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34권, 정조 16년 1792년 3월

싸라리리 2025. 8. 5.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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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경오

각처의 능(陵)과 원(園), 묘(墓)의 제기(祭器)에 능호(陵號) 1자씩과 제작한 연도를 새겨넣어 표시하고, 또 사용하는 연한을 정하되 목기(木器)는 3년, 유기(鍮器)는 10년, 철기(鐵器)는 5년으로 하고 연한 내에 손상시키면 해당 관원을 논죄하여 각기 정성껏 잘 보관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가락국(駕洛國)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능에 봄가을로 올리는 제사의 의식을 정하고, 전교하기를,
"가야(伽倻)의 시조는 그 국가를 1백 58년 동안 향유하였는데, 위대하고 신령스런 공적은 지금까지 동방(東邦) 사람들에게 전송(傳頌)되고 있다. 그 대궐터와 묘자리가 김해부(金海府)에 있는데, 김해부의 노인들이 사당을 짓고 편액(扁額)을 ‘회로(會老)’라고 하였다. 제사지내는 날에는 조육(胙肉)을 받고 음복(飮福)하는 것을 준행해 와서 상례(常禮)로 삼고 있고, 조정에서 제전(祭田)을 떼어주고 능지기를 두었으며 표석(表石)을 세워 경계를 표하여 백성들이 침해하거나 개간하는 것을 금지하였었다. 내가 즉위함에 미쳐서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고 귀두(龜頭)019)  를 다시 세웠는데, 근래에 감시와 보호를 규정대로 하지 않아 온 능에 쑥대만 무성하여 봉분 앞을 지나는 자치고 손가락질하며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또 간악한 백성들이 그 땅에 농사를 짓는다고 빙자하여 잠식(蠶食)하고 있다. 그의 후손이 사실을 갖추어 연로(輦路)에서 호소하기에 유사에게 명하여 그 백성을 치죄하고 세금을 내게 하였다. 대저 역대의 능묘(陵廟)에 제사를 올리는 것은 바로 제왕(帝王)의 훌륭한 법이니, 문화(文化)·평양(平壤)·월성(月城)에 감(監)을 세우고 향을 내려주는 의식은 따라서 모방할 만하다. 이 뒤로 봄가을 제향시에는 향과 축문을 보내고 고을 원이 전(奠)을 드리며 감독관 한 사람은 이 고을에 본관(本貫)을 둔 자로 충당하라."
하고, 조금 있다가 몸소 제문을 짓고 각신(閣臣)을 보내어, 한식날 사유를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제전(祭田)과 제각(祭閣)을 수리하게 하고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축문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성균관 유생에게 응제(應製) 시험을 보이면서 명(銘)·부(賦)·시(詩)·상량문(上樑文)의 제목을 내어 각자 원하는 대로 지어 올리게 하였다. 모두 4천 명이 응시하였는데, 80명을 뽑고 등급을 나누어 상을 주었다.

 

3월 2일 신미

성균관 제술(製述) 시험에서 합격한 유생을 희정당(熙政堂)에서 불러 보고 술과 음식을 내려주고는 연구(聯句)로 기쁨을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우부승지 신기(申耆)는 술좌석에 익숙하니, 잔 돌리는 일을 맡길 만하다. 내각과 정원과 호조로 하여금 술을 많이 가져오게 하고,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되, 잔은 내각(內閣)의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토록 하라. 승지 민태혁(閔台爀)과 각신 서영보(徐榮輔)가 함께 술잔 돌리는 것을 감독하라."
하였다. 각신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오태증(吳泰曾)은 고 대제학 오도일(吳道一)의 후손입니다. 집안 대대로 술을 잘 마셨는데, 태증이 지금 이미 다섯 잔을 마셨는데도 아직까지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희정당은 바로 오도일이 취해 넘어졌던 곳이다. 태증(泰曾)이 만약 그 할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어찌 감히 술잔을 사양하겠는가. 다시 큰 잔으로 다섯 순배를 주어라."
하였다. 식사가 끝난 뒤에 영보(榮輔)가 아뢰기를,
"태증(泰曾)이 술을 이기지 못하니 물러가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취하여 누워 있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옛날 숙종조에 고 판서가 경연의 신하로서 총애를 받아 임금 앞에서 술을 하사받아 마시고서 취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였던 일이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 후손이 또 이 희정당에서 취해 누웠으니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하고, 별감(別監)에게 명하여 업고 나가게 하였다. 그때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니, ‘봄비에 선비들과 경림(瓊林)020)  에서 잔치했다.’는 것으로 제목을 삼아 연구(聯句)를 짓도록 하였다. 상이 먼저 춘(春) 자로 압운하고 여러 신하와 여러 생도들에게 각자 시를 짓는 대로 써서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취하여 짓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내일 추후로 올리라고 하였다.

 

명을 받고 영남으로 내려가는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에게 명하여 숭덕전(崇德殿)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숭덕전은 바로 신라 시조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우리 세종(世宗)께서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매년 봄가을로 향과 축문과 예물을 내려보냈으며 선조(先朝) 무신년021)  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이번 길에 월성(月城)을 지난다고 하니, 똑같이 제사를 지내라. 제문은 내가 직접 짓겠다. 또 신라의 여러 왕릉이 이 고을에 있다고 하니, 봉심(奉審)하고 돌아오라."
하고, 또 옥산(玉山)과 도산(陶山) 두 곳의 서원에도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옥산과 도산은 바로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과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전교하였다.
"정학(正學)을 존숭하려면 마땅히 선현을 존숭해야 한다. 어제 옥산 서원에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는데, 옥산 서원에 제사를 지내고 도산 서원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 지난번 사학(邪學)이 점차 번질 때에 오직 영남의 인사들이 선정(先正)의 학문을 지켜 흔들리지도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았으므로, 그후부터 나의 앙모(仰慕)가 더해졌다. 각신 이만수는 명령을 받들고 돌아오는 길에 예안(禮安) 고을에 있는 선정 문순공의 서원에 달려가 제사를 지내라. 제문은 지어 내려보내겠다. 선정의 자손들과 이웃 고을 인사들로서 참여할 자는 미리 와서 기다리게 하라. 제사 지내는 날 각신은 전교당(典敎堂)에 앉아서 여러 생도들을 불러 진도문(進道門) 안뜰에 서게 하고 가지고 간 글 제목을 게시하여 각기 글을 짓도록 하고 시험지를 거두어 조정에 돌아오는 날 아뢰도록 하라."

 

3월 5일 갑술

원임 대신(原任大臣)과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원자(元子)의 말과 걸음걸이가 점차 나아져 비록 계단이 있는 마루라도 잘 오르내린다. 날씨가 다소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경들로 하여금 보게 하겠다. 능은군(綾恩君)이 과거에 급제한 지 만 60년이 되었을 때 뒤에서 모신 자손들이 매우 많으니, 이처럼 복 있는 사람은 드물다고 할 수 있다."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연전에 구상(具庠)은 실로 보존하기 어려웠습니다. 성상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능은군에게 어찌 오늘 같은 날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대대로 벼슬하는 집안은 비유컨대 열국(列國)에 토지를 나누어 주고 제후(諸侯)에게 성씨를 내려준 것과 같아서 한 집안이 죄를 지으면 그 성씨를 모두 버려둔다. 그러므로 내가 세신(世臣)들을 보전하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언급할 것이 있다. 병신년022)  에 우의정 집안이 시비를 총괄했었는데, 우의정의 형이 수어사(守禦使)에서 체직됨으로부터 그 형세가 매우 위태로웠었다. 우의정은 그 사실을 아는가? 대저 《명의록(明義錄)》은 정치할 때의 일만 기록한 것이 아니다. 병신년 3월 10일의 전교는 조정 신하들이 거의 모두 알겠지만 이덕사(李德師)와 조재한(趙載翰) 무리들의 흉측한 두 글자의 말은 곧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이환(鄭履煥)이 홍 봉조하(洪奉朝賀)에 대하여 살(殺) 자를 썼다. 이미 외조(外祖)인 이상 어떻게 이처럼 운운할 수 있는가. 조돈(趙暾)은 ‘어찌하여 정이환의 머리를 베지 않는가.’라고 말하였으니, 조돈은 정이환과 평일 의기가 대략 비슷했는데도 그 말이 또한 이와 같았다. 역적 구선복(具善復)의 죄악에 이르러서는 조정 신하들이 모두 아는가?"
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한없이 흉악한 죄를 오늘의 신하들이 누가 명백히 알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에게 전교하기를,
"경의 집안이 나에게는 은인(恩人)이다. 무진년023)   귀주(貴主)의 상사(喪事)가 있은 뒤 기사년에 대리 청정(代理聽政)이 곧바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제문(祭文)과 비문(碑文)에 대략 언급하였다. 경이 새로 복상(卜相)된 뒤로 내가 비록 깊숙한 구중궁궐에 있으나 물의(物議)도 대략 알고 있다. 복상의 결과가 나오자 사람마다 모두 흡족하게 여기지는 않은 듯하나 경은 모름지기 터럭만큼이라도 동요하지 말고 오직 국사(國事)만을 잘 보살피기를 생각하고, 또한 옛날 어렸웠던 시절을 잊지 않는 의리를 생각하라."
하였다.

 

3월 6일 을해

이의필(李義弼)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3월 7일 병자

황단(皇壇)에 전배하였다.

 

3월 8일 정축

춘당대에 나아가 장용영(壯勇營)의 여름철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다.

 

3월 9일 무인

춘당대에 나아가 별군직(別軍職)·선전관·내승(內乘)·무예청(武藝廳)·금군 등의 시사(試射) 및 서북 별부료(西北別付料)의 시사를 거행하고 차등이 있게 상을 주었다.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에게 제사를 지냈다. 경업의 사손(祀孫)인 임필영(林必榮)이 내금위(內禁衛)로서 과거에 급제하였기 때문이다.

 

식년(式年) 문과 회시(文科會試)를 시험보였다.

 

3월 10일 기묘

식년 회시(式年會試)의 정원은 원래 33명인데, 시험관이 착오로 32명을 뽑았다. 방목(榜目)을 만들어 아뢰니, 시관들의 직책을 삭탈하라고 명하고는, 인하여 전교하기를,
"금일 마침 3일제(三日製)024)  를 만났으니, 합격한 자 중에서 1명을 뽑아 33명의 수를 채우는 것이 실로 적합한 방편이다."
하였다. 춘당대에 나아가 3일제(三日製)를 거행하였는데, 7명의 시관을 갖추어 고사하게 하여 6명을 뽑았다. 1등한 진사 윤익렬(尹益烈)은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하도록 하여 식년 회시에 등제한 33명으로 부쳤으며, 그 다음인 생원 이명부(李明孚)와 홍대협(洪大協)은 아울러 급제를 주었다.

 

3월 11일 경진

춘당대에 나아가 장용영(壯勇營)의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다.

 

3월 12일 신사

박우원(朴祐源)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권이강(權以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얼마되지 않아서 체직시키고 김이희(金履僖)로 대신케 하였다. 김이소(金履素)를 한성부 판윤으로, 조종현(趙宗鉉)을 예조 판서로, 구익(具㢞)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3월 13일 임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문과 전시(殿試)를 설행하고 다시 춘당대에 나아가 무과 전시를 설행하였다. 문과에서는 이조원(李肇源) 등 59명을 뽑았고, 무과에서는 한형조(韓亨祚) 등 3백 74명을 뽑았다. 서유대(徐有大)를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3월 14일 계미

서울의 어떤 여인이 다리[髮]를 금하기 위하여 관(官)에서 파견된 사람이라고 사칭(詐稱)하고 여염집을 출입하며 재물을 징수하다가 포도청에 붙잡혔다. 형조에 내려 엄한 형벌을 주고 먼 섬으로 귀양보내며 종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급제한 남공철(南公轍)과 이조원(李肇源)을 낭서(郞署)에 부쳐 사관(史官)을 겸임케 하라고 명하였다. 고사(故事)에 경상(卿相)의 자제로서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이미 6품에 오른 자는 이러한 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익휴(金翊休)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평택 안핵 어사 김희채(金熙采)가 복명(復命)하고 서계(書啓)하기를,
"평택의 전 현감 이승훈(李承薰)이 봉심(奉審)하고 알성(謁聖)할 때에 절을 했는지 안 했는지와, 권위(權瑋)·조상본(趙常本)·정상훈(鄭尙勳) 등이 무함했는지 무함하지 않았는지를 신이 끝까지 조사하고 세밀히 탐문하였습니다. 이승훈이 공자의 사당을 참배할 때에 향을 피우고 절하는 예를 의식대로 행한 것은, 재실의 선비들과 향교의 생도들이 홀기 부르는 반열에 동참하였고 고을의 아전과 지키는 노복들이 절할 때에 함께 보았으니, 알성(謁聖)할 때에 절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헛말입니다. 봉심(奉審)할 때에 절을 하지 않았다는 한 조목에 대해서는, 비록 오래 되어서 상고할 만한 문적이 없으나 이미 향교 선비들의 증거할 만한 말이 있으니, 이는 바로 본읍(本邑)에 유래해온 전례입니다.
대저 평택은 신유향(新儒鄕)과 구유향(舊儒鄕)이 서로 다투어 원수간이 되었는데, 승훈이 부임한 뒤에 신유(新儒)로서 왕래하는 자를 하나도 영접하지 않고 이치에 닿지 않게 송사하는 것도 간혹 금지한 것이 많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신유(新儒)들과 원한을 맺게 되었는데, 그중 권위(權瑋)는 자취가 본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고 수완 또한 몹시 음흉한 것이 바로 익로(翼魯)와 더불어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으므로 세상의 지목을 받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방(堤防)의 세금을 함부로 받아들여 쇠잔한 백성들을 침해한 것에 대해서 이미 전 관리의 배척을 받았으며, 소요를 일으켜 자리를 다투고 향교를 혼란스럽게 한 것이 또 전 관리 때문에 꾀를 이루지 못하게 되자, 백방으로 독기(毒氣)를 품고 반드시 유감을 풀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승훈이 죄를 당한 뒤에 그의 동류들과 함께 황당한 말을 지어내어 시골에서는 홍병원(洪秉元)이, 서울에서는 조상본(趙常本)이 기꺼이 동조하여 이르는 곳마다 거짓말을 퍼뜨렸으니, 그 주범과 종범을 논한다면 권위가 바로 괴수이고 홍병원·조상본·정언택(鄭彦宅)은 추종자들입니다.
권위는 흉악하기 짝이 없고 간사하기가 더욱 심하여 여러 가지의 죄악을 줄곧 승복하지 않다가 심문할 때에 그대로 형장 아래에서 죽었으니, 비록 몹시 분하지만 지금 따질 수 없습니다. 홍병원은 권위의 사주를 받아 시키는 대로 따라 하여 80세에 가까운 그 아비를 통문을 발한 주모자로 만들어 보고 듣는 사람들을 현혹시켰으니, 그의 심보를 추구해 보면 마디마다 헤아릴 수 없고 윤리로 논하더라도 참으로 통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조상본(趙常本)은 본래 교활한 성품으로 남모르게 고을의 권력을 잡고 어리석은 백성의 소장(訴狀)을 대신 지어 전 수령을 모함하였고, 관리를 모욕하는 토착민을 편들어 멋대로 통문(通文)을 돌렸습니다. 아전 한 명의 죄를 다스리지 못한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인데도 이로 인해 노여움을 품고 권위에게 붙어 서로 동조하여 서울과 지방 각지에 전파하였으니, 지극히 음흉합니다. 정언택(鄭彦宅)은, 말을 바꾸어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한 것이 비록 권위의 지시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말을 지어낸 근본은 이미 언택에게 있으니, 후일을 징계하는 도리상 엄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상훈(鄭尙勳)은 갑자기 풍문(風聞)을 듣고는 남을 모함하는 기화(寄貨)로 삼고자 작정하고 거짓 이름을 모록(冒錄)하여 성균관에 통문을 보냈으며, 말을 지어내고 소요를 일으키며 과거 시험장에 함부로 들어가 기필코 남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몰아넣으려고 하였습니다. 본 고을의 향교가 돌린 틀림없는 진짜 통문은 믿지 않고, 다만 사가(私家)의 애매모호한 짧은 편지를 빙자하여 정론(正論)이라 일컬으며 계속 다투어 왔으니, 그가 한 짓을 논한다면 지극히 망령됩니다.
홍병원(洪秉元)·조상본(趙常本)·정상훈(鄭尙勳) 등은 비록 모사를 꾸민 권위와는 차이가 있으나 추종하며 남을 모함한 죄로 처벌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3명의 죄인은 엄한 형장을 두 차례 친 후에 본도(本道)의 도신에게 관문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한 차례 형장을 더한 후에 법률에 의해 멀리 귀양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정언택은 엄한 형장을 한 차례 친 후에 똑같이 관문을 보내 법률에 의해 귀양보내게 하였습니다. 구윤중(具允中)은 비록 말을 지어낸 죄는 벗어났으나 본래 간사한 짓을 했다는 죄목이 있으니, 한 차례 형문(刑問)하고 놓아보냈습니다. 이성(李珹)과 신상오(申尙五) 등은 알성할 때의 재임(齋任)으로서 이전에 신유(新儒)들의 모함을 당하였는데, 조사함에 미쳐서 본사(本事)가 거짓으로 판명되었으므로 용서하여 놓아보냈습니다. 고을 아전 이정길(李貞吉)의 편지 내용 중 비록 ‘절하지 않았다. [不拜禮]’는 3자가 변환하여 모함을 꾸민 화근이 되었으나 ‘저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한 구절에서 지극히 분개하는 뜻을 징험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내놓은 답서는 실로 변명하는 명백한 증거가 되기에 조사한 뒤에 놓아보냈습니다. 그리고 김중순(金重淳)은 권위를 초청하여 술을 권하며 문답하였고, 조기홍(趙基泓)은 앞서는 편지 내용을 끄집어내어 듣는 자들을 현혹시키고 뒤에는 발명하는 답장으로 문적(文跡)을 만들게 하였으며, 조덕함(趙德涵)은 처음에는 조기홍(趙基泓)을 탐문하여 사론(士論)을 격동시키고 끝내는 또 정상훈(鄭尙勳)을 충동시켜 소요를 야기시켰습니다. 이상 3명은 이미 죄인의 공초에서 나왔고 상세히 원안(原案)에 실려 있으니, 마땅히 그 자리에서 추문(推問)해야 될 것이었으나, 혹은 조정의 관리이고 혹은 서울에 있어 상세히 캐물어 조사할 수 없었습니다."
하니, 해조(該曹)에 명하여 복계(覆啓)하라고 하였다.

 

3월 15일 갑신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권위(權瑋)에 관한 일은 지난번에 명백히 말한 바가 있다. 이른바 익(翼)·노(魯) 무리들은 다만 조정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바로 나의 원수이다. 만약 이 무리들의 속임수가 아니었다면 어찌 연전에 강교(江郊)에서 밤을 새우며 대소(大小)가 소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겠으며 현재의 일이 어찌 형제가 서로 보전해주지 못해 백성의 기롱을 받는 지경까지 이르렀겠는가. 홍국영(洪國榮)이 축출당한 것은 바로 정유년025)  에 그가 인성군(仁城君)026)  의 옛일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말을 구한 적이 없었는데 고 정승 정홍순(鄭弘淳)이 상세히 알고는 일찍이 연석에서 아뢰기를 ‘사실을 신도 또한 기록해 두었습니다.’고 하였다. 권위같은 자가 역모(逆謀)에 동참한 것이 비록 역적 구선복(具善復)처럼 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익만을 노리고 교제한 비루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취는 죄상이 형조의 문안(文案)에 명백하게 실려 있다. 그가 어찌 감히 성균관에 출입하며 사론을 간섭하는가. 설령 이승훈(李承薰)이 누명을 벗어나지 못해 그를 법으로 다스리게 된다 하여도 권위의 죄는 그대로 있는 것이니, 금일 신하된 자는 마땅히 가차없이 엄하게 토죄해야 한다. 그런데 김문순(金文淳)은 자신이 형조 판서가 되어 지난날의 연교(筵敎)를 듣고도 심상한 일로 보고 공자의 사당에 관계된 일이라 핑계하였으며, 지금 이 회계(回啓) 중에도 아예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어찌 통탄스럽고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주야로 보는 바는 오직 경서(經書) 뿐이고 성인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나의 고심이라는 것을 조정 신하들은 거의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正道)를 붙잡을 곳에서는 정도를 붙잡고 엄히 막아야 할 곳에서는 엄히 막은 후에야 국가가 국가 노릇을 할 수 있고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번 홍낙안(洪樂安)의 일 또한 몹시 놀랍고 통탄스럽다. 겉으로는 정도를 호위한다는 이름을 칭탁하고 남몰래 시험해 볼 계책을 이루려고 하였으니, 그가 어찌 감히 오늘날 이런 작태를 부리는가. 태아(太阿)가 내 손에 있으니, 내가 마땅히 이 무리들에게 한 번 시험해 보겠다. 김문순(金文淳)으로 말하자면, 처음에는 김중순(金重淳)을 두둔하기에 여력이 없더니 지난번 하교한 뒤로는 갑자기 김중순이 권위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며 친밀하였다는 등의 말로 회계(回啓)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첫번째 회계의 말끝에 어찌하여 ‘벌을 주어야 한다. [施罰]’는 2자로 소략하게 논열하였는가? 바로 이 한 가지 일은 편당(偏黨)의 습관일 뿐만이 아니다. 이는 대개 세 당상관이 남의 말만 회피하려 하고 국가의 기강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김문순은 은혜를 받은 것이 어떠하였으며, 심환지(沈煥之)와 이면응(李冕膺)은 내가 구해준 것이 또한 어떠하였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 처음에는 법대로 직접 국문하려고 했으나, 다시 생각해본즉 지금 만물과 함께 봄을 맞이하고 있으니 굳이 이와 같은 일을 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또 효종조에 김홍욱(金弘郁)을 처결한 뒤에 정명도(程明道)의 말을 취하여 ‘이치를 관찰한다. [觀理]’는 두 글자로 현판을 달았는데, 내가 이 훈계에 대해 마음으로 유념해 두고 있었으므로 금일의 처결에도 또한 반복해 생각하여 다음가는 법률을 적용하고자 하니, 경들은 나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여라."
하였다. 평택 안핵 어사 김희채(金熙采)가 아뢰기를,
"권위의 교활함과 흉악함에 대해서는 지난날 하교하였을 때에 신이 이미 원수라고 하신 전교를 받았으니, 그로 하여금 한 시각이라도 생존토록 할 수 없었으므로 한 차례 엄하게 심문하면서 낱낱이 모진 형장을 쳤더니,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형조 판서 김문순(金文淳), 형조 참판 심환지(沈煥之), 형조 참의 이면응(李冕膺)을 금갑도(金甲島)에 귀양보내고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치게 하였다. 김문순이 평택 안핵 어사의 서계(書啓)를 가지고 복주(覆奏)하기를,
"권위는 흉악한 역적의 집에 붙은 것이 익로(翼魯)와 다를 것이 없었고, 원한을 앙갚음할 뜻으로 감히 말을 꾸며내는 꾀를 내었습니다. 거짓말을 퍼뜨려 전 관리를 모함하고 원근(遠近)에 전파하며 남모르게 규합하고 끝내는 성균관에 통문을 보내서 남을 헤아릴 수 없는 죄과(罪科)에 몰아넣고는 끝내 승복하지 않다가 곧바로 형장(刑杖) 아래에서 죽어 법으로 쾌히 바로잡지 못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김중순(金重淳)은 태학(太學)의 장의(掌議)에 재직하면서 못된 무리들을 불러 술을 나누면서 정성껏 대하였고 마침내는 모함하는 말을 진실한 증거로 인정하였으니, 그의 경솔하고 망령된 행동은 성균관에 수치를 끼쳤습니다. 조덕함(趙德涵)은 말의 근거를 탐문하여 발론(發論)하도록 충동질하였고 정상훈(鄭尙勳)이 과거 시험장에 난입(欄入)하여 소요를 야기시키게 하였으니, 더욱 해괴하고 요망스럽습니다. 아울러 성균관으로 하여금 중한 벌을 주게 하소서."
하니, 복주(覆奏)한 것을 내주고 다시 회계(回啓)하라고 명하였다.
문순 등이 다시 김중순은 엄한 형장을 쳐서 외딴 섬으로 멀리 귀양보내고 조덕함과 정상훈은 아울러 성균관으로 하여금 엄한 형벌을 주게 할 것을 청하니, 또 되돌려 주고 다시 회계(回啓)하라고 명하였다. 문순 등이 또 조덕함과 정상훈도 또한 엄한 형장을 쳐서 섬으로 귀양보내자고 계청(啓請)하니, 또 되돌려 주라고 명하고 인하여 국청(鞫廳) 죄수의 준례대로 형틀을 씌워 잡아오라고 하였다. 문순 등이 이르자 당직청(當直廳) 안에 구속하였다.
이윽고 전교하기를,
"만약 익로(翼魯)와 같은 자가 흉측한 사단을 야기하지 않았다면 어찌 지극히 난처하고 차마 못할 일이 있었겠으며, 또 어찌 지난해 강가에서 밤을 새우고 온 나라가 몹시 소란한 일이 있었겠는가. 대저 외조(外朝)는 외조(外朝) 대로 있는 것이고 종반(宗班)은 전연 상관하지 않는 법이니, 나쁜 징조와 좋지 못한 단서가 되는 습관을 통렬하게 개혁한 뒤라야 비로소 끝내 사적인 은혜를 펴고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전에 한편으로는 손을 잡아 막힌 것을 풀고 한편으로는 엄하게 익로를 다스렸던 것이다. 이처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간사한 폐단을 막고 사적인 은혜를 펼 수 있었겠는가. 이른바 권위는 미천한 모리배의 무리에 불과하니 여기저기서 교류한 죄는 입에 담을 것도 못 되지만, 그의 이름이 공교롭게 평택의 조사에서 나왔고 그가 종전에 범한 죄 때문에 일찍이 해조(該曹)가 조사한 공사(公事)가 있었다. 그제서야 조정에서도 이에 대하여 숨기려고 하지 않은 것은, 이와 같은 무리들은 죄의 경중과 자취의 드러나고 안 드러나고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대로 용서하지 않아서 온전히 보전해야 할 곳에는 진정으로 온전히 보전하려는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이다. 저 김문순이란 자는 정경(正卿)의 지위에 올라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은 것이 어떠하였는가. 그런즉 당초의 회계(回啓)는 비록 미처 듣지 못했다고 핑계를 댄다 하더라도 금일의 끝말은 이해할 수가 없다 하겠다. 만약 공자의 사당에 절하지 않은 데 관계된 일이라 하여 쥐를 잡으려다가 그릇이 깨질까 혐의스럽다고 여겨서 감히 다른 죄의 유무에 대해서도 말하지 못한다면, 또한 크게 잘못된 것이다. 설령 이승훈(李承薰)이 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승훈의 죄는 승훈의 죄이고 엄하게 막는 일은 엄하게 막는 일이다. 승훈에게 비록 법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그 일이 본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더구나 승훈의 이 일은 죄에서 벗어났다는 뜻으로 명백히 계목(啓目)에 논열했으면서 유독 그 일의 근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엄하게 막아야 한다고 언급한 것이 없었다. 법관이 된 자가 행동거지가 이와 같으면 장차 온전히 보전하려는 고심(苦心)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른바 판서는 비록 이와 같으나 참견한 참판과 참의도 바로 동일하게 죄를 진 것이다. 처음에는 몸소 국문한 뒤에 처결하려고 하였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죄인을 가두고 형틀을 씌워 대궐 뜰을 더립히는 것은 너무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죄인 김문순·심환지·이면응을 금갑도(金甲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라."
하였다.

 

우의정 박종악이 아뢰기를,
"각 궁방(宮房)의 무토면세(無土免稅)027)  는 호조에 납부하면 호조에서 각 궁방으로 나누어주는 것이 원래 규정인데, 궁속들은 혜택만 받으려 하고 해조(該曹)는 수송하는 것을 싫어하여 궁방이 직접 밖에서 받도록 하였으니, 밖에서 받는다는 것은 궁속들이 창고 뜰에서 받아가는 것입니다. 매 석(石)마다 더 받는 것이 매우 많아서 백성들이 그 피해를 받고 있으니, 엄하게 금단(禁斷)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은 궁결(宮結)의 세금 징수에 대해 몹시 고통스럽고 가련하게 되는 큰 폐단으로 여기고 있다. 즉위한 첫해에 윤음을 반포하면서 첫번째로 이 일을 제기하고 선왕께서 ‘살을 떼어낸들 무엇이 아깝겠는가.’라고 하신 전교를 되뇌이면서 특별히 궁에서 사람을 보내 세금을 받는 규정을 없애고 모두 호조에 수납토록 하여 호조에서 각 궁방(宮房)에 나누어 주되, 한결같이 선혜청(宣惠廳)에서 각 관청에 공물을 나누어 주는 법을 따르도록 한 규정이 금석처럼 굳건하고 명백하게 실려 있다. 지금 경의 말을 듣건대, 이른바 창고에서 직접 받는다는 말은 천만 놀라운 일이다. 명색은 비록 받아서 준다고 하지만 직접 수납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호조의 장관이 만약 살피고 경계하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병신년028)   규정을 정한 이후로 창고에서 받아가는 법을 처음으로 시작한 해당 판서와 당상은 파직시키고 그후 따라서 인습한 판서와 당상관은 하나같이 모두 중하게 추고하라. 최초로 간사한 꾀를 부린 궁속(宮屬)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하고 규명해내어 법에 의해 엄히 다스리라. 이러한 뜻으로 무토궁결(無土宮結)029)  이 있는 각도에 행회(行會)하여 다시는 국가의 법을 범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종악이 또 아뢰기를,
"안흥진(安興鎭)은 바로 강화도 외곽을 지원하는 곳이고 해로(海路)의 길목이니 국경 방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래 근무한 자를 첨사(僉使)로 임명하여 보내기 때문에 호령이 엄하지 않고 가렴주구가 너무 심합니다. 신의 뜻으로는 이력이 있는 무관을 가려 보내어 성과를 거두도록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나 오래 근무한 자가 들어갈 자리가 적으니 또한 고민스럽습니다. 다른 도에 이력이 있는 자리와 서로 교환하면 양편이 다 편할 것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의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종악이 또 아뢰기를,
"해미(海美)의 방선(防船)과 병선(兵船)이 정박하는 선창은 조수(潮水)가 물러가면 육지가 되기 때문에 매번 수군(水軍) 조련시에는 경내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포구를 파낸 뒤라야 겨우 겨우 배를 끌어내리니, 백성의 피해가 매우 큽니다. 만일 급한 일이 있을 경우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선창에서 10리 거리 내인 홍주부(洪州府)의 한 면에 선창을 만들기에 합당한 곳이 있으니, 그곳을 해미에 떼어 붙이소서."
하니, 따랐다. 얼마 안 되어 감사가 불편하다고 말함으로 인하여 도로 취소하였다.

 

여러 도의 도사(都事)는 통청(通淸)에 적합한 사람으로 임명하여 보내라고 명하였다.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 능의 제사 날짜를 관상감으로 하여금 삼성사(三聖祠)·숭령전(崇靈殿)·숭덕전(崇德殿)의 규례에 의거하여 택일하라고 명하였다.

 

무과에서 3번의 식년시(式年試)가 지나도록 전시(殿試)에 응시하지 못한 자는 시험을 치르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3월 16일 을유

김상집(金尙集)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고, 홍명호(洪明浩)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체직시키고 이홍재(李洪載)로 대신하게 하였다. 홍억(洪檍)을 형조 판서로, 이경일(李敬一)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17일 병술

정창순(鄭昌順)을 공조 판서로, 이경일(李敬一)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대사헌 이홍재(李洪載)가 상소하기를,
"역적 권위(權瑋)의 죄를 이루 다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본래 역적 윤구종(尹九宗)의 집에 출입하던 사람으로 역적 익로(翼魯)와 동일한 무리입니다. 아, 저 김중순은 역적 권위와 체결하여 단란하게 술과 음식을 먹었고 논의한다 핑계하여 서로 결속하고 호응하였으니, 역적 권위와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그런데 형조의 세 당상관이 전혀 공분(共憤)하는 뜻이 없고 감히 얼버무리려는 꾀를 내어 한결같이 덮어주고 오로지 미봉(彌縫)하기만을 일삼으니, 대체 무슨 마음입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김중순(金重淳)은 엄하게 조사하여 실정을 찾아내고 형조의 세 당상관은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하게 심문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이미 정말로 병이 있다고 하므로 우선 회피하려고 꾀한 죄를 용서하니, 만약 조금 차도가 있으면 내일이라도 대각에 나오라. 억지로라도 나올 만한데 나오지 않는다면 경부터 먼저 당파에 참여한 벌을 내리겠다. 그런 뒤라야 신하로서 국은(國恩)을 저버리고 당파를 비호하는 자들의 경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3월 18일 정해

후원의 농산정(籠山亭)에서 재숙(齋宿)하였다. 각신(閣臣) 및 시위(侍衛)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옛적엔 교묘(郊廟)에 제사를 지내게 되면 반드시 여러 집사(執事)들로 하여금 먼저 택궁(澤宮)에서 활을 쏘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그의 덕을 살펴보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오늘도 또한 경들로 하여금 짝을 지어 활을 쏘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수레를 타고 춘당대에 나아가 과녁을 설치하고 각신(閣臣)과 승지와 사관(史官)을 한편으로 만들고 시위(侍衛)하는 여러 신하들을 한편으로 만들어 차례대로 짝을 지어 활을 쏘게 하고 끝난 뒤에 과일을 하사하여 먹게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이경일(李敬一)을 그대로 유임시키라고 명하였다.

 

김중순(金重淳)과 조덕함(趙德涵)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고 시골로 쫓아내라고 명하였다.

 

3월 19일 무자

황단(皇壇)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거행하였다.

 

양사가 【 대사헌 이홍재(李洪載), 대사간 이경오(李敬五), 헌납 박규순(朴奎淳), 정언 장지면(張至冕).】  아뢰기를,
"김문순의 죄를 이루 다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망극한 은혜를 받고 높은 벼슬에 올랐으니, 의리상 징계하고 성토하는 일에 대해서 참으로 남보다 만 배나 더 눈을 밝히고 담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금번의 행동거지는 실로 그지없이 놀랍고 분통스럽습니다.
아, 저 역적 권위는 섬에 있는 역적과 큰 역적 사이에 붙어 출입하면서 돈을 주관하여 결속을 무르익게 한 자이니 곧 역적 무리와 동일한 심보를 가진 자입니다. 한 번 그 이름을 들으면 분통이 어떠하겠습니까. 문순은 법관으로서 성균관의 직책을 겸하고 있으면서 당초 상언(上言)의 회계(回啓)에 역적 권위의 성명이 그 속에 명백하게 있는데도 감히 등한히 보아넘기고 끄집어내어 성토하지 않았습니다. 가령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알지 못한 죄 또한 용서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연교(筵敎)로 명백히 유시한 뒤인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진실로 조금이라도 상성(常性)이 있다면 더욱 마땅히 두렵고 놀라 죽을 곳을 찾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성 안에 버젓이 누워 편히 지냈고 끝에는 억지로 성문(城門) 밖으로 나갔으니, 이는 몹시 방자하고 무엄한 자입니다. 어사의 상소에 대해 복주(覆奏)할 때에 미쳐서는 심환지(沈煥之)와 이면응(李冕膺) 등이 한자리에 같이 앉아서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는데, 이른바 끝말은 모두가 부드럽고 화락한 말이었지 놀라고 분개하여 엄히 벌하려는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 역적 권위와 은근하게 술잔을 나누고 왕래하며 호응한 자는 바로 김중순(金重淳)입니다. 역적 권위가 갑자기 죽어버린 뒤여서 세밀하게 캐물을 만한 하나의 단서는 오직 중순의 무리에게 있는데, 저 문순 등은 무슨 마음으로 덮어주면서 처음에는 유벌(儒罰)을 청하였다가 재계(再啓)에서야 비로소 섬으로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으니, 앞뒤가 어긋나고 거조가 황망합니다. 감히 조사하는 처지에서 도리어 사정을 따르는 꾀를 부려 뜻은 분명하지 않고 일은 미봉(彌縫)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은혜와 국가를 저버리고 사당을 비호하며 토벌을 늦춘 죄가 이에 남김없이 밝게 드러났습니다. 김문순·심환지·이면응은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엄히 국문하여 법으로 분명하게 바루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아, 역적 권위는 이 얼마나 패려궂은 자입니까. 역적 윤구종(尹九宗)에게 음흉한 계략을 가지고 다가가고 역적 익로(翼魯)와 친밀하게 지냈으며 천 가지 요사하고 만 가지 악한 짓은 열 손으로도 가리우기 어려우니, 진실로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지닌 자라면 누가 즐겨 이 역적과 사귀겠습니까. 그런데 오직 저 김중순(金重淳) 과 조덕함(趙德涵) 무리들은 대체 무슨 심보이기에 빈틈없이 결속하고 단란하게 술을 나누며 의논한다 핑계하여 서로 호응합니까. 어두운 밤에 맞이하여 오직 친분이 깊지 않을까 염려하였고 남모르게 선동하여 반드시 사람을 모함한 뒤에야 그치려고 하였으니, 그의 음흉한 심사와 흉악한 계책은 역적 권위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형조의 판부(判付)에 비록 내쫓으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역적 권위가 이미 죽었으니 조사할 길은 오로지 중순과 덕함에게 있습니다. 결코 유생이라 하여 그대로 두고 논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시골로 내쫓은 죄인 김중순과 조덕함은 빨리 의금부로 하여금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엄히 심문하여 통쾌하게 해당되는 법을 적용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0일 기축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선희궁(宣禧宮)에 전알하였다.

 

가마를 길에 멈추고 여러 각신들로 하여금 용방(龍榜)에 합격한 자들을 거느리게 하고 여러 장수들은 호방(虎榜)에 합격한 자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말과 푸른 일산을 새로 과거에 급제한 남공철(南公轍)에게 주어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청공(文淸公)의 아들에게 특별한 은전을 내리는 것이 무엇이 아까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도총관 이민보(李敏輔)는 아들 이조원(李肇源)을, 형조 판서 홍억(洪檍)은 아들 홍대협(洪大協)을, 훈련 대장 조심태(趙心泰)는 아들 조기(趙岐)를 거느리고 아울러 앞에서 인도하며 갔다. 각궁의 참배가 끝나자 심류사(心留舍)에 나아가 근신들에게 밥을 대접하였다. 상이 이민보에게 이르기를,
"작년 봄 나의 시에 ‘좌중에 백발이 많으나 내년에도 지금처럼 술잔을 기울이세.’란 구절이 있었는데, 지금 또 경들과 함께 이 모임을 가졌으니,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늘은 날씨 또한 매우 화창하니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다시 전날 놀던 곳을 찾아보련다."
하고는, 편여(便輿)를 타고 세심대(洗心臺)에 올랐는데 연로한 여러 신하에게 각각 구장(鳩杖)을 하사하여 오르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상이 직접 율시(律詩) 한 수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라고 명하였다. 이병모(李秉模) 등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매년 이 행차 때마다 반드시 이곳에 오는 것이 어찌 단지 꽃을 구경하는 즐거움 때문이겠는가. 내가 특별히 이곳에 대해서 은근히 잊지 못할 것이 있는데, 여러 신하들은 과연 모두 아는가?"
하였다.

 

3월 21일 경인

여러 각신들을 불러 내원(內苑)에서 꽃을 구경하고 고기를 낚았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규장각을 설치한 이래로 이 직책에 있는 모든 자를 집안 사람처럼 보았으니, 오늘의 모임에도 마땅히 집안 사람의 준례를 적용하겠다. 각신의 자제들도 모두 이 자리에 참여하기를 허락한다."
하였다. 못에 둘러앉아 낚시질을 하는데, 고기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기(旗)를 들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상이 각신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금일의 놀이는 매우 성대한 모임이니, 시를 짓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기구(起句)와 결구(結句)를 지을 터이니 경들이 각각 한 연[一聯]씩 지어서 전편(全篇)을 만들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기구(起句)를 읊기를,
내원에선 어조(魚藻)030)  시를 노래하고
앞 연못엔 뛰어난 인재 모여 있네
하고, 결구(結句)를 읊기를,
온 자리에 화기가 혼후(渾厚)하니
너희 무리를 집안 사람처럼 보련다
하고, 이어서 음식을 베풀었다. 9개의 과녁을 설치하고 각신·승지·사관 및 유생 중 활을 잘 쏘는 자들과 짝을 지어 활을 쏘아서 한 차례에 5개의 화살을 맞추었다. 저녁 때에 이르러 파하였다.

 

한림 권점(翰林圈點)을 행하였는데, 【봉교 이중련(李重蓮)·홍낙유(洪樂游), 대교 서유문(徐有聞).】  3점을 맞은 자는 심능적(沈能迪)·심상규(沈象奎)·김이재(金履載)·서유구(徐有榘)·박종경(朴宗京)·임경진(林景鎭)·채홍원(蔡弘遠)이었다.

 

3월 22일 신묘

동지정사 김이소(金履素)가 복명(復命)하였다. 상이 그곳에서 본 바를 물으니, 이소가 답하기를,
"황제가 혹 기침하거나 침을 뱉을 때는 화신(和珅)이 요강을 내오니, 기강(紀綱)을 알 만합니다. 황제가 지극히 사치를 하기 때문에 세금이 많고 부역이 번거로워서 백성들이 고달파 편히 살지 못합니다."
하였다.

 

김희(金憙)를 이조 참판으로, 서매수(徐邁修)을 참의로, 이성규(李聖圭)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병모(李秉模)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홍문록(弘文錄)을 하였다. 【부제학 이의필(李義弼), 응교 이태형(李太亨), 교리 박규순(朴奎淳), 수찬 윤치성(尹致性), 부수찬 심흥영(沈興永).】  5점을 맞은 자는 송준재(宋俊載)·장지현(張至顯)·이경명(李景溟)·박사묵(朴師默)·이현도(李顯道)·정내백(鄭來百)·한상신(韓商新)·이지담(李之聃)·한흥유(韓興裕)·한치응(韓致應)·윤제동(尹悌東)·이상황(李相璜)·정약용(丁若鏞)·박윤수(朴崙壽)·김이교(金履喬)·윤노동(尹魯東)·이명연(李明淵)·김달순(金達淳)·이익모(李翊模)·홍수만(洪秀晩)·이조원(李肇源)·홍대협(洪大協)·남공철(南公轍)·정동간(鄭東榦)이었다.

 

훈련 대장 조심태(趙心泰)를 성문 밖으로 내쫓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죽산부(竹山府)로 귀양보냈다. 당시 야간 통행 금지가 해이해졌으므로 궁궐에서 야표(夜標)를 주고 내보내어 적간하게 하였는데, 훈련 도감의 순행하던 자가 머리를 휘어잡고 끌며 때린 것을 해영(該營)의 장수가 잘 단속하지 못한 죄였다. 서유대(徐有大)로 훈련 대장을 대신하게 하였다.

 

특별히 이한풍(李漢豊)을 금위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3월 23일 임진

유효원(柳孝源)을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김익휴(金翊休)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서유대(徐有大)를 우포도 대장(右浦盜大將)으로 삼았다.

 

의정부에서 강독과 제술에 합격한 문신을 초록하여 아뢰었는데, 이조원(李肇源)·김희화(金熙華)·이홍달(李弘達)·남공철(南公轍)·한기유(韓耆裕)·이운항(李運恒)·권의(權倚)·임경진(林景鎭)·심반(沈鎜)·민치재(閔致載)였다.

 

서장관 심능익(沈能翼)이 별단(別單)을 올렸는데, 다음과 같다.
"1. 현재 남아있는 황자(皇子)는 4명인데, 여덟째 아들 영선(永璇)은 경박하고 일처리가 엉망이어서 황제가 아들로 대우하지 않아 재작년 여러 아들에게 봉작(封爵)할 때에도 분봉(分封)의 대열에 끼지 못하였습니다. 열일곱째 아들 영린(永璘) 역시 나이가 젊고 방탕하며 예절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열한째 아들 성친왕(成親王) 영성(永瑆)은 사람됨이 단아하며 가장 어질고 효성스럽기 때문에 매우 총애를 받았습니다. 열다섯째 아들인 가친왕(嘉親王) 영염(永琰)은 총명하고 힘써 공부하여 자못 인망(人望)이 있으니, 황제가 이 두 사람 중에 뜻을 두고 있는데, 열한째 아들이 더욱 인망이 있습니다.
1. 갑진년031)  에 황제가 태학에 벽옹(辟雍)을 새로 세우고는 각성(各省)에서 추천한 생도 수 천 명을 뽑아 몸소 《주역》을 강의하여 한 명제(漢明帝)의 고사(故事)를 모방하였고, 새로 석고(石鼓)를 만들어 옛날에 있던 석고와 함께 태학의 정문 좌우에 설치하였으며, 또 경서(經書)를 간행하고 석판(石板)을 태학에 소장하기 위하여 지금 돌을 채취하고 석공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1. 사고전서(四庫全書)는 모두가 6천 1백 44함(函)인데, 먼저 필사(筆寫)를 하고 이미 상세히 교정을 거친 것이 5천 8백 50여 함이며 무영전 제조(武英殿提調)가 관계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문원각(文源閣)·문연각(文淵閣)·문진각(文津閣)의 관원들이 조사하고 상세히 교정하는데, 한 사람마다 매일 각각 2만 자씩 봅니다. 그리고 심양[盛京]의 문소각(文溯閣) 장서(藏書)도 함께 교열하고 있습니다. 문진각(文津閣)은 열하(熱河)에 있어 도로가 멀고 운반하기 불편하므로 이곳에 먼저 가서 가까운 데부터 교열하고 있습니다. 문소각(文溯閣)의 서함(書函)은 질수가 방대하여, 장도(張燾)로 하여금 가서 뽑아 교열하게 하고 육석웅(陸錫熊)으로 하여금 함께 가서 뽑아 조사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무영전(武英殿)에서도 조사해 밝히고 분별하게 하였으나 아직까지 일을 끝내지 못하였습니다."

 

부제학 이의필(李義弼)을 특별히 외지에 보임하여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삼았다.

 

3월 24일 계사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였다.

 

춘당대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 【서유구(徐有榘)·임경진(林景鎭) 2명을 뽑았다.】 및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봄 시사(試射)와 성균관 유생들의 응제(應製) 시험을 행하였다.

 

우의정 박종악이 아뢰기를,
"관서 지방은 명분(名分)이 비록 명백하지 않다고 하지만 유향(儒鄕) 및 서자, 이교(吏校)의 자질들에 대해서는 또한 등급이 없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전부터 새로 과거에 합격한 자를 분관(分館)할 때에 유향은 국자감(國子監)에 소속시키고 서자 및 이교의 자질들은 교서관에 추천하였는데, 금번 분관할 때에는 하나같이 모두 국자감에 보내어서 책을 교정할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세 등급으로 나누어 분관(分館)하는 것은 바로 4백 년 동안 바꾸지 않은 규정이니, 승문원의 해당 상박사(上博士)를 파직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는 인재를 쓸 때에 오로지 이름 있는 벼슬에서 취하는데, 이름 있는 벼슬 중에도 또한 등급이 있어 먼저 1등급을 차지한 자는 그 밖의 권점(圈點)이나 통망(通望)을 받아야 하는 벼슬에는 다시 일삼을 것이 없다. 한번 수(守) 대제학을 지내면 양관(兩館)의 대제학도 자연 그 속에 있고, 한번 예문관 응교를 지내면 부제학 이하 문관도 또한 자연 그 속에 있다. 이보다 낮은 이조 직임에 이미 통망(通望)된 자는 경연관이나 사헌부의 장령, 지평의 의망으로 융통되지 않는 자가 없고, 이조의 낭관은 곧 6품인데 으레 4품인 사인(舍人)에 붙인다. 분관(分館)하기 전에 한림(翰林)의 권점에 참여된 자는 서비 한림(西飛翰林)이라고 써넣고 7품인 세자 시강원의 설서(說書)에 통망하는데, 만약 6품으로 승급되면 순조롭게 문학과 사서로 오르며 양사(兩司)에 통망(通望)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저 내각(內閣)을 설치한 본 뜻이 어떠한데, 절목(節目) 중에 아직까지 미비한 것이 많은가. 대교(待敎)를 일찍이 지낸 자가 다시 직각(直閣)에 권점을 받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 더구나 직각과 대교의 권점에서 이조의 낭관, 홍문록(弘文錄), 설서에 통망된 자와 한림에 주의(注擬)된 사람으로 취사(取捨)하게 하는 것은 더욱 전도된 혐의가 있다. 지금부터는 이미 대교를 지낸 자는 다시 직각에 권점을 하지 말고, 7품의 홍문관 박사 이하부터 세자 시강원 벼슬과 승문원과 6품의 여러 자리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빈자리가 나는 대로 즉시 의망하고, 이미 직각(直閣)을 지낸 자는 사인(舍人)과 이조와 삼사(三司)에도 또한 빈자리가 나는 대로 즉시 의망하라. 이로 규정을 정하도록 하라.
또 고 대제학 양성지(梁誠之)가 건의하여 본각(本閣)에 대제학을 두도록 청하자 세조께서 옳게 여겼는데, 규장각을 설치한 이후로 지금까지 시행하지 못한 것은 사체가 매우 구차하다. 내각의 대제학 한 자리도 또한 고사(故事)를 따라 설치하고 만약 차출하라는 명령이 있으면 일찍이 대제학을 지냈거나 권점을 받은 사람으로 의망하여 임명하고, 만약 규장각의 제학으로 정승에 임명되면 저절로 대제학으로 승급하도록 해야 한다. 송나라 때 자정전(資政殿)에는 다만 학사(學士)만 있었으나 갑자기 학사가 정승 벼슬로 승진되는 것으로 인하여 별도로 태학사의 자리를 설치하였으니, 이 또한 옛 법도로서 본받을 만한 점이다. 규장각으로 하여금 알고 있게 하라."
하니, 이에 제학 오재순(吳載純)이 아뢰기를,
"규장각의 관제(官制)는 이미 새 규정이 있으니, 지금부터 직각과 대교에 관한 권점(圈點)이 있은 뒤에 권점을 받지 못한 사람은 후일 권점을 매길 때 그대로 쓰도록 하고, 만약 새로 권점을 받기에 적합한 사람이 있으면 합하여 권점을 매기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서유구(徐有榘)를 예문관 검열로 삼았다.

 

전 직제학 박우원(朴祐源)을 그대로 유임하라고 명하였다.

 

직각을 선출하기 위하여 전임자들이 모여서 권점을 찍었는데, 3점을 맞은 이는 남공철(南公轍)이고 2점을 맞은 이는 이조원(李肇源)과 정동간(鄭東榦)이었다.

 

남공철(南公轍)을 규장각 직각으로 삼았다.

 

3월 25일 갑오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와 과강(課講)을 거행하였다. 이운항(李運恒)이 사륙문(四六文)을 잘 짓지 못하여 시권을 쓰지 못한 채로 올리니, 전교하기를,
"이운항이 표문(表文)과 책문(策文)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전일 이동면(李東冕)의 준례에 의하여 명년 3월까지 장기휴가를 주어 익히게 하라."
하였다.

 

규장각에 명하여 경기 감사와 수원 부사에게 하유하여 어진(御眞)을 봉안한 어목헌(禦牧軒)에 수호하는 사람을 두고 요포(料布)를 지급하라고 하였다.

 

이조 참판  김희(金憙)를 체직시키고 박우원(朴祐源)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전교하였다.
"문겸 선전관(文兼宣傳官)의 직책은 청관(淸官)으로서 홍문관의 한림과 대등하다. 옛적 성종조(成宗朝)에 수교(受敎)를 본청(本廳)에 게시하였는데, 그 교서에 ‘아황(鵝黃)·죽엽(竹葉)·용두(龍頭)·봉미(鳳尾)를 즉시 올리라.’ 하였고, 또 ‘홍문관 한림에 추천된 자를 문겸(文兼)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그 후로 혹 적격자가 없으면 이조의 가랑청(假郞廳) 준례에 의하여 차라리 통청(通淸)되지 못한 문신으로 의망할지언정 혹시라도 양사(兩司)의 관원으로 의망한 적이 없었으니, 대저 그 선발의 엄중함이 이와 같았다. 근년에 혹은 특별 전교나 첨가해 써넣은 것으로 인하여 양사 중에서 차출되어 제수된 자를 곧 홍문관 권점과 동등하게 보는 것은 장차 권장하여 발탁하려는 뜻이었는데, 권점을 찍을 때에 미쳐서는 거론하지 않는 때가 있다. 진실로 그 사람과 문벌이 감당할 수 없다면 공론을 굳이 위에서 강제로 꺾을 필요는 없으나, 규정 이외에 임명된 사람 모두가 홍문관 관리가 되기에 넉넉한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빼버린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이 전교를 홍문관으로 하여금 본관 등록(謄錄)에 써넣어 후일 이 등록을 열람하는 자로 하여금 알게 하도록 하라."

 

3월 26일 을미

온릉(溫陵)의 국내(局內)에 있는 성씨(成氏)의 여러 묘의 나무를 적당히 베어버리라고 명하였다. 이는 경기 감사 서정수(徐鼎修)의 아룀에 따른 것이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능침(陵寢)의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사릉(思陵)에 이러한 조처가 있었고 본릉(本陵)에도 또한 그렇게 한 것은 성후(聖后)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삼고 우러러 받드는 방도를 본받으려는 것이다. 울창하게 덮힌 수목은 베어내고 너무 가까이 있는 수목은 제거하여 여러 묘로 하여금 햇빛을 받게 하면 위에서 오르내리는 밝은 성후(聖后)의 영혼이 어찌 향기로운 제사에 즐거이 강림하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사체(事體)와 신리(神理)가 서로 경중(輕重)이 있어 감히 상례(常例)만을 고수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뜻으로 능관(陵官)과 주가(主家)에 분부하라."

 

전 대제학 오재순(吳載純)을 그대로 유임시켰으니, 장차 도당록(都堂錄)을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3월 27일 병신

직각(直閣) 남공철이 상소하기를,
"지난번 형조 당상관들은 죄에 걸린 바가 지극히 중하였기에 먼 변방으로 내쫓아 허송세월하는 자들을 경계하였으니, 참으로 혁혁한 왕정(王政)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건대 빨리 성토하지 못한 것은 역적과 무리를 지은 것이 아니고 논죄(論罪)를 잘 하지 못한 것은 명령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닙니다. 형틀과 포승은 경솔하게 대부(大夫)에게 적용할 수 없는 법이니 그때의 조처는 길가는 사람들도 모두 놀랐는데 전하를 위하여 말해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면서 충직한 말 듣기를 좋아하니 숨기는 풍습이 있는 말세(末世)도 아니고, 홍문관의 여러 현신들은 언론과 풍모가 또 모두 신보다 월등한데도 아직까지 서로 바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용렬하고 어리석은 신이 하루아침에 벼슬에 있게 되었으니, 어찌 능히 그 책임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중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은 나이 젊은 학사(學士)들의 풍모로서 막아서는 안 되니, 우선 그대로 두라."
하였다.

 

부사직 김희채(金熙采)가 상소하기를,
"신이 일전에 호서(湖西) 고을을 조사했었는데, 겨우 복명(復命)하고나서 들은 바로는, 호서의 감사가 해당 현032)  에 공문을 보내어 신상오(申尙五)와 이성(李珹) 등을 감영의 옥으로 옮겨 가두고 다시 조사하려 한다고 합니다. 대저 상오 등은 바로 평택현 교임(校任)으로서 조사할 때 그가 공초한 바는 또렷하고 명백하였으며 참관한 각 사람들의 공초와 함께 명백히 문안(文案)에 실려 있는데, 저 감사는 신의 복명(復命)과 서계의 판하(判下)를 기다리지도 않고 굳이 다시 조사하려고 하는 것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아, 저 김문순(金文淳)과 김중순(金重淳)은 역적 권위(權瑋)와 체결하여 터무니없이 모함하려는 계책을 끝내 이루지 못했으니, 독기가 미치는 바와 기세를 부릴 수 있는 바에 다시 죄안(罪案)을 번복하기를 도모한 것은 실로 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어찌 공문을 보내고 체포해서 다스리는 일을 이처럼 급하게 하면서 조금도 꺼림이 없을 줄 짐작하였겠습니까. 조사하는 사체(事體)는 지극히 엄중한 것이니, 일개 감사가 마음대로 다시 추구할 것이 아닙니다. 신의 불초함을 인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한 것이 크고 수치를 끼친 것이 지극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충청도 감사에 대한 일은 풍문인가, 확실하게 들은 것인가? 비록 사건이 교묘하게 모인 것이 아니라도 어사의 계사는 사체가 지극히 엄중하다. 더구나 조정에서 처결한 뒤에 일개 감사가 감히 사적으로 체포하여 죄안을 번복시킬 수 없다. 상소한 말이 혹시라도 실제와 틀림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면 왕부(王府)에 법이 엄연히 있으니, 그 법으로 죄를 결정하는 것이 무슨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 관계된 바가 매우 중대하여 또한 경솔히 억측으로 결단할 수 없다. 즉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한 공문으로 조사하여 자수하게 하고 심문에 응한 감영의 관속들을 잡아올리고 공초한 바를 거두어오게 하여 즉시 세밀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 네가 조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약 소상하게 행회(行會)하였다면 누가 감히 다른 말을 하겠는가. 네가 왕명을 욕되게 한 것이 실로 한둘이 아닌데, 이것은 더욱 드러나 숨기기 어려운 것이다. 조사하는 일의 결말을 기다려 먼저 너부터 엄하게 감죄하여 사명을 받들고 삼가하지 않는 자들의 경계로 삼을 것이다."
하였다.

 

대사간 김익휴(金翊休), 사간 최훤(崔烜), 정언 장지면(張至冕) 등이 아뢰기를,
"역적 권위(權瑋)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수령을 모함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자질구레한 일입니다. 섬에 있는 역적에게 음모를 가지고 영합하고 극악한 역적과 규합하였으니 익노(翼魯)와 더불어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자입니다. 현륙(顯戮)을 가하기 전에 지레 고을의 감옥에서 죽었는데, 역적의 형률을 추후로 실시하는 것이 비록 금지법으로 되어 있으나 연루자를 분산시켜 귀양보내는 것은 법에 있어서 당연하니, 역적 권위(權瑋)의 여러 아들을 빨리 먼 섬으로 분산시켜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만약 이번 사건이 없었다면 어찌 반드시 자질구레한 일을 연석(筵席)의 사이에서 내놓았겠으며 또한 어찌 반드시 조칙의 글에 올렸겠는가. 어사의 말을 들어보건대 시골에서 다툰 것 이외에도 그 죄가 경미하지 않으니, 마땅히 한 번 공론을 풀어주겠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대제학 오재순(吳載純)이 상소하기를,
"지금 그대로 유임하라는 명은 다만 도당록(都堂錄)의 권점(圈點)을 찍기 위해서이니, 7년 동안에 한 번도 도당록에 빠뜨리지 않고 4번이나 권점을 찍는 자리에 참석시켜 마치 신이 아니면 적합한 자가 없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또 대제학 벼슬은 체직된 뒤에 비록 그대로 유임시키라는 명령이 있더라도 으레 공무를 집행하지 못했었습니다. 연전에 준례를 인용해 호소하여 즉시 양해를 받았으니, 이는 더욱 반드시 체직되어야 할 단서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로 유임시키는 것은 다시 임명하는 것과는 다르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예문관의 고사(故事)가 그러함을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이미 파직시켰다가 도로 그대로 유임시킨 자가 공무를 집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오히려 혹시 근거할 만한 것이 있는가 염려하였었는데, 지금 대제학의 상소를 보니 과연 그렇다. 권점을 찍는 일은 큰 정사이고 또 금일 안으로 권점을 시행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대제학에 대한 전의 의망 단자(單子)를 들여오라. 마땅히 점을 찍어 결정하겠다. 본직(本職)은 어제 이미 하비하였으니, 굳이 다시 거행할 필요가 없다. 원래의 망단자에 다만 그대로 유임한다는 두 글자의 표지를 붙이도록 하라."
하였다.

 

도당회권(都堂會圈)을 거행하다가,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우의정 박종악(朴宗岳)과 의견이 맞지 않아 권점을 찍지 못하고 함께 의금부에서 명령을 기다리니, 전교하기를,
"도당록(都堂錄)은 큰 정사이기도 하지만 또한 얼마나 큰 일인가. 그런데 반나절이나 서로 고집하여 부질없이 수응(酬應)만 번거롭게 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은 국가의 체제가 있는가. 홍문록은 나이 젊고 이름난 관리의 회권(會圈)으로서 왈가왈부하고 많으니 적으니 하며 의견이 즉시 통일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당당한 의정부에서 국가의 근본이 되는 대신들이 재상들을 거느리고 모여 앉아서 아직까지도 하나의 도당록(都堂錄)을 만들어 내지 못하였으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그 책임은 피차간에 똑같은 듯하다. 경들을 위해 개탄스럽게 여긴다. 경들은 대명하지 말고 속히 거행하라."
하고, 인하여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경의 서계(書啓)를 보고 비로소 사실을 알았다. 경과 우의정을 막론하고 이것이 어찌 이처럼 할 일인가. 지난번 연석에서 마침 도당회권(都堂會圈)에 대해 언급하면서 지공무사하고 결백하고 충정에 의한 마음으로 각기 임금의 뜻을 펼 방도를 마련하라고 신신당부하였었다. 이는 비단 경들만 자세히 들은 것이 아니라 또한 사관(史官)이 시정기(時政記)에도 실었다. 그렇다면 경들이 이른바 같다는 것은 무슨 일이고 다르다고 한 것은 또 무슨 말인가? 덕이 적고 어두운 나는 끝내 의혹을 깨치지 못하겠다. 더구나 권점(圈點)을 찍는 일은 영의정과 대제학이 모두 주관하고 동료 정승과 여러 재상들은 참가하여 의논할 뿐이니, 이는 바로 바꿀 수 없는 옛 규정이다. 대제학은 한 마디 말도 없고 경은 바로 수석(首席)의 정승이니, 금일의 회권은 이미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의정이 이와 같이 하는 것은 크게 평일에 알고 있던 바가 전혀 아니다. 경의 너그러운 도량으로 어찌하여 처음에는 의견이 달라도 끝내는 화합하게 되는 뜻을 생각하지 않는가. 나름대로 경들을 위하여 개탄스럽게 여긴다."
하고, 박종악에게 이르기를,
"좌의정 서계(書啓)의 비답에서 다 말하였다. 대제학이 말하지 않는 바와 경이 말하기 어렵게 여기는 바는 참으로 노성(老成)한 자의 규모에 바라던 바가 아니다. 대명하지 말고 즉시 개좌(開坐)하여 권점 찍는 일을 완결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8일 정유

좌의정과 우의정에게 일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두 정승이 연석에서 하교한 말을 가지고 서로 증거를 삼는 것은 그 말을 족히 들을 것도 없을 뿐만이 아니다. 대저 대신은 훌륭한 인재를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인데 지금 만약 어진 자를 등용하고 불초한 자를 물러가게 하는 즈음에 의견이 서로 틀린다고 한다면 내가 마땅히 경들을 접견하고 기필코 올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고야 말겠다. 어젯밤에 경들이 운운(云云)한 것은 꼭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찌 배분 비율이 많으니 적으니 하는 등의 말을 조칙의 글에 드러내어 거듭 유식한 자들의 웃음거리를 제공하겠는가. 내가 비록 덕은 없지만 수준이 낮다고 해도 이런 짓은 하지 않겠다. 경들은 대명하지 말고 속히 거행하라."

 

도당록(都堂錄)을 거행하였는데,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우의정 박종악(朴宗岳), 대제학 오재순(吳載純), 좌참찬 김화진(金華鎭), 이조 판서 김사목(金思穆), 참판 박우원(朴祐源).】  4점을 맞은 자는 이의준(李義駿)·송준재(宋俊載)·유하원(柳河源)·장지현(張至顯)·김희직(金熙稷)·이경명(李景溟)·박사묵(朴師默)·이현도(李顯道)·이복윤(李福潤)·심규로(沈奎魯)·정내백(鄭來百)·한상신(韓商新)·이지담(李之聃)·한치응(韓致應)·윤제동(尹悌東)·이상황(李相璜)·정약용(丁若鏞)·박윤수(朴崙壽)·김이교(金履喬)·유한우(兪漢寓)·윤노동(尹魯東)·이명연(李明淵)·김달순(金達淳)·이익모(李翊模)·홍수만(洪秀晩)·이조원(李肇源)·홍대협(洪大協)·정동간(鄭東幹)이었다.

 

대제학 오재순(吳載純)에게 다시는 서용하지 않는 벌을 내렸다. 그 전교에서,
"도당회권(都堂會圈)은 홍문록과는 다른데, 밤을 새우고야 비로소 완결지었으니, 옛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중간에 책망하는 전교로 인하여 대명하였는데, 비록 모임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하나 체면으로나 남들의 이목에 대해서나 관계된 것은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니다. 상세히 그 이유를 따져보면 모두가 대제학이 직접 일을 훼방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대저 도당회권(都堂會圈)의 자리는 수상(首相)이 비록 권점을 찍는 일을 주관하지만 대제학도 또한 취사(取捨)를 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그 모임에 나아갔으면서 물러나 다른 곳에 앉아서 우의정으로 하여금 마치 노고를 대신하는 자처럼 하였고 좌의정도 따라서 또 허물을 자신에게 돌리고 부절(符節)을 반납하였으니, 옛 규정과 올바른 전례가 가는 곳마다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탄식스러운 바는 사체(事體)이고 방과할 수 없는 바는 후일의 폐단이다. 이런 결과에서 대제학이 어찌 감히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대제학 오재순에게 빨리 다시는 서용하지 않는 벌을 내려 조정을 높이고 권점을 찍는 일을 엄하게 하라."
하였다.

 

3월 29일 무술

소대(召對)가 있었다.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과강(課講)을 거행하였다.

 

규장각의 직함을 띤 채로 홍문관의 직책에 임명된 사람은 이름을 등영록(登瀛錄)에 기록하고 내각록(內閣錄)에 주를 달아놓는 것으로 규정을 삼았으니, 직제학 박우원(朴祐源)의 아룀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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