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경자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상소하여 대동법에 있어서 무명과 돈을 반씩 대봉(代捧)하는 문제에 대해 청하니, 답하기를,
"민정(民情)을 알 만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뒤늦게 청하는가. 대동미는 순전히 돈으로 바치는 것을 허락한다. 전세에 대해서는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한데, 경의 상소 중에서는 이 또한 낱낱이 거론하지 않았으니 백성을 위하는 일을 어느 것은 하고 어느 것은 하지 않겠는가. 도내(道內)에 목화 흉년이 더욱 심한 고을은 특별히 순전히 돈으로 바치거나 혹은 수량을 나누어 돈으로 대납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처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라도 생업에 전념하지 못하거나 한 백성이라도 떠돌아다닌다면 이는 감사와 수령의 죄이다."
하였다.
2월 2일 신축
김이희(金履禧)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홍억(洪檍)을 예조 판서로, 구익(具㢞)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2월 5일 갑진
조종현(趙宗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권이강(權以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7일 병오
김문순(金文淳)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2월 8일 정미
홍수보(洪秀輔)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2월 9일 무신
덕천 군수(德川郡守) 송전(宋銓)이 상소하기를,
"신이 부임할 때에 본군(本郡)의 실재 호구와 허위 군안(軍案)을 조사해냈는데, 원래 호적에 실린 4천 호 안에 2천 70호만 현존하며 그중 향무(鄕武)와 이노(吏奴)들을 제외하면 첨정(簽丁)할 수 있는 호수는 8백, 9백 호도 되지 않습니다. 군안(軍案)의 원래 총숫자는 3천 5백 60명인데, 도망치고 죽은 자를 허위로 기록한 것이 1천 2백여 명에 이르니, 지금 현존하는 호수로서는 비록 집집마다 세 사람의 군정(軍丁)을 뽑아내더라도 결원을 보충할 수 없습니다. 만약 원래의 액수 중에서 5백의 숫자를 덜어준다면 신의 고을에서 긴요하지 않은 명목은 제거하고 경내(境內)의 누락된 군정을 차츰차츰 조사하여 점차로 숫자를 채워넣음으로써 과외(科外)의 징발을 영구히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서쪽 백성들의 고통받는 모습이 내 눈에 선하게 보인다. 흉년과 전염병에 시달리고 혹독하게 세금을 징수하는 데 피폐해져서 구렁에 쓰러지고 흩어져 사방으로 떠도는 상황을, 어찌 너희 상소를 보고서야 알았겠는가. 그러므로 항시 잊지 못하고 한밤중에도 일어나 책상머리를 맴돌며 특별히 도탄에서 구제하여 편안하게 살게 할 방도를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방백과 수령들의 재능이 대부분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탐욕을 부리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하니, 이것이 이전까지의 습성이었다. 우선 월계(月計)와 세계(歲計)의 부족 여부를 살펴 다시 표창하고 벌주려고 하는 때를 당하여 너의 상소를 보건대 군정을 뽑는 폐단이 또 이와 같았다. 이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감사와 병사에게 상세히 물어서 쇠잔해진 것을 소생시키고 병폐를 제거할 방도를 구하여 진달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이상(李頤祥)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10일 기유
삼사가 김상철(金尙喆)에게 노적(孥籍)의 법을 추후로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가 김우진(金宇鎭)에 대하여 국청을 설치하여 실정을 밝히자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우진(金宇鎭)을 교동부(喬桐府)로 이배(移配)시키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상이 비밀리에 선전관을 보내어 신표(信標)를 가지고 제주도에 들어가 우진을 귀양지에서 나오게 하였고, 또 대간의 계사도 윤허하였었다. 그리고는 압송하여 호서(湖西)의 경계에 이르러 풀어주고 돌아가 그의 친상을 치르게 하였다. 대신과 삼사(三司)가 번갈아 상소하여 간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고, 복합(伏閤)하여 청대한 것도 인견(引見)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서로 여러 날 동안 버티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섬이기는 마찬가지이다.’고 전교하고 마침내 이 명이 있은 것이다.
김우진(金宇鎭)이 귀양지에서 나올 때에 제주 목사 이운빈(李運彬)이 왕부(王府)의 지시가 없었다고 하여 거행하려 하지 않으니, 상이 노하여 운빈을 처벌하여 가장 먼 변방에 위리 안치하라고 명하였다.
승지 구수온(具修溫)이 상소하기를,
"신은 평소 남들의 가장 밑에 있었는데, 외람되게 당상관에 올라 잘못 승정원에 들게 되면서 끝내는 비루하고 미천하다는 배척을 받았으니 이는 일신의 모욕에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신은 기왕에 이경심(李敬心)과는 은혜와 원망이 없는 처지인데, 이 말이 어찌하여 나왔겠습니까. 신이 이병정(李秉鼎)과 당초에는 친하였지만 그 말을 들어보고 그 눈동자를 보니 끝내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국가에 화를 끼치는 것이 그의 기량(伎倆)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원하게 대하는 뜻이 자연 밖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깊은 노여움이 쌓이고 위협과 질책이 점차 심해지더니, 결국 그가 길을 터서 벼슬시킨 사인(私人)을 통하여 신을 모욕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이 외로운 상황을 헤아리지 않고 망녕되이 남의 의심과 노여움을 산 죄입니다. 신의 불초함으로 인하여 조상까지 모욕을 받게 하였으니, 성세(聖世)에 버린 물건이 된 지가 이미 오래된 것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 상소를 보건대 이경심(李敬心)을 바로 이병정(李秉鼎)의 사인(私人)이라고 하였다. 대저 인물을 논박하는 것은 바로 대각(臺閣)의 공론에 의한다. 그것을 하는 자가 어찌 감히 남의 사주를 받겠으며, 사주하는 자가 어찌 감히 자기의 사사로운 감정을 멋대로 부리겠는가. 만약 네 상소에서 논한 바와 같다면 그것이 미치는 폐해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조정에는 권간(權奸)이 사람을 시켜 상소하는 폐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병정이 감히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그 말이 이미 상소문에 나왔으니 의심스러운 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정원으로 하여금 전 정언 이경심에게 엄히 물어서 아뢰게 하겠다. 너의 사정도 그럴듯하므로 본직(本職)의 체직을 허락한다."
하였다.
장령 송환기(宋煥箕)가 상소하여 병의 증상을 진달하고 체직을 청하니, 답하기를,
"봄 날씨가 따뜻해지니, 경연에 오르기에 적합하다. 너는 시골에서 독서하는 선비로서 반드시 핑계대는 말을 하여 간절하게 불러오려는 조치가 지연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너를 기다리는 생각이 날마다 심해지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이 뜻을 살피고 속히 마음을 고쳐 올라와 목마르게 바라는 내 마음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장계를 올려 도(道)의 병폐 8조(條)를 말하니, 묘당(廟堂)에 내려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묘당이 다시 아뢰니, 전교하기를,
"강원도 관찰사가 여러 조목으로 폐단을 진달한 것이 모두 상세하니, 이는 그 임무를 오랫동안 맡은 효력이다. 우의정이 연석에서 아뢴바, 방백(方伯)은 임기가 차기 전에는 체직시키지 말자고 한 말이 매우 좋으니, 특별히 유의하고자 한다. 제1조의 사옹원을 나눈 폐단에 관해서는 좌의정이 이미 사옹원[廚院]을 겸하여 관리하고 있으니, 상세히 물어보고 다시 사리를 논해 초기(草記)하라. 제6조의 다른 도에서 옮겨온 군정(軍丁)을 돌려보내는 일에 관해서는 누구나 모두 평등하게 배려해야 되는 것은 당연하다. 대저 양역(良役)의 총 숫자는 바로 선조(先朝)께서 만든 변경할 수 없는 법인데, 행한 지 이미 오래되어 법금(法禁)이 해이해지지 않았다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반드시 징수하지 않아야 할 군포(軍布)를 수납하고 면제하지 않아야 할 공납을 면제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도내(道內)를 조사하여 한결같이 간행된 책에 따라 시행한다면 하필 멀리 다른 도에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낱낱이 가려내는 것이 비록 계속 소란스럽게 하는 듯하겠지만 결원이 있을 때 보충하면 넉넉해질 것을 분명히 안다. 관찰사에게 엄히 신칙하여 속히 거행토록 하여서 동쪽 고을의 소민(小民)들로 하여금 실제의 혜택을 입게 하라. 제8조의 내관(內官)들을 복호(復戶)하는 일에 관해서는 허실이 서로 섞였으니 매우 놀랍다. 당시 벼슬한 실제 날짜수를 책으로 만들어 보고한 뒤에 해도(該道)에 내려 보내고, 거짓으로 모록(冒錄)한 무리는 또한 감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1일 경술
서유구(徐有榘)를 규장각 대교(待敎)로 삼았다.
수찬 김의순(金義淳)이 상소하며, 역적 김우진(金宇鎭)을 가까운 섬에 옮겨 안치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하고, 인하여 그날 등연(登筵)한 대신과 삼사(三司)가 힘써 간쟁하지 않은 잘못을 논하였다. 이에 교리 성덕우(成德雨)와 부수찬 송민재(宋民載) 등이 인혐(引嫌)하여 연명하여 상소를 올리고 곧바로 나가니, 모두 삭탈 관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전 정언 한상신(韓商新)의 상소를 되돌려주라고 명하고서 전교하였다.
"한상신의 일은 더할 나위 없는 웃음거리다. 상신은 바로 등연(登筵)했던 삼사(三司) 중의 한 사람이다. 내가 대신과 삼사를 대하여 유시한 뒤에 대신은 삼사에게 맡겨서 그들의 요청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하였다. 대신들의 면려가 이미 이와 같았고 그도 삼사의 반열에 있으면서 귀로 대신들의 말을 들었으니, 진실로 다투어 고집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면 대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즉시 입을 열었어야 옳고, 만약 순종하려고 하였으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또한 옳은 것이다. 연석(筵席)에 있을 때에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체직된 뒤에 전 직함으로 상소하면서 마치 잘못된 거조를 처음 듣는 양 하였다. 또 감히 대신들을 배척하여 능멸하고 업신여김이 적지 않으니, 말과 행실을 따져보면 결코 그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세상을 면려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방도에 있어서 되돌려주는 것으로 그칠 수 없으니, 빨리 파직시키는 법을 시행하라."
전 집의 조석목(趙錫穆)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원자(元子)께서는 슬기로운 자질을 타고났고 조화로운 위의(威儀)가 숙성하다고 하니, 인도하고 가르치는 방도가 실로 이때에 달려 있습니다. 무릇 세자보(世子保)와 세자부(世子傅)가 될 사람은 반드시 충성스럽고 신중하며 단정하고 순일한 자를 택하여 좌우에 두고 그 성정(性情)을 길러준 뒤라야 덕기(德器)가 스스로 이루어져서 날로 요(堯)·순(舜)처럼 천성(天性) 그대로 행하는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서학(西學)이 매우 성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시키고 심지어는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 무리들이 윤리를 거스리는 변고까지 있었습니다. 대저 이단의 말이 떠들썩한 것은 실로 정학(正學)이 밝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태학(太學)에는 대사성(大司成)을 강사로 삼고, 지방에서는 경서에 밝고 행실이 훌륭한 자를 잘 선택하여 훈도(訓導)로 정해서 매월 1일에 《효경(孝經)》·《소학(小學)》·사자(四子) 등의 책으로 선비들을 모아 강론하여 충신(忠信)과 효제(孝悌)의 도리를 거듭 일깨움으로써 경박하고 부황한 풍속을 한 번 변화시키면 거의 정학(正學)이 날로 밝아지고 사학(邪學)이 날로 쇠퇴해질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작년에 흉년이 들어 모든 곡식이 익지 않고 목화의 흉년은 더욱 심하였는데, 겨울 추위가 혹독하고 전염병도 성하여 얼고 굶주리다가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각도(各道)에 신칙하여, 강 연안으로서 특히 심한 피해를 입은 곳에는 특별히 진휼청(賑恤廳)을 설치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주고, 봄에 징수하는 무명에 대해서도 변통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또한 비변사로 하여금 마땅한 대책을 강구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지금의 규장각(奎章閣)은 한(漢)나라의 백호관(白虎觀), 당(唐)나라의 영주각(瀛洲閣), 송(宋)나라의 이영전(邇英殿), 우리 나라의 집현전(集賢殿)과 같습니다. 그곳에 선발된 인물로 말하면 일대의 영재(英才)들이고 그 영광으로 말하면 하루에도 임금을 세 번씩 접견하는 총애를 누리는 것입니다. 좌우에 가깝게 두고 달마다 과제를 주고 시험하여 전하께서 그들의 재능과 품격의 우열(優劣)을 매기고 글 잘하는 신하는 그들의 글재주를 서로 높이니, 이것도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만 임금을 면려하고 경계하며 불의에 대하여 뜻을 거스르며 간쟁하는 신하의 법도를 보인 자가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평범한 과제(課製)나 한만하게 음풍영월(吟風咏月)하는 것은 모두 여사(餘事)로 치고 오로지 경전과 사서(史書)를 강론하는 것을 주로 하여 삼대(三代) 제왕들의 정치와 역대 치란(治亂)의 원인을 연구한다면 훌륭한 인재를 교육시키는 효과가 반드시 성대하여 볼 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한(漢)나라가 융성한 것은 바로 수령을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공수(龔遂)·황패(黃覇)·윤옹귀(尹翁歸)·소신신(召信臣)의 무리는 모두 치적(治蹟)이 뛰어났다는 이유로 공경(公卿)으로 발탁되었으니, 한나라 시대에 어진 관리들이 이토록 많았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인재를 등용함에 유독 고을을 잘 다스리는 능력은 선발에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고을의 관리가 된 자는 힘쓰는 바가 전혀 없어 오직 탐하고 백성을 해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새로 벼슬에 나온 자로서 품계가 6품에 찬 사람은 반드시 먼저 주현(州縣)에 벼슬을 시켜 시험하여 반드시 특이한 공적이 현저하게 알려진 뒤에 비로소 삼사와 같은 요직에 등용시키면, 관리들이 모두 스스로 힘써 공정하고 청렴하고 정직한 것으로 일삼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도사(都事)의 관직은 허명(虛名)만 있고 실제의 일이 없으니, 비록 폐지한다 하더라도 실로 무방합니다. 만약 조종조의 관제(官制)를 하루아침에 폐지하기 곤란하다면 옛 규정을 회복하여 재해를 조사하는 일을 맡기거나 혹은 민정(民情)을 살피고 혹은 유일(遺佚)을 찾아 직접 장계로 알리게 하고, 인하여 한 도의 교수(敎授)를 겸하게 하여 학업을 권면토록 하여 상서(庠序)와 학교에서 독서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흥성하게 된다면 아마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제1항은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제2항은 구구한 나의 마음으로는 오직 정학(正學)을 높이는 데 있다고 여겼는데, 너의 말이 또 이와 같으니 더욱 유의하고자 한다. 제3항은 백성들을 걱정하는 마음은 잠깐 동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데, 영남의 해변 고을의 민정(民情)이 이처럼 어렵고 고달프다고 하니, 굶주린 백성을 먹여주고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는 방도를 찾도록 특별히 묘당(廟堂)에 신칙하겠다. 지난번에 부유한 백성들에게 가난한 자를 구제하도록 권하는 것을[勸分] 하지 말고 공명첩(空名帖)을 요량하여 청하라는 글을 이미 통지하였는데, 과연 실효가 있는지 모르겠다. 봄에 징수하는 무명에 이르러서는 전삼세(田三稅)013) 와 대동미를 막론하고 비로소 구별하여 처분토록 하였다. 제4항은 실효를 힘쓰는 데에 이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마땅히 유의하겠다. 제5항은 말인즉 옳다. 다만 언론과 정사는 각기 다르니, 수령을 삼사(三司)가 되는 계단으로 삼는 것은 서로 방해되는 문제가 없겠는가. 제6항의 일은 시급하지 않으니 우선 그대로 둔다."
하였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이경심(李敬心)에게 물어보니, 경심이 말하기를, ‘구수온(具修溫)은 몇 년 전 신의 이웃에 살던 사람으로 신이 본래부터 그의 처지와 인물이 청선(淸選)에 합당치 못함을 알았습니다. 또 듣건대 그가 승정원의 벼슬을 하기도 전에 승지라 자칭하여 사대부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였으니, 신이 논열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금번 그가 맞서 올린 소장에서는 다만 비천(卑賤)의 여부만 밝히면 되는데, 갑자기 이병정(李秉鼎)의 사인(私人)이란 말을 끌어들였습니다. 아, 신이 이병정과는 대대로 친분이 없지 않으나, 만약 본심이 아니고 남의 사주를 받아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하였다면 이는 임금을 속인 것입니다. 신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사인(私人)이란 한 글자는 신하로서 씻기 어려운 죄입니다. 신이 만약 이병정의 사인(私人)이라면 영해(嶺海)로 귀양을 가건 부월(鈇鉞)의 형벌을 받건 신이 달게 여기겠으니, 구수온(具修溫)과 더불어 함께 법관에게 내려 그 진위를 분별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인(私人)인지의 여부를 구수온과 함께 형관에 내려 그 진위를 분별해달라 청하였으니, 마찬가지로 구수온에게 문계(問啓)하여 말이 혹시라도 실제와 어긋나면 도리어 비방한 죄까지 아울러 엄하게 죄를 정하고, 구수온이 대답해 아뢰는 것을 기다려 그 말로 이경심에게 문계(問啓)하라."
하였다. 정원이 또 아뢰기를,
"구수온(具修溫)에게 물어보니, 수온이 말하기를 ‘이경심(李敬心)은 오로지 이병정(李秉鼎)의 집에 주인을 정하고 있었는데, 병정은 매번 말하기를, 「경심이 자주 우리 집에 와서 종일토록 담화해 보았는데 사람됨이 훌륭하였다. 예조의 낭관으로 의망(擬望)하는 것을 내가 좋게 여겼는데, 이후의 통청(通淸)에서 머지않아 수망(首望)으로 추천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신이 직접 병정에게 들은 말이었습니다. 과연 대간으로 추천된 뒤에 여러 차례 사람들을 탄핵하였는데 모두가 병정(秉鼎)이 싫어하던 자였으며, 신도 또한 병정의 패거리에게 미움을 받았으니, 그가 병정의 사인(私人)이라는 것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사인이 아니라면 어쩌면 그리 연달아 탄핵을 한 자가 모두 병정이 시기하는 자였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구수온(具修溫)이 대답한 말로 이경심에게 물어보니, 경심은 말하기를, ‘신이 10년 동안은 시골에서 살았고 수년 동안은 교외(郊外)에서 살았으니, 실로 한 곳에다 주인을 정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수온이 병정과 주고받은 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신이 알지 못하지만 이는 사실(私室)에서 있었던 일이니, 지금 굳이 잡다한 말을 늘어놓으며 분변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가 말한 연달아 탄핵한 자가 모두 병정이 시기한 자라고 한 데에 관해서는, 신이 처음 사헌부 신하 한 명을 논박하니, 그 일에서도 또한 병정과 친한 사람에게 핍박받은 것이라고 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후 논열한 것은 사건이 많으니 병정이 시기하는 자가 그 중에 없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신의 본심은 일에 나아가 일을 논했을 뿐인데, 만약 이로써 억지로 망측한 누명을 씌운다면 대신(臺臣)이 되어 탄핵하는 자가 어찌 일마다 스스로 밝힐 길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구수온은 사소(辭疏)의 내용이 비록 비난에 가깝지만 오로지 한집에만 머물렀다 하여 이미 이처럼 증거를 대었는데, 이경심의 대답은 혹은 말이 되는 것도 같고 혹은 매우 모호하기도 하다. 본사(本事)는 관계된 바가 작지 않으니, 대충 더듬어 내어 처리할 수 없다. 마땅히 후일 빈대(賓對)에서 문의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2월 12일 신해
경연관 이성보(李城輔)가 사직소를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성명은 이전에도 들어 알고 있었으나, 금번 천거에서 관찰사가 추천하여 조정에 알리고 얼마 안 되어 묘당이 또 뽑아 아뢰었으므로 네가 경서에 깊은 조예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도움을 구하기를 목마른 것처럼 기대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리 돌보지 않는가. 너는 즉시 등연(登筵)하여 연대(筵對)의 반열에 참여하라."
하였다.
지의금부사 김사목(金思穆)·정존중(鄭存中)과 동지의금부사 홍검(洪檢)을 엄중히 추고하도록 하고 전교하기를,
"비록 길이 가깝더라도 법률의 명목이 섬으로 귀양보내는 것인데, 해부(該府)에서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집에 있게 하였으니, 해부(該府)의 하는 짓이 오로지 늦추어서 모면하려는 데 있다. 이처럼 성실치 못한 습관은 바로 볼 수 없으니 근일 공무를 집행한 당상관을 중하게 추고하고, 새로 제수한 판서를 패초하여 임무를 살피게 하되 그로 하여금 속히 압송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였다.
"의금부 당상이 이처럼 미루고 핑계를 대는 것은 일을 늦춰서 모면하려는 계책에 불과하다. 그대로 그의 집에 두는 것은 옳지 못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럴 경우 머무르는 것이 무한정이 되는 것이다. 김우진(金宇鎭)을 섬으로 귀양보내는 조치를 즉시 금오랑(金吾郞)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홍검(洪檢)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관학 유생 이종직(李鍾直) 등이 상소하여 김우진을 옮겨 정배하라는 명령을 특별히 중지하고 빨리 저자에서 처형하는 법을 시행하라고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승지 홍명호(洪明浩) 등이 상소하고 곧바로 나갔다. 이는 동료 관원 이사조(李思祚)가 김우진(金宇鎭)을 귀양지로 보내는 공문을 반포하고 금오랑(金吾郞)이 전교를 거행하였기 때문이다. 사조(思祚)도 또한 대장(對章)을 올리고 곧바로 나갔다. 이에 그 상소를 반포하지 말고 모두 패초(牌招)를 기다리지 말고 출사시키라고 명하였다.
판의금부사 오재순(吳載純)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김우진을 옮겨 귀양보내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모두 체직시켰다.
양사가 연명으로 아뢰어 김우진을 왕법으로 다스릴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학례강(學禮講)에 관하여 신칙하고, 전교하기를,
"회시(會試)에 학례강을 거행하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다. 그러나 법을 따라 시행한다 하더라도 글을 잘하는 자라고 어찌 반드시 다 잘 읽겠으며 글을 잘하지 못하는 자라도 어찌 반드시 외우지 못하겠는가. 만약 한갓 구두[口讀]만을 가지고 결정한다면 요행으로 시험을 치르는 단서가 될 것이니, 금번에는 오로지 글 뜻을 위주로 시험을 치르고 굳이 한결같이 규정과 구두만을 따를 필요가 없다. 그리하여 자격이 있는데도 버리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3일 임자
좌의정 채제공이 상소하였다.
"어제 내린 전교를 통해 비로소 대간이 논의에 참여한 말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원본의 상소는 비록 보지 못했으나 대강 성상의 전교를 미루어 보면 그 짓밟고 기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 역적 김우진(金宇鎭)을 반드시 사람마다 죽이고자 하는 것은 병이지심(秉彝之心)이 있는 자라면 누군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신도 10일 안에 세 번이나 차자를 올린 것은 스스로 피를 흘리며 토죄(討罪)하는 뜻에 부친 것입니다. 대저 지금 사람들이 쫓아가 그의 목을 베는 자를 보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대간의 징토(懲討)는 바로 말과 글로 한 것이고 신의 징토도 또한 말과 글인데, 어찌 유독 대간의 말과 글은 진실한 징토로 삼고 신의 말과 글은 진실한 징토라 할 수 없습니까. 신은 삼가 의혹스럽습니다. 그러나 대간이 힘써 묘당(廟堂)을 공박하는 것은 실로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이로써 마음속에 불만을 품고 따라서 출처(出處)의 결단을 하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백거이(白居易)가 늙은 재상을 기롱한 시를 읽어보았는데, 혹은 ‘곱추가 대궐문으로 들어간다.’ 하였고 혹은 ‘늘그막에 자손을 걱정하네.’ 하였습니다. 신은 그의 시가 사실을 잘 묘사한 것을 기뻐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또한 그들을 대신하여 부끄럽게 여기려 하였습니다. 제 몸이 그와 같은 전철을 밟아 금일에 이르러 이렇게까지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게 될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삼가 성명(聖明)께서 즉위하여 예의로서 국가를 다스리니 사물(四勿)014) 의 덕화에 조야(朝野)가 모두 감복하고 있습니다. 지금 신이 청하는 바는 신이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바로 성인의 말씀입니다. 모든 일에 예의를 따르는 전하께서 유독 연로한 것을 이유로 사직하려는 신의 요청에 대하여 허락하지 않을 리가 결코 없을 줄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하가 임금을 섬기다가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떠나가는 것입니다. 신이 역적 우진(宇鎭)의 일에 대하여 중도에서 놓아보낸 것이 놀라운 일이라 강력히 말하였고, 국가의 형법으로 불가불 바루어야 한다고 강력히 말하였고, 가까운 섬으로 옮겨 귀양보내는 것은 의논할 바가 아니라고 강력히 말하였는데, 전하께서 신의 말을 들어주지 아니하고 끝내 금오랑(金吾郞)에게 교동(喬桐)으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신에게 재상의 이름을 부여하고서 말한 것에 대하여는 행인처럼 대우함이 낱낱이 이와 같으니 신이 만약 떠나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다시 책 속의 옛사람을 대하겠습니까."
이복원(李福源)을 특별히 서용하였다. 이에 앞서 복원이 김우진(金宇鎭)의 일을 쟁집하다가 삭탈 관직을 당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전교하기를,
"지난번의 처분은 전 영부사(前領府事) 한 사람만을 몹시 미워한 것이 아니었다. 전 영부사에게 개탄스럽게 여기는 것은 바로 부황하고 조급한 논의에 동요되어 도리어 사체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떠들썩함을 배척하지 못한 점이다. 그러나 대신이 어찌 분수와 의리를 절실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러하였겠는가. 날짜가 다소 오래 되었으니 즉시 서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삭탈 관직시킨 이복원을 특별히 방면하고 바로 임명장을 주어 서용하라. 옛날 훌륭한 시대에 예의로 대신을 공경하던 성덕(聖德)이 어떠하였던가. 그런데도 고 정승 최석정(崔錫鼎)이 이와 비슷한 일로 삭탈 관직을 당했다가 다시 서용되었을 적에 돈면(敦勉)의 전교를 기다리지 않고 대죄신(待罪臣)으로서 한 번 상소를 하자 즉시 비답을 내렸었다. 내가 비록 덕은 없으나 소원은 선대의 임금을 우러러 계술(繼述)하려는 데 있고, 감히 억지로 전례가 없는 예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승지 이면응(李冕膺)을 엄중히 추고하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어제 김우진(金宇鎭)을 압송하여 귀양보내는 일을 반드시 새로 제수된 대신(臺臣)이 대각에 나오기 전에 처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별도로 금오랑(金吾郞)을 보낸 것이다. 대저 일전에 여러 대간들이 등연(登筵)하였을 때가 마침 재일(齋日)이어서 생각한 바를 진술만 하고 계사를 발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제 새로 아뢰면서 조어(措語)를 고쳐서 조지(朝紙)에 써 냈어야 하는데, 다만 전일 아뢴 예에 따라서 써 냈으니, 이는 후일의 폐단에 관계될 뿐만이 아니라 어찌 이와 같은 격식이 있겠는가. 또 도사(都事)를 별도로 보내는 처분도 무슨 결말이 없으니 해방(該房) 승지를 체차하고 말을 하지 않은 대신(臺臣)은 아울러 중히 추고하라."
하였다.
대사헌 홍검(洪檢) 등이 인피(引避)하니, 즉시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구익(具㢞)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홍수보(洪秀輔)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이 차자를 올려 김우진(金宇鎭)의 처분에 관하여 간쟁하고, 또 동료 정승이 한상신(韓商新)의 상소로 인하여 인의(引義)하였는데 신도 또한 다름이 없다고 말하며 내쫓아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좌의정과 거취(去就)를 같이하려고 하니 염치와 예의가 그러할 것이다. 모름지기 좌의정이 출사하기를 기다려 즉시 조정에 나오라."
하였다.
정언 장지면(張至冕)이 상소를 올렸는데,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상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역적 김우진(金宇鎭)이 얼마나 극악한 역적인데, 가까운 섬으로 옮겨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내리셨으니, 이 무슨 일입니까. 더구나 교동과 강화도는 바로 물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가까운 지역이니, 근심스러운 단서가 매우 많습니다. 직책이 정승 지위에 있으니, 눈을 밝히고 담력을 키워 성토하는 바가 마땅히 여러 동료들보다 갑절로 있어야 하는데, 지금 이와 반대로 하여, 처음 여론이 비등할 때에는 우물쭈물하고 끝내 임금 앞에서 의논해 처리할 때에는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서 조금도 놀라고 탄식하는 뜻이 없었습니다. 의분(義奮)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고 반드시 정토하고야 마는 의리로는 비록 깊이 책망할 수 없으나, 현재 사나운 시랑을 기르고 도적이 숨어 있는 걱정이 어떠한데, 자기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태연히 팔짱만 끼고 있으니, 임금을 받들고 돕는 도리가 참으로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삼사의 신하로 말하면 혹은 논계하고 혹은 아뢰어 겨우 책임만을 모면하였지 끝내 합사하여 대궐문에 엎드려 극력 간쟁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을 일삼아 당초부터 등연(登筵)하지 않은 자도 있으니 충성과 의분 두 글자가 땅을 쓸어낸 듯 하나도 없어졌습니다. 대신들이 이미 이와 같고 삼사가 또 저와 같으며, 재상들과 벼슬아치들도 또한 강개(慷慨)하여 굳게 간쟁하는 자가 없으니, 전하의 조정에 대신이 있다고 하겠으며, 삼사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역적 김우진 (金宇鎭)을 가까운 섬으로 옮겨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거두고 빨리 법에 따라 집행하자는 청을 윤허하소서. 그리고 기강을 진작시켜 대신들의 불성실한 죄를 바로잡고 그날 등연(登筵)했던 삼사도 아울러 삭탈 관직시키며, 세상이 다 아는 사정이 아닌 것으로 회피하고 등연하지 않은 삼사의 관원들도 사판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2월 14일 계축
좌의정 채제공이 첫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전교하기를,
"어제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고도 또 사직서를 올리니, 경은 참으로 물러가기로 정하고 영영 가려는 것인가. 경이 만약 사직서를 거두고 우의정과 함께 조정에 나온다면 내가 마땅히 헤아려 머무르게 할 방도가 있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승지에게 명하여 함께 오게 하였다.
내의원에서 진찰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신경을 번거롭게 쓰면 가슴 막히는 기운이 올라오고 신경 쓰는 것을 줄이면 반드시 가라앉는다. 근일 다행히 조금 괜찮았는데, 갑자기 오늘 아침에 좌의정이 또 사직서를 올려서 어제보다 10배나 더 신경을 썼더니 가슴 치미는 기운이 솟구쳐 올라 불길보다 더 뜨겁다. 정승 지위에 있는 자가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할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다. 내가 자신을 보건대 너무 모자란 듯하여 참으로 말을 하고 싶지 않으니, 경들은 물러가 조정이 편안해지고 정승 자리가 채워져 수응하는 일이 줄어든 뒤에 와서 기다리라."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의금부에서 대명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어찌 병을 칭탁하는 말로 경의 거취(去就)를 위협하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집에 돌아가 치료하고 차도를 기다려 조정에 나오라. 만약 억지로라도 마음을 고쳐 나온다면 또한 어찌 굳이 막고서 즉시 접견하지 않겠는가. 경이 나오면 우의정도 또한 나올 것이다. 사세가 비록 그러하기는 하나, 아까 내린 전교를 우의정이 평범하게 듣는다 하니 또한 예상했던 바가 아니다. 내가 부덕하기 때문에 비록 신하들을 예로 대우하는 도리가 결여되었으나 옛사람들이 ‘임금은 비록 무례하더라도 신하는 충성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참으로 스스로 큰 체하고 싶지는 않으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임금의 기강과 국가의 체통이니, 이 뜻을 마땅히 동료 정승들에게 알게 하라."
하였다.
내의원이 재차 들어가 진찰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서 차대에 와서 모이라 명하였다. 내의원이 하명을 거두라고 청하였으나 또한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채제공에게 유시하였다.
"해가 저물어가는데 아직까지도 대신의 거취(去就)가 없구나. 지금 접견하는 것은 바로 비답 중 헤아려 머물게 하겠다는 뜻이다. ‘헤아린다.[商量]’는 두 글자에서 은미한 뜻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이와 같이 하는가."
김문순(金文淳)을 형조 판서로, 홍억(洪檍)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차대(次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전교 중에 ‘헤아린다. [商量]’는 두 글자로 이미 은미한 뜻을 보였는데 여론도 또한 억지로 거스를 수 없으므로 지금 당초에 처분한 대로 도로 바다 섬으로 귀양보내려 한다. 그러면 여러 신하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공의(公議)는 삼사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대신이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법을 지키는 가운데서도 자연 융통성이 있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삼사에 물어 처리하소서."
하자, 상이 마침내 김우진(金宇鎭)을 귀양지로 다시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구익이 아뢰어 김우진을 바다 섬으로 다시 귀양 보내라는 명령을 거둘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고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공명첩(空名帖)을 함경도 감영과 경상도 감영에 지급하여 구휼(救恤)하는 데 보충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2월 16일 을묘
오재순(吳載純)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2월 17일 병진
학례강(學禮講)의 시관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강침(姜忱) 등이 명령을 받들고 시강할 적에 생도들을 대하여 몸을 비스듬히 하고 관을 삐뚤게 쓰고서 담뱃대를 문 채로 밥상을 대했으며 또 잡스럽게 농담을 하였다. 상이 그 소문을 듣고 모두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또 감찰·사관(史官)과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여러 관원들은 잡아다 심문하고, 대사성은 의금부에서 추고하며, 성균관의 재임(齋任)과 동재(東齋)·서재(西齋)의 반수(班首)들은 정거(停擧)하고 공무를 집행한 양사(兩司)의 관리들도 또한 엄중하게 추고하라고 명하였으니, 능히 살펴 경계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던 죄가 있기 때문이었다.
전교하였다.
"학례강(學禮講)도 형식에 불과하지만 조흘강(照訖講)은 더욱 형식 중에서도 형식이다. 그러나 그 명칭을 따라 그 실질을 구하는 것이 그래도 새 제도를 만들고 새 법령을 게시하는 일보다 낫기 때문에 작년 가을 조흘강을 할 때에 이미 거듭 경계하였고 금번 학례강에도 또한 옛 규정을 회복할 것을 신칙하였다. 근래 선비들의 풍습이 옛날과 같지 않은 것이 어찌 선비들의 잘못이겠는가. 바로 조정에서 능히 제도를 정비하여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니, 이것이 가르치지 않고 처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강할 때에 반드시 서서히 하게 하고 강을 못하는 자는 또 글짓는 것으로 대신하게 한 것인데, 여러 생도들이 여러 차례 신칙한 법의 본 뜻을 알지 못하고 내일의 회시(會試)와 오는 식년시(式年試)부터는 법금(法禁)이 예전과 같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면 또 어찌 백성을 기만하는 하나의 단서가 아니겠는가. 대저 과거의 폐단을 한번 변혁시켜 옛 법도로 회복시키는 것은 공거(貢擧) 제도로 선비를 천거하게 하는 한 가지 일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처음 내린 윤음(綸音)이 지금까지 빈 말로 실려 있는 것이 또한 어찌 까닭이 없이 그러하겠는가. 공거(貢擧)로 추천하는 옛 규정을 갑자기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우며 형편상 장차 법도 중에서 규제해야 한다.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이 모두 모였을 때에 마땅히 한 번 공포해야 하니, 이 전교를 써서 두 곳의 시험장에 게시하고, 또 대사성으로 하여금 명륜당에 게시하여 제각기 법이 완화되었다 하여 방심하지 말고 또한 법령이 엄해졌다 하여 너무 조급해 하지 말게 하라."
전교하였다.
"중신(重臣) 정창순(鄭昌順)에게 낙점(落點)을 아끼는 것은 대개 연유가 있다. 정학(正學)을 부지하고 사학(邪學)을 배척하는 것이 바로 나의 본래 뜻이다. 금일 여러 신하들이 어찌 지난번의 처리에 대하여 사학(邪學)을 배척하는 데 엄하게 하지 않았다고 여기겠는가마는 홍낙안(洪樂安)의 일은 참으로 하나의 변괴이다. 등용하고 버리는 것을 처치하는 권한은 위에 있으니 쓰고 싶으면 쓰고 쓰고 싶지 않으면 쓰지 않는 것이다. 내가 어찌 공갈하는 말 한마디에 흔들려 본 뜻을 빼앗기겠는가. 그가 품고 있는 계략은 단지 쥐는 잡으려 하면서 그릇을 깰까봐 주저한다는 것만으로 논해서는 안 된다. 대저 낙안(樂安)이 참으로 사학(邪學)을 공박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상소하여 알리는 것도 옳고 대신에게 글을 두번 세번 보내어 기어코 임금에게 전달하여 알리도록 하는 것도 옳은데, 이러한 일을 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장서(長書)를 쓰고 한편으로는 전파시켜 뜻이 다른 사람들까지도 말을 전하여 마치 역마를 타고 명령을 전달하듯이 하여 연석(筵席)에까지 알려지기에 이르렀으니 그의 용심(用心)이 오로지 좌의정에 있었음은 불을 보듯 훤하다. 그의 행적과 노선에 대하여 위에서 또한 어찌 들어 아는 것이 없겠는가. 낙안(樂安)을 한번 처리하는 것은 내 뜻을 이미 정하였으나 아직까지 다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우선 기다리는 것이다. 낙안과 같은 자가 끝내 형벌을 받지 않는다면 어찌 위복(威福)의 권한이 위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홍인호(洪仁浩)는 바로 낙안의 지친이기 때문에 지난번에 인호로 하여금 사사로이 낙안에게 물어 그로 하여금 이 일의 근원과 맥락을 써 내게 하였더니, 처음에는 비록 분명하지 않았으나 끝내는 말이 중신(重臣)에게 관계된 것이 많았다. 중신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듣게 되었는가. 내가 중신(重臣)에게 취한 바는 ‘맑고 밝다는 것[陽明]’이다. 지난날 대궐의 연석에서 주대(奏對)할 때 낙안과는 말 뜻이 자못 달랐다. 중신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마는 이 일이 끝나기 전에는 낙점(落點)을 아끼지 않을 수 없다. 시관의 의망은 관직과 다르므로 어쨌건 중신에게 금난패(禁亂牌)를 내주도록 하였으니, 받들든지 어기든지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
사직(司直) 정창순(鄭昌順)이 상소하기를,
"신이 병으로 누워 있는 중에 삼가 연교(筵敎)가 내린 것을 보았는데, 홍낙안(洪樂安)의 문계(問啓) 중에 신의 이름을 끌어댄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이 그 말의 천심(淺深)을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도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에게 고하는 말에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이처럼 극심하게 하였으니,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으며 무슨 말인들 지어내지 못하겠습니까. 신의 자식이 과거장의 일로 낙안과 서로 알게 되었으므로 신도 또한 그 얼굴을 알게 되었습니다. 금번 장서(長書) 사건이 생긴 뒤에도 신은 소문을 듣지 못하였다가 대간의 계사가 나오고서야 낙안이 정승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말을 비로소 들어 알았으며 이른바 장서(長書)라는 것은 그때까지도 보지 못했습니다. 한참 뒤에 신의 자식이 와서 말하기를 ‘아까 홍낙안이 찾아왔는데 그 장서를 소매에 넣어 가지고 자뭇 과시하는 뜻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후 늦게서야 등초본을 빌려 보았으니, 이는 모두 대계(臺啓)에서 등초하여 전한 뒤였습니다.
며칠 후에 낙안이 와서 말하기를 ‘정원(政院)에서 오는데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렸다.’고 하기에, 신이 무슨 일로 정원에 들어갔었느냐고 물어보니, 그가 말하기를 ‘서양 서적 간행에 어느 사람이 주간했는지 지적하여 고하라 하기에 내가 현재 탐문하는 중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동배들은 어쩌면 서양학을 하는 무리들이 그리도 많은가. 그대가 참으로 상세히 알면 지적하여 말해보겠는가?’ 하니, 그가 이에 낱낱이 들어가며 대답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그대가 정승들과는 반드시 자주 만날텐데 진실로 할 말이 있으면 어찌하여 대면해서 말하지 않고 편지로 하였는가?’ 하니, 그는 ‘내가 수차 집으로 찾아갔으나 모두 만나보지 못했으므로 편지로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와 말을 주고받은 것이 이와 같을 뿐이고, 이 또한 장서(長書)가 이미 알려지고 조사 명령이 이미 내려진 뒤였습니다. 장서의 일이 있기 전에는 당초부터 그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고 신은 장서의 일이 있은 지 한참 뒤에야 비로소 얻어 보았는데, 지금 신과 상의했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 이치에 닿는 말이겠습니까. 그가 이미 남모르게 사주를 받아 기밀을 감추고 이단을 물리친다는 명분을 가탁하여 남몰래 모함하려는 작태를 행한 정상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늘이 밝게 내려다보는데, 지금 청문(淸問)하는 아래에서 또 간교한 꾀를 내어 참으로 사주를 받은 곳은 비밀로 숨긴 채 말하지 않고 우연히 만난 사람을 끌어대어 대답하여 저쪽에서는 자취를 없애고 이쪽으로 화를 옮겨놓으려고 하니, 간사한 정상은 마치 마음속을 들여다 보는 듯합니다. 벼슬을 지내는 자의 반열에 이처럼 간사한 무리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 세도(世道)를 생각함에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그 편지는 이미 사학(邪學)을 배척한다 칭탁하였고 그 말은 또 사도(斯道)를 호위하는 듯하였으니 조정에서 처리함이 이와 같은 것은 참으로 당연하지만 그의 판단이 아니고 반드시 시킨 자가 있을 것이니, 가증스러운 것은 정상과 작태입니다. 지난번 궁연(宮筵)에서 대략 이런 뜻을 진달하였으니, 삼가 성상께서도 아마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신이 참으로 참여하여 알았다면 어찌 차마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신이 임금을 섬기는 하나의 절개는 오직 ‘속이지 않는다. [不欺]’는 두 글자입니다. 지난 뇌사(雷肆)015) 에 있을 때부터 지금 거의 3기(三紀)가 되었으나 일찍이 자취가 기밀에 관계되거나 이름이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었는데, 백발이 되어 죽어가는 말년에 불행하게도 이 간사한 무리와 우연히 한 번 만난 것 때문에 암암리에 농락을 당하여 스스로 임금을 속인 죄에 빠지게 되었으니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봄에 차라리 죽고 싶습니다. 지금 만약 낙안(樂安)에게, 그의 장서(長書)를 신과 상의했다고 했는데 편지로 의논하였는지 직접 대면하여 의논하였는지 어느 때에 했는지 한번 물어보기만 하면 한 마디 말로 분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낙안이 대답한 말은 바로 홍인호(洪仁浩)가 사적으로 물어 앙달한 것입니다. 낙안과 인호는 평소 좋게 지내 몸은 다르나 마음은 같으니, 그들이 얽어매는 바가 어느 곳인들 이르지 않겠습니까마는, 하늘이 위에 있는데 감히 이런 말을 한단 말입니까.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상소를 내려보내 다시 낙안에게 물어보아 만약 신의 말이 털끝 만치라도 서로 틀린다면 부질(鈇鑕)의 형벌을 내리소서."
하니, 지금은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다고 비답하였다.
승지를 보내어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니, 이날은 바로 의춘 부부인(宜春府夫人)을 합장(合葬)하는 날이었다.
2월 18일 정사
경모궁에 전알하였다.
감시(監試)와 복시(覆試)를 실시하였다.
영돈녕부사 홍낙성(洪樂性)과 영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에게 함께 서울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노인을 우대하는 뜻이었다.
전교하였다.
"감시(監試)를 치르는 과정에서 만약 행차가 눈앞에 당했다 하여 분주하게 시험지를 채점한다면 이것이 어찌 신칙한 뜻이겠는가. 궁궐을 나간 뒤에 합격한 자를 발표하라. 수정한 방목(榜目)은 파발 길에 부쳐라."
2월 20일 기미
예조 판서 오재순(吳載純)을 체직시켰으니, 이는 수어사(守禦使)로 진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었다.
감시(監試)의 시험장에 신칙하기를,
"연로하여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은 별좌(別坐)가 시험지를 걷어 두고 절대로 경솔하게 떨어뜨리지 말라."
하였다.
사간 신우상(申禹相)이 상소하기를,
"하늘의 벌이 시행되지 않아 극심한 역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섬에 귀양살이를 하도록 도로 보냈으나 죄명은 옛과 다름이 없으니, 전하께서는 이 일을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르다고 생각하십니까. 왕부(王府)의 법도는 지극히 중한 것이고 국가의 형법은 지극히 엄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마음대로 높혔다 낮추었다 하면서 조금도 곤란하게 여기지 않아 이미 잡아오라 명했다가 즉시 다시 놓아주고 여러 신하들 보기를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여기며 국법을 마치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신은 죽을 죄를 무릅쓰고 대성인(大聖人)의 처사도 또한 하나의 실수를 면하지 못했다고 말씀드립니다.
대저 알맞게 헤아리겠다고 하는 것은 살려줄 만도 하고 죽일 만도 한 의심스러운 자에게 있어서 알맞게 헤아린 뒤에 결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역적은 만 번 죽일 만한 죄는 있으나 하나도 살려줄 만한 이유가 없는데, 다시 헤아려 논할 만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빨리 내리신 명을 거두고 해당되는 벌을 쾌히 실시하소서. 신이 지난번에 외람되게 헌부의 직책에 있으면서 역적 김우진(金宇鎭)을 법대로 처결하는 일로서 장관 동료의 생각에 따라 참여했었습니다. 그날 연교(筵敎) 중 ‘알맞게 헤아린다. [量宜]’는 두 글자에 대해서 대소 신료들이 힘써 다투었는데, 자리에서 물러나온 후에 미쳐서 교동부(喬桐府)로 옮겨 귀양보내라는 명령이 있었기에 신이 여러 대간들과 서로 돌아보며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미 공무에서 물러나왔으므로 다시 뵙자고 하기가 어려워서 연명으로 상소하여 호소하면서 내리신 명령을 도로 거두시길 간절히 빌었는데, 해가 이미 저물고 문 닫을 시간도 임박하였으므로 길게 말할 겨를도 없이 바삐 진달하였었습니다. 그런데 비답을 겨우 받고보니 관직까지 겸하여 체직시키셨습니다. 만약 교동부로 옮겨 귀양보내라는 전교가 등연(登筵)했을 때에 내려졌는데도 신이 그 전교를 보고 입으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면 참으로 이루 다 죄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만, 대청(臺廳)에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내리신 교서를 보았으니, 상소로 다투어 고집하는 이외에는 다시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대신과 동료의 상소가 나오는데 미쳐서 책망이 엄하고 벌주기를 청하였으니, 신은 송구스러운 마음에 몸 둘 곳이 없었습니다. 감히 일이 이와 같았으니 실상을 양해해 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자리에서 물러가기 전에 참으로 귀로 들은 것이 없고 눈으로 본 것이 없었는가? 어찌 감히 자신을 변명하는 말로 수다스럽게 꾸며대는가. 수치스럽기 막심하고 무엄하기 그지없다. 이와 같은 사람을 어찌 대간으로 대우하겠는가. 원 상소를 되돌려주고 해조로 하여금 다시는 언관의 자리에 의망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1일 경신
춘당대에 나아가 서총대(瑞蔥臺)의 시사(試射)를 거행하고, 합격한 자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이갑(李𡊠)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2월 23일 임술
김이익(金履翼)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정창순(鄭昌順)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2월 24일 계해
상이 영릉(永陵)에 가는 도중 파주목(坡州牧)에서 대가(大駕)를 멈추고 목사 이민보(李敏輔)를 불러 보고는 백성의 병폐를 물어보았다. 민보가 답하기를,
"본 고을의 전결(田結) 중에는 옛날부터 애초 조세의 명목이 붙어있지 않은 전결이 있어 해마다 계속되어 온 것이 거의 50결에 가깝습니다. 수령된 자가 차마 강제로 징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당장 지목할 만한 재앙이 없어도 이 명색을 만들어 지금까지 인습해 왔으니, 영영 감면해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본주(本州)의 목사와 더불어 장용영(壯勇營)의 우사(右司) 후초군(後哨軍)과 파주목의 장수와 군졸에게 활과 포 쏘는 시험을 보인 뒤에 차등 있게 상을 주도록 하였다.
상이 몸소 제문(祭文)을 짓고 승지를 보내어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화평 옹주(和平翁主), 봉조하(奉朝賀) 홍봉한(洪鳳漢)의 묘소에 제사를 올렸으니, 묘소가 연로(輦路)의 고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2월 25일 갑자
영릉(永陵)을 전알하였다.
교하(交河) 지역에 이르러 대가(大駕)를 멈추고 군수 임성운(林性運)에게 일렀다.
"본읍(本邑)은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가 자못 훌륭하다. 회감(會減)하고 남은 곡식을 직접 백성들에게 주어 실지의 혜택이 있게 하라."
영릉 령(永陵令) 박지원(朴知源)은 벼슬을 승진시키고 참봉 윤행진(尹行進)은 6품으로 올려주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정자각(丁字閣)·비각(碑閣)·향화청(香火廳) 등 관청 건물이 모두 새롭게 단장되었으니 성심으로 수리한 것을 알 수 있다. 임기가 차기 전에 체직시키기는 아까우니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권부령(權付令)과 시임령(時任令)은 지방관 이외에는 옮기지 말라."
하였다.
고양군(高陽郡)에 대가(大駕)가 머물렀다.
대가가 돌아올 때에 야간 통행금지를 풀어주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구경하려는 남녀들이 앞을 다투어 성(城)에 들어가려는 혼잡한 폐단을 염려해서였다.
2월 26일 을축
양철평(梁鐵坪)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임금에게 올린 글 71통을 판하(判下)하였다.
2월 27일 병인
군대를 사열할 때의 여러 장수들과 경기 감사·개성 유수와 영릉(永陵) 행차시의 지방관인 파주 목사(坡州牧使) 이민보(李敏輔)에게 상을 주었으니, 이는 규정에 비추어 시상한 것이다.
장용영(壯勇營)과 고양(高陽)의 향무사(鄕武士)들에게 시사(試射)하게 하여 수석한 사람은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2월 28일 정묘
생원·진사 시험의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한 지 만 60년이 된 능은군(綾恩君) 구윤명(具允明), 완림군(完林君) 이수인(李壽仁)과 무과 시험에 합격한 지 만 60년이 된 김익서(金益緖)는 모두 편전(便殿)에서 사은(謝恩)하라고 명하였다. 사은례를 행할 때에 다만 사배(四拜)를 하고 그의 자손으로 하여금 부축하게 하여 윤명(允明)과 수인(壽仁)은 섬돌 위에 동서로 나누어 앉게 하고 새로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은 줄을 지어 뜰 아래에 섰다. 상이 윤명에게 말하기를,
"경은 나이가 80이 넘었는데 환한 얼굴빛이 쇠하지 않았고 자손과 증손 현손이 거의 수십 명이 넘으니, 고금에 드문 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또 과거에 합격한 지 만 60년이 된 경사가 있으니 더욱 영광스럽다. 이 기쁨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경은 율시(律詩) 하나를 지어 내각(內閣)에 보내라."
하고, 윤명에게는 2등 음악을, 수인에게는 3등 음악을 하사하였다. 합문(閤門) 밖에서부터 음악을 연주하며 앞에서 인도하고 새로 과거에 합격한 자들의 반열을 정돈해서 나가게 하였다.
또 익서(益緖)에게는 내취세악(內吹細樂)을 하사하고 인하여 감사에게 명하여 그의 아들을 등용하라고 하였다. 새로 합격한 생원 윤홍각(尹弘覺)과 진사 김진광(金鎭光)은 나이가 모두 80이었는데, 자급을 뛰어넘어 첨추(僉樞)에 제수하고 호조에서 옥관자[玉圈]를 주라고 명하였다.
양주(楊州) 선비 윤인식(尹仁植)·의식(義植)·효식(孝植) 형제 셋이 한꺼번에 과거에 합격하니, 경기 감사로 하여금 음악과 잔치에 드는 물품를 지급하도록 하고 돌아가 그 부모를 뵙게 하였다.
연로(輦路)의 고을에 갔던 암행 어사 신헌조(申獻朝)가 복명(復命)하였다.
김희채(金熙采)를 평택 안핵 어사(按覈御史)로 삼았다. 당초 이동욱(李東郁)의 아들 이승훈(李承薰)이 서양의 천주교(天主敎)에 물들어 평택 고을에 사는 3년 동안 공자의 사당에 참배하지 않았다. 권위(權瑋)라는 자가 태학생(太學生)에게 이것을 말하니, 태학생이 그 말을 듣고 그의 이름을 청금록(靑衿錄)에서 지워버렸다. 이때에 이르러 그 아우 이치훈(李致薰)이 대가(大駕)의 앞에서 상언하여, 태학생이 권위와 더불어 자기 형을 무함한 일을 신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형조가 회계(回啓)하기를,
"사림(士林) 사이의 논의가 위로 조정에까지 번거롭게 하는 일이 원래 없으니 그대로 두소서."
하니, 판하하기를,
"이미 그 내용을 들었는데, 처결도 부결도 아닌 채로 놔두어 범법한 자를 심리하지 않고 범법하지 않은 자를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마땅히 조사할 사람을 특별히 보내어 엄격히 조사해야 한다."
하고, 마침내 희채에게 명하여 가서 조사하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일체(一體)이니, 그 임금이나 아버지에게 절을 하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고 바로 금수이다. 스승 또한 그러한데 더구나 만대의 스승인 공자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도척(盜跖)이 후세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른바 이승훈(李承薰)이란 자는 간담이 얼마나 크길래 참으로 절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는가. 사민(士民)들의 수많은 시선 속에 누구를 속이겠는가. 결코 사민들의 수많은 눈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니 공자의 사당에 절하지 않았다는 말은 평상적인 이치로 규명하기는 어렵다. 이 일이 근래에 와서 시끄러운 단서가 될 줄 일찍 알았다면 어찌 지금까지 즉시 엄격하게 조사하고 끝까지 밝혀내지 않았겠는가. 지금 형조가 상언에 대해 회계(回啓)한 것으로 인하여 겨우 판부(判付)를 내렸으나 본 사건은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하니, 잠시라도 방치해 둘 수가 없다. 승훈이 향교에 배알했는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고을의 유생이나 향교의 생도나 하인이나 백성들 중 그 실제의 상황을 듣고 본 자가 있을 것이니, 이 한 조목을 마땅히 먼저 조사하라. 그리고 향교를 수개(修改)할 때 고을의 전례가 옛부터 예를 거행했는지 거행하지 않았는지의 여부를 또 마땅히 소급하여 상세히 조사하면 고을의 선비나 향교 선비의 공론이 즉시 하나로 귀결될 것이다. 그리고 권위(權瑋)가 한 짓이 과연 상언(上言)한 내용과 같은지, 승보시(陞補試)에 뽑히지 않자 억지를 부리는 무리에 섞여 들어가 마치 사적인 감정을 멋대로 부리는 자와 같았는지의 곡절을 낱낱이 조사한 뒤라야 승훈의 죄를 다스리고 벌을 주는 것이 당연한지 부당한지를 비로소 참작해 결정할 수 있다. 이 일은 한 명의 감사와 한둘의 조사 관원이 사적으로 거행할 일이 아니므로 전 교리 김희채를 충청도 평택 고을의 안핵 어사(按覈御史)로 임명한다."
하였다.
파주(坡州)의 장교(將校)들은 한 번의 도목정(都目政)을 넘기고 승진시키라고 명하였다.
장용영(壯勇營)과 수원(水原)의 향무사(鄕武士)에게 활과 포 쏘는 시험을 치르도록 하고, 모두 회시(會試)에 부치라고 명하였다.
재령(載寧) 사람 김경엽(金景燁)에게 상으로 가자(加資)해 주라고 명하였다. 경엽은 매번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였고 또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해준 것이 거의 1천 명에 가까웠으므로 감사가 진달한 것이다.
장용영(壯勇營)에서 곧바로 회시(會試)에 응하는 무리는 증시(增試)·식년시(式年試)·전시(殿試)가 있기 전에 별도로 시험을 보여 취하는 것으로 규정을 삼으라고 명하였다.
2월 29일 무진
정호인(鄭好仁)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2월 30일 기사
차대(次對)하였다. 이어서 초계 문신(抄啓文臣)들의 친시(親試)와 일차 유생(日次儒生)의 전강(殿講)을 거행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교화(敎化)가 두루 미치지 않아서 나도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반성하고 있는 중인데 공자의 사당에 절하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하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이와 같은 것을 그대로 두면 곧 백성을 살리는 도(道)로 악한 자를 죽이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조사하라는 조치까지 있게 된 것이다. 우의정은 바로 그때의 감사인데, 도내에서 일어난 이같은 일을 어찌 들어 알지 못했겠는가. 대저 내가 이 일에 대하여 특별히 한심스럽게 여기는 점이 있다. 연전에도 또한 운운한 바가 있었지만 나의 일념(一念)은 오직 은혜를 온전히 하는 한 가지 일에 있다. 은혜를 온전히 해야 할 곳에는 반드시 은혜를 온전히 하려 하고 법을 사용해야 할 곳에는 반드시 법을 사용하려고 하니, 대저 이러한 무리들에게 법을 사용한 뒤라야 비로소 은혜를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익노(翼魯)와 같은 자로 말하면 가차없이 참수하는 것이 법에 당연하고, 지금의 권위(權瑋)도 익노와 마찬가지다. 지난번 제방을 쌓는 등의 일로 해궁(該宮)에 드나들어 자취가 이미 드러났으나 다만 미처 법으로 처결하지 못했다. 저와 같이 흉악한 자가 감히 성균관에 통문(通文)을 돌리는 짓을 하였으니, 이런 일을 그대로 두면 의관(衣冠)을 한 선비들을 거느리고 금수의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기에 부득불 본말(本末)을 펴보이는 것이다. 대개 그는 제방을 쌓는 일로 바로 연전에 형조에서 송사를 일으킨 자였으니, 일찍이 형조 판서와 호조 판서를 지낸 사람치고 누군들 알지 못하겠는가. 사람을 속이고 물건을 취한 것은 오히려 여사(餘事)에 속하니 그의 죄악이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또 이처럼 날뛰어 그 이름이 다시 조문(詔文)에 오르게 되었으니 어찌 몹시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추한 무리들을 각별히 통렬하게 다스린 뒤라야 동기(同氣)도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너의 소 뿔이 아니면 어찌 우리 담이 무너졌겠는가.’ 하였으니, 만약 익노(翼魯)와 권위(權瑋) 같은 무리가 없었다면 당초부터 어찌 저처럼 바다 섬으로 귀양가는 일이 있었겠는가. 이놈들은 바로 나의 원수이니, 반드시 한 번 보복하려고 하는데, 선비들과 대사성이 지금까지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이번에 역적 김우진(金宇鎭)을 교동(喬桐)에 두려 하신 것은 참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의 삼사가 잘못한 것이다. 일찍이 먼 섬에 있을 때에도 오히려 법을 적용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지금 경기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둔 뒤에 어찌 법을 적용하는 것을 허락하겠는가. 경기 감사 장계의 말을 들어보면 정배(定配)도 아니고, 천극(荐棘)016) 도 아니며 다만 보수(保授)하게 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하니, 박종악(朴宗岳)이 아뢰기를,
"역적 우진은 우선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다음으로 법 적용을 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계(臺啓)가 이미 발론된 뒤에 귀양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3백 년이나 된 옛 규례이다. 어찌 갑자기 폐지할 수 있겠는가. 그가 가고 오는 것도 모름지기 박자가 맞아야 한다. 지금 만약 정계한다면 즉시 도로 귀양을 보낼 수 있는데, 한갓 쟁집만을 일삼으니, 오직 그대로 두는 한 가지 일만 있을 뿐이다. 어찌 이러한 사체가 있겠는가.
권위(權瑋)의 일도 연석에서 하교한 내용을 상세히 안핵 어사(按覈御使)에게 전하여 그로 하여금 다 알게 하라."
하고, 박종악(朴宗岳)에게 하교하기를,
"예조 판서의 상소를 보았는가?"
하니, 종악이 아뢰기를,
"보긴 보았지만 이번 사건을 이미 알지 못하니, 외면만 가지고 논한다면 예조 판서는 이 일에 관여했을 리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본 사건의 속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온 세상이 모두 취했다고 할 만 하다. 대저 내가 도(道)를 보호하는 마음이 어찌 금일 조정 신하들만 못하겠는가. 이른바 장서(長書)는 ‘위정척사(衛正斥邪)’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니 겉으로 논하면 비록 배척한 것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심적(心跡)을 추측해보면 지극히 통탄할 만한 것이 있다. 대저 이 일을 말하고자 했다면 변고를 아뢰는 상소로 진달하더라도 안될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장서(長書)로서 덫을 조성해 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무슨 마음인가. 내가 좌의정에게 싫어하는 뜻이 있었다면 출척(黜陟)의 권한이 나에게 있다. 저들 무리가 어찌 감히 선동하고 흔들어 임금으로 하여금 그 사이에 손을 쓸 수 없게까지 하는가. 이후부터 좌의정에 관계된 일이라면 내가 참으로 사적인 내 일로 보아서 휴척(休戚) 영췌(榮悴)를 그와 함께 하려고 한다. 사건이 한 번 생기면 대우를 더욱 더할 것이다. 조화(造化)의 권한이 어찌 이 무리들에게 놀림을 당하겠는가. 보검(寶劒)이 저기 있으니 그 갑(匣)은 비록 좀먹었다 하더라도 그 칼날은 있으니, 어찌 홍낙안(洪樂安)의 머리에 시험할 수 없겠는가. 다만 이 일은 이미 사학(邪學)을 공박하는 데서 나왔으니 급히 처리하는 것도 또한 불가하다. 모름지기 온 세상이 내가 정학(正學)을 보호하는 뜻을 알고 낙안의 자취가 다 드러나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결말을 지을 것인데, 좌의정은 늙어서 미처 보지 못할 듯하다. 예조 판서의 일로 말하면, 낙안의 문계(問啓)를 본 뒤라서 스스로 판단할 것이 아닌 듯하기에 홍인호(洪仁浩)로 하여금 물어보게 하였더니, 낙안은 중신(重臣)이 간섭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중신이 궁중의 연석에서 아뢴 말을 들어보니,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내가 예조 판서에게서 취한 바는 그 성품이 결백하고 곧은 점이다. 중신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였다. 정창순(鄭昌順)이 아뢰기를,
"일전 신의 상소에서 대략 이 일을 폭로하였습니다. 대저 낙안의 아비가 수령이었을 때 신의 형에게 폄체(貶遞)되었으므로 일찍이 찾아온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문계(問啓)하는 날 잠깐 와서 보기에 신은 나름대로 의아해 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 들어보니 과연 인호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처럼 권하여 보내고 뒤에는 이처럼 모함하니 심술(心術)에 크게 관계된 일입니다. 이는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즉시 조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장서(長書)는 이미 흉한 말이 아닌데, 신이 만약 참여하여 알았다면 어찌 감히 숨기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병신년017) 과 정유년018) 에 대대적으로 처리한 일이 있었는데, 만약 이처럼 중지하지 않는다면 병신년과 정유년처럼 처리하는 일을 어찌 다시 오늘에 사용하지 않겠는가. 비록 대신과 각신(閣臣)으로 예우를 받고 또 친밀한 자라 하더라도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결코 용서할 수 없다. 태양이 밝은데 감히 이러한 습성을 이루려고 하는가. 지금 한 해가 지났는데 아직까지 스스로 그 몸을 벗어나려는 한 마디 말도 없으니, 무리가 많다고 할 수 있다. 인호(仁浩)처럼 용렬한 자를 논할 가치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다. 창순이 아뢰기를,
"그가 이미 낙안(樂安)을 신에게 보냈으니, 반드시 맥락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도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지만 내 뜻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여긴다. 다시 물어본 뒤에 중신(重臣)에게 끌어다 붙였으니, 지금 만약 다시 물어본다면 다른 사람을 끌어대겠는가."
하였다. 창순이 아뢰기를,
"대저 이 일은 인호(仁浩)가 반드시 알 것이니, 즉시 조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가 많이 지나다 보면 자연히 드러날 것이니, 드러난 뒤에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승지 신기(申耆)가 아뢰기를,
"창순이 자기와 관계된 일에 대해 말이 매우 장황하니, 추고하소서."
하니, 내버려두라고 명하였다.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 이조원(李肇源)에게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하도록 하였다.
호남에서 새로 제작한 훈련 도감의 배에 모곡(耗穀)을 실어나르는 것을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식년 문무과의 복시(覆試)를 실시하였다.
교리 신헌조(申獻朝)가 상소하기를,
"신이 조금 전 연석(筵席)에 올라 삼가 성상의 하교를 들어보니, 권위(權瑋)의 죄악이 여지없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권위는 바로 일개 비열한 자이고 또한 하나의 변괴인데, 이에 감히 서울과 지방간을 출몰(出沒)하면서 흉하고 추한 이름이 임금에게 아뢰는 문자에 오르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국가에 법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듣건대 이승훈(李承薰)의 일에 관련되어 현재 조사 중에 있다고 하니, 우선 일이 마무리되기를 기다려 먼저 먼 섬으로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홍낙안(洪樂安)의 일에 이르러서도 또한 놀랍고 탄식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작년 낙안의 장서(長書)는 속 내용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다만 정도(正道)를 호위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난번 중신(重臣)의 상소 말을 보고 비로소 의아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삼가 연교(筵敎)를 받고 또 직접 중신이 입으로 진달하는 말을 듣고서 비로소 천하의 일이 이처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약 낙안이 밖으로는 정도(正道)를 호위한다는 말에 칭탁하고 안으로는 남을 모함하려는 꾀를 부린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이를 어찌 일각(一刻)이라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중신이 간섭했는지는 실로 국외자가 알 바가 아니니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이 많은 재상으로 하여금 심한 모욕을 당하고도 변명하지 못하게 한 것은 이미 성조(聖朝)에서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뜻에 어긋났습니다. 낙안의 심적(心跡)이 밝게 굽어살피시는 성상의 감식에서 도피할 수 없다면 죽어도 죄가 남을텐데, 한결같이 용서해주어 탈이 없는 자와 같이 대하니, 또한 조정에서 사실을 상세히 가려내는 정사가 아닙니다.
지금 듣건대, 다만 홍인호(洪仁浩)로 하여금 평범하게 집에서 물어보게 하였다고 하니, 왕정(王政)의 구차스러움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빨리 의금부로 하여금 낙안과 그 외에 관계된 여러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한번 철저히 조사하여 엄한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권위(權瑋)의 일에 대해서 너의 상소가 비록 이와 같으나 다른 일로 현재 어사가 조사 중이다. 또 저처럼 비천한 자로 어찌 조정의 형벌을 번거롭게 하겠는가. 안으로는 유사(有司)가, 밖으로는 방백(方伯)이 본래 있다. 홍낙안을 철저히 심문하여 처벌할 일에 대하여, 개인의 집에서 평범하게 물어본 것을 구차하다고 말하지 말라. 이 일은 임금의 권한에 관계되는 것이며 너 한 사람의 소견으로 측량할 만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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