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신축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다.
서호수(徐浩修)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반궁(泮宮)에서 감제(柑製)를 거행하였다. 장원을 한 진사 정동간(鄭東簡)을 전시(殿試)에 곧장 응시토록 하였다.
12월 2일 임인
각사의 구임 낭관(久任郞官)을 불러보고 맡은 직분을 물어 보았다. 혜청의 여러 낭관들이 조리있게 대답을 못하니, 그 관직을 파면토록 명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대동청(大同廳)을 처음 설치했을 때는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으로 낭관을 겸임하게 했는데, 뒤에는 음관이 임명되는 자리가 되었고, 음관이 또 변해서 군수 이상 가는 자리가 되었다. 게다가 당파에 따라 배치하는 것이 거의 바뀌지 않는 제도가 되어 버린 나머지 이 자리가 하나 나오기만 하면 뇌물이 분분하니, 요즈음의 갈등은 오로지 여기에서 생겨난 것이다. 비록 이 보다 더 좋은 이름난 관직이라 할지라도 모두 건극(建極)250) 의 감화를 받고 있는데, 유독 무엇 때문에 혜청 낭관이란 미관 말직에 대해서 이처럼 서로 다툰단 말인가."
하고, 이어 연전에 신칙하는 하교가 있은 뒤에 당색으로 배열해 임명한 혜청 당상에게 서용시키지 않는 벌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구상(具庠)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朴宗岳)이 장계하기를,
"천안(天安)의 이존창(李存昌)을 신의 감영에 잡아다 처음에 엄히 매를 쳤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자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날을 가두어두고 여러 가지로 효유했더니, 그가 정신이 번쩍 들며 크게 깨달아 사학(邪學)을 배척해 부르기를 요술(妖術)이라고까지 하는 등 허물을 뉘우치고 정도(正道)로 돌아올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선 그대로 가두어두고 계속 훈계하며 신칙하여 완전히 의심없게 된 것을 알게 된 뒤에 적절히 헤아려 처리할 생각입니다."
하니, 회유(回諭)하기를,
"감화시키기 어려운 최필공(崔必恭)같은 자도 이미 정도(正道)로 돌아왔다마는, 기호 지방에서 감화시키기 어려운 자로 말하면 바로 이존창이었다. 그런데 이제 존창이 또 크게 깨달아 죄를 후회하고 사학을 배척하여 요술이라 부르기까지 하였으니, 그가 깨달았음을 가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물든 것은 이미 오래 된 반면 선으로 돌아온 날은 얼마 되지 않으니 이 뒤로 그가 진실로 정도로 돌아왔는지의 여부는 그가 공로를 세워 속죄하려는 성실성 여부를 살펴 결정할 문제이다.
지방관에게 명하며 그 근처 고을 사람들의 의혹이 풀어질 때까지 간간이 말을 해서 힐문하여 사실인지를 따져보고, 그 외에 겉으로 드러난 모습도 참고해서, 터럭만큼의 찌꺼기도 속에 남아 있거나 밖으로 드러난 것이 없게 된 뒤에야 영구히 석방해서 통쾌하게 그로 하여금 평민이 되도록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또 힘을 다해서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백성들을 효유하고, 이 뒤로 이 일로 감영에 보고해 오거든 경은 즉시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3일 계묘
이조 판서 오재순(吳載純)을 보내 고 영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에게 치제(致祭)토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고상(故相)이 한 장의 상소로 대궐 문에서 호소하자 선대왕께서 크게 포장(褒奬)하시고 특별히 벼슬을 올려 발탁하시는 동시에 대신 정려(旌閭)하도록 명하시고 그 집의 선조에게 치제하도록 명하신 날이다. 그러니 옛날을 잊지 않는 뜻으로 볼 때 어찌 이날을 그대로 보낼 수 있겠는가. 고 영부사의 집에 정경(正卿)을 보내 치제토록 하라."
하였다. 전 우의정 김종수(金鍾秀)에게 특별히 효유하기를,
"경을 만나지 못한 지 오래되었는데, 목마른 자가 마실 것을 생각하는 것 같을 뿐만이 아니다. 경이 근력을 헤아리지 않고 예법을 너무 지나치게 지켜 몸의 건강이 손상되기에 이르렀으니, 옛사람이 남긴 교훈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모름지기 힘써 슬픔을 억제할 방도를 생각해서 생강과 계피로 위(胃)를 소생시키고 인삼으로 깊은 병을 조리하여 속히 평소의 건강을 회복해 걱정을 끼치지 말도록 하라.
오늘이 어떤 날인가. 해마다 이날이면 매번 선대왕의 천지 일월(天地日月) 같으신 위대하심과 밝으심을 칭송하게 되는데 경들이 협력하여 밝힌 덕분으로 대의(大義)가 어둡지 않게끔 되었다. 지금 충헌(忠憲)251) 은 이미 죽고 없다마는, 당시 위태로웠던 형세에서 경이 재야(在野)에 있으면서도 충성을 다해 도움을 많이 주었으니, 원서(原書)에 이름을 가탁하고 안한 것이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충헌의 집에 내린 제문(祭文)을 베껴 보내 경의 수명(修明)한 공을 거듭 말하니, 경은 노력하라."
하였다. 이때 종수는 상제(喪制)를 지켜 교외의 여묘에 있었다. 또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에게 효유하기를,
"오늘이 어떤 날인가. 해마다 이날이 오면 매양 선대왕의 천지 일월과 같은 위대하심과 밝으심을 칭송하게 되는데, 경들이 협력하고 천명한 덕분으로 대의가 사라지지 않게끔 되었다. 이제 충헌은 이미 가버렸으나 매년 이날의 단란했던 모임을 돌이켜 보면 바로 어제 아침의 일만 같다. 가버린 사람은 그만이지만, 어찌 경들처럼 기억나고 살아 남은 사람들을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헌의 집에 내린 제문을 써서 보내니, 경은 모름지기 더욱 천명할 방도에 힘쓰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 을미년의 이날을 생각해 보건대, 흉도(凶徒)들이 말의 근거를 조사하기를 청했을 때 선대왕의 지인 지명(至仁至明)이 아니셨던들 위기일발의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 동방의 신자(臣子)된 자로서 큰 관원이건 작은 관원이건 간에 이 뜻을 제대로들 알고 있는가. 고상(故相)과 승선(承宣)이 만약 옆에서 힘써 아뢰지 않았다면, 비록 선대왕의 일월같은 밝으심으로도 어찌 굽어 통촉하실 수 있었겠느냐. 그 당시의 승선은 지금 현재 거두어 쓰고 있다마는 잊을 수 없는 것은 고상이다. 고상 이은(李溵)의 아들을 해조로 하여금 임기가 찬 수령의 자리에 단망(單望)으로 임명해 보내 그 집 선대의 사판(祠版)이 관원의 제향을 받도록 하라. 그리고 정호인(鄭好仁)을 예조 판서로 삼으라."
하였는데, 호인은 바로 을미년에 승선이었다.
오재순(吳載純)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12월 4일 갑진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효유하기를,
"경이 고상(故相) 서 영부사(徐領府事)252) 의 집에 갔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무릎을 치며 찬탄하였고 곧 이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였다. 그래서 일전에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모임이 있은 뒤에 유감스럽게 생각했던 마음이 물이 흘러가 버리고 구름이 벗겨지듯 사라졌다. 경처럼 크고 넓은 도량을 지니고서 오직 나라와 공도(公道)만을 위해 《명의록(明義錄)》의 큰 의리만을 알 뿐 다른 것은 관계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이런 일을 하기 위해 병을 무릅쓰고 추위를 이겨내며 분연히 떨쳐 갈 수가 있었겠는가. 여기에서 더욱 내가 경을 안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 줄을 알겠다. 만약 고상에게 지각이 있다면 경의 이와 같은 성의를 저버린 것을 부끄러워함이 진실로 클 것이다. 그래서 근거없이 무성한 말들만 편차적으로 믿은 것에 대해 반드시 후회하는 바가 많을 것인데, 죽은 사람을 다시 일으켜 경에게 사죄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하니, 제공이 부주(附奏)하기를,
"신이 고상과 전날 비록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점이 있었으나, 이는 다만 개인적인 일에 속하는 것일 뿐입니다. 성상께서 《명의록(明義錄)》에 감회를 일으키신 이런 날에 어찌 감히 7, 8년 동안 설왕설래하던 혐의를 돌아본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가는 곳에 저만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고상에게 가서 조문한 것은 고상을 생각해서만이 아니라, 오직 《명의록》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고상 서명선의 시호를 의논할 때 정부(政府)가 서경(署經)을 해야 하는데도 제공이 자리에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에 상이 사관에게 명하여 《명의록》을 가져다 보여 주게 하면서 이르기를,
"경은 이 책을 모르는가."
하니, 제공이 황공해 하면서 비로소 나왔고, 이 때에 이르러 또 그 집에 조문을 한 것이었다.
12월 6일 병오
춘당대(春塘臺)에서 장용영(壯勇營)의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다.
12월 7일 정미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에게 사제(賜祭)하고, 그 봉사손(奉祀孫)을 등용하도록 하였다. 전교하였다.
"오늘은 바로 우리 정성 성후(貞聖聖后)의 탄신일이다. 그리고 임신년이 또 탄신하신 해이니, 올해로 꼭 1백 년이 된다. 또 내가 태어난 해로 말하면 바로 성후의 회갑이 되시던 해로써 성후의 지극히 자애로운 덕을 두루 입었으니, 이날을 맞아 더욱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때가 한창 겨울인 만큼 군민(軍民)의 폐단에 대해 소중(所重)253) 때문에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능에 배알하여 효성을 펴는 예절을 비록 거행할 수는 없으나, 어찌 이날을 그냥 지낼 수야 있겠는가. 달성 부원군과 잠성 부부인(岑城府夫人)의 사당에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라."
신응현(申應顯)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2월 8일 무신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장계를 올려 세운(稅運)에 대한 일을 조목별로 진달하기를,
"도내에서 가장 먼 고을의 세곡(稅穀)을 처리하기 어려운 폐단에 대해서는 경시관(京試官)의 서계에 이미 자세히 논열(論列)되어 있습니다. 대저 조창(漕倉)에 소속된 고을을 제외하고 기타 직접 바치는 고을이 26개 고을인데, 임피(臨陂) 등 11개 고을은 칠산(七山) 상류에 있고, 나주(羅州) 등 15개 고을은 칠산 하류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류의 여러 고을은 물길이 멀 뿐만 아니라 험한 곳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게다가 또 큰 바다를 지나야 하니, 비록 일찍 먼저 운반한다 해도 그 사이에 낭패당하는 일이 많습니다. 또 만약 늦게 꾸려 운반할 경우에는 물힘은 약하고 바람은 거꾸로 불며 궂은 날씨에 안개로 막혀 바다에 나가 있는 두서너 달 동안 곤궁하고 급박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단단하고 완전한 배에 싣고 노련한 사공들이 운전한다고 해도 오히려 잘 건너기를 기대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오래된 배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겨우 처음 조운을 하자마자 곧바로 돌아와 수리할 여가도 없을 뿐더러 오합지졸이라서 배를 통제하지도 못하니, 배가 파손되거나 침몰하는 걱정은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혹 편대를 이루는 일을 창시한 때도 있었고 혹 조창(漕倉)을 더 설치하자는 의견도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도의 상류에 있는 여러 고을과 호서(湖西)의 각 고을은 길이 가까운데다 안흥(安興) 한 곳을 제외하면 별로 험한 바다가 없으니, 비록 5, 6월에 배를 운행해도 먼 고을처럼 막히고 지체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 먼 고을의 세곡을 먼저 운반하자는 의논이야말로 편의한 방책이라 하겠습니다.
먼 곳의 세곡을 나중에 운반하는 것은 뱃사람들에게도 큰 폐단입니다. 만약 그들로 하여금 먼저 먼 고을의 것을 운반하게 하고 다음에 가까운 고을의 것을 운반하게 하면, 반드시 기꺼이 따를 것입니다. 또 그들의 이해 관계로 말하더라도, 1년에 선운(船運)하는 것이 두 차례에 지나지 않지만, 먼 고을을 두 번 운행하게 하는 것은 여러가지로 장애가 많습니다. 지난 겨울 주교사(舟橋司)에서 먼저 먼 고을의 것을 운반한 자는 다음에는 가까운 고을을 운행하게 하고 먼저 가까운 고을을 운행한 자는 다음에 먼 고을을 운행하게 하자는 뜻으로 정식(定式)을 만들었는데, 이제 똑같이 먼저 먼 고을의 것을 운반하고 다음으로 가까운 고을의 것을 운반하게 하면, 새 격식에도 방애가 없고 뱃사람들도 손해볼 것이 없어 모두 편리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호서 한 도에서는 혹 모두 두 번째 운행에 속하게 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각 지방을 담당한 신하가 제각기 봉공(奉公)하는 뜻으로 말한다면, 원근을 따질 것 없이 반드시 일찍 운반하고자 하는 것이 자연 직분상 진실로 당연하다 하겠으나 선후 사이에 별로 이해를 말할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단지 경비로만 따진다 하더라도 먼 곳을 먼저 하고 가까운 곳을 뒤로 하는 것이 진실로 매우 편리합니다.
26개 고을의 대동미와 각사에 바치는 쌀과 콩을 평년의 숫자로 총계하면 매년 11만여 석 안팎이 되는데, 나주 이하 각 고을의 숫자가 7만여 석이나 됩니다. 주교사에 속한 경강(京江)의 큰 배가 80여 척이니, 이른 봄에 먼저 나주 이하 각 고을과 칠산 상류 지역 가운데 가장 먼 고을의 세곡을 운반하고 이어 호서와 본도의 상류에 속하는 여러 고을의 것을 운반하면, 5, 6월 안에 운반을 모두 끝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면 조운의 뜻밖의 걱정이 적어질 것이고 공사(公私)간에 모두 이로운 효과가 있을 것이니, 이것을 정식으로 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각신(閣臣) 서영보(徐榮輔)가 복명(復命)하니, 상이 불러보고 사의(事宜)를 물었다. 영보가 아뢰기를,
"함흥(咸興)과 영흥(永興) 두 본궁(本宮)의 제품(祭品)의 많고 적음과 진설한 제기의 높고 낮음을 처음부터 일정하게 헤아려 정한 바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별차(別差)와 궁리(宮吏)들이 늘이고 줄임을 멋대로 하고 높이고 낮추는 것을 형편에 따라서 하므로 쉽게 준비할 수 있는 어육(魚肉)은 큰 그릇에 가득 담고 희귀한 과일은 단지 한 개만 쓰기도 합니다. 이처럼 어떤 것은 많고 어떤 것은 적어 숫자를 정한 의미를 근거할 데가 없으니, 사체(事體)로 따져보면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예법의 뜻을 참작하여 한 가지로 확정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체로 본궁의 체모는 원묘(原廟)의 제도를 적용한 것인데, 외신(外臣)이 일찍이 살펴서 검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별차의 무리들이 힘써 이바지해야 할 절차를 적당히 넘어가고 소홀히 하여 경건함을 잃은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이번에 특별히 봉심(奉審)을 할 사람을 보낸 것도 오로지 이 때문이었다. 이제 그대의 말을 듣고 다시 이처럼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으니, 제사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는 탄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 저 별차배처럼 미천한 자들이야 어찌 책망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미 들은 뒤에야 어찌 일각이라도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둘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이른바 내찬(內饌)이란 명목을 각별히 엄금하고, 제물 가운데 별차들이 사사롭게 서울의 시장에서 사 가지고 가는 잘못된 예도 엄히 금지시키라. 그리고 지금부터는 내수사에서 미리 내려 보낼 물건과 수량을 기록해 보고하도록 도신에게 분부하라.
제탁(祭卓)의 견본을 이미 올려 보냈으니, 이 제탁의 견본에 따라서 유기(鍮器)로 제기를 만들어 보내고 제품(祭品)도 대략 적절히 헤아려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도식(圖式)을 써 내리기를 기다려서 호조의 정해진 예규(例規)에 따라 별도로 한 책자를 만들어 활자로 인쇄한 뒤 한 본은 본궁에 소장하고 한 본은 해도 감영에 소장하며 서울에서도 역시 사고(史庫)와 내각(內閣)·예조·내수사에 나누어 소장케 하라. 이 뜻을 본도의 도백에게 하유하여 이에 따라 준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진설 도식(陳設圖式)은 모두 별차들의 한때 억견에서 나온 것인데, 요즈음에는 또 탁상이 협소하기 때문에 잘못 포개놓은 경우까지 있으니 일이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제품(祭品)으로 기왕에 시식(時食)과 설미(褻味)를 쓰고 있는 만큼 모두 전례(典禮)에 실려 있는 대로 따를 수는 없겠지만 대략 바로잡아서 너무 지나친 것은 제거해도 안 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홀기(笏記)는 비록 전해 내려오는 의절(儀節)을 사용하고 있으나 역시 조정에서 적절히 헤아려 정한 것이 아니니, 도식을 바로잡을 때 역시 전부 살펴보아 어긋난 것이 있으면 고치고 잘못된 것이 없으면 옛것을 그대로 써서 지극히 합당하게 되도록 힘쓰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제사의 예(禮)는 수복(守僕)들이 익숙하냐 익숙하지 않냐에 관계되는 바가 많은데, 본궁의 수복들은 원래 예를 익히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일이 닥치면 어긋나 동서도 구분할 줄 모릅니다. 이제 만약 그들에게 도식과 홀기를 읽어 외우게 하면, 일을 맡아서 할 때 자연 익숙하게 될 것입니다. 도신이 봄 가을에 봉심할 때 직접 강(講)을 받아서 부지런하고 태만함을 따진 뒤 상벌(賞罰)을 시행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만들어 거행하는 근거로 삼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제향의 거행은 오로지 수복의 능력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의지하고 살 밑천이 없기 때문에 곧 싫어하고 피하는 자리가 된 나머지 번번이 무리들 가운데 새로 소속된 자를 보충해 넣곤 하니, 항상 거행하는 의절도 매양 생소한 걱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만약 일정한 급훈을 정해주어 그들이 모두 기꺼이 오게 한다면, 역시 폐단을 바로잡는 한 가지 방책이라 하겠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북도의 좁쌀 가운데 적당히 갈라주는 것으로 길이 정식을 삼게 하소서.
그 가운데 또 제감(祭監)과 제청직(祭廳直) 등의 명색이 있는데, 제감은 수복보다 중요하고, 제청직은 또 제물을 익히고 진설하는 일을 관장하니 중요함이 역시 수복에 밑돌지 않습니다. 모두 똑같이 일정한 급료를 정해 줌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감 및 수복 그리고 제청직은 몇 명인가? 그리고 만약 급료로 줄 쌀을 마련한다면 어느 예를 쓰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하였다. 영보가 답변드리기를,
"제감이 1인, 수복이 3인, 제청직이 1인입니다. 그 무리들을 생활하게 할 다른 방책은 없고 오직 급료를 받게 하는 방법밖에 없으니 곡물을 떼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 장차 북도의 좁쌀을 취해 쓰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에 속하니, 적절히 헤아려 마련할 수밖에 없습니다. 준원전 영(濬源殿令)의 급료가 매달 6두(六斗)인데 이것도 요즈음에 와서 처음 생긴 것입니다. 전미(田米)가 현미만은 못하지만, 궁리(宮吏)와 전사(殿司)에는 또한 관료와 아전의 구별이 있으니, 마땅히 똑같이 6두로 마련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도내의 곡식 장부가 비록 넉넉하지 않다고 해도, 어찌 선조를 섬기는 일을 위해 별도로 비용을 떼어주지 못하겠는가. 1인당 6두의 급료를 마련해서 나누어 주도록 하라. 북도의 좁쌀이건 다른 조목의 곡물이건 도백으로 하여금 좋은 방향으로 부지런히 모아 준비하게 하되, 먼저 이번달 급료부터 시행케 하라. 도내에 있는 곡물 가운데서 갈라내기 어려우면 본도의 경납(京納)이나 내수사의 노비 혹은 본 궁의 별차가 연례적으로 진상하는 조목 가운데에서 갈라서 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모두 도백에게 하나로 확정해서 장계를 올리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제품(祭品)은 목기(木器)와 자기(磁器)를 뒤섞어 쓰는데, 그 모양의 크고 작음에 역시 일정한 예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경건한 자세가 부족한 것은 오로지 자기 한 종류에서 생겨납니다. 신이 삼가 고례(故例)를 살펴보니, 제기라는 이름 가운데 목기를 쓰는 것이 햇수가 오래되어 깨지고 손상되면 자기로 대신 쓴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이것 자체가 당초 자기와 목기로 나눈 본뜻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자기로 말할지라도 5년마다 내수사에서 개비(改備)하여 보내지만, 자기는 쉽게 손상되어 5년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는 별차가 스스로 준비해 쓰게 마련인데, 모두가 북로에서 구운 사기(沙器)로서 색깔과 품질이 정밀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지극히 경건한 자리에 쓰니 진실로 미안스럽습니다. 대개 유기(鍮器)·목기·자기 세 가지 종류 가운데 가장 쉽게 손상되는 것은 자기만한 것이 없으니, 형세상 부득이 구차하게라도 충당하지 않을 수 없어, 경건함을 잃고 정결함을 잃는 폐단을 부르게 마련입니다. 이 한 조목은 신속히 바로잡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의 말이 이럴 뿐만이 아니라, 가져온 자기와 목기를 살펴보니, 두렵고 죄송하기가 이보다 심한 것이 없었다. 일찍이 이런 줄 알았다면 어찌 지금까지 그대로 두었겠는가. 의절(儀節)에 관한 일이라면 감히 가볍게 고치는 일을 의논할 수 없겠지만, 막중한 제기는 한순간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또 각종 그릇으로 자기와 목기와 유기를 뒤섞어 쓰는 것도 사체(事體)로 따져 볼 때 더욱 구차한 일이다.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유기로 만든 물품만을 쓰게 해야 할 것이다. 내년 4월 대향(大享) 때까지 만들어 보내도록 하라. 먼저 이런 뜻을 도백으로 하여금 알아두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제사를 공경스럽게 하는 것은 오로지 집사(執事)가 술잔을 올리고 일어났다 구부리며 절하고 무릎꿇고 주선하는 것들이 절도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본궁의 제사를 거행할 때, 그 일을 담당하는 것은 오직 별차 1인과 무식한 수복(守僕)의 무리 서너 명뿐입니다. 지금 제기와 제품을 정결하게 하고 도식과 홀기(笏記)를 모두 예문에 합치되도록 하는 것은 단지 조정에서 한번 바꾸면 되는 것이니 별로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사를 엄숙하고 경건하게 시행하여 위의를 그르치지 않게 하는 일같은 것은 궁차(宮差)나 궁속(宮屬)에게 달려 있는데, 이는 한순간에 갑자기 가르쳐서 익숙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신의 생각은 삭망제(朔望祭)는 별차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되, 대향(大享)과 절제(節祭)는 도백과 지방관이 번갈아 참석하게 하고 만약 일이 있으면 부근 고을의 수령 가운데 임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또 삼가 살펴보니 숙종 병자년에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추후 부묘(祔廟)할 때 고 판서 이광하(李光夏)가 그 당시 도백으로서 실제로 두 본궁의 헌관이 되었고 여러 집사들도 도내의 수령들을 나누어 맡겼으니, 이것이 바로 외방 신하도 제사를 거행할 수 있다는 전례입니다. 따라서 지금 도신이 말한 거사도 역시 이치가 있는 듯한데, 이렇게 변통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경장(更張)하는 것과 관계되어 감히 단정해 말하지 못하겠으니, 예당(禮堂)254) 에게 물으셔서 처리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도신과 지방관이 돌려가면서 일을 거행하는 것이 진실로 좋으나, 일이 막중한 의절(儀節)과 관계되니 다시 헤아려보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대신이나 예조 당상이 연례적으로 봉심하기 위해 내려갔을 때, 만약 삭망제나 크고 작은 별향(別享)의 시기를 당하면 헌관이 되어 일을 거행하라는 뜻으로 정식을 삼고, 예조로 하여금 그것을 현재 사용하는 예서(禮書)와 등록(謄錄)에 싣도록 하는 동시에 도백 및 본궁의 별차로 하여금 각각 등록에 기재한 뒤 이에 따라 준행하게 하라.
이번에는 제기를 새로 만들고 제향 도식(祭享圖式)을 수정하는 등 사체가 자연 특별하니, 어찌 단지 별차에게 일을 거행하게 하고 말 수가 있겠는가. 향(香)은 이전에 내려보내 봉안해 둔 것을 쓰고, 제기가 내려갈 때를 기다려 도백이 경건히 받아서 직접 본궁에 가서 봉안하고, 내년 4월 대향하는 날에는 도백이 헌관이 되도록 하유하라."
하였다.
12월 10일 경술
차대를 거행하였다.
공조 판서 구익(具㢞)을 파직하였다. 원릉(元陵)의 제기(祭器)는 개수할 때 구익이 잘 살펴 단속하지를 못하자 상이 성의(誠意)가 여러 신하들에게 스며들지 못했다 하여 자신을 책망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에 대신이 구익을 죄주기를 청하니 드디어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포도 대장 조심태(趙心泰)가 아뢰기를,
"포도청에서 기찰하여 잡을 때 5부와 자내(字內)255)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기찰하고 염탐하는 데 불편이 많습니다. 백 리까지는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었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포교들을 부외(部外)로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은 외읍(外邑)의 입장에서 진실로 폐단이 줄어들기 때문이니, 고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나에게서 하교를 받아 할 일이 아니니 감히 가볍게 논의할 수 없다. 만약 부득이한 경우에는 묘당에 공문을 보낸 뒤에 보낼 수 있게 하라."
하였다.
12월 11일 신해
호서의 사학 죄인(邪學罪人) 이존창(李存昌)을 석방하여 평민을 만들도록 명하였다. 존창이 도백에게 글을 올려 스스로 정신이 번쩍 들며 잘못임을 깨달았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전교하기를,
"그 말이 이치에 가까우니, 그 마음이 정도(正道)로 돌아온 것을 증험해 알겠다. 죄없는 평민이 되도록 해서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서로 본받아 나날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으로 옮겨가는 아름다움이 있게 하라."
하였다.
12월 12일 임자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참의로, 이치중(李致中)을 형조 판서로, 조종현(趙宗鉉)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2월 13일 계축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아뢰기를,
"양주(楊州)는 동쪽과 북쪽의 교차점으로 사람이 많고 땅이 넓어 도둑을 방비하는 정사를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예전대로 다시 진영(鎭營)을 설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2월 14일 갑인
김상철(金尙喆)이 죽었다. 이에 죄명(罪名)을 씻어주도록 명하고, 대신(大臣)의 예로 장사지내게 했으며, 그 아들 김우진(金宇鎭)을 석방하여 돌아가서 장사지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전교하기를,
"원상(院相)은 바로 국정을 총섭하는 임무를 맡는 사람이다. 그 체모나 예우(禮遇)가 과연 어떻겠는가. 불행히 그 사이에 일을 저지른 것이 있다 해도 섣불리 처벌하지 않는 법이니, 이것이 우리 조정에서 대신을 공경하는 법의 뜻이다.
이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연전에 대간의 논의가 준엄하게 나왔어도 단지 파직으로 처벌하는 법만을 시행한 것이 어찌 공연히 한 것이겠는가. 이제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만약 예에 따라 빼주는 일을 거행하지 않는다면, 원상을 각별하게 대접하는 의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전 영부사 김상철의 죄명을 씻어주고 대신의 예장을 거행하도록 하라.
그 실정이야 진실로 죽일 만하지만, 국법도 때로는 굽혀야 할 때가 있으니, 이는 대개 떳떳한 법 가운데 조화(造化)의 권능을 참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행해야 할 것과 마땅히 해서는 안될 것을 어찌 족히 비교해 볼 것이 있겠는가. 그리고 제주목(濟州牧)에 사형을 감해 위리 안치한 죄인 우진을 특별히 석방해서 즉시 돌아가 장사지내도록 허락하라."
하니, 정원이 합문을 막고 청대(請對)를 요구하였는데, 상이 그 명을 반포하도록 효유하여 이르기를,
"다툴 일인지 다툴 수 없는 일인지를 따질 것 없이 전교를 중간에서 잡아두는 것은 크게 뒷날의 폐단과 관계가 된다."
하고, 또 효유하기를,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 이와 같은 처분을 내리는 것이 어찌 그 사람이나 그 집을 위해서 하는 것이겠는가. 하나는 조정의 관대한 정치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요, 하나는 원상의 체모와 임무가 자연 특별함을 생각해서이다. 이와 같은 사정을 이미 비망기로 자세히 말했는데, 만약 반포를 하지 않는다면 바깥 조정에서 어떻게 처분을 내린 본뜻을 알겠는가."
하였다. 이에 각신(閣臣)·옥당(玉堂)·양사(兩司)가 합문에 엎드려 물러가지 않았다. 옥당이 아뢰기를,
"지금 이 역적 상철의 죄명을 씻어주고 우진을 석방해서 돌아가 장사지내게 한다면, 의리가 이로 말미암아 어둡게 막히고 이륜(彛倫)이 이로 말미암아 무너져 끊길 것입니다. 이 하교가 한번 반포되면 동방의 수천 리 땅이 모두 장차 오랑캐와 짐승의 땅으로 빠져들까 두렵습니다."
하고, 정원과 양사도 서로 글을 올려 명을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모두 잡아다 신문하도록 하였다. 동소(東所)의 위장(衛將) 이태일(李台一)을 가승지(假承旨)로 임명하여 전교를 반포하도록 하고, 이어 처분한 여러 신하들을 분간해 주도록 명하였다.
영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을 면직하였다. 복원이 가장 먼저 청대(請對)를 요구하니, 전교하기를,
"대신의 거취로 말하면 관계되는 바가 어떠한가. 만약 이보다 더한 일이면 장차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하고, 드디어 이렇게 명하였다.
전교하였다.
"접견을 허락하지 않으면 마땅히 논계(論啓)로 다투고, 논계가 또 길이 막히면 마땅히 차자나 상소로 해야 하는데, 갑자기 논계를 하지 않고 차자를 올렸으니, 합문에 엎드렸던 양사의 관원을 파직하라."
의금부에서 김우진을 석방할 수는 없다고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와 같은 일을 거행할 수 없다는 뜻을 번거롭게 아뢰다니, 이는 옛날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잘못된 습관이다."
하고, 금부 당상을 체직하도록 명하고, 그 글을 받아들인 승지를 경기 연안 지방에 유배하라고 했다가 곧바로 고신(告身)을 뺏도록 명하였다.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민종현(閔鍾顯)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면긍(李勉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구상(具庠)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15일 을묘
경외(京外) 관원의 전최(殿最) 문서를 뜯어 보다가 관서 지방의 진장(鎭將) 가운데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은 자가 있자 특명(特命)으로 수령으로 승진해 임명하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관서 지방에서 7년 가뭄에 비가 온 것만 같다."
하였다. 문관 수령으로 중(中)을 받은 자가 있었는데, 그를 바꾸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문학(文學)과 정사(政事)는 본래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거행하였는데, 유학(幼學) 임경진(林景鎭)이 장원을 차지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 전강에서 응시한 유생들을 보고 차례로 그 씨족과 문파(門派)를 물었는데, 이 유생에 이르자 묻는 데 따라 그 아비의 이름을 대답하는 것이 자못 남달랐다. 말이 옛날을 생각하는 데에 미치자 그 행동거지에 나타난 감개한 동작이 옆에서 보기에도 거의 정신을 수습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연석에 있던 여러 신하들도 이 때문에 덩달아 감동하여 모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가 평소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부모를 돈독히 사랑했다는 것을 이로써 알 수가 있다. 또 정신을 가다듬고 강에 응시했는데 뒤에 보니 강하는 것도 역시 잘해서 순통(純通)의 점수를 얻었다. 이런 사람은 보기 드문 사람이라 하겠다.
일차의 강에 급제를 내리는 것은 예가 드물기는 하지만, 옛날에도 효렴과(孝廉科)가 있었으니, 이런 사람은 특례로 표창해야 할 것이다."
하고, 특명으로 급제를 하사하였다. 경진은 고 승지 임석철(林錫喆)의 아들이다. 시관 구윤옥(具允鈺) 등이 김상철과 김우진에 대한 처분이 잘못되었다고 논하니, 전교하기를,
"옛날에는 법령이 관대하였다. 그래서 허적(許積)이 원상(院相)의 신분으로 사사(賜死)받기까지 했어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법령이 너무 각박하다. 그러니 부득이 이런 특례를 쓸 수 밖에 없다."
하였다. 각신(閣臣) 이병모(李秉模)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 또한 그 당시에 옥사를 처리했던 신하입니다. 그래서 그가 역적질한 실정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겠다는 말과 뒷날을 두고보자는 등의 공술(供述)을 분명히 받았습니다. 상철이 역적인 것은 그 자식이 역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요, 우진이 역적인 것도 역시 그 아비가 역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두 직접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니, 아무리 완곡히 용서해주고자 한들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정원과 삼사가 합문에 엎드려 청대(請對)하니,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 민종현을 자산 부사(慈山府使)로, 대사간 이면긍을 영천 군수(榮川郡守)로 보임하고, 정원과 삼사를 모두 체차하였다.
전 영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과 각신 오재순(吳載純) 등과 판중추부사 구윤옥 등과 이조 참의 조윤대(曺允大) 등이 서로 글을 올려 앞의 교서를 철회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6일 병진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을 파직하였다. 제공이 상소하여 앞의 분부를 환수하고, 후원(喉院)256) 과 삼사(三司)에 대한 처벌을 취소하도록 요청하니, 전교하기를,
"옛날의 대신은 반드시 그 임금의 잘하는 것을 따라서 이루어주더니, 지금의 대신은 그 잘못에 비위를 맞추려 하고 있다. 이렇게 하고서도 협찬하고 바로잡아 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이번의 처분이 없었더라도 경과 같이 대신의 반열에 있는 자로서는 너그러움을 숭상하는 정치와 그물을 풀어주는 은혜를 베풀도록 은근히 아뢰어 기필코 감동시켜 깨닫게 했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대신이 임금을 섬기는 도리이다. 경들의 요즈음 행동을 옛날 대신들의 일처리와 비교해 본다면 과연 만족스럽지 못한가, 만족스러운가. 과연 두려운 마음이 드는가,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는가.
조정에서 중시하는 것은 체모(體貌)이다. 그런데 처분을 기다리면서 비답을 받기도 전에 곧이어 소장을 올리고, 소장을 올리고 나서 비답을 받기도 전에 빈계(賓啓)257) 가 나오게 했으니, 고금을 통하여 이와 같은 체모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체모라고 하는 것이 어찌 다만 오늘날 조정의 체모만 말하는 것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예로부터 전해오는 바꿀 수 없는 기강인 것이다. 그런데 경은 이제 경 한 사람의 손으로 그것을 무너뜨리고 훼손하고 애매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경은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를 만나려 하는가. 이쯤 되었고 보면 대신을 공경하는 예를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 경에게 파직의 벌을 시행한다."
하였다. 각신 오재순(吳載純) 등과 지중추부사 윤동섬(尹東暹) 등과 의금부 당상 정존중(鄭存中) 등과 이조 참의 조윤대(曺允大) 등과 전 집의 이언호(李彦祜) 등과 전 교리 이은모(李殷模) 등과 전 감찰 강극성(姜克成)이 상소하니, 모두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이어 병조와 한성부에 신칙하여 경재(卿宰)들을 대궐 밖에 있지 못하게 하였다.
이갑(李𡊠)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재학(李在學)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명식(李命植)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2월 17일 정사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고 전교하기를,
"조화(造化)하는 권한은 상 주고 벌 주는[威福] 것뿐인데, 해서 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요령을 얻은 뒤에야 비로소 위복이란 두 글자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의 처분도 어찌 의견이 달라 서로 일치하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겠는가마는 원래 나 스스로 재량하여 선택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내린 분부를 힘써 거두어들이면서 여러 사람들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결과 한갓 조정의 분위기만 나날이 동요시켜 하루하루를 이런 식으로만 넘기게 한다면 이는 조정에서 먼저 성실하지 못한 것으로 여러 신하를 인도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비록 부덕하지만 잘못하여 이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대저 공벽(拱璧)258) 을 받들 듯이 해야 하는 것이 경(經)이요, 강하(江河)를 무너뜨리듯이 하는 것이 권(權)이니, 권의 뜻이야말로 오늘 시험삼아 쓰기에 적합하다. 구구하게 까다로움을 부려 겉모습에 구애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세 가지 처분 가운데 예장(禮葬) 한 조목으로 말하면, 비록 무고한 대신의 경우라도 그 집에서는 받지 않으려 할 것이지만 이 예를 써서 대신 보낸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 김우진(金宇鎭)을 석방하게 한 일로 말하면, 끝내 무턱대고 한 듯한 인상이 드는데 겁을 주면서 시행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범하지도 않아 아무 탈도 없는 사람에게 손상을 끼치는 자료가 되게 할 따름이니 조정의 입장에서 올바른 계책이라고 할 수가 없다. 우진을 잡아오는 일은, 특별히 양사(兩司)의 요청을 허락하여 사람들에게 왕법(王法)의 무거움과 공의(公議)가 있음을 보여주도록 하겠다. 우진의 체포를 명한 이상, 죄명을 씻어주라고 한 것은 자연 없었던 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14일에 내린 비망기(備忘記)는 철회하지 않더라도 철회한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이를 또한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잘 알아두도록 하게 하라.
내가 늘 생각하는 것은 체모(體貌)와 기강(紀綱)에 대한 문제이다. 비록 처벌하여 파직하였으나 하교의 내용을 고치도록 명한 뒤이니 하필 다시 등급을 둘 것이 있겠는가. 세 대신이 아뢴 데 대한 비답과 상소에 대한 비답 가운데 체직과 면직이란 말을 삭제한 뒤 안심하고 성에 들어와 집으로 돌아가게끔 전유(傳諭)하라. 대신을 이미 용서한 이상 작은 관원들이 격식에 어두운 것이야 책망할 것도 없다. 시종 3품 이하 파직한 사람들도 역시 분간해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진신(搢紳)들이 연명으로 상소했을 때 3품 이하로 상소에 참여한 자들에 대하여 외람되다 하여 파직을 명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상하가 서로 버티는 것이야말로 불성실하게 아랫사람을 인도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이 명을 내리는 것이다."
하였다. 승지 임제원(林濟遠)이 나아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김상철(金尙喆)의 예장과 관련해 하교하시면서 ‘비록 무고한 대신의 경우라도 그 집에서는 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고 하셨으니, 이는 지금 역적 상철을 무고한 대신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또 우진의 일에 대해서는 ‘습속(習俗)이 각박하고 가혹하다.’ 하시고, 또 ‘기회를 보아서 공격한다.’ 하셨으니, 이는 역적을 토죄하는 대의(大義)를 각박하고 가혹하게 기회를 보아서 공격하는 죄로 돌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런 어구는 바깥 조정의 경악과 의혹을 부를 듯합니다."
하니, 상이 각박하다느니 공격한다느니 하는 등의 구절을 없애도록 명하였다. 승지와 삼사의 여러 신하가 한 목소리로 장례 물품을 대신 보내도록 한 명을 거두기를 청하며 쟁집해 마지않으니, 전교하기를,
"보낸 지가 이미 오래되어서 이미 사용했을텐데 그 물건을 어찌 도로 빼앗아 올 수 있는가. 이처럼 성실하지 못한 말은 내가 듣고 싶지 않다."
하고, 이어 여러 대간들을 삭직하고 승지 이형원(李亨元)·이재학(李在學)을 유배하도록 명하였다가 곧이어 용서하였다.
봉조하 정존겸(鄭存謙)과 전 영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과 관학 유생 이계원(李啓遠) 등이 상소하여, 장례 물품을 대송(代送)하게 한 하교를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승지 서매수(徐邁修)·이만수(李晩秀)·심환지(沈煥之)·서영보(徐榮輔)가 연계(聯啓)하여 김상철의 장례 물품을 대송하게 한 명령을 철회하기를 청하니, 그들을 파직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에 처분을 내리기 전에 밀지(密旨)를 내려 도사(都事)를 발송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일이 구차스러운 데에 가깝기 때문에 곧바로 놓아보내도록 명하였으나, 공의(公議)가 이와 같으니, 애써 내 뜻을 굽혀 왕법(王法)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조연(朝筵)에서 비망기를 비록 거두었지만, 그 도정(道程)을 따져보면, 오늘이 바로 도사가 바람을 기다려 바닷길에 오르는 날이다. 그러니 하필 다시 도사를 보낼 것이 있겠는가. 곧 왕부(王府)259) 로 하여금 비밀 공문을 도사가 있는 곳에 보내 서둘러 잡아오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도사를 보낼 때 의금부를 통하지 않았었는데 의금부가 장차 도사를 보내자고 요청했기 때문에 이런 전교가 있었던 것이다.
12월 18일 무오
북관(北關)의 여러 고을과 관서(關西)의 진휼할 고을의 수령들은 맥추(麥秋)260) 때까지 자리를 옮기지 못하게 하고, 남도(南道)의 진휼할 고을 수령들에게도 휴가를 허락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충청도 수군 절도사 김명우(金明遇)가 장계로 아뢰기를,
"수군 우후 김수기(金守基)가 첩보(牒報)를 올리기를 ‘낯선 배가 홍주(洪州) 지역에 표류해 왔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서 글로 물으니, 답하기를 「청나라 산동(山東) 등주부(登州府) 복산현(福山縣)의 백성인 선호(船戶) 안영화(安永和)로서 봉천성(奉天省)의 세곡(稅穀)을 한 차례 실어 나르러 산동으로 가는 길인데, 이는 약속한 양객(糧客)261) 이 산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험한 바람을 만나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데, 현재 선표(船票) 한 권이 있으니 증명할 수 있다.」 하면서, 주머니 속에서 표문(票文) 한 장과 명록(明錄) 한 장을 꺼내 보였습니다. 제출한 표문은 인쇄한 것이었는데, 글씨 획이 흐릿해서 한 자 한 자 자세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 첫머리의 글씨에 「등주부 복산현 정당(正堂) 가오급(加五給) 기록 십행 황(紀錄十行黃)……」 하였고, 끝에는 「선호 안영화, 선공(船工) 안복(安復)과 양수(梁手)262) 등 합계 15인임. 건륭(乾隆) 56년 2월 15일 선호 안영화에게 지급함.」이라 하였습니다. 표문의 윗부분에는 여섯 곳에 도장을 찍고, 작은 종이 여섯 조목을 풀로 붙였는데, 각기 그 종이에 쓰기를 「건륭 56년 3월 29일에 빈 배로 지부(芝罘) 포구를 나갔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사를 마치고나서 묻기를 「이 표문의 인쇄한 글자를 보니 먹물 획이 마모되어 자세하지 않은 곳이 많다. 글자마다 너희들이 손으로 자세히 써서 보여라.」고 하니, 답하기를 「이 표문은 산동 제남부(濟南府) 무태(撫台)의 지시를 받아 배를 운행한다는 것인데, 해가 여러 번 바뀌는 바람에 표문의 글씨 획이 분명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너희들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봉천성에서 배를 띄웠느냐?」 하니, 답하기를 「이번 11월 23일 유시(酉時)에 봉천성 영해현(寧海縣) 해구(海口)에서 출발했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너희들이 봉성(奉省)이라 쓰기도 하고 봉천성(奉天省)이라 쓰기도 하니, 어째서 서로 틀리느냐?」 하니, 답하기를 「봉성이나 봉천성이 모두 같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배에 탄 사람이 모두 몇 명인가?」 하니, 답하기를 「배를 부리는 사람 16인과 배에 따라온 여행객 4인과 여자 1인이 있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여자는 어째서 배에 태웠는가?」 하니, 답하기를 「이 여자는 시댁이 복산현(福山縣)에 있는데, 배 다른 형이 그녀를 복산현에 보내 성가(成家)시키려고 해서 따라온 것이다. 표문에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우리 나라의 규례(規例)가 그렇다. 이 여자는 나의 외종질녀(外從姪女)이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너희들의 표문에 기록된 명단 가운데 빠진 나그네 4명은 어느 곳에 살고, 무슨 일로 배에 탔느냐?」 하니, 답하기를 「행객(行客) 4명은 모두 동향의 친한 사람들로서 봉천성에서 무역하다가 본성의 배편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탔기 때문에 표문에 기록되지 않았다. 모수원(牟壽元)·모백학(牟白學) 2명은 복산현 사람이고, 우화국(于華國)·전당일(典當一)은 산동 영해현(寧海縣)과 복산현의 옆에 있는 현에 산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행객 4명은 무슨 물건을 무역하느냐?」 하니, 답하기를 「모두 양객(糧客)과 관련을 맺고 배를 따라다니는데, 잡곡이 모두 배 위에 있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너희들이 큰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여러 날 표류하는 가운데, 모두 별고가 없었느냐?」 하니, 답하기를 「요행히 신성(神聖)의 보호를 입어 키[舵]와 큰 돛이 손상되지 않아 상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너희 배 안에 세곡(稅穀) 이외에 또 다른 물건이 있느냐?」 하니, 답하기를 「자잘한 물건들이 약간 있으나, 이는 배에 따라온 행객들이 몸에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고 별로 다른 물건은 없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배 위의 기구들이 손상되지 않았느냐?」 하니, 답하기를 「앞의 돛이 부러졌고 큰 닻이 없어졌으며, 1정(頂)의 작은 닻이 없어졌고 2정·3정의 닻의 정람(丁纜)263) 이 모두 없어졌으며, 싣고 있던 양곡도 많이 내버렸는데, 누각 2개도 모두 무너졌으나 별로 손상된 것은 없다. 바라건대 어른께서 도구를 두루 갖춰주면 신년을 지내고 우리들은 배를 타고 집에 돌아가고 싶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새해까지 늦게 기다리느냐?」 하니, 답하기를 「올해는 얼음이 언데다가 동남풍이 매우 적어 돌아가기 어려우니, 반드시 내년 봄 3월이 지난 뒤에야 돌아갈 수 있겠다. 그런데 나 한 사람만 물길로 돌아가기를 바랄 뿐 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는데 나도 어쩔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등주부 복산현에서 황성(皇城)까지는 몇 리인가?」 하니, 답하기를 「1천 8백 리를 가면 등주부의 성에 도착한다.」 하였습니다.
각 사람의 차림새를 보건대 모두 머리를 깎고 머리 윗쪽의 모발을 약간 뒤로 당겨 묶었으며, 머리에는 전마아락(氈麽兒絡)을 쓰고 몸에는 모구(毛裘)를 입었는데, 혹은 짧은 소매 모양을 하기도 하고 전복(戰服)같은 모양이기도 하였습니다. 밖은 검은 세올[黑三升]이었고 안은 양피(羊皮)와 산양피(山羊皮)를 댔으며 모두 단추로 서로 연결하였는데 은이나 구슬이나 상아였습니다. 바지도 모두 검은 세올이었고 발에는 검은 세올 신을 신었는데 혹 누비로 만든 청흑 신발을 신기도 하고 비단 주머니를 차기도 했습니다. 여자는 귀에 은고리를 달고, 상의는 붉은 세올의 반저고리 둘을 입고, 또 붉은 세올의 겉옷을 입고, 또 검은 세올의 좁은 소매옷을 입었으며, 아래는 초록색의 좁은 바지와 다홍빛 세올 행전(行纏)을 차고, 발에는 비단 꽃무늬 신발을 신었습니다. 머리는 이마 양쪽의 머리카락을 뒤로 당겨 묶었고, 그 윗머리카락은 다시 묶어서 모두 뒤로 늘어뜨렸습니다.
배는 뱃머리에서 배의 후미까지 한복판에 판옥(板屋)이 있어 위 아래를 덮었으며, 그 편액에는 「순풍상송(順風相送)」이란 글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불상(佛像)을 그린 한 장의 종이가 붙어 있었고, 좌우의 판벽(板壁)과 선폭(船幅)을 붙인 곳에는 유회(油灰)로 발랐습니다. 이른바 창합구(倉盒口)는 판옥에 이어 아홉 칸으로 되어 있는데 매 한 칸의 길이와 넓이는 각기 반 파(把)였으며 각기 그 창고 안에 산도미(山稻米)·당미(糖米)·이모미(耳牟米)·목맥(木麥) 등 곡식이 포대에 들어차 가득 실려 있었으므로 수삼 일 안에는 모두 점검할 수가 없었습니다.
배의 길이는 15파(把)이고 넓이는 4파인데 모두 쇠못을 썼으며, 둘째 칸에는 쇠로 만든 솥을 두 개 고정시켜 놓았고, 셋째 칸에는 특별히 회를 발라서 물창고를 만들어 물을 채웠습니다. 앞 돛의 막대는 11파인데 이번에 바람을 만나 표류할 때 중간이 부러졌고, 가운데 돛의 막대는 9파이고 뒤의 돛의 막대는 5파인데 모두 백목(白木)의 돛을 쓰고 있었습니다.
판옥 속에는 책이 보자기에 쌓여 있었는데, 《나경해정(羅經解定)》 4권·《영화집(英華集)》 1권·《입반구(入泮彀)》 1권·《금함옥책(金函玉冊)》 1권·《가취서(嫁娶書)》 1권·《십이월화갑전서(十二月花甲全書)》 1권·《고취풍아(鼓吹風雅)》 1권·《정선수조길일(精選修造吉日)》 1권·《회시원괴권(會試元魁卷)》 1권·《징회원과고(澄懷園課稿)》 제1책 1권·《반구영금학필독(泮彀英今學必讀)》 1권·《성유문수(聖諭文修)》 1권·《연석만언교화천하(衍釋萬言敎化天下)》 1권이었습니다.
배에서 쓰는 도구와 판옥의 새끼줄 그리고 물 긷는 작은 배 한 척은 모두 우리 나라 배의 제도와 같았습니다. 닻을 묶은 새끼줄·용층색(龍層索)·도입색(倒入索)·지색(旨索) 등이 혹 검고 혹 희기에 재료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종려나무 가죽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면화를 담는 바구니 두 개에 실려 있는 물건들은 모두 장사하는 밑천거리였습니다. 처음에는 서로들 본도(本島) 초막(草幕)에 묵더니, 지금은 배에 실린 곡물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모두 육지로 내려오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장졸과 아전을 정해 특별히 단속토록 하였습니다. 서울의 역관을 내려보내 그 실정을 좀더 자세히 물었으면 합니다.’ 하였습니다. 삼가 조정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였는데, 그들의 소원대로 육로를 통해 봉성(鳳城)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12월 19일 기미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행실을 닦은 선비들을 대상으로 현재 널리 공론을 모으고 있다고 치계하니, 전교하기를,
"열 집이 있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는 법인데, 면적이 천 리나 되고 백 개의 고을이 있는 지방에 어찌 한 명도 행실을 삼가고 자신을 닦는 선비가 없겠는가. 그런데도 성심(誠心)으로 도움을 바라고 있는 터에 보고 들은 것이 두루하지 못하다는 핑계를 대어 ‘기한에 구애받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감히 어렵지 않게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면서 이런 장계를 올리다니 당초 내린 윤음(綸音)을 한 장의 휴지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도백의 하는 짓이 경악스러울 뿐만이 아니다. 처음에는 곧 의금부에 내려 명을 거역한 법을 시행하고자 했으나, 잡아오고 바꿔 보내는 사이에 해가 또 바뀔 것이고, 해가 바뀐 뒤에는 바로 식년(式年)으로 마땅히 천거해야 할 해이니, 특별히 인재를 찾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본도는 다른 도와는 달라 풍속은 추로지향(鄒魯之鄕)264) 이라 불리우고 내력(來歷)은 모든 사람이 아는 바이다. 참으로 이른바 끼리끼리 모여 사는 지역이니 일단 찾는다면 찾지 못할 탄식이 없을 것이고 한 고을의 논의를 보아 얻기만 하면 될 것인데, 감히 늦추어 모면하기를 바라니, 내가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장차 무슨 면목으로 돌아와 내 앞에 설 것인가. 먼저 월봉(越俸)의 벌을 시행해 영남 70고을의 사람들에게 조정의 고심(苦心)을 알게 하라.
영남 지방이 이러니 다른 도는 미루어 알 만하다. 만약 혹시라도 연말 이후로 늦추는 자는 영남 도백의 예에 따라 월봉하라. 이와 함께 묘당으로 하여금 팔도의 도백을 신칙하여 비록 제석(除夕)에 봉발(封發)265) 하더라도 올해를 넘기지 않게 하라. 조정은 사방(四方)의 모범이 되는 곳이다. 인재를 초선(抄選)하라는 명을 내린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즉시 공의(公議)를 널리 모아 반드시 올해 안에 거행할 일을 정부에 이르라. 그리하여 온 세상으로 하여금 조정에서 정학(正學)을 크게 권장해 인재(人才)를 육성하는 동시에 처음 말한 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본의를 분명히 알게 하라."
하였다.
어제(御題)를 내려 성균관 유생을 시험보이고, 경상(卿相)의 자제들과 시임 음관(時任蔭官)들을 신칙해 모두 글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12월 20일 경신
춘당대에 나아가 선전관의 사강(射講)을 거행하고, 꿩을 구워 여러 신하들에게 먹였다. 전교하였다.
"효종(孝宗) 때부터 응사(鷹師)의 공물(貢物)에 꿩을 올리는 법이 있는데, 매해 말에 시강(試講)에 참여하는 선전관에게는 철창(鐵槍) 하나를 주고 그 앞에서 꿩을 구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고사(故事)이다."
12월 21일 신유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22일 임술
명광문(明光門)에 거둥하여 초계 문신과 선전관의 총 점수를 계산하여 상전(賞典)을 시행하고, 응제(應製)에 합격한 유생들의 시험을 보였다. 전교하기를,
"요즈음 풍속이 전례에만 따라 답습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사람을 등용하는 것도 한 명의 정리(政吏)면 족할 텐데 격양(激揚)시킬 것이 뭐가 있겠으며 인재를 시취(試取)하는 것도 한 명의 시관(試官)이면 될 텐데 조화(造化)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출신(出身)하지 못한 유생들도 감히 조정 벼슬아치들의 허물을 본받아 고질적 폐단이 습속이 되고 말았다. 성균관의 응제(應製)가 바로 그런 일 중의 하나이다. 과거(科擧)로 출신하는 시제(試製)에는 염치를 내팽개치면서도, 이 이하의 경우는 비록 어제(御題)를 내리거나 임금이 직접 시험을 보일 때에도 막중한 체면을 돌보지 않은 채 모두 다 편안히 모면할 생각만 하니, 일의 놀랍고 통탄스러움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옛날 성대하던 때에는 사운 율시(四韻律詩)로 대과 급제를 내리기도 했고, 또 혹 성균관 유생들에게 자주 시험을 보여 모든 유생들에게 급제를 주기도 했으며, 혹 특별히 생원 진사를 전시에 곧바로 응시하게 하기도 했던 것이다.
어제 이미 특교(特敎)로 성균관 유생들을 신칙하였고, 이제 또 직접 문에 나와 다시 시험하였으니, 장원한 사람에게 모름지기 특별한 처분을 내려야 명령이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표(表)에 장원한 참봉 신귀조(申龜朝)와 부(賦)에 장원한 채홍원(蔡弘遠)과 고시(古詩)에 두 번 상(上)을 받은 전 현감 신광하(申光河)에게 모두 특별히 대과 급제를 내리도록 하라. 그리고 그 중에 윤익렬(尹益烈)이 연이어 세 번 우등한 것은 삼장(三場)에 합격한 것과 다름이 없다. 문학(文學)과 정사(政事)가 비록 일치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백리(百里)266) 의 벼슬을 줄 때 문학을 한 사람을 빼놓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찾겠는가. 참봉 한 자리를 이미 마련해 두었으니, 해조로 하여금 구전(口傳)으로 뽑아 보내도록 하라. 그 다음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모두 점수를 부여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예문관에 명하여 여러 유생의 시권(試券)을 가져다 간행하여 올리도록 하고, 《경림문희록(瓊林聞喜錄)》이라 이름붙였다.
박우원(朴祐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호남에서 추천한 사람을 그날 바로 등용하도록 하였다. 도신이 식년(式年)마다 추천하게 되어 있는 3인 외에 특별히 2인을 추천하니, 상이 호남에서 가장 먼저 대정(大政) 전에 추천해 올린 것을 가상하게 여겨 이런 명을 내린 것이었다.
친히 도정(都政)267) 을 거행하였다. 【 이조 판서 오재순, 이조 참판 박우원, 참의 심환지, 병조 판서 서호수(徐浩修)가 참여하였다.】 이홍재(李洪載)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이익(金履翼)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허식(許侙)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운산(雲山) 등 열 고을에 봄이 되면 진휼을 실시할 것을 치계(馳啓)하니, 전교하기를,
"진휼 실시에 관한 장계를 보니, 백성들의 생활이 얼마나 곤궁한지를 알겠다. 바야흐로 봄철에 먹여 살릴 생각을 하니, 내 몸이 아파오는 것만 같다. 지금부터 진휼을 끝냈다는 보고가 오는 날까지 서북 지방을 돌보느라 어느 날이고 편안히 먹고 쉴 겨를이 없을 것이다. 이 하교를 듣고도 도백이 의례적으로 신칙하는 말로만 보거나 수령들이 제대로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조정에서는 자연 어사라는 호랑이를 보낼 것이다. 호랑이가 그 사람을 물지 않겠는가. 물리고나서 일을 망친 채 돌아오기보다는 잘 처리해서 나의 근심을 덜어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먼저 이 뜻을 묘당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헌납 김한동(金翰東)이 상소하여 영남에서 물난리를 당해 굶주리는 실상을 진달하고, 바쳐야 할 환곡을 정면(停免)268) 해 줄 것을 청하고, 다음으로 곡식 장부가 여러 곳에서 나와 각 고을 민곡(民穀)의 많고 적음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니 마땅히 균등하게 해야 한다고 아뢰고, 또 아뢰기를,
"무릇 간곡히 벼슬을 사양하는 이유는 혹 염치 때문이거나 혹 질병 때문이니 모두가 부득이한 것입니다. 글을 올렸을 때 반드시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할 말을 다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요즈음은 그렇지를 못하여 다른 말을 한 것이 있다고 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번번이 어디로 보나 모난 것이 없는 것 한두 가지를 억지로 첨부한 뒤에야 겨우 물리침을 당하지 않고 있으니 이 무슨 도리입니까. 이 뒤로는 상소하는 글은 긴요한가 안한가를 따지지 말고 모두 지체되게 하지 마소서."
하였다. 한동은 영남 사람이다. 비답하기를,
"환곡의 납부 기한을 물리는 일은 일찍이 조정이 명을 내려 몇 번이나 거듭 신칙했었다. 그런데 그대의 말이 이러하니 이는 도백과 수령의 죄이다. 수령이 부지런히 하지 않은 것을 제대로 살펴 신칙하지 않았으니, 이 어찌 도백의 입장에서 더욱 죄에다 죄를 덧붙인 것이 아니겠는가. 대저 환곡의 기한을 물리거나 대신 바치도록 가을부터 교서를 반복해 내린 것이야말로 미리 대비하는 정사를 부지런히 한 것이라 하겠는데, 명령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민간에 얼마나 많은 간악한 폐단이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첫째도 도백이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이고, 둘째도 도백이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그러나 해가 바뀔 때가 머지 않아 창고를 여는 것이 곧 있을 것이니, 지금에 와서 환곡의 수납 기한을 물리는 것은 논할 일이 못된다. 곡부를 균등하게 하는 일은 어찌 그대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여러 번 부지런히 신칙하였다.
삼사의 사직하는 상소와 관련하여 있을 만한 것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말도록 한 일은 비록 근례(近例)인 듯하지만, 그것은 선조(先朝) 때부터 규정을 마련해 분부를 받았던 것이니, 지금에 와서 논의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하였다.
12월 23일 계해
대신과 수령을 불러 보았다. 정언 이명연(李明淵)과 김달순(金達淳)에게 서경(署經)을 받기 전에 공무를 집행하라고 명한 뒤 불러보고 효유하기를,
"그대들은 처음 대성(臺省)에 올랐으니, 새로 수령에 임명될 사람 가운데 위의가 잘못된 자들을 규찰(糾察)하라."
하였다. 명연이 기린 찰방(麒麟察訪) 채지영(蔡趾永)과 고성 현령 임무원(林懋遠)은 추고하고, 양덕 현감(陽德縣監) 이윤길(李潤吉)은 개차(改差)하며, 횡성 현감 조운구(趙雲衢)와 한산 군수 정지덕(丁志德)은 파직하기를 청하니, 모두 허락하였다.
12월 24일 갑자
인정전에 나아가 기곡 대제(祈穀大祭)의 서계(誓戒)를 거행하였다.
전교하였다.
"듣건대 금위영과 어영청의 하번군(下番軍)이 호서군(湖西軍)이라 한다. 연말이 닥쳤는데 내일 군대에서 풀어 보내면 넉넉히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양식을 주어 보내어 부모 처자와 함께 새해 떡국을 배불리 먹게 하라."
송환덕(宋煥德)을 의릉 참봉(懿陵參奉)으로 삼았는데, 호서의 도백이 천거했기 때문이다. 전교하기를,
"천리마를 구하는 사람은 죽은 말의 뼈라도 천금을 아끼지 않는 법이다. 대저 호걸(豪傑)의 선비는 진실로 문왕(文王)을 기다리지 않고도 흥기하는 것이지만, 중인(中人) 이하는 모두 권장한 뒤에 일어나고 장려한 뒤에 고무되는 법이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흰 머리가 되도록 학문을 하는 것이 어찌 다만 그 뜻이 따뜻하게 살고 배불리 먹는 것에만 있겠는가. 그러나 스스로를 팔기를 부끄럽게 여기고 스스로 벼슬길을 찾는 것을 혐의롭게 여긴 나머지 어쩔 수 없이 산속에 살면서 풀부리를 캐 먹고 단지 공연히 늙어가는 대로 맡겨둘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진실로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그들을 초치하는 것은 조정에서 인재를 키우려는 뜻이 성실하냐 성실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지금 여러 도에서 천거해 올린 사람들이 꼭 모두들 대유 걸사(大儒傑士)는 아닐지라도, 그들이 읽은 것은 경전의 글이요 아는 것은 정(程)·주(朱)의 말이니, 점필(佔畢)269) 에만 빠져 있거나 공령(功令)270) 에만 빠진 무리들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클 뿐만이 아닐 것이다. 하물며 또 사경(邪經)이나 잡학(雜學)과 비교해보면, 양(陽)이 음(陰)에 대해서 중원(中原)이 이적(夷狄)에 대해서 과연 어떠한가. 그러니 조정에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등용하려 하는 것을 어찌 우활하다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호남에서 별도로 추천한 사람에 대해서도 당일로 거두어 쓰도록 했는데, 하물며 본도는 사대부의 고을이고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 또 유현(儒賢)의 후손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참봉의 자리를 마련해 의망하도록 하고 호남에서 특별히 천거된 사람과 함께 즉시 올려보내 입시하게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전조(銓曹)에서 송환기(宋煥箕)를 진산 현감(珍山縣監)으로 삼았으나, 환기가 부임하지 않았다. 경연의 신하들 가운데 새해 봄이 되기를 기다려 올라오게 하자고 아뢰는 사람이 있자, 전교하기를,
"이미 그가 나오려고 하는 것을 안 이상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하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이어 개차(改差)를 허락하였다.
12월 25일 을축
차대를 거행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경들이 일찍 오리라고 생각해서 나 역시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났다. 숙종조에는 매번 빈대(賓對)할 때마다 이른 새벽에 옷을 찾아 입으셨고, 선왕조 때는 차대를 할 때 간혹 전각에 일찍 나오지 않으신 경우가 있긴 하였으나, 치평(治平)을 이루신 50년 동안 걱정하고 근면하지 않으신 날이 없었으며, 무신년 이후로 병신년까지는 하루도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날이 없으셨으니, 이것이 우리 조정의 가법(家法)이다."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도정(都政)은 팔도에서 모두 눈을 씻고 주시하는 것인데, 신의 친지(親知) 가운데에는 한 명도 관모를 쓰고 사은(謝恩)한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수령 한 명이 있었으나, 그것도 대간의 논계로 파직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 급제한 사람들은 경의 아들과 친지들 가운데에서 나왔으니, 이는 어쩌면 승제(乘除)271) 의 이치인 듯하다."
하였다.
이조 판서 오재순(吳載純)과 병조 판서 서호수(徐浩修)를 파직하고, 이어 잡아다 문초하도록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조정을 유지시키는 것은 기강(紀綱)인데, 체통(體統)은 기강 가운데의 한 가지 일이다. 큰 관직이 비하되지 않아야 조정이 비하되지 않는 것이니, 이는 마치 실(室)과 당(堂)의 관계나 당과 폐(陛)의 관계와 같다. 체통이 존엄하여 기강이 서고 서로 질서를 어기지 않아야 조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흐릿하게 하려고 한다면 비록 그 실마리가 작더라도 그 유폐(流弊)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번 도목 정사는 명색이 친정(親政)인데도 초도(初度)272) 로부터 정본(正本)을 만들 때까지 애당초 한 글자도 연중(筵中)에서 정서(正書)한 적이 없으니, 이것이 과연 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던 일인가. 저 전장(銓長)들이 전례를 모르는 것은 진실로 책망할 것도 없거니와, 전부터 전해진 옛 법규가 이 두 전장들에서부터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전날 이미 이 문제를 들어 신칙하였는데도 연석에 올라 하는 행동거지가 이와 같으니, 사실(私室)에서의 처신은 더욱 적절함에 맞는 바가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대신의 집에 정사(政事)에 대해서 문의를 했는가를 알고자 하여, 어제 정원으로 하여금 알아보고 들이라 하였다. 이제 연석에서 대신에게 물으니, 이번 정사에서 대신에게 묻는 것을 판당(判堂)273) 은 물론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당(亞堂)274) 과 삼당(三堂)275) 도 역시 가지 않았다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기강이 무너짐이 이와 같다. 대신에게 정사에 대해 문의도 하지 않고서 도목 정사를 한다는 것은 옛날에도 듣지 못했고 요즘도 듣지 못했던 일이다. 이런 일을 범상하게 여겨 그냥 지나간다면 이 뒤로 누가 기꺼이 대신이 되어 하급 관료들에게 호령을 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결단코 일마다 너그럽게 용서할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이런 명령을 하였다. 또 차당(次堂)은 정석(政席)에서 수수방관했다 하여 이조의 아당과 삼당을 체직하도록 하고, 병조의 여러 당상은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성당창(聖堂倉)의 곡물을 조운(漕運)할 때 함열 현감(咸悅縣監)으로 하여금 배에 타고 그 운반을 통솔하도록 하고, 충청도 수군 우후로 하여금 원산(元山)에서 배를 점검하는 것을 격식으로 삼도록 권하니, 따랐다.
의금부가 오재순과 서호수 등의 공술을 받아 알리니, 전교하기를,
"남의 신하된 자들은 그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가짐을 더욱 낮추고 관직이 친밀할수록 뜻을 더욱 경건하게 가져야만 그 몸을 보존하고 집안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인정해주는 것이 조금만 지나치면 갖가지로 버릇없이 굴어 스스로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는 자가 매우 드물다. 이는 모두 조정에 글을 읽은 재상이 없기 때문인데, 그 한심스러움으로 말하면 지금 이 일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높은 관직의 중신(重臣)을 이미 파직하고 잡아다 문초한 것만도 무거운 법을 쓴 것이니, 이 법 이외에 특별히 더 죄줄 것이 없다. 그러니 허물로 돌려 석방해서 이 중신들과 이밖의 여러 신하들에게 나라에 기강이 있음을 조금이나마 알도록 하라."
하였다.
김문순(金文淳)을 이조 판서로,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이병모(李秉模)를 병조 판서로, 홍문관 제학 황승원(黃昇源)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철모(李喆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한광회(韓光會)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2월 26일 병인
철산(鐵山) 사람 이형복(李亨馥)의 아내 정씨(鄭氏)가 한 번에 2남 2녀를 낳으니, 원래 규정 이외에 특별히 곡식을 내렸다.
12월 27일 정묘
의주부 윤(義州府尹) 자리가 비었는데, 묘당에서 의논해 추천한 사람이 대부분 적임자가 아니었다. 상이 이는 사람을 추천하여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라고 책망하고, 폐단을 복구시킬 능력과 재물에 청렴한 사람을 예에 구애받지 말고 뽑아보내라고 명하였다. 광주부 윤(廣州府尹)인 정익조(鄭益祚)가 묘당의 추천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연한(年限)이 지났는데도 멋대로 부임하려 하자, 전교하기를,
"마땅히 청렴하게 하는 방도를 고려해야 한다."
하고, 체직하였다.
한성부가 조관(朝官)과 사서인(士庶人) 노인에게 연초에 자급을 올려주도록 아뢰니, 전교하기를,
"그 가운데 백 세가 된 노인은 뛰어올려 숭정 대부의 자급을 주고 중추부의 직함을 갖게 하라."
하였다.
12월 28일 무진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및 이조와 홍문관에 명하여 각기 경학(經學)을 하고 몸가짐을 신칙하는 선비를 추천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경연관을 초계(抄啓)하는 것은 옛날 융성하던 때에도 그 예가 매우 드물었고, 백도(白徒)276) 의 경우는 더욱 갑자기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는 비단 그 자리가 지극히 중요해서 일 뿐만이 아니고 관방(官方)이 본래 이렇기 때문인데, 이 뜻은 이미 하교를 하였다. 그러나 경행(經行)277) 으로 천거하는 격식의 경우는 그에 해당되는 자의 입장이 경연관처럼 나오기 어렵지 않으니, 과거를 보고 벼슬살이를 한 것도 모두 구애될 것이 없고, 내직으로 시험하건 외직으로 시험하건 족히 실다운 정치를 할 것이며, 그 천거하는 사람의 많고 적음도 일정한 격식을 둘 것이 없다. 이번에는 경술(經術)에 마음을 두거나 몸가짐을 닦아 처신을 잘하는 것 모두를 꼭 갖추도록 할 것이 없으니, 비록 한 가지 능력만 있더라도 그대들이 아는 바를 각각 한두 사람씩 천거하라."
하였다.
동몽 교관(童蒙敎官) 이성보(李城輔)를 경연관으로 삼았다. 의정부와 이조에서 추천했기 때문이다.
12월 29일 기사
친히 기곡 대제(祈穀大祭)의 향축(香祝)을 점검하였다.
경모궁에 전배하였다.
이조 참의 심환지(沈煥之)를 잉임(仍任)시켰다.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탐욕스러운 관리들을 마땅히 논죄하고, 환곡을 많은 곳에서 덜어 적은 곳에 주는 정사와 관련, 우선 가을까지 기다려 받게 하고, 구황(救荒)은 비장들을 나누어 보내 곡물을 나누어 주게 하라.’는 뜻으로 치계하니, 회유(回諭)하기를,
"한갓 법만으로는 스스로 시행되지 않는 것이니, 말만으로 어찌 효험이 스스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 이 장계의 글을 보니 늘어놓은 문장이 진실로 번드르르한데, 내 뜻에 부응하는 실제 효과도 과연 그런가? 만약 말이 실제 효과보다 지나치다면, 이는 경이 조정을 속이는 것이다. 경이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기야 하겠는가. 혹 아니라면 도내의 오래 묵은 폐단을 시원히 제거해 백성들이 삶을 즐기게 된 나머지 경내에 들어가면 괄목할 만한 볼거리가 있는 것인가? 대저 다른 읍을 우선 논할 것은 없지만 비록 사재(私財)로 구휼하는 몇 고을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미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또 들으니 본도의 약간 읍에 향임(鄕任)을 뽑아보내 그 영내를 거느리게 하고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한 일에 대해 연신(筵臣)이 그 처사가 합당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는데, 이 역시 꼭 그렇지만은 않은 점이 있다. 이는 백성을 무마하는 것이 마땅함을 잃어서 한갓 억지로 묶어두는 정치를 일삼는 것이다. 아, 저 하소연할 곳이 없는 자들이 위로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아래로 도망쳐 숨지도 못하면서 세금 재촉에 시달리고 굶주림과 추위에 쫓긴 나머지 장차 그 속에서 죽어 나뒹구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아득한 천리 밖의 일을 조정에서 명백히 알 수는 없으나 연전에 유민(流民)들을 쇄환(刷還)한 일이야말로 한갓 가혹한 정사가 되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밤중에 이를 생각하다가 곧장 분명히 말해주고 싶었다. 경이 만약 밤낮으로 부지런히 걱정하는 나를 생각한다면, 한 순간이나마 소홀히 하고자 한들 될 수 있겠는가. 진휼할 고을에 대한 관심이 이러하니, 이밖의 다른 고을에 대해서는 각별히 손쓰는 바가 없이 예전처럼 여전하리라는 것을 알기 어렵지 않다. 대저 서쪽 지방의 여러 고을에 대해 한해 두해 차례로 크게 경장(更張)하고 크게 징계하여 수령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게 한 뒤에야 서쪽을 돌아보며 걱정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을 것이다. 경은 이를 잘 알아두도록 하라."
하였다.
향천(鄕薦)된 관동(關東)의 윤사진(尹思進)과 관서(關西)의 강규(康逵)·최규현(崔奎顯) 등이 지은 글을 봉해 올리고, 해서(海西)의 이풍림(李豊林) 등을 초사(初仕)에 의망(擬望)해 들이도록 명하였다.
12월 30일 경오
상이 사직서(社稷署)에 가서 재숙(齋宿)하였다.
진안 현감(鎭安縣監) 윤영희(尹永僖)가 의리를 들어 부임하지 않으니, 다시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에 보임하였다. 이에 이르러 임지에 도착한 것을 감사가 아뢰니, 전교하기를,
"그와 거취를 함께 하게 하라는 말을 이미 전에 말한 바가 있으니, 전 대교 심상규(沈象奎)와 전 검열 홍낙유(洪樂游)·서유문(徐有聞)을 서용(敍用)하고, 오수 찰방(獒樹察訪) 이중련(李重蓮)을 다시 한림에 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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