였는데 초기에도 역시 그렇게 말하였고, 그 상소에 ‘어찌 오늘에 와서 증거가 될 줄이야 알았겠는가.’ 하였는데 초기에도 역시 그렇게 말하였다.
그런데 그의 상소 가운데 ‘변이 친우들 가운데에서 일어났다.’는 말을 보면 은근히 홍낙안을 고변한 사람으로 돌리려는 것인데, 이는 초기에서 말하지 않은 것을 첨가해 말한 것이다. 그가 비록 만 개의 입을 갖고서 청산 유수와 같은 변론을 한다 한들, 이는 한갓 교묘하게 하려다 도리어 졸렬해지는 자취만을 보일 뿐이다. 상복을 입고 조정에 와서 감히 이런 때에 이런 짓을 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그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하겠다.
더구나 그의 상소 가운데 인용한 그 책의 말과 어구들로 말하면 매우 패악스럽고 도리에 어긋난 것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단지 부모가 길러주는 것만 알 뿐 천주가 돌보아주는 것이 부모보다 더 큰 것은 모르고, 단지 임금의 다스림만 알 뿐 천주의 주재가 임금보다 더 크다는 것은 모른다.’는 등의 말을 상소에 쓰는 것을 어렵지 않게 여겼다. 설령 그가 일찍이 그런 구절을 본 일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바로 귀로 듣기만 하고 입으로 말해서는 안될 부당한 피사(詖辭)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역시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막중한 상소에 이런 것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죄로 본다면 이런 것은 모두 별 것이 아니다. 이외에 이보다 심해 정말 가증스러운 것이 있다. 사학(邪學)의 이른바 ‘영세’라는 두 글자야말로 더럽고 비루한 오랑캐나 짐승들이 하는 행동이다. 장중자(將仲子)241) 나 순지분분(鶉之奔奔)242) 같은 편조차 오히려 경연에서 강의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야 진실로 말할 가치도 없지만 그래도 이름이 법종(法從)의 반열에 있는데, 아무리 척진 이승훈을 욕하기에 급급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차마 이런 말을 마음에서 일으켜 붓에 적실 수 있단 말인가. 설사 승훈이 기꺼이 귀역(鬼蜮)이 되려 하고 즐거이 짐승이 되려 하여 옛날 배운 것을 버리지 못한 채 몰래 그것을 외우고 익힌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승훈 하나만을 유배하고 죽이면 될 죄일 따름이다. 어찌 꼭 조정이 비웃음을 받도록 누를 끼쳐야 하겠는가.
그의 이 상소는 단지 조정의 수치라고만 말할 수가 없다. 세도(世道)의 변괴와 진신(搢紳)의 치욕은 당연히 어떠하겠는가. 그 마음 씀씀이와 의도를 따진다면 비록 어렵게 여기는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하다. 진실로 낙안과 같이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장악원에서 개좌(開坐)했을 때 어째서 대신을 향해 이런저런 소리로 아첨을 하다가, 이제 와서는 또 무슨 이유로 창을 돌려 비난하는 소리를 퍼부으면서 두려워하고 겁내지를 않는단 말인가.
이처럼 부끄러움을 모르고 법을 무시하는 무리를 무거운 법으로 처벌하지 않는다면, 장차 맑은 조정의 관원들을 모두 진흙 속에 빠뜨리고 말 것이다. 세도(世道)를 위하고 인심(人心)을 깨끗이 하는 방도에 있어서, 지금 그가 상중에 있다고 하여 제멋대로 굴도록 버려둘 수는 없다. 초토 죄인 이기경을 우선 가벼운 죄로 처리해 함경도 경원부에 햇수를 제한하지 말고 유배하고 사전(赦典)에 끼이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14일 을유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강계부(江界府)의 삼폐(蔘弊)는 이제 이미 바로잡아 개혁하였습니다. 그러나 혹 삼이 풍년인 해에 공납(公納)하는 30근 이외에 남은 숫자를 본 고을에서 예전처럼 관리하여 원정가(元定價) 4냥 2전으로 사게 한다면, 이는 부사 자신이 이익을 독차지하게 될 뿐 실다운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제부터는 엄격히 조목을 만들어 30근 이외에는 다소를 막론하고 남은 삼들을 관에서 사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홍낙안(洪樂安) 등이 장서(長書)를 올리고 통문으로 돌리고 상소를 한 이면에는 반드시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인데 승지 홍인호(洪仁浩)가 필시 참여했을 것이라고 하여 연석에서 엄히 문책하였다. 인호가 물러가 상소하기를,
"병오년·무신년 이후로 신의 자취가 불안한 가운데 의심과 비방이 걸핏하면 모여들었습니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연석(筵席)에서 꾸짖음을 받았고 나와서는 친구들의 비방을 받았으므로 그림자를 감추고 사귐을 중지하면서 오직 스스로 조용히 지낼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스스로 설파한 뒤로는 대료(大僚)도 정녕 마음 속에 유감을 품지 않겠다고 말하였는데, 신 역시 스스로 처신을 전처럼 하자고 마음을 먹어 원래 터럭만큼도 속에 담아둔 일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또한 일찍이 천한 이의 말도 들어주시는 상께 우러러 아뢰었습니다.
이번 홍낙안의 장서가 나온 것을 신은 늦게야 소문을 듣고 그 초본(草本)을 가져다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두 차례 문계(問啓)할 때는 마침 승정원에 있었기에 그 문서의 출납이 모두 신의 손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끝난 뒤에 비로소 결정하여 논의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낙안은 스스로 벽이 척사(闢異斥邪)하려는 고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만, 그가 증거로 끌어대는 말같은 것들에 대해 신은 전혀 깜깜하게 모르고 있었으니, 또 어떻게 그를 지휘하고 간섭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달 7일에 낙안이 또 이수하(李秀夏)의 대답한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스스로 변명을 하고자 상소를 지어 승정원에 이르렀을 때 신이 직접 상소문을 접어서 낙안에게 돌려주었는데, 그 때의 실상은 승정원의 동료들이 모두 압니다.
그리고 이기경의 일로 말하면, 초기(草記)와 공술한 말이 서로 어긋나는 점이 있다 하여 그가 상소로 변명하겠다는 뜻을 편지로 재상에게 통지했고 이어 정원에 편지를 하게 된 이유를 낙안이 신에게 와서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말하기를 ‘기경이 스스로 변명하고자 한다면 원래 다른 사람이 권하고 막을 일이 아니지만, 승정원에 편지를 보낸 일은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일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송익효(宋翼孝)의 소에 대한 비답이 내리자, 낙안이 또 와서 말하기를 ‘지금은 기경이 현재 상중에 있다 하여 끝내 한 번 폭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기에, 신이 과연 응답하기를 실상이 원통하고 잘못되었다면, 상중에 소를 올리는 것도 예가 없지는 않다.’ 하였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그와 왕복하면서 그 상소문 초고를 본 일은 없었는데, 또 어찌 그 상소를 외람되게 재계하시는 날에 올리고 말이 패려(悖戾)한 것이 많으며 뜻이 사태를 험하게 만들려는 것이라 엄정하신 처분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헤아리기나 했겠습니까.
대개 신은 낙안과 지친(至親)으로서 친한 사이이고 낙안은 기경을 뜻이 같은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에게 아뢰는 글에 증거로 삼을 말로 인용했고 끝에는 또 그가 황급한 사정을 보고 민망히 여긴 나머지 기경의 일이라면 모두 신에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묻는 대로 대답해 주었으니, 이는 대체로 그들의 마음가짐이 오로지 벽사 위정(闢邪衛正)하려는 것에서 나왔고, 신 역시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연석에 올라 거듭 엄한 하교를 받고 보니 오장이 떨리면서 죽음을 모면하려 해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 기경이 상소를 올리면서 어떤 다른 속셈이 있고 누구의 조종을 받았기에 이처럼 계속 갈등을 일으키는 일을 하려고 했단 말입니까. 그것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낙안에게 대답했던 말을 보건대 실정을 따져보면 비록 딴 속셈은 없었다 하더라도 그 자취를 돌아보면 말을 잘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처럼 행적에 혐의가 있는 자가 조용히 입을 닫아야 한다는 경계를 전혀 모른 채 끝내 스스로 의심을 받아 변명하기 어려운 죄에 빠졌으니, 하나도 신의 죄요, 둘도 신의 죄입니다. 가슴을 치고 혀를 깨물며 후회해도 장차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상의 앞에서 쫓겨 나오고 보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삼가 살 길을 지시하시며 시종 곡진히 보존시켜 주시는 은혜로운 가르침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그야말로 신이 살고 죽으며 사람이 되고 귀신이 되는 길목이라 할 것입니다.
신이 만약 터럭만큼이라도 기경의 상소에 별다른 속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진실로 마땅히 낱낱이 밝혀 진술하기에도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찌 차마 우물쭈물하며 머뭇거려 거듭 기망(欺罔)하는 죄를 지었겠습니까. 이는 기경이 있으니, 한 번만 물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신을 사패(司敗)243) 에 내려 기경과 대질(對質)시킴으로써 지극히 원통한 심정을 풀게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불쌍하여 살려주고 싶다. 사실을 자백한 말을 보니 양심이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지나간 일로 덮어둔다."
하였다.
11월 16일 정해
권일신(權日身)을 호서(湖西)로 이배(移配)하여 사학(邪學)을 하는 자들을 회개시켜 깨우치도록 했다. 일신이 옥중에서 회개하는 글을 짓자 형조가 이를 아뢰니, 상이 그가 진실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생각하고 그를 사학을 하는 지방으로 이배하여 실제로 공을 세우도록 하였다. 최필공도 얼마 있다가 스스로 마음을 바꾸어 회개한다고 하자, 형조가 이를 아뢰니,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11월 17일 무자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홍검(洪檢)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익휴(金翊休)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18일 기축
관동 도백에게 도내의 전염병이 든 백성들을 구휼하라고 신칙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서 관궁(官弓)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11월 20일 신묘
차대를 행하였다.
고성(高城) 등 다섯 고을의 가포(價布)를 모두 돈으로 대신 받는 것으로 정식을 삼도록 명하였다. 도사(都事) 윤치성(尹致性)의 서계(書啓)와 관련하여 묘당에서 복주(覆奏)하였기 때문이었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임진 왜란 때 윤경원(尹慶元)이 칼날을 무릅쓰고 순절한 것은 심대(沈岱)·강수남(姜壽男)과 같은 공로인데, 강·심에게는 모두 시호를 내린 반면 윤은 도헌(都憲)으로 증직되었다는 이유로 시법(諡法)을 받지 못했습니다. 같은 사당 안에서 누구는 시호를 받고 누구는 시호를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서둘러 해야 할 일인 듯합니다. 고 충신 김홍익(金弘翼)은 병자 호란을 당해 연산 현감(連山縣監)으로 관찰사 정세규(鄭世規)를 따라 근왕(勤王)의 길에 올라 험천(險川)에 진을 치고 있다가 칼날을 무릅쓰고 적을 꾸짖으며 진지에서 죽었는데, 인끈을 갖고 있던 소동(小童)도 그 시체를 품고 함께 죽었으니, 그 충절의 늠름함이야말로 족히 백 대 뒤에까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합니다. 모두 증직하고 시호를 내리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11월 21일 임진
전교하였다.
"선조(先朝) 갑자년에 특별히 법식을 반포하여 상소에 하늘에 대해 언급할 때는 한 글자를 떼어 쓰도록 하면서 숙종조 때의 고사를 보아도 이와 같다고 하교하였다. 그런데 그때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국초(國初)의 고사를 보아도 역시 그러하니, 이 뒤로는 옛 법도를 거듭 밝혀 무릇 하늘을 말할 때에는 감히 붙여서 쓰지 않도록 하라."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 최동악(崔東岳)이 치계(馳啓)하기를,
"누선(樓船)은 거북선처럼 민첩하지 못한데, 본영에는 누선만 많고 거북선은 적습니다. 누선 6척을 거북선으로 고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누선 10척 가운데 3척을 거북선으로 만들면 적절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11월 22일 계사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였다.
11월 24일 을미
전교하기를,
"요즈음 들으니 영남과 해서 지방만은 유독 사학(邪學)에 물들지 않았다 한다. 백세 뒤에도 오히려 선정(先正)의 유풍(遺風)에 힘입고 있으니,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절실하다. 그분들을 볼 수는 없으나, 그 후손들에게서 모범을 찾아야 하겠다.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사손(祀孫)인 이지순(李志淳)을 희릉 참봉(禧陵參奉)으로 임명하고,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인 전 승지 이정규(李鼎揆)를 병조 참판으로 발탁하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후손인 전 첨사 이항림(李恒林)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임명하라."
하였다. 항림은 문성공의 서손(庶孫)인데, 상이 선현의 후손이라 하여 특별히 임명한 것이었다.
이치중(李致中)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동래 부사 유강(柳焵)이 치계하기를,
"이 달 13일에 훈도 별차(訓導別差)244) 가 보고하기를 ‘왜인의 큰 배 한 척이 관에 이르렀기에 실정을 물으니, 기묘년 조약에 의한 제 8선의 왜인 선원 30명과 의빙 대차왜(議聘大差倭)의 선문(先文)245) 을 가져온 두왜(頭倭) 한 명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힐문하기를 「이른바 의빙사(議聘使)란 명목은 조약과 관계가 없는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법도 이외의 차왜(差倭)를 별도로 보내고자 하느냐?」 하였더니, 답하기를 「의빙사를 보내온다는 뜻의 선문을 가져다 전할 일로 도중(島中)246) 에서 차왜(差倭)를 보냈기 때문에 선문을 가져왔을 뿐, 일의 실상을 자세히 모른다.」 하였습니다.
‘관수왜(館守倭)247) 가 저희들을 보고 말하기를 「지금 이 배편에 부쳐 도중에서 보낸 사서(私書)를 보니, 통신사(通信使)를 의정할 일로 강호(江戶)248) 의 명에 따라 별도로 의빙 대차사(議聘大差使)를 보내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제 선문(先文)을 보내온 것이다.」 하기에, 저희들이 답하기를 「매년 여덟 차례 사신을 보내기로 정해진 이외에 만약 일이 있어 따로 사신을 보낼 때에는 자연 조약에 따른 명목이 있다. 그런데 이미 통신사를 요청하는 대차사(大差使)도 아니고 보면 무슨 특별히 의논할 일이 있기에 조약에 정해진 이외의 사신을 먼저 보내는가? 설령 통신사를 보낼 때 의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더라도, 문위관(問慰官)이 머지 않아 들어갈 것이니 잠시 그 때를 기다려 강정(講定)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관수왜(館守倭)로 하여금 전품(轉稟)해서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성신(誠信)의 도리이다. 그럼에도 예가 없는 차개(差价)를 감히 보내려고 하다니 천만 부당하다. 설혹 보내 오더라도 결단코 예에 따라 접대할 수 없고 또 그 문서도 받을 수 없다. 선문을 가져온 두왜(頭倭)를 속히 돌려 보내는 동시에 이 뜻을 도중(島中)에 통보하여 대차사를 정지시키도록 하라.」고 엄한 말로 책망하였습니다.
그러자 관수왜가 또 말하기를 「통신사를 의정하는 일은 비록 알 수 없지만, 이것은 강호(江戶)의 명령이라 도주(島主)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선문(先文)이 이제 이미 나왔으니, 대차사도 머지 않아 나올 것이다. 중지시키려고 해도 형세상 어찌 할 수가 없다.」 하기에, 저희들이 말하기를 「신분이 책임을 맡은 관원인 이상 규정 이외에 보낸 사신에 대해서는 다만 물리쳐야 마땅한데 어찌 여러 말로 변호를 할 수 있느냐. 선문을 가져온 두왜를 속히 돌려보내 머뭇거리려는 희망을 갖지 못하게 하라.」는 뜻으로 엄히 책망해 깨우쳤습니다.’ 하였습니다.
전에 대차왜가 나올 때는 반드시 선문을 전하는 두왜가 나왔으니 이것이 구례(舊例)이긴 합니다. 그러나 매년 여덟 번 보내기로 정한 사왜(使倭)와 고부(告訃)·고경(告慶)·표민 영래(漂民領來)·신사 청래(信使請來) 등의 명목 이외에는 규정 이외의 차왜를 보내지 못하도록 임술년의 약조(約條)에 실려 있으니, 지금 이 의빙사를 보낸다는 것은 규정 이외에 속하는 것입니다. 맡은 일이 무엇인지를 따질 것 없이 선문을 가져 온 두왜는 즉시 돌려보내야 하겠습니다.
이른바 통신사를 의정(議定)할 일이라는 것도 무슨 사단인지 모르겠으나, 관수왜가 이미 ‘강호의 명령으로 의빙사를 별도로 보낸다.’ 하였고 보면, 그 의정하는 일을 관수왜는 반드시 자세히 알텐데 명백히 지적해 보고하지 않고 범범하게 의정할 일이라 한 것은 성신(誠信)의 도리에 전혀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의빙의 실상을 관수왜가 있는 곳에 가서 조사하도록 훈도 별차에게 엄히 신칙하였습니다.
이에 훈도 별차가 보고해 오기를 ‘저희들이 관수왜를 찾아 가서 반복하여 책망하며 깨우치고 여러 가지로 힐문하니, 답하기를 「도중(島中)에서 보낸 사서(私書)에는 『통신사를 의정할 일로 강호의 명령을 받아 별도로 의빙사(議聘使)를 정한 것인데 바야흐로 보내고 말 것이다.』 하였고, 원래 어떤 일로 보낸다는 분명한 말이 없었다. 그래서 사서의 내용대로 사실을 곧장 말한 것인데, 머지 않아 대차사(大差使)가 나온 뒤에는 당연히 문서가 있고 또 당연히 말로 아뢸 것이다. 의빙사의 실상은 실로 분명히 모른다.」고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의빙 대차왜(議聘大差倭)의 선문(先文)을 가져 온 두왜(頭倭)가 이미 나왔으니, 그 의논할 일이란 것을 관수왜(館守倭)가 필시 모를 이치가 없는데도 끝내 명시해서 보고하지 않으니, 그 실정을 따져보면 매우 교활합니다. 무신년에 저 나라에 화재가 발생하고 흉년이 들어 차왜(差倭)를 별도로 보내 통신사를 보내는 것을 물리자고 요청했던 것은 규정 이외에 속하는 것이었는데, 조정에서 특별히 먼 이방을 무마하는 성대한 뜻으로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었습니다. 그러니 조만간에 통신사를 요청하는 절목(節目)은 예에 따라 거행하면 될 것이고 별로 따로 사신을 보내 의정(議定)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또 의빙(議聘)이라는 명목을 교묘하게 꾸며서 감히 규정 이외의 차왜를 보내고자 하니, 사체(事體)로 따져보면 더욱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그래서 선문을 가져 온 두왜를 즉시 돌려보내고 대차왜도 보내지 말라는 뜻을 엄히 훈도 별차에게 신칙한 다음 그로 하여금 관수왜에게 각별히 책망하고 효유토록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왜인들이 의빙이라 하면서 규정 이외로 보낸 것은 전에 없던 일입니다. 동래 부사로 하여금 각별히 꾸짖고 효유해 돌려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11월 25일 병신
부총관 서용보(徐龍輔)를 특별히 고성진 첨사(古城鎭僉使)에 보임하였다. 용보가 품계가 올라 총관(摠管)에 제수되었는데도 부름을 어기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인데, 곧이어 작질(爵秩)도 환수하라고 명하였다.
정존중(鄭存中)을 개성부 유수로 삼았는데, 즉시 명에 응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하고, 이시수(李時秀)로 대신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에게 유시하였다.
"내가 밤낮으로 마음을 쓰는 것은 바로 본도 백성들의 일이다. 몇 년 전부터 읍리(邑吏) 가운데 행실이 좋아 재물에 청렴하다는 명성이 들리는 자는 하나도 없고 크고 작은 장오범(贓汚犯)들만 없는 고을이 없다. 그래서 백성들의 아우성치는 모습이 도탄 가운데 거꾸로 매단 것 같을 뿐만이 아니니, 매양 한 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어찌 편안히 지낼 수 있겠는가. 게다가 경외(京外)에서 이익을 얻는 구멍이 곡식을 내다 파는 데 있으므로 백성들의 식량이 늘 부족하다. 또 혹 많이 쌓인 곳에서도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막심하다. 이러고서야 백성들이 어찌 관장(官長)을 원수처럼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여러 차례 호수(戶數)를 따져 곡식을 헤아리라는 명을 내리면서 먼저 백성의 식량부터 여기는 많고 저기는 적은 폐단을 제거하는 동시에 탐관오리를 징계하는 법을 특별히 시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곡식 장부를 정리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 도백은 무슨 굳이 시행하지 못할 이유가 있기에 올해도 또 관심을 기울여 바로잡지 못하는 것이며, 아울러 너무 지나친 정사를 제거하는 일까지도 그 효과가 전혀 들려오지 않는 것인가.
또 탐오한 관리로 말할 것 같으면, 오대익(吳大益)과 조진명(趙鎭明) 같은 자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나오는데, 도백이 되어서 한결같이 눈과 입을 닫고 있으니, 이렇게 하고서야 조정의 명령을 장차 어떻게 시행하겠는가. 탐오한 수령으로서 조정의 명령이 있은 뒤에도 죄를 범한 자를 만약 대동문(大同門)에 그 목을 베어 달지 않는다면, 어찌 조금이나마 자중할 줄 알겠는가. 그러나 도백이 만약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는다면, 또한 어떻게 그 마땅한 법을 쓸 수 있겠는가.
본도는 한 번 새롭게 혁신한 뒤에야 백성들이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경이 관복을 입고서 향안(香案)249) 앞으로 돌아오고 싶으면, 각별히 도내의 크고 작은 장오 죄인을 살피도록 하라. 그리하여 작다고 버려두지 말고 크다고 주저하지 말고서 스스로 청렴하여 재물을 싫어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비록 온 도의 수령 전체를 모두 장오죄로 다스린다 할지라도 절대로 아낄 것이 없다. 그리고 곡식 장부의 일로 말하면 먼저 서울에서 팔도록 하되 감히 일반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말도록 할 것이며, 그런 뒤에 철산(鐵山) 등 여러 고을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홍억(洪檍)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1월 26일 정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친히 묘궁(廟宮)과 능원(陵園)의 동지 제향의 향축(香祝)을 단속하고, 이어 영희전(永禧殿)에 가서 재숙(齋宿)하였다.
이조 판서 이갑(李𡊠)에게 서용하지 않는 벌을 시행하였다. 이갑이 이경심(李敬心)을 매번 정사 때마다 의망에 넣었고 또 아경(亞卿)에 올려 의망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참판이 이집두(李集斗)를 천거하니, 이갑이 응답하기를 ‘그러면 마땅히 정이환(鄭履煥)을 천거해야 한다.’고도 하였다. 상이 그 말을 듣고 하교하여 크게 꾸짖고 이어 이런 명을 내린 것이었다. 경심은 정후겸(鄭厚謙)의 척족(戚族)으로 오래도록 벼슬 길이 막힌 상태였다.
주교 당상(舟橋堂上) 김문순(金文淳)을 삭직하였다. 상이 유사에게 신칙하여 주교(舟橋)의 일에 경비를 번거롭게 낭비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문순이 여러 군문에 철삭(鐵索)을 배정하자, 묘당에서 이를 논박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11월 27일 무술
영희전(永禧殿)에서 동지 제향을 직접 거행하였다.
11월 28일 기해
태묘 헌관(太廟獻官) 이의행(李義行)을 당진현(唐津縣)에 유배하였다. 이의행이 태묘 헌관이 되었는데, 시간이 되자 여러 집사들이 모두 자리로 나왔는데도 의행은 막 국을 먹느라 즉시 자리에 나오지 못하였다. 감찰 백영진(白泳鎭)이 보고하는 글을 올리니, 상이 엄한 하교로 의행의 죄를 책망하고, 호서 연안 지방에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영진이 신진(新進)의 낮은 관료로서 능히 재신(宰臣)을 탄핵했다 하여 품계를 올려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우현 첨사(牛峴僉使) 유문양(柳文養)이 상소하여 각진(各鎭)의 환곡 폐단을 진달하면서, 백성의 환곡을 징수할 곳이 없는 경우는 면제해주고, 아전들이 포흠(逋欠)하여 빈 장부만 남아 있는 것은 독촉해 받아내고, 진흙으로 썩어 없어진 곡식은 널리 감면하는 은전을 베풀고, 각진의 환곡 출납은 그 지방관이 관할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각진의 백성을 착취하는 폐단을 아뢰었다. 이에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묘당에 복주(覆奏)하도록 하였으나, 흐지부지된 채 시행하지 못하였다.
11월 29일 경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장용영의 중일 시사(中日試射)를 거행하였다.
오재순(吳載純)을 이조 판서로, 홍문관 제학 서호수(徐浩修)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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