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4권, 정조 16년 1792년 1월

싸라리리 2025. 8. 5.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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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신미

상이 사직단에 농사가 잘 되기를 빌고, 이어서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열조(列朝)의 책보(冊寶)를 봉심(奉審)하였다. 전교하기를,
"3년 전에 이미 봉심하였으니, 너무 자주 펴보는 것이 도리어 번독스러울까 염려된다. 금년에는 다만 밖에서만 봉심하겠다."
하였다. 돈화문(敦化門)에 이르러 정조 호장(正朝戶長)을 불러 보고는 하교하기를,
"만약 읍에 폐단이 있으면 써서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농사를 장려하는 윤음을 내렸다.
"정월 원조(元朝)가 마침 상신일(上辛日)이기에 삼가 사직단에 나아가 농사가 잘되기를 비는 제사를 거행하였다. 상신일이 원조에 당하여 몸소 제사를 지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성대하고 잦은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축원은 어느 해인들 하지 않겠는가마는, 이해 이날 이 축원은 어느 해보다 갑절 더 간절하다.
대저 농사가 풍년이 드는 것은 오로지 농정(農政)의 권면에 달려 있다. 아, 너희 여러 도의 방백(方伯)으로 있는 신하가 만약 원조(元朝)에 농사가 잘 되기를 비는 내 마음처럼 마음을 갖는다면 비록 조금이나마 소홀히 하고자 하더라도 그럴 수 있겠는가. 반 걸음을 걸을 때에도 이를 생각하고 먹고 쉴 때에도 이를 생각하여 내가 거듭 유시하는 지극한 뜻에 부합토록 하라."

 

해조가 친경(親耕)과 선농제(先農祭)를 행할 것을 품의하니, 하교하기를,
"밤낮없이 정성을 다하여 오늘 사직단에 농사가 잘 되기를 빌었고, 지금부터 추수할 때까지 마음속으로 묵묵히 풍년을 축원하지 않을 때가 없을 것이니, 어찌 친경하는 것과 차등이 있겠는가. 금년에는 선농제만을 거행하겠다."
하였다.

 

1월 2일 임신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세수 호궤(歲首犒饋)001)  를 거행하였다.

 

역마로 경연관 이성보(李城輔)를 부르고는 전교하기를,
"옛사람은 경전(經傳)을 다반(茶飯)으로 여기고 명의(名義)를 고기[蒭豢]로 여겼는데, 지금 사람은 예의를 버리고 이욕(利欲)을 멋대로 부려 우리 도(道)는 외로워지고 이단(異端)은 치성해지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마치 불이 타오르는 듯 물이 범람하는 듯하다. 내 눈으로 독서하는 선비와 행실을 닦는 사람을 오랫 동안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너무 높은 데서만 구하여 그렇겠는가. 또 생각해보건대, 비록 수준을 낮추어 구하더라도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처럼 찾기 어려우니, 이는 다름이 아니다. 부흥시키고 권면하는 방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 금일 불러오게 한 것은 바로 먼저 곽외(郭隗)로부터 시작한다는 뜻이다002)  ."
하였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권엄(權𧟓)이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삼가 유지(有旨)를 받아 경내(境內)에 반포하니, 뜰에 가득한 선비, 향임과 아전, 교졸(校卒)들이 춤을 추고 가까운 마을이나 먼 지방에서 손모아 축원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거주하고 있는 자는 목숨을 바쳐 떠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고 떠난 자는 불러들이면 도로 모이려는 바람이 있습니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북쪽에서 옮겨온 40, 50명의 백성들이 와서 고하기를, ‘아무 지방에 비어 있는 옥토(沃土)가 있으니 개간하도록 허락해주고 세금과 부역을 감면해주면 스스로 한 마을을 이루어 강계의 백성이 되겠으며 일가 이웃 수십 호도 봄이 지난 뒤에 또한 불러오겠다.’고 하기에, 신이 3년 동안 부역을 감면해주고 나중에 오는 북쪽 백성들도 똑같은 예로 정식을 삼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소문을 듣고 오는 자가 많이 있을 듯합니다.
대저 강계의 백성들은 삼(蔘)을 캐는 데 고달플 뿐만이 아닙니다. 근년에는 삼 종자[蔘種]도 점점 드물어져서 캐는 것으로는 공납하는 수량을 충당하지 못하므로 돈을 걷어 사가지고 공납하는 것이 어느새 읍의 준례가 되었습니다. 돈을 걷을 때에는 번번이 도망치는 집이 나오고 도망치는 집이 나오면 이웃과 일가에게 징수하니, 이것이 가난한 자나 부자나 고루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매년마다 30근으로 정하면 이 정도는 캐지 못할 리가 없을 듯하니, 10년 내에 거의 돈을 걷느라 백성을 소란스럽게 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장계를 보건대, 떠난 자는 오고자 하고 간 자는 돌아오려고 한다 하였으니, 오늘은 바로 새해 이튿날인데 이런 날에 이러한 장계를 보니 신년 제일의 희소식이라 하겠다. 이후로 지방을 맡고 있는 신하들은 성심으로 불러오게 하여, 이달에 한 촌락이 모이게 하고 다음달에 한 마을이 모이게 하며, 금번에 몇 백 호의 신적(新籍)을 첨가하고 다음 번에 몇 천 호의 가록(加錄)을 더하며, 세금을 더욱 감면하여 인구가 더욱 증가하게 하고, 들에는 개간하지 않은 땅이 없고 집집마다 풍부한 재산이 있어 위로 부모를 섬길 수 있고 아래로 처자를 기를 수 있으며 생활을 즐기고 직업을 편안하게 여긴다면, 비록 몰아내어 쫓더라도 다른 곳으로 가려는 마음이 없을 것이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몇년 동안 강계(江界) 백성을 위하여 노력한 본뜻이 그 효과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열 줄의 별유(別諭)를 강계부의 입춘첩(立春帖)으로 사용하라. 묘당에 말하여 입춘일에 맞추어 행회(行會)하여서 해당 군수로 하여금 공당(公堂)의 문설주에 부치고 부내(府內)의 사민(士民)들과 더불어 함께 대양(對揚)할 방도를 도모하도록 하라."
하였다.

 

특별히 승지 조진택(趙鎭宅)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임명하였다. 상이 진택에게 일렀다.
"너희 집은 교목세가(喬木世家)로서 불행히도 대대로 변고가 많아 이렇게까지 쇠퇴하였으니 내가 매우 민망스럽게 여긴다. 또 너희 집안에서 전후로 서읍(西邑)에 부임한 자는 모두 일을 망치는 것을 면치 못했으니, 이는 너희 집안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조정에 수치를 끼침이 또한 어떠하였겠는가. 지금 또 너를 서읍에 보내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이 마음을 체득하여 충정공(忠定公)003)  을 본보기로 삼고 밤낮으로 성의를 다하여 자신을 단속하고 공무를 봉행하도록 하라. 그리한다면 어찌 너희 한 집안의 수치를 씻을 뿐이겠는가. 조정에서 청렴을 권면하는 효과가 있게 되는 것이니, 이는 바로 네가 집안의 수치를 씻고 국가에 보답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이다."

 

양양(襄陽)과 정평(定平)에 도호부(都護府)의 호칭을 회복하였으니, 두 읍의 강호(降號) 기한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1월 4일 갑술

서호수(徐浩修)를 예문관 제학으로, 이치중(李致中)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권이강(權以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갑(李𡊠)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고성진(古城鎭) 첨사를 장용영(壯勇營) 자벽과(自辟窠)에 소속시켰다. 고성 첨사 서용보(徐龍輔)의 장계 요청을 따른 것이다.

 

묘당에 명하여 평양 감영에 가분(加分)할 적모(糴耗) 5천 석을 나누어 주어 진휼(賑恤)의 수용에 보충케 하였다. 본도(本道)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1월 5일 을해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와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를 중하게 추고하도록 명하고 파발마로 사찰(私札)을 전달하는 폐단을 금하도록 하였다.

 

1월 6일 병자

박우원(朴祐源)을 이조 참판으로, 정범조(丁範祖)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조윤대(曺允大)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정원이 【승지 홍명호(洪明浩)와 신기(申耆).】  아뢰었다.
"대각(臺閣)의 체제는 경솔하지 않고 엄중하여 징계에 관계된 일이면 본래 대청(臺廳)에 일제히 모여 논열해 아뢰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양사(兩司)는 징토(懲討)라 이름하고도 밖에서 연명으로 차자를 올렸으니, 대각의 체제를 어겼을 뿐만 아니라 불성실함이 막심합니다. 엄히 처분을 더하소서."

 

1월 7일 정축

충청도 오영장(五營將)을 삭탈 관직하고 엄히 곤장을 치라고 명하였다. 직산현(稷山縣)의 전패(殿牌)를 도적질한 죄인을 기한이 다 되도록 잡지 못했다는 전 도백(道伯) 박종악(朴宗岳)의 장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의(文義)에 사는 전 총관(摠管) 신의청(申義淸)과 공주(公州)에 사는 전 동지(同知) 이광춘(李光春) 부부에게 지방관으로 하여금 의복과 음식을 넉넉히 주도록 명하였다. 의청은 나이 1백 세이고, 광춘은 1백 1세이며 그 아내도 나이 1백 세라고 한다.

 

1월 8일 무인

전교하였다.
"원(園)에 행행(行幸)하는 모든 일에 경비를 많이 쓰고자 하지 않으니 모름지기 별도로 주선하고, 각영(各營)에서 어가(御駕)를 수행하는 보군(步軍)의 식량과 말 먹이에 대한 경비를 기획하는 방도는 묘당으로 하여금 병조 판서, 훈련 대장과 함께 의논하여 사리를 따져 초기(草記)하게 하라. 훈련 도감은 홍 봉조하(洪奉朝賀)가 삼군(三軍)을 위해 스스로 방역(防役)004)  에 대비했다는 것을 내가 어릴 때부터 익히 들었으므로 훈련 대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이 조목이든 다른 조목이든 간에 반드시 실제의 혜택이 아래 백성에게 미치도록 하라."

 

원행(園行)할 때 어가를 수행하는 백관과 대동하는 예속들에게 비변사에서 목표(木標)를 만들어 주되 신부(信符)를 만드는 예처럼 ‘비(備)’ 자의 도장을 주조해 낙인찍고, 각각 그 관청의 이름과 직명 및 위내(衛內)와 위외(衛外)를 써서 표지하라고 명하였다.

 

1월 11일 신사

윤대(輪對)를 하였다.

 

금년에 경재(卿宰)로서 나이 70이 된 자는 자급을 올려주고, 한 품계가 부족하여 기로소[耆社]에 들지 못한 자는 해조의 지사(知事)로 하여금 자리를 만들어 의망해 들여서 나이 많은 이를 존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도에 명하여 여제(厲祭)를 시행토록 하였다. 전교하였다.
"근일 듣건대 여러 도에 전염병[癘疫]이 아직까지도 그치지 않고 간혹 성한 곳이 있다고 하니, 농사를 시작할 이때를 당하여 백성들의 일을 생각함에 어찌 염려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여제에 쓸 향과 축문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각기 공손히 받아 시행하게 하라."

 

서울과 지방의 혼인과 장례 시기를 넘긴 자들을 구휼해주는 은전을 매년 네 번으로 나누어 정리해서 아뢰라고 명하였다.

 

1월 13일 계미

심풍지(沈豊之)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1월 14일 갑신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울진(蔚珍)에 사는 선비 윤사진(尹思進)의 저서를 올리니, 사진을 영동 교양관(嶺東敎養官)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사진의 이름을 듣고 도백(道伯)에게 명하여 그의 저서를 구하도록 하고 또 그를 불렀는데, 사진은 늙어서 올라오지 못하고 단지 그 저서만을 올렸다. 상이 그 저서를 보고 마침내 이 명령을 내렸고, 이어서 그 저서를 간행하도록 하였다.

 

1월 15일 을유

상이 영희전(永禧殿)과 경모궁(景慕宮)을 전알하였다. 이는 춘기(春期)의 알현이었다.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하였다.

 

박우원(朴祐源)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만수(李晩秀)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공명첩(空名帖) 4백 장을 평양 감영에 주어서 진휼(賑恤)에 필요한 물자를 보충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도의 제방을 수리하도록 신칙하였다.

 

충청도 관찰사에게 1백 1세 된 노인 이광춘(李光春)의 일가 자손을 상세히 문의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서울의 각사와 각영이 신해년005)  의 회계 문서를 올렸다. 호조의 양향청(糧餉廳)·선혜청(宣惠廳)과 병조의 훈련 도감·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에 현재 있는 물건은, 황금 3백 냥, 은 42만 1백 13냥, 돈[錢文] 84만 8천 3백 95냥, 명주[綿紬] 86동, 무명[綿布] 3천 5백 60동, 모시[苧布] 49동, 마포(麻布) 1천 3백 37동, 쌀 36만 3천 5백 52석, 좁쌀[田米] 1만 1천 2백 40석, 황두(黃豆) 5만 19석, 피잡곡(皮雜穀) 9천 석이었다.

 

1월 16일 병술

차대를 하였다.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인일제(人日製)와 춘도 기강제(春到記講製)를 거행하였다. 강(講)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 정종현(鄭宗顯)과 책문(策文)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 남공철(南公轍)과 조문(詔文)에서 수석을 차지한 생원 이홍달(李弘達)은 전시(殿試)에 직부(直赴)케 하였다.

 

서유대(徐有大)를 주사 대장(舟師大將)으로, 이형원(李亨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17일 정해

검교 직각(檢校直閣) 서영보(徐榮輔)와 과거에 급제한 유생 남공철(南公轍)을 불러 보았다. 공철에게 이르기를,
"네가 보양관(輔養官)006)  의 아들로서 지금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내 마음이 감격스럽다. 고 재상 서 문청공(徐文淸公)은 너의 아비와 더불어 같이 내가 어렸을 때의 스승이었는데, 네가 서영보와 동시에 조정에 서게 되었으니, 매우 귀한 일이다."
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남 보양관(南輔養官)은 내가 3살 때부터 수학(受學)하였는데 무릎 위에 앉히고 성심으로 가르쳤으니, 내가 문자에 처음으로 향방을 안 것은 바로 남 보양관이 훌륭히 가르친 공로였다. 선조(先朝)께서 여러 차례 총애를 더하여 자급(資級)을 올려주기까지 하였고 물러갈 나이가 되자 박 유선(朴諭善)007)  과 함께 아울러 치사(致仕)하도록 허락하였으며, 같은 날 대궐에 임하여 선마(宣麻)할 때에 두 소씨(疏氏)의 고사(故事)008)  를 인용하면서 어제(御製)와 어필(御筆)을 주고 미포(米布)와 주백(紬帛)을 많이 내려 주었다. 인하여 그날의 성대한 거조를 기록하여 책 하나로 만들어서 인쇄 반포하고 사고(史庫)에 소장하라 명하였으니, 이는 선조(先朝)의 특별한 은전이었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에 비록 그 자손을 보살피기는 하였으나 어찌 그 공로를 보답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다행히도 그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그 가문을 위해 다행스러움이 적지 않다. 고 정승 서지수(徐志修)는 바로 남 보양관(南輔養官)과 더불어 같은 때 보양관의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 손자가 과거에 급제하던 날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으니, 지금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 봉조하(故奉朝賀) 남유용(南有容)의 집에 검교 직각(檢校直閣) 서영보(徐榮輔)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짓겠다."
하고, 또 옷과 음식을 가지고 가서 그 부인의 안부를 물으라고 명하였다.

 

1월 18일 무자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오재순(吳載純)을 공조 판서로, 이경오(李敬五)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20일 경인

부수찬 김희순(金羲淳)이 상소하기를,
"수원부(水原府)의 새 고을인 수성(隋城)에서 과거를 시행하여 선비를 시험보인 것은 실로 우리 성상(聖上)께서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자기가 사는 곳을 편히 여기게 하려는 지극한 뜻에서였습니다. 선비로서 이 고을에 사는 자는 진실로 마땅히 은혜에 감격하여 집을 짓고 생업에 전념하여 성상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근래 듣건대, 선비의 풍습이 좋지 못하여 임시로 가서 머물러 있다가 과거가 지나면 즉시 돌아가는 무리들이 많이 있고, 집을 짓는다고 칭탁하고는 빌리거나 임차하여 있으며 가족을 데리고 온다 핑계하고는 잠시 갔다가 잠시 머문다 하니, 성실하지 못하기가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이처럼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감사와 지방관으로 하여금 각별히 조사해 적발하도록 하여 허실(虛實)이 서로 섞이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수원(水原)에 새로 유생(儒生)들을 초치하여 살게 하는 일에 과연 이런 문제가 있구나. 어찌 선비들에게 이러한 풍습이 있단 말인가. 제생(諸生)들에게 매우 큰 수치라고 여긴다. 경기 감사와 해부(該府)로 하여금 들어와선 안 되는데 들어온 자는 빼버리고 와서 살고 있는 성실치 못한 무리들은 권하고 타일러 돌려보내게 하라."
하였다.

 

1월 21일 신묘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였다.

 

정승 후보자를 심사하여, 【정존겸(鄭存謙)·홍낙성(洪樂性)·이복원(李福源)·유언호(兪彦鎬)에다 박종악(朴宗岳)을 가복(加卜)하였다.】 충청 감사 박종악을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상이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이르기를,
"질박함이 많고 문식(文飾)이 적은 자가 제일이며, 남을 해치거나 이기려고 하지 않은 뒤라야 영욕과 이욕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속담에 ‘지혜 있는 장수가 복 있는 장수만 못하다.’ 하였으니, 이 또한 격언(格言)이다. 비록 전례로 말하더라도 정승을 뽑을 때에 일찍이 자급(資級)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적격자를 뽑았으니, 반드시 숭록(崇祿)이나 숭정(崇政)의 자급에서 뽑을 필요가 없고 비록 자헌(資憲)이나 정헌(正憲)의 자급이라도 사람이 적합하면 구애될 필요가 없다. 내 뜻은 충청 감사에게 있다."
하니, 채제공이 마침내 가복(加卜)하여 들였다.

 

박천형(朴天衡)을 충청도 관찰사로, 김희(金憙)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우의정 박종악에게 유시하였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는 차치하고 멀리 삼대(三代)를 상고해보더라도 초야(草野)나 산속에 있는 사람을 정승으로 세운 일이 항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오로지 문벌과 명망이 있는 자를 채용하였으니, 정승을 구하는 방법이 중신(重臣)과 재신(宰臣) 중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밝은 지감(知鑑)이 없고 세상에는 공경하고 본받을 만한 사람이 드물어, 조심스럽고도 어렵게 여기고 거듭 정중히 처리하느라 세월을 끌어 좌의정으로 하여금 다년간 홀로 수고롭게 하였다. 이는 참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겠는가. 근일 좌의정이 동료 정승을 갖추자고 극력 진달함으로 인하여 금일 정승을 뽑는 일을 행하려고 하면서 내가 좌의정에게 이르기를 ‘내가 취하고자 하는 점은 네 가지가 있으니, 질박함이 많고 문식(文飾)이 적은 연후에 투박한 풍속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고, 글을 읽은 후라야 정치의 체제를 알 것이며, 남을 해치지 않고 이기려고 하지 않은 뒤라야 영욕과 이욕에 끌리지 않을 것이고, 복이 두터운 후라야 길상(吉祥)과 좋은 일을 불러올 것이다. 이 네 가지는 능한 사람이 많지 않으니, 능한 자가 있으면 내가 정승으로 결정하겠다.’ 하니, 좌의정도 또한 그렇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내가 경을 뽑고 이에 입시(入侍)한 사관(史官)을 보내어 내가 경을 뽑은 본래의 뜻을 먼저 유시하는 것이다."

 

다시 오재순(吳載純)에게 수어사(守禦使)를 제수하였다.

 

김상집(金尙集)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능은군(綾恩君) 구윤명(具允明)과 완림군(完林君) 이수인(李壽仁)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지 60년이 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옷감과 잔치에 드는 물품을 주도록 하였다.

 

1월 22일 임진

병조 판서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철릭[帖裏]은 본래 무관들의 의복이나, 선조(先朝) 경오년009)  에 무관이 직령(直領)을 입는 것을 금한 조항에 의거하여 거듭 밝혀 알리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법령은 오직 시행하여 오래 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무늬 있는 비단과 가체(加髢)010)  를 금지토록 한 것도 오히려 해이해질까 염려되어 거듭 엄하게 신칙하였는데 철릭[帖裏]에 관한 한 가지 일을 더하면 또한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무장(武將) 이하 문벌이 있는 무관들이 선조(先朝)의 하교(下敎)를 지키는 것은 괜찮겠지만 빈한(貧寒)한 자들에게까지 똑같이 금지법을 시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전교하였다.
"날씨가 이처럼 추운데 경기 지방의 척후(斥候)와 복병들을 모레 날이 밝은 후부터 배치하게 되었으니, 날짜를 따져 급료를 주는 것은 서울 군문(軍門)이 급료 없는 군사를 내다 쓰는 준례에 의하여 하되 다소 넉넉히 주고 패장(牌將)도 또한 계산하여 지급하라. 이후로는 법으로 정하여 시행하고 정례에 싣도록 하라. 교졸(校卒)의 수효는 지극히 적으니, 방한 도구 등은 관청에서 준비하도록 하라. 경기 감사로 하여금 각 지방관에 엄히 신칙하여 각자 머리에는 휘항(揮項)을 쓰고 몸에는 두터운 솜옷을 입게 하라."

 

1월 24일 갑오

상이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하는 도중 갈현(葛峴)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서 초상(軺床)에 앉아 마을 노점의 노인들을 불러서 고통스러운 일을 물어보았다.

 

수원부(水原府) 행궁(行宮)에 머물렀다. 강무당(講武堂)에 나아가 활로 과녁을 쏘았는데 한 차례에 두 개의 화살이 맞았고 중포(中布)011)  에는 한 차례에 세 개의 화살이 맞았다. 무장과 병조 판서에게 명하여 각각 한 차례씩 쏘라고 하였다.

 

1월 25일 을미

상이 현륭원을 배알하고 시신(侍臣)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가 풍수지리에 대해 비록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1백 리의 평야에 이러한 형국이 이루어졌으니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둘러싼 것과 조·대산(朝對山)의 밝고 수려한 모습은 비록 평범한 사람의 안목이라도 모두 알 수 있다. 이곳은 효종 때에 표시하여 둔 곳인데, 지금 원침(園寢)이 되었으니, 실로 하늘이 준 것이지 나의 힘이 아니다. 28년 동안 옛 능원(陵園)에 봉안하였다가 다행히도 천지 신명의 도움을 힘입어 내 마음에 여한이 없게 되었으니, 지난 일을 회상하면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하였다.

 

어진(御眞)을 현륭원의 재전(齋殿)에 봉안하였다. 이는 궁궐을 나올 때에 각신(閣臣)들을 명하여 먼저 가서 봉안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전교하기를,
"남향으로 봉안한 것이 참으로 좋지만 동편의 협실(挾室)에 서향(西向)으로 봉안한다면 능원을 첨앙하는 뜻에 있어서 더욱 정례(情禮)에 적합할 것이다."
하고, 또 능원의 관리에게 전교하기를,
"너희들은 각신(閣臣)과 더불어 입회하여 전봉(展奉)하는 것이 좋겠다. 전봉은 바로 전배(展拜)하는 것이니, 유독 너희들로 하여금 봉심(奉審)하는 절차를 익히게 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너희들은 이러한 뜻을 알라."
하였다.

 

중비(中批)로 수원 부사 김사목(金思穆)을 이조 판서로, 여주 목사 이경무(李敬懋)를 수원 부사로 삼았다.

 

득중정(得中亭)에 나아가 본부(本府)의 유생과 무사들을 시험보였다. 유생으로서 수석을 차지한 진사 임후상(任厚常)은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케 하고, 무사로서 삼중(三中)012)   이상은 곧바로 전시에 응시케 하였다.

 

1월 26일 병신

상이 궁궐로 돌아왔다.

 

어가가 사근현(沙斤峴)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잠시 쉴 때에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본래 가슴이 막히는 병이 있어 궁궐을 나올 때에 꽤 고통스러웠었는데, 이제 다행히도 배알하는 예를 마치고 나니 사모하는 마음이 다소 풀리어 가슴 막히는 증세도 따라서 조금 가라앉았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이 지역은 바로 수원의 경계이다. 말에서 내려 머무르며 경들을 불러 보는 것은 대저 나의 행차를 지연시키려는 뜻이다."
하고, 인하여 그 지역을 지지대(遲遲臺)라고 명명(命名)하였다. 노량진에 이르러 망해정(望海亭)에 나아가 금군(禁軍)의 기마병이 먼저 강을 건너가 북쪽 기슭 양편에 배열하여 서라고 명하고, 이어서 선전관에게 명하여 신전(信箭)을 가지고 여러 군사들을 지휘하여 차례로 다리를 건너게 하니, 대오(隊伍)가 정숙하여 감히 이리저리 흩어지거나 뒤지거나 앞서는 자가 없었다. 근신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전일 선창(船艙)을 설치할 때에는 걸핏하면 수만 금을 허비했었는데, 배다리[舟橋]를 설치한 뒤로는 수백 금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대단하게 비용을 줄인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원행(園幸)의 연로(輦路)에 있는 각읍의 농부와 민가에 특별히 금년 가을 환자 모곡을 면제해주라 명하고는 전교하기를,
"행차시 1백 리나 되는 연로(輦路)가 숫돌과 같이 평평하고 화살과 같이 곧아서 길닦는 공력을 허비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농부들이 노력을 들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겨울과 봄의 큰 눈이 내린 뒤였음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방관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효유(曉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언(上言) 1백 29 통을 판하(判下)하였다.

 

1월 27일 정유

경기 관찰사 서정수(徐鼎修), 수원 부사 이경무(李敬懋), 전 부사(府使) 조심태(趙心泰)·김사목(金思穆)에게 명하여 정례(定例)를 바로잡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저 먼 길을 행차할 때 임금의 음식물 마련은 여러 고을에서 담당하는데 만약 서울 관청에서 한다면 실어나르는 폐단이 또한 갑절이나 될 것이다. 더구나 수원은 서울에서 1백 리나 되는 거리이고 또 더구나 해마다 행차하니 제도를 정할 때에 마땅히 서울과 지방이 모두 편리한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금번의 행차는 규정을 정한 초기이니 십분 엄격하게 조목을 세운 뒤라야 영구히 준수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생선 1마리나 과일 1개라도 혹 정한 규정에 벗어나는 것이 있다면 이는 사적으로 바치는 것이니, 그 죄가 가볍지 않다. 마땅히 적발되는 대로 중히 다스릴 것이니 이를 본부(本府)의 장남헌(壯南軒)에 써서 게시하라."
하였다.

 

여러 도에서 바치는 음식물 중 규정에 맞지 않는 것을 바로잡으라고 명하고, 조금 있다가 전교하기를,
"절기가 각각 이른 것도 있고 늦은 것도 있는데, 아래에서 마음대로 월령(月令)을 고칠 수 없으니 수시로 봉진(封進)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영남에서 봉진한 김[海衣]을 보건대 모양이 예전 그대로이니 몹시 놀랍다. 명령을 내린 후 즉시 바로잡지 않은 감사는 중하게 추고하고, 봉진한 수령도 잡아다 심문하여 엄히 처단하라."
하였다.

 

청송부(靑松府)의 민가 2백 19호가 불에 탔다. 구휼의 은전을 지급해주라고 명하였다.

 

1월 29일 기해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심환지(沈煥之)를 이조 참의로, 이갑(李𡊠)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명호(洪明浩)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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